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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Trek] 변신
맥코이는 눈을 떴다. 낯익은, 하지만 그의 방은 아닌 천장이 보인다. 그리고 역시 낯익은, 하지만 자신의 것은 아닌 고른 숨소리. 피부를 간지럽히는 보드라운 머리카락의 감촉. 눈을 뜨자 의식하지 못했던 감각들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듯했다. 맥코이는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시간은 여전히 새벽보다는 밤에 가깝다. 하지만 일단 의식이 깨어나고 안온했던 타인의 체온이 거북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다시 잠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멍하니 누워 상념에 항복하느니 의무실에 가서 일이나 하는 편이 낫다. 낯익은 온기의 주인은 그가 일어나 개켜뒀던 옷을 집어들고 소리 없이 욕실로 들어가는 동안 여전히 아기처럼 자고 있었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맥코이 못지않게 기척에 예민한 그가 저렇게 세상모르고 잘 정도면 아직도 함은 대부분 깊은 꿈나라 여행을 하고 있을 터였다. 씻고 대강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맥코이는 침대 옆에 서서 잠시 평온한 커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깨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손이 저절로 그의 목으로 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미지근한 체온, 그리고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주기적인 생명의 박동.
"....나 살아 있으니까 안심해."
커크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그의 손을 잡으며 웅얼거렸다. 맥코이는 잡힌 손은 내버려둔 채 다른 손을 들어 꽤 자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입가에 미미한 쓴웃음이 떠올랐다.
"깨워서 미안. 그냥 자." "넌 어디 가는데." "의무실에. 알잖냐. 나 한번 깨면 다시 못 자는 거."
커크는 불평하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잡은 손을 당기는 힘은 잠에 취한 사람답지 않게 강하다. 억지로 손을 빼낼 수도 있었지만 맥코이는 순순히 끌려가주었다. 커크가 침대에 앉은 그의 허리를 감으며 머리를 기대온다.
"그러지 말고 너도 자. 요즘 계속 제대로 못 잔 거 알아."
맥코이는 대꾸 없이 천천히 헝클어진 금빛 머리칼만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닿는 감촉은 부드럽고도 생생하다. 한창 때의 건강한 성인 남성의 왕성한 생명력이 가득 느껴지는 감촉이었다. 이러다 커크가 다시 잠들면 맥코이는 의무실로 갈 것을 둘 모두 안다. 그래도 더 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커크였고, 아무 말 없이 그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맥코이였다. 이윽고 커크의 팔에서 힘이 빠지자 맥코이는 조용히 일어서서 이불을 정돈해주었다. 쿼터를 나오며 돌아보자, 어둠과 별빛이 잠든 그 얼굴과 몸 위로 복잡한 꿈의 무늬를 수놓고 있었다.
"닥터 맥코이." "닥터 채플."
짤막한 호칭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채플의 둥근 이마와 엷게 주름진 눈가에 근심스런 기색이 얼핏 서렸다가 사라졌다. 그가 뜨거운 커피를 내밀며 물었다.
"아직 시프트 끝나려면 한참이에요.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니에요?" "한번 깨면 다시 잠을 잘 못 자서요."
맥코이는 대강 얼버무리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음식에는 그닥 신경쓰지 않는 채플답게 커피에서는 물질재생기 특유의 미묘한 맛이 났다. 아마 카페인이 잔뜩 들어 있으리라. 어차피 잠이 깨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맥코이는 기꺼이 감사 인사를 하고는 패드를 집어 훑어보기 시작했다. 지난 밤 그를 낙담하게 하고 결국 친구의 쿼터로 기어들어가게 만든 수치들은 그대로였다. 몇 시간 만에 바뀔 리가 없었지만. 맥코이는 패드를 내려놓고는 잠시 망설이다 물었다.
"메레디스 소위는 깨어 있습니까?" "응?"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채플이 고개를 쳐들었다.
"글쎄요, 12시 이후 들여다보지를 않아서. 지금 시간이면 수면중이겠죠." "네......." "사람들이 다 누구처럼 올빼미인 건 아니라서요. 환자가 이 시간에 깨어있으면 되겠어요?"
환자. 입안에 진작 목구멍으로 넘어간 커피의 쓴맛이 다시 고이는 것 같았다. 맥코이는 이번에도 웃음으로 얼버무리고는 발소리를 죽이며 의무실 안쪽의 입원실로 향했다. 진료실 끝의 문이 열리면 나타나는 짧은 복도, 보이지 않는 방역장이 나누고 있는 복도의 한쪽 끝은 격리구역이고 그 맞은편이 입원실이었다. 거대한 엔터프라이즈의 내부에서도 가장 조용하고 가장 외떨어진 구역이다. 그중 하나의 호출 버튼을 누르자 바로 문이 열렸다. 맥코이는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섰다.
"안 잤나?" "저도 닥터께 똑같은 질문을 드려야겠는데요."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는 미소지으며 손에 든 것을 치웠다. 맥코이는 한참만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뭉치처럼 보이는 것이 옛날 방식의 책임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지구의 옛날 방식으로 묶인. 가족들이 다 앤티크 광인 커크 덕에 구경은 한 적이 있었지만 맥코이 자신은 전혀 관심이 없는 물건이었기에 알아보는 것이 늦었다. 그는 벽에 붙은 패널에 나타난 바이탈 수치를 체크하고 여자의 다리를 덮고 있던 재생치료기를 열면서 말했다.
"책은 재미있나? 보기 드문 물건인데." "재미있어요. 함장님께서 선물로 주시더군요." "함장님이?" "예. 빌려 읽고는 돌려드리려고 했는데, 어차피 자기는 관심 없는 골동품이라면서." "답군."
커크는 전혀 관심없을 골동품을 그의 짐에 넣어준 사람은 아마도 어머니 위노나였으리라. 그런 물건을 남에게 덥석 주어버리는 것은 확실히 커크다웠다. 맥코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뭔가를 오래 들고 있는 것도 팔에 좋지 않은데."
여자의 평온한 얼굴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의사답지 않게 우유부단한 맥코이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맥코이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여자의 다리를 꼭꼭 감고 있던 붕대와 부목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부드럽고 얇은 젤에 묻어난 뼛조각이 툭툭 떨어졌다. 드러난 것은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외골격과 군데군데 구멍난 뼈를 통해 들여다보이는 분홍빛 근육과 혈관들이었다. 내골격을 지닌 인간인 맥코이로서는 이상을 머리로는 알아도 좀처럼 정서적으로 느끼기는 힘든 모습이다. 그러나 다름아닌 자신의 팔다리가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는 메레디스의 얼굴에도 동요의 빛이 떠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부서져가는 몸이 남의 것인 양, 완벽한 무관심이었다.
"통증은 어때?" "처방해주신 약이 좋아요. 훨씬 견딜 만 해졌어요." "다행이네." "네. 내일은 복귀할 수 있을까요?"
맥코이의 대답은 약간 느렸다.
"아마도. 하지만 그러려면 지금은 좀 자야 하지 않겠나?"
메레디스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겠습니다. 책도 거의 다 읽었으니까요."
맥코이는 헛기침을 하고는 새로 부목을 대고 윤활제와 보습 처치를 한 다음 새로운 붕대를 감았다. 복귀라. 메레디스가 일터로 복귀한 다음 다시 입원하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이주일? 열흘? 최근 그 간격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부서져가며 더 이상 근육을 지탱할 수 없는 사지의 뼈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장기를 감싸고 중추신경계를 보호하는 골격의 석화였다. 아직까지는 전신 보호대의 도움을 받으며 걸을 수도 있고, 주의만 한다면 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유예가 언제까지 가능할까?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1년보다는 짧으리라는 사실뿐이었다. 필요한 처치가 모두 끝나고도 맥코이는 머뭇거리다가 담요까지 덮어주고야 겨우 무거운 걸음을 떼놓았다. 외골격이 전신을 감싸고 있는 아스페라 종족은 감각으로 추위를 느끼지는 않기 때문에 완벽하게 불필요한 배려였다. 하지만 메레디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맥코이가 왜 그러는지 안다는 듯 인내심 깊게 기다려 주었을 뿐이다. 마치 습관이라도 된 것처럼 그는 문을 나서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입원실의 창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기에 이번에는 불 꺼진 방에 누운 메레디스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다.
퇴원 지시는 내려두었지만 오전 중에 맥코이는 과학부 대원들과 함께 수집한 미생물의 분류와 분석으로 바빠서 메레디스가 퇴원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오후에는 현재 함내에서 유행하는 전염성 눈병의 치료제를 배합하고 예방 지침을 전달했고, 밀렸던 입원 환자들의 차트를 정리했다. 메레디스의 것은 채플이 미리 해놓았기에 그가 더 손댈 일은 없었다. 오후 늦게 모든 일과를 끝내고 한숨 돌리고 있자니 스팍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맥코이는 한숨을 크게 쉬고는 그가 어제 부함장에게 제출했던 제안서가 든 패드를 들고는 일어섰다.
"피곤해 보이는군요, 닥터." "자네가 오늘 그 말 한 스물일곱번째 사람이야. 멀쩡하니까 1절만 하고 관둬."
스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맥코이는 머쓱함 대신 짜증을 느끼며 책상 맞은편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함장의 개인실 겸 과학부 주임의 집무실은 벌칸답게 삭막할 정도로 간소했다. 벽을 가득 메운 패널의 다채로운 디스플레이와 한쪽의 전면창을 제외하면 방안에 있는 가구라고는 책상과 의자 네 개, 수납장 하나뿐이다. 그는 접혀 수납장 뒤로 들어가 있는 의자의 끄트머리에 시선을 주면서 물었다.
"왜 부른 거야? 간단한 요청이었는데." "간단하지 않으니까요."
스팍은 콘솔을 두드려서 그래프와 수치 몇 개를 띄웠다. 맥코이는 잘 알아보기 힘든 그것들을 열없이 바라보았다.
"닥터가 요청한 대로 아스페라 종족의 DNA 분석 능력을 200% 이상 끌어올리려면 함의 메인 컴퓨터의 자원을 1% 이상 추가로 할당해야 합니다. 현재 메인 컴퓨터의 자원 중에서 상시 운영 없이 할당 가능하게 남은 자원은 20% 정도지만 그중 12%는 다시 비상시를 위한 여유분으로 남겨둬야 해요." "그럼 남은 건 8% 정도인가?"
맥코이는 놀랐다. 컴퓨터 자원이 그렇게 빠듯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스팍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8%도 전적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예정된 프로젝트들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간단하지 않은 문제라고 말한 겁니다. 닥터, 요청한 작업의 우선순위를 적절하게 평가한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만."
맥코이는 발칵 화를 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어렵지는 않았다. 그 역시 요청한 작업이 메레디스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었으니까.
"소위를 치료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스팍은 그를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이었다. 맥코이는 한숨을 내쉬며 등을 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어. DNA를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해 보는 건 모든 의료적 처치에 필요한 기반작업이야. 메레디스는 놓칠지도 모르겠지만," 맥코이는 침을 삼켰다. "아스페라 종족에게는 확실히 도움이 될 거야. 그들이 지금 가능한 모든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건 스팍 자네도 잘 알잖아." "중요한 일이지요. 고귀한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것이 엔터프라이즈의 우선적인 임무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참기 어려웠다. 맥코이는 분노에 찬 눈으로 스팍을 노려보았다. 스팍은 거의 냉담하기까지 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분노는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닥터. 임무의 우선순위를 평가하는 것은 지휘관으로서 내가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고, 그건 닥터 역시 의무주임으로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동정이나 공감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그게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지요. 닥터, 메레디스 소위에 대한 동정이 지금 자신에게 지나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만." "빌어먹을, 꼭 그렇게 초록피 냉혈한답게 말해야겠어? 안 그래도 네 피가 파충류처럼 차가운 건 잘 안다고!" "내 질문에 대답을 하기보다는 내 질문하는 태도를 문제삼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요." "내 우선순위 판단은 멀쩡해. 그리고 자네한테 요청한 건 현재 의료부 자원으로 해낼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추가작업이니까 염려할 필요 없어! 어떻게 할 거야?"
맥코이의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한참 미동도 없이 보던 스팍은 던져 뒀던 패드를 다시 집어들었다. 맥코이는 이마를 문지르면서 감정을 다스리려 애썼다.
"함장님과 의논이 필요하겠군요." "왜?" "현재 자원을 가지고 1%를 추가로 의료부에 배분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메인 컴퓨터의 자원 용량 자체를 늘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함선의 메인프레임 개수가 필요하고, 어차피 엔터프라이즈의 기술부만으로는 불가능한 작업이 될 겁니다." "그럼........." "함장님의 허가뿐 아니라 스타플릿 지부의 기술지원이 필요할 테니 최소 석 달 정도의 항해와 탐사 계획을 재설정해야겠지요. 지부가 있을 만한 대규모 정착지로 가면 아마 의료부 인원 역시 충원할 수 있을 겁니다."
생각보다 훨씬 커진 일에 맥코이는 멈칫했다. 처음에 요청할 때는 이럴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스팍은 이미 콘솔을 두드리고 있었다. 곧 통신이 연결되고 커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크입니다. "함장님. 스팍입니다. 의논드려야 할 일이 있어 닥터 맥코이와 함께 뵙고 싶은데, 어디 계십니까?" -뭐야? 둘 다 지금까지 일하는 거야? "Affirmitive."
맥코이는 그제서야 시간을 보았다. 알파 시프트가 끝난 지 벌써 한 시간 정도 지난 후였다. 커크가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저녁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겠지? "저는 식전입니다. 닥터는,"
스팍이 그를 흘끔 보았다. 맥코이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나도 아직 안 먹었어." -그럼 내 쿼터로 와. 몇 가지 만들었는데 마침 잘됐네. 스카티가 가져온 와인도 있어. 스팍 자네한테는 엄청난 샐러드를 만들어 줄게. "알겠습니다."
엔터프라이즈가 다시 출항한 이후 커크는 요리에 취미를 붙여 곧잘 이것저것 만들곤 했다. 꽤 솜씨가 좋아서 맥코이도 여러 번 얻어먹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서야 시장기가 느껴졌다. 무거운 피로 또한. 방을 나서 리프트까지 걷다가 그는 불쑥 말했다.
"화내서 미안해."
스팍은 그를 쳐다보다니 뚱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그들은 함장의 개인실까지 남은 거리를 침묵 속에서 걸어갔다.
음식은 훌륭했다. 다진 고기를 넣고 바삭하게 구워내 치즈를 뿌린 가지, 약간 새콤한 맛이 도는 소스를 곁들이고 층층이 치즈와 계란으로 감싼 야채를 끼워넣은 라자냐, 흰살 생선을 넣은 담백한 수프, 그리고 채식주의자 벌칸을 위해 토마토 마리네이드와 식초가 주재료인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 스팍과 맥코이가 함장의 쿼터에 들어섰을 때 커크와 스카티는 이미 식사를 어느 정도 끝내고 느긋하게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스팍이 와인 병에 시선을 보내자 커크가 빙그레 웃었다. "딱 한 잔만이야, 미스터 스팍." 아무리 함선이 순항중이라도 우주에서는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함장과 기술부 주임이 취해 있을 수는 없다. 맥코이의 눈에도 스캇은 술보다는 분위기에 취한 듯 보였다.
"메레디스 소위가 돌아왔더라구."
커크가 스팍이 건넨 보고서를 읽는 사이 스캇이 꺼낸 말에 맥코이는 음식을 한 입 가득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고 피곤해 시장함도 잊고 있었지만, 막상 방에 가득한 음식 냄새를 맡으니 허기가 몰려들어 그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요리를 입에 쓸어넣었다. 옆에 앉은 스팍은 맥코이보다는 훨씬 차분하고 절제된 태도였지만 커다란 보울에 가득했던 채소가 줄어드는 속도는 그 못지않았다. 지구식 드레싱이 꽤 입에 잘 맞는 모양이었다. 맥코이는 음식을 힘겹게 삼키고는 메이는 가슴을 와인으로 쓸어내리며 서둘러 물었다.
"어떻던가?" "새로운 작업을 맡겼어. 저번까지 맡아 하던 건 입원했을 때 끝났거든."
맥코이는 '이번에도 마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말을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음식은 분명 위장으로 내려갔는데 명치 끝이 답답해지는 느낌에 그는 잔에 가득한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마침 읽기를 끝내고 눈을 들던 커크가 그걸 보고는 눈썹을 슬쩍 올렸다.
"조심해, 본즈. 그 와인 독한 거야."
이까짓 포도주스 한 잔에 취하지는 않는다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피로 탓인지 확 번져가는 알싸한 취기가 꽤 셌다. 맥코이는 말없이 벌개진 얼굴을 도로 접시에 박았다. 스캇이 붉은 액체가 바닥에 얇게 깔린 자신의 잔을 아쉽게 흔들며 툭 뱉었다.
"안됐어, 그 아가씨. 성실하기로는 기술부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는데." "......." "....물어도 되려나? 얼마나 남았을지....." "스카티."
커크가 짧게 주의를 주었다. 스캇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얄팍한 호기심에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소위의 병세에 대해 좀 자세히 알면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더 많지 않을까 싶어서." "소위는 그걸 바라지 않을 거야. 어떤 식으로든 다르게 대우받는 것이 싫어서 이름까지 감춘 사람이 아닌가. 그냥 건강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하게. 어렵겠나?" "제가 어려울 거야 뭐 있겠습니까. 부함장님이 가져오신 건 뭡니까?" "자네도 알아야 할 일."
커크는 패드를 집어들어 스캇에게 건넸다.
"항해 계획 수정이요?" "그래. 그것뿐만이 아니고. 계속 읽어봐. 아무래도 우리 항법사와 조타수도 불러야겠는데, 대접할 만한 것이 없군. 본즈, 다 먹었어? 재촉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이만 회의실로 옮기지. 오늘밤 내로 업무 분담을 끝내면 좋겠어." "난 괜찮아. 가자구."
스팍은 어느새 샐러드 보울을 다 비우고 그릇 옆에 단정하게 포크를 놓아두었다. 맥코이는 음식이 남은 접시에 포크를 대강 던지고는 의자에서 내려서다 휘청거렸다. 피로와 취기 때문에 순간 다리가 풀렸던 것이다. 다행히 빈 접시들을 세척기에 밀어넣느라 등을 돌리고 있던 커크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빤히 쳐다보는 스캇에게 그는 급히 손가락을 입술에 대 보였다. '지금은 말하지 마.' 납득했는지 아니면 그저 자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스캇은 입을 다물었고 자료들을 챙겨들고 문 옆에 서 있던 스팍 역시 침묵을 지켰다. 저놈의 벌칸은 도무지 꿍꿍이를 모르겠어. 맥코이는 속으로 툴툴대며 쿼터를 나서는 커크의 뒤를 따랐다. 함의 지휘관들이 이렇게 한데 모이는 일은 드물었기에 지나가는 승무원들이 의아한 기색으로 인사를 건넸다. 탐사 계획을 수정하고 새로운 일정에 맞춰 업무를 조정하려면 그들 모두 내일부터 정신없이 바빠질 것이다. 함교 옆 회의실에서 스팍이 자료를 늘어놓는 사이 스캇은 들고 온 애플 소다를 잔 여섯 개에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출을 받은 술루와 체콥이 들어섰다. 둘 다 근무복 차림은 아니었고, 특히 술루는 온실에 있다 온 것인지 목에 수건을 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커크는 미안한 듯 웃었다.
"쉬는 시간에 불러 미안하네. 되도록 빨리 끝내지. 자세한 건 미스터 스팍이 제출한 계획서를 보도록."
맥코이는 몰려드는 잠을 쫓으려 소다를 홀짝거리며 패드를 읽는 둘을 지켜보았다. 체콥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고 술루는 이맛살을 잔뜩 찡그렸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술루였다.
"제나 대위가 낙담하겠군요. 현재 식물원에서 진행중인 16번 프로젝트는 폐기해야 할 텐데요." "연기할 수는 없나?" "제가 담당이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대위가 연구하고 있는 미생물은 장시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아직 못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현지에서 보충해야 하는데 이 정도로 멀리 돌아가는 일정이라면 나중에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겠죠."
커크는 흘끔 스팍을 보았다. 스팍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루의 말을 받아 말했다.
"나중에 다시 정리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만, 현재 진행중인 다섯 개 프로젝트 전부 어느 정도 차질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의 손상은 없을 것이라 예상합니다만."
맥코이는 잘 넘어가던 소다가 목구멍에서 걸리는 느낌이었다. 스팍이 커크가 아닌 그에게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아마도 피해망상이겠지만. 체콥이 고개를 갸웃했다.
"프로젝트들이 40일 안에는 끝날 텐데요. 그때 계획을 수정하면 안 되겠습니까? 미스터 스팍은-" 체콥은 다시 패드를 들여다보았다. "2일 내에 항로 수정 계산을 마치라고 하셨지만 너무 촉박합니다. 근방의 공역도 수정된 항로도 아직 항법 지도가 불완전한 부분이 많은데, 착오라도 생긴다면-" "함선에 치명적인 오류가 일어날 확률은 낮네, 미스터 체콥. 그리고 40일은 너무 늦어. 되도록 빨리 스타플릿의 기술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지나 정착지로 가야 하네." "왜요?" "메레디스 소위."
커크가 대답했다. 짤막한 말이었지만 체콥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넘어간 소다가 이번에는 식도 끝에 걸린 느낌이다. 역시 그의 착각이겠지만. 술루가 말했다.
"바빠지겠군요. 24시간만 더 주시면 좋겠습니다. 미스터 체콥과 상의해서 3일 뒤 22시까지 항로 수정 계획 초안을 제출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나와 미스터 스팍은 초안이 나올 때까지 스타플릿 본부에 계획 변경을 통보하고 필요한 지원요청을 할 테니까. 스카티, 보안부와 협의할 수 있겠나?" "일주일 전 분기 점검을 마쳤기 때문에 당분간 기관실에 큰일은 없습니다. 기술부 업무 재조정은 제가 전담하지요." "고마워. 그럼 다음은......."
그들은 세 시간이 넘게 현재 진행중인 프로젝트들을 가장 손실이 없는 방식으로 연기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회의가 끝났을 때는 거의 자정이 가까웠다. 커크는 뻣뻣해진 목을 돌리며 탁자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소다 병을 집어들었다.
"모두들 수고 많았어. 내일 아침 보지."
인사를 하고 분분히 흩어져가는 사람들을 보며 맥코이도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쓰러지고 싶을 정도로 피곤했다. 하지만 커크가 말했다.
"본즈, 나 좀 보지. 쿼터로 가자."
맥코이는 잠시 버텨볼까 생각했다. 그냥 피곤하다고, 내일 이야기하자고 말하고 그의 쿼터로 가버리면 된다. 커크는 굳이 붙잡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이라는 말이 공허한 줄 알면서도. 하지만 맥코이는 순순히 따라나섰다. 정 힘들면 거기서 자버리지 뭐. 커크의 방에서 맥코이는 긴 소파에 신발만 벗어던지고는 드러누웠다. 문득 아카데미 기숙사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 그가 누운 함장실의 푹신한 소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낡고 쿠션이 죽어 곳곳이 딱딱했던 소파. 청소 로봇이 있었지만 그와 커크가 매일 그 위에서 끊임없이 뭔가를 먹어대는 바람에 늘 더러웠던 그 소파에서 참 많은 시간을 보냈더랬다. 조그만 부엌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거운 머리를 힘겹게 들자 아까 급히 나가느라 대강 놔두었던 남은 음식을 잘 싸서 냉장고에 집어넣는 커크의 모습이 보였다. 흐트러진 포크 하나, 먼지 앉은 접시 하나 없이 깔끔한 부엌과 식탁이 낯설다. 정리를 마친 커크가 거실로 와서 그를 들여다보며 웃었다.
"침대에서 편하게 자." "내 방 가서 샤워하고 잘 거야."
거의 감긴 눈으로 맥코이는 허세를 부렸다. 커크가 피식거리며 테이블에 소다 병을 놓았다. 특수용기에 담긴 음료는 아직도 적당히 차갑고 스파클링도 신선했다. 맥코이는 누운 채로 한 모금 들이키며 물었다.
"왜 보자고 했어?" "사실 용건 없어. 그냥 자고 가라고." "........" "혼자 있으면 또 몇 시간 기절했다가 새벽에 깨서 튀어나갈 거잖아. 오늘밤은 편하게 자."
맥코이는 잠시 대답을 궁리하다가 그만 소다를 흘리고 말았다.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던 소파에 지저분하게 튄 음료수 자국을 보자 왠지 기분이 나아졌다. 그는 벌떡 일어나 맞은편에 앉은 커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의사는 나야, 꼬마. 내가 요새 맥을 못 춘다고 감히 네가 의사 노릇 하겠다는 거야? 꿈 깨."
친구의 낄낄거림을 들으며 맥코이는 서랍을 뒤져 새 속옷과 티셔츠를 꺼내 욕실로 향했다. 커크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예전 같았으면 너 왜 그러냐고 온 사방에 호들갑을 떨면서 방방 뛰었을 텐데, 정말 많이 차분해졌다. 커크의 눈에 비치는 그 역시 나이를 먹었으리라. 뿌듯한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이 스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 열흘은 영혼을 우주 어딘가에 흘린 것처럼 정신없이 지나갔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을 죄다 중단해야 했기에 몇몇 승무원들은 불평을 터뜨렸지만 대다수는 아무 내색 없이 열심히 일했다. 불평의 소리는 기묘한 침묵의 공조 속에 곧 사그라들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기에 맥코이는 특별히 함의 상담의인 닥터 린을 불러 메레디스를 살펴줄 것을 부탁했지만 안도리안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메레디스 소위가 먼저 제게 오지 않는 한 제가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습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소위가 상담을 원하지 않습니까?" "관심 없어 보이더군요. 그보다 상담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의료부 주임의 상담 일정이 한참 밀렸는데요."
맥코이는 어색하게 웃고는 도망쳤다. 메레디스와 함께 일하는 대원들은 의아해했지만, 맥코이는 다름아닌 그녀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북새통에 메레디스가 무관심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병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이리라. 맥코이는 종종 부서져가는 팔다리를 보던 메레디스의 눈을 떠올리곤 했다. 다가오는 죽음조차 흔들 수 없는 평정. 죽음도 삶도 그의 마음을 차지할 수 없다면 메레디스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왜 그는 삶의 마지막 시간을 고향에서 수천 광년 떨어진, 멀고 낯선 연합의 배에서 보내기를 선택했을까? 사람들은 맥코이가 의사라는 이유로 죽음에 대해 잘 알 거라고 속단하곤 했다. 그러나 수많은 질병과 사고, 죽음을 보면서 맥코이가 얻은 유일한 깨달음이라면, 삶의 숫자만큼 죽음도 무한하다는 것이었다. 육신이 기능을 정지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우주에 존재하는 항성만큼 많은 그 죽음들에는 공통점이라고는 없었다. 모든 죽음은 개별적이며, 단 한 번이며, 되풀이되는 만큼 새롭다. 그는 아직도 1년 전에 겪은 커크의 죽음을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콱 막힌 것처럼 답답해지곤 했다.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는 새로운 죽음들 가운데서도 각별했던 하나. 스트레스가 심해질 때면 커크의 침대로 기어들어가 여섯 살 어린 친구를 안고 자는 습관이 생긴 것도 그 이후였다. 자다가 문득 눈이 떠질 때면 경동맥의 맥박이나 심장 박동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되는 강박도 그 사건 때문에 생긴 것이다. 기묘하다면 기묘하게도, 이전에 종종 스트레스성 불면을 호소하며 그의 침대로 들어오던 커크는 죽음과 부활을 기점으로 더 이상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맥코이에게는 그것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맞춰지는 세계의 균형처럼 느껴졌다. 메레디스.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는 자유를 누리는 그녀는, 자신의 그것이 철저히 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우는 행위가 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종족 전체가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는 유전병에 사멸해가는 아스페라, 죽어가는 사회를 탈출한 그녀는 행성연합으로 와서 우주선에 탔다. 맥코이는 함에서 그녀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었지만 메레디스가 가족을 입에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일부러 지구 식의 가명을 택한 그녀의 본명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없다. 엔터프라이즈에 승선할 때 메레디스는 스타플릿에서 마련해준 표준 보급품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의 소지품 중 유일하게 개성을 담고 있는 것은 맥코이에게 건넨 차트뿐이었다. 두 자릿수의 병원 이름과 세 자릿수에 가까운 의사들의 서명이 들어 있는, 맥코이에게는 그만큼의 좌절의 무게로 느껴졌던 기록들. 메레디스가 띠고 있던 무관심한 사교용 미소는 마지막 남은 개성과 그 자신의 관계를 완벽하게 부정하는 것 같았다. 항로를 수정하고 출발한 지 14일째, 엔터프라이즈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연합의 법률에 따르면 행성에 위치한 정착지로 분류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유인 기지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총 거주인구 2천 명 남짓한 소도시였다. 커크와 스팍은 엔터프라이즈가 요크타운이나 안도라 같은 대규모의 정착지로 많은 시간을 들여 돌아가기보다는, 스타플릿에서 필요한 인력과 장비를 장기출장의 형태로 이 먼 변방 행성까지 보내 주도록 샌프란시스코 본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함선의 메인컴퓨터를 개조하고 처리 용량을 늘리는 작업은 공전궤도상에 위치한 우주항에서 약 7주에 걸쳐 이뤄질 예정이었다. 그동안 스캇을 비롯한 엔터프라이즈의 기술부와 멀리서 출장 온 기술인력은 바쁘겠지만 나머지 대원들은 돌아가며 상당히 긴 휴가를 누리게 될 것이다. 메레디스는 단 하루의 휴가도 신청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대원들 중 하나였다. 그가 개수 작업에 쏟는 열렬한 관심은 엔지니어로서 갖는 순수한 직업적 호기심처럼 보였다. 맥코이는 개수된 컴퓨터를 가지고 그가 하려는 작업에 대해 메레디스가 알기나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조그맣고 누추하기까지 한 우주항이었지만 그래도 정박과 새로운 환경에 들뜬 대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훨씬 한적해진 배의 복도를 느릿느릿 걷던 맥코이는 과학부의 연구실에서 뜻밖의 사람을 발견했다. 의아해진 그는 작은 방 안으로 고개를 디밀고 물었다.
