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immyrho
jimmyrho
Cinema de Dream
8 posts
꿈을 꾸는 중
Don't wanna be here? Send us removal request.
jimmyrho · 5 years ago
Text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시인의 선택은 추억-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 영화의 주제인 초상화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일단 영화는 화자인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의 추억을 회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바로 ‘액자’식 구성이다. 본래의 이야기는 마리안느가 결혼 대상에게 보낼 한 집안의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하에넬)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그녀의 저택을 방문하면서 시작한다.
마리안느는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초석으로 대상의 디테일을 스케치를 통해 구체화 시키는 일을 보여준다. 이 영화 또한 그렇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관계가 쌓여가는 모습은 마치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신체 일부를 목탄의 굵직한 선으로 담백하게 그리듯 그 어떠한 시네마적 기교나 음악을 쓰지 않고 덤덤하게 표현한다. 한 씬이 한 장의 스케치같이 그들의 관계성을 쌓아 올려준다. 하지만 문득문득 나오는 마리안느의 단순하지만 수려한 곡선의 스케치처럼 매 장면 영화는 아름다운 프랑스 해변의 모습과 함께 그들의 관계성을 아름답게 꾸며준다.
Tumblr media
또한, 이 영화는 대부분 명화와 같이 그 뒤에 있는 이야기나 감정들이 오랫동안 들여다봤을 때 관찰자에게 전달이 된다. 이 영화에서 전달하는 마리안느의 모습은 영화 속 세 여자(마리안느, 엘로이즈 그리고 여식인 소피)가 밤이 깊도록 토론하던 오르페우스의 모습과 닮았다. 아내와 함께 이승으로 가기 위해 저승의 문까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던 하데스의 약속을 어기고 아내가 잘 따라오는지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본 후 아내를 영원히 잃은 오르페우스의 처지와 엘로이즈에 대한 추억으로 살아가게 된 마리안느의 처지를 일치시키며 영화는 마리안느의 이야기를 설화화 시킨다. 그렇기에 영화 말미에 표현되는 그들의 처절한 그리움과 추억으로만 표현되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오르페우스 설화와 같이 필연적임을 관객들에게 설득 시키기에 충분하다.
Tumblr media
영화는 초상화라는 주제를 영화의 틀로 사용하지만, 의식적으로 행함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 자연스럽게 영화는 회화, 특히 초상화를 표방하고 관객들 속에는 잊히지 않을 엘로이즈의 초상화처럼 잊히지 않을 영화로 남게 구성되어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18세기 유럽 여성들의 절제된 삶을 표현했듯이 영화 속 음악 또한 굉장히 신중하게 사용된다. 이 영화에서 음악은 딱 2곡이 2번씩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 음악들은 스토리 상에 매우 중요한 기점으로 사용되고 그렇기에 관객들의 뇌리에 너무나도 깊숙이 각인 된다. 그러나 사실 장치로서의 음악을 제외하자면 딱히 영화는 음악이 필요하지 않다. 목탄이 캔버스를 긁고 지나가는 소리, 장작이 타들어 가면서 내는 따듯한 소리, 아름다운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의 소리, 그리고 그녀들의 숨소리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독특하지만 정교한 연출, 그리고 오르페우스 신화를 접목하여 관객들의 입에서 감탄이 나오게끔 만든 각본 등 하나부터 열까지 영화적 미(美)로 채운 이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로필(Profile)을 가진 배우 노에미 메를랑의 연기를 만나 그녀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같이 관객들에게 잊히지 않을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로 기억될 영화로 그려졌다.
노재상. 2020.01.22
1 note · View note
jimmyrho · 5 years ago
Text
결혼 이야기...?
제목에서부터 영화는 블랙코미디를 표방한다. 영화의 시작에는 아무 정보 없이 찾아온 관객들을 의자에 편하게 안착시키기 위해 조금의 트릭을 섞어 놓는다. 하지만 초반 서로를 사랑하는 이유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는 점점 영화는 본색을 드러내고 관객들은 그제서야 분명 ‘결혼’과 ‘이야기’ 사이에 ‘끝내는’이라는 단어가 빠져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 <결혼 이야기>는 결혼 생활이 끝나가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필자가 정오 즈음에 극장을 찾았을 때 4~50대의 여성 관객이 많았는데 영화 초반에 제목만 보고 티켓을 샀을 그들의 당황함에서 나온 기류가 극장 안을 맴돌았다.
Tumblr media
그러나 영화가 시작한 이후로 관객들은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니콜(스칼렛 요한슨)이 찰리(아담 드라이버)와의 약속은 접어두고 이혼 전문 변호사 노라(로라 던)의 매력에 의해 그녀를 선임하면서 본격적인 갈등은 시작하고 몇 가지 요인들이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특히 두 주연 배우와 조연들은 그들의 연기만으로도 존재감을 확실시하며 관객들을 스토리 상에 붙잡아 놓아주지 않는다.
영화는 주로 찰리의 행적을 조명할 때가 많은데 이는 찰리가 아버지, 그리고 남자로서 좀 더 미성숙해 보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미성숙함을 자신도 알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찰리를 연기한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에 눈길이 간다. 일터에서는 성공한 사람이지만 자기 아들 앞에서 서운함을 쉽게 내보거나 전 부인이 될 니콜과의 언쟁 후 아이처럼 그녀를 껴안고 우는 그의 모습에서 미성숙한 부모와 남편으로서의 모습을 너무나도 실감 나게 표현한 아담 드라이버는 그의 중후한 목소리와 같이 나지막이 영화의 전체적인 감정선을 이끈다. 한 길 속을 모르겠는 마성의 변호사 노라를 연기한 로라 던 또한 그녀의 5번째 골든 글로브를 받기 충분할 정도로 극 중에서 찰리의 정신을 시나브로 극한으로 몰아가게 한다.
