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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가 알리제의 __해주는 엄마인 이야기
"멋져, 엄마."
어린 엘레젠 소녀는 마지막 매듭을 마무리짓고 만족스러운 듯 한 발짝 떨어져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나 덜렁이는 성격인 그에게도 침착하고, 차분하고, 누구보다도 꼼꼼해지는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눈 앞에 있는 건강한 갈색 피부를 한 단단한 근육질의 비에라족 모험가-흔히들 영웅이라 부르는, 그 사람이 맞았다-는, 전라인 상태로 입을 다물고 무릎을 꿇고 침대 위에 앉은 채 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의 몸은 관절 부분을 쉽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잘 삶아 꼼꼼하게 기름을 먹인 마 로프로 묶여 있었다는 점이었다. 온몸에 잔흉터가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건강하고 탄탄한 피부와, 파고들 듯이 단단하게 묶인 밧줄. 그것으로 한 장의 그림이 되기엔 충분했다.
알리제는 종종 모험가를 <엄마>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곧 <놀이>를 시작하겠다는 사인이었다. 모험가는 알리제가 요구하는 것들에 대해 좋다, 싫다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그렇다고 한 번도 거절한 적은 없었다.
그저 부르면 대답했고, 하고 싶다면 몸을 내어주었고, 결코 중간에 멈추자 한 적이 없었다. 알리제가 느끼기에는 그 점이 가장 아쉬우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좀 더 자신에게 장난 쳐 줘도 좋을 텐데. 더 살갑게 굴어 줘도 좋을 텐데. 하긴, 그러면 또 지금만큼의 매력은 없을 터였다.
모험가의 어깨를 강하게 밀자, 그는 그대로 나동그라지다시피 침대 위에 누웠다. 알리제는 세계를 구한 영웅이 저항할 도리 없이 비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누워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씨익 웃고는 천천히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자체로는 성적인 의도라고는 찾아볼수조차 없는 손의 움직임이었지만 항상 이 뒤에 뭐가 오는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모험가의 숨이 천천히 가빠져 오기 시작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천천히 알리제의 손이 얼굴을 쓸며 밑으로 내려왔다. 가슴 근처를 노닐던 손가락이 유두를 장난스레 튕기자, 이제껏 말 한 마디 없던 모험가도 으읏, 하고 처음으로 소리를 흘렸다.
"딸에게 만져져서 기분좋아하는 거야?"
양 쪽 유두를 동시에 잡아당기듯 문질러, 허스키한 톤의 낮은 신음소리가 모험가의 입술에서 연이어 비어져나왔다. 알리제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계속 말을 걸었다.
"평소보다 더 반응하는 것 같지 않아? 기대하고 있었나 봐."
동그랗게 고개를 세운 유두를 이를 세워 가볍게 깨물며, 알리제의 손이 좀 더 아래로 내려왔다. 둥근 엉덩이를 쓸며 성기를 손으로 비집어 벌린다. 이미 미끈해�� 질구 근처를 손가락으로 훑고 살짝 들어올리자, 질액이 가는 실처럼 쭉 이어졌다.
"엄마는 정말로 토끼 아니랄까봐 매일매일 발정기구나. 벌써 이만큼 젖어버렸대요."
알리제가 놀리듯 말을 걸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찌걱거리다 못해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눕힌 자세로 다리를 위로 돌려 다시 한 번 성기를 벌리고 혀로 클리토리스를 핥자, 모험가의 신음소리가 좀 더 커졌다. 몸을 버둥대려 해도 단단하게 묶여 있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완전히 흥분한 건지, 질 내부를 집요하게 자극하던 알리제의 손이 금세 흥건해졌다.
"침대가 지저분해졌어."
실제로 그랬다. 침대는 튀고 흐른 질액인지 뭔지 모를 투명한 액체로 얼룩져 있었다.
"어쩔 수 없네... 이렇게 야한 엄마는 벌을 받아야지."
모험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서랍에서 작은 회초리를 들고 온 알리제가 모험가를 향해 물었다.
"괜찮지?"
모험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알리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모험가의 몸을 밀어 엎드리게 하고 회초리로 그의 단단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가볍게 후려쳤다. 찰싹 하는 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따끔하고 얼얼한 고통에 모험가가 몸을 들썩였다. 모험가의 살갗 위에 금세 붉은 자국이 올라왔다.
"오늘은 가볍게 오십 대만 때릴게, 엄마. 숫자 세는 거 잊지 말고."
모험가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휘익, 차악. 하나, 둘, 셋. 엉덩이에 길고 붉은 자국이 하나씩 늘었다.
"...오십."
연속되는 매질에 긴장했던 몸을 풀고 숨을 돌리고 있자니, 뒤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모조 성기를 착용하는 소리는 모험가의 귀에 익숙했다. 알리제는 모험가를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엎드리게 한 채, 착용한 모조 성기를 삽입해 왔다.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더 큰 것 같아. 모험가는 허억 숨을 토했다.
언제나처럼의 허리놀림일텐데 꾹꾹 밀어올려지는 힘이 유난히 강했다. 그는 신음 섞인 거친 숨소리를 내다 이내 몇 번이고 온몸을 경직시키며 바르르 떨었다.
그제서야 좀 만족스러웠는지 알리제가 모험가의 몸에 걸린 밧줄을 풀었다. 꽉 묶여 있던 밧줄 자국과 몸을 버둥거릴 때 쓸린 흔적이 드문드문 몸에 남아 있었고, 그 모습은 한 번 가라앉았던 성욕을 다시 한 번 불러일으킬 만큼 에로틱했다. 알리제는 차갑게 얼린 수건을 가져와 모험가의 엉덩이 위에 올렸다.
"수고했어."
모험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제가 모험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험가는 귀를 뒤로 젖힌 채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어쩐지 전보다 감도가 더 높아지는 것 같지? 개발되는 거려나-, 그런 거면 좋을 텐데. 이제 손가락을 대기만 해도 움찔움찔한다던가, 아니면 이런 걸로 느껴버린다던가."
아까 전의 회초리질로 붉고 긴 자국이 한참 남은 엉덩이를 시원하게 찰싹 소리가 나게 한 대 치자, 모험가가 벌떡 일어났다. 짐짓 화가 난 듯한 표정을 한 채 등짝이라도 때릴 기세로 자신을 붙잡으려는 모험가를 피해 까르르 웃으며 도망치다가, 알리제는 방의 구석에서 문득 눈을 빛낸다.
"주인님에게는 복종해야지, 엄마. 무슨 짓이야."
<놀이>는 그대로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모험가는 그 자리에 바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알리제가 손가락으로 모험가의 콧잔등을 가볍게 튕겼다.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알리제가 다시 ‘그것’을 착용했다. 모험가가 무릎을 세우고 엎드린 자세로 알리제 쪽으로 엉덩이를 내밀었다. 그리고 알리제가 삽입한 곳은, 아까와는 다른 쪽 구멍이었다. 아무리 아랫도리가 질척해져 미끈한 액이 뒤쪽까지 이어져있었다 해도, 제대로 근육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기에 모험가의 머릿속은 그대로 하얗게 바랬다. 잠깐, 거긴-... 그래도, 다행히도 내심 겁을 먹었던 것보다는 아프지 않았다. 자세가 고통을 줄인 덕분인 듯 했다.
단단한 것이 드나들면서 천천히 감각이 깨어났다. 처음은 아니지만 익숙하지도 않았던 곳이 조금씩 말랑말랑해졌다. 간질간질하고 찌릿한 것이 한 데 모여 쾌감이라는 형태가 되어 머리를 울리고, 점점 더 격렬해지는 움직임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한 번 물꼬가 트인 뒤로는, 둑을 무너뜨리는 듯한 감각만이 존재했다. <절정에 이르다>라는 흔히들 일컫는 단어가 하찮게 느껴질 만큼 몇 번이고 머릿속이 휘저어졌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자극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모험가는 저절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흘리며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체력이라면 세상 누구보다 자신있는 모험가였지만, 한참을 계속되는 쾌락에는 그만 무너지고 만다. 그는 그대로 엎어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알리제도 제법 지친 모양으로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
모험가는 <놀이>를 끝내고 침대 위에 마주 누워 서로 살을 부비다, 어느새 잠들어버린 알리제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먼저 지쳐 곯아떨어지다니 그것마저도 너답고, 어떤 의미로는 참 짓궃구나. 그는 물끄러미 알리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모험가는 알리제의 잠든 눈꺼풀에 조용히 입술을 대었다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가 좀 화끈거리긴 했지만, 몇 가지 의뢰를 마치러 나가야만 했다. 아마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운 걸 알았다가는 또 벌을 주려고 하겠지만, 그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니까. 모험가는 옷을 챙겨입고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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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전라하(남체빛전/여체라하) 임신하는 얘기... (5.4 쎄게 스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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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전라하(남체빛전/여체라하) 임신하는 얘기... (5.4 쎄게 스포 있음)
빛전라하(남체빛전/여체라하) 임신하는 얘기... (5.4 쎄게 스포 있음)
"라하, 에테르가 두 사람 분이 되었네요. 이건 좋은 소식인가요?" "에, 어라...?" "설마 스스로 눈치 못 채고 있었던 건 아니죠?"
지나가던 야슈톨라의 말에 돌의 집에 놓여진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그라하 티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라면 짐작가는 사람은 단 하나, 빛의 전사라고 불리고, 때로는 영웅이라고 불리며, 그리고 때로는 모험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사람뿐이다. 매번 <네 아이가 가지고 싶어>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아마 아이를 갖는다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거라며 내려놓던 게 몇 달 전부터의 일이었다.
그라하 티아가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 사람이라면 진즉에 다 알고 있었다. 아마도 홍혈의 마안과 관계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뿐,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사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었고 그러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크게 굴곡 없는 몸매와 높지 않은 목소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당연하게 남자로 여기게끔 했다. 그에게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고, 한 달에 며칠 정도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이었다. 타워와 일체화되어 인간이 아닌 몸으로 살았던 약 백 년이 넘는 시간은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편했다.
영웅은 응조이라는 여성의 이름을 하고 있지만 남성의 몸을 하고 있었다. 이 또한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는 사정이 있는 모양으로, 알 사람이라면 다들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마른 체형과 작은 ���, 중성적인 톤의 목소리 덕분에 몇몇 사람들은 당연히 여성이라고 여겼고 여태껏 라하도 조이의 성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의 비밀 아닌 비밀을 알게 된 건 정말 우연한 계기였다.
처음���는 분명 일방적인 동경이었다. 옛날 이야기에 나올 법한 영웅이라는 존재가, 스스로 되고자 꿈꾸기도 했던 존재가 눈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경이였고, 그 자체로 기쁨이었다. 영웅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 뭐든 해냈다. 세계를 구하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곧 특별한 애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분명 그 감정이 착각일 거라고 생각했다. 곧 가라앉을, 아무렇지도 않아질 그저 뒤틀린 동경의 모습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어한 것도 있었다. 별 일 아닐 거라고 끝없이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새벽의 일원으로서 야만신 신자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행동을 같이하게 되면서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늘었고 그는 그제사 깨달았다. 이것은 하나의 욕구라고. 평범하게 영웅과 함께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하고 싶다는 욕구. 약간의 독점욕, 그리고 성욕.
술식을 발견하기 위해 장치를 과부하시킨 탓에 '새벽에서 배상해야 했다면 새벽의 존치마저도 출렁였을 정도의 가격'의 갈론드 사의 마도 장치를 박살내고 만 날 밤, 라하는 잔뜩 취해 있었다.그 자리에서는 <술식을 전부 기억했으니까 괜찮아>라고 강하게 의지를 표명하고, 좌절해 있던 빅스와 웨지에게 사과하고 넘어간 정도였지만 그에게도 만져본 적조차 없는 거금의 장비를 망가뜨렸던 것은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우리 자기, 무슨 일이야?"
하필 그 날따라 술이 잘 받는 날이었다. 헤롱헤롱해진 상태로 끝없이 술을 들이붓고 있는 라하의 옆에 나타난 건, 이 시점에 가장 곁에 있어주었으면 했지만 동시에 가장 자신의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상대였다.
"조이." "어휴, 술 냄새 나는 것 봐. 아까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런 거야?" "뭐어... 그렇네, 아무래도 가격을 들은 순간 꽤 충격적이어서." "그렇게 쩔어 있다가 기껏 기억한 술식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너한테 다 빚으로 떠넘겨 버린다?" "윽, 그럴 일은 없으니까 괜찮아. 샬레이안의 현자 칭호는 공짜로 받은 게 아니라고." "응, 알지. 나도 사랑해."
너는 누구에게나 사근사근하고, 모두를 애칭으로 부르고, 엉뚱할 정도의 살가운 애정을 쏟곤 하지. 그것은 라하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그도 언제나 조이의 평등한 애정을 받을 수 있었다. 갈색의 매끈한 손이 라하의 손을 덮었다.
"위로해 줄까?" "무슨 뜻이야?" "뭐어, 흔히 하는 것들. 섹스라던가... 나라도 괜찮다면 말이지."
뜬금없는 제안에 라하는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이가 울다하의 뒷골목 출신이라는 건 언뜻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태까지 자신이 고민해 온 것들은 뭐란 말인가. 네게 감히 성욕을 품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일들은, 함부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던 날들은 대체.
"됐어." "겁이 많네." "넌 아무것도 몰라." "왜 모르겠어. 네 눈동자가 붉어서 시선도 뜨겁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행동하잖아, 넌." "그게 나니까. 무대 뒤편에서도 영웅이라고요." "정말이지...너 말이야." "나 잘 빠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머리가 아픈 건 술 탓만은 아닐 터였다. 라하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너, 그냥 적당한 상대를 찾던 중인 거 아니야?" "부정은 안 할 건데, 그렇다고 누구라도 좋은 건 아냐." "말해 두지만, 나는 남자애가 아냐, 널 만족시킬 수 없어." "아, 신경쓰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난 여자가 아니니까...이렇게 얘기하니까 되게 쓰레기 같네, 참."
쿵, 하고 뭔가가 머리를 내리찍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라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당연히 조이를 여자라고 생각했고, 스스로가 약간 특이한 건가? 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수많은 모험가들이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언약식을 올리는 세상이고, 같은 성별의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는 게 이상한 취급을 받던 건 아주 오래 전 일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성별 따위 아무래도 좋은 일일 뿐일 텐데도, 어쩐지 해답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뒤의 전개는 놀라울 만큼 빨랐다. 라하는 술김에 응석을 부리겠다는 핑계로 조이에게 기대 왔고, 조이는 자리를 치우고 라하를 방으로 데려갔으며, 두 사람은 놀라울 만큼 뜨겁고 농밀한 시간을 보냈다. 새벽 늦게까지 이어진 정사로, 두 사람은 다음날 한낮에서야 겨우 눈을 떴다. 확실히 기분은 좀 가벼워진 것 같네. 라하는 숙취와 근육통으로 삐그덕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가, 조이가 팔을 잡아당긴 덕에 도로 침대 위로 나동그라지듯 누웠다. 조이가 라하의 등 뒤에서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어차피 오늘 일 없잖아."
느긋한 오후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라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품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여태까지 이 품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쳐갔을까. 괜한 생각에 입이 썼다. 아아, 엉망진창의 독점욕이다. 이 품에 안기는 게 나뿐이라면 참 좋을 텐데. 물론 조이가 그런 데에 얽매일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라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조이는 만인의 연인이니까, 아마 몸을 섞는 일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멍하니 머리를 비우려니 입에서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네 아이가 가지고 싶어." "의외의 말을 하네, 너."
조이가 키득거리며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라하는 적당히 말을 주워섬겼다. 정말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람... 하고 스스로 생각할 정도로.
"그러려나? 네 모험가로서의 기량과 내 현자로서의 재능이 만난다면 분명 멋진 아이가 태어날 거야." "그럴싸한 이론이네." "뭐, 농담이지만. 네가 응해 줄 리도 없고." "너한테라면 속박되어도 좋을 것 같다는 기분은 들거든, 의외로." "그건 생각지도 못한 대답인걸." "좀더 기뻐해주지 않을래?"
조이가 라하의 귀를 가볍게 깨물었다. 라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장난스러운 손이 가슴께에 닿아 민감한 곳을 건드리자, 금세 달콤한 신음이 흘러나온다.
"네가 진심으로 한 말이라면 난 지금부터 시동 걸 수도 있는데." "...!" "어떻게 할래? 네가 말한 이론, 시험해보고 싶긴 해."
뭐, 그런 연유로... 두 사람의 사랑의 흔적이 라하의 몸 안에 싹을 틔웠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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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님 커미션 : 히카에메 19금
자주 그랬던 것처럼, 그 날도 나크는 아모로트의 길거리를 걸으며 시간을 보내던 참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고, 이를 원래대로 돌려놓고자 했던 시도조차 저지당하고 만 연인의 기분을 헤아리며. 그리고 그의 처절하고 필사적인 시도를 막은 건 바로 자신이었다- 연인이 그런 자신을 선택해 사랑한 이유는 결코 완전히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영원히 모를 것이었다. 그런 복잡한 생각에 젖어 있을 즈음, 눈 앞에서 <그>가 나타났다. 한 때 아씨엔 에메트셀크라고 불렸던 남자. 지금은 소멸되기 직전까지 간 터라 힘도 많이 잃었을 뿐더러, 아씨엔의 자리에서는 내려왔기에 새로운 몸을 장악하는 등의 아씨엔 특유의 능력 몇 가지는 쓸 수 없는 모양이었지만... 여전히 고대인으로서의 힘은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동 마법으로 나크가 어디에 있든지간에 그 옆에 문득문득 모습을 드러내곤 했고, 때로는 그걸 즐기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날따라 뜬금없이 그가 나크에게 내민 건- 어딜 보나 케이크 상자였다. 케이크를 받아들고 의아해하는 나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메트셀크가 입을 열었다. "생일 축하한다, 나크." "에?" "되다 만... 크흠, 현생 인류들�� 생일날 케이크를 준비한다고 들었다." "나 오늘 생일 아니야." "넌 네 생일을 모르지 않나, 적당히 오늘로 해 두지 그래?" "뭐야, 어디서 케이크 할인 판매라도 하고 있었어?" "넌 이 내가 고작 케이크 하나 가격에 연연할 정도로 돈이 없는 줄 아나?" "아니, 그렇지만..." 그런 실없는 대사를 하며 두 사람은 아름다운 도시를 걸었다. 깊은 바다 밑에서, 영원히 어슴푸레한 밤인 그곳.건물들은 전부 밝은 불이 켜져 있었고, 얼굴을 가린 이들의 환영은 외로운 거리에 외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에메트셀크는 문득 한 건물 앞에 멈췄다. 커다란 빌딩. 출입문 위에는 에오르제아 공용어가 아닌-나크가 읽을 수 없는 글자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빌딩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이동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이 좁은 공간은 나크에게는 여전히 생소했다. 도착한 곳에는 복도를 따라 문이 여러 개 있었고, 그 중 한 곳의 문을 자연스레 열고 에메트셀크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크에게 따라 들어오라 손짓했고, 나크는 그에 따랐다. 그 곳은 딱 봐도 사람이 살 만한 공간이었다. 그들이 발을 들인 곳은 거실이었고, 그리고 방이 두 개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하나는 침실, 하나는 서재 같았다. 나크는 거실 중앙에 놓인 테이블 위에 케이크 상자를 올려두었다. 벽에 붙은 넓은 쇼파에 두 사람이 걸터앉았다 툭 던지듯, 에메트셀크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 사람의 생일이기도 해." "잠깐만, 그래서 내 생일이라고 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될까... 아니, 그런 얼굴 하지 마. 물론 내가 네게서 그 사람의 에테르를 잠깐 겹쳐보았다고 해서 너를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말이야,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한 이의 흔적을 이어받는 것을 허락했다는 점에서 내가 널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알겠지. 기뻐하라고." 나크는 짐짓 화난 얼굴로 에메트셀크를 노려보았다. 노려보았다기에는 좀 더 뾰루퉁한 얼굴이긴 했지만. 그는 에메트셀크의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가 자신을 되다 만 것이라던가 불완전한 것이라 부르는 데에는 익숙해졌지만, 화난 지점은 당연하게도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멋대로 남의 흔적 위에'덧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기꺼울 리 없다. "내가 그걸 진심으로 기뻐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에메트셀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으로 놀란 것 같은 기색이었다. 나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끔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니까. 생각보다 그는 쉽게 고개를 숙여 왔다. "사과하도록 하지. 그의 생일에 너에 대한 정을 더해 현세의 방법으로 축하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너무하네, 정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군." "거야 당연히 화가 난다고.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기나 해?" "미안하지만 네가 왜 화가 났는지 나는 짐작밖에 할 수가 없어. 너희들은 이름을 지을 때도 때로는 존경하는 선대의 인물로부터 이름을 따오지 않나? 건축물에도 옛 사람의 이름을 적어 기리곤 하지. 그런데 왜 이건- 기분나빠하는 거람." "..." 그런 비유를 들으니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닌데, 분명 틀린데. 나크는 천천히 생각하고, 천천히 입을 연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 그리고... 일단, 네 마음에는 고마움을 표할게. 그렇지만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생일이라는 건, 일 년에 한 번 뿐인 자신을 위한 날이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보통은 소중한 사람들과 지내고 싶어 하고 말이야, 그리고 나라면, 만약에 내 생일이라면 오롯이 둘이 지내고 싶은 거야. 단둘이 말이야. 네가 나를 위한 날에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게 싫어." "흐음, 흥미로운 의견인데... 대충 알았다." "...그러니까, 굳이 오늘을 내 생일로 정하고 싶다면." "네가 지독하리만치 자세하게 구현해 놓은 이 공간을 그 사람이 아닌 내 냄새로 물들일 거야. 나와 네 냄새로... 하데스." 나크는 그의 어깨에 팔을 얹고 키스했다. 에메트셀크는 밀어내지 않았다. 에메트셀크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는 몰랐다- 어쩌면 되다 만 것들의 취미에 응해줄 뿐인지도 몰랐다. 더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나크는 그저 본능대로 행동했다. 옷 단추를 풀어내리며 계속해서 입술을 핥고 깨물고 부딪고, 그의 목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그를 아예 쇼파 위에 눕혀버리고 어깨를 깨물며 손가락으로 집요하게 가슴을 지분거리자 그의 평상시의 냉소적인 태도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에메트셀크의 반응은 빨랐다. "웃..." 누운 자세에서 무릎을 세우고 다리를 오므리려 하는 건 어느때처럼의 그의 버릇으로,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기 시작할 때는 늘 그랬다. 스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걸까. 몇 번이나 관계를 가진 지금까지도. 나크는 섭섭함을 느끼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합은 놀라울 만큼 잘 맞아서, 나크는 이제 눈을 감고도 에메트셀크가 민감하게 느끼는 부분을 짚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허리를 쓰다듬고, 허벅지 뒤쪽을 손가락을 세워 가만히 훑자 에메트셀크가 후왓 소리와 함께 목을 뒤로 꺾었다. 나크는 그의 다리를 일부러 부끄러울 만큼 적나라하게 벌려 양 팔로 누르고, 일부러 들으라는 듯 소리를 내며 그의 것을 천천히 빨아올렸다. "취미가 나쁘군 그래..." "왜냐면 이 쪽이 더 기분좋잖아, 너. 저번에도 그랬고." 그렇게 한참 에메트셀크의 것을 입으로 애무하는 동안, 벌려진 다리 탓에 뚜렷하게 드러난 뒷쪽은 윤활제가 필요없을 만큼 타액과 쿠퍼액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나크는 손가락으로 입구의 긴장이 풀릴 때까지 힘을 살짝 실어 문질렀다. 장난기가 발동해 구멍 입구를 가볍게 핥자, 그가 흐윽, 하고 바로 반응해 왔다. 사실은 좀 더 괴롭혀주고 싶지만, 두 사람 다 더 큰 쾌락을 바라고 있는 건 명��했기에-반응을 보니 손가락 한 마디 정도는 들어갈까 싶어 나크는 검지를 가져다대고 살짝 밀어넣었다. 옴찔거리는 뒷쪽으로 손가락이 매끄럽게 빨려들어갔다. "하나 더 넣어도 괜찮아?" "그걸 대체 왜 물어보는 거야?!" "네가 싫으면 나도 싫으니까." "알아서 좀 하란 말이다..." 손가락이 두 개로 늘었지만, 아픈 기색은 없었다. 손가락을 구부려 안쪽을 훑고, 살짝 안쪽으로 패인 듯한 곳을 두드리자 에메트셀크가 입을 틀어막았다. "흡..."
포인트에 집중해 문지르고 꾹꾹 누르고, 어느새 나크와의 관계로 쾌락에 익숙해진 에메트셀크의 몸은 바로 반응했다. 그의 끝부분에서 투명한 액이 울컥 하고 방울져 흘렀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내벽을 자극하던 손가락이 빠져나와... 약간 허전함을 느끼나 싶던 참에 꾸욱, 하고 익숙하고 커다란 쾌락이 그의 안을 헤집고 들어왔다. 에메트셀크는 저도 모르게 흐악 하는 소리를 토했다. 나크가 작게 웃었다. 허리를 움직이는 동안에도 나크의 손은 멈출 줄 모르고 에메트셀크의 것을 위아래로 빠르게 흔들었다. 앞뒤로 휘몰아치는 자극은 분명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었음에도, 오히려 익숙한 만큼 더 강렬하게 와닿았다. 혀가 얽히고, 머릿속이 몇 번인가 종말의 순간마저 잊어버릴 만큼 하얗게 바랬다 돌아왔다. 짧은 듯, 동시에 긴 듯 헤아리기 힘든 시간들의 연속 끝에 에메트셀크가 먼저 절정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크도 그의 안에 자신의 정을 내었다. 나크가 그의 안에서 빠져나와 풀썩 엎어졌다.
"이제 좀 개운해?" "내 마음 알겠어?"
동시에 뱉은 말에, 두 사람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없어도 어쩐지 알 것 같은 것들이 있다. 단순히 짐작일 뿐이라도 괜찮다고 이 애정어린 휴전 관계는 말하고 있었다.
"그래, 에메트셀크. 케이크나 먹자." "네게 주는 거다, 그 사람이 아니라." "알고 있어... 와아, 초콜릿 케이크네. 예쁘다..."
