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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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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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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주공아파트 : 오래된 미래
철거를 앞둔 둔촌주공아파트는 스산했다. 둔촌주공아파트 관리사무소 서고에는 지난 30여년간 5천 여 세대의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온갖 문서들이 잠들어있었다. 사람들은 이주했고 관리사무소도 곧 철거할 예정인데, 이 곳을 관리했던 흔적인 문서들만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만일 이 기록들이 잘 정리된다면, 1980년대에 세워졌다 곧 철거될 대단지 아파트의 기억을 잇는 토대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도 어릴 적 주공아파트에 산 적이 있었다. 호계주공아파트. 너무 어릴 때�� 시간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지만, 단지에 들어서면 낮은 건물과 넓은 간격 덕에 하늘이 쉬이 보이는 주공아파트 특유의 공간적 기억만은 존재한다. 둔촌주공아파트 단지를 ���었을 때의 느낌도 그런 것이었다.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면, 자동차가 빼곡히 들어서고, 베란다 곳곳에 빨래가 널려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텅 비어버린 아파트 단지의 몇 동의 집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방, 버려진 가구들. 사람들은 그 곳에서 식탁을 놓고 밥을 먹고, 침대를 놓고 잠을 잤을 것이다. 아파트는 건물마다 같은 형태의 집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실제 모습은 제각기 달랐다. 같은 구조를 제 각기 다르게 쓰는 사람들의 일상과 삶을 떠올렸다. 5천 여 개의 집은 모두 서로 다른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아파트의 생애를 본다. 처음 아파트가 만들어졌을 때, 아파트의 지금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반듯하게 만들어진 땅과 건물은, 시간이 지나 뒤틀리고 해지면서, 낡아간다. 사람들은 그들 평균 수명의 절반도 안되는 30년 만에, 아파트를 떠나고 새로 짓는 결정을 한다. 아파트는 너무 빨리 늙는다. 나도 아파트에서 태어나, 평생을 아파트에서 살았다. 내가 살았던 아파트도 언젠간 헐릴 것이다. 어릴 적 그렇게 커보였던 방은 어느 순간 물건으로 가득 차 비좁아 보였다. 내 몸이 자란 것일까, 나의 삶이 자란 것일까. 우리는 다른 아파트로 이사했다. 우리는 이렇게 평생 이곳 저곳을 옮겨가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파트가 고향이라면, 그 고향에 오래도록 살 수는 없는걸까? 나는 내가 살던 집의 오래된 미래를 보고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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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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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과 기록
2017년 12월 15일, 서울기록원 friday_archives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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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가장 큰 발명은 단연코 농사다. 농사를 통해 인간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고 농사로 얻은 잉여생산물 덕분에 혹독한 겨울을 견뎌낼 수 있었다. 또 유목민으로 떠돌던 삶이 정착을 시작했고, 이후 인류 앞에는 찬란한 문명의 미래 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21세기를 사는 현재의 인류는 놀라운 과학기술로 날마다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제 아무 리 기술이 발달한 디지털 사회라 할 지라도 먹고사는 문제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지극히 원초적일 수 밖에 없고, 그 기 본이 충족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최첨단의 과학기술로 가장 원초적인 것을 지키는 공간인 씨앗저 장소는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장소다. 씨앗은 우리의 생명이고 재산이며 미래이기 때문이다.”
지은경, 세바스티안 슈티제, <인류의 생명저장소, 스발바르 세계 씨앗저장소(Svalbard Global Seed Vault)>,   ⟪매거진 책Chaeg⟫, May, 2016. http://www.chaeg.co.kr/스발바르-세계-씨앗저장소/
‘스발바르 세계 씨앗저장소’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들었던 느낌은 ‘안심’이었다. 인류 최후의 날(doomsday)이 도래 하더라도, ’저장소’가 그 멸망을 막지는 못하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게는 하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최후의 날이 오면 나도 죽 고 없을텐데 나는 왜 안심하는가? 저장소는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키는 것일까? 저장소는 무엇을 보관하는 것일까?
씨앗은, 먹고 사는 인류의 모든 시작이다. 씨앗을 지킨다는 것은 식량을 지킨다는 것이다. 하여, 씨앗을 모은다는 것은 너울대 는 시간 안에 있는 인간의 삶을 모으는 것이기도 하다. 최후의 날이 지나더라도, 씨앗저장소의 문 앞에서 삶이, 그리고 문명이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저장소는 여러모로 아카이브와 많이 닮아있다. 저장소가 씨앗을 모으듯, 아카이브는 기록을 모은다. 남겨진 씨앗이 미래의 사 람들에게 ���사를 통해 삶의 지속을 가능케 하듯, 남겨진 기록은 인류가 가꾸어온 문명의 유지를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평등, 민주, 자유와 같은 사회적 가치, 개인과 공동체의 존재, 예술 작품, 인간의 삶과 일의 기억 같은 것들이다.
북극해 ‘스발바르 제도’라는 곳에 있는 이 ‘씨앗 아카이브’로부터, 우리는 아카이브의 핵심 기능인 ‘수집’과 ‘보존’의 중요성을 새삼 배우게 된다(물론 씨앗저장소가 보존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장소는 ‘종자은행’처럼 수집물의 적극적인 활용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경향신문 2016.12.8). 보존기록물의 정리와 활용이 부재함을 늘 절감하고 아쉬워하지만, 한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과 사회에 대한 더 넓고 깊은 기록화, 그리고 전기로부터 독립이 가능한 기록 보존이 아닌가? ‘최후의 날'을 상상해본 적은 없지만, 우리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느껴진다. 지진, 핵, 원전이 초래하는 위험은 우리의 일이다. 따라서 아 키비스트의 미션 중 하나는, 출렁이는 지구의 위험 속에서 문명의 기록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재밌는 건, 그렇게 애써 모아 보존하는 물건들의 공통점이 바로 ‘쓸데없는 것’이라는 데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비현용 (non-current use)’의 의미를 포함한다. 하지만 현재 쓸데없는 것은 앞으로도 쓸모없는가. 현재 소용없는 것의 가치를 정당하 게 판단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수많은 수집가들이 현재 소용없는 것을 굳이 공들여 모으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렇게 공들여 모아진 기록과 모으는 사람들을 위해, 아키비스트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나.
이것은 결국 아카이브가 어떤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쓸데없는 것’을 모으는 아카이브는 왜 존재해 야 하나? 질문은 이어지고, 우리는 미처 답하지 못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내가 섣부르게 예단하는 답변은 : 아카이빙은 삶의 지 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적극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흔히 이야기하는 ‘공공’과 ‘민간'이라는 기록 구분은 나누어지지 않 는다.
얼마 전, 씨앗저장소 옆에 세계의 기록을 보관하는 기록보관소가 개관했다는 기사를 읽었다(경향신문 2017.4.5). 이 곳에, 지 구 곳곳의 기록들이 모여들고 있다. 씨앗 옆에 보관되는 기록은 상징적이다. 씨앗이 식량의 출발이듯, 기록은 삶의 출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북극 스발바르의 ‘노아의 방주’...미래 담긴 씨앗들>, 경향신문, 2016.12.8.  <씨앗 저장 ‘북극의 방주’ 옆에 세계기록보관소 개관>, 경향신문, 20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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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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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기록을 왜 아카이브해야 하는가?
2017년 9월 15일, 연구반 <기록학연구 읽기>에서 발제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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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기록 관리 방안 연구 - ‘나의 아카이브(My Archive)’ 만들기, 최유리·임진희, 2016.1, 기록학연구 47, 한국기록학회.
개인기록을 왜 아카이브해야 하는가?
‘아카이브(archive)’는 근대 국민국가의 등장 이후, 도구적 합리성에 근거한 행정을 주장했던 베버(Weber)의 관료제적 통치기술의 하나로 등장했다. 통치행위의 자의성을 줄이고 규칙성, 예측가능성을 늘리기 위해서는 ‘문서에 의한 행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정준영 2017). 이후 관료제적 조직에 근거하여 기록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출처주의의 원칙’과 같은 근대 기록학 초기의 담론이 형성되었다(설문원 2017).