"미스터 술루, 여기서 뭐해? 함교 인원은 오늘부터 휴가라고 들었는데?"
모니터에 뜬 자료를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던 술루는 움찔해서 돌아보았다. 동시에 커다란 디스플레이가 꺼졌다. 하지만 술루의 기민한 동작도 큼지막한 글자들이 맥코이의 시선에 잡히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마침 하선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자료를 좀 찾아보던 중이었어요." "........그래? 내가 도와줄 일은 없고?" "괜찮습니다. 그럼 이만."
맥코이는 서둘러 그를 지나쳐 연구실을 빠져나가는 술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메레디스의 불치병에 대해 궁금해할 이유가 뭘까? 맥코이가 알기로 술루는 메레디스와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눈 적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의 접점이 될 만한 것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어떤 것도 막연한 추측일 뿐 이렇다 싶은 것이 없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맥코이는 휴가 인원들의 하선 절차를 알리는 선내 방송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걷기 시작했다. 전혀 그럴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역시 오늘부터 휴가였다.
"지루하지 않냐?"
신기한 듯 묻는 맥코이의 어조에 커크는 모니터 너머로 슬쩍 눈썹만 올려 보였다. 저 버릇도 전에는 못 본 것 같은데. 스팍한테 배운 건가. 맥코이는 아마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죽어 있었던' 경험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커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생각해 보았다. 이번이 백만 번째쯤 될 것이다. 커크는 그저 아주 깊게 잠들었다 깬 것 같았다고만 말했지만 맥코이는 왠지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이 더 있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머릿속 탐구는 백만 한 번째의 사고실험을 기약하고 흐지부지 끝났다. 맥코이는 넓은 창에서 비쳐든 항성의 빛이 커크의 머릿결에 부딪쳐 낯익은 색조로 부서지는 반짝임에 잠시 눈을 빼앗겼다. 커크가 읽던 자료로 다시 고개를 숙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루하십니까, 닥터 맥코이?" "나야 집에 있는 거 좋아하잖아. 착륙만 하면 못 나가서 안달이던 녀석이 며칠째 꼼짝 않고 있으니까 별일이다 싶어서." "나가봐야 재밌는 것도 없으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전체 거주자 숫자가 엔터프라이즈 승무원 숫자의 두 배보다 적은 도시에는 오랜만에 배를 벗어난 이들을 즐겁게 해줄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주민들이 가족과 함께 한 잔 하러 오는 펍이나 바는 자정이면 문을 닫았고 딱 하나 있는 클럽의 선곡 센스는 미묘했다. 미개척지를 각별히 사랑하는 대원들은 탐험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맥코이는 정착지를 둘러싼 흙투성이 황무지를 보면서 도시만큼이나 자연도 낡고 우중충해 보이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커크의 경우에는 굳이 엔터프라이즈를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사람들이 귀찮게 하던?"
환영 파티를 베풀어 주었던 기지 사령관이 엔터프라이즈의 함장과 부함장에게 보여준 엄청난 관심은 커크와 스팍이 지상으로 내려갔을 때 주민들의 반응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우주항의 바 순례를 마친 커크는 엔터프라이즈로 돌아와 개인실에 틀어박혔고 스팍은 3주 일정으로 떠나는 무주지 트레킹 대열에 합류했다. 연합의 영웅을 불러내고 싶어하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댄 핑계는 개수 작업을 감독한다는 것이었지만 어차피 스캇이 있었으니 함장이 할 일은 거의 없었다. 기관실과 중앙 컴퓨터실에 가는 대신 커크는 쿼터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보고서를 쓰고 항해일지를 정리했다. 맥코이가 생전 볼 일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해보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커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맥코이는 손을 깍지 껴 머리 뒤를 받친 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마침내 커크가 항복한다는 듯이 컴퓨터를 껐다. 맥코이가 길게 드러누운 소파로 온 그는 옆자리에 앉아 맥코이의 팔 안으로 파고들었다. 꼬물거리며 자세를 조정한 커크는 마침내 만족했다는 표정으로 맥코이의 어깨 위에 턱을 얹고 웅얼거렸다.
"좋아, 닥터. 원하는 게 뭐야?" "임사체험 이야기는 어때?" "별거 없어. 말했잖아. 좀 길게 잠들었던 기분이라고. 꿈도 많이 꿨는데 지금은 기억도 안 나."
살이 빠졌나. 품에 딱 맞던 어깨가 지금은 약간 남는다. 맥코이는 기분 좋게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기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 죽었다 살아난 후는?" "재활이 끔찍했어." "그거 말고." ".........." "칸 사건 후로 너는......... 그래. 내가 알던 말썽꾸러기에서 뭔가가 빠져버린 것 같아. 정말 괜찮은 거야?"
아아, 결국은 말해버리고 말았다. 닥터는 안 해도 될 걱정까지 사서 하는 게 문제예요. 언젠가 우후라가 했던 신랄한 평가를 떠올리며 맥코이는 대답을 기다렸다. 당장 일어나서 튀어나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커크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의 턱 밑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도 달라진 점이다.
"철 좀 들라며 윽박지르던 때는 언제고." "임마, 그것도 천천히 해야지. 갑자기 이렇게 변해버리면 나는 어떻게 쫓아가라는 거야. 넌 어째 철이 들어도 눈을 못 떼게 하냐." "쫓아올 필요 없어."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맥코이는 커크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동그란 정수리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대신 커크는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짚었다. 칸 사건으로 입원했던 시절부터 맥코이가 종종 하던 동작이었다.
"난 여기 있을 거야. 어디 안 가. 약속할게.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
무언가 목 안쪽에서 울컷 치솟는다. 맥코이는 팔에 힘을 넣어 커크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런 약속이 부질없음은 그도 커크도 안다. 그럼에도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1년 전, 싸늘해진 커크를 보았을 때부터 가슴 한 켠에 휑하니 뚫렸던 구멍이 아주 잠시나마 데워진 듯했다. 하지만 이내 맥코이는 품 안의 몸을 떠밀었다.
"야, 떨어져. 덩치도 산만한 녀석이 징그럽게."
너무하잖아. 밤마다 외롭다고 내 침대로 기어들어오던 사람은 어디의 누구였더라. 짓궂게 툴툴대는 커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맥코이는 오랜만에 예전처럼 웃었다.
사건은 개수 작업이 후반으로 접어들 때쯤 터졌다. 아스페라 종족의 DNA와 유전병의 심화 연구를 위한 준비는 휴가 첫 주에 끝났다. 그후로 맥코이는 내내 함장 쿼터에서 뒹굴다가 그것도 지겨워져서 연합의 통합의료시스템에 저장된 자료를 몽땅 다운로드받아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커크는 결재 서명을 해주면서 두 번 다시 자신을 일중독자라고 부르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맥코이는 패드를 받아들고는 커크의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트레킹을 떠났던 대원들은 예정을 이틀 넘겨 다 죽어가는 얼굴이 되어 귀환했다. 그들 중 유일하게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온 스팍은 옷을 갈아입자마자 맥코이의 작업에 참여했다. 낄낄거리며 여행은 어땠느냐 묻는 맥코이에게 벌칸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인간의 평균 체력으로는 다소 힘든 코스였나 봅니다." 스캇은 모처럼 인력과 장비를 아낌없이 지원받는 김에 평소 손보고 싶었던 부분을 몽땅 고치겠다고 기세를 올리고 있었고 메레디스를 비롯한 기술부 대원들은 열성적으로 동참했다. 그래서 맥코이마저 정해진 진료 시간 외에는 메레디스를 보기가 힘들었고 요즘 몸 상태가 어떠냐는 가벼운 잡담도 건넬 시간이 없었다. 환영받지 못한 손님이 찾아온 것은 그렇게 만사가 평화롭고 고요할 때였다. 여느 때처럼 의무실에서 자료의 색인과 주석 작업을 하고 있던 맥코이에게 통신이 들어왔다. 스캇이었다.
-닥터. 지금 당장 57번 덱으로 와줘. "왜? 누가 다쳤나?" -그건 아니고...... 직접 와서 봐. ��리 와줘. 당장.
엔터프라이즈가 관련된 일이 아니면 만사 태평하던 기술부 주임의 목소리에 실린 다급함은 맥코이까지 덩달아 긴장하게 만들었다. 스캇은 사고 상황은 아니라 말했지만 맥코이는 진료가방을 챙겨들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메레디스 뿐이었다. 병세가 점점 악화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전신 골절이 일어날 수 있었다. 서두르는 맥코이의 발 밑에서 철제 구름다리가 쿵쾅거리는 소음을 냈다. 온통 붉은 셔츠들 사이에 잘못 튄 잉크처럼 보이는 노란 셔츠를 입은 두 사람이 그를 돌아보았다. 난처한 듯 눈썹을 축 늘어뜨린 체콥과 가면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술루였다. 의아해져서 몰려든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가니 맨 앞쪽에서 애매한 표정으로 난간에 기대 서 있던 스캇이 그를 보고 반색하며 맞았다.
"아, 닥터!"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던 맥코이는 그의 앞에 있는 무중력 보조의자를 보고는 흠칫해서 입을 다물었다. 메레디스는 멀찍이, 구름다리의 거의 끝에 서 있었다. 뒤에 난간만 없었다면 더욱 멀리 물러났을 듯했다. 맥코이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두려운 것을 보는 것처럼 얼어붙은 눈빛이 보조의자에 앉은 남자에게 못박혀 있었다. 아스페라 종족은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크다. 천천히 돈 보조의자에 앉은 아스페라 남성을 본 맥코이의 첫인상은 웅장한 폐허였다. 강건하게 전신을 떠받쳐야 할 골격 곳곳에 금이 가고, 구멍이 뚫리고, 바스러지는 틈새로 의지할 곳을 잃은 근육과 혈관이 흐물거리는 덩어리가 되어 무너져내렸다. 여기저기 붕대가 감겨 끔찍한 모습을 감추고 있었으나 신체구조상 어쩔 수 없이 드러난 곳에서 붕대 아래의 여린 조직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있었다. 골격이 조각나며 노출된 조직은 아무리 보습을 하고 윤활제를 발라도 흐르는 시간을 버텨낼 수는 없다. 수분을 빼앗기고 공기 중에 떠도는 각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살점은 검게 변색되며 쪼그라들면서 썩어갔다. 장대한 체구만큼 더해지는 처참함이었다.
"이 배의 의료주임이신가 보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OOOOO이라 합니다."
맥코이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게 명징하고 깊었다. 하지만 맥코이는 그의 입술이 전혀 움직이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입 아래 목에는 손가락 한 마디만한 지름의 구멍이 뚫렸고 거기서 뻗어나온 불투명한 관이 보조의자에 설치된 갖가지 의료기기들의 미로 속으로 사라졌다. 이미 성대는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상실했고 기계가 대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맥코이는 말없이 눈을 올려 메레디스를 보았다. 잿빛 골격으로 감싸인, 미세한 표정을 읽어내기 어려운 아스페라 인의 눈이 그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맥코이는 남자에게 말했다.
"누구십니까? 여긴 어떻게 오셨지요?" "저는 연합 통합의료원의 뉴 칼세도니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저희 종족은-" 그는 붕대에 감긴 손을 들어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재앙을 겪고 있고, 저는 연합의 조력을 얻어 저희 종족을 구할 방도를 연구하고 있지요. 엔터프라이즈에 제 동족이 승선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저 분과 닥터 맥코이, 두 분께 요청드리고 싶은 것도 있구요."
이 깜찍한 함장 새끼가. 맥코이는 이를 갈았다. 나한테 말도 없이 이런 요망한 수작을 꾸몄다 이거지. 낯선 남자에게 승선 허가를 내주었을 커크는 갑자기 일이 있다고 외출하고 없었다. 맥코이는 통신기를 부러뜨리고 싶은 것처럼 거친 동작으로 꺼내어 통신을 연결했다. 함장과 한통속이 되어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부함장에게였다.
-스팍입니다. "스팍? 당장 내려와. 와서 뭔 생각으로 이 난장판을 만들었는지 해명 좀 해 보겠어?" -의미를 모르겠군요, 닥터. "무슨 생각으로 내 환자와 관련된 일을 내게 말도 없이 진행했느냐고! 당장 기관실로 와!" "닥터 맥코이."
맥코이는 갑자기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그의 앞에 선 사람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스터 술루?" "닥터. 함장님이나 부함장님은 이 일을 모르십니다. 이분을 무단으로 배에 들여놓은 것은 저니까요."
술루의 심상찮은 태도에 기댄 난간에서 등을 떼던 스캇의 입이 딱 벌어졌다. 맥코이는 통신기 너머에서 그를 부르는 스팍의 목소리에 대꾸도 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져 술루의 단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휘관의 허가 없는 무단 승선은 상황에 따라서는 즉결 처분까지도 원칙적으로 가능한 중범죄다. 정박했을 때 역시 예외는 아니다. 무단 승선을 원조한 것 역시 무거운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성실한 원칙주의자 술루가. 리프트 문이 열리더니 스팍과 우후라가 나타났다. 스팍은 평소처럼 무표정했으나 걸음이 빨랐고 그 못지않게 성큼성큼 걷는 우후라는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허둥거리던 스캇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몰려든 구경꾼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연신 돌아보며 흩어져 가는 사람들 사이로 다가온 우후라가 술루의 팔을 잡으며 분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엉뚱한 짓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잖아, 히카루." "......." "닥터. 우후라 대위에게 설명을 들었습니다. 여기 계신 닥터 OOOOO-맥코이는 스팍이 어떻게 그 이름을 발음하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는 어제 함장님께 승선 허가를 요청했다더군요. 메레디스 소위를 만나고 싶다는 용건으로요. 함장님은 소위에게 물었고, 소위가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향을 밝히자 승선을 불허했습니다. 그러나 닥터 OOOOO는 물러서지 않았고 함에 통신을 넣어 소위와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지요. 그 통신을 수신한 사람이 우후라 대위였고 대위는 함장님의 지시대로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통신을 우연히 들은 술루 대위가 관심을 보였고, 우후라 대위는 이상한 생각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결국엔 무용한 충고가 되었지만."
스팍은 말을 맺으며 술루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돌렸다. 술루는 굳은 얼굴로 아랫입술만 깨문 채 말이 없었다. 물고기처럼 입만 뻐끔거리던 스캇이 물었다.
"미스터 술루. 왜 말도 안되는 짓을 했어?" "......." "허, 참......."
맥코이는 뭐라 할 말을 찾을 수도 없었다. 고집 센 모양으로 다물린 술루의 입술 위로 문득 이전에 본 광경이 겹쳐졌다. 혼자서 메레디스의 병에 대해 찾아보고 있던 뒷모습. 이상하게 메레디스도, 이름을 발음하기 힘든 의사도 아무 말이 없었다. 기묘한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스팍이었다.
"미스터 술루." "......." "내가 습득한 정보가 정확하다면, 귀관의 딸 드모라는 유전적 소인이 큰 골격계 질환으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지."
술루는 불똥을 맞은 뱀처럼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맥코이는 움찔했다. 그가 이전까지 술루에게서 본 적이 없던 격렬한 눈빛이었다.
"제 딸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정말인가? 그럼 이런 무리한 일을 벌인 동기는 뭐지?" "부함장님!" "저기, 이봐요."
스캇이 삽시간에 험악해진 공기를 휘젓듯 손을 흔들며 끼어들었다. 멍하니 섰던 맥코이는 그제야 그들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의식했다. 흩어진 사람들이 기관실 곳곳에서 빼끔히 눈을 내밀고 이쪽을 흘끔대고 있었다.
"말이 길어질 듯하니 어디든 가서 얘기합시다." "그렇게 하지. 스팍."
맥코이의 부름에 스팍이 돌아보았다.
"들어가서 얘기하자구. 여긴 너무 노출되어 있어. 그리고 짐도 부르는 편이 낫겠어."
스팍이 고개를 끄덕이자 스캇이 앞장서 그들을 기관실 한쪽에 붙은 연구실 겸 제어실로 인도했다. 머뭇거리던 메레디스는 맥코이의 시선을 받고는 금속 의족의 둔한 울림으로 그의 곁을 지나 일행을 따라갔다. 여전히 감정을 찾아볼 수 없는 가면 같은 얼굴이었다. 맥코이는 맨 뒤에서 걸음을 옮기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스캇이 기관실에서 밤샘할 일이 있을 때 종종 사용한다는 연구실은 비좁았다. 아스페라인 두 명이 들어가니 남은 공간이 거의 없어서, 맥코이와 술루가 몸을 구겨넣은 후 스팍과 스캇은 문을 열어두고 바깥에 서야 했다. 맥코이는 잽싸게 술루와 스팍 사이에 끼여들어 대화를 차단했다. 무단 승선에 대한 처분은 커크의 결정이지만 맥코이 역시 한 마디 해야 할 터였고, 그는 커크가 오기 전까지는 어떤 식으로든 스팍이 상황을 스팍의 방식대로 정리해 버리기를 원치 않았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 보조의자와 금속 의지가 여기저기 부딪치는 소리로 방은 꽤 시끄러웠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에 분위기는 숨 막히게 무거웠다. 우후라는 복작거리는 연구실을 보더니 체콥을 데리고 떠났다. 체콥은 끌려가는 새끼양처럼 처량한 눈으로 술루를 자꾸 돌아보았지만 우후라는 단호한 목동처럼 그를 내몰았다. 마침내 방이 조용해졌을 때 스팍은 통신기를 꺼내들었다. 계속 신호음만 갈 뿐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지만 스팍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커크입니다. "함장님? 스팍입니다." -아, 젠장, 스팍. 자넨 꼭 이런 때만 골라 연락해야겠어?
배경으로 시끄러운 음악이 들리는 걸 보니 클럽인 모양이었다. 웬일이지, 맥코이는 생각했으나 끼여들지는 않았다. 스팍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적인 시간을 방해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함장님께서 아셔야 할 사건이 발생했는지라." -사건? "네. 자세한 사항은 오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가지.
스팍이 통신기를 갈무리하자 숨막히는 고요가 다시 내려앉았다. 손을 넣어 휘저으면 만져질 것 같은 끈적한 질감의 침묵. 스팍은 무표정하게 맞은편 벽만 바라보았고 스캇은 초조한 얼굴로 연신 문 안쪽을 흘끔거렸다. 맥코이는 입술을 짓씹으며 지금 말을 꺼내는 것이 현명한 일일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가 마음을 정하기 전 먼저 아스페라인 의사가 묵직한 기계음으로 침묵을 깨뜨렸다.
"메레디스 소위." "........." "그쪽을 선호하는 것 같으니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우리의 이름과 언어를 두고 이렇게 번역기로 말을 나누는 것이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요. 소위, 나를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내가 일하는 곳으로 와 주세요. 지구의 환경도 우리에게 호의적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만 환경의 변동이 시시각각으로 일어나고 언제 어떤 것을 맞닥뜨릴지 모를 우주선은 우리에게는 최악의 장소입니다. 이곳에서는 소위가 받을 수 있는 치료도 제한될 수밖에 없어요. 닥터 맥코이께서 최선을 다해주실 것이라 의심치 않습니다만."
남자는 붕대와 부목으로 감싸인 목을 힘겹게 움직여 맥코이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맥코이는 의사가 인간에게 굉장히 익숙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지구에서 인간들 틈에 섞여 살았을까? 그가 겪는 고통을 피상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동정 어린 시선을 감내하는 삶은 어떤 것일까. 맥코이는 남자의 입을 막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에게는 권리가 없었다. 이건 아스페라의 일이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힘을 모아야....." "술루 대위."
내내 말이 없던 메레디스의 어조는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줄처럼 튕겨올랐다. 스팍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벽에서 메레디스에게로, 그리고 다시 술루에게로 이동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눈빛이었다. 술루는 입술을 꽉 다물고 메레디스의 시선을 받았다.
"무슨 생각에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함장님께 합당한 처벌과 함께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가능한 모든 방안을 강구해 주시도록 요청하겠습니다.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 제게 접근하지 마십시오. 절대."
의사는 당황한 기색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말을 잇기 전 메레디스가 먼저 움직였다. 걷지 못하는 다리 대신 의족이 벽과 합금 패널에 부딪쳐서 둔탁한 울림을 만들었다.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를 대신해 그녀의 적개심을 전하는 듯 위협적인 소리였다. 의사는 입을 다물었고 메레디스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아니, 그러려 했다. 하지만 술루가 그 전에 입을 열었다.
"사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럴 거라면 애초에 하지도 않았습니다." "술루!" "어째서 그럽니까? 왜 삶을 포기하죠? 동족과 고향에 대한 책임은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겁니까?" "입 닥쳐, 술루!"
맥코이의 고함에도 술루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메레디스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술루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하고 냉정했다.
"당신에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훈계를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스캇이 허둥지둥 길을 비켰다. 그를 거의 밀쳐내다시피 스쳐지나간 메레디스는 그대로 기관실의 미로 같은 기계장치들 사이로 사라졌다. 스팍이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술루는 주먹을 꽉 쥐고는 고개를 숙였다. 맥코이는 그를 한 대 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스팍에게 눈을 돌렸다.
"부함장." "........." "히카루 술루 대위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길 요청하네. 함장에게도 말하겠지만 엄중한 처벌 또한 의료부 주임으로서 요청하는 바야. 일지에도 명확하게 기록하겠네." "동의합니다. 미스터 술루."
술루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금 즉시 개인 쿼터로 돌아가 근신하도록. 쿼터 밖으로 나오는 것과 면회, 외부와의 통신을 일절 금지한다. 함장님과 의논해 처분을 결정할 테니 그때까지 자숙하도록. 따로 경비는 붙이지 않겠으나 금지사항을 위반시 가중처벌하겠네."
대답은 없었으나 맥코이는 꽉 다문 입술 아래 턱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술루는 말 한 마디 없이 연구실을 나서 리프트 쪽으로 걸어갔다. 곧은 등은 꼿꼿했고 걸음은 흔들림이 없었으나 반듯한 어깨는 단단하게 굳어 그대로 부서질 것만 같다. 허겁지겁 모퉁이를 돌아오던 커크와 하마터면 부딪칠 뻔 했을 때도 그 완강한 뒷모습은 조금도 허물어지지 않았다.
"어? 미스터 술루? 무슨 일이야?"
당황해 묻는 함장에게 술루는 '죄송합니다' 한 마디만을 남기고 리프트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통신기가 쥐어진 손을 휘저으며 그를 보던 커크가 그들에게 몸을 돌리고 똑같은 질문을 했다.
"미스터 스팍? 무슨 일이야? 사건이라니?"
커크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달리다가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바지는 흙투성이였고 뜯어진 밑단 사이로 보이는 맨 발목에는 큼직한 생채기가 나 있었다. 옆이마에도 못 보던 찰과상 하나. 가까이 가자 왜 그 모양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달큰한 술 냄새가 확 피어오른다. 맥코이는 어이가 저 멀리 날아가는 것을 느끼며 거칠게 방정맞은 손목을 움켜쥐었다.
"대낮부터 퍼마셨냐?" "아씨, 휴가잖아. 모처럼 기분 내고 있었더니만.... 아니, 아니. 무슨 일이냐니까?" "술에 꼴아서 뭘 하겠다고. 이리 왓!"
무작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커크는 다리가 꼬여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내일쯤이면 우주항 통로에서 화려하게 나뒹구는 연합의 영웅 사진이 네트워크에 뜨겠군. 맥코이는 휘청거리는 커크의 허리를 잡아채 부축하면서 생각했다. Unbelievable. 하지만 분노와 긴장으로 딱딱하게 뭉쳤던 마음 한켠이 어느새 몽글몽글해졌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뒤에 남은 아스페라 의사가 신경쓰였으나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스팍이 알아서 내보내겠지.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주정뱅이의 취기를 깨게 하고 사라진 메레디스를 찾는 것이었다.
술루의 처분을 결정하는 자리에 메레디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호출에 답이 없을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커크는 다시 통신을 연결하려는 스팍에게 손을 저어 말렸다.
"됐어, 스팍. 결정에 소위의 의견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소위는 이미 자신의 뜻을 분명히 했죠." "알아.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게 해달라고 말했지."
커크는 맥코이가 방금 소독해준 상처를 무심코 긁적거렸다. 그 손을 잡아 내리면서 맥코이는 그를 쏘아보았다.
"별로 화나지는 않은 것 같다?" "굳이 화낼 일은 아니잖아. 스팍, 술루의 딸이 아스페라 유전자를 이용한 치료를 받은 건 확실해?" "가족의 의료 기록은 사적인 일이니 저나 함장님이라도 정당한 명분 없이는 열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기억이 맞다면 그렇습니다." "그게 동기인가. 그것 참."
스캇은 메레디스를 찾으러 가고 없었다. 그들이 모여 있는 의무실의 구석은 고요했다. 의료부 대원들은 이런저런 일로 대부분 자리를 비웠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지휘관들의 대화에 신경쓰지 않았다. 커크의 가벼운 분위기도 그런 무심함에 한 몫 했으리라. 함교도 함장 집무실도 아닌 이곳에서 이야기하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맥코이는 팔짱을 끼고 본격적으로 커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게 왜 화가 날 일이 아닌데?" "처벌을 안하겠다는 말은 아니야." "그건 당연하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메레디스가 결정할 일이야! 술루가 주제넘게 나설 일이 아니라고! 만약 네가 메레디스의 입장이었다면 화가 안 났겠어?"
커크는 씩씩대는 맥코이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나는 메레디스가 아니잖아." "야!" "진정해요, 닥터."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이 자식 하는 말을 들어보라구! 너도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 하는 생각이야? 엉?" "내 생각에는,"
스팍은 맥코이에게서 시선을 돌려 커크를 바라보았다.
"함장님은 그간 승무원들에게서 줄곧 거리를 두어 온 메레디스 소위의 처신을 지적하고 싶으신 듯합니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아마 미스터 술루도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나 싶고요." "빙고. 메레디스에게도 문제가 있어. 인정하자구, 본즈." "이......."
맥코이는 순간적으로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격분했다. 하지만 그가 폭언을 퍼부을 수 있기 전 커크가 잽싸게 말했다.
"자네도 소위를 환자로만 보고 있잖아." "뭐?" "동료나 가족, 뭐가 됐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여기지 않지. 그렇잖아?" "......."
이번에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은 혼란 때문이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얼얼한 머릿속 어딘가에서 말이 멈췄다.
