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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kyuyoung-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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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방, 롤랑 바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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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어느 날 나는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 제롬의 사진(1852)을 우연히 보았다. 그때 나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놀라움을 드러내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황제를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 때때로 나는 그 놀라움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않는 것 같았기에(이처럼 삶은 작은 고독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한 장의 사진이 어떤 볼거리를 주든, 그리고 그것의 방식이 어떠하든, 그것은 언제나 비가시적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은 사진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보면 사진은 완전히 별개인 두 방식의 교차점에 있다. 하나는 화학적 차원에 속한다. 그것은 어떤 실체들에 대한 빛의 작용이다. 다른 하나는 물리적 차원에 속한다. 그것은 광학적 장치를 통한 이미지의 형성이다.
즉 '자아'는 나의 이미지와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겁고 부동하며 집요한 것은 이미지이고(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이 이미지에 의지한다), 가볍고 분열되어 있으며 분산된 것은 '자아'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차원에서 보면, (거울에서와는 다르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다는 그 행위는 최근의 일이다. 왜냐하면 사진이 보급될 때까지 그림으로 그려지고 스케치되거나 소형화된 초상화는 경제적, 사회적 생활 수준을 과시하는 제한적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림으로 그려진 초상화는 아무리 실물을 닮았다 하더라도 사진이 아니다(이것이 내가 입증하고자 하는 바이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새로운 행위가 가져다주는 (문명적) 혼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시선의 역사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의 도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동일성 의식의 교활한 분열인 것이다.
사진은 누구 것인가? (사진이 찍힌) 사람 것인가? 사진작가의 것인가? 풍경 자체는 땅의 소유주로부터 빌린 일종의 차용물인가? 존재를 소유에 근거해 확립한 사람이 볼 때, 수많은 소송들은 한 사회의 그런 불확실성을 표현했던 것 같다. 사진은 주체를 객체로 변모시켰고, 심지어 박물관의 미술품으로 변모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1840년경) 최초의 인물 사진들을 찍기 위해서는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큰 유리창 아래서 사람이 오랫동안 포즈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외과수술처럼 고통스럽게 했다. 그래서 창안된 것이 머리받침이라는 기구인데, 이것은 육체가 움직이지 않아야 할 때 육체를 받쳐 주고 유지시켜 주는 일종의 인공 보정기이며, 카메라 렌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머리받침은 나라는 존재가 변화하여 될 조각상의 받침대, 즉 내 상상적인 본질의 코르셋이었다.
인물 사진은 힘들의 닫혀진 영역이다. 네 개의 상상적인 것이 그 속에서 교차하고, 대립하며 변형된다. 카메라 렌즈 앞에서 동시에 나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이고, 내가 사람들이 나라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자이며, 사진작가가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가 자신의 예술을 전시하기 위해 이용하는 자이다. 달리 말하면 이상한 행동이지만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모방하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누군가 내 사진을 찍도록 놓아둘 때마다) 진짜가 아니라는 느낌, 때로는 기만의 느낌이 반드시 나를 스쳐간다(어떤 악몽을 꿀 때처럼 말이다). 상상적으로 보면 사진(내가 의도하는 사진)은 매우 미묘한 순간을 나타내는데, 이 순간에 사는 나는 주체��� 대상도 아니고 그보다는 대상이 되어간다고 느끼는 주체이다. 그때 나는 죽음(괄호의)의 미시-경험을 체험한다. 그러니까 나는 진짜로 유령이 된다. 사진작가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자신도 자신의 동작이 나를 방부 처리하게 될 이 죽음을 그리워한다.
나는 이런 나쁜 꿈으로부터 훨씬 더 힘들게 깨어나야 한다는 것을 예감한다. 왜냐하면 나는 사회가 내 사진을 가지고 만드는 것, 사회가 내 사진에서 읽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어쨌든 하나의 동일한 얼굴에 대한 수많은 해석이 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작업의 산물에 따라 노출될 때, 내가 보는 것은 내가 온통 이미지, 다시 말해 죽음의 화신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타자-은 나에게서 나 자신을 박탈하고, 나를 잔인하게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며, 온갖 미묘한 계략들을 위해 준비된 카드 속에 나를 정돈하여 마음대로 하고 이용한다. 예컨대 언젠가 훌륭한 사진작가가 나의 사진을 찍었다. 나는 그 사진의 이미지에서 최근에 당한 초상의 슬픔을 읽고 있는 듯했다. 한번이지만 사진은 나를 나 자신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후에 나는 이 사진을 한 비방 책자의 표지에서 다시 만났다. 인위적 인쇄로 인해 나는 저자들이 나의 언어에 주고 싶었던 이미지처럼, 내면을 상실하고 침울하고 험상궂은 끔찍한 얼굴만을 드러내고 있었다('사생활'은 내가 하나의 이미지나 대상이 아닌 그 시공간의 지대에 다름 아니다. 내가 방어해야 하는 것은 하나의 주체라는 내 정치적 권리이다).
사실 사람들이 찍은 내 사진에서 내가 노리는 것(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의도')은 죽음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이 사진의 에이도스(본질)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상상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나의 사진을 찍을 때, 내가 견뎌내고 좋아하며 나에게 친숙한 유일한 것은 사진기 소리이다. 나에게 사진작가의 기관은 그의 눈이 아니라(시선은 나를 질겁하게 한다) 손가락이다. 손가락은 카메라 렌즈의 셔터 소리에 연결되어 있고, (사진기가 아직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면) 금속성을 내는 건판의 미끄러짐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이런 금속성 소리를 거의 관능적으로 좋아한다. 마치 사진에서 이 소리가 내 욕망이 매달리는 바로 그것-유일한 그것인 것처럼 말이다. 이 짧은 셔터 소리는 죽음의 노출 시간대를 깨버리는 것이다.
사르트르를 인용하자면, 어떤 신문의 사진들은 '나에게 마무것도 말하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지만 존재의 위상을 부여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재빨리 이해한 것은 그 사진의 존재(그것의 모험)가 불연속적이고 이질적인 두 요소, 즉 병사들과 수녀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같은 세계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대조라는 용어를 쓸 필요도 없었다).
이 기호들은 민간 복장을 한 가난한 병사들, 폐허가 된 거리들, 죽은 자들, 고통, 태양과 인디언들의 무거운 두 눈 같은 것이다. 수많은 사진들이 이 영역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나는 이 사진들에 대해 일종의 일반적이고 때로는 감동된 관심을 느낄 수 있지만, 그 감동은 도덕적, 정치적 교양의 합리적인 중계를 거쳐 간다. 내가 이 사진들에 대해 느끼는 것은 평균적인 정서, 즉 거의 길들이기에 속한다. 나는 프랑스어에서 이런 종류의 인간적 관심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낱말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라틴어에는 이런 낱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스투디움(studium)인데, 이것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연구'를 의미하지 않고 어떤 것에 대한 전념, 누군가에 대한 애정, 열정적이거나 특별히 격렬하지는 않은 일반적인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바로 스투디움을 통해 나는 많은 사진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 내가 그것들을 정치적 증언으로 받아들이든, 그것들을 좋은 역사적인 그림들로 감상하든 말이다. 왜냐하면 바로 교양적으로(이 함축의미는 스투디움에 존재한다) 나는 태도, 표정, 몸짓, 배경, 행동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이 두번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punctum)이라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는(뿐만 아니라 나에게 상처를 주고 완력을 쓰는) 그 우연이다.
스투디움은 나는 좋아한다/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정도의 나른한 욕망, 다양한 관심, 일관성 없는 취미의 매우 방대한 영역이다. 스투디움은 사랑하기가 아니라 좋아하기에 속한다. 그것은 반쯤의 욖망, 반쯤의 의지를 동원한다. 그것은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광경들, 옷들, 책들에 대해 느끼는 동일한 종류의 막연하고 잔잔하며 무책임한 관심이다.
스투디움을 인정하는 것은 사진작가의 의도를 숙명적으로 만나는 것이고, 그 의도와 일치하는 것이며, 그것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내 자신 안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투디움이 속하는) 교양/문화는 창조자들과 소비자들 사이의 계약이기 때문이다. 스투디움은 일종의 교육(지식과 예절)이다.
사진은-단 하나의 낱말이 수행하는 갑작스러운 작용을 통해 문장을 묘사에서 성찰로 이동하게 해줄 수 있는 텍스트와는 반대로-순수한 우연이고 또 그뿐일 수 있기 때문에(언제나 사진은 재현된 어떤 것이다), 민족학적 지식의 재료 자체가 되는 그 '세부적 사항들'을 즉시 전달해 준다.