이러한 움직임은 과거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근대 역사학을 창출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아카이브에 구축된 공문서는 엄밀한 사료비판과 확실한 전거주의를 지향하고자 했던 근대 역사학이 다룰 수 있는 이상적인 사료 모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의는 20세기 이후 객관성이 가진 맹점에 근거한 비판에 직면하였다. 공문서가 아무리 명징하다 하더라도, 결국 ‘텍스트’이며, 그것 자체가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논의가 등장한 것이다(정준영 2017). 더불어, 국가 단위의 거시 주제만을 역사의 주체로 인정했던 기존의 담론에 대한 반기를 드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들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지역사, 개인사와 같은 미시사를 제시하였다.
기록학도 이와 같은 역사학의 논의를 이어받아, 기록의 가치중립성과 거대 담론 중심성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논의들이 전개되었다. 기록이 특정 계층이나 권력의 기록만을 보존하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에 대한 기록화를 통해 설명책임성을 증대시키고,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데 의미가 있다는 주장이 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윤은하 2016).
이러한 논의는 2010년을 전후하여 사회적 도큐멘테이션 전략의 일환으로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아카이브의 논의가 진행되면서, 다수의 ‘공동체 아카이브’ 연구가 나타나는 것으로 이어졌다.1) 더불어 민주주의적 사회의 주체인 ‘보통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려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한 제안과 함께 ‘일상아카이브’에 대한 논의 역시 전개되었다.2)
‘개인기록’은 이렇듯 미시사적 접근의 맥락에서, 개인의 일상을 기록의 대상으로 삼아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즉, 개인 기록을 통해 시대상을 유추할 수 있고, ���히 공식기록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의 이른바 ‘저항기억(또는 저항기록)’을 통해 사회적 편견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인의 기록화’가 역사적 의미만 있는 것일까? 자신을 기록하는 개인의 입장에서, 개인기록은 지나온 삶에 대한 반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으며, 주변 관계와 사회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기록이란 무엇인가?
임진희(2013), 김진용(2013) 등의 논의를 통해 정리한 개인기록의 유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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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아카이브 구축 방안
(1) 나의 생애 분석
공공영역에서 효율적인 기록관리를 위해 조직의 업무분석이 선행하듯, 개인기록 구축에 있어서 도 생애 분석을 통해 체계적인 정리와 분류가 가능하다. 생애주기 분석은 나이를 기반으로, 사회 에서의 역할 등으로 구체화하여 정리할 수 있다. 이 때, 모든 삶을 다 아카이빙할 필요는 없고, 자신이 구축하고자 하는 아카이브의 ⓵목적을 고려하여 ⓶범위를 설정하고 그에 걸맞는 ⓷생애 분석이 필요하다. 이후 각 ⓸시기를 세분화하여 각 시기에 일어났던 ⓹사건과 활동을 구체적으 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2) 나의 활동과 기록 매핑(mapping)
이 절에서 다루는 매핑은 생애 분석을 통해 밝혀진 나의 삶을 실제 자신이 갖고 있는 기록물들 과 연결하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 자신의 기록이 어떤 형태, 어떤 종류로 구성되어있는지 파악해 야 한다. 이 때, 비전자기록은 종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물질로 되어있고, 전자기록의 경우 디지 털 파일이 PC, 외장스토리지, 클라우드 환경 등 여러 저장소에 흩어져 보관되어 있다는 점을 확 인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생산한 기록 외에 가족, 지인 또는 사회로부터 수집한 기록인지, 즉 생산자를 확인해야 한다. 이들을 묶어내면, 개인의 생애 시기와 특정 사건에 따라 전자/비전자기 록, 자신/타인 생산 기록으로 구분하여 기록을 정리할 수 있다.
(3) 나의 기록 평가, 선별
개인기록은 기존 기록학의 평가·선별론에서 제시하는 평가기준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개인기록 은 객관적인 공공성이 아니라 주관적인 중요성에 의해서 평가되고 보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 인기록 아카이브 구축에 있어 선결적 조건은 개인이 왜 아카이브를 구축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사명문(Mission Statement) 작성에 있다. 이를 통해 개인아카이브에 대한 목표를 선정하면, 이 를 바탕으로 기록을 평가·선별할 수 있는 기준을 도출해낼 수 있다. 논문은 <그림 7>에서 3차에 걸친 개인기록 평가 프로세스를 제안하는데, 이는 개인과의 연관성, 가치, 그리고 기록의 중요도 에 따라 복수에 걸쳐 평가를 진행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4) 나의 기록 분류, 기술 개인기록의 분류와 기술은 기록학의 전통적 방법인 ISAD(G)의 다계층 기술원칙이나 기술요소를 준용하여 사용할 경우, 기록의 내용, 구조, 맥락 등을 놓치지 않고 기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틀이 개인기록의 자연스러운 기술에 방해된다고 판단될 경우, 자유롭게 기술할 수 있다 (이영남 2012).
‘개인기록 아카이브’의 사회적 의미
기록학계 혹은 아키비스트가 공공/공동체아카이브를 구축하는데 기여하는 것 뿐 아니라 개인기록을 도와준다는 것은 어떤 사회적 의미가 있을까? 개인기록을 아카이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나는 개개인의 자신의 기록/기억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경험 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타인의 아카이브를 읽으며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 능성이 많아질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있어 잘 정리된 기록은 내가 나를 믿고, 내가 선택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길라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다. 개인기록을 보다 쉽게 아카이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역시 아키비스트가 해야할 중요한 사회적 책무라는 생각이다.
1) 권순명, 2009, 「지역 아카이빙을 위한 기록화방안 연구」, 명지대 석사학위논문; 김익한, 2010, 「마을 아 카이빙 시론」, 기록학연구 26, 한국기록학회; 최윤진, 2011, 「성미산 마을 아카이빙 체계방안에 관한 연 구」, 명지대 석사학위논문; 김민국, 2012, 「주민참여 지향 마을 아카이빙 체계 구축에 관한 연구」, 명지 대 석사학위논문; 윤은하, 2012, 「공동체와 공동체 아카이브에 대한 고찰」, 기록학연구 33, 한국기록학 회; 손동유·이경준, 2013, 「마을공동체 아카이브 활성화 방안」, 기록학연구 35, 한국기록학회.   2) 곽건홍, 2011, 「일상 아카이브(Archives of everyday life)로서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소론」, 기록학 연구 29, 한국기록학회; 심성보, 2011, 일상 아카이브르를 통한 생활세계 연구의 가능성, 국제한국학연 구 5,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임진희, 2011, 일상 아카이브즈 구축방안, 국제한국학연구 5, 명지 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참고문헌
임진희, 2013, 개인아카이브&개인디지털아카이빙의 특성과 과제, 제33회 명지대 실버랩 콜로키 움 발표문. 김진용, 2013, 개인 아카이브의 유형별 특성에 대한 연구,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석사 학위논문. 이영남, 2012, 공동체아카이브, 몇 가지 단상, 기록학연구 31, 한국기록학회. 윤은하, 2016, 아키비스트의 객관성에 대한 재고찰 :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s)의 인류 학적 방법론을 통해, 기록학연구 47, 한국기록학회. 정준영, 2017, 문서고적 전환(archival turn)의 의미와 일본 소재 ‘식민지’ 아카이브의 특징 : 일 본 야마구치현 소재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인문한국사업단 제30회 HK워크숍 <일제 강점기 통치 기록물과 아카이브> 발표문. 설문원, 2017, 기록관리 원칙의 해석과 적용에 관한 담론 분석 : 출처주의를 중심으로, 기록학 연구 52, 한국기록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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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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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마음’ : 기록은 나의 힘?
2017년 10월 9일, 연구반 <기록학연구 읽기>에 제출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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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는 생각 몇 가지를 두서 없이 적어보았다.
