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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계속 쓰고 있어요, 소설과 수필 사이를 오가면서 갈피를 좀체 잡지 못하는 중.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풀어나가던 한 자락에 245차원의 그 친구들이 손을 잡아준다면 언제든지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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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써보고 싶어서 끄적끄적. 취미생활을 다시 찾아야 할텐데...
꽤 멀지 않은 곳이라고, 의식적으로 생각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는데 막상 여기까지 오는 길은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고 지루한 여정을 필요로 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바라보는 푸른 잎새의 반짝임이, 지금은 그저 시끄럽기만 하다. 사샤. 네가 여기까지 오는 길은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길었겠지? 원치 않는 여행의 마지막이 파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결국 끌려왔어야만 했던, 신부의 새하얀 복색을 하고 이 장원에 발을 딛으면서 당신은 웃고 있었을까, 혹은 울고 있었을까. 너를 그렇게 떠나보내어선 안되었는데.
새하얀 비단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자꾸만 난다. 긴장한 탓에 드레스를 손으로 꽉 쥐고 있던 탓이었다. 누군가는 시끄럽다고 잔소리를 할 법 했다. 하지만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 문이 자물쇠로 잠긴 마차를 탄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 복색은 새신부의 그것인데 어째서 이런 굴욕적인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지 설명하려면 꽤 길다. 하지만 어쩌면 단순하다. 나는 팔려가는 중이었다.
같이 도망가자고, 나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 사람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 꿈 속에서의 거절이었다. 그 사람은 단 한번도 내가 필요로 할 때 내게 온 적이 없었다. 내가 보았던 그 따뜻한 순간들이 모두 나의 환상이었을까, 혹은 꿈으로만 기억해 달라는 당신의 마법이었을까? 이제는 모르겠다.
마차의 문이 덜컥, 열리고 검은 제복을 입은 사내가 내 손을 잡아 마차에서 내리는 일을 도와주었다. 검은색. 결혼식에 어울리지 않는 상복의 색깔이었다. 내 죽음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망자의 마지막 복색이 붉은빛이면 어떨까? 그런 이야기를 그에게 한 적이 있었다. 웃으며 내 무덤에는 붉은 장미를 가져다 달라고 말했었다. 내가 마지막 숨을 내쉬고 나면 당신은 내게 그 꽃을 가져다 줄까. 사랑을 속삭이고 덧없는 영원을 속삭이던 순간 정표로 건네주었던 그 장미를.
등 뒤로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샹들리에의 불은 빠짐없이 켜져 있어 휘황찬란하도록 빛났지만 신부의 표정은 전혀 밝지 못했다. 그걸 알기라도 하듯 어디선가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와 백색 면사포를 휘저었다. 스스로 그 면사포를 벗어던지고 수많은 계단을 돕는 이 하나 없이 올라갔다. 난간에 붉은 장미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나의 조화(弔花)였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육중해 보이는 문은 손을 대자 스윽-하고 열렸다. 그녀가 스스로 열지 못했을 문이었다. 새삼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쉬웠다면 진즉 구하러 왔을 것을. 늦은 뒤에야, 떠나신 뒤에야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아신다면 나를 향해 웃어보이실텐가요.
색이 노랗게 바란 면사포가 붉은 카펫 위에 떨어져 있었다. 그 끝이 문득 검붉은 피로 적셔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손에 쥐어들자 그 가벼운 천은 파삭 소리를 내며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마치 그녀가 내게서 순식간에 사라졌던 것처럼. 혼자 올라갔을 저 계단이 더욱 가슴아팠다. 난간에 여린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문이 열려있는 방은 딱 한 곳 뿐이었다. 마치 유령에 이끌리는 것처럼 나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깨끗한 리넨 향과 장미 향기가 나는 아름다운 방이었다. 벽에 발린 푸른 비단과, 새하얀 침대 위에 가로질러 놓인 붉은 비단이 인상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창가에 놓인 푸른 장미 한 송이는 내가 비현실의 세계에 들어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곳에서 스스로 신부의 드레스를 벗었다. 원하던 이를 위해 입지 못했던 옷이니 사정없이 구겨 불타는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이제 나는 정말로, 철저히, 온전히 혼자였다.
유리창이 하나도 깨지지 않은데다, 이상할 정도로 바닥에는 먼지가 쌓여있지 않았다. 우습게도 나는 그녀의 작은 발이 향하는 방향마저 볼 수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때로는 나를 앞서기도 했던 그녀가 걸어갔던 길을. 쭉 따라가니 방문 하나와 마주했다. 문 손잡이에 붉은 피가 남아있었다. 손을 갖다 대자 붉은 피가 그대로 묻어나왔다. 점점 이 저택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문을 열었다. 아직 밝은 한낮의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잠시 내 시야를 방해했다. 샹들리에에 걸려있는 그녀의 웨딩드레스가 보였다.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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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에서 슬그미 번지는 그 따뜻한 선들이 내게는 너무나도 일상과 같은 것이었다. 시시각각 차분하게 가라앉는 어두운 하늘과, 노란색 불빛으로 은은하게 비추어지는 물 위의 전각은 누가 보아도 아, 하고 탄성을 자아낼법 했다. 홀로 고궁의 밤을 걷는 길, 사박사박 걷는 이들 틈바구니로 유유자적하는 일도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리 된지 꽤 오래 되었으므로 외로움은 내게 익숙한 것이었다. 다만 잠시동안의 따뜻함이 덜어내진 그 틈바구니가 허전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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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며칠 째, 옆집에선 아무런 기척도 없다. 연락을, 자주 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이 그 사람이 사라졌고 거기다 어디냐고 캐묻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지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우울증이 또 찾아왔다. 나는 다른 사람이, 심지어 가족이라도 내게 뭔가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싫었다. 상대방은 사소한 부탁 정도로 생각하는 듯 했지만 내가 하기 싫은 일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다른 사람 말을 듣고 있다가도 관자놀이를 총으로 쏴서 자살해 버린다거나,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린다던가 하는 그런 상상이 부던히도 나를 찾아와 흔들어 놓고 있었다. 서른 전에는 자살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이대로 살다가 그냥 어느날 갑자기 죽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삶을 내가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자살 정도는 내가 온전히 내 삶을 통제한다는 증거나 다름아니었다. 점차로 술 마시는 날이 늘어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와인 몇 잔 마셨다고 술병이 나서 드러누웠는데, 그 토악질을 경계하지 못한 듯 나는 술에 의존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었다. 전부 당신 탓이야. 당신이 갑자기 사라지지만 않았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어. 달콤한 말 몇 마디, 내가 겪은 적 없는 다정한 행동 몇 가지에 홀랑 넘어가서는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내가 자살하고 나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서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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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진짜 숙취 때문에 약국 청년이 약 포장지, 약병 다 까주고 약 먹고 출근했습니다. 출근해 보니 직장 동료들이 얼굴 너무 새하얀거 아니냐고 걱정.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했을 무렵에는, 저녁에 와인 한 병을 다 마시고도 멀쩡하게 다음날 출근할 수 있었다. 나이도 들고, 슬슬 외로움이 다시 찾아들 무렵에는 한 병은 커녕 몇 잔 들어가도 숙취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혼자 마시니 그저 술만 묵묵히 집어넣었고 그러다 보니 하루는 아침에 구토를 하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약국에 잠시 들렀다가(그 때의 약사 청년이 약봉투를 다 까 주었는데 나중에 거울을 보고 이유를 알았다) 출근을 한 적도 있었다. 막상 앞에 사람을, 그것도 내 눈에 과분한 미남을 두고 술을 마시고 있자니 지난 외로움은 다 뭐였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주신의 위로를 받자면 목을 타고 넘어가는 그 액체가 다른 어떤 것보다 달았는데. 자기 생각보다는 내가 술을 잘 마시는 것이 조금은 놀랐는지, 걱정이 되어서였는지 어느 시점부터는 그가 내 잔에 술을 채워주지 않았다. 솔직히 살짝, 시야가 흔들리기는 했다. 나는 혼자 있을 때가 아니면 취했을 때 무슨 말에도 까르르 웃는 주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또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빰을 쿡쿡 찌르는 것 까지는 기억이 났다. 서서히, 시야가 흐려지면서 뭔가를 베고 까무룩 잠들었던 것 같다. 다음날 아침,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몸을 일으켰을 때 나는 이불을 덮고 있었다. 깨끗한 리넨 향이 나는 얇은 이불 덕분에 감기에 걸리진 않았지만, 부엌에서 흥얼거리며 해장국을 끓이고 있는 그를 보자마자 옷차림새를 확인했다. 그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아무렇지 않게 내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아무 일 없었으니까 안심해도 돼요. 취하니까 금방 무릎베개 하고 잠들던데?" "이런......" "오히려 그게 더 귀여웠으니까 보는 재미도 있었고. 술 잘 마신다고 오기 부리다가 금방 취해서는...즐거웠어요. 자, 아침식사 다 했으니까 와서 한 술 떠요. 속은 괜찮고?" 앞치마를 한 그가 식탁 위에 따뜻한 국물과 밥을 차려주었지만, 밥은 조금도 먹질 못했다. 역시 위장에서 술을 받아줄 수 없다고 거부를 한 모양이었다. 속이 계속 울렁거렸다. 예전과 같은 그 패턴이었다. 결국 양해를 구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얼굴이 새하얗다고 걱정을 한 인호가 집에 보내기는 커녕 붙잡아서 다시 침대에 눕혀놓았다. 언제 사온건지 약봉투까지 주섬주섬 꺼내서는, 예의 약사 청년처럼 약을 다 까서 입에 넣어주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가 약을 삼키고 다시 드러눕자 그가 툴툴거렸다. "눈에 안보여도 불안하고 또 눈에 보여도 불안하고."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그것보다 더 하다면?" "어...음. 나름 성인인데요." "그렇단 사람이 이렇게 술 조절 못하면 곤란하죠. 집에 가서 혼자 토할 생각은 말고." "어떻게...?" "소혜 씨 같은 패턴도 몇 번 겪어서요. 토할 것 같으면 여기 화장실 얼마든지 써요. 청소 걱정은 집어치우고, 사람 사는게 우선이잖아요. 속은 좀 어때요?" "덕분에..." 게다가 여기서 토하는 추태를 보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내 대답에 그는 한숨을 쉬더니, 이불을 끌어당겨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오늘 출판사 미팅이니까 잠깐 자리 비울거예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요. 알겠어요?" "그럼 차라리 제 집에 있는게 낫잖아요." "아뇨." 그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집에 와서 소혜 씨가 바로 눈에 보였으면 좋겠으니까요. 눈 감고 좀 자요. 금방 다녀올테니까." "미저리..." "그 여자야 뭐...그런거지만." 인호는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뺨에 살짝 입술을 갖다대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황송할 정도로 달콤했���. "난 가끔 당신이 그렇게 해 줬으면, 싶기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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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이도스코프.
