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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zzanji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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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nning A Tale
이 번역은 작년에 옮긴 아래 <고든 브라운은 누구인가>와 한 쌍이다: 그들 경력의 가장 화려한 시절이 도래했을 무렵 작성된 것, 2008년 벌어질 사건들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정반대의 관측만을 암시하는 것, 성장 배경과 초반 경력을 두루 설명한 것,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는 것.
조너선 프리들랜드는 영국 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미국인 독자들을 위해 글을 썼다. 앤디 베켓은 정치인으로서의 피터 만델슨보다 과거 노동당 언론 보도 당직자 모습에 익숙한 정계 내부자의 시선을 가지고 취재하여 영국인 신문 구독자들을 상대로 기사를 썼다.  그래서 <고든 브라운은 누구인가> 와 달리, 이 글은 영국 문화 전반에 익숙하고 영국 정치의 기초적인 구조와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옮겼다. 고유 명사 번역, 단어 선택, 주석에 이러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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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Mandelson in Hartlepool (1996) by Peter Jordan / Alamy Stock Photo
1996년 2월 4일, <인디펜던트> 지 일요판 문화면
  이것도 지어낸 이야기 SPINNING A TALE
 앤디 베켓 ANDY BECKETT
 피터 만델슨의 웰링버러[1] 유세 지원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런던에서 출발한 그의 일등석 기차는 신속하게, 제시간에 꼭 맞춰 그를 역에 내려주었다. 공손한 태도로 적절한 귀띔을 해줄 수 있는 지역당 담당자가 이미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만델슨은 노동당 만찬회에서 연설하기로 되어있는 펍에 조금 앞서 도착했다. 이미 잔뜩 들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당원들이 하나 둘 들어왔고, 그 짧은 사이 극성스런 지역구 의원 후보는 그에게 오렌지주스 한 잔을 권했다.
매끄럽게 면도한 날렵한 턱선을 가진 남자는 불그스레하고 주름진 얼굴을 가진 사람들 사이를 솜씨 있게 누비고 있었다. 만델슨은 이쪽에서 친근한 인사를 건네고 (“헬로 디어,”), 저쪽에서 사려 깊은 척 몸을 구부리고, 계산된 윙크를 하고, 일부러 h를 발음하지 않으면서, 전화 선거운동 일을 하는 젊은 노동당 열성 당원에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고 즐거운 목소리로, “나도 그래요. 나도 처음 당원이 된 게 열 다섯 살이에요.” 하고 말했다. 그는 눈을 돌려 지나치게 새빨간 카펫, 목재 무늬를 그려 넣은 싸구려 탁자, 맥주잔, 재떨이, 연기 사이로 큰 소리로 대화하는 사람들을 간간이 힐끔거렸다. 과거 노동당 공보 총책임자였던 시절이라면 이 시선 끝에 맺힌 것은 분명 메트로폴리탄적 경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 지역당의 사기를 북돋우고 전국적으로 자신의 지명도를 올리기 위해 내각 중진이라는 새로운 공적 형상을 입고 있는 바, 그의 눈빛에는 정치인이라는 직업에 걸맞을 진정한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그는 샐러드도 채소도 아닌 허옇게 뜬 절인 양파 한 점을 곁들인 감자칩과 페이스트리가 올라간 종이 접시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기서 음식을 집어 입에 넣었다.
지지연설이 시작되자 이곳저곳 마디지고 투박한 손들이 박수를 쳤다. 피터 만델슨을 향한 노동자들의 박수 소리는 이곳에서 노동당 내 좌파들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증거 같았다. 남자는 재킷을 벗고 웰링버러에 대해, 그의 하틀풀 지역구에 관해, 또 자신과 함께 와 있는 취재기자들에 대해 농담을 했다.  “저는 스핀 닥터를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은 만나본 적 있나요?” 청중이 폭소를 터뜨렸다. 여기는 2년 전 토니 블레어가 연설했던 곳이다. 이순간, 같은 장소에서 블레어의 최측근 참모가 그보다 전혀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허황된 말이 아닌 냉철한 공문서의 언어들로 그는 현실에 도래할 집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얇은 입술의 남자가 조만간 신노동당의 총선 캠페인을 지휘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보수당 표가 무려 다섯자리 수로 집계되는 지역구인 웰링버러에서, 그는 열정적인 젊은 지역구 후보를 옆에 앉혀 두고 감히 승리에 대해 언약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한마디 한마디 모두 현실적으로 느껴졌고, 더없이 설득력 있게 들렸다. 사람들은 연신 담배를 피워 댔다.
