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함��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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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yewonblog-blog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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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디자인: 한국 디자인의 전통과 정체성
한동안 국내 문화계에서 전통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지만 요즘엔 뜸하다. 그런 반면에 우리의 좌담에선 늘 ‘정체성’이란 말이 한 번씩은 나왔던 듯하다. 아마 이는 정체성이란 개념이 워낙 넓기 때문이겠지만, 정작 정체성 자체를 독립된 주제로 심도 있게 다룬 적은 없었다. 정체성이라 할 때는 나 자신의 현재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고, 전통이라고 할 때는 내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가 하는 역사적인 측면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란 차이가 있다. 하지만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이란 문제를 다루려면 전통이란 소재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이번 토론은 자연히 한국 디자인의 전통이란 주제로까지 이어졌다.
최범(이하 최) 디자인 분야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정체성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역설적으로 한국 현대 사회가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에게 과연 이렇다 할 정체성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그동안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생산적이기보다는 소모적이었고 정체성을 말하면 말할수록 더욱 공허한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이대일(이하 이) 최 선생님은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 제기가 근대화 이후 서구 문화의 유입에 의해 불거진 것으로 보시는 것 같은데요, 일본의 경우는 서구 문물의 유입이 이미 19세기에 훨씬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면서도 우리만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지는 의문입니다.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 문제에 대한 제기는 비교적 근래의 일이지만, 역사적으로 우리는 그 이전부터 일종의 문화적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문화사를 들여다보면 삼국 시대 이래로 중국 문화에 대한 열등감과 더불어 콤플렉스적인 요소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현재의 정체성 논의도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죠. 정병규(이하 정) 정체성 문제는 역사적으로 볼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나거나 장면이 바뀔 때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질문이겠지요.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떠올린 질문일 때도 있었고, 외부의 변화에 의해 일어난 질문일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살펴보면 우리 예술을 주제로 전통과 정체성을 논의하고 추구하는 태도가 주류를 이룬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로 토속주의나 소재주의의 수준에서 머물렀다는 점도 크게 눈에 ���입니다. ‘정체성’이란 것을 독립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 태도가 그런 결과를 낳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사실 정체성이란 그 자체로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최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란 질문과 제가 처음에 던졌던 ‘우리에게 정체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서로 다른 성격의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생각하니, ‘우리에게 정체성이 있느냐’라는 질문 자체가 과연 합당한 질문인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이에 대한 이 선생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이 정체성은 ‘인격’에서 ‘격’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의 ‘~격’이란 ‘~다움’을 의미할 텐데, 이는 자기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인격, 정서, 지력 등의 총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우리는 좋든 싫든 ‘격’에 해당하는 정체성을 어떤 식으로든 가지게 마련이지요. 전통이란 과거에는 있었다가 지금은 사라진 특정 콘텐츠가 아니라, 시대가 바뀌어도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 있어 과거와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적 특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전통이란 문제는 자연히 정체성 문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정체성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나의 특성이나 기질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불만에서 시작된 질문이라고 본다면, 전통에 대한 새삼스러운 인식 속에서 전통과 정체성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즉 어떤 조형물이 ‘무엇을 소재로 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정서와 기질 혹은 세계관 속에서 형성되었느냐’에 정체성의 요체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디자인을 보면 선과 색채를 비롯한 조형성에서 이탈리아의 정체성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런 점에서 본다면 최 선생님이 지적하신 정체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질문은 이러한 독특한 정서나 기질이 현대에도 충분히 드러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질문으로 환원되는 것이지요. 최 지속성이 없다면 정체성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정체성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그런 지속성이 현재는 없다고 보기 때문일 텐데, 이 선생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런 정체성은 우리가 발견을 못한 것뿐이지, 분명 현재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겠네요. 이 저는 지속성이 정체성의 특징을 이루는 요소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며, 조금 얘기를 발전시켜서 지속성이란 문제는 우리의 몸과 관련해 논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몸과 유전자로부터 우리가 일궈온 문화적 코드가 만들어지므로, 우리 몸이 만들어내는 현상은 지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정체성 문제는 자연스럽게 전통의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여기에서 나온 생각이고요.