음...쓰다 보니 와인을 마시고 싶어졌지만 내일로 미룹니다.
자판을 아무 생각 없이 두드리다 보니 어느새 늦은 저녁이었다. 영상회의가 예정되어 있어서, 퇴근시간이 훨씬 지나도 나갈 수가 없었다. 옆집의 그 남자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하마터면 휴대전화에 걸려온 전화를 놓칠 뻔 했다. 일전에 교환했던 그의 번호였다. 전화 회선을 사이로 듣는 목소리는 더 근사해서, 피로가 싹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이 시간에 옆집에 인기척이 없어서요. "야근이예요. 아마...밤 열 시쯤?" -왜 이렇게 늦어요? "야근이잖아요. 영상회의가 좀 늦게 시작해요. 차 마시는 중이예요? 부러워라." -데리러 갈까요? 시간 너무 늦는데. "그래주면 고맙지만...너무 늦잖아요."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건지 모르겠네. 그 아래 카페에서 글이나 쓰지 뭐. 회사 위치는 안바뀐거 맞죠? 그는 전화를 끊기 전에도 몇 가지를 더 확인하더니(회사 위치라던가), 이내 일 잘 하라며 격려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 너머로 나는 하마터면 아쉬움을 흘려 보낼뻔 했다. 이런 다정한 일에는 역시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다른 직원들은 다 퇴근하고 나 혼자 남아서 회의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 조금 외롭단 생각은 들었다. 저녁 여덟시쯤 되어 시작된 영상회의는 의외로 일찍 끝났고, 나는 그에게 데리러 오지 말라고 전화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들고 바쁘게 건물을 나서는 중이었다. 회사 건물 일층의 카페에서 만년필로 노트에 무언가 적고 있는 그가 단박에 눈에 띄는 바람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 역시 나를 알아보더니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와 있냐는 타박에 인호는 싱긋 웃으면서, 대답 대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함께 건물을 나서는데, 봄답지 않게 더웠던 공기가 어느샌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온도가 낮에 좀 찾아들면 좋을텐데, 아쉬움이 들었다. "회의는 잘 했어요?" 집으로 함께 돌아가는 길, 오늘은 익숙지 않은 높은 굽의 옥스퍼드화를 신고 와서 걸음걸이가 어색했다. 그걸 알아챈 인호가 내 손목을 살짝 잡아주며 물었다. "그럭저럭. 항상 긴장하게 되더라구요. 보고하는 거랑, 피드백 받는거랑...그래도 잘 했다고 격려는 해 주시지만. 신입직원이라고 봐 주던 시기는 다 지나기도 했고요." "그렇구나. 그래도 잘 했다니 마음이 놓이네요. 소혜 씨 가만 보면 불안하거든. 지금 걷는 것도 어색하고. 힐 거의 안신고 다닌댔죠?" "신발장에 있는 신발 몇 켤레 안돼요. 그 중에서도 힐이나 플랫 한 켤레씩은 사무실에 있으니까...검은색. 하나? 잘 모르겠어요." "좋은 신발은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고, 신경을 아예 끄는 것도 좀 별로긴 하네요. 왜, 가벼운 새 신발 신으면 기분도 좋을텐데." "구두는 언제나 불편했어요." 아예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발에 맞지 않는 구두가 발뒷꿈치에 커다란 구멍같은걸 낸 날은 짜증이 엄청 났다. 액체형 밴드를 그 위에 덧바를 때의 통증은, 어지간한 고통은 참는 나조차 소리를 지를 정도로 따갑고 아팠다. 조금 걸어갔을 뿐인데 금방 집이 나왔다. 내일은 어차피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이메일로 회의결과는 이미 정리해서 보내줬으니까). 조금 심술을 부리고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는 그를 데리고 근처 마트에서 와인을 두 병 샀다. "어라...술, 잘 안마신다면서요." "금주는 못하겠고, 절주 중이었는데...그래도, 마시고 싶어졌어요." "그걸 또 혼자 마시겠다고?" "어...안되나요? 원래 자주 그랬는데, 아니, 거의." "지금 그거 굉장한 도발인데요. 괜찮겠어요? 내일 출근은." "안해요. 그래서 마음놓고 마시는거죠." "그럼 몇 병 더 고르죠." "네?" 원하던 방향의 반응이 나오긴 했지만 막상 그가 와인 말고 보드카를 집어들자 나는 살짝 긴장했다. "보드카는 왜...?" "기왕 마실거면 즐겁게, 맛있는거 마셔야죠. 오늘 스트레스 좀 받은 모양이네요, 갑자기 그러는거 보니까. 뭐...나름 신선해서 보기 좋지만요. 평소의 소혜 씨는 격식, 예의 엄청 차리고 거리감을 두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또, 색다른 모습이랄까? 보기 좋아요. 그러니까 나도 어울리게 해 줄래요?" 이 사람이 이렇게 부탁을 해 버리면 거절할 수가 없다. 거절한 사람이 있기는 할까. 결국 얼결에-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와 함께 먹을 안주를 몇 가지 더 골랐고, 자연스럽게 인호의 집으로 들어왔다. 대신 잠시 내 집에 들러서 -- 주객전도란 생각은 잠시 뒤 버렸다 --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돌아왔다. TV앞에 자연스럽게 술상같은게 차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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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글거려서 미치겠다. 대체 무슨 대사를 써야 하는거야...
머리를 빗고 몇 번이나 다른 모양으로 만져보다가, 아무래도 예전에 빠진 머리숱이 돌아오진 않는 탓인지 축-가라앉는 바람에 마음도 저 깊이 가라앉고 말았다. 그래도 약속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단장을 하고는 옆집 문을 두드렸다. 늘 보던 편안한 차림의 그가 편안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일전의 애매한 고백 이후로 다소 서먹해진 감도 있었지만, 그게 '진짜'임을 서서히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나는 스스로를 속이는 중이었다. 일단 이 쪽도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고. "립스틱, 바꿨네요? 어울려요. 너무 화사한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쪽이." 그는 자연스럽게 내 손에 따끈한 차를 따른 머그잔을 쥐어주고는, 예의 소파 옆을 툭툭 가리키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는 괜히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그 옆에 가서 앉았다. 손끝에 립스틱이 묻어난건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입술에 손가락을 대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었기 때문에 쉽게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입술이 워낙 작으니까, 뭘 발라도 어울리질 않아요. 그냥 기분 전환 삼아서." "다음엔 내가 골라줄까요?" "그렇게까지는..." 이 사람의 이런 다정한 호의가 정말 순수한 것인지는, 아직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로 성공하고 이렇게나 잘생기고 다정한 사람이 내게 호감을 보인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아서. 그는 찻잔을 앞에 내려놓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가끔은 기분전환, 이라고 말했잖아요. 실례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하고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들어줄테니까. 같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같이 하는게 더 즐겁고." "--."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조금 걸린다면, 얼마든지 기다려줄게요." "그렇게 기다린다고 해 놓고 도망친 사람이 근래에 있어서요." "아아, 그 아이." 확실히 나보다 어린 남자였으니까 이 사람에게 있어선 애라고 생각될 법 했다.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에 속아 넘어간 소혜 씨도 무른거예요." "갑자기 시비예요?" "그럴리가. 그냥 순진하다는 말이예요. 내가 소혜 씨 신경 돋궈서 좋을게 뭐 있다고. 여하튼, 하고싶은거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말해줄래요? 나도 사람 마음을 다 꿰뚫어보는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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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디 아파요? 얼굴이 하얀데." 평일에도 마주치면 인사는 하는 편이었지만, 휴일에 추레한 모습으로 약국으로 가려다가 막상 붙잡히고 나니 몰골이 염려되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음만 먹으면 거짓말이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나였지만 머리가 너무 아파서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그랬더니 어느샌가 이 사람 집에 붙잡혀 와서는 진통제를 먹고 소파에 누워있는 꼴이 되어있었다. 한편 그는 마감인 원고가 하나 있다면서, 등 뒤에 나를 눕혀둔 채 자판을 타타탁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지막이 한 소리 했다. "몸 아픈데, 혼자 약 사러 나가고, 그러면서 또 집에 돌아와서 혼자 아프면 서럽잖아요. 억지로 잡아놔서 좀 미안하긴 한데, 두통 가라앉을 때까지 쉬고 있어요. 못 놀아주는건 미안." "놀아준다니요." "아니었나? 요즘 소혜 씨 만나면 꽤 즐거워서. 통증은 좀 어때요? 두통은 이유가 꽤 여러가지지만 진통제로 가라앉는 종류면 좋겠는데." "잘...모르겠어요. 사실 아까도 두통 때문에 잠깐 자다가 나가려던 거여서. 잠을 자고 막 일어났을 때는 괜찮은데 좀 지나니까 다시 아프더라구요." "와아, 엄청 걱정 시키네요." "죄송합니다?" "일부러 아픈 것도 아니잖아요. 일부러 데려온건 오히려 나고. 집에 가서 쉴래요?" "싫어요." "변화무쌍하네요." "애초에 집에 가려던 사람 여기 데려다 둔건 인호 씨니까 책임은 지셔야죠." "하하, 그러네요. 기분은 좀 어때요?" "좀 웃었더니 나아진 것 같아요." "아플 때는 다른 기분 좋은 일을 하거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꽤 좋으니까요. 그럼, 쉬고 있어요. 원고 보내고 나서는 놀아줄테니까." 그리고 다시 자판 두드리는 소리. 소파가 있는 이런 공간에 사람과 같이 있는 일이 정말 오래간만이었던 고로,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따뜻한 담요 덕분일지, 졸음이 쏟아졌다. 여기서 잠들어버리면, 자면, 아, 곤란한데--.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다행이도 아직 바깥은 밝았다. 그런데 벽시계를 보니 오후 여섯 시. 해가 꽤 길어지긴 했어도 이렇게 시간이 지날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다. 인호가 앉아있던 의자는 비어 있었다. 