"소위는...... 뭐라고 해야 하나.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는 게 없어. 철저히 혼자고, 혼자이고 싶어하지. 이해는 해. 누가 소위의 처지를 알 수 있겠어? 어설프게 다가오는 동정은 철저히 혼자인 고독보다 더 슬프고 힘들 테지. 본즈 네게는 그래도 환자와 의사라는 관계가 남아 있어. 하지만 다른 승무원들에겐 아니야." "........" "이번만 해도, 배 전체가 소위 때문에 진행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이곳까지 와서 장기체류 중이야. 그런데 그에 대해 소위가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고 했던 적이 있나? 메레디스는 그게 아예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고 있잖아. 소위를 탓하는 게 아냐. 정말이야. 소위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해해. 소위는 그를 시한부로 만든 병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어.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간을 병에 대해 생각하면서 낭비하고 싶지는 않은 거겠지. 나는 이해하고, 함장으로서 끝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줄 거야. 그게 함장으로서 스타플릿으로부터 소위를 위임받은 내 의무니까. 하지만 그 이상의 관계는 불가능해. 내가 아니라 소위가 원하지 않으니까." "소위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입밖에 꺼내 말하는 자는 없습니다만."
맥코이는 놀라 스팍의 무뚝뚝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불만?" "함장님이 말씀하신 것과 비슷하죠. 왜 병자가 병원이 아닌 개척 우주선에 있느냐는 식의." "그런....... 말도 안 되는........."
커크는 분노로 시뻘개진 맥코이를 보면서 씁쓸하게 턱을 문질렀다. 파르스름하게 진해지는 멍을 건드려 아픈지 금방 손을 내렸지만.
"그런 거야. 아마 술루는 메레디스의 그런 태도가 더 참기 힘들었겠지. 그만큼 연합에 대한 사명의식이 투철한 사람도 없으니까." "........" "술루는 신념에서 일을 저질렀겠지만 다른 승무원들은 그냥 빈정이 상하거나 싫은 거야. 어쩔 수 없어. 정든 동료도 가족도 아니고, 그런 관계를 원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 그저 살 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사람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다들 표현하지는 않는 것뿐이지." "너는...... 너는 어때? 너도 그렇게 생각해?" "잘 모르겠어. 굳이 내 생각이 필요한 일도 아닌 것 같군. 아까 말했듯 나는 함장으로서 의무를 다할 생각이고, 소위도 그거면 만족할 거야."
맥코이는 시선을 돌려 스팍을 바라보았다. 그 처량한 눈빛에 스팍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소위의 선택에 왈가왈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소위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닥터의 말대로 전적으로 소위의 선택이니까요. 그가 자신의 종족을 등지고 철저히 한 개인으로 살다가 죽겠다면 그 생각을 존중해야겠지요."
벌칸의 말은 늘 그렇듯 감정이 절제되어 있었지만 맥코이는 그 속에 숨겨진 비난을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저들의 비난과 불만은 정당한가? 그도 메레디스에게 비판적이어야 하는가? 그러나 메레디스는 그가 비판적이든 아니든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가 불만을 입밖에 내지 않고 주치의로서 해야 할 일만 해준다면. 맥코이는 커크와 스팍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커크는 혼란에 빠진 맥코이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술루의 처벌은 규정대로 하지. 전출까지는 아니고, 두세 달 정직 수준에서 마무리될 거야. 그렇게 알아둬. 소위에게는 내가 직접 얘기할게." "........" "더 이상 신경쓰지 마. 본즈 너는 그냥 해왔던 대로 하면 돼. 소위도 한 명쯤은 그런 사람이 필요할 거야."
글쎄, 그럴까? 맥코이는 더 이상 확신할 수 없었다.
사고가 일어난 것은 엔터프라이즈가 다시 출항한 지 정확히 37일 만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본부와 화상회의 중이던 맥코이가 긴급 호출을 받고 의무실로 뛰어갔을 때 닥터 채플은 이미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맥코이는 받아든 차트를 점검할 시간도 없이 수술복을 집어들면서 채플에게 집도하라고 말했다. 채플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상 침대를 밀면서 수술실로 들어갔다. 급히 장갑을 끼는 맥코이 앞에 컴퓨터가 홀로그램으로 바이탈 수치를 띄워주었다. 메레디스의 심장 하나는 멎었고 다른 하나는 부정맥으로 헛된 수축을 반복하고 있었다. 맥코이는 네트워크를 통해 채플이 간호사들에게 간결하고 전문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을 들으면서 옆에 서 있던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우후라가 짤막하게 설명했다.
"소위는 고장난 통신 기기의 프로그램을 재설정하는 작업을 도와주러 왔던 참이었어요. 바닥에 쌓인 장치들을 피해 걷다가 그만 전선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저희가 달려갔을 땐 이미 의식이 없었어요."
맥코이는 입술을 짓씹었다. 울상이 된 체콥이 물었다.
"괜찮겠지요?" "목숨은 건질 거야. 그 이상은, 글쎄." "미리 치워놔야 했는데 저희 잘못입니다."
뭐라고 대꾸할 말도 여유도 없어서 맥코이는 고개만 까딱였다. 바이탈 수치에서 멎었던 심장의 그래프가 다시 표시되기 시작했다. 그는 수술실로 걸음을 옮기며 짤막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가봐. 일도 많을 텐데."
채플이 있으니 그는 참관만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다른 일을 하고 있다가 보고만 받아도 충분했다. 간단한 시술이었다. 메레디스가 의식을 잃고 심장이 멎은 것은 넘어지면서 일어난 골절이 뼈 안쪽의 신경계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엉망이 된 자율신경계의 전기신호를 바로잡고, 심장 박동을 되살리고, 부서진 뼈를 이어붙인다. 세 가지 중에서 마지막이 가장 복잡한 과정이었다. 채플 정도의 숙련된 의사는 두어 시간이면 아주 꼼꼼하게 뼛조각들을 모아 붙여 그럭저럭 모양은 갖추게 해줄 것이다. 문제는 그게 의사가 해줄 수 있는 일 전부라는 것이었지만. 문이 열리고 땀 범벅이 된 스캇이 뛰어들어왔다. 그가 말을 건넬 수 있기 전 맥코이는 수술실로 들어와버렸다. 닫힌 문 옆에 서서 수술을 지켜본다. 스캇이 메레디스를 최대한 배려했음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온 후부터 주로 일하던 기관실에는 언제 어디서든 바닥에 볼트 하나 떨어져 있지 말아야 했고, 모든 통로는 항상 깨끗하고 넓게 치워져 있어야 한다는 수칙이 생겼다. 그러나 그런 배려를 모든 부서에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통신실의 요청에 다른 대원이 아닌 메레디스를 보낸 일로 스캇이 얼마나 자신을 자책할지 환히 보이는 것 같아 입맛이 썼다. 한 달 전 스팍이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귓가에 울렸다. '왜 병자가 병원이 아닌 우주선에 있냐는 것이지요.' 심장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한숨 돌린 채플이 고개를 들고는 그에게 의아해하는 눈빛을 보냈다. 맥코이는 무거운 걸음으로 메레디스가 누워 있는 수술대 옆에 섰다. 수술은 세 시간을 넘겨 네 시간에 가까워서야 끝났다. 입원할 때면 늘 사용하는 개인 병실로 옮겨진 메레디스는 전신에 부목을 대고 붕대로 칭칭 감겨 마치 박물관에 보존된 미이라 같은 모습이었다. 수술실을 나오자 우후라와 체콥, 스캇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맥코이는 스캇에게 통신을 넣어 결과를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대신 천근 같은 몸을 주임 집무실의 의자에 구겨넣었다. 피곤했다. 육체적인 피로가 아니라 이제부터 그가 해야 하는 말에 대한 정신적 피로였다. 그는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조명의 깨끗한 흰 빛이 오늘은 시리도록 차갑게 느껴졌다.
메레디스는 전신이 마비되었다. 부서진 뼛조각은 짜맞추었지만 보통 골절이 그러하듯 시간이 지나면 아물어 붙을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고, 뼈 안쪽과 연결된 섬세한 신경다발이 기능을 되찾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근육 안쪽, 인간이라면 척추가 있는 곳에 위치한 중추신경총은 아무 이상 없었지만 골격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근육이 뒤틀리기 시작하면 그곳에도 압박이 갈 것이다. 근육이 퇴화하고, 중추신경총이 변형되고, 마침내 호흡과 운동을 관장하는 신경이 망가지면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느리고 고통스럽고 소란한 과정이었다.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분석 결과를 보고 맥코이는 잠시 아득해졌다. 이렇게나 빨리. 아직 1년의 1/3도 채우지 못했는데.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 끔찍한 선고를 듣지 못한 메레디스의 ��인실 문 앞에 서서 맥코이는 스캇에게 수술 결과를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스캇은 머리를 잡아뜯으며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 내 잘못이야." "스카티. 자네가 최선을 다한 건 누구나 알고 있어. 설령 메레디스라도......" "소위야 남 탓 안하겠지. 씩씩한 아가씨니까. 하지만 내 잘못이야. 기관실처럼 통신실도 치워놨어야 했는데. 소위가 여기저기 다니는 걸 걱정하면서도 다른 곳도 기관실처럼 하면 된다는 걸 미처 생각 못했어."
맥코이는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메레디스가 넘어진 이유는 통신실 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브러졌던 기계장치와 전선들 때문이었다. 왜 그런 일이 기관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가? 미리 규칙을 정해 청소와 정리를 했으니까. 왜 그는 그걸 함선 전체에 적용할 생각을 못 했을까? 커크의 말이 떠올랐다. '너는 소위를 보살핌이 필요한 환자로만 보고 있잖아.' 그들 모두 메레디스의 일에서는 멍청이들이었다. 메레디스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일하는 것을 가엾게만 생각했던 맥코이나, 메레디스가 일하기 편하도록 기관실을 치우도록 했으면서 그걸 다른 곳에 적용할 생각은 못 했던 스캇이나, 핵심을 짚고서도 그것의 의미를 깨닫지는 못했던 커크와 스팍이나. 메레디스가 얼마나 고독했는지 그제서야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스캇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닥터?" "하지만 이제 와서는 소용 없겠지." "응?"
배 전체를 정돈하고 모든 통로를 넓히고 모든 종족이 어떤 상태든 아무 불편 없이 어디든 다닐 수 있게 배를 전부 뜯어고친다 해도...... 메레디스가 그 넓어진 길을 자신의 발로 걷는 일은 없을 것이다. 스캇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남은 시간마저 원하는 대로 보내지 못하게 된 것은, 전부 그들 모두의 탓이었다. 메레디스가 모두를 밀어낸다고 해서 밀려난 대로 멀리 서서 그녀를 지켜보기만 한, 엔터프라이즈 전체의 잘못이었다.
"죽고 싶습니다."
맥코이는 그것이 지구 인간들이 흔히 사용하는 어법대로 참담한 심경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기를 염원했다. 하지만 지구의 언어와는 아무 상관 없는 메레디스는 또렷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저는 죽고 싶어요. 이런 상태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죽게 해 주세요." "메레디스......." "연합의 법률은 존엄사를 보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닥터 맥코이가 거절하신다면 하선하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죽음을 줄 수 있는 곳으로 가겠어요."
맥코이는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멈췄다. 어차피 그 이름은 그녀의 본명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어떤 흔적도 남기기를 거부한 메레디스, 아무도 자신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와서 모든 것을 감추고 지냈던 그녀라면 당연한 선택이겠지. 메레디스를 알았을 때부터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속절없는 무력감이 다시 그를 휩쌌다. 그는 실패했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에도 실패했고 환자의 남은 시간을 늘려 주는 데도 실패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환자가 원하는 대로 죽도록 해주는 것뿐이리라. 알면서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대답 없이 병실을 나온 맥코이는 집무실의 모니터에 떠오른 수많은 메시지들을 읽었다. 입원한 후로 메레디스는 개인 통신을 사용하지 않았고, 병문안도 일절 거절하고 있었기에 대신 의무실로 날아온 메시지들이었다. 위로, 안타까움, 기도하겠다는 약속 등을 담은 각양각색의 말들. 천 명이 넘는 승무원들의 삼분지일은 메시지를 보낸 것 같다. 그중에는 메레디스와 말 한 마디 나누어 보지 않은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었다. 동정과 공감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맥코이는 그 다정한 말들을 메레디스 대신 읽으면서 내내 생각했다. 연락을 받은 커크는 바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라고 딱히 신통한 수가 있을 리 없다. 커크가 할 수 있는 일은 메레디스의 결정을 추인하는 것뿐이었다. 메레디스의 죽음의 방식과 때를 결정하는 것은 그녀만의 오롯한 권리였다. 맥코이는 작은 목소리로 시간을 조금 달라고 말했고 메레디스는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려는 것이 그녀가 아닌 맥코이인 것처럼. 방금 결정한 죽음이 남의 일인 양. 어쩌면 죽음은 그녀에게는 정말로 해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원하는 것이 있었기에 살았고, 병마로 더 이상 그것을 얻을 수 없게 되자 미련없이 삶을 버렸다. 번거롭기 짝이 없는 철 지난 옷을 버리듯. 맥코이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뜻밖의 사람들이 찾아온 것은 커크가 돌아간 다음이었다. 심란한 마음을 안고 의무실을 하릴없이 돌아다니다 병실로 간 맥코이는 그 앞에 서 있는 스팍과 술루를 보고 멈칫했다. 분명히 정직 처분을 받고 근신 중일 텐데 술루의 근무복은 변함없이 단정했다. 맥코이의 시선을 받은 스팍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나도, 미스터 술루도 메레디스 소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기에 왔습니다." ".......메레디스는 병문안을 받지 않아. 자네들이라면 더더욱 보고 싶어하지 않을 텐데." "압니다. 안그래도 방금 면회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럼 돌아가." "닥터."
맥코이는 눈을 돌려 술루를 바라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표면으로 얼핏 비치는 것은 간절함이다. 어째서?
"자네 딸 때문이야?" "아닙니다." "아니라고?"
술루는 망설였다. 속에 담아둔 것을 적절하게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해 애먹는 듯했다. 맥코이는 충동적으로 몸을 돌려 콘솔에 패스코드를 입력했다. 메레디스는 그에게도 화를 내겠지만, 뭐 어떤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길어도 일주일 내에 그녀는 맥코이의 인생에서 사라질 것이다. 커크는 다른 의사를 찾아봐도 좋다고 말했지만 그는 환자의 최후를 다른 이의 손에 맡길 생각은 없었다. 메레디스는 앉아 있었다. 그녀의 엔터프라이즈 생활 내내 불편한 팔다리를 대신했던 보조기는 끝까지 충실하게 역할을 다하고 있다. 그 금속 덩어리가 의사보다 낫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비웃으면서 맥코이는 창가로 가 기대 섰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그녀의 눈에 언뜻 날카로운 번득임이 지나갔지만 순간이었을 뿐, 메레디스는 마치 그들이 방에 없는 것처럼 평정한 태도로 돌아갔다. 반대로 술루는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방 밖에서의 엄격함은 역시 가장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자 결국 메레디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이전의 날카로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술루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대답했다.
"소위의 결정..........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래서요?" "그저,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서........ 그래서 무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 이왕이면......" "........." "이왕이면, 소위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좋겠고요."
스팍과 맥코이는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메레디스는 뜻밖에도 화를 내지는 않았다. 머리가 잠시 기울어지다 멈춘다.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 싶었지만 뻣뻣한 붕대와 부목의 방해를 받은 듯했다.
"앉으세요. 어차피 지금은 할 일도 없으니, 대위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요."
술루는 이번에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침대 발치에 놓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왜 그렇게 제게 집착하시죠? 왜 제가 살고 죽는 것이 대위님께 중요합니까? 물론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데 태연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겠지만, 대위님의 관심은 그런 평범한 종류가 아닌 것 같네요." "그건........" "제가 들은 대로 따님 때문이라면 잘못하시는 거예요. 제가 산다고 해서 따님께 도움이 될 리도 없고, 제가 죽는다고 따님께 해가 갈 리도 없어요. 따님의 치료는 지구의 현명한 의사들 소관입니다. 그들이 저를 돕지는 못하겠지만."
술루는 곁눈질로 스팍을 한 번 보고는 대답했다.
"먼저 오해부터 풀지요. 제 딸은 이 일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딸이 어려서 병을 앓은 것도 사실이고 치료법으로 아스페라 DNA 재조합을 추천받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스페라 종족의 병이 DNA를 통해 전염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이었죠. 하지만 제 딸은 그 치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드모라가 받은 치료는 다른 것이었어요." "정말인가요?" "정말입니다. 검사 결과 아스페라 치료법은 제 딸의 유전자와 맞지 않아서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고 의사들이 말했죠."
메레디스는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그럼 더욱 이해가 안되는군요. 따님과도 관련이 없다면, 제게 신경쓰시는 이유가 뭡니까?" "........." "제가 앞으로 겪을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어조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여전히 조용하고 침착했지만, 끓는 감정을 억누르는 듯한 말투였다.
"닥터 채플은 제 팔다리의 뼈에 핀을 박고 긴 막대를 연결해서 뼛조각들이 떨어지는 것을 막았죠. 하지만 뚫린 구멍은 아물지 않고 점점 넓어지기만 할 겁니다. 그러다가 뼈 전체에 금이 갈 거고, 그렇게 껍질이 벗겨지듯 뼈가 한 조각씩 떨어져나갈 거예요. 내게는 인간의 피부 같은 기관이 없기 때문에 내 살은 어떤 감염도 막을 수 없겠지요. 나는 이미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다음은 먹고 소화시키는 능력을 잃을 테지요. 그 다음은 팔다리가 떨어져나가는 것일지도 모르고, 혼자서는 숨쉴 수 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온몸은 악취를 풍기고 진통제 없이는 한 시간도 버틸 수 없게 될 거고요. 이 모든 걸 침대에 갇혀서 견뎌내야 해요. 그래서 그 끝이 뭐죠? 폐에 물이 차서 질식하거나 아니면 신경계가 눌려서 심장마비를 겪겠지요. 아스페라에게 심장이 멎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세요? 인간의 심장마비도 굉장히 고통스럽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심장이 두 개고, 그래서 두 배의 시간 동안 두 배의 고통을 겪게 되겠죠. 끝이 날 때까지 말입니다." ".........." "어째서 제게 이걸 참고 견디라고 요구하는 건가요?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이기에? 인내하는 시간만큼의 고통과 비참함 말고 무엇이 있어서요?"
술루는 힘들게 대답했다.
"치료법이...... 치료법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무슨 말입니까." "제 딸이 관련이 없다는 말은....... 완전히 옳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닥터 OOOOO과는 드모라의 병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그분이 연구하는 치료법은 드모라와는 맞지 않아 결국 다른 치료를 받게 됐지만...... 그분은 자신처럼 연구에 나서는 아스페라인이 별로 없어서 굉장히 안타까워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말이 맞아요. 이 병을 앓는 것은 끔찍하고, 희망도 없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택하는 아스페라인은 얼마 없지요. 대다수는 고향 행성에서 최대한 덜 고통스럽고 조용한 죽음을 맞고 싶어하지요. 고향을 떠나는 극소수는 당신처럼 삶의 마지막을 할 수 있는 한 원하는 대로 살다가 떠나고 싶어합니다. 누가 그것을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지만 그 때문에 닥터 OOOOO의 연구는 지지부진합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애써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연합의 의사들은 최대한 돕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아스페라가 아니죠."
대화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메레디스의 평온함이 깨졌다. 술루는 그 떨리는 눈빛을 보며 말했다.
"나는 지구인입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우리 인간의 과거에도 수많은 불행이 있었어요. 전쟁으로 종 전체가 멸망 직전까지 가기도 했고, 불평등과 가난으로 서로를 증오하며 복수하던 때도 있었고, 수많은 질병으로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바라며 노력했지만 대부분은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걸 알고 있었어요. 고통스럽게 노력해도 자신의 시대에는 나아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죠. 그럼에도 그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뿌린 씨앗이 싹을 틔워 만들어진 것이 현재의 행성연합입니다. 자신의 후손이, 자기가 속한 인류라는 공동체의 막연한 이상이 자신들의 수고의 대가를 누리리라는 그들의 믿음이 없었다면 나 역시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나는 그런 행성연합의 대의를 믿고 스타플릿에 왔습니다. 당신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당신이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었으면 해요. 닥터 OOOOO를 도와주십시오. 연합은 당신에게 어떤 것도 약속할 수 없습니다. 그걸 할 수 있는 존재는 우주에 아무도 없어요. 나는 그저, 동족을 가엾게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호소하는 겁니다. 당신의 인내가 당신 자신의 고통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먼 훗날, 새롭게 태어난 아스페라인이 당신을 기억하며 고마워하게 되겠지요. 내가 나의 선조들에게 그러하듯이요."
메레디스는 눈을 감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침묵을 지키며 무정물처럼 그녀와 술루의 대화를 지켜보기만 하던 스팍이 입을 열었다.
"메레디스 소위." "........" "먼저 사과하겠네. 자네는 두 번 다시 술루 대위를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 하지만 내가 대위의 근신 상태를 깨면서까지 대위의 요청을 수락해 자네에게 데리고 온 것은, 대위의 논증에 자네가 한번쯤은 들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 "나는 멸망 직전에 있는 종족의 일원이네. 자네의 아스페라처럼."
메레디스는 흠칫해서 고개를 들었다. 스팍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 고향 벌칸은 로뮬란의 테러로 파괴되었고 60억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네. 남은 숫자는 일만이 채 안 돼. 벌칸에게 천 년 정도는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나의 종족이 천 년 후에도 남아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가 없네. 생존자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 노력이 성공적일지는 아무도 모르고, 설령 새로운 벌칸이 안정된다 해도 파괴 이전의 문명과 같을 수는 없겠지." "....... 그래서요?"
대꾸하는 목소리는 미약했다. 스팍은 머리를 저었다.
"그저 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내가 자네의 개인적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비논리적인데다 주제넘기까지 한 주장이겠지. 하지만 자네에게도 동족을 향한 마음은 있을 것이라 생각하네. 내가 늘 새로운 벌칸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주제넘게 짐작해 본다면, 자네가 자네의 종족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는 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뿐이기 때문일 거야. 아닌가?" "........." "불쾌했다면 미안하네. 하지만 그저 소위가 존엄을 지킨 죽음 대신 끝까지 희망을 간직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임을 알아주었으면 했어. 희망은 종종 기만적인 고문일 뿐이지만, 가끔은 정말로 기적을 가져다주기도 하니까."
기적. 맥코이는 턱을 젖혀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들은 우주를 날고 있다. 두터운 합금과 얼기설기 얽힌 전선들의 벽을 지나면 끝이 없는 무한한 공간이 펼쳐진다. 옛날 인간들은 하늘이 신의 처소라고 생각했고 지금 인간들은 우주에서 희망을 찾았다.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리라는 희망을. 술루가 믿는 것처럼. 하지만 정말 그럴까? 맥코이도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술루와 스팍에게는 있는 희망이 메레디스에게는 없었다. 정말 희망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마 메레디스 자신보다도 더 간절하게 원했을 테지만, 맥코이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기만일 뿐이었다.
"메레디스." "........." "저들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어. 그건 자네의 결정이야." "닥터 맥코이!"
술루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맥코이는 손을 저어 그의 말을 막았다.
"희망은 좋은 거지. 하지만 끝까지 견딘다 해도 자네에게 남은 시간은 2년 남짓일 거야. 그 안에 아스페라 유전병의 치료법 연구에 돌파구가 생길 가능성은 매우 낮네. 의학 전공도 아닌 자네가 그..... 의사와 함께 일한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거고. 그래. 그 낮은 가능성과 조그마한 기여를 위해 자네는 고통과 절망뿐인 2년을 견뎌야 하는 거야. 나는 자네의 주치의고, 그렇기에 희망을 가지고 자네를 속이는 짓은 도저히 못 하겠군. 다시 말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는 자네를 전적으로 지지하겠네."
마지막 한 조각의 진실은 맥코이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연합의 의학계에선 아스페라의 멸망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연합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던 때에는 이미 병이 인구 전체로 퍼진 뒤였다. 남은 것은 고통을 덜고 존엄을 지키며 죽을 수 있게 해주는 작업뿐이다. 맥코이가 메레디스에게 해주려는 것처럼. 술루의 말대로 먼 훗날 아스페라는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들이 메레디스의 후손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아스페라는 남아 있는 DNA 자료와 앞으로 발전할 유전자 치료법으로 인공자궁의 힘을 빌려 탄생할 클론들의 종족이 될 것이다. 메레디스는 말없이 다리를 덮은 담요만 내려다보았다. 맥코이의 말 속에 담긴 말하지 않은 진실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셋은 조용히 죽어가는 이의 결정을 기다렸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별빛이 그의 흰 가운 위에 까불거리며 새기는 무늬를 보면서, 맥코이는 그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순간이 하나 더 그의 기억의 창고에 더해졌음을 알았다. 문득 그 옛날, 커크와 처음 만났던 때가 선연하게 떠올랐다.
장례식은 간소했다. 일반적인 관례와는 다르게 함장과 부함장마저 참석하지 않았다. 끝없는 우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나는 고인을 배웅하는 이는 맥코이와 채플, 스캇 외에는 술루 뿐이었다. 메레디스는 장례식 자체를 원하지 않았지만 장례의 의식은 죽은 자 만큼이나 산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기에 맥코이는 이 정도는 메레디스가 양보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장한 재가 담긴 작은 관은 맥코이에게 말없는 동의를 보내는 듯했다. 어느 누구도 추도사 같은 것에는 능숙하지 못했기에 엉성하기 짝이 없는 작별인사가 끝난 후 관은 엔터프라이즈를 떠나 먼 우주로 사라져갔다. 마침내 일생 그녀를 괴롭히던 병마로부터 해방을 얻은 메레디스의 영혼처럼. 모인 네 사람은 어색하게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말없이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슬픔도 의미도 되씹을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맥코이는 그날 아침부터 하고 싶었던 대로 커크의 쿼터로 향했다. 어차피 관이 보이지도 않을 텐데 창에 찰싹 붙어 우주를 내다보던 커크가 그를 돌아보았다. 애매하게 웃는 얼굴 속에 담긴 것은 슬픔이 아니라 연민이다.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메레디스에게 직접 향하는 것이 아닌 맥코이를 매개로 해서만 작동되는 연민. 커크는 메레디스의 친구가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녀가 원하지 않았으니까. 자신을 더 슬프게 하는 것이 메레디스의 죽음인지 아니면 그 죽음이 애도받지도 못한다는 사실인지 맥코이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보내주고 왔어?" "응."
팔을 끌어당겨 껴안자 따뜻한 체온은 고분하게 품에 안겨들었다. 등에 두른 손으로 건강하게 뛰는 심장의 울림이 전해진다. 맥코이는 그의 이마에 입술을 대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짐." "응." "죽지 마. 절대 죽으면 안돼. 영원히 살아야 해. 알았지?"
부질없는 말이었다. 절대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이다. 하지만 커크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 "약속하는 거야." "그래. 약속할게. 죽지 않을게."
