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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관계가 있다. 나는 서로 존재가 연루되었음을 느끼는 사람들을 아주 가끔 만난다. 헤어날 수 없음에 허탈해하다 항복하듯 나를 내던지고 만다. 우리는 그렇게 공범처럼 서로를 인식한다. 너의 존재는 나에게 위로인 동시에 절망, 그 사이를 오가는 아슬아슬한 매혹이다.
얼마전 친구와 나는 선택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은 선택이라고 대답했다. 상대방이 내게 주는 사랑의 방식과 깊이에 따라 시소 타듯 따라가는 단계를 넘어서서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는 것. 그것을 선택할 때의 희열에 관하여.
우리는 때때로 자신만의 잣대와 방식으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하기에 우리가 무작정 사랑해야 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사랑을 주기로 선택한 이후, 상대가 내가 원하는 만큼 사랑을 돌려주는가 아닌가는 내 사랑을 결정짓지 않는다. 내가 집중하는 것은 내 안의 에너지가 생성되고 상승하고 그러다 남김없이 사라지는 광경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 당신이 나타나서 무한한 감사를 느낀다.
십오 년도 훌쩍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내게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그때 이미 예감처럼 알고 있었다. 존재가 연루된 누군가가 나타나는 일은 흔치 않음을. 그러나 그를 남김없이 사랑하는 일은 선택이며, 그 비장함을 품기란 엄청난 기회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그 절호의 찬스를 무심코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그는 두려워했다. 자신의 좋지 못한 상황을 원망했고 내게 충분한 정성과 시간을 쏟을 수 없음을 염려했다. 아직 이십 대 언저리에 머물고 있던, 젊고 패기에 찬 청년이 내 앞에서는 한없이 작고 유약해지는 것을 보았다.
“나에게 좀 더 많은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남김없이 시간을 보내고 일상을 맞이하고 거리를 헤멜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네게 내가 바로 그 남자가 되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자꾸만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우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가 없어. 나는 이렇게,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일정과 책임에 얽매어서 나 대신 네 곁에 있을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는 누구보다도 바쁜 사람이었다. 바쁜 것은 물론이고 스트레스도 엄청났다. 하지만 그가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나는 사랑에 있어 어설픈 증거와 선언을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내게 사랑은 선택이고 믿음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신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그에게 대답했다.
“기다림이 선택이 되었을 때에는 그 어떤 행위보다 즐거울 수 있어. 나는 내 산책을 이끌어줄 누군가를 원한 적이 없어. 단지 그 상대가 네가 되어준다면, 그건 참 멋진 일이 되겠지. 기다릴게. 불필요한 상상은 해로운 거야. 너의 바쁜 일상을 두고 나는 어리석은 상상 따위는 하지 않기로 이미 선택했는걸. 내게 너는 선택이고 너를 기다리는 것 역시 선택이야. 그리고 나는 내 선택에 충실한 사람이야.”
당신을 위해 달리는 속도를 늦출 수는 있겠지만, 달리는 행위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사랑이 끝나는 순간은 당신이 나를 원하는 만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 안의 무언가가 비로소 마감을 알리는 신호를 보낼 때에 찾아왔다. 그것은 비장한 마무리일 때도 있었지만, 바람이 대기에 스며들 듯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기도 했다 남김없이 사랑한 뒤의 결말은 대체로 편안했다.
내 메일을 받은 그는 그날 밤 늦게 내 얼굴을 보기 위해 우리 집을 찾았다. 우리는 파리 15구 노천카페에서 때늦은 저녁을 먹었다.
“기다릴게.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얼마나 숨 가쁘든 상관하지 않아. 나를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거 하지 않아도 좋아. 그냥 내가 선택한거야. 나는 바쁘게 달려가는 지금의 네가 좋은 거고, 이건 내가 선택한거야. 내가 바라는 건 나의 선택에 네가 행복했으면 하는거야. 그뿐이야”
그의 얼굴에서 환호성처럼 번지던 기쁨의 자취를 보며 내가 느꼈던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이었다. 나는 누구보다 의기양양했고 그 기쁨에 취해 그에게 말했다.
