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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랑 타입 글 샘플: 유이님
유이님-아르카나 패밀리아 파체
16000자
수레는 역방향으로 굴러간다
By. 카논(@do_u_darling)
눈꺼풀은 무겁기만 했다. 분명 자신은 눈을 뜨고 있을 텐데, 닫힌 것처럼 시야가 흐리멍덩하다. 일어나고 싶었지만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지고, 제 몸을 들어올릴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대로 드러누운 채 흐릿한 시선 너머로 보이는 것은 새하얀 천장뿐이다.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언젠가 보았던 것만 같은 풍경. 겨우 흔해빠진 천장 하나였지만, 어째서인지 파체는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왜 여기에 있는지. 왜 아무런 일도 못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기시감의 정체를 알 수 있다면, 분명 제가 처한 상황 역시 금방 파악할 수 있을 텐데, 애석하게도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은 마비가 된 것만 같았다.
“……! ……. ……!”
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물이 잔뜩 들어간 것처럼 그 소리 역시 제 시야만큼이나 흐릿하다. 흐릿하던 시야에 예상치 못한 상대가 나타난다. 진한 분홍빛 머리칼.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자세하게는 몰랐지만 그 색깔로, 그녀가 누구인지를 단번에 알아차린다. 그녀는 그의 시야를 가리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고 있다. 막힌 귀에서부터 이따금씩 새어 들어와 들리는 건 제 이름이 고작이다. 아, 그녀가, 에리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구나. 파체는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닫는다.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느릿느릿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시간을 들여 눈을 깜빡인 보람은 있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해진 광경에, 파체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에리카는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늘 당당하게 앞을 ��다보고 있던, 그 커다랗고 예쁜 푸른 눈은 눈물에 촉촉히 젖어 평소보다 더욱 청연하다. 그녀의 턱을 타고 내린 눈물은 이내 제 얼굴 위에 흩어진다. 미적지근하지만 따뜻해서,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평안해졌다. 하지만 그런 느낌보다 먼저 깨달은 건, 왜 그녀가 울고 있을까? 라는 문장이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손을 들어 그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다. 에리카는 웃는 게 제일 잘 어울려, 라고 말하며 울고 있는 그녀를 보듬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그의 입술은 꼭 돌이라도 매달아놓은 것마냥 무거워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힘 자체가 들어가지 않았다. 제 몸이 더 이상 제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이려고 하는 그의 의지와는 상반되게 안간힘을 써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 그렇구나. 그제야 그는 자신의 상황을 깨닫는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천천히 내쉬던 숨이 누군가가 제 목을 쥐어 잡은 것처럼 순식간에 막혀온다. 반쯤 열려있던 눈꺼풀이 더욱 무거워진다. 시야가 차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파체는 깨닫는다. 이게 죽음의 순간이라는 걸.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제가 지금 받고 있다는 걸.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네가 곁에 있어줘서 기뻤다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파체는 눈을 감았다. 멍해지는 의식 속에서 절규하듯 제 이름을 외치는 에리카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은 것만 같았다.
“……!”
풀썩, 이불이 침대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가쁜 숨을 헉헉대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주변을 둘러본다. 창 밖으로 보이는 희미한 풍경을 보아 날은 아직 어둡다. 저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 듯 했다. 제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내고는, 재빠르게 파체는 두 손으로 제 몸을 이곳 저곳 눌러본다. 자신의 몸을 만지는 감각은 아직 남아있고, 손 너머로 몸이 비치지도 않는다. 모든 게 꿈이었구나. 그 사실을 깨닫자 온 몸에서 힘이 쫙 풀려 그대로, 다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리기만 해서, 무척이나 불쾌했다.
최근 들어 이런 꿈을 너무 많이 꾼 �� 같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주시하며 파체는 생각했다. 죽어가는 자기 자신과,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에리카. 에리카는 눈물을 흘리고 있고, 저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만다. 애석하기 짝이 없는 꿈이다. 제 앞에서 울고 있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눈물 하나 닦아주지 못하다니. 파체는 자신의 한심함에 짙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꿈을 꾸고 있는 이유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에리카를 향한 자신의 ���정을 깨닫고 나서부터였으니까. 사실 당시에는 이 꿈에 대해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느꼈다. 자신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그냥 제 짝사랑이 만들어낸 망상의 산물이라고 코웃음을 치면서 잊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그녀 역시 저를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거다. 에리카가 제게 보이는 행동들, 말들, 태도들. 그 모든 것이 파체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느끼게 했다. 그런 탓에, 파체는 지금의 꿈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녀가 훗날 정말로, 죽어가는 저를 위해 울어주는 그 날이 찾아올까 두려워졌다.
“…차라리 꿈이라도 꾸지 않으면 좋을 텐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 말에는 깊은 후회와 원망이 담겨있다. 이 꿈을 꾸고 난 이후 에리카를 볼 낯이 없어졌다. 정말 그렇게 되는 날이 찾아오는 걸 막기 위해서, 파체는 그녀를 피하고 다녔던 것이다. 스스로 거리를 두고 다니면 그녀도, 자신도 서로에 대한 감정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려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마치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지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 와서 고민해봤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파체는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며, 제가 꾼 꿈을 잊기 위해 애쓴다. 어차피 그래 봤자 내일 밤에 같은 꿈을 꿔서 잊지 못하게 될 것을 잘 알면서도, 그는 잠깐이라도 그 순간을 잊고 싶어했다. 그러면 적어도 그 순간 동안만이라도, 자신이 에리카에게 느끼고 있는 죄책감과 두려움을 잊을 수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잠을 청하는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형상은 짓궂게도, 환하게 웃고 있는 에리카의 모습이었다.
그 날 점심, 파체는 카페 레스토랑의 오픈 테이블에 앉아서 파스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홀로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테이블에는 파스타, 그라탕, 라자냐, 샐러드, 티라미수, 스테이크 등 각종 음식들로 한 가득 푸짐하다. 혼자 먹기에는 무리인 것 같았지만 파체는 두 볼에 음식을 잔뜩 집어넣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한 접시 한 접시 비워나가고 있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커다란 파스타 접시를 끝낸 파체가 드디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라자냐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파체? 여기 있었구나. 점심 먹고 있었어?”
라자냐를 크게 한 입 입에 가득 채워 넣었던 파체는 그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라 그만 음식을 씹지도 않고 목으로 넘겨버리고 말았다. 컥컥대며 연거푸 기침을 해댄다. 커다란 라자냐 조각은 그의 목에 걸려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눈물이 핑 돌고, 숨이 턱 막힌다.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긴 머리의 소녀는 그가 앉아있는 쪽으로 재빠르게 다가와 파체의 등을 가볍게 툭툭 쳐주었다.
“괘, 괜찮아?”
파체는 음식들 접시에 밀려 위태롭게 테이블 끝에 걸려있던 물잔을 집어 들어 벌컥벌컥 들이키고 나서야, 고갤 끄덕이며 저를 걱정해주는 그 말에 대답을 해줄 수가 있었다.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그에게 잔소리하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많이 먹으니까 자꾸 목에 걸리고 하는 거지. 좀 천천히 먹어.”
“아하하, 미안해, 에리카.”
멋쩍게 웃으면서, 소녀에게 대답하자 파체에게 에리카, 라고 불린 그 소녀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고였던 눈물을 쓱쓱 닦아내고, 안경을 고쳐 쓴 파체는 소녀와 마주하고 앉아있었다. 에리카는 턱을 괴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그 푸른 눈빛에는 걱정의 빛이 어려 있었기에, 파체는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해맑고 밝은 웃음이다.
“에리카는 무슨 일이야? 오늘은 일이 없는 날이야?”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하면서 파체는 다시 먹다 만 라자냐에 달려들었다. 에리카는 그런 그의 말에 곧바로 대답은 하지 않고서 잠자코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딘가 고민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다. 파체는 곁눈질로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먹고 있던 라자냐를 꿀꺽 넘기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배고파?”
“대체 어떻게 하면 내가 배고파 보이는 거야?”
“아니, 내가 먹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으니까. 아, 알겠다. 에리카 돈이 없는 거구나! 괜찮아. 오늘은 내가 사줄게. 먹고 싶은 거 시켜도 돼. 아니면 내가 시킨 것 중에서 하나 먹을래?”
아니라고 딱 잡아떼며 대체 지금 자기가 어떻게 보이길래 배가 고파 보이는 거냐고 투덜거리는 에리카의 얼굴에서 방금 전의 굳은 표정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파체는 다시 씨익 웃어 보였다. 그 얼굴에 그가 했던 말이 농담이었다는 걸 알았는지 에리카는 작게 웃는다. 역시 에리카는 웃는 얼굴이 제일 잘 어울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불연히 어제 꿨던 꿈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아니, 그 꿈에 대해서 지금 생각해서는 안 된다. 속으로 고갤 절레절레 내저으며 파체는 헛기침을 했다.
“무슨 일이야, 그럼?”
“…다름이 아니라, 파체.”
에리카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요즘,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고민?”
생각지도 못한 말이 그녀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와 파체는 앵무새 마냥 그녀의 말을 반복한다. 에리카는 고갤 끄덕였다.
“파체의 행동이 평소와 같아 보이지 않아서.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그 말에 파체는 아무런 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평소’와 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저를 피하고 다니는 파체의 행동을, 눈치 빠른 에리카라면 분명 알아차렸으리라. 하기야 파체 본인도 너무 피하고 다니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설마, 제일 들키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들키고 말 줄이야. 그 충격에 그만 말을 잃고 가만히 있자니, 에리카의 의문에 가득 찬 눈빛이 제게 꽂히는 걸 알아차린다. 이래서는 더욱 의심을 살 것이다. 파체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얼른 입을 열었다.
“아, 그…….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그래.”
“꿈자리?”
“악몽, 이라고 해야 하나. 아하하, 별로 좋은 내용은 아니라서.”
대충 둘러대는 이유라서 그런 걸까, 그 내용이 참으로 실없었다. 에리카는 더 얘기해보라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파체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파체는 자신을 독촉하는 것 같은 에리카의 시선을 피해 눈을 테이블로 돌려버렸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하나 같이 맛 좋아 보이는 음식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갑자기 오늘 먹는 양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더 이상, 입에 뭔가를 넣고 싶다고 느끼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도 파체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에리카는 결국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도 괜찮다면, 상담해줄게. 그 꿈에 대해서.”
에리카의 걱정 어린 눈빛이, 시선을 피하고 힐끔힐끔 저를 바라보는 파체에게 고정된다. 파체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제 꿈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꿈 때문에 자신이, 그녀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도 물론, 함묵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파체는 억지로 입가를 양 옆으로 주욱 당기며 밝은 목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사실, 그, 라자냐가 가득한 수레가 물에 빠지는 꿈을 꾸지 뭐야.”
“…뭐?”
터무니 없는 말에 에리카가 얼이 빠진 듯 파체를 멍하니 바라본다. 파체는 하하하, 하고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라자냐가 가득한 수레를 타고 가고 있는데, 그게 물에 전부 빠져서 먹지 못하는 거야!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지 모르겠어. 기왕 꿈에서 그렇게 많은 라자냐를 손에 넣었는데 먹지 못한다니! 에리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말이 거짓말임을 에리카는 금방 알아차리리라. 에리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파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녀에게 질문 공세를 받을 것만 같았다. 이 상황에서 얼른 빠져나가야만 했다. 파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에리카는 반쯤 입을 벌린 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단테가 할말이 있다고 얼른 들어오라고 했었지. 잊고 있었다. 에리카를 보니까 생각났어. 고마워, 에리카!”
“파체, 잠깐만!”
일방적으로 내뱉고서는 얼른 자리를 피해 그대로 달려나간다. 등 뒤에서 당황한 에리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파체는 뒤를 살짝 돌아보고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환한 웃음이 가득하던 얼굴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설 때마다 점점 어두워진다. 에리카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자기가 식사하던 레스토랑에서부터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하염없이 달리던 파체의 발은 우뚝 멈춰 선다. 에리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파체는 고갤 절레절레 내저었다. 왜냐면, 어쩔 수 없는 걸. 속으로 중얼거렸다. 뛰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자신이 뛰었기 때문일 거라고, 애써 자기 자신에게 암시한다.
그러나 그런 파체의 머릿속을 방해하는 건, 에리카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걱정스러운 표정과 눈빛이다. 거기에 ���긴 건 분명, 그가 그녀에게 안고 있는 애정이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지 않으면 보여주지 않는 에리카의 얼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저는 어찌나 기쁜 마음이 들었던가? 그녀 역시 저를 좋아해주고 있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고, 그 짧은 순간에 파체는 생각하고 만 것이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설령 에리카와 자신이 정말 서로를 좋아하여, 이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의 감정은 결코 마지막까지 열매 맺지 못하리라. 그의 사랑은 다 익기도 전에 숙명이라는 칼에 베여 땅바닥에 나뒹굴 것이다. 꿈에서 본 풍경이 눈에 아른거렸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파체’라는 존재는 오랜 시간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저와 이어진다고 한들, 에리카가 제 꿈에서처럼 울게 된다면 자신의 감정을 죽이는 게 제일 좋았다. 그냥, 단순히 그의 짝사랑으로 끝나버리면 그만이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파체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에리카가 더 이상 자신에게 더 큰 애정을 품지 못하게, 자신을 더 좋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억지로 피해야만 했다. 그게 자신의 의중(意中)과 다르더라도, 그게 분명 에리카를 위한 일일 테니까. 자신은 어차피 금방 세상을 떠나야 하는 몸이니, 제가 마음 아파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세상에 남을, 에리카를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죽이지 않으면.
“하아…….”
언제나 밝은 그답지 않은 한숨이 마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파체는 천천히,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천천히 나아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방에서 나온 파체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본다. 그의 눈동자가 살피고 있는 것은 복도를 드나드는 이들의 얼굴이다. 그가 찾고 있던 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사실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체념이나 후회 등의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안도라는 감정이었다. 꼭 누군가가 제 뒤를 따라오는 것을 살피기라도 하듯, 힐끔힐끔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옮기면서 불안하기 짝이 없게 재빠르게 발을 들어올렸다.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파체는 긴장감이 풀린 얼굴로 가슴을 쓸어 내린다. 에리카를 만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지난 점심 시간에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이제 와서 후회한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평소처럼 행동했다면 이렇게까지 큰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리라. 거기에 괜한 걱정까지 끼쳐버렸다. 최대한 에리카와 더 이상 엮이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이래서는 여태까지 파체 자신이 노력해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금 깊게 내쉰 한숨은 금방 시끄러운 바깥의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묵직한 기분을 전환하려는 듯 쭈욱 길게 기지개를 켜고서 안경을 고쳐 쓴다. 간부라는 그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은 여느 때와 같이 씩씩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무거워 보였다. 성의 복도 유리창 너머로 파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리카는 먼 발치에서도 분명하게 느꼈다. 역시,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파체가 별의별 이유를 들면서 저를 피하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자신에 대한 문제가 있음이 확실한데, 도무지 예상이 가지 않으니 골치만 아플 뿐이었다. 자기가 그에게 뭔가를 잘못했던가 싶어 며칠을 고민해보았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어제 펠리치타를 만나서 그녀에게 상담까지 하지 않았던가? 펠리치타는 에리카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지만 그녀 역시 이렇다 할 결론은 제시해주지 못했다.
당연하다. 지금 파체의 상태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파체 자신일 테니까. 그 사실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에리카에게 있어서 파체는 자신의 소중한 이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파체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면 제 일처럼 생각하고 해결해주고 싶었고, 그 문제라는 게 에리카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와의 사이가 멀어지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파체가 저를 온전히 믿어주지 못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자 어딘가 모르게 씁쓸해졌다. 한 번 든 불안한 생각은 그녀의 머리를 갉아먹고, 모든 사고를 부정적으로만 이끌어간다. 에리카는 점점 멀어지는 파체의 뒷모습을 오도카니 바라보고 있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기까지 온다면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펠리치타와 상담 뒤에 떠올린 ‘그 일’을 시도해보기로 에리카는 마음 먹었다. 그 행위에 대한 결과가 두려웠기에, 결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차라리 답답한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이제 나도 슬슬 일을 하러 가야겠다. 그렇게 내뱉은 에리카는 짧은 한숨을 내뱉고는 창가에서 멀어졌다.
몇 시간 뒤, 파체는 순찰을 끝마치고는 점심을 어디에서 먹을지, 거리를 거닐면서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가게의 주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따가운 눈초리가 그의 얼굴에 꽂혔지만 배가 고픈 파체에게 그런 것쯤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역시 라자냐를 먹고 싶다는 생각에 자주 가는 파스타 집에 가기로 목표를 정하고 발을 옮기는데, 그의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숙한 목소리에 파체는 빙긋 미소를 지은 채 몸을 돌렸다.
“아, 아가씨! 우연이네. 같이 점심 먹을래?”
언제나와 같이 활발한 그의 목소리와는 달리 펠리치타의 얼굴은 무척 진지했다. 파체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는 펠리치타의 말에 파체는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파체는 볼을 긁적거리더니 펠리치타의 얼굴을 살피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그러면 서서 말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점심 먹으면서 얘기할까?”
펠리치타는 파체의 말에 고갤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한 마디를 그에게 던졌다. 그 말에 파체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설렘에 의한 것이 아닌, 두려움과 불안감에서 비롯되는 두근거림이다. 설마 그녀가 그렇게까지 저를 신경 쓰고 있었을지는 몰랐다. 펠리치타는 차마 아무 말도 못 꺼내고 있는 파체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다시 덧붙인다. 둘이 무슨 일이 있었다면 잘 해결하라는 그 말에는 같은 패밀리라는 것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담겨있었다. 그렇게 제가 할 말을 다 한 펠리치타는 자신에게는 일이 있다며 부디 에리카와 얘기를 잘 해보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등을 돌아 사라져버렸다. 파체는 멍하니 터벅터벅 걸어가는 펠리치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음을 지었다. 천천히 입을 열어, 펠리치타가 했던 말을 되풀이한다.
“설마 내가 피한다고 해서 에리카가 아가씨에게 상담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비록 에리카를 필사적으로 피하고는 있었으나 나름 제 행동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할 생각이었고, 이에 대해 다른 이들도 별 말을 안 했을 터였다. 어쩌면, 에리카는 당사자이기 때문에 금방 알아차린 것일까? 파체는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 손으로 제 목을 쓸어 올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곤란하게 하는 건 지금 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다. 저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에리카도 제게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파체는 피식,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자신이 에리카를 정말 좋아하는 건 맞는 모양이라고, 새삼스럽게 자각하고 만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를 채워오는 건 자괴감이었다. 에리카에게 결국 폐를 끼치고 말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엷은 미소를 짓고 있던 입술은 이내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일자로 돌아온다.
에리카는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유도 없이 그녀를 피하는 제 행동에 환멸을 했을까? 저를 싫어하게 된 걸까? 하기야,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요구하는 에리카의 말에 항상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도망치던 자신이다. 그런 이에 대한 신뢰도, 호감도 다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누구든지, 이 상황에 있어서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유를 듣지 못하는 이상 한 번 떨어진 신뢰는 다시 찾기 힘들 것이다. 차라리 그게 낫다. 파체는 그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두근거리던 가슴은 이제 천천히, 제 맥박을 찾아가고 있었다.
차라리 에리카가 파체 자신에 대해 환멸을 하고 나면, 제게 가지고 있던 모든 감정이 전부 무(無)로 돌아갈 게 분명했다. 그럼 그걸로 그의 목표는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에리카와 더 이상 친해지지 않는다는, 그녀가 저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미래 따위는 존재할 여부조차 남기지 않을 테니까. 잘된 일이다. 몇 번이고 곱씹으며 애써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했지만, 파체는 마음 한 켠이 꼬챙이로 찌르듯 아파오는 감각을 느낀다. 슬펐다. 바닥을 향해 떨구고 있는 시선에 담긴 색깔은 한없이 짙은 절망의 빛깔이다. 제가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부당하는 미래만이 남은 것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건 제가 선택한 길.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다. 파체는 한숨을 내쉬면서 발길을 돌렸다. 더 이상 식욕이 나지 않았다.
다음날, 그 고통은 더욱 그의 가슴을 찔러왔다. 책에서나 읽어봤던, 심장을 찌르는 것만 같은 고통이 어떤 느낌인지, 파체는 그 날에야 알아낸 듯 했다. 원인은 제가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에리카의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뀌고 만 게 주요인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저를 붙잡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거나 꿈에 대해서 걱정을 해주던 에리카였는데, 오늘은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만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은 전혀 하지도 않고, 오로지 업무에 대한 대화만을 하고서 금방 그의 곁을 떠났다. 그 변화는 파체는 물론이요 다른 동료들까지 깜짝 놀라게 했다. 모두가 파체에게 두 ���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왔지만 파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제가 뭔가 잘못한 모양이라며 에리카에게 사과하겠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치고서 그 상황을 빠져나왔다. 물론 에리카를 따로 만날 생각은 없었다. 그럴 낯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패밀리 내부에 문제를 일으키는 건 좋지 않았다. 막 복도로 나서는 에리카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한 것도 그런 이유다. 에리카는 성실하고 똑똑한 아이니까, 분명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으리라.
솔직히 말해서,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그의 예상대로 에리카는 파체에게 질린 게 분명했다. 제대로 된 대답 하나 하지 않고 빙빙 돌며 도망치는 그를, 포기하기로 한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품게 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활발하고 밝은 에리카가 저렇게 무뚝뚝하게 저를 대할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어제부터 느끼던 고통은 파체를 점점 침식해왔다. 에리카가 ‘정말로’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게,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제가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사람인데. 꼭 무언가가 막힌 것마냥 답답하기만 했다. 그 사실이 무척이나 서글펐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생각해온 결과라고 하지만, 막상 제 눈으로 직접 보고 나면 겪는 충격과 마음 시린 감정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법이다.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가 가슴을 움켜쥔다. 두근두근 뛰고 있는 심장을 쥐어뜯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슬픈 감정도 사라지고 말리라. 다른 동료들의 뒤를 따라 걸어나갈 때에도 파체는 꼭 붙잡은 손을 결코 놓지 않았다. 고갤 푹 숙이고, 자기 자신을 타이르기라도 하듯 속으로 같은 말을 중얼거린다.