커크가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창으로 보이는 우주가 그제야 부옇게 흐려졌다. 아주 늦은 눈물과 함께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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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Trek] 시간의 바늘
별들이 빛났다. 가장 어두운 밤 속에 있는 수많은 낮, 기묘하기 짝이 없는 우주의 새벽이었다. 커크는 블라인드를 내릴까 생각하다가 그대로 돌아누웠다. 이미 익숙해진 별들이 잠이 깬 이유는 아니다. 시트를 코끝까지 끌어올리고 웅크려 눈을 감은 채로, 커크는 하나씩 마음 속으로 점검해 보았다. 몸이 불편한가? 아니. 스트레스 요인이 있는가? 평소보다 많지는 않다. 남은 일이 있는가? 업무는 다 마쳤다. 체력단련과 논문 작업 분량도 끝냈다. 지난 며칠의 숙제이던 어머니와의 통화도 어쨌든 하긴 했다. 잠을 설칠 요인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 커크는 반듯이 누웠다. 별빛이 은은한 아지랑이가 되어 감은 눈꺼풀 위를 미끄러졌다. 어머니는 스트레스 요인이 아니었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때때로 무덤에서 기어나온 그림자가 목을 조르는 악몽을 꿀 정도로 늘 부담이었던 아버지에 비하면 말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기 일쑤였던 아버지에 비하면 어머니에게 느끼는 껄끄러움이야 불편 축에 끼지도 못했다. 하지만 한번 달아난 잠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고, 두서없는 사고의 편린들만 잠들려 애쓰다 멍해진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어머니가 차라리 재혼이라도 했으면 나았을까. 커크는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런 멍청한 생각을 했던 때도 있었다. 대체 언젯적인지, 지금은 멀게만 느껴지는데, 매일 매순간 부모의 존재가 뼈에 새겨진 것처럼 그 주박에 묶여 지내던 때였다. 누구나 꿈꾸는 스타플릿조차 또다른 감옥이라 여겼기에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던 시절. 매일 술 마시고 싸우고 도둑질하고. 딱히 어머니를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렇게 시간을 탕진하던 때가 있었더랬다. 커크는 머리를 휘저으며 일어났다. 밤에 잠 대신 생각에 빠지면 쉽게 우울해지고, 한번 우울에 잡히면 좀처럼 리듬을 회복하기 힘들다. 조금 피곤하더라도 일이라도 하는 편이 낫다. 총 1007명을 책임지는 함장으로서 어느새 몸에 밴 책임감이었다. 그는 조명을 켜고 패드를 집어들어 간밤에 들어온 메시지를 읽고 승무원들의 인사기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맥코이로부터 내일 아침 시프트 전에 잠시 의무실에 들르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발송 시간을 본 커크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제대로 먹으라,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 틈만 나면 잔소리를 해대면서 정작 그 자신도 못말리는 일중독자인 사람이 그의 친구 본즈였다.
"요즘 체콥은 어때?"
그를 침상에 앉혀두고 무언가를 부지런히 꺼내오던 맥코이가 뜨악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커크는 피로한 눈을 깜빡이며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매일 함교에서 볼 거 아냐?" "나야 보더라도 일 얘기나 하지. 그거 말고."
맥코이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뒤지고 있던 상자로 돌아갔다. 스타플릿 우편국의 로고가 찍힌 꽤 큼지막한 상자였다. 몇 개의 병과 커크로서는 알아보기 힘든 물건들로 꽉 차 있다.
"사생활 말이야? 나도 주워들은 것 뿐이야." "주워들은 거라도 내놔봐. 낌새가 이상해서 알아둬야 할 거 같은데 인사기록으로는 모르겠어." "인사사항에까지 올라갔어? 하기사 그 밥통이 이런 일을 제대로 이해했을 리가 없지." "저번에 싸우고서 아직도 화해 안 한 거야?"
맥코이는 커크의 물음에는 대답 없이 말했다.
"그, 알지? 키엘류다 족 아가씨." "엘라 소위?"
그 한마디에 사태를 짐작한 커크는 골치가 아파졌다. 마침내 찾던 것을 발견한 듯 조그맣고 까만 병 하나를 들고 일어선 맥코이는 상자를 수납함에 밀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체콥하고 같이 논문 썼잖아. 스팍이 심사했고. 근데 이 아가씨하고 얽힌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지. 그래서 불미스런 일이라도 있었나?" "아니. 없어. 기관실의 베우 중위가 엊그제 멍든 눈을 하고 의무실에 오긴 했는데, 구름다리에서 발을 잘못 디뎌서 튀어나온 파이프에 얼굴을 부딪혔다고 하더라고. 문제는 그 파이프가 중위의 턱을 갈기고 팔목까지 꺾었다는 거지만. 스팍도 안 속겠던데." "스팍하고 화해는 언제 할 거야?"
스타플릿은 모든 종족들이 모여들어 미지의 개척이라는 공동의 기치 아래서 함께 나아가는 장이다. 이 아름다운 말은 스타플릿의 함선들이 말 그대로 온갖 문화들과 기기묘묘한 관습들이 서로 부딪치는 현장이며 함장을 비롯한 지휘부에는 극한의 통솔력을 요구하는 골치 아픈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키엘류다 종족의 여성들은 가임기 때마다 수 명의 남자들을 만나 후손을 낳는다. 키엘류다 족 남자들은 수백만 년의 지혜로 분쟁 없이 선택을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했지만 불행히도 그런 지혜가 없는 다른 종족의 남자들이 말썽이었다. 특히 비슷한(그러나 같지는 않은) 습성이 있는 인간의 젊은 남자들이 문제였다. 스무 살 전후의 인간 남자들은 번식이 아니라도 골치 아픈 존재들이다. 맥코이는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없이 물을 끓이더니 스푼으로 병에서 떠낸 내용물을 찻잔에 넣고 물을 부어 저었다. 쌉싸름하고도 묘하게 달콤한 향이 의무실 가득 퍼진다. 진한 향기에 일찍부터 나와 있던 의료부 대원 몇 명이 이쪽을 흘끔거렸다.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차를 ��고 왔다.
"마셔." "아침부터 부른 용건이 이거였어? 차 한 잔 하자고?" "잔말 말고. 알러지에 좋은 성분이래."
커크는 찻잔을 입술에 댄 채 눈동자만 굴려 맥코이를 보았다. 그의 질문에 대답하기 싫어 딴청을 부리는 줄 알았는데, 이 차가 정말 용건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는 한 모금을 넘긴 다음 침울하게 물었다.
"어머니가 또 뭘 보내신 거야?" "응. 인삼이라든가? 나한테는 과자로 주시더군." "....미안해."
맥코이는 눈썹만 슬쩍 올려 보였다. 커크는 뜨거운 차를 단숨에 털어 마시고는 손을 내밀었다.
"차 줘. 내가 알아서 마실게." "네가 퍽도 그러겠다. 불상처럼 모셔놓고 보기만 하다가 썩혀서 버리겠지. 이거 지구에서도 귀한 거라고. 잔말 말고 내가 오라고 할 때마다 와서 한 잔씩 마셔. 나도 먹을 거야."
커크는 불상이 뭔지 알 수 없었다. 본즈가 요새 열심히 보고 있는 고전 영화에라도 나오는 말인 모양이다. 어젯밤에 애써 쫓아냈던 우울이 위풍당당하게 돌아오는 느낌에 그는 끙 하는 한숨을 내뱉았다. 맥코이는 못 들은 척 하며 뚜껑을 꽉 닫은 병을 호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잘 보관해 둬야지. 그냥 서랍에라도 넣었다가는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체콥은 어쩔 건데?"
그의 주의를 어머니로부터 돌려놓으려는 의도가 뻔한 말이었지만 어쨌든 그것도 커크가 신경써야 할 일이긴 했다. 커크는 뺨을 긁었다.
"그 파이프 씨가 체콥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야 모르지. 아닐 것 같긴 한데 어쨌든 베우가 파이프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은 건 사실이니까. 그럼 파이프가 누군지는 찾아야 되는 것 아니겠어?" "기술부는 아니겠고. 스캇이 그걸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을 거야."
커크는 어제 본 체콥을 떠올려 보았다. 손등이나 손가락 관절에 생채기 같은 건 보이지 않았지만 어차피 장갑이라도 끼고 싸웠다면 흔적은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소년 같은 뺨을 지닌 젊은 소위의 청춘은 일부 고급장교들을 당황하게 했지만 커크는 아니었다. 그는 진상을 알아낼 몇몇 수단을 순식간에 생각해내고는 침상에서 훌쩍 내려섰다. 오늘도 일정은 꽉 차 있다. 베우 소위 폭행의 진상 캐기라는 가욋활동을 끼워넣으려면 하루종일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맥코이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했다.
"거기 너는 왜 끼여 있는 거야?"
커크가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전혀 상상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이다.
"누가? 내가? 엘라 소위하고?" "소문은 그렇게 났던데. 그것도 네가 먼저 들이댔다며? 아니야? 아니라면 뭣 때문에 그런 얘기가 나돈 건데?"
확실히 정신적 바이오리듬이 처지는 시기인 듯했다. 커크는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울의 뒤편으로 황당함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정신적 복통으로 신음했다. 기분에 상관없이 빠르게 도는 대뇌는 묵은 아카이브들을 뒤져 검색 결과를 내놓는다. 당시 술에 곤죽이 되어 있었기에 뚜렷하게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저번 휴가 때 한번 춤을 같이 춘 적이 있어." "고작 춤 한 번에 소문이 그렇게 난다는 거야?"
춤 치고는 좀 끈적하긴 했지만. 하지만 아무리 취했어도 그 이상은 아니었다고 커크는 맹세할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그는 결백했다.
"너 그때 술이 떡이 되어서 엔터프라이즈인지 기지인지 길거리인지 구분도 못했잖아. 뭘 갖고 그렇게 확신해?" "어쨌든 엘라 소위는 아냐." "그니까 어떻게....." "내가 노린 건 소위랑 춤추고 있던 귀여운 남자애였거든. 그러니까 아냐."
맥코이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걷지도 못하던 커크를 기지의 숙소까지 떠메고 왔던 잘생긴 청년은 그의 기억에도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앞인지 뒤인지 구분도 못하는 와중에도 할 건 다 하셨다 이거구만.
"재밌었냐?" "환상적이었어. 술 때문에 별로 기억이 안 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맥코이는 고개를 젓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만 꺼져. 커크는 소리 없이 웃으며 의무실을 빠져나와 함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제가 왜 그 애들에게 신경써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커크는 잠시 지금 그를 번잡하게 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애들'이라는 호칭이 적절할지 생각해 보았다.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감상이었다. 수많은 외계 종족이 어울려 사는 세계에서 생물적 나이는 큰 의미가 없지만, 그것도 눈앞의 여인처럼 보낸 세월이 백삼십년쯤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커크는 목을 한껏 꺾어 그의 키에는 거북할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자네는 그 남자들 누구에게도 특별히 관심 없다는 것이지, 엘라 소위?"
엘라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만 기울였다. 새하얀 모발과 붉은 피부, 돌처럼 단단한 어깨를 지닌 여인은 장엄한 풍모에 걸맞는 위풍당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옛 신화의 대지모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엘라 같은 모습이 아닐까? 커크는 그녀에게 목을 맨 나머지 웃기지도 않은 드잡이질까지 하게 된 멍청한 남자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몇 해 동안 연구원 자격으로 그의 배에 탑승한 과학부의 소위는 깊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함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저희 종족의 관습은..." "알고 있네. 내 배에서 자유롭게 지낼 자네의 권리를 부정할 생각은 절대 없어. 다만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묻는 거야. 자네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 중 자네가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말이야. 만약 있다면, 그를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내가 중재를 좀 해야 할 것 같거든."
엘라는 고개를 다시 반대쪽으로 약간 기울였다.
"아직은 없습니다. 솔직히 다 고만고만하니 마음에 들지는 않아요."
무리도 아니지. 커크는 짧게 웃고는 엘라에게 작별을 고하고 자리를 떴다. 상황은 그의 예상대로였다. 키엘류다 여인은 누구에게도 큰 관심이 없었으나 몸이 단 인간 남자들이 오는 사람은 막지 않는 그녀의 의도를 과대해석해서 괜히 서로 날을 세우는 것뿐이었다. 엘라의 생각을 확인했으니 이제 볏 세운 수탉처럼 맞붙어 싸우고 있는 그 멍청한 사내아이들을 떼어놓고, 가능하다면 화해도 시켜야 했다. 커크는 이 이야기가 스팍의 귀에 들어가면 일어날 일들을 생각해 보았다. 보고서, 징계, 시말서, 그리고 또 징계, 줄줄이 보안부로 끌려오는 젊은 남자들의 행렬. 상상만으로도 골치가 아파져 저절로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제 오늘 무슨 낌새라도 챈 것인지 체콥은 시프트가 끝나면 여우의 기척을 느낀 토끼처럼 달아나버렸다. 웃어야 하나. 커크는 잠시 생각했으나 결국 웃지 않았다. 그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의외였지만, 별로 우습지가 않았다. 엘라 소위를 만나며 느꼈던 유쾌함이 빠르게 가신 자리에 남은 감정은 즐거움이 아니라 엷은 짜증이었다. 커크가 함의 컴퓨터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찾아간 곳은 넓은 식물원 한쪽의 온실이었다. 어째서인지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있던 술루는 그를 발견하자 묻지도 않고 곧바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술루가 이 일을 대체 어떻게 안 것인지 곰곰 생각하며 커크는 애써 주눅 든 기색을 감추려 하는 체콥에게 말했다.
"폭력은 안 돼, 미스터 체콥."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함장님." "집어치워. 자네도 베우 중위가 파이프에 부딪쳤다고 주장하는 거야?"
체콥은 움찔했지만 꿋꿋하게 말했다.
"싸움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저는 끼지 않았습니다."
커크는 눈썹을 슬쩍 올렸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는 얼마든지 상대만큼 치사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좋아. 미스터 스팍에게 가서 그렇게 말해보겠나?"
저만치서 호미를 쥐고 쪼그려 앉은 술루의 등이 들썩거렸다. 체콥은 대번에 풀이 죽었다. 커크의 손에 들린 패드가 삑삑 울었다. 임박한 일정을 알리는 것이다. 커크는 시간을 체크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중위의 유치한 도발에 넘어간 척 하면서 싸움을 부추겼을 때는 어떻게 수습을 할지 생각해둔 바가 있었겠지? 말해보게." "함장님, 저는....." "뒷수습 방안도 없이 폭행 사건을 일으킨 건가?"
체콥은 울상이 되었다. 커크는 그 속내가 환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단순한 사건이었다. 아마 저지를 때는 이후에 어떻게 될지 생각하지도 않았으리라. 혹은, 생각했더라도 그 순간에는 자신을 억제할 수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과거 그 모든 과정을 눈 앞의 어린 청년보다 몇 배의 강도로 거쳤던 커크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거짓말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에는 그것이 얼마나 진실처럼 느껴지는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커크는 간단하게라면 몰라도 쉽게 넘어가줄 생각이 없었다. 폭력은 안 된다.
"오늘 저녁은 자유 시간일 테니 가서 잘 생각해 보게. 그리고 내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게 되면 베우 중위와 함께 찾아와. 이 일에 얽힌 다른 대원들도 함께. 알겠나?" ".....예, 함장님."
늦었다. 커크는 돌아보지 않고 온실을 나갔다. 멀찍이서 모르는 척 하고 있던 술루가 체콥에게 다가와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조언일지 위로일지 궁금했지만 더 이상 신경쓸 수 없었다.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빠르게 긴 복도를 가로질러 목적지에 도착하자 마침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스팍이 보였다. 커크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5분 정도 지각이었지만 그 못지않게 바쁜 스팍 역시 늦었던 것이다.
"미스터 스팍." "함장님."
그들이 선 곳은 각종 훈련을 위해 만들어진 대형 시뮬레이션 룸이었다. 전술 훈련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있지만, 함장과 부함장이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훈련은 2-3주에 한번씩 돌아온다. 스팍이 고안한 프로그램이 랜덤으로 지정하는 훈련 목표나 시간, 상황은 대중이 없었다. 한 시간만에 끝날 때도 있었고 밤새 계속될 때도 있었다. 안에는 각 팀에 60여 명씩 120명 정도의 인원이 이미 대기 태세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가실까요?" "그러지."
문이 열리고 커크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다음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리고 피로와 긴장으로 약간씩 쓰라리기 시작하는 뱃속의 상태는 무시했다.
훈련은 날을 넘기고 이튿날 04시가 되어서야 종료되었다. 아홉 시간 동안 휴식도 없이 강행군을 한 참여자들 모두 피로로 질린 낯빛을 한 채 시뮬레이션 룸을 나섰다. 이 무렵 커크의 위는 지끈거리는 통증을 호소하며 한동안 잊고 살았던 신경성 위염의 위력을 그 주인에게 맛보여 주고 있었다. 커크는 내색하지 않으며 스팍을 불러세웠다.
"스팍, 주말에 예정되어 있던 체술 훈련 일정을 내일 저녁으로 당기지. 오늘 나온 결과값이 많아서 제대로 분석하려면 주말을 비워야 할 것 같군. 내일 시간 괜찮나?" "개인적 일정이 있습니다만, 조정할 수 있습니다."
커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후라에게 내가 미안해 하더라고 전해줘." "제 일정을 조정하는 것은 제가 우선순위를 고려하여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내리는 결정입니다. 함장님께서 미안해 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줘. 내 기분 문제.....앜!"
인정사정없이 목덜미에 꽂힌 하이포에 커크의 말은 비명으로 끝났다. 돌아보니 부스스한 머리로 보아 자다 나온 것이 틀림없는 맥코이가 보였다. 커크는 얼얼하니 감각이 사라진 목을 쓰다듬으며 투덜거렸다.
"본즈, 자네가 이걸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데." "생각까지 할 게 뭐가 있어? 난 이걸 즐겨." "......"
그들의 대화를 듣던 스팍은 애매한 얼굴을 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고 가서 쉬겠다며 떠났다. 커크는 눈치껏 묻지 않는 그가 고마웠다. 지금은 인간이 우정의 표시로서 서로에게 부리는 심술이 비논리적이나 그래도 의미가 있음을 설명하기에 좋은 때는 아니었다. 맥코이의 하이포는 효과가 좋았다. 커크는 따끔거리던 뱃속이 단번에 진정되는 것을 느끼며 몸을 돌려 친구를 마주보았다.
"안 자고 왠일이야?"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말하면 되는 거야, 이 사회성 떨어지는 녀석아."
커크는 고맙다고 하는 대신 맥코이의 손에 들린 맥주캔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맥코이는 캔을 든 손을 뒤로 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위염 있는 주제에 꿈도 크네. 넌 이거나 마셔."
맥코이가 턱 안겨준 보온병을 열어본 커크는 낯익은 향에 김샜다는 얼굴을 했다.
"겨우 차야?" "겨우라니. 어머님의 정성이다." "......" "하여간.... 얼른 가서 잠이나 자." "너는?" "의무실 가는 길이야. 가서 일을 하든 잠을 자든 하겠지 뭐."
커크는 어지간하다고 툴툴대며 쿼터로 향했다. 나한테 잔소리할 자격이 없다고 궁시렁대는 그의 뒤통수로 맥코이의 낄낄거림이 따라붙었다. 친구의 존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미뤄두었던 피로가 몰려들었다. 쿼터로 들어서 간신히 샤워를 마치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려던 그의 눈에 점멸하는 메시지 알림이 보였다. 그의 안부를 묻고, 괜찮다면 한번쯤 다시 만나고 싶다는 내용에 커크는 의아해졌다. 보낸 이의 이름을 떠올리는 데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저번 휴가를 보낸 스타플릿 기지에서 만났던, 귀엽고 섹시하던 젊은 청년. 어떻게 답장할지 생각하던 커크는 그만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갔다. 느릿느릿 기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다다다 뛰어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버리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한 시간이었다. 커크가 제출한 논문은 조용히 스타플릿 아카이브에 등재되었다. 엔터프라이즈는 약 30여 개의 성계를 지났고 수십 개의 행성들과 거의 그만큼의 항성들을 조사했다. 보고서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폭행 사건은 스팍에게 알려지는 일 없이, 어느 날 함장 개인실로 찾아온 여섯 명의 젊은 위관급 장교들이 나란히 서서 사죄하는 진풍경으로 마무리되었다. 존경하는 함장에게 추태를 보였다는 생각에 시뻘개지거나 푸르딩딩해진 얼굴 여섯 개는 커크로 하여금 그런 경험은 일생에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단언하게 만들었다. 그는 옛날 그가 부린 말썽에 대해서 지치지도 않고 반성문을 쓰게 하고 사과를 요구한 학교 선생들과 동네 어른들이 변태가 틀림없다고 술을 마시며 지껄여댔다. 그 궤변을 듣던 맥코이는 거둬 먹인 보람이 없다며 커크의 등을 한 대 갈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엔터프라이즈가 두 번 유인 행성이나 기지에 정박하는 동안 커크는 두 번 원나잇을 했고,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승무원들을 모두 거절했으며, 통신상으로긴 하지만 끈질기게 구애해 오는 귀여운 청년의 관심을 즐겼다. 어머니와는 짧은 문자 메시지 외에는 연락을 하지 못했다. 마지막 통화로부터 정확히 여덟 달과 이틀 뒤, 현재로부터는 한 달하고 보름 후면 그의 생일이었다. 커크는 거의 방심 상태에서 그 날짜를 기다렸다. 그의 생일이 그를 습격할 복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어떤 수를 써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고 믿는 것처럼. 이런 그의 상태를 아는 사람은 맥코이 뿐이었지만 그는 꼬박꼬박 차나 타다 줄 뿐, 그 외에는 대체적으로 냉담한 것인지 배려하는 것인지 모를 침묵을 지켰다.
"우울해 보이는군, 짐."
퍼붓듯이 내리는 폭우가 창을 두들겼다. 가끔씩 엄청난 에너지를 담은 번개의 빛이 낮은 조명으로 밝혀진 실내로 침입했다가 사라진다. 너무나 밝아 오히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하는 빛. 견고한 기지의 방음은 완벽했으나 커크는 창 밖에서 노호하는 행성의 울부짖음을 들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스팍의 말은 그렇게 시끄러운 고요함의 일부분인 것처럼 가만히 그의 귓가를 쓰다듬었다. 커크는 부러 밝은 웃음을 지으려다가 포기했다. 스팍에게까지 위장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보여?" "그래. 최근 한 달 정도."
커크는 적절한 대답을 찾다가 실패하고는 다시 창으로 눈을 돌렸다. 지상으로부터 55백 미터 상공, 궤도 엘리베이터 위에 지어진 이 기지는 우주항이 자리한 차갑고 고요한 외부 대기권과 그 어떤 항구적인 구조물도 불가능하게 하는 격정적인 바다 중간에 위치했다. 육지에도 기지가 있었으나 우주항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승객은 굳이 지상까지 내려가기보다는 이곳을 선호했다. 가벼운 보수 작업을 위해 잠시 정박한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도 마찬가지여서 어둑한 라운지 곳곳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모여 담소하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졌지만 스팍은 굳이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커크가 그를 이해하게 된 것만큼 스팍의 커크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그가 느끼는 감정의 복잡한 출렁임을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같은 때 억지로 끌어내는 대답이 무용함을 알 정도로는. 두 사람은 요즘 종종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일을 하면서 가끔씩 오가는 한두 마디로 상대의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 말이다. 엔터프라이즈라는 공동체를 함께 책임진 이들만이 나눌 수 있는 단단하고도 풍성한 시간, 둘 모두 사랑하게 된 시간이었다. 편안한 침묵은 다소 당황스러운 방식으로 깨졌다. 커크는 느닷없이 그들의 공간에 들어와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무례한 이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제프?"
아름다운 남자였다. 투명한 푸른 빛이 도는 검은 머리칼은 우주의 가장 정순한 어둠을 모아 빚은 것 같고, 깊은 갈색 눈동자에서 뾰족한 턱끝으로 미끄러지는 선은 벌칸의 가장 숙련된 장인이 벼려낸 검 같다. 커크가 보자마자 눈독을 들였던 미모는 긴 여행을 거친 듯 구깃해진 옷차림에도 전혀 가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왜 여기에 있는가. 그래서는 안될 사람이었다. 커크의 놀라움을 눈치 챈 스팍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근래에는 보기 힘들었던 칼날 같은 눈빛이었다.
"함장님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람입니까?" "아.... 그래. 아는 사람이야." "이 기지에서 일하거나 스타플릿의 탐사 임무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자입니까?" "그건 아니..... 아니, 잘 모르겠어. 아닐 거야." "그럼 임무와 관련 없는 외부인에게 엔터프라이즈의 항해 계획이나 행선지를 밝힌 것입니까?" "당연히 아니지! 날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스팍?"
커크를 보며 환한 미소를 띠던 앳된 청년은 두 사람의 싸늘한 반응이 의외였던 듯 당황한 기색이 되었다. 찌를 듯 날카로운 눈빛을 청년에게 돌린 스팍이 몸의 무게 분포를 아주 약간 바꿨다. 당장 튀어오를 태세로 도사린 뱀처럼. 커크는 황급히 그를 가로막듯 말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제프?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제프는 스팍의 무표정한 얼굴과 사나운 기세에 겁을 집어먹은 듯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커크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스팍에게 눈짓을 했다. 위압감이 다소 줄어든 다음에야 청년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스타플릿 본부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설마 친분을 이용해 기밀을 캐낸 거야? 날 만나려고? 맙소사." "아니! 아니에요! 그 사람이 준 건 몇 가지 암시 뿐이에요. 나머지는 내가 신문을 보고 짐작해낸 거예요! 맹세코 불법은 저지르지 않았어요! 믿어줘요!"
엔터프라이즈의 구체적인 행선지와 항해 계획은 당연히 기밀이다. 실제로는 우주 곳곳과 사적 통신을 주고받는 승무원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느 방면에 있는지 정도는 대략적으로 알려지지만, 어디에 언제 들르고 떠나는지는 정박이 임박해서야 승무원들의 직계 가족에 한정되어 알려지는 정보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함장의 하룻밤 상대야 당연히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커크는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다시 만나자고 조르는 제프를 좀 심하게 약올리긴 했었다. 그래봤자 답신하는 간격이 다소 불규칙해지고, 유인 기지나 연합 행성에 들르게 되면 알려달라는 요구에 애매하게 대답한 정도였지만. 아무리 몸이 달았기로소니 설마 정말 쫓아오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스팍은 여전히 예리한 시선을 커크와 제프에게서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가 말을 잇기 전 커크가 선수를 쳤다.
"우후라가 왔는데, 스팍."
라운지의 입구에 우후라의 날씬한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스팍은 이 기지에 배치받은 지인을 만나러 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돌아보는 대신 눈썹을 더욱 찌그러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커크가 먼저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하겠어. 내 책임이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돼."
스팍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커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팽팽한 기세 싸움에서 이윽고 스팍이 양보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짐." "고마워." "사후 처리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설명 정도는 기대하겠네."
우후라와 스팍이 인사를 하고 떠나간 후에야 커크는 어깨의 힘을 뺐다. 그동안 제프는 강아지 같은 눈을 한 채 푹신한 의자에 몸을 잔뜩 구겨넣고 있었다. 커크는 한숨을 삼키면서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정말 이상한 짓 한 거 알아?" ".....내가 많이 잘못한 건가요?" "나는 함장이야. 방금 간 그 사나운 친구는 부함장이고. 배의 안전에 관련된 문제라면 예민할 수밖에 없어."
제프는 꾸지람을 들은 강아지처럼 풀이 죽었다. 처진 눈매를 보자 커크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내리는 비에 눅눅하게 젖어 있던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키엘류다 기지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것 맞지?" "그래요. 급히 휴가를 냈어요. 당신은 내가 보낸 메시지에는 대답도 안 하고.... 너무했다고요. 여기까지 오면서 내가 온갖 생각을 다 한 거 알아요?"
솔직하다. 커크는 무릎에 놓여 있던 패드를 접어 치우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말 그대로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일이었지만 화를 낼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맥코이가 알았다면 뭐라 했을까. 작작 하라며, 자업자득이라고 한 대 때렸겠지. 커크는 미간을 문지르면서 제프에게 웃어 보였다. 우아한 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눈매에 청년의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
"그래, 내가 미안해. 인정할게. 이왕 이렇게 만났으니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먼 길을 달려오면서 내 생각 했을 거 아냐?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테고. 말해봐. 들어줄게."
보드라운 뺨이 새빨개진다. 문득 커크는 저 뺨을 깨물던 감촉을 떠올렸다. 술 때문에 어렴풋하기만 한 기억이었지만. 그때는 대화할 정신도 없었기 때문에-여러 가지 의미로- 잘 몰랐지만, 침대에서는 그가 버거울 정도로 사납던 남자가 이렇게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의외이면서도 매력적이었다. 그간 오간 통신에서도 귀여운 남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보니 더 사랑스럽다. 커크 쪽으로 몸을 기울인 제프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럼 오늘 저녁은 나한테 내줄 수 있어요?" "뭘 하고 싶은데?" "많죠."
커크는 웃으며 잘 생긴 청년이 잡아끄는 대로 몸을 일으켰다.
"좋아."