그렇게 만델슨이 성공적인 연설을 마치고 만찬회의 경품 추첨을 진행한 뒤 어디까지나 품위 있게, 그러나 신속하게 출구를 향해 걸어가던 마지막 순간, 그 자리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구석 자리의 박수 소리가 노래로 바뀌었던 것이다. “인민의 깃발은 가장 짙은 붉은색, 수의 되어 우리 순교자의 시신을 덮는 기… ”[2] 노랫소리를 듣자 한쪽에 모여 대화하던 노부인들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말을 멈추고 문가를 돌아보았다.  후보자와 대화 중이었던 만델슨은 눈치채지 못한 듯 노래하는 이들로부터 등을 돌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가세하여 합창은 점점 커졌다. 노래가 후반에 이르자 젖은 눈가와 갈라진 목소리들이 방의 절반을 채웠고, 옛 낭만주의 시구의 절정에 이르러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비겁자들 후퇴하고 반역자들 비웃어도, 우리 적기가 여기 계속 휘날리게 하라…” 만델슨 옆에 있던 시의회 의원 하나가 소리를 애써 덮으려는 듯 불쑥 말했다. “여긴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의 만찬회장과는 다르니까요.” 만델슨은 꼿꼿하게 선 채로, 여전히 등은 돌리고서, 대화에 몰두해 계속 소리를 못 들은 척했다. 그는 재킷을 다시 걸치고, 떠날 채비를 했다. 옷깃에는 자그마한 붉은 장미가 달려 있었다.  십여 년 전 득세하던 사회주의자들을 정당에서 추방하기 위해 자신이 도입했던 상징인 붉은 장미였다. 곱고 창백한 뺨은 조금 더 창백해져 있었다. 그는 끝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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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만델슨은 바로 이런 상황들을 통제하고 싶어했다. 중앙당 당직자들과 웨스트민스터 언론인들을 회유하는 일에 정치 인생을 바친 후, 웰링버러 같은 초겨울의 황량한 미들랜드 소도시들을 상대로 같은 일을 하려는 참이었다. 스스로 이런 새로운 야망을 가리켜 “정치가로서의 입신양명”이라고 표현했고 이는 웅변조로 피력됐다. “모든 종류의 정치적 입장을 아우르는 정책을 내고 벌어지는 작은 일 하나하나에 입장을 변경한다면 단순히 중재자일뿐, 정치인으로서는 쓸모없는 사람일겁니다...”
최근 몇 년 그는 “쓸모없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해왔다. 1990년, 햄스테드 출신인 만델슨은 런던에서 다섯시간 떨어진 북동부 도시 하틀풀의 보잘것없는 평의원이 되기 위해 중앙 정당 본부에 있던 자신의 언론 보도 제국을 포기했다. 작년에는 행정조직 담당 대변인이라는 야당의 한직을 받았다. 요즘은 시간을 쪼개 친구인 소설가 로버트 해리스의 집에 틀어박혀 집권 후 노동당 정부가 무엇을 해야할 지 제안하는 블레어 혁명 The Blair Revolution 이라는 정책서를 쓰고 있다 (책은 이번 달 출간 예정이지만, 원고 마감은 아직이다).  “무척 고된 작업이더군요,” 고상한 목소리였다[3]. “제겐 익숙하지 않아서 큰 절제와 훈련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방식으로 일하는 걸 사랑하게 되었지만요.”
그러나 “쓸모”가 있기는 꽤 어렵다는 것이 드러났다. 권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권력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는 지금까지 최근 노동당 관련 건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어온 인물이다. 이러한 편재, 그리고 이 편재를 획책하고 유지해온 방식이 적을 끌어모았다. 그는 정당 내부의 반대파들과 좌파 기관지[4] 로부터 매우 위험하며 큰 영향력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져왔다. 당내 좌파의 거물 브라이언 굴드는 만델슨이 80년대 중반부터 블레어를 당수로 만들기 위한 “만델슨 프로젝트”를 은밀히 가동 중이었다고 주장했으며, 블레어는 94년 경선 출마 당시 만델슨을 막후 조직책으로 인정한 바 있다 (만델슨은 블레어와 지역구가 이웃하고 있어 하틀풀 후보 선발을 준비할 때 블레어 막내딸의 방에서 하숙했었다). 이것은 “중재자”로서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다. “필요 이상으로 음모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옛 동료의 증언이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익명으로 남는 것을 선호한다). 그 결과 실제 유권자가 아닌 언론인들과 정치인들만이 만델슨을 유명하고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만델슨을 의식하는 것은 정확히 그런 사람들뿐이다. 그렇게 비밀스럽게, 오로지 당수에 의존해 활동함으로써 – 한 동료 의원은 경멸적으로 “맨 앞줄에 앉아 당수 연설문 아래 쓸데없는 것 끄적여놓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 만델슨은 정치인으로서 중대한 신임을 결여하게 되었다.  한 당내 적대자는 신임을 회복하려는 그의 노력을 다음과 같이 폄하한다. “누구든 피터 만델슨의 정책적인 면을 찾아낸다면 아마 그사람이 세계 최초 발견자일겁니다. 그에게 ‘장기’란 보통 다다음 총리질의응답까지의 시간이거든요.”  