상자를 열고 꺼낸 케이크는 제법 화려했다.매끈한 초콜릿으로 코팅된 케이크 위에, 나비와 튤립 모양의 희고 검은 초콜릿 장식이 올라가 있다. 거기에 초콜릿의 갈색과 흰색이 단조롭게 느껴지지 않게 살며시 얹어진 금박은 딱 좋은 밸런스로 포인트를 잡고 있었다.
"이건 먹기 아까운데." "어차피 먹어 없애기 위해 존재하는 데에 너무 깊은 의미 부여하지 말라고." "그냥 예쁘다고 말하는 거야."
먹기 아깝다는 말을 한 것치고는 서슴없이 튤립 장식을 입에 문 채 나크가 투덜거렸다. 달콤한 초콜릿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 사라지며 쌉싸름한 여운을 남겼다. 그는 그대로 에메트셀크의 입술에 제 입술을 살짝 가져다대고, 그의 입술을 장난스레 핥았다.
"...단 냄새." "에메트셀크는 단 거 싫어하던가?" "딱히... 싫어하지는 않지. 그냥 새삼." "새삼?"
"초콜릿 냄새가 너랑 잘 어울리는군... 하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게 다다."나크가 활짝 웃으며 그에게 쪽쪽 하고 몇 번 더 입을 맞췄다. 에메트셀크는 멋쩍은지 크흠, 하고 괜한 헛기침을 ���다. 그 헛기침은 조금씩 다시 들러붙어 오는 나크의 키스가 진해지자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침실 빌려도 될까?" "사양, 사양하....방금 했잖아!" "침대 밖에서 한 건 횟수로 카운트 안 하는 거 알지?" "-!!"결국 꽃장식과 나비만이 떨어진, 덩그러니 금박만이 뿌려진 매끈한 케이크를 뒤로 하고... 두 사람은 침대 위로 풀썩 몸을 던졌다(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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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와 자해 이야기
올리의 팔 안쪽에는 칼에 몇 번이고 베인 듯한 흉터가 있었다. 전투 때문에 생긴 것은 물론 아니었다. 딱 봐도 알 법한 인위적인 흉터.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을 만큼 명확한 흔적. 그리고 그곳에 새로운 상처가 생긴 것은 꽤 최근의 일이었다.
요샌 쭉 긴 팔을 입고 다니기도 했고, 잠옷으로 쓰고 있는 초승달 가운도 긴 옷이었다. 최근에 가까스로 마음을 조금 허락한 뒤로부터 라하가 <올리는 말랑말랑해서 기분 좋아>라며 은근히 붙어 오는 건 컨디션이 나쁘다며 변명하면 되는 것이었다.
실은 토벌전 모집에 <당신의 모습을 보아하니 민첩한 모험가처럼 보이지는 않네요>라며 거절당했을 뿐이었다. 그것뿐이라면 이미 익숙했지만, 우울해져 귀와 꼬리까지 축 늘어진 채 돌의 집 테이블에 엎어져 있자니 새벽의 동료들이 한 마디씩 말을 걸어온 게 오히려 올리에게 있어서는 독이었다.
<괜찮아? 기운 내.> 조금만 이렇게 엎어져 있을게, 금방 나아질 거야.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요, 올리. 당신답지 않아.> 그러게요, 하하. 얼른 밝아져야 할텐데.
<단 거라도 드실래용? 생크림을 얹은 팬케이크를 만들어올게용!> 아니 괜찮아, 됐어...마음은 정말 고마워.
그 외에도, 지나가던 모든 동료들과 새벽을 돕는 이들이 기운 내라며 한 마디씩 해 주고 간 탓에, 올리는 더는 테이블에 있기 힘들어져 방으로 들어가 펑펑 울고 말았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야속할 정도로 눈물이 흐르고 숨이 찼다. 대체 왜 나 같은 얼뜨기 모험가를 영웅 취급하는 거야, 대체 왜 내가 우울해져 있으면 다들 걱정하고 신경써주는 거야. 대체 왜 나는 이렇게 분에 넘칠 만큼 사랑받으면서도 외롭고 쓸쓸한 거야, 대체 왜.
그래서 그녀는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피가 흐르자 조금 개운해진 기분도 들었다. 상처가 깊은 건 아니니 금방 나을 터였다. 좋은 습관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올리는 스스로에게 ��명했다. 상처가 몇 개 더 늘었다. 실수로 조금 깊게 베는 바람에 송글송글 맺히던 피가 주륵 하고 흘러내렸다. 우왓, 올리는 급히 붕��를 가져와 감았다.
치유술 정도면 금방 회복될 상처였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상처가 난 부위에서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이게 기분 좋단 말이지... 올리는 침대에 풀썩 누웠다. 따끔따끔하고, 화끈화끈하고, 두근두근하다. 이렇게라도 괜찮다면 살아 있어도 될 것 같아. 상처의 감각에 집중하느라 방금까지 걱정하고 속상하던 일들이 조금 풀린 것도 있었다. 대충 감은 붕대 밖으로 핏자국이 약간 배어 나왔다.
올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타타루가 만들어 준 토마토 스튜와 바삭하게 구워진 빵으로 돌의 집에 있던 동료들과 저녁식사를 했고, 모두와 밝게 떠들었다. 아깐 잠깐 우울한 일이 좀 있었는데 이젠 괜찮아졌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 때까지만 해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침대에서 책을 읽으며 뒹굴거리고 있던 도중 라하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올리, 팔 줘 봐.>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팔?" "너, 뭔가 했지?" "아무 일도 없어." "그럼 더 괜찮겠네, 줘 봐." "윽... 싫어, 내가 왜." "빨리, 그거 그대로 놔두면 덧난단 말야." "네가 어떻게 알고 그래." "...밥 다 먹고 나서, 네가 다쳤으니 슈톨라가 찾아가보라고 그러더라."
그 자리에 사물의 형상이 아니라 에테르 자체를 보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떠올리고, 올리는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사람이 상대라면 거짓말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부러 치유술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도 그녀라면 알고 있을 터였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전부 들켰겠지. 올리는 몸을 일으켜 앉고 순순히 붕대를 감은 팔을 내밀었다.
"팔인 건 어떻게 알았어? 그것도 슈톨라 씨가?" "전에 네 흉터를 본 적이 있으니까. 뭐, 이번에도 거기일 거라 짐작한 거긴 해."
붕대를 풀자 피딱지로 범벅이 된 상처가 드러났다. 라하는 세상에... 하고 한숨을 푹 쉬며 올리를 끌어안았다.
"왜 그랬어, 그러지 마." "네가 뭐라고 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라하." "내 말 들을 때까지 계속 귀찮게 할 거야." "미워할 거야." "네가?" "..." "너, 소독도 안 했지?" "괜찮다니까." "약이라도 발라, 굳이 마법 쓰기 싫으면." "알았으니까 제발." "제발 뭐? 내버려두라고? 싫어, 안 내버려둘 거야. 약 발라. 들고 왔어." "하아..."
라하가 올리의 팔을 붙잡고 천천히 연고를 펴발랐다. 올리의 눈에서 또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왜 눈물이 나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마음이 아팠다. 아까는 분명 기분이 후련했던 상처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마치 쥐어짜듯, 올리는 훌쩍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야, 올리. 세상에서 너랑 가장 친한 친구라고. 사실은 그 이상이라도 좋을 만큼 널 좋아하는 사람이 나야. 그러니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네가 이럴 때마다, 계속 약을 발라줄 거고 계속 하지 말라고 말할 거야. 그리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할 거야." "잠깐, 친구라며!" "친구끼리 사랑할 수도 있지."
마침 약을 다 바른 라하가 올리의 입에 쪽, 하고 뽀뽀했다.
"친구끼리 뽀뽀할 수도 있고." "아잇, 정말."
라하가 새 붕대를 꺼내 올리의 팔에 ��돌 감고 올리와 손깍지를 꼈다.
"친구끼리 손 잡을 수도 있고." "너 이러다 어디까지 가려고?!" "갈 데까지?"
라하는 올리의 이마에, 콧잔등에, 뺨에, 목에 잔뜩 키스를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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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하올리(뉴라하) 이야기.
우욱.
올리는 안에 있는 것을 게워냈다. 목구멍에 손가락까지 넣어서 있는 힘껏 전부 토해냈다. 그녀는 아침식사를 너무 많이 먹었다고 생각했다.사실은 토스트 두 조각에 햄 두 장 정도의 간소한 식사였지만, 아무튼 그랬다. 전부 토해내야만 할 것 같았다. 나 같은 건 아침식사를 할 자격이 없어. 나 같은 뚱뚱한 애가 아침부터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고 모두 속으로 비웃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올리는 화장실 밖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안절부절하는 라하의 존재를 깨닫고 말았다. 망했다. 저 애한테만은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라하의 걱정은 유난했다. 올리가 조금이라도 풀이 죽거나 자기를 탓하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정말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그는 올리 옆에 붙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곤 했다. 물론-그마저도 가식이 아닐까 올리는 의심하고 있었지만.
차라리 자신을 그저 써먹기 편한 영웅으로 봐 주거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해주는 편이 올리에게 있어서는 편했다. 물론 수많은 뛰어난 모험가들을 놔두고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자신을 신뢰하고 있는지는 도통 납득이 안 가지만서도.
"올리."
라하가 말을 걸어왔다. 올리는 서둘러 물을 내렸다. 갈론드 식 수세식 화장실 만세.
"올리, 괜찮아? 들어갈까?"
"아니야, 이 좀 닦고... 금방 나갈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줘."
"알았어. 밖에서 기다릴게."
왜 저 남자애가 <올리는 귀여우니까> 라던가, <올리랑 같이 있으면 뭐라도 좋아> 라던가-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지 올리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짐작도 안 갔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달콤한 말에 괜히 둥실둥실 행복한 기분이 들려고 하는 걸 그저 경계할 뿐이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올리가 '세상을 구한 영웅'인 만큼, 다른 이들이 그녀의 존재를 동경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특히 너-그라하 티아라면. 그녀 하나만 믿고 끝없이 기다리던 백 년이 넘는 세월들, 그녀를 그 세계로 불러오고자 했던 간절한 마음, 그 기억을 그대로 계승한 남자아이인 만큼.
이를 두 번이나 닦고, 깔끔하게 입 안을 박하향 나는 물로 헹구기까지 했다. 입 안이 얼얼할 정도로 매웠다. 욕실 밖으로 나가자 라하가 귀를 젖힌 채 올리에게 물었다.
"아침 식사가 맛이 없었어?"
"그럴 리가, 최고였어."
"그런데 왜 토했어..."
"그냥, 기분이 너무 안 좋��어."
올리는 침대로 가 그대로 풀썩,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엎어졌다.
"올리는 오늘 휴업이야... 아무 것도 안 할 거야."
"그럼 나도 아무 것도 안 하고 올리랑 같이 있을래. 따뜻한 염소젖이라도 가져다 줄까? 꿀 좀 타서, 먹으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괜찮아, 그냥..."
옆에 있어 줘,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도저히 나오지 않아서, 올리는 침대맡에 걸터앉은 라하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라하는 그것만으로 올리의 의도를 이해했는지, 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냥 그 손길만으로 툭 하고 눈물이 터져나왔다. 왜 갑자기 눈물이 났는지는 그녀도 몰랐다.
"왜 이렇게 챙겨주는 거야..."
그리고 뒤로 이어지는 말은 마음에도 없는 말이어서, 올리는 스스로 어떻게든 말을 멈추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분명, 이렇게 하면, 이런 말을 하면 넌 떨어져나갈 거라고. 가지 말았으면, 그렇지만 가 버렸으면. 나를 미워해줘, 라하.
"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부담스럽고 싫어. 내가 예쁘거나 귀엽지 않다는 건 나도 아는데 계속 귀엽다고 하는 거, 기만하는 것 같고 놀리는 것 같아서 싫어. 네 앞에서 뭔가 먹는 게 부끄러워. 비웃음 살 것 같아. 그래서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어버린 내가 미워서 전부 토했는데, 괜찮냐고 꿀 탄 젖을 가져다준다던가 그런 배려가 너무너무 불편해."
"미안해, 올리. 네가 그런 생각을 할 줄 몰랐어. 정말 미안해."
그리고 그는 뜬금없이 사과를 해 왔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올리는 벙쪘다.
"올리는 늘 나를 챙겨줬으니까, 올리가 날 챙겨주는 만큼 나도 챙겨주고 싶었어. 날 걱정해주고, 생각지도 못한 말들을 내게 해 주고, 함께 예전의 일들을 추억해주는 건 올리 너뿐이니까. 그리고... 진심이야, 내가 보기에 넌 정말 매력적인 아가씨라고."
라하는 잠시 침을 삼키고 말을 고르더니, 올리를 향해 똑바로 말했다.
"올리, 나... 없던 일로 하기 싫어."
"..."
"저번 환영회 때 일, 없던 일로 하고 싶지 않아."
몸을 섞으며 몇 번이고 좋아한다며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던 일들, 연인이 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며 손깍지를 끼고 울며 속삭이던 일들. 올리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술김이어서, 그날따라 엉망진창으로 취해 있었어서, 올리는 핑계를 대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라하에게 그 날 일어났던 것들을 전부 없던 일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언젠가, 언젠가 자기 자신을 지금보다 더 아낄 수 있게 된다면... 그 때 아직도 그가 자신의 곁에 있다면, 그 때는 어쩌면 자신의 감정을 확신하고 감정을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그 부탁을 라하는 들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해도?"
"거짓말이었어?"
"모르겠어, 만약에... 만약에, 더 각별한 사이가 된다면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평소처럼 대하면 돼."
"내가 제대로 널 좋아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고."
"이제부터 좋아하면 돼."
"아하하, 그게 뭐야... 억지잖아."
올리가 눈물이 덜 마른 얼굴로 피식 웃으면서 라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라하의 제안 아닌 제안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틈에, 라하는 대담하게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올리가 투덜거렸다.
"아까 토했다고, 지저분하게."
"이 닦았잖아, 안 닦았어도 했을 거지만."
"지저분하게!"
"뭐어... 아무튼 걱정하지 마,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꼭 연인이 될 필요는 없어. 친구부터 시작하면 되지. 메가 베스트 프렌드."
"그거 좋은 어감이네. 맘에 들어."
"그래도 따로 남자친구 만들면 삐질 거야."
"생길 리가 없다네요, 그라하 씨."
"너는 널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니까."
주고받은 농담 덕분에 올리는 기분이 좀 나아진 느낌이었다. 휴업이라고 했지만 오후 정도가 되면 임무 몇 가지는 수행하러 갈 수 있을 거 같아. 올리는 라하의 손을 여전히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꼬르륵- 하고... 올리의 배가 라하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울렸다. 그러게 먹은 걸 다 토하니까 이제 배고프지. 라하가 안쓰럽다는 듯 올리의 뺨을 만졌다.
"염소 젖, 데워 올 테니까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
"...응."
주방으로 가기 위해 라하가 방문을 닫고 사라지자, 올리는 먼지가 일 정도로 베개에 푹푹 머리를 박았다. 메가 베스트 프렌드가 다 뭐람, 멍청한 키올리! 떠먹여 줘도 못 받아먹는 멍청한 키올리! 그러면서도 어쩌면, 어쩌면 이렇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연인이라면 분명 언젠가는 헤어질 사이일 테니까, 이렇게 친구로서 쭉 같이 지내면 되는 거야. 물론 친구라고 해도 여태까지 제대로 된 이성친구라곤 한 명도 없었기에 라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지만...
라하가 가져다 준 따뜻한 염소 젖은 꿀이 딱 알맞게 들어가 있어서, 그 한 잔이 아침부터 울적해져 있던 기분을 침착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올리는 밉지 않아, 먹는 모습도... 난 귀엽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마저 천천히 다 마셔도 좋아. 그리고 오늘은 쭉 옆에 같이 있자."
그래, 오늘 정도는... 아니, 잠시간은, 그의 따뜻한 말에 기대어도 되지 않을까. 올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더 의심하고 더 날을 세우기에는 이젠 정말이지 마음이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차라리 믿는 척이라도 하자고 그녀는 생각했다.
대체 뭐가 문제길래 남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걸까, 올리는 엉망진창으로 꼬인 자신의 성격이 몸서리쳐질 만큼 싫었지만, 어쩌면... 이 소중한 사람와 함께라면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희망을 조금 가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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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쓰기에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넓은 방에 비해서는, 두 사람이 누워 있는 침대는 좁은 편이었다. 조금이라도 제 오빠와 더 가까이 붙어있고 싶다는 미우의 고집으로 고른 아늑한 더블 침대. 그마저도 쿠션 몇 개가 두 사람의 거리를 ���욱 붙여놓고 만다.
꼭 붙어 있던 두 사람 중에, 먼저 눈을 뜬 건 여동생인 미우 쪽이었다.
미우는 문득 어제의 일을 떠올려 본다.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는 단독 빌라라는 이유로 소리도 신경쓰지 않고 몇 번이고 기분 좋아, 갈 것 같아 같은 부끄러운 말들을 내뱉었던 자신의 모습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몸을 섞을 때에는 평소 이상으로 솔직해지는 것 같다니까. 같은-게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거침없는 스킨십도, 가끔은 먼저 올라타는 적극적인 모습도. 그런 것들이 평소의 미우와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보통 때보다 조금 더 악셀을 밟고 있다는 건 히로토도 눈치채고 있을 터였다.
히로토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오빠가 사랑스럽기도 하고, 왠지모를 장난기가 발동하기도 한다. 오빠를 지키기 위해 부상도 마다하지 않고 공격을 대신 맞아주었던 때를 떠올리며, 그녀는 새삼 잠자는 공주를 깨우러 온 왕자 기분이 되어 엣헴, 하고 히로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는 척-그러다 스스로 괜히 멋쩍어져 그저 그의 뺨을 손끝으로 쓰다듬는다. 으음, 하고 히로토가 몸을 뒤척였다. 핫, 하고 놀라 미우는 손을 떼었다.
"좋은 아침이야, 미우."
잠긴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여느때처럼 다정한 목소리는 지금 자신이 히로토와 같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혹시, 혹시 키스하려던 게 들켰나? 미우는 괜히 움찔했다.히로토는 미우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는다. 따뜻한 체온, 살 냄새. 언제나처럼의 오빠. 히로토가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들켰구나-! 미우는 속으로 작은 비명을 지르며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의 인사에 대답했다.
"좋은 아침이야. 잘 잤어?"
"덕분에 푹 잠들었지."
"에, 덕분에?"
"미우가 정기를 왕창 빨아먹은 덕분에 내가 얼마나 지쳤는데."
"정기라구? 나는 오빠 때문에 허리가 얼마나 아픈 줄 알아?"
품에서 벗어나 옆에 놓인 쿠션으로 히로토를 팡팡 때리는 미우. 히로토는 저항도 않고 맞아주며 그저 즐거운 듯 조금 능글맞게 웃었다.
"무슨 내가 서큐버스도 아니고, 정기가 다 뭐야! 오빠는 변태!"
"오빠가 변태라서, 미우는 싫어?"
"시, 싫을 리가 없잖아! 오빠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라구. 변태지만!"
히로토는 흐응- 하고, 미우의 손목을 잡아 밀어눕혔다. 그리고는 목과 쇄골에 잔뜩 새겨진 키스마크 위에 한 번씩 더 쪽쪽 소리나게 입술을 겹쳤다. 미우가 간지러운 듯 깔깔거렸다.
"아침식사로 토스트라도 만들까?"
"싫어, 오빠랑 더 있을래."
"헤에, 내가 만들어주는 건데도 싫어?"
"지금은 오빠랑 있고 싶단 말야, 조금만."
그래, 좋아. 그렇다면- 하고 히로토가 미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이번엔 아까보다 좀 더 진한 키스였다.아마 기대와 애정과 행복이 담긴 키스에 살짝 묻은 독점욕을, 여동생도 느꼈으리라 생각하며 히로토는 몇 번이고 입술을 부딪었다.
"음, 으응..."
히로토가 혀를 섞어 오는 데에 미우는 반응했다. 자연스레 팔을 뻗어 히로토의 등을 끌어안고, 그의 키스에 몸을 맡긴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 히로토가 입술을 떼고 미우의 몸에서 떨어졌다.
달콤한 아침의 얽힘을 기대하고 있던 미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히로토를 바라보았다.
"...?"
"오늘 아침은 여기까지로 해 둘까, 미우."
"너무해-!"
"아침은 챙겨먹지 않더라도 이럴 시간까진 없어. 슬슬 나가봐야 한다고.오늘은 연회에 참석해야 하잖아, 미우 너도."
"파티는 저녁이잖아, 오빠."
"그러니까, 나뿐 아니라 너도 드레스를 고르거나 머리를 세팅하거나 하려면 아침부터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조금은 늦게 출발해도 될 것 같단 말이야."
히로토의 손을 잡아끌어 제 뺨에 대고 헤헤 웃는 미우를 보고, 히로토는 잠시 생각했다. 드레스 코드에 맞게 옷을 고르는 데에 한 시간, 예약해둔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메이크업을 하는 게 미우를 포함해 두 시간. 연회장까지 이동하는 데에 한 시간... 그래, 그는 일찍 출발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늦으면 네 책임이야, 미우."
"재미없는 연회 따위에 늦는다고 아무도 뭐라고 안 해."
"하아, 정말이지 내 동생이지만 제멋대로라니까."
미우는 그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히로토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여동생인 미우라면 분명 장난을 칠 것 같아, 히로토는 괜히 걱정스런 말투로 입을 열었다.
"자국 남기지 마?"
"안 남겨, 오빠!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구."
그리고, 히로토가 미우를 눕힌 채 입술로 그녀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간질간질하면서도 짜릿한 감각에, 미우는 몸을 떨었다.발목의 복사뼈를 입술로 쪼듯 머금고 핥자, 그녀는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바쁜 것은 입술뿐이 아니라서, 히로토는 몇 번이고 미우의 허벅지를 손끝으로 쓸었다. 잔뜩 달아오른 그녀의 몸은 더한 자극을 갈구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미우는 욕심쟁이구나."
"오빠니까 그런 거라구...!"
그 말에 가슴이 괜히 두근거려, 히로토는 못 이기겠다는 듯 미우의 위에 반쯤 엎어진 자세로 귀를 앙 물었다. 미우는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며 히로토의 허리에 자신의 다리를 감고 숨을 뱉었다. 마치 지금의 자극만으로도 절정에 이를 듯이, 자신의 오빠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로.
-
그렇게 어느 날 아침, 햇볕이 산산히 부서져 창 밖에서 들어오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커다란 외딴 빌라의 한 침실에서 두 남매가 진하게 몸을 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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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그 사이에...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구나."
알리제는 최근 독 무기에 부상을 입고 '새벽'�� 돌아와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 하고 며칠 동안을 앓고 있었다. 그러다 몇 주나 지나 몸이 회복되고 정신이 좀 ��었는지, 최근에는 무난히 식사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잠시 몸을 풀기 위해 운동을 하려다 힘이 풀려 엎어지거나... 하는 모양이었다. 알리제는 이슈가르드에서의 한 차례 큰 모험을 끝낸 토모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 무엇보다, 알리제는 미데와 기공성 알렉산더에 대한 이야기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눈을 반짝였다.
"괜찮다면 그 잔해에 가 보고 싶은걸. 이딜샤이어 근처랬던가?" "아서라, 너 부상에서 회복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잖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움직이고 싶다구! 온몸이 근질근질해. 별로 전투에 임하는 것도 아니고, 괜찮잖아." "못 말려, 정말... 좋아, 재활훈련 겸이야. 절대 위험한 일은 시키지 않을 테니까." "정말이지? 신난다!"
... 그렇게 두 사람이 도착한 것은 파괴되어 무너진 기공성의 잔해 앞. 알리제는 근처에서 길을 막아오는 작은 마물들을 처리하며 슥슥 앞으로 나아갔다. 파이프와 커다란 기어, 지지대 등을 날렵하게 기어 오른 알리제는 파괴된 잔해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이건 돈이 될 것 같아, 이 부분은 인간들이 쓰지 않는 부품이네... 등 이런저런 코멘트를 남겼다. 몸으로 뛰어다니는 걸 머리 쓰기보다 좋아하는 알리제지만, 이렇게 무언가를 분석하고 연구하고 싶어 하는 부분은 알피노와도 꼭 닮았단 말이지... 토모는 속으로 웃었다. 알리제는 한 때 페인트가 가득 들어 있었던 봄베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알리제가 잠시 머리를 짚으며 주저앉았다.
"윽..." "알리제, 괜찮아?!" "괜찮아, 그냥 기분이 조금... 이상해. 몸이 뜨거워." "역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너 아직 다 안 나았단 말야." "아니야, 틀려. 아픈 게 아니야, 이건..." "설마 페인트가 남아 있었어?"
쉬이이이이.
"모르겠지만... 딱히 그래 보이진 않아." "잠깐, 무슨 소리 안 들려?"
쉬이이잇.
"봄베에서 가스가 새고 있는 것 같아." "가스...?!" "왠 가스야, 우왓. 이 봄베인가 봐, 핑크색 연기가... 잠궜다. 이상하네, 내가 이 곳에서 적을 쓰러뜨렸을 때엔 가스와 관련된 장치는 없었을 텐데?" "이 곳이 파괴되면서 다른 층에서부터 굴러떨어지거나 흘러들어온 것 아닐까?" "...아니야, 이 봄베만... 어딘가 낡은 정도라던가 색이 전혀 달라. 나중에 들어온 누군가가 보관한 것 같... 아..." "토모? 토모!" "대체 저게 무슨 가스야... 조금 마신 것 가지고 어질어질한 건 둘째치고, 그러니까..." "너도... 너도 그래?"
그 뒤로의 전개는 빨랐다. 토모가 대답하기도 전에 알리제가 손깍지를 껴 왔다.
"혹시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거라면 얘기해 줘, 토모." "아마... 오해는 아닐 것 같아." "그렇지만 역시 이상하지...?"