최 전통이란 것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전통이란 바로 지속성�� 표상이고, 지속성 없이 정체성은 구성될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전통을 자주 지뢰밭에 비유하곤 합니다. 전통에 대한 논의와 정체성에 대한 욕망은 곧잘 위험에 빠져버리거든요. 역사 속의 특정 소재를 다루는 것만으로 전통이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소재주의’도 그런 함정이지요. 적어도 저는 이제까지 전통이라는 지뢰밭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생환한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최 선생님은 전통을 과거의 규범이나 틀, 형식, 제도 등 양식적 개념으로 보고 계신 것 같은데, 저는 전통이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살아나 되풀이되고 있는 여러 문화적인 양태’라고 봅니다. 특히 ‘전통의 지뢰밭’이란 표현을 하셨는데 이는 현재의 문화가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견해거든요. 우리가 밝혀내야 할 것은 소재주의나 양식주의가 아니고 시대가 바뀐다 하더라도 쉽게 변하지 않는 우리 자신의 특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각 디자인, 혹은 제품 디자인이 과연 전통문화로서의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국인의 특질’이란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디자인 역시 어떤 형태를 빚어내고 사회화시키는 조형 활동이므로, 한국인의 조형이란 측면에서 접근해본다면 한국적 조형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대답은 조형 세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문화 일반에 대한 특성과 대등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한국인의 조형 의식은 한국인의 예술 일반과 학문, 나아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일반에 대한 문제가 됩니다. 어떤 형태를 창조해내는 이러한 ‘조형 의식’은 디자인에 머물지 않고 한국의 전 문화를 아우를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정 전통적 조형미라는 것도 하나의 객관적인 명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늘 변하고 생성하는 것이지요. 변화와 지속의 만남이랄 수 있지요. ‘지속 가능’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그것마저 초월적인 실체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경계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디자인의 행위와 결과에도 최선의 것이 따로 존재하며, 디자인 행위란 이를 추구하는 일이 될 뿐이니까요. 지속 가능한 것으로서의 전통이란 것이 수학 공식처럼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서구의 박래품일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바람직한 창조적인 행위의 근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전통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전통을 생각하면 전통이란 일종의 ‘욕망하는 힘’이 아닌가 싶어요. 우리에게 드러나는 모든 인공물이 잠재적인 것으로부터 현실화된 것이라면, 잠재된 형태를 세상 속으로 형태화, 현실화하는 힘 중의 하나가 정체성이면서 또한 전통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전통을 단순히 ‘생성하는 힘’으로만 보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추상화시키거나 일반화시킴으로써 현재에 대해 아무 답도 끌어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제도나 형식이란 것도 모두 몸에서 비롯되므로, 저는 다름 아닌 우리의 몸 자체에 한국적 전통이 내재되어 있다고 봅니다.
최 이 선생님은 몸이라는 장소, 주체, 경험을 설정하고 말씀하셨는데 흥미로운 부분이고 그런 관점이 이전엔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통을 얘기하며 일차적인 가치로 지속성을 얘기했는데, 어쨌든 ‘몸’이라고 했을 때에도 역사 속에서 새롭게 획득한 형질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몸에는 유전에 의해 계승된 형질도 있지만, 자신의 경험에서 얻은 획득 형질도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사실 전통과 정체성은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의 결합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만약 그것이 불변한다면 전통과 정체성을 논할 필요 자체가 없어질 것이며, 반대로 어떤 지속성도 없다면 정체성이란 것을 식별해낼 수 없게 되어버리겠지요. 역사와 전통은 결국 지속성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라고 봐요.
정 그런데 우리 디자인에서의 정체성과 전통성의 논의와 성과를 살펴보면 공허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반면 미술이나 문학의 경우는 좀 더 구체적입니다. 문학의 경우는 김소월의 시, 한용운의 시처럼 우리의 전통성을 잘 담고 있는 작품이 구체적으로 떠오릅니다. 우리 디자인계의 전통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디자인계에서도 정체성과 전통성의 논의도 구체적인 작업의 결과물을 통하여 접근하는 전환이 필요합니다. 명확한 성과물을 대상으로 정체성을 살피는 것은 전통성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디자인 자체에 대한 우리 나름의 정체성을 살피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이 정 선생님은 김소월 등의 문학 작품을 예로 들면서 우리 문학에서의 전통성의 존재처럼 시각 디자인 분야도 이런 문제를 논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여기에 대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전통이란 어떤 구체적 형식의 계승이 아니라 ‘거기 배어 있는 우리의 기질이나 정서’라는 점입니다. 김소월의 시도 우리 언어의 리듬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거기에 담겨있는 정서 때문에 전통을 계승한다는 평가를 받는 것 아닌가요? 즉 ‘무엇이 전통을 만들고 계승시켜나가는가’ ‘무엇이 지속성을 갖게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한국인의 기질과 성품, 그리고 정서’라는 겁니다. 문학이든 음악이든 시각 조형물이든 간에 결국 한국인의 기질이 그것을 형성시키는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의 문화적 토양으로, 어떤 변수가 주어지더라도 비슷한 결과물이 만들어져 나오는 것, 이것이 전통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국이란 토양에서 나오는 결과물은 일본이나 중국이란 토양에서 나오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며, 2000년 가까이 어떤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저는 확인하고 있고요. 시각 문화에서 구체적인 사례가 없느냐고 하셨는데, 가령 이중섭 그림에서의 선의 느낌과 분청사기에 드러난 선의 느낌은 너무도 같습니다. 민화도 그러한 사례의 대표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거친 조형성’이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사례라고 하면, 좁은 지면에도 글자를 꽉꽉 채워 넣지만 섬세하거나 치밀한 맛은 부족한 라면 포장 디자인 같은 것을 들 수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우리 피에 내장되어 있는 일반적인 기질적 특성은 ‘좋게 말해 씩씩하고 대담하지만, 나쁘게 말해 대강대강 처리하는 성질’인 것 같습니다. 학생들의 습작만 보더라도 끝까지 붙잡고 다듬는 치밀함이 부족하고, 기성 화가 ���품의 구성적인 면을 따져봐도 ‘일부러 완벽하게 하지 않았을 뿐이다’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게 어떤 면에선 우리 조형성의 일관성 아닌가 싶습니다.