나는 촬영자의 본질적인 동작이 (카메라의 작은 구멍을 통해서)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현장에서 포착하는 것(surprendre)이고, 따라서 이 동작이 사진 찍히는 자가 모르게 수행될 때 완벽하게 된다고 상상한다(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사진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작으로부터 '충격'을 원칙(알리바이라고 말하는 게 더 나으리라)으로 하는 모든 사진들이 공개적으로 유래한다. 왜냐하면 사진의 '충격'(이것은 푼크툼과 매우 다르다)은 상처를 준다기보다는 너무도 잘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당사자 자신도 모르고 있거나 ���식하지 못하는 것을 드러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온갖 종류의 놀라움들이 나온다(구경꾼인 나에게 사진들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사진작가에게 그것들은 모두 '성과물들'이다).
요컨대 사진은 겁을 주고, 격분하게 하며 상처 줄 때가 아니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복적이다.
"이미지에 선행하는 조건은 시각이다"라고 야누흐는 카프카에게 말했다. 그러자 카프카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어떤 것들을 사진 찍는 것은 그것들을 정신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다. 나의 이야기들은 눈을 감는 하나의 방식이다." 사진은 침묵해야 한다(매우 시끄러운 사진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중함'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의 문제이다. 절대적인 주관성은 침묵의 어떤 상태나 노력에서만 도달된다(눈을 감는 것은 이미지가 침묵 속에서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사진을 그것의 통상적 객설, 예컨대 '테크닉' '현실' '보도' '예술' 따위로부터 구해낼 때, 그것은 나를 감동시킨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눈을 감으며, 세부 요소만이 정서적 의식으로 올라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틀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은 이 틀을 벗어나면 절대적으로 죽는다. 사진이 부동의 이미지로 정의될 때, 이것은 사진이 나타내는 인물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또한 인물들이 튀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나비처럼 마취되어 꽂혀 있다. 그러나 푼크툼이 있자마자, 하나의 가려진 시야가 만들어진다(간파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가려진 시야의 현존(역동적 힘)은 에로틱한 사진을 포르노 사진과 구분시켜 주는 것이다. 포르노는 보통 성기를 나타내며, 그것을 벽감에서 나오지 않는 신처럼 모셔진 부동의 대상(물신)으로 만든다. 내가 볼 때 포르노적 이미지에는 푼크툼이 없다. 기껏해야 그것은 나를 즐겁게 할 뿐이다(뿐만 아니라 곧바로 실증이 난다). 그 반대로 에로틱한 사진은 성기를 중심적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이것은 에로틱한 사진의 조건 자체이다). 그것은 얼마든지 성기를 보여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보는 사람을 그것의 틀 밖으로 끌고 간다. 이 점 때문에 나는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은 나에게 활기를 불어넣는다. 따라서 푼크툼은 시야 밖의 미묘한 영역 같은 것이다. 마치 이미지가 그것이 보여주는 것 너머로 욕망을 쏘아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나체의 '나머지'를 향해서 뿐 아니라, 또 성행위의 환상을 향해서 뿐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된 어떤 존재의 절대적 특출함을 향해서 말이다.
역사는 히스테릭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바라볼 때에만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 살아 있는 영혼으로서 나는 역사의 반대 자체인데, 이런 측면은 나만의 이야기를 위해 역사를 부인하고 파괴한다(나는 '증인들'을 믿을 수 없다. 최소한 증인이 된다는 게 불가능하다. 미슐레는 자기 시대에 대해 말하자면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그 사진들을 통해서 때때로 나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코와 이마의 비례와 같은 한 부분, 팔과 손의 움직임을 알아보았다. 나는 단편적인 조각들을 통해서만 어머니를 알아보았다. 다시 말해 나는 어머니의 존재를 놓쳤고, 따라서 어머니 전체를 놓쳤다. 그것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고다르는 "정확한 이미지는 없고 오직 이미지만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의 슬픔은 정확한 이미지, 정당함이자 동시에 정확함인 이미지를 원했다. 다만 하나의 이미지, 그러나 정확한 이미지를.
사진은 과거를 회상시키지 않는다(사진 속에 프루스트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나에게 미치는 효과는 (시간, 거리에 의해 파괴된 것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있는 그것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반드시) 말하는 게 아니라 존재했던 것을 다만 확실하게 말한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는 결정적이다. 한 장의 사진 앞에서 의식은 추억을 향수하는 길을 반드시 택하는 게 아니라(얼마나 많은 사진들이 개인적 추억을 벗어나 있는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진을 위해 확실성의 길을 택한다. 사진의 본질은 그것이 나타내는 것을 인준하는 데 있다. 어느 날 나는 어떤 사진 작가로부터 나의 사진 한 장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이 어디서 촬영되었는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 넥타이를 매고 스웨터를 입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것들을 면밀히 검토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한 장의 사진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확신과 망각 사이의 이와 같은 어긋남은 나에게 일종의 현기증을 일으켰고, 일종의 탐정물에 나오는 불안감을 주었다.
어떠한 글도 그 확신을 나에게 줄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인증할 수 없다는 것은 언어의 불행이다(또한 언어의 관능성이라 할 것이다). 필시 언어의 노에마는 이러한 무력감일 것이다. 혹은 보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언어는 본성상 허구적이다. (...) 그러나 사진은 어떠한 중계와도 무관하다. 그것은 꾸며내지 않는다. 그것은 인증 자체이다. 그것이 허용하는 드물지만 인위적인 기교들은 입증을 하지 못한다. 그 반대로 그것들은 속임수이다. 사진은 그것이 속임수를 쓸 때에만 고심한 흔적을 드러낸다. 그것은 거꾸로 된 예언이다. 카산드라처럼 말이다. 그러나 과거에 눈이 고정된 채, 그것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본성상 편향적인 바 사물의 의미에 대해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사물의 존재에 대해선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영화에서 사진은 어떤 흐름 속에서 촬영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끊임업싱 다른 시각들을 향해 밀어붙이고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는 사진적인 지시 대상이 항상 있다. 그러나 이 대상은 미끄러져 이동하고, 자신의 현실을 위해 주장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옛 존재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나에게 달라붙지 않는다. 그것은 유령이 아니다. 현실 세계처럼 영화 세계는 "경험이 동일한 구성적 스타일로 끊임없이 연속해 흐를 것이다"라는 가정에 의해 지탱된다. 그러나 사진은 '구성적 스타일'을 깨버린다. 그것은 미래가 없다. 사진에는 아무런 미래 지향이 없다. 반면에 영화는 미래 지향적이고 따라서 전혀 우울하지 않다. 부동한 채 사진은 나타내 보임으로부터 과거지향으로 역��한다.
사진은 방을 '에워싸지' 않는다. 그것은 향기도 음악도 없고, 다만 돌출된 사물만이 있다. 사진은 폭력적이다. 그것이 폭력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매번 그것이 시각을 힘으로 가득 채우고,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거부되고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우리가 때로는 사진이 부드럽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이것이 사진의 폭력돠 모순되는 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설탕이 부드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1865년에 청년 루이스 페인은 미국의 국무장관 W.H.슈어도의 암살을 기도했다. 알렉산더 가드너는 페인을 그의 독방 감옥에서 촬영했다. 그는 자신의 교수형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은 아름답고, 청년도 역시 아름답다. 이것은 스투디움이다. 그러나 푼크툼은 그가 곧 죽는다는 것이다. 내가 동시에 읽는 내용은 그 사실은 존재할 것이고 그것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나는 죽음이 걸려 있는 전미래의 공포를 느끼며 지켜본다. 포즈의 절대적인 과거(정해지지 않은 부정과거)를 나에게 제시하면서 사진은 미래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나를 찌르는 것은 이와 같은 등가성의 발견이다. 나의 어머니-아이를 촬영한 사진 앞에서 나는 어머니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위니코트의 정신병자처럼, 이미 일어난 재아엥 대해 전율했다. 사진의 주체가 이미 죽었든 죽지 않았든, 모든 사진은 이와 같은 재앙이다.
사진의 기술적인 기원 때문에 그것을 어두운 통로(암실/어두운 방; camera obscura)의 관념과 연결시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우리는 밝은 방(camera lucida)을 언급해야 한다(그것이 사진보다 앞서는 그 장치, 한 눈은 모델에, 다른 한 눈은 종이에 고정시킨 채 프리즘을 통해 대상을 그릴 수 있게 한 그 장치의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시선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의 본질은 내밀함 없이 전적으로 바깥에 있으나 내면의 사유보다 더 접근할 수 없고 더 신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시적인 의미는 없지만 가능한 모든 의미의 깊이를 부른다. 그것은 세이렌(반인반어의 요정)의 매력과 매혹을 만들어 주는 그 존재-부재를 지니고 있음으로써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뚜렷하다"(블랑쇼).
