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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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씨발 이게 나라냐 이게 나라면 난 망명갈란다 시이이이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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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말도 안되게 추워졌던 날이었다.
집안의 창문을 깨기라도 할 작정인지 바람은 날카롭게 불어댔다. 새벽 4시, 안입던 후드와 양말을 꺼내 신으며 여느때와 다름없이 노트북 앞에 앉았다.
메일함엔 어지러우리 만큼 온갖 메일이 쌓여있었다.
내게 회신이 온 메일이 가끔은 무서울 정도다. 몇통의 전화를 했을까, 한국에 있는 몇명의 감독님들께 전화를 걸고서 겨우 일을 끝냈다. 노트북을 닫으면 그날의 피로를 맞이 한듯, 그제서야 온몸에 피곤이 퍼져나간다.
오전 8시가 되어서야 다시 잠을 자려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문득 베를린을 떠나고 싶었다. 적절하리만치 지겨워진 타이밍이었다. 나는 프라하에 사는 친구 몇명에게 연락을 해두고 가방에 대충의 짐을 싸서 베를린을 떠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프라하에 있던 건 지난 4월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날씨가 꽤나 추워 가죽자켓을 껴입고 따가운 손 끝을 숨기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다녔던 것 같은데,
그곳에 가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너무 많은게 싫어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려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내가 프라하에 있던 건 그리 멀지도 않은 이야기였고, 나는 그때 실패를 앞두고 다가올 미래를 더욱 두려워했었으니까. 걱정이 하루가 멀다하고 쌓여대던 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하에 사는 동안 이 도시가 너무 싫다며 울먹거리며 찌질하게 돌아섰던 적이 있었다.
과연 내가 안정적이게 될까? 행복이 오려나. 하고 불안감에 휩싸여 막연하게 생각했던 질문에 어쩌면이라는 단어를 남기고 싶다.


프라하에 도착해 친한 언니 양을 만났다. 몇달 전 베를린에 놀러온 언니에게 집중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었는데, 그녀를 볼 수 있어 기분이 잠시나마 좋아졌다.
언니는 1월이 오면 한국으로 돌아갈거라고 말했다. 한국에 가기로 결심한 그녀의 결단력이 부럽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미래에도 주변을 정리하고, 바리바리 가져온 짐들을 되돌려 보내고. 남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날이 올까.


비가 세차게 내리던 홍수 속의 프라하였다. 언니는 계속해서 우산을 챙기고 나는 그냥 비를 맞고 다녔다. 비를 맞고 걸어다니는 걸 좋아하니까. 유럽에 와서 생긴 고집이었다.
밤늦게 친구 강도 함께 불러 우리는 길게 술을 마셨고 과거와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 없이 했다. 아주 오랜만에 편안함을 느꼈다.
나는 그들에게 자꾸만 베를린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지금 같은 순간 처럼 마음 편하게 속마음을 말할 자리가 없는 것도 그렇고, 일상의 내 흐름 자체가 불편하다고. 예전 만큼이나 베를린이 마냥 자유롭진 않은 것 같다고. 가끔은 내가 발없는 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도시 곳곳에 내가 기억하는 몇가지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좋아하던 바, 다니던 회사 건물, 광장에 주차 된 트럭, 불꺼진 놀이공원.
대개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그 당시 나는 속상한 감정과 맞바꾼 술 한잔을 좋아했다. 붉은 도시 조명이 즐비한 거리에서, 강이 보이는 다리에서, 혹은 이 집 저 집을 옮겨다니며 속상함을 술로 풀었다. 어쩌면 그러한 행위는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면서 위로를 얻었던 건지 모르겠다.

프라하가 더이상 싫지 않았다. 이곳에서 울 일도 절대 없을 것이다. 그때의 기억이 더이상 중요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있었고, 누구와 함께 했는지 그 사실들은 기억 저편에서 서서히 멀어져갔다. 이렇게 둘러보면 예쁘고 무해한 도시가 있었다는 것 뿐. 그 힘들었던 도시가 이번엔 나를 조금 살게하는 기분이들었다.
행복은 조금 매섭고, 불행은 가끔 너무 유순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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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일이 조금 꼬였다. 일요일은 보통 오전에 회의만 하고 공항으로 오게 되는데, 오전 회의 때 사장이 지금까지 한 것 중 하나를 문제 삼았다. 결국 사장 말대로 하기로 했다. 사장이 오니까 뒷짐 지고 공손하게 있는 모습도 그렇고, 지금까지 해오던 거에 대해 계속 보고를 했다고 하던데, 그걸 기억 못하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일정을 무시하고 사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건 한국이랑 똑같았다. 결국 전체 일정은 그대로 두고 그전 일정만 촉박해졌다. 한국팀도 답답해 했지만, 사실 중국 직원들이 한동안 훨씬 더 고생할 것이다. 공항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도착할 때 보지 못했던 노란색 꽃밭을 보았다. 당연히 유채라고 생각했는데, 차이신(채심)이라고 했다. 그 밭이 너무 넓어서 제주도 유채밭도 작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한명도 보지 못했다. 다음 회의는 4월 4일이다. 한국에서 출발해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네. 일주일에 한 번씩 해외 나갔다 오는데 이렇게 바쁘게 살아도 되나 모르겠다. 한국에서 대장 내시경을 할 예정인데 용종 같은 게 생겼을 경우 떼어내야 하는데 일주일도 안 돼 비행기를 타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죽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유튜브로 뉴스를 본다. 한국 가기 전까지 탄핵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집회에 가봐야 하나 생각을 했다. 짐을 조금씩 싸고 있다. 중국 출장 때문에 짐이 조금 늘었고, 한국에서의 일정이 조금 더 촉박해졌다. 아이는 친구 만난다고 즐거워하는데 선물 준비 안하냐고 물으니 별 생각이 없다. 요즘 애들 쿨하다고 생각했다.

