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anaradoo · 10 mont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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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희, 소감문 쓰기
성탄절에 작은 봉사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빨간색 노란색 접시를 교차로 놓고 하얀 테이블보에서 우리는 창백함과 순연함과 고요함과 적막함을 봅니다
천사와 천국은 눈 내리는 들에서 풀을 뜯는 흰 소
아이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언제나 좋게 들립니다
케이크를 잘라 아이들 앞에 두었습니다 아이들은 소리를 먹는 생물을 몰래 키웁니다
드물게 성인이 되도록 그 생물을 키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수한 잔금이 서로 밀치고 있는데 물로 적셔주어야 부서지지 않습니다
찻잔과 찻주전자와 성질이 유사할지도 모릅니다 애지중지 혼자 내는 소리를
아낌없이 주어야 자라납니다
케이크 더 줄까, 물어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가장 오랫동안 울고 있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의 생일에 케이크를 먹는다는 사실이 무섭다고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벌레가 웁니다 새가 웁니다 고양이가 사자가 원숭이, 당나귀가 웁니다 소리나는 것은 모두 울립니다 나는 벌써 수년간 눈물이 안 났던 것 같습니다 얼굴 씻을까, 데리고 나가 더운물을 틀어줍니다 보일러가 웁니다 들리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눈물에 들리지 않게 우는 아이도 꾸준히 자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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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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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림, 붉은 유령
내가 질베르트를 사랑할 무렵 더 먼,
사랑이 한갓 외면뿐이 아니고 실현 가능한 실체처럼
생각되었던 시절까지 나는 거슬러올라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
신은 우리를 가리켜 시가로 흐르는 강이나 강을 가로지르는 시가와 같이 떼어놓지 못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지느러미 혹은 고통보다 먼저 태어나 그 속에 몸을 버려두었다 헤엄을 배우는 동안 비늘이 떨어져나갔고 나는 그 경험을 간직할 수도 간직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설탕통을 쏟자 다시 떠오르는 기억
해변의 이층 반
창을 열면 멀리 흰 포말이 이는
낮은 담장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는 너
잠수 장비들이 그을린 어때에 걸쳐져 있고
팔다리에 달라붙은 모래알이 슈거처럼 빛나고
담장 아래 잠든 고양이들
그날의 대화 길어진 여름의 대낮
우리 뒤를 따라오던 젖은 유령
책상에 쏟아진 검은 잉크가 괘종에 맞춰 뚝뚝 떨어지던 날의 기록
-
<떼어놓을 수 있는 존재들; 혼혈과 쌍둥이 품속에서 굵어져가는 십자가 자주 애절한 사랑으로 창을 바라보던 연인들>
무너진다는 말과 이층에서 끝난 계단
계단의 어둠이 끝날 때까지 몽상에 잠기는 짓
그것 또한 또다른 한 장면에 불과하다...... 붉은빛 푸른 물고기 물속의 물고기가 흩어질 시간 앞에서 사라질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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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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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팔리스의 진리

라팔리스의 진리(Lapalissade). 프랑스의 귀족이며 군인인 자크 드 샤반 드 라팔리스(Jacques II de Chanbannes de La Palice), 1470~1525)의 비석에서 유래한 말로 '자명한 진리'를 뜻한다. 그가 죽은 뒤 그를 기리는 무덤에 "슬프도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부러움을 샀을 텐데. (Hélas s'il n'était pas mort / Il ferait encore envie.)"라는 비명이 새겨졌다. 후세에 이 비명의 후반부가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을 텐데. (Il ferait encore envie.)"로 잘못 읽힌 경과 자명한 사실을 의미하는 문장이 되었다. 그 후 다시 그 인물과 관련하여 "라팔리스의 진리 (vérités de La Palisse)" 라고 불리는 자명한 사실들을 담은 베르나르 드 라모누아의 풍자 노래가 유행했으니 바로 "죽기 십오 분 전에 그는 아직 살아 있었네. (Un quart d'heure avant sa mort, il était encore en vie)"라는 내용의 노래다.