비록 영화 속 니콜과 찰리의 주변인들이 만들어주는 코미디 적 요소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을 ‘이혼’이라는 주제를 보통의 문제로 끌어내렸지만, 현실적인 주제와 실감 나는 연기를 관객이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화면의 질감과 음악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제는 한국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35mm 코닥 필름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아쉽게도 극장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넷플릭스 오리지날이라는 명목하에 소수의 관에서만 개봉한 이 영화는 필름 만이 가지고 있는 따듯한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물론 작은 화면에서도 느껴지기는 하지만 큰 화면을 통해 보이는 그들의 피부와 그 위로 부드럽게 떨어지는 햇빛이 20세기 초 할리우드 흑백 영화에서 나올 법한 부드러운 음악과 함께 이 스트레스 많은 인물들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관객들에게는 조금이나마 거리를 두어 영화라는 관점에서 관찰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영화는 미적지근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이 영화에는 그들의 결말을 함축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디가 고장 났는지도 모를 대문을 억지로 닫기 위해 니콜과 찰리 그리고 아들 헨리가 열심히 문을 미는 장면이다. 둘은 눈이 마주친 상태로 문을 닫아버버리는데 그들의 눈맞춤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아직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이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를 그들의 관계를 억지로 닫으려는 시도로 인해 그들이 갈라서게 된다는 점에서 이 함축적인 장면은 애틋하고 아름답게 묘사되어있다.
영화는 모순적인 니콜과 찰리의 모습으로 끝난다. 추악한 모습을 서로에게 들켰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전부인과 전남편이라는 관계는 모순적이면서도, 그렇기에 인간적인 이 영화는 시사하는 점보다는 그렇게 인간미를 느끼게 하며 끝나는 쪽을 택한 것 같다.
노재상 20.01.17
0 notes
jimmyrho · 5 years ago
Text
변화의 중심에서
-영화 속 여성들과 그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목소리-
노재상
“Time’s Up”. 이는 올해 1월 (2018년에 쓴 글이다) 열린 골든글로브 시상식을 시작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비롯하여 여러 세계적인 시상식에서 많은 배우가 검은 옷을 입고 그 위에 보여준 글귀이다. 세계적인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러 여성 배우들과 여성 제작진들의 폭로는 온라인상에서 미투(MeToo)라는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양성평등 운동을 오프라인에서도 시행하기 위해 엠마 왓슨과 메릴 스트립과 같은 할리우드의 많은 여성 배우들과 작가 등이 모여 타임즈업(Time’s Up)이라는 운동이자 단체를 설립하였다. 할리우드라는 상징적 장소에서 발생한 성폭력과 불평등에 대한 폭로와 양성평등 운동은 미국을 넘어서 전 세계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움직임은 현실 세계를 벗어나 스크린 속 여성 캐릭터들과 그들을 연기하는 여성 배우들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 이전에 여성이란 스크린 속에서는 오랫동안 한정되어 있었다.
과거 고대로부터 내려온 인간의 가부장적 사회의 모습은 초기의 영화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여성들은 영화 속에서 그들의 존재가 대상화(對象化, Objectification)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영국 페미니스트 영화 평론가 로라 멀비는 남성적 응시(Male Gaze)라는 이론으로 설명하였다. 그녀는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의 거울 이론을 바탕으로 가부장적 남성이 스크린 속 인간의 형태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2가지로 간결화시켰다.
첫째는 남성 관객이 스크린을 통해 여성 캐릭터를 바라볼 때 그들의 육체를 훔쳐보고 성적인 욕망에 휘감기게 되는 관음증적 절시증(苆視症,Scopophilia,대상의 나체나 사적인 행동을 보고 싶어 하는 성적 욕망)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이창>에서 제프(제임스 스튜어트)는 자신의 아파트 뒤편 창문으로 보이는 다른 이들의 보금자리를 훔쳐보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영화 전체가 관음증적 즐거움을 욕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중 특히 제프가 성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부분은 건너편에 사는 젊은 여성의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모습이다. 이 부분에서 관객은 제프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신체와 행동을 보고 똑같이 절시증적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성적인 욕망의 객체가 되고 과거 사회의 가부장적인 질서가 스크린 속 여성과 관객 사이에서도 성립된다.
이러한 가부장적 질서에서 남성은 나르시시즘적 투영을 통해 관음의 대상이 되는 여성보다 심리적으로 우위에 서게된다. 성공하고 부유한 잘생긴 남성이 아름다운 여성을 부인으로 맞이하는 스크린 속 진부한 관계는 남성 관객이 자신과 같이 남근을 소유한 스크린 속 남자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시킨다. 그리고 자신과 그 남자 주인공을 동일시하여 여성을 쟁취하고 그들보다 위에 서야 하는 사디즘적 욕망으로 발전하게 되는 데, <이창>에서 제프가 위치한 곳은 그가 지켜보는 다른 이들은 볼 수 없는 전지한 위치이다. 또한, 제프를 돌봐주는 미모의 연인 리사(그레이스 켈리)는 제프에게 헌신적이다. 제프는 관객들이 자신들을 투영할 존재이고 그 존재는 전지하고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관음증적 절시증을 즐기는 관객들의 심리적 기저에는 사회의 가부장적 논리로 인한 나르시시즘과 사디즘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Tumblr media
(Rear Window, 1954)
로라 멀비가 정의한 남성의 시선이 스크린 속 존재하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여 보는 행위를 충족시키는 기제 중 또 하나는 페티시즘적 전시증이다. 이는 관객들이 스크린 속 여성의 존재와 그 형태를 보는 것을 통해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킨다. 여성을 페티시즘적으로 대상화시키는 데 있어서 그들의 캐릭터가 가지는 여성성은 중요하지 않다. 조세프 본 스텐버그 감독의 1932년 작 <상하이 익스프레스>는 그가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함께한 7편의 작품 중의 하나이다. 이 영화에서는 초기 영화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페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서구 영화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가진 애너 메이 웡이 연기한 페이는 극 중 레즈비언으로 나온다.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연기한 릴리와 페이는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극 중에 존재하는 남성 캐릭터와의 관계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실제로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양성애자였고 극 중에서도 양성애자로서의 연기를 훌륭하게 펼친다. 이러한 두 여배우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자신을 투영할 우월한 남자 캐릭터도, 여성과 남성의 뚜렷한 상하관계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 그녀들의 존재와 신체를 대상화하여 보는 즐거움을 선사 받게 된다.