요즘 생활하는 게 무료하다고 생각했다. 책도 읽지 않으니 아침에 청소를 일찍 끝내고 나면 특별히 할 것이 없다. 뭔가의 집중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고 느꼈다. 아내는 골프 유튜브나 보면서 공부하라고 하던데 정말 그거라도 봐야 할 것 같다. 유튜브 뉴스를 보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적극적인 행위 같지는 않다. 스스로 뭔가를 먼저 해야 하는 걸 찾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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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임신한지 10주차가 되어간다. 아마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고난 뒤 생리를 한차례 했으니 그 사람의 아이는 아니지 싶다.
계속 속이 좋지 않고 잘 먹지 못해 살이 좀 빠졌다. 가슴도 좀 커지는거 같아 몸매가 이전보다 나아진게 의아하다. 둘째를 낳고서도 허리라인이 돌아오게 될까? 내 생활습관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지만.
거울에 비친 알몸을 이리저리 훑어보는 걸 좋아하는 나르시스트로서 드는 생각.
임신전에 끄적이는 말로 임신을 하게 되면 한국으로 가 마음껏 질내사정을 당해보고 싶다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역시나 미친생각이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면 그때의 내가 미쳐 있었거나.
10월즘에 한국에 갈 것 같다. 부모님도 보고 지하철을 타고 혼자 다녀보고 아이와 함께 한국의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싶다.
남편이 얼마전에 회식같은 걸 하고 와서는, 지인이 이혼하게 될 것 같다는 얘길 했다. 와이프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최근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우울증이 심해지고 아이도 돌보지 않는댔다. 그 두사람의 사정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아마 섹스를 한지도 꽤 되지 않았을까. 부부 사이의 일은 부부 밖에 모르므로, 와이프는 어떤 불만을 갖고 이혼하자 얘기했는지 모른다.
그와 별개로 두사람의 아이들을 만난적이 있는 나는, 문득 그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엄마의 사랑이 부족한 아이들이라니. 또한 나에게도 그런일은, 이혼이란 일은 있으면 안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게 나 자신을 위해서든 우리 가족, 아들을 위해서든 말이다.
최근에는 지금의 내 삶, 주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단 생각을 한다. 매일 나를 배려해주고 내가 속이 안좋다고 나를 주물러주고 먹을 걸 생각해주는 남편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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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전역하고 첫 유럽여행을 떠나 가장 오래 머물던 곳이 파리였다. 완전히 다른 시공간에 놓여진 듯한 기분과 여유 넘치는 사람들의 모습에 진하게 반해버렸고 이듬해 다시 3주간 파리 여행을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예 1년 살기로 마음 먹고 파리에 간다. 그렇게 11개월을 지내고 돌아왔다.
막연히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할 때는 내가 겪은 파리의 풍경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쿵쾅 뛰었다. 곧 책상에 앉아 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좌절감을 맛보긴 했다만. 내 인생의 답은 파리에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한국에서는 내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랑하는 영화, 파리의 건물, 파리의 여유, 심지어 지하철역 승강장의 지린내까지 나의 모든 것이 파리에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단순한 환상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도착하자 마자 난관에 부딪혔다. 집을 구하는 일부터 계좌 개설 등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나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그냥 다 집어치우고 일본이나 여행하다 집에 갈까?’ 라는 생각까지 해봤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어려움을 극복한 후의 파리는 아주 멋졌다. 퇴근 후 퐁피두 앞에 털썩 주저 앉아 마시던 맥주도, 센강을 걸으며 생각하던 <퐁뇌프의 연인들>도, <네 멋대로 해라>를 떠올리게 되는 샹젤리제 거리도 가슴 뛰지 않을 수가 없는 풍경 뿐이었다. 일을 해도 즐겁고 산책을 해도 즐겁고 늘어지게 자다 일어나 집 앞 슈퍼마켓을 갈 때도 즐거웠다. 하지만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땅히 먹고 살 만한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 단순히 파리가 좋아서 있기에는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목적 없이 남아 있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학문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돌아왔다. 언젠가 다시 놀러 올 부푼 마음을 가지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 탄 게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는 나보다 더 막연하게 떠난다. 순전히 한국이 싫어서, 한국에서는 사람답게 살 수 없는 것 같아서 떠난다. 즐겁고 슬프기를 반복하다 잠시 한국에 돌아온다. 다시 뉴질랜드로 돌아갈 것인지 고민한다.
계나는 결심을 한다, 나와 반대로. 계나는 여전히 사람답게 살고 싶어할 뿐이다.
계나는 말한다, “행복은 과대평가된 것 같아.”
그저 배부르고 따뜻하게 잘 수만 있다면 그게 행복인데, 다들 행복을 저 멀리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계나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가까이에서 사소한 것으로부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나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나아가는 것, 선택에 망설임과 후회가 없는 것, 계나는 알게 되었다. 활주로를 바라보며 새로운 설렘을 기다리는 계나의 웃음에는 행복이 묻어 있다.
우리는 모두 마음 속 깊숙한 곳에 계나와 같은 생각이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끄집어낼지 말지는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알려고 애쓰지 않아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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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캐나다에 살고 있다.
한국 생활을 다 정리하고 떠나온 이유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40대 중반에 접어 들면서 받는 스트레스, 자리를 보존하지 못할 것과 도태되고 밀려날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내 안에 있었다. 그러다 캐나다에 갈 기회가 2019년에 생겼다.
캐나다에 와보니 이 곳은 왜인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다시 기회가 생길 것 같은 기대가 생겼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2020년 1월에 캐나다 땅을 다시 밟았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일하던 곳에서 레이오프 되었고, 일할 기회가 사라졌다. 그러나, 캐나다는 달랐다. 일하다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에게 베네핏을 제공하였다. 한달에 2천불씩 6개월 넘게 베네핏을 받았고, 아내도 비슷한 기간동안 받게 되어 당시 어려웠던 시기를 잘 지나갈 수 있었다. 캐나다의 정책은 참 대단하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정책을 펼친다니..(물론 나중에 세금은 다 다시 받아갔지만, 그래도..)
코로나19가 지나가는 동안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고, 영주권을 신청했다. 2년의 기다림 끝에 2023년 영주권을 받았고 이제 2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직장이 어려워져서 풀타임에서 파트타임으로 포지션이 바뀌었다.
삶이 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고 죽으란 법은 없으니. 감사하게도 지난 주 부터 나는 우버 이츠 드라이버를 시작했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픽업하고 배달한다. 힘들지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즐겁다. 이 어려운 시기에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인가 싶다.