당장 침대로 끌려들어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의 손을 꼭 잡은 제프가 향한 곳은 기지 밖으로 나가는 외부 출입구 쪽이었다. 그들이 지상으로 내려가는 리프트를 타자 기지의 관리 요원들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프트의 전면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여전히 회색과 검은색으로 으르렁대는 비바람의 세계였다. 라운지와는 달리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악천후의 풍경에 커크는 조금 질린 채 물었다.
"어딜 가는 거야?" "재밌을 거예요."
창에서 한 발 물러난 그를 귀엽다는 듯 뒤에서 껴안은 제프가 드러난 목덜미에 키스했다. 등골을 스치는 소름 같은 감각에 커크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이 모습을 부하들이 보지 않기를 바라는 한편, 지금 이 자리에서 등뒤의 남자를 덮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워낙 고도가 높기에 리프트는 거의 삼십여 분을 달려 지상으로 내려갔다. 커크는 높이가 어느 정도 낮아지자 비구름이 걷히고 날씨가 맑아지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리프트의 문이 열리자 닿아오는 행성의 공기는 얼어붙을 듯 차가우면서도 신선한 습기를 품어 청량했다. 커크는 저도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독특한 흙의 냄새를 품은 대기가 그의 폐부까지 맑게 씻어내리는 듯했다. 제프는 그런 커크를 보고 웃으며 손을 잡아끌었다. 엄청난 굵기로 하늘을 꿰뚫는 것처럼 선 궤도 엘리베이터의 기둥을 돌아가자, 비바람이 덜 들이치는 곳에 검은 포장을 씌운 무언가가 보였다.
"아무도 없는 땅을 당신과 단둘이 달려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죠."
포장을 벗겨내자 모습을 드러낸 구식 자동차를 본 커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골동품에 향수를 가진 사람이 많은 지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되었으면서도 잘 보존된 작품이다. 어린 시절 그가 몰고 나가 벼랑에 던져버렸던, 외삼촌이 애지중지하던 차도 이 정도의 마스터피스는 아니었다. 제프는 그의 볼에 입맞추고는 자동차 열쇠를 건넸다.
"우리 신나게 달려봐요. 운전하는 법은 알아요?" "대강은. 하지만 모르더라도 배워서 할 거야."
대체 어떻게 이 엄청난 물건을 여기까지 가지고 왔을까. 커크는 새삼 눈앞에서 웃고 있는 청년의 정체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자동차가 먼저다. 그 다음은 섹스일 테고, 스무고개는 나중에 시간 날 때 하지 뭐. 운전석에 앉은 커크는 늘 이런 차를 몰고 다닌 것처럼 능숙하게 시동을 걸었다. 자동차는 투레질을 하는 물소처럼 몇 번 튀어오르더니 무인 행성의 흙길을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커크는 뻐근한 어깨가 호소하는 통증에 깨어났다. 두어 시간을 신나게 달리고, 바람이 견딜 수 없이 추워져서 잠시 차를 세우고 바람막이를 꺼내 걸쳤다. 그리고 차 안에서 제프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설핏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고공 기지에 일거리와 읽을 책을 싸들고 내려올 때만 해도 몰랐는데 은근히 피로가 쌓였었던 모양이었다. 커크가 움직이자 그에게 팔베개를 해준 채로 잠들었던 제프도 눈을 떴다.
"일어났어요?" "아....."
왠지 민망한 기분이다. 커크는 굳은 목을 푸는 것처럼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사위를 휩싼 새카만 어둠, 아스라하니 먼 산맥의 한쪽에서, 이 세계의 유일한 인공적인 빛인 스타플릿 지상기지의 불빛이 점이 되어 반짝인다. 그리고 별, 별, 별. 사납게 으르렁대던 비구름은 자취를 감추고, 대신 깨끗이 씻긴 유리 같은 하늘에 수억 개의 별이 매달려 있었다. 커크는 넋을 잃고 그 어떤 지성체의 손도 닿지 않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거 알아요? 당신은 늘 내가 아닌 다른 것만 본다는 거."
허리를 감은 손이 그를 끌어당겼다. 뜨거운 입술이 이마에, 감은 눈 위에, 목덜미에 떨어진다. 커크는 제프의 목을 감고 키스하려 했지만 남자는 약을 올리는 것처럼 커크의 목에 멍을 새겨넣을 뿐 입술을 내주지 않았다. 젖혀진 시트가 성인 남자 두 명의 무게를 받아안으면서 삐걱거린다. 짙은 살 내음과 오랜만에 가깝게 다가오는 체온에 머릿속이 확 달아올랐다. 커크는 간신히 제프의 옷 여밈을 찾아내어 손을 밀어넣으며 가늘게 신음했다. 손가락에 닿는 허리가 움찔하더니 경직한다.
"......"
곧 커크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응답할 때까지 울리겠다는 듯 끊임없이 호출음을 내는 통신기. 제프가 긴 한숨을 내쉬며 그의 위에서 내려가 보조석에 사지를 늘어뜨리고 드러누웠다. 커크는 그에 대한 미안함과 상황에 대한 민망함, 그리고 하필 지금 그를 찾는 통신기 너머의 사람에 대한 살의를 느끼며 거칠게 작은 기계를 잡아챘다.
"커크입니다." -함장님. 스팍입니다.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에 차마 심통을 낼 수가 없다. 커크는 흘끗 제프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목소리를 다듬어 대답했다. 눈이 마주치자 제프는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그래. 무슨 일인가? 시간이 늦었는데." -본부로부터 새 임무 지시가 왔습니다. 티낙시 성계 방면에서의 외교 업무입니다. "알았어. 곧 가지."
스타플릿의 함장 급에게 주어지는 외교 임무라면 적어도 행성 간 연락 정도는 된다. 커크는 급히 머릿속을 뒤졌지만 티낙시 문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돌아보자 제프는 이해한다는 듯 손을 뻗어 그를 껴안을 뿐이었다. 커크는 순간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미스터 스팍." -Yes, captain. "일정을 바꾸지. 어차피 스카티와 기술부가 보수 작업을 마치는 데 내일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 모레 아침 10시까지 출항 준비를 완료하도록 전 승무원에게 고지하도록. 나는 내일 저녁 6시까지 복귀하겠네."
통신기 너머의 스팍은 한동안 침묵했다. 외교적 임무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느니, 본부에서 함장의 응답을 기다릴 거라느니 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커크도 이미 알고 있을 그런 사항들을 침묵으로 상기시키려는 듯했다. 그러나 커크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럼 내일 보지. 사전 준비를 부탁해." - ......알겠습니다.
통신을 끊은 커크는 통신기를 차의 수납함에 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제프가 키득대면서 바짝 끌어안아 왔다. 좁은 차 안에서 어떻게든 옷을 끌어내리는 짓궂은 손에 협조하면서 커크는 어둠 속에 가라앉은 지평선을 흘끗 보았다. 물러갔던 폭풍이 돌아오고 있는지 보랏빛으로 찢어진 하늘의 틈이 보였다.
그날 그들은 지상기지의 작은 호텔에 머물렀다. 사람이 거의 없는 호텔의 꼭대기층에서 커크는 창에 온몸을 부딪치며 울부짖는 폭풍을 보았다. 라운지에서 보던 광경과 달리 안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온기 때문이리라. 잠든 남자와 살을 맞댄 채 커크는 내일의 임무를 생각했다. 티낙시 성계를 지나면 강대한 피보난 공화국, 그리고 그 너머에는 스타플릿의 최전방 기지이자 수백만이 사는 첨단 도시인 요크타운이 있다. 지구를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검은 우주를 유영하는 하얗고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엔터프라이즈를 떠난다면.
문득 든 생각에 커크는 움찔하지도 소스라치지도 않았다. 그저 공상했다. 배를 떠나 정착한다면. 한 곳에 머물면서 삶을 가꿔나간다면. 지금 그를 안고 있는 남자도 좋고 다른 사람도 좋다.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서, 조그만 집에서 같이 머물며 아이를 기르는 삶. 그의 어머니가 꿈꾸었으나 가질 수 없었던 인생. 어머니는 우주에서 아버지를 잃었고 그 후로 다시는 그와 같은 사람을 찾지 못했다. 심지어 아들조차 그 빈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다. 온 세계가 그를 아버지의 대용품으로 보는데 그가 정말 그렇게 되기를 소원했던 단 한 사람에게만은 아니었다. 어린 지미가 삶을 찾아 정착하고 나면 어머니는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제프가 뒤척이더니 그를 더욱 바싹 끌어안았다. 따뜻한 몸을 마주 안고 커크는 눈을 감았다. 아이오와에 갇혀 살았던 시절 우주는 그에게 아버지를 의미했었다. 처음에는 쳐다도 보기 싫었고, 그 다음에는 정복욕을 불태웠었고, 도전하여 승리하고 마침내 가장 먼 개척지까지 나아갔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평생 잡히지 않는 허상을 쫓아 산 것이었다. 어머니가 평생 세상에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것처럼. 이제 텅 빈 우주를 떠나 지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옛날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끔찍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창 밖에서 번개가 울었다. 천지를 밝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빛이 우주에서 길을 잃고 지상에 내려와 잠든 선장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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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Trek] 상처
쏟아져 들어온 암흑이 어둑한 빛에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몇천 광년의 넓은 우주를 다니면서 수없이 많은 하늘을 보았지만, 체콥이 가장 사랑하는 하늘은 역시 이곳에서 이 시간에 보는 하늘이었다. 베타 시프트가 끝날 무렵, 함교의 조타석에 온몸을 늘어뜨린 채 보는 하늘. 인적 드문 고요한 함교에서 배가 내는 기계음은 졸린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린다. 잠들어야 하는 '밤'이라고 정해진 시간이었지만 그마저도 꽉 짜인 일상에서의 기분 좋은 일탈처럼 느껴지곤 했다. 온몸에 번지는 피로를 즐기며 체콥은 아름다운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했다. 즐거움의 순간이 많지는 않았다. 그는 본래 알파 시프트 근무조였고, 지휘부 소속이었기에 경험을 쌓기 위해 두어 달에 한 번씩 베타 시프트의 함장 대리를 맡을 뿐이었다. 긴급상황에서는 -커크나 스팍이 브릿지로 올 때까지, 라는 단서가 붙지만- 배 전체를 지휘해야 하는 중대한 자리였으나 체콥은 아직까지 자신의 함장 역할에 대해서는 막연한 느낌밖에 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비상 상황에서 커크를 대리한 적 있는 술루와는 달랐다. 아직 나이가 어리니 커크도 스팍도 딱히 뭐라 한 적은 없었지만, 슬슬 체콥 자신이 좀더 신경써야겠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이제 스물 넷. 선배인 술루가 최초로 함장 대리를 했던 나이를 지나면서부터는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그런 한편으로는, 아무리 애써도 함장석에 앉은 그 자신의 모습에 생각이 이르면 물에 젖은 종이처럼 집중이 흩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체콥은 지금의 자리, 그의 손으로 배를 움직이고 기계를 어루만지는 조타수의 자리가 좋았다.
"미스터 체콥."
들어선 사람은 스팍이었다. 그의 딱딱한 부름도 이제는 정겹게 느껴진다. 그만큼 함께한 세월의 눈금이 늘어났다. 체콥은 조타석에서 일어서며 돌아보았다.
"일찍 오시는군요." "함장님이 오늘은 조금 늦을 예정이라서. 이만 가서 쉬게." "예."
스팍이 함장석에 앉아 콘솔을 두드리자 알파 시프트의 시작을 알리는 버저음이 울리고, 최소한의 조명만 있던 브릿지가 확 밝아졌다. 분분히 들어서는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으며 체콥은 마지막으로 전면창 너머에 아쉬운 시선을 던지고는 터보리프트에 올랐다. 닥터 맥코이로부터 정기 검진 관련 메시지를 받은 것이 어제였다. 쿼터로 가기 전에 메디베이에 들를 생각이었다.
환하게 밝혀진 메디베이에 들어섰을 때 체콥은 커크가 왜 시프트에 늦는지 알게 되었다. 맥코이는 이른 아침부터 환자를 보고 있었고, 체콥이 커튼을 젖히다 말고 주춤하자 눈짓만으로 인사를 해 보였다. 그러자 맥코이 앞에 앉아 있던 커크가 돌아보았다.
"Good morning, Mr. Chekov." "아... 안녕하십니까, 함장님." "잠깐 그쪽 베드에 앉아 있어. 얘 좀 봐주고 금방 갈게."
'얘'는 맥코이의 무례한 호칭에도 실실 웃기만 했다. 체콥은 따라 미소지으며 옆에 있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맥코이와 함께 있을 때 커크는 마치 아이처럼 종알거렸다. 맥코이가 왜 함장이 아닌 친구, 아니, 어린 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챙기는지 알 것 같은 모습이었다.
"왜 네가 꼭 탐사 임무를 가야 하는데?" "정말 오랜만에 만난 지구형 행성이잖아! 게다가 물도 있고, 라티늄 채굴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정말 재밌을 거야." "그놈의 재미 때문에 벌써 넉 달째 고생하고 있는 건 다 잊었냐?" "이거야 뭐...... 몸 생각하다 보면 방에서 나가지도 말아야 할걸. 네가 잘 고쳐주면 되잖아, 응?" "나한테 떠넘길 생각은 집어치우세요, 함장님. 그보다는 함장답게 점잖게 구는 법을 배우면 어떨까?"
늘 부산스러울 만큼 활기찬 모습에서는 연상하기 쉽지 않았지만, 커크는 천여 명에 달하는 크루 중에서도 가장 잔병치레가 많은 사람이었다. 철철이 유행하는 감기-인류가 영원히 박멸하지 못할 것이라 일컬어지는 유서깊은 질병-는 어김없이 앓았고, 별별 희한한 물질에 고루 알러지가 있었고, 선내에 피부병이나 눈병 같은 전염성 질환이 돌면 가장 먼저 걸리고 가장 늦게 낫곤 했다. 그러면서도 도무지 몸을 아낄 줄 몰라서 맥코이는 친구의 무모함에 화가 날 때면 커크를 걸어다니는 우주의 박테리아 배지라고 불렀다. 오늘 아침에는 저번 탐사임무 때 얻은 세균성 피부병이 재발해서 메디베이를 찾은 모양이었다. 처음 진단받은 것이 벌써 넉 달 전인데 나은 듯하면 다시 증상이 나타나니 맥코이가 신경질이 날 법도 했다. 체콥은 예의바르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맥코이가 시키는 대로 소매를 걷어올린 커크의 팔을 보고는 그만 숨 삼키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두드러기처럼 벌겋게 올라온 환부는 곁눈질로 슬쩍 보기에도 아파 보였고 긁어댔는지 여기저기 피딱지까지 앉았다. 그런 염증이 팔 전체를 덮고 있었다. 맥코이는 이를 북 갈아붙였다.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바로 오라고 했잖아! 이게 뭐야?" "나도 아침에야 발견했어. 좀 가렵긴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웃기지 마. 가려움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몰랐다고?!"
커크는 웃는 얼굴 그대로 어깨만 으쓱했다. 맥코이는 험악한 말들을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치료를 시작했다. 손에 든 의료용 트라이코더가 연신 삑삑거리는 소음을 냈다. 푸른빛과 초록빛을 오가는 광선 아래서 조금씩 염증이 가라앉고 피부가 제 색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커크는 목에 무리가 갈 정도로 몸을 틀어-"좀 가만히 있어, 짐!"- 체콥을 돌아보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체콥. 그냥 피부병일 뿐이니까."
저도 모르게 입술을 모으고 정신없이 치료를 보고 있던 체콥은 깜짝 놀라 머리를 수그렸다. 커크가 유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본즈가 치료해 주고 나면 괜찮을 거야. 내일 기대하고 있으라고." "야, 이 자식아!"
맥코이의 포효에 슬쩍 이쪽을 들여다 본 간호사 하나가 익숙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체콥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일어나 따라가면서 체콥은 조금 웃고 말았다. 따발총처럼 이어지는 닥터의 폭언에 발랄하게 대꾸하는 함장의 목소리를 듣노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애하는 함장의 말대로 내일 탐사는 매우 재미있을 것���고, 피부병 같은 것 때문에 재미를 놓치다니, 스타플릿 대원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일의 탐사에는 커크 외에도 스팍과 체콥, 그리고 열댓 명의 과학부와 보안부 대원들이 참여할 예정이었다.
행성은 크고, 매우 물이 많았고, 다세포 생물은 거의 없었고, 대신 온갖 광물이 토양과 바다에 갖가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맥코이의 기준으로는 끔찍한 행성이었다. 흐물거리는 진흙으로 이루어진 땅이 내디딜 때마다 발목을 잡아챘기 때문이다.
"본즈가 하는 말 듣지 마, 체콥. 본즈는 지구 외에는 다 싫어하니까." -그러는 너는 왜 지구 빼고는 다 좋아하는데?
커크는 깔깔거리며 아이처럼 웃었다. 원래 함을 떠나는 탐사 임무 때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발랄해지는 함장이었지만 오늘은 유별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반대로 탐사 때면 과하게 진중해지는 스팍이 그런 커크를 흘끗 보고는 묵직한 저음으로 말했다.
"제가 있으니 굳이 함장님까지 오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닥터의 진단으로는 함장님의 감염 질환이 자가면역 이상으로 발전했다고 하더군요. 함에서 쉬시는 편이 논리적입니다." "이런 수다쟁이 같으니. 환자의 신상 정보를 아무데나 흘려도 돼, 닥터?" -지랄한다. 나한테 의료 윤리 따지기 전에 의사가 말하면 듣기나 하시지.
체콥은 질척이는 발 밑의 진창에 신경쓰느라 그들의 대화는 반쯤 흘려듣고 있었다. 진흙의 깊이는 대개 발등까지 올라오는 정도였지만 종종 종아리나 그 이상까지 빠지는 곳이 있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걷기 시작한 지 9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피로가 느껴졌다. 저만치 둔덕이랄 수 있는 지형이 보였다. 온갖 색깔의 진흙을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것을 언덕이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바다와 육지는 거대한 흙탕물의 늪지로 경계를 이루고, 평지와 언덕의 명확한 구별이 없는, 굉장히 기이하면서도 불쾌한 느낌을 주는 행성이었다. 잠시 멈춰서 진흙에서 발을 뽑아낸 체콥은 커크가 이것을 예상하고 동행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필요한 말 이상은 하지 않는 스팍이 리더였다면 분위기가 상당히 가라앉았을 것이다. 앞장서서 걷던 커크와 스팍이 진흙더미인지 언덕인지 모를 지형 앞에서 동시에 트라이코더를 뽑아들었다.
"길이 갈라지는군." "붕괴의 위험은 없군요." "지형이......"
몇 분 동안 트라이코더 화면을 들여다보던 커크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체콥은 그를 흉내내듯 끈적거리는 흙이 조금씩 흘러내리고 여기저기 뭉친 경사면을 바라보았다. 스팍이 말했다.
"이만 철수하고 항공 정찰로 대신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도 괜찮겠지만..... 조금 더 가 보도록 하지. 분석상으로는 사면을 넘어가면 좀더 단단한 토질이 나온다고 하니까. 셔틀이 착륙할 수 있는 지형이 있을지도 몰라."
스팍은 별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원들 중 몇 명을 불러들였다. 체콥은 나머지 대원들과 함께 커크를 따라갔다.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자 땅이 좀더 단단해지면서 걷기가 수월해졌다. 하지만 울쑥불쑥 솟은 산들 때문에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단단한 곳을 골라 뛰고 디디면서 커크는 말했다.
"조금 있다 통신하지, 본즈. 지금은 걷는 데 신경써야겠어." -영원히 안해도 괜찮으니까 어디 긁혀 오지나 말아, 이 골칫거리야.
대답하기도 전에 끊겨버린 통신기를 챙겨넣으며 커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닥터가 나한테만 너무 박하게 굴지 않아?"
그러니 말 좀 잘 들으세요. 체콥의 뒤에서 누군가 대꾸했고 왁자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체콥은 피식거리며 커크가 남긴 발자국을 밟았다. 진흙 산은 점점 더 높아지고 길은 더욱 가팔라졌다. 특수 작업화를 신고 있는데도 발을 떼기가 힘든 구간까지 있었다. 20여 분 정도 힘든 행군 끝에 결국 커크는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추게 했다.
"더 이상 진행할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안정적인 지형이 안 보이는군. 이만 철수해서 B팀과 합류하지." "Yes, sir."
대답은 일사불란하게 했지만 좁은 길에서 돌아서 내려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앞의 대원이 움직이는 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던 체콥이 마침내 걸음을 옮겼을 때, 조금 전까지도 단단하던 땅이 쑥 꺼졌다. 발을 헛디딘 그는 그대로 가파른 언덕을 데굴데굴 굴러 아래의 강인지 늪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졌다. 입 속으로 들어온 뻘을 뱉어내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 하얗게 질린 커크가 경사면을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체콥은 감탄했다. 사람보다는 사슴에 가까워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넘어져서 다리를 부러뜨릴 가능성 따위는 생각도 안 한다고 말하는 듯한, 커크만이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
"저는 괜찮습니다, 함장님! 조심해서 오...."
웃으며 말하던 체콥은 창백해진 커크의 눈이 그의 얼굴이 아닌 좀더 뒤쪽에 못박혀 있음을 알아차렸다. 무릎까지 차오른 검은 진흙이 부글거렸다. 체콥은 급히 몸을 일으키다 넘어지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던 기척이 느껴진다. 늪 속에 무언가가 있었다.
"체콥!!!"
통신기가 울렸을 때 B팀의 선두에 선 스팍은 A팀과 반대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길이 없어 합류 지점으로 돌아간다는 커크의 연락을 받고 이쪽도 슬슬 철수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스팍입니다." -부함장님? 빨리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무슨 일인가, 중위?"
그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통신을 넣은 중위가 아니었다. 통신기 너머로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아챈 스팍의 검은 눈동자가 얼어붙었다. 갑자기 끊어진 비명, 혼란에 빠진 대원들의 웅성거림. 더듬거리던 중위가 대답하기 전 스팍은 빠르게 말했다.
"지금 즉시 스캇 기관장에게 연락하게. 트랜스포트가 필요할지 모르니 준비하라고 해. 내가 바로 그쪽으로 가겠다." -Aye, sir!
통신기를 집어넣은 스팍은 발을 잡아당기는 진흙을 뿌리치며 달리기 시작했다.
한가한 시간이었다. 모처럼 환자도 없었고 다른 사람 세 명 분의 일거리를 안겨주는 말썽꾸러기도 잠시 함을 떠나고 없었다. 맥코이는 의료 기록들을 정리하고 의약품 재고를 점검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이맛살을 찡그리곤 했다. 오늘 아침 커크는 피부병이 더 심해졌으니 가지 말고 쉬라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나가버렸다. 아카데미 시절에는 어렸다는 변명이라도 있지, 벌써 십 년도 더 지났는데 언제나 철이 들려는지. 그렇게 생각하는 그에게 바로 그래서 짐 커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묻는다면 맥코이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딴청을 피웠을 것이다. 십 년. 맥코이는 잠시 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첫 번째 배가 난파한 후 엔터프라이즈의 이름을 얻은 두 번째 배, 그동안 대대적인 개수도 세 번이나 있었지만 어느새 손때 묻은 일상의 냄새가 날 정도로는 낡은 메디베이였다. 청소 로봇들이 늘어선 침상들에서 먼지를 털어내고 때로는 새 커버를 씌우는 모습을 잠시 멀거니 보던 그는 씁쓸하게 인정했다. 이제 이곳이 그의 집이었다.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미래였었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눈앞의 작업으로 돌아간 그의 이마에는 여전히 한 가닥 주름이 있었지만 입가에는 어렴풋한 미소가 떠돌았다. 커크를 나무랄 때도 그런 기색이니 커크가 말을 안 듣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한다면 그는 역시나 못마땅한 기색으로 딴청을 부렸을 것이 틀림없다. 고요를 깬 것은 통신기의 요란한 알림음이었다. 이 녀석이 또 헛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임무에나 집중할 것이지. 맥코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손만 뻗어 통신기를 집어들었다.
"맥코이입니다." -닥터. 지금 바로 5번 트랜스포터 룸으로 와주십시오. 부상자가 있습니다. "바로 가지."
스팍의 음성은 비교적 담담했지만 맥코이는 심상치 않은 사태임을 직감했다. 엔터프라이즈에는 트랜스포터가 여섯 기 있다. 6번 기는 화물용으로만 사용되고, 5번 기는 함내의 다른 구역과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격리검역이 필요한 물품이나 사람을 수송할 때 쓰인다. 1번부터 4번 기에도 외부의 이물질을 차단하는 간단한 장치는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5번 기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엄중한 격리가 필요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의미였다. 부상자라니. 의료부 선원 두 명과 함께 달려가는 맥코이의 심장은 어느새 세차게 뛰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오존의 냄새가 나는 투명한 방역장을 지나자마자 맥코이를 맞은 것은 엄청난 피비린내였다. 인체에서 갓 분출한 신선한 혈액의 내음이 아니었다. 썩어가는 피와 살점의 악취. 트랜스포터 패널 위에 전송된 모습 그대로 웅크려 앉은 스팍과 체콥, 그리고 그 앞에 길게 누운 이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맥코이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미끄러지듯 달려가 무릎을 꿇은 그에게 체콥이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늪 속에...... 괴물이....... 함장님이 저 대신......."
전원을 올리자마자 미친 듯이 경보를 울려대는 의료용 트라이코더를 움직이며 맥코이는 슬쩍 스팍을 쳐다보았다. 스팍이 간결하게 말했다.
"나는 직접 보지 못했어요. 내가 도착했을 때 함장님은 이미 이 상태로 의식이 없었습니다. 보다시피 미스터 체콥을 비롯해 다른 대원들은 당황해서 내게 설명을 해줄 여력이 없었고요. 내가 아는 사실은 늪에 사는 생물이 함장님을 덮쳤고 대원들이 페이저를 쏴서 그것을 쫓아내고 미스터 체콥과 함장님을 끌어냈을 때는 이미 두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다는 것뿐입니다. 휴대용 트라이코더로는 해당 생물의 존재도, 그것이 뿜어낸 독의 성분도 제대로 탐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알았어. 닥터 린, 미스터 체콥을 좀 봐주게."
넋을 잃고 스팍과 맥코이를 번갈아 보던 체콥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화들짝 놀랐다. 맥코이는 한 손으로 커크의 목덜미에 주사를 찔러넣으며 다른 손으로는 체콥의 어깨를 쳤다.
"정신 차려, 미스터 체콥!" "예- 예, 예."
커크의 부상만큼은 아니었지만 체콥의 상처도 상당히 컸다. 그는 괴생물의 독을 직접 맞지는 않았다. 커크를 끌어내면서 그 몸에 묻었던 독이 손에 닿은 정도였지만, 그 소량의 독은 체콥의 손가락 피부를 벗겨내고 군데군데 뼈가 드러날 정도의 심각한 화학적 화상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체콥은 손의 아픔 따위는 느낄 수도 없었다. 검은 늪 속의 괴물이 튀어오른 순간 커크는 그를 잡아채 몸으로 감쌌고,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체콥을 안전한 쪽으로 밀쳐내고 쓰러졌다. 귓가에 울리던 처절한 비명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맥코이가 체콥의 무릎에서 커크의 머리를 들어올려 조심스럽게 바닥에 뉘었다. 트라이코더가 한층 더 높은 옥타브로 빽빽거리기 시작했다. 상처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서바이벌 수트는 맹독에 전혀 기능을 하지 못하고 녹아내렸고 왼쪽 골반부터 대퇴부까지 피부와 근육이 한꺼번에 벗겨져 나가 뼈가 들여다보였다. 출혈이 엄청났지만 쏟아지는 피마저 독에 검게 삭아 있었다. 이미 완전히 의식이 없는 듯 핏기가 사라진 얼굴은 맥코이가 움직이는 대로 맥없이 흔들거렸다. 다물어진 입술은 푸르스름한 빛을 띤 보라색이었다. 쇼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문이 열리고 스캇이 뛰어들어왔다. 커크의 모습을 보고 짧게 비명을 지르며 손으로 입을 막은 그에게 스팍이 물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전부 귀환했나, 미스터 스캇?" "예, 트랜스포트 하자마자 곧바로 메디베이 격리실로 보냈습니다. 이건...... 이건 도대체....." "그럼 함장님을 일단 옮기고....." "그럴 시간도 없어."