에리카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서, 그의 시한부를 알고서 겪는 슬픔에 비하면, 죽는 자기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리카의 슬픔에 비하면, 제가 지금 느끼고 있는 건 별 거 아니다. 꿈처럼 자신이 에리카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이게 최선의 방법이다. 에리카라는 그 아름다운 소녀가 파체라는, 죽은 자의 허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제 인생을 걸어나갈 수 있도록. 그녀에게 슬픈 기억은 남지 않고, 행복하고 기쁜 기억만 추억할 수 있도록. 그녀가 결코 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일이 없도록. 에리카는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에리카는 자신과는 무관하게, 행복하게 살아가야한다. 그게,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파체의 소원이자 바람이었다. 애써 위로하는 제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처량해 보여, 파체는 자괴감을 이겨내기 위해 그저 입술을 꾹 깨물고만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게 고작이었다.
파체는 살금살금 발뒤꿈치를 들고서 복도를 걸어나가고 있었다. 성 안을 비추는 등불들은 은은하게 어두운 밤을 비춘다. 그의 직위상 특별히 누가 무어라고 하지도 않는데도 괜히 발소리를 죽이는 건 지금이 무척이나 늦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섬의 순찰을 끝내고 성으로 돌아오면 늘 배가 고파져서, 오늘도 그는 일이 끝나자마자 제 방으로 가는 발걸음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을 한창 넘긴 부엌에는 사람이 없어 조용하기만 했다. 파체는 고요한 바닥을 걸어나가더니, 고픈 배를 채울 것을 찾아, 마치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찬장에 얹힌 커다란 치즈도, 바구니에 담겨있는 길쭉한 빵도, 탁자 위에 놓인 두꺼운 햄도 모두 그를 유혹한다. 파체가 무엇을 먼저 먹을까, 생각하며 우선 빵으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
누군가의 시선을 강하게 느끼고, 조심스럽게 눈을 돌려 그 쪽을 향한다. 부엌의 꺼진 오븐 옆에 기대어 서있는 사람은, 그가 여태까지 그렇게 피해왔던 그 소녀였다. 팔짱을 낀 채 말없이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 파체의 당황한 표정이 담겼다. 오늘 밤에 에리카는 일정이 없어서 휴식시간이었을 터.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지금 이 시간에 부엌에 나와있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담은 채, 파체는 저도 모르게 놀란 나머지 입을 열고 만다.
“에리카? 무슨 일로 부엌에 와있는 거야?”
파체의 말을 듣자마자 에리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섞인 것은 한심함이나 안도감과 같은 일반적인 감정이 아닌, 굳은 다짐이다.
“파체와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
파체는 그 말에 제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 드디어 이 시간이 찾아왔구나. 제가 그래야만 한다고 분명히 인식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결코 섣불리 스스로 발을 내딛지 못했던 그 상황이 이제 곧 그의 눈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한 번 바닥을 향해 내동댕이쳐진 심장은 마지막 발악을 하기라도 하듯 그 자리에서 두근두근, 쉴새 없이 뛴다. 파체는 숨을 죽였다. 에리카의 입술이 열리는 그 순간을, 조용히 기다린다. 에리카는 망설이듯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달싹였다.
“…파체는, 내가 싫어?”
“…뭐?”
뜻밖의 질문에 파체는 그저 바보 같은 소리를 내는 게 고작이었다. 멍하니, 에리카의 얼굴을 바라본다.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 충격에, 입을 딱 벌린 채 저를 보고 있는 파체의 시선을 여전히 에리카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저번에 임무에서 실패한 것 때문에 그래?”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하는 에리카의 눈은 바닥을 향해 있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조금 떨린다. 꼭, 혼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파체가 무어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에리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게 아니면, 내가 저번에 같이 점심 먹자고 한 걸 거절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라자냐를 사달라고 했는데 피자를 사와서? 혹시 지난 순찰 임무 때 말없이 두고 가서 그래?”
정말 별 것도 아닌 이유들을 계속 꺼내 들어 보인다. 얼마나 특별하게 생각되는 게 없으면, 저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는 걸까. 파체는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어버렸다. 언제나 성실하고 똑 부러지는 에리카가 저렇게까지 필사적인 건 오랜만에 보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에리카의 시선은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위로 향한다. 파체가 유쾌하게 웃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어딘가 풀이 죽은 것 같았던 에리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뭐가 우스운 거야.”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그 한 마디에는 저를 우스워하는 거냐고 따지는 듯한 목소리가 담겨있다. 하지만 파체의 입장에서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도 유쾌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드디어 그 때가 왔노라고, 저와 에리카의 사이를 온전히 단절시킬, 그 절망적인 순간이 찾아왔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정작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나온 말은 그가 자신을 싫어하게 된 ���이냐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파체가 저를 피하는 이유를, 어떻게든 듣고 싶어하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제게 환멸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다행이다. 파체는 에리카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생각했던 상황이 찾아오지 않아서, 그리고 에리카가 저를 싫어하는 게 아니란 걸 확신할 수 있어서, 되려 그와의 사이를 되돌리고 싶어한다는 걸 알게 되어서 나오는 한숨이었다. 에리카는 대답을 하지 않는 파체의 얼굴을 여전히 수상하다는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파체는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앞으로 걸어나간다. 그 발걸음은 마치 호수 위에 뜬 깃털을 밟는 것처럼 가볍기만 했다.
“별 거 아니야.”
부드럽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찰랑이는 진홍빛 머리칼이 그의 손끝에 닿는 그 느낌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라서, 새삼스럽게도 그것이 예쁘다고 생각하게 된다. 파체의 손이 닿자 에리카는 잠자코 입을 다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걱정스러운, 그러나 한편으로는 안도하고 있는 시선에 파체는 또다시 환한 미소를 띄웠다.
“딱히 에리카가 걱정할 만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괜한 생각을 할 필요는 없어.”
“정말로?”
파체의 따뜻한 말에도, 굳이 되묻는 에리카의 목소리는 확신을 바라는 빛을 띠고 있다. 그녀의 강한 눈빛과 목소리에 가슴 한 켠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사실을 말했을 때에, 에리카가 지을 표정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무척이나 저를 걱정해줄, 그 얼굴. 그리고 이윽고 파체의 가슴을 채우는 것은 기쁨이다. 에리카가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주고, 또 걱정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흘러나오는 기쁨. 그것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에서 비롯된 기쁨이라는 것을 파체는 족히 알고 있었다. 에리카도 역시, 그에게 적어도 애정을 지니고는 있다는 걸 깨달았기에,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파체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고는 진실을 찾아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에리카의 시선에서 눈을 애써 돌렸다.
“그냥, 에리카가 나오는 꿈을 꿨을 뿐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에리카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한 것이 불만스러운 듯 다시 한 번 차분한 목소리로 파체에게 말한다.
“그 꿈은, 어떤 내용이었는데?”
목소리에서 약간의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보여서, 파체의 마음 속은 더더욱 복잡해져 가기만 했다. 자신에 대해 나쁜 꿈을 꾼 것은 아닐까, 하고 에리카는 또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에는 꿈 속의 에리카 자신이, 파체에게 어떠한 해를 끼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의 빛이 역력하다. 에리카는 늘 그랬다. 솔직한 나머지 그녀의 행동과 표정, 목소리에서 모든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파체에게 그런 것이 가능했던 건 아니다. 파체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리고만 있자, 에리카가 그에게 대답을 재촉해왔다.
“나에게 말해줘, 파체. 내가 도움이 되어줄 테니까. 꿈 속에서 내가 무슨 일을 했는데?”
에리카가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내뱉은 그 한 마디는 순간 파체의 입술 밖으로 사실을 고할 의지가 타오르게 했다. 그녀의 따뜻한 배려와 마음을, 저도 모르게 받아들일 뻔 했다. 파체는 얼른 고갤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서는 제 꿈의 내용이 그대로 실현될 뿐이다. 그 단 한 마디를 제가 받아버리고 마면, 자신이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왔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충동을 억지로 억누르면서, 파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섣불리 입을 놀려서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길을 걷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에리카의 시선이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살피며 따라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아차리고, 파체는 얼른, 또다시 입가에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우스꽝스러운 내용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
“에리카가 있지, 내가 너무 많이 먹는다고 지하실에다가 나를 가둬버리는 거야. 그게, 정말 무서운 거 있지.”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에리카의 표정이 다시 찌푸려졌다. 지난 점심시간에 꿈에 대해 물어온 에리카의 질문으로부터 도망쳤을 때의 그 때와 같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에리카는 지어 보였다. 파체의 설명에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그녀는 빤히 파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꿰뚫어보는 그 눈빛을 파체는 애써 신경 쓰지 않는 척 했다. 괜히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다시 눈을 내려버렸다. 만일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가는 그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 제 마음을 그대로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진정한 꿈의 내용을 그녀에게 들려줄 것만 같았다. 그의 얼버무리는듯한 태도에 에리카는 언짢은 목소리를 냈다.
“파체, 그건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정말이야. 미안해, 에리카. 그런 꿈을 자꾸 꾸니까 에리카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거 있지. 에리카의 그 무서운 얼굴이 자꾸만 생각나서.”
에리카는 팔짱을 끼고, 여전히 의심쩍은 표정으로 파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에리카가 과연 믿어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파체는 에리카가 저를 추궁해올까 조바심한다. 한참 파체를 바라보던 에리카는 이윽고 눈을 감고 굳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됐어. 괜히 나는 파체에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을 한 줄 알았어. 괜히 걱정했잖아.”
꼭 삐진 듯 샐쭉하게 말하는 말투와는 반대로, 에리카의 얼굴에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따뜻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봐주는 에리카에게서는 눈빛만큼이나 따스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파체가 저를 피하는 이유가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 듯, 한쪽 손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무래도 정말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제 뻔한 거짓말을 저렇게 순진하게도 에리카는 믿어주고 있었다.
그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그녀에게 진실을 전하지 못하고 이런 거짓말을 칠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이 미웠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정해진 운명이 정해주는 길을 걸어야만 한다는 게 슬펐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게 그런 운명 따위가 없었더라면 분명 그런 꿈을 꾸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에리카를 피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다면 그녀가, 저를 위해서 저렇게까지 생각해주고 걱정하면서, 에리카 자신을 책망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숨이 막히듯 가슴만이 먹먹해졌지만 그는 그 답답한 마음을 섣불리 터트릴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운명을 한스럽게 느꼈다. 제게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순응해왔던 그로서는 그런 제 자신이 낯설기 짝이 없었다. 더욱이, 운명을 거스르고자 하는 그 이유가 단 한 명의 소녀 때문이라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파체는 입술을 초조하게 핥았다.
“…에리카가 내게 무슨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내가 에리카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 후 파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말을 내뱉고 있었다. 에리카는 그의 말에 동그랗게 눈을 뜨고서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갤 갸웃거렸다. 아차, 서둘러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이미 내뱉어버린 말은 두 번 다시 주워담을 수 없었다. 파체는 아까처럼, 얼른 환하게 웃었다. 다시 에리카의 얼굴이 어두워질까 싶어,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이다.
“전처럼 에리카가 나 대신에 내 식사비를 내준다던가,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파체, 너는 정말이지…….”
에리카는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곧 어쩔 수 없다고 말하듯 작게 웃었다. 파체는 깊게 안도했다. 그녀의 모습이 이전처럼 돌아왔다는 게 이렇게 기쁘게 느낄 줄은 몰랐다. 파체는 빙긋, 평온한 마음으로 미소를 지었던 입술을 열었다.
“에리카, 그럼 우리 화해한 기념으로 같이 라자냐 먹으러 가자!”
에리카는 활기찬 그 말에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알겠어. 별 게 아니라 정말 다행이야. 파체도 평상시와 같은 거 같고.”
파체는 그 말에 하하, 하고 웃어 젖혔다.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인다. 에리카는 그에게 절레절레, 가볍게 고갤 내저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열었다가 금방 다물어버린다. 무언가를 말하기를 망설이는 듯 했다. 무슨 일인 걸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파체가 에리카에게 물어보려는 찰나, 에리카는 고갤 숙인 채 조심스럽게,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파체가 혹시 나를 싫어할 까봐, 걱정했어.”
파체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분홍빛 머리칼 사이로 드러나는, 살짝 붉어진 귀와, 살며시 떨리는 목소리, 차마 금방 들지 못하고 푹 숙인 고개,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제 쪽을 향해 시선을 올리는 눈동자. 그녀의 모든 것이, 파체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역시 그녀도 제게 호감을, 애정을 품고 있노라고.
제 심장이 쉼 없이 뛰고 있는 건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도 깨달았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그녀가 설령 제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더라도, 결코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설렘과 불안이 뒤섞인 그 기묘한 기분은 파체를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누군가가 심장을 꼭 쥐고 있는 것처럼, 숨을 ���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파체는 선뜻 손을 들었다. 그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그저, 겉뿐인 미소를 띄운 채 하염없이 쓰다듬는다. 에리카는 영문을 모른 채 파체의 손을 그대로 피하지도 않고 서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담긴 의문과 호기심의 빛을 애써 무시한 채, 그저 쓰다듬고 또 쓰다듬는다. 에리카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파체가 제 머리를 전부 쓰다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한 것에 안도했다. 더 이상 물어보지 않는 건, 에리카 나름대로의 배려이리라. 에리카의 그 모습에, 파체는 빙긋 웃었다. 역시 자신은 이 소녀를 지극히 애정하고 있노라고, 이렇게 사모하는 소녀를 밀어내는 것은 역시 제게는 불가능했다고, 파체는 다시금 깨달았다.
에리카와 부엌에서 좀 더 잡담을 나눈 뒤, 파체는 제 방으로 들어섰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오는 건, 자신의 계획이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리라. 에리카에게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어서, 그녀가 제게 주던 마음을 온전히 지워지기를 바랐는데. 고통 받는 건 저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 못했다.
“괜한 짓을 해버렸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등불이 은은하게 비추는 천장을 바라보��서, 자신이 에리카에게 거리를 두고 나서 에리카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걱정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이미 에리카 본인에게도 말했지만, 역시 여러모로 그녀에게 폐를 끼쳐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거였는데. 그랬더라면, 에리카가 그렇게 쓸데없이 저를 위해 감정을 쏟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파체는 옅은 한숨을 다시금 내쉬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내일은 에리카와 맛있는 라자냐를 먹기로 했으니까, 그 때 제대로 사과하도록 하자. 자기 때문에 에리카에게 폐를 끼치고 말았으니까, 미안하다고.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에리카가 자신을 걱정할 만한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설령 거짓이어도, 에리카의 밝은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날 밤, 꼭 정해진 것처럼 파체는 또다시 꿈을 꿨다. 언제나와 같은, 흐리멍덩한 시야에 제 몸이 지긋하게 무겁고, 온 감각이 마비되어버리는 그 꿈이다. 흐릿한 시선을 돌려 옆을 보니 역시, 에리카가 그의 곁에 앉아있었다.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온통 적신다. 파체는 그대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또 에리카가 울고 있다. 커다란 추를 매달아놓은 것처럼 마음은 또 무거워지기만 했다.
어서 이 꿈에서 깨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리카의 저 슬픈 얼굴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에리카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리는 것 같아 파체는 눈을 감아버렸다. 소리 없이 제 이름을 부르고 있을 에리카의 오열하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 피어난다. 아, 일분일초라도 빨리 이 꿈이 끝나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파체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꿈은 좀처럼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꿈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게, 무척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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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랑 타입 글 샘플: 일상이야기님
일상이야기님-명탐정 코난 아카이 슈이치&아무로 토오루+스카치
19000자
화포(火砲)
By. 카논(@do_u_darling)
히메가 문득 그 소리를 듣고서 식사하던 손을 멈춘 건 저녁의 시계 초침이 7시를 막 돌았을 때였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스라한 소리였지만, 그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소리는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기에는 충분했다. 언제나와 같은 여름이다. 매년마다 그녀는 그 작은 소리에 간혹 귀를 기울이곤 했다. 이유는 특별히 없었다. 어쩌면 단순히, 제가 늘 혼자 지내던 고요한 식사 시간에 돌연히 들려왔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만 같이, 희미하기 짝이 없는 그 소리는 그녀에게 있어서 행동을 멈추게 할 정도로 큰 자극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히메, 젓가락이 멈춰 있어.”
그 목소리에 히메는 바짝 정신을 차린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목소리가 난 쪽으로 돌리자, 그 곳에는 집어 든 두부를 제 입으로 털어 넣는 버본의 얼굴이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의아함이 담겨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해하는 눈초리다. 히메는 아주 엷은 미소를 짓고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얼어붙은 것만 같은 제 손가락을 다시 움직인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또 먼 곳에서 그 소리는 울려 퍼진다.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리는 그 화약의 소리. 이번에 폭죽 소리를 알아차린 건 아무래도 히메 뿐만이 아닌 듯 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은 에도카와 불꽃 축제던가.”
운을 먼저 뗀 것은 버본이었다. 그는 눈을 돌려 그저 캄캄하기만 한 창 밖을 바라보았다. 히메도 그의 시선을 따라 그 곳을 응시한다. 잘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먼 곳의 하늘 위에 무언가가 단번에 반짝거리다가 이내 사라진다. 버본은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열었다.
“불꽃 축제라……. 벌써 그런 계절이 되었나.”
“벌써 그런 시간이 되어버렸네. 그러고 보니 나도 마지막으로 축제를 간 게 언제더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버본의 말에 미소시루를 마시던 스카치도 입술을 움직였다. 버본은 여전히 창 밖을 바라보면서 그에게 대꾸한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제대로 가질 못했네. 마침 임무가 있던 날이라 빌딩 너머에서 막바지에 터지는 폭죽을 몇 개 본 게 고작이었지.”
어깨를 으쓱거리고 밤하늘에 고정하고 있던 눈을 다시 제 동료들에게 돌린 버본에게 스카치도 고갤 끄덕였다.
“나는 폭죽은 무슨 신사 주변도 못 갔어. 일이 바쁜 건 어쩔 수 없고 조직에 몸을 담근 이상 그런 평범한 생활이 이어지기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나는 대학교 때 간 게 마지막이던가……. 그 때 사격에서 제일 좋은 상품을 얻어서 다른 녀석들의 부러움을 샀었지.”
씨익 미소를 짓는 버본의 입가에는 예전 기억에 대한 추억이 담겨있다. 검은조직에 들어오고 나서, 그런 평화롭기 짝이 없는 일과는 무관한 생활을 해왔기에 더욱 아련한 추억이라 느끼는 걸지도 몰랐다. 스카치는 버본의 말에 쯧쯧 가볍게 혀를 차더니 말한다.
“축제하면 역시 뭐니뭐니해도 먹을 거지. 야키소바에 링고아메, 솜사탕은 물론이고 오코노미야키나 이런저런 꼬치들. 최근에는 스테이크까지 판다고 들었어. 랍스터도 있다더라.”
“고작 몇 년 밖에 안되었는데 그 정도까지 발전 했단 말이야? 요즘 축제는 수준이 높네.”
스카치의 말에 맞장구를 쳐준 버본의 눈은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식사를 계속하는 히메에게 다가가 꽂힌다. 버본은 빙긋 웃으면서 히메에게 선뜻 말을 걸어왔다.
“히메는 축제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 있어? 어쩐지 솜사탕이나 링고아메 같이 단 걸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
히메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라, 이런 걸 기대한 게 아닌데. 그 가벼운 반응에 버본이 속으로 의아해하고 있는데, 그것을 틈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스카치가 끼어들어온다.
“가판대에서 파는 음식은 집이나 가게에서 먹는 거랑은 다른 느낌이 들지 않아, 히메? 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아.”
“히메는 마지막으로 축제에 가본 게 언제야? 역시 학생이니까 우리들보다 최근일 거 같은데. 히메의 유카타 모습은 분명 아름다울거야. 한 번 나도 ���접 보고 싶은걸.”
그에 이어 버본도 유들유들한 말투로 히메에게 추파를 던지며, 그녀를 자신들의 대화에 초대한다. 그러나 히메는 아까와 같이, 엷은 미소를 띄우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 혹시 축제에 나쁜 기억이라도 있는데 그걸 제가 건드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서둘러 미안하다 말하려고 하는데, 먼저 입을 연 것은 히메 쪽이었다.
“사실, 여태까지 축제는커녕 유카타도 입어본 적이 없어요.”
버본은 그녀의 그 침착한 한 마디에 모든 상황을 그제야 깨닫는다. 히메가 폭죽 소리에 젓가락을 멈춘 이유도, 힘없이 사라지는 저 먼 곳의 불꽃 가루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지, 어째서 축제를 추억하는 자신들의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그 모든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녀에게서 점수를 얻으려고 했던 게 역효과가 되어버린 듯 했다. 이런 상황을 저는 바라고 있지 않았는데. 뒤늦게 와서 후회를 해 봤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스카치 역시 히메의 말을 듣고서 입을 다문다. 그녀의 과거에 대해, 저희도 모르게 손을 대 버린 것이다. 버본은 제가 저지른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 재빠르게 혀를 놀린다.
“이번에 스미다가와 축제가 엄청 성대하다고 들었어.”
그 한 마디에 잠깐 이어지던 침묵이 깨진다. 히메는 내리고 있던 눈을 들어 버본을 향했다. 이제야 저를 봐주었다. 그 사실에 안도한 버본은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히메도 같이 가지 않을래? 그 날은 마침 간부들의 회의가 있는 날이라 모든 조직원들이 쉬는 날이었던 걸로 기억하거든.”
“나도 같이 갈래. 스미다가와의 축제라면 원래 유명한 곳인데 더 성대하다니, 안 갈 수가 없지. 히메도 같이 가자. 무척 재미있을 거야. 이왕 가는 거, 화려한 곳에 가는 게 좋지.”