아직 약간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몸을 겨우 일으키자, 부엌에서 차를 준비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아직 머리 아프구나. 그래도 차 한잔은 괜찮을걸요?" 불쑥 내게 건네주는 머그잔을 집어 들자, 그는 소파의 가장자리에 어설프게 걸터 앉더니 자연스럽게 TV를 켰다. 주말이라 그런지 온갖 채널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멍하니 화면을 따라가다가 나도 모르게 하르르 웃었다. "웃는거 보니 다 나은 모양이네. 하루 재워서 보내려고 했는데." "그런 위험한 소린 하지 마요. 내일부터 또 출근이니까...으으, 하기 싫어라." "직장 다니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 하던데." "출판사 직원들?" "그 사람들도 그렇고...아니 애초에 그 사람들은 밤낮없이 일해요, 원고 받고 교열하고 뭐 그런거 하느라." "생각해 보니 그렇겠네요." "내가 아는 사람이 출판사 직원만 있는건 아니예요, 소혜 씨." "아? 아, 그게 아니라--." "맨날 집에서 글 쓰는게 전부니까 그렇게 생각하는게 일견 당연하기도 하지만요. 별로 기분 나쁘다는 건 아니예요." 그는 그 사이 다 마신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나를 옆 쪽으로 밀어내고는 자기가 옆에 앉았다. 작은 집에 남녀가 단 둘이, 소파에 앉아있지만 그는 어깨 위에 팔을 두르지 않았다. 솔직히 그에게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어서 내심 기대도 했지만, 오히려 그러지 않아서 고마웠다. 나는 내게 그런 일을 하다가 자기가 놀라 도망간 사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혼자가 아니어서 좋았어요. 늘 주말엔--." "알아요. 그래서 일부러 데려온거니까." "--." "신경이 쓰이잖아요. 여자 혼자 사는데다가, 하루의 절반은 우울에 갇혀있는 것 같고, 그래서 걱정 되어서 다가가 보면 하르르 웃기나 하고. 답답하잖아요. 울고싶어 하는게, 다 때려치고 싶은게 눈에 보이는데." "지금 그거..." "이렇게 신경 쓰는 사람이 오랜만이라 나도 참 정상적이지는 않지만." 그는 갑자기 리모콘에 손을 뻗어 TV를 끄더니 내 고개를 돌리게 해선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살다 보면 물론 포기해야 할 것이 생기기도 하지만, 일부러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갖고싶은 걸 억지로 포기할 필요는 없어요. 원하는게 있으면 손에 넣어야죠,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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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인장이 찍힌 편지를 보고도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으레 그렇듯 그녀의 안부 인사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편지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의 눈은 의식조차 못한 채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듯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명헌대공은 제가 거느리고 있던, 심지어 리프레의 타운하우스에 동행하게 했던 수석 장서관이 자살했는데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무척 담담하기까지 해서, 사람들은 그가 그녀를 죽인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명백한 자살이었고, 사건은 신속하게 종결되었다. 이후의 관심은, 얄궂게도 명헌대공의 약혼녀로 옮아갔다. 한미한 자작 가문의 여식이 대공과 약혼한다고 다들 야단법석이었다. 그러니 보잘것 없는 평민 여자의 자살은 금방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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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이도스코프. 자꾸 본성이 튀어나오려는걸 붙잡아서 얌전히 앉혀놓고, 그래놓고선 투덜투덜.
내가 왜 이 집 식탁에 앉아있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앞치마까지 두른 총각이 조심스럽게 상을 차려주었다. 그래, 어제의 일로 보답을 하기 위해 먹을걸 사들고 문을 두드렸는데,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어서 얼결에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다. 명색이 이웃인데 그냥 돌려보내기는 아쉽다는 ���지였다. 솔직히 나 같은 사람을 아쉬워할 만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틈이 나서 잠깐 집을 둘러보니 좁은 공간의 벽 하나는 책장으로 꽉 차 있었다. 매끈한 데스크탑과 책상, 의자, 그리고 창가에 놓인 작은 침대 하나가 전부인 단촐한 구성이었지만 남자 혼자 사는 것 치고는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깔끔하네요." "그런가요? 다른 사람한테 보여줄 일은 거의 없어서." 그가 무미건조하게 말하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차린건 많이 없지만요. 요즘은 뭐 물건 주문하는 것도 귀찮아서 음식도 제대로 안하고 살았는데 덕분에." "저야말로. 잘 먹겠습니다." 메뉴는 간단하게 돼지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와 김, 참치캔, 밥 뿐이었지만 이마저도 잘 챙겨먹지 않던 내게는 오랜만의 '집밥'같은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수저를 놀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워냈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나서 그가 따끈한 차를 내어올 때야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계속 긴장하고 있었네요, 안그래요?" 그가 처음으로 옅은 웃음을 보이며 내 앞에 노란색 머그잔을 살짝 밀어주었다. 안에는 면으로 만든 얼그레이 티백이 들어가 있었다. 저녁에는 가급적 커피나 홍차는 마시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푸른색 베르가못의 향이 나는 이 차가 오랜만이라 기꺼워 거부할 생각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거야...요즘은 이래저래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들 하잖아요." "일견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서운한 일이기도 하고." "그래도, 고맙습니다. 어제의 일이나, 오늘 식사 대접까지 해 주신거." "저야말로 모처럼 다른 사람이랑 시간 같이 보내서 즐거웠어요. 일 하다보면 아예 바깥에 나가지 않는 날이 꽤 되거든요." "집에서-?" "음, 뭐랄까. 미천하지만 글을 쓰고 있어요." 그가 손끝으로 가리킨 곳에는 잡지 몇 권과, 단편 소설들이 놓여있는 책장 칸이 있었다. 아마도 잡지에 칼럼 따위를 투고하고, 짧게는 소설책을 써서 내는 일이 생업인 사람이라라. 예전에, 나도 갖고 있던 꿈이었다. 그는 내가 자신의 직업을 밝혔음에도 별 반응이 없자 신기한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다시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나는 나름대로, 이 사람이 하루종일 이 차림-그러니까, 가디건에 면바지-일거라고 추측한게 맞아서 조금 즐거웠다. "그럼 평소에도 글?" "아아. 글 쓰는게 업이라 마감 아니면 안 쓰고 싶더라구요. 시간이 비면 영화를 본다던가, 전시회 보러 나가기도 하고. 혼자 지내는게 다 그렇죠, 뭐." 마치 내 일상을 보는 듯한 말에 저절로 공감이 갔다. 그나마도 나는, 만나는 사람 없이 주말 내내 허송세월. 전시회라도 보러 가도 두시간 이내에 질려서 돌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시간이 꽤 늦었네요..." 머그잔을 소리나지 않게 내려놓으며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아홉 시였다. 평소라면 침대에 뛰어들어 데굴거릴 시간이었다. 그 역시 시계 쪽으로 시선을 흘끗 주더니, 나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내서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감사해요. 이렇게 편하게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 한게 오랜만이라 즐거웠어요." "이웃이니까, 다음에 또 식사 같이 할래요? 저도 편했거든요. 특히...이름이?" "소혜요." "소혜..예쁜 이름이네요. 제 이야길 잘 들어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예요. 나이 많은 사람이라, 지루하면 어쩌나 솔직히 고민도 했거든요." "나이...?" "소혜 씨 생각보다는 많을거예요. 자, 들어가요." 내가 카드키로 집 문을 열고 안으로 한 걸음 내딛자 그가 내 등을 살짝 밀며 말을 이었다. "잘자요. 내일도 출근 잘 하구요." "아? 아...고맙습니다. 들어가세요..." 문이 닫히고 도어락에서 경쾌한 안내음이 흘러가자, 익숙한 적막이 나를 감싸는 듯 느껴졌다. 익숙한, 조용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주 익숙해야 했는데 방금 전까지 사람이랑 이야기를 조금 했답시고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차림새를 편하게 한 뒤에는 늘 하듯이 침대 위에 얼굴을 파묻듯이 뛰어들었다. 포근한 침구의 감촉, 미리 뿌려둔 향수의 달콤한 향내가 폐부를 깊게 파고들어 우울해진 기분을 띄워주려고 노력했지만 또다시, 으레 찾아든 우울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골수에 깊게 스며든 우울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번잡하게 끼어있는 것을 못견뎌 하면서도 사람과 떨어지면, 특히 마음에 든 사람과 떨어져 있을 때면 순간적으로 우울이 덮쳐와, 과하게는 자살마저도 생각하게 하는 '병'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차분하고 친절해서, 자살따위는 생각 안할 것 같은 인상과 말투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론 그들의 '착각'이었다. 단 한번도 죽음은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으므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비명을 한 번 지르니 그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몸을 다시 일으키자 얼굴에 피가 쏠려 붉어진 것이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자야지, 내일도 출근하려면. 내일 출근해서는 상사에게 받을 서류를 정리해서 중복된 것은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하고, 업체에 전화도 해야하고, 같이 일하는 다른 사무실 사람에게도 이메일을 써야 하고...해야할 일들을 떠올리면서 가까스로 현실로 돌아온 나는, 씻고 잘 채비를 했다. 마음 가는대로 이렇게 휘둘려서는 종내에 내가 정한 결말마저 맞이할 수 없을거란, 지극히 상상 가능한 예감이 들었다.