최 정 선생님은 구체적 사례를 가지고 논의하자고 말씀하셨지만, 조형물의 경우에는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 사이에 연속성을 찾기가 참 어려운 것 같거든요. 우리 현대 사회는 무엇보다 시각적인 면에서 크게 변화되었기에 그런 사례를 찾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정체성 찾기가 조선 시대와 현재의 닮��꼴 찾기는 아니지요. 그리고 전통이란 문화로써 학습되고 계승되는 것인데, 모든 전통이 그대로 계승되는 것은 아니며 선별적으로 계승되지 않나요? 우리 전통 사회의 요소 중에서도 어떤 것은 사장되지 않았을까요? 마치 시각 문화에서 민화적 전통은 오늘날 도시 풍경 등에서도 강하게 전승되고 있지만 문인화적인 요소는 찾기 힘든 것처럼, 전통 중에서도 어떤 것은 계승되고 어떤 것은 단절된다는 말입니다.
이 인간이란 존재는 몇천 년 정도로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봅니다. 물론 현재가 과거와 미래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최 선생님과는 달리, 조선 시대의 문화적인 코드와 지금의 문화적인 코드가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문학자들이 이미 그러한 사례를 여럿 찾아냈습니다. 시대에 따른 문화적 양상은 다를 수 있지만,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요소들이 과연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것이 지금 얘기하는 디자인의 특성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봅니다. 전통과 정체성을 현대에는 찾을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은 제도권 내의 디자인에서만 그것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며 또한 사람들이 형식주의와 소재주의에 갇혀 어떤 특정 모델을 맹렬히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처럼 단일성이 약하여 그 문화적 특성이 일본인만큼 뚜렷하고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 디자인사를 기술하는 태도에는 크게 두 가지 패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작가주의 중심의 기술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제도권이라는 말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관점은 ‘제도권은 끝났으며, 중심과 주변의 경계가 허물어졌으니 삶의 일상과 사소함 속에 디자인의 본령이 놓여 있다’는 접근 태도입니다. 저는 우리의 경우 후자의 방식으로만 디자인을 보는 것을 우려합니다. 극단적으로 이를 연장하면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산물이 전부 디자인’이라는 말이 되고, 나아가 지금의 디자인 교육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 될 겁니다. 시대의 감성을 담보한 작품이 있게 마련이고, 이 디자인 작품들을 중심으로 해서 그 시대의 디자인은 폭넓은 결실을 맺습니다. 현대 디자인이 시작된 이후 당분간 우리는 이런 작업을 제도권에 기대할 수밖에 없으므로, 지금까지의 작업을 통해 우리 디자인의 정체성과 전통성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제도권 디자인에서는 이런 논의를 활발히 하지 않고 있습니다. 디자인의 역사가 아직 기술되어 있지 않고, 디자인에 대한 시대와 역사적인 가치를 살피는 비평이 없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우리의 디자인적 현실은 오히려 제도권의 존재를 더욱 주목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시대를 가로지를 만한 올바르고 변변한 디자인 담론이 황무지인 오늘의 우리 디자인계를 생각해본다면, 쳐부술 만한 제도권마저 어디에 있는지 모를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비가시적인 지금의 제도권을 옹호하자는 것만은 아니지만요.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과 전통성, 나아가서는 한국 디자인의 현실을 재는 방식의 하나로 한국 디자인의 작업 결과물이 그 지표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이런 입장에서 제도권 디자인을 얘기할 수 있고, 또 제도권 디자인 현장에선 과연 전통이 어떻게 다뤄지는지를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통성 자체도 과거의 구체적인 작품으로부터 생성된 것이고, 따라서 지금의 논의도 구체적인 작품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전통성에 대한 논의는 일차적으로는 현대 한국 디자인의 제도권이 생산한 작품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부터 생산된 담론은 우리 디자인을 문화적 입장에서 살피는 원심력의 바탕이 될 것입니다. 정체성과 전통성의 논의에서 제도권의 구체적인 작업의 결과물을 일차적으로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런 논의는 겉돌게 마련이며 지금까지의 담론 방식과 수준을 반복하는 것밖에는 별다른 성과가 없을 것 같습니다.