맥코이가 제지했다. 어느새 그의 이마에도 진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
"맥박이 거의 안 잡혀. 일단은 출혈을 멈추고 심장이 제대로 뛰게 하는 게 급선무야. 강심제도 안 듣는군. 망할, 당장 여기서 응급 수술을 할 수밖에 없어. 닥터 린, 몇 명 더 여기로 오라고 해. 장비 다 갖추고."
체콥은 스팍이 이끄는 대로 일어나 트랜스포터 패널을 내려왔다. 다리가 나무토막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를 보는 스팍의 가라앉은 검은 눈이 마치 꾸짖는 것처럼 느껴져서 체콥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흰 옷을 입은 의료부 대원들 몇 명이 더 들어왔다. 모두 손에 온갖 기구를 잔뜩 들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는 이동식 침상을 끌고 있었다. 체콥은 잠시 붕대에 감긴 제 손을 보다가 다시 커크가 누워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발치에서 흐른 끈적한 액체가 패널의 가장자리에 닿아 작게 딱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잠시 멍하니 그것을 보던 체콥은 피에 섞인 독이 금속을 부식시키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몸서리를 치며 눈을 돌렸다.
사흘 휴가를 받았지만 체콥은 반나절 만에 함교로 복귀했다. 정확히 말하면 15시간 만이었다. 함장석에 앉아 있던 스팍은 눈밑이 거멓게 죽어 걸어들어오는 체콥을 보고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때 응급 수술을 마치고 메디베이로 옮겨진 커크는 두 번째 수술을 받고 있었다. 상세는 좋지 않았다. 목숨을 위협하던 출혈은 일단 막았지만 소량의 내출혈이 계속 있었고 상처에 화농이 고이면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독이 비교적 덜 닿은 상체와 팔, 목 등의 화상은 처치가 진행되며 아물기 시작했지만 문제는 다리였다. 재생 치료는 독이 퍼지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배양 세��는 이식되자마자 괴사했다. 맥코이는 결국 두 번째 수술에서 커크의 왼쪽 다리를 대부분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 함장석의 통신으로 들려오는 맥코이의 지친 목소리를 듣고 있던 체콥은 절단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스팍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그쪽으로 가지요, 닥터. 자세한 사항은 메디베이에서 의논합시다. 미스터 술루, 함교를 맡게." "예, 함장님." "미스터 체콥, 따라오도록."
손에 감긴 붕대를 만지작대고 있던 체콥은 놀라 튀듯이 일어났다. 스팍은 이미 리프트에 올라타 있었다. 급히 쫓아가며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지만 스팍은 무뚝뚝한 벌칸의 얼굴 그대로, 리프트에서도 메디베이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메디베이에 들어서자 하루만에 놀랍게 초췌해진 맥코이가 그들을 맞았다. 그들이 오는 사이 샤워를 했는지 새로 꺼내 입은 셔츠는 깨끗했지만 면도를 하지 못한 턱과 뺨은 파르스름했다. 껄끄럽다는 듯이 목덜미를 문지르던 맥코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기 벽지에서 벗어나 사람 사는 곳으로 가야 해." "무슨 의미입니까." "엔터프라이즈의 수술 기기로는 재생에 한계가 있어. 조금 더 상태를 지켜봐야겠지만 더 정밀한 기구가 필요해. 무슨 놈의 독이 이런지..... 세포 단위 치료로는 독이 완전히 제거되지를 않아. 분자 단위의 치료가 필요해." "그런 고급 기술이라면 단순히 유인 행성이라고 전부 있지는 않겠군요. 스타플릿의 유인기지가 워프로 이틀 거리입니다만 그곳에서는 안 되겠지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럴 거야. 그 작은 기지에 있는 병원이 엔터프라이즈보다 크게 나을 것 같지는 않군." "그렇다면,"
스팍은 옆에 놓인 콘솔을 끌어와 함교로 통신을 연결했다.
"미스터 술루,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유인 행성이 어딘가?" -Es935 행성이 최대 워프로 36시간 거리입니다. "그곳은 안돼. 거기 의학은 별볼일 없다고." -그 다음으로 가까운 대규모 정착지는 요크타운입니다. 최대 워프로 140시간 거리입니다. 하지만 중간 경로에 워프가 힘든 블랙홀 근처 공역을 지나게 됩니다. 30시간 정도는 워프 없이 통상속도로 운행해야 합니다." "그럼 9일은 걸리겠군. 닥터, 함장님이 그 기간을 버틸 수 있겠습니까?" "젠장, 해봐야지. 솔직히 모르겠어. 독이 어느 정도는 자연적으로 빠질 수도 있으니까. 당장은 바이탈이 안정적이니까 짐이 이대로 잘 버텨주기를 바랄 수밖에. 엔터프라이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처치는 다 했어." "수고했습니다, 닥터. 미스터 술루, 요크타운으로 항로를 잡도록." -Aye, sir.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체콥은 커크가 누워 있는 캡슐로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맥코이는 무균 배양액이 담긴 재생 캡슐에 커크를 넣어두었다. 계속 순환하며 체온을 유지해주는 배양액의 낮은 웅웅거림에 둘러싸여 커크는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다. 상처는 체콥의 손처럼 액체 붕대에 싸여 있었다. 파르스름한 눈꺼풀이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자네 잘못이 아니야."
어느새 다가온 맥코이가 불쑥 말했다. 체콥은 유리 너머로 보이는 창백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괜찮으시겠죠?" "그럼. 진짜로 죽었다가도 살아난 놈인데. 잘 버틸 거야. 자네 손은 어때?" "저는 괜찮습니다."
실은 괴로웠다. 커크가 맹독을 뒤집어쓰고서도 즉사하지 않은 이유는 그를 감싸느라 괴물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넘어진 채 비척대고 있었던 그가 그 독을 그대로 맞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그의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는 자꾸만 그 이상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넘어지지만 않았더라면. 좀더 재빠르게 몸을 피했더라면. 애초에 바보 같이 늪지로 굴러떨어지지만 않았더라면. 혼자 남겨진 밤을 그는 몸서리쳐지는 죄책감과 분노에 시달리며 보냈다. 듣지 않아도 이해한다는 듯 체콥의 등을 두드리는 맥코이의 어깨 너머로, 술루에게 지시를 내리는 스팍의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단 세 시간은 워프8로 진행하고, 미스터 스캇이 워프 코어가 이상없음을 확인하면 바로 9로 변경하도록. 닥터, 분견대를 파견할 필요는 없겠습니까?" "분견대? 뭔 분견대?" "독을 분석하고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해당 생물을 생포할 필요는 없는지 묻는 겁니다. 원격으로 트랜스포트하는 옵션도 생각해 보았지만 미스터 스캇은 난색을 표하더군요. 근거리의 트라이코더에도 잡히지 않는 생물을 위성 궤도에서 포착하여 수송할 방법은 없다고. 하지만 포획팀을 파견하면 가능합니다."
체콥은 어안이 벙벙해져 부함장의 냉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체콥과 똑같은 심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던 맥코이가 소리를 꽥 질렀다.
"짐이 저 꼴��� 된 걸 보고서도 대원들을 다시 그 진흙탕에 던져넣겠다고? 제정신이야?" "이번과 같은 사고가 다시 발생할 확률은 낮습니다. 반면 생포에 따르는 이득은....." "안 돼, 안 된다고! 독이라면 짐의 상처에서 뽑아낸 것도 충분히 많아! 그러니 이 지긋지긋한 우주를 벗어나서 요크타운에 빨리 도착할 생각이나 해!"
스팍은 입을 다물었지만 맥코이의 분노를 이해했다기보다는 독은 충분하다는 말이 합리적이라 생각해서 그런 듯했다. 체콥은 순간 그가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커크는 스팍을 좋아하고 신뢰한다. 그리고 체콥은, 비록 벌칸답게 표현은 적지만, 그런 애정과 신뢰는 쌍방향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애하는 사람이 생사의 기로에 선 상황에서도 일체의 감정적 동요를 보이지 않고 모든 선택지를 합리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의 배를 책임져야 하는 자리란 그런 것일까? 생각에 잠겼던 스팍이 문득 그를 바라보았다. 체콥은 황급히 눈을 떨구었다. 순간 마음 속에서 일어난 반감을 들킨 것만 같았다. 잠시 머물렀던 시선이 그의 어깨를 넘어 은은한 흰 빛을 뿜는 캡슐에 닿는다. 체콥은 아주 가느다란 한숨을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보았을 때 스팍은 변함없이 엄격한 표정이었다.
"그럼 나는 함교로 돌아가겠습니다. 상태에 변화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러지."
돌아선 스팍은 체콥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메디베이를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휘저은 맥코이는 벽의 대형 패널로 다가가 무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체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캡슐 옆에 주저앉았다. 이대로 쿼터로 돌아가더라도 스팍은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커크의 얼굴을 좀더 보고 싶었다. 커크는 그가 여기 있는지도 모를 테지만 상관없었다. 체콥 자신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72시간이 흘러갔다. 함선은 계속 워프8과 9를 오가며 순항중이었다. 워프10을 시험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이 기관부에서 나왔지만 스캇과 스팍은 불허했다. 계속 혼수상태인 커크의 상세는 아주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염증 때문에 오른 열이 떨어지지 않았고 면역체계가 무너진 틈을 타 평소 잠복해 있던 바이러스며 세균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맥코이는 커크의 몸 전체를 약물에 절이다시피 하고 나서야 커크를 지난 넉 달 동안 괴롭히던 세균이 순환계를 공격해 호흡곤란을 유발하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독 대부분은 제거되었지만 일부는 미세한 세포벽 안팎까지 파고들었고 꾸준히 상처를 잠식하며 퍼져갔다. 커크의 목숨은 아주 가느다란 실 끝에 매달려 있었고 그것이 언제 끊어질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모두가 초조해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기적이 일어나 항로 중간에 있는 블랙홀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74시간을 달린 뒤 엔터프라이즈는 블랙홀 근처 공역에 도달했다. 중간 크기의 블랙홀과 초신성이 되기 직전에 적색거성이 서로를 공전하고 있는, 이상 중력장과 뜨거운 성간 물질로 가득 찬 위험하기 짝이 없는 우주였다. 워프 속도가 클수록 중력에서 받는 영향이 커지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워프 속도를 대폭 낮추어야 했다. 위중한 환자만 아니었다면 이곳을 항로로 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엔터프라이즈는 워프2의 속도로 약 35시간을 운행해 공역을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체콥은 사흘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일만 했다. 맥코이가 오라고 한 시간마다 손을 치료받으러 메디베이로 가는 것을 빼면 휴식도 거의 취하지 않았다. 종종 옆에 앉은 술루의 근심스러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체 했다. 함장석에 앉은 스팍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을 텐데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역시 별로 쉬지 않았다. 내내 함교에서 함장 대리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기관부에서 스캇과 워프에 대해 의논하고 있거나 술루와 함께 항로 계획을 점검하고 수정했다. 체콥은 그가 자신처럼 메디베이를 찾지 않는 것에 의아함을, 나중에는 약한 분노마저 느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에 대해 화가 나는지 말하기 어려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스팍은 커크의 상태에 대한 보고는 꼬박꼬박 받고 있었다. 그저 직접 찾아가서 보지 않을 뿐이었다. 안그래도 비상 상황에 바쁜 부함장으로서는 합리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맥코이와 얘기를 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갈수록 눈이 퀭해지는 맥코이는 체콥이 메디베이에 들어설 때마다 커크 옆에 달라붙어 쉴새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스팍이 오는지 마는지는 신경쓸 시간도 없어 보였다. 체콥은 매번 커크의 얼굴을 한 번 들여다보고는 힘없이 몸을 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직 함의 상담의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가 꼭 받아야 하는 상담을 미루고 있다는 것 역시 모를 스팍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해서도 그는 말이 없었다. 상담의로부터 재촉하는 메시지가 날아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기묘한 정체는 위험지대로 접어든 지 12시간만에 깨졌다. 알파 시프트가 시작된 직후였으나 체콥은 두 시간째 조타석에 앉아 있었을 때였다. 메디베이로부터 함교에 통신이 들어왔다. 뜻밖에도 함장석이 아닌 체콥이 앉아 있는 조타석으로였다. 치료 일정이 바뀌기라도 했나? 체콥은 당황해서 통신을 연결했다.
"체콥입니다." -미스터 체콥, 부함장에게 허가 받고 당장 메디베이로 와. "닥터 맥코이? 무슨 일입니까?" -짐이 의식을 회복했어. 자넬 보고 싶어해.
함교 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체콥에게 쏠렸다.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체콥은 뭐라 대답도 못 하고 벌떡 일어나 달려나가다가, 리프트 앞에서야 함장석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스팍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리프트에 몸을 던지다시피 한 체콥은 메디베이까지 정신없이 뛰어갔다. 문이 열리자마자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캡슐은 열려 있었고 배양액 특유의 싸한 냄새가 체콥이 선 곳까지 밀려왔다. 맥코이 외에도 너댓 명의 사람들이 캡슐 위로 몸을 숙이고 있어 커크는 보이지 않았다. 다가가자 맥코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제기랄, 짐,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어! 체콥은 괜찮다니까! 자네보다 백만 배는 멀쩡하니까 안달하지 말고! 지금 그 몸을 하고 누굴 걱정하는 거야?"
대꾸하는 목소리는 낮고 쇠약해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체콥은 순간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지난 며칠간 누구의 목소리가 없었는지, 왜 함교가 텅 빈 것처럼 느껴졌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체콥은 사람들을 헤치고 맥코이 바로 뒤까지 다가갔다. 비로소 낯익은 색조로 빛나는 금발이 보였다.
"함장님....."
그의 미소는 중간에 얼어붙었다. 커크는 눈을 뜨고 앉아 있는데도 혼수 상태일 때보다 더 좋지 않아 보였다. 패널의 체온 수치는 39도를 웃도는데도 안색은 새파랄 만큼 창백했고, 이마와 뺨은 배양액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로 젖어 금빛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달라붙었다. 눈동자에는 또렷한 이지의 빛이 있었고 체콥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떠올렸지만, 그것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고통이 표정 한 겹 아래서 맴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허벅지까지 잘려나간 왼쪽 다리였다. 누워 있을 때는 캡슐의 패널에 가려졌기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이다. 급히 시선을 들었지만 커크는 이미 그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알아차린 후였다. 그가 애써 만들어낸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좀 보기 흉하긴 하지? 그래도 요크타운에 도착하면 본즈가 다시 달아 준다고 호언장담을 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체콥." "예........ 예, 함장님."
커크를 부축하고 있던 맥코이가 궁시렁거렸다. 내가 언제 약속했다는 거야. 커크는 그에게도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지만 끌어올린 입꼬리는 통증 때문에 이상하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맥코이가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됐지? 체콥이 팔팔하게 돌아다니는 거 소원대로 직접 확인했잖아. 그러니 이젠 누워." "아......"
커크의 시선이 메디베이의 문으로 향했다. 그가 무엇을 보는지 알 수가 없어 체콥이 몸을 돌린 순간, 문이 열리고 스팍이 들어섰다. 변함없이 차분한 걸음걸이다.
"미스터 스팍." "........"
스팍은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커크의 다른 쪽 어깨를 붙잡았다. 힘겹게 팔을 올려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는 커크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진한 안도감이 떠올랐다. 파란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검은 눈에 묘한 빛이 반짝인다. 삽시간에 밀려난 체콥은 알 수 없는 소외감을 느끼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커크가 부쩍 기운이 빠진, 거의 속삭이는 듯 낮아진 목소리로 ��었다.
"다들 무사하지?" "자네를 제외한다면, 짐." "엔터프라이즈도?" "순조롭게 항해 중이야."
이런 때도 스팍은 필요한 말 이상은 하지 않았다. 커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밀려드는 고통으로 젖은 이마가 일그러진다. 맥코이가 그를 눕도록 도와주며 인상을 썼다.
"통증이 심해?" "조금." "의사 앞에서 허세 부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그럼 왜 묻는 거야 하는, 평소의 커크였다면 바로 되받아쳤을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체콥은 검붉은 액체 몇 가닥이 붕대를 뚫고 흘러나와 배양액 속으로 풀려가는 것을 보았다. 맥코이가 패널에 떠오른 수치를 체크하더니 나직하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대로 의식을 잃을 것처럼 보였던 커크가 다시 눈을 뜨고는 맥코이를 올려다보았다. 맥코이는 찌푸린 표정을 거두고 대신 쓴웃음을 지으며 손으로 흰 이마를 짚었다. 아이를 재우는 아버지 같은 태도였다.
"그만 자. 한숨 자고 일어나면 요크타운일 거야."
커크는 착한 아이처럼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고통에 패인 미간의 주름은 펴지지 않았지만. 맥코이가 무언가를 입력하는 동안 다른 의사와 간호사가 부지런히 몇 개의 관을 연결하고 붕대를 다시 감았다. 필요한 처치가 끝나자 캡슐이 닫히고 배양액이 교체되었다. 맥코이가 한 발 물러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스팍과 체콥에게 다가와 나직하게 말했다.
"진통제가 듣지 않아. 출혈이 조금씩이지만 계속되고 있고. 조만간 약물과 재생 광선으로 독성에 의한 세포 파괴를 저지하는 것도 한계가 올 거야." "요크타운까지 갈 시간은 벌 수 있겠습니까?" "아슬아슬해. 그러니 서둘러 줘.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건 굳이 말 안해도 되겠지."
스팍은 고개를 끄덕였다. 캡슐이 웅웅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맥코이가 흘끗 돌아보고는 말했다.
"의식이 돌아올 정도의 상태라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조금 전처럼 일어나 움직이는 건 좋지 않아. 진통제가 효과가 없으니 고통도 극심할 테고.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인위적으로 혼수 상태를 유도해 두려고 해." "그러면 통증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신경 자체에 통각 신호가 전달되는 걸 막을 거야. 가사 상태 비슷하게 되겠지."
체콥은 입술을 짓씹었다. 맥코이는 그를 보고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잠시 입술을 뗐지만, 잠시 후 아무 말 없이 도로 다물었다. 대신 그는 두 사람 모두에게 짧게 말했다.
"바쁠 텐데 이만 가봐."
스팍의 통신기가 울린 것은 침묵 속에서 운행하던 리프트가 함교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체콥은 말없이 자신의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Yes?" -부함장님. 스캇입니다. 지금 기관실로 오셔야겠습니다. "알겠네."
통신을 끊은 스팍은 체콥에게는 묻지도 않고 리프트를 기관실로 향하게 했다. 그의 존재를 잊기라도 한 것인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굳이 동행하게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체콥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우울해져 생각을 접어버렸다. 어렴풋하게 지금 자신의 상태가 평상시 같지 않다는 자각이 들었다. 기관실에서의 일이 끝나면 바로 상담의를 찾아가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체콥은 잠자코 스팍을 따라 기관실로 향하는 통로를 내려갔다. 손에 든 커다란 패드를 휘두르며 연신 기관부 대원들에게 뭐라뭐라 소리를 쳐대고 있던 스캇은 그들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짐이.... 아니, 함장님이 정신이 들었다면서요? 저도 만나고 싶은데." "안타깝지만 지금은 다시 혼수 상태이네. 아주 잠깐 의식이 돌아왔던 것뿐이야." "그렇습니까? 이것 참."
입을 쩝쩝 다시는 스캇의 얼굴빛은 어두웠다. 활기 있는 몸짓과는 별개로 침중한 기색에 체콥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선이 저절로 스캇의 머리 너머, 위압적으로 버티고 선 워프 코어로 향한다.
"워프 코어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체콥의 귀에 스캇의 말은 마치 천둥처럼 떨어졌다. 하지만 스캇과 스팍 모두 그의 굳은 표정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스팍이 지난 나흘 동안 가시지 않았던 미간 주름을 더욱 깊게 하며 되물었다.
"이상이라니?" "높은 속도를 장시간 유지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냉각 효율이 떨어졌어요. 당장 워프를 쓰지 못할 고장은 아닙니다만 하루 후면 워프8을 걸어야 하잖습니까." "정확히 22시간 후지. 그게 어렵다는 말인가, 미스터 스캇?" "아마도요. 낮은 워프로 가는 동안 최대한 손보기는 하겠지만 효과가 있을지는 통상 속도를 걸어봐야 알 수 있습니다." "해당 시험운행은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으로 예상하는가?" "워프5에서 6 정도로 적어도 대여섯 시간은 달려봐야 합니다. 코어 과열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해야 안심하고 8 이상으로 올릴 수 있습니다.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속도를 올렸다가 사고가 나기라도 하면......" "끔찍한 사태가 초래되겠지. 함장님의 생명이 위험해질 테고."
스팍은 스캇이 내민 패드를 받아들어 훑어보기 시작했다. 체콥은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워프6로 다섯 시간이라니. 그렇다면......... 멍하니 선 그의 옆으로 다가온 스팍이 같이 워프 코어를 올려다보았다.
"열 시간에서 열다섯 시간의 지체는 각오해야 한다는 말인가. 어쩔 수 없지."
체콥은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의 앞에 놓인 탁자에는 밤샘의 결과물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머릿속의 어느 알 수 없는 구석에서, 어제 저녁부터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던 작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가 완강하게 문을 닫아걸자 다시 말한다. '너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결정해선 안 돼.' 현명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체콥은 벌떡 일어섰다. 잔뜩 쌓인 패드와 종이조각 중 패드 하나를 집어들고 방을 나가려다가, 한쪽에 선 거울 앞으로 가서 머리를 쓸어내린다. 한참을 손으로 이리저리 빗어내리자 간신히 봐줄 만한 정도로 차분한 곱슬머리가 되었다. 더욱 짙어진 눈가의 그늘은 어쩔 수 없었지만. 어차피 그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려면 한 번은 부함장을 대면해야 했지만 막상 기관실로 내려가자마자 스팍과 마주치니 심장이 덜컹거렸다. 밤을 새지는 않았겠지만 기색을 보니 새벽부터 여기 와 있던 것이 분명한데 스팍에게서는 전혀 흐트러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반면 그와 마주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스캇의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면 으레 그렇듯 계속 머리를 잡아뜯은 모양이었다. 어색하게 선 체콥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스캇이었다. 그는 다시 머리로 손을 올리다가 체콥의 시선을 의식한 듯 도중에 내리며 씩 웃었다.
"이른 시간부터 여긴 웬일인가, 미스터 체콥?"
패드에 코를 박고 집중하던 스팍이 그제야 알아챈 듯 돌아보았다. 침을 꿀꺽 삼킨 체콥은 걸어가 스캇에게 패드를 내밀었다.
"말씀하신 워프 코어 이상에 대해서요.....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스팍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체콥은 속으로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마주본 눈동자에는 체콥이 판독 가능한 어떤 빛도 떠오르지 않았다. 체콥은 새삼 커크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좋아하고 신뢰할 수 있지? 흥미를 보이며 읽어내려가던 스캇의 눈썹이 팍 찌푸려졌다. 간신히 달라붙는 시선을 잡아뗀 체콥은 그가 다시 정신없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거, 확실히...... 아니, 제대로만 되면 좋은 방법이긴 한데......" "미스터 체콥의 제안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나, 미스터 스캇?"
스캇은 턱을 문지르며 패드를 스팍에게 건넸다.
"직접 보십시오. 솔깃하긴 합니다."
체콥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그의 초조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팍의 읽는 속도는 느렸다. 글자를 더듬어가는 시선이 패드의 끝까지 옮겨갔다가 다시 올라오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훑어내려간다. 그렇게 두 번을 읽은 후에도 스팍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견디다 못한 체콥이 입을 열었다.
"부함장님...."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미스터 스캇."
스팍은 체콥의 말을 잘라내듯 스캇에게 말했다. 갈비뼈 아래서 심장이 너무 시끄럽게 쿵쾅거려서, 체콥은 스팍이 그 소음을 들은 게 분명하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 그는 멍하니 스캇과 스팍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스터 체콥이 제안하는 방식은 워프 코어의 장기적 안정성을 다소 희생하여 단기적으로 출력을 끌어올리자는 것이군. 최대 40시간 정도는 워프10도 가능하게 될 거라고?" "그렇습니다. 딜리리움 원자로에 손을 대야 하긴 하지만 개수한 부분이야 요크타운에서 다시 고칠 수 있으니까요. 워프 코어에 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코어가 폭발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겠지." "그럴 위험이 없지는 않지만........ 확률은 낮습니다."
스캇은 체콥의 기색을 흘끗 살피며 변명하듯 말했다. 스팍은 패드를 스캇에게 돌려주었다. 체콥은 그의 대답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피로에 찌들은 육체는 나무토막처럼 맥이 없었지만 덜컹거리던 심장이 조용해진 가슴 속에선 알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불가하네, 미스터 스캇. 현재 엔터프라이즈는 매우 위험한 우주를 지나고 있어. 이곳에서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없네." "그렇지요. 하지만 이 공역을 빠져나간 후에는," "지금 워프 코어가 정상이 아니라고 말한 사람은 자네야. 미스터 체콥의 계산은 정상 상태, 그것도 딜리리움 원자로의 출력이 100%에 가까운 상태를 모델로 한 것이더군. 엔터프라이즈의 원자로는 가동된 지 십 년이 넘었어. 현재 출력이 어떤지는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겠지, 미스터 스캇. 그런 상황에서 사고 위험이 1% 미만이라는 것은 근거 없는 낙관이네."
스캇은 입을 다물었다. 노련한 기관장으로서 논쟁이 불가능한 지점을 모를 그가 아니었다. 스팍의 지적은 모두 정확했다. 그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체콥을 흘끗 보았다. 체콥은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닫았다. 가슴 속에서 끓는 무언가를 진정시키는 것만도 힘들어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스캇이 납득했음을 확인한 스팍은 체콥에게 시선을 돌렸다. 체콥은 그 냉담한 눈빛이 칼날처럼 온몸을 꿰뚫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스터 체콥.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군. 쿼터로 가서 휴식을 취한 후 오늘 내로 상담을 받게. 시프트는 면제하겠네. 명령이야."
맥코이는 횡설수설하는 체콥의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똑같은 기계라지만 의료용 기구들과 함선의 동력부는 당연히 매우 다르다. 반쯤은 울먹임이 섞인 웅얼거림 속에서 그가 간신히 주워올릴 수 있었던 정보는 현재 워프 코어에 이상이 있단는 사실뿐이었다. 스팍이나 스캇이 그에게 아무 말 없었던 것을 보면 극소수만 아는 기밀이 분명한데 그걸 이렇게 쏟아버리다니. 그에게 일부러 통신을 넣어 체콥이 적절한 휴식을 취하고 반드시 상담을 받도록 당부한 스팍의 우려가 기우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통신을 끊자마자 뛰쳐들어온 체콥의 상태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맥코이는 다들 바빠서 현재 메디베이에 인적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체콥을 달래려 애썼다.
"스팍의 말이 옳아, 체콥." "하지만 사고 확률은 정말 낮단 말입니다! 미스터 스팍은 어떻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는 거죠? 뭐든 시도라도 해 봐야......."
맥코이는 한숨을 내쉬며 캡슐의 패널 뚜껑을 닫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지금 그의 엉덩이 밑에 누워서 세상 모르고 잠든 함장놈이 죄가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맥코이는 느릿느릿 말했다.
"아니, 시도를 해서는 안돼. 마음이 급해져 뭐든 한다면 그거야말로 큰 잘못이겠지." "닥터......." "지금 너처럼 말이야, 꼬마."
강아지처럼 그를 올려다보던 체콥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쌓인 피로 때문이 골이 지끈거렸다. 상담은 내 소관이 아닌데. 맥코이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짐이 다친 것이 네 잘못이라고." "......." "그러지 마. 누구보다도 짐이 원치 않을 거야. 잘 알잖아."
한동안 쌕쌕거리는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맥코이는 열없이 그 숨소리와, 나직하게 진동하는 캡슐이 만들어내는 작은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숨소리와 거의 구별이 되지 않는 힘겨운 목소리가 손가락 사이로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함장님이...... 시간이 늦어져서........ 정말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저 놈이 죽는다면. 맥코이는 체콥의 마음 속을 떠돌고 있을, 그러나 차마 입으로는 뱉을 수 없는 말을 짜맞춰보았다. 쉬운 일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그의 마음 속에 새겨지다시피 한 말이었으니. 익숙했기에 그 말이 주는 통증을 완화시킬 방법 같은 건 없다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맥코이는 체콥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닥터." "받아들여. 그럴 수밖에 없어. 사람은 누구나 죽어. 그리고 이 위험한 우주에서는 누구나 죽을 수 있어. 그걸 모르고 배에 탄 것은 아닐 텐데."