저를 서포트 해주듯 거드는 스카치에게 시선을 돌려 눈을 마주치자, 스카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아무래도 버본과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인 지라, 그의 말에 담긴 의도를 재깍 알아차린 듯 했다. 히메는 저를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를 한 번 쭉 돌아보더니, 젓가락을 들어 반쯤 남은 감자샐러드를 입으로 옮기면서 천천히 그들의 제안에 답한다.
“…스미다가와의 축제 말이죠. 재미있겠네요.”
“그 말은 참여해준다는 말이야, 히메?”
확실하게 답을 듣고 싶어 그녀에게 되묻자, 히메는 글쎄요, 라는 세 글자의 단어와 함께 엷은 미소를 띄우고서 그 이상 답해주지 않았다. 긍정의 의미인지, 부정의 의미인지 모를 그 수수께기 같은 웃음에 버본과 스카치는 뚱한 표정을 짓고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게 고작이었다.
조금만 더 밀어보면 허락해줄 법도 한데, 히메는 말끝을 흐리며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저희와는 함께 가고 싶지 않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축제’라는 행사 자체를 그녀는 꺼리는 것일까? 확실히 저는 히메를 알고 지낸 지 아직 얼마 되지 못했고, 그녀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지라 괜한 소리를 한 건 아닌가, 마음 속에서부터 작은 걱정이 피어난다.
겨우 축제에 함께 가자는 말인데도 그가 이런 걱정을 하는 건, 버본 자신이 히메에게 큰 호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이 누굴 향하고 있는지, 그는 진작에 눈치챘기에 더욱 신경을 쓰는 걸지도 몰랐다. 별로 내키지 않아하는 듯한 히메의 태도에 아무로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혹시 가는 게 꺼려진다면 거절해도 된다고, 그런 말을 하려는 그 순간 누군가가 불쑥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어왔다.
“가고 싶으면, 가면 되는 거다.”
익숙한, 그러나 결코 반갑게는 들리지 않는 그 목소리에 버본은 속으로 칫, 하고 혀를 찼다. 언제 돌아온 건지, 그는 그들이 앉아있는 탁자에 몸을 향한 채,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히메의 보랏빛 시선은 곧바로 그 쪽으로 돌아간다. 그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 버본은 또다시 칫, 하고 이번에는 소리를 내고야 만다. 그러나 그 소리는 그 남자에겐 닿지 못했는지,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최근에 일로 많이 힘들어 보였으니 가보는 건 어때, 로즈? 꽤 괜찮은 기분 전환이 될 거다.”
그의 말에 히메는 곧바로 빙긋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버본이나 스카치와 대화할 때와는 다른, 어딘가 따뜻한 기운이 서린 미소다. 히메는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임무에 대해 묻는다. 라이는 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대답하고, 히메는 그의 대답에 다시금 밝고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이런 게 제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좋으련만. 확연히 차이 나는 그 태도에 버본은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라이 씨가 말씀하신 대로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라이 씨도 함께 가시지 않을래요? 일이라면, 라이 씨도 많이 지치신 것 같고…….”
말꼬리를 흐리는 소녀의 말에는 조그마한 기대감이 담겨있었다. 라이는 그런 히메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몇 초 되지 않아 시선을 옮긴다. 그리고 곧 흘러나오는 말에 버본은 제 예상이 맞았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에겐 할 일이 있어. 버본과 스카치는 갈 생각이 있는 듯 하니, 시간 있는 녀석들끼리 함께 가는 게 좋을 거다.”
“…그렇군요.”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하다. 그것을 라이가 못 알아차렸을 리가 없지만, 그는 제가 내뱉은 말을 번복하지 않고 그대로 식사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의 방을 향해 발을 돌렸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버본은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히메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을 때 저는 애매한 답을 들었는데, 저 녀석은 되려 히메가 먼저 가자고 하며 거절하기까지 하니, 늘 느끼는 그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혀버린 탓이다. 하지만 히메가 우울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버본은 그가 짓고 있던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싹 지우고, 싱긋 웃으면서 히메에게 말을 건넸다.
“저런 어두운 녀석이랑 같이 가면 우리 분위기까지 다 망할 거야, 히메. 그것보다 히메, 유카타는 있어?”
활기찬 목소리로 대화의 주제를 돌리면서, 그가 진작에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대어 있던 벽에 눈을 고정하고 있던 히메의 주의를 다시 제게 끌어온다.
“아니요, 한 벌도 없어요.”
“기왕 처음으로 축제에 가는데, 유카타 정도는 입어야지.”
“그럼 사러 가야겠네. 히메, 나랑 같이 가자. 내가 아는 멋진 유카타 샵이 있거든.”
스카치가 먼저 선수를 치면서 히메에게 제��한다. 그의 권유에 히메는 또, 옅은 미소와 함께 살짝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기왕이면 그녀의 옷을 고르는 건 제가 되고 싶었지만, 스카치에게는 무슨 생각이 있는 듯 했기에 버본은 그 이상 끼어들지 않고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라이의 말에 참여하기를 결심하고, 그가 함께 가지 않는다는 말에 아쉬워하던 히메의 태도는 일이 이미 지나갔음에도 여전히 버본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역시 자신에게 그녀의 마음이 돌아오는 일은 없는 걸까. 아니, 지금은 그게 어찌되든 좋다. 버본은 저도 모르게 고갤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녀와 함께 축제를 즐길 수 있는 그 날을, 버본은 기대하기로 했다. 그 날이 그녀에게 있어서, 그리고 제게 있어서도 좋은 날이 되리라 굳게 믿으며, 다 식어버린 미소시루를 버본은 단숨에 들이켰다.
스미다가와의 불꽃 축제는 그 주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그래서 스카치는 오전부터 히메를 데리고 긴자에 자리잡은 유명 기모노 브랜드샵에 와있었다. 그들이 함께 살고 있는 하나자와 가(家)의 저택에는 지금쯤 버본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다. 히메는 역시 라이와 함께 하고 싶은지, 오늘 아침 일찍 나가려는 그에게 다시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지만 라이에게 돌아온 답은 그들이 축제를 가는 일정을 잡은 그 날처럼, 차갑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직원이 아름다운 유카타들을 꺼내어 그녀의 눈앞에 펼쳐놓는 데도 불구하고 히메는 아무런 말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 상황이 그리 반가운 것이 아니란 걸, 스카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제 여동생처럼 생각하고 있는 스카치로서는 오늘 그녀가 처음 가는 축제가 즐겁고 밝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랐다. 그것은 지금 집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버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히메에 대해 비록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가 사람들을 대할 때에 거리를 두고, 저나 버본에게 마음을 열기에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린 이유를 스카치도, 버본도 예의 조사를 통해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검은조직에 속하는 것도 저나 버본처럼 어떠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 아닌, 협박에 의해 들어왔고, 조직의 감시하에 지내느라 타인과의 교류가 없기 때문이리라. 그녀에게 좋은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카치는 더욱 그녀에게 즐거운 기억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것은 기구한 운명의 이 소녀를 안타까워하는 애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동정심일지도 몰랐다. 스카치는 먼저 무어라 말을 꺼낼지 몰라 그저 무표정하게 자꾸 쌓여만 가는 유카타의 산더미를 내려다보는 히메의 옆얼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신작이 됩니다. 어떠실까요?”
직원의 낭랑한 목소리에 히메는 그제야 멍한 눈동자를 옮긴다. 각양각색의 화려한 유카타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스카치는 저도 찬찬히 그 옷가지들을 살피면서, 히메에게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
“히메는 뭐가 제일 맘에 들어? 뭐든 잘 어울릴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히메가 맘에 드는 걸 고르는 게 제일이니까.”
스카치의 말에 히메는 잘 모르겠다고, 짧게 대답했다. 혹시 스스로 옷을 고른 적이 없는 걸까? 스카치는 그녀를 보듬어 주듯 온화한 목소리로 이어나간다.
“좋아하는 색깔은 어떨까? 평소에 입는 옷보다 조금 화려한 색깔도 괜찮은 법이지.”
히메는 그 조언을 듣고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제일 구석에 가지런히 접힌 검붉은 유카타를 집어 들었다. 지나치게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고급스러운 색깔의 유카타다. 조금 모던한 느낌이 들면서도 검은색의 장미와 목단 문양이 프린트된 유카타는 고등학생인 그녀가 입기에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가 고른 것치고는 그리 기분이 나지 않는 것 같은 히메의 모습에 스카치는 그제야 그녀가 왜 그것을 골랐는지 알아차린다. 그는 미소와 함께 히메에게 말했다.
“…라이가 오늘 오지 않아서 실망 했니, 아가?”
그녀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에 히메는 말없이 눈만 돌려 스카치를 바라본다. 손에 집어 들고 있는 유카타의 색깔을 다시금 확인한 스카치는 쓴웃음을 지었다. 붉은색은, 라이를 떠올리게 하는 색깔이라고 조직원들이 이미 입을 모아 말한 적이 있다. 거기에 어른스럽고 매혹적인 느낌이 드는 유카타는, 저를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인정해주지 않는 라이에 대한 작은 아쉬움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했다. 라이를 대하는 태도가 타인에 비해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건 스카치 역시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와 절친한 사이인 버본이 직접 입으로 들려주었으니 그녀가 라이에 대해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괜히 그녀가 고른 이 붉은 유카타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히메,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기왕 축제에 가는 거니까, 즐겁게 놀자. 처음으로 가는 불꽃 축제잖아. 분명 재미있을 거야.”
히메는 그 말에 대답 없이 빙긋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가 제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총명한 히메라면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녀는 지금 아무 말을 안 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차라리 저들이 처음부터 축제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이렇게까지 우울해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를 한다. 히메의 연심 상대가 하필이면 라이이기에, 그리고 그녀를 좋아하는 게 그 라이가 아닌 버본이라는 게, 더더욱 그녀에 대해 안타까움을 더해간다. 히메가 저를 믿어주고 나서 가끔 해오던 상담에 버본의 투덜거림을 들어주면서 세 사람이 어떠한 사이이고, 어떻게 감정이 엮인 지, 그리고 히메가 라이에게 얼마나 푹 빠져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스카치라, 감히 안타깝다는 감정을 품을 수 있었다.
결국 스카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건네주지 못했다. 제가 말을 해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전부 닿지 못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대신에 그가 선택한 건 어줍잖은 위로가 아닌, 축제에 대한 즐거운 얘기이다. 히메는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가끔 대꾸를 하면서 그와 대화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변하지 않는 표정이, 스카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거 주세요.”
결국 몇 십분 뒤 히메의 손에 들린 것은, 예의 검붉은 유카타였다.
유카타를 사고 집에 돌아오니 어느새 노을이 뉘엿뉘엿 지고 있는 시간이 되었다. 히메는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제 옷매무새를 체크했다. 평소에 잘 입지 않는 기모노라서 그런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샵에서 세팅까지 다 받고 왔건만, 꼭 다른 사람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다. 평소와는 달리 틀어 올린 머리칼과 찰랑거리는 화려한 칸자시 역시 자기 자신이 아닌 듯해 생소했다. 스카치는 세팅이 끝난 히메의 모습을 보며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며 환하게 웃어주었지만 정말로 그런 것인지, 히메는 의심스럽다고 생각했다. 제가 보기엔 이렇게 그저 붕 뜬 느낌인데, 어디가 예쁘다고 하는 건지. 차라리 이걸 벗고 평소에 입는 옷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그래서는 기껏 저를 유카타 샵까지 데려가 주고 옷까지 함께 골라준 스카치에게 폐가 되는 일이겠지. 히메는 옅은 한숨을 내쉰다.
“히메, 준비는 다 되었어?”
문 밖 너머로 들려오는 버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밝게 들렸다. 그 역시 오늘의 축제를 무척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히메는 유카타 샵에서 들은 스카치의 부드러운 말 한 마디를 떠올렸다. 기왕 처음으로 가는 축제니까, 즐겁고 재미있게 지내자는 그 말. 라이가 안 온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는 저를 위해 건넨 스카치의 따뜻한 위로. 그래, 제가 지금 이렇게 어두워서는 함께 축제에 가 주기로 한 버본과 스카치에게 미안하다. 폭죽이라던가 축제라던가, 그런 일상에 히메 자신이 그렇게 큰 흥미는 없었지만 가끔은, 자기도 ‘평범한’ 여고생처럼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히메는 오늘은 그 축제라는, 별 거 아닌 일상에 집중하기로, 여전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거울 속 제 모습을 보며 결심한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늦어져서 죄송해요. 이제 가봐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탁자에 앉아서 히메의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버본과 스카치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한다. 두 사람 모두 저와 같은 유카타 차림이다. 제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조금 부끄럽다고 느껴져 히메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고 만다. 버본은 잠시 동안 멍하니 입을 열고 그녀의 유카타 모습을 하염없이 보고 있다가, 이내 환하게 웃으면서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다.
“세상에, 히메. 정말 히메의 이름처럼 공주님 같아.”
“고마워요.”
히메는 조금 멋쩍은 듯, 옅은 미소로 답한다. 버본의 찬사는 계속 이어졌다.
“평소의 히메와는 다르게 조금 어른스러운 느낌이 무척 아름다워. 내 예상대로 히메는 무슨 옷이든 참 어울리는구나. 너무 아름다워.”
“그것 봐.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히메.”
히메가 이미 샵에서 제 모습이 어색하다고 고백한 스카치 역시 씨익 웃어 보였다. 스카치의 따뜻한 눈동자에 히메는 고맙다는 듯 저도 시선을 교차시킨다. 뿌듯한 표정으로 히메를 바라보던 버본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히메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으면서 나긋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제 갈까, 히메? 에스코트는 내게 맡겨줘. 축제에는 사람이 많으니까 잘못해서는 길을 잃기 쉽거든. 처음 가는 히메라면 더더욱 그렇게 될 거야.”
히메는 손을 들어 제 어깨를 감싼 버본의 손을 살포시 떨어뜨려 놓는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버본. 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버본과 스카치를 따라갈 게요.”
부드럽지만 완곡한 거절이 담긴 그녀의 행동에 버본은 머쓱해져 들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스카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소리 죽여서 쿡쿡 웃었다. 나중에 저 녀석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버본이 입을 열려는 찰나 현관이 열리더니 하루 종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유카타를 차려 입은 그들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는가 싶더니 이윽고 히메에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 시선에 굳어버린 것처럼, 히메는 머뭇거리면서 차마 눈을 들지 못한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평소와 다른 제 모습에 어떤 대답을 해줄까? 기대감과 불안감이 섞인 마음으로, 라이의 반응을 기다린다.
“…예쁘네.”
간단하지만 명확한 그 말에 히메는 오늘 내내 무거웠던 제 마음이 금방 밝아지고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그제야 그녀는 내리고 있던 눈을 들어 라이를 향한다. 그의 입가에는 드물게 미소가 지어 있었다. 쉬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옅었지만, 부드러운 빛깔을 띤 미소다. 라이는 다시 한 번 찬찬히 히메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보면서 덧붙였다.
“붉은색이 무척 잘 어울려. 머리를 올린 모습도 처음 보는 것 같 같은데, 그런 스타일도 예쁘군.”
“…고마워요.”
기뻐서 터질 것 같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히메는 겨우겨우 그 한 마디를 내뱉었다. 설마 라이에게 ‘예쁘다’라는 말을 들을 줄이야. 제가 사모하는 이에게 아름답다는 칭찬을 들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히메는 최대한 제 표정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귀까지 새빨개진 그 얼굴은, 누가 봐도 그녀가 지금 행복해하고 있다는 걸 잘 알려주고 있었다. 스카치는 그런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대뜸 라이에게 말을 걸었다.
“기왕 히메도 이렇게 예쁘게 꾸몄는데, 라이도 역시 함께 가자.”
그 말에 히메는 절로 스카치로 눈을 돌렸다. 히메와 눈이 마주친 스카치는 빙긋 웃었다. 그녀를 생각하고서, 그는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에게 깊은 감사를 느끼며 히메는 조심스럽게 다시 돌렸던 눈을 라이로 향했다. 라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히메와 시선을 마주한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그녀의 귀를 마비시킨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그가 이번에는 함께 가주겠다고 말하지 않을까? 조그마한 희망이 히메의 마음 속에서 피어난다.
“……….”
한참 시간이 지났음에도 라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원하는 듯한 세 사람의 시선을 무시하고서, 발걸음을 옮겨 제 방으로 향한다. 이윽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힌 그의 방문을 세 쌍의 눈동자가 바라보더니, 곧 스카치의 한숨 소리가 정적을 깨뜨린다.
“이런, 무리였네.”
“뭐, 라이는 별로 축제 같은 걸 즐길 것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내내 팔짱을 끼고 서있던 버본이 스카치의 말에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그리고는 힐끗 눈을 돌려 히메를 바라보니, 그녀는 방금 전 기뻐하던 얼굴은 어디 가고 힘없이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저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기에, 축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아무래도 히메에겐 별 의미가 되지 못한 듯 했다.
역시, 무리구나. 버본의 말대로 그가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말없이 거절한 그의 모습에 풀이 죽어버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잠시나마 품고 있던 희망의 불은 그렇게 너무나도 쉽게 꺼져버렸다. 스카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라이는 못 가는 것 같으니까 우리끼리만 가자고.”
그렇게 세 사람은 조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자와 저택을 떠났다.
회장까지 가는 길은 유독 고요하기만 했다. 이따금씩 스카치와 버본이 제게 말을 걸어왔지만 히메는 그에 제대로 된 답을 해주지 못했다. 라이가 저를 거절했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 크기 때문이리라. 아니, 사실은 거절이라고 일컫는 건 틀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그저 자신의 의지를 표명했을 뿐이지,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히메는 저 자신을 다독였다. 오늘은, 버본과 스카치와 함께 온 날이니까, 그들과 즐겁게만 지내야 한다고.
그러나 그런 다짐과는 정반대로, 강가에 도착하자 시끌벅적한 주변 소리는 익숙지 않아 히메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강가 주변을 따라 쭉 늘어선 노점상들, 유카타를 입고 돌아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어두운 배경에 녹아들 듯 반짝이는 휘황찬란한 불빛들은 눈이 부시기만 했다. 처음 느끼는 일들은 그녀의 오감을 빼앗아간다. 사람들의 웃음���리는 청각을, 반짝거리는 불빛은 시각을, 처음 보는 주전부리들은 후각을, 볼을 스치는 여름의 밤바람은 촉각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마치 홀로 남겨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이런 곳, 저와는 맞지 않는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지금이라도 당장 뒤돌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 점점 제 주변에서 느껴지는 소리가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히메, 우선 어디부터 둘러볼까?”
그렇게 말하며 버본이 히메의 손을 잡아와, 그녀는 대뜸 정신을 차린다. 흐릿해지던 시야가 다시금 뚜렷해졌다. 잡힌 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갤 들어 제게 말을 건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버본의 입술에는 옅은 미소가 걸쳐있었다. 히메는 그 미소에 답했다. 변함없는 모습에 조금, 안도감이 새어 나온 걸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오니까 괜히 신나는 걸.”
스카치도 그렇게 말하면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다. 히메는 주변을 둘러보며 답을 기다리는 버본에게 작게 말했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너무 많아서.”
그녀의 솔직한 대답에 버본과 스카치는 눈을 두어 번 깜빡 거리더니 서로 마주보고 하하, 하고 밝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어린애 같았나 싶어서 시선을 내리자, 버본이 그녀의 두 손을 잡아왔다.
“그럼 오늘 히메는 나랑 스카치에 어울려줘. 그래도 괜찮을까?”
“네가 좋아할만한 것들을 소개해줄게. 맛있는 음식도 있으니까, 걱정 마.”
두 사람의 말이 그렇게까지 든든하게 여겨지는 건 어째서였을까. 히메는 저를 보며 눈을 반짝이는 두 남자에게 엷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다시 한 번 회장으로 들어서며 생각했던 다짐을 머릿속으로 되뇐다. 그래, 오늘은 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자. 검은조직원으로서의 일상이 아닌, 평범한 여고생으로서의 일상을 즐기자.
앞으로의 일이 결정이 되고 나자 버본과 스카치는 그녀를 가판대로 데리고 간다. 처음 보는 음식을 신기해하는 그녀에게 링고아메를 손에 쥐어주고, 입가에 묻은 야키소바의 소스를 닦아주기도 하고, 버본이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사격장에서 예쁜 곰인형을 뽑아다가 그녀의 손에 쥐어주고, 스카치와 함께 쪼그리고 앉아 얇은 종이로 금붕어를 낚아보기도 한다. 정신 없었지만 새로운 체험은 히메에게 큰 흥미를 가지게 했다. 제가 볼 수 없던, 조직원들의 모습 역시 생소해도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단순히 그렇게 느끼는 건, 이 곳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화려하고 밝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웃음이 전염된다는 말처럼, 이 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환하게 웃으며 즐겁게 지내고 있기 때문에, 그녀도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처음으로 즐겁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저와는 무관하게 느끼고, 그런 걸 즐길 여유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그 일상을 제가 직접 체험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학교조차 조직에서의 업무로 자주 가지도 못했던 히메가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도 없었거니와, 애초에 히메 본인이 타인과 벽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말이 나온다고 해도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겪어보는 그 ‘일상’이란 건, 그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여태까지 했던 생각이 조금은 틀린 듯 했다. 물론 그것이 그저 모르는 이들, 가령 예를 들면 같은 학교의 클래���메이트들이나 함께 연구하는 다른 조직원들과의 것이었더라면 이렇게 즐겁다고 생각하기 어려웠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히메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링고아메를 한 입 베어 물고는 시선을 제 옆으로 옮겼다.
여전히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버본이 먼저 히메의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고갤 갸웃거렸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것이겠지. 히메는 그런 그의 얼굴에 그저 살짝 미소를 돌려주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어느새 이 쪽을 바라보는 스카치와 시선을 마주하고, 그에게도 마찬가지로 웃어 보였더니 곧장 스카치가 입을 열었다.
“네가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다.”
“…전부, 버본과 스카치 덕분이에요.”