<눈 앞의 상대에게 성욕을 느낀다> 같은 효과라면... 가스는 지독하게 강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입술을 포개고, 눈을 조용히 감는다. 두 사람은 혀를 얽어 천천히 움직이며, 혀의 ���기 하나하나가 느껴질 때까지 농후하게 키스했다. 폐허라고는 해도 그들이 있는 미다스의 주먹 부분은 지붕의 일부가 날아가있을지언정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어, 누군가에게 보여질까 불안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등이 조금 배기긴 했지만. 토모는 알리제의 옷을 걷어올리려다 잠시 망설였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확신이 서지 않아, 다시 한 번 알리제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예전부터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대미궁 바하무트에서 알리제가 보여 준 반짝임에, 결의에, 그리고 얼마 전 다시 새벽에 합류하면서 그녀가 실력을 갈고닦으며 바쳤을 노력에 토모는 반해 있었다. 뭐, 이 마음을 모처럼 전할 수 있는 기회가 고작 마과학 가스 때문이라는 건 슬프지만.
"괜찮겠어?" "망설이지 말고, 어서..."
토모는 침을 삼키고 알리제의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천천히 쓸어내렸다. 살갗에 손이 닿는 감촉만으로 기분이 좋은지, 알리제는 작은 탄성을 질렀다. 성욕뿐만 아니라 감각도 민감해진 것일까. 몸은 붕 뜬 것 같고, 머리는 멍하고, 그저 상대의 손길만이 자극적으로, 유일한 감촉으로 다가오는 듯한... 옷을 벗는 순간마저도 마치 흥분을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져, 두 사람은 잠시라도 더 이어져있기 위해 옷 단추를 풀고 벨트를 끌러내리면서도 입술을 다시금 부딪었다. 그렇게 토모와 알리제는 흰 나신을 햇볕 아래에 드러냈다.
"예쁘다..."
토모가 알리제의 몸에 감탄했다. 어리다고 해도 엘레젠답게 균형잡힌 몸매와, 꾸준한 운동과 연습으로 다져진 몸.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의 가슴.
"네가 말하니까 쑥스럽잖아."
알리제가 쿡쿡 웃었다. 그리고, 서로의 가슴을, 허리를, 그리고 엉덩이를 더듬으며 목을 물고 어깨를 핥는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두 사람 다 서로 기분좋아지고 싶다는 마음으로. 토모는 알리제의 쇄골에 가볍게 붉은 흔적을 남겼고, 알리제는 토모의 어깨를 물어 옅은 이빨 자국을 남겼다.다시 키스하고, 다시 겹쳐진다. 겹쳐 누워서 다리를 벌리고 음부를 애무하기 시작할 때쯤엔 서로의 그곳은 잔뜩 젖어 있어서, 알리제는 애액이 허벅지를 타고 한 방울 주륵 흐르고 있을 정도였다. 토모는 개의치 않고 그녀의 비부를 열어젖히고 클리토리스에 입술을 살짝 대고 빨아들였다.
"후왓...?!"
위에 올라탄 자세로 토모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알리제는 갑자기 밀려온 자극에 깜짝 놀랐는지 몸을 움찔 떨었다. 토모는 장난기가 발동해, 일부러 츄르릅 소리를 내며 혀를 놀렸다. 알리제는 애무를 멈추고 그대로 녹아내리는 신음을 흘리며 토모의 혀에 몸을 맡겼다.
"기... 기다려, 금방 갈 것 같아." "그걸 왜 기다려, 또 하면 되지." "싫어엇... 나도, 나도 할 거니까...해줄 거니까! 같이... 아, 히익!"
그러나 저항은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하고, 이내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힘없이 풀어진다. 딱 봐도 절정을 맞이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으, 바보." "뭐야, 별로였어?" "같이... 같이 가고 싶었단 말이야.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 분하다구!" "그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라구." "...그치만 너라면 될 것 같았어..."
나, 경험 없으니까 잘 모른단 말이야. 알리제가 부루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토모는 잠시 놀랐지만 바로 납득했다. 하긴, 그녀에게 다른 사람과의 경험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그런 말 하면 엄청 장난치고 싶어지는 거 알아?" "무슨...앗!"
토모는 알리제를 뒤집어 눕히고, 다리를 잡아벌린다. 그녀가 능숙한 손 움직임으로 알리제의 질 내부에 손가락을 넣자 윗벽에 볼록 튀어나온 얇은 선 같은 것이 만져졌다. 여기서부터...대충 이쯤이려나. 토모의 손가락이 안쪽을 훑었다. 알리제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틀었다. 안쪽을 가차없이 문지르면서, 다른 손으로 아직 민감함이 가시지 않은 클리토리스를 살살 비빈다. 알리제는 그저 무방비하게 그 자리에 누워 히끅거리며 또다시 절정에 달했다.
"처음부터 안쪽으로 느끼는 건 쉽지 않은데... 음란하네." "그만... 나도, 하게 해 줘..." "싫어." "그치만 토모, 너도 분명 가스에..." "흐음... 그거 금세 깼어. 알리제도 지금이라면 풀렸을걸? 그렇게 효과가 긴 건 아닌 것 같아." "거짓말이지, 그럼 지금은 왜... 아..." "뭐, 그렇다는 거지. 한 번 더 할까?" "시, 싫어엇...!"
그 싫다는 소리도 달콤하게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여서, 말뿐인 저항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알리제는, 밖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할 때까지 잔뜩 괴롭힘당해야 했다.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던 건 덤으로.
*
그 가스가 어쩌다 그 곳에 놓여져 있는지 알게 된 건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고블린들끼리 기리곤 하는 연인간의 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미약 성분이 있는 가스를 몰래 개발한 이들이, 판매 직전에 마침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기공성 알렉산더의 폐허에 숨겨놓았다는 것... 그 사실을 브레이플록스로부터 전해들었을 때에, 두 사람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역시 그게 아니었다면..." "우린 내내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못했을지도. 그렇지, 토모?" "그래, 알리제. 맞는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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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같았으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뒹굴거렸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좀 더 생산적인 척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기에 그녀는 모처럼 컴퓨터를 켰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생산적인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었고... 좋아하는 영화를 옆에 대강 틀어둔 채로 트위터를 하던 게 다였다.
그러다 문득 발견한 계정에 놀라울 정도로 큼지막한 성기를 자랑하는 영상이 눈에 띄었을 뿐. 딱히 거근 페티쉬가 있는 건 아니었다. 성욕이 동한다기보다는 그저 이런 사이즈도 있구만- 하는 신기하다는 마음이 앞서 타임라인을 내리고 있자니, 문득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내주는 살라미 소세지인걸? 물론-내가 더 끝내주지." "으게에엑!?"
몸이 그대로 굳었다.분명 집에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개도, 아빠도, 한참 뒤에나 들어올 테고. 문을 안 잠근 것도 아니었으니 누가 들어올 일도 없다. 이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낯익다. 마치 방금 전까지 듣고 있었던 것처럼. 설마- 덜덜 떨리는 몸으로 뒤를 돌아보자, 완벽한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찌른다.
데드풀. 지금 막 틀어놓고 있던 영화에서 냅다 튀어나온 남자가 서 있었다.
"아,으아악...우아아아..." "쉿, 나 지금 너 해치러 온 거 아니야. 무기도 없잖아, 자, 봐봐. 양 손, 겨드랑이, 다리 사이... 아, 여긴 내 아들내미가 살고 있어. 무기는 아니야.궁금하면 엉덩이에도 손 집어넣어 볼래? 결백하다구." "아니, 그건 사양할게요... 그보다, 어쩌다... 어쩌다 여기 온 거에요?" "화면 안에서 사는 게 지루해서 잠깐 놀러나온 것 뿐이야, 그게 우연히 여기였고... 흠.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해피 타임을 방해한 거 같은데... 혹시 내 살라미에 관심 있어?" "없...아니, 있어요. 굉장히 있는데요, 있긴 한데 그게 아니라고요."
하긴 한켠에는 영화, 눈 앞에는 포르노 영상. 오해 사기 딱 좋긴 했다. 그녀는 있는 힘껏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딱히 무슨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좋아하는 캐릭터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상식인으로서의 마음이 앞섰을 뿐이었다.
"그럼 나도 야한 거나 볼까. 폰헙에서 엄선한 데드풀 추천 야한 영상 100선."
그리고 머리를 한 대 치고 지나가는 생각 한 조각이 있었으니. 모처럼 최애가 모니터 밖으로 튀어나왔는데 섹스 안 하고 뭐 할 거야! 그녀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 잠깐, 아닌 게 아니라... 있어요." "오, 머리 굴러가는 소리 여기까지 들리는 거 봐." "그 살라미, 저 주세요." "그렇게 당당한 태도 마음에 들어, 짜잔."
그가 수트의 앞섶을 풀고 밖���로 꺼낸 것은 보통 사람들의 것보다 몇 배는 그로테스크하게 여겨질 만큼 거칠게 일그러지고, 쭈그러졌지만...그 만큼 길이도 평균의 두 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와, 백남... 자지..." "끝내 주지? 품질보증서도 있다구! 아, 지금은 집에 놓고 왔어."
그는 자기 물건을 덜렁 내놓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우물쭈물 옆에 앉았다. 그는 그녀의 말랑한 손을 잡아올려 천천히 쓰다듬고 만지작거렸다. 수트 너머의 온기이건만, 마치 살과 살이 닿은 듯 따뜻했다.
"난 살집 좀 있는 애들이 기분 좋더라~, 커다랗고 따뜻한 비즈쿠션 같단 말이지." "방금 그거 굉장히 실례인 거 알아요?" "응응, 사랑스러운 내 비즈 쿠션."
쪽쪽, 하고 뽀뽀하는 소리를 내며 그가 그녀의 옷을 천천히 벗겼다.
"샤워하고 올게요, 어제 저녁에 씻긴 했지만..." "괜찮아, 이대로가 좋아. 난 취향이 좀 지저분하거든. 이건 비밀이다?" "동네방네 다 떠들 거에요!" "나쁜 말 하는 애 입에는 살라미를 잔뜩 쑤셔넣어야지." "아, 사양할게요, 턱이 약해서. 생각 같아선 엄청 땡기지만." "그건 아쉬운 소리네. 아니, 그렇게 미안한 표정 안 지어도 돼. "
시덥잖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데드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옷을 착착 개어서 침대맡에 놔 두고는, 그녀의 엉덩이와 성기가 드러나도록 다리를 잡아올렸다. 그녀가 부끄러운지 으음,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살짝 뒤틀었다. 그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발기했는지, 그는 자신의 것을 그녀의 비부에 위아래로 비볐다.
"바로 넣으면 화 낼 거지?" "뻑뻑해서 안 들어가지 않을까요?" "이거 봐, 안 뻑뻑해."
남성기에 비벼지는 음부에서는 벌써부터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빠르게 흥분해 본 것도 처음이라, 그녀는 얼떨떨해져서 허어, 하는 소리를 냈다. 아직도 하나도 정신이 없는데, 몸이 먼저 반응해버리는 신기한 경험이라니. 그의 것이 곧 단단해져, 안쪽 살결을 파고든다. 꽃잎 같은 질구의 주름을 훑고, 질 내부의 오톨도톨한 부분에 끝부분이 비벼진다. 아직 반 정도밖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자신의 안이 가득 찬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의외로 생각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무게감-그의 가벼운 입과는 천지차이였다-은 생소했다.
"너 굉장한데, 트위즐러 다발에 박는 것 같아." "트위즐러..." "기분 좋다는 뜻이야."
빠르게 받아치고,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안쪽까지 한번에 쑥 밀어넣는다.
"...아!" "아파?"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않았지만, 이게 앞뒤로 위아래로 움직인다고? 이렇게 꽉 찬 게? 그 의혹을 긍정하듯 한 번 크게 빠져나갔다가 다시 몰아치듯 안쪽으로 들어온다. 그녀의 질육은 그저 쓸려나갔다 밀려들어오는 커다란 기둥을 힘껏 감싼 채 꼬물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의 허리에 조금 탄력이 붙어, 느리고 크게 흔들리던 움직임이 곧 자잘하고 리드미컬한 동작으로 바뀌었다.그녀는 가볍게 조금씩 쳐올려지며, 스스로 약간 제빵기의 빵 반죽이 된 듯한 기분도 조금 느끼면서 아랫도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앗, 하아..."
한참을 그렇게 움직였을까, 문득 데드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번쩍 안아올렸다. 공중에 붕 뜬 채 움직임을 봉쇄당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떨어지지 않게 그의 목을 잡고 매달리는 정도뿐이었다. 어느 쪽이냐면 과체중, 아니 그보다 조금 더 나갈 정도의 그녀를 거뜬히 안아드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당황했다.
"아, 무겁잖아요!" "이 나한테 고작 네 정도 무게가 무거울 거라고 생각해?" "핫, 잠깐, 으...!"
그는 그녀의 몸 전체를 튕기듯 그대로 아랫도리를 쳐올렸다. 큼직한 물건은 자궁 경부의 뒤쪽으로 들어와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의 압박감이 그녀의 온몸을 감싸왔다.
"히끅... 윽..."
아까부터 그랬지만, 온몸의 감각이 이상했다. '절정'이라는 �� 있다면, 그게 연속해서 파도처럼 뺨을 후리고 가는 느낌. 그 한 번 한 번의 움직임에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휘저어져왔다. 여태까지 살면서 느껴봤던 어떤 오르가즘이니 뭐니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쾌감.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보다 더 큰 파도가, 아랫도리에서부터 뜨겁게 몰려오고 있었다.
"아,아아아...!"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자잘하게, 크게, 내내 예상을 빗나가며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그의 허리에 그녀는 금세 녹아내려 갔다. 몸이 붕 뜬 데에 온 몸을 긴장시켰던 것도 잠시, 그녀는 해일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허리가 구부러지고, 발과 손이 저절로 멋대로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머릿속까지 웅웅 울리는 듯한 감각을 받았다. 흔히 포르노에서 말하는 '온몸이 성기가 된 기분' 이 이런 느낌일까. 그 말도 안 되는 절정은 길게, 길게 이어졌다.
"기분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 뭐 나도 금방 쌀 것 같으니까. 네 보지 정말 끝내주거든."
그리고 그녀의 절정이 마무리될 쯤에, 그도 안쪽 가득히 사정했다. 자세가 자세라, 정액이 엉덩이를 타고 흘렀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화장실로 달려가 자신의 아래쪽에서 만화처럼 줄줄 흘러나오는 정액을 씻어내야만 했다.
방에 돌아왔을 때, 이미 그는 자리에 없었다.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고, 이런저런 걸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가 버리기야?!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 좋았으니 아무래도 됐나, 영화를 보다 잠들었다가 그 영화의 등장인물과 섹스하는 꿈을 꾼다던가, 우습지만 없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언제나처럼 집에 돌아오는 중이라는 아빠로부터의 전화이리라. 전화를 받으며 문득 눈에 들어온 영화의 일시정지 화면에서는 데드풀이 어딜 보나 '화면 바깥'을 바라보며 찡긋 웃고 있었다.
아, 이런 장면 분명 영화에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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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님 커미션!
간밤. 창문 밖에서 파란 달빛이 안개처럼 살살 방 안에 흩어진다. 여주는 잠에서 깨 화장실에 다녀온 참이었다. 눈을 감은 순경을 발견한 여주는 그 모습이 괜히 얄미워, 자리에 서서 슬쩍 발가락으로 그의 몸을 쿡 찔렀다.
"자는 척 하고 있네, 자지도 않는 주제에." "몸이 쉴 시간 정도는 필요하다고... 놔 둬."
괜히 도발하는 듯한 여주의 말에, 순경은 피곤한 시늉을 하며 팔을 젓는다.
"그런 너야말로 안 자면 키 안 큰다?" "내가 이만큼 강한데 키가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의미가 있지."
여주는 순경의 손에 팔을 잡혀 그의 품에 넘어지듯 안겼다. 품 안에 폭 들어오는 여주를 순경은 장난스레 안았다. 순경도 그다지 큰 키는 아니지만, 이 여자아이... 박여주는, 놀�� 만큼 작다. 예전에는 이런 행동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서로 적대하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으리라... 하고, 순경은 툭 말을 뱉었다.
"이대로 목을 조르면 넌 죽어." "그만 둬라, 우리 싸우지 않기로 안 캤나." "글쎄, 우리가 언제 그런 계약서에 사인이라도 했던가?"
장난기가 발동해, 순경은 자신의 팔로 여주의 목을 감은 채 힘을 준다.
"가만 안 둔데이...케흑."
동시에, 순경은 여주의 귀에 숨을 살짝 불어넣었다.여주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낯선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등줄기를 타고 짜르르 올라오는 감각.
"읏..." "응? 무슨 일 있어?"
태연하게 한 번 더, 귀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순경은 반대쪽 손으로 여주의 가슴에 손을 댄다. 옷 위로 굴곡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정도의 어린 몸.아까 잠자리에 들었던 탓에 속옷은 입고 있지 않았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순경은 여주의 귀를 앙 물었다.
"히. 히잇." "어린애가 젖은 소리도 낼 줄 알고,대견하네." "변태..." "뭐, 사람이 변태인 게 뭐가 어때서."
사실 장난만 칠 생각이었다. 성욕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는 열다섯 살이나 아래의 어린아이니까. 그냥 자라다 만 조그만 가슴을 좀 희롱하다 놓아줄 생각이었다. 여주의 손이 스스로의 아랫도리를 꾹 누르는 걸 볼 때까지는 그랬다.
"하아, 하아..." "어어."
그녀는 순경의 손길에 훌륭하게, 어른처럼, 어쩌면 어른보다 더 에로틱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금단의 영역에 손을 들이는 심정으로 순경은 여주의 목에서 팔을 떼고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로 그녀의 옷을 걷어올렸다.손가락으로 작은 유두를 쥐고, 문지르고 또 살살 굴린다. 그녀가 다리를 배배 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동작을 멈추고 온몸을 뻣뻣하게 세운 채 파르르 떨다 축 쳐졌다.
"뭐야, 가슴 만진 것만으로 한 번 가버린 거야? 음란한 애네. 소질 있어." "시끄럽다.. 안 카나...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누가 갔다고..."
여유 있는 척 연기하고 있지만, 순경도 여자를 다루는 법을 잘 아는 건 아니었다. 아니, 아주 경험이 없긴 했다. 그저, 눈 앞에 있는 여자아이에게 본능적으로 짓궂은 장난을 치고 있을 뿐.
"한 번 더 할까?" "장난하지 말고 놔라." "그치만 기분 좋았잖아, 그치."
다시 가슴을 붙잡자, 언제 거부했냐는 듯 여주가 또 달콤한 신음을 흘린다.
"그렇게 야한 소리 내면 옆에서 깰지도 몰라." "읍..."
옆자리에서는 남주와 니제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지금보다 더 소리를 키웠다간 깰지도 모른다. 순경은 여주의 입을 틀어막고, 한 손으로 유두를 집요하게 건드렸다.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여주의 반응이 격하다. 입이 틀어막힌 데에 흥분한 걸까, 정말 변태가 누군지 몰라.
금세 한 번 더, 허리와 목을 뒤로 꺾으며 여주가 파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순경도 성적인 자극을 받고 만다. 여주의 하의를 내리자, 은색 실처럼...잔뜩 흥분해 분비한 액이 속옷과 음부를 잇고 있다. 그녀의 거뭇한 털이 막 나기 시작한 어린 아랫도리는 팬티가 젖을 만큼 축축해져 있었다.
"이렇게 야한 열다섯 살���리 꼬마가 세상에 어디 있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여주는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피한 채, 그의 눈 앞에서 적나라하게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번들거릴 만큼 젖은 음부에서 새어나온 액은 그녀의 엉덩이골까지 흘러내려 적시고 있다. 순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바지를 내려 바로 그녀의 음부를 벌리고 그의 것을 밀어넣었다.
"....!!"
여주의 눈이 동그래진다. 놀라움, 고통, 그리고 쾌감이 뒤섞여,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녀는 헉 하고 숨을 들이삼켰다. 충분히 젖어 있는 그곳은 남자의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역시 첫 경험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라-찢어지는 듯한 감각에, 여주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순경은 허리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 아악... 기다려라, 잠깐만...!" "미안, 못 멈추겠어." "뭐라캐쌌노!" "...미안, 그치만 네 안 정말 기분 좋아서."
그 말에, 여주는 최대한 고통을 참아보려 안간힘을 쓴다. 그러자 이내 고통의 순간에서, 성적인 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속궁합이 좋기라도 한 걸까, 놀랄 정도로 금세 여주의 안쪽이 다시 젖어온다. 순경의 것이 앞뒤로 움직이며 여주의 기분 좋은 곳을 살살 문지르는 것이 느껴졌다. 자칫 들키겠다 싶을 만큼, 하반신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찰박찰박 들려왔다.
그렇지만 성감이 느껴진다고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파, 아파. 천천히 해 주길 바라지만, 잠깐 멈춰 주기 바라지만, 아무리 말해도 순경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저 입술을 깨물고,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무엇보다 여주 본인이 그가 멈추길 바라지 않았다. 계속 미친 듯이 흔들리고 싶었다. 계속해줘. 돌아버릴 만큼 기분 좋아.
"엄청 조여... 아, 금방 나올 것 같아. 말도 안 되게 조여." "앗, 아...아흐윽, 응..." "그러고 보니 너... 생리하던가?" "아, 아직..." "그럼 안에 해도 되지?" "아마... 괜찮을 끼다."
불안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여주. 그조차도 순경에게는 성적 자극으로 다가왔는지, 몇 번 더 허리를 움직이고는 읏... 하고 금세 안에 내고 만다. 휴지를 가져와 뒷처리를 하며,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기류가 흘렀다. 둘 다 첫경험인 만큼, 각별하다고까지는 말하기 힘들지 몰라도 조금의 정조차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리고, 이 간질간질하고 두근두근한 분위기는 예상치 못한 한 마디에 툭, 깨져버리는 것이다.
"...둘이, 다 들리는거야에..."
뒤척이며 투덜거리는 니제의 목소리에, 핫 하고 입을 가리는 두 사람.
"밖에 나가서 하라는거야에, 증마알..."
...간밤. 창문 밖에서 파란 달빛이 안개처럼 살살 방 안에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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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트셀크랑 빛전이 섹스하지 못하면 나갈 수 없는 방에 들어간 이야기
"잘 지냈나, 영웅 나리?"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에테르계에 내가 '존재'한다는 걸 잊고 있었나본데, 네가 부른다면 네 꿈에 나타나는 정도야 간단하지."
"그렇다고 이런 방에서 만나고 싶진 않았어, 악당."
"악당이라니, 실례되는 말을 하는군. 난 너희 되다 만 것들을 믿고 세상을 맡기기까지 했는데, 오히려 너보다 더 대단한 영웅이라고."
"에메트세르크...아니, 하데스, 너는 영웅이 아냐. 그래, 이제 넌 황제도 아니고 아씨엔도 아니지."
"그럼 내가 뭐라고 생각하지?"
"실직자."
"풉! 그보다 <이런 방>이라니, 여긴...."
큼지막한 침대와 서랍장이 있는 작은 방이었다. 창문은 없고, 사방이 석재 벽으로 막혀 있다. 그리고 천장에는 조명과 작은 환기구가 있고, 한 쪽 벽에는 문이 있었다. 문고리를 돌리고 당겨봤지만, 문은 열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섹스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벽에 대충 후려갈겨진 문자를 보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되다 만 것들의 상상력하고는! 천박하고 유치해서 참을 수가 없군."
"그치만, 우리 능력으로는 이런 수준의 방을 만들 수 없어.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건 너네 아씨엔... 아니, 고대인들이잖아?"
"아."
그는 문득 과거의 행적을 떠올렸다. 이것은... 일종의 실험 중에 폐기된 <방> 중 하나인 게 틀림없었다.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에, 몇 개인가의 방을 창조한 적이 있었다. 그 곳의 음식을 전부 먹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는 방, 서로를 헐뜯고 싸우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는 방, 동시에 같은 것을 생각하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는 방, 수수께끼를 풀기 전까지는 나갈 수 없는 방... 그 중에 분명히, 이런 내용의 방도 있긴 했다. 아마 되다 만 것들이 붙어먹는 꼴 같은 건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아서 폐기했었지.
"이봐, 빨리 끝내고 나가자고."
"잠깐만. 분명히 이 방을 완전히 지울 방법이 있을 거야. 기다려 봐."
"나 같으면 그냥 섹스하고 나가겠다."
"방을 나가기 위해 진짜로 섹스를 하겠다고? 난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다만. 그건 너희들의 방법이지."
"우리들의 방법이라고?"
"너희들이 말하는 고대인 - 그러니까 우리는, 유희를 즐길지언정 쾌락을 추구하지 않았다, 육신의 것이라면 더더욱 멀리했지. 소중한 생명을 낳는 의식은 엄격한 계획 아래에서 엄숙하게 이루어졌고, 지금 너희들 같은 경박한 작태를 보이는 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그렇지만... 생각해 봐. 문은 밖에서 잠겨 있으니 열쇠도 없어. 방에는 영혼이 없으니 명계로 보낼 수도 없지. 환기구는 사람이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작고. 네가 이 방을 만든 사람이라면 그 목적에 맞게 만들었을 것 아니야? 의도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차단해놓았지?"
"큿! 아니야, 날 얼마나 바보로 만들 셈이냐. 기다려 보라고."
그는 환기구를 키워보려고 했지만, 단단히 고정된 나사는 풀지 못했다. 문의 디자인이 다섯 번 정도 바뀌었지만 다섯 번 전부 안쪽에서는 열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톱도, 망치도 들지 않았다.
"...이봐, 영웅 나리, 너도 어떻게든 해 보라고!"
"내가 뭘 어떻게 해!"
"이거 네 꿈이잖아. 여긴 내가 만든 방이지만 내 통제 밖에 있는 게 틀림없어."
"아니, 아까 네가 말하긴 했지만 이건...꿈이 아니야. 무언가, 힘이 작용하고 있어."
"힘이라고?"
"분명 나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일면서 이 공간으로 이동했단 말야."
"혹시, <시간>을 창조해냈다는 건가..."
그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단순히 추측일 뿐이긴 하지만, 너희와 달리 세계가 나눠지기 전의 우리들의 경우엔... 종종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을 때, 그것이 구현자 본인의 능력을 초월하는 형태로 현실로 일어나는 일이 있었어. 너는 분명히 다른 인간과는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어떤 생각을, 나와 네가 동시에 떠올린 게 원인일지도 몰라."
"혹시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어?"
"그거야 네가 그 뒤로 어떻게 이 빌어먹을 세상을 구할지 궁금하지. 미련이 남을 수밖에 없잖아."
"과연, 그렇구나."
"설마..."
"응?"
"하필이면 한날한시에 서로를 떠올리는 바람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거냐."
"마치 연인 같네."