"지난번에 준 영화 티켓, 썼어? 예전에 선생님이 말한 영화, 오늘 개봉하길래 생각이 나서." "아차...못 썼어요. 오늘 보러 가야겠네...모처럼 챙겨주신건데." 주섬주섬 퇴근 채비를 하는 중에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아마 집에 그대로 들어가서 씻고 잠들었을 지도 몰랐다. 모처럼 2인 티켓인데, 누구를 불러볼까? 고민하다가 문득 옆집 총각 생각이 났다. 일전에 신세를 진 일도 있고 해서(얕은 계단에서 미끄러지려는 걸 잡아줬다) 보답 차, 그리고 조금 흥미도 생겼기 때문에 작업 거는 듯한 그런 느낌도 있었다. 예전에도 정신을 단단히 놓고 호감이 있던 남자애의 번호를 갈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에라, 모르겠다!' 뭐 그런 생각으로 곧장 옆집의 벨을 눌렀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언제나의 그 얼굴이 문틈으로 쏙,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예요?" "어, 음...그게...영화, 같이 보러 가실래요?" "언제요?" "오늘이요." 거기까지 말하자 그가 피식, 웃음을 보이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웃어서 미안해요, 신선한 어프로치라서. 원래 내일이나 모레, 그렇게 부르지 않아요? 그래서 웃겼어요. 음..."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뭔가 확인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마감도 많이 남았고, 기분 전환도 될테니까 가죠. 일단 집에 들어가 있어요. 이십분 쯤 걸릴 것 같으니까. 막 퇴근한 것 같기도 하고?" 그의 말대로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는데 화장이 지워져 얼굴이 완전 엉망이었다. 나름 신경을 쓴다고 하고 다니는데 역시 이렇게 보니 나는 여느 평범한 사람 A나 다름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저런 남자에게 어프로치따윌 해도 되는걸까? 화장을 조금 손보면서 자괴감이 드는 와중에 이십분이 훌쩍 지난 모양인지 그가 문을 두드렸다. 구두를 신고 현관을 나서니 멀끔한 차림의 소설가가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평소에는 안 쓰는 뿔테안경을 써서 자세히 들여다 보니 렌즈는 없는 것이었다. "뭘 그렇게 유심히 봐요? 그렇게 보면 좀 부끄러운데." "안경 쓴건 처음 봐서요. 신기해서 그만." "아하. 뭐...가끔 기분전환으로 쓰고 그래요. 그럼, 갈까요? 모처럼 외출이라 좀 두근거리네요." "출판사 미팅도 안나가신다면서." 사실 요즘 꽤 자주 마주치면서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름은 최인호. 직업이 무려 소설가였다. 내가 연재분까지 챙겨 보고 있는(단행본도 구매한) 소설 망우초의 작가가 이 남자였다. 처음에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솔직히 소설가를 꽤 오래 꿈꿨던 나로서는 지근거리에 그런 작가가 산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에게 왠지 모르게 호의적이었고. 장난으로 그런다손 치더라도 태도가 자연스러워서 위화감은 별로 들질 않았다. 그는 주로 집안에서 연재분을 작성하거나 잡지에 칼럼을 싣는 형식으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데,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전에 완결이 난 소설 '4월의 거짓말'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랑 단 둘이 영화를 보러 가게 되다니. "그거야 뭐 이메일로 다 해결하잖아요. 소혜 씨도 업무는 거의 이메일로 처리한다고 하면서." "그거랑 이거랑 조금 다르지 않아요? 이메일 생각하니까 조금 우울해 졌어요." "또 직장에서 무슨 일 있었구나." "입사한지 꽤 된 것 같은데도 아직 초보란 생각이 자꾸 들어요." "실수는 누구나 해요. 오래 산 사람도 실수를 잘 하는데 하물며 젊은 사람은. 너무 신경쓰지 마요. 그런거 계속 염두에 두면 다음 일도 다 망치니까." 이런저런 잡담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샌가 영화관 초입이었다. 뭘 보고싶냐고 물어보니 오늘 개봉한다는, 때마침 내가 보고싶어 했던 영화를 골라주었다. 신나서 표를 들고 돌아오니 그가 팝콘과 맥주를 들고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네요." "그거야, 며칠 전부터 이 영화 이야기만 했잖아요." "아차." "은근히 허당이라니까. 에드워드 레스터의 신작 나온다고 엄청 들떠서 나한테 그 배우에 대해 온갖 에피소드들을 늘어놨잖아요. 그러니까 잊을 수 있을리가. 음료는 그냥 맥주 골랐어요. 영화 볼때 적당히 한 잔 하면 몰입도 되고 좋더라구요. 영화 보는거 좋아한다고 했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이제 곧 상영 시간이라며 나를 데리고 상영관에 들어섰다. 평일인데다, 그렇게 사람이 많이 오는 상영관이 아니었음에도 의외로 관객이 좀 있는 편이었다. 가장 뒷자리 커플 석을 고른 것은 인호의 초이스였다. 왠지 이 사람이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일단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광고를 아주 흥미롭게 보는 그 얼굴의 옆선을 물끄러미 보다가 요란한 사운드에 나도 모르게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창 영화관에 자주 다닐 때는 매번 그 광고가 그거라서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큰 스크린으로 보는 광고는 꽤 볼만했다. 이번에 나온 에드워드 레스터의 신작은, 그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미스 다아시'의 이미지에서 완전히 탈피한 액션 영화였다. 그 고전적인 미남 얼굴이 영화에 매끄럽게 녹아든 것이 감독의 능력을 칭찬하고 싶을 정도였다. 영화에 몰입해서 보느라(맥주의 기운도 한몫 했다) 나는 옆에 인호가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있었다. 이따금 그가 나를 흘끗 쳐다본다는 것은 눈치챘지만 너무 신나게 보고 있어서 신기해서 그런거려니, 했다. 영화가 끝나고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상영관을 나서는데, 잠깐 힘이 빠져 휘청이는 나를 인호가 붙잡아 주었다. "재미있었나봐요." "저런거 좋아하거든요. 피는 안나는데 딱딱 동작이 이어지는 액션 영화. 그냥 가볍게,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고." "그래도 봤다는 영화 들어보면 마냥 그런 쪽은 아니던데."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하니 오후 아홉 시였다. 차를 마시고 들어가자고 제안할까 하다가 금방 관두었다. 복도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오니 공허함이 두 배로 느껴졌다. 사람들을 잔뜩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늘 드는 그 기분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금방 잠이 들까 싶어서, 중고서점에서 사 두고 손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아던 원서를 집어들었다. 내가 한창 빅토리아 시대에 매료되어 있을 때 사둔 책 중 하나였다. 그 때는 자료 검색한답시고 오래된 책까지 도서관에서 찾아내고 그랬는데 그게 다 '옛날'일이었다. 꽤나 즐거웠던 것 같은데 이제 추억에 지나지 않다니. 그리 생각하니 입안에 쓴맛이 감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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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이도스코프는 이 친구에게 줍니다. 인트로, 문득 생각나서 끄적이다 보니 꽤 길어졌어요.
퇴근하고 돌아오면 늘 나를 기다리는 이는 차가운 방, 불 꺼진 뒤의 어두움 뿐이었다. 혼자 살아온지 제법 시간이 되어서 익숙해질거라 생각은 가끔 들었지만 역시, 혼자인게 싫기도 하고 좋기도 했다. 행복한게 아니라 일신의 편안함을 그저 행복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살아남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을 나왔고, 저축할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에 다니고,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 월세 40, 거기다 공과금이며 식비까지 하면 실상 모을 수 있는 금액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서른 즈음에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나로서는, 장례비를 모으는 것이나 다름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이승을 방황하던 그 두 해동안 나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때쯤이었다. 서른이 되는 생일 날 자살하자고 결심했던 것은. 취업이 되자마자 부모님은 기뻐할 새도 없이 동시에 사고로 돌아가셨고, 온갖 복잡다단한 장례의 절차를 치르고 나서 나는 정말로 홀로 남겨졌다. 그때도 웃었던 것 같다. 힘들 때면 웃어버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정말 그 때조차 변태같은 기질을 감추지 못하고 웃었다. 누군가 곁에서 말리고 나서야 울음이 터졌다. 나는 언제나 나를 감추고 있었고, 나에게 조차 솔직하지 못했다. 나 자신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 무서웠다. 한동안 방황을 끝내고 다시 직장에 마음을 붙이기 시작하면서는 내 다정했던 부모님도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연애는 그만둔지 육 년이나 되어가서 이제 누구를 만나도 즐겁지 않을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크리스마스에 모종의 사건을 겪고 나서는 한동안 사람을 새로 만나기는 힘들 거라고 스스로에게 단정짓고 있었다. 나에게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애초에 혼자가 편안했고, 혼자가 두려웠고--뭐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좀처럼 솔직이란 단어를 생태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문을 닫고 들어서면 내 키에 딱 맞는 침대 하나와, 미닫이문으로 분리된 부엌, 그리고 작은 화장실이 전부인 내 공간이 보였다. 한눈에 들어오는 이 작은 공간. 저녁시간이 조금 지나긴 했지만 그래도 스타킹을 벗어버리고 털썩 주저앉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이 기꺼웠다. 저녁에는 자주 파스타를 삶아 먹었다. 펜네, 아니면 마카로니. 엔젤스 헤어같은 면 종류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매콤한 아라비아따 소스를 붓고도 타바스코 소스까지 듬뿍 쳐서 먹으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탄산수를 만들고, 작은 프로젝터를 켜서 영화 볼 준비를 하면 행복했다. 예전에는 책을 자주 읽었지만 어느샌가 영화를 즐겨 보게 되었다. 머릿속에 상상을 펼치는데 한계가 느껴진 것은 나이가 들면서 글자가 더는 잘 읽히지 않게된 것과 연관이 있기는 할 터였다. 나는 그게 난독증이 와서 그런 것으로만 생각했다. 헤드셋을 푹 눌러쓰고 영화 속에 빠져들다 보면 금방 시간이 흐르곤 했다. 그리고 그 영화가 끝낼 때의 허무함이란. 여운을 남기기도 하고, 그냥 즐겁기도 했지만 역시 혼자 보는건 그닥 즐겁지 않았다. 영화란 혼자 보는거야-그런 생각을 하려고 해도 역시 치고박고 싸우는 류의 영화는 같이 깔깔대고 웃어야 즐거웠다. 그렇다면 나는 그 즐거움을 반쯤 놓치고 있는 것이나 다름아니었다. 하지만 뭐 어때. 원래 혼자인걸 새삼스레 외롭다고 외쳐봐야 들어줄 이도 같이 해줄 이도 없었다. 나는 사방이 철벽이었다. 어릴 때의 기억이라던가, 여러 기억이 습관적으로 굳어져 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오면 기겁을 하며 거부하면서도 다가오기를 바라곤 했다. 모순이란걸 자각 하고서도 바꿀 수 없는 까닭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살다 갈래, 뭐 그런 대답이 겨우 튀어나와서 나를 잡아챘다. 시계를 다시 확인하니 밤이었다. 게임을 하다 잘까, 아니면 그냥? 고민하다가 결국 침대에 드러누웠다. 영화는 늘 새로운게 나오거나 옛날 영화를 알게 되어서 그 목록이 끊이질 않았다. 집에서 보는 일 아니면 개봉관에 직접 찾아가느라 이래저래 돈은 돈대로 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 편이 좋았다. 뭐랄까, 외로움이 덜어진다고 해야하나. 그랬기 때문에 바깥에서 문 두들기는 소리, 아니 정확히는 내 집의 철제 문을 요란하게 두들기는 소리라는걸 알아차리고는 소름끼치게 놀랐다. 인터폰으로 확인할 수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곧장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끌려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소동이 좀 잠잠해지고는 이번에는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옆집인데요, 괜찮으신지 확인 좀 하려고." 조심스레 문을 열어주자 아주 편안한 차림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는데, 복도에는 달리 아무도 없어 조금 전의 소동이 꿈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는 피곤한 듯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키는 나보다 훨씬 컸고, 무엇보다 목소리가 내 기준에서 너무 근사해서 순간 호의적으로 대하고 말았다. 아니, 애초에 나는 타인에 대해 호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호의적으로 대하는게 디폴트 값이었다. "아...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어디서 그런게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괜찮다니 다행이네요." "괜히 시끄럽게 해 드린게 아닌지는 모르겠-." "아니, 뭐, 그쪽 탓도 아니니까. 그렇게 신경쓰지 마세요. 단지 하던 일이 방해받아서 나와본 것 뿐이라서. 요즘은 조심하지 않으면...이상한 놈들이 워낙 많은 세상이라. 옆집인데 얼굴 처음 보네요, 생각해보니까. 여튼...들어가세요." "아."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나를 안으로 살짝 밀더니 조심스레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대체 뭐지? 예전에 어디선가 본 듯한...그러니까, 얼굴이나 목소리 따위가 아니라 '기운'?
