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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일하다 피자가 먹고 싶다고 하니까 갑자기 내 손을 이끌고 차에 태웠다.
잠시 후 63빌딩 피자 하우스에서 샐러드와 피자를 먹고 있는 내 모습이 유리창에 비쳤다.
근사하지 않은가. 젊은 여자와 나이 많은 남자의 조합은 뜻밖에 잘 어울린다. 남자는 자신에겐 더 이상 없는 지나간 것을 여자에게서 찾고, 여자는 현재 자신에겐 없지만 미래에 가질 수 있는 것을 지금 남자에게서 얻을 수 있다.
ー 나라타주 / 시마모토 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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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대체 내가 어디가 그렇게 좋아?”
입에 캔을 댄 채로 그가 컥컥거려, 나는 얼른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고맙다, 너무 놀라서, 아까 한 얘기는 흘려들었으면서 엉뚱한 걸 묻는다, 너?”
“미안, 하지만 정말 궁금해. 오느가 좋아할 만한 일은 별로 한 기억이 없는데.”
“그럼, 구도 너는 친절하게 대해주는 상대는 꼭 좋아하게 되니?”
호칭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거 봐, 나도 마찬가지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워. 다만, 내가 뭘 할 때 굉장히 기뻐하는 표정을 짓는다든지, 같이 있으면 차분해지는 그런점은 분명히 의식해서 좋아하지만. 그다음은, 글쎄, 솔직히 말하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목소리가 좋았어.”
“목소리?”
“응. 크게 소리를 지를 때도 찢어지지 않고 부드러운 느낌이었어. 그러니까 제일 마음에 든 건 목소리. 미안, 내면적인 게 아니어서.”
“아니야. 고마워. 무슨 질문이든 진지하게 대답해주는 게 오노의 좋은 점이기도 하잖아. 난 그걸 좋아하고.”
ー 나라타주 / 시마모토 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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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종종 떠오른다. 체육 수업이 싫어서 양호실에 가 있으면 금방 하야마 선생님이 상황을 보러 오곤 했다. 점심시간에 혼자 복도를 걷고 있을 때, 이즈미, 하고 그가 밝은 목소리로 불러 사회과 준비실로 데려가서는 멕시코 여행 당시의 슬라이드 사진을 아무도 몰래 보여준 적도 있었다.
“멕시코의 호텔에서 라이터와 시계를 그냥 놔뒀더니, 그날 싹 없어진 거야. 그래서 내가 호텔 가이드에게 항의했지. 그랬더니 뭐랬는지 알아. ‘당신은 도난을 당했다고 하지만, 청소를 하려고 방에 들어가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틀림없이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물건은 하느님이 선물로 보내주신 것이다. 그러니 고맙게 받자. 그렇게요. 그러니까 가져간 사람은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을 겁니다.’ 정말 어이없는 나라라고 생각했지만, 나름 앞뒤가 맞는 얘기라는 생각도 들었어.”
어두운 방에서 본, 아무것도 없이 그저 넓기만 한 길과 석조 주택, 파란 하늘 아래서 웃고 있는 햇볕에 탄 까만 사람들이 꿈만 같았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께 있기만 해도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였는데, 알게 모르게 역망이 현실의 거리를 뛰어넘어 기대하고 요구하게 되었다. 점점 사치스럽게 굴었지, 하고 생각했다.
ー 나라타주 / 시마모토 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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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님의 힘의 될 수 없는 건가요?”
그가 힘주어 고개를 저었다. 소중하게 여겨주는 가족도 있고, 만약 내가 네 부모님이라면, 절대 나 같은 남자랑은 사귀지 말라고 할 거야. 그게 딸의 행복을 위한 길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을 테니까.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의 보호 속에 있어. 그 보호를 배제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도 언젠가는 깨달을 날이 오겠지.”
내가 그 지적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것은 논리에 설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말 뒤에 숨겨진, 절대로 자기 의견을 꺾지 않는다는 완강한 의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ー 나라타주 / 시마모토 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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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에가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 자랄지 나는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이 나잇대의 여자아이는 외모도 마음도 순식간에 바뀌어버린다. 몇 년 지난 뒤 만나면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열세 살 마리에의 초상을 하나의 형태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을(설령 미완성에 그쳤다 해도) 기쁘게 생각했다. 이 현실세계에 불변의 형태로 영속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ー 기사단장 죽이기 2: 전이하는 메타포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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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결국 미완성으로 남기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마리에는 그 그림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고(”이 그림에는 지금의 내 생각이 아주 잘 드러나 있다"고 했다). 괜찮다면 자기가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완성되지 않은 초상화를 기꺼이 그녀에게 주었다(약속했던 석 장의 데생과 함께). 미완성이라서 오히려 더 좋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림이 미완성이면 나 자신도 언제까지나 미완성 상태인 것 같으니까 멋지잖아요.” 마리에는 말했다.
“완성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모든 사람은 언제까지나 미완성이야.”
“멘시키 씨도 그래요?” 마리에가 물었다. “그 사람은 굉장히 완성된 것처럼 보이는데.”
“멘시키 씨도 아마 미완성일 거야.” 내가 말했다.
멘시키는 결코 완성된 인간이 아니다. 그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밤마다 아키가와 마리에의 모습을 찾아 고성능 망원경으로 골짜기 맞은편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비밀을 지님으로써 이 세상에서 자기 존재의 균형을 교묘히 컨트롤한다. 그에게 비밀은 서커스의 외줄타기 곡예사가 들고 있는 장대 같은 것이다.