( 알베르 카뮈, 김화영 역, 『시지프 신화』, 민음사, 2016. 16-17면. 각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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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1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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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지금 나는 믿는 사람. 나는 믿을 만한 사람으로서
놀랍게도 고요한 마음을 적습니다.
네 개의 눈동자는 하나의 시선을 만듭니다. 분명한 시선을.
충실하게, 그러므로 충만한 시선입니다.
당신이 읽고 있기에
이 토막글은 당신의 시선 속에 있습니다.
글을 넘어서 당신은 나를 보려고 합니다.
글을 넘어서 나 또한 당신을.
이제 이 글은 적어도 하나의 시선입니다.
그렇다고 믿습니다. 적어도 나는
시선 속에서
언제나 새롭고 싶습니다.
일상을 회복한 후에
안전한 좌표를 마련하고 있겠습니다.
붙박인 곳이고
여러 자세로
사람은 자유로이 떠다닐 수 있으며
그런 채로 까무룩 깊게 잠들 수 있는
그곳에서는
무엇도 어렵지 않고
아득하고 아늑할 것입니다.
마주보고 바라보겠습니다.
당신은 새롭게 발견됩니다.
나는 새롭고
가능한 신비입니다.
나는 믿을 만합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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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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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건축
친척의 별장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곳에서 좋은 일이 많았다 이따금 슬픔이 찾아올 때는 숲길을 걸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때의 일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어떤 기하학에 대해, 마음이 죽는 일에 대해, 건축이 깨지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 시는 지난여름 그와 보낸 마지막 날로부터 시작된다
"이리 나와 봐, 벌집이 생겼어!"
그가 밖에서 외칠 때, 나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불 꺼진 거실에서 한낮의 빛이 들이닥쳐서 여러 가지 무늬가 바닥에 일렁였고
"어쩌지? 떨어뜨려야 할까?"
그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벌집은 아직 작지만 벌집은 점점 자란다 내버려 두면 큰일이 날 것이다 그가 말했지만 큰일이 무엇인지는 그도 나도 모른다
한참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벌이 무섭지도 않은 걸까 그것들이 벌집 주위를 바쁘게 날아다니고 육각형의 방은 조밀하게 붙어 있고 그의 목소리가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아 무섭다는 생각이 들 때
"하지만 벌이 사라지면 인류가 멸종한댔어"
돌아온 그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쯤 여름이 끝났던 것 같다
여름의 계곡에 두 발을 담근 두 사람이 맨발로 산을 내려왔을 때,
늦은 오후에 죽어 가는 새의 체온을 높이려 애썼을 때,
창을 열어 두고 외출한 탓에 침대가 온통 젖어 어두운 거실의 천장을 바라보며 잠들었을 때,
혹은 여름날의 그 어느 때,
마음이 끝났던 것 같다
다만 ​나는 여름에 시작된 마음이 여름과 함께 끝났을 때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도무지 알기가 어렵고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
숲길을 걸으면서 그가 결국 벌집을 깨뜨렸던 것을 떠올렸다 걸어갈수록 숲길은 더 어둡고
가끔 무슨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는 시간이 오래 흘러 내가 죽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때는 아름다운 겨울이고
나는 여전히 친척의 별장에 있다
잔뜩 쌓인 눈이 소리를 모두 흡수해서 아주 고요하다
세상에는 온통 텅 빈 벌집뿐이다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________________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다.
그래 끝내야지, 하고 어제는 먼 곳의 친구와 오래 통화했다. 주로 내가 말했고 친구는 들었다. 나는 나의 힘듦과 잘못과 후회와 슬픔 등을 토로했다.
입을 연 그는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러나 나는 충분히 이해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입을 빌려 타인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었고.
이해하자 나는 내 형체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는 정말 타인이 되어 그를 알아 보기로.
아무도 모르는 섬이 하나 있었으면 한다. 해안을 따라 걷다가 뛰어들었으면 한다. 아무 때나
실컷 울게. 파도랑 같이 무너지고. 그러고 기어올라가게.
단단한 섬이 되고 싶다. 앞에는 쓰다듬을 바다를 하나 앉혀 놓고. 안전하다고, 놀러오라고, 드물게 사람을 초대도 하면서.
