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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 오얏꽃 무늬를 수 놓은 표피 양탄자
세로 240cm, 가로 574cm
근대 201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6·25전쟁 때 국외로 불법 반출됐다 국내에 반환된 ‘오얏꽃 무늬를 수놓은 표피(豹皮)’도 이곳에서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와 동일품 여부로 주목을 끌었던 이 유물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의 전문가 조사과정에서 오얏꽃(이화·李花) 문장의 형태에 의해 대한제국기 이후의 것으로 밝혀졌다.
(기사: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08050103213007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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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 융희원년 (1907년) 10월 일본황태자 방문기념메달 1점.
백동재질로 앞면에는 일본황실을 상징하는 국화꽃의 문양과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이화문이 태극모양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뒷면에는 행사를 기념하는 문구가 적혀있다. 위편에는 줄을걸기 위한 작은 고리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상태양호화나 군데군데 뭉개짐이 있음. 지름 약 2cm.
(출처: KO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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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이화문 장식장
거울 달린 2층 장식장으로 20세기초 서양식 응접실에 두고 사용하던 당시로서는 최신형 가구이다. 전면 상부에 세 개의 상감한 방형틀 내에 상감한 이화문을 장식하고 하단 문판에는 얕게 상감한 국화문을 장식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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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이화문 대구장식
놋쇠로 만든 원형판에 이화문이 양각(陽刻)된 대구장식이다. 대구장식은 초기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초기에 걸쳐서 널리 사용된 가죽이나 천 소재로 된 띠를 매기 위해 양끝에서 서로 끼워 맞추는 고리이자 허리띠의 부속용구이다. 띠고리의 구조는 모두 같아 한 쪽 뒷면에 큰 단추모양의 돌기(突起)된 부분이 있어 혁대의 한 끝에 끼워 고정하고, 다른 한 끝을 휘게 만들어 혁대의 구멍에 걸도록 되어 있다. 재료는 동제품이 가장 많고 철제가 그 다음이며, 드물게 금 또는 은제품도 있다. 금속제품 이외에 옥제(玉製)·패제(貝製)·파리제(厓璃製)도 있다. 표면장식을 금·은·옥·청석(靑石) 등으로 상감(象嵌)한 것이 있고 금으로 도금한 것도 보이는데, 실용품 이상의 호화스러운 유물도 있다. 이 대구장식은 중앙에 이화문이 양각된 원형판과 이 원형판을 끼울 수 있는 원형 고리판으로 되어 있다. 각각은 다시 대(帶)에 끼울 수 있도록 사각고리에 연결되어 있다. 원형 고리판의 표면에는 작은 이화문들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고 원형판이 걸려서 빠지지 않도록 안쪽에 십자형의 걸림쇠 장치를 해놓았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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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이화문 사각쟁반
정방형 상자로 전체적으로는 흑칠, 구연부에는 밖으로 도드라져 금칠이 칠해져 있는데 중앙의 원형 금선내에 5엽의 금색 이화문이 장식되었다. 이화문 엽맥에는 각3개의 꽃술을 정교하게 그려놓았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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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윷말
화형윷말 花形윷말 Pieces in Yut 20세기 은 최대너비 2.0 두께 0.7 운1323 윷놀이를 할 때 사용하는 말로 4개가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 형태는 꽃모양으로 가운데 암술을 양각하였다. 재질은 은으로 만들어져 화려했던 왕실 생활의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이화형윷말 李花形윷말 Pieces in Yut 20세기 은 최대너비 1.9 두께 0.7 운1324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이화李花를 조각하여 만든 윷말이다. 4개가 1세트를 이룬다. 은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왕실 유물 중 하나이다.
박쥐형윷말 Pieces in Yut 20세기 은 최대너비 2.3 두께 0.7 운1325 박쥐문 형태로 만든 은제 윷말이다. 4개가 1세트를 이룬다. 화려했던 왕실의 놀이문화를 알려주는 유물이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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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한 목이 길고 몸통이 부른 형상에 양쪽에 귀가 달린 고식(古式)의 의례용기(儀禮容器) 형태의 화병으로 주석의 합금율이 높아 표면 광택이 밝다. 기계로 생산한 제작방식과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李花)을 두툼하게 붙여 넣은 점에서 근대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있으며 이왕직미술품제작소의 설립취지가 유지된 1910년대 제작품으로 추정된다. 당시 공예품 제작의 실상을 보여주는 유물로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ㅇ 규격(지름x높이) 164×302mm - 재료 : 은·금 - 제작시기 : 1910년대 추정 - 제작 :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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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백자오얏꽃무늬타구
백자 침그릇으로 몸통에 몇 줄의 음각선이 있고 중앙에 2개의 큰 적색 오얏꽃 무늬가 있다. 입부분에는 세척시 분리할 수 있도록 깔대기를 씌웠으며 바닥에도 유약이 칠해져 있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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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백자樂善齋가쓰인오얏꽃ㆍ 학무늬대반
대형의 백자 접시(盤)이다. 청색안료를 주로 사용하여 장식하였다. 구연의 홈이 진 아래로 음각선을 짧게 구획하여 꽃잎을 표현하였다. 8엽의 화형마다 날개를 펼쳐 날고 있는 학을 각각 그려 주었으며 학의 머리깃털은 적색안료로 칠해 강조하였다.
