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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ratme-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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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1. 그 해 여름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몸만 한 배낭을 메고 맑게 웃으며 가보고 싶은 곳이,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말했다. 나는 그의 터져버릴 것 같은 순수한 열망이 좋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도 함께 부풀어 올라 기분 좋은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는 그가 말한 대로 곧 세계를 여행했고 새로운 일들과 끊임없이 마주했다. 거리로 나가 타인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가하면 배고픈 아이들을 돕기도 했고, 때로는 모임을 만들어 사람들과 함께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그가 원하는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하는 모든 일들, 가끔은 과하다 싶은 그의 자존감까지도 모두 사랑했고, 그의생각, 행동, 철학을 쫓았다. 가끔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날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내게 염원이자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는 행복해했고 그런 그와 함께 하는 나 또한 행복했다.
그가 일을 시작했다. 그는 늘 그렇듯 최선을 다했다. 무엇을 하든 리더가 되어 성과를 내야 한다는 그의 관성은 어김없이발휘되었다. 늘 빛나던 사람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그쯤부터였다.
“누구나 다 싸우며 살아.”
“제발 즐기며 살아. 싸우지 말고.”
그는 밥을 급하게 먹고 체하고를 반복했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미간을 찌푸린 채로 보냈으며, 의자에 앉을 때에는 곧 튕겨나갈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는 했다. 그는 무엇과 싸우고 있던 것일까.
2. 내가 가장 찬란하고 용기 있었던 그 해 여름,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 말했다.
나는 나와 다른 삶을 살아온 그녀에게 호기심을 느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기심은 사랑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취향이라는 귀속감 아래 깨지지 않는 바위가 되어갔다.
일을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처럼 자신 있었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일들을 만들어갈 수 있다 생각했다. 무력감과패배감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그쯤부터였다. 일을 진행할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들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노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싸워야 했다. 많은문제들과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워야 했다. 사업가는 냉철해야 한다는 일종의 방어기제를 방패 삼아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으로 나를 사랑한다 느꼈을 때, 그때의 나를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며 그녀는 나를 떠났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일이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싸워 왔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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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ratme-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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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10.
몇 바퀴 째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땀복 두 겹을 껴입은 채 희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나는 계속 뛰고 있다. 8월의 폭염은 내 몸의 모든 물기를 짜내고 있고 옷은 점점 무게감을 더해간다. 반복적인 운동에 몸을 온전히 맡기는 일은 나의 정신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문득 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한 채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집이, 완전히 망해버린다면. 그래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는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된다면. 새벽에는 우유를 배달하고 밤에는 체육관 청소를 하며 운동선수로 살아간다면 어떨까. 고민과 선택의 여지없이 모든 것이 단순해지는 것이다. 한 곳만보고 달려가면 된다.
집이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고 나서야 나는 뛰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항상 이런 식이다. 극단적인 상황 혹은 생각으로 나 자신을 몰아가는 것. 나락으로 한없이 치닫고 싶은 욕구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극으로 치닫는 상황과 생각 속에서 오는 안정감 때문인 것일까. 나는 왜 바닥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일까.
20.
그녀의 이별 통보에 눈물이 나지 않아 당혹스러웠다. 이별은 마땅히 슬퍼야 한다고 학습 받았고, 슬픔은 눈물이 되어야하는 게 마땅했다. 왜 눈물이 흐르지 않았을까.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녀와 헤어져서 너무 아파.” 나는 사실 아프지 않았지만 그렇게 얘기해야만 할 것 같았다.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이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빠져나간다. 동시에 내가 뱉은 말들은 다시 내 귀를 통해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다시 생각이 된다. 처음보다는 조금 더 큰 생각, 확신이다. “그녀와 헤어져서 너무 아파.” 다시 말을 내뱉고, 말은 다시 생각이 되고. 그렇게 내가 하는 말들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삼키게 되는 것이다. 어느새 나는 아픈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괴물이 되어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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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ratme-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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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평온하다
1. 출근길에 죽은 화분을 밖에 내놓았다. 혹시 모르니 물을 줘보라는 그의 말에 짜증이 밀려왔다. 늘 시간이 없다 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 한낱 죽은 화분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방 안에서 화분이 죽어갈 때, 이미 죽음을 인지했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더 이상 내 신경을 화분에 주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편해진다. 내 평온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믿는다.
2. 처음으로 죽음과 마주했던 그때. 목석처럼 굳어버린 아기 고양이의 시체를 만졌을 때. 나는 땅을 깊게 팔 수 없 었다. 슬퍼서도 아니었고, 너무 많이 울어 힘이 빠져서도 아니었다. 나는 그 상황을 탈피하고 싶었다. 아파트에 불 빛이 듬성 듬성 보이던 시간, 인적이 드문 곳에서 땅을 파고 있는 내 모습에 이물감을 느꼈고 나는 결국 도망치듯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듣기 좋은 말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잘 보내 주었다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며 작별을 고했다고.
땅에 묻혀 있을, 어쩌면 구덩이의 얕음 때문에 누군가에게 발견되었을지도 모를 아기 고양이와 비슷한 고양이를 볼 때면, 나는 내 슬픔을 토로한다. 그리고 뒤늦게 올라오는 구역질을 억누르며 닦은 손을 또 닦는다.