Tumblr media
(Shanghai Express, 1932)
이러한 페티시즘적 절시증은 영화를 보는 남성의 불안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를 로라 멀비는 프로이트의 거세 불안 이론을 통해 설명했다. 그녀는 여성의 존재가 자신의 위치를 위협한다고 생각하자 여성의 존재 자체를 유희를 위한 존재로 치부해버리는 방어기제가 발생하는 것이라 설명하였다. 그렇기에 관객이 여성 캐릭터와 그를 연기하는 여성 배우의 모습에 페티시즘을 느낄 때는 영화의 네러티브는 그 힘을 잃어버리고 스크린 속 존재는 형태로써만 남아있게 된다.
로라 멀비는 1975년에 발표한 논문인 <시각적 쾌락과 네러티브 영화>에서 처음으로 남성적 응시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개념은 1975년 이전에 제작된 가부장적인 통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분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이론은 현재에도 유효할까?
여전히 수많은 영화에서 여성은 응시에 대상으로 그려지고 그 역할은 한정적이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 <언더 더 스킨>은 여성의 몸이 남성의 시선으로부터 대상화되는 과정을 실험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남성 대부분은 배우가 아닌 일반인들이고 카메라는 그 일반인 남성 배우들이 볼 수 없게 숨겨져 있다. 또한, 로케이션 촬영은 촬영인지 모를 정도로 영화적 세팅 없이 실제 스코틀랜드 거리를 배회하며 촬영하였다. 스칼렛 요한슨은 외계인이자 로라라는 여성의 가죽을 뒤집은 여성을 연기하기 위해 살을 찌우고 검은 가발을 썼다. 길거리를 배회하며 남성들에게 길을 묻는 척 유혹하는 그녀를 본 남성들은 매력적인 그녀의 모습에 쉽게 차에 올라타 그녀의 희생양이 된다. 그녀의 첫 목표물이 희생되기 전까지 관객은 첫 희생양과 마찬가지로 그녀가 그와 함께 무엇을 할지 모른다. 그저 관객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같이 탑승한 희생양과 같은 위치에 있다. 그러나 그녀가 길거리를 배회하는 이유가 희생양을 만들기 위함을 알았을 때 관객들은 더는 그녀를 응시하는 즐거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Tumblr media
(Under the Skin, 2013)
문제는 무시무시한 함정이 도사리는 ‘검은 방’에서 남성이 희생되는 모습이다. ‘검은 방’에서 남성은 나체의 로라를 욕망에 사로잡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따라간다. ‘검은 방’에서 그녀를 따라가자마자 바닥은 늪과 같이 희생양을 무시무시하게 삼킨다. 이때 카메라는 나체의 로라를 보여주는 데 그녀의 모습은 네러티브를 벗어나 여성의 형태로 페티시화되어 관객과 희생양에게 잠깐이나마 시각적 쾌락을 선사한다. 그러나 평행하던 카메라의 위치는 점점 늪과 같은 바닥에 잠식되어가는 희생양의 눈높이와 같이 낮은 앵글로 그녀를 쳐다본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페티시즘적으로 대상화되었지만, 그녀와 희생양 혹은 그녀와 관객의 관계는 가부장적 사회의 통념과 같은 남녀의 상하관계가 아닌 전복된 관계가 된다. 이 상황에서 희생양인 남성과 관객은 거세 공포로 인한 여성의 대상화가 아닌 체제가 전복되는 거세를 경험하게 된다. 남녀의 상하관계가 뒤집히는 거세는 관객에게는 공포이다. 공포 스릴러로 분류된 이 영화는 분명하게 로라 멀비의 남성적 응시를 이용하여 관객들의 심리를 뒤틀고 있다. 여성으로서 자신에게 친절한 남성에게 연정을 품은 로라는 자신이 여성이 아닌 존재(외계인)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남성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를 부정하는 강간범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이 영화조차도 로라 멀비가 제시한 이론 속 수동적이고 소비적인 여성의 존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극처럼 보인다. 이처럼 여성이란 현대 영화에서조차도 가부장적인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능동적이고 입체적이며 가부장적 통념에서 벗어난 영화 속 여성은 초기 영화에서부터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프리츠 랑의 걸작 <메트로폴리스>에서 체제전복적인 역할의 여성 캐릭터를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 마리아의 모습으로 변신한 로봇은 상류층 남성들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 사회를 뒤흔든다. 무대에서 남성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선정적인 춤을 추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휴거의 상징인 대탕녀 바빌론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메트로폴리스 지하세계에 홍수를 나게 하고 지상에는 혼돈을 가져온다. 비록 다분히 기독교적인 영화인 <메트로폴리스>는 이 체제전복적인 여성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그리지만, 이 여성형 로봇은 초기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매우 강력한 독립적 여성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진정 능동적이며 남성적 응시에서 벗어나는 여성의 모습은 현대에 이르러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대표적인 여성영화인 <델마와 루이스>에서 나오는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벗어나려는 ‘델마와 루이스’적 여성이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 <델마와 루이스>는 현대 영화에 상징적 영화이다. 남성이라는 존재의 통념을 뒤집으며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루이스(수잔 서랜든)는 자신들을 억압하고 종속된 존재로 생각하는 남성들을 총이라는 상징적인 무기로 심판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부장적 사회에서 그들의 존재는 역설이다. 순종해야만 하는 부인과 종업원이라는 그들의 위치는 그들의 일탈이 남성적 시선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남성적 응시 이론을 무참히 깨버린다. 초반 치마와 화장으로 꾸며낸 그들의 여성적 모습은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사라진다. 그들의 손에는 탈취한 총이 쥐어져 있고 한껏 꾸며냈던 겉모습은 추레하기보다는 자유롭게 그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 같다. 또한,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타자의 응시이다. 델마와 루이스는 타자에 의해 관찰당하고 응시당한다. 그러나 그들은 제이디(브래드 피트)를 통해 그러한 응시의 객체를 전도시킨다. 