사진에서의 시선은 우리가 삶에서 때때로 재발견하는 무언가 역설적인 게 있다. 예컨대 요전날 카페에서 어떤 청년이 홀로 두 눈으로 홀을 훑어보고 있었다. 때때로 그의 시선은 나에게 머물렀다. 그때 내가 확신한 것은 그가 나를 쳐다보고(regarder) 있지만 나를 보고(voir)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는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생각할 수 없는 뒤틀림이라 할 것이다. 어떻게 보지 않고 쳐다볼 수 있는가? 사진은 주의력을 지각과 분리시키고 전자만을 전달하는 것 같지만, 후자 없이 전자는 불가능하다. 괴상한 일이지만, 이런 현상은 노에마 없는 노에시스이고, 사유 없는 사유행위이며, 목표물 없는 조준이다. (...) 시선은 눈으로 보이는 것을 피하면서 내면의 무언가에 의해 붙들려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난한 소년은 �� 태어난 강아지를 손에 안고 뺨을 대고 있는데(케르테스, 1928), 슬프고 집착적인 두려운 두 눈으로 렌즈를 쳐다보고 있다. 생각하는 표정이 얼마나 가련하고 애절한가. 사실 그는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사랑, 자신의 두려움을 내면을 향해 붙들어 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선이다.
사슬에 묶여 채찍질당하는 익명의 개인이 자신의 쾌락을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것은 이 쾌락이 사도-마조히스트의 판에 박힌 이미지와 합류할 때 뿐이다. 바로 이것이 커다란 변모이다. 이러한 전복은 윤리적인 문제를 반드시 제기한다. 이미지가 비도덕적이고 반종교적이거나 악마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일반화되어 갈등, 욕망의 인간 세계를 예시한다는 구실 아래 이 세계를 완전히 탈현실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른바 선진화된 사회들을 특징짓는 것은 오늘날 이 사회들이 예전의 사회들처럼 믿음을 더 이상 소비하지 않고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사회들은 더 자유롭고 덜 광신적이지만 더 '허구적'이다.
이상이 사진의 두 길이다. 사진의 광경을 완벽한 환상들의 문명화된 코드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진 안에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완강한 현실의 깨어남과 대결할 것인가, 이것이 내가 선택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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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kyuyoung-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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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로서의 글쓰기, 에텔 아드난 (번역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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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언어는 집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나는 유년시절부터 어떻게 내가 여러 언어들 속에서 성장했는지, 일반적으로 내가 말하거나 시를 쓰기 위해 결코 쓰지 않았을 언어들을 어떻게 마주하게 되었는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 것이다. 이러한 질문과 함께 나의 가족의 배경과 분쟁에 관한 몇몇 정보를 주고자 한다.
나의 어머니는 제1차세계대전 이전에 오토만제국 내의 그리스어권 커뮤니티인, 대다수가 그리스인으로 이루어진 도시 스미른 출신의 그리스인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시리아 다마스에서 태어난 아랍인이었다. 12세 때 그는 전쟁학교라 불리는 이스탄불의 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19세기 말 무렵이었다. 다마스는 오토만제국의 일부였고 그에 따라 그는 오토만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터키는 카이저 독일제국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그는 먼��� 12세까지 코란학교에서 아랍어로 수학 후 터키어,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로 교육을 받았다. 오토만제국은 일반교육의 일환으로 프랑스어를 가르쳤고 그것은 러시아어도 마찬가지였다.
무슬림이었던 아버지는 자신보다 훨씬 젊고 다른 문화권에서 온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때가 제1차세계대전 초반, 즉 1914년 무렵이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터키에 살았던 그리스인들은 모두들 터키어를 조금씩 구사할 줄 알았지만 집이나 학교에서는 그리스어로만 이야기했다. 그들의 삶은 그들의 교회, 문화, 종교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밀접하게 뒤섞였다. 각각의 커뮤니티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은 무척 드물었다.
오토만 제국은 하나의 제국이었고 그것은 동일한 민족들로 이루어진 국가가 아님을 의미했다. 그 제국에서는 터키어 조차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가 아니었다. 터키어는 그 자체로 수많은 아랍어 어휘와 표현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무슬림인 터키인들이 아랍어로 코란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터키어는 또한 수많은 페르시아어를 포함하고 있었다. 결국, 오토만제국에서는 아르메니아어와 터키어를 말하는 아르메니아인들 또한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자신의 모국어 외에 다른 언어를 조금씩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각각은 자신들의 삶과 언어권 커뮤니티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이처럼 내가 말했듯 나의 부모님은 둘 사이에서 터키어로 말했다. 어머니는 12세의 나이까지 프랑스인 수녀원 기숙학교를 다녔다. 프랑스인들은 모든 큰 도시에 카톨릭학교를 가지고 있었고 소위 교육받은 사람들은 프랑스어를 배웠다. 적어도 특정한 프랑스인들은 말이다. 결과적으로 나의 부모님은 프랑스어를 이해했고 프랑스어로 읽고 쓸 줄 알았다. 어머니는 터키어로 말했지만 터키어를 공부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중요한 전투에서 특정 시간동안 이스탄불 근처의 다르다넬 전선에 있었을 때 그는 어머니에게 프랑스어로 편지를 썼다. 그의 글쓰기 스타일은 그당시 독일, 오스트리아 혹은 러시아 소설에서 쓰였던 방식으로서 매우 로맨틱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그 편지들은 자랑이자 기쁨이었고 그 덕분에 나는 소중히 보관될 편지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 편지들은 사랑과 전쟁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같은 소설 속에서 나타날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그것들은 캐논 음율에 따라 검정색 잉크와 매우 읽기 쉬운 서체로 쓰여져 있었다. 잦은 이사와 젊은 시절의 부주의함으로 인해 그 편지들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나는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태어났다. 제1차세계대전 말 부모님은 그곳에 정착하기 위해 터키를 떠���기 때문이었다. 도시는 아버지가 태어난 도시인 다마스와 가까웠다. 수년이 지난 후 나는 부모님이 알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태어났다. 연합국은 아랍중동지역을 점령했고 그곳을 분단시켰다. 프랑스군은 그들이 갈라놓은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을 관할했고 그 직후 레바논에 사제, 수도사, 수녀들이 운영하는 프랑스학교망을 설치했다.
이에 따라 나는 프랑스 수녀원 기숙학교에 가서 프랑스어로 교육을 받았다. 나와 같은 세대의 아이들은 자신의 나라가 권력을 소유한 자들에게 속한 언어, 관습, 명성을 스스로를 위해 향유하는 프랑스인들에 의해 통치되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는 유럽의 프랑스아이들과 같은 책으로 공부했고 세계수도는 파리인 것처럼 느꼈으며 이전에는 결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 이를테면 프랑스의 하천, 산, 제국을 건설한 파란눈을 가진 사람들의 역사와 같은 모든 종류의 이름을 배웠다. 프랑스수녀는 자신들의 가족이 카이저군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독일을 증오했고 우리에게 독일어에 대한 분노 등을 전달했다.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는 프랑스인이라는 것이 가장 우월하다는 것을 공기처럼 느꼈고 가장 최선의 일은 어쨌든 프랑스어를 말하는 것이었다. 점점 모든 부유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들 세대는 학교에 가지 않고 아랍어밖에 할 줄 모르는 가난한 아이들에 비해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느꼈으며 아랍어는 후진적이고 부끄러운 것과 동일시되었다. 몇년 후 나는 이와 같은 일이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북아프리카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와 같은 모든 프랑스제국 식민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위해 사용된 방법은 그 자체로 일종의 마인드컨트롤이었다. 사람들은 수녀들이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옳고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거기에 반박하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모든 학교에서는 몇몇 학생들을 뽑아서 다른 아이들을 감시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있었는데 교실이나 운동장에서 아랍어로 말하는 모든 학생들은 벌로 주머니에 작은 돌을 넣도록 했다. 아랍어로 말하는 것은 죄와도 같았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집에서 아랍어로 말했지만 자신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식들에게 프랑스어나 아랍어 혹은 그 두 언어를 섞어서 말했다.