만델슨에겐 이런 적들이 수도없이 많다.  블레어를 당수로 만드��� 과정에서 그의 역할을 감춰야 했던 것이 증거다. 블레어를 지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만델슨의 가담을 알고 발길을 돌릴 것을 우려해 그는 “보비”(존 F 케네디의 참모였던 동생 로버트 케네디에게서 따온 별명)라는 암호명 뒤에 숨겨져야만 했다. 만델슨의 어느 하원 동료는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싫어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한번은 제가 극좌도 아니고 블레어 지지자인 한 스코틀랜드 출신 의원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대화 도중 만델슨의 이름이 나오자 그친구가 그러더군요. ‘그 혐오스러운 남자, 또 시작이군! 도대체 여길 언제쯤 관둔다지?’”
물론 이 상황의 대부분은 닐 키녹의 노동당 현대화를 위해 만델슨이 더러운 일을 해야 했던 과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익명으로 언론 요약 보고를 하고 상황을 왜곡해 전달하는, 경멸적 조어로 “스핀닥터”라고 불리는 사람이 하는 일들 말이다. 만델슨 자신과 그의 동료들은, 한때 자기 위안을 얻기 위해 정당의 변혁에 반대했던 사람들의 항의시위라는 벼락을 막아주는 일종의 피뢰침 같은 역할을 만델슨이 담당했을 뿐이며, 때로는 하원 의원들이 당권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으면서 변화의 명분을 얻어갈 수 있도록 기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셰필드 대학의 정치학 교수 데이비드 마퀀드는 이에 동의한다. “같은 일이 해롤드 윌슨에게도 일어났죠. 그의 만델슨은 공보관 제럴드 카우프만이나 ���샤 윌리엄스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최근들어 만델슨은 “이제 더이상 로비 브리핑을 하거나 언론을 상대하지 않을겁니다.” 라고 말했다. 속임수를 쓰던 시절의 역할은 다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델슨이 “저는 오직 정당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라는 말을 했을 때 그의 동료 대부분은 카우프만이나 윌리엄스가 아니라 라스푸틴을, 혹은 스트랫퍼드 백작[5]을 떠올릴 것이다. 정치적 명성의 척도로 여겨지는 캐리커쳐 풍자쇼 스피팅 이미지 Spitting Image에서 만델슨은 동료들처럼 오만하든 바보같든 어쨌든 정치인의 형태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인간조차 아닌, 작은 머리에 달린 독니에서 군침을 흘리면서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최면술사 뱀으로 그려진다. 바로 그래서 “진정한 정치인” 만델슨은 할 일이 많다. 그래서 책을 쓰고, 그래서 웰링버러 만찬회에 간다. 옛날 같으면 연단을 세웠겠지만 이제는 연단에 선다. 평소에 입던 늘씬하게 잘 맞는 회색 수트 대신 유행 지난 헐렁한 녹색 수트를 걸치고, 구깃구깃한 여행가방에 휴대전화와 잘 정리된 서류철들을 터질 듯 쑤셔 넣은 채, 귀한 금요일 밤과 토요일 아침 시간을 남부 미들랜드를 위해 포기한다. 2주 전 그는 먼저 적들에게 점령당해 탈환이 어려운 웰링버러의 당원들을 격려한 후, 목전의 보궐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는, 7192표 격차로 토리에게 뒤지고 있는 탐워스의 군중을 집결하기 위해 차를 타고 동쪽으로 향했다. 그동안 비서들은 이 언론 권력자가 소도시의 선동가로 거듭났다는 목격을 전하기 위해 기자들을 동원했다. 나는 세인트 판크라스 기차역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아래턱은 내가 사진으로 알던 것보다 앞으로 좀더 튀어나와 있었다. 아마 촬영할 때 좀 더 잘 나오게 하는 각도를 알고 있을 것이다. 언론관 시절 자랑스레 기르던 콧수염은 이제 깨끗하게 밀었고 덕분에 마흔둘보다 훨씬 젊고 잘생기게 느껴졌다. 전에는 수염 탓에 사립 학교 영어 교사 같아 보였다면, 이제는 텔레비전 영화에 나오는 악한 같았다. 머리는 아주 짧게 잘라 귀가 보이도록 깎았고, 새것은 아니었지만 반질반질 윤이 나는 구두와 품이 넉넉한 수트를 입은 그는 단정한 옛날 정치인 같아서, 차림새로만 따지면 애틀리 아래서 부총리를 지낸 그의 외조부 허버트 모리��과 같은 내각 장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말 현대의 허버트 모리슨이라면 기차에 오르자마자 전화를 받으러 어디론가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와서 그는 일단 정중히 사과하고, 곧장 커프링크스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녹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만년필과 새 종이 뭉치 한다발을 꺼냈다. 나는 그가 A4 용지에 제목, 별표, 밑줄을 깔끔하게 구분해 표시해가며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십오분쯤 침묵 속에서 집중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글씨체는 단정하고 우아했지만 모음을 작게 쓰는 바람에 내가 앉은 일등석 맞은편 자리에서는 종이 위에 활자체로 또박또박 적혀 있는 “토니 블레어 하원 의원 귀하” 외에 거의 읽을 수가 없었다[6].