제이디의 모습은 남성적 응시에 대한 도전인데, 제이디는 델마와 루이스에게 성적으로 유흥의 대상이고 또한 관객들에게도 그의 몸음 관음적 응시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델마와 루이스>는 경찰과의 추격 끝에 절벽으로 내달은 그들의 오픈카가 공중에서 머물며 끝이 난다. 죽음으로서 밖에 벗어날 수 없는 안타까운 남성 중심적 사회 속 여성들의 모습이라고 이 영화를 평가하기에는 조금 아쉽다. 대신 처음으로 두 손을 맞잡고 땅에서 벗어난 델마와 루이스는 찰나의 완전한 자유 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더 좋은 결말의 해석이리라 생각한다. ‘델마와 루이스’적 여성의 모습은 이 이후에도 꾸준히 모습을 드러낸다. 대표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속 히데코(김민희)와 숙희(김태리)다. 그들도 델마와 루이스처럼 남성 중심적이며 변태적인 사회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심판한다. 단지 <아가씨>와 <델마와 루이스>가 다른 점은 델마와 루이스가 우정을 통한 여성의 연대였다면 히데코와 숙희의 연대는 사랑으로 인한 것이다. 또한, 극의 끝이 클라이맥스로 마무리되는 <델마와 루이스>와는 달리 <아가씨>는 남성이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연합으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는 점이다. 이 두 작품처럼 여성이 여성성을 유지한 채로 남성 중심적인 사회를 탈피하는 영화 속 여성 배우들은 남성적 응시를 통해 페티시즘적 절시증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확실한 체제 전복을 이룬다.
이와 반대로 여성성을 누락시켜 완전하게 남성적 응시로부터 자유로운 능동적 여성 캐릭터가 존재한다. 리들리 스콧이 <델마와 루이스> 이전에 그린 또 하나의 강력한 여성 캐릭터인 리플 리(시고니 위버)가 그 중 대표적이다. <에이리언>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를 제작한 리들리 스콧은 제작단계에서 대부분 배역의 성별을 정해놓지 않았다. 그 때문에 주인공 리플리는 <에이리언>에서 매우 중성적인 인물로 나온다. 영화의 초반에 보이는 그녀의 속옷 차림을 제외하면 네러티브 상에서 그녀는 무시무시한 화염방사기를 손에 든 채 용감하게 제노모프와 대결하는 여성성을 초월하는 강인한 리더의 모습이다. 인간으로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 리플리는 관객에게 성별의 존재를 망각하게 하고, 때문에 <에이리언>이라는 영화의 네러티브가 남성과 여성의 존재를 떠나 인간과 그 인간을 위협하는 초월적 존재와의 대결에 초점을 맞추기 쉽게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보여진다. <에일리언>시리즈는 2편부터 본격적으로 리플리라는 존재가 여성성을 초월하여 중성적 매력에 모성이 덧붙여진 강인한 어머니라는 존재로 그려진다. 프로이트가 설명한 남근기를 지난 인간은 더 이상 어머니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에이리언>시리즈 속 모성을 갖는 리플리는 관객에게 어떠한 시각적 쾌락을 선사하지 않으며 남성적 응시에서 벗어나게 된다.
조지 밀러 감독의 4번째 매드맥스 영화인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속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는 임모탄의 여인들을 구출해주는 짧은 머리의 영웅적 인물로 리플리 이후에 대표적인 중성적 여성 캐릭터이다. 퓨리오사 역시 극 중에서 어떠한 남성으로부터 여성성을 강요받거나 시각적 쾌락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현대 영화에서 남성적 응시를 벗어나는 여성 캐릭터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여성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가부장적 사회질서의 통념 아래 수동적이고 소비적이었다. 이로 인해 남성적 응시는 이 가부장적 질서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허용되어왔고 남성 캐릭터와 관객들은 영화의 주된 혹은 부수적인 역할로서 시각적 쾌락을 즐겨왔다. 이러한 네러티브 속 남녀불평등이 완화된 것은 분명 델마와 루이스 그리고 리플리와 같은 체제전복적인 캐릭터들이 주목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영화제작자는 머물러있지 않고 남성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방향으로 남성 중심적인 영화 산업을 흔들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남성 캐릭터가 나오지 않는 영화는 영화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초기 영화사에 몇 안 되는 여성 감독 중 하나인 레온티네 세이건은 그녀의 대표작 <걸스 인 유니폼>을 통해 남성성을 완전히 배제한 영화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1931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남성성을 배제하기 위해 여성 기숙학교라는 배경을 선택하였다. 주인공 마누엘라(헤르타 티엘)는 최근 어머니를 잃고 군인 아버지에 의해 여성 기숙학교로 보내진 어린 소녀이다. 그녀는 곧바로 학교의 선생님인 본 베른부르크 부인(도로테아 비크)에게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모성을 느끼고 후에는 모성을 넘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동성애 관계로 진입하는 과정이 자연스러웠던 부분은 극의 초반에 어린 소녀들이 본 베르부르크 부인을 맞이하는 모습이 마치 잘생긴 남자 선생님을 보듯 ���덤이 형성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마누엘라가 학교로 전학 오기 전 이미 본베부르크 부인은 그녀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여학생들에게 연정의 대상이었다. 이 영화는 시대를 뒤흔드는 동성애적 주제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 중의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장면이 있다. 극의 초반 본 베르부르크 부인은 잠을 청하기 전 여학생들의 방을 방문해 한 명씩 이마에 키스해준다. 마지막으로 마누엘라에게 키스를 해줄 차례가 오는 데 이때 본 베르부르크 부인과 마누엘라의 투샷은 마치 3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남녀 연인관계의 미묘함을 표방한다. 마주 본 두 여성은 입술에 키스하는 것으로 이 장면은 끝이 나는데 30년대 독일의 기독교적 사회는 이 장면을 비난하였다. 직유적인 동성애 코드와 영화가 가지고 있는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적 성격은 이 영화가 1970년대까지 독일과 미국에서 검열의 대상이 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 도전적이며 진취적인 영화는 1958년에 독일에서, 2006년 미국에서 <사랑하는 애너벨>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 되었다. 하지만 <걸스 인 유니폼> 이후에도 여성들이 네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영화는 여전히 실험적인 영화로 치부되었다.