'그러니까 대답해 주세요. 그 사람, 좋은 사람이예요? 행복해요?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안그러면 나 또...' 나에겐 꿈이 찾아오지 않은 날이 드물었다. 그렇게 하다 깨어나면 번번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그 꿈자락을 붙잡아보려 노력하다 포기하고 나서는, 훨씬 홀가분해졌다. 그래도 가끔은 붙잡고 싶었다. 내 현실이 될 수 없는 꿈을 보는 날에는. 베갯잇이 촉촉이 젖어 당황스러울 적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고, 인연도 없이 홀로 살아가는 몇 년 동안은 그런 일이 드물었다. 그리움의 대상이 된 그 사람이 꿈에 나와도 그저 아련한 그리움만 남아있을 따름. 하여, 옛 연인을 꿈에서 보는 일은 나에게 생경한 일이나 다름아니었다. 몸을 일으켜 보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제 조금 바람이 차갑다 싶었는데 금방 목이 부어오른 모양이었다. 프로폴리스 스프레이를 입 안에 뿌린 뒤에는 조금 가라앉아서 마음이 놓였다. 편도, 라던가-목이 부으면 몸에 열이 올라와서 짜증이 난 적이 여러번이었다. 출근 준비는 항상 비슷했다. 어제 감고 잔 머리를 정리하고 하나로 묶은 뒤, 블라우스와 바지 아니면 치마를 입고 화장을 했다. 차림은 가볍게, 마음도 가볍게-그런 마음으로 다니는 셈이었다. 사무실에선 언제나 만나는 그 사람들만 보니까 화장을 제대로 할 필요가 사실 없기는 했어도, 나를 곱게 꾸미는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나서는 공들여서 하고 나가는 날이 늘어났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나서려는데 옆집에서 문 여는 소리가 같이 들렸다. 어제의 그 사람이었다. 그는 신문을 집기 위해 잠깐 나온 모양으로, 눈이 마주친 내가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목례로 받아주었다. 분명 검회색 가디건에 면바지를 입고 있는 단순한 차림새였는데 의외로 잘 어울려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집에서 직장까지는 걸어서 딱 15분. 아주 추운 겨울에는 한 구간 뿐인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기도 했지만 슬그미 날이 풀리고 있어서 요즈음엔 걸어가는 편이 나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면서 신열이 가라앉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이 아주 그만이었다. 특히 자고 일어나서 소위 '재부팅'시간이 좀 걸리는 나는 이 시간이 아주 귀중했다. 항상 직장에 일찍 출근해서 커피 아니면 따끈한 차를 마시면서 업무를 준비하는 것도 익숙했고. 그렇게 똑똑한 것도 아니고, 계산이 빠른 것도 아닌 내가 여기서 오래 버틸 수 있던 것은 꽤나 무던한 성격 덕분이었다.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법을 배워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덕분에 반쯤은 사람 아닌 것 같단 소리를 듣는데 이제는 그마저 즐기고 있었다. 행복한 것인지, 그저 일신의 평안함에 젖은 것인지 알고는 있는 거냐고 어디선가 일침 비슷하게 듣긴 했는데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일 만큼 나는, 의외로 마음이 너그럽지는 않았다. 빨리 처리되지 않는 업무에 소리를 질러가며 난리를 쳐도 적어도 여기선 내게 화 낼 사람이 없었다. 작은 규모의 사무실이었고,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친근함을 연기한 것이 주효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예단하는 것만 같아 누군가는 분명 한 소리 할 만한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그저 그 생각은 잘 포장된 미소로 내비칠 뿐이라 누구도 내 진의는 모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같이 일을 하고, 각자 일을 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 차를 함께 마시다 막힌 업무를 처리할 아이디어를 얻고, 사외이사에게 짜증을 내기도 하면서 즐거운 하루가 지나갔다. 솔직히 이렇게 즐거운데 다니면서 돈을 벌어도 되나 의아할 지경이었다. 동료들에게는 스트레스인 일도 나는 즐거운 일-그래서 나는 회사에서 두루 사이코로 여겨지고 있었다-이나 다름아니었다. 고통이나 슬픔을 목도한 그 상황에서마저 웃음이 나오는 나니까, 이상할게 하나도 없었다. 퇴근길에는 걸음이 평소보다는 빨라진다. 속으로는 복잡하다. 무얼 해야 하나. 주어진 저녁 시간에 뭘 해야 그래도 하루가 덜 허무할까 생각을 한다. 금요일이라도 되면 토요일, 일요일 대체 뭘 하고 놀까 고민한다. 생각과 고민의 연속인데, 쉬는 날이라고 좀처럼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한 나는 새벽부터 깨어나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만지거나 다시 이불로 파고들거나 하면서 오전을 아예 죽여버릴 적도 있었다. 오늘은 대출해 온 책을 마저 읽고, 내일은 미술 전시회라도 다녀올까. 지갑 사정은 언제나 빠듯했지만 꼭 가보고 싶던 전시전이 다음주쯤 끝난다는 사실을 알아서 조바심이 났다. 귀가, 그리고 리드미컬한 컴퓨터 부팅 후 옷을 대강 집어던져 보니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옷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어서 세탁물이라곤 양말이나 속옷, 셔츠나 이따금의 스타킹 정도가 전부였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자판을 두드리다 문득 생각해 보니 어제의 일로 옆집 총각에게 조금이라도 사례를 해야 한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다시 바깥으로 나섰다. 혼자 사는 사람이니 적당히 1인용 레토르트라던가, 쌀? 그런 것을 사다 주면 체면치레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솔직히는, 생각보다 잘생겨서 호기심이 생겼다. 이상한 사람만 아니아면, 친해져도 나쁠 것 없다는 막연한 그런 생각이. 그리고 언제나 내 생각이나 추측은 틀렸기 때문에 나는 그저 보답의 의미만을 품은 채 몇 가지 물건을 사서 봉투에 담아 돌아왔다. 곧장 옆집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졸린 눈의 총각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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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사는 곳에 외풍이 들어온다...추워.
마리안느 아가씨의 등판?