죽어가는 화분에 넉넉히 물을 주고 빛이 잘 드는 곳에 두었다. 어쩌면 이미 죽은 화분이었지만, 생명은 끈질긴 법이라며 화분에 책임을 떠넘기고 안도와 위안을 얻는다. 볕이 따뜻하다. 어느날 베란다를 찾았을 때 거짓말처 럼 새싹이 돋아 있겠지. 생명이란 그런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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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ratme-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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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
1. “무엇이 보이시나요.” 최면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얇고 부드러운 천으로 내 몸을 감싸주는 듯한 그의 낮은 음성, 방 안의 적당한 어둠과 온기는불안에 떨고 있는 나를 기억 속 어딘가로 떠날 수 있게 도와주고 있었다. 온갖 생각들이 교차했다. 생각의 어떤 지점에서 머물러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던중, 돌연 한 장면이 갑작스레 그러나 아주 천천히 선명해져갔다. 저 멀리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아체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고 나는 반드시 여기서 벗어나야 했다. 최면을 의심하며 언제든 이 행위를 멈출 수 있도록 손가락, 발가락을 중간중간 움직여보았던 나였다. 그런데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내 몸은 더 이상 내 의지대로 움직일수 없었다. 바닥에서는 중력일지 모를 무엇이 나를 강하게 잡아당겼고, 정신은 분명 또렷했지만 그 아이에게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최면사는 떨리는 내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시 물었다. “무엇이 보이시나요.” “아이가 울고 있어요.” “그 아이는 누구인가요. 어디에서 왜 울고 있나요.” 공중전화박스는 내 유일한 은신처였다. 어린 내가 벗어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가족이라 불리는 어른들의 강압적인 행동과 폭력을 마주할 때마다 숨어있던 은신처. 어린 나에게 그 박스는 안전과 안정을 보장하는 나만의 공간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나. 나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이야기들을 의지할 곳 없는 아이처럼 흐느끼며 설명했다. 최면사는 참을성 있게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2. 가족성 불행이라는 단어가 한동안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불행도 가족성이 있어 자식은 부모의 불행을 닮아가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쉬는 법을몰라 늘 경직된 어깨, 급한 성미, 생각 만연에 깔려있는 부정, 그리고 그 부정을 이용한 자기방어. 어린시절 기억하고 있는 어른들의 모습. 지금 내가 이러한생각을 하고 있는 것 또한 내 핏줄에 스며있는 불행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흠칫 놀랐다. 아버지가 나보다 강한 사람이었을 때,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며 입버릇처럼 말했고, 내가 아버지보다 강한 사람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내게 본인처럼 살지 말라 말했다. 이렇게나 완벽한 서로의 부정이 있음에도, 왜 나는 그들을 닮아갔던 것일까.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녀가 나를 떠날 때, 그리고 다시 나에게 돌아왔을 때, 몇 번이고 내게 했던 말. 그러나 내가 행복을 찾아 헤맬수록, 가족과 불행이라는 단어는 더욱 집요하게 나를 쫓아다녔다. “하나” 최면사가 셋을 세고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는 내 무의식 어딘가에 존재하는 가족성 불행. 그 암세포와 같은 것을 떨쳐내야 했다. 나는 인정해야했고, 극복해야 했다. 이 늪에서 나를 구원해줄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둘" 최면사의 지시에 따라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아주었을 때, 나는 그 아이가 더는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나는,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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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oratme-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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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순간
1. 나는 침묵의 순간을 사랑한다. 멍하니 상대의 눈을 보고 있으면 우주를 하염없이 유영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구태여 입을 움직일 필요 없다. 아름답다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은 언제나 그 아름다움을 초월하지 못하고, 아픔은 언제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아픔으로 우리에게 닿는다.
2. 우리는 고타츠에 들어가 마주 보고 앉았다. 밤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어스레한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서로의 유리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마트에서 샀지만제법 가격이 나갔던 위스키는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고 적요한 창밖 풍경과 잘 어울렸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나는 오늘 그녀를 처음 본 것처럼 그녀의 이마에서부터 입술까지 구석구석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다가도 그녀가 너무나 익숙한 사람인 듯 옅은 미소를 지어보내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게 변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게 무엇인지 찾고 싶어 그녀를 한참을 바라보다, 그녀의 눈동자 안에 위치한 나를 보게 되었다. 그녀의 검은자 안에 갇힌 듯 보이는 내 모습이 두렵기도 했지만 왜인지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 동안 그녀의 검은자를 주시했다. 문득 이러다가 빠져나오지 못할 다른 차원의 세계에 갇혀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며 나는 다시 갖가지 상념들과이 침묵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그녀 또한 지금 이 침묵에 충실하려는 듯, 혹은 나의 첫 마디를 기다리려는 듯,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텅 빈 이 시간과 공간을 채우려는 듯 오디오에서는 쉬지 않고 클래식 음악들이 흘러나왔다. 어떤 말이든 좋으니 입을 ��어볼까 한참을 고민했다. 목에서 무언가가 차오르기 시작했고, 입술이 조금씩 떨리기도 했다. 처음으로 꺼낼 말을 정성스레 고르다 다시 관두기로 하고 계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탐구하는 데에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이 침묵의 순간들을 서로만큼이나 아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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