Tumblr media
(Girls in Uniform, 1931)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여성 캐릭터를 네러티브의 주체로 등용하는 영화들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필두로 할리우드와 한국 영화계 등 전세계에서 실험적인 영화를 넘어 하나의 장르성을 띄게 되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와 같은 남성성을 완벽하게 배제한 영화는 마치 남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그저 남성성을 배제하기 위함이기 보다는 사회의 통념적인 이분법적 사고로부터 탈피하기 위함이다. 또한, 그들이 여성성으로부터 탈피하려는 것이 아닌 인간으로서 사랑하고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임을 그리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 속 남성적 응시에 의해 정해진 한계를 넘어서는 여성은 이제 막 수면 위로 올라왔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남성성을 배제하여 남성적 응시의 한계를 무너트리거나 <언더 더 스킨>과 같이 남성적 응시를 정면으로 부딪치는 영화는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는 여성 배우에게도 매우 큰 부담이다. 현재 영화계에서는 여성이 네러티브를 이끄는 영화는 여성 배우에게 큰 부담을 안기는 여론을 형성한다. 대부분 여론은 과거 여성영화들이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것을 빌미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의 생산을 꺼리게 한다. 그러나 여성영화들이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전 세계에서 생산된 영화 중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가 차지하는 비율은 지금까지 제작된 여성영화들의 상업적 성공 확률보다 적을 것이다. 또한, 근래 많은 여성영화의 성공은 이러한 여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수상 등 평단과 관객 모두를 만족시킨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의 주인공은 사회적 소수자 중에 소수자이다.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는 여성이자 장애인이며 경제적으로도 최하층이다. 이러한 엘라이자는 소수자로서의 사회가 강요한 규범을 부수고 진정한 사랑을 위해 떠난다. 엘라이자의 나오지 않는 목소리 대신 젤다(옥타비아 스펜서)가 대신 말해주는 것처럼 이 영화는 소수자를 대변한다. 엘라이자가 항상 챙겨주는 옆집의 자일스(리차드 젠킨스)는 동성애자이다. 엘라이자는 남성은 필요 없다는 듯이 남성적 응시를 정면으로 부딪치며 자위를 즐긴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한 것은 성별을 초월한 존재이다(물론 엘라이자는 크리쳐와의 섹스 후 젤다에게 “그”의 성기는 내장형이라 필요할 때 나온다고 설명하며 크리쳐는 남성임을 시사한다). 이러듯 쉽사리 보호받아야 할 소수자이자 응시의 대상이 되기 쉬운 여성 캐릭터를 샐리 호킨스는 위태위태하지만 강직한 여성으로 해석하여 연기하였다. 이처럼 캐릭터에 대한 해석을 통해 능동적인 여성을 영화 속에 그려내는 능력은 남성 중심의 사회와 남성적 응시에 도전하는 현대 여성의 힘이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쓰리 빌보드>와 코엔 형제 감독의 <파고>를 통해 두 번이나 아카데미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두 영화에서 가부장적인 사회에 흐트러진 질서를 바로잡는 영웅적 여성이자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녀가 연기한 두 여성의 의의는 남성적 응시에서 벗어남에 그치지 않는다.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영화가 시각적 언어임을 이용하여 스크린 속과 밖의 여성들이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그녀는 임신했어도 직업적 소명을 다하는 여성의 모습을 <파고> 속 마지를 통해 보여주었고, 반인륜적인 사회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강인한 모성의 전형을 <쓰리 빌보드> 속 밀드레드를 통해 보여주었다.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과 같은 일렬의 일들은 남성 중심적 사회와 남성적 응시로 인해 스크린 속 여성이 소비되는 행태가 스크린을 넘어 현실 세계에 반영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생각한다. 그렇기에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연기한 캐릭터들과 같이 남성 중심적 사회와 여성이 소비되는 행태가 팽배한 사회에 대한 반기를 드는 스크린 속 여성들은 스크린 밖 타임즈업과 미투운동에 힘을 실어줄 것이다. 그러나 영화계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여성운동은 한국에서는 “남혐”이라는 잘못된 개념이 첨가되었다. 필히 우리는 영화 <카트> 속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연대라는 주제를 통하여 진정한 여성운동이 무엇인지, 소비되지 않는, 능동적인 여성의 모습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2018년 여름
0 notes
jimmyrho · 11 years ago
Text
인생의 암흑기에서
Tumblr media Tumblr media
사실 최근 3개월 동안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영화는 2개일 듯���다. <겨울 왕국>과 <변호인>. <변호인>이야 실재 인물을 차용한 좋은 내용과 배우들의 연기의 내공이 좋은 작품을 탄생시킨 좋은 영화의 예일 것이다. 하지만 <겨울 왕국>은 내러티브 적 오류와 억지스러운 혹은 디즈니다운 스토리 구성임에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오랜 기간 공주 시리즈의 부재와 겨울에 개봉한 <겨울 왕국>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절대적으로 부부 작곡가의 탁월한 작곡 능력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영화들이 많은데, 특히 <카운슬러>는 내가 좋아하는 리들리 스콧 감독이 내가 좋아하는 마이클 패스벤더, 브래드 피트, 하비에르 바르뎀 같은 미친 연기를 하는 사람들을 대려다 놓고 장르를 알 수 없는 모호하고 이해 가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 놨으니 참으로 비통하다. 아마 리들리 스콧의 동생, 토니 스콧의 죽음 때문에 손에 잡히지 않는 영화를 억지로 만들었다고밖에 생각 들지 않는다. 또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영화는 삶과 죽음에 대해 너무 얽혀있고 철학적인 관점을 화면으로 옮기지 못하고 배우들을 통해 내뱉게 시켰다. 영화가 실패한 원인 중 하나이다. 앞으로 많은 영화를 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리들리 스콧도 이제 은퇴를 바라보는 만큼 그 전에 좋은 작품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보다 최근 개봉한 두 영화는 굉장한 관심을 받았었는데 하나는 <인사이드 르윈>, 또 하나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다. 두 영화는 한 남자가 어두운 시간을 보낸 실재 인물의 삶을 모티브로 한 내용이다. 하지만 두 영화의 엔딩은 상당히 다른 양상이고 결국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두 영화의 엔딩이 초래한 결과가 나타났다.