잘 살자. 남은 인생, 힘을 내보자.
2025.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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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우리 한국으로 비행기 표를 사서 정말 신나고 있었어요. 여러 년째 여기 가고 싶어서 제 30살의 년에 이 여행 할게요. 아마 배운 한국어를 드디어 사용할게요. 다들, 잘 지냈어요? 요즘에 리그 오브 레전드 하는 거 배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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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국으로 돌아가기 마음먹고,
PI한테도 얘기하고,
논문은 어찌 마무리되던 상관도 없어지고,
이렇게 난 낙오자가 되는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쩌겟어..허허 걍 남은 기간 할수 잇는 것만 하고
잘 마무리하고 가자.. 5년 센루 생활 곧 마무리 예정..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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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누나(1)
사촌 누나는 4명이 있고 내가 아기였던 시절 나보다 7살 많은 가장 큰 누나가 날 엄청 이뻐했다고 해. 본인도 어린이인데 날 끼고 살았다는군. 물론 난 기억이 나지 않지. 그리고 몇년 후 고모 가족들은 해외로 이민을 갔어. 그 기억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것 같아. 하지만 그 사촌 누나의 모습은 기억이 나지 않았어.
그 뒤로 20년 좀 안되는 시간이 흘렀고 난 대학생이 되었어. 2학년이 되었던 때 그 사촌 누나가 약 한달간 한국으로 오게 되었고, 우리집에 머물게 되었지. 부모님은 그 누나가 오면 나보고 같이 다녀주라고 했어. 당시 여자 친구가 있던 난 좀 불만이었지만 어쩔 수 없기에 알았다고 했지.
누나가 오는 날 온 가족이 마중을 나갔어. 게이트가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고, 약간 외소하고 까무잡잡한 한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우리에게 왔어. 사촌 누나였지.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날 보던 덥석 안았어.
"너가 ○○ 구나. 아기때 내가 널 엄청 이뻐했었는데 기억나?"
사실 기억이 안났어. 공항에 나 혼자 나왔으면 누군지도 몰랐을꺼야. 암튼 누나는 날 꼭 안고 볼에 뽀뽀까지 했어. 날 이뻐했던 누나가 맞나봐. 암튼 그렇게 만나서 집으로 왔지.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외국생활 등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 누나는 내 옆에 앉아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 보고 싶었다는 둥 아직도 아기처럼 이쁘다는 둥. 그러면서 볼을 꼬집고 안기도하고 암튼 스킨십이 많았어. 산만한 분위기에 정신이 없었고 사실 누군지 기억이 없기 때문에 어색하기도 했어.
암튼 다음날 부터 누나와 같이 다니게 되었어. 길도 모르고, 한국말도 서툰 부분이 있다보니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지. 그리고 누나에게서 쏟아지는 애정표현과 스킨십도 반복되다 보니 처음보단 덜 어색했지.
둘째날 아침 늦게 일어난 나는 혼자 아침을 먹고 있었고 씻고 나온 누나는 내 앞에 앉았어. 참 말이 많은 누나였어.
"오늘 누굴 좀 만날건데,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가하는 대로 따라와줘."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알겠다고 했지.
나도 나갈 준비가 끝나고 누나와 나갔어. 그리고 누나가 알려준 곳으로 같이 갔지. 사람들이 약속 장소로 많이 정하는 곳이었어.
"손 좀 잡아. 남자친구 같이."
난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누나를 멀뚱멀뚱 쳐다봤어.
"그냥 잡아. 그리고 카페에 가면 가까운 테이블에서 기다려줘."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암튼 손을 잡고 누나에게 바싹 붙어서 갔어. 약속 장소에는 남자 한명이 있었고, 굉장히 반가운 표정으로 누나를 맞이했어. 누나의 옆에 붙어 손을 잡고있는 나를 굉장히 불편한 시선으로 봤고. 어찌되었든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카페로 갔지.
"자기 잠시만 저기서 기다려줘."
누나는 날 자기라 부르며 좀 떨어진 테이블을 손으로 가르켰어. 난 어색하게 대답하고 그 테이블로 가서 앉았어. 책을 보며 기다리는데 누나와 그 남자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시선이 갔어.
그는 굉장히 반가운 눈치였으나, 누난 시큰둥해 보였지. 둘이 이야기를 나눈듯 했어. 거리가 떨어진 나에겐 들리지 않았지만 그 남자는 왠지 좀 실망한 눈치였지. 약 30분이 지나고 그 남자가 일어나 카페를 나갔어. 누나는 날 돌아보며 자기한테 오라고 손짓을 했어.