내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보면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다섯 살 무렵까지 그리스어와 터키어를 말할 수 있었고 그후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내가 프랑스어로 말한다는 사실, 그리고 도시에서 프랑스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 어머니는 자신이 어린 시절 스미른에서 배웠던 프랑스어를 가지고 다른 이웃들과 함께 이야기했다 - 우리로 하여금 집에서 점점 더 프랑스어로 대화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어머니로서는 기쁜 일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아랍국가에 살던 아랍인이었고 도시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아랍어로 대화했기 때문이었다. 아랍어를 할 줄 몰랐던 어머니는 자신이 그리스인으로서 프랑스인과 닮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을 프랑스인과 동일시시켰다. 그녀가 구사하는 프랑스어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유일한 아이인 나와 함께 가끔씩 프랑스어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아버지는 내 나이대의 아이에게는 나이가 든, 오히려 다른 아이들의 조부모와 닮은 사람이었다. 어느날 그는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 어머니에게 불쑥 내질렀다. “우리는 프랑스에 살지 않아. 그리고 이렇게 전부 프랑스어로 말하는 건 옳지 않아. 아이는 아랍어를 배워야만 해.” 그러자 그녀가 답했다. “그럼 자기가 아이에게 가르쳐보지 그래?” 그는 조용해졌고 화를 삼키며 아랍어로 몇몇 단어를 내뱉었다. 내가 6살인가 7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특별히 아끼던 만년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어느날 그는 행정서류를 채워야했고 아랍어가 공용어였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 낯설지도 친숙하지도 않았던 언어를 가지고 매우 정성스럽게 한줄 한줄 써내려갔다. 그는 나에게 아랍어문자를 가르쳤고 그것을 100번 쯤은 베껴쓰도록 했다. 나는 글자들을 열심히 따라썼다.
그때 잠깐동안 아버지는 그의 모험으로 가득찬 삶에서 살아남은 낡은 아랍어-터키어 문법책을 사용했다. 자신이 사관학교 생도였을 때 사용했던 책이라고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 책은 두껍고 종이가 누렇게 변색되었으며 표지에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나는 그 책을 통해 동사를 변형하는 법과 동사형태의 사용법을 설명하는 예문들을 익혔다. 때때로 나는 지겨워지거나 주의가 산만해졌고 그럴 때마다 그는 나를 친절하게 나무랐지만 곧 인내심을 잃게 되었다.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희망이 없어. 이런 일을 해야하는 것은 학교라고. 그런데 수녀들은 죄다 선동자들이라고. 이 나라에는 프로파간다 말고는 없다니까.”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수업하는 것에 지쳐서, 더 진지하게 말하면 그는 전쟁에서 진 사람이자 한 제국을 위해 전투에서 싸웠지만 결국 그 제국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본 목격자였고 전쟁에서 다쳐서 훈장을 받은 사람이었지 이 오토만제국의 장교는 교육자라고 볼 수 없었다. 어느날 그는 나에게 앉아서 문법책을 한장 한장 필사하라고 말했다. “이것들을 따라서 쓰렴. 그럼 너는 아랍어를 배우게 될거야.”라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1년, 2년, 아니면 한 계절에만 이루어졌을까?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 내가 기억하기로 나는 졸지에 자리에 앉아서 필사를 해야했고 그것은 내가 알파벳을 알지만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들을 베끼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쓴다는 사실을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로지 그것을 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별다른 노력 없이 언어를 배웠다고 주장했다. 이 연습에는 어딘가 최면적인 면이 있었음에 분명하다. 왜냐면 훨씬 나중에 나는 다른 이유로 결국 실제로 같은 것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것이다.
모르는 언어를 베끼는 것을 통해 나는 아랍어를 배우지 못했다. 아랍어가 금지되었던 학교에 다니는 것은 스스로를 고립되게 만들었고 결국 나는 아랍어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아버지도 의도치 않게 나를 도왔다. 어느날 그는 아마 전쟁학교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 때문이었는지 세상의 미래는 과학, 특히 화학에 속하게 될 것이며 내가 자라면 화학자가 되기 위해 나를 독일로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는 10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이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운명을 꿈꾸는 것이 행복했을까, 아니면 그것은 더이상 아랍어를 공부하지 않기 위한 이상적인 구실이었을까? 내가 알고있는 것의 전부는 몇 년 후 정부의 압력에 의해 프랑스학교가 주당 2시간씩 아랍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수녀원장님을 보러 가서 내가 공부를 하기 위해 독일로 보내질 것이라고, 그러므로 나는 아랍어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만일 그것이 내 부모님이 생각하는 바라면 그렇게 해도 좋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므로 나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함께 라틴어를 공부하기로 선택했지만 첫 과를 넘기고는 전혀 수업에 가지 않았다. 베이루트의 봄은 아이들을 초조하게 했고 여름은 무척 빨리 왔다. 라틴어, 뎃생, 바느질, 혹은 식물학같은 부차적인 수업들은 그게 누구든지간에 결코 멀리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러니 아랍어를 상상해보면 어떻겠는가. 아랍어는 자신의 국가에서 제2외국어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때 나는 베이루트 도시가 국제적으로 중요한 도시가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그곳에 군사령부를 설치했고 도시의 국제적인 면은 영화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로맨틱한 요소처럼 반짝였다. 원주민과 함께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커뮤니티가 속한 인구공동체에 호주군, 캐나다군, 뉴질랜드군, 아프리카계흑인군, 자유폴란드군들로 이루어진 연합국 군인들을 포함하는 다양한 국적의 무리들이 더해졌다. 베이루트는 전쟁과 유흥이 뒤얽힌 작은 소용돌이, 소우주가 되었다. 거기에서는 진짜 전쟁은 보이지 않았고 세상을 조각내는 군인들만 보였다.
어린아이였던 나에게 그것은 새로운 얼굴들, 새로운 사건들, 새로운 언어들을 의미했다. 우리는 영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는데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를 잘 알던, 그곳에서 살다가 돌아온 몇몇 레바논 여자아이들은 잊고있던 영어를 기억해냈고 역사에 흐름에 따르고자 했다. 주로 외국학생들로 이루어진 베이루트의 미국 대학교는 레바논 학생의 정원을 늘리기 시작했다. 2개국어를 공용어로 하던 도시는 3개국어의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거의 십년 후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레바논에 도착했을 때 그들 중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아랍어와 영어를 할 수 있었고 미국 대학교 근처에 있는 도시의 상업지구에서는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가 비즈니스 언어로 쓰였다. 레바논 대학교 또한 세워지기 시작했다.
대학들은 주변에 문화공간을 만들었고 베이루트는 세 개의 문화, 세 개의 삶의 방식, 세 개의 지성을 상징했던 세 개의 대학 주변에서 발전했다. 세 개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상했던대로 작가, 문학평론가, 심지어는 기자들까지 이 흐름을 따랐다. 그것은 분명 일종의 풍요로움이었고 세계를 향한 개방이자 활력있는 다양성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쉽게 이러한 변화를 흡수하기에는 너무 작은 나라에서 긴장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훗날 한 세대를 폭발시키고 거의 파괴하게 될 것이었다.
조금씩 레바논은 집중적으로 문화적 생활을 발전시��� 나갔지만 언어 공동체로 쪼개졌다. 조르주 슈하데 같은 훌륭한 시인들은 프랑스어로 글을 썼던 반면 대다수는 아직 아랍어로 글을 썼고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 시인, 기자들이 있었다. 300만명의 거주민들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이러한 현상에 따라 각각의 공동체에는 공통분모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것은 큰 문제였다. **시인이나 산문작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나라를 대하는 감정을 결코 가지지 못했다. 나는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나는 스무 살 때 시를 쓰기 시작했고 그 긴 시집에 나는 ‘바다의 책’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태양과 바다의 상호관계를 일종의 우주적인 에로티즘처럼 보는 시집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 경우에서조차 시집이 프랑스어로 쓰였다는 사실은 나에게 문제를 일으켰다. 내 시는 가장 중요한 두세개의 아랍문학잡지에 보통 아랍어로 번역되어 실렸다. ‘바다의 책’은 번역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프랑스어로 바다는 여성명사였고 태양은 남성명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랍어로는 정반대였다. 모든 시는 바다가 여성이고 태양이 군사 혹은 적어도 남성이라는 메타포를 발전시켰다. 그러므로 시는 거의 아랍어로 번역하기 불가능했지만 어휘의 적절한 의미에 대해 아랍어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50년대 초 나는 소르본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에 갔고 나는 몇몇 시를 썼다. 나는 시테대학기숙사에서 미국인 학생들을 만났고 베이루트에 돌아가 짧게 머문 뒤 1955년 1월 뉴욕으로 떠났고 몇 주 후 캘리포니아의 버클리로 떠났다. 나는 대학을 바꾸는 것이 단지 다른 기관에서 학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산다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었다. 그것은 생각하는 방식의 완전한 변화였고 일종의 지진과도 같았다. 1955년에 소르본에서 버클리로 가는 것은 행성을 바꾸는 것과도 같았다. 4개국어는 어느 정도 잘 구사하면서 나는 언어가 잠재적인 문제였음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영어권 대학들이 - 나에게 문제를 불거지게 했던 -  특히 언어에 - 그리고 수학적인 논리 - 열중했던 어떤 시대에 나는 버클리의 철학과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알고 있던 10개의 영어단어 5개의 영어문장들을 가지고 이러한 복잡한 수업을 따라갈 수 있도록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나는 열심히 타임지를 읽고 재즈음반을 듣기 시작했고 6개월 후 나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미국 캠퍼스의 삶에 잘 적응했다.