1. ‘기록(을 다루는 일)은 특별하지 않다’
기록의 생산과 수집과 분류와 정리와 활용을 하는 일이 아키비스트만의 영역일까? 이미 많은 사람 들이 해왔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아카이브를 탐방하고 전시회를 다니고 기 억과 기록에 관한 책을 읽으며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화가가 존재하 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작가가 있는 것처럼, 누구나 기록할 수 있지만, 아키비스트가 존재한 다는 건 그에게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기 때문일까? 그는 무엇의 전문가일까? 사서와 학예연구사 와 역사가와 예술가 사이에서 기록전문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에 대한 고민과 생각이 많아 진다.
2. ‘기록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일상아카이브 연구> 수업을 위해 내 방에 있는 온갖 기록들을 들춰보았다. 일기장과 메모와 사 진, 수업 자료와 성적표, 상장, 문집, 그 외에도 모아둔 엽서와 CD, 리플렛, 입장권, 편지들... 내 방 곳곳에는 이미 나에 대한 수 많은 기록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작년, 시니어들이 가져온 사진들을 엮 어서 작은 사진자서전을 만들면서, 또 기록수집과제를 위해 슬리브수집가와 인터뷰를 하며 느꼈던 보통 사람들의 일상...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기록학은 기록의 효과적인 보존과 활용을 위한 다 수의 방법론을 다루는 매우 기술(technical)적인 학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 정리된 기록들 을 돌아보며 사람들에게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메세지’를 나는 임파워먼트(Empowerment) 같은 개념으로 읽었다. 페미니즘 이론에서 ‘임파워먼트’는 여성 에게 금지된 관습과 전통을 깨도록 용기를 주는 전략을 말한다. 사람들에게 자신과 공동체의 과거 를 돌아보도록 하여, 삶의 영감과 희망과 감동 따위를 얻는 일...이 기록의 메세지, 가 아닐까? 랜달 지머슨은 ‘기록의 힘’이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데 있다고 밝혔는데, 사회정의를 기록을 통해 추구할 수 있는 이유는, 기록이 자신과 공동체의 삶의 양식을 돌이켜보게 만들어 그 속에 자리잡은 권력의 구조를 발견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읽었다.
3. ‘종이는 중요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의 9월 아카이브 전시는 <종이와 콘크리트 :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이 었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 기점인 1987년부터 시작된, ‘현대 한국 건축운동’을 이끌어 온 몇몇 단체 들의 활동을 ‘종이기록’을 통해 전시하였다. 근대(또는 후기 근대) 건축의 특징인 ‘콘크리트’를 ‘종이’ 를 통해 설명한다, 는 물성의 역설 같은 느낌의 제목이었는데, 나는 이것이 모든 아카이브에도 적용 된다고 생각했다. 전자기록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기록학의 업무현장이 이제 대부분 디지털로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 ‘종이 기록’은 아무도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점차 찬밥 신세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20세기와 그 이전부터 축적된 모든 기록은 종이로 되어있다. 디지털 기록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시대는 기껏해야 2000년대 이후에 불과하다. 기록의 장기보존 전략을 위한 디지털기록 연구 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 존재하는 아카이브에서, 그 이용자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경험은 종이로 만들어진 생산자의 기록 원형을 그대로 다시 들추어보는 일이이 아 닐까? 전자기록은 종이기록을 잘 안내해줄 좋은 도구로서 정립되어야 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그 리하여 아카이브는 마치, 옛 종이들의 박물관과도 같은 느낌이 아닌가, 하는 것이 요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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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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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구축하기
2017년 4월 20일, 연구반 <기록의 힘 읽기>에서 발제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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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주간 우리는 역사 속에서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아카이브를 그들의 ‘도구’로 사용했는지 살펴봤다. 그리고 근대 이후 기록을 통해 주류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새로운 사유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했다.
이번 4장에서는, 그 아카이브를 구성하는 내용인 ‘기억’에 대해서 논한다. 아카이브는 기록과 그 맥락으로 이루어져있다. 물론 기록은 사람들의 기억 중 일부만이 가공되어서 담겨있기에, 기록을 온전한 기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쨌든 기록은 기억의 재구성이므로, 아카이브 역시 기억이 담긴 곳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기억은 무엇인가? 저자는 기억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개인적 기억이다. 사람들은 경험을 ‘회상’하거나(삽화적episodic 기억), 학습된 정보를 바탕으로 재구성하거나(의미론적 semantic 기억) 또는 무의식적으로 습득(절차적procedural 기억)하면서 개인의 기억을 형성한 다. 이 기억들은 개인의 정체성의 변동에 따라 끊임없이 유동한다. 이것은 사실을 인식하여 기억하는 과정에서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조영재 2015).
둘째, 집합적 기억이다. 집합적 기억과 개인적 기억은 기억의 ‘주체’가 다르지만, 기억이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집합적 기억의 대표적 사례는 ‘민족’이다. 같은 혈연, 언어, 지역, 인종,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흔히 정의되는 민족은, 사실 근대 국민국가 탄생 이후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이다(앤더슨 2004). 국가의 경계선이 흐릿했던 전근대 시대에는 경계선 끝에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일체감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대중매체’와 같 은 미디어 등장 이후, 사람들은 서로가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공동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민족이 형성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족은 개별 사회구성원들에게 특정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한다.
셋째, 역사적 기억, 즉 역사다. 근대 역사학은 부인할 수 없는 ‘증거’에 기반하여 과거 사실을 기술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이후 기술(記述)이라는 단어를 ‘해석’이라는 용어로 수정하여, 역사가의 주관성 개입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역사인식의 전환이 있었으나, 역사가 여전히 증거 에 기반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인정되고 있다. 증거가 담긴 기록이 모인 곳이 아카이브이기에, 앞서의 언술은 역사는 곧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한 과거의 해석이라는 말로 다시 쓸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는 기억과 어떻게 다른가? 알박스Halbwachs는 “기억과 역사는 궁극적으로 정 반대”라고 주장했다. 역사는 기록의 해석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며, 이를 통해 현재와 분리시킨다. 반면 (개인적, 혹은 집합적) 기억은 개인과 집단 사이에 형성된 정체성을 기반으로 과거 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킨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차이를, 기억은 현재와 과거와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서로 다른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기억의 마지막 종류는 보존기록 기억, 즉 아카이브다. 앞서 말했듯, 기록은 기억이 아니지만, 사람들은 기억을 연장하기 위해 기록했고, 이것을 잃지 않기 위해 모았다. 기록들의 보관소인 아카이브는 그 자체로는 역사를 구성하지도 않고 기억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역사와 기억은 아카이브를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아키비스트는 기억이 수집되는 양상과 이를 바탕으로 역사가 서술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과거가 재구성되는 장면을 직시하고 있다. 과거의 재구성은 곧 미래의 재구성과 다르 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미래를 구성할 것인가. 아키비스트는 역사와 기억 사이에서 만들어지 는 과거가 놓치는 ‘그 무엇’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역할을 요구받는다. ‘그 무엇’이란 주류 공동체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목소리일 것이다. 결국 아키비스트는 역사와 기억의 속성을 이해하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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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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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2017년 5월 10일, <연구와 발표> 에 제출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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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왜 기록학을 하는가?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던 작년 가을, 나는 내가 왜 기록학을 하고 싶은지, 기록학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내 삶의 어떤 변곡점 앞에 서 있었다. 