"이메일을 통해 알게 된 친구인데, 한국에 오면 자꾸 보자고 해서. 나를 좋아한다고 그러는데 난 마음이 없어서. 거절하러 온거야."
스토커까지는 아니지만 계속 누나를 귀찮게 하던 녀석이었고, 남자친구(?)인 나를 보여주며 단념을 시킨거였어. 누나는 이런 부탁해서 미안하다고 했고. 난 아무생각 없었고, 그냥 누나가 원하던 일이 잘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어떤 일이든 누나를 잘 데리고 다니는게 내 일이었으니까.
"근데, 우리 손잡고 다니면 안될까. 너 나 잃어버리면 안되잖아."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누나를 쳐다봤어.
"손 잡자. 그냥 손 잡고 싶어. 아까 손 잡으니까 좋았단 말이야.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아."
나보다 나이도 많은 누나가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데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그냥 손을 잡고 다녔어. 이것도 계속 반복되니 이상하지 않아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모르게 물리적인 거리도 가까워 졌어. 내가 아닌 누나 쪽에서.
한국에 있는 누나 친구를 만나면 누나와 동생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누나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어.
"좋겠다. 사촌 동생이지만 동생이 항상 이렇게 같이 다녀줘서. 이쁘게 생겨서 데리고 다닐 맛도 나고"
"부럽지? 진짜 이런 남자친구 있으면 좋겠어."
"너네는 지금 연인이라고 해도 믿겠어. 어떤 누나가 그렇게 동생한테 폭 안겨다니냐."
누나는 날 가슴팍에 꼭 안았어. 누나에게서 예전에 만난 아줌마처럼 여자 냄새가 났고, 그때처럼 설레였어.
"얘는 내꺼야. 아무도 못 가져가."
누나는 웃으며 친구에게 말했고, 그 친구는 눈꼴 시렵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어. 난 그렇게 잠시동안 안겨있으면서, 예전과 같은 두근거림을 느꼈어.
누나는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모든걸 사줬어. 그렇다고 누나 등골을 빼먹은 것은 아니고. 사봤자 보고 싶었던 책이나 가지고 싶었던 음악 앨범 등 이었지. 자꾸 옷이나 비싼 무엇인가를 사주고 싶어 했지만 내가 받지 않았어. 그때마다 누나는 굉장히 아쉬워 했지.
어느덧 내가 먼저 누나의 손을 잡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누나에게 기대어 자는 것들이 너무 자연스러워 졌어. 난 누나의 손을 잡고 싶고, 체취를 맡고 싶고, 살결과 그 살결의 말랑함을 느끼고 싶었어. 물론 속으론 갈등되었지. 어찌되었든 누나에게 이런 감정을 품어도 되나,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이래도 되나 등의. 그래도 본능은 이길 수 없었고, 점점 누나에게 여자로서의 모습을 갈구하게 되었어.
어느날 그날의 일정을 마치고 밤거리를 누나와 오붓하게 걸었어. 말이 좋아 누나의 일정을 따라 다닌것이지, 그냥 여기 저기 놀러 다닌것이고 놀았다기보단 데이트였어.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사서 공원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같이 담배를 피웠어.
"너 여자친구 만나야 하는데, 내가 방해하는거 아니야?"
난 ���자친구가 있었고 못 만난지 2주 정도 되었어. 여자친구가 어느정도 내 사정을 이해준다고 했지만 그 2주 동안 전화로 몇번 싸웠어. 사촌 누나하고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며 자기를 못 만나는게 이해할 수 없다며. 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누나와 같이 있고 싶었어.
"괜찮아. 이해해줄꺼야."
"좋은 여자친구네. 보통 누나라면 동생 여자친구와 함께 저녁도 먹고 커피도 마실텐데....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무슨말인지 모르겠어.
"여자친구한테 너 빼앗긴 것 같아. 내가 더 먼저 알았고, 더 먼저 이뻐했는데. 그리고 지금도 이뻐 죽겠고, 더 이뻐해주고 싶은데."
그녀는 손을 튕겨 담배불을 껐어.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날 봤어.
"내 친구 이야기 들었지? 우리 연인처럼 보인다고. 우리 그냥 하자. 연인. 나 갈때까지만."
여자친구도 있는데 바람을 피우고, 바람을 피우는 상대는 또 누나이고... 하지만 사실 나에겐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여자이고, 그리고 나도 그 여자가 좋고... 그냥 단순해지고 싶고, 지금 이순간의 감정에 따르고 싶었어. 그리고 누나는 곧 가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어. 누나는 환하게 웃으며 날 껴안았어. 더운날 하루종일 다닌 덕에 그녀의 옷은 살짝 축축했고, 내가 아는 그 여자 냄새는 더 진해진것 같았어.
누나는 나에게 입을 맞추었어.
"너 바람피우면 안돼."