기어코 고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맥코이는 못을 박듯 말했다.
"너 대신 앞으로 나섰을 때 짐은 그걸 각오하고 있었을 거야."
체콥이 상담을 받은 직후부터 시작된 40시간은 길지 않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스릴 넘치게 보낸 기간이었다. 아니, 이전에 배가 대파되었던 세 번에 비하면 긴장의 강도는 조금 덜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안으로 신경을 혹사한 시간의 길이는 압도적으로 길었고, 그렇기에 마침내 요크타운에 도착했을 때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은 모두 지쳐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그 강철 같은 스팍마저도 미미하게 피로한 기색을 띠었다. 맥코이가 예견한 타임테이블은 잔혹할 정도로 정확해서, 엔터프라이즈가 마침내 워프 코어 과열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최대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 직후부터 커크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여정의 마지막 열 시간 동안 커크의 심장은 두 번 멎었고, 두 번째 심정지에서 간신히 회복한 다음에는 맥코이와 의료부 대원들이 무슨 수를 써도 바이탈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술루와 체콥은 너무 다급한 나머지 요크타운 항공 관제부에 통보하지도 않고 도시의 코앞이나 다름없는 좌표까지 최대 워프로 내달렸고, 그 결과로 하마터면 인근의 무인 위성과 충돌할 뻔 하고 관제부 전체에 비상 경보를 울리게 하는 대소동을 초래했다. 갤럭시 급의 함선이 예고도 없이 도시 바로 앞에 최대 워프로 나타났으니 본부가 뒤집어질 만했다. 그러나 항공 관제부는 사정을 들은 다음 그들을 용서했고 스팍도 두 사람을 책망하지 않았다. 우주항에서 병원까지 갈 시간도 없어 입항하자마자 곧바로 맥코이와 함께 병원으로 트랜스포트된 커크는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에게 수술을 받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20시간이나 걸린 수술이 끝난 후 맥코이는 이런 서커스는 앞으로 절대 사양이라고 투덜거렸다. 스팍은 승무원 모두에게 사흘간 휴가를 주었고 대다수는 휴가를 자기 쿼터에 틀어박혀 죽은 듯이 잠만 자는 데 썼다. 체콥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눈을 뜰 마음이 들었을 때 휴가는 어느새 이틀 하고도 반나절이 지나간 후였다. 일어날지 말지 고민하면서 베개를 껴안고 뒹굴고 있을 때 방문자를 알리는 버저음이 울렸다. 모니터를 보자 술루였다. 가족이 요크타운에 있기에 술루는 휴가를 받아 외출한 소수의 승무원들 중 하나였고, 지금도 깔끔한 사복 차림으로 체콥의 쿼터 문 앞에 서 있었다. 체콥은 퉁퉁 부은 눈과 떡진 머리를 부끄럽게 쓸어내리며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함장님이 회복실에서 개인 병실로 옮겨가셨대. 병문안 가지 않겠어?" "어.... 저희들도 면회가 됩니까?" "글쎄,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어. 가서 졸라보려고. 미스터 스캇은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었거든."
벌써? 하긴 내내 기관실에서 워프 코어와 씨름하느라 커크가 엔터프라이즈에 있을 때도 제대로 병문안을 못한 스캇이니, 마침내 무거운 불안에서 벗어난 지금은 누구보다도 커크의 얼굴을 보고 싶었을 터였다. 엔터프라이즈의 각 부서장들과 함장은 사석에서는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체콥은 마음의 동요 때문에 얼토당토 않은 제안으로 스캇을 번거롭게 만들었던 일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스캇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아마도 그를 불쌍하게 생각했을 테지만 말이다. 체콥은 재빨리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술루와 함께 쿼터를 나섰다. 그들은 커크가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는 것만 알 뿐 정확한 상태가 어떤지는 아직 몰랐다. 거의 8개월 만에 우주선이 아닌 지상을 밟자 햇살이 찌르듯 눈부시게 느껴졌다. 체콥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연신 그들을 흘끔대자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처음엔 예민해진 신경이 일으키는 착각인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다소 사정을 아는 술루가 설명했다.
"요크타운에서 엔터프라이즈는 유명하거든." "아, 크랄 사건 때문에요?" "그것도 있고, 이번에도 조용히 돌아온 건 아니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랄과 일대일로 맞서서 도시를 구한 함장님이잖아. 누구나 다 아는 그런 사람이 중태에 빠져 돌아왔으니 시끌시끌한 모양이야. 집에 갔더니 처음 보는 이웃들이 내게 함장님 소식을 물어보더라고."
어딜 가나 이목을 끄는 재능이 있다니까. 체콥은 술루의 웃는 얼굴이 새삼 낯설었다. 돌아올 집이라. 열너댓의 생도 시절부터 우주선에 푹 빠져 살았던 그에게는 생경하게만 느껴지는 단어들이었다. 사고 전 술루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까마득하게만 느껴지는 그 기억이 불과 열흘쯤 전이라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다. 체콥은 술루를 따라 어설프게 웃으며 아직도 부기가 다 가시지 않은 눈가를 문질렀다. 화창한 날이었다. 커크가 건강했다면 소풍이라도 가자고 외쳤을, 떨떠름해 할 스팍을 반강제로 끌고 길을 나섰을 법한 그런 날. 그 커크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맥코이는 꽃까지 사들고 온 그들을 보더니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선착순 다섯 명까지야." 그들은 세 번째라고 했다. 아직 면회가 가능해졌다는 소식이 함 전체로 퍼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함장님 상태는 어떻습니까?" "좋지 뭐. 안 죽은 것만도 감지덕지인데 나쁠 게 뭐 있겠어?"
의사보다는 환자에 가까워 보이는 맥코이의 얼굴을 흘끗 본 그들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거짓말은 아닌지 재생 치료기에 누워 있는 커크의 안색은 꽤 좋아 보였다. 평소보다 창백하긴 했지만 적어도 의식을 잃은 것이 아니라 푹 잠든 듯한 얼굴이었다. 다만 담요 아래로 보이는 다리의 윤곽은 여전히 균형이 맞지 않았다. 두 사람의 묻는 시선에 맥코이는 중얼중얼 설명했다.
"세포 괴사의 범위가 워낙 커서 당장은 새로운 조직을 이어 붙일 수가 없어. 독이 순환계를 따라 몸 전체로 퍼져서.... 독은 완전히 제거했지만 손상된 장기들을 제대로 회복하는 것이 먼저야. 적어도 한 달은 지나야 다리 재생을 시작할 수 있을걸. 그때까진 뭐.... 의족이라도 달고 있어야겠지." "그럼 당분간은 배로 복귀하실 수 없겠군요?"
체콥이 놀라서 물었다. 맥코이는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꼈다.
"성질도 급하지. 저 녀석은 죽다 살았다고.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지, 뭐? 임무 복귀? 임무는 무슨 말라죽은 개뼈다귀야?"
둘은 슬슬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아는지 모르는지 맥코이는 세상 편하게 자고 있는 커크의 얼굴을 노려보며 궁시렁거렸다.
"저놈 때문에 내 수명이 십 년은 줄었을 거야. 이게 대체 몇 번째냐고. 어쩌자고 우주선을 타서.... 됐어, 이제 정말 끝이야. 저놈 일어나면 보직 변경 신청할 거야. 우주를 쏘다니며 감기에 걸리든 벌레에 쏘이든 맘대로 하라지. 더 이상은 신경 안 써! 이게 뭐냐고!"
병실 입구까지 물러난 그들은 대강 인사를 중얼거리고는 황급히 문을 열고 내뺐다. 맥코이는 평소에도 커크의 모든 언행에 불만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달랐다. 함장이 깨어난 후 최소 몇 달은 고생하겠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은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정원의 먼 끝에서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스캇과 스팍이었다. 스팍은 정복 차림이었고 스캇은 그들처럼 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스캇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상태 봤어? 대단하지?"
체콥은 피식 웃었다. 스캇이 말하는 사람이 커크건 맥코이건 맞는 말이었다. 술루가 대답했다.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더군요." "그보다는 상심한 것이겠지. 레너드는 상심을 분노의 형태로 표현하는 버릇이 있어. 어째서 그렇게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지 나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체콥과 술루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스팍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에 스팍의 얼굴이 잠시 미묘해졌다. 인간이었다면 쑥스러워한다고 말할 수 있을..... 부함장이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하지만 스캇은 그들처럼 당황하지 않고 대신 웃으며 스팍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런 사람도 있지요." "그래. 인간은 그럴 수도 있더군."
얼핏 듣기엔 같은 의미였지만 체콥은 두 사람의 말이 어딘가 다르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가 그 차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기 전, 스팍이 그를 불렀다.
"미스터 체콥." "예."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네."
체콥은 순간 당황해서 술루와 스캇을 흘끔 보았다. 술루는 애매한 표정이었고 스캇은 못 들은 척 하며 변함없이 큼직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체콥은 작게 대답했다.
"예."
새 소리가 들려왔다. 길고 높게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소리, 떨리는 깃처럼 작게 지저귀는 소리, 파다닥거리며 날개를 치는 소리. 무성한 잎사귀 사이로 조각나 떨어지는 햇빛처럼 엔터프라이즈에서는 전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것이라 체콥은 다시금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자신도 옛날에는 땅을 밟으며 나무와 새를 보고 해가 금화처럼 빛나는 하늘 아래 살았을 텐데,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감각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낮은 벤치에 나란히 앉은 스팍은 등을 꼿꼿이 세운 채 멀리 시선을 주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정원의 자연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좀처럼 하기 어려운 말을 숙고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체콥은 손을 쥐어짜며 초조하게 그 담담한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미스터 체콥."
말의 첫머리에도 감정을 읽어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체콥은 고개를 돌려 스팍을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스팍이 시선을 돌렸다.
"이번 임무에서 자네의 행동은 부적절한 점이 많았네."
역시. 체콥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핥으려다가 화들짝 놀라 도로 집어넣었다. 스팍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변함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자네는 이미 비상 지휘 승계 순위에 들어있는 선임 고급장교야. 지위와 책임이 있는 이상 나이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네. 하지만 함장님의 부상과 후송이라는 비상 상황에서 자네는 지나치게 감정에 휩쓸려 우선순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네. 자네가 내놓았던 위험한 코어 개수 방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야. 그 이전에, 스스로의 상태를 돌보고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것은 고위 장교의 기본 덕목일세.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는가?"
누구보다 잘 안다. 체콥은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팍의 처분은 무엇일까? 징계? 보직변경? 아니면........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네." "예? 하지만........" "비합리적이긴 하지. 하지만 나는,"
스팍의 말이 끊어졌다. 정말 놀랍게도 지금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정리가 되지 않아 애를 먹는 것처럼 보였다. 체콥은 이번에는 저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렸다가 잽싸게 다물었다. 몇 번이나 말을 이으려다가 실패한 스팍은 마침내 말했다.
"용서하게. 나는 절반은 인간이지만 여전히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는 어려워. 지금 내가 말하려는 것은 자네들 인간에 대한 것이고, 그렇기에 나는 내 사고를 명확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군." "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부함장님." "고맙네. 그럼, 어떻게 해도 명쾌하지는 않을 것 같으니 그냥 말하지."
스팍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술을 뗐다.
"예전에, 칸이 일으킨 사건 때," "예." "그 당시 우후라와 짐 모두 내게 화를 내고 있었어."
그랬던가? 우후라가 스팍에게 화를 냈던 것은 그도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우후라의 입장이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커크도? 그때 커크는 아버지처럼 여겼던 파이크 제독을 칸의 손에 잃었기에 늘 화가 나 있었고, 스팍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까칠하고 부루퉁했다. 최근 몇 년은 전혀 보이지 않은 모습이었기에 체콥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확실히 그랬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기에?
"칸을 생포했을 때 짐은 그 자리에서 저항하지 않는 칸을 폭행했지. 그건 아무 이유도 결과도 없는, 그저 분풀이밖에 되지 않는 행동이었네. 나는 그 행동에 감정적 합리성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해는 할 수 없었어. 바람직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이것 역시 금시초문이었다. 하긴 스팍이나 우후라가 함장의 결점일 수도 있는 모습을 떠벌리고 다닐 사람들은 아니었으니까. 체콥은 말없이 귀를 기울였다.
"바로 몇 시간 후에 내가 정확히 똑같은 감정을 느끼기 전까지는 말이야." "........." "그 일을 겪고 나서, 조금은 더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네. 애정을 가진 사람이 위험에 처할 때 인간은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겠지. 화를 내고, 슬퍼하고, 복수하고 싶어하고, 또는.......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스팍은 체콥의 눈을 들여다보던 시선을 천천히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은 있었으나 해는 없는 하늘. 희푸르게 번져가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우후라와 지내면서..... 그런 모습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게 되었네."
이번에야말로 체콥은 정말 놀라고 말았다. 그의 부함장이 입에 담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스팍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체콥을 흘끗 보고는 조용히 일어섰다. 늘 단정한 선으로 다물어진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보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한다고 해서 자네의 행동이 부적절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야." "예........예, 당연하죠." "앞으로는 지휘장교로서 좀더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기를 기대하겠네, 미스터 체콥."
스팍은 정복의 깃을 가다듬더니 횡설수설하는 체콥을 내버려두고 쌩하니 걸어가 버렸다. 체콥은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기분으로 방금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커크는 깊은 물에서 빠져나오듯 힘겹게 눈을 떴다.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에 낯선 천정이 빙글빙글 돌며 쏟아졌다. 누군가 그의 머리를 잡고 힘껏 흔들어대는 듯한 현기증과 두통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그의 몸은 그가 깨어난 이유를 강렬한 존재감으로 일깨워주었다. 목이 말랐다. 입술과 입 안쪽이 모조리 바짝 말라붙어서 건드리면 그대로 툭 갈라질 것만 같았다. 허우적거리는 손에 무언가 쾅 부딪쳤다. 아프기도 아팠지만 작게 삑삑거리는 경보음이 들려 커크는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이게 뭐지. 여긴 어디지. 내가 또 뭘 부쉈나? 본즈가 화낼 텐데. 본즈. 그 이름에 멀어졌던 현실 감각이 느릿느릿 돌아왔다. 목구멍만이 아니라 두개골 안쪽도 녹이 슬어 말라붙은 것 같아 쉽지 않았지만, 커크는 힘겹게 생각을 돌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여긴 어디인가. 평소보다 훨씬 오래 잤다는 감각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왜 늦잠을 잤을까. 병이라도 앓았나. 사고. 갑자기 기억이 홍수처럼 돌아왔다. 그래, 체콥 대신 자신이 다쳤었다.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부상이었고 엔터프라이즈의 기술로는 치료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요크타운에 가서...... 그럼 여기는 요크타운인가? 참기 힘들 정도로 갈증이 났다. 삑삑거리는 경보음은 신경에 거슬리게 계속되었다. 커크는 안간힘을 써서 목을 돌렸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지만 간신히 시선 끝에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컵과 주전자가 걸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간신히 보이는, 낮은 간이침대에 웅크려 누운 커다란 윤곽도 함께.
"본즈."
목소리는 커크 자신이 듣기에도 끔찍했다. 언젠가 보았던 고전 영화에 나오는 귀신이 긴 손톱으로 철판을 긁어대는 듯한 목소리다. 다 포기하고 도로 잠들고 싶었지만 목이 너무 말랐다. 커크는 기운을 쥐어짜냈다.
"본즈!"
불편한 자세로 잠든 맥코이는 커크의 부름을 듣지 못했다. 삑삑삑삑. 커크는 신경질이 나서 다른 손도 흔들었다. 쾅, 그리고 한층 커진 빽빽거리는 경보음. 그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 것 같아 커크는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 진짜...... 죽다 살았으면 곱게 잠이나 잘 것이지 더럽게 시끄럽네."
익숙한 궁시렁거림과 함께 커다란 몸이 일어섰다. 누운 커크를 들여다보는 얼굴은 푸석하게 부었고 까칠하다. 커크는 마른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 간신히 목소리를 목구멍에서 끄집어냈다. 물을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왜........ 왜 거기에서 그러고 있어?"
거슬리는 쉰 목소리에 맥코이의 이맛살이 찡그려졌다. 그는 커크의 팔을 잡아 가지런히 옆구리에 붙이게 하고는 몸 전체를 둥글게 감싸는 재생 치료기의 패널을 닫았다. 그제야 커크는 자기가 손을 휘둘러 때린 것이 치료기였음을 알아차렸다. 다리를 덮은 담요까지 정돈해 준 맥코이는 주전자를 들었다. 쪼로록. 컵에 물이 차오르는 소리.
"네가 하도 속을 썩이니까 안심이 되어야지. 그래서 여기서 궁상 떨고 있었다, 됐냐?"
입술을 적시는 차가운 물의 감촉은 그가 여태까지 마신 그 어떤 음료보다도 달고 시원했다. 커크가 컵을 비우자 맥코이는 다시 그의 머리를 편하게 뉘어주고 베개를 다독여 주었다. 놀랍도록 초췌해진 친구의 얼굴을 보면서 커크는 문득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조금 더 자. 아직 한밤중이야."
크고 따뜻한 손이 이마를 짚는다. 아카데미 시절, 걸핏하면 앓아눕고 다쳐오는 커크를 불평하면서도 돌봐주던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손이었다. 목과 어깨에 긴장이 풀어지면서 밀려났던 잠이 쏟아진다. 커크는 가물거리기 시작하는 눈을 힘겹게 뜨며 불렀다.
"본즈." "왜 자꾸 불러. 잠이나 자라니까." "미안해."
다정한 손이 담요를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알아. 그러니까 자도록 해. 푹 자고 나면 한결 나을 거야."
필요했던 휴식을 취하고 입항 나흘째 아침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복귀한 승무원들을 맞은 것은 날벼락 같은 출항 준비 명령이었다. 우주항의 식당에서 느긋하게 맛있는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던 체콥은 관제 센터의 방송을 통해 울려퍼진 스팍의 음성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심정이 되었다. 옆에서 드모라와 놀아주고 있던 술루가 귀를 의심하면서 되묻는 모습을 보니 그 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침부터 어디서 구한 것인지 웬 위스키 한 병을 들고 식당 한쪽 구석에 서서 담소하고 있던 스캇만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집결 명령을 들은 직후에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이 되어 턱을 문지르며 입맛을 다실 뿐이었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엔터프라이즈로 돌아온 승무원들에게 스팍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특유의 간결하고 명확한 어조로 필요한 사항들을 점검하고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할 일이야 차고 넘쳤다. 커크가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진행하고 있던 탐사에서 얻은 결과들을 정리해서 아카이빙하는 작업도 중단된 상태였고, 유래 없이 장시간 높은 워프로 달린 함선의 정비도 시급했다. 스팍이 제시한 계획표에는 준비 기간이 겨우 일주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출항 전까지 마쳐야 할 작업량을 감안하면 그답지 않게 촉박한 일정이었고, 다들 의아해했지만 아무도 스팍에게 묻는 사람은 없었다. 함장 대리인 스팍 외에 승무원들의 직속 상관�� 각 부서장들은 사정을 아는 눈치였지만 역시 구구절절하게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이번 임무는 요크타운에서 대략 백여 광년 떨어진 방면의 우주를 돌아보고 이전에 작성된 항법 지도를 보완하는 것이었다. 기간은 약 두 달 가량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계획표를 들여다본 체콥은 더더욱 의아해졌다. 크게 어렵지는 않은 임무였지만 그렇기에 스타플릿의 최신예 함선에 어울리는 임무도 아니었다. 요크타운에 정박 중인 어떤 함선이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작업이었는데, 본래 요크타운 기지 부대 소속도 아니고 방문 중인 엔터프라이즈가 동원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여어."
너무 바빠서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콘솔과 패드에 번갈아 코를 박고 일하고 있던 체콥은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장석에 앉아 있던 스팍은 언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대신 리프트에서 내려 조타석 옆으로 온 사람은 스캇이었다. 틀림없이 기관실 쪽도 목구멍에서 손이 기어나오게 바쁠 텐데 거기 있어야 할 사람이 함교까지 올라오다니. 체콥은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통신으로는 의논하기 힘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미스터 스캇?" "그런 건 아니고. 일 얘기는 아니야. 한 시간 후쯤에 나갈 수 있겠어? 미스터 술루도 같이."
옆에서 계속 통신으로 뭐라고 떠들어대고 있던 술루가 놀라 스캇과 체콥을 쳐다보았다.
"어.... 한시간 반 정도면 지금 하는 작업은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요?" "함장님 보러. 이제 일어나서 움직일 수 있다는데. 자네들에게 해둘 얘기도 있고. 그럼 한시간 반 후에 터미널에서 만나지. 조용히 나와."
무슨 비밀작전 같다. 하지만 왜 지금 함장을 만나야 하는 것인지, 또 그걸 다른 동료들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술루를 바라보았으나 그 역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말을 끝낸 스캇은 곧 리프트에 올라 사라져버렸고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업으로 돌아갔다. 한 시간 사십분 후 간신히 몸을 빼낸 둘은 허겁지겁 우주항 터미널로 갔고 오분 후 나타난 스캇을 만나 무중력 전동차에 올랐다. 급한 마음에 행선지를 제대로 묻지도 않았던 그들은 전동차가 익히 알던 병원이 아닌 센트럴 플라자 쪽으로 향하자 깜짝 놀랐다. 전동차에 서거나 앉아 있던 사람들이 커다래진 눈으로 연신 그들을 흘끔거리며 수군거렸기에 두 사람은 스캇에게 어디로 가냐고 제대로 묻지도 못했다. 플라자에서 내린 스캇은 인파를 뚫고 척척 걸어갔고 술루와 체콥은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조금 걸어가자 한결 덜 붐비는 길이 나왔고 높게 선 유리 건물로 이어진 길의 끝에는 큼지막한 간판이 붙어 있었다. <Yorktown Aquarium>. 요크타운의 명소로 유명한 해양박물관이었다. 물론 대형 수족관 안에서 헤엄치는 생물들은 전부 DNA 합성과 클로닝으로 만들어진 인공이었지만. 내리쬐는 햇살이 깊은 물을 통과하며 신비롭게 일렁거리는 박물관 내부는 바깥 광장과 달리 인적이 드물고 조용했다. 미리 약속 장소를 정한 듯, 구불구불한 통로를 한동안 돌아가자 이윽고 낯익은 목소리와 웃음 소리가 들렸다. 엄청나게 거대한 생물이 유유히 헤엄치는 인상적인 광경 아래 커크와 맥코이, 스팍이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그들이 다가가자 돌아보았다. 디스플레이에는 고래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왔나?" "아, 예. 짐, 그렇게 일어나 있어도 되는 겁니까?"
사고 전보다 홀쭉하게 야윈 커크는 짚고 있던 지팡이를 옮기며 무안한 듯 웃었다. 한쪽 다리를 대신하고 있는 의족의 금속이 일렁이는 빛을 받아 둔한 광택을 발했다. 맥코이가 투덜거렸다.
"이 자식을 누가 말려. 얌전하게 쉬면서 있으랬더니 열흘 넘게 누워만 있어서 몸이 썩을 것 같다며 난리를 치기에 할수없이 데리고 나왔어. 이런 놈의 주치의라니 나는 일찍 죽을 거야. 사인은 홧병." "그럴 리가. 나 같은 친구가 있으니 자네 인생도 다이나믹해지는 거지. 그리고 욕창 예방하러 나온 건데 휠체어를 타면 의미가 없잖아."
스캇과 술루, 체콥은 욕창이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묻지 않고 웃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언제 심장이 멎을까 두려워하던 동료가 씩씩하게 일어나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인생의 가장 좋은 순간에 속한다. 맥코이가 머리를 저으며 나직하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대체 언제 갈아입은 건지, 이 바쁜 와중에도 외출시에는 정복 또는 사복 차림이어야 한다는 규정을 지켜 정복을 입고 있던 스팍이 입을 열었다.
"준비는 일정대로 진행되고 있나, 미스터 스캇, 미스터 술루?" "한 시간 정도 늦어질 수는 있습니다만, 모레 아침까지는 맞출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부함장님?" "뭔가?" "왜 이렇게 급하게 출항하는 겁니까? 그 이유를 설명해주시려고 이렇게 부르신 거겠죠?"
체콥은 놀라서 상관들을 보았다. 스캇은 쓴웃음을 지었고 스팍은 입을 다물었다. 술루의 말에 대답한 것은 커크였다. 그는 다시 아까의 무안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때문이야." "예?" "역시 본부에서 시끄러운 겁니까?"
스캇이 불쑥 말했다. 술루의 눈썹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은 체콥뿐이었다. 커크는 그들이 오기 전부터 들고 있던 패드를 스팍에게 돌려주었다. 스팍이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자 커크는 말을 이었다.
"그런 거지. 다친 사람이 함장이 아니라 일반 승조원이었다면, 진행 중이던 탐사를 모조리 취소하고 그렇게 무모한 항해를 했겠느냐는 거야."
체콥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술루가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명이 위험한 사람이 함장님이 아니라 다른 누구였더라도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겁니다! 누가 그걸 트집잡을 수 있다는 거죠?" "미스터 스팍이 급하게 떠나기로 결정한 이유가 바로 그래서야, 미스터 술루."
스캇이 묵직한 음성으로 끼여들었다. 술루가 반박하려 했지만 스캇은 고개를 저었다.
"외부 사람들은 이해 못 해. 탐사는 위험한 일이고, 자원해서 그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으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 스타플릿 규정에서 심우주에서 승무원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 대해 전혀 말이 없이 전적으로 함장 재량에 맡기는 이유를 아나? 승무원이 아프거나 할 때마다 이번에 우리들이 한 것처럼 기지로 돌아온다면?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는 함선들도 많아." "하지만....." "함장이 아닌 평선원이 위험에 처했어도 이번처럼 했겠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야.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반대로 크루들은 이해를 못 하겠지. 지금 자네처럼 말이야. 계속 요크타운에 머물다 보면 부딪치지 않을 수 없을 거고, 그래서 서둘러 우주로 나가서 불미스런 사태가 없도록 하려는 거야."
체콥은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이해와 동시에 반사적으로 반감이 치솟았다. 그렇다면 커크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어야 한단 말인가? 그저 탐사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묵묵히 있던 스팍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비합리적인 것은 아니지." "부함장님!" "한 사람의 생명은 중요하지만, 엔터프라이즈가 수행하는 임무는 그 이상이네. 두 가지를 비교해 경중을 재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지휘관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일이야."
커크는 스팍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체콥은 이성 이전에 감정적으로 도저히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력하게 앉아 커크가 죽는 것을 지켜만 보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것도 더욱 먼 우주로 유유히 ��아가는 우주선에서 말이다. 속이 뒤집어지는 감각 속에서 체콥은 자신이 함장 재목은 아니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커크도 스캇도, 심지어 맥코이까지도, 스팍의 말을 별 반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아 더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격한 거부감을 공유하는 사람은 술루 뿐인 듯했다. 커크가 두 사람의 기색을 살피더니 호르르 한숨을 쉬었다. 실망했을까. 체콥은 그의 눈치를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커크는 미안한 기색으로 미소지었다.
"음, 어쨌든.... 본부 사람들이 전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야. 패리스 준장님만 해도 전적으로 지지해주시고 있으니까. 나 때문에 급하게 우주로 나가게 되어서 자네들에게 미안할 뿐이야. 나는 동행할 수도 없으니 더 그러네." "함장님 혼자 요크타운에 남아 계시는 건가요?" "혼자는 아니야. 닥터 맥코이가 같이 있을 거네. 본즈도 이번에 엄청 고생했으니 지상에서 휴가 누릴 자격은 있지. 자네들이 돌아올 때면 재활 훈련 하고 있을 거야."
배에서나 여기서나 네 수발이나 들 텐데 뭐가 휴가냐. 맥코이가 툴툴거렸다. 커크는 그의 어깨를 한 대 치고는 웃었다.