남방 대공령, 수도 슈플리테. 대공저 안뜰에서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던 명헌대공은 고대하던 이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시비들은 따르게 하지도 않고 버선발로 대문을 향해 뛰어갔다. 막 마차에서 내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마리안느는 그런 그를 보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오라버니였다. 마리안느 페트라르카는 명헌대공의 여동생이었고, 또한 그 유명한 화헌대공비(다른 차원에서 왔다고 알려진)의 딸이었다. 그녀가 사교계에 데뷔하는 날, 관례대로라면 공작부인 쯤 되는 이가 마리안느를 에스코트 해서 황후에게 보여야 했지만 그 관례를 무시하고 명헌대공이 직접 마리안느를 데리고 간 일은 꽤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는 사건이었다. 그 일을 두고 심지어 그 윈스턴 공작이 뭐라 한 소리 하기까지 했지만, 페트라르카 가문의 대공에게 그런 것은 별로 상관할 바 못되었다. 그렇게 귀애하던 여동생이 막 시즌을 마치자, 명헌대공은 득달같이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슈플리테의 본가에 데리고 온 것이었다. 사실 사교시즌에 나가서 첫 시즌에 제 짝을 만나면 가장 좋은 일이었고, 그 일을 명헌대공도 거들어주고는 싶었지만 영지의 일 때문에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터라 - 얄궂게도 그는 마리안느가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온 것이, 솔직히 기뻤다. "잘 지내셨어요? 오라버니. 리프레에서는 소식을 듣기 힘들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내정에 힘쓰느라 명헌대공은 거창하게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일을 벌일 수도 없다 보니 황실에서 이름이 나올 건수가 거의 없었다. 화헌대공이 그 부인과의 연애사 때문에 거창하게 리프레에서 이름이 오르내린 것과는 대조적인 일이었다. 명헌대공은 마리안느를 그녀의 별채로 데려다 주며, 화사한 아가씨가 즐겁게 전해주는 리프레의 온갖 소식들을 들었다. "다들 오라버니를 궁금해 하세요. 나이도 있으신데, 성혼조차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이유가 분명 저일거라고 하시면서요." 어릴 때부터 실감하긴 했지만, 명헌의 아버지 화헌대공은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오페라로, 연극으로 만들어져 공연되는 그 화려한 연애를 하면서도 한 번도 남방의 수호라는 의무는 놓지 않았기로.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소장을 검토하고, 관료들과 회의를 하고 지방을 시찰하는데만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니 연애라던가, 부인들 들인다던가 하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순간은 마리안느와 함께 차를 마시는 시간 뿐이었고. 자그맣게 투정을 부리는 마리안느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손가락을 튕겨 벽난로에 불을 넣어준 명헌대공은 직접 차를 끓이겠다는 동생을 만류하고 자기가 그 일을 도맡았다. 원행에 지쳐서 혹여나 뜨거운 물을 쏟을까 저어된다는 이유였다. 결국 마리안느는 대공이 내어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집에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리안느는 리프레에 있는 페트라르카 대공가 소유의 타운하우스에 줄곧 머무르긴 했지만, 그래도 어릴 적의 추억이 있는 이 곳이 가장 편안했다. 스콜라에서 수학할 때도 방학이면 다른 별장으로 오라는 친구들의 부탁을 거절하고 언제나 돌아와 오빠와 시간을 보낸 그녀였다. 사실 그녀의 이복 오빠만큼이나 근사한 신사가 없기도 했다. 브라더 콤플렉스일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하던 마리안느는 안도감에 잠겨 차를 마시는 그를 보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기실 그녀보다 더 관심의 대상이었던 사람은, 명헌대공 쪽이었다. 마리안느에 대해서는, 친오빠가 지나칠 정도로 귀애한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였기 때문에 - 게다가 대공가와 혼맥으로 이어진다는 일은 시기와 기회가 일치해야 가능한 일이어서 더더욱 그 쪽에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아리따운 아가씨 여럿이 마리안느와 친하게 지내려고 애썼지만, 적어도 명헌대공의 여동생 되는 이가 보기에 대공비가 될만한, 즉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한 자질을 가진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여러 귀족 가문들이 후계만 낳아놓고 양육에는 신경을 기울이지 않아 벌어진 참담한 사건들을 듣기도 해서 마리안느부터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윈스턴 공가의 수장 나오 윈스턴을, 말이다. 30대 후반에 접어든 그는 이미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공작부인이었던 레이첼의 일로 꽤 오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처제였던 헤일리가 그의 아이를 낳다가 아이와 함께 사망하고 나서는 누구도 그와는 결혼말을 꺼내려 들지도 않았다. 아무리 잘난 귀족이라 해도 딸 가진 아버지 마음은 다 똑같은 모양이었다. 윈스턴 공작 역시 한동안 잠잠하다가는, 무슨 생각에선지 - 혹은 우연이었는지 마리안느가 사교계 데뷔를 하는 시즌에 이따금 연회에 참석하곤 했다. 마주친 것이 몇 번은 되는지라 우연히 그를 떠올린 마리안느가 몸서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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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곧 바람에 실려 날아갈 것처럼 가볍고 자유로워서, 나로서는 너를 붙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 그렇게 묻자 책장에 손을 뻗던 그녀가 스르륵 멈추었다. 이윽고 희미해진 그녀의 모습은 금방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치 모래가 바람에 날리듯 은빛으로 반짝이면서.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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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이어지는 것 같은데 각자 다른 이야기들. 나오를 사실 이렇게 굴리면 안된다는 생각은 있는데 선한 얼굴 주제에 퇴폐적이고 이상한 사람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헌팅턴은 예전의 그 헌팅턴.
내 기억이 허용하는 가장 깊은 곳, 가장 오래된 장면은 칼을 들고 있는 한 소년의 것이었다. 부모님이 마차 사고로 죽어, 그는 세상에 남겨진 나의 단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커다란 대저택에 단 둘이 남겨진 어린 아이들을 노리는 일은, 노련한 도둑이라면 생각해 봄직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방문을 받았다. 돌봐주는 이 없이 떨며 다락방에 숨어있던 우리에게 다가온 남루한 차림의 사내는 망설임 없이 우리에게 칼을 휘둘렀다. 내가 먼저 칼에 깊숙히 찔렸다. 피부를 파고드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검이 빠져나가는 끔찍한 기분도. 칼과 동시에 내 몸에서 뜨거운 액체가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오빠가 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그 이후로 내 의식은 잠시 끊겼고,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때 내 앞에는 - 그 소년이 서 있었다.
아, 그래. 그는 나를 찌른 것이 아니라 날 공격한 그 도적을 공격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날 이후로 저택을 처분해 작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후로는 모든것이 평화로웠다. 넘치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부족함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금이 은행에 맡겨져 있었고, 우리는 그 돈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갑자기 마을에 나타난 부모 없는 남매를 두고도 마을 사람들은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물론, 생활비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을 법도 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이후로도 우리 남매를 노리고 집에 침입한 강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었다.
어릴 때 입은 자상으로 인해 나는 걸음이 느렸고, 겁이 많았다. 오빠는 언제나 걸음이 빨랐지만, 함께 걸어가 주지는 않아도 나와의 거리가 멀어지면 항상 멈추어서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는 내 오빠였고, 내 보호자이며 또한 나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 다음의 기억은, 동네 어른들에게 멱살을 잡혀 집 현관에서 내팽겨쳐지는 오빠였다. 어린 애들이 살아갈 만한 돈이 대체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지 그 사람들은 알고 싶어했다. 오빠가 입을 열지 않자 그들은 기어이 길다란 막대기와 낫들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공포에 질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오빠가 어떻게든 나를 감싸려고 기어왔지만 덩치 큰 청년이 오빠의 등을 발로 밟으면서 소름끼치게 웃었다. 오빠가 고통의 비명을 속으로 삼키는 동안, 인자한 미소를 줄곧 보여주었던 촌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다그쳤다. 대체 이 집을 유지할 수 있는 재산이 너희같은 꼬맹이들 어디에서 나오는 거냐고. 그의 거친 손이 내 턱을 짚는 순간, 다 죽어가던 오빠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 앞에 섰다. 절대로 이 아이는 건드리지 말라고. 왜 당신같은 족속들을 믿었는지 후회가 된다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장정 여럿의 힘을 겨우 소년이 견뎌낼 리가 없었다. 비웃음 가득한 얼굴의 촌장이 지시하자 오빠는 사지를 결박당한 채 끌려나갔고, 내 목에는 기어이 단검이 들이밀어졌다. 익숙한, 차가운 감촉이었다.
바깥에서 오빠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피냄새가 났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촌장이 단검을 치우더니 느릿하게 걸어나갔다. 내가 달아나지 못함을 알고 있기에 한 행동이었다. 곧이어 돌아온 촌장의 손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뒤이어 돌아온 사내들은 오빠의 몸을 들쳐매고 있었다. 피가 흥건히 그들을 적시고 있었다. 그 이후론 아주 신속했다. 오빠의 몸에는 여러차례의 자상이 남겨졌고, 나는 의자에 결박당했다. 바닥에 뿌려진 기름, 그리고 그 위에 던져진 성냥이 곧이어 집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익숙한 죽음의 기운이 나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눈을 감았다. 성당의 젊은 신부가 언젠가 말했던, 어떤 기사의 기도문이 떠올랐다.
내게 남은 것이 없사오니, 이제 나를 거두어 주소서.
크리스털링-헤이븐 교구에 오고나서는 딱히 신경쓰일 만한 커다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성 리프레의 번잡함에 질린 내게 이 교구의 보조사제 역할은 그야말로 적임이었다. 매일 몸이 힘든 것을 제하면 마음은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선하고 친절했으며, 공기는 맑고 언제나 싱그러운 바람이 나를 반겨주었다. 저녁이 되면 기도를 올리고 나서도 해야할 일들이 많았다. 이따금 교구에 들르는 나의 친구, 에스테반 경과 밤 산책 겸 방범을 하는 것은 그 중 하나였다. 평소에는 약초를 정리하거나 성서를 필사하며 묵상을 하곤 했다. 낮의 일로 번잡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시간이 바로 저녁이었다. 에스테반 경과 함께 나서는 밤 산책도 고즈넉해서 좋았다. 낮과 밤의 크리스털링-헤이븐 교구는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정경을 보여주어 나를 즐겁게 했다.
평소라면 매캐한 연기는 내 코 끝에 잡혀서는 안되었다. 그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갑자기 미간을 좁힌 에스테반 경이 뭐라 물어볼 틈도 없이 한 방향으로 내달렸다. 매일 훈련을 거듭하는 그와 달리 일개 신부에 불과한 내가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을리 만무했다. 그가 뛰어간 방향으로 줄곧 뛰어갈 수 있던 것은, 그 시선의 끝에 불타는 집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굳게 잠긴 문을 발로 걷어찬 에스테반 경이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 나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열기와 그걸 압도하는 피냄새 때문에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묵주를 들고 기도를 올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바로 이 집이, 어린 남매 단 둘이 사는 집이라는걸 기억해낸 나는 나도 모르게 에스테반 경을 따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집 안은 처참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작은 가구들이 모조리 부수어져 있었다. 그 때, 기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에스테반 경이 소녀를 껴안고 뛰어나왔다. 그는 소녀를 안은 채 내 목덜미까지 낚아채서는 집 바깥으로 뛰어나갔고, 우리가 현관을 나서는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집이 폭삭 주저앉았다.
목에 상처를 입은 소녀를 살핀 에스테반 경은, 나에게 아이를 맡기더니 검을 뽑아들고 집 주변을 살피기 위해 나섰다. 나는 정신을 잃은 이 소녀를 알고 있었다. 부모 없이 단 둘이서만 살던, 유리디스였다. 검을 든 에스테반 경이 돌아오기 전에 아이가 깨어났으면 싶었다. 그런 소원을 신께서 들어주기라도 하셨는지, 그녀가 움찔하더니 눈을 떴다. 나를 알아보기도 전에 그녀는 오빠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나는 그녀의 오빠인 세드릭을 발견하지 못했다. 설마.