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길거리 간판에서는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제도권의 디자인에서는 찾을 수 없단 말이지요. 최근 강의 등으로 지방에 다닐 기회가 많은데, 가는 곳마다 가로등에 새나 사과 같은 형상이 붙어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지요. 그런 걸 보면서 ‘왜 우리는 이런 구체적인 형상을 넣지 않으면 못 견딜까’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서구적인 현대 디자인의 경험이 없어 장식 미술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것은 너무 서구 기준의 사고방식인 것 같고요, 어쩌면 일종의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대구의 사과나 울산의 돌고래 등 한 지역의 특산물 형태를 가로등에 연결시키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평론가로서 고민스럽습니다. 다른 문화권에선 그렇지 않은 것 같거든요.
이 저도 그런 가로등을 보면 이것이 바로 한국적 디자인의 현실이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경우 가장 큰 원인은 이런 디자인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대개 디자이너가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이런 것의 시행과 결정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별로 크지 않습니다. 아직 한국 사회에서 디자이너는 하나의 도구적 존재일 뿐, 정당한 의미의 주체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입김을 강화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가난한 불안 의식을 보여주지요. 덩치가 커져도 마찬가집니다. 추상적인 디자인의 언어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동물이나 과일 같은 구상적인 형태를 원하는 것이 현재의 우리 모습입니다. 삶의 구심점과 지향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이런 동물이나 식물의 형상이 우리 사회의 상징 지표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해, 마구잡이로 이상한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듯합니다.
최 우리 고유의 기질이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것을 많이 확인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 각각의 요소들을 개별적으로 확인할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불쾌함을 느끼는 것은 그 가로등이 우리 문화의 맥락 속에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일탈 요소로 존재한다는 거예요. 전통문화란 것은 그 당시의 사회 체계 속에서 존재한 거지 그 자체가 독립해 존재한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의 전통이 과연 오늘날 문화의 맥락 속에서 어우러져 존재하고 있나요?
이 사실은 한국 사회의 제품 처리 불량률이 산업 국가 중 상당히 높은 편에 속했었다는 것에서도 우리의 기질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마무리 처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과거의 수공 사회에서 이루어지던 수공 생산 시스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업 생산 시스템에서의 생산품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것은 공산품인 가로등조차 어딘가 거칠고 마무리가 덜 되어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 문화의 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정 그러면 그렇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최 그런 불안정한 성질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의 역사적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봐요. 우리 한국적 삶의 근본적인 불안함 때문 아니겠습니까? 삶의 조건이 안정되지 못해 만들어낸 기질이겠지요.