그럼에도 무언가 나의 삶의 다음 단계를 결정짓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미국의 언어와 사랑에 빠졌다. 나는 캘리포니아인들이 말하는 영어의 스타일, 전문용어, 미국광고의 은어, 그리고 미국인 운동선수들의 말투는 나를 흥분시켰다. 미국 야구나 축구 중계방송을 듣는 것은 특정한 세계, 게다가 그 비밀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내가 실제로 경기를 그 자체로 좋아했는지 아니면 거기에 동반되는 모든 언어적 관습 때문에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다만 친구들에게 제대로된 전문용어를 써서 친구들에게 경기에 대해 묘사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느꼈다. 나는 관용적인 표현들을 쓰는 것을, 카우보이들의 화법과 소도시의 말투를 이해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영어로 내가 아는 다른 ���어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언어에 대한 내 경험이 제한되어 있거나 제한된 것처럼 보였고 혹은 나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너무 친숙했기 때문이었다. 영어로 말하는 것은 아마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위험천만함과 놀라운 일들로 가득찬 것이었다.
대학에서는 모든 것이 달랐다. 나는 새로운 전공에 열정을 갖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나에게 뿌리깊이 박힌 감정과 생각의 방식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는 내 동료 중 한명인 젊은 유고슬라비아인 학생의 석사논문 주제가 거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오히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기억하고 있다. 그는 니체에 대해 쓰길 원했지만 니체는 철학자가 아닌 시인이기 때문에 그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했다. (60년대 문화혁명 이후 모든 것은 달라졌고 오늘날 그 주제가 같은 이유로 거절당할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나는 특히 교수들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나는 횔덜린과 하이데거 이후로 철학이 시에서 가장 훌륭한 표현을 발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글을 거의 쓰지 않았는데 왜냐면 나는 잠정적인 발견 상태에 있었고 매일 힘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아름다움과 각성된 환상으로서 자연에 대한 발견을 포함하여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미국 고속도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시를 쓰는 것과 같았다. 나는 몇 년만 대학에 남았고 어떠한 논문도 쓰지 않았다. 나는 샌프란시스코 근방의 마린카운티의 한 컬리지에서 철학교수직을 얻었고 행복했다.
나는 일정한 리듬이 있는 직업과 함께 어떤 안정감을 가지고 무언가 새로운 것, 새로운 경험을 하기 시작했고 그로인해 나는 다시금 글을 쓰고 싶어졌다. 영어로 수업을 했지만 나는 항상 스스로를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내가 다시 시와 글쓰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정치적인 성질�� 띤 문제에 직면했다. 그것은 알제리 독립전쟁 중이었다. 조간신문은 정기적으로 죽은 알제리인들에 대한 정보와 항상 거대한 규모로 펼쳐진 폭력을 동반하는 듯했던 잔혹함을 다룬 소식을 전달했다. 나는 갑자기 맹렬하게 내가 본질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내가 프랑스어로 표현하는 것에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오래전에 해결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나는 프랑스어에 대해 이러한 폭력적인 반응을 느끼지 않는다. 알제리와 프랑스 사이에는 평화가 생겼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랍세계의 운명은 이 분쟁의 결과에 달려있는 것 같았다. 그 당시 단일아랍의 꿈은 매우 열띠었고 알제리는 그 상징이었다.
나는 그때 나를 중대한 분쟁의 상황에 처하게 한 언어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없음을 이해했다. 나는 나 자신의 완전한 표현이라는 내 삶의 근본적인 영역에서 곤란을 겪었다. 무언가 예상치 못했던 것이 다가와 내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그것은 마치 어느날 아침 태양이 예상했던 곳이 아닌 바로 옆, 수평선의 다른 지점에 떴을 때처럼, 창문이 열리는 것과 같은 해결책이었다. 나는 내가 근무하던 컬리지의 캠퍼스에서 예술대학 학장이었던 안오한론이라는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장미덩굴이 우거진 오솔길에서 수다를 떨었다. 내가 가르치는 과목들 중 하나가 미학이라고 그녀에게 말했을 때 그녀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지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고 그녀는 어떻게 모르는 것에 대해 철학을 가르칠 수 있는지 내게 물었다. 나는 어머니가 내가 그림 그리는 데 서툴었다고 말했던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답했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이 결정적인 대화는 순간적으로 내 손을 자여롭게 해줬을 뿐만 아니라 행성이 궤도를 바꾸듯 내 관심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었고, 이에 따라 내 에너지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로 향했고 그것은 새로운 영역에 대한 관심을 내포했다. 나는 자유시간에 예술대학으로 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빠르게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언어였음을, 그리고 그것이 내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해 줬다는 것을 이해했다. 나는 더이상 프랑스어로 글을 쓸 필요가 없었다. 다만 아랍어로 그림을 그리면 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1960년에 일어났다. 열정을 가지고 나는 화가가 되었다. 나는 이 새로운 언어 속으로 빠져들었다. 추상예술은 시적인 표현과 동일했다. 나는 단어들이 아닌 색깔과 선들이 필요할 뿐이었다. 나는 더이상 언어로 점철된 문화에 속할 필요가 없었고 표현의 열려있는 형태에 열중할 수 있었다. (수년 후 모로코를 여행하며 나는 한 모로코 화가와 대화했고 그는 모로코에 수많은 훌륭한 화가들이 있는데 그것은 프랑스 문화의 지배 아래에 자랐던 그들이 언어에 대한 의문점을 그림을 통해 해결했기 때문이라고 내게 말했다.) 내 정신은 활짝 열렸고 나는 다양한 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음을, 정신은 육체와 달리 동시에 여러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단지 평면 뿐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내부로 갈 수 있음을, 우리가 문제로 여기는 것이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긴장덩어리일 수도 있음을 이해했다. 시간이 지나고 내가 영어로 수업을 함에 따라 나는 점점 영어에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더이상 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 삶이 되었다.
그후 베트남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베트남을 침략했다. 베트남은 미국인의 영혼에 들어왔고 사람들은 거리에서 시위를 했다. 미국에서 발생한 문화혁명은 베트남전쟁에 대한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제기였고 그 결과로 전쟁에 대한 질문은 참여문학의 한 지점이 되었고, 시인들에게 관심을 이끌었고, 그것은 하나의 역동적인 주제가 되었다. 시인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글을 썼다. 아니 오히려 시를 통해 전쟁에 맞서 싸웠다.
어느날 나는 특별히 텔레비전에 나온 전쟁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피로를 느끼고 낙심했다. 나는 교수실 테이블 위에서 네 번 접은 신문처럼 있었던 문학잡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무료로 배포된, 시를 반전활동으로서 소개하는 잡지였다. 그 잡지의 이름은 S. B. Gazette 였는데 S는 소살리토, B는 벨베데레라는 샌프란시스코 북쪽의 두 작고 예쁜 도시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타자기에 용지를 삽입하고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은 듯 ‘오늘날 미국의 고독한 기사를 위한 발라드’라는 시를 한 편 써서 S. B. Gazette에 보냈다. 며칠 후 나는 원고와 함께 ’다른 시들도 보내주세요’라고 종이 위에 휘갈겨 쓴 답장을 받았다. 레옹 스피로라는 이름으로 서명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영어권 시인이 되었다!
나는 감정과 사건들로부터 동기를 부여받아 몇몇 다른 시들도 썼고 내가 시가 그 나라에서 허브와 음악처럼 성장하던 시기에 미국 시인들의 거대한 운동에 동참하는 것처럼 느꼈다. 어느날 기자들은 로버트 케네디에게 아마 그의 살아생전 열 번째로 그가 자신의 형제의 부재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물었다. 그는 눈물을 흘렸고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로미오가 한밤 중에 줄리엣의 아름다움에 대해 한 말을 인용했다. 나는 눈물이 연약함의 상징이기 때문에 남자들에게 울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 속한 그가 자신의 죽은 형제를 위하여 공개적으로 울며 셰익스피어를 통해 내적 사랑의 일체감을 인식하며 표현해내는 것에 감동하여 그에게 편지를 써서 그가 내가 처음 쓴 발라드 시를 읽는다면 기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놀랍게도 그로부터 그 시를 읽고 감동했다는 답장을 받았다.