ー 기사단장 죽이기 2: 전이하는 메타포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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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위스키를 더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마사히코가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그리고 두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많이는 못 마셔. 내일 아침에도 일을 해야 해서.”
“내일은 내일이야. 오늘은 오늘밖에 없어.” 마사히코가 말했다.
그 말에는 기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ー 기사단장 죽이기 2: 전이하는 메타포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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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우스도 매우 좋은 차죠.” 멘시키가 말했다. “실은 저도 진지하게 구입을 고려했습니다.”
정말일까? 나는 내심 고개를 갸웃했다. 도요타 프리우스를 모는 멘시키라니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레스토랑에서 니수아즈 샐러드를 주문하는 표범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ー 기사단장 죽이기 2: 전이하는 메타포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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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대로군요. 그림 모델 일은 정말 예상보다 힘든 노동입니다.” 멘시키가 말했다. “그림으로 옮겨진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나의 알맹이가 조금씩 깎여나가는 느낌이에요.”
“깎여나가는 게 아니라 그만큼 다른 장소로 이식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예술세계에서의 공식적인 견해입니다.” 내가 말했다.
“보다 영속적인 장소로 이식된다는 뜻입니까?”
“물론 그 대상이 예술작품으로 불릴 자격이 있어야 가능하겠지만요.”
“이를테면 반 고흐의 그림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그 이름 없는 우편배달부처럼요?”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상상도 못했겠지요. 백몇십 년 후에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미술관까지 찾아가서, 혹은 화집을 펼쳐서 거기 그려진 자기 모습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리라고는요.”
“거의 틀림없이, 상상도 못했겠지요.”
“허름한 시골집 부엌 한구석에서, 아무리 봐도 정상 같지 않은 남자가 그린 특이한 그림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묘한 기분이 드는군요.” 멘시키가 말했다. “그 자체로는 영속할 자격이 없던 무언가가 어떤 우연한 만남에 의해 결과적으로 그런 자격을 얻게 된다는 게 말입니다.”
“매우 드문 일이지만요.”
그리고 나는 문득 <기사단장 죽이기>를 떠올렸다. 그 그림 속에서 검에 찔린 ‘기사단장’도 아마다 도모히코에 의해 영속할 생명을 얻었을까? 아니, 애당초 그 기사단장은 대체 누구일까?
ー 기사단장 죽이기 1: 현현하는 이데아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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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세점에서 산 카멜 한 보루가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었다. 새 담뱃갑을 뜯어 한 개비를 빼내 물고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인 뒤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래, 바로 이거야.
복잡했던 심사가 금세 편안해졌다. 더위에 찌들었던 하루를 보내고 나서 샤워를 마치고 피우는 맛난 담배 한 개비로 그나마 마음의 고요를 찾게 돼 다행이었다.
작고 사소한 행복이야말로 우리 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진정한 축복일진대 왜 우린 평생 어렵게 행복을 찾아 헤맬까?
ー 데드 하트 / ��글라스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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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렵다. 너무 무섭다. 손이 덜덜 떨려온다. 과연 이 길이 맞을까. 내가 이렇게 일 해준다고 알아주는 사람 한 명 있을까하는 미래의 속마음이 막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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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소설을 읽으면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아니, 그냥 기분이 매우 나쁘다고 보면 될 듯 싶다. 오직 두 사람 중 아이를 찾습니다에서 미라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뜬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전혜진이 떠올랐고, 읽고 나서 얼마나 심장의 박동수가 빨라진 듯이 답답하고 먹먹하든지. 어떤 의도로 소설을 써 내려간 것인지 모르겠는 작가 중 김영하가 나에겐 한 명인데, +기분도 나빠질 뿐이고, 근데도 계속 읽게 되는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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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충고들을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예요.
ー 오직 두 사람 [오직 두 사람] /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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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출판할 수 없는 난해하고 어지러운 소설을 쓰는 거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같은 걸 써버려. 한 천 페이지쯤 되고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고 주제도 알기 힘든 소설 말이야."
"「율리시스」에는 줄거리도 있고 분명한 주제도 있어."
"사실 난 안 읽어봤어. 주제가 뭔데?"
"찌질한 중년 남자의 어지러운 성적 몽상."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하고 주제가 같잖아?"
"그렇지. 그게 사실 전부야. 「율리시스」를 음란물로 판정했던 미국 판사는 뭘 아는 놈이었어. 가끔은 문학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작가들의 내면을 꿰뚫어 보기도 하지."
ー 오직 두 사람 [옥수수와 나] /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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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에는 정답 아니면 오답만 있었다. 수업 중에 '네 입장을 토론해보자'며 사기를 치려 드는 히피 같은 과목들과는 달랐다. 마치 누가 긴 단어를 더 많이 아는지 점검하는 게 결론을 내리는 방법이기라도 한 것인 양.
오베라는 남자 / 프레드릭 배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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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내 사이엔 예수라는 남자가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때부터다. 아내의 몸에서 뭔가가 빠져나간 뒤의 일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예수라는 남자가 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죄를 고백하게 만든다. 울고 웃게도 한다. 그건 내가 아내에게 해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예수는 권총으로 위협할 수도 없는 자이다. 물론 내가 총을 겨눈다고 오줌을 지리거나 하지도 않겠지만.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사진관 살인사건] /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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