정 우리 전통문화는 서구식 근대 문화와 만나면서 생긴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 자체가 불안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의 모든 전통의 기반은 자연일 텐데, 자연 고유의 곡선과 근대적인 직선과의 갈등을 자생적인 방식으로 해소하지 못한 데서 오는 혼란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구적인 균형을 기반으로 하는 가로등이란 사물에 덧붙인 이상한 형태 때문에 혼란이 느껴지는 것도 그런 식으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는 시각 디자인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근대적인 서구식 직선적 요소와 전통적인 곡선 주의와의 잘못된 만남이 오늘날 한국 시각 문화의 불협화음의 한 근원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한국인의 조형 의식의 맥락에 대해 보충하자면, 저는 한국적 정체성의 본체는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문화가 지닌 특징에는 그것을 형성해낸 이들의 기질과 성품, 정서적 특성이 배어 있기 마련인데, 저는 과거부터 우리 한반도도 미국과 같은 다인종 사회였으며, 여러 기질과 성품을 지닌 사람들이 혼재되었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배달 민족’이라는 동일성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조선의 개국 공신 쉰 두명 중에도 당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을 비롯해 중국인이 40퍼센트나 섞여 있었으니까요. 제 생각의 핵심은 우리 자신의 현재에 대해 냉정히 주목하고, 너는 누구이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새삼스러운 인식과 더불어 우리가 만들어가는 문화에 공통적인 ‘격’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반성이 따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문화 종속 때문에 조선 500년 동안 반복한 사대주의를 또 반복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최 그 부분은 저도 동의합니다. 한반도가 교류의 장소였다는 것은 이젠 새삼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한국 문화는 그 최종적인 산물이거든요. 다만 그 결과물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라는 것, 우리가 우리의 가로등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게 문제지요. 이런 지경에 이른 가장 큰 원인은 우리 사회의 디자인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도 안 되는 디자인의 경쟁력 논리와 디자인에 대한 고상한 포장이 우리 디자인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는 거지요. 그런 허섭스레기 수준의 말들의 마취에 ���해 계속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런 마취에서 빨리 벗어나 각성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그것은 디자인 내적인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디자인은 어쨌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도구로 기능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개성적인 인격을 부여해 가족들이나 소규모의 공동체에서 수용하는 ‘생활 디자인’ 분야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것이 국가나 세계라는 맥락에서 작용하게 될 때, 과연 우리가 그 커다란 틀 속에서 디자인을 향해 무엇을 어찌 요구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조형적이고 문화적인 특징을 이루는 맥락의 정체에 대한 각성, 그리고 우리는 지금 왜 이럴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새삼스러운 주목, 그리고 과연 디자인이 앞으로 올 세상에서 무엇일 수 있는가의 새로운 가치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최 이런 평범한 진리를 이렇게 힘들게 역설해야 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이 선생님은 아까 ‘몸’을 중시하는 발언을 하셨는데 저 역시 동감합니다. 몸의 감각을 통해 그것이 시각적 문화로 체험되는 것이 디자인 문화이고 거기에 전통이 있다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마치 임금님이 옷을 입었다고 하니 다들 옷을 입었다고들 말하는 것처럼, 사이비 경험의 세계가 실제 경험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얼마 전부터 디자인은 조형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기술이고 배치의 문제이지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몸의 감각, 세계의 직접성을 상실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며, 디자인과 문화를 말할 수도 없게 되겠지요. 디자인 문화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인간으로서 그것을 체험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으니까요. 체험하지 못하는 것은 문화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지요.
정 디자인의 체험이란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들어내는 공론의 장에서 만남과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된다는 의미겠지요. 오늘도 전통에 관해 많은 얘기를 했지만, 개인적으로 작업 현장에서 전통을 의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구체적으로 내보이고 싶은 어떤 것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전통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우리 디자인계에서 상식화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떤 특수한 시기에 특정 목적으로만 전통을 얘기할 것이 아니라, 전통을 문화 생산의 바탕이자 한국 문화의 존재 이유 중 하나로 항상 의식하고 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전통을 담론화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요. 예를 들면 우리가 문화를 논의하면서 문화 자체만을 정의해서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상적인 차원에서의 논의에 그칠 뿐이거든요. ‘문화’란 개념은 독립된 명사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이라는 형용사적이고 부사적인 것이 될 때 비로소 실체가 되어 체험적으로 우리 주변에 존재할 수 있게 되지요. 전통도 마찬가지로 ‘전통적’이라는 새로운 차원에서 논의와 접근 방식을 변경해보는 것이 전략적일 수 있습니다. 특히 디자인 쪽에서는 더욱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디자인은 하나의 독립된 영역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모든 세상의 인간과 사물들 사이에 ‘디자인적인 현상’으로 존재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렇게 디자인�� 생각한다면 디자인은 인간이 지닌 진화력의 근원적인 힘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직립을 하면서 세상과 만났을 때 생긴 능력이 바로 디자인적 힘이고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자인은 우리 삶과 생명의 과정적 현상이기도 하며 또 그 결과이기도 합니다.
최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건축이란 하나의 벽돌을 다른 벽돌과 붙이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지요. 건축 행위의 즉물성에 대한 발언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디자인이란 단춧구멍에 단추를 끼우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삶의 구체적*실체성*반듯함이 없이는 디자인 문화란 생성될 수 없습니다. 요즘처럼 디자인에 대한 온갖 공허한 담론이 떠도는 시절에는 특히 마음에 새겨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전통과 정체성이라는 것은 결코 뜬구름과 같은 것이 아니거든요.
http://mdesign.designhouse.co.kr/article/article_view/101/46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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