나에게 강연에 참석하거나 문집에 내 글들을 실을 것을 요청하는 편지들이 왔다. 나는 미국, 라틴아메리카의 시인들로부터도 사유를 나누기 위한 편지를 받았다. 그 시절 시는 몇 년 동안 신도 교리도 없는, 처벌도 위협도 없는, 숨겨진 동기도 상업성도 없는, 경찰도 바티칸도 없는 단 하나의 유일한 종교였다. 그것은 여성과 남성과 나무와 산을 포용하며 유대감을 형성했다.
나는 탐험가처럼 영어라는 언어 속으로 들어갔다. 각각의 단어가 태어나기 시작했고 표현들은 창조물이었으며 부사들은 무한했고 동사들은 화살을 던졌으며 in과 out같은 단순한 전치사는 하나의 모험이었다! 글쓰기는 일종의 스포츠였다. 문장들은 에너지를 가지고 앞의 공간을 열어나가는 말들과 같았고 말들이 달리는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하지만 늙은 유령들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아랍세계는 내 관심영역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반대였다. 나는 여름에 모로코, 튀니지, 혹은 요르단, 시리, 레바논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수많은 아랍 시인들과 아랍어 혹은 프랑스어 표현들에 유대감을 느꼈다. 시와 그림은 분리되어 있었지만 어느날 내가 글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조금 더 정확히 말해서 캘리그래피를 일종의 수채화 혹은 잉크 작품과 화합할 생각으로 시를 아랍어로 필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늘 내 앞에 있던 어떤 발자취에 의해 좌초되었다.
나는 각각의 양쪽 페이지가 이미지로 연결되어 이어지는, 옛날 일본 목판화집처럼 부채꼴로 접힌 일본종이를 발견했다. 그때 어린시절 무언가, 내가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아랍어 문장들을 한줄 한줄 써내려가던 즐거움이 떠올랐다. 나는 주요 아랍 근대 시인들이 쓴 시를 가지고 작업을 했다. 나는 그들에게 그 시를 번역해달라고 요청하려 하지 않았고 그저 내가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낯설음을 느끼는 데 만족했다. 여기저기의 조각들, 내가 주요 단어를 이해하는 문장들, 그것은 마치 베일 너머로 보는 것과 같았고 화면이 이미지를 지우지 않고 단지 흐릿하게 만들어서 이미지를 원래 이미지보다 더 ���가사의하게 하는, 그런 화면을 통해 보는 것과도 같았다.
매년 나는 두루마리 종이같이 기다란 종이 위에 나의 불완전한 글씨로 작업을 했다. 전통적인 캘리그래피와 반대되는 것이 걸려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알면서 말이다. 나는 예술을 통해서 한 시인의 작품을 읽었다. 이 작품들은 미국의 갤러리와 몇몇 아랍국가들의 수도에 전시되어 있다. 그것들은 문제를 제기했고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대부분 혼돈을 불러일으켰지만 그것들은 잡지, 기사 그리고 비평연구에서 나름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것들은 나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내 삶을 수놓는 모든 실타래를 푸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우회해서 아랍의 문화적 운명 속으로 합류했고 이러한 연구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럼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70년대 초반에 가르치는 일을 멈추고 베이루트로 돌아갔다. 나는 돌연히 미국을 떠났고 최고의 해를 겪었던 도시에 도착했다. 나는 활화산의 중심에 빠져들었고 그것은 무척 매혹적이었다. 나는 프랑스어, 아랍어 그리고 영어로 말하는, 나에게는 특히 프랑스어로 말하는 나라에 있었고 나는 프랑스어로 일상적인 소식을 전하는 문화면 부장직을 구했다. 아랍의 역사가 발생하는 것 같은 곳에 다시금 있는 것, 시에라가 아닌 알레프로 휴가를 떠나는 것, 그리고 뉴욕이 아닌 카이로와 다마스에 대해 더 알게 되는 것이 좋았다. 새로운 영토로의 이동은 나에게 생기를 주고 들뜨게 했다. 베이루트는 무척 ��르게 변해서 나에게는 완전히 새 도시와도 같았다.
물론 나는 한쪽에 영어를 남겨둔 채로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나는 문학적인 여정이 될 어떤 것에 대한 결과를 생각하느라 바빴다. 문학은 나에게 직업이었던 적이 없다. 그것은 다만 책과 관계된 것이었다. 내 글쓰기는 숨을 쉬는 것과 같았고 그저 내가 했던 것이었다.
1975년 베이루트에서 비극적이고 끔찍한 전쟁이 터졌다. 사람들의 삶은 붕괴된 건물의 파편들처럼 폭발했고 모든 방향으로 흩어졌다. 우리 중 몇몇은 파리로 떠났다. 프랑스어를 쓰는 레바논 사람들은 파리로 갔고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런던이나 뉴욕으로 떠났다. 다른 사람들은 특히 비즈니스 문제로 아랍국가로 갔다. 나는 전쟁이 발생하고 2년 후 파리로 떠났다. 그것은 완전히 정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레바논에서 모든 것들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모두 알듯이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고 오히려  내전으로 군대에 의해 점령되어 점점 악화되었다. 어느날 파리에서 나는 레바논에서 일어난 비참한 소식을 들었다. 내가 조금 알던 여자가 기독교 민병대에 의해 납치되어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단지 그 살해의 동기가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해 말할 것이다. 나는 이 비극적인 사건의 현실을 적용한 소설인 ‘시트마리로즈’를 썼고 그것은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프랑스어로.
나는 개인적인 이유로 몇 년 후 캘리포니아로 돌아갔고 베이루트로 돌아가는 것은 점점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내가 일했던 신문사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물론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면 내가 캘리포니아에서 달리 무슨 일을 하겠는가? 나는 내 환경에 맞설 필요가 없을 때 더 자연적인 움직임으로 ��� 즐겁게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글쓰기가 내가 거주하는 땅 위에서 그 땅에 의해 영향을 받고 심지어 마치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자라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미국에서 글을 쓸 때 나는 영어로 글을 쓴다.
내가 모국어를 사용하지도 않고 조금의 감각도 가지지 않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작가로서 대중과 직접적인 의사소통 감각을 가져야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마치 내게 내가 다른 누군가였다면 나는 누구였을까, 하고 묻는 것과 같다. 이러한 질문에는 답할 수 없다. 그것은 내 자신의 손으로 생각을 쥐려고 하는 것과 같다. 영어와 같은 국제언어를 사용하는, 역사적인 이유, 정치적 망명의 이유 혹은 개인적인 취향의 이유로 그들의 언어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나는 추방당했다고 느끼는가? 그렇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오래되어서 내 본성이 되었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그렇게 자주 고통을 겪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행복한 순간도 있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가장 순수한 상태의 인간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고양이가 고양이이고 체리나무가 체리나무이듯 시인 역시 인간적이다. 나머지는 그 후에 온다. 나머지도 중요하지만 때때로 그것은 아무 것에도 쓸모가 없다. 시인들은 언어에 깊이 뿌리박혀있고 언어를 초월한다.
누군가 일어나서 내게 왜 스스로 내 삶의 어떤 순간에 아랍어를 배우지 않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것은 내가 자주 듣는 질문이다. 나는 프란츠 파농이 그랬듯이 낡은 프랑스 식민지 시스템을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아랍 시인들도 예를 들어 그들의 언어가 프랑스 식민정부로부터 완전히 제거된 아프리카계 흑인 작가들의 상황 속에 놓여져 있지 않다. 아랍 시인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온전히 책임이 있다.
나는 언제나 여기 그리고 지금의 일원으로 속해있다. 나는 매일의 자유 시간을 진짜 언어로서 아랍어를 배우려고 하는 데 쓰지 않는다. 태양이 강렬하고 바다가 푸를 때 나는  창문을 닫고 방에 갇혀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 그게 무엇이라도 말이다. 나는 영원히 현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바깥에서 머무른다. 아랍어는 나에게 금지된 천국으로 남아있다. 나는 같은 땅, 나에게 모국어였어야 했던 같은 언어의 원주민인 동시에 외국인이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자주 홀로 머무르고 모든 연결고리를 끊고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을 정복하러 떠나라고 가르쳤다. 그것이 내가 했던 것이고 내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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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kyuyoung-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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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lly Gonzales - SOLO PIANO III - Pretender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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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kyuyoung-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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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ruangbin - Friday Morning (Official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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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kyuyoung-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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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마르그리트 뒤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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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은 침대도, 이곳도, 파리도, 트루빌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창문, 특정한 테이블, 검정색 잉크로 발견하기 어려운 잉크자국을 남기며 글을 쓰는 습관이기도 하고 어떤 특정한 의자이기도 하다. 내가 가는 ���, 있는 곳, 호텔방과 같이 내가 글을 쓰지 않는 장소들에서 늘 발견하는 특정한 습관들, 불면증이나 절망을 느낄 때를 대비하여 가방 안에 늘 위스키를 넣어두는 습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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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kyuyoung-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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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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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은 마치 하나의 공장 같았습니다. 하나의 기계 같았지요. 우리 모두는 이 밋밋한 바탕에 ���떤 무늬를 새기기 위해 앞뒤로 섞여 짜이고 있습니다. 