바람 상대가 나보고 바람을 피우지 말라고 했어. 그녀에게 이런 모순을 말을 해주려다 말았어. 그녀의 기분을 해치고 싶지 않았고, 어차피 2주 후면 그녀는 가니까. 그리고 이전의 생활로 돌아 갈 것이라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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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대구 아세아 병원에서 태어났다. 요샌 안 그렇지만 내가 태어났던 연도 11월엔 눈이 펑펑 내렸다 한다. 아빠가 날 참 좋아했다고 엄마한테 들었다. 100일 전까지 바닥에 내려 놓은 적이 없을 정도로. 잘 때도 배 위에 눕혀 놓고 재웠다 했다. 첫째 이모가 경남 진주에서 과일 장사를 오래 하셨는데 꽤 부를 축적 하셨다. 그걸 보고 아빠는 대구에서 진주로 내려가서 장사를 배우자고 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네살 즘 내려가서 이삼년 후에 다시 대구로 왔다. 이유는 정확하진 않지만 아빠의 의지 부족으로 다시 온 걸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엄마가 흘리면서 한 이야기라) 초등학생 땐 무작정 밝은 편이었다. 몰라도 무조건 손 들어서 발표 하고 모두가 날 바라보는 관심이 좋았던 거 같다. 애가 애다웠다. 웃음도 많고 장난기도 많고 동생이 갖고 싶었다. 엄마한테 동생 낳아달라고 했는데 진짜 동생이 태어났다. 여섯살 아래 남동생이 생겼을 땐 너무 좋았다. 중학생 때까진 수저를 씻어 챙겨주기도 하고 아침에 항상 깨워주고 (이건 지금도) 나름 잘 챙겨 주려 했다. 중학생 때 처음 권력 이란 걸 느끼고 바라봤다. 일진 친구라는 개념도 그때 알았다. 중학생 때도 무난하게 살았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되고 고등학생 땐 꽤 작고 큰일들이 많다. 그때 만난 친구들과 10년 넘게 친하게 지내고 가끔 주기적으로 본다. 그 중 한명은 서울로 갔고 또 한명은 곧 갈 예정 인 거 같다. 대학생이 되었다. 일본어 자격증을 갖고 있었는데 그걸로 지방 전문대 입학 했다. 4년제에 가고 싶었지만 엄마가 돈 없으니 취업 잘 되는 전문대로 입학하라 했다. 딱히 4년제 가고 싶단 말은 못했다. 이제 겁도 눈치도 그러려니 하는 법도 알았다. 어쩔 수 없지 하고 넘겼다. 고등학교 졸업 하고 대학생 되기까지 시간이 비어서 편의점 알바를 4개월 했다. 인수인계 해 주는 사람과 어떻게 인연이 닿아 연애도 했다. 한 일 년 반 정도 대학 졸업 후 바로 일본으로 취업 했다. 취업 할 때 즈음 부모님은 이혼 하셨다. 얼마 못 버티고 한국으로 왔다. 연���를 할 때 일본으로 갔고 일본에서 헤어���다. 한국으로 왔을 때에도 재회는 하지 않았다. 1년 동안 다이소에서 정규직으로 근무했다. 감사하게도 그곳에서 좋은 어른을 많이 뵙게 되었다. 사회는 다 이런 사람들만 계신 줄 알았다. 퇴사 하고 단단히 착각 했구나 하고 느꼈다. 집도 질리고 대구도 질리고 대전으로 갔다. 일본 비즈니스호텔에서 사람 구한다길래 냉큼 올라갔다. 대구만 아니면 된단 생각으로 고등학생 때 만났던 남자친구와 몇 년만에 재회를 하고 또 일년을 더 만났다. 내가 상대에게 질려서 잠수이별 했다. 상대방은 곧 전역을 앞두고 있었다. 직장 텃세가 힘들어서 그만뒀다. 판매직이 재밌을 거 같아 지하상가에 있는 에뛰드 매장에서 2년 가까이 판매직을 했다. 꽤 잘 맞았고 즐거웠지만 주말에 쉬고 싶단 욕망이 생기며 그만뒀다. 그땐 귀여운 친구도 만났다. 그 친구가 부산으로 근무지를 옮기며 나도 부산으로 갔다. 우리는 2년 반을 만났다. 그중에 1년 반은 동거 했다. 결과적으로 헤어졌다. 안 좋은 모습으로. 그 후에 동거에 대한 환상은 없다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고 싶다 생각했다. 인터넷 쇼핑몰 사무직에 취업했다. 월급은 적었지만 주말에 쉴 수 있단 생각에 행복했다. 회사가 망했다. 권고사직을 당했고 예전부터 여행사 취업을 꿈꿨던 나는 여행사 취업 준비를 하며 자격증도 이것저것 땄다. 코로나가 터졌다. 여행사는 직격타를 맞고 글러먹었다 싶었다. 다시 대구로 왔다. 혼자 있을 엄마가 걱정 되었고 집에 가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거 같았다 가족의 품도 그리웠다 (사실 이게 더 컸다) 다시 쇼핑몰에 취업 했다. 스타트업이었지만 잘 이끌어 가고 싶단 욕심과 함께. 어쩌다 보니 3년 차에 접어들었다. 2년 차 접어들 때 남자 친구가 생겼다. 1년 반 정도 만났다. 나의 오만함은 항상 있었고 그게 문제가 된 거 같았다. 지금 와서 생각 해 보면. 마냥 생각하는 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하던 시기도 있었다. 지금은 잘 해야 한단 생각에 행동 하나 말 하나 함부로 하지 못한다. 최근에 이별을 했다. 너무 딱한 사람이었고 그다지 마음이 크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은 했지만 별개로 싫은 모습을 너무 많이 봐서 더 이상 감내 하고 싶지 않아졌다. 무난하게 흘러가는 하루에 감사히 여기며 (종교 없음) 뜨뜻미지근하게 지낼 수 있음에 행복을 느낀다. 한 것도 없는데 올해 30살이 되었다. 여전히 술·담배는 못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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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March - April