입학 원서로 제출했던 「자기소개서」와 「학업계획서」에서, 나는 내 삶의 궤적 안에서 ‘기록학’이라는 선택의 당위성을 담아보려고 했다.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았다. 나에게 ‘기록학’은 나의 어떤 기대로부터 출발하는 미지의 세계였으니까. 아직도 기록학이 어떤 건지,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내가 어떤 물음으로부터 이 공부를 시작했는지를 한번 되짚어보고 싶었다.   내가 왜 기록학을 선택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자 했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나는 「자기소개서」에, 나의 삶의 방향과 목표를 “‘공존(共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썼다. 여기서 ‘공존’은 나에게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한다. ‘더불어 사는 삶’은 내가 다녔던, 대안학교인 ‘이우학교’의 ‘모토’였다. 그 말이 나에게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던 계기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다녀왔던 인도의 오로빌(Auroville) 공동체 여행에서였다. ‘평등’, ‘평화’, ‘생태’와 같은 사회적 가치를 위해 1968년부터 자급자족을 목표하며 살기 시작했다던 이 정주공동체의 ‘존재’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공동체’가 현대 사회의 ‘어떤 대안’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후 한국에서 공동체 운동을 하는 성미산마을, 산안마을, 변산공동체, 풀무학교 등을 방문해 그 모습을 기록했다. ‘공동체 운동’에 대한 가능성을 내 나름대로 정리해봤던 그 작업은, 이후 고등학교 총학생회장, 10대 문화생산자 캠프 ‘프로젝트 작당’ 기획, 느티나무도서관 인턴 등 내가 10대와 20대에 걸쳐 했던 나의 이런저런 경력의 ‘동력’이 되었다.   누구나 삶의 ‘동력’이라는 것이 있다. 삶의 동력이란 ‘살아가는 근원이 되는 힘’을 말한다. 나는 내 나름대로 사회가 규정한 어떤 ‘한계’를 넘고 싶었고, 세상의 관성처럼 작용하는 힘에 반작용하여 사는 모습을 나의 삶의 방향으로 그리고 싶었다. 나의 동력은 왜 ‘공동체 운동’에서 시작했던 걸까? 언젠가 그 물음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 물음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나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마음의 존재’였다. 돌아보면, 지금 내가 관심을 갖고 찾아보거나 공부해보고 싶은 주제의 밑바탕에는, ‘나’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나는 사회 안에서 다층적으로 존재한다. 안양에 살고 있는 나, ‘아파트’를 고향처럼 생각하는 나, 축구를 좋아하는 나, 남성인 나, ‘대안학교’를 나온 나, 그리고 경상도 집안에서 태어난 나... 내가 ‘공동체 운동’을 삶의 대안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이유는, 10대 때부터 부딪혔던 획일화와 억압성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무의식적인 기대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어릴 때부터 부딪혔던 크고 작은 삶의 억압들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기인했다.   살면서 가장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의 ‘아버지’였다. 경상북도 구미 출신의, 박정희와 보수정권을 지지하며, ‘집안’을 지키기 위해 제사와 성묘를 끔찍이 생각하고, 장자가 집안을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전라도’와 ‘가시나’들과 ‘예수쟁이’를 ‘혐오’하는 아버지... 지금까지 내 삶의 가장 큰 변곡점은, 제도권 교육으로부터 벗어난 대안학교인 이우학교의 진학이었다. 그리고, 이우에 진학하게 된 밑바탕에는 ‘아버지’와, 그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항심이 있었다. ‘왜 항상 아버지가 하라고 하는, 사회의 주류를 쫓아야만 하나?’ 중학교 시절, 나는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는 몰랐지만, 뭘 하기 싫었는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친구들이 모두 학원을 다닐 때, 나는 다니던 학원마저 끊고 집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놀았다. 지승호, 홍세화, 박노자 등 이른바 ‘진보 지식인’들의 책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사회적 이슈에도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그 관심은 ‘미디어몹’, ‘딴지일보’ 등 소위 ‘진보계열’의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 곳에서 (그동안 열독하던) <조선일보>가 이념적으로 편향되었고, 박정희 정권을 귄위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 ‘정치 사회화’를 했던 셈이다. 나는 작게나마 사회적 이슈에 참여하고 싶었고, 권위주의에 저항하고 싶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혼자 다녀왔고, 그 일로 아버지와 크게 싸웠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쯤에는, 말만 ‘자율’인 야간자율학습을 하기 싫어 ‘야자를 하지 않는’ 대안학교를 찾았다. 마침 개교 2년차를 맞는 ‘이우학교’가 옆 도시에 있었고, 나는 ‘동네 명문고에 진학해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반대를 ‘이겨내고’, 나는 이우학교에 진학했다. 물론 아버지는 내가 이기고 말고 할 존재는 아니다. 당신은 결국 자식에게 져 주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까지 아버지 말을 듣는 ‘척’이라도 했던 내가, 어떤 이유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했을까? 그 ‘힘’은,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던 마음에서 비롯되었는데, 나를 만들었던 가장 큰 ‘세계’는 역설적이게도 ㅡ 그리고 당연하게도 ㅡ 아버지였던 것이다. ‘아버지’를 여전히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이, 나에겐 결국 나를 이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를 이해하려는 마음에 끝에, 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2. 사회적 의미로서의 ‘공존’과 ‘이해’
그리하여 다시, ‘공존의 가능성’을 말한다. 사회적 의미로서의 ‘공존’은, 상대와 나 사이의 커다란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든 한 사회의 구���원으로서 서로를 같이 살아야하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공존이 필요한가?   최근 ‘적폐 청산’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요컨대 지난 반백년동안 구조적 차별을 옹호해온 기득권 세력과 그들을 지원하는 제도 및 문화를 ‘적폐’로 보고, 이를 ‘청산’하는 것이 작금의 ‘시대정신’이라는 것이다. 사회가 아주 조금씩, 보다 평등해지길 바란다는 측면에서 일면 이해되는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이 주장을 경계한다. 우선, ‘적폐’의 실체는 누구인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자유한국당 등으로 상징되는 극우보수세력인가? 이들이 지난 파시즘 정권을 주도한 세력의 후예라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정치세력은 그들을 지원하는 지지자들의 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한국의 보수(혹은 극우)파는 여전히 2-30%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적폐인가? ‘적폐’를 누가,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한편, ‘청산’은 가능한가? 만일 앞서 말한 이들이 ‘적폐’라면, 이들을 어떻게 ‘청산’할 수 있는가? 어느날 갑자기 이들이 모두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리고 한국에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이웃’들이 존재하는 이상, ‘청산’은 가능하지 않다. 더욱이, 이 용어는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근대 국가에서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권력을 잡은 누군가가 반대편을 ‘사회악’으로 몰아 ‘처단’해버리는 일은, 지난 세기동안 반복해온 인류의 과오인 ‘파시즘’이 아닌가? 이른바 ‘박근혜 게이트’라고 불리는 ‘국정농단’ 스캔들의 핵심은 ‘권력의 사유화’에 있었다. 박근혜는 어찌되었든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절차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그는 그 자리를 ‘되찾아야 할 아버지의 권력’정도로 생각한 듯 하다. 국정농단 스캔들을 통해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잔존한 ‘전근대성’이었다. 한국에서 우리가 흔히 ‘보수’라고 말하는 정치세력은, 나에겐 ‘왕당파’ 정도의 전근대세력으로 보인다. 적어도 조선시대, 왕이 지배하던 세계로부터는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정도의 당연한 생각이, 어떤 이들에겐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왕의 권력을 인정하려는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전근대성’이란, 결국 자신의 운명을 타인에게 맡기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근대성’의 세계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여, 결국 ‘운명’이라는 말을 없애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이는 상대적인 평등, 삶의 기회의 평등을 확보하는 것에 달려있다. 국정농단 스캔들을 이겨낸 ‘촛불시민’들의 주장을, 나는 ‘근대성의 회복’을 요청하는 것으로 읽었다.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며, 사회적 변화는 법에서 정한 제도와 구조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리성에 대한 신뢰. 적어도 이 정도는 바랐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는 ‘적폐 청산’이라는 단어에서, 또 태극기 집회에 참가하는 노인들을 보며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내 아버지 역시 ‘적폐’였다. 나는 아버지를 ‘청산’해야 하는가? 우리는 ‘전근대성’과 ‘근대성’이 혼재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합리주의를 근거로 평등한 세계를 꿈꿨던 근대의 기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든 ‘근대성’이 추구하는 가치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면, 우리 옆에, 그리고 우리 안에도 도사리고 있는 ‘전근대성’을 어찌할 것인가?   