히메는 한껏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다, 그들이 저를 여기에 데리고 와주지 않았더라면, 제게 이런 감각을 안겨주지 못했으리라. 제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히메는 깨닫는다. 단순히 이 일상을 제가 처음으로 직접 겪었기에 즐겁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제가 믿고 애정 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같은 집에서 지내며, 같이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는 사이였던 그들과 함께였기에, 제가 평생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일상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그들에게 고맙다고 생각했다. 저와 이런 시간을 보내주는 것에, 자신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알려준 것에 대해 마음 속 깊이 감사함을 느꼈다.
“…고마워요.”
타코야키를 사러 줄을 선 가판대 앞에서 히메가 불쑥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버본이 타코야키를 받아오는 동안, 히메의 곁에 있던 스카치는 가볍게 웃으면서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처음 그가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던 그 때처럼, 크고 따뜻한 손이다. 시선을 올려 그 손을 바라보고 있자니, 스카치가 여전한 미소를 띄운 채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은 모든 걸 잊어버리렴, 아가. 이렇게 즐거운 날이잖아.”
스카치의 그 한 마디는 히메의 마음 속 깊은 곳의 무언가를 녹여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껴안고 있던,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녹아서 흘러 넘치는 것처럼 마음 한 켠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부드러운 그 말을 히메는 곧장 삼킨다. 그런 그에게 대답하려는데, 이윽고 어느새 타코야키를 손에 들고 나타난 버본이 그녀의 입 앞으로 하나를 꺼내다가 내밀었다.
“히메, 한 입 먹어볼래?”
“…고마워요.”
히메는 작게 중얼거린 뒤 순순히 그가 내민 그것을 제 입에 밀어 넣었다. 신기하게도 입 안에서 느껴지는 맛이 더 이상 생소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지금 상황을,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히메가 맛있다는 듯 오물거리는 모습을 보고서 버본과 스카치는 서로를 바라보고서 씨익 웃었다. 그녀의 모습이 밝아진 것에 대해 안도를 느끼는 것처럼. 이 자리에 라이가 없다는 것을, 그녀가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분명 두 사람 모두 같았을 터다. 설령, 그 의도나 동기가 다르다고 해도.
“아, 슬슬 불꽃놀이가 시작되려나 봐.”
주변 사람들이 이동하는 것을 보고서 스카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버본은 히메의 손을 꼭 붙잡았다. 강인하고 따뜻한 손에 히메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우리도 가자, 히메.”
“가다니, 어디를요?”
“어디라니, 불꽃놀이를 보러 가는 거지. 좋은 자리를 찾아야 제대로 볼 수 있으니까. 사람이 많으면, 가려져서 보이지 않거든.”
히메의 질문에 스카치가 대답한다. 어안이 벙벙한 채, 신이 난 그들의 손에 이끌려 히메는 발걸음을 그저 정처 없이 옮겼다. 사람, 그리고 사람, 또 사람. 눈이 돌아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주변을 걸어 다닌다. 꼭 파도에 휩쓸리는 것만 같았다. 히메는 겨우겨우 버본의 손을 붙잡고 그 인파를 헤쳐나가고 있었다.
“역시 유명한 스미다가와 축제라서 그런지 사람이 많네. 히메, 내 손을 꼭 붙잡아.”
그렇게 말한 버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히메가 그의 손을 저도 꼭 붙잡으려는 순간, 히메는 제 어깨에 강한 통증을 느꼈다. 자동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만다. 손을 놓쳤다는 걸 깨달은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아, 미안해요! 서두르고 있어서!”
그녀에게 부딪힌 남자는 그 말만을 남기고 쏜살같이 사라져버렸다. 아직도 얼얼한 고통이 남아있는 제 어깨를 다른 손으로 감싸며,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히메는 그제야 제 손이 서늘하다는 걸 느끼고, 제 곁을 함께 걷던 버본과 스카치 쪽으로 눈을 돌렸다.
“…버본? 스카치?”
불안한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분명 그녀의 옆에서 걷고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었다. 대신에 제 시야를 채우는 건 한쪽 방향으로만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모습뿐이다. 그들은 어디에 사라져버린 걸까? 히메는 멍하니 그 곳에 서있기만 했다. 머릿속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서있는 방향과는 반대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제 어깨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부딪힘에도 불구하고, 히메는 풀린 눈으로 제 몸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고,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있었다. 방금 전까지 즐거워 보였던 얼굴은 창백하게 굳고, 가만히 서있는 두 다리는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어련할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서있는 건 히메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겪은 일이었고, 가뜩이나 제가 믿고 따르는 일행과 떨어져 혼자 이 곳에 있다는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머릿속이 새하얘져 핑핑 돌기 시작하고, 귓가에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웅웅거린다. 어지럽다.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온전히 서있기가 힘들었다.
정신적인 한계가 와 히메의 발목에 힘이 풀려 털썩 쓰러지려는 그 순간, 누군가가 히메의 손목을 홱 낚아챘다. 그 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 사람은 그녀를 데리고 수많은 행렬들 사이를 우악스럽게 지나치고는 한적한 곳에 도착했다. 히메는 멍한 눈으로 제 손목을 붙잡고 있는 그 큰 손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불안한 시선을 올려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다. 그리고 히메는 그가 누군지를 알아차리고는, 심장이 크게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라이가, 바로 그곳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그 눈빛에는 분명한 걱정이 서려있었다.
“괜찮나? …버본과 스카치는, 어디에 갔지?”
낮은 그의 목소리에 히메는 저도 모르게 안심하고 만다. 이번에는 지나치게 안도했기 때문인지, 다시 다리에 힘이 풀리는 찰나, 라이가 그녀를 가까스로 끌어안아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라이의 손의 느낌, 마주하고 있는 피부 너머로 그의 체온이 느껴져 그만 히메는 얼굴을 붉혔다. 눈에 띄게 의식을 해버리고 마는 건, 지금 상황이 제 과거의 일과 겹쳐지기 때문이리라.
예의 파티에서 함께 수행했던 암살 작전에서, 지금과 흡사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제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죽음을 바로 제 눈앞에 두고 있던 히메는 바로 방금 전처럼 큰 패닉에 빠져있었다. 그 검붉은 피와 힘없이 쓰러진 시체를 차마 ���바로 보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 있던 히메를 구해준 건 바로 이 남자, 라이였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시야를 가려주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그녀를 인도하고, 그녀의 손을 붙잡아 안심시켜주었다. 그 때도 그랬었다. 지금처럼, 부드럽게 허리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언제 어디서나, 두려움에 떠는 그녀를 구원해주는 건 라이였다. 그는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나이트나 왕자님과 같았다. 연극에서의 영웅처럼, 그는 늘 히메를 절망에서 꺼내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히메는 저도 모르게, 제 손을 잡아주는 라이의 손에 제 손가락을 얽는다. 꼬옥 붙잡는 손에서는 그를 향한 강한 의지가 서려있다. 라이는 힐끗 그것을 내려다보았다가 히메의 얼굴로 다시 눈을 고정했다. 아, 그 때 보았던 그의 눈빛이다. 걱정과, 애정을 다한 눈빛. 그 눈빛을 받자 히메는 제 가슴 한 켠에서부터 따뜻한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단순한 안심이 아니라,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기대감이다. 이전에 겪었던 그 때처럼, 오로지 저���을 위해서 행동하는 라이의 모습에 모르는 사이에 큰 기대감을 안고 만 것이다. 그게, 실로 허용되기 힘든 감정이라도 좋았다.
“버본과 스카치는, 그래서 어디에 간 거지?”
라이는 그녀를 부축하여 제대로 일으킨 뒤에 다시금 물어왔다. 히메는 말없이 고갤 내저었다. 갑자기 사라졌으니 그녀로서는 대답할 길이 없었다. 라이는 그녀의 답에 주변을 살핀다. 버본과 스카치의 모습을 찾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훑던 눈을 돌려 다시 히메에게 향했다.
“로즈.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함께, 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히메는 그의 말꼬리를 따라 하는 게 고작이었다. 라이는 고갤 끄덕였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을 혼자 돌아다니기엔 위험하니까. 그리고,”
라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는 말을 이었다.
“…불꽃놀이, 보고 싶지 않나?”
히메는 그 미소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고갤 끄덕였다. 그를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명한다. 라이는 여전한 미소를 띄우고는 말없이 붙잡은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오로지 그에게 모든 걸 의지한 채 계단을 내려가던, 그 때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히메는 그를 따라서 걸어나간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다. 분명 제 주변은 시끄러울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인지 히메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제 손을 붙잡은 그의 크고 따뜻한 손의 감촉과, 옆에서 살짝살짝 들려오는 규칙적인 숨소리뿐이었다. 히메는 그것을 따라가듯이, 제 발을 옮긴다.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라이의 곁을 그녀는 걷고 있었다.
그렇게 말없이 걷다가, 라이는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손을 붙잡고 걷고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던 히메는 그제야 제 주변 상황을 알아차리고 현실로 돌아온다. 그들은 커다란 다리 위에 서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래에서 불꽃이 피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아래에서 느꼈던 그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어디 가고, 그들이 있는 이 곳은 한적하기만 하다. 비교적 조용한 이 공기에, 히메는 조금씩 제 페이스를 되찾아갔다. 라이는 히메의 손을 이끌어 함께 다리 난간으로 향했다. 그는 난간에 팔을 기대어 서서는 새카만 밤하늘에 눈을 고정시킨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곳은 조용하고, 주변에 사람도 없으니 불꽃도 분명 잘 보일 거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어느 샌가 ���오른 폭죽들이 하늘 위를 유리조각처럼 반짝이면서 수놓는다. 폭죽이 올라가면서 들려오는 그 새된 목소리와 흡사한 소리는, 제가 몇 번이고 집에서만 아득하게 들었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히메는 처음 보는 그 광경에 그만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이것이 사진으로만 보고 말로만 듣던 그 불꽃놀이라는 거구나. 밤하늘을 향해서 퍼져나가는 그 모양새는 꼭 별들이 일순간 퍼트려진 것만 같았다. 히메는 한참 동안 멍하니 그것을 바라본다. 설마 태어나서 이런 걸, 제 눈으로 직접 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저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제가 사모하는 이의 곁에서 이렇게나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게 되다니.
히메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눈을 돌려 제 옆에 서있는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무표정한 옆얼굴에 다시금 가슴이 뛴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저를 찾아와준 일, 패닉에 빠진 자신을 구해준 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던 눈빛, 그리고 기꺼이 제 곁에 그녀를 두고, 이렇게 아름다운 폭죽들을 말없이 감상하고 있는 라이는,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까? 저번 일에 이어서 자신에게 보여주는, 제가 모르고 있던 라이의 그 모습. 부드럽고 걱정이 담긴 그 행동들이, 단순히 그의 ‘인성이 좋기 때문에’ 일어났을 거라고는 차마 생각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동료로서만 저를 대하는 거라면, 거기까지 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은조직의 사람들은 누구나 매정하고 냉철했다. 라이가 물론 진과 같은 인물과는 현저히 다른 사람이란 걸 충분히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제아무리 그래도 아무런 마음도 없는, 단순한 동료에게 이런 사소한 일까지 도와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쩌면 라이는, 제게 애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가정하고 보면 그가 히메 자신에게 해주었던 모든 행동들의 동기에 납득하고서 고갤 끄덕일 수 있었다. 스카치처럼 저를 여동생처럼 여기고 있는 걸까? 그런 것이라도 좋다. 라이가, 이 남자가, 저를 ‘동료’가 아닌, 다른 형태의 애정으로서 봐주고 있다면. 히메는 새싹이 움트듯 조금씩 피어 오르기 시작한 그 조그마한 희망을, 그만 다시 품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조금 확신에 차있다. 똑 같은 상황을 두 번이나 겪어버렸기 때문이리라.
“……?”
계속 하늘만을 보고 있을 것 같았던 라이의 시선이 옮겨져 히메 쪽으로 향한다. 저를 한참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린 것인지, 무표정한 얼굴에는 약간의 의문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히메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눈을 피해버렸다. 다시금 하늘로 솟아오르는 불꽃에 애꿎은 시선을 향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것은 그녀가 방금 전에 깨달은, 작은 희망에 의한 것임이 분명했다.
“간만에 보는 불꽃은 무척 아름답군.”
라이는 그렇게 감상을 내뱉고는 저도 히메와 같이 하늘을 바라본다. 히메는 자연스럽게도 작게 웃었다.
“그러게요. 정말, 아름다워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행복감이 서려있었다. 라이는 그녀의 말에 힐끗 히메를 바라보고는, 엷은 미소와 함께 다시 말없이 불꽃들을 감상하는데 집중한다. 저를 보고 웃어주었다는 사실에 히메의 마음은 또다시 설렘으로 가득 찬다.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계속 갔으면 좋을 텐데. 히메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되지도 않는 바람이었지만, 그래도 이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쭉 이어지기를 바랐다. 적어도, 제가 그와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이 행복감을 계속 느낄 수 있기를. 어둑한 밤하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어딘가의 신에게 소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 커다란 다리 위에 단둘이 기대어 서서, 마치 불꽃 하나하나가 수 시간 동안 타는 것처럼, 그저 오랫동안, 불꽃이 온전히 꺼질 때까지 말없이 서있기만 했다. 볼을 스치는 밤바람이 유독 차갑게 느껴지는 건, 분명 제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 젖어있기 때문이라고, 히메는 문득 생각했다. 이따금씩 불꽃이 피어 오르는 소리가 적적했다.
그들이 집에 돌아온 것은 시간이 제법 지나고 나서의 일이었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나서 특별히 할 일도 없었던 지라, 곧바로 귀가하기로 한 것이다. 라이와 보낸 짧은 시간은 찰나와도 같은 순간이었지만 히메의 마음을 가득 채워서는, 돌아오는 길 내내 그 반짝이는 광경과 함께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라이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자꾸만 신경이 쓰여 힐끗힐끗 눈을 돌려 그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살폈지만 라이는 그저, 묵묵히 앞을 향해 걷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제멋대로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저를 위해서 행동해준 것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두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것은 이 쪽을 향해 달려오는 두 쌍의 발소리였다. 시선을 돌려 그 쪽을 향하자, 걱정스러운 표정의 버본과 스카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랑 같이 있었어?”
그렇게 먼저 입을 뗀 것은 버본이었다. 히메는 고갤 끄덕였다.
“길을 잃었는데, 라이 씨가 도와줬어요.”
“다행이다. 네가 중간에 사라져서 나도 버본도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 라이가 찾아줘서 정말 다행이다.”
스카치는 제 가슴을 쓸어 내렸다. 두 사람이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보여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버본은 히메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더니, 금방 언짢은 표정으로 라이를 노려보았다. 라이는 역력하게 적대적인 눈빛을 제게 보내는 버본에게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 두 사람 다 계속 여기 서있는 것도 그렇고, 안으로 들어와. 오래 걸어서 많이 피곤하지, 아가?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쉬렴.”
버본의 그 적대적인 시선의 이유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스카치는 재빠르게 히메를 먼저 피난시킨다. 히메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스카치가 제 어깨를 붙잡으면서 방으로 데려가서 그대로 그를 따라간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니 이제 텅 빈 거실에 남은 건 버본과 라이 뿐이었다. 스카치가 히메의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버본은 팔짱을 끼고서 라이를 향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당신이 히메와 함께 다리 위에 있던 걸 봤어요.”
벽에 기대어 서있던 라이는 그 말에 힐끗, 눈을 돌려 버본을 바라본다. 눈에 띄게 불쾌해 보이는 버본과는 달리 라이의 눈동자는 고요하기만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상황이 꼭 귀찮게도 보였다. 굳이 이런 걸 가지고 왜 붙잡느냐는 식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반응은 ‘보고야 말은’ 버본의 감정을 추스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안 온다고 한 거 아니었습니까?”
“너희 두 사람이 너무 칠칠 맞으니까, 그냥 둘 수 없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로즈는 우리 모두의 동료니까.”
라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버본과는 달리 무척 여유로운 모습이다.
“그렇게 분해할 거면, 네 ‘공주님’을 잘 지켰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 같은 사람에게 뺏기지 않도록 말이다.”
되받아 치는 모습이 밉상이다. 버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거기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제 자신에게 짜증이 밀려왔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녀에게 눈을 떼고 있지 않으려고 했는데, 손을 잡고 있다고 방심한 사이에 모든 일이 일어나버렸기 때문이���. 그의 말대로 그녀를 잘 지키지 못한, 자신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다는 걸, 버본은 이미 자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내가 이번 축제에 참가한 건 단순히 기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냉정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버본은 하, 하고 크게 코웃음을 쳤다. 그것이 거짓임을 잘 알고 있다. 라이라는 남자가 겨우 기분으로만 행동을 일으키는 자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본은 똑똑히 보았다. 다리 위에서 그가 짓고 있던 표정은 무표정한들 무척이나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단순히 히메를 동료로만 인식하고 있다면 그런 표정을 짓지 않을 게 분명하거니와, 애초에 히메가 길을 잃어서 패닉에 빠졌다는 걸 도와준다고 해도 집에 돌아가라고 할지 망정, 저와 함께 폭죽을 보지 않겠냐는 그런 선의의 제안을 할 리가 없었다. 그 말은 즉, 라이에게도 저와 같이, 히메에 대한 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게 된다. 무엇보다도 버본은 지난 파티에서 라이가 보였던 태도를 기억하고 있다. 그 때 히메의 눈을 가리고 나타났던 그의 얼굴 역시, 오늘과 같이 부드러운 것이었다.
“단순히 기분이 바뀌었다고?”
버본은 반격할 준비를 한다. 당신이 그 때 보였던 얼굴이나, 오늘 보였던 얼굴에서 다 드러난다고. 히메에게 헛된 희망을 품게 하지 말고,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다면 확실하게 거절을 하라고.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그 순간이었다.
“두 분 다 무슨 일이에요?”
그런 짧은 말 한마디와 함께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히메가 등장했다. 아무래도 버본의 격앙된 목소리를 듣고 나온 것 같았다. 버본은 벌리고 있던 입을 꾹 다물고, 제 입술을 깨문다. 그녀의 앞에서 이 남자, 라이에 대한 진실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상처받을 대로 받았고, 더 이상 히메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그녀가 그런 상황에 놓여진다고 한들, 결코 제 입으로 직접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입장은, 그녀가 갈 곳이 없어 찾아오는 자리로 족했다. 라이는 눈을 감은 채 그녀에게 대답해주지 않았고, 버본도 입을 다물어버리자 눈치가 빠른 히메는 두 사람 사이에 그리 좋지 않은 대화가 지나갔음을 알아차린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히메는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해주세요.”
짤막하지만 단호함이 담긴 말이었다. 버본은 그런 히메에게 빙긋,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었다. 사모하는 이에게 보여주는 미소는 늘 상쾌하고 밝았다. 그는 히메의 곁으로 걸어가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고서 은근하게 속삭였다.
“오늘은 피곤한데, 그만 돌아가서 쉬어, 히메. 별 거 아니야. 우리 둘의 사상이 조금 부딪혔을 뿐이지.”
히메는 정말이냐고 묻는 듯 버본을 올려다보았다. 라이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그대로 뒤를 돌아 제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마 제 쪽에서 할 얘기는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저 자식, 먼저 시비를 털어놓고 도망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 그 뒷모습에 버본이 무어라고 말을 걸려는 순간, 그보다 더 빠르게 히메 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이 씨.”
이름이 불리자 라이는 발걸음을 멈춘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히메는 생긋, 부드럽고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라이 씨 덕분에, 정말 좋은 경험을 했어요.”
그 말을 듣자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장소를 준비하고, 그녀를 초대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을 텐데. 히메의 말에 저도 모르게 표정을 잔뜩 굳힌 채 그녀를 내려다본다. ���지만 히메의 시선은 그를 더 이상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라이라는, 그 무뚝뚝한 남자에게만 꽂혀있었다. 라이는 히메의 말에 가볍고 엷게 웃어주었다. 소리 내지 않는 웃음이었음에도, 히메는 꼭 제 귀에 들린 것만 같이 작게 소리를 내어서 웃었다. 라이는 다시 뒤를 돌아 제 방으로 사라진다.
“저는 그럼 이만 쉬러 가볼게요. 버본 씨도 오늘은 고마웠어요.”
히메는 그렇게 말하고는 제 어깨를 여전히 감싸고 있는 버본의 굳은 손가락을 살포시 밀어내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마음은 꼭 커다란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것처럼 가볍기만 했다. 오늘 같이 황홀한 날을, 결코 잊을 수 없을 테다. 제가 연모하는 이와 함께 그 사람이 가득한 곳에서 운명처럼 만나서, 함께 불꽃놀이를 보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간 축제의 마지막을, 라이와 함께 장식할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그 뿐만 아니라, 라이가 저번처럼 저를 위해서, 조직이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저만을 위해서 시간을 사용해주고, 행동해주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우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제게 애정이란 감정을 조금은 품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오늘의 그 마법과도 같은 순간을, 기적과도 같은 우연을, 다음에도 또 겪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직까지도 두근거리고 있는 가슴을 억누르기라도 하듯 제 두 손을 얹었다. 손바닥 너머로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괜한 기대감을 품게 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을까? 히메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깊은 행복감에 빠진 히메는, 등 뒤에서 버본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유독 쓸쓸하다는 것을 결국 알아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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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랑 타입 기획서 샘플: 룬님
룬님-꿈왕국 매드해터
13000자 작업용
룬님 기획서
제목(가제): Luscious Nightmare
시놉시스: 어느날부터였을까, 꿈 속에서의 그녀는 언제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긴다. 그녀의 앞에는 항상 같은 사람이 마주앉아 있다. 금발을 늘어뜨린, 커다란 모자를 쓴 화려한 옷차림의 남자. 그녀와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홍차를 마시다가, 남자의 손이 그녀의 얼굴에 닿는 순간 선유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러던 어느 날, 꿈 속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남자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온 것이다. “원더랜드를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선유는 그 때에, 갑자기 꿈이 현실처럼 다가오기 시작한다. 아무런 일을 못하던 꿈에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남자와의 티타임이, 계속되고 있었다.