본 것:


읽은 것: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 Gabrielle Zevin
모두가 듣는다 - 루시드폴
What My Bones Know - Stephanie Foo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 박완서
돌봄과 작업 - 정서경 외 10명
각각의 계절 - 권여선

3월. 긴 긴 겨울이 지나가고 드디어 가벼운 외투만 입고도 산책할 수 있는 날씨가 찾아왔다. 하루가 다르게 길어지는 해와 정비례하는 행복감. 봄이 오면 그제서야 겨울에 좀 힘들었네? 한다.

Kip 인스타그램에 내 그림이 업로드되기 시작했다. 동료들, 친구들, 엄마, 주원 모두 좋아해주어 기쁘고, 꾸준히 정신건강에 대해 생각하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그림으로 표현해야 하는 숙제가 생겨 좋다.
15일에서 16일로 넘어가는 밤, 한국으로.

빨간 박스를 매개로 우정과 사랑을 주고받고


여행자의 오감을 곤두세워 귀엽고 맛있는 것들을 맘껏 탐닉하고

엄마랑 커플바지 입고 집에서 빈둥빈둥한 시간이 제일 좋았다.
3월 말일엔 다시 뉴욕으로. 한국에 머무는동안 그린카드가 나와서 JFK 공항에 도착해 permanent residents 줄에 서는데 기분이 묘했다. 다만 입국심사 시간이 짧아져 신나는 마음이 묘해진 마음을 금방 이김.

4월. 인생 첫 지진을 경험했다. 상담중에 테이블이 10-20초간 미세하게 흔들리길래 빈혈인가 공황발작인가 했는데 내담자가 "수진 방금 지진 느꼈어?" 라고 말해주었다.

무럭무럭 자라고있는 자스민

첫 월간낚시 모임

라쿠에 우동먹으러 갔다가 패티 스미스를 보았다. 아임 유얼 빅팬이라 말하고 사인 받을까말까 200번 고민 끝에 안 받았는데 잘 내린 결정이다.

페퍼톤스의 20주년 앨범이 발매되었다. 고맙고 좋아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처음으로 유튜브 영상에 댓글을 달았다. 페퍼톤스의 음악 덕분에 지치는 날엔 힘을 내고 즐거운 날엔 더 즐거울 수 있어요. 어떤 날이 다가와도 용기있고 씩씩하게 삶을 마주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봄 기운이 돌고부터는 틈만나면 센트럴파크에 누워있거나 리버사이드파크를 걸었다. 공원여행을 들으며 걷다가 "어때 기분이 좋아졌지?" 하면 웃음이 실실 나온다. Colorful Express / New Standard / Sounds Good! / Beginner's Luck 앨범을 자주 들었다.