"스팍이 있으니 걱정은 안 해. 자네들 손에서라면 엔터프라이즈는 아무 걱정 없어. 두 달 후에 만나지. Godspeed, everyone." "함장님도 무탈하게 계시길 바랍니다. 두 달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들은 함께 웃었다. 그들의 머리 위, 신비롭게 일렁이는 바다 속에서, 고래가 길게 끄는 아름다운 울음 소리를 냈다.
항해는 체콥과 모두의 예상대로 별다른 일 없이 끝났다. 근방 공역의 특성과 주변 성계의 분포, 내친 김에 정착이 가능할 듯 보이는 행성들에 대한 기초 조사까지 마친 엔터프라이즈는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하지만 조용하게 돌아왔다. 해양박물관에서 들은 이야기를 지울 수 없었던 체콥은 날마다 요크타운의 텔레네트워크 중계를 수신해서 보곤 했다. 엄청난 화젯거리였던 엔터프라이즈는 떠나 있는 사이 금방 잊혀졌다. 요크타운에 남았던 커크와 맥코이는 가끔 화면에 등장하기도 했지만, 일부러 그러는 건지 너저분한 차림으로 날마다 재활훈련이나 하는 모습은 대중이 즐거워하는 영웅의 상에는 맞지 않았다. 귀환할 때쯤에는 수백만이 사는 도시에서 그들을 화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스타플릿 본부라면 또 어떨지 모르지. 체콥의 말에 술루는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커크는 한결 건강해지고 빠진 살도 웬만큼 다시 붙은 모습으로 그들을 맞았다. 요크타운 병원의 의사들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커크가 함장 임무에 복귀하는 것을 허락했다. 아직은 온전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왼쪽 다리의 재활 훈련을 계속 하고, 하루 근무 시간을 일곱 시간 이하로 제한한다는 조건을 달아서였다. 걸을 때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기는 했지만 함장의 복귀에 모두들 기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 이전처럼 걷고 뛸 수 있을 것이라고 맥코이는 진단했다. 당연하다는 듯 짐을 한가득 들고 커크를 따라온 맥코이에게 아무도 보직변경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귀환한 엔터프라이즈 승무원들은 다시 먼 우주로 떠나기 전 3주간의 휴가를 받았다. 드모라의 생일파티를 직접 해줄 수 있게 되어서 술루는 기뻐했다. 시끌벅적하거나 조용한 휴식 속에서 21일은 금방 지나갔다. 체콥은 바다가 마음에 들어 해양박물관에 자주 갔다. 술루 가족이나 다른 동료들과 함께일 때도 있었고 혼자일 때도 있었다. 커크와 마주친 것은 휴가가 끝나기 하루 전, 이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였다. 고래라는 생물은 오늘도 우아하게 헤엄치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함장님." "미스터 체콥."
커크는 그동안 기르던 수염을 싹 면도하고 머리도 깔끔하게 빗어넘긴 모습이었다. 태가 좋은 옷이 잘 감춰준 것인지 아직은 오른쪽에 비해 여윈 왼쪽 다리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체콥은 보이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었다. 커크가 긴장한 그의 얼굴을 보더니 웃었다.
"왜,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 "그때..... 사고 난 행성에서......" "자네 탓이라느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게. 본즈한테서 들었어. 그 자리에 선 사람이 자네가 아니라 다른 크루였어도 나는 똑같이 행동했을 거야."
말을 꺼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체콥은 자신이 함장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한숨을 내뱉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 어웨이 미션에 지원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응?"
커크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체콥은 과학부였지만 행성 조사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분야는 아니었다. 굳이 갈 필요가 없었다. 파견팀에 포함된 것은 순전히 그가 자원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 "전에 미스터 술루에게서 조언을 얻었거든요." "조언?" "네. 제가.... 저는 아무래도 함선과 과학 조사 외에는 관심을 갖는 것이 어렵다고, 지휘부 소속이면서 이래서는 안될 것 같다고 상담했었거든요."
커크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체콥은 더욱 힘들게 더듬더듬 말했다.
"그랬더니 미스터 술루가..... 지상에 관심을 가져보라고 했습니다. 엔터프라이즈가 탐사하는 세계들에 좀더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고요."
술루의 관심사는 식물이다. 그다운 조언이라고 생각하며 커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글쎄, 굳이 알아야 할까?" "예?"
커크는 지팡이를 쥔 손을 바꿨다. 아무래도 오래 한 자세로 서 있으면 불편했다.
"나는 파이크 제독님의 도발 때문에 스타플릿에 들어왔어. 물론 제독님은 점잖게 입대를 권유하셨지만 내게는 그게 도발이었지. 옛날의 나는 누구든 죽은 아버지를 들먹이는 게 너무 싫었거든."
조지 커크 함장. 스타플릿의 전설적인 영웅 중 한 명. 체콥은 잠시 그런 아버지를 둔 삶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상상이 되지 않았다.
"운이 좋아서 졸업하던 해에 바로 엔터프라이즈를 꿰어찼지만 함장이 된 지 몇 년이 지나도 나는 내가 왜 우주에 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어. 한심하지? 처음에는 명성을 얻는다는 것이 좋았네. 마침내 아버지를 따라잡았다는 안도감도 있었고 말이야.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지. 하지만 뭘 보여주고 싶었는지는 나도 몰랐어. 그저 더 이상 내 아버지의 아들이란 말은 듣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정말입니까?" "정말이야. 안 믿기나?"
믿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임스 커크가. 불신의 눈빛으로 쳐다보자 커크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어. 뭔가를 찾고 있긴 하지. 하지만 동시에, 내가 원하는 건 이미 찾았다는 생각도 드네." "........" "우리가 하는 일이 그거잖아. 미지의 우주로 나아가는 것. 알 수 없는 것을 찾는 여행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 스타플릿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체콥은 마주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정말 그것으로 충분할까? 물론 그도 자신의 일을, 엔터프라이즈를 사랑했다. 하지만 언젠가 하나의 함선을 책임지기를 기대받는 장교라면 그보다는 더 훌륭한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커크는 잠시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다시 머리 위를 헤엄치는 고래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내가 찾은 답이야. 자네는 자네만의 답을 찾아야겠지. 누구도 강요하지 않으니 천천히 생각하고 찾아도 괜찮아." "그럴까요?" "그래. 나를 우러러보거나 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은 본받지 말라고 하고 싶군. 나는 너무 조급하게 결정하고 뛰어든 일도 많았고, 그래서 잃은 것들도 있네."
체콥은 말없이 얼마 전에 스팍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늘 화가 나 있었던 옛날의 커크.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천천히요........." "그래. 천천히." "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이만 돌아갈까? 내일부터는 또 정신없이 일해야 할 테니까."
커크는 지팡이를 한 번 휘두르더니 걷기 시작했다. 체콥은 그의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따라서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는 자신을 본받지 말라고 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충족된 느낌이 들었다. 커크의 말대로 이유 같은 건 없어도 좋을지 모른다. 적어도 오늘 이 순간은 말이다. 바깥은 어느새 저녁이었다. 하얀 포석을 풍성하게 적시는 인공적인 석양을 받으며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갔다. 멀리 항구에서 기다리는 엔터프라이즈로, 그들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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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 Trek] 혼불
요크타운에 괴이한 이야기가 떠돌기 시작한 것은 봄의 일이었다. 크랄의 습격 때 요크타운 주둔 스타플릿 부대는 대부분 자리에 없었다. 괴물이 된 그들의 일원이 부린 술수에 걸려 잘못된 좌표가 포함된 구조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도시가 공격받을 때 도시를 지켜야 했을 스타플릿은 짙은 성운의 반대편 끝에서 헤매고 있었다. 뼈아픈 일이긴 했으나 그나마 수확이랄 수 있는 것은, 첫째 프랭클린의 활약으로 요크타운이 무사했다는 것이고 둘째 스타플릿의 정예 함선들이 대거 동원된 덕에 광대한 성운의 지리가 밝혀진 것이었다. 새로운 엔터프라이즈가 건조되는 동안 성운의 항법 지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완성된 엔터프라이즈가 다시 모험과 개척의 길을 떠났을 때는 이미 알타미드와 그 성계를 둘러싼 성운은 미지의 영역이 아니었다. 드모라를 안고 떠나는 술루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벤은 무중력 전동차의 텔레네트워크 화면으로 관측 위성이 알타미드 궤도로 쏘아올려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몇 달이 지나면 알타미드는 정식으로 연합의 영토로 편입될 것이다. 크랄과 옛 엔터프라이즈를 기억하는 이들의 복잡한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런 상황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흘러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괴담이 어울리는 시기는 아니었다. 처음 유령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현상을 목격한 것은 알타미드를 관측하던 선원들이었다. 파괴된 엔터프라이즈의 원반부는 추락한 행성에 영원히 잠들었고 스타플릿은 원반부를 회수하는 대신 그 옆에 순직한 선원들을 위한 조그만 위령비를 세웠다. 선원과 동력을 완전히 잃은 배는 그대로 행성에 풍부한 지의류 식물에 덮여 대지의 일부로 돌아갈 운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잊혀지는 대신, 언제부터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빛들이 잔해를 감싸고 떠돌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 전 소진된 동력이 내는 빛은 당연히 아니었고 알타미드의 대기가 일으키는 현상도 아니었다. 즉 현상의 원인도 불빛의 정체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스타플릿의 첨단 스캐너는 모든 것이 정상이라고만 말할 뿐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처참하게 부서져 침몰한 배 위에서 춤추는 정체불명의 빛덩어리들. 지켜보는 이들이 죽음의 자리를 떠도는 원령을 연상한 것은 당연했다. 요크타운에는 사건 직후 이곳으로 와서 쭉 머물고 있는 옛 엔터프라이즈 선원들의 유가족이 많았다. 그들을 만나고 글을 쓰면서 벤은 계속 커져만 가는 괴담에 정신이 산란해지곤 했다. 처음 엔터프라이즈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발 밑이 무너지던 아찔한 감각을 그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술루가 살아 있음을 알고 느꼈던 안도감도. 유가족들의 슬픔은, 그���고 한 번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 이름이 뇌리에 새겨진 행성을 맴도는 영혼들의 이야기는, 벤의 기억에 날카로운 채찍질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술루는 살았고 술루의 동료들은 죽었다. 벤 역시 언제든 슬퍼하는 유가족이 될 수 있었다. 원반부를 회수해 연구하고 거주민들의 동요를 진정시키자는 요청이 쇄도했으나 기지의 책임자인 패리스 준장은 어째서인지 묵묵부답이었다. 봄이 저물고 불빛들이 사라지자 조금씩 소란도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빛덩어리들이 돌아왔을 때는 두 배로 시끄러워졌다. 패리스 준장은 비로소 입을 열어 딱 한 마디를 했다. 원반부의 회수는, 지금은 통신조차 잘 되지 않는 먼 우주로 떠난 엔터프라이즈가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그의 말은 떠들썩함을 진정시키긴 했으나 괴담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요크타운과 스타플릿은 불안한 침묵 속에서 희고 푸른 둥그런 빛들에 잠긴 난파선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엔터프라이즈가 요크타운으로 돌아온 것은 해가 네 번 바뀌고도 다시 여섯 달이 지났을 때였다. 드모라가 학교에 입학하고, 기이한 빛들의 춤이 다섯 번째로 시작된 직후였다.
제일라는 괴담을 오래 전에 들었으나 요크타운에 가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알타미드에서 보낸 수십 년 동안 추락하는 우주선은 무수히 많았다. 유성우처럼 쏟아지던 끔찍한 이야기들. 유령이 정말 있다면 그 푸른 하늘이 온통 혼불로 가득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곤 했다. 제일라가 마침내 무거운 걸음을 옮길 마음이 들었던 것은 만나고 싶다는 스캇의 연락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요크타운에 남아 있는 프랭클린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섯 해 만에 활기찬 우주항을 밟던 순간 커크는 패리스 준장을 만나고 있었다. 비로소 자세한 사정을 들은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침묵했다. 살아남은 자가 짊어져야 할 무게였다. 준장은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결정하라는 말과 함께 그를 내보냈다. 스타플릿 지부를 떠나 몸을 실은 전동차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요크타운 특유의 희푸른 빛깔이었다. 자연과 인공의 오묘한 경계에 걸친 색을 보며 커크는 생각했다. 원반부를 회수해야겠지. 문득 추위를 닮은 감각이 소름처럼 온몸에 돋아났다. 원혼이란 것이 정말 존재할까? 죽은 배를 떠나지 못한 이들이 지금 그를 부르는 것일까? ......살아남은 그를 원망할까? 스팍은 비논리적이라며 단칼에 잘라버릴 생각이었지만 커크는 질기게 달라붙는 사고의 편린을 도저히 떨칠 수 없었다. 죽은 자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처럼. 커크를 감싸고 흘러갔던 시간의 물살이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영원히 같은 시간을 살며 삭아가는 배를 떠돌게 될까? 커크는 정체불명의 괴현상이 유령의 출현임을 어느새 믿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몸서리쳐지는 생각이었다. 죽은 이들에 대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또다른 망자에게로 건너뛰었다. 발타자르 에디슨. 커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또 하나의 망령이었다.
에디슨의 후손들은 지구에 살고 있었다. 5년 탐사 도중 지구에 들를 기회가 있었던 커크가 찾아갔을 때, 에디슨 가족이 운영하던 조그만 박물관은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연합의 위대한 개척자에서 요크타운을 습격한 괴물로의 추락이었다. 누구도 괴물의 자손들을 탓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때가 타고 먼지가 앉은 금속 명패 앞에 한참 서 있던 커크가 이윽고 돌아섰을 때, 비어 있는 듯 보였던 정원의 쇠살문 앞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엔터프라이즈의 커크 함장이시죠. 약간 충혈된 눈을 한 중늙은 남자의 말이었다. 커크가 조금 얼떨떨해져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루이 에디슨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발음하는 이름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실려 있었다. 커크는 이해할 수 있었다. 조금 의미는 달랐지만 그의 이름 역시 엄청난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으니까. 그가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남자는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미안합니다. 그는 에디슨의 손자였다. 에디슨의 부인은 남편의 실종 후 30여 년을 더 이 집에서 살다 죽었고, 에디슨의 아들은 그후로 70년을 더 살다가 떠났다. 거주자들은 태어나고 자라 나이를 먹고 늙어갔는데 집은 기술과 정성으로 살짝 빛이 바랬을 뿐 옛날 그대로였다. 역사란 무엇일까. 변화란 무엇일까. 제임스 커크는 무엇을 남기게 될까. 에디슨의 삶과 죽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박물관이 그에게 묻는 듯했다. 미안해요. 박물관으로 바꾼 작은 집의 뒤편, 조그만 정원에 자리한 조그만 뒤채에서 커크에게 차를 대접하며, 루이 에디슨은 다시 한 번 말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커크는 그렇게 대답하지는 않았다. 때로 어떤 부채는 그냥 머리 위로 떨어진다. 어떤 유산은 그저 짊어지고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다. 커크는 에디슨의 유물을 볼 수 있을지 청했을 뿐이었다. 남자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랫동안 닫혀 있었던 본채 겸 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전시물이 많지는 않았다. 에디슨 부부가 사용했던 가구를 제외하면 사진 몇 점, 일기가 담긴 노트, 훈장 몇 개와 에디슨의 아내가 죽은 남편을 기리며 만들었다는 레이스 따위가 전부였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가져가세요. 루이 에디슨이 말했다. 어차피 조만간 모두 처분할 생각이었습니다. 이것들을 갖기에 당신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것 같군요. 그러나 커크는 그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집을 정리하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어떤 연결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끊어낼 수 없다. 에디슨이 낯선 땅에 묻혔어도 끝끝내 그의 대원들을 버리지 못했던 것처럼. 커크는 에디슨의 일기장과 펜던트, 브로치 몇 개를 집어들고 엔터프라이즈로 돌아왔다. 훈장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것들은 작은 상자 안에 담긴 채 여행 내내 그와 함께 있었다.
얼굴이 안 좋네. 프랭클린이 위풍당당하게 앉아 있는 박물관에서 만났을 때 제일라가 커크에게 던진 첫 마디였다. 잠을 제대로 못 잤어. 커크의 대답에 제일라의 얼굴에 어렴풋하게 쓴웃음이 떠올랐다. 왜? 유령이 무서워서? 가볍게 말하는 그는 분명 이종족이었는데도 놀라울 만큼 인간처럼 보였다. 커크는 살짝 곤혹스러워졌다. 그것마저 잘 안다는 듯 제일라는 긴 머리를 흔들며 소리 내어 웃었다.
나는 반은 인간이나 마찬가지야. 나를 키운 것이 바로 인간의 배였으니까.
아, 그런 건가? 불쾌했다면 미안해.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스카티도 그렇고 아카데미의 동기들도 나를 보면서 종종 당황하곤 해. 근데 별로 나쁜 기분은 아니야. 이상한 일이지만.
제임스티, 몽고메리 스카티 같은 어색한 호칭은 사라지고 없었다. 약간씩 튀었던 영어 발음조차 지금은 완벽한 샌프란시스코의 억양이다. 커크는 제일라를 따라 가볍게 웃었다. 아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한 미묘한 기분이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거대한 프랭클린이 먼지와 자외선을 막아주는 보존장에 휘감겨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은 넓고 인적이 없었다. 시간마저 늦어 실내에는 그들 둘 뿐이었다. 프랭클린의 선내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대신 커크는 야트막한 난간에 기대 섰다. 오랫동안 알타미드의 비바람에 깎인 선체의 얼룩덜룩한 녹은 그대로였으나 요크타운에서 얻은 파손은 말끔하게 수리되어 흔적이 없었다. 역사란 무엇일까. 유물의 보존만큼 기만적인 작업도 없다고 커크는 생각했다. 보존은 보존이 아니다. 무언가의 보존은 그만큼의 삭제를 포함한다. 기억과 망각은 같은 시간의 양면이었다.
알타미드에 같이 가겠어?
지난 며칠 그의 속에서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떠돌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문득 눈앞이 밝아지는 듯했다. 알타미드에 간다. 엔터프라이즈를 보기 위해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만나야 하니까. 그래, 이게 내가 원하던 것이었어. 스팍도 맥코이도 아닌 제일라와 함께 가고 싶었다. 그러나 제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내 집이 아니야, 커크.
난간을 훌쩍 넘어선 제일라는 프랭클린의 단단한 목에 손을 얹고 올려다보았다. 두 개의 커다란 눈동자 같은 네이셀이-지금은 그 속의 딜리리움 원자로를 잃고 텅 비어 있지만- 언젠가 달렸던 우주를 그리워하듯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일라는 인사를 하는 것처럼 녹슨 금속을 가볍게 두드렸다.
내 집은 여기 있으니까. 다녀와. 그리고 엔터프라이즈는 어떤지 말해줘.
커크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한 배의 함장이 다른 배의 함장에게 갖추는 예우였다.
혼자 가겠다는 말에 본즈는 염려스러운 얼굴을 했으나 반대는 하지 않았다. 스팍은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알겠습니다, 라고 짧게 말했을 뿐이었다. 다녀와서 꼭 상담 받아야 해. 셔틀베이까지 졸랑졸랑 따라온 본즈가 그날 세 번째로 말했다. 엔터프라이즈가 잘 있는지 얘기해 줄게. 커크는 씩 웃으며 대꾸했다. 본즈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도 내년이면 어느덧 마흔이었다. 정밀한 항법지도 덕분에 5년 전 엔터프라이즈가 힘겹게 헤쳐갔던 성운 속을 셔틀은 자유롭게 날아갔다. 알타미드에 착륙했을 때는 오전의 해가 쭉쭉 길어지는 시간이었다. 행성에 위험한 동식물은 별로 없었고 한낮이니 위험의 확률은 더더욱 낮아질 것이었다. 캠프를 설치하고 주변을 답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커크는 꼭 필요한 일만 해두고 셔틀을 내버려둔 채 바위 언덕 너머 보이는 잔해를 향해 나아갔다. 5년 전의 모습 그대로, 선체 위로 뻗어오르는 푸른 이끼와 덩굴 아래 고요히 잠든 듯한 모습으로, 엔터프라이즈는 오랜만에 돌아온 그를 맞아주었다. 요크타운에서 알면 펄쩍 뛰겠지만 커크는 그날 밤을 잔해에서 새울 작정이었다. 함장이 배를 떠나서야 되겠는가. 트라이코더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스태이빌라이저와 임펄스 엔진의 연료는 이미 기화하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직 이상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커크는 미끄러운 동체를 힘겹게 디디고 걸어 잔해의 가장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브릿지로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동체가 완전히 뒤집혀 있어 여의치 않았다. 결국 커크는 선체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포기하고 적당히 평탄한 곳을 골라 앉았다. 장비는 있었으나 텐트는 치지 않기로 했다. 배를 떠나지 못한 이들이 있다면, 거추장스러운 것 없이 만나고 싶었다.
해가 졌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쉼없이 이어지는 척박한 산지, 엔터프라이즈의 잔해가 가장 큰 바위처럼 버티고 선 옹색한 분지의 맞은편에, 스타플릿이 세운 위령비가 가느다란 은색 바늘처럼 서 있었다. 튀어나온 골조물에 기대어 졸던 커크는 얼굴에 닿는 바람이 차가워지자 잠에서 깼다. 알타미드는 일교차가 큰 편이었다. 뻐근한 어깨를 이리저리 펴며 그는 석양을 받아 붉게 빛나는 위령비를 바라보았다. 밤이 오고 있었다. 불을 밝힐까 하다가 커크는 그대로 웅크리고 앉아 내리는 어둠을 기다렸다. 지구보다 몇 배는 큰 거대한 행성에서 지금 그는 홀로였다. 바람에 나무들이 버석거렸다. 어둠 속에서 갔던 길을 되짚어 오는 망자들의 발걸음일까. 문득 서러움처럼 공포가 치밀었다가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움켜쥔 주먹을 내려다보고는 커크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폈다. 어느새 들어찬 긴장 때문에 천천히 하나하나 손가락을 펴야 했다. 늘어뜨린 다리 위에 애써 편 손을 가볍게 얹으며 커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내가 왔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내게 와줘. 무슨 이야기든 들을게.
죽은 이가 다시 돌아와 그의 앞을 걷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죽은 이와도 생전처럼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나누고,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론가 가는 걸까, 아니면 영영 사라지는 것일까? 인류가 삶과 죽음을 구분한 시작점부터 물어왔던 질문이었으나 지금도 그 답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우주의 끝을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처럼. 커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의 삶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가 두려웠고, 삶이 뿌리를 내리고 안정을 찾은 후부터는 미래를 생각하기만도 바빴다. 그가 걸어온 기나긴 길에서 뒤에 남겨진 이들은 커크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죽어서 그와 함께 가지 못하게 된 이들, 그는 그들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생각하고, 더욱 깊이 애도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울컥울컥 치미는 공포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을 다스리며 커크는 심호흡을 했다. 빛이 영글었다. 처음은 위령비에 내려앉은 별빛 뭉치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심히 돌린 시선 끝에 하얗고 둥근 빛 하나가 데구르르 굴러 검은 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걸린 순간, 커크는 괴현상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렸다. 트라이코더는 묵묵부답이었다. 커크가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듯 빛들이 무리지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여섯, 스물, 백. 낮에 분지를 날던 솜털 달린 홀씨처럼 빛들이 날아오르며 부서진 동체를 비추었다. 커크가 앉아 있는 잔해 아래서도 까불대는 빛들이 기어나왔다. 저도 모르게 발가락이 꽉 오므라들었다. 식은땀이 소름 돋아난 피부를 적셨다. 커크는 무기를 쥐고 싶은 충동과 싸우며 주변을 맴도는 하얗고 파란 빛덩어리들을 바라보았다. 분지는 고요했다.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두려움이 서서히 당혹감으로 대체되는 것을 느끼며 커크는 어깨에 살짝 내려앉았다 사라지는 빛을 보았다. 이미 읽은 보고서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긴 했다. 이 현상은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어두운 밤이 되면 수백 개의 불빛이 나타나고, 해가 뜨면 사라진다. 그것뿐이다. 어떤 측��기기에도 잡히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그리고 바라보는 이의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아름답고 신비롭다고도 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커크는 묘하게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전의 관찰자들과 자신이 다를 거라고 무의식중에 믿었음을 문득 깨달았다. 유령이 있다면 그에게만큼은 다가와줄 거라고, 비명이든 호소든 말을 건네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믿었는가?
아니면, 그것을 원했던 것인가?
아아. 커크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며 어깨를 숙였다. 깨달음과 함께 명치 끝이 불에 덴 듯 아파왔다. 그는 입속으로 신음을 깨물며 눈을 들었다. 어떤 연결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끊어지지 않는다. 죽음을 넘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망각의 흙에 묻혀서도 새롭게 자라나는 생명의 일부가 될 뿐 삭제되지는 않는다. 에디슨이 두 번의 죽음을 겪고 나서도, 인간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잃었어도, 그의 대원들만큼은 잊지 못했던 것처럼. 잊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염원이 절대적인 죽음의 강마저 넘어서, 죽은 이들이 산 자들의 세상으로 돌아오는 방주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뜨거운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맺힌 열매처럼 빛들이 그를 감쌌다. 이것은 유령이 아니었다. 죽은 이들의 혼은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대신 이곳에 남겨진 것은 산 자들의 애도와 염원이었다.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수없이 많은 그 마음을 받아 밝혀진 빛들이 난파한 배 위를 날고 있었다. 엔터프라이즈가 떠나간 이들을 위해 부르는 노래였다. 호흡을 가다듬은 커크는 천천히 일어섰다. 내민 손 끝을 빛덩어리 하나가 장난스럽게 살짝 치고 날아갔다. 빛들 속에서 엔터프라이즈의 파괴된 동체는 별빛 가루를 뿌린 듯 부드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작별 인사를 했으니, 이제는 다시 여행을 떠날 시간이었다.
프랭클린이 떠난 자리는 무너져내린 잡석과 쓰러진 나무에 묻혀 있었다. 한 척의 배가 행성에서 생을 마쳤고, 또 한 척의 배가 다시 생명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Poetry of fate. 언어로 이루어진 모든 것을 기억하는 데 천부적 재능을 가진 우후라가 들려주었던 크랄과의 대화, 그 속에 있었던 한 구절이 커크의 입술에 얹혔다. 유한한 생명에게는 길었던 백여 년의 세월이 기묘하게 꼬아놓은 그들의 운명이었다. 적당한 자리를 찾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묵직한 돌무덤을 파내려가는 데 또 상당한 시간이 소모되었다. 간신히 아픈 허리를 폈을 때 커크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알알이 맺혔다. 옆으로 밀어놓은 자갈 무더기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커크는 배낭에서 가져온 것을 꺼내었다. 조그만 나무 상자였다. 뚜껑을 열자 안에는 낡은 노트 한 권과 만년필 한 자루,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새로 태어난 금속의 예리한 빛을 잃지 않은 펜던트와 브로치가 누워 있었다. 지구에 있었던 작은 집의 작은 연못가에는 늦가을을 맞아 시들어가는 수선화가 무리지어 늘어서 있었다. 샛노랗게 빛나는 꽃잎을 가진, 전장에서 쓰러진 병사들을 애도하듯 무덤 위에 피어난다는 꽃. 에디슨의 부인이 좋아했다는 꽃이었다. 그녀가 남편에게 선물받아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는 수선화 모양의 펜던트와 브로치를, 커크는 에디슨의 일기와 함께 묻었다. 그가 불행했던 동료와 그 아내에게 보내는 나름의 장례 의식이었다. 선장은 모든 선원들 중에서도 최후까지 배와 운명을 함께한다. 그것이 그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에디슨은 배를 버렸으나 프랭클린은 제일라와 함께 그에게 돌아갔다. 프랭클린이 요크타운에 있으니 에디슨의 남은 부분은 여기에 묻히는 것이 옳다고 커크는 생각했다. 그는 길을 잃었을 뿐이다. 광대하고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찬 우주에서 언제든 커크에게도 찾아올 수 있는 운명이었다.
잊지 않겠습니다.
조그만 봉분과 묘석을 보며 커크는 말했다. 잊지 않으리라. 알타미드에 잠든 엔터프라이즈와 크루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에디슨과 그의 가족들 역시 잊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커크의 세계를 만들어 준 이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잊지 않는 것,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 스러져 간 삶이 의미를 남기도록 하는 것. 개척이란, 역사란 그런 것이라고, 자신도 끝까지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커크는 무덤을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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