스토리(기승전결):
(기) 선유는 평범한 디자인과 대학생이다. 여느 때와 같이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함께 그녀가 좋아하는 앨리스 전시회에 들렸다가 집에 들어온 참이었다. 선유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친구들과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몇날 며칠이 지났지만, 그동안 쭉 잠들어있었다고. 병원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깨어난 이후로는 평범하게 자신의 일상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선유는 그 때 일 이후로 매일마다 같은 꿈을 꾼다. 한 남자와 마주앉아서, 티타임을 갖는 꿈이다. 어쩌면 자신이 앨리스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오늘은 그런 해괴한 꿈을 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시회에서 사온 물건들을 장식한 선유는 잠에 든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선유는 역시 언제나와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우아하고 따스한 공중정원에서, 근사한 티테이블을 눈앞에 두고서 그녀는 찻잔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예의 꿈 속의 남자가 있었다. 금발을 늘어뜨리고, 화려한 옷으로 몸을 감싼 그 남자는 항상 볼 때마다 선유에게 ‘매드해터’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우아한 손놀림으로 차를 홀짝이면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선유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말을 해도 안 통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남자와 홍차를 들고 바라보다가 끝나는 꿈. 그 기묘한 꿈이 오늘도 결국 일어난다고, 조금 지루하게 느꼈을 뿐이다.
(승) 그 때, 남자는 선유에게 말을 걸어왔다. “두번째의 원더랜드를 가장 먼저 찾아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여태까지 없었던 일에, 선유는 무척 놀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질문에 “다이나”라고 대답한다. 두번째 원더랜드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일컫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남자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드디어, 그녀가 이 곳에 와주었다고. 그 순간 선유는 깨닫는다. 여태껏 꿈 속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던 그녀가, 스스로 행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그녀를 ‘다이나’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선유는 자기 이름이 김선유라고 했지만, 그는 고갤 절레절레 내저었을 뿐이다. 그리고는 자신을 매드해터라고 소개한다. 그녀가 자신을 잊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깝다며, 그녀가 이 곳을 찾아오는 것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자신이 보낸 선물을 그녀가 금방 손에 넣은 것 같아 기쁘다고 한다. 물론 선유의 입장에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몰랐지만, 그는 멋대로 계속 말을 해나간다. 그녀가 이 곳에 올 때까지 제가 무척 고생을 했다고, 티타임이 끝나면 그녀의 방으로 향하자고 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선유는 그의 말을 부정하면서 자신은 다이나도 아니고, 당신도 모른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그녀가 돌아왔으니까 이런저런 일을 하자며 제안한다. 예전의 ‘앨리스’는 그렇지 않았지만, ‘다이나’는 돌아와줄 것이라고 믿었다고. 선유는 그런 그에게 당치도 않은 말을 하지 말라며 자신을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한다. 그러자 매드해터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선유, 다이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녀가 바랐기 때문에, 그녀는 바로 이 곳에 있는 것이라고. 모든 것은 그녀의 선택이라고 말이다. 자신은 그녀가 언제든지 이 곳에 올 수 있도록 표식을 둔 것 밖에 없다고.
돌아가겠다는 선유의 말에 그는 슬픈 표정을 짓는다. 선유는 그 이유를 물었지만, 매드해터는 다시 금방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한다. 그리고 그는 선유에게 권유한다. 하룻밤만 이 곳에서 잠들지 않겠느냐고. 그러면 기억해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녀가 간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그녀의 선택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그런 그녀에게 그는 질문한다.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채 돌아가도 괜찮겠느냐고. 선유는 그 질문에, 그녀의 호기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러겠다고 답한다.
(전) 그녀는 매드해터와의 근사한 저녁식사를 한다. 어딘가에서 섣불리 모르는 곳에서의 음식은 입을 대선 안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그가 내미는 음식들이 전부 너무나도 달콤한 향을 띄고 있어서, 그녀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그는 선유와 공중정원을 산책하며, 다시금 그녀에게 돌아가겠느냐고 물었다. (이 때에 아래 내용과 더불어서 부드럽지만 조금은 강인한 스킨십을 넣을 예정입니다. 그래서 선유가 약간 당황해하는 장면을 넣고자 해요~)
그는 그녀가 이 곳에 오게 된 이유와 더불어(그가 트로이메아의 공주였고, 여행 중에 그녀가 이 곳을 찾아와 그가 그녀를 알고 있는 이유를 포함해서. 그러나 연인과 흡사한 관계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에게 이 곳에서의 이점에 대해 알려준다. 현실 세계와는 다르게, 그녀는 이 곳에서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이다. 그녀의 존재가, 이 곳의 사람들을 모두 구해줄 것이라고. 그러니 자신으로서는 불쌍한 다이나가 이 곳에 남아주는 것을 추천한다고. 선유는 그에게 빙긋 웃으면서 제 뜻을 비친다. 그러자 매드해터는 말한다. 원더메어라는 곳은 놀라운 곳이라서, 그녀가 진실로 이 곳에 있고 싶다면 이 곳에 있게 해줄 것이라고.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도 이 곳에 있다면, 그건 그녀가 이 곳에 있기를 바라는 것이니 계속 이 곳에 있겠다고 약속해달라고. 선유는 그러겠노라 그에게 약속한다. 왜, 그런 약속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저는 절대 돌아가고 말 것이라고 다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 선유는 눈을 뜬다. 꿈이었다. 아, 역시 저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된 거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이 곳에 남는 걸 선택해주어서 무척 기쁘다는, 꿈에서 본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선유는 강한 위화감을 느낀다. 매드해터는 말한다. 당신과 나의 계약은, 이렇게 새로운 형태로 맺어지는 것이라고. 선유가 그 말을, 이 상황을 이해하고 제가 이 곳을 떠나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닫는 건 먼 훗날의 일이었다. 아니, 그 때엔 이미, 그녀 자신도 ‘원더메어’의 일원으로서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제가 매드해터의 곁에 있는 것도 당연하게, 그렇게 느낄 터였다.
: 스토리 전개 라인이라 전부 기재하기 힘들어서 아래 목록에 사건의 진상(?)과도 같은 것을 적어둡니다! 이 요소들은 모두 복선으로서 넣을 예정입니다.
앨리스에서의 ‘음식’이 하는 역할은 몸의 크기를 키워주거나 작게 만들어주는, 즉 현재와 상반되는 상태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제 스토리에서는 원더메어의 음식은 그녀가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즉 ‘현재 상반되는 상태’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녀가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테지만, 다이나는 그것을 입에 대고 말았기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걸 알고 있는 건 매드해터 뿐입니다.
매드해터는 어디까지나 그녀에게 권유를 했을 뿐, 강요를 하거나 계략을 꾸민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첫번째 질문에서도 굳이 답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으며, 그녀가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키가 되는 ‘음식’ 역시 먹는 건 어떻느냐고 권유했습니다. ��드해터가 그녀에게 스킨십을 해온 것 역시, 다이나가 승낙했기에, 시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모든 것은 결과적으로 다이나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됩니다.
다이나가 이런 결과를 가지고 온 것은, 그녀의 지��� 호기심과 탐구심 때문입니다. 그녀가 현 상태에 대해 공포심이나 두려움을 느꼈더라면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다이나는 냉정한 판단을 하면서도, 그 호기심을 채우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그녀에게 이 곳에 남는다는 결과를 가져오게 만들었습니다.
다이나는 마지막에 한 매드해터와의 약속에 대해,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이는 다이나 본인은 잊고 있지만, 그녀가 꿈 속에서 겪었던 일들을 그녀의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고, 당시에 매드해터에게 품었던 감정 역시,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의식이 크게 작용했다고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캐릭터 시트(스토리상에 적히지 않은 내용도 기재되어있습니다.):
김선유: 평범한 여대생. 디자인학과에 재적하고 있으며, 앨리스를 무척 좋아한다. 오랜 기간 동안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었으며, 그동안의 기억은 없다. 매일마다 우아한 티타임의 꿈을 꾸다가, 꿈 속에서 만난 남자에게 그녀가 실은 꿈 속의 이들을 지키는 존재였으며, 그녀가 꿈에서 만난 이 남자 역시 그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지적이고 호기심이 많으며, 할 때는 딱 잘라서 말하는 침착하고 영리한 여성.
매드해터: 이상한 나라 원더메어의 왕자. 신사적이고 우아하지만, 말장난이나 수수께기를 즐기는 조금 이상한 면도 있다.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선유의 꿈 속에서 등장한 사람. 그는 선유를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 곳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한다. 선유를 ‘다이나’라고 부른다. 그의 말에는 오묘한 힘이 있어서, 선유는 그가 저를 ‘다이나’라고 부를 때마다, 어딘가 모를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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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에 타입 샘플: 이스하님
이스하님-히로아카(나의히어로아카데미아) 토도로키 쇼토
1500자
이스하님-달달한 분위기, 풋풋함, 두근거림, 평화로움, 다정다감, 잔잔한 일상, 행쇼
벚꽃이 피어나는 날, 히노키는 여느 때와 같이 유에이 고등학교로 향했다. 유독 흐드러지게 피어난 고등학교는 오늘따라 어딘가 생소했다. 그녀는 오늘 졸업을 하게 된 것이다. 졸업식은 별 일 없이 무사히 끝났다. 앞으로 정식적으로, 히어로로서 활동하는 미래가 약속된 히노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겐 또 하나의 미래가 약속되어있다. 함께 지내왔던 친구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선생님들에게도 인사를 끝마친 그녀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뒤를 돌아 그를 확인하니,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다. 이어지는 친숙하고도 든든한 목소리에 히노키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토도로키 쇼토. 10년이 넘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욱 각별한 것은 두 사람의 사이가 연인, 그것도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기 때문이리라. 약속된 또 하나의 미래.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고 결혼식의 약속까지 이미 잡힌 상태. 그녀의 남편이 될 그는, 히노키에게 다가와 부드럽게 웃었다.
이윽고 들리는 목소리는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 그 말에 히노키 역시 웃으며 고맙다며, 그에게도 졸업을 축하한다고 답한다. 처음에 봤을 때에 서로에 대한 인상이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양가의 부모에 의해 맺어진 강제적인 약혼자. 그것은 단순히 구두상의 관계였을 뿐, 히노키의 안에서는 그리 부각되는 일이 없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토도로키는 히노키에게 처음부터 호감을 갖고 있었다던가. 이에 대해 히노키가 이유를 물었지만 토도로키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두 사람이 얘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이 몰려와 그들을 둘러싸고서 졸업생들만의, 추억을 얘기하며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그 그룹에 끼어, 친구들과 못다한 이야기를 나눈다.
몇 십 분 뒤, 친구들은 하나 둘씩 돌아가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벚꽃이 흩어져 내리는 나무 아래 남은 것은 토도로키와 히노키 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 아래에 앉은 채로 서로를 바라본다. 말없이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 토도로키가 먼저 입을 연다.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고, 그리고 이 곳에 입학을 해서 너를 여기에서 볼 줄은 몰랐다는 말이다.
두 사람은 가끔 집안 사정으로 얼굴을 마주할 때는 있었으나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다는, 그런 만남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학교에서 보는 히노키의 얼굴은 제가 모르던 것이라, 조금 신선하고도 생소했다고 토도로키는 이어서 말한다. 사실 입학 시험 때 너를 발견했을 때에 조금 기뻤다고, 이어서 말한다. 히노키는 그의 말에 빙긋 웃으면서 답한다. 저는 네가 이 곳에 있을 줄 진작에 알았다고.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서로의 관계를 인정하게 된, 체육대회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히노키는 그 때의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도 정말 고마웠다고 말하며 약혼자라는 입장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그의 과거를 알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무관심했던 태도를 보였던 그 때의 자신을 아직도 후회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토도로키는 빙긋 웃으면서 대답한다. 괜찮다고,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으며, 거기에 히노키가 책임감을 가질 이유도 없다고. 그러면서 그는 히노키의 머리칼을 붙잡아 매만지면서 낮게 말한다. 지금의 자신은 히노키와 함께 있어 행복하며,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렇게 말하는 토도로키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히노키를 내려다보면서 토도로키는 말한다. 너는 나와 있어 행복하냐고.
그 말에 히노키는 작은 미소와 함께 대답 대신에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당연하잖아, 라는 말과 함께 히노키는 밝게 웃는다. 토도로키는 히노키의 행동에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이내 저도 미소를 짓더니 앞으로 우린 더 행복해질 것이라며, 이번에는 토도로키가 고갤 숙여 히노키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두 사람의 손에 끼워진 은색의 반지가 석양빛에 반짝이고, 한줄기 바람이 벚꽃 잎을 흐드러지게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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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에 타입 샘플: 결님
결님-옥도사변 타가미
2000자
결님 – 투닥투닥/간질간질/아슬아슬 줄타기
By. 카논(@do_u_darling)
언제나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던 시호. 도서관에서 제가 맡게 된 사건에 대한 자료를 과거에 대한 서적을 통해 조사하는 중. 의문이 생긴 내용을 노트에 메모까지 하면서 열심히 일을 하던 시호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기분 나쁜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려고 하는데, 그녀보다 재빠르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의 주인은 타가미다. 별 거 아닌 사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다며 한 마디 흘리는 모습에 시호는 제 옥졸로서의 자존심을 비웃은 것마냥 들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확히 말하자면 늘 타가미가 시호 자신을 바보처럼 여기는 것처럼 느껴져서, 타가미가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라도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호가 타가미에게 남일에 참견하지 말고 네가 할 일이나 하라고 말했지만, 타가미는 아무런 말도, 아무런 반응 없이 몸을 숙여 시호가 적은 노트를 뺏어다가 읽는다. 시호가 밑에서 돌려달라고 해도 죄다 무시한 채 그는 유심히 내용을 읽다가, 금방 시호가 고민하던 문제의 답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장 그가 한 말을 대입해보니, 놀랍게도 제가 가지고 있던 의문이 단번에 풀려버린다. 시호는 타가미에게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역시 네가 알지 않겠느냐고 묻고, 타가미는 아, 그건 말이지, 하고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다물어버린다. 언제나와 같은 반응에 시호는 질린 듯이 한숨을 내쉬지만 그녀가 문제의 해결방법에 있어서도 막힌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타가미에게 다시금 질문한다.
계속 귀찮다면서 말을 회피하던 타가미였지만, 시호가 그럴 거면 차라리 얘기하지 말라는 둥 언제나 말을 하다가 마는 타가미의 나쁜 습관에 울분을 토하며, 도서관에 있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주목하자 계속 불만을 터트리는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고서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수상한 미소를 띄운 채 그녀에게 내기를 하자고 한다. 내기에서 이기면 답을 알려주겠다고. 평소였더라면 시호가 내기를 하자고 했을 텐데, 수상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시호는 이번 문제에 꽤 고생을 하고 있었기에, 그 수상함을 알면서도 그의 내기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번에야말로 제가 이기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인 내기였지만 그 내용을 듣고서 시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타가미가 내건 내기는 놀랍게도, 시선게임.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가 둘 중 먼저 시선을 피하는 사람이 지는 내기란다. 어린애 같은 그 내용에 시호가 당황했지만, 타가미의 말에 따르면 현세에서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시호가 주저하자, 타가미는 그럼 됐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다. 시호는 그런 타가미의 팔을 붙잡는다. 타가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잡고 안더니, 고갯짓으로 제 맞은편에 앉게 시킨다. 정말로 그런 시시한 게임을 할 생각인가, 하면서도 시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의 말을 따른다.
게임은 타가미의 구호에 맞추어 시작한다. 타가미와 시호는 팔짱을 끼고서, 서로를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본다. 지루하기 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시호는 자기가 왜 이런 바보 같은 게임에 참가하고 있어야만 하는지, 제 신세를 처량히 여긴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이 게임이 무척 어려운 것이란 걸 몇 분 뒤에 깨닫는다. 타가미의 얼굴을, 그것도 그의 시선을 그저 한없이 바라보고만 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늘 자주 마주했을 얼굴인데 왜 이렇게 저 시선을 받고 있으면 얼굴이 붉어지는 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시호와는 반대로 타가미는 무표정하다. 시선에 특별히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니고, 언제나와 같은 눈빛과 표정인데 왜 자기는 이렇게 당황하고 있는가? 시호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타가미와의 이 유치한 게임(더 이상 유치한 것이 아니게 되었지만)에서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런 시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제가 먼저 그를 당황하게 하면 된다는 내용이다. 비록 ‘저 타가미’가 당황하는 모습을 제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다. 근거리로 다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시호가 그 판단이 어리석은 것이었단 걸 깨닫는 건 그녀가 그 계획을 시행하고 얼마 지나지 않고의 일이다. 시호가 몸을 살며시 숙이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자, 타가미는 무표정하게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뭐가 우스운지 피식, 하고 마른 웃음을 흘린다. 저를 바보처럼 대하는 그 모습에 발끈하여 좀 더 그를 도발할 생각으로 좀 더 몸을 타가미 쪽으로 가져다 대자, 타가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붙잡아온다. 그리고는 저 역시 고갤 숙여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의 주홍빛 눈동자가 이런 색깔을 하고 있었나, 순간적으로 느껴진 그 낯선 감각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두 사람의 거리가 거의 입맞춤을 할 거리임을 깨달은 시호는 깜짝 놀라서 그만 시선을 피하고 만다. 그러자 타가미는 여유롭게도 제 승리라고 선고한다.
반칙이라며 시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따졌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타가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시선을 계속 마주하란 것만이 룰일 뿐, 다른 걸 하란 말은 하지 않았다며 비겁하게 도망친다. 시호는 이런 내기는 무효라면서 다시 한 번 하기를 원한다고 했지만, 타가미는 지금 다시 해 봤자 또 제가 이길 것이라며, 네 얼굴이나 보고서 그런 말을 하라며 그대로 시호를 두고서 사라진다. 타가미의 등 뒤에 대고서 야, 기다려! 하면서 소리를 질렀지만 시호의 큰 목소리에 사에키가 도서관에선 조용히 하라며 주의를 준다. 시호는 씩씩대면서 문득 타가미가 얼굴을 보라고 했던 말에 거울을 들어다 보다, 새빨개진 제 얼굴을 보고 분하듯이 입술을 깨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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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에 타입 샘플: 네들님
네들님-아이실드21 콘고 아곤&콘고 운스이 양날개
2500자
네들님-제국AU, 쌍둥이 황제(폭군과 성군), 시종 드림주
네토리가 그 황제들의 시종으로서 발을 들인 건 수년 전이었다. 황제를 위한 공물로 각 지역의 미녀가 선출되어 매년마다 시녀로서 뽑힌다. 그 중에서도 얼굴이 반반한 이들만이 황제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네토리는 뽑힌 시녀들 중에서도 쌍둥이 황태자들과 나이가 비슷하단 이유로 일찍이 현 황제, 콘고 운스이와 콘고 아곤의 측근에 들었다. 그들은 어린 시간을 함께 보냈다. 신분차를 딛고, 같이 놀면서 보냈던 시간은 무척이나 즐거��다.
그러나 그것도 황태자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금으로서는 희미한 추억에 불과하다. 그들이 황제가 되고 나서, 네토리는 그들의 측근에서부터 부엌에서 일하는 시녀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네토리가 형제를 만나지 못한 동안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그들은 각각 폭군과 성군이라는 칭호를 얻고서 난리를 피우고 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곤이 저지른 일을 운스이가 잘 처리하고 있는 느낌. 그러나 아곤을 책망할 수도 없는 것이, 그의 황제로서의 능력은 운스이를 훨씬 뛰어넘을 정도이기 때문이란다. 그가 무슨 짓을 하던, 눈을 감아준다는 게 현 상태였다. 그리고 운스이는 그런 그를 옆에서 보좌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특유의 선량함은, 감히 아곤의 만행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이었다.
오래 전부터 그들을 봐온 네토리는 그게 최선의 방법이라는걸 잘 알고 있다. 어느 쪽으로 기울면 이 제국이 파멸을 맞이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아곤의 힘이 강하면, 제국은 스스로 멸망할 것이고, 운스이의 힘이 강하면 제국은 적국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리라. 그렇기에 네토리는 지금 이 상태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른 대신들이 황제의 자리가 둘이나 있다는 건 이상하다며, 남들 모르게 편가르기 싸움을 하고 있는 건 족히 알고 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되리란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네토리는 단순한 시녀. 그들의 일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다. 가뜩이나, 형제와 아주 먼 거리에 와버린 지금으로선.
네토리의 이동이 갑작스럽게 결정된 건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일의 성과에 따라서 승진의 기회가 주어지는 평가의 날. 보나마나 비슷한 곳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일하게 되겠지 싶었던 네토리는 어째서인지 황제들의 측근으로서 일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네토리는 다른 측근 시녀들과 함께 첫 출근을 했다.
상궁의 명에 따라 아곤의 침소로 향했던 네토리는 아곤이 여자를 끼고 잠든 것을 발견하고, 어딘가 모를 복잡한 감정과 함께 그를 깨운다. 아곤은 그를 깨운 것이 네토리임을 알더니 반가워했다. 예전의 코찔찔이가 아니더냐고. 네토리는 물론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발끈했다. 투닥거리면서 대화를 조금 한 뒤, 아곤은 왜 네토리가 이 곳에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이동이었기에 이유를 모르는 건 네토리 역시 매한가지. 아곤은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아무쪼록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되어서 다행이라며 황제로 즉위한 이후 쓸데없는 권리만 밀어붙여서 피곤했다며, 자기가 조금만 손보면 다 되는 걸 가지고 대신들이 시끄럽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전한 모습에 네토리는 안심한다.