나는 양자의 ‘공존’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유행하는 다른 말로 하면 이는 ‘통합’일 것이다. 근대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결국 ‘전근대적’인 주장을 하는 그들까지도 존중하고 같이 가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는 공존의 가능성이 ‘이해’의 가능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여성을, 청년은 노인을,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서울은 지방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사회는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3. ‘기록’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다시, ‘기록’은 ‘공존’의 가능성에 기여할 수 있는가? 나는 기록이 사람을 변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사람들을 서로를 ‘이해’하도록 할 수는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김영·설문원(2015)은 밀양의 할머니들이 송전탑건설반대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과정을 구술을 통해 깊이 있게 보여주었다. 논문은 식민지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반공이라는 이념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국가폭력으로부터 피해를 입고 국가권력에 거스르지 않기 위해 평생을 국가에 순응했던 이들이, 어떠한 계기로 국가에 ‘반기’를 들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그들의 ‘언어’를 통해 보여준다. 송전탑건설반대운동에 참여한 이들 중 이 정도로 극적인 삶의 궤적을 보이는 이들이 많이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극단적’으로 드문 사례일 수 있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국가의 거대한 폭력에 무참히 스쳐간 수많은 이들이 우리의 근현대사를 이루는 이웃들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어떤 보편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또, ‘극우-반공’이라는 파시즘의 사회에서 자신이 삶의 객체로 전락해버렸던 이들이, 서서히 주체적 모습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은 어떤 감동을 주기까지 한다. 한편 최현숙(2016)은 어르신, 꼰대, 가난, 저학력, 노인 등의 키워드로 설명되는 한국 사회의 가부장 남성을, 50대, 여성, 레즈비언 그리고 좌파로 지칭되는 자신의 시선을 통해 재구성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는 한국의 노인들이 파시즘 권력이 강건했던 시대를 지나오며 내면화했던 권력지향적 사고가, 급격히 민주화된 오늘날 존재를 인정받지 못해 발생하는 간극으로부터 한국의 노인문제가 시작된다고 본다. 예컨대 우리는 태극기집회에 참여했던 이들에 대해 ‘알바’, ‘세뇌’ 등의 단어로 너무 쉽게 이들을 낙인찍는다. 만일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이 한국 사회의 민주성을 갉아먹고 있다면, 이들은 어떤 맥락에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지 이해하기 위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록의 사회적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기록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근대 기록학은 기록의 목적을 업무의 합리적 설명을 담보하는 증거의 확보라고 정의했다. 이 때 기록의 생산 ��체는 국가 권력이었다. 하지만 탈근대 기록학은 기록 생산 주체를 모든 사회구성원으로 확장하고, 주체 각각의 기억을 모두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층적인 주체들의 여러 기억들이 갈등하고 혼재하는 장으로서의 ‘사회적 기억’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최정은 2011). 이런 맥락에서, 기록학은 아직도 기록되지 않은, 그리고 이해의 필요성이 절실한 이들을 기억의 주체로서 인정하고 기록하는 학문이자 작업이다. 기록학은 사회 내에서 서로 이해되지 않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을 놓고, 상호 이해를 도모하여 궁극적으로 공존에 기여하는 학문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사회에 만연한 ‘차별’을 이해하여, 결국 없애가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김영·설문원, 2015, 「구술생애사 기록을 통해 본 사회운동참여의 맥락 : 밀양765kV송전탑건설반대운동에 참여한 여성주민들의 구술생애사 분석을 중심으로」, 『기록학연구』 44. 최정은, 2011, 「사회적 기억과 구술 기록화 그리고 아키비스트」, 『기록학연구』 30. 최현숙, 2016, 『할배의 탄생』,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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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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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힘에 대한 신봉
2017년 3월 23일, 연구반 <기록의 힘 읽기>에서 발제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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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키비스트’라는 새로운 직업을 시작하는 어떤 과정 앞에 서있다. 아키비스트라는 직 업이, 또는 그 작업장이 될 ‘아카이브’가, 우리의 인생이 될지 어떨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 연구반의 궁극적 목표 중 하나는 ‘나는 왜 아키비스트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해 서두 정도를 꺼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아키비스트가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도 잘 모르는, 새내기일 뿐이다. 하여, 함께 읽게 될 이 책 『기록의 힘 : 기억, 설명책임성, 사 회정의』(2016, 랜달.C. 지머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선정에는, 우리가 왜 이 직업을 선택했는지를 넘어, 어떤 아키비스트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아키비스트라는 꿈을 잠시 뒤로 한 채, ‘아카이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본다. 나는 아카이브 를 이용해본 적이 있었나? 그리고 그랬다면, 그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했나? 그리고, 나는 어떤 아카이브에서 일하고 싶으며, 궁극적으로는 어떤 아카이브를 만들고 싶나?
아카이브의 개념을 넓게 잡는다면, 위키백과나 공공도서관들도 아카이브라 할 수 있고, 나는 그 곳을 통해 충분히 많은 정보를 얻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기록 을 수집, 생산, 보존, 평가하여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보존기록 보관공간으로서의 아카이브 는? 아카이브의 기록서비스를 이용해본적은 아쉽게도 없다. 아직까지는 인터넷이나 도서관에 서 필요한 정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두 곳에서도 못 찾는 정보 라면? 만일 그 정보가 내 삶을 결정하는 중대한 기점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아카이브의 필요 성은 절실해질 것 같다.
그런데 아카이브를 제대로 이용해보지 못한게 비단 나 뿐일까? 아닐 것 같다. 적어도 한국에 서는 ‘서비스가 좋은’ 아카이브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 사회의 아카이브에 대한 척 박한 현실 때문일 것이다. 아키비스트를 하고 싶은, 또는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었다.
책의 도움을 받아, 아카이브를 상상해보자. 서론에서 저자는 아카이브를 세 가지 공간으로 비 유했다. 기록 선별에 있어서의 권위와 존경을 상징하는 사원temple, 보존 과정의 통제력을 행 사하는 감옥prison, 그리고 해석과 중재의 힘을 통해 접근가능한 이용성을 보장하는 식당 restaurant이 그것이다. 사회적 개입을 강조하는 능동적인 아카이브를 강조하는 오늘날 우리 의 역할은, 이제 식당(아카이브)을 운영하는 요리사(아키비스트)로 비유할 수 있다. 하지만 진 정한 아키비스트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저자는 요리사 뿐 아니라 사원의 수호자와 감 옥의 간수 역할까지도 온전히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럴까? 저자는 이에 대해, 아키비스트의 세 가지 책무로 답하고 있다. 그 책무들은 다음 과 같다. 첫째, 무엇을 보존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즉 보존기록의 평가와 선별이다. 이것은 두 려운 일이다. 아무리 정해진 기준에 따라 기록을 평가한다지만, 폐기되는 기록의 사회적 가치 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도서관이 자신의 정체성을 보유한 장서를 통해 말하듯, “기록관 이 (보유한) 기록으로 말해야”한다면, 결국 각 아카이브에 어떤 기록을 남길 것인지를 정하는 것은 아키비스트가 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이 사원(아카이브)의 수호자 (아키비스트)가 해야할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아키비스트의 두 번째 책무는 기록의 조직과 통제다. 어쨌거나 보존된 기록의 철저한 유지관리, 즉 간수(아키비스트)가 감옥(아카이브)를 잘 지켜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어떻게 지켜내는가에 있다. 기록을 장기적으로 지키는 데에는, (보존이론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메타 데이터의 작성, 즉 기술description을 통해 ‘기록관의 기록’으로서 자리잡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그 기록을 ‘기술하는 일’은 아키비스트의 가장 전문적인 업무 이자 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기록의 기술하는 일은 곧 기록을 완벽히 통제 하는 일, 즉 누구보다도 그 기록에 대해서 잘 아는 일이기 될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키비스트의 마지막 책무는 기록서비스의 접근과 이용, 즉 접근성 확보에 있다. “좋은 기록 관리는 결국 사회적 비용을 감소시키는 일”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는 사회 곳곳에 적 절한 기록이 관리되고 이것이 적절히 이용된다면, 실수를 되풀이하거나 갈등이 확산되는 등의 사회적 소모 비용이 줄어들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결국 아키이브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 만으로도 사회적 이익에 기여하는 외부적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아키비스트가 된다는 것은, (비록 아무도 몰라주겠지만) 사회적 가치를 지닌 기록의 운 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권력을 갖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듯, 이 일 역 시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의 사회적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은, 그 힘든 일을 버 텨낼 작은 사명감을 얹어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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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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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큐멘테이션 전략의 재구성