         <인사이드 르윈>은 ‘믿고 보는’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코엔 형제의 첫 음악 영화다. 하지만 끝은 코엔 형제의 매니아틱한 엔딩이다. 마치 외출을 했는데 화장실 불을 켜고 나온 듯한 느낌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나 <파고>의 엔딩과 같이 굉장한 여운과 아쉬움이 있는 영화다. 그런 아쉬움에도 사람들이 ‘믿고 보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는 코엔 형제의 영화는 분명 매니아들의, 매니아들을 위한, 매니아들에 의한 영화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화마다 형제의 특유 색은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다고 영화들이 모두 지겹고 비슷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만드는 영화들은 새롭기만 하게 보인다. 특히 그들의 웨스턴 장르를 표방하는 영화들은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하는 질 높은 서부 영화들이다.
         그러나 <인사이드 르윈> 속, 르윈 데이비스는 암흑기에 허덕이며 지푸라기를 잡고 놓고 하며 위태롭게 사는 사람이자 음악가이다. 그의 행동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캐릭터 성으로 보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에게서 희망이란 모습은 보기 어렵다. 이 영화가 실재 인물을 모티브로 한 스토리라는 걸 고려한다면 속으로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라고 계속 생각하게 되지만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한다. 사실은 아는 사람들의 집이란 집은 다 찾아다니며 소파를 신세 지는, 얼마 전 파트너가 자살한 가난한 음악가의 입장이라면 희망이란 희망은 찾아볼 수 없는 게 당연한 현실이라 생각된다. 차갑디차가운 색감의 영화는 외로운 그의 뉴욕 생활을 대변해주며, 풍파 같은 인간관계와 현실 속에서 그가 헛웃음을 짓는 이유는 공감 가는 대목 중에 하나다. 그러나 희망을 꿈꾸는 관객들에게 허무하고 전달되지 않는 엔딩은 공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요소이다. <겨울 왕국>의 엔딩은 분명 억지스러운데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엔딩인 것이고 그게 지금까지도 억지스럽게 먹히고 있는 것을 보면 <인사이드 르윈>의 저평가는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데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 주연상, 남우 조연상, 그리고 분장상까지 3관왕에 오른 인정받은 영화다. 사실, 내용은 둘째 치더라도 매튜 맥커너히와 자레드 레토의 연기만 보더라도 소름이 돋고 눈물이 난다. 에이즈에 걸린 론 우드로프를 연기하기 위해 좀비 같은 행색이 되도록 감량하고 매소드 연기가 무엇인가를 보여준 매튜 맥커너히와 에이즈에 걸린 복장 도착증을 가진 게이, 즉 크로스 드레서가 된 자레드 레토의 연기는 왜 아카데미가 그들에게 상을 주었는지, 과연 아카데미가 진정성을 가진 시상식임을 알려준다.
         처음엔 자신이 살기 위해서 그러다 남들을 살리기 위해서 목표가 바뀌어버린 론 우드로프가 “가끔은 살려고 노력하느라 진짜 살 시간이 없는 것 같아.”라고 말한 대목에서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은 쉽지 않지만 놓아버릴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 사람의 삶이 변화는 과정을 보여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은 수많은 에이즈 환자들의 힘든 삶을 대변하며 소시민적 영웅이자 사회 비판적인 인물을 원하는 시민들에게 매튜 맥커너히의 연기는 관객들의 심장과 뇌에 새겨진 길이 남을 무형문화재일 것이다.