엄마가 만들어준 가방 들고 좋아하는 베이커리에서

집앞의 화단. 우리 동네 거리 곳곳에 예쁜 화단이 정말 많다고 봄이 돌아올때마다 생각한다.

집앞의 (아마도) 매화 나무


4월의 가장 큰 수확은 수년 전에 시작한 단편을 드디어 마무리지은 것이다. 왜 끝내질 못할까 자책하던 때가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어떤 것들이 쌓이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사둔지 오래된 프린트를 드디어 프레이밍했다.

루시드폴의 모두가 듣는다. 소리, 음악, 듣기에 대한 책인데, 글 쓰는 일과 상담 일에 대입해 읽게 되는 부분이 많��다. 늘 내담자들과 함께 네 번째 방에 들어갈 수 있기를.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Ryan이 강조하는 play의 개념과 닿아있다.

4월 중순부터는 잔잔한 불안이 일상과 늘 함께했다. 몸과 마음이 잔뜩 긴장했던 2021년 5월 이후로, 매년 그 무렵이 되면, 아니 꼭 그보다 몇 주 전에 그렇다. 불안은 일종의 미리 준비하는 마음이니까. 이해해, 당연히 그렇지, 라고 말을 건네면 아 그래? 하고 좀 잠잠해진다. IFS 최고네. 더 공부해볼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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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3.02
붉은 마음이 우글 대던 겨울도 지나갈 것이다.
생각이 많아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 지나고 나면 마음이 답답해져 템펠호프를 걸었다.
그간 많은 눈이 내렸고, 잦은 안부가 오고갔으며, 늘 그렇 듯, 여직 쌓인 화가 마음 저 멀리서 활개를 쳤다. 불안함과 속상함이 섞여 움푹파인 눈 더미 처럼 마음을 푹푹 밟아댔다.
그렇게 못된 겨울을 보내고, 그 야박한 계절은 언제였냐는 듯이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고, 거리로 사람들이 나왔고, 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나는 오래 달려온 터널을 빠져나오듯. 숨을 쉬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두려워 벌벌 떨었던 터널의 계절이었다.
계절 탓을 하도 많이 했던지라, 이제는 여름이 와도 더이상 탓할 게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한다.
“그냥 한국에 들어와. 이만하면 됐잖아.“
수도 없이 들은 말이다. 나는 그 말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매번 회피를 했다. 그들은 선택의 유효기간이 끝났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그 말이 유일한 해결책인 걸까. 마음이 답답해 친한 친구 H와 값 비싼 소주 한잔에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 놓을 때면 그는 계속 해서 내게 말했다.
“어쨌거나 모든 건 너가 선택한 거야”
그래 그렇지, 갈팡질팡 아무것도 못했던 건 나였으니까. 행복하지도 않았고, 일을 잘 한 것도 아니었으며, 무언가를 꾸준히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 똑부러지게 하지 못하는 나는 그저 회피인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같잖은 소리 좀 그만하라며, 손에서 찰랑거리는 작은 소주잔을 깨부숴버리고 싶었다. 마음 속에 오래 자릴 잡던 화를 테이블 위로 우수수 쏟아 붓고싶었다.
소주의 알콜 냄새가 자욱하게 베어버린지도 모른채로. 지도를 봐야만 아는 낯설기만한 길을 오래도록 걸을테다. 간혹 나는 그런 상상을했고, 내가 기억하는 베를린에서의 내 모습은 대부분 그러한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나 자신에게도, 타인들에게도.
걱정으로 무장한 마음 속엔 가식이 있었다. 사람에 대한 실망을 배웠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정이 없고, 의리가 없으며, 위로를 잘 못 한다는 것. 나도 그들도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
그러한 해소하지 못했던 속상한 마음들은 저편에서, 마주하기 싫을 정도로 깊게 박힌 가시돌이 된다.
그렇게 불안은 쉽게 전염되고, 커다랗게 자라서 내게 돌아왔다.
대부분은 피곤에 절어 쌓인 설거지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않고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을 가장 아낀다. 그러다 금새 하루 중에 내뱉었던 실수같은 말귀들이 자꾸만 입가에 맴도는 기분이들곤 한다. 그래서 종종 슬펐다.
R에게 전활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들 속에 슬픔같은 것은 추호도 티가나지 않게끔 잘 섞어 말한다. 그러나 그는 다 알고 있는 듯했다.
그 또한 나에게 계속 한국에 가고 싶으면 가라고 말하니까.
그래서 덜컥 어느 날 아침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샀다.
보고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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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서 아내 회사 동료 분들과 저녁을 같이 먹었다. 아침에 카풀하는 분이신데, 남편과 아이 둘이 지난 주에 와서 내일 남편만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하루 저녁 시간을 낸 것이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는 그 분 가족이 아직 한국에서 오지 않아, 그 분 홀로 우리 가족과 식사를 했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약속을 잡은 것 같았다. 섬 북쪽 해안의 해변 술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남편분의 질문이 많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먼저 해외로 보내고 홀로 한국에서 기러기 생활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이런저런 궁금한 것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이는 나보다 6살 어리다고 했는데, 자신도 한두 해만 있다가 한국 생활 정리할까도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 했다. 