2017년 4월 5일, <연구와 발표>에 제출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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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기록의  평가와  선별1)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인간의  유한성에  기인한다.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사실상  무의미하다.  모든  것을  기록하는  것은  기록하지  않는  것 과  같기  때문이다.  하여,  기록들의  끊임없는  평가와  선별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현대의  가치와 문화를  전달하는  일은,  오늘날  아키비스트의  숙명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적  평가·선별론은  젠킨슨(Jenkinson)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19세기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기록  선별에  있어서  가치중립적  ‘객관성’을  중시했다.  이를  위해  기록의  선별  과정에서  아 키비스트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20세기  이후  쉘렌버그(Schellenberg)는 기록  선별의  기준에  있어  증거성,  역사성과  같은  ‘가치’를  전면으로  내세웠다.  이는  양차대전과 기술  발달로  인해  급격히  늘어난  정부  기록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하는  상황  아래,  기록  선별과 정에서  아키비스트  개입의  불가피성을  선언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당시  역시  기록  선별의  객관 성은  최선의  가치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기록  선별의  논의는  붐스(Booms)가  주장한  ‘도큐멘테이션  이론’의  등장  이후  전환기를 맞게  된다.  붐스는  기록이  그  생산  목적과  무관하게  생산된  당대  사회를  반영하는  ‘사회적  표상’ 이라고  보았다.  기록은  그  자체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습을  투영해  존재한다는  것이 다.  이에  기록  평가와  선별에  있어서도  기록의  활용성  측면의  가치를  넘어,  기록이  그  생산  근거 인  사회적  맥락을  온전히  담고  있는지를  판단하여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아 키비스트의  주관적인  사회의식을  필요로  했는데,  이는  앞서  논의되었던  기록  선별의  객관성을  점 차  의심받게  만들었다.  요컨대,  평가  선별에  있어서  ‘어떻게  평가하여  선별할  것인가’에서  ‘무엇 을  선별하여  수집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변화상을  추적하는  것이  이  글에서  다룰  도큐멘테이션 이론의  핵심적  논의이다.2)  
2.  도큐멘테이션  전략은  무엇인가   
‘도큐멘테이션  전략’은  전술한  기록  선별  이론인  도큐멘테이션  이론에  바탕을  둔  방법론을  말한 다.  도큐멘테이션  전략  이전  기록  선별  전략은  기록의  생애주기에  따라  각  기록의  효용가치를 평가하거나(Schellenberg),  기록  생산  출처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수집방식(Bearman)이  주를  이 루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가치나  출처를  기반으로  평가·선별한  개별  기록관의  보존  기록 들이  서로  중복되거나  편파적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이  등장했다.  이에  전  사회적  기록의  총량을 대상으로  한  협업적  선별·수집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  도큐멘테이션 전략은,  전  사회적  차원의  협동적  기록  수집을  통해  기록이  담고  있는  현  사회의  양태를  포괄하고자  하는  거시적  방법론으로의  기록  선별·수집론을  말한다.3) 
기록을  통해  사회를  온전히  구현하고자  하는  도큐멘테이션  전략은,  기록  선별의  전통적  가치인 ‘객관성’의  지위를  위협했다.  ‘기록의  선별을  통한  사회의  구현’이라는  미션은  필연적으로  ‘어떠 한  모습의  사회를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아키비스트의  ‘주관적  판단’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한 사회에  속해  있는  서로  다른  하위집단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처한  계급·계층적  또는  문화적  위치 에  따라  상이한  모습의  사회를  구현하게  된다.  이  때  ‘올바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  사회의  모습 은  무엇인가?  그  객관적  기준은  존재할  수  있는가?  이는  ‘아키비스트의  도큐멘테이션  수집  과정 에서  개입되는  주관성은  어떠한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윤은하(2016)는  이러한  딜레마를  기어츠(Geertz)의  ‘해석적  방법론’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였 다.  기록을  통한  사회  구현의  모습이  서로  다른  이유는  각  개인이  모두  서로  다른  문화를  배경 으로  하는  공동체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기어츠에  따르면,  이러한  이질적  문화체계에  속한  각  사 회  구성원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너머의  타자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그 불가해성을  인식하고,  그  인식론적  한계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상이한  문화  간  통합은  불 가능하지만,  대신  자신의  위치에서  타자를  맥락(context)과  함께  —  저자에  표현에  따르면  ‘두텁 게’  —  읽어낼  수는  있다.  아카이브는  결국  특정  공동체에  소속된  아키비스트의  해석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키비스트는  타자  공동체의  삶을  기록으로  살펴보 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아키비스트가  자신의  해석을  통해  구현한  사회적  총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추 측컨대,  사회의  기울어진  권력구조를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기존의  국가  또는  공공기록  중 심의  기록관리체계가  지금껏  사회적  주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창구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이다.   고전시대부터  기록은  국가권력의  유지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왔는데,  이는  기록이  가진  권력적 특성에  기인한다.  기록의  이러한  측면은,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오늘날  시민의  권리를  위한  도구 로  재탄생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지배계급  및  공공기록  중심의  기록관리  패러다임이  갖는  식 민주의와  비민주성을  극복하고,  소수자의  당사자성이  반영된  ‘아카이브  정의(archival  justice)’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비롯된다(이경래  2016).   
3.  나오며
도큐멘테이션  전략의  등장  이후  기록의  평가·선별론을  둘러싼  객관성과  주관성의  대립은,  양자 의  공존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당대  사회상을  드러낼  기록  선별의  기준을  각  기관의 조직과  기능에  기반한  출처에  두는  ‘거시평가론’을  제안한  쿡(Cook)4)이나,  기관의  기능을  거시 적으로  식별하여  해당  업무  활동에  대한  설명책임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던  사무엘스(Samuels)의 ‘기관기능분석론’5),  그리고  대상과  시점의  목표  지향적  조합을  통한  기록의  실재적  획득을  추구 한  이승억(2014)의  논의  등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록관리  과정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방 향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기록  평가·선별  과정에서의  객관성과  주관성의  대립은,  결국  기록을 통한  사회  표상의  온전한  구현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법론에  불과하다.  결국  기록은  이를 통해  그려진  사회의  모습에서  사회적  차별의  양태를  발견하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발판이  될  때 사회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  기록  ‘평가’는  ‘기록  각각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여  보존해야  할  기록을  식별하는  작업’을,  ‘선별’은  ‘평 가의  결과를  수행하는  절차’로  각각  정의할  수  있다.  한국기록관리학회,  『기록관리론  :  증거와  기억의  과 학』,  아세아문화사,  2017,  151쪽.
2)  윤은하,  「아키비스트의  객관성에  대한  재고찰  :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의  인류학적  방법론을 통해」,  『기록학연구』  47,  2016,  134쪽,  이승억,  「기록  평가선별  결정  분석에  관한  연구」,  『기록학연구』 12,  2005,  49쪽,  위의  책,  156쪽.
3)  이승억(2005),  50쪽,  위의  책,  158-161쪽.
4) 위의  책,  162쪽.
5) 김장환,  「기관기능분석  방법론을  적용한  기록화  전략  사례  연구  :  미국  의회  기록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기록학연구』  44,  2015,  11쪽.