수평선이 끝나도 바다는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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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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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 장소의 연인들.
친구의 발췌 불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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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인과 당류를 마디게 마시라는 조지아 사의 배려.
진로도 도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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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는 박동억 선생님의 논문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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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선생님 논문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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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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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중독
오늘은 어제의 거리를 다시 걷는 오후.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이건 거의 중독이야. 하지만 어제는 또 머나먼 일몰의 해변을 거닐었지.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훗날 너는 나를 기준으로 오래된 책의 페이지를 펴고. 또 아무런 깊이가 없는 해변을 거니는 거야.
완전한 평면의 바다. 그때 바다를 바라보는 너로부터 검은 연필로 긴 선을 그으면, 어디선가 점에 닿는 것. 그 점을 섬이라고 하자. 그리고 그 섬에서 꿈 없는 잠을. 너는 나를 접어 종이비행기를, 나를 접어 종이배를, 나를 접어 쉽게 구겨지는 학을.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러므로 모든 것이 어긋나 버렸는지도 모르지. 서서히 늪에 잠겨가는 사람처럼,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일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백화점 옥상에서, 지금 막 우울한 자세로 이륙하는 종이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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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시. 전에 여기 올린 적 있을지도.
책갈피를 선물 받았다. 직접 받은 건 아니고, 물려 받았다고 해야 옳겠다. 내 돈 주고 사기에는 망설여졌던 품목이라 더욱 선물 같았다.
나의 책갈피는 그런 것들이었다. 영화나 연극 관람권, 승차권, 서점 영수증, 인덱스 스티커 따위. 쉽게 여러 장 생기고, 그래서 잃어도 아쉬울 것 없고, 필요가 다하면 버리기 좋은 것들. 그런 게 편하고 싫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길들어가는 존재를 항상 바랐다.
생각해보면 관람권, 승차권, 영수증은 내가 거기에 적어도 돈과 시간을 들였다는 증거다. 나아가 경험에 집중했고 애정을 쏟았고 즐거웠다는 의미다. 그것들은 얽힌, 숨은 기억을 더불어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충실한 책갈피 맞다.
책갈피는 사람이 항상 소지하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책이 지참하는 것이다. 두께가 거의 없고 머무는 것이다. 책과 동시에 펼쳐지는 것이다. 펼쳐지면서 지난 내용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좋았던 차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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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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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새벽에는 눈물이 줄줄 났다. 한 번씩 이런다.
나는 무언가 분실하는 일도, 우는 일도 정말 없었다. 그런 일들이 부쩍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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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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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이 궁한지라 용기를 냈다. 친구한테 술 사달라고 했다.
1차에는 청요리 먹었고 그가 냈다. 맛주머니가 두둑한, 유명 블로거 겸 유튜버 되시는 분의 추천 맛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쟁짜와 고탕은 맛있었다. 다만 내 기대가 좀 컸다. 내가 소개하는 식당에서 맛있게 먹는 사람을 보면 아주 흐뭇하다. 수척한 딸처럼 그릇을 싹 비웠다.
2차로는 맥주 마셨다. 카우치를 되는 대로 뭉개면서 마시는 맥주가 어찌나 달고 술술 넘어가던지. 트림도 안 나왔다. 좋은 카우치를 꼭 장만하자고 함께 다짐했다. 상상 그대로의 레브라도 리트리버가 테이블을 옮겨다니며 고개를 드밀었다. 온순한 개의 목을 어물어물 긁어주었다. 오래 머물러주길 기대했지만 역시 내 기대가 컸다. 호프 개 연차는 몰라도 영업 잘하더라. 동물은 어렵다.
응당 내가 낼 차례였지만 생각보다 가격이 셌다. 카드 긁고 머리 속으로 좀스럽게 저울질 했다. 다시 한 번 용기냈다. 3차 가자고. 그리고 취했다. 이후에는 궁상 떨었다. 애당초 그럴 생각이었다. 궁상에도 용기가 필요하고 기대가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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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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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을 들쑤시는 버릇이 생겼다. 고르는 건 대개 덤이 달려 있는 커피지만 무심코 주전부리에 손을 뻗었다가 관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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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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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지, 빛의 생산
전기 좋아해요?