괴테는 여성을 찬미했고, 무솔리니는 여성을 경멸합니다. 어디를 돌아보든 남성은 여성에 관해서 생각했고, 그것도 서로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통치해야 하고 정복해야 할 가장에게 있어서 다수의 사람들, 사실 인류의 절반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막대한 중요성을 가질 겁니다. 그것이 실상 그의 권력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겠지요. 
여성은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왔습니다. 
거울은 모든 격렬하고 영웅적인 행위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여성의 열등함을 아주 힘주어 강조합니다. 만일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면 거울은 남성을 확대시키기를 그만둘 테니까요.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무척 빈번히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 일면 도움이 됩니다.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요. 이 세상의 어떤 무력도 나에게서 500파운드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음식과 집, 의복은 이제 영원히 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노동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과 쓰라림도 끝나게 됩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또 누구에게도 아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일이 년이 지나자 연민과 관용도 사라지고 가장 커다란 해방, 즉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가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면 저 건물을 내가 좋아하는가 아닌가? 저 그림은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은가? 내 생각에 그것이 좋은 책인가 나쁜 책인가? 진정 숙모님의 유산은 내게 하늘을 베일을 벗겨주었고, 밀턴이 우리에게 영원히 숭배하라고 천거한 신사의 크고 위압적인 모습 대신 훤히 트인 하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주 기묘하고 복합적인 존재가 생겨납니다. 상상에 있어서 여성은 더없이 중요한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하찮은 존재입니다. 시에서는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성의 존재가 고루 퍼져 있지만, 역사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픽션에서 그녀는 왕과 정복자들의 삶을 지배하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손가락에 강제로 반지를 끼워준 어느 부모의 아들에 딸린 노예였습니다. 문학에서는 영감이 풍부한 말들, 심오한 생각들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녀는 거의 읽을 줄 모르고 철자법도 모르며 남편의 재산에 불과했습니다. 
셰익스피어 같은 천재는 교육받지 못하고 노동하며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남자들에게 말하듯이 “네가 원한다면 써라. 내게는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글을 쓴다고? 네가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라고 말하지요. 
그것은 여성이 열등하기보다는 남성이 우월하기를 바라는 뿌리 깊은 욕망으로서, 남성을 예술의 전면뿐 아니라 도처에 서 있게 함으로써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도록 합니다. 
항의하거나 설교하려는 욕구, 자신이 받은 모욕을 공표하거나 원한을 갚으려는 욕구, 세상을 자신이 겪은 곤경과 불만의 증인으로 삼으려는 욕구, 그 모든 욕구가 그에게서는 불타올라 소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이 흐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걸작이란 혼자서 외톨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단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경험이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소설가에게 있어서 성실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은 작가가 독자에게 부여하는, 이것이 진실이라는 확신입니다. 그래, 나는 이 일이 그리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나는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이렇고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당신이 나를 확신시켰지 하고 독자는 느낍니다. 
그 일을 해낸 것은 오직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뿐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또 다른, 어쩌면 가장 훌륭한 미덕입니다. 그들은 남성처럼 쓰지 않고 여성이 쓰듯이 썼습니다. 그 당시 소설을 썼던 수천 명의 여성들 가운데 그들만이 영원한 현학자들의 끊임없는 충고 - 이렇게 써라, 저렇게 생각하라 - 를 완전히 무시했지요. 
여성이 작가가 될 무렵 옛 문학 형식들은 모두 이미 굳어지고 결정된 형태였습니다. 소설만이 그녀가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고 새로운 것이었지요. 
이를테면 화이트홀을 따라 걸으면서 자신이 그 문명의 타고난 계승자가 아니라 그 반대로 문명의 변두리에 서 있는 이질적이고 비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듯이 말이지요. 
한번도 방해받거나 저지된 적이 없으며 태어날 때부터 내키는 대로 어느 쪽 방향이건 뻗어 나갈 수 있는 완전한 권리를 누려온 이 자유로운 마음, 영양분을 풍부하게 공급받았고 훌륭한 교육을 받아온 이 마음을 읽으면서 나는 물질적 풍요를 느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을 염두에 두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한 남성 또는 순전한 여성이 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인간은 남성적 여성이거나 여성적 남성이어야 합니다. 여성이 어떤 불평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정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대의를 변호하는 것, 어떤 식이건 여성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온전히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으려면 마음 전체가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자유가 있어야 하고 또 평화가 있어야지요. 바퀴가 삐걱거리거나 빛이 깜박거려서도 안 됩니다. 커튼을 완전히 내려야지요. 작가는 일단 자신의 경험이 끝나면 드러누워서 자기 마음이 어둠 속에서 결혼식을 거행하도록 두어야 합니다.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거나 질문을 던져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그는 장미 꽃잎을 따거나 백조들이 조용히 강물에 떠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칭찬은 비난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아니, 가치를 ���장하는 것이 아무리 즐거운 소일거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더없이 무익한 일이며, 가치를 측정하는 사람들의 규정에 복종하는 것은 가장 굴욕적인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 그것만이 중요한 일입니다. 
“지난 백 년 동안의 위대한 시인들은 누구인가? 콜리지, 워즈워스, 바이런, 셸리, 랜더, 키츠, 테니슨, 브라우닝, 아널드, 모리스, 로제티, 스윈번 - 여기서 멈춰도 될 것이다. 이들 중에서 키츠와 브라우닝, 로제티를 제외하곤 모두 대학 출신이며, 이들 세 명 중 한창 젊은 나이에 목숨을 빼앗긴 키츠만이 유복하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야만적이며 서글픈 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로서, 시적 재능이 내키는 대로 바람처럼 불어 가서 빈자에게나 부자에게 똑같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거의 진실성이 없다. 엄연한 사실로서, 이 열두 명 중에서 아홉 명이 대학 출신이었고, 이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건 영국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입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해 말하지만, 실제로 영국의 가난한 집 아이들은 위대한 작품을 산출하는 지적 자유로 해방될 희망이 아테네 노예의 아들만큼이나 없는 것이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여성은 그저 입개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나는 남성의 동료라든가 남성과 대등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고귀한 감정을 찾을 수 없고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세상을 영향을 끼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간단하게 그리고 평범하게 중얼거릴 뿐입니다. 이제 나의 신념은 글 한 줄 쓰지 못한 채 교차로에 묻힌 이 시인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여러분 속에 그리고 내 속에, 또 오늘 밤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재우느라 이곳에 오지 못한 많은 여성들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녀는 살아 있지요. 위대한 시인은 죽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계속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우리 속으로 걸어 들어와 육체를 갖게 될 기회를 필요로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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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kyuyoung-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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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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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실수의 백과사전이었어요. 실수의 박물관이었지요. 
잘못된 인연, 잘못된 행동, 잘못된 환경과 같은 그 모든 것들이 시인에게는 도구랍니다. 시인은 그 모든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해요. 불행조차도 말이에요. 불행, 패배, 굴욕, 실패, 이런 게 다 우리의 도구인 것이죠. 행복할 때는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행복은 그 자체가 목표이니까요. 그러나 우리에겐 실수가 주어지고 악몽이 주어지죠. 거의 밤마다 말이에요. 우리의 과제는 그것들을 시로 녹여내는 겁니다. 만약 내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나는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시적이라고 느낄 것이며, 주무르고 빚어서 형상을 만들어내야 하는 일종의 점토라고 느낄 거예요. 그러니 내 실수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매우 복잡한 인과관계의 사슬에 의해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끝이 없는 결과와 원인의 사슬에 의해서 그런 실수들이 나에게 주어졌어요. 내가 그것들을 시로 바꿀 수 있도록 말이에요. 
작가의 경우 가장 좋은 것은 전통의 일부가 되는 것, 언어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언어는 계속되지만 책은 잊힐지도 모르니까요. 어쩌면 시대마다 같은 책을 되풀이해서 다시 쓰는 것인지도 모르죠. 몇몇 상황을 바꾸거나 덧붙이면서 말이에요. 영원한 책은 다 똑같은 책인지도 몰라요. 우린 항상 고대인들이 썼던 것을 다시 쓰고 있는 거예요. 그거면 충분할 테니까요.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 야망이 없어요.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실수라고 생각하지요.
내가 원하는 것은 잊히는 거예요. 물론 나는 잊히겠죠. 모든 건 때가 되면 잊히니까요.