"주제넘는 소리."
그는 투덜거렸다.
"너는 잘 지냈어?"
"물론. 이런 자리에 쓸데없이 끄집어내지기 전까지는 내가 사랑하는 도시에서 영원히 살아가고 있었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은 채로, 쭉 꿈을 꾸고 있었어."
"널 다시 볼 수 있어서 반가워."
그녀는 발꿈치를 들고, 그의 양 뺨을 잡고 그에게 입을 맞춘다.
"무슨 짓이냐, 이건."
"섹스할 준비."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을 지경인데... 그 짓을 꼭 하고 싶냐? 나랑?"
"나는 누구와도 할 수 있어."
"정말이지 천박하구만."
"나는 그런 내가 좋으니까 네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그 부분은 너다워서 차암 마음에 든다."
그녀는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방 안을 서성이던 그는 굳이 침대에 앉지 않고, 벽에 기댄 채 땅바닥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지금부터 이 방은 무한히 작아질 거야. 이 방을 통째로 소멸시킬 생각이다. 방은 곧 한없이 0에 수렴하는 크기가 되어서 사라지겠지. 그렇게 되면 나는 에테르계로 돌아갈 수 있어."
"잠깐만, 멈춰."
"안돼, 이 방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어. 섣불리 손을 댔다간 모든 것들의 질서가 흐트러지고 말 거다."
"방이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데?"
"...앗차."
"아니 이보세요?"
"미안. 널 죽일 생각은 없었어."
"내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걸 잊기라도 한 거야?"
"뜬금없이 여기 불려나온 탓에 약간 돌아버린 모양이야."
"당장 나가게 해 줘."
"이거 곤란해졌는데."
그녀는 침대맡에서 일어나 바닥에 앉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네 방법이 아니라 내 방법. 우리들의 방법으로 날 나가게 해 줘, 빨리. 어서."
"젠장맞을..."
"나랑 섹스해."
"알았다고, 알았다니까. 널 포기 못 하고 살려놓기로 한 내 잘못이지."
그는 멱살을 잡고 있는 그녀의 팔을 양손으로 잡아 떼어내고는, 그녀의 어깨를 밀쳐 침대에 눕혔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그는 잠시 그녀를 노려보다가, 그녀의 옷을 풀어헤친다. 단추를 풀고, 벨트를 푼다. 소매를 벗기고 바지를 내려, 그녀는 이내 전라의 모습이 된다. 그녀는 여전히 부끄럼 한 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분명 되다 만 놈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또 느끼고, 스스로의 눈 앞에서 보고서도 자신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그 눈으로. 놀라울 만큼 욕망 같은 것은 없었다. 어쩌면 한 때는 있었는지도 모르지. 무얼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다지 기분 좋진 않을 거다."
"알아."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그보다 그녀가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바지를 벗기고, 속옷을 내리고, 그의 페니스를 한 손으로 쥐고 몇 번 위아래로 훑었다. 손 안의 것이 천천히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욕망이 없다고 감각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난잡하군, 정말 싫어.
"입으로 하게 해 줘."
"지저분한 짓 하지 마."
"내 입이?"
"아니, 멍청한 녀석아. 그 쪽이 아니라."
"에테르계에서 갓 배달되어온 몸이 지저분할 리 없잖아."
"그러니까 그걸 입으로 왜...아."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그에게 있어 지나칠 만큼 낯선 행동이었다. 언젠가 그런 성적 유희가 있다고 책에서 본 정도였고, 갈레말 제국의 황제로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행위였다. 그녀는 능숙하게 그의 페니스를 입에 물고 끝부분을 입술로 문지르며 혀로 휘감았다.
"큿...으."
저도 모르게 목에서 소리가 새어나올 만큼 자극이 강했다. 경험이 없어도 그녀가 능숙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인간이라는 건 고작 이런 행위에 이성을 잃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곧 스스로 그렇게 될 것만 같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호르몬의 분비와 뇌의 작용, 이런 싸구려 쾌락 따위에 순응하는 몸. 소름이 돋았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녀가 그것을 목구멍 너머로 깊게 머금었다. 괜한 심술을 부려보고 싶어서, 그는 그녀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허리를 밀어붙였고, 그 상태로 허리를 거칠게 몇 번인가 움직였다. 콜록, 콜록. 그녀가 그를 밀쳐내고 기침을 했다. 입에서 점성이 높은 타액이 나와 그의 것과 투명한 실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러게, 쓸데없는 짓을 하니까."
"한 번만 더 해 줘."
"하?"
"방금 거 기분 좋았어."
"이봐, 방에서 나가는 게 목적 아니었어?"
"정말 낭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양반이야."
"낭만 좋아하시네."
질렸다는 얼굴을 하고, 그는 그녀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끼웠다. 그녀의 다리가 벌어졌다. 그곳은 삽입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젖어 있었다.
"넌 대체 왜 벌써부터..."
"네가 섹시하니까."
"또 시덥잖은 소리를 하는군. 어서 끝내줄 테니까 얌전히 돌아가라고."
"간만에 만났으니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싶었는데. 누가 방을 소멸시키려고 하는 바람에."
"미안하게 됐구만."
"너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단 말야."
"그렇게 가차없이 내 몸에 구멍을 ���어놓고?"
"네가 사라지고 난 뒤에 많은 생각을 했어."
그는 입구 부분에 자신의 것을 대고 끝부분부터 천천히 밀어넣었다. 나름대로의 배려였지만,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듯 안쪽의 주름들은 그의 것에 쫀득하게 착 들러붙어 왔다. 방금 전에 혀의 움직임을 보고 능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쪽은 좀 더 위험할지도 몰랐다. 타고났다고밖에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오톨도톨한 돌기들이 옴찔대며 페니스를 조여온다.
"좀 더 깊이, 끝까지..."
"욕심이 많구만."
"그냥 너한테도 제대로 달려 있구나 싶었으니까."
"너 임마, 할 생각 없지?"
가장 깊은 곳까지 꾹 밀어누르자, 그것만으로도 안쪽이 꿀렁거리며 조여 온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손을 들어 그녀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그녀의 질이 성기 뿐 아니라 온 몸을 감싸고 달라붙고 조여 오는 것 같은 감각마저 들었다. 보여지고 싶지 않다. 절대로 자신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다. 그녀가 노린 듯 안쪽을 꽉 조였다.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멋대로 허리가 움직이려 들었다. 그는 간신히 버텼다.
"...엎드려."
"꽤 즐기고 있나 보네?"
"아니, 얼굴 마주친 채로 끝내고 싶지 않아서."
"아하하! 부끄럼쟁이야."
"민망한 꼴 보이고 싶지 않단 말이다."
"싫어."
그녀는 그가 눈을 가리기 위해 뻗은 팔을 잡고 가볍게 그를 엎어버렸다. 야. 그가 당황했다. 그녀는 씨익 웃으며 위에 올라탔다.
“왜, 금방 끝내자며. 끝내주게 금방 끝낼 수 있어.”
“정말이지, 사람 말도 안 듣고...”
그리고 그녀가 빠르게 아랫도리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통제할 수 없는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한 번 흔들릴 때마다 이성의 끈이 하나씩 투둑,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되어먹지 못한 것들은... 제멋대로고, 엉망진창이고, 통제할 수 없고, 그리고...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제길..."
"기분 좋았어?"
"넌 빨리 저리 가. 소멸당한다."
"너는?"
"나는 이대로 에테르계로 돌아갈 거다. 내 세계 속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같이 나가볼래?"
"필요 없어. 어차피 어느 쪽이든 나는 사라져."
"같이 나가자."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아끈다.
...분명히 사라졌을 터인 자기 자신이 익숙한 풍경 안에 서 있다. 지나칠 정도로 익숙한 건물과 사람들. 혹시, 정말로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눈 앞에는 그녀가 서 있다. 그래, 내가 돌아왔을 리가 없지. 아니, 어떤 의미로는 돌아온 것인가? 영문을 몰라 하는 그의 옆에서, 그녀가 근처 의자에 걸터앉았다.
"종종 오곤 해, 네가 만든 환상은 굉장히 멋지거든."
새삼 그는 생소한 것을 느꼈다. 어째서인지 아무 빛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울림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에게서 보이던 그 사람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손가락을 튕겨보고, 무언가를 구현해보려 했지만 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지는 않은데, 잠깐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느껴진 것은 허기였다. 그리고 식욕. <그라탕이 먹고 싶다>...이전에 이런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특정한 음식을 먹고 싶다는 것을 느낀 것은 어쩌면 처음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 입술로 아까 ���게 키스해왔었지 - 역시, 이것도 이상하다.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이 전부 눈에 들어온다. 혹시, 이것은 설마.
"...내가 환생한 건가, 그것도 현세의 인간으로?"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러게, 나도 모르겠다."
그는 푹 한숨을 쉬었다. 대체 이 세계는, 이 여자는 내게 무슨 시련을 주려고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그녀는 그저 연신 싱글벙글 웃고만 있다. 그는 잠시 그녀의 등짝을 세게 한 대 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찌됐든 어서 와, 나의 세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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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전이랑 수정공(여체화)이 레섹즈스하는 이야기...
픽시 족은 기본적으로 장난꾸러기라고 알려져 있다... 그 장난기는 꽤나 변덕스러워서 때로는 상대를 해치는 심술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요정왕> 티타니아는 누군가에게 장난을 걸기보다는 장난꾸러기에 변덕쟁이인 요정들을 다스리고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자리이다. 그래도 어쩌면, 가끔은, 적어도 한 번쯤은 장난을 쳐도 되지 않을까. 페오 울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하아아아-?!
언제나처럼의 아침, 오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다. 그리고 수정공의, 평소라면 절대로 낼 리 없는 괴성으로 그 날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연히 문 밖에 서 있던 라이나가 방문을 노크하는 것도 잊은 채 뛰어들어와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다. 괜찮아. 수정공은 그녀를 간신히 안심시켜 돌려보냈다. 그래, 어쩐지 아침마다 자기 존재를 어필하는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없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다른 게 달려 있다. 설마 어제 '여자아이들은 무슨 기분일까' 같은 혼잣말을 좀 했기로서니, 그 탓인가? 누가 저지른 짓인지는 알 만 했다. 내 절친한 친구여, 세상에 맙소사. 거울에 비친 그는, 아니, 그녀는 완벽한 여성의 체형을 하고 있다. 수정으로 변한 몸 부분도 그에 맞추어 굴곡 있는 몸매가 되어 있었다. 스스로의 몸을 만지거나 보는 것조차 민망해, 수정공은 빠르게 평소대로의 로브를 뒤집어썼다. 이거라면 체형도 가릴 수 있다. 어차피 그 친구라면 하루이틀 정도 지나면 몸도 원래대로 돌려줄 테였다 - 그는 생각했다.
그 날 아침은 별 일 없이 넘어갔다. 딱히 여성의 몸이라고 해도 의식하지 않으면 평소와 똑같았다. 평소에도 타워 밖으로 잘 나가지 않다 보니, 주민들이 의구심을 가질 일도 없었다. 느닷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영웅이 나타나기 전까진.
그라하 티아! 무슨 일이야?! 아니, 무슨 일인가. 방금 페오가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라하에게 가 보라고 다급하게 말했거든. 너야말로 무슨 일이야?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 이런, 별 일 없다. 그 아이, 정말 완전히 노렸군... 어째 오늘은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좀 높다? 역시 뭔가 수상한데. 뭔가 숨기고 있지? 아니, 아무 일 없다니까...!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늘 쓰던 비누가 없어서 새로 다른 걸 사 봤을 뿐이다. 그대가 이 냄새를 좋아한다면, 이걸로 바꾸지. 흐음, 좀 더 진하게 맡고 싶은데. 우리 방으로 들어갈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집요한 거야?! 그 애가 별 일 없는데 나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네게 가 보라고 말할 리가 없잖아. 무슨 일인지 알려줘. 어디 떠들고 다니지 않을 테니까, 나에게만이라도. 크리스타리움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내가 있잖아. 이젠 너 혼자 고생하지 않아도 돼.
영웅의 사뭇 진지한 태도에 그는 일말의 미안함을 느꼈다. 고작 몸의 성별이 바뀐 것뿐이다 -고작이 아니긴 하지만-. 이 정도라면, 이야기해도 되지 않을까. 수정공은 자신이 보았던 알리제와 영웅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와, 여자아이가 되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야기, 그리고 페오가 그 말을 들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영웅의 눈이 동그래지고, 귀가 쫑긋 섰다. 그리고 그녀는 순간 비가 올 것만 같은 하늘조차 활짝 개어 보이게 할 만큼 밝게 웃었다.
난 정말 뭔가 큰일이 난 줄 알았어! 다행이다. 아니, 나에겐 꽤 큰일이란 말이다! 그렇지만 크리스타리움은 무사한 거잖아? 너도 무사한 거잖아? 아무 일 없으면 그걸로 된 거야. 내가 여자가 되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데에 불쾌감이나 혐오감을 느끼지는 않는 건가? 내가 왜? 네가 여자든 남자든 라하는 라하인걸. 별 생각 없어. 그보다, 케이크 먹으러 갈래? 여자들끼리 알콩달콩하는 게 부러웠다며. 나도 라하랑 같이 케이크 먹고 싶어! 그럴 만한 날씨는 아니지만... 아니, 아니야. 괜찮다. 성별 이전에 크리스타리움의 지도자로서 그런 짓은 조금 경망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대를 실망시킨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럼 케이크는 포장해 와서 방에서 같이 먹자. 같이 고르러 가자! 응?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을지도... 음... 그, 그렇게 하지.
그래 모처럼만이니까. 괜한 합리화를 하며 어물어물 대답하는 수정공의 크리스탈 팔을 잡아끌고는 와아, 차가워! 하고 영웅은 웃었다. 날씨가 싸늘하니 더 차가울 수밖에 없는 팔이다. 왠지 그녀의 체온을 느끼고 싶다고 생각해, 수정공은 팔을 바꿔 자신의 손으로 영웅의 손을 잡았다. 좋아, 좋아해. 그런 말을 속으로 삼키며.
앗, 모험가님과 공께서 같이 오실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오늘은 다른 것도 맛있지만 롤란베리 타르트와 딸기 치즈 케이크가 제일 예쁘게 구워졌답니다! 따뜻한 커피도 좀 내려드릴까요? 어제 막 커피콩이 들어왔거든요. 한 번 직접 볶아 봤는데, 꽤 맛있게 됐지 뭐에요!
크리스타리움에 케이크 가게가 생긴 것은 밤이 돌아온 뒤의 일이었다. 작물이 알차게 자라기 시작하고, ���들이 달걀을 하루에 하나씩 꼬박꼬박 낳는 세계가 되자 사람들의 마음도 많이 누그러지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보통 사람들에게도 약간의 사치가 허용되는 분위기가 자리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케이크 가게의 점원은 꽤나 수다쟁이인 모양이었다. 영웅은 눈을 반짝이며 케이크를 골랐다.
하나만 먹기 아까운데, 두 개, 세 개...아니, 세 개는 너무 많아. 라...아니, 수정공, 어떻게 생각해요? 음, 케이크는 피자가 아니지만... 물론 네가 좋아한다면 얼마든지. 그럼 한 조각만 먹어야지! 여기 있는 자허토르테로 할래. 들고 갈 수 있을까요? 커피도 주세요! 나는 롤란베리 타르트로 하지.
음식의 값을 치르고 종이 봉투를 손에 들고 타워로 향하려는데, 하늘에서 톡, 하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리고 후두둑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제법 굵었다. 수정공과 영웅은 봉투를 끌어안고 전력을 다해 타워까지 뛰었다. 비는 곧 후두둑이 아니라 쏴아,에 가까울 정도의 폭우로 바뀌었다.
완전히 젖어버렸네... 그래도 케이크는 무사해. 케이크가 문제가 아니네. 얼른 몸을 씻고 나오게. 감기 걸리겠다. 라하도 같이 들어가자. 로브는 말려야 할 것 아니야. 같이...? 같은 여자끼리인데, 뭐 괜찮잖아! 지금 몸이 여자일 뿐이지, 원래는 남자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영웅이 그 자리에서 훌렁 젖은 옷을 벗어제끼는 걸 보고, 라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그녀-는 등을 돌렸다.
여자들끼리 꺄꺄우후후 하고 노는 게 부러웠다면, 역시 최고는 같이 씻는 것 아니겠어? 그런 건 남자들이 상상하는 불경한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게 아니고? 에-, 모험가가 되기 전에 내가 있던 곳에서는 보통 그 정도는 했는데. 그보다 정말로 젖은 옷 입고 있으면 감기 걸린다. 얼른 벗어. 잠깐만, 내가, 내가 벗을 테니까! 기다려! 알았다니까!
결국 네 페이스에 말려들고 말잖아... 라하는 영웅이 멋대로 반쯤 풀어헤쳐놓은 로브를 마저 벗고, 옷걸이에 펼쳐 난로 근처에 놓아 두었다. 역시 이 몸은 어색하다. 부끄럽고 민망하다. 딱히 여성에 대한 공포심이나 거부감은 없지만, 이 몸은 어쩐지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다. 전라의 영웅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라하도 조심스레 그 뒤를 따라갔다.
샤워기에서는 따뜻한 물이 나왔다. 물을 직접 데워서 쓰지 않는 한 온수가 나오는 수도 시설은 고급 여관에서나 볼 법한 시설이다. 그나마 온천이 있는 쿠가네에서 본 정도였을까. 역시 대단한 기술력이라고 감탄하며 영웅은 비누로 거품을 내어서는 바로 라하의 가슴에 손을 댔다.
꺄악! 오, 방금 여자아이로서 백 점.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앗, 무슨 짓이야, 잠깐...
크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볼륨이 있는 느낌의 둥근 가슴이, 영웅의 손에 의해 이리저리 주물러진다. 미끈거리는 비누가 괜히 감각을 더 예민하게 만들어 손바닥에 스치는 유두가 저릿한 쾌감을 안겨준다. 피가 몰린 유두가 금세 부풀어오르는 걸 느끼며, 라하는 영웅의 어깨를 붙잡고 신음을 뱉었다. 영웅이 검지와 엄지로 유두를 잡아 비비자, 라하의 입에서 아, 하고 달콤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잠깐잠깐잠깐, 이럴 때가 아닌데. 기다려 봐, 잠깐만. 그러나 생각은 이내 하얗게 지워지고, 의식은 반쯤 날아갔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영웅의 손에 몸을 맡긴 채 비음을 흘리며 입술을 부딪고 혀를 얽고 있었다.
실은 이전 영웅과 한 번 몸을 섞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단순한 호기심에서였다. 그 땐 자신이 봉인되었다 다시 깨어나고, 다른 세계로 보내져서, 긴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으니까. 그것도 이제 생각해 보면 벌써 백 년 전 일이다. 스스로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 동안 라하는 한 번도 성적인 행위에 대한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했다. 그저 영웅의 존재를 마음 속에 품고 그리며 마을을 번성시키며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니까. 그랬던 라하였건만, 무뎌져 있던 감각이 되살아나자 욕망이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이러면 안 돼, 라는 생각조차도 흩어져 사라질 만큼 백 년만의 키스는 달고 황홀했다. 입술을 떼고, 영웅의 손이 몸을 떠난 순간 아쉽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아쉽다는 생각이 무색하게, 영웅은 비누를 손에 묻혀 라하의 몸 구석구석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괜찮아, 내가 할 테니까, 잠깐만, 거긴 내가 한다니까! 아...!
몸에 손이 닿는다. 온 몸이 만져진다. 분위기에 취한 탓일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터인 수정 부분을 만져질 때조차 어째서인지 등줄기를 타고 짜르르한 감각이 흘렀다. 영웅은 샤워기를 틀었고, 따뜻한 물과 함께 비눗기가 씻겨내려갔다. 제대로 씻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며 영웅은 다시 한 번 온몸을 쓰다듬고, 이번에는 엉덩이골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어 깨끗이 닦아내는 척 항문 근처를 문지르거나, 물을 틀어둔 채 가볍게 가슴 언저리에 키스하거나 했다. 머리가 어질했다. 아마 따뜻한 물을 오래 틀어놓은 탓일 것이다. 아마도.
머리까지 감고 보송보송해진 두 사람은 욕실에서 나와 나란히 가운을 걸치고 테이블에 앉았다. 라하는 자꾸만 침대 쪽으로 눈이 가는 것을 참기 위해 애썼다. 아까 전에 하던 거, 마저...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려던 말을 그는 간신히 삼켰다. 그만두자. 없던 일이야. 영웅은 그런 라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이봉투를 열어 안에 든 것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케이크! 아, 케이크 먹어야지. 커피 다 식었겠다. 그러게, 따뜻할 때 마실 걸 그랬다. 그래도 목욕하고 나오니까 기분 좋다, 그치? 어, 응... 그렇네.
어쩐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끄러워 라하는 괜히 벽만 쳐다봤다. 언제나처럼의 자신의 방인데도 이 장소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입을 닫자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는 마치 전파가 맞지 않는 수신기 소리 같았다. 스스로의 몸과 지금의 성별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건만 아랫배 언저리가 간질간질하다. 남자일 때에는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다. 그런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라하는 긴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별 것 아니야.
영웅은 포크로 자른 자허토르테의 첫 조각을, 아- 하고 벌린 라하의 입에 넣어준다.
단 거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날씨가 우중충하니까 영 안 좋은 생각도 들고 그러지?
라하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와서, 그는 다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식은 커피는 유난히 쓴 맛이 강했고 -물론 처음부터 이런 맛은 아니었을 것이다- , 라하의 귀가 뒤로 확 젖혀지며 꼬리털이 곤두섰다. 영웅은 그 모습을 보고 뭐가 그리 우스운지 깔깔대며 웃었다.
그래도 좋다, 빗소리 들으면서 너랑 케이크 먹는 거. 다행이네. 별 할 일도 없어서 심심하지 않아? 명색이 모험가인데. 난 네 얼굴만 봐도 재밌어. 네가 좋으니까.
무슨 생각으로 날린 직구인지. 라하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언제나처럼의 영웅이다. 능글맞고, 명랑하고, 뭘 생각하고 있는지 영 알 수 없을 만큼 이리저리 튀는 성격. 이번에도 별 의미 없는 말일 것이었다. 진정하자, 그라하 티아. 라하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자기 몫의 타르트를 깨작였다. 최근에 원초세계에 다녀온 영웅은 오랜만에 모르도나에 들렀던 모양이었다. 그리운 이름이었다. 누구는 여전히 잘 지내고, 누구는 어떤 일을 겪은 모양이고, 누구네 아이가 태어났고, 어디어디서 우리가 뭘 했었는지, 그런 얘기를 즐거운 듯이 하는 영웅의 모습을 라하는 행복한 듯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꽤 길어졌다. 케이크 한 조각은 참 작았다. 그리고, 쓴 맛 나는 커피도 케이크와 곁들이면 마실 만 했다. 영웅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쯤 마른 자신의 옷을 집어들었다.
그럼 나는 슬슬 여관으로 가 볼까! 내일 일과도 준비해야 하고, 비도 잦아들었고. 그래, 언제나 그대의 안전을 비네. 면목없지만 아직도 그대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많아. 그게 네가 원하는 대답이야? 에? 정말 내가 그냥 갔으면 좋겠어? ...!
아니야, 조금만 더. 속으로 생각하며 라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영웅의 팔을 잡았다. 영웅이 싱긋 웃었다.
지금 키스하면 엄청 단 맛 날 것 같지?
그 뒤로는, 모든 것이 빠르게, 그리고 동시에 느리게 지나갔다. 팔을 잡고 잡힌 채 침대에 엎어져, 마주본 채 몇 번이고 키스했다. 영웅은 라하의 귀를 입술로 자근대며 숨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라하의 가운 끈을 풀어헤치고는, 손끝으로 천천히 등을 훑었다. 예전에도 등이 약했었지? 등허리 언저리에서 손가락이 움직였다. 라하는 흐읍,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녹아내릴 것 같아, 어째서 이렇게나 기분좋은 거야. 아랫도리가 간질간질해진 라하는 다리를 꼬면서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영웅은 그 움직임을 받아치듯 라하의 허벅지 뒷쪽을 쓸어내린다. 어느 새 흘러나온 애액에 시트가 살짝 젖어 있었다.
아직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이렇게 젖어버리면 어떻게 해, 음란하게. 네가 기분 좋은 곳만 계속 만지니까...! 그거야 전부 기억하고 있는걸.
그 말 한 마디에 괜히 눈물이 터질 것 같아져서, 라하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영웅은 그의 팔을 잡아 내리고 씩 웃었다.
울지 마, 이제부턴 나도 모르는 곳이니까.
손가락을 라하의 질 안쪽으로 밀어넣는다. 빨아들이듯 꿈틀거리는 점막이 손가락에 엉겨붙어왔다. 손가락을 조금 움직인 것만으로 요란한 찌걱 소리가 났다. 영웅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일부러 몇 번이고 소리를 내 보였다. 라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영웅이 입구 부분의 오톨도톨한 주름을 ���가락으로 몇 번인가 훑었다. 아, 앗... 자칫 아플 수 있는 위치인데도, 지금은 쾌감이 앞섰다. 클리토리스에 남성기마냥 피가 몰려 저릿했다. 아랫도리가 손가락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듯 영웅은 웃었다.
영웅의 손끝이 자궁 경부에 닿았을 때에는 아무래도 화들짝 놀랐다. 그 정도로 몸 깊은 곳에서 감각이 느껴진다는 사실이 라하에게는 영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둥근 부분을 살살 더듬고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는 온몸이 달아오른다. 곧 라하는 절정하며 질벽을 강하게 조였다. 분명히 절정했다는 걸 알 터인데도, 영웅의 손가락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라하의 다리를 양 쪽으로 적나라하게 벌렸다. 외음부를 살짝 손으로 들추자, 그 곳에는 새끼손톱만한 크기의 클리토리스가 잔뜩 흥분한 채 고개를 내밀고 있다.
헤에, 라하의 여기는 큰 편이구나.
그리고 고개를 바로 묻는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의 신경이 한번에 성감을 느끼는 것 같은 충격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아아...잠깐만, 자극이 너무 강해!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화장실, 화장실 다녀올래... 괜찮다니까. 아니, 저기, 여긴 내 침대라고!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영웅은 혀를 세워 혀끝으로 클리토리스를 힘주어 문지른다. 소변인지, 애액인지, 아니면 다른 그 무언가인지 모를 액체가 왈칵왈칵 흘러내렸다.