참고문헌  
김명훈,  「기억과  기록  :  사회적  기억  구축을  위한  기록학의  역할」,  『기록학연구』  42,  2014. 김장환,  「기관기능분석  방법론을  적용한  기록화  전략  사례  연구  :  미국  의회  기록화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기록학연구』  44,  2015. 윤은하,  「아키비스트의  객관성에  대한  재고찰  :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의  인류학적 방법론을  통해」,  『기록학연구』  47,  2016. 이경래,  「과거사  집안기억과  ‘아카이브  정의’  :  진실화해위원회  아카이브의  동시대적  재구성」, 『기록학연구』  46,  2016. 이승억,  「기록  평가선별  결정  분석에  관한  연구」,  『기록학연구』  12,  2005. 이승억,  「동시대의  기록화를  지향하는  보존기록  평가선별에  관한  제언」,  『기록학연구』  42, 2014. 한국기록관리학회,  『기록관리론  :  증거와  기억의  과학』,  아세아문화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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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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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인 서울> 2부 단상
내가 생각하는 <메모리 인 서울>의 주요 키워드
#빠르게_변화하는_서울 #무작정_상경 #서울_토박이  #이방인의_서울 #사라져버려_‘애달프고_그리운’_서울의_공간  #젊은_시절_마음_속에_머물러_있는_나만의_서울
어제 마감 직전에 나를 찾아오신 한 분은, ‘기억 수집’에 참여하고 싶은 본인의 어머니를 위해 전시 관리자인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시고 가셨더랬다. 여러 대화를 나누던 중, 내게 기억에 남는 말이 있었다.  
“서울��� 대한 안 좋은 기억도 말 해도 되나요?”
나는 선뜻 그럼요, 라고 답했지만, 하루가 지난 오늘, 2부의 새로운 영상을 보면서 느낀 나의 약간은 거북한 감정들을 바라보며, 그 질문은 나의 것이기도 하구나, 라고 생각했다.
메모리 인 서울 2부 영상에 등장하는 양숙자씨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 붙인 곳이 있으면 그 곳이 고향이에요. 어떻게보면 서울은 축복의 도시같아요.”
<메모리 인 서울>에서 서울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은 ‘빠르게 변화하는 서울’이다. 서울은 왜 ‘빠르게’ 변화할 수 밖에 없었는가? 이는 전근대부터 이어져온 ‘중앙 집중적 사고’가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어지면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경제적 변화는 모두 서울에서 출발했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속담처럼 1960년대 이후 ‘사람다운 삶’을 위한 이촌향도가 커다란 당위성을 얻으면서 서울 인구가 급증했고,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전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서울의 ‘빠른 성장’은 중심 지역의 지속적인 공간적 변화를 가져왔다. 식민지기 존재했던 ‘일본식 가옥’은 슬레이트로, 판자집으로, 다시 주택과 아파트로 변하게 된 것이다.
<메모리 인 서울>은 서울의 성장 흐름이 완만해진 시기, 과포화로 인해 서울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시대에 등장했다. 더 이상 성장이 미덕이 아니게 된, ‘먹고 살 만한’ 시대에,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살았던 공간 서울을 돌아보며 자신과 공동체의 힘겨웠던 지난 시절을 살피고, ’그리워하며’ 애틋한 기억의 시기로 재설정하게 되었다.  <메모리 인 서울>은 ‘도시는 기억으로 살아간다’고 전시 공간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도시는 기억을 통해 두터워진다’고 하는 것이 나에겐 더 정확한 표현으로 보인다. ‘서울이 이렇게 성장하는 동안, 그래서 이 정도로 살 수 있게 된 데에는 시민 개개인의 힘이 있었어요. 우리는 당신의 노고를 기억합니다. 당신은 서울을 구성하는 중요한 사람이에요’라는 메세지, 가 나에겐 읽힌다.  
<메모리 인 서울>이 시도하는 도시에 대한 미시적, 개인적 접근은 역사와 사회의 다양한 서술이라는 관점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울에서 쫓겨난 사람들, 서울의 공간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듣고 이해하며 맥락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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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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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9일
창문의 방충망을 열면, 아파트 18층 높이 옆에 작은 난간을 앞에 두고 앉을 수 있다. 깊어가는 밤에도 풀벌레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 방에서 불을 모두 끄고 창틀에 앉아서 수박을 먹거나 맥주를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보곤 한다. 지평선이 보이는 바다나 나무를 셀 수 있는 산등성이가 보였으면 좋았겠지만, 내 방에서 보이는 건 아파트단지의 건물들 뿐이다. 그 건물의 창가에는 사람들이 켜놓은 TV 불빛만이 번쩍, 번쩍이고 있다. 요새 새로이 짓는 이른바 '정원식' 아파트단지라는 것은 아파트 사이를 나무와 놀이터로 메운다는 것인데, 이들은 모두 너무 어린 나무들뿐이어서, 마치 놀이공원에 심어진 인공숲을 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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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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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의 경성, 나의 서울
 김동진,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2010. 서해문집.
 이 책은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당시 의열단의 무장투쟁활동을 다루고 있다. 김상옥은 독립운동가로서 학생운동, 애국계몽운동, 문화투쟁, 의병 후신인 대한광복군 활동, 3.1운동 만세시위, 의열투쟁, 임시정부 활동, 독립군 연계투쟁, 군자금 모금 등 당시 수행되던 거의 모든 방식의 독립운동 방략을 실천하였던 독립투사다.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사건은 그의 의열투쟁 정점이자,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결국은 순국으로까지 이어지게 한 사건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흥미롭게 보았던 것은, 1923년 1월 12일 폭탄 투척 이후 17일 은거하던 삼판통(현 용산구 후암동)에서의 총격전과 도주, 그리고 22일 효제동에서의 총격전에 이르는 숨막히던 열흘동안 김상옥이 움직였던 옛 서울, 경성의 모습이다.  김상옥은 1890년 1월 5일 동대문 어의동(현 종로구 효제동)에서 태어났다. 경성 태생인 그는, 조선에서 태어나 대한제국을 지나 식민지 시기에 이르는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에게 경성과 조선은 ‘고향’으로서 지켜야 할 사람들의 공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1905년 동대문 감리교회의 신군야학교(信軍夜學校)와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경성영어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09년에는 그와 지역 청년의 교육을 위해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했으며, 1912년 동대문 안(현재 종로6가) 교회서점과 창신동 영덕철물점을 개점하는 등 그의 생애 초기 일련의 사회 활동이 모두 그의 출생 근거리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종로서 폭탄 투척 이후 경성역 폭탄 투척을 위해 삼판통에 숨어있다가, 경찰에 발각되자 남산을 넘어 결국 다시 돌아간 곳도 그의 ‘고향’이자 ‘출생지’인 효제동이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 자신의 생을 다하는 연어처럼, 그 곳에서 운명처럼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지금은 거의 한 세기가 흘렀다. 그 동안 서울은 당시와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변화했다. 나는 그가 신봉했던 독립운동의 중심인 ‘민족’을 쉽사리 믿지 않는다. 물론 그건 시대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당시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고, 또 그것이 독립운동의 거대한 명분으로 작용하던 시기였던 반면, 지금은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라는 프레임을 넘거나 혹은 더 작은 단위로 향해가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쨌건, 그렇다고 해서 그와 내가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내가 김상옥을 기억하고, 만나고, 또 고마워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서울’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162번 버스를 타고 그가 살았던 효제동과 그가 폭탄을 투척했던 종로서에 갈 수 있다. 그의 흔적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나는 그를 책에서 뿐만 아니라 걸어서 만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 경성, 서울은 태어난 곳, 즉 고향이었고, 빼앗겨 다시 되찾아야 할 터전이었으며, 그의 평생 활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1989년 안양에서 태어났고, 잠시 과천에서 살다가 1992년 평촌 신도시 건설과 함께 그곳에서 20여년을 넘게 살았다. 나는 안양 평촌이 내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그 곳에서 나왔고 어린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서울은? 어릴적 서울은 나에게 늘 4호선으로 연결된, 멀지 않은 커다란 다운타운이었다. 서울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서울이 어색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스무살이 넘어, 서울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나는 학교를 위해 서울 정릉에 살게 되었다. 나는 서울 사람인가? 서울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정릉에 3년을 넘게 살면서, 나는 스스로를 이 곳의 이방인처럼 느끼고 있다. 서울은 나에게 낯설고도 익숙한 곳이다. 이 묘한 감정은, 서울을 더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서울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왔는가? 서울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이 것이 내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서울 사람’ 김상옥의 ‘길’은 흥미로웠다. 1923년 1월 17일 새벽 5시, 일제 경찰 20여명이 삼판통 고봉근 가택에 잠입, 김상옥을 체포하려 하지만 실패한다. 김상옥은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고 그 곳을 빠져나가 눈 덮인 남산으로 들어간다. 그는 남산 북쪽, 당시 일본인이 다수 거주했던 진고개가 아닌 남산 남동쪽으로 돌아간다. 즉, 눈보라치는 산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셈이었다. 지금 남산은 정상 팔각정과 남산타워를 중심으로 길이 나있지만, 당시에는 특별한 길이 없었을 것이다. 이후 서빙고 채석장 낭떠러지를 지나 한강리(현 용산구 한남동)에 당도하였다. 이후 방향을 북쪽으로 하여 장충단을 거쳐 안정사(당시 금호동, 현 성동구 하왕십리동)에서 허기를 해결하고 승복으로 환복, 다시 왕십리 인근에 거주하는 지인의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이후 마장동을 거쳐 청량리 영도사 고개를 지나 미아리 밖 무내미 이모집에 도착, 저녁을 먹은 뒤 미아리고개를 넘어 다시 경성으로 들어온다. 