한편 그 날 점심, 네토리는 또 다른 황제, 운스이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운스이는 아곤과는 달리 옛 친구를 만나고 나서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조금 곤란해할 뿐이었다. 아곤과는 다른 태도에 네토리는 의아해했지만, 운스이의 곁에서 차를 따르는 역할을 맡으면서 운스이가 말해준 것에 네토리는 사태를 이해한다. 예의 편가르기 싸움에서 운스이 파의 대신이 이 일을 꾸몄고, 그는 네토리를 이용하여 아곤을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낼 생각이라고. 그러나 제게는 아무런 힘이 없고, 아곤 역시 제 말을 믿어주지 않기에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운스이는 어쩌면 이것이 기회일지도 모른다며, 네토리에게 비밀스러운 부탁을 한다. 낯선 황궁에서 유일하게 친한 상대 중 하나가 네토리니까, 그를 설득시켜줄 수 있겠느냐고. 자기보다 훌륭한 능력을 지닌 아곤이 황제 자리를 떠나서는 이 나라는 패망한다고. 네토리는 운스이의 말에 고갤 끄덕였다. 단순한 우정 때문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저녁 시간이 되고, 네토리는 아곤의 명에 따라 그의 침소로 향한다. 주변인들이 황제에게 지명 받았다며 후궁이 되겠다고 수군거리는 와중에, 네토리는 운스이와의 약속을 떠올린다. 그러나 워낙 문란하단 말을 들었던 지라, 마음의 준비는 해두기로 한다. 아곤의 침소로 향하자, 아곤은 네토리에게 손짓을 하며 제 곁에 눕게 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그녀를 덮치듯, 그녀 위에 올라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곤이 몸을 숙이는가 싶더니, 곧 웃어 젖히면서 자기가 뭔가 할 줄 기대했느냐고 짓궂게 묻는다. 네토리는 얼굴만 새빨개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대를 안 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부 이상한 소문과 주변에서 하는 말 때문이라고, 네토리는 제 자신을 눌렀다.
아곤이 그녀를 부른 건 외로운 이 황궁에서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운스이는 형제이지만 아무래도 같은 황제의 입장이다 보니 못하는 이야기도 많고, 그는 아곤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라주어서 별 재미가 없단다. 네토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곤에게 운스이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들도. 아곤은 자기들 뒤에 숨겨진 음모를 듣고도 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어차피 자기가 쓸어버리면 되는 거지, 라는 식이었다. 운스이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아곤이 제 재능을 맹신한 탓에 일을 망칠 것을 우려했다.
네토리는 아곤에게 호소한다. 이번 사태를 그냥 넘어서는 안 된다고, 그랬다가는 아곤 자신에게도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아곤은 그러자 네토리에게 역으로 묻는다.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나라를 위해서인가, 네토리 자신을 위해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곤 자신을 위한 것인가. 네토리는 아곤을 위해서이기도,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다고 답한다. 그러자 아곤은 크게 웃어 젖히더니 네토리에게 제안한다. 네토리를 자신의 전속으로 삼는 대신에, 생각을 해주겠다고. 밤이고 낮이고 저를 위해서만 행동할 것을 명했다. 네토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러자 아곤은 씩 웃으면서,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다고 답한다. 처음부터 네토리가 제 손에 들어왔어야만 했더라고. 그렇게 아곤을 설득하기 위한 네토리의 고군분투는 막을 열어가는 것이었다. 이런 형태로 맞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하는 의문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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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사 타입 샘플: 인디고님
인디고님 - 사이코패스 코가미 신야
총 13000자 중 행위 전 4000자 기재
야경(夜景)
By. 카논(@do_u_darling)
최근에 들어, 저녁 시간은 유독 따뜻했다. 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일에부터였다. 코가미와 함께 같은 집, 같은 방에서 지낸 것도 어언 몇 개월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같은 공간에서 그와 숨을 쉬며 시간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아직 론에게는 새삼스러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새삼스럽다기보다는 부끄럽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와의 시간은 언제나 신선했다. 마치 그와 처음 만나고, 대화를 했던 그 때처럼.
따뜻한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헤드를 올려다보던 론은 손을 들어 타일 벽에 붙어있는 선반으로 향한다. 집어 든 것은 바로 어제 그와 함께 구매했던 바디워시다. 론에게 잘 어울리는 향이라며 코가미가 골라온 그것의 향기는 론이 좋아하는 과일의 향이다. 향기롭기 그지 없는 그 향에서 저를 떠올려주었다니 몇 번을 생각해보아도 괜히 볼이 붉어지는 일이었다. 플라스틱 용기의 펌프를 눌러 액체를 짜낸다. 오늘밤에도 침대에서 같은 향의 공기를 맡게 될 거라고, 저도 모르게 생각하고 만다. 침대에서 단순히 손을 잡고, 피부 너머로 서로의 숨소리와 체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이, 론이 얻게 된 새로운 행복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예정보다 긴 시간을 들여 샤워를 끝마친 론이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밖으로 나오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코가미가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다시 돌린다. 론은 마치 홀린 것처럼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그의 곁에 살며시 자리를 잡았다. 검은 가죽 소파가 살짝, 짓눌린다. 방금 전까지 뜨거운 물을 받고 있었기 때문인지 란제리 사이로 드러나는 맨살에 찬 공기가 와 닿았다. 코가미는 여전히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론은 열었던 입을 금방 다물었다. 대신에 그녀는 그의 옆모습을 찬찬히 살피며 관찰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턱선과 높고 길쭉한 코, 일자로 다물어진 입술은 부드러워보인다. 눈을 위쪽으로 올리자 보이는, 책을 읽느라 살짝 내리깔고 있는 눈동자의 빛깔은 오늘도 조금 우수에 젖은 듯 차가운 색이었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기색이 어려있다. 론이 그와의 생활을 행복하게 느끼는 만큼, 코가미 역시 그녀와의 나날을 늘 행복이라 생각하고 있으리라 론은 다시금 확신한다. 그 결론에까지 이르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그녀의 심장이다. 온몸에서 미열(微熱)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조금씩 뛰는 속도가 빨라져, 론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가슴 위로 가져간다. 살짝 주먹을 쥔 손 아래에서 두근거리는 심장의 진동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무슨 일입니까?”
고요한 가운데 들려온 목소리는 마치 지금의 분위기를 망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마냥 잔잔했다. 론은 그 목소리에 몽롱한 꿈에서 깨어난 듯 퍼뜩 정신을 차렸다. 두꺼운 책에 꽂혀있던 코가미의 시선은 이제 온전히 론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갤 돌린 채, 제 질문에 답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시선에 담뿍 담긴 애정을 느낀다. 그 시선을 더없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이 남자를 사랑해서, 이 남자에게 사랑 받게 되어서 너무나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론은 코가미의 따스한 시선을 받으면서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에게 대답해주기 위해서다. 밝게 웃으면서 아무 것도 아니에요, 분명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너무 좋아서 그���다던가, 그런 낯 간지러운 말은 채 부끄러워 감히 입 밖으로 내뱉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
하지만 다음 순간, 론은 제 행동에 스스로 놀라고 만다. 입술에 닿은 말캉하고 부드러운 그 물체. 그리고 금방 알아차리는 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곁에 있었을 코가미의 얼굴이 어느덧 제 시선 바로 앞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그의 입술에서부터, 아니, 온몸에서부터 그녀와 같은 향기가 훅 풍겨왔다. 제가 오늘 사용했던, 바디워시의 향기였다.
론은 몇 초도 되지 않아 마치 불에 데인 것마냥 입술을 떼낸다. 제가 충동적으로, 저도 모르게 행한 행위에 그녀의 얼굴은 잔뜩 놀란 고양이 마냥 눈을 동그랗게 떠서는 코가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것은 론 뿐만이 아니다. 입을 살짝 벌린 채 대담한 행동을 저지르고 만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두려워 금방 시선을 내려버렸다. 쉴새 없이 두근두근 뛰는 심장은 입 밖으로부터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세다. 코가미로부터 웃음소리가 들려올 거라 생각했다. 이런 제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나지막한 말을 들려줄 거라 믿었다. 평소의 코가미는 늘 그런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리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코가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어색한 침묵이 이어진다. 론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머뭇거리면서 눈을 다시 코가미에게 향한다. 그리고 제 시야에 들어온 모습에 론은 제 입술을 자연스럽게 풀고 만다.
드물게 볼을 조금 붉히고 있는 코가미는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론의 시선을 피한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멍한 얼굴로 론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당황한 것인지 그녀의 눈을 최대한 마주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아마 그 역시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론 자신이 화들짝 놀란 것만큼이나 그 역시 적지 않게 놀란 것이리라. 론은 푸스스 가볍고 밝게 웃음을 지었다. 코가미는 터져 나온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서 눈을 천천히 들었다. 우물쭈물 거리는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친다. 코가미의 푸른 눈동자에는 론의 머뭇거리는 얼굴이, 론의 초록빛 눈동자에는 코가미의 당황한 표정이 그대로 담겨져 있었다.
마치 그것이 신호가 된 듯, 침묵에 차있던 방에는 어느덧 화사하고 활달한 웃음소리가 가득 찬다. 꼭 웃음이 번진 것만 같았다. 한참을 마주보고서 웃다가, 론은 입술 가득 담뿍 미소를 지었다. 매일 일이 끝나고 나서 같은 저녁 시간을, 이런 별 거 아닌 일에 웃으며 지내는 생활이 무척 감사하다고 느꼈다. 행복이란 감정을 감히 말할 수 있다면 론은 단연코, 그와 지내는 이 시간을 일컬으리라.
한창을 서로를 마주보고 즐겁게 웃던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잦아든다. 이제 그들은 그저 시선을 함께 하고만 있다. 뚫어져라 서로를 바라보며, 비록 아무런 말은 하지 않지만 두 사람이 생각하는 내용은 분명 같은 것일 테다. 다시 찾아온 침묵에 몸을 맡긴 채, 누가 먼저 입을 열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제가 저지른 일이니, 자기가 화제를 바꾸는 게 맞다 생각하여 론이 천천히 입술을 뗀 그 순간, 코가미가 갑작스럽게 론의 턱을 붙잡아왔다. 론은 그를 올려다보며 가볍게 고갤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묻는다. 그러자 진지한 표정으로 론을 바라보며 한참 답이 없던 코가미는 대답 대신에 그녀에게 입맞춤을 선사해왔다.
론이 방금 전에 그에게 했던 그 입맞춤과는 다른 느낌이 드는 키스였다. 론이 했던 것이 조금 소극적이고 수줍었더라면 코가미의 것은 적극적이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온전히 바라고 있다. 열띤 입맞춤이었다. 그녀의 닫힌 입술을 제 입술로 밀어 열고, 그 안으로 혀를 내밀어 부끄러운 듯 숨어버린 그녀의 것을 말아 올렸다. 그와 처음으로 키스를 해보는 것도 아니면서, 론은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고야 말았다. 시야가 차단되고 나면 민감해지는 건 그가 탐하고 있는 혀에 대한 감각이다. 코가미는 그의 성격처럼, 론에게 대해주는 것처럼 정중하고도 섬세하게 제 혀를 놀린다. 그에게 그대로 리드되어, 론은 연신 그의 입맞춤에 대응해주며 가까스로 그를 따라간다. 열정적이지만 동시에 부드러운 키스. 처음으로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고 나누었던 그 입맞춤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론의 턱을 붙잡고 있던 코가미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온다. 얇디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에 론은 그만 움찔거리고 말았다. 별 일도 아닌데 괜히, 온 신경이 민감해진 것 같았다. 전부 방금 전 겪어버린 그 일 때문이다. 다시 뜀박질을 시작한 제 심장을 가리기라도 하듯, 론은 손을 들어 가슴 위에 올려둔다. 하지만 코가미는 그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는 쑥스러워 고갤 뒤로 돌리는 론을 그대로 따라가며 그녀의 윗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옅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론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이 단번에 아래로 떨어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론은 그에게 덮쳐지듯 소파에 등을 마주한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입술이 떼어진다. 제 턱에서부터 흐르는 미적지근한 액체는 그의 것일까, 그게 아니면 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너무나도 충족한 키스에 멍하니 코가미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코가미는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 론의 목을 타고 내려오는 그 액체를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갑작스럽게 목에 닿은 느낌에 론이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내뱉은 것은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그 소리에 자극을 받은 것처럼, 그녀의 목덜미를 핥던 코가미는 란제리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가냘픈 론의 쇄골에 대고 입을 맞추었다. 진하고 뜨거운 입맞춤에 론은 손을 들어 제 두 팔로 그의 머리를 꼭 껴안았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며 살갗에 닿을 때마다 론은 조금씩 몸을 움직이고, 그녀의 손가락은 그의 머리칼 사이를 헤집는다. 쇄골에 마주하던 입술을 떼낸 코가미는 제 얼굴을 론의 가슴에 파묻더니,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빼내어 그녀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그 말캉한 살의 감각이 그대로 손끝, 손바닥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가볍게 손가락 끝에 힘을 주고 주무르자 론은 곧바로 미세하게 떨면서 반응을 해왔다. 코가미는 그녀의 다리를 살짝 위로 젖힌 뒤, 부드럽고 상냥한 손길로 주무른다. 뜨거운 그의 체온은 언제 느껴도, 무척이나 기분 좋은 것이라 론은 가슴으로 꼭, 다시 코가미의 머리를 껴안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코가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갤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녀의 다리를 주무르던 손도 어느덧 멈춰있었다. 조금 상기된 얼굴로, 론은 갑자기 모든 행위를 그만 둔 코가미의 얼굴을 조금 의문이 섞인 채 바라보았다. 그러자 코가미는 빙긋 웃으며, 손을 들어 그녀의 따뜻한 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기분 좋은 온도에 론은 또 눈을 감은 채 그의 손에 제 얼굴을 더 가까이 밀어붙인다. 코가미는 낮은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침대로 갈까요?”
그 말이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 론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만 귀까지 빨개져서는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론에게서 허락을 받은 코가미는 잔잔한 미소를 띄우고 몸을 일으켰다. 엉거주춤 상체를 일으킨 그녀의 앞에 서더니, 그대로 제 두 팔로 그녀의 등을, 다리를 받치고 안아 올렸다. 돌연 자신이 공중에 떠있는 상태가 되자 론은 얼른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코가미는 그런 론의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은 무척 깊고도 진지해서, 그대로 빠져버릴 것만 같다. 코가미는 저를 올려다보는 론의 수줍은 얼굴을 보고 작게 웃으며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에스코트는 맡겨주세요.”
나지막하게 내뱉은 그의 목소리에 론은 새빨개진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짓는 게 고작이었다. 코가미는 천천히 발���음을 옮긴다. 분명 마음 속으로는 급할 텐데, 론이 놀라지 않게 하기라도 하듯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는 걸음은 지극히 조심스럽기만 하다. 이윽고 도착한 침실에 들어선 그는 혹여 론이 다치기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녀를 살며시 침대 위에 눕혔다. 시트에 누운 채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제 위로 올라와 시선을 아래로 떨구는 코가미의 눈을 바라본다. 그 눈동자가 내뿜는 뜨거운 빛에 홀려버린다. 그가 바라는 것을 그에게 전부 내어주고 싶었다. 코가미는 다시 고갤 내려 그녀에게 키스했다. 이번에도 깊고, 짙은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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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사 타입 샘플: 린님
린님 - 페이트 시리즈(페그오) 길가메쉬
총 12000자 증 행위 전 약 5000자 기재
미열(微熱)
By. 카논(@do_u_darling)
최근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길가메쉬가 그 사실을 문득 깨달은 건 예의 소녀가 먼저 그런 말을 해왔기 때문이다. 기상 높은 우르크의 국왕으로서의 일을 마치고 제 궁전에서 쉴 때면, 어김없이 길가메쉬는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총총히 뜬 별들을 바라보며, 떠올리는 것은 한 때 제 유일무이한 친우의 얼굴이다. 함께 신의 노여움을 사 저주를 받은 그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는 제게 마지막까지 상냥한 한 마디를 나누던 그 친우의 얼굴. 유일한 이해자였고, 늘 고독했던 그의 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들어온 자였다. 그런 소중한 이를, 제 눈 앞에서 보내고 말았으니, 그가 밤이 되면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자신은 병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에게 더 가치 있는 재보가 손에 들어오리라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를 위로하던, 그 친우.
“…오늘도, 밤하늘을 보고 계시네요.”
등 뒤에서 들린 친숙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길가메쉬는 고갤 돌렸다. 새하얀 튜닉을 몸에 두른 채 제 쪽을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은 오늘도 온화하기만 했다. 은은한 등불을 받아 목에서 반짝이는 굵직한 금 목걸이는 제가 바로 오늘 하사한 것이다. 낮에 제게 선물을 받고 기뻐하던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역시 저 목걸이는 이 소녀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길가메쉬는 말없이 다시 시선을 밤하늘에 박았다.
“잠이 오지 않아서 말이다.”
“……….”
소녀는 말없이 창가에 걸터앉은 그의 곁에 와서, 저도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밤의 신의 한숨만큼이나 미약하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와 소녀의 검고 긴 머리칼을 가볍게 어루만진다. 소녀는 흐트러지는 제 머리칼을 손으로 정리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길가메쉬에게 말한다.
“어서 주무시지 않으면 내일 폐하께 무리가 갈 거에요. 거기에 오늘밤은 유독, 바람이 차갑고요.”
저를 걱정해주는 소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달콤하다. 길가메쉬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웃음은 지극히 힘이 없다.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언제나 백성들의 앞에서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한없이 인자하고 강한 자태만을 보이던 그의 모습과는 정반대되는 얼굴이었다. 소녀는 맑은 눈을 반짝이며 잠자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그에게 중얼거렸다.
“폐하의 몸이 최우선이에요.”
“…백성들 앞에서 당당하게 서는 게,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니까. 짐도 잘 알고 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한다. 해가 떴을 때에는 제 왕으로서의 업무로 정신이 없어 생각을 잘 못하게 되지만, 이렇게 고요한 밤이 되면 그는 어김없이 창가에 앉곤 했다. 처음에는 지친 심신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힐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제가 다스리는 이 나라를 어떻게 해야 지킬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제 백성들을 도울 수 있을지, 그런 생각을 도모하곤 했다. 그러나 밤이 깊어갈수록, 그의 잡념은 점점 커지다, 이윽고 제 친우에 대한 생각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아직, 길가메쉬가 그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듯 했다.
소녀는 그런 그의 모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사색을 방해하기 싫은 것이리라. 예전부터 저 아이는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제 감정을 이해해주었다. 시끄럽게 시녀들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고, 그가 감정을 정리하는 것을 기다리며, 여전히 슬픔에 빠진 그의 심정을 이해해주었다.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가끔 처소를 들려 대화를 할 때면, 그녀는 다른 여인들처럼, 그의 처(妻)가 되기 위해 속이 보이는 내숭을 부리거나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는 일 없이, 가만히 제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다. 총명한 아이라, 한 국가의 왕이자 반인반신이란 신분을 지닌 그의 말에도 대답을 망설이는 일 없이 또렷한 답을 돌려주곤 했다. 모종의 그게, 고독하기 짝이 없던 길가메쉬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위로가 되었다.
“……….”
길가메쉬의 등을 따뜻한 온기가 감싸왔다. 한창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내려보니, 소녀의 가느다란 팔이, 단단하게 저를 안아주고 있음을 깨닫는다. 지극히 이 소녀다운 방식이다. 길가메쉬는 손을 올려 제 가슴께에 내려오는 소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은, 언제 느껴도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린, 너야말로 이만 쉬어야 하는 게 아니냐? 오늘 낮에는 성내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시두리와 함께 시장을 나섰다고 들었다만.”
조용히 소녀에게 그렇게 읊조리자, 소녀는 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넣으면서 언제나처럼, 총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백성을 위해서 일하시는데, 저라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요. 폐하가 느끼시는 피로나 힘겨움에 비하면, 제 일은 잠깐 눈을 붙이면 나아지는 피곤함이에요.”
역시 이 소녀는 제 아내에 상응한 여인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분명 한낱 흔해빠진 무희에 불과하지 않았었는데, 어느새 그는 그녀에게 제 마음을 용서하고 있었고, 지금에는 그의 아내가 되어 저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물론 단순한 대화 상대에 불과했더라면 거기에서 그쳤을지도 모른다. 불로초를 찾으러 갔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몇 안 되는 존재.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린이란 소녀였다.
그녀와의 첫만남을 기억한다. 모두가 제 눈에 띄고 싶어하여 춤에 집중하기는커녕, 주목을 이끌려고 애쓰던 그 가운데, 유일하게 진심으로 제게 주어진 무대와 춤을 즐기고 행복해하던 소녀의 미소가 도리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늘하늘하고 우아한 춤사위를 자랑하던 소녀는 이윽고 왕의 시선을 받아 거처를 옮겼다. 제가 믿는 신하 중 하나인 시두리에게 소녀를 맡기고, 낮이면 그녀를 찾아가곤 했다. 소녀는 그가 찾아올 때면 언제나, 무대에서 보이던 그 밝고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폐하께서는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고 계세요.”
린의 목소리는 차가운 밤 공기 안에서 맑게 울려 퍼지며, 길가메쉬의 마음으로 곧장 스며든다. 길가메쉬는 잠자코 눈을 감고 그녀가 제게 선사하는 따스함을 느낀다. 뜨겁지는 않지만, 지극히 미약한 열기이지만, 편안함과 안도감을 주는 이 열기를, 길가메쉬는 꽤 좋아했다.
“폐하께서 짊어지고 있는 짐이, 저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는 걸 저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가끔은, 폐하께서 안고 계신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때도 필요해요.”
“…린.”
저도 모르게 조용히 소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를 껴안고 있던 소녀의 팔에서 조금 힘이 풀렸다.
“저는 폐하께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아요. 폐하의 감정을 감히 이해한다고도 하지 않아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조금 쉬시는 게 좋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언제까지나 제 친우의 죽음이 가져온 슬픔의 늪에 빠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자신을 바쁘게 하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적어도 왕의 모습으로 있을 때만이라도, 제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숭고한 바빌로니아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그 사실을, 소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길가메쉬는 작게 웃었다. 몇 분 전 지어 보였던, 힘없는 웃음소리가 아닌 안도의 웃음이었다. 이렇게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소녀를, 저는 이 세상의 수많은 여인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길가메쉬는 저를 안은 소녀의 팔을 가볍게 풀어내고, 그는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밤하늘을 등진다. 소녀는 그의 작은 웃음에 안심한 것인지, 언제나처럼 예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셨나요?”