응, 예뻐. 좋아해. 힛...히익...
라하는 허리가 뒤로 휜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었다. 그 자세 그대로 몸이 경련하듯 굳어서, 도저히 옴짝달싹 할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그만두고 싶지 않다. 계속 몸을 내어주고 맡긴 채 좀 더 기분좋아지고 싶다-라고, 라하는 생각했고, 또 아직 남아있는 약간의 이성은 그런 바보 같은 자신을 질책했다. 그리고 한 번 더 절정했다.
사람의 몸에 마물이 깃들어 있다면 바로 혀가 아닐까. 영웅의 혀는 라하의 성기 언저리를 떠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녀는 입술과 혀로, 계속해서 라하의 클리토리스를 공략하고 있었다. 껍질에 덮여있지 않아서 핥기 좋다며 영웅은 웃었다. 영웅의 손가락은 여전히 라하의 자궁 경부를 세심하게 쓰다듬고 있다. 아까부터 계속 침과 애액과 다른 액체들이 섞여 엉덩이를 타고 줄줄 흐르고 있는 것을 라하는 느끼고 있었지만, 어떻게 해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저 몸을 맡기고 신음하고 파르르 떠는 것이 라하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문득 자신이 사람이 아닌 무언가의 마물에게라도 사로잡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마물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이길 방도가 없다. 이대로 쾌락의 노예가 되어버릴 것 같아. 그런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웅은 정말 꿋꿋이 라하를 애무하고 있다. 정말 마물이나 기계라도 된 것처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태까지 느껴본 적 없었던 커다란 파도가 라하의 몸 한가운데서부터 터져나왔다. 사정감에 가까운 절정이었다. 온 몸에 무언가 기어다니는 듯, 전기가 흐르는 듯 저릿했다. 부딪히고, 빠져나가고, 또 부딪히고, 빠져나가고. 파도는 작게 부서지며 몇 번씩 몸 안을 두드렸다. 그제서야 영웅이 라하의 하반신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좋았어? 굳이 듣고 싶어? 키스해 줘. ...
라하가 영웅의 얼굴을 왼손으로 끌어당겨 키스하자, 그녀는 라하의 오른손을 잡는다. 라하는 움찔했다. 크리스타리움의 주민들�� 물론이요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 온 라이나조차도 조심스럽게 대하는 수정의 몸을 거리낌없이 만지고 끌어안는 것은 그녀뿐일지도 몰랐다. 손깍지를 끼고, 서로 바라보고, 멋쩍은 듯이 라하가 웃었다. 절정 후의 노곤노곤해진 몸으로 영웅의 살 냄새를 맡고 있자니, 덮쳐오는 수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라하는 잠들고 말았다. 비 내리는 소리와 새근거리는 숨소리, 시계바늘 소리만이 남았다. 영웅은 잠든 라하의 이마에 아주 오랫동안, 입을 맞췄다.
*
페오가 '여성의 몸이 된 수정공이 전혀 위화감이 없어서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그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일주일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 그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도록 하자. 언젠가 또 이야기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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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제와 빛전이 레즈섹스하는 이야기
꽃잎을 몰고 온 바람은 완연한 봄이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그 모든 소음이 기분 좋게 귀를 휘감는다. 한동안 여정이 일단락 된 뒤에도 요리며 연금술이며 기술을 배우겠다며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느라 바빴다 보니,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는 달콤했지만 무얼 해야 할지 몰라 괜히 초조하고 멍하긴 했다. 간만에 알리제와 시간을 보내기로 한 영웅은 율모어의 최상층에서 바람 내음을 맡으며 가벼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영웅 외에도 있었는지,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외곽 복도는 꽤 북적이는 편이었다. 난간을 붙잡고 먼 곳을 바라보자, 옅은 안개가 서린 산봉우리가 보였다. 문득 알리제가 입을 열었다.
“있지, 나 어제 처음으로 바에 가 봤어.“ “바? 여기에 있는 거?“ “그래, 멋지던걸? 당신과 관련된 사람들은 시민권과 상관없이 무료로 음료를 제공한다니, 정말 최고야!“ “넌 그래 봐야 주스밖에 못 마시는 거 아니야?“ “무슨 소리, 나는 어리숙한 알피노랑 다르다구. 실제 나이보다 두 살 더 많은 걸로 되어 있지롱.“ “어이, 괜찮은 거야?“ “흥, 샬레이안에서는 어엿한 성인이었으니까.“ “특별히 눈감아주도록 하지, 뭐... 이런 마음씨 너그러운 모험가가 또 어디 있을까. “ “으, 좀! 아이 취급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그 때, 누군가가 뒤에서 영웅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뒤를 돌아보자 깔끔한 짙은 갈색의 로브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후드 옆이 살짝 튀어나온 걸 보아서는 도란 족 남성 같았다.
“바 이야기를 하는 것 같길래 잠시 실례했네. 오늘 밤 열두 시부터 특별한 이���트가 기다리고 있다네. 괜찮다면 놀러 오겠나?“ “이벤트? 어떤 이벤트인데?“ “글쎄, 와 보면 알게 될 거야.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말고, 꼭 둘이서만 와야 한다네.“ “엄청 수상한데... 나, 이 도시에서 뭔가 원한이라도 산 거야?“ “그런 건 아냐. 자네들 말고도 꽤 많은 자유 시민들이 참가한다네. 관심이 있다면, 입장할 때 이 티켓을 꼭 보여주게. 혹시 필요없다면 꼭 태워서 버리도록. 그럼 이만.“
영웅과 알리제는 각각 붉은 색 티켓을 한 장씩 받았다. 남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인적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티켓에는 검은 색으로 화려한 덩굴장미가 그려져 있었고, 글자는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았다.
“알리제, 이거 뭔지 알겠어? 누구한테 좀 물어볼까?“ “그치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차이 누즈 씨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입이 가벼울 사람도 아니고...“ “그 사람이 지금 어느 위치인지 잊어버린 거야?! 이 도시에 무언가 비밀이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한테만은 절대로 들키면 안 된다고.“ “음, 어쩌지... 알리제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재밌을 거 같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전부 박살을 내 주면 되지!“
밤 열두 시가 조금 지난 시각.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알리제와 영웅은 바로 향했다.
“티켓을 제시해 주십시오.“
입구에 서 있던 종업원의 말에 두 사람은 가지고 있던 티켓을 내밀었다. 종업원이 그것을 받았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는 여느 때와는 달리 붉은 조명으로 밝혀져 있다. 열두 시가 지난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안에는 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벤트라고는 해도, 사람들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순간 히익, 하고 알리제가 숨을 삼키며 얼굴을 감쌌다. 알리제의 시선이 닿았던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성이 부끄럼없이 그 자리에서 남성의 페니스를 입에 넣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뭐야, 이벤트라는 게 이런 거야? 완전 재밌어 보이는데.”
“어서 오십시오, 이 곳은 처음이신가요?”
종업원으로 보이는 흄 족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바니 의상을 입고 있었다. 적당히 마르고 근육이 붙은 체형의 남성이 입은 바니 의상이라니, 눈이 행복해진다. 영웅은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처음이야.”
사람들은 옷을 입거나, 혹은 벗은 채로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종종 두셋씩 엉키곤 했다. 영웅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리제는 눈을 둘 곳을 모르고 쩔쩔맸다 - 이런 거... 이게 뭐야... 라고 입을 뻐끔거리면서.
“여기서는 원하는 사람 아무에게나 말을 걸어도 됩니다. 행위에 참가하는 구성원이 모두 동의한다면 성적인 행위를 하는 것도 허락됩니다. 그 모든 행위를 관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물론 심하게 폭력적이지 않은 한도 내에서 어떤 성적인 행위도 가능하나, 성기 삽입 시에는 종업원에게 말을 걸어 꼭 피임기구를 받아 사용해 주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성적인 행위를 강요하는 경우 즉시 퇴장당하며 본 장소에 다시는 입장할 수 없습니다. 연락처나 주소 교환은 금지입니다. 발각되었을 경우 역시 즉시 퇴장당하며 다시는 입장이 불가능합니다. 일행이 아닌 여기서 만난 사람과 동시에 밖으로 나가는 것도 금지입니다. 음료는 기본적으로 무료입니다. 단, 음료는 한 사람당 한 잔만 들고 있을 수 있는 컵 교환제이니, 새 음료를 받을 때는 꼭 기존의 컵을 반납해 주십시오... 참고로 오늘은 뉴 페이스 이벤트의 날입니다. 무대에서 두 분이 성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지게 됩니다. 무대에 서는 이벤트는 대인기라 평소에는 좀처럼 자리가 나지 않습니다만, 오늘이야말로 두 분의 애정을 자랑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입니다. 원한다면 신청해 주십시오.”
“나, 할래!” “무슨 소리야!” “재미있을 것 같아!” “지금 뭐라고 했는지 듣긴 했어?”
“...두 분 결정되시면 언제든지 말을 걸어 주십시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알리제와 눈을 반짝이는 영웅을 옅은 미소를 띠고 지켜보던 종업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왠지 모처럼 왔으니까, 재밌게 놀아야 할 것 같잖아.” “그 재밌게 논다는 게 무대에서 섹스하는 거라고? 미쳤어?!” “뭐, 닳는 것도 아니고... 괜찮지 않나?” “아냐, 틀려. 분명 뭔가가 닳아버린다고! 다시 돌릴 수 없는 무언가가!” “알리제는 보수적이구나~.” “상식적이라고 말해 주지 않을래...?” “알피노는 은근히 개방적인 애니까, 이런 거 부끄러워하면서도 분명 참가해 줄 거란 말이지.” “딱히 알피노랑 비교한다고 해서 내가... 내가, 아무 데서나 분해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줄래?” “그치만 왠지 좀 분하지?” “그건...그러니까...당신에게 처음을 주는 건 싫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공개된 장소는 좀 싫어...” “에, 처음? 진짜로?” “정식 교육 과정을 빠른 속도로 밟아 온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여자아이가 남이랑 몸을 섞을 기회가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해!?” “음, 과연. 이건 확실히 일리 있는 이야기네.” “게다가 혹시라도 이런 식의 자극에 익숙해지면 보통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고...” “그거라면 내가 보증하건대 별 문제 없는 것 같아.”
영웅은 알리제의 스커트 안쪽으로 손을 비집어 밀어넣고, 손가락을 세워 가볍게 다리 사이를 훑었다.
“벌써 이만큼 젖어있는 건, 역시 조금은 기대하고 있는 거 아니야?” “땀, 땀이야! 더우니까!”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서?” “으으... “ “알리제는 역시 밀어붙이는 데에 약하구나.” “대체 왜 남의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얘기하는 거야, 당신은.” “정말로 화가 났다면 아마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거라고 생각했어.” “맞아, 그랬겠지.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어.”
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무대에 오르는 쪽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알리제는 여전히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무대의 조명이 켜지며 불그스레하게 어둡던 바 안이 조금 더 밝아졌다.
오늘의 뉴 페이스! 두 사람 무대로 올라와 주세요!
어느새인가 무대 위에는 가벼운 매트리스 같은 것이 놓여져 있었다. 영웅은 알리제의 팔을 잡고 성큼성큼 무대에 올랐다. 휘파람 소리, 박수 소리, 그 사이에 섞인 남성 혹은 여성들의 벗어! 벗어라! 하는 환호성. 저 사람 <누군가> 아니야? 라는 듯한 수근거림. 영웅은 천천히 재킷을 벗었다. 언제나처럼의 앙증맞은 크기의 가슴이 드러났다. 바지와 신발을 벗고, 속옷을 내린다. 깔끔하게 정리된 매끈한 음부를 관객들 모두가 보고 있었다. 나체가 된 영웅은 알리제의 옷을 천천히 벗긴다. 새빨개진 얼굴로, 그녀는 딱히 저항하지 않고 몸을 드러냈다. 겉으로는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았던 가슴은 은근한 볼륨이 있고, 핑크빛을 띤 연한 갈색의 유륜 위에 작은 유두가 얹혀 있다. 따로 손질하진 않은 듯 하지만 예쁘장하게 난 음모는 묘하게 없던 페티쉬조차 불러일으키는 맛이 있다. 영웅은 알리제를 매트 위에 앉히고 가슴께에 얼굴을 묻었다. 손으로 가슴을 쥐고, 유두를 튕기듯 문지른다. 알리제는 당황한 듯 그녀의 손을 잡아 막는다.
“원래, 키스부터 하는 것 아니야...?” “에? 그런 룰 같은 건 없지만... 키스할까?” “...응.”
영웅은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물론 손은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 혀를 얽고,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살짝 문지르고, 그러면서 유두를 자극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알리제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온다. 자극이 필요해진, 갈 데 없이 방황하는 양 다리는 영웅의 허벅지를 사이에 끼고 허리를 뒤튼다. 입술이 떨어졌다. 상기된 얼굴로, 그녀는 영웅을 끌어당겨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좀 전보다는 조금 덜 농후한 키스인가 싶더니, 손바닥이 알리제의 다리 사이에 닿았다. 영웅은 살짝 힘을 주어 누른 채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손바닥에 압박당하는 성기에 달콤한 쾌감이 밀려든다.
“모두에게 보여지는 앞에서 키스하면서 보지 만져지고 있잖아.” “싫어, 부끄러운 소리 하지 마...”
영웅이 음부의 갈라진 틈 사이로 중지를 밀어넣자, 이미 젖을 대로 젖은 그 곳은, 아예 엉덩이까지 완전히 축축해져 있을 만큼 애액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놀려 틈새를 위아래로 쓰다듬듯 문지른다. 기분 좋은 듯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영웅은 손톱을 짧게 깎은 손가락을 질구에 한 마디 정도 밀어넣었다. 여러 겹의 꽃잎마냥 살결이 겹쳐져 오톨도톨한 느낌을 준다. 아마 남성기를 삽입한다면 절대 기분 좋을 테지. 영웅은 손가락의 관절을 굽혀 윗부분을 가볍게 눌렀다. 알리제가 허리를 튕겼고, 영웅은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그 사이에도 손가락은 조금씩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다. 아직 아무도 허락한 적이 없었던 그녀의 안쪽은, 자칫하면 상처가 생기지 않을까 싶을 만큼(사실 그럴 것이다) 연약하게 느껴졌다.
“아파?” “괜찮아.”
안쪽을 쭉 훑어보자, 가느다란 선 같은 것이 만져졌다. 그 언저리를 톡톡 두드리듯 손가락으로 짚어 본다. 보통은 이 언저리가 가장 기분좋은 포인트일 테다. 알리제는 파르르 떨었다.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려 볼까. 마주 본 자세에서, 영웅은 아주 아래로 내려온다. 왼손으로 성기를 벌리자 작은 꽃잎 같은, 클리토리스를 덮고 있는 살갗이 보였다. 그녀는 거기에 입술을 가볍게 가져다댔다. 입이 닿은 부분을 혀 끝으로 살살 쓸어올리며, 한 번 손가락을 빼고, 약지와 중지를 붙여 같이, 세로로 가져다 대고 천천히 손목을 돌리며 가로로 밀어넣는다. 그리고 약간 힘을 주어 질 내벽을 문지른다. 알리제는 놀라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숨을 들이쉬고, 크게 내쉬기를 반복했다. 신음이 숨에 섞여 나왔다. 모이를 먹는 금붕어처럼 뻐끔거리며, 질 안쪽이 조금씩 조여 온다. 서두르지 말자-영웅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이 아이는 섹스조차 처음인 데에다, 심지어 모두가 보고 있는 자리이다. 느껴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정도이다... ��� 정도로 젖어 있는 시점에서 꽤나 변태라는 것도 틀리지는 않지만. 영웅은 피식 웃었다. 사실, 가장 민감한 곳을 캐치한 뒤엔 남은 건 계속해서 자극하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다. 그녀의 손과 입은 꽤나 집요하게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질 내벽이 움츠러들어 손가락을 확 압박해 왔다. 알리제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다리를 오므리고 허리를 뒤로 황급히 뺐다. 집중이 풀리자,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몇 명인가는 박수를 치기도 했다.
“이거 봐, 엄청 젖었어.”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아무 말도 하지 마...!”
귀 끝까지 새빨개진 알리제는 등을 돌린 채 옷을 챙겨입으며 투덜거렸다. 영웅은 여전히 헤실헤실, 어쩌면 좀 바보 같은 얼굴로 웃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즐거운 모양이었다.
“다음에 케이크 사 줄 테니까.” “또 먹을 걸로 회유하려 들지, 또.” “그치만 이게 제일 잘 먹히잖아?” “진짜 악당이야, 누가 이런 사람을 또 영웅이라고 해?”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칫...”
. . .
일에 치이던 수정공이 탑 밖으로 나온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오늘은 날씨가 맑다. 마치 예전을 떠올리게 하는- 아, 아니야. 그가 이곳저곳 둘러보다 문득 발견한 것은 영웅과 알리제가 티팟을 가운데 놓고 사이좋게 케이크를 먹는 모습이었다. 여자아이들에게는 단 것이 들어가는 배가 따로 있다지. 어쩐지 얼굴이 빨개져 투덜거리는 알리제와 능글능글 웃고 있는 영웅의 모습은 분명 전에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남자라고 못할 것은 아니지만, 동성인 여자끼리 서로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괜히 궁금해졌다. 으음, 하루 정도는 여성의 몸과 마음을 가져 보고 싶군.
그리고 그의 말을 엿들은 것은, 마침 일 메그의 소식을 전하러 온 요정왕 티타니아 페오 울-의 작은 분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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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공이랑 빛전이 사귀면서 떡치는 이야기
그가 울음을 터뜨렸다.
투명한 보석 같은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던가, 방울진 눈물이 바닥을 어둡게 물들였다던가, 그런 장황한 묘사를 늘어놓기에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영웅은 미안해하며, 그리고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내가 기분을 상하게 했어? 그렇지 않아, 절대 그런 게 아니니 알아 주게. 어느 쪽이냐면...기뻐. 그래, 기쁘다.
그럼에도 그의 울음은 기쁘다기에는 서글픈 빛이 담겨 있었다.
나는 언제든 그대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고, 내 목숨을 포함해 내가 가진 어느 무엇도 그대를 위해 바칠 수 있어. 그렇지만... 그런 쪽으로는 맹세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 미안하다.
아, 이것은 아마 거절의 사인이다. 입맛이 씁쓸했다.
그럼, 우리 좀 더 특별한 사이가 되지 않을래? ...! 너를 위해서라면 내 지금 같은 생활을 조금 더 자제해도 좋아. 네가 좋아. 그러니까 네게 침대맡에서 밤을 새워 내 모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네가 샌드위치를 만들어준 만큼, 나도 청어 파이를 만들어 네게 선물할게. 나는 영원한 생명을 손에 넣었고, 그대는 그렇지 않아. 내가 그대를 잃었을 때의 슬픔은 상상만 해도 몸이 떨릴 정도다. 무슨 소리야, 어떤 연인도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어. 라하는 그냥, 지금을 즐기면 되는 거야. 그 이름으로 부르는 건 반칙이잖아... 그라하 티아. 응. 좋아해.
왈칵, 그의 눈에서 한 번 더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는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여태껏 영웅에게 있어 섹스란 '한 번 정도 즐길 만한, 스포츠 같은 것'에 불과했고 어느 상대와도 그런 관계를 맺어 왔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 나를 위해 이 세계로 넘어와, 마을을 부흥시키고 세계를 무너뜨릴 재해로부터 영웅이 사는 세계를 구하고자 발버둥친 청년. 그라면 섹스가 아니어도 좋다. 그저 끌어안고 싶다. 울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영웅은 생각했다.
사실은 조금... 도를 넘은 생각을 했었다. 어떤 생각? 네가 크리스타리움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대의 제안을 듣고 솔직히 말해 충격이었다. 내게도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 한 번의 충동을 내게 부딪힌다는 게 참을 수 없을 만큼 슬펐어. 그래서 오히려 거절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대에게 '소비'되는 한낱 시민보다는 더 특별하고 싶었기에. 아니야. 늘 너를 우선으로 할게. 어디에 있든 너를 생각할게. 네가 그랬듯이. 넌 내게 있어 누구보다 더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야. 틀렸어. 그건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야. 그대는 모두의 영웅이어야만 한다. 어디서든 빛나고, 모두에게 이야기가 되어 전해질 영웅이어야만 해. 나 따위가, 한낱 내가 그대를 독점할 수는 없다. 내가 모험을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 없어. 네가 알고 있는 영웅은 결코 변치 않아. 나는 여전히 모두를 사랑해, 모두를 위해 내 목숨을 바쳐 모험을 떠나고 적과 싸우겠지. 대신, 네가 내 심장을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줬으면 해. 내가 지치고 힘들 때, 네 존재를 떠올리면서 힘을 낼 수 있게 해 줘. 내 크리스탈 방패가 되어 줘. ...바보 같은 영웅님, 어째서 너는 이렇게 내가 듣고싶은 말만 골라서 할 수 있는 거야.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우리가 이렇게 맺어질 수 있겠어.
그 날,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가 변했다.
비행이 금지되어 있는 크리스타리움에서 새벽 세 시 반에 몰래 둘이 초코보를 타고 도시 위를 날다가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사람에게 들킬 뻔했던 일들이라거나, 원초세계와 제1세계를 가로지르는 철학과 역사 이야기를 하며 밤을 지샌 나날이나, 그러다 지쳐 잠든 영웅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앉은 채로 잠들어버린 수정공이라거나, 그런 나날이 오갔다. 영웅은 여전히 원초세계과 제1세계를 드나들며 사람들의 부탁을 해결해주었고(그 중에는 때로는 비료 주기라던가 도망친 고양이 잡아오기 같은 자질구레한 일들도 있었다), 수정공은 크리스타리움을 지키며 늘 그녀를 기다렸다. 어쩌면 마치 옛 이야기에 나오는 솔베이지처럼.
그 날도 두 사람은 샤워를 마친 뒤 여전히 밤 늦게까지, 침대에 엎드려 책을 펴 놓고 점성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원래부터 샬레이안 출신이었던 만큼 수정공은 현명했고, 살아온 세월만큼의 책을 꾸준히 읽어온 만큼 박식했다. 아직 제1세계에서 사용하는 점성술에 대한 이치를 다 깨닫지 못한 영웅은 그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마무리지어질 무렵, 영웅이 수정공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살며시 깍지를 낀다. 네 팔이 부서질까 두려워. 영웅은 때로 생각했다. 사람의 몸보다도 단단한 수정일텐데, 어쩐지 여리게만 느껴진다.
라하. 응. 키스해도 될까?
그 이름으로 불린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거리는데, 그에 이어지는 뜬금없는 제안에 그가 흡, 하고 숨을 삼켰다.
서투를 거야! 샬레이안의 고등교육 시설에 있던 시절 이후로 한 번도 키스해본 적 없어. 내가 안 서투르니까 괜찮아. ...그거, 조금 질투해도 돼?
영웅은 수정공, 아니 라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입술 표면은 아까 전까지의 긴 이야기 끝에 살짝 말라 있었지만,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녀는 그의 입술을 핥아 적시고, 애써 밀어넣으려던 혀를 잡아끌어 가볍게 깨문다. 혀로 혀를 핥았다. 영웅의 손이 라하의 등허리를 쓰다듬는다. 예상치 못한 자극에 그는 으응, 하고 몸을 흠칫 떨었다.
너, 등이 약하구나.
영웅은 깔깔 웃으며 한 번 더, 그와 입을 맞추며 동시에 견갑골 언저리에서부터 꼬리뼈까지를 살살 쓸었다. 라하가 입을 틀어막았지만 흘러나오는 비음은 막지 못했다. 다섯 손가락의 손끝으로 등허리에 원을 그리며, 귀에 가볍게 바람을 불어넣자 몸이 솔직하게 반응해 허리를 튕긴다.
너는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그 날부터 쭉 너와 섹스하는 상상을 했어. 나도... 너와 정을 나누는 걸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나도 우리가 맺어진 그 날부터 네 몸에 닿는 걸 때때로 상상하곤 했어. 차마 말로 하지 못했을 뿐이지. 라하. 응. 사랑해.
그의 눈시울이 또 붉어진다. 이 울보야.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 어떻게 백 년이나 총독 역할을 했대. 영웅은 그의 눈가에 가볍게 키스하고 미소지었다. 그녀는 라하의 앞섶을 걷고 속옷을 내린다. 팽팽하게 선 페니스는 이미 끝부분에 투명한 액체가 방울져 흘러내리고 있다. 영웅은 그대로 조용히 그것을 뿌리 부분까지 입에 머금었다. 단단해진 것의 끝부분이 목구멍에 닿았다. 아, 하고 억누른 듯한 소리가, 그 상태에서 혀가 움직이자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신음소리로 변한다. 그의 다리가 저절로 벌어졌다. 고개를 앞뒤로 움직여 입술로, 혀로 그의 것을 애무하며, 영웅은 벌어진 다리 사이로 팔을 밀어넣어 그의 뒷부분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지른다. 그것만으로도 신음소리의 톤이 높아지고, 평소 한 번도 들은 적 없었던 히윽, 하는 높은 목소리가 목에서 새어나왔다. 한참을 앞뒤로 자극하다, 이내 영웅은 손가락에 침을 바르고 슬쩍 뒷쪽으로 가운뎃손가락을 밀어넣는다.
아파? 괜찮아.
손가락으로 안쪽을 살살 더듬자, 아주 작은, 옴폭 들어간 부분이 느껴졌다. 영웅은 그 자리를 빳빳한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듯 눌렀다. 거친 숨소리에 에로틱한 목소리가 섞여나온다. 그녀는 조금 힘을 주어 그곳을 문질렀다.
라하, 여기 어때? 응, 으읏...
제대로 된 말조차 잇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그는 하반신을 그대로 영웅에게 맡긴 채 쾌락에 신음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라하는 반쯤 비명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그대로 영웅의 입 안에 사정했다. 절정의 순간 격하게 꿀렁거리며 요동치는 안쪽의 감촉이 손가락에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입 안에 고인 정액을 전부 말끔히 삼켜버리고, 영웅은 웃었다.
정말 귀여워. 내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넌 때때로 잊어버리는 것 같아. 나이 같은 건 상관없잖아, 우리가 여기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너는 지금 그라하 티아로 있어도 좋아. 내 앞에서라면. 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날 울릴 것 같아. 이건... 정말 반칙이야.