브래들리가 쓴 아주 멋진 책을 읽었어요. 현상과 실재라는 책인데, 거기서 그는 시간을 강물로 표현했어요. 브래들리는 시간이 미래에서 우리를 향해 흘러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항상 그 흐름에 맞서서 수영을 하죠. 미래가 과거로 변해가는 혹은 녹아드는 그 순간이 바로 현재의 순간인 거예요.현재는 미래가 과거로 변하는 순간인 거죠. 나는 약 6개월 전에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았어요. 두려웠죠. 그래서 나는 속으로 이 두려움, 예상, 다가올 사흘간의 낮과 밤, 모든 게 수술 자체의 일부라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기분이 상당히 나아졌어요. 
나는 일부러 어떤 주제를 내세우려 한 적이 없어요. 일부러 주제를 찾은 적도 없고요. 주제가 나를 찾도록 내버려둔 채 거리를 걷고, 내 집의 이 방 저 방을 왔다 갔다 하죠. 눈먼 사람의 조그만 집 안에서 말이에요. 그러다 보면 뭔가 일어나려 한다는 걸 느껴요. 그건 한 줄의 시구일 수도 있고 어떤 종류의 모양일 수도 있어요. 섬을 비유로 들어 말해볼게요. 나는 두 개의 끝 부���을 봅니다. 그 끝 부분은 시나 이야기의 처음이자 끝이에요. 그게 다예요. 나는 그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을 지어내야 합니다. 그게 나에게 남겨진 일이죠. 
현재는 딱딱하고 융통성이 없는 것들을 지니고 있죠. 그러나 과거에 대해 얘기하자면, 우리는 줄곧 과거를 바꾸고 있어요. 우리는 뭔가를 떠올릴 때마다 약간씩 기억을 바꾸죠. 우리는 모든 과거에, 인류의 역사에, 모든 책에, 모든 기억에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과거뿐이고, 그건 신념에 찬 행위이니까요. 내가 “나는 1899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신념에 찬 행위인 거예요. 내가 그걸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부모님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신념을 고수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가 1899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때 나는 정말 신념에 찬 행위를 하고 있는 거예요. 
과거는 우리의 보물이에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과거뿐이고, 과거는 우리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에요. 
모든 시는 대상을 낯설게 느끼는 데서 비롯되지요. 반면에 모든 미사여구는 대상을 무척 평범한 것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데서 비롯된답니다. 물론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내가 사람의 몸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 눈으로 본다는 것, 귀로 듣는다는 것과 같은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곤 해요. 어쩌면 내가 쓴 모든 것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당혹감이라는 핵심 주제에 관한 은유이거나 변용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라요. 
그들은 잠을 깨울 때 “일어나”라고 말하는 대신 recordarse라고 말해요. 너 자신을 생각해내라, 너 자신을 기억해내라, 라는 말이지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어요. “Que me recuerde a lasocho." (여덟 시에 나 자신을 기억해내게 해주렴.)” 
현재가 과거에 의해 그리고 미래의 두려움에 의해 압박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현재란 언제인 거죠? 현재는 과거나 미래만큼이나 추상적인 것이에요. 현재의 우리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를 함께 가지고 있는 거예요. 우린 늘 미래에서 과거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어요. 
사람들은 기억도 해야 하고 잊기도 해야 해요. 모든 걸 다 기억해서는 안 돼요. 왜냐하면 내 작품에 나오는 푸네스라는 인멸처럼 모든 것을 끝없이 기억하면 미쳐버릴 것이기 때문이에요. 물론 우리가 모든 걸 잊는다면, 우린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거예요. 우린 우리의 과거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지요.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거예요. 우린 그 두 가지 요소가 뒤섞인 상태를 지향해야 하는 거예요. 이 기억과 망각을 우린 상상력이라 부르지요. 
흄이 이렇게 말한 것 같아요. 나 자신을 찾고자 했을 때 난 아무도 찾지 못했다고. 세상의 이치가 그런 거예요. 
악몽을 글로 쓰기 어려운 것은, 악몽의 느낌이 이미지에서 비롯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콜리지가 말했듯이 느낌이 이미지를 제공하는 거예요. 
우린 세상의 종말에 나무 형태의 악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말이에요. 그 나무는 묘사할 수 없어요. 만약 우리가 두개골이나 유령으로 만들어진 나무를 생각한다면, 그건 무척 바보 같을 거예요. 그렇지만 나무 '형태'의 악은 어떤가요. 이것은 그가 정말 그 나무에 관한 악몽을 꾸었다는 것을 보여줘요. 
나는 잠에서 깰 때 안 좋은 기분으로 깨어나요. 나 자신이라는 것에 깜짝 놀라면서 말이에요. 이러저러해서 1899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고 제���바에서 살았던 어떤 사람이라는 것에 놀라면서 말이에요. 
우리 모두가 어느 순간에든 다른 누군가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다른 누군가로 바뀌면 우린 그 사실을 알지 못해요. 예를 들어, 어느 순간에 나는 당신으로 바뀔 거예요. 당신은 나로 바뀔 것이고요. 그러나 그런 변화가 끝난 뒤엔 아무런 기억이 없어서 바뀐 걸 알지 못하는 거예요. 우린 늘 바뀌어요. 우리는 달에 사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그걸 알지 못해요. 왜냐하면 달에 사는 사람이 되면 '그'의 과거를 지닌, 그의 기억을 지닌, 그의 두려움과 희망 같은 것을 지닌 달에 사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지요. 
깨어 있을 때의 경험과 잠잘 때 혹은 꿈꿀 때의 본질적인 차이는, 꿈의 경험은 우리 자신에 의해 생겨날 수 있고, 창조될 수 있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전개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어요. 
나는 여러 번 자살을 생각했어요. 그러나 언제나 그걸 미뤄두었지요. 이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왜 걱정을 해야해? 자살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는데 말이야. 그와 동시에 난 한 번도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그걸 사용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살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자살했다는 걸 알고 나서 남들이 자신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까, 하는 것만 떠올려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 때문에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복수심 때문에 자살을 하지요. 화가 나서 자살을 해요. 자살은 자신의 분노와 복수심을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예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누군가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것, 이건 대단히 잘못된 일이지요. 
책은 아마도 우리가 과거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일 거예요. 우리들 개인의 과거를 포함해서 말이에요. 그런데 책은 뭘까요? 책은 서가에 놓여 있을 때 많은 물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에요. 그런데 왜 책은 드러나야 하는 걸까요? 책은 하나의 물건인데,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아요. 책은 독자가 오기 전까지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죠. 
나는 이틀에 한 번꼴로 악몽을 꾼답니다. 패턴은 늘 똑같아요. 나는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리의 한 모퉁이에 있거나 아주 평범한 방 안에 있는 걸 발견하곤 해요. 그러면 애써서 또 다른 거리의 모퉁이나 또 다른 방으로 가는데, 그것들은 다 똑같아요. 그런 일이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그러고 나면 나는 속으로 생각하지요. 흠, 이건 미로의 악몽이군. 나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결국 때가 되면 깨어날 거야. 그러나 때로는 잠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는데, 내가 똑같은 거리의 모퉁이나 똑같은 방, 똑같은 습지대에 있으면서 똑같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거나 똑같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하지요. 그러면 나는 정말로 잠에서 깬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돼요. 
나는 글쓰기가 받아쓰기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뭔가 막 생기려 한다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리는 거예요. 나는 그것에 간섭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답니다. 그러면 뭔가 보여요. 거기에는 항상 최초의 영감이 있어요. 불완전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에요. 한줄의 글이 나에게 주어지기도 해요. 구성이 주어지기도 하고, 꿈속에서 한 단어나 어떤 말들이 주어지기도 한답니다.
나에게 세계관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세계를 수수께끼로 생각해요. 그에 관한 한 가지 아름다운 사실은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을 거라는 점이지요. 
나는 인생이, 세계가 악몽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서 탈출할 수 없고 그저 꿈만 꾸는 거죠. 계속해서 꿈을 꾸고, 글을 쓰고, 그 글들을 아버지가 나에게 해주셨던 충고와 달리 무모하게 출판하는 일 ���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게 내 운명인걸요. 내 운명은 모든 것이, 모든 경험이 아름다움을 빚어낼 목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실패했고, 실패할 것을 알지만, 그것이 내 삶을 정당화할 유일한 행위니까요. 끊임없이 경험하고 행복하고 슬퍼하고 당황하고 어리둥절하는 수밖에요. 나는 늘 이런저런 일들에 어리둥절해하고, 그러고 나서는 그 경험으로부터 시를 지으려고 노력한답니다. 많은 경험 가운데 가장 행복한 것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아, 책 읽기보다 훨씬 더 좋은 게 있어요.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인데, 이미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더 풍요롭게 읽을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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