영화가 가진 힘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당시의 박스오피스에서 제일 흥행한 영화는 곧 새로 극장에 걸린 영화들에 의해 침식당하고 관객들의 머릿속에서 밑바닥으로 가라앉아버릴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계몽한 영화들의 경우 영화를 본 관객들을 통해 사회 속에서 되새김질 되기는 매우 어렵지 않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 로데오에 다시 도전하는 론 우드로프의 모습으로 끝맺음을 지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그의 지독한 인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닫거나 혹은 다시 생각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0 notes
jimmyrho · 11 years ago
Text
스크린 속 미술
  디즈니의 새로운 공주시리즈 애니메이션인 <Frozen> (한국 제목 <겨울 왕국>)은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영화의 성적은 벌써 세계적으로 8억 불이 가까워졌고 전문가들은 9억 불까지의 성적을 낼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Frozen>의 OST는 벌써 많은 사람이 따라부르고 있고 캐릭터 상품들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끈 이유는 음악과 스토리 속 캐릭터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 대형 극장들의 압도적인 스크린 크기의 영향을 받아 이 애니메이션 속 그림체와 배경들의 아름다움이 많은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한 이유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사람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영상이다. 즉, 회화와 다를 게 없다는 뜻이다. 이와 반대로 실사 영화는 현실의 그대로를 담은 사진술의 발전적 형태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기본 속성은 사진으로서의 시각적 예술성이다. 최초의 영화들은 아무 설명도 없이 사물이나 사람들의 움직임을 연속적으로 촬영한 필름들을 빠르게 보여줌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해줬다. 그 당시 영화는 예술이라기보다는 체험에 가까웠다. 하지만 영화가 발전하면 할수록 영화감독들은 프레임 속 예술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예술 사진같이 아름다운 장면을 프레임 안에 담은 영화들은 시각적인 감동으로 스토리의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프랑스 작가주의 시작이자 새로운 영화적 기법을 시도한 프랑스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의 영화, <400번의 구타>에서는 아름다운 파리 시내의 전경과 구름 낀 프랑스의 아름다운 해변은 주인공의 어두운 어린 시절을 한 프레임 안에 담아 놓은 듯하다. 판타지 서사시 영화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은 아름다운 뉴질랜드 전경을 보여준다. 컴퓨터 그래픽이 필요 없는 뉴질랜드 남섬의 모습은 대형 스크린으로 보면 관객들로 하여금 장엄함에 숨이 턱 막히게 한다. 외국의 모습뿐 아니라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한국의 아름다운 절경들을 한이 서린 여인의 모습과 함께 프레임 속에 나열함으로써 <서편제>라는 영화의 ‘한국적 한과 예술’이라는 주제를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아름다운 자연과 사연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프레임 속에 담은 샷(Shot)들을 보면 밀레의 <만종>처럼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보는 듯하다.
현실의 아름다운 모습을 프레임 속에 그대로 담은 영화들 외에도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상을 담은 영화들이 있다. 인도 출신의 감독 타셈 씽은 그만의 독특하고 초현실주의적인 영상미를 뽐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과 <더 셀>이 있다. 두 영화의 이야기는 실로 놀랍도록 환상적이고 동화적이며 동시에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잔인하다. 스토리와 일맥상통하게 영상들 또한 환상적이며 잔인하다. 특히 영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은 18개국 26로케이션에서 촬영되었다. 타셈 씽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기하학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배경과 건물들을 찾아 촬영했다. 이 영화를 보면 많은 장면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꾸며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컴퓨터 그래픽은 완전하게 배제되어있는 영상들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미비아의 나미브 사막과 인도의 블루시티라 불리는 조드뿌르 등 실제 모습이라 믿기 어려운 환상적인 배경은 마치 달리의 초현실주의 그림 속 배경과 같다. 독특한 원색을 프레임 속에 사용함으로써 강렬하면서도 환상의 장소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두 영화에 초현실주의적 성격을 더해주는 것은 배경뿐만 아니라 영화 속 인물들의 모습과 옷들도 한몫한다. 타셈 씽의 영화 속 인물들은 과장되고 판타지적인 모습이다. 거대한 뿔을 달고 있거나 가면을 쓰고 있고 거대하고 특이한 드레스를 입고 있다. 이러한 실사 영화들이 우리의 상상 속 형상을 한 것에 대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우리가 시청각적 정보를 통해서 스토리를 얻을 수 있는 매체이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는 스크린 속 장면들을 통해 시각적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술적 영감과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모네의 세로 2m가 넘는 <수련>이란 거대한 작품을 미술관에서 직접 봤을 때와 같은 극장에서 거대한 스크린 속 아름다운 영상 미술을 보면 소름이 돋음을 경험할 수 있다.
-노재상 ([email protected])
Tumblr media Tumblr media Tumblr media
0 notes
jimmyrho · 12 years ago
Text
어른이 되어가는 중에 느낀 점이 있다면 삶이란 놀랍도록 시니컬하다는 거다. 사람들 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즐거움은 없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았지만, 피부로 느끼고 만성적인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것은 20세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연속적인 차가움 속에 즐거움은 언제나 있고 <개그 콘서트>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런 짜여 있는 개그와는 다르게 일상적 코미디, Episodes, 그 자체는 굉장히 시니컬하다는 사실이다. 그런 평범한 일상 속 Black Comedy를 Louis C.K.는 인간성의 평범함 속 반전으로 잘 표현한다.
고등학교 당시 이미 “알 거 다 아는” 학생이었던 시절, 미드, 영드, 그리고 일드까지 섭렵하던 시절, PMP 속 나의 친구는 이기상 지리 선생님과 외국 드라마였던 시절, Lucky Louie라는 미국의 섹슈얼 블랙 코미디의 신세계를 열어준 미드가 있었다. Facebook에 짧은 씬(Scene)으로 동영상이 올라오곤 했던 바로 그 미드다. 사실 Facebook에 올라온 Lucky Louie의 영상들은 아주 건전한 개그이다. 정말로. Lucky Louie는 ‘할리우드’식 스튜디오 시트콤의 성인 버전이다. 여기서 “성인 버전”이란 정말 19세 이상이며 보고 싶지 않은 어떤 남성 등장인물의 번데기같은 성기도 나온다 (게이도 그렇게 생긴 건 보고 싶지 않을 정도의 역겨움이었다). 섹스라는 것 자체가 미국 시트콤에서는 아주 평범한 소재지만, 섹스 씬(Scene)자체는 은유적인 방법으로 표현된다. 놀랍게도 Lucky Louie에서는 적나라한 흑인 커플의 신음소리(스포일을 하자면, 사실 커플이 아니고 부인 혼자의 즐거움이다만)가 스피커를 가득 채우며, 실제로 미국에서 쓰면 안 되는, 여성의 성기를 표현하는 (이 단어에 비해 pussy는 귀여울 정도) 정말 정말 너무나도 나쁜 언어를 이 TV 쇼에서는 한 씬(Scene)안에 수십 번 등장한다. 그러나 웃기다. 너무 웃겨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PMP를 붙잡고 미친 듯이 웃어댔다.