“행복하다고 말해줘, 내가 너를 사랑해서, 내가 너를 사랑하기로 선택해서 기쁘다고 말해줘”
지금도 생각한다. 관계의 황홀경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달을 때 찾아왔다가 그 사랑을 지속하기로 선택한 순간에 지극해진다. 존재의 연루가 관계의 단단함으로 이어지는 자리. 그곳은 인연의 결말이 어떠하든 눈부시다.
- 존재의 연루 / 이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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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관계에서 기브앤테이크는 별로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거든? 상대에게 마음을 쏟은만큼 되돌려 받으려고 하지말고, 그 사람에게 애정을 주면서 느꼈던 기쁨과 과정을 즐길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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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채 뽑고 싶은 지저분한 생각들이 있다.
수치심,열등감 따위의 감정들.
그러나 반응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살아온 대로 반응하는 그 습관을 인식하고 바꾸려고
나름 주기적으로 노력을 하는 편이지만
잡초처럼 이제 좀 아무렇지 않은가? 싶다가도
잠시 한눈팔면 더 많이 자라있다.
근데 그게 뭐.
자라면 또 없애면 그만이다.
문제라고 내가 생각하면 문제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만의 지옥은 있는 법이니까.
전에 일하던 직장 상사분이 카톡 상메로 해두신 말인데
가끔 참 위로가 된다.
잡초같은 생각은 그때 그때 잘라주면 그만. 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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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부재에 대한 오해를 쌓으며, 서운함을 주고받으며 생각했다. 친구 같은 사랑이 이 모든 사랑의 끝이기를 바란다고. 당연한 듯 서로를 원해도 그 사이 자리한 기다림이 비참해지지 않는 사랑. 어릴 때 좋아했던 노래 가사처럼-Part-time lover, Full-time fiend-파트 타임으로 애인, 풀타임으로 친구인 사이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관계의 모양이다. 그 사랑이 뜨겁지 않다는 것은 흔한 오해일 것이다. 미지근해 보이는 그 사랑은 사실 낮은 온도로 가장 오래 끓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닮고 싶은 연인들은 죽고 못 사는 애인이라기보다 친구에 가까워 보였다. 닦달했던 연애 초반은 반드시 존재했겠지만 다음 단계인 친구 같은 애인으로 발전한 것처럼 보였다.
서로가 없는 자리에서도 서로를 생각하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 각자의 고독을 이해하기에 연락이 뜸해도 불안해하지 않는 관계. 그 고독이 결국은 너를 위한 일이 되는. 함께 있을 때는 애인으로서의 부분이 전체가 되는. 아름다운 안심은 두 사람이 온전히 각자 존재할 때 태어났다. 연인이 있어도 여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사랑. 때에 따라 친구였다가, 애인이었다가 하는 변형 가능한 유연한 사랑. 그 믿음은 활활 타지는 않았지만 결코 꺼지는 일이 없었다.바람이 통하는 사이. 그 바람의 선선함은 영원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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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는지 궁금해도 물어보지도 못하고 보고싶은 거 같은데 보고싶다고 말도 못하고 이게 뭐야 대체. 이렇게 지낸지 벌써 한달. 나 지금 괜찮을까. 괜찮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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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면 슬픈대로, 기쁘면 기쁜대로. 그러다 설레면 설레는대로 — 맞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이 어디있어. 우리 모두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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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난데 요즘은 나 혹시 외롭나?? 하는 순간들이 가끔 있다. 인간은 혼자 시간을 보낼 때에 가장 많이 성장한다고 어느 영상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래서 지금을 더욱 소중히 여기며 즐기고 있던 찰나에 문득 겁이 났다. 이 기간이 더 길어져 내가 외로움을 견디다 포기해버리고 그때에 가장 가까이에 있을 그냥 좀 만만하다 느껴지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의지해버릴까 봐 갑자기 그게 너무 겁이 났다.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닌데. 나 분명 잘 해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고 겁이 난다. 나는 그저 안아달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한 것뿐인데. 그렇게도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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