라하는 영웅의 옷을 천천히 벗겼다. 그는 온 얼굴에, 내가 이 사람을 안는 날이 오다니-라는 듯한 황홀한 표정을 하고 있다. 라하는 영웅이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에게 몇 번이고 키스하며 침대 위에 눕혔다. 그가 유두를 가볍게 터치하자, 영웅의 몸이 떨렸다. 유두를 입에 물고 혀로 살살 굴리자, 하아, 하고 숨소리에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손이 다리 사이로 향한다. 이미 영웅의 음부는 미끌미끌해져 있다. 아마 방금 전의 사정을 바라본 것만으로 흥분해 젖은 모양이었다. 손톱을 짧게 다듬은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넣자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는지 질 내부가 작게 오물거렸다. 좋아해. 견딜 수 없다는 듯, 라하는 영웅의 뺨에 입을 맞췄다. 손바닥으로 클리토리스가 있는 위치를 문지르며 천천히 삽입한 손가락을 움직였다. 영웅은 라하의 허리를 끌어당겨, 그가 자신의 머리맡에 무릎을 세워 앉게 하고는 그의 것을 입에 다시 물었다. 잠시 시들었나 싶었던 것이 도로 빳빳해졌다. 그 사실이 더 큰 자극이 되었는지, 영웅은 시트가 젖을 정도로 애액을 흘리며 몇 번이고 안쪽을 꽉 강하게 조여 왔다. 그가 손가락을 빼냈을 때, 손가락은 푹 젖어 있었다. 라하는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대고 살짝 핥았다. 시큼한 맛이 났다. 그냥, 그것조차도 좋았다.
넣을게.
라하의 말에 영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옷을 전부 벗고 그녀를 안았다. 찌걱 하는 소리와 함께 라하의 페니스가 질 윗벽을 긁듯 찔러올린다. 오톨도톨하게 달아오른 질벽이 쫀득하게 감겨 오는 것이 생각 이상으로 자극이 컸는지, 그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인상을 찡그렸다.
거짓말쟁이. 뭐가? 고등 교육 기관 이후로 키스도 안 했다더니, 능숙하잖아. 그냥 조금...찾아봤을 뿐이야, 말 안 하려고 했지만. 책으로? 조용히 해, 부끄러우니까...!
그 작은 체구에서 어디서 그런 체력이 나왔는지, 신음을 내는 것조차 지쳐버릴 때까지 그의 움직임은 멈출 줄을 몰랐다.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민감한 곳을 골라 찌르며 동시에 가슴께를 입으로 애무하거나, 키스하거나, 손깍지를 끼곤 했다.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안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내가 이 사람을 안아도 괜찮은 걸까. 라하는 여전히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그런 생각 따위 날려버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밀려드는 사정감을 몇 번이나 참아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저 영웅이 기분좋아하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밤을 새도 좋다고. 그러나 영웅의 손이 라하의 유두를 가볍게 집은 순간부터, 그 생각은 와장창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영웅의 손가락은 요염하게 라하의 양 유두를 만지작거렸다.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 성감에, 그는 격렬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아아, 눈 앞에 동경하는 영웅이 있고, 그녀와 섹스를 하고 있다고. 그 사실을 또 한 번 자각한 것만으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졌다. 영웅의 안을 가득 채우고, 그는 옆에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 두 사람은 잠에 빠져들었다.
날이 밝았다. 창 밖에서 햇살이 쏟아져들어와 두 사람의 몸을 비췄다. 영웅은 잠에서 깼다. 커튼을 치지 않아도 잠들 수 있다는 게, 빛이 들어오는 걸 느끼고 깰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녀는 새삼 생각했다. 기척을 느낀 것인지 라하도 눈을 떴다.
잘 잤어? 꿈도 안 꾸고 잤어. 마찬가지야.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꼴을 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키식 웃고는, 가볍게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머리를 빗었다. 어쩐지 이제야 제대로 연인으로서 맺어진 첫 날인 것만 같아서, 방을 나갈 때는 손을 잡을까 하다가 괜히 신경쓰여 두 사람 다 손을 뒤로 치우고 머쓱해했다.
문을 열고 복도를 걸어나가면 그의 집무실이 있고, 언제나처럼 라이나가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영웅님. 그리고 수정공.
그래, 좋은 아침이군.
수정공은 지팡이를 들었다.
오늘도 오늘의 일을 시작해야지. 그대도 오늘을 준비하도록 하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고 타워 밖으로 나간다. 그 곳에는 언제나처럼 하얗게 둥근 넓은 광장이 영웅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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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극의 피그말리온
아, 정말 끔찍한 일이죠. 제가 진작에 녀석을 말렸어야 했어요. 하지만 선생님, 어느 누구도 그 녀석이나 제게 잘못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계속해서 지켜본 저조차도,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이 커지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변명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일을 예상할 만한 능력이 없어요. 이번 일은 정말 보통 사람의 상식을 벗어난 일이잖아요, 그렇죠, 선생님?
아시다시피 저는 그저 공책에 내놓으랄 것 없는 판타지 소설을 끄적이곤 하는 정도의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이었습니다. 제게는 아주 어렸을 적, 유치원에 다니던 그 때부터 같이 다니던 친구가 하나 있었죠. 선생님도 알고 계실 거에요, 서민혁이요. 같은 유치원,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를 같이 다니느라 지겹게 붙어 다닌 녀석이었죠. 어렸을 때부터 워낙 소심해서 제가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다른 애들하고 어울리지도 못 하는 녀석이었거든요. 친구들이랑 만나서 놀 때도 혼자 나가는 건 되게 싫어했어요. 저한테 전화까지 해 가면서 같이 나가지 않겠느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까요. 오죽하면 저랑 그 녀석이 끔찍하게 붙어 다니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은 혹시 사귀는 게 아니냐고 반 장난으로 물어보곤 했죠. 중학교 때에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긴 했어요. 저 녀석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런데 뭐, 그 녀석이 절 지겹게 불러 대긴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그런 의도는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냥 민혁이 보모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렇다고 걔가 자기 앞가림 못 하는 그런 녀석은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꼭 사람 만날 때만 그래서.
그렇다고 해도 말이에요, 아무리 평준화 지역인 데에다 집이 가깝다고 해도, 고등학교까지 같은 곳에 들어올 줄이야! 결국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과가 갈리긴 했지만 말입니다. 저는 글 쓰는 걸 워낙 좋아했으니 문과를 지망하긴 했지만, 그 녀석이 이과를 지망한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어요. 선생님도 2학년 올라오면서 민혁이네 반 담임 맡으시면서 보셨죠? 걔, 다른 건 몰라도 과탐 점수는 내신이나 모의고사나 항상 만점이었잖아요. 실수로 한두 개쯤 틀릴 법도 한데, 언제나 정확하게 만점인 거요. 선생님도 되게 궁금해하셨잖아요, 대체 무슨 수로 이런 점수가 나오는지.
그 녀석은 제가 기억하고 있는 제일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뭔가 살아있는 생물 같은 거에 집착하고 그랬어요. 특히 물고기랑 벌레 같은 거요. 뱀이나 거북이도 엄청 좋아했는데, 그런 건 전시관에서밖에 볼 수가 없으니까. 놀려고 밖에 나가면 잠자리채 같은 걸 들고 방아깨비라던가, 메뚜기 같은 것도 막 잡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보통 남자애들, 벌레 같은 거 잡고 나면 여자애들한테 들이밀어서 울리거나 아니면 다리를 뗀다거나 하고 좀 짓궂게 놀잖아요, 그런데 그 녀석은 그걸 잡아서 페트병이나 그런 데에다가 넣고,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구조로 움직이는지 같은 걸 엄청 자세히 관찰을 했어요. 다른 애들이 막 싫어하는 바퀴벌레나 파리 같은, 그런 것까지요. 벌레 배 부분 보면 무지 징그러운데,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만지면서. 그 녀석은 노트만 펴면 맨날 곤충이라던가, 물고기라던가 그런 걸 볼펜이나 연필로 엄청 자세히 그려놨었어요. 교과서에도 막 그려놓고, 책상에도 그리고. 선생님이나 엄마들이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얘는 나중에 커서 화가 해도 되겠다, 했는데 걔가 딱히 그림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어요. 게다가 정말 그런 동물, 그것도 피가 차가운 동물만 잔뜩 그리고 사람 같은 건 죽어도 안 그리는 바람에 미술 점수는 완전히 바닥이었거든요.
그리고 중학교로 올라왔을 때도 그랬어요. 과학 점수는 무조건 만점이었죠. 민혁이 그 녀석 문제를 풀 때 혹시 보셨어요? 이전에 집에서 같이 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우연히 문제집을 푸는 모습을 봤거든요. 눈빛이 완전히 변해요. 뭐라고 하나, 사람 같지가 않죠. 무슨 문제를 푸는 기계가 된 것 같았어요. 문제를 읽기는 한 건지, 객관식 문제의 숫자를 마치 그냥 답지라도 보고 적듯이 1, 3, 4, 2, 이런 식으로 쭉쭉 써 내려가는 거에요. 그걸 보는데, 와, 소름이 쫙 끼치더라고요. 그런데 그에 비해서 다른 과목은 그리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어서, 언제였더라, 시험을 쳤는데 갑자기 담임 선생님이 확 표정이 굳으셔서 민혁이를 부르는 거에요. 알고 보니까 혹시 부정 행위를 한 게 아닌가 하고 교무실에 끌려갔었대요, 과학 성적이 너무 높으니까.
그런데, 그 때가 한참 판타지 소설이 유행해서 막 이것저것 책이 많이 나오던 때였거든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판타지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예전에 PC통신 같은 데에서 소설을 써서 유명해진 작가들이 작품을 내고 그럴 즈음이었죠. 선생님도 그거 영화 개봉하셨을 때 한 편 정도는 본 적 있으시죠? 제가 그런 걸 접하고 난 뒤로 굉장히 깊게 빠졌었거든요. 제가 워낙 판타지 소설을 많이 가져다 읽다 보니까, 주변 친구들도 남녀 가릴 것 없이 영향을 받아서 제가 빌려온 소설 같은 걸 다들 같이 봤어요. 민혁이도 다를 건 없었죠. 몇 년 지난 지금 찾아보면 굉장히 별 거 아닌 소설도 그 때는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둘이서 밤을 새 가면서 읽곤 했거든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그 이후로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또 재미있는 게 애들이 다 관심을 갖는 데가 달랐어요. 다른 애들은 뛰어난 검사가 들고 있는 전설의 검이라던가 그런 걸 공책에 수십 개씩 그리기도 했고, 몇몇 애들은 거기 나오는 예쁜 여자 엘프나 정령 같은 걸 그리고 그랬거든요, 제법 그럴싸하게, 또 막 야한 것도 그리고 그래서 애들이 노트 돌려보면서 좋아하고 그랬는데. 그러면서 그림을 그리다가 또 누구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쪽에 빠진 애들도 있고요.
그런데 민혁���는 생물광답게, 유난히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생물에 관심이 많았어요. 오크라던가, 트롤이라던가, 그런 걸 되게 열심히 그렸어요. 이렇게 생긴 생물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그 생물의 메커니즘 같은 걸 그럴듯하게 정리해놓기도 하구요. 그러면서 그걸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저한테 막 자기가 알아낸 생물의 구조 같은 걸 들려주곤 했어요. 물론 걔가 얘기해 봐야 사실 저는 반도 못 알아들었어요, 너무 전문적이어서. 그 녀석이 보는 소설에 다른 종족이나 동물이 나올 때마다 이것저것 그리면서 정리를 한 노트가 있는데, 아, 제가 갖고 있어요. 그게 몇 권이 넘어갔더라……. 그런데 그런 소설에 나오는 애들은 한계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는 자기가 막 만들어서 그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상상의 동물 같은 걸. 그러면서 일일이 해부도 같은 걸 막 그리고, 골격 구조나 근육의 움직임 같은 걸 그려놓고. 얘는 여기가 이렇게 움직이고, 여기에서 독액을 만들어내서 공격하고, 그런 거요. 저는 그 녀석이 만들어낸 생물체에 완전히 매료됐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많은 동물들을 관찰하고, 또 책을 읽으면서 쌓아온 수많은 지식은 이미 전문가의 수준을 뛰어넘었으니까요, 그 녀석이 만드는 생물체에는 정말 영혼이 있는 것 같았어요. 전 녀석에게 허락을 받고 나서 걔가 만들어낸 생물체가 나오는 내용의 소설을 썼죠. 민혁이도 제가 쓰는 글을 참 좋아했어요. 매번 쓸 때마다 글을 읽으면서 얘는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반응한다던가 하는, 좀 더 자세한 내용에 대한 조언도 해줬구요. 걔 머리 속에서는 그 생물들이 아예 둥지를 틀고 살고 있었는지, 보통 사람이 실존하는 동물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한 걸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건 정말 생물학적인 지식에 근거해서 설정된, 엄청나게 정교한 내용이었죠.
사춘기가 지나면서 이제 열이 식나 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오고 나서도 공부하는 짬짬이 그런 그림을 그리더라구요. 수학 문제집 아래에 빈 칸이나, 교과서나, 아니면 필기하는 노트라던가. 그리고 자기가 그린 그림을 인터넷에 자기 블로그나, 어디 카페 같은 데에다가 올리곤 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예전이랑 다르게, 요새 게임 3D로 많이 나오잖아요, 제법 돈도 막 들여서 진짜 있는 것처럼 만들구. 그래서 워낙 또 그런 종류의 생물이 나오는 게임이 많거든요. 몬스터나, 아니면 플레이어 종족으로. 인터넷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걸 많이 봐 왔으니까, 그 사람들 반응이 영 시큰둥한 거에요. 잘 그렸다. 되게 잘 그렸는데, 어디 나오는 뭐랑 닮았다, 라던가, 뭐랑 뭐 섞은 느낌이라던가. 걔는 딱히 만화를 보거나 어디 게임을 하는 애는 아니었으니까 그 생물들이 다 걔 머릿속에서 나온 걸 텐데, 다른 사람 걸 따라했다는 얘기를 듣고 화가 좀 났나 봐요. 그런데 또 그게 어디 인터넷에 누가 뭘 따라했는데, 자기 그림이라고 우긴다던가 하는 그런 글이 막 한참 동안 돌아다녔거든요. 민혁이가 약간 이상해진 게 그 때부터였어요. 예전에는 아주 작은 생물부터, 굉장히 다양한 생물을 많이 만들어내곤 했었는데, 그 녀석 공책에 점점 크고 강한 존재가 늘어났죠. 그리고 그 생물들은, 상대방을 죽이는 아주 많은 방법을 알고 있었어요. 이전에는 움직이는 방법이나, 모여 사는 방법 같은 것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뤘다면, 날이 갈수록 덩치로 밟아버리거나, 발톱이나 뿔을 사용한다던가, 혹은 불을 뿜어내거나 하는 설명이 늘어났죠. 아마 스트레스를 받는 걸 그런 방법으로 해소하는 모양이었어요. 크고 강한 생물을 만들고, 그걸 다루는 존재가 되는 상상을 하는 거죠. 그리고… 어쩌면 모종의 방법으로, 자신의 창조물을 모독한 사람들을 벌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몰라요.
그러다 보니 걔가 진심으로, 엄청 간절히 바라는 게 하나 생겼었어요. 딴 것도 아니고, 자기가 그렇게 그려낸 생물이 종이 밖으로 나오는 걸 그렇게 바란 거에요. 물론 수십, 수백 마리를 그려놓고 그 수십 마리가 다 튀어나오는 걸 바란 건 아니구요. 민혁이가 정말 온 힘을 다해서 그려내고 싶어하던 게 있는데, 그걸 꼭 실제로 만들어내고, 눈 앞에서 보고 싶어했어요. 그 모든 생물의 완전체라고 해야 좋을까, 우두머리라고 해야 좋을까. 민혁이가 말주변이 좋은 건 아니었는데, 어떻게든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그걸 설명하려고 노력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걔는 자기가 상상한 그 생물에다가 지옥에서 올라온 왕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그가 말하는 지옥에서 올라온 왕은, 아주 크지도, 아주 작지도 않은 딱 건장한, 조금 체구가 큰 성인 남자의 키를 하고 있어요. 그는 용의 머리와 사람의 몸을 하고 있는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극한의 공포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고, 카리스마를 가진 그런 존재라고 했어요. 그 자체는 거의 영겁의 생명을 가지고 있고, 살아온 나이만큼 현명하고,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부분까지 모두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죠. 그가 숨쉬는 소리는 용암이 끓는 것과도 같아서 결코 곱지는 않지만, 그가 말하는 목소리는 머릿속에 바로 들어와 울리면서,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했어요. 그게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봤는데, 그걸 모르겠다는 거에요. 그 정확한 생김새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 녀석은 정말 밤을 새워 가면서 그림을 그렸어요. 자신이 만족하는 디자인이 나올 때까지 말이에요. 그런데, 언제나 어딘가가 부족했나 봐요. 오늘은 좀 어떻냐고 물어볼 때마다, 녀석은 퀭한 얼굴로 고개를 젓곤 했어요. 모르겠다고. 느낌은 너무나도 확실하고,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눈 앞에서 나타날 것만 같은데 보이질 않는다고.
그 존재에 대한 녀석의 집착은 엄청났어요. 녀석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거든요. 녀석은 학교에 과학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되게 놀랐어요. 사람 대하는 걸 죽어라 싫어하던 애가, 웬 일로 동아리 같은 걸 만들었나 했죠. 그런데, 그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어요. 민혁이 녀석은 정말로 그 지옥의 왕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낼 생각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생물이 만들어질 수 있는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나 봐요. 저도 그 녀석이 부탁한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과학 동아리 부원이 됐죠. 처음에는 겨우 고등학교 화학 실험실 같은 데에서 뭐가 나올 수가 있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민혁이가 원래 과탐 성적이 좋으니까 화학 선생님은 걔가 무슨 실험 같은 걸 한다고 하면 선뜻 실험실을 빌려주시곤 했어요. 게다가 뭔가 화공약품 같은 걸 주문해달라고 부탁하면 바로 교육부에서 지원을 받아서 금방 가져다 주시기도 했고요. 그런 걸 보니까 얘가 뭔가 해낼 것 같긴 하다, 싶긴 했죠. 물론 나라에서 동아리를 지원해주려면 그 만큼 뭔가 결과물 같은 것이 나와야 되니까, 민혁이나 잘 오지도 않는 몇 부원들이 별 거 아닌 실험 몇 가지로 보고서를 쭉 써서 대충 제출하곤 했어요. 명목상은 정말 그럴듯한 과학 실험 동아리였죠. 그리고 본업은 따로 있었죠, 민혁이 녀석의 실험 말이에요. 그 녀석은 대체 어디서 무슨 정보를 얻은 건지, 주문한 물질을 여러 가지로 섞고, 추출하고 하면서 과학실에서 뭔가 이상한 약물을 만들곤 했어요. 그걸 보고 제가 제조법에 근거는 있는 거냐고 슬쩍 물어봤더니, 그 녀석은 다 방법이 있다면서 씨익 웃는 거에요. 그런데 그 미소가, 등줄기가 싸늘해지더라고요. 그 때 본 녀석의 얼굴이 잊혀지질 않아요. 그게 딱 그거 있잖아요,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 나올 법한 과학자의 얼굴.
그런데 저는요, 저는 그 녀석을 제 손으로 말릴 수가 없었어요. 그 녀석의 고집은 워낙에 대단했으니 말린다고 들을 녀석도 아니었겠지만요, 선생님, 솔직히 말할게요. 사실 제가 그 녀석의 그런 모습을 지독하게 좋아했어요. 온갖 실험을 하면서 자신의 생물을 이 땅에 재현해 보이겠다는 민혁이의 태도야말로, 살아있는 인간이 원래 지닌 본성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언제나 지성을 가지고 신에게 도전하는, 이지적인 인간의 표본 말이에요. 제게 있어 민혁이의 그런 모습은 녀석이 그 완성된 존재에게 느끼는 매력만큼 강했고, 제게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었죠. 민혁이가 여러 가지 일을 겪고, 점점 변해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손 하나 댈 수 없었어요. 말리거나 부추길 수 없었죠. 그 녀석이 스스로 어떻게 변해가는지, 신에게 도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마지막이 어떤 결과로 끝나는지도 말이에요. 사실 제가 보기에 민혁이는 특별했어요. 여태까지 다른 과학자들이 실패했던 어떤 것도 모두 이루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죠. 그라면 신에게 이길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와 민혁이는 주말만 되면 국립중앙도서관 같은 데에 가서 한참 동안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죠.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과 수업에 대해서 정말 한 글자도 모르던 저도 그 녀석과 얘기하고 있다 보면 이것저것 주워듣고 해서 또 보이는 게 있긴 했거든요. 그 녀석은 원서를 읽기 위해서 영어나, 심지어는 라틴어 공부도 막 하고. 하여튼 되게 특이한 걸 엄청 공부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뭔가 고대의 의사 같기도 했어요. 아니, 의사라기보다는 연금술사 쪽에 더 가까우려나. 그런데 걔는 그 약물을 만들어가지고는, 이런저런 동물을 구해다가 약물을 주사하곤 했어요. 처음에는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는 벌레나 그런 걸 잡아서 실험하더니, 그 뒤로는 인터넷 같은 데에서 실험용 생쥐를 사오더라고요. 그런 걸 또 파는 데가 있던데. 물론 실험 결과 애가 좀 더 난폭해진다던가, 아니면 잠이 든다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딱히 눈에 띌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그런데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걔가 이젠 점점 초조해지는 거에요. 자기가 세운 이론으로 만들어낸 약물을 주입했을 때, 어떤 이치에 따라서 나름대로 생물이 변화할 법도 한데 아무리 실험해도 변화가 없으니까 말이에요. 언제였더라, 아마 그 날도 실험을 하러 과학실에 가긴 갔을 텐데, 애가 연락이 없더라고요. 매번 뭔가 할 때마다 저를 부르곤 했었는데. 어쩐지 이상해서 과학실로 뛰어갔더니, 하 참……. 애가 정말 맛이라도 갔었는지, 자기 몸에다 약을 놓고 있는 거에요. 전 그 때 그 모습을 보고 정말 당황했어요. 많이 놀랐죠. 분명히 계속해서 지켜보고만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러고 있는 걸 보니까 엄청 걱정이 되는 거에요. 혹시라도 어떻게 되면 어쩔 뻔 했냐고 화를 막 냈더니, 걔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긴 하던데, 그걸로 끝이었어요. 다른 말도 없고. 정말 아무런 생각도 없었나 봐요. 진짜로 다행이었던 건,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는 거죠. 전 혹시라도 녀석이 다른 인격 같은 걸 깨워내는 건 아닌가 생각했는데, 하하.
그런데, 과학실에 있는 기기가 상당히 오래되기도 했고, 딱히 전문 의료 시설이나 실험실에 있는 고가의 실험 설비도 없고 하니까 거기서는 답이 나올 리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나 봐요. 그거 말고도 뭐, 자기가 뭘 하다 보니 생각난 것이 있는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이런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아무런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나. 민혁이는 생물체를 만드는 방법을 좀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죠. 자퇴서까지 써 온 민혁이를 뜯어 말린 건 작년 저희 담임 선생님이셨어요. 그 분이 미술 선생님이셨는데, 그 녀석과 상담을 하겠다더니, 뭔가를 만들고 싶으면 그걸 조형 재료 같은 걸 이용해서 직접 만들어보는 건 어떻겠냐고 물어봤던 거에요. 금방이라도 직접 살아서 숨쉴 것 같은 조형을 만들어서 그 욕구를 표출해 보라는 식으로요. 선생님은 미술실에 있는 모든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적어도 학교는 졸업하라고 얘길 했어요. 뭐, 사실 자퇴하는 애가 실제로 있으면 그 반 분위기도 좀 술렁이고 하니까, 그런 걸 또 막고 싶으셨는지도 모르고요. 그런데 그 녀석이 원하는 생물 창조는 그런 종류가 아니잖아요, 뭔가 작품 창작 활동 같은 걸로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니까. 그래서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정말 택도 없는 소리라고 코웃음을 쳤는데, 민혁이는 예상 외로 그 조건을 쉽게 받아들였어요. 학교에 남아있겠다고 하더라고요. 전 굉장히 놀랐죠. 얘한테 무슨 바람이 불었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 녀석은 그냥 조형을 하기로 한 게 아니었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신화 있잖아요. 태초에 신이 세상을 만들고, 인간을 창조했을 때의 이야기요. 각 나라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흙이나 돌을 빚어서 사람을 만들고, 코로 숨을 불어넣자 인간이 만들어져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고 하는 거요. 책에서는 그게 농경 사회의 시작을 의미하는 거라고도 했던 것 같지만. 그걸 문자 그대로 믿어 보자는 의도였죠. 그렇게 민혁이 녀석이 답을 찾은 건, 과학실이 아니라 과학실 옆에 있는 미술실이었어요.