Tumblr media
그러나 그런 Louie는 이제 스튜디오를 벗어나 실제 삶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실제 코디이언인 Louis C.K.가 Fake Documentary 식으로 <Louie>라는 시트콤을 본인 시나리오와 제작 아래 만들었다. 시트콤은 카메라를 3자의 입장에서 촬영하며 섹슈얼 코메디 드라마 장르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혼 후 두 딸과 같이 살며 Stand-up comedy로 뉴욕에 사는 픽션 속의 Louis C.K.를 그리는데 그의 삶은 너무나도 슬프다. 그가 만나는 모든 여자는 현대인을 대변하듯 어딘가 굉장히 불완전하며 싸이코다. 근데 그 상황이 너무 웃기다. 아니, 웃프다. 정말 너무 웃퍼서 그를 동정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너무 헷갈린다. 하지만 그만큼 현대인들의 삶을 뒤틀어 놓으며 반전의 웃음을 선사한다.
정말 더럽고 섹슈얼하며 뚱뚱한 아저씨가 나오는 이 드라마는 대가리가 얼추 다 큰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보고서 역겹고 재미없고 더럽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냥 보지말라. 아직 삶이 얼마나 역겹고 재이없고 더럽지만 그 사실들이 우리를 <웃프게>만드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0 notes
jimmyrho · 12 years ago
Text
Alfred Hitchcock의 영화 <Vertigo>는 반전의 묘미와 많은 생각을 주는 영화다. 어쩌자고 이런 영화를 다 만들었는지. 결국, 이 영화는 (내 생각으로는) <아내의 유혹>(같은 쓰레기 드라마)에 헛된 영감을 줘버린다. 제길.
원초적 공포와 성적 욕망. 이 주제들은 히치콕의 주제였고 히치콕은 이 주제를 다루는 사람이다. 원초적 공포가 귀결되는 것은 결국 '죽음'이다.
<Vertigo> 속 주인공, John은 죽음이 무섭기에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것이고, claustrophobia가 있는 사람은 좁은 공간에서 '죽을 뻔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술을 많이 마시고 '아 이대로 죽는 건가'이라고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어서 해장하러 순대국 먹으러 가자! 일어나!'라고 '위'로부터 대뇌는 명령을 하달받는다. 그러나 술은 또!또!또! 다시 들어간다. 이처럼 죽음이 영화에 있어서 주된 주제인 이유는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죽음', '종말', 혹은 '헤어짐'이란 단어들이 주는 감정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마음속 심해로 이성과 논리를 끌어당긴다. 그러나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머물기에 다시 찾게 되고 다시 깨우치게 된다. 마치 <Vertigo> 속에서 John이 Judy와 함께 그가 사랑한 Madeline의 복수와 자신의 비참함을 풀기 위해 수도원 종탑을 다시 올라가는 것처럼. <He faces the death again> 
Tumblr media
John이 비참해지는 이유는 쓸데없는 Fetish. 즉, 불필요한 성적 집착을 Judy에게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내가 만지고 싶은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아는 John은 우리가 봤을 때 완전체 Psycho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분명히 모두 특정한 것에 Fetish를 가지고 있다. 아이돌에 미친 빠순이들은 분명 섹스 어필이 불가능해 보이는 (마르고 야리야리하고 순수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남자다운) 어리고 아름다운 남자들에게 집착할 것이다. 분명 Fetish는 다들 가지고 있지만, 문제는 그것을 표출하는 것. 변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John 역을 연기한 James Stewart의 표정은 분명 오싹한 변태가 되어버린 남자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우리도 우리 자신 모르게 욕망의 대상이 앞에 나타났을 때 그렇게 미소를 씩 지어낸다는 것이다. 그 욕망의 대상은 당사자들이 잘 알겠지.
히치콕은 천재다. 스탠리 큐브릭과 함께 오묘한 세상을 프레임 안으로 옮겨 놓은 거장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대단한 것은 오묘해 보이는 그 세상이 실상 전형적인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죽음과 섹스, 공포증과 페티쉬. 어느 하나 빠짐없이 우리 이야기다.
0 notes
jimmyrho · 12 years ago
Text
요즘 쓰는 말 중에 ‘긁지 않은 복권’이라는 아주 좋은 말이 있다. 뭐, 굳이 이 단어가 여성들의 지방층에 가려져 있는 골격을 X-Ray로 본 양 떠들어 다니는 거지 같은 사람들의 단어 선택에서 나온 것이라 되새겨 볼 필요는 없다. 인생을 복권에 빗대어 말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만약 그 복권이 꽝이 없는 모든 사람이 당첨되는 그런 복권이라면 말은 달라진다. 그런데 어떤 인생은 “꽝” 혹은 “다음 기회에”라고 말하며 윤회사상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생이란 복권에는 “꽝”은 없다. 다만 ‘긁다 만 복권’이 존재할 뿐이다. 인생이란 복권같이 다 긁어 봐야 아는 일이다. 어느 멍청이가 복권을 긁다가 포기하겠는가. 그러나 많은 사람은 노력하지 않는다. 다 긁어 봤자 어차피 꽝일 것으로 생각한다. 위험한 생각이다. 영화 <October Sky>에서 제이크 질렌할이 연기한 토미 힉캠은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힘들고 어두운 삶 속에서 NASA에 들어가기까지 계속 그의 미래를 덮고 있는 100원짜리 하나로 긁어 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스크래치를 끝없이 벗기었고 결국 당첨되었다. 끝까지 긁어봐라.  결국 당첨되니까.
그렇다고 혹자(Tony Kim)는 미국에 있는 복권기계(거스름돈을 주지 않는)에 20달러를 넣어 놓고 20달러를 7불과 나머지 쓰레기통 행 종이 쪼가리들을 사는 멍청한 짓을 반복하지는 않겠지.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