이제 그만
그걸 자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담배를 마지막으로
집에 불타오르는 물건이 없어졌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전기를 좋아하는구나
전기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만두 없는 세계
슬프지만 그럴 수 있고
종달새는 본 적도 없고
나 없는 세계는 지금도 뭐
언제부터
고통 없는 세계
그건 상상을 안 합니다
자연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봄기운이 완연한
오늘 날씨 이야기처럼 다들
두줄을 넘기지 말라고
고통에게 차례를 지키라고
말할 거라면
사물들은 다 잘 있습니다
가끔 고장이 나고
그것을 고치거나 버립니다
빛이 깜빡거리면
문제가 있는 거고
담배는 진짜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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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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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지, 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
분명한 마음이 있었는데요
사라졌습니다
고장 난 사람처럼 야구만 보았습니다
공이 뭐라고
공은 분명한데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니까
개의 마음을 알 것 같고
공의 궤적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야구를 보는 동안
아픈 사람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공을 보는 개의 마음은 알아도
나를 보는 아픈 사람들의 마음은 모르겠는데
엄마는 내가 멀쩡해 보여요?
아름다움처럼 모르겠는데
나 없이 내게로 오는
그 마음들은
아무도 사할을 넘지 못하도록
투수와 타자가
긴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쉽게 하나가 되는데
그러려고 모인 거니까
온 힘을 다하여 야구를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던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매일 죄송하다고 말해야 했던 전화기를 잊을 때까지
그러면 프랜차이즈 스타가 이적해도
돈이 모자라면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는 팬들만 남아서
내가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포지션이 없으면 게임이 재미없습니다
공놀이죠
돌아오지 않는 공도 가끔 있지만
야구에서는 돌고 돌아야 합니다
야구가 끝나면
아픈 사람에게 병원에 가야 한다고 답장합니다
사회보장제도를 알아보자고 말합니다
의사가 알려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에 따라서
차라리 돈을 많이 벌지 그랬어·····
그렇게 말해주는 시가 있었다면
저작권으로 농담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맥주가 지겨워요
사라진 마음이 지겹습니다
공은 왜 자꾸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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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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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후성, 볼트
​​
코끼리를 보라
코끼리끼리는 볼 수 없는 코끼리를 보라
꼬리를 위해 서 있는 네 번째와 세 번째 다리를 보라
걸음을 뗄 때 발을 남기고 벗겨질 것만 같은 발의 접힌 거죽을 보라
달라붙어 있지 않고
그것은 끌려다닌다
우리의 난제였던 바깥이다
실체는 헐렁헐렁하다
그 안에서 기관을 해체하는 망치질 같은 코끼리의 걸음을 보라
눈앞에 직접 정의된 코끼리를 보라
걸을 때마다 부서지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어금니로 연결되어 있지만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지 않은가
코끼리 안으로 들어가지 마라
안과 바깥은 서로에게 통증이 그지없다
뒤쪽 숲을 보라
나뭇잎들이 가지에 붙어 벌어졌다 오므라들었다 한다
나무 주위를 맴돌며 탈출이 어려운
바람의 원숭이들을 보라
가장 가까운 붉은색을 볼 수 없는 원숭이의 눈을 보라
저 영특한 종족은 의혹의 못에 박힌 매혹이다
이때 고개를 돌려 완전한 불의 형태로 시간을 태우는 대관람차를 보라
오전의 하품 같은 간격을 보라
회전의 무의미 아래 네게 권해지는 네 머릿속을 보라
주차장에서 마주친 사 년 전 그 사람을 보라
하천이 흐르는 대로변에서
다리 아래로 유혹해
교량의 접합부마다 극렬하게 박힌 볼트를 해가 질 때까지 함께 보았던 그 사람을 보라
볼트 하나를 빼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을 보라
그가 너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볼트 하나를 갖고 있다
그와 상관없이 혼자서 한 번 더 다리를 건너라
다리는 흔들거린다
그 아래를 보라
조그만 구멍을 남기고 녹슨 생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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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2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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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밍, 정한아
지나간 일이야, 입동에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무릎과 무릎을 스치며 걸었지
나의 남천은
검붉게 물든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마른 가지는 맥 빠진 무릎처럼