처음에는 기가 찼어요. 여태까지 봐 온 민혁이는 그런 애가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과학에 통달한 녀석이 신화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다니.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제가 판타지 소설을 쓴다는 건 마법을 진짜로 믿어서가 아니잖아요, 그게 환상이라는 걸 알고 있고, 상상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소설을 쓰는 거죠. 그런데 녀석은 그걸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기 시작한 거에요. 마법이든, 신의 힘이든 말이에요. 어떻게 사람의 관점이라는 게 완벽할 정도로 극에서 극으로 이동할 수 있는지. 저는 민혁이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걸 포기한 줄 알고, 흥미를 잃었어요. 제 공부도 해야 했고, 뭐, 아예 연락을 끊기로 했죠. 저는 현실을 등지고 꿈만 꾸는 예술가한테는 아무 관심 없거든요. 솔직히 애초부터 멀쩡한 정신머리 가진 놈도 아닌데 아예 돌아버린 이상 아무 관심 없다. 그렇게 생각했죠. 그런데, 제가 말이에요, 어쩌다가 우연히 그 녀석이 작업하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그런데 역시, 역시 민혁이인 거에요. 그 모습을 보고, 돌아서겠다고 생각했던 제 마음이 순식간에 꺾여버렸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봐 온 녀석에게서 제가 눈을 뗄 수 있을 리가 있나요, 그 녀석은 정말 대단한 놈인걸요. 그 녀석 안에서 타고 있는 불꽃은, 설마 창조 신화가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그걸 정말로 실현해 낼 기세였다고요. 민혁이는 미술실 한 구석에서 그걸 만들기 시작했어요. 녀석은 자신이 상상한 실제 크기로 뼈대를 잡고, 거기에 조형용 찰흙을 가져다 붙였죠. 그런 걸 말없이 지켜보는 것도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마치 전문 예술가가 작업하는 걸 구경하는 것 같았거든요. 미술이라고는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는 애가,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거쳐가면서, 하나의 생물 모형을 창조하는 걸 구경하는 건 그 나름대로 대단한 장관이었죠. 그게 워낙 커다랗다 보니까, 아무 상관 없었던 다른 애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저 커다란 거 뭐냐고. 신기하다고 와서 막 구경하는 애들도 있었고요. 민혁이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말없이 그 흙덩어리를 매만졌죠. 전체적인 틀이 잡혀가면서, 사람들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렸어요. 남자애들은 멋있다, 대단하다, 하고 와서 보는 애들이 되게 많았는데, 몇몇 여자애들은 불길하다고, 기분 나쁘다고,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고 미술 선생님한테 엄청 불평을 했어요. 무엇보다 미술실에서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3학년 선배들이 그걸 미술실 구석에 두는 걸 반대하는 목소리가 엄청 컸어요. 그게 되게 불길하다고. 그 커다란 찰흙덩어리는 결국 사람들의 반대에 밀려서 미술실 재료창고로 옮겨지게 됐죠. 수업 할 때라도 안 보게 된 게 어디냐고, 민혁이가 만들던 흙덩어리를 꺼리던 사람들은 그 결정을 다들 반겼어요. 그래도 민혁이는 그걸 계속 만들고 있었죠. 사람들이 보고 안 보고는 그 녀석한테는 전혀 상관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미술실을 빌려주겠다고 하셨던 그 미술 선생님이 저희가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잖아요. 그러면서 새로운 미술 선생님이 부임하셨구요. 카일 선생님 아시죠? 한국 전통 문화의 미학에 반해서 외국에서 귀화하셨다가, 교단에 서서 애들을 가르치게 되셨다고. 그 분이 워낙 심미안이 뛰어난 분이라고 알려져 있어서, 민혁이가 하고 있던 그 작업이 또 단상에 오르게 됐어요. 재료창고에 뭐 가지러 들어갈 때마다 자꾸 깜짝깜짝 놀란다고, 애들이 여전히 불만이 좀 있었거든요. 그런데 미술 선생님이 새로 부임하시면서 예전에 그 조형물을 감싸주던 사람이 사라졌다 싶으니까 슬슬 또 이야기를 꺼내는 거에요. 특히 여자애들이 선생님께 달라붙어서 졸랐어요. 그걸 없애버리자고. 그런데 새로 오신 선생님의 그 뛰어난 심미안이라는 게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수준을 넘어선 게, 와, 정말 엄청났는데, 그 일이 말이에요, 그 선생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때부터 알아봤어야 되는데. 저희 처음 미술 수업 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죠? 그거 인터넷 뉴스에도 나고 그랬잖아요. 선생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는, 프로젝터가 비추는 스크린에 에로스와 타나토스, 라는 글씨를 큼지막하게 띄웠어요. 에로스라는 단어를 잘못 알아본 아이들이 야한 거라도 보여주나, 해서 괜히 반 전체가 술렁이고 있는데, 선생님은 꽤 큼지막한 나무 상자를 들고 오셔서는 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맞춰보라고 하셨어요. 먹을 거, 미술 작품, 동물, 여러 가지 답이 나왔었죠. 그리고 선생님이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교사용 테이블 위에 쏟으셨어요. 그리고 정말 과장 섞지 않고, 그 곳에 있던 거의 모든 학생의 엄청난 비명 소리가 미술실 안을 울렸죠. 미술실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상자 안에 들어있던 그게 뭐였냐 하면, 다른 것도 아니고, 동물 시체였어요. 죽은 토끼, 죽은 비둘기, 죽은 쥐, 죽은 강아지. 사실 저도 좀 많이 놀랐어요. 그런 걸 꺼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셨거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은 했죠. 아, 이 선생님은 민혁이 편이겠구나. 저는 그 날 그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요. [너희들이 흔히 감상하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미술 작품은 다 죽어 있는 존재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다면 생명이 없는 것이고, 생명이 없다는 건 죽어 있는 것이 아니더냐. 그렇다면 과연 여기 죽어 있는 시체를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냐]라고 말이죠. 저는 그 선생님의 말에 더할 나위 없이 공감했어요. 여태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어떤 선생님도 말하지 않았던 미학이었죠. 그게 제 마음에 확 와 닿은 덕에, 저는 카일 선생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어요.
알고 보니, 선생님은 우리 반이 아니라 학년 전체에게 같은 내용의 수업을 했나 봐요. 그런 수업을 듣고 심하게 충격을 받은 학생들이 집에 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죠. 인터넷에다가도 막 글을 올리고.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학부모들이 전화도 하고 그랬나 봐요.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게, 그랬는데도 그 선생님이 교단에서 끌려 내려오시진 않았다는 거에요. 아이들은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이 점점 관대해졌어요. 아이들뿐이 아니라, 인터넷에 올라온 글도 하나둘씩 지워졌어요. 예술을 하고 미학을 아는 사람이니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지, 라면서 말이에요. 내가 손을 댄 일이 아니었는데도, 사태가 비현실적일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걸 보고 있자니 마치 마법을 눈 앞에서 본 것 같은 기분에 손끝이 짜릿할 정도였다니까요. 그건 분명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었어요. 만약 아이들이 반발하는데도 교단에서 내려가지 않았다면 뇌물이라던가, 비리라던가, 그런 안 좋은 소문이 돌 만도 한데, 그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조용해진 거에요. 순식간에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예상했던 대로, 미술 선생님은 민혁이가 만들고 있던 그것에 큰 관심을 보이셨죠. 민혁이가 그걸 방학 동안에도 학교에 나와서 만들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조형물�� 이제 굉장히 정교한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어요. 그건 정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악을 자아낼 정도였죠. 어떤 숙련된 예술가라고 해도 그런 물건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거에요. 그것은 전체적인 생김새로부터 느껴지는 원초적인 공포, 그리고 섬뜩함에 몸을 떨면서도, 그러면서도 더없이 완벽한 비율로 이루어져 저절로 감탄을 우러나오게 하는, 존재 자체가 모순투성이인 조형물이었는걸요. 그것은 숨을 불어넣지 않았다 뿐이지,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 걸을 수 있을 것처럼 생생했어요. 방과 후에 민혁이가 그걸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선생님은 걔가 그렇게나 원하던 그 말을, 마법의 문장을, 녀석의 귀에 직접 들려주었어요. [네가 만든 그거, 살아나게 하고 싶지 않아? 방법은 알고 있는데, 알려 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민혁이 표정이 어땠는지 아세요? 그건, 분명히 신에게 구원받은 자의 표정이었어요. 아니, 어쩌면 신을 이긴 자의 표정인지도 몰랐죠. 저는 그 날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환희를 느끼는 자의 표정을 봤어요. 녀석이 기뻐서 죽었다고 해도 전 믿었을 거에요. 민혁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던져서라도 그 방법을 잡고 말겠다고 장담했어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할 테니까, 이 조형에 숨을 불어넣는 법을 알려달라고. 선생님에게 정말, 정말 온 힘을 다해 간절히 부탁했어요.
카일 선생님은 얌전하던 민혁이에게 그렇게까지 격렬한 반응이 나온 것에 흠칫 놀란 듯 하면서도, 이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생명을 불어넣을 수는 있어. 하지만 네가 만든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게 되면, 네 존재가 사라지게 돼. 정확히 말하자면, 네 스스로가 네 자신의 창조물이 되는 거야. 너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니까. 하나의 생명을 만드는 대가가 그만큼 큰 거지. 카일 선생님의 표정은 굉장히 진지했고,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보고 있다가, 정말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걸 느꼈어요. 저는 처음에는 민혁이를 말리려고 했죠. 솔직히 무서웠어요, 민혁이가 사라져버린 세계. 세상에서 한 사람의 존재가 사라지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있고, 그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데, 정말 제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녀석은 이미 누군가가 말린다고 어떻게 될 만한 상태가 아니었거든요. 카일 선생님은 분명 그걸 알고 있었을 거에요. 그 조형에서 느껴지는 민혁이의 광기 어린 집착을 말이에요. 그 선생님은 민혁이에게 말했어요. 이 조형물이 완벽하게 네 안에서 완성되었을 때, 그 때 조형물을 향해 그대로 뛰어들면 네가 바로 그 안으로 들어가서 조형물이 네 존재를 대가로 생명을 가지고 숨을 쉴 거다, 라고요. 그리고 이어 말씀하셨죠. 그 이후의 행동은 자신은 절대 책임지지 않겠다고, 만약 네가 창조해낸 생명체가 다른 이를 해치거나 지나치게 큰 문제를 일으킬 경우에는 그 일이 일어나게 만든 선생님 당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는 수밖에 없으니, 그 점은 명심하라고 민혁이에게 몇 번이고 당부하셨어요.
민혁이는 처음에는 굉장히 고민하더라고요. 카일 선생님의 말이 솔직히 보통 상식으로는 절대 이해되지 않는 얘기잖아요. 그냥 앞뒤 없이 달려들면 된다니. 게다가 그 조형물은 점토로 만들어서 쉽게 부서지는 거구요. 카일 선생님 말씀이 거짓말이어서 부딪혔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되면, 여태까지 공들여 만들었던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거구요. 그리고, 물론 마음 속 한 켠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서 걱정했는지도 몰라요. 자신이 살아왔던 기억이나 그 이성이 그대로 남아있긴 할지,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글쎄, 다른 사람들과도 제대로 얽혀 본 적 없는 그 녀석이 미련 같은 걸 남길 만한 기억이라는 게 과연 뭐가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데, 여튼 애초부터 속세에 정말 미련이 없는 자식이었으니까요. 결국 녀석은 그렇게나 매달렸던 조형물을 완성해냈고, 그리고 그 날, 제가 보는 앞에서 그것을 향해 달렸어요. 그리고 저는 그 날 눈 앞에서 마법이 일어나는 걸 봤죠. 만들어진 그대로의 찰흙 색을 띠고 있던 그 조형물이, 점차 새카맣게 탄 듯한, 아니, 어두운 데에서 눈을 감았을 때에 느껴지는 것과 같은 칠흑의 빛으로 변했어요. 완전히 검은색을 띠고 있던 그것은, 천천히 몸에 광택을 띠며 뚜렷한 형체를 가지기 시작했죠. 그러더니 곧 눈에 생기가 돌면서 저와 눈이 마주쳤어요. 눈동자는 빛나는 듯한 노란색이었고, 마주치는 사람의 다리를 순식간에 풀리게 만들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꼬리, 볏, 군데군데에 마치 불이 피어오르듯, 진홍색의 점, 혹은 물결 무늬가 생겨났어요. 그 존재의 몸에서부터 까만 것이 드라이아이스의 연기처럼 피어오르거나, 혹은 타르처럼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고, 그것은 금세 흔적을 감추며 사라지곤 했죠. 어둠에서 막 기어올라온 것처럼. 지옥의 왕. 그 말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존재였어요. 소름이 끼치도록 두렵고, 미치도록 아름다운 생물. 저는 물어봤죠, 절 알아보겠냐고.
그리고 그는 저를 바라보고, 정말 한 치 망설임 없이 대답했어요. 모른다, 라고.
그 순간 갑자기 속이 확 뒤집히는 거에요, 선생님. 그건 참을 수 없는 살의였어요. 제가 느꼈던 감정, 그걸 분노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 존재가 지옥에서 올라온 왕이라면, 제 기분은 지옥에서부터 올라온 듯한 극한의 불쾌함이었어요. 저는 책상 옆에 있는 커터칼을 들고 그 존재를 내리찍었어요. 그러나 박히기도 전에 날이 부러져서, 커터 날이 튀어서 팔에 스치는 바람에 제 교복 소매만 찢어졌죠. 그 가죽은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어요. 아니, 커터 날으로 누군가를 해치는 것 자체가 무리였던가요. 어찌되었든, 눈 앞에 있는 저것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어요. 바닥에 굴러다니던 조각도를 들고 찍어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요. 그래요, 선생님. 사실은 민혁이가 조형물을 향해 뛰어들기 전에 제가 그걸 막았어야 했어요. 저라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 녀석은 애초부터 나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죠.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서 지켜 봐 왔는데, 내가 얼마나 많이 도와주고, 보살펴줬는데 말이에요. 그 녀석이 조형물에 제 생명을 바치는 순간까지도 함께였는데! 제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민혁이는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버렸잖아요. 그 빌어먹을 녀석이 말이에요…….
지옥에서 올라온 왕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녀석은 미술실을 천천히 걸어나갔어요. 제 존재 따위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에요. 심지어 자신을 해치려고 했던 절 공격하지도 않았어요. 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가슴을 대못으로 찍는 것 같은 아픔이 달려서, 눈물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파서, 누군가가 심장을 잡아뜯는 것 같은 기분이 돼서,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게 절 흘끗 돌아보더라고요. 제가 넋을 놓았던 탓에 잘못 본 건지 모르겠지만, 그 눈빛이 왠지 그 존재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많이 슬퍼 보였어요. 그랬더니 그 눈빛을 보게 된 순간 제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던 그 격한 감정이, 물에 씻은 듯이 사라져버린 거에요. 정말 신기하죠. 저도 이해가 안 돼요. 그건, 그건요 선생님, 마치 카일 선생님이 첫날 죽은 동물을 들고 온 수업에 화를 내던 아이들이 조용해진 거랑 굉장히 비슷했어요. 마법이라는 건 원래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힘일까요, 선생님. 그 녀석은 천천히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어요. 학교를 빠져나갔죠. 시간이 늦어서 길에는 사람이 없었어요. 한참을 따라가다가, 녀석이 어떤 골목으로 사라졌어요. 그 녀석이 걸음이 빨랐던 탓에 쫓아가기도 벅차서, 체력이 딸렸던 저는 멀리서 녀석이 사라지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죠. 그 녀석은 말 그대로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것만 같았어요.
그 뒤로는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어요. 민혁이가 어디 갔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제가 혹시나 싶어 다른 아이들이나 선생님들께 물어봐도, 반응은 다들 시큰둥했어요. 그냥 어디 여행 가지 않았어, 라던가, 학교 그만두고 검정고시 치러 갔대, 라던가, 심지어는 사람이 사라지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라며 대충 넘기거나. 민혁이네 부모님도 어디 좀 갔다 오나 보지, 하고 정말 대수롭지 않은 듯 넘기더라고요. 사실 저는 녀석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무척 궁금했어요. 여기저기 알아보러 다녔지만, 정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거에요. 카일 선생님에게 물어봤지만, 아마 이 근처에 있을 거라는 확실치 않은 대답뿐이었죠. 그래도 결국 그 선생님이 지옥에서 올라온 왕의 생명을 제 손으로 끊게 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그 분이 말씀하셨던 대로, 녀석은 이 마을 근처 어딘가에 있었나 봐요. 어느 날 동네에서 느닷없이 끔찍한 살해 사건이 일어났거든요. 범인은 날카로운 이빨으로 사지를 물어뜯어 죽였대요. 경찰은 키우던 애완동물에 물려 사망한 거라는 판단을 내렸어요. 그 애완동물이라는 게 뭐였냐면, 골든 햄스터 두 마리였어요. 최근에 새끼를 낳은 탓에 스트레스를 받아 몹시 민감해져 있었다고 하네요. 확실한 건, 그 피해자는 작년 여름즈음에 민혁이의 그림을 보고 어디 게임에 나오는 생물이랑 비슷하게 생겼다며 괜히 물고 늘어지던 무리 중 한 명이었다는 거죠.
카일 선생님은 짓궂게도, 당신이 목숨을 거둔 이의 시체를 제게 넘겼어요. 어차피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데에다,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게 저밖에 없으니 알아서 처분하라나요. 그래서 저는 그 존재의 모든 걸 먹어치우기로 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뼈도, 이빨도, 발톱도, 아버지 작업장의 공업용 분쇄기에 넣고 전부 부수어 가루로 만들어서 목 뒤로 삼켰어요. 그 단단한 가죽도 전부 조각 내서 천천히 씹어먹었고요. 그 녀석이 얼마나 컸던지, 그걸 먹는 데만 해도 거의 보름이 넘는 시간이 걸렸어요. 그래도, 모든 걸 삼켜버리고 나니까 속이 아주 후련해지더라고요. 녀석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이제는 제 자신이 되었는걸요. 그리고 남은 찌꺼기는 바람이 되고, 강이 되고, 흙이 되고, 꽃을 피우겠죠. 물론 끔찍한 일이에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죠. 그래도 선생님, 사실 전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요. 제 생에 이런 꿈만 같은, 엄청난 일을 겪게 될 줄이야. 그것도, 길지는 않지만 여태까지 살아온 제 모든 인생에 걸쳐서 말이에요. 전 이제 이 내용으로 소설을 쓸 거에요. 분명히, 예전에 민혁이가 노트에 그리던 생물을 대상으로 ���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멋진 글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 날씨가 참 맑죠, 선생님. 막 봄이 되려고 하는 흙 냄새, 나른한 햇빛 냄새. 겨우내 버틴 나무 냄새, 바람 냄새. 세상이 마음 아플 정도로 사랑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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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노랑 조이가 함뜨는 얘기 1
그 일을 처음 눈치 챈 건 꽤 오래 전 일이었다. 합류해 이동하며 야영하던 날,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해 뒤척이던 때 뒤에서 들린 부스럭거리는 소리. 귀를 기울이던 조이는 피식, 하고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손이 옷가지에 부딪히는 소리, 가쁜 숨. 그게 누구의 것인지도 명확했다. 엘레젠 족 남자아이는 혈기왕성하구나. 조이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천재 소년이니 뭐니 해도 육욕에는 이기지 못했다는 걸까. 영웅님이 있는 곳에서 감히 자위행위 같은 걸 하다니 괘씸한걸. 금방이라도 번쩍 눈을 뜨고 장난스레 무슨 짓이냐 밀어붙이고 싶었지만, 오늘은 가만 참아주기로 했다. 조이는 눈을 감고 조용히 자는 척 했다.
그리고 이내 미숙한 손길이 조이의 짧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어라, 혹시 내가 네 딸감이야? 조이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 분투했다. 아, 세상에. 세상에 귀여워라. 조이는 숨을 죽였다. 이 겁쟁이 엘레젠 소년이 과연 어디까지 용기를 낼 수 있을까 하고 속으로 나름 응원하면서.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턱선을 훑고, 목과 쇄골을 지나 가슴께에서 멈췄다. 작게 솟아오른 가슴을 살짝 눌렀다 떼어 보는 손은 떨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응, 볼륨이 없어서 미안하네. 아마 옷 위로는 별 감촉도 없을 만큼 빈약한 가슴일테지만, 손은 그 언저리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마음껏 만질 수 있는 성인 여성의 가슴이다. 크기를 가릴 때가 아닌 것이다. 그렇지, 매력적이지 않을 리가 없지.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충분한 자극이었을까, 잠시 숨을 참는 듯한 소리와 함께 손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끝까지 모른 척 해 주려고 했지만, 역시 장난기가 앞선다. 조이는 눈을 뜨고 몸을 돌려 알피노를 바라보았다.
안녕?
동그래진 눈과 웃음기 어린 가늘게 뜬 눈이 마주쳤다. 알피노는 앗, 허억, 하고 급히 숨을 들이마시며 뒤로 물러났다. 조이가 결국 참지 못하고 키들키들 웃었다. 입술을 깨물고 어쩔 줄 모르는 어린 엘레젠 소년을 앞에 두고, 그녀는 이 녀석을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동경하는 영웅을 상대로 그런 짓 하고 기분 좋았어? 짐짓 화를 내는 척 해 볼까. 더 만져볼래? 하고 능글맞게 들이대 볼까, 아니면 그대로 밀어붙여 한 발 더 뽑아줄까.
미안...하네.
알피노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못 볼 꼴을 보이고 말았어. 그래? 기왕이면 좀 더 만져도 괜찮은데.
조이는 연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알피노가 붕붕 고개를 저었다.
볼 낯이 없군. 정말이지 미안하네. 이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깨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한 거야? 모르겠어. 아무래도 정신이 나갔던 모양일세. 아아...
조이는 옷을 걷어올렸다. 윤기 도는 갈색 피부가 달빛을 받아 파르스름하게 빛났다. 작긴 하지만 확실한 여성의 가슴이다. 그 중앙에는 연한 고동빛의 유두가 부풀어오른 채 자리하고 있다. 나는 좀 더 만져도 괜찮아. 조이가 씨익 웃었다. 딱할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가슴을 감쌌다. 그러고 보면 최근 꽤 오랜 시간 본의 아닌 금욕 상태네. 몸이 민감해져있는 건 그녀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애송이 상대로 진지하게 몸이 반응하다니,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알피노는 조이의 가슴을 몇 번 주물러보고, 이내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유두를 문지른다. 조이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인적이 없긴 하지만 소리를 냈다간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알리제를 깨우고 말 것이다. 이건 둘 사이의 비밀로 해 두는 게 좋겠지, 괜한 참관객을 늘리고 싶지 않다. 조이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서투른 주제에 쓸데없이 집요한 손놀림은 잔인할 만큼 아쉬웠다. 좀 더, 조금만 더 기분좋아지고 싶어. 그러나 소년의 용기는 그게 전부였던 모양이었다.
그럼 여기까지만... 그래?
알피노의 눈에 순간 스치는 아쉬움을 조이는 알아챘다. 이미 조이의 비부는 속옷에 자국이 남을 만큼 흠뻑 젖어 있었다. 연인에게 흠뻑 빠진 십대 소녀 같아. 그녀는 자조했지만 곧 받아들였다. 그래, 상황이 이런 걸 어쩔 수 없지. 그녀는 바지 벨트의 버클을 풀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그것만으로 알피노를 흥분시키기에는 충분했는지, 나이와 체격에 비해 약간 과한가 싶을 정도로 큰 페니스가 보란 듯 발기해 있다. 방금 사정한 주제에 건강하네... 조이는 제 입술을 핥았다. 굳이 친밀감을 느끼는 상대가 아니더라도 흥분될 정도의 크기와 모양이다. 평소 같았으면 입에 먼저 넣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는 없었다. 조이는 주저없이 알피노의 어깨를 잡아 밀어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질척해진 입구에 귀두 끝부분을 비빈 것만으로, 소년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나온다. 용돈벌이를 할 때라면 피임기구를 썼겠지만, 어차피 몇 년 전 일로 아이는 가질 수 없는 몸이다. 이 아이라면 내가 어떻게 행동하든지간에 나를 함부로 다루진 않을 테니까. 입구 부분에서 비비고 있던 것을 한 번에 꾸욱, 끝까지 밀어넣는다. 알피노가 참지 못하고 아아, 하는 쥐어짜는 듯한 신음을 냈다. 조이는 손으로 알피노의 입을 막았다. 이 정도로 안에 꽉 차는 느낌은 간만이다. 이거라면 조금 허리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금세 기분이 좋아지고 만다. 위험해, 위험해. 조이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안쪽을 꽉 조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몰아치는 쾌감에 알피노는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다행이라면 지금이 두 번째라는 정도일까, 아마 처음이라면 삽입하고 몇 번 움직이지도 못한 채 사정했을지도 모른다. 알피노의 머릿속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큰일이다. 지금 내가 뭘 하는 짓이람. 눈 앞에서 동경하는 영웅은 허리를 흔들고 있고, 정작 자신은 아랫도리에 피가 몰려 머리가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기분 좋아, 기분 좋아. 그저 저릿한 쾌감에 몸을 맡기고 밭은 숨을 내뱉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쩌면 지금은 그걸로 충분할지도 몰랐다. 입을 틀어막고 있는 조이의 손조차도 쾌락을 더할 뿐이었다. 질 내부에 있는 오돌토돌한 돌기가 하나하나 확실한 형태를 띠고 허리의 움직임에 따라 쓸려내려가고, 쓸려올라온다. 쾌감을 느낄 때마다 한 번씩 툭, 툭 꺾이듯 조여온다. 수백 개의 촉수에 범해지는 것 같다고, 멍한 머리로 알피노는 생각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게 민망할 정도로, 절정에 이르는 속도는 빨랐다. 알피노는 조이의 어깨를 꽉 잡고 끌어당겼다. 잠깐만, 조금만 멈춰 주게, 잠깐만... 그 요청에 조이가 응할 리 없었다. 조이는 완벽히 맹수의 눈을 하고 있다. 쥐어짜주겠어, 있는 힘껏 쥐어짜주겠어. 그 마음만으로 가득해서, 허리가 움직이는 속도가 더욱 빨라져 간다. 이윽고 알피노가 히끅, 힉, 하는 소리와 함께 온 몸을 파르르 떤다. 그제사 허리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정액을 닦아낼 만한 게 없다... 수건도 무엇도 없다. 근처에는 멱을 감을 만한 곳도 없다. 조이에게 당면한 문제였다. 물론 닦아내지 않고 그의 정액으로 속옷을 더럽히는 것도 꽤 에로틱하긴 하다. 보지에 네 정액을 머금은 어둠의 전사가 저기서 너와 함께 싸우고 있다고? 아하하, 어린 소년에게는 자극이 너무 심하려나. 조이가 딴 생각을 하고 있자니, 알피노가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얼굴을 가져다 댄다.
잠깐만, 네 정액이라고. 알고 있네. 역겹잖아. 견딜 만해. 왜 그렇게까지... 그렇지만 나만 기분좋아지는 것도 반칙이지 않나.
