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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즐의괄호
do-nttry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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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 뭐 별거 있나.
-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의 북방에 있는 나의 동네. 태어나기는 강남에 있는 병원이었는데, 탯줄 끊은 이후로 한강 남쪽 근처는 가보지도 못했다. 실은 업무를 보지 않는 이상 부러 찾아가지도 않는다. 강남보다 강북이 더 좋고 편한 건 삼십 년을 훌쩍 넘긴 짬에서 나오는 ‘강북 바이브’ 때문일 터. 어쨌든 이 동네를 옮겨 다니며 사는 나에게 공간에 대한 기억은 ‘00빌라’ 때부터이다.
초등시절 만점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혼이 날까봐 숨겨놨던 시험지를 들켜 도망 다니며 맞았던 집이자 찬 바람이 부는 계절에는 찹쌀떠억 메밀무욱 소리가 창틈을 비집고 들어오던 곳이었다. 한여름에는 101호, 102호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얼음 동동 띄운 커피믹스를 들고 드나들던 다정함이 있었고 빌라 입구에는 작은 공간이 있어서 온갖 종 류의 자전거와 씽씽카를 나란히 주차해두는 암묵적인 규칙이 지켜지던 집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조경마저 훌륭한 신축 아파트에 살게 됐는데 지금은 파킨슨병으로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가, 당시에는 오로지 당신의 힘으로 걸어 다니며 함께 살았다는 것 외에 특별한 기억은 없다. 그리고 지금은 여전히 수유동에서 지어진 지 오래된 작은 주택에 살고 있다.
건축가는 공간을 다루는 사람이다. 그 공간에 머물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 공간과 어우러질 또 다른 공간까지 아우른 다. 사실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다름 아닌 박호준 씨, 우리 아빠 되시겠다. 토요일 아침 늦잠이라도 잘라 치면 뚝딱거리는 소리에 눈이 떠지고 만다. 저 소리는 필시 마당에서 나는 소리로, 그가 또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뜻. “엄마! 아빠 또 뭐 하는 거야?” 소리를 지르면 “몰라! 또 밥도 안 먹고 저러고 있다! 맨날 저렇게 밥을 다 식혀서 먹어요. 어휴”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주말 아침의 필수 코스인 영화 소개 프로그램 보며 밥을 뜨려 할 때쯤, 다소 상기된 얼굴로 아빠가 들어온다. 손발을 씻고 아구구 소리를 내며 밥상에 앉으면 그때부터 현장 보고가 시작된다. 이번에 만드는 건 앞마 당과 뒷마당 사이의 ‘중문’인데, 목적은 ‘길고양이의 가택 침입 방지’란다. “저렇게 만들어 놓으면 아주 괜찮을 거야. 평소에는 열어두고, 밤에는 고리를 걸어 닫아두는 거지.” 건축가의 목소리에 넘치는 자신감이 묻어난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마주친 까만 길고양이에 화들짝 놀라 우는소리를 했었는데 그게 클라이언트 미팅이었을 줄이 야. 설계도도 청사진도 없고 가위로 색색 테이프를 끊는 시공식도 없었지만, 건축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루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는 이틀 반이 걸렸다. 우리 집 건축가 취미가 바둑인데, 그 정이 깊어 어쩔 수 없었으리라. 공짜 시공이니 이 정도는 봐 드려야겠지.
가꾸목을 다루는 솜씨가 이정도였나 완성된 중문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마 ‘푸하하하’ 웃었던 것 같 다. 푸하하하. 그 시절 조경마저도 훌륭했던 신축 아파트에 살 때보다 지금 사는 집에 더 큰 안식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나에게 딱맞는 방식으로 말을 걸어주는 건축가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심지어 같이 살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우리 박 사장님 톱질하느라 고생하셨으니 오늘 저녁엔 삼겹살 한 근 사들고 들어가야겠다. 공간을 다루며 그 공간에 머물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 공간과 어우러질 또 다른 공간까지 아우르는 것. 그래, 건축이 뭐 별거 있나. 이게 바로 건축이지.
Issue No.13 푸하하하프렌즈 Monthly Artwork, Pinz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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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try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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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즐의 괄호
Monthly Artwork, Pinzle에 한 달에 한 번씩 글을 쓰게 되었다. 출근부터 퇴근까지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다니 정말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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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자유
미켈라 피키의 써클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색의 규칙과 선의 자유가 매끄러운 틀 안에 갇혀 굳게 마감되어 있었다. 흥미로웠다. 위태롭게 폐쇄된 욕망 혹은 어떤 것으로도 침해되지 않을 온전한 욕망이라. 보는 이에 따라 느끼기 나름일 테지만, 대단한 힘의 결정이었다. 
폐쇄된 욕망을 위태롭다고 표현한 데에는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있다. 나는 다양한 종류의 욕망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해 부끄러웠던 적이 많다. 무작정과 아무 말이 넘쳐나는 흑역사의 시절,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위태의 나날들. 자의든 타의든 억압은 늘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자신의 욕망에 눈 뜬 사람들이 좋다. 그들은 타인이나 환경으로부터 잘 훼손되지 않는다. 온전히 자신으로 서 있다. 나혜석이나 전혜린, 오스카 와일드나 버지니아 울프, 에곤 실레나 피카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고달팠다. 세상의 평가로부터 투쟁해야 했다. 그 대신, 자유를 얻었다. 
욕망에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알아도 모른다 말하겠다. 그건 자기 기준에 따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파도에 부딪히고 씻겨 정제된 욕망은 주위를 감동하게 하는 열정으로 드러나고 생의 뜨거움으로 간직된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또 그대로 남는다. 욕망은 욕망의 주체가 정해놓은 경계를 넘나들며 흔적을 남긴다. 
함부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그런 것들. 가느다란 선으로 시작해 구불거리는 덩어리가 되기까지 끝내 알아채지 못할 것들. 아마도 ‘욕망’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좀 더 자신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내 속에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욕망의 선을 더듬거리고, 쥐어 흔들다보면 언젠가 자유의 포구에 가닿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다고 믿는다. 욕망의 경계에서 선을 넘은 자들은 언제나 자유의 기록을 남겼다.
Monthly Artwork Pinzle Issue No.8
[핀즐]은 매월 새로운 아티스트 한 명을 선정하고 그의 작품과 라이프스타일이 담긴 매거진, 그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 콘텐츠를 함께 전달하는 아트 프린트 매거진이다. 작품은 A1 사이즈로 제공, 정기구독과 개별 이슈 구매가 모두 가능하다.(http://www.pinzl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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