돈을 계속 모으고 있었다면 그 모은 돈을 앞으로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지, 앞으로 얼마나 더 벌어야하는지가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아내가 이곳에서 회사를 다니고 월급을 받고 있으니 나처럼 은퇴를 선택한다면 좀 더 수월하게 결정할 수도 있을 듯. 다만 자신의 나이가 많지는 않으므로 이곳에서 일을 하든가 혹은 장사를 하든 무엇인가를 하려는 고민이 있는 것 같았다. 회사 동료 다른 분들도 오셨는데 한 분은 말레이시아 분이었다. 재미있는 성격에, 한국말을 배우고 있다며 이야기 ��간중간 단어 위주의 한국말을 많이 해서 모두를 재미있게 했다. 날씨가 시원하고 건조해서 밖에서 저녁 먹는 게 좋았다. 요즘 날씨는 한국 초가을 날씨 같다. 해가 뜨면 따갑고 땀도 나는데 오후들어 해가 질 때부터 시원해져서 새벽에는 이불을 덮지 않으면 춥다고 느낄 정도가 되었다. 작년 이맘때는 기상이변으로 40도에 가까운 더위가 있었다고 했는데 올해는 정상적인 날씨라고 한다. 요즘 참 살기 좋다고 느끼는데 앞으로 닥쳐올 더위가 조금 걱정된다. 오늘 아침에는 어제 구입한 유선청소기를 사용해서 청소를 했다. 흡입이 강력했다. 카페트용 헤드를 끼웠더니 마룻바닥에 착 달라붙어 앞뒤로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였다. 다만 모터 소리가 엄청 커서 전원을 켜는 순간 구경하려 온 냥이들이 호다닥 도망치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유선이므로 2번 콘센트를 바꿔야 했고 손잡이는 가벼워도 호스가 연결되어 걸리적 거리기는 했으나, 청소 효율 면에서는 최고라고 느꼈다. 다만 청소를 한 후 청소기를 청소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유선청소기는 거치대도 없어 집 어딘가 구석에 대충 집에 넣어야 한다. 음.. 그러니 ���선 청소기인데 거치대를 겸하는 청소기 청소 스탠드가 있다면 구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암튼 몇 단점을 위해 100만원 정도를 더 투자했던 셈인데,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고 느껴진다. 카페트가 너무 깨끗해져 고장났던 청소기가 다시 오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카페트는 유선청소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청소기에 화를 내지 않으니 아주 평온한 토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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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갈 날이 한 달 남았다
이사 생각하면 몸도 마음도 지치고
거기 가서도 또 적웅하면서 정신 붙잡고 살아야 하는 생각을 하니 또 지친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이다 진짜
최소한 내 삶에서 영어도 안 쓰고 차별 당하고 싸울 생각도 안하고 그냥 그렇게 살고싶다 돈 벌기도 힘든데 쓰고 사는 것 조차도 힘들면 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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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정리하다가 16년 전에 아내가 쓴 글을 찾았습니다.
어제는 제인이를 공항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제인이가 한 달 동안 방학을 이곳에서 보내고 어제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아직은 어린애 같은데 혼자 떠나 보내는 마음이 엄마로써 너무나 애처로와 보입니다. 제인이도 공항에서 떠나면서 눈물이 핑 도는지 애써 딴 곳을 봅니다.
이제 28일엔 내가 떠납니다.
다른 때 같으면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즐거운 일이 었을 터인데 유진이를 혼자 여기 두고 가려니 마냥 즐겁지만은 않습니다.
항상 떠나는 사람은 모르지만 남아있는 사람은 떠난 사람들의 공간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제인이의 마음보다 모두를 떠나 보내는 유진이 마음은 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교사로 살아 가기로 하면서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내려놓는 시간이 저에게는 제일 힘이 듭니다.
이모든 것이 주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23년을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이제 정리 하고 떠나려 하니 지난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힘 들었던 생각보다는 감사하고 즐거운 일들이 더 많이 생각납니다.
살아오면서 유난히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또 주위에 주님이 보내주신 천사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또 아름다운 추억들이 생각납니다 즐거웠던 시간들 ...
저를 아는 모든 분들, 너무나 고맙습니다.
너무나 감사합니다. 누군가 생각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번집니다.
주님은 떠나기 위해 준비 하는 저에게 또 이렇게 위로를 해주시네요.
제가 얼마나 더 살지 어디서 살지 오직 주님만 아시겠지만 제 마음에 아름다운 추억과 아름다운 사람들을 마음에 안고 떠납니다.
그 동안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혼자 남아 이 미국땅을 지킬(ㅎㅎ) 우리 유진이를 보시면 많은 위로와 격려를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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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MIN WEVERSE UPDATE
241214
"징글볼 투어 이제 잘 끝내구우.. 한국으로 곧 돌아가요🥰"
Translation:
"Let's finish the Jingle Ball Tour well.. I'm going back to Korea s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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