한밤에 툭툭 꺾어져 내려
가끔은 정말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입술과 입술을 포개고
그러면 정말로
피가 다시 돌고
그러다 어느 날엔
죽은 사람으로부터
죽었다는 전갈이 온다
무서운 일이야, 죽은 잎들은
회오리져 몰려다니니까
웅성거리니까
모아서 태우면
천국으로 올라가거나
지옥으로 내려갈 것 같지만
지나가지 않는다, 염가의 탄식일랑은 금할 것
가수는 죽고
통조림통에 담긴 노래는 영원히 젊고
나의 남천은 물든 입술을 떨고 있다
귀신을 쫓아준다는 나무
우리는 그것을 베란다에 내어놓았는데
담배를 태우려 창을 열 떄마다
이상한 일이야, 누가 자꾸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시작 메모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노래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자주 잊는다.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지니까 부러라도 입술을 움직여 음절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 언어의 대부분이 이런 식일 테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대도 말하지 않으면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질 거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말한다는 건, 이쪽 기분이 이상해지는 일. 왠지 섬뜩할 때는 누군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로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노래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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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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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여름, 신해욱
맑고도 무거운 날이었다
그는 쓱 웃으며
나의 한 쪽 어깨를 지웠다
햇빛이 나를 힘주어 눌렀고
그를 벗어나는 자세로만 나는
그에게로 기울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시간이란
이제 다시 없을 것이다
내가 먼저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쓱 웃으며 나를
나의 의미를 미리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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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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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이장욱
오늘은 어제의 거리를 다시 걷는 오후.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이건 중독이야, 하지만 어제는 또 머나먼 일몰의 해변을 거닐었지.
이제 삼차원은 지겨워. 그러니까 깊이가 있다는 거 말야. 나를 잘 펴서 어딘가 책갈피에 꽂아줘. 조용한 평면. 훗날 너는 나를 기준으로 오래된 책의 페이지를 펴고. 또 아무런 깊이가 없는 해변을 거니는 거야.
완전한 평면의 바다. 그때 바다를 바라보는 너로부터 검은 연필로 긴 선을 그으면. 어디선가 점에 닿는것. 그 점을 섬이라고 하자. 그리고 그 섬에서 꿈 없는 잠을. 너는 나를 접어 종이비행기를, 나를 접어 종이배를 , 나를 접어 쉽게 구겨지는 학을.
조용한 평면처럼 어떤 내부도 지니지 않는 것들과 함께. 그러므로 모든 것이 어긋나버렸는지도 모르지. 서서히 늪에 잠겨가는 사람처럼 , 현대백화점 너머로 일몰. 일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백화점 옥상에서 , 지금 막 우울한 자세로 이륙하는 종이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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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radoo ·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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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아홉 살
도시를 만드는
게임을 하고는 했다. 나무를 심고 호수를 만들고 빌딩을 세우고 도로를
확장했다. 나의 시민들은
성실했다. 지루해지면
아이 하나를 집어 호수에
빠뜨렸다. 살려주세요
외치는
아이가 얼마나 버티는지
구경했다. 살아 나온 아이를 간혹은
살려두었고
다시 집어 간혹은 물에 빠뜨렸다. 아이를
아무리 죽여도 도시는 조용했다.
나는 빌딩에 불을
놓았다.
허리케인을 만들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UFO를 소환해서 정갈한 도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선량한 시민들은 머리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내 도시 바깥으로 도망쳤다. 나는 도시를 벽으로
둘러쌌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태우지는 않았다.
나의 시민들이 다시 도시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만 나는 도시를
망가뜨렸다.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더 오래 게임을 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나의
시민들에게 미안하지
않다. 아무래도
미안하지가 않다.
약간의 사고와 불행은 나의 시민들을 더 성실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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