“…아아, 네 덕분이다, 린. 감사를 표하지.”
“아니에요, 그게 저의 역할이니까요. 이 우르크를 지키는, 폐하의 곁을 지키는 아내로서의,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런 말을 하는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길가메쉬는 손을 뻗어 소녀의 볼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제 손이 닿자 그녀는 조금 쑥스러운 듯, 고갤 살짝 돌리면서도 결코 그의 손을 피하지는 않는다. 부드러운 감촉이 언제나처럼 정겹다. 린은 그를 올려다보면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희미한 등불을 받아도, 그 눈동자만큼은 언제나처럼 아름답게 반짝인다.
이번에는 다른 손을 들어 린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제 어깨 위애 놓인 그의 손에 손가락을 얹어온다. 지극히 별 거 아닌 행동임에도, 하나하나 길가메쉬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주고, 마음을 달래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이 소녀는 더없이 따스하다. 길가메쉬는 그 따스함에 밤공기를 맞아 차가워진 제 몸이 조금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길가메쉬는 말없이 소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한 품으로 들어오는 그 연약한 몸에서부터 느껴지는, 미지근한 열기는 실로 강하기만 하다. 린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마치 괜찮다고 말이라도 해주듯이, 그의 인생에 나타난 모든 일이 전부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주듯이, 제가 있으니 그가 외로울 리는 없다고 해주듯이. 부드럽고 상냥한 손길이었다.
“…엘키두의 말이 맞았다.”
린의 몸을 폭 안은 채, 길가메쉬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린, 너는 지극히 순수하고도, 완전한 인간이다. 짐이 여태까지 만났던 그 어떠한 인간보다도, 가장 인간다운 영혼을 지니고 있다.”
“폐하도, 제가 여태까지 만난 그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길가메쉬는 눈을 감은 채 그 목소리를 음미한다. 소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제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소녀는, 그 작은 몸으로 길가메쉬의 모든 걸 전부 받아주고 있었다.
길가메쉬의 생각은 곧 행동으로 이어진다. 안고 있던 팔을 풀어다, 몸을 숙여 소녀의 턱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아는 듯, 린은 눈을 감고 그를 기다린다. 그 모습이 또 사랑스러워서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길가메쉬는 이내 입술을 겹쳤다. 소녀의 말캉한 입술은 그의 입맞춤을 거절하는 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다. 마치 혼인을 하기 전의 그의 모든 모습을, 그녀가 전부 받아주었던 것처럼.
제 혀로 그 연한 입술을 열어젖히고, 그 안을 가볍게 훑어 올린다. 부드럽지만 진한 키스가 이어진다. 소녀의 입안을 쓰윽 밀어 올리던 혀는 이윽고 그녀의 혀를 어루만진다. 그러자 소녀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서투르게 제 혀를 그의 것에 감쌌다. 린은 눈을 감은 채 그와의 입맞춤에 열중하고 있다. 살짝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연상시키게 했다. 길가메쉬는 그녀의 얇은 튜닉 사이로 드러난 다리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러자 린은 그의 손에 깜짝 놀란 듯, 움찔거렸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길가메쉬는 그쯤에서 입술을 떼냈다. 농후했지만, 그렇게 길지 않은 입맞춤이었다. 마치 자석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듯, 두 사람의 입술은 서로를 아쉬워하며 뒤로 물러난다. 길가메쉬는 제 입맞춤으로 인해 붉어진 린의 볼에 가볍게 입맞추고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린, 짐이 오늘 너를 탐해도 되겠느냐?”
그 말이 어떤 의미를 뜻하는지, 린은 잘 알고 있었다. 린은 부끄러운지 시선을 아래로 하면서도, 기쁘다는 듯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띄운 채 고갤 끄덕였다. 역시 조금은 이른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무리를 할 필요는 없다고 하려는 그 때, 린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내리고 있던 시선을 올려 길가메쉬의 붉은 눈을 똑똑히 마주한다. 그리고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면서 제 두 팔을 그에게 벌려보았다.
“폐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고 저는 맹세했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 한 마디에는 강한 그녀의 의지가 담겨있었다. 소녀는 작은 심호흡을 한 뒤, 다시금 길가메쉬를 향해 이번에는 언제나와 같이, 강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폐하를 안게 해주세요.”
길가메쉬는 그 말을 듣고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소녀의 몸을 탐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그녀가 저를 완전히 받아주고서, 진정한 부부로서의 길을 나아가려는 것을 대견하게 여겼으리라.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내려보다가, 길가메쉬는 이번에는 그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쪽, 하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단번에 그녀를 안아 올렸다. 길가메쉬에게 안긴 린의 얼굴은 여전히 조금 부끄러워하는 듯 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길가메쉬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린의 표정에서는 긴장감과, 자그마한 기대감이 서려있다. 길가메쉬는 그런 그녀의 위에 가볍게 올라가서는, 다시금 이마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린.”
린은 그의 말에 안도한 것처럼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입술이 살포시, 조심스럽게 열린다.
“…언제든지, 괜찮아요.”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이제 긴장감은 보이지 않았다. 길가메쉬는 그런 그녀에게 이윽고 몸을 숙이고, 방금 전 채 하다 못한 입맞춤을 이어서 한다. 부드럽고 상냥한 입맞춤이다. 천천히, 마치 그녀 자신을 탐미하기라도 하듯이 섬세한 키스가 이어진다.
린과의 입맞춤을 할 때마다 길가메쉬가 느끼는 건 채 피어나지 못한 꽃봉오리였다. 그 꽃봉오리는 그를 진하고 달콤한 향으로 부드럽게 감싸 올리며, 그가 느끼는 긴장감과 외로움을 단번에 녹게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꽃봉오리는 언젠가 피어 오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오늘밤이 되고 말 것이라는 걸 린도, 길가메쉬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부부가 된 기간은 꽤 오래 되었지만, 여태까지 길가메쉬는 린을 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 어리고 서툰 린을 생각하는 길가메쉬의 상냥함이기도 했으며, 제게 모든 걸 털어놓을 길가메쉬의 준비를 기다리는 린의 배려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개화(開花)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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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다 타입 샘플: 일상님
일상님 - 명탐정 코난 아무로 토오루 일기
2일
: 본 일기는 신청서에 따른 작업이 아닌, 많이 신청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제가 서비스로 작성해드린 것입니다.
12월 23일. 토요일
오늘도 바쁜 하루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두어 가게는 정신이 없다. 크리스마스 한정 메뉴로 오늘부터 3일간 한정으로 케이크를 파는 건 물론이고, 새로운 음료를 만들어서 파는 것까지 하고 있으니, 익숙지 않은 새 음료 제조에 곤란함을 느끼고 있다.
그래도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게 있다면, 어제 히메가 먼저 크리스마스에 함께 식사를 하자고 말해준 것에 대한 걸까. 그녀가 먼저 내게 그런 말을 걸어주는 건 정말이지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내심 놀랐다. 이전에 나와 함께 갔던 레스토랑에 또 가고 싶다고 했다. 마음에 들어준 것인지, 그 때 먹었던 스테이크를 또 먹고 싶다고 해주었다. 물론 나의 답은 당연히, 오케이였다. 크리스마스 오전에 임무가 있는 건 그리 정겹지 않았지만, 히메 역시 오전까지는 근무를 해야 한다고 했으니 피차일반이었다. 하여간, 그런 날까지 일을 하게 한다니 괜히 ‘검은’ 조직이 아니다.
요즘 들어 신경이 쓰이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 남자가 예전과는 다르게 집에 자주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처음으로 몸을 셋이서 섞고 나서, 능청스럽게도 집에 와서는 소파에 앉아서 히메와 함께 나를 기다리기도 했는데, 최근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는 무척 좋은 일이었지만,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그 남자’니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는 게 원통하다.
12월 24일. 일요일.
최악의 기분이다.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오늘밤은 히메와 단 둘이 보낼 생각으로 케이크를 사다가 집에 돌아왔더니, 요즘 보이지 않던 그 남자가 있었다. 이미 케이크를 사다가 히메의 곁에 있었다. 내가 너무 늦어서, 히메가 외로워할 까봐 먼저 와서 그녀와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아는 건 너무나도 쉬웠다. 만일 그 말대로라면, 일부러 케이크까지 사서 집에 찾아올 리가 없었다.
히메와 단 둘이 보낼 생각이었는데, 방해꾼이 들어와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히메는 이대로 좋은 모양이었다. 오키야를 떠나 보내고 난 뒤에,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셋이서 보내니까 꼭, 예전에 라이나 스카치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때가 떠올랐다고. 그건 무척이나 위험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라이에 대한 언급을 하지 못하게, 화제를 돌려서 주의를 끄는데 성공했다.
히메가 오키야가 죽은 라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이미 무너져버렸던 그녀가, 그 사실에 충격을 받으면 어떡하지?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아예 그걸로 인해 나에게만 의지해주었으면 하는 내 자신이 있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내일 크리스마스는 단 둘이 보내기로 했으니, 저 남자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히메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고민해야겠다. 그녀는 무엇을 받아야 기뻐할까? 안지 오래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해 씁쓸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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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다 타입 샘플: 페아님
페아님-은혼 사카타 긴토키&드림주 일기
3일
2월 2일.
오늘은 절분의 날이라서 장사를 할 날이라고 말하고, 여느 때와 같이 꼬맹이가 찾아왔다. 그냥 길거리에 있는 것보다 요로즈야에 와서 자리를 펴는 것이 더 장사가 잘된단다. 매일매일 찾아오기에 익숙해지기도 익숙해졌지만, 이 꼬맹이가 요로즈야에 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지는 게 무척 좋다고 생각했다. 뭐, 카구라나 신파치도 그 꼬맹이를 꽤 반기고 있고.
절분이기도 해서 점 좀 봐달라고 했더니 오늘도 나한테만 유독 복채를 톡톡하게 받아냈다. 이 녀석, 평소에 우리 가게에서 점집을 차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사���게 생각해야지! 저번에 길거리에서 점을 보다가 불법 상업 행위라고 경찰서에 끌려간 걸 도와준 것도 바로 나인데! 더 어이가 없는 건 카구라와 신파치는 공짜로 봐줬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항의했더니 카구라와 신파치의 분까지란다. 아니, 그 녀석들의 분까지 왜 내가 내야 하는 거지? 그래, 백 보 양보해서 그건 좋은데, 그건 상관없는데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1인당 1만엔이라고 하면서 복채를 3만엔으로 책정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내가 거,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긴상도 긴상대로 불쌍한 사람인데,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사정사정했더니 꼬맹이는 9천엔을 뜯어갔다. 귀신 같은 녀석. 점은 내일 봐준다고 했으니, 조금 더 지켜보자. 이 녀석, 점의 내용이 얼토당토않으면 이 긴상도 가만두지 않을 거에요.
2월 3일.
오늘은 예의 요로즈야에 들려서 자리를 펴고 왔다. 그 곳은 의외로 벌이가 좋은 곳이다. 괜히 거리에 앉아있다가 경찰에게 쫓길 일도 없고, 의외로 아저씨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서 온 김에 점 한 번 보시겠냐고 물어보면 다들 금방 넘어온다. 나에게 있어서도 무척 좋은 곳이다.
물론,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가는 건 아니다. 그런 경제적인 이유라면 굳이 아저씨네가 아니어도 괜찮으니까. 아저씨나, 카구라, 신파치와 함께 지낼 수 있는 그 시간이 내게는 무척이나 즐겁다. 시끌시끌한 게 무척 기분 좋다고 느낀 건 언제부터였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저씨를 만나고 나서부터 그렇게 느끼게 된 것 같다. 물론 아저씨에게 그런 말을 하진 않는다. 아저씨가 분명 놀릴 테니까. 아저씨에게 그런 약점을 잘못 잡히면 그 비겁한 아저씨가 두고두고 이용해먹을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아저씨에게 최대한 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게다가, 나의 과거나 내 상태를 알면 분명 아저씨도 예전처럼 나를 대해주지 못할 것이고.
나는 지금 생활에 무척 만족하고 있고, 또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바보 같고 시끄럽고 어이없는 일이 있더라도, 자꾸만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게다가 아저씨는 딱 잘라서 말하면 돈도 달라는 대로 주고 말이지.
내일도 아저씨네에서 자리를 펴볼까. 아저씨의 점괘도 내일은 제대로 봐줘야지. 조금 장난을 쳐보는 것도 재밌겠다.
2월 4일.
이 꼬맹이를 나는 가만두지 않을 거다. 오늘은 드디어 나의 차례가 되었는데 이 꼬맹이가 글쎄 돈을 먹고 튀어버렸어요! 긴상의 소중한 9천엔을 손에 들고 말이야! 그래, 나중에 듣고 보니까 꼬맹이에게 중요한 일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거 약속과 말이 너무 다르잖아?! 게다가 중요한 일도 별 거 아니고 길고양이 구경하기라면서?!
결국 저녁에 되어서야 나는 꼬맹이에게서부터 점을 볼 수 있었다. 연애운에 대해서는 최악이라고 평하는데 어째서인지 거짓말인 것만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모든 올해의 운세가 최악이라고 말했지만. 꼭 사기를 당한 기분이다. 꼬맹이에게 이런 사기를 당하는 건 한두 번이 아니고 점 자체가 사기란 걸 알고 있지만 이건 정말이지 사기꾼의 사기에게 사기를 당한 기분이라고!
복채를 돌려달라는 말을 했지만 기각 당했다. 꼬맹이 녀석, 돈에만 눈이 시퍼래가지고. 요즘 애들은 이게 문제야. 이게 바로 물질만능주의의 폐해라고. 그러니까 그런 어린 녀석까지 눈에 円 표시를 띄우고 있지! 긴상과 같은 어른들은 후대의 일이 걱정입니다, 엄청 걱정이에요!
그래도 점을 다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꼬맹이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 것에 대해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녀석,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길고양이’를 만나러 간 건 아닌 것 같은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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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다 타입 샘플: 졍님
졍님 - 우타프리(노래의 왕자님) 잇토키 오토야 육아일기
4일
4월 4일. 화요일. –제나
하루쿠가 아침부터 열을 내는 바람에 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무래도 심한 감기에 걸린 듯 했다. 언제나 몸이 약한 아이라서, 걱정이 많이 된다. 히마리만 혼자 학교로 보내고 나서, 아이에게 약을 먹이고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주었다. 하루쿠가 좋아하는 책이다. 어린왕자라던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던가, 몇 번이고 읽어줬을 텐데도 하루쿠는 무슨 책이 좋냐고 물으면 어김없이 그 책들의 이름을 내뱉는다. 언제나 밝은 꿈을 꾸는 게 꼭 오토야를 닮았다.
내 손을 꼭 붙잡고 겨우 잠든 하루쿠는, 오늘은 학교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시간인데 가지 못했다며 많이 우울해했다. 그런 하루쿠를 위해서 오랜만에 피아노 앞에 앉았다. 하루쿠는 피아노 소리를 좋아한다. 피아노를 치면 조금 어둡던 얼굴에도 금방 밝은 빛이 돌고, 신이 나서 노래를 하기 시작한다. 학교 대신에 엄마랑 같이 합창 연습을 할 수 있었다고, 내 피아노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하고서는 밝은 표정으로 그런 말을 샐쭉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합창 대회가 있다고 했던가. 오토야와 일정을 맞추어서 그 날만큼은 꼭 참석해야지.
오후에 수업이 끝나 돌아온 히마리의 손에는 예쁜 벚꽃 가지가 들려있었다. 오빠에게 주려고 꺾어왔다며, 높은 곳에서 가져왔으니 칭찬해달라고 우쭐거렸다. 학교에서 있던 일을 들어주면서, 벚꽃을 하루쿠의 방에 장식해두었더니, 하루쿠도 히마리에게 고맙다고 하며 얼굴이 벚꽃처럼 환해졌다.
4월 5일. 수요일. –오토야
히마리도 이제 자기가 갖고 싶다는 걸 자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다. 오늘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마론의 새 장난감을 사러 가잔 말에 펫샵에 들렸더니, 히마리는 한참을 고양이들이 있는 쇼윈도에서 우뚝 서서는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돌아가자는 제나의 손을 끌고 가서는,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강아지인 마론이 있으니 고양이까지는 괜찮지 않겠느냐, 라는 제나의 말에 히마리는 고갤 내저으면서 자기는 꼭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한껏 주장했다. 평소에 이것저것 사달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끈질긴 히마리는 처음이었다.
난감해하는 제나를 구해주기 위해서 다가갔던 나에게까지 “파파도 가족이 잔뜩 생기면 기쁘지?”와 같은 말을 하면서 눈을 빛내고 있었으니. 꼭 나라면 자신의 편이 되어주리라고 굳게 믿는 듯 했다. 그 눈에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나는 웃으면서 그렇다고 대답해주었다. 아이가 원하는 걸 들어주는 건, 중요하니까. 어쩌면 내가 어릴 때 그러지 못해서 더욱 이런 부탁에 약한 걸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원하는 걸 주는 게, 부모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하니까. 적어도 나의 아이들은 원하는 걸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준비가 있어 당장 데려오진 못했지만, 허락을 받아 히마리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루쿠도 새 애완동물이 생긴다는 말에 어딘가 모르게 신나 보였다. 다행이다.
4월 9일. 일요일. –오토야
오늘은 드물게 일이 없는 날이라서, 집에서 쉬면서 다음달에 있을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었더니, 아이들이 내 곁을 기웃거리면서 관심을 가져왔다. 덕분에 기타 연습과 함께 노래 연습을 하려고 했는데 조금 뒤쳐지고 말았다.
기타를 매만지는 내 손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아이들은 별 거 아닌 질문을 해왔다. 내가 뭘 할 때 제일 즐거운지, 뭐를 제일 좋아하는지, 뭐를 제일 먹고 싶어하는지. 엄마의 어디를 제일 좋아하는지 등등. 솔직히 물어볼 당시에는 왜 이런 걸 물어보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의아함이 들었지만, 저녁이 되어 이렇게 일기를 쓰다 보니 그 이유를 조금 알 것만 같았다. 평소에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는 나에 대해, 아이들은 알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내가 대답을 해줄 때마다 어째서 그런지를 물어오는 건 히마리 쪽���었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건 싫어하느냐고 물어보는 건 하루쿠 쪽. 아직 알고 싶은 게 많은 어린 아이들이라서 그런지, 아이들의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결국 연습은 거의 못했다. 그래도 아이들의 환한 얼굴을 보았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제나에게 다음주 주말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서 연주회를 하자 했더니 제나 역시 좋은 생각이라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다음주엔 내 멋진 모습을 보여줘야지. 너희 아버지가 이런 사람이라고, 알려줘야지. 나와 제나를 닮아 노래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니까, 분명 좋아할 것이다. 주말이 기대된다.
4월 11일. 화요일-제나
정말이지 정신 없는 날이었다. 오토야의 생일인 오늘, 하루쿠와 히마리,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깜짝 파티를 준비했다. 오토야가 제일 좋아하는 카레를 만들고, 하루쿠와 히마리와는 함께 케이크를 꾸몄다. 아이들은 파파의 생일 케이크를 자기들이 꾸미게 된 게 처음이라 무척 신나 했다. 오토야가 좋아하는 것만 차린 생일상, 우리는 오토야가 오는 걸 숨죽이고 기다리다가 그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폭죽을 터트리면서 반겼다. 오토야는 깜짝 놀라서 그만 뒤로 넘어져버렸다. 우리의 계획대로 깜짝 파티는 성공했다.
하루쿠와 히마리는 학교 돌아오는 길에 늦는다더니, 오토야에게 해바라기 꽃다발과 함께 선물을 주었다. 어쩐지 하루쿠가 자기 방에 못 들어가게 하더니, 그런 걸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오토야는 조금 놀란 듯 했지만, 무척 기뻐하면서 눈물 섞인 웃음을 지어주었다. 아이들도 오토야가 기뻐하자 자기들의 계획이 대성공 했다면서, 한껏 신이 나있었다.
나 역시 오토야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태어나줘서 기쁘다고, 나의 마음을 전하자 그는 내게 입맞춰주었다. 언제나와 같이 따뜻한 입맞춤이었지만, 그의 말에서, 모습에서, 그 입맞춤에서, 행복함을 느낄 수 있어 기뻤다. 오토야는 환하게 웃으면서 저야말로 고맙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아이들과 함께 조금은 정신 없지만,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오토야, 생일 축하해. 언제나 많이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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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체 타입 샘플: 졍님
졍님 - 우타프리(노래의왕자님) 잇토키 오토야 편지
4장
제나에게.
안녕, 제나. 너의 스물 세번째의 생일을 축하해.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하는 건 오랜만이라 그런지 부끄럽네. 생각해보니 우린 수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글로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인 것 같아. 제나의 생일에 넣어주던 카드처럼 짧은 내용이 아니라, 이렇게 길게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이라서 어색한 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말로서는 분명 하지 못할 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굳이 글로 남기기로 했어. 제나의 앞에 서면, 해야 할 말이 뭔가 정리가 될 것 같지 않아서……. 조금 길어지겠지만, 읽어줄래?