안바닥에는 황실의 문장(文章)인 오얏꽃 무늬(李花文)를 큼직하게 넣었는데 각 꽃잎마다 세 개의 꽃술을 놓은 모양으로 정형화되어 있다. 꽃 아래에는 '樂善齋(낙선재)'가 쓰여 있다. 낙선재(樂善齋)는 1847년에 지어진 창덕궁의 건물이다. 본래 이름은 낙선당이었으며 창경궁에 속해 있었다. 고종 황제도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숨졌으며 1963년 고국으로 돌아온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는 각각 1970년과 1989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 역시 어려운 삶을 보내다 1962년 낙선재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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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백자 청화 배꽃 무늬 병
원통형 몸체와 둥근 어깨 그리고 좁은 아가리로 연결되는 선의 흐름이 단정하고 절제된 병이다. 작은 원 속에 배꽃을 넣은 장식 무늬가 그릇과 깔끔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이렇게 도안화된 배꽃 무늬는 조선 후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종류이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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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청자오얏꽃무늬병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靑磁李花文甁 조선 말기의 국내 도자기 생산은 왕실용 자기를 공급하던 관요(官窯)인 분원(分院)이 상업자본의 발달로 인해 1883년에 민영화되는 큰 변화를 맡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근대적인 도자기 생산 방법의 이행 단계로 접어들기 시작했음을 말해 준다. 현재 고궁박물관에 남아있는 국내 도자기들은 대한제국시기 이전 관요인 분원에서 생산했던 것과 대한제국시기에 〔한성미술품제작소(漢城美述品製作所:1908-1910)〕로 시작한 이왕직미술품제작소(李王職美術品製作所:1908-1922)에서 만들진 것으로 보인다. 원형에 가까운 몸체를 가진 병으로 원래는 목이 있었지만 현재는 유실되었고 표면에는 빙열이 있다. 몸체의 어깨에는 번개문〔雷文〕을 새겼고, 몸체 가운데에는 대한제국의 상징인 큰 오얏꽃이 하나 양각되어 있다. 밑부분에는 한 줄의 음각선이 간략하게 돌려져 있다. 1900년대 초에 일본인들의 청자에 대한 선호 때문에 청자 재현붐이 일어 서울, 평양, 개성 등 전국에서 공장이 성업하였는데 이 작품도 당시에 재현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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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Paul Jacoulet (1896~1960)
일제강점기 때 청자를 만드는 도공의 모습을 판화로 만든 화가가 있는데, 폴 쟈쿨레(Paul Jacoulet 1896~1960)다. 1896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 난 그는, 3살 때 아버지가 도쿄 외국어대학에 교수로 부임하게 되면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가 25살 때인 192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32살 때 어머니가 경성제대에 재직 중이던 일본인 의학박사와 재혼하면서 거처를 서울로 옮겼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 남아 작품 활동을 했고, 어머니를 만나러 서울을 자주 오가며 우리나라 사람들과 삶의 모습을 판화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나라를 소재로 36점 이상의 다색목판화와 100여 점 이상의 수채화와 드로잉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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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 (1915)

출처: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장전경, 가로 : 52.8cm 세로 : 38.5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1915년 시정 5주년을 기념해서 개최했던 조선물산공진회 기념포스터이다. 공진회장에 대한 배치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전시관에는 미술관,음악관,연예관,철도관 등이 개설되었으며 장소는 경복궁에서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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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설립

출처: <京城と仁川>, 萩森茂(하기모리 시게루)편저, 대륙정보사, 1929
한성미술품제작소는 1908년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에는 옛 영선사 건물을 수리하여 사용하다가 1915년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선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서양식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는데 1915년에 신축된 미술품제작소는 조선식으로 신축되었다. 아마도 조선 고유의 미를 복원하고자 하는 미술품제작소의 설립취지와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0일간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를 겨냥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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