에스테반 경의 조사 덕분에, 유리디스 남매의 집을 불태우고 그 오빠를 죽인 범인은 금방 밝혀졌다. 모두가 마을 촌장과 그 청년들의 범행을 믿지 못했고 때문에 에스테반 경은 황실 측에서 수사관을 보내주어 보강 수사를 한 뒤에야 자신의 조사가 정확함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범죄자들은 처벌받았다 해도 남겨진 사람은 여전히 고통 속에 살아있었다. 작고 여린 소녀의 처분을 묻는 물음이, 유리디스의 보호처인 성당에 하루가 멀다하고 날아들기 시작했다. 고아원을 따로 운영할 만한 여력이 없는 성당이었고, 소녀들을 위해 수녀원에서 봉사하는 고아원들이 제법 있었으므로 그 쪽으로 유리디스를 보낼 것이 분명하다는 이야기들이 돌아다녔다. 하지만 주임인 제임스 신부는 그러한 결정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유리디스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는 소수의 인물 중 하나였다. 조사를 위해 유리디스에 대해 알아본 에스테반 경 역시 그들 중 하나였지만, 그는 친구인 내게 사실을 함구함으로서 나의 호기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 와중에 법황청에서는 유리디스를 교구에서 보호하라는 통보를 해 왔다. 당황스러웠다. 나에게는 황실에서 검서관으로 일하는 여동생이 있었지만 그 아이는 혼자 훌륭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어린 여자아이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주임신부는 교구의 일로 너무나도 바빴기 때문에, 어린 아이를 양육하는 일은 결국 나의 몫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법황청의 결정을 내게 전달해 준 에스테반 경은 잘 해보라고 격려만 한 뒤 곧장 크리스털링-헤이븐을 떠났고, 나는 어색함을 가득 안고 유리디스의 법적인 보호자가 되었다.
한편, 나오 윈스턴 공작이 크리스털링-헤이븐에 당도했다. 찾고있던 사람의 행방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도 정작 움직여야 할 명완군 디안케트가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하루 낮밤을 꼬박 걸려 공작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른 새벽이었다. 가게를 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쓴 훤칠한 키의 사내가 설마 그 나오 윈스턴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방해받지 않고 성당의 생활관에 도착한 공작이 문을 두드렸고, 이미 새벽 기도를 올린 뒤였던 깔끔한 얼굴의 알로이스 신부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그저 신도겠거니, 생각해서 문을 열어주었지만 막상 후드를 벗은 이가 황실의 실세 중 하나인 윈스턴 공작인 것을 알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나오 윈스턴은 유창한 인사치레 없이, 곧장 유리디스를 데려오도록 요구했다. 알로이스로서는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그의 명령을 거부할 방도가 없었다. 아직 잠이 덜 깬 유리디스는 알로이스 신부의 목소리에 겨우 눈만을 뜬 채 생활관의 부엌에 발을 디뎠다. 나오 윈스턴 공작의 얼굴을 보는 순간 유리디스는 달아나야 한다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으나 알로이스 신부가 어깨를 붙잡고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유리디스를 데리러 왔다는 짧은 말을 남긴 윈스턴 공작은, 알로이스가 유리디스의 몇 없는 소지품을 챙겨주자 마자 그녀를 말 위에 태워서 순식간에 떠났다. 뒤늦게 생활관으로 돌아온 제임스 신부가 그 사실을 알고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알로이스는 그제서야 제임스 신부가 고해성사를 하듯 털어놓은 유리디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유리디스 헌팅턴이었다. 헌팅턴 가문이라면. 알로이스는 곧장 나오 윈스턴 공작의 추문을 떠올렸다. 윈스턴 공작부인의 수양동생인 헤일리 헌팅턴이 공작의 아이를 낳다 죽었다는 소식을 말이다. 헌팅턴...헌팅턴. 그 성씨를 다시금 떠올린 그는 헌팅턴 가문이 이 세계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신수의 직계 혈통이란 사실을 기억해 냈다. 너무나 당황해 그 자리에 굳어 선 알로이스에게 한 줄의 소식이 닿기 전까지는 그저 그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래도 황실 기사다 보니 에스테반 경을 제거하는 데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법이었다. 하지만 명완군은 아무렇지 않게 그 일을 해냈다. 실은 윈스턴 공작이 유리디스를 데려오는 동안 디안케트는 유리디스의 '정체'를 알아낸 모든 이들을 제거하는 중이었다. 첫 번째 타자는 에스테반 경이었다. 비번 중 사고사로 꾸미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으나 정작 본인의 저항이 너무 거세서 번거로움을 겪어야만 했던 것 뿐이다. 비록 뒷방 늙은이 신세를 자처하고 있다고는 해도 그는 여전히 강력했고, 황실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다만 법황청 소속인, 크리스털링-헤이븐 교구의 알로이스 신부와 제임스 신부에게 손을 대기는 힘들었다. 때문에 에스테반 경을 죽인 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였다. 에스테반 경은 황제에게 바친 자신의 맹세를 어기고 법황청에 곧장 유리디스를 찾았다는 사실을 보고했으니 사실상 이적 행위로 처분했다고 해도 항명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법황청과 대놓고 다투는 일은 피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게다가 헌팅턴 가문을 지키는 일은 대대로 황족의 의무였다. 테런스 헌팅턴이 뿌린 씨를 수습하고 다니는 것에 질린 나오는 그예 테런스의 딸 중 하나인 헤일리 헌팅턴과의 추문으로, 그 대단한 용족 후계자와 대판 싸움을 벌였다. 디안케트 대신 나오가 크리스털링-헤이븐에 간 것도 그 때의 일에 대한 사죄의 의미가 컸다. 물론 헤일리와의 일을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나오는 몰래 다녀오는 편을 택한 것이지만.
법황청에 헌팅턴을 빼앗길 수야 없지. 과거, 황태자 시기의 카를과 법황청 추기경의 사생아 로벨리아의 약혼 사건을 생각해 보면 법황청이 드러내 놓고 움직일 만한 일은 없어야 마땅했지만 최근들어 법황청이 수면 아래에서 벌이는 움직임이 디안케트의 눈에 적잖이 거슬리고 있었다. 에스테반 경이 법황에게 곧장 보고를 한 일도, 그리고 그들이 헌팅턴을 찾아다녔다는 사실도 명완군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알로이스 신부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명완군과 윈스턴 공을 조심하라'는 편지를 쓰겠지. 하지만 디안케트에게는 아주 고전적인 수가 남아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딱딱한 껍데기를 두른 여린 감성의 여자에게 어떻게 하면 파고들 수 있는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틴 슈라이버는 아끼는 여동생의 자진 이후 상심에 빠져있든 디안케트를 가엾게 여기고 있었지만, 곧 '사용되고 버려질' 알로이스의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디안케트는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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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연몽으로 태그를 정하고 나서, 이렇게 글이 확 나올적이 있어 가만이 돌아켜 보면 예전에 써둔 설정을 지금의 필체로 서술한 것이더라. 설정의 중요성이랄까.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윈스턴 공가의 방에는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초상이 놓여 있었다. 정작 아버지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내게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공작위를 물려받은 이후로 집안 자산을 점검하면서야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미하일 윈스턴 대공은 힘의 흐름과 어머니의 집착 때문에 엘리자베타 여제와 결혼한 경우지만, 그 이전에 약혼녀가 있으리란 것은 당연한 추론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바로 미하일 윈스턴 대공이 평생을 두고 짝사랑했던, 그래서 내 어머니에 의해 죽어야먄 했던 귀족 아가씨였다. 아마 엘리자베타 여제도 이 초상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을 듯 하지만, 손에 넣은 남편의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마저 조각내는 것이 두려워 손대지 않았을 터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어머니도 꽤 가여운 사람이었다. 물론 펜리르 백작을 정부로 두고 아버지의 면전에서 욕보인 일은 잘못되었지만, 그 원인이 그녀의 지독한 짝사랑과 집착임을 생각해 보면 보상 받은 듯 하면서도 그런게 아니니까 더욱 그러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가져온 수많은 죽음을 가벼이 여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신수 에드워드는 황제 노릇을 집어치우고 카를에게 제위를 넘겨준 이후로 가끔 윈스턴 공가에 나타나 나에게 술을 내어 놓으라고 땡깡을 부리곤 했는데, 술이 적당히 들어가면 옛날 이야기를 해 주어 그것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다. 주로 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엘리자베타 여제는 나를 낳고 며칠 지나지 않아 탑에서 투신자살했고, 아버지는 핏덩이인 나를 거두어 키우면서도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과거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그 모든걸 지켜본 이 빌어먹을 신수가 내게는 유일한 단서이자 과거로의 열쇠였던 셈이다. 본인도 에드워드 황제로서 살아간 시간이 그렇게 귀찮지만은 않았는지 물어보면 이것저것 술술 말해주기야 했다. 레티시아 윈터게이트. 아버지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한, 그리고 비극적으로 헤어져야만 했던 사랑. 어쩌면 나의 어머니가 되었을 수도 있었던 인물.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라, 그 당시에 일어났던 차원의 균열로 인해 벌어진 -- 기이한 만남이 아버지를 더욱 그녀와의 기억에 얽매이게 했다. 지금은 초상화가 걸려있을 뿐인 그 방에 들어갔던 어린 날의 미하일 윈스턴은, 아름다운 처녀를 그 곳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는 묘한 미소를 남긴 그녀를 그가 다시 만난 것은, 루트비히 황제가 정기적으로 열던 갓 데뷔한 숙녀들을 위한 무도회에서였다. 평소와 다름없이 지루하게 창가에 서 있던 미하일에게 다가온 여인은 그가 어릴 때, 저택의 기묘한 방에서 만났던 바로 그 숙녀였다. 그때의 레티시아는 미하일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엇갈린 시간 덕분일지, 그렇게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이내 연인으로, 그리고 약혼자로 그들을 이끌었다. 약혼 후 삼개월 뒤를 결혼식 날로 정하고, 사랑에 푹 빠져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던 미하일에게 비수를 꽂은 사람이 바로...나의 어머니 엘리자베타 라인하르트였다. 엘리자베타는 자신의 오빠이자 나의 백부가 되는 루트비히 황제에게 꾸준히, 약효가 더디게 나타나는 독을 먹이고 있었다. 그녀의 조카인 메르디스 황녀를 익사시킬 때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끈기있게 진행되는 '작업'이었다. 엘리자베타는 루트비히 황제에게 '미하일 윈스턴 공작을 부군으로 달라'고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이후로 그를 손에 넣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고 있었다. 짝사랑 하던 상대가 자신은 조금도 돌아봐 주질 않고(물론 미하일 윈스턴에게 엘리자베타는 친구의 여동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곧 결혼까지 한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자베타는 조급해졌다. 그녀는 몹시도 레티시아를 죽이고 싶어했다. 분노와 질투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루트비히 황제의 배려로 열린 미하일의 결혼식 일주일 전의 파티에서 레티시아는 엘리자베타의 시녀가 가져다 준 와인을 마시고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다시는 깨어나지 않은 채 며칠 만에 사망했다. 