경성에 남아있는 가족과 동지에게 자신의 무사함을 알리고 향후 상황을 숙의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가 경성에 잠입한 곳은 동지 이혜수의 집이었던 효제동 73번지. 이 때가 17일 밤이었다. 이후 닷새 뒤인 22일, 김상옥의 거처를 찾은 일제 경찰은 시내 4대 경찰 무장 인력 1,000여명을 데리고 그를 덮친다. 경찰의 4중 포위망의 한 복판에 갇힌 김상옥은 3시간 동안 16명 이상의 경찰을 사살하며 대치한 끝에, 마지막 남은 하나의 총알로 자결을 선택,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김상옥은 나에게 어떤 인물로 기억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공동체였던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담하게 던진 독립투사이자, 1920년대 일제의 기만적 문화통치에 강렬하게 저항한 서울 사람이기도 하다. 대학로에 있다는 그의 동상을 이 전까지는 모르고 지나갔었는데, 이제는 잠시 멈춰서서 지켜보고 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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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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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어제 저녁 체했다. 밤새 소화가 되지 않아 끙끙 앓았다. 몸의 여기저기가 굳고 아팠다. 힘겹게 보낸 새해 첫 날이었다.  무얼 먹었기에 체했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그 때는 당장 대답할 수 없었는데 하루가 지나면서 차차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최근에 소화할 수 없었던 것은 음식보다는 오히려 ‘일’들에 가까웠다. 연말이 되어 바빠졌던 학교, 집, 가족, 친��들의 일들. 하나하나가 나에게 소중한 일들이지만, 어느 하나 집중하기 힘들정도로 일이 몰리니 나는 그저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해지고 말았다. 더 신경쓰고 마음 쓰고 싶은 일들도, 그 마음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지쳐버려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고 말기 일쑤였다. 그 일들을 12월 말일까지 끝내고나니, 긴장이 풀린 것인지 아님 긴장을 제대로 풀지 못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집에 오는 길부터 그만 체하고 만 것이다.   덕분에(?) 하루종일 쉬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방학이었다. 속을 비워내고 나서야, 어스름할 무렵 죽을 사서 먹을 수 있었다.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내내 어두운 내 방에서 해가 질 때까지 내가 한 일은, 누워서 유투브의 영상 따위를 찾아보는 일이었다. 왠지 TV가 보고 싶었다. 그저 누군가가 나와 상관없이 계속 떠드는 걸 보고 듣고 싶었다.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않고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엿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시간이 갈 수록 더 중요한 것은 ‘집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시간, 내 몸, 나의 즐길거리, 내 사람, 사람들... 사랑할 수록 더 깊이, 주의깊게, 천천히, 하나하나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잊어버릴 것만 같다. 잊어버리면, 놓칠 것만 같다. 부디... 잊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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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10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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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
 ‘사진으로 나의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지난 4주 간의 프로젝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과정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 사진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진은 항상 많은 말을 하고 있다.  지나온 나의 삶에 대한 기억이 나의 남겨진 사진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어왔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의 장면들은 늘 불완전하고, 그걸 말하는 언어는 때로 위태로운데, 오직 사진만이 그 장면을 온전히 전하고 있다. 한 사회의 기억을 보존하는 것이 공동체의 유지를 가능케 한다고 나는 믿고있다. 그렇다면, 개인의 기억을 잘 정리하는 것은 인간을 더욱 두껍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러하니, 우리가 사진을 이렇게나 자유롭게 찍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므로, 앞으로도 더 많은 사진을 찍을 것! 
 20151123, ‘청년기억공방’에서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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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10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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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5일
<쓸모>에 대해 고민한다. <존재>, 에 대한 고민일 수도 있겠다. 나는 어떤 수단 혹은 필요로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 그 자체의 의미인가. 사실, <변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사회’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그것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어떻게 변하는가. ‘나아간다’는 뜻의 ‘진보’라는 말로 ‘역사’를 설명하려고 했던 일련의 시도가 좌절된 후 - 물론 여전히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 우리에게는 아직 새로운 지도가 보이지 않는 것만 같다. 어제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나의 안 쪽 깊숙한 곳에 있는 욕망과 사람들의 욕망, 넘지 못한 벽, 오늘을 위해 상경한 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유리창 바깥의 캡사이신과 유리창 안의 커피, ‘한국의 어른들’, 그리고 생활인으로서 우리의 삶도, 보았다. 사회학은 사회의 변화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하고 있는가. 설명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것이 사회학의 <쓸모>가 되는가. “잘 모르겠다.”  말과 글로 전해진 사람들의 기록과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도,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여전히 애쓴다. 애를 써서, 사람들의 마음을, 말을, 발걸음을, 지폐 한 장을 하나라도 더 모은다. 그러나 그 다음은 “잘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다. 안개에 가려진 터널 앞에 마주선 기억이 떠오른다. 그 앞을 향해, 보이지 않아도 가야만 하는 것은, ‘운명’인 것일까? 삶의 설명의 끝에서 결국 우리는 다시 이 단어를 마주하게 되는 것일까?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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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10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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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청운동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서울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다. 새벽에 비가 와서인지, 먼지가 맑고 따뜻한 서울, 가을이다. 사람들은 세종문화회관 계단장에서 공연을 하고, 청계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서울광장에서 북페스티벌을 즐긴다. 선물같은 가을의 서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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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10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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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5일
1. 학교에 감나무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을이 오기 전까지 소나무 사이에 가려졌던 감나무는, 이제 점점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감이 익으면 학교에서 가져갈까? 점심을 먹고 햇빛을 쐬러 걸었던 운동장에서 들었던 생각이다. 2. 사람들에게는 제각기 자신에게 와닿는 이슈들이 있다. 그것은 모든 논리적 설명 이전, 혹은 이후에 벌어진 감정의 울림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구조와 개인적, 집단적 욕망이 뒤엉켜, 누군가는 평생 안을 상처를 받는다. 그 과정과 연원을, 우연히 수업을 듣다 문득 깨달았던 순간이 있다. 공부는, 특히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결국 서로의 '다른' 태도를 아는 일인 것이다. 그 난맥을 더 파헤치고 싶은 마음이 많았는데, 그 전에 먼저 슬퍼서 주저앉게 되고 말았다. 왜 누군가는 아파야만 하는가, 아파야만 했는가. 상처입은 그를 앞에 두고 뒤를 돌아보면, 막막하기만 하다. 그것이 내가 무언가를 더 해봐야겠다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그 전에 슬픈건, 어쩔 수 없다. 3. 스스로 글과 사진을 남기지 않은 사람의 평생을, 그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가 떠난 흔적을 뒤져서, 나온 자료들을 정리하고 유추하여, 겨우 가늠이나마 할 수 있으려나. 때때로 이 일이 참 애처롭게 보인다. 4. 사람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바꾸는 일을, 어릴 때 동경했었다. 그건,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항상 때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언젠가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그 때. 지금보니 나도 그렇게 살고있더라. 노력하면 사람의 마음이 변할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이 말, 이 참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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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amable · 10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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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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