알피노는 조이의 음부를, 전부 닦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꼼꼼히 핥는다. 질 안쪽까지 혀를 넣어, 혀끝이 질구 가까이의 오톨도톨한 부분을 문지른다. 입술로 클리토리스를 머금고 가볍게 빨아당기고, 혀 전체로 아래부터 위까지 주욱 훑어올린다. 조이의 엉덩이가 조금씩 들썩였다. 잠깐, 이제 다 핥았으니까, 그만. 혀의 움직임은 멈출 줄 몰랐다. 혀끝이 클리를 튕기듯 톡톡 두드린다. 안 돼, 싫어, 안 돼... 이런 어린애를 상대로 진짜로 느껴버리는 건 이상하잖��. 조이는 고개를 저었지만, 되려 허벅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건 착각은 아니었으리라. 그의 테크닉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으련만, 절정까지 다다르는 느낌이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다. 아랫배가 찌르르하고, 요의 비슷한 것이 훅 치고 올라온다. 주륵, 하고 투명한 액이 흘러내리고 이내 있는 힘껏 뿜어져나왔다. 땅바닥이 젖었다. 알피노의 얼굴도 흠뻑 젖고 말았다. 아, 이젠 닦아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잖아. 심지어 그의 페니스는 다시 발기해 있다.
면목없지만...
알피노가 시선을 살짝 피하는 듯 하다, 조이를 조심스레 바라본다.
내일 딱히 힘든 전투가 예정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시간도 늦고... ...한 번만 응석부리게 해 주게. 오늘만이야.
어쩔 수 없지. 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부하기에는 아직도 그녀의 몸은 달아올라 있었다. 역시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몸이 민감해져 있어. 그의 페니스가 다시 한 번 천천히, 누워 있는 조이의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자궁 경부를 압박하는 아픔이 쾌감이 되어 머리를 어지럽혔다. 어색한 허리놀림조차도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조이는 그 크기에 압도당한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것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한 번의 절정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음부를 자극해왔다. 기분좋다는 말조차도 아쉬울 정도의 쾌락. 눈 앞이 핑 돌았다. 대체 어디에 그런 수분이 저장되어 있었는지, 애액인지 뭔지 모를 액체가 엉덩이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조이의 다리가 알피노의 허리를 감았다.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절대 노린 것은 아니겠지만,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조이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저 몸을 맡기고, 그를 끌어당겨 안는다. 입을 맞추고 혀를 섞고, 마주보고 민망한 듯 웃으며. 그리고 한 번 더, 알피노는 그녀의 안쪽을 채웠다.
미안하네. 네가 그걸 왜 사과해, 바보 같아. 역시 오늘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어. 괜찮아, 기분 좋았어. 아직 엉망진창이라... 당연한 거야, 네가 테크니션이라면 오히려 이상하지. 그렇게 되나, 음. 아하하.
그리고 몇 미터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보세요, 내가 그 난리통에 잠을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등을 돌리고 누운 알리제는 입이 댓발 나와 있었다. 내가 더 기분좋게 해 줄 수 있는데. 조이가 자신을 봐줄지 아닐지도 확실치 않지만(물론 쾌락을 추구하는 조이라면 분명 응해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긴 했다), 절대로 알피노에게 지지 않겠다는 이상한 승부욕이 불탔다. 두고 봐, 하고 괜히 뾰로통해진 알리제는 으음, 하고 뒤척이는 척 자세를 바꾸었다. 실눈을 뜨고 두 사람이 흠칫하고 놀라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씨익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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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냥이랑 조이가 떡치는 얘기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 조이는 그 말을 꽤 신뢰하는 편이었다. 대표적으로 예를 들자면 역시 빛의 전사로서 이 세상의 다양한 면을 마주대했던 경험들일까. 수많은 일들을 겪고 그 스스로도 최근에는 보는 눈이라던가 통찰력이 늘어났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조이의 ‘본업(혹은 취미)’에도 그것은 분명히 영향을 끼치는 부분일 터였다.
용시전쟁의 막을 내리고 미드가르드오름의 봉인을 부순 이후로, 조이는 여태껏 자신이 빛의 전사로서 얻어온 삶의 지혜와 선택받은 자로서의 초월하는 힘을 백 퍼센트, 아니 그 이상으로 잘 활용하고 있었다. 능력을 이용해 귀찮거나 위험하지 않을 법한 사람을 백 퍼센트 확률로 골라내서, 꼬시고, 하룻밤 혹은 짧은 시간을 보내기. 그는 그다지 일정이 없는 날에는 서너 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의 주지육림이다. 그래, 영웅은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조이는 만족스러웠다.
연중 반절이 넘는 날 동안 내리 눈이 흩날리는 폐쇄된 도시. 약육강식의 신분사회에 온순한 가축처럼 길들여지며 자극에 굶주린 인간들은 겉으로는 으레 보수적인 척 하면서도 알고 보면 꽤 흥미로운 취향을 가진 이들이 많았고, 조이는 ‘힘’을 사용해 그런 취미들을 몰래 들여다보는 몹시 무례한 행위를 어느 누구보다 사랑했다(물론 그 모든 것은 미드가르드오름이 지켜보고 있었으나, 그는 드래곤의 한계조차 뛰어넘은 듯한 미진한 인간의 남사스러운 취미에는 애써 눈을 감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취향에 하나하나 흥미진진해하며 직접 응해주는 것을 즐겼고, 고작 몇 주도 지나지 않아 조이의 머릿속에는 포르탕 백작의 수기와는 다른 방향의, 조금 자극적인 내용의 창천록을 집필할 만한 정보가 모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날의 조이는 이전에 한 번 눈인사정도는 한 적이 있었을 신전 기사단 소속 용기사단 하급 기사로부터 [탁 트인 설원에서 햇빛을 받으며 마물을 무찌른 직후의 영웅과 섹스해보고 싶다]는 기상천외한 부탁을 받은 참이었다. 그는 건장하지만 숫기 없어 보이는 신참 병사의 조심스러운 부탁을 재미있어하며 수락했고, 맑은 겨울의 새하얀 하늘 아래에서 커르다스 서부고지의 한구석에서 수많은 마물의 시체와 함께 피를 뒤집어쓴 채, 얼음 벽에 기대어 스커트를 막 걷어올리고, 이미 기대에 가득 차 잔뜩 젖어 움찔대는 질구에 그대로 남자의 페니스를 받아들여 한 차례 온몸을 찌르르하게 스치고 지나간 쾌감에 몸을 맡긴 상태였다. 대단하다 싶을 만큼 물건은 실한데, 역시 테크닉은 조금 부족하려나, 조이는 조금 아쉬워하며 한 쪽 다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아 걸쳤다.
“오늘은 시간 많으니까, 천천히 상대해줄게…”
그리고 사람 키 하나 정도 더 높은 위치에서부터, 불쑥 말이 걸려 왔다.
“오… 시간이 많아요, 빛의 전사 나으리?”
“어후 씨발… 아, 뭐야, 에스티니앙… 놀랐잖아.”
“간만에 잠깐 얼굴이나 비출까 하다 웬 마물 시체가 산더미잖냐. 무슨 구경이나 났나 해서 와 봤더니 진짜 좋은 구경거리가 있을 줄은 몰랐지.”
“아니 이거 순 미친 놈 아니야! 자리 펴놓고 자위라도 하게?”
“그럴 리가. 근데, 나야 네 악취미엔 별로 신경 안 쓰니까 상관없지만… 저 쪽은 좀 신경쓰고 있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던 젊은 기사의 얼굴은, 어느 새 핏기가 싹 가셔 새하얗게 되어 있었다. 삽입한 채로 빼지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걸 보니 피식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지금은 아무리 에스티니앙이 푸른 용기사를 그만두었다 해도 어엿하게 전 직속상관 격인 셈이다.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지.
“그러게, 신경쓰고 있네, 너를.”
“그으럼, 슬슬 빠져 줘?”
“같이 낄 생각은 없구?”
“사양할래. 같이 여행할 때야 경황이 없으니 장소 안 가리고 했지만,굳이 할 거라면 눈밭보다야 여관이 낫네.”
“늙었어, 늙었어.”
“야, 너도 서른 넘어 봐, 이 년아… 그럼 이만 간다, 아는 집 포토푀가 먹고싶어서 잠깐 들른 거니까 조용히 하고 어디다 소문내지 말기. 너도 임마, 좋은 시간 보내고.”
“화, 황공무지로소이다……...”
“어쩌면 좋아, 얘 쫄아서 이상한 말 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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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처음 말했던 만큼 천천히 하루 종일 이어서 즐길 수 있었냐 하면, 사실 전혀 아니었다. 까마득히 높고 어려운 위치일 불청객이 불쑥 다녀간 만큼, 뭘 하려 해도 더 이어서 하기도 영 민망하기야 했을 것이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남자는 멋쩍어하며 그,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라고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며 주섬주섬 바지 앞섶을 챙겨올렸다. 조이는 영 불만이었다. 제 멋대로 나타나서 남의 흥을 다 깨 놓은 에스티니앙에게 단단히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셈이었다. 좋아, 있는 대로 쥐어 짜 주지. 여관으로 들어온 조이에게, 주점의 여급은 에스티니앙의 방 호수를 특별히 귀뜸해 주었다.
“룸 서비스 왔습니다.”
“응? 시킨 적 없는데…아 정말, 조이, 너 임마.”
“하루 묵고 갈 거야?”
“그래.”
“아까 굳이 여관이 낫다고 한 건 여기 있을 거라는 얘기지? 나랑 그만큼 섹스하고 싶었구나?”
“온 김에 잊힌 기사 주점 아침식사로 나오는 특제 미트 파이도 먹고 갈까 했을 뿐이거든.”
“잊힌 기사 주점 단골손님 특제 크림파이는 관심 없고?”
“방금 한 말 그대로 돌려줘야겠네. 나랑 그만큼 섹스하고 싶었어?”
“거야, 좋은 자지 달고 잘 다루기까지 하는 사람을 내가 마다할 리가.”
“내가 좀 뭐든 길쭉하게 생긴 건 잘 다루지.”
“하하, 정말이야. 아마 이슈가르드에서 손에 꼽을 정도일 걸.”
“대체 몇 명이랑 잔 거냐?”
“세는 거 잊어버렸어.”
“적당히 해 둬, 눈치 보일라. 너 말고 지금 저 윗 자리 앉아 있는 네 ‘맹우’가.”
“제멋대로 구는 건 그 쪽도 마찬가지 아니야, 푸른 용기사 양반?”
“그렇게 말하면 나야 할 말은 없다만… 아무래도, 그렇잖아? 이슈가르드는 아직 귀족 아가씨가 코르셋을 벗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 과반수니까.”
“물론 우스티엔 같은 사람도 있지만 말이지. 이슈가르드에서 성별은 상관없는 것 아니었어?”
“글쎄… 단순히 성별 얘기라면 나는 좀 상관 있을지도.”
“질투해?”
“지랄 마.”
“내가 코르셋을 하길 원해?”
“그건 더 최악이군.”
에스티니앙은 조이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그 까맣고 탄력있는 피부를 손끝으로 쓰다듬어내린다. 다른 동작은 더 필요없다는 듯, 그는 물 흐르듯 끊김 없는, 묘하게 힘이 들어간 듯한 동작으로 조이를 침대에 눕히고 하의를 끌어내렸다. 그의 뼈마디가 굵고 긴, 잔흉터로 가득한 손가락들이 비부를 스쳤다. 조합이 좋은 사람과의 섹스는 하루 세 번도 아쉬운 법. 조이의 발정한 하반신이 무심코 움직여 그의 손가락을 좀 더 기분 좋은 곳에 비비려고 애쓴다. 이 상황만으로도 애액이 엉덩이골을 타고 내려올 만큼 흘러넘친다. 에스티니앙의 손가락이 조이의 질 주름을 헤집고 깊이 들어왔다.
“그냥, 이 구멍이 없으면 내가 좀 섭섭할 것 같어.”
“그 말 덕분에 너 만나고 난 이래로 나 방금 최고로 꼴렸어.”
그의 손이 자궁구 근처의 민감한 곳을 힘주어 누르고 문질렀다. 조이는 정신을 놓을 것 같아져, 에스티니앙의 팔을 붙든 채 몇 번이고 신음 섞인 숨을 토했다. 손가락으로 한 번 갈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질 내벽의 조임으로 눈치를 챈 건지, 그는 일부러 완전히 가지 못하게 손가락을 뺀다. 조이의 안타까운 듯한 탄성을 들은 건지, 듣고도 무시할 셈인지, 그는 있는대로 발기해 껍질 밖으로 고개를 내민 클리토리스를 애액에 젖은 손가락 끝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비벼 왔다. 에스티니앙의 팔을 붙잡은 조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깐, 위험...아, 안 돼, 요의가...”
“괜찮아, 맘대로 해.”
“안 괜찮...아, 아- 안 된다니까… 아…!”
온 몸의 신경을 그대로 부숴버릴 것 같은 절정과 함께 시트 위가 흥건해졌다. 그럼에도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등뼈가 곧추 섰다. 목이 뒤로 꺾일 것 같다. 잠깐, 간 직후는- 그래도, 그는 들은 척도 않는다. 극심할 정도의 자극에 다리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쾌락을 쫓는 마음이 지금의 가장 기분 좋은 손놀림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몸의 움직임을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다. 조이는 그저 허리를 간헐적으로 움찔댈 뿐이었다. 분명 엉망진창인 표정 하고 있을 텐데...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이불에 얼굴을 묻자 에스티니앙은 이불을 치워 침대 밑으로 던져 버렸다.
“반칙… 반칙이야, 이거어...”
“먼저 멋대로 절정한 쪽이 반칙이지, 벌이야.”
간 직후까지 자극을 계속해 찌덕해진 구멍에 에스티니앙이 그대로 삽입해 왔다. 끝부분이 가장 깊은 곳에 닿자 그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남아 있는 절정의 여운 덕분에 위험할 정도로 오톨도톨한 질주름이 계속 움찔거리며 그의 페니스를 꼭꼭 물어대며 조여 왔다. 이거, 내가 움직일 필요 없는 거 아냐? 그가 피식 웃었다. 싫어, 움직여 줘… 고양잇과 생물과도 닮은 특유의 눈동자가, 욕망에 가득차 살짝 초점이 풀린 채 흐릿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씩 천천히 움직이며 조이의 기분 좋은 곳을 찾아 찔렀다. 어느 순간 확 하고 질 전체가 수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 번 더 절정인 모양이었다. 이거, 엄청 조여서 기분 좋은데. 에스티니앙은 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방금 한 번 더 갔지? 자기 멋대로 몇 번이나 가버리고, 허락도 없이.”
“그거야 네가 기분 좋은 곳 계속 자극하니까… 당연하잖아...”
“발정난 암코양이도 이 정도는 아닐 걸, 이런 야한 구멍 벌름거리면서 자지 넣어달라고, 움직여달라고 애원하기나 하고. 자지 넣고 움직인 걸로 더 흥분해서 시트가 젖을 정도로 흘러서, 이거 봐, 찌걱거리는 소리 들리지?”
“그러니까 그게 누구 때문...”
“흐응, 뭐라고 해도 나는 꽤 좋아해, 이 음란한 보지.”
“하히이잇...”
“이런 말 들으면서 흥분해서 또 이만큼 조여대지. 변태야.”
몇 번이나 갔는지 세기도 힘들 만큼 수많은 절정이 치고 올라와, 조이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쾌감에 몸을 맡기고, 허리에 다리를 감은 채 온 몸의 근육을 몇 번이고 경직시키며 떨었다. 표정이라던가, 제스쳐라던가,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놀리듯 페니스를 살짝 빼려는 시늉만으로도, 조이는 아쉬워하며 허리를 움직여 몸을 붙여 왔다. 사실 에스티니앙도 그렇게 여유롭기만 하지는 않았다. 제대로 발달된 질육이 페니스를 쥐어짜려는 듯 휘감아 와, 말도 안 될 만큼 빠른 속도로 사정감이 치고 올라왔다. 어후, 하고 그가 숨을 토했다.
“이래서야, 어지간한 남자로는 만족 못 하는 거 아니야?”
“평소에는 평범하게 하고 있거든...? 잘난 척 하긴...”
“이 정도로 조여 오는 데에는 도리 없을 텐데, 지금 당장이라도 싸려면 쌀 것 같다고, 나는.”
“헤, 조루 새끼...”
“진짜? 진짜 그렇게 생각해? 지금 바로 그만둬도 되는데, 나는?”
“농담인 게 당연하잖아, 싫어!”
“하여간, 너랑 궁합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 엄청 조여, 좋아.”
흥분할 대로 흥분한 조이의 질 안쪽이, 또 한 번 새로운 감각으로 변해 갔다. 꽉 물었다, 라고 할 만큼 생생하게 조여오던 감각이 이윽고 마치 감싸안듯 부드럽게 머금은 채로 꿀렁댔다. 착상을 기대하기라도 하는 듯, 자궁구의 위치가 아래로 밀려내려와 귀두 언저리에 닿아 문질러졌다. 마치 질 전체가 정액을 받아내기 위한 자세를 취한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아랫도리가 저릿해질 정도로 흥분되는 일이었다. 조이가 아무리 잘 느끼는 체질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까지 다다르는 일은 두 사람이 섹스할 때도 드문 일이었기에, 에스티니앙은 새삼 피식 웃었다.
“완전 참고 있었나 보네. 꽤 욕구불만이었지?”
“아니거든? 말했잖아, 다른 사람들이랑 잘 하고 있었다니까.”
“몸이 더 솔직하잖아, 이거 봐, 툭툭 걸린다고. 이렇게, 이렇게.”
“흐히익…!잠깐, 거기 찌르면...”
“응? 으응-? 찌르면 뭐?”
“또, 가, 가버리니까, 그만… 아하아…!”
“좋아?”
“좋아...”
“뭐가 좋아?”
“자지이…”
“헤에, 누구 자지가 그렇게 좋아?”
“네 거…”
“이름 제대로 불러줘. 누구 자지가 그렇게 마음에 든다구?”
“에스티니앙 자지… 좋아…”
“아깐 조루라는 둥 뭐라는 둥 열심히 떠들었으면서, 자궁구에 비벼져서 내 자지 좋다고 헐떡거리기나 하는 변태 년 주제에. 그래서 지금 기분 어때?”
“분하다구, 젠장...이런 거 인정하고 싶지 않단 말야...”
“뭐 좋잖냐, 아무래도. 나도 이런 음란한 보지는 얼마든지 환영이다… 아, 슬슬. 안에 해도 괜찮아?”
“언제나처럼, 좋을 대로.”
그에게 있어 오늘의 사정감은 평소보다 유난했다. 혼자 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쾌감. 아니, 이 정도라면 평소에 섹스할 때보다도 더 강하게 쥐어짜이는 느낌이다. 아랫배에서부터 확 아플 정도로 잡아뽑히듯, 정액이 꿀럭대며 뿜어져나왔다. 그다지 느끼는 기색 없이 꽤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목 아래에서부터 아으, 하고 저절로 소리가 비어져나왔다. 이쯤 되면 뇌까지 뽑혀나오는 느낌이야. 에스티니앙은 반쯤 쓰러지듯 조이의 옆에 몸을 눕혔다.
간만에 정말 좋은 섹스를 했다… 라고, 조이는 생각했다. 분명 어딘가 후련해진 느낌이었다. 하긴 에스티니앙은 조이에게 있어 전투의 상성도, 몸의 궁합도, 대화의 호흡도 좋은 상대이긴 했다. 뭐, 좋은 친구다. 다만 그걸 인정하자니 좀 민망하고 짜증이 날 뿐이지. 떠올리고 나니 괜히 심술이 나 조이가 에스티니앙의 옆구리를 폭폭 찌르자, 그는 아, 좀- 하고 돌아 누웠다. 조이가 장난기 어린 얼굴로 히쭉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네, 다음에 언제 한 번 보려나. 그 땐 나도 이슈가르드에는 없을 것 같네.”
“운 좋으면 또 보겠지. 그래서…”
“그래서?”
장난을 받아줄 생각 따위는 없다는 듯이, 에스티니앙이 조이의 팔목을 쥐어잡는다. 단순한 완력 차이라면, 분명 이기기 힘들다. 조이는 저항을 포기하고 그에게 눈을 흘겼다. 무슨 소릴 할 셈이야, 이 녀석.
“오늘은 한동안 아무 생각도 안 들 만큼 쥐어짤 거야.”
“뭐? 야, 이 인간, 지치지도 않냐...!”
“아까 늙었다는 소리 했던 데에 복수다. 어때, 내일 아침까지 밤 새도 나는 체력적으로 절대 여유라고?”
“하히익...”
기대 반 절망 반의 숨 삼키는 소리와 함께, 그제사 깨달은, 멍청하게도 휑하니 열어 둔 객실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에 커튼이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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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자동안이하생략...
그다지 성욕이 동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바로 전날 섹스했던 파트너가 꽤 괜찮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나이는 많았지만 노련했다. 정말 간만에 상대에게 조르고 매달리고 헐떡이며 엉겨붙었다. 어젯밤엔 드물게 깊게 잠이 들었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기분이 좋은 섹스라는 건, 그것만으로도 며칠동안 미뤄놓았던 일을 하게 될 만큼, 제법 기운 차려서 살 수 있을 정도로 영혼의 빈곤함을 채우는 경험이었다.
그랬기에, 사실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조금 꺼려지기도 했다. 아니, 사실 좀 귀찮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었다. 전날의 섹스를 며칠 정도 되새기면서 어렴풋한 뒷맛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이미 잡아놓은 약속을 취소하는 것도 조금 그런가-, 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심지어 감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드물게 먼저 말을 걸어 본 상대이기까지 했다.
까짓것 에너지 좀 쓴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만나 주지 뭐.
상대는 네 살이나 어린 애였고, 근처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지나치게 철이 없거나 한 건 아닐까 조금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두 사람은 식사를 했고, 술은 없었다. 처음 보는 상대이건만 이야기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대화하는 양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그리고 언제나처럼, 이야기가 은근슬쩍 불건전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여자는 그것이 자신의 타고난(별 쓸모없는)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팔 아래 부분을 만지면 말랑말랑해서 가슴이랑 비슷한 느낌이래.”
“그건 처음 듣는 얘긴데, 신기하네.”
“가슴 만져볼래?”
“뭐?...아니, 나 그런 유혹에 약하니까…”
“꼬시고 있는 거 맞는데, 지금.”
“그...그럼 사양 않고...”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고가던 어느 시점, 남자애로부터 [나, 엄청 민감해서 여자애처럼 반응해버리니까... 당해버리기 전에 필사적으로 밀어붙이게 돼]라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쯤에는, [역시 한 판 뜰 수밖에 없잖아!]라고, 의무감에마저 가까운 욕망이 끓었다. 이 녀석, 맛있어 보인다…!
그 뒤의 과정은 순조로웠다. 상호간의 동의를 얻는 데에는 정말 몇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런 일이 될 줄 몰랐어…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이런 일이 되도록 노리지 않았더라면 집에 부르지도 않았을 걸… 이라고,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말을 속으로 삼켰다.
옷을 벗으려는 남자를 붙잡고, 등 뒤에서 팔을 뻗어 ���두 근처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순간 그가 몸을 파르르 떨며 신음 섞인 숨소리를 토해냈다. 아, 잠깐, 그, 씻을 테니까…! 가슴께에서 여자의 손이 떨어졌다. 큰일이다. 진짜 재미있을 것 같아. 좋은 사냥감이 걸렸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샤워를 마친 뒤 섹스에 돌입하기까지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여자는 남자를 반쯤 떠밀듯 이불로 밀어붙여 눕혔다. 손바닥을 펴서 목 언저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쓰다듬어내렸다. 남자의 몸의 근육들이 여자의 손이 움직이는 흐름을 따라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세운 채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피부를 스치며 발끝에서부터 다시 여자의 팔이 천천히 올라갔다. 남자는 그 아슬아슬한 자극의 종착역에 한껏 기대에 부풀어 숨을 들이켜 멈추었다. 느긋하게 애를 태우며 느린 속도로 가슴 위에 올라간 손가락을, 여자는 다섯 개를 전부 모아 유두에 대고 문질렀다. 아하아앗, 하고 톤 높은 소리가 방 안에 튀었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튕기고, 문지르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작에 남자의 하반신이 들썩였다. 어떻게든 참아보려던 신음이 하염없이 콧소리가 되어 새어나왔다.
여기 방음 잘 안 될 텐데-, 이웃에 민폐잖아. 여자가 키득키득 웃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여자의 손은 계속해서 장난스럽게 움직였다. 그는 애써 소리를 억눌러 참았지만, 숨 사이로 비집고 새어나오는 신음소리마저 어찌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입을 막고, 그래도 여전히 손의 움직임은 멈출 줄을 몰랐다. 기분 좋아, 이거, 너무 기분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아. 남자가 헐떡이며 작은 소리로 소근거렸다. 더 기분좋은 거 알고 있는데-, 여자는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가슴에 얼굴을 가져다댔다. 말랑한 입술이 유두 위에 가볍게 포개졌다. 하히이잇-! 남자의 몸이 크게 튀어올랐다. 여자는 반쯤 위에 올라탄 자세로 남자를 내리누른 채, 즐거운 듯이 혀를 움직여 유두를 자극했다.
민감하게 반응해 오는 남자의 모습에 아랫도리가 젖을 만큼 흥분하고 있긴 했지만, 여자의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냉정하고 침착했다. 지금보다 더 녹아내려서 귀엽게 하닥이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럴 때일수록 자신의 즐거움을 컨트롤할 줄 알아야 한다. 흥분한 기세로 동작이 빨라지거나 조금이라도 혀에 힘을 주었다가는 이 극상의 분위기가 깨지고 만다는 건, 몇 년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여자는 숙련되어 있었다. 혀를 붓펜이라고 생각하고, 타액으로 글씨를 쓴다는 감각으로 - 유두 위에, 천천히 알파벳을 그린다. 그 뒤에도 시간이 남는다면 한글과 가나 문자.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면 키릴 문자라도 써 주지. 남자의 목이 쉴 때까지 알고 있는 모든 문자를 써 주겠노라고 여자는 다짐했다.
유두를 괴롭혀지는 남자는, 거의 울 지경이었다. 계속해서 핥아지고 만져지면서도, 어째서인지 몸은 자극에 익숙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튀어오르려던 몸이 여자의 몸 아래에 눌려서 부질없이 들썩였다. 목소리가 흐느끼듯 변해 갔다.
여자의 손은 아래로 내려가, 성기 근처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작정하고 약을 올리듯, 손가락이 음모를 고르듯 쓰다듬고 회음부까지도 손끝으로 살살 긁듯이 문지르면서도 단단하게 발기한 그 중심에는 손가락 하나 스치지 않은 채였다. 남자의 다리에 힘이 풀려 가랑이가 저절로 벌어졌다. 쿠퍼액이 방울져 맺혔다. 여전히 여자의 혀는 유두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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