당연히 의심은 엘리자베타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 일이 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루트비히 황제가 병환으로 쓰러져 죽었고 엘리자베타 여제의 부군으로 미하일 윈스턴을 지정함으로서 엘리자베타는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 비극적인 무도회 이후로 나의 아버지는 엘리자베타 여제를 절대 친구의 여동생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온전한 부인으로 봐 주었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내 어머니의 유약한 내면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레티시아와 루트비히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한게 분명한 그녀를 용서할 수 없던 사람이었다. 무관심으로 일관한 덕분에 여제는 즉위 후 몇 년동안이나 후사가 없었고 결국 그 일이 원인 중 하나가 되어 루트비히의 친아들인 에드워드가 돌아오도록 만들었다. 에드워드는 미하일과 엘리자베타의 결혼 서약을 무효로 돌려놨다. 자신이 궁으로 돌아오는데 큰 도움을 준 미하일을 '보호'하기 위한 처사였다. 그리고 엘리자베타는 여제의 작위를 박탈당한 채 침묵의 탑에 감금당했다. 그 때부터였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내 어머니에게 결국 연민의 손길을 뻗기 시작했던 것은. 시기를 잘 생각해 보면 내가 잉태된 것은, 미하일 윈스턴 대공이 미리 여제에게 경고를 해 주기 위해 검은 상복을 입고 황궁에 혈혈단신으로 다시 나타났을 때였다(그 직전의 아버지는 사고로 위장된 습격 현장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결국 그 연민의 결실로 태어난 사람은 나였지만, 엘리자베타의 심리는 더욱 심연으로 가라앉는 중이었다. 겨우 창 하나, 문 하나만이 있는 작은 방에 갇힌 그녀를 무엇이 압박했는지는, 그녀만이 알 터였다.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과의 아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어머니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에드워드 황제가 면담 차 다녀간 직후, 그에게서 엘리자베타를 만났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미하일 대공이 불안감에 휩싸여 침묵의 탑을 단번에 올라갔던 그 순간, 내 어머니는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어릴 때 나의 아버지는 내게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다 크고 나서야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과거와 통증이 가라앉아 있었는지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때가 되고 나서는 그가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은 건강하다가도 심리적인 불안 요소가 극대화 되면 약도 듣지 않는 생병이 들어앉아 순식간에 목숨을 덜어내게 된다고들 하던데 미하일 윈스턴이 딱 그런 경우였다. 그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그 방의 문을 열어보았다. 작게 인기척이 들렸다. 얼마 전에 내가 크리스털링-헤이븐에서 데려온 유리디스 헌팅턴이었다. 테런스 헌팅턴은 그 호색한 기질을 버리지 못해 많은 자녀들을 세상에 남겨 두었다. 본인 말로는 헌팅턴의 씨를 보존하고 후세에 전할 의무라고 거창하게 포장하긴 했지만, 나로서는 귀찮은 일이 몇 해에 한번은 늘어나는 셈이었다. 헤일리의 일은 여전히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내가 하지 않으려고 했건만 디안케트가 극구 사양했기 때문에 결국 그의 또다른 딸을 내가 보호하게 되는 꼴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유리디스가 나를 경계하는 것도 상당히 성가셨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를 낚아채다 방에 가두는 일은, 정말 하고싶지 않았다. 내가 레이첼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코웃음이 나오는 일이지만 말이다. 나는 결국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문을 조용히 닫아준 뒤 내 서재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법황청이 이 저택에 함부로 들어올 수는 없으니 아이가 바깥에 무단으로 나가는 일만 벌어지지 않으면 내게도 귀찮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란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아니면 디안케트를 설득해서 어떻게든 아이를 그의 별궁으로 들여보내는 수도 있었다. 그 교구에 있던 슈라이버 신부의 여동생이 디안케트의 별궁에 주기적으로 드나든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 쪽으로 어떻게든 일을 엮어봄직 했다. 슈라이버 신부라면 유리디스를, 게다가 내가 데려간 일을 상당히 염려할테니까. 기왕 생각난 김에 지금 가볼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곧장 명완군의 별궁으로 향했다. 슬며시 구름이 밀려와 밝은 보름달을 가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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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친구와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그 사람이 여행을 마치고 귀국했으며, 곧 복직 준비를 한다는 것도 들었다. 새삼스레 그런걸 전달할 필요는 없다고 타박을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그는 크리스마스 때 만나서 며칠 만에 '내가 차이고 만' 그런 비참한 결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떠올리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다. 그냥 그는 내 사람이 아니었다. 차인 당일 친구와 만나서 술 마시는 일로 모든 감정 정리는 손쉽게 끝났다. 먼저 다가온 주제에 먼저 도망간 버릇없는 애새끼. 내가 그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정리였다. 업무 도중에는 휴대전화를 거의 들여다 보지 않기 때문에 하마터면 놓칠 뻔 했지만, 부재중 번호와 함께 남긴 문자가 나의 남은 시간을 뒤흔들어 놓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 사람이었다. 일��에서 기다릴 테니 만나달라는 거였다. 여기에 다다르자 나는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너는 내게 진심이지 않았으므로, 나도 네게 진심을 내보일 필요는 없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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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의 성격도 참 특이하네요...
Music with ‘TOUCH’, Shinhwa.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살면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레이첼, 나의 부인이었던 그녀는 그저 적당한 시기에 내 눈에 걸려든 여자에 불과했다. 그녀의 씨다른 동생 헤일리 헌팅턴은, 헌팅턴이기 때문에 귀애했을 뿐이었다. 여제의 아들이지만 나는 살아남기 위해 황제의 계승권을 포기했고, 그로 인해 내게 주어진 애매한 직위와 신력 그리고 아버지의 막강한 재산과 공작이란 명성은 나를 오만하게 만들었다. 아니, 솔직히 디안케트가 먼저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엄밀히 혈통을 따지자면 그 녀석은 내 아버지의 숨겨진 쌍둥이 남동생이 성녀 요한나와 만나 낳은 아이였으니 내게는 사촌 동생이었으나, 황제 에드워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황적에 입적시켰고 나의 오촌으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오 윈스턴 공작은 침묵의 탑에서 자살한 전대 황제 엘리자베타 여제의 외아들이고, 또한 윈스턴 공가의 정당한 계승자였다. 그리고 내게, 살아남고 싶다면 계승권을 포기하라고 말해준 에드워드 황제는, 엘리자베타 여제의 오빠인 루트비히 황제의 아들이었다. 이 복잡한 가계는, 일견 문제가 많을 것 같았지만 내가 계승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실제로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나이 터울이 얼마 나지 않는 카를 황태자와, 명완군 디안케트 그리고 나는 친구처럼 늘 항상 어울려 다녔고 스콜라에서도 함께 수학했다. 다만 디안케트가 쓸데없이 잔소리를 하는 일만 제외하면 말이다. 제국을 이끄느라 여념이 없는 카를 황태자를 대신해, 명완군은 언제나 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쌍둥이로 태어나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에서 활동하며 -- 윈스턴 공가만을 위해 움직이던 자기 친부, 앤드류 윈스턴의 영향이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내 행실에 문제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피곤해 보이지만 성격 더러워 보이는 눈매를 가진 디안케트에 비해 나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얻을 수 있는 명석하고 선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사회적으로 문제를 야기하는 행동을 일삼는건 언제나 내 쪽이었다. 하지만 뭐 상관 없지 않은가. 나는 그저 내가 원하는대로 살고싶다고 생각했을 따름이었다. 대를 이을 아들을 두고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당주의 의무를 충족하려고 했을 뿐이고, 잠시 눈에 들어온 용족 아이를 가엾게 여겨 보살펴 주었을 뿐이었다. 레이첼이 기괴한 방법으로 자살을 했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그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내게서 사라져 주었다. 망자의 소리가 들리는 나였지만 이미 귀를 닫아버린지 오래였다. 그런 망령의 음성에 귀기울이는 이는 북방 대공이면 충분했다. 손 닿는 곳에 저택 하나는 단번에 사고도 남을 보석들이 널려있었고, 미소 한 번에 품에 안겨들 여자들이 있었고, 제국을 건설하는데 기여한 개국 공신 가문의 당주인데 뭔가 더 필요한게 달리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항상 지루했다. 남들 다 원하는 것, 갈망하는 것이 태어날 때부터 곁에 있었고 원하지 않아도 따라붙어왔다. 스콜라에서의 삶이 잠시 즐거웠던 것은, 내가 노력해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졸업은 애저녁에 일찍 해버렸고, 카를이나 명완군처럼 국정을 돌본다거나 하는 것도 내게는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끝없이 파티에 참석하고, 여러 귀족을 만나고, 연구 따위를 후원해주는 일에 마음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지루한 그 일들을 당연하다는 듯이 견뎌야 하는 일에 신물이 나면 가끔 도망을 가기도 했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아. 그래. 이런다고 내가 누군가에게 지은 죄들이 용서받을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도처에 널린 것이, 흔해빠진 연애담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다 결국에는 행복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가. 소설은 그래서 아예 손에 대질 않았다. 내게 아직도 접근하는 어린 아가씨들도 그런 이야기를 믿고서, 내가 손을 내밀어 준다면 자기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릴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그런 기대를 산산히 부수는 것이 즐거웠지만 레이첼과 헤일리가 죽은 이후로는 그마저도 그만두었다. 찢겨진 옷, 흰 피부에 난 상처, 그리고 흐느끼는 울음 끝에는 뭔가 금전이 걸린 협상이 항상 들어왔다.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에서 오는 짜릿함도 물론 존재했지만 나는 그들의 탐욕에 어울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엔, 마음 둘 곳 하나 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이는 것이 나의 평생이 될 터였다. 누군가 멈추어 주기나 할까. 자기 오빠를 독살했던 나의 어머니 엘리자베타 여제처럼, 아니면 자신의 고모를 탑에서 자살하게 만든 나의 친척 에드워드 황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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