이런, 분명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글로 쓰려고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건데, 처음부터 이래선 아무런 의미도 없겠다. 행동이 먼저 앞서버리는 건 나의 나쁜 버릇이지. 알고 있고, 이것을 고치려고 하는데 제나의 앞에서는 그게 잘 되지 않더라고. 이제 내년이면 곧 부부가 될 사이인데, 제나에게 어울리는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제나와 함께 있으면, 나 자신이 진정한 내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걸. 그래서 자꾸 긴장이 풀리는 걸지도 모르겠어.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 제나에게 생일 축하를 한다고 글로 처음으로 전했던 게, 우리가 학교에서 만났을 때 이후였지. 내가 도와주었던 아이가 학교에서 같은 교실에 앉아있었던 그 때를 떠올리면, 어쩌면 우리의 사이는 그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돼. 그런 말이 있잖아. 우연이 겹치고 겹쳐서 필연이 된다, 라는 말. 그런 대단하고도 사소한 우연이, 제나와 나의 만남을 이끌어주었지. 그리고 함께 오디션을 준비를 하기도 하고, 같이 점심을 먹기도 하고. 언제나 제나는 그런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힘을 내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 숙제를 잊어버린 나를 도와주기도 하고, 어려운 과제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기도 했고 말이야. 그런 제나를, 언제나 눈부신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더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던 걸지도 몰라. 그리고, 그렇게 성실하고 착한 제나를 더욱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학교를 다닐 때에는 그 외에도 물론 이런저런 일이 많았지만, 내가 정말 잊을 수 없는 건 제나가 수영장에 빠졌을 때야. 제나가 그 때 눈을 뜨지 못했으면 어쩌지, 하고 아직도 내 안에서는 강한 불안감이 되살아나는걸. 기껏 친해지고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그 아이가,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니. 그게 무서워서, 너무나도 무서워서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그래서 나는 네가 그 때 눈을 떠주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제나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서 깨어났을 때, 얼마나 안도했는지 몰라. 조금 이기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 너와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을 테니까. 생각해보면 그 때가 처음이었어. 내가 제나를, 정말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게. 제나와 함께 하던 시간에서, 어느새 제나가 내 안에서 큰 존재로 자라고 말았다는 걸, 그 때 깨달았으니까.
그 다음으로 뜻 깊은 사건이라면, 참 여러 가지가 떠오르지만 지금 떠오르는 생각은 제나도 잘 알고 있던, 오진 해프닝이야. 기억하고 있어? 건강검진 때, 내가 곧 죽는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그 사건. 뭐, 결국에는 오진이었으니까 다행이었지만……. 아하하, 나중에 토키야에게 우리 둘 다 너무 순진하다고 한숨 소리를 듣고 말았어. 왜 그런 걸 기억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러게. 제나에겐 제대로 말하지 않았었네. 그러니까 이번 기회를 빌어서, 얘기할게. 꼭 들어줘.
나는 그 때 정말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한 달 밖에 없는 줄로만 알았어. 그래서, 그 시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밤낮으로 연습을 하고, 어떻게든 제나와 페어를 맺었잖아. 그렇지만 내게 남은 목숨은 이제 한 달. 나 때문에 제나에게 피해가 가는 건 죽어도 싫었어. 제나의 꿈을 내 손으로 부숴서는 안 된다고 느껴서, 나는 그렇게 말했던 거야. 제발 나 대신에 다른 사람과 페어를 맺어달라고. 하지만 제나가 절대 안 된다고 고갤 저으면서, 울먹이면서 끝까지 나와 함께 하겠다고, 오디션을 나와 꼭 맞이하고 싶다고, 내 꿈과 제나의 꿈이 하나가 되어서 결코 떼놓을 수 없으니까 그건 불가능하다고, 그렇게 말해준 그 때, 사실 무척이나 기뻤어.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나도 역시 제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아. 제나의 존재가 내 안에서 너무나도 커져서, 이제 내 음악에서 제나가 없으면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걸 그날에야 깨달은 거야. 그건 참 슬프고도 행복한 일이었지. 뭐, 물론 내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해였고 오진이었다는 걸 알아서 다행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해프닝이라 웃음이 나오는 일이기에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 맞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나와 같은 길을 걷고 싶다는 내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은 일일지도 모르겠어. 결국에는 그것이 단순한 음악의 길이 아닌, 인생의 길을 함께 걷고 싶다고 생각하기에까지 이르고 만 거야. 그리고, 나의 그 꿈은 이제 내년에 이루어지게 되었지. 나의 인생을 제나와 영원히 함께 보내게 되는, 그 꿈을 말이야.
사실 이런 이야기는 말로 하는 게 좀 더 와 닿을지도 모르겠지만, 제나의 반응도, 나 역시도 많이 부끄러워서 글로 남기게 되어버렸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말이야.
하지만 제나, 꼭 기억해줘. 너와 보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나에겐 더 없는 추억이고, 행복한 기억이라는 걸. 내가 내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준 사람은 제나 뿐이고, 제나를 영원히 행복하게 해줄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걸. 내가 프로포즈를 할 때, 했던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야. 그건 진정으로 내가 제나를 사랑하기에, 제나의 모든 것을 내게 맡겨달라고 한 그 말을 말이야. 인생을 함께 걷자고 한 그 말을, 오래오래 기억해주었으면 해.
아무쪼록 제나, 오늘은 정말 정말 생일 축하해. 오늘은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주어서, 고맙다고, 나도 감사하는 날이야. 내년에도 근사한 생일을 맞이할 수 있기를. 그 때에도, 나는 네 곁에 있을 테니까. 사랑해, 제나.
새하얀 눈처럼 맑은 너를 떠올리며, 잇토키 오토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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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체 타입 샘플: 옴님
옴님-앙스타(앙상블스타즈) 모리사와 치아키 편지
4장
하리에게.
하리, 잘 지내고 있어? 유성대의 모리사와 치아키야. 제일 먼저 말해두지만, 이 편지를 네가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네가 아직 이 주소에서 살고 있는지 조차 모르니까. 만약 이 편지가 잘못된 주소로 갔다면 그냥 버려주세요. 그러나 만일 하리 네가 이 편지를 받게 된다면, 부디 끝까지 읽어줬으면 해. 뭐, 내 마지막 부탁이라고 생각해줘.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 제일 먼저 걱정되는 건 너의 상태야. 예의 사건 이후로 네가 불현듯 유메노사키를 떠나고 난 뒤, 이 동네를 떠나고 난 뒤, 나뿐만 아니라 유성대 모두가 걱정하고 있어. 미도리 녀석도, 무척 너를 그리워하고 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기껏 친해지고 마음을 튼 녀석이 갑작스럽게 사라지면, 누구나 그런 감정이 들기 마련이겠지.
워낙 네 감정에 대해 말을 안 하고 있던 너였기에 더욱 그 걱정이 커. 팀원의 부조화로 인해 하나의 유닛이 해체되던 사건에, 그런 끔찍한 폭력사건이 배후에 숨겨져 있을 거라곤 우리 모두 모르고 있었으니까, 가뜩이나 네겐 더욱 충격이 컸겠지. 네가 친하게 지냈던 그 녀석이 속해있던 곳이었으니까, 더더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늘 평소와 같은 태도를 보였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진 이후에도 너는 무덤덤하게 할 일을 해나갔어. 그게 전부 우리의 무대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임을 알았더라면, 나는 리더로서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네게 쉬라고 말했을 텐데.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나도 너의 그 담담한 모습을 보고, 괜찮겠다고 안이한 생각을 하고 말았어. 어쩌면 나 역시 그 일로, 그리고 우리의 무대로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다.
참 우습지, 나는 분명 너를 전부 이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는 네 마음을 단 한 치도 읽지 못했으니까. 아니면 네가 너를 너무 편하게 여겨서, 네가 곁에서 도와주는 걸 당연하게 여겨서,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이래선 리더 실격이지. 담당 프로듀서 역시 우리 유닛의 일원이나 다름없는데, 나는 내 눈앞의 상황에 정신이 팔려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어. 리더로서, 팀원의 관리를 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당연한 건데 말이다.
그 날, 네가 갑작스럽게 학원을 떠나기 전, 연습이 끝난 그 길에 나를 붙잡았던 너를 기억하고 있어. 드물게 너는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었지. 나는 너의 말을 들어주려고 했지만, 너는 결국 별말 하지 않고 무대를 힘내라는 말만 하고 사라졌고. …그 때, 너의 그 부자연스러운 표정에 담긴 감정을 내가 읽어냈어야만 했어. 괜찮다고, 별 거 아니란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알아볼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 무대가 끝나고 나서 물어봐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 ���의 무대는 우리 유성대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큰 의미를 가진 것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너 역시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내게 말을 하지 않은 것이겠지. 실은 괜찮지 않을 텐데, 괜한 말을 내게 해서 무대를 망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거겠지. 그 때엔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이제야 와서 깨닫게 된다는 건 정말 우스운 일이야. …그리고, 한심하고.
텐쇼인에게서 네가 전학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무대가 끝나고 나서야 나는 들을 수 있었다. 너는 그 때까지 계속 아프다고만 하고 학교에 오지 않았으니까. 미도리와 함께 병문안을 가려는 걸 괜찮다는 말로 거절했던 너를,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무대가 바쁘니까 너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던 거겠지. 우리가 무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너는 그런 섬세한, 말없는 배려를 무척이나 잘했으니까. 나와는 다르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지만 너를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내가, 그런 사소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슬프다. 결국 나는 너에 대해 온전히 알고 있지 못했다는 말이니까. 네게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받고도 나는, 너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어.
하리, 조금만 욕심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너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너를 만나서, 뒤늦었지만 그 때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감정으로 그 사건을 보고 있었는지, 듣고 싶어. 애초에 나는 네가 왜 전학을 결정했는지 조차 알지 못하니까. 텐쇼인은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어. 그저, 네 의지로 이 학원을 나갔다는 말만을 해줬을 뿐이야. 얼마나 내가 답답했는지 너는 알 수 있을까?
너를 만나게 된다면, 제일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어서 애석하다고, 그 때 너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이다. 동시에 고맙다는 말도. 네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나서는, 여태까지 네가 해주었던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도 제대로 할 수 없잖아. 그렇지? 네가 유메노사키를 떠난 지 반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뻔뻔하지만, 네가 그 동안 고통 받고 힘들어했던 걸 생각하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편지에 비치는 내가, 나답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리, 꼭 알아줬으면 해. 나는 그만큼 너를 소중하게 여겼고, 모든 진상을 알게 된 지금, 네게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커. …그래, 누군가의 말대로 내가 지금 너에게 편지를 하는 것도 내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몰라. 너는, 그 사건에서 모든 걸 손을 떼고 싶어할 테니까.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사건이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내 죄책감을 털어내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닐지도 몰라. 이렇게 말하면 너는 내게 환멸할까? 그게 아니면, 내 마음을 이해해줄까? …언제나처럼.
정말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할게. 나를 만나달라는 말은 아니니 안심해. 하리, 이제 네 감정을 죽이거나 숨기지 마. 더 이상 너 자신을 괴로운 상황에 메몰지 마. 네가 있는 그 곳에서, 너의 진정한 이해자를 만나기를 바라. 잘 지내.
모리사와 치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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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체 타입 샘플: 진혼님
진혼님 - 사이퍼즈 제키엘 편지
4장
안타리우스의 성녀, 여비에게.
잘 지내고 있는가? 그대를 보지 못한 게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가는군. 너와 마지막으로 보낸 밤 역시 이제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시간이 되어버렸도다. 나의 여인인 너라면 분명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만, 나는 네 온기가 너무나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신도들을 인도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듯, 길 잃은 나의 감정과 마음을 인도하는 것이 너의 역할이거늘, 너는 이번에도 또 나를 안달나게 하며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겠지. 너의 방법은 이미 퍽 잘 알고 있지만, 결국 나는 너의 말을 듣고 말게 되리니. 죄가 많은 여인이여, 그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나에게 너의 모든 것을 내어줄 필요가 있도다.
사도 제키엘이 속히 그런 너에게 명하노라. 내일 수도원을 나와 내가 있는 이 곳, 교단의 중심부에 와줄 것을. 속히 나에게 와서, 너의 그 온기를 이 가여운 사도에게 나눠주어라. 이미 너의 것으로 얼룩져버린 나의 마음과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건 오로지 여비, 그대 밖에 없다.
손을 뻗으면 느껴지는 너의 감촉이, 진실된 것이라면 좋으련만 그러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도다. 속히 그대의 온기를, 나의 품 안에서 느끼고, 나를 네 깊숙한 곳에서 따스하게 데워주기를 바란다. 네 답장을 기다리고 있겠다.
사도 제키엘
나의 여인, 여비에게.
이렇게 글을 남기는 건 또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그러나 우리들의 일이 바빠서 얼굴조차 보기 힘든 이상, 이런 식으로 연락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겠지. 결혼을 하고서, 정식적인 부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밤을 함께 보내기는커녕 목소리를 내어 대화하기도 어렵다는 건 정말이지 슬프고도 애석한 일이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여인의 사랑을 받기에, 이 세상은 한 사람의 여인을 사랑하는 내게 있어서 가혹하기 짝이 없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끝마치고 그대의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도다. 그대의 품에서, 그대가 주는 애정을 담뿍 맞보며, 그대와 부부다운 일을 하고 싶다. 예전과 같은 밤이지만, 부부라는 말 한 마디만 달렸을 뿐인데 어쩜 이리도 애타게 느껴지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내가 그대를 안을 때 느끼는 기쁨과 행복은 그 쾌락만큼이나 강하고 또 굉장하다는 것이다. 네가 괜히 성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너의 그 자비로운 사랑은 나를 모두 감싸주고 있나니. 그대의 그 흘러 넘치는 사랑은 오로지 이 사도 제키엘이 아니면 차마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그대를 또 갈망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의 아내여, 최근에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도다. 일부 신도들 사이에선 그대가 벌인 일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것은 진실이더냐? 혹 그대가 벌인 일이라면 반드시 알려주도록 하거라. 네 손을 직접 거치지 않아도, 내가 너를 위해서 길을 마련하도록 하겠다. 그것이 남편으로서의 도리, 성녀를 사랑하는 남자로서의 도리가 되겠노라. 성녀는 자고로 신도들을 인도하는 자. 나 역시 안타리우스의 신도 되리니, 성녀인 그대의 뜻대로 해주는 것이 사제로서의 도리이기도 하도다. 게다가 가끔은 이런 모습을, 그대의 남편으로서의 모습을 다른 신도들에게 보여줘야 하지 않겠느냐? 나와 네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손길을 바라는 신도들이 여전히 보이고, 나는 그들을 숙청할 필요가 있다. 그대는 이제 정식적으로 나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부부의 도리를 다하는 것 역시, 안타리우스의 교리이기도 하노라.
결혼이란 행위는 참으로 신기하도다. 너와의 사이가 평소와 그렇게 다른 것도 아니면서도, 너를 갈망하는 마음을 떠나, 나의 마음에 걱정이란 씨앗을 싹 틔우고, 이전보다도 더욱 나를 이렇게 애태우게 만들고 있으니. 그러나 나는 너와 정식적인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아끼는 나의 여인이니까. 그런 너를 사랑하는 건 나 하나로서 족하다.
나의 여인이여, 시간이 되었다. 이만 나는 글을 줄이도록 하겠노라. 네 답장을 즐겁게 기다리고 있으마.
사도 제키엘
나의 아내, 여비에게.
그대의 소식은 잘 들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바로 어제 이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들었노라. 무척이나 기쁘다. 네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나를 위해서 발을 옮기는 것이니까.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너를 맞이하고 싶다. 사제로서의 집무가 이렇게까지 따분하게 느껴지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노라.
오늘밤이면 너를 내 품에 안을 수 있겠지. 너의 그 달디단 맛과, 감미로운 목소리와, 향기로운 체취를 느끼면서 잠을 청할 수 있다는 건 실로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행복하고도 기쁜 일이다. 너와의 밤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만족하지 못한 적이 없으니. 아니, 역으로 말해서 네가 만족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 것도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나의 여인이여. 그 동안 풀지 못한 나의 욕망과 사랑을, 네게 전부 바쳐주겠노라. 그대의 사랑 역시, 나의 몸을 잔뜩 채울 수 있도록, 넘칠 정도로 베풀어주는 것이 좋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너를 배불리 해주리라. 나만큼이나 굶주린 욕정을 가지고 있는 건 너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까.
네가 이 편지를 받는 것이 먼저일지, 아니면 네가 이 곳에 도착하는 것이 먼저일지, 정말이지 기대가 되는구나. 네가 한시라도 빨리 내 곁에 와주길 바란다. 이만 줄이도록 하지.
그대의 남편, 제키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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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체 타입 샘플: 소소님
소소님 - 언더테일 차라 편지
4장
어딘가에서 덜덜 떨고 있을 너에게.
안녕, 친구? 잘 지내고 있어? 반가워 해줘. 나야. 누군지 말을 하지 않아도 너는 잘 알고 있겠지? 그럼, 너와 나의 사이잖아. 그러니 나는 굳이 너에게 내 소개를 하지 않을게.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까 구질구질하기도 할 거야, 그렇지?
네가 스노우딘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누구에게서 들었냐고? 그런 걸 지금 네가 알 필요가 있을까? 지금 너에게 중요한 건 나의 귀환이잖아. 너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렇게 돌아왔어. 어쩌면 너는 이게 전부 기분 나쁜 장난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어떤 짓궂은 괴물이 나의 이름을 함부로 빌려서 편지를 썼다고 말이지.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전부 사실이야. 어릴 때부터 나는 약속을 잘 지켰잖아. 특히, 너와 했던 약속이라면 뭐든지. 게다가 너와 나의 사이를 아는 건 그 울보 녀석 밖에 없는걸. 그 녀석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오랜 친구인 네가 스노우딘에 꽁꽁 숨어있다는 건 정말이지 안타까워. 기껏 이 곳에 새로운 인간이 찾아왔는데 말이지. 어쩌면 너와 잘해볼 수도 있을 텐데. 너는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잖아. 나를 잘 알고 있다고, 나와 아스리엘이 지상으로 올라간 이후에 말해주었던 걸 나는 기억해. 정말이지 감사하기 짝이 없지. 하필이면 그 사람이 너라서 말이야. 네가 아니라 다른 이였더라면 나는 아마 다시 돌아오는 일이 없었을지도 몰라. 네가 겁쟁이라서 다행이야. 만약 다른 녀석이었더라면, 아스리엘 같은 녀석이었더라면 분명 아스고어나 토리엘에게 말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감사함을 표할게. 내가 돌아오는 걸 도와준 너에게, 진심으로 감사해.
귀환하고 나서 너의 생각을 많이 했어. 그럼, 무척이나 많이 했지. 그 날 이후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네가 나의 죽음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네가 알게 된 사실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네가 아스리엘에 대해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에 대해서 말이야. 설마 해서 묻는데, 어린 시절의 연심을 아직까지 품고 있진 않겠지? 그 녀석이 죽은 지도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아, 어쩌면 너는 내가 돌아왔으니 그 녀석도 돌아올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무척 궁금하지? 거기에 대해서 답해줄게. 아스리엘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아. 적어도, 본래 모습대로는 돌아오지 못해. 죽은 이가 돌아오는 게 그렇게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럼 나는 어떻게 돌아왔을까? 그에 대한 의문은 내가 너를 만나러 가면 그 때 알려주도록 할게. 어때? 너는 그리워하던 오래 전의 친구를 재회하는 것과 동시에 깊은 의문을 해결할 수 있다고. 나를 만나는 게 기대되지?
마음 같아서는 나도 그런 너를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너를 만나러 가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그러지 못해. 그게 무척 애석하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시간은 단순한 문제일 뿐이야. 내가 이 방해물을 해치우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거든. 조금 끈질긴 녀석이었지만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이걸 ‘한 번’ 해본 게 아니니까.
이쯤 얘기했다면 제아무리 멍청한 괴물이라도 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지. 그래, 나는 예전의 그 방법대로 이 지하세계에 돌아왔어. 나는 누구일까?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두려워해. 어떤 것이 나일지 모르니까. 나는 네가 바로 어제 즐겁게 얘기했던 옆집 사람일까? 네가 자주 가는 식당의 주인일지도 몰라. 아니면 아주 처음 보는, 다른 지역의 여행객일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면, 이 편지를 가져다 준 녀석이라던가. 네가 과연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벌써부터 너무 신이 나는걸.
나는 숨바꼭질을 제안하는 거야. 몇 년 전의 우리처럼 말이야. 가여운 너는 언제나 그 게임에서 지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잖아? 기왕 오랜만에 하는 게임인데, 즐겁게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 네가 꼭 이번에는 이겨줬으면 좋겠어. 항상 내가 이겨서는, 내가 재미가 없거든.
이 숨바꼭질에서 이기면, 네가 원하는 걸 하나 들어줄게. 그 대신 내가 이겼을 때에도, 내 소원을 네가 들어줬으면 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네가 말이지. 예전부터 내가 바라던 건 굳이 네가 아니어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거거든. 하지만 이 소원은 조금 달라. 왜냐면 이 소원은 네가 없으면 통하지 않는 거라서. 게다가 너는 지금 불안에 떨고 있잖아. 겁에 질려있잖아. 내가 내 손으로 너의 그 오래된 불안감과 두려움을 끊어줄게. 너를 편하게 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밖에 없어.
그러니까 내가 이 게임에서 이기면, 내 손으로 너를 파괴할 수 있게 해줘. 나의 손으로 너의 숨통을 끊게 해줘. 너를 조각조각 내서, 너의 마지막 숨결과 흔적을 내가 가져갈 수 있게 해줘. 네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모습을 오로지 내가 볼 수 있게 해줘. 왜 그런 일을 하냐고?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렇게 쉬운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 대단하지 않아? 나는 아직도 너를 좋아해. 네가 아스리엘을 좋아하던 걸 알면서 묻어뒀지만, 이제 그 녀석이 없으니까 나는 너에게 내 마음을 전해도 되겠지. 그렇지?
어서 너를 만나러 가고 싶다. 네가 나를 찾아내고,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나도 기대가 돼. 기껏 만나는 친구니까, 나를 반겨줄 거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실망스러울 거야. 매우, 실망스러울 거야. 그러니 내 기대를 부디 저버리지 말아줘. 나는 너를 믿고 있어.
네가 나를 어서 찾아줬으면 좋겠다. 네가 나를 찾아내는 그 날을 기쁘게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나 나를 찾는 데에 너무나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그 때는 너의 패배야. 머지 않아 인간이 너를 찾으러 올 거야. 그 때까지 네가 나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나의 승리로 하자. 그럼 너는 내 소원을 들어줘야 해.
그 날을, 나는 즐겁게 기대하고 있을게. 네가 나를 찾아내는 그 날을.
세상에 둘도 없는 너의 오랜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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