한참이 지난 후 그는 일부러 여유로운 척하며 먼저 말을 붙여왔다. “물어보고 싶은 것 있으면 마음껏 물어봐요. 이제 옛날처럼 신경 쓰는 거 없으니까요.” 그러나 지퍼가 열려 입구가 벌어지는 바람에 자꾸만 안을 힐끔거리게 되는 그의 여행가방과 달리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란 여전히 불가능했다. 정당 정책에 대한 문단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오늘 오후 일찍 있을 주식시장에 관한 블레어의 연설문을 한 단어씩 끊어 되풀이하고, 그것을 마치 유능한 버젼의 존 메이저가 읽는 것처럼 일정하고 지루한 톤으로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때에야 나는 겨우 끼어들어 질문을 건넸다. 노동당/국가/총선거 캠페인에 대한 당신의 주요 의제는 무엇입니까? 대답은 항상 하던 것과 같았다. “미래 닥쳐올 변화에 그저 휩쓸리기보다 앞서 충실히 대비하는 것이죠.”
이렇게 만델슨은 주말 대부분의 시간조차 올바른 노동당원의 자세라는 단단한 벽 안에 앉아 있었다. 잠시 망설이는 순간에만 그 벽 뒤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슬쩍 엿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당신의 정치적 신념은 무엇입니까? “저는 항상 확고하고 원칙 있는 사회 민주주의자이며… ” 그는 잠시 멈추었으나 눈을 돌리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기차가 큰소리로 경적을 울렸다. “음… 정부의 중심적 역할은 경제적 효율과 사회 공정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마거릿 대처가 할 법한 소리인데요? 그말에 그는 다시 벽 뒤로 후퇴했다. “완전히 아니던데요. 대처리즘 구경은 보수당 총리 덕에 다들 지난주에도 물릴만큼 해봤을텐데요?”
자신이 누구인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주겠다고 말한 사람치고는 희한하게도, 만델슨은 나에게 질문할 때가 훨씬 더 즐거워보였다. 그래서 내가 이걸 누구한테 얘기했어야 한다고? 그사람들은 또 뭐랬더라? 이 얘기 이사람 친구 로버트 해리스에게 하면 안된다고 그��지? 내가 그 “지긋지긋한” 스핀닥터 기사들 중 하나를 썼던 사람인가? 나에게 질문하는 순간만큼은 그가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였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눈을 반짝이면서, 깨끗하고 흰 치아가 살짝 보일만큼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재미있고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그가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음흉한 목소리로 중간중간 말을 끊고 들어오며 “앤디”라고 자꾸만 내 이름을 부르자, 나는 매일 하원 로비 출입 기자들에게 “이제 우리는 한배를 탔어요” 라고 속삭이던 고압적인 미소, 나를 덮쳐오던 스핀의 느낌을 문득 기억해 냈다. 나는 준비했던 질문을 잊어버렸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에 입각한 만델슨의 또다른 전술은 상대를 놀림감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음날 탬워스의 꽉 찬 좁은 자선단체 행사장 강당에서 당원들의 전의를 북돋우던 중이었다. 그는 연설 중반쯤 이르러, “우리는 이미 개종한 사람들에게 전도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개종자를 원합니다!” 하더니, 갑자기 구둣발을 탕, 구르고 말을 멈췄다. 이윽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나쁜 소식이 하나 있어요.” 했다. “이 마을에 곧 전세계 언론들이 몰려올 겁니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메모하고 있던 나를 가리켰다. 후텁지근한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백여명의 사람들이 미친듯이 웃어댔다. 그 웃음이 가리키는 바는 명백했다: 만델슨은 이제 우리 중 하나다, 더 이상 언론들, 홍보관들, 즉 “저들”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웰링버러에서 이미 두 번, 같은 농담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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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함이란 그의 인생을 특징짓는 말이다. 웰링버러에서 두 노부인에게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그의 선거 운동은 1959년 선거 결과 보고가 들어오는 것을 참관하던 다섯 살 때 이미 시작되었다. 60년대초 햄스테드 가든 섭어브에 살던 미들클라스 부모(아버지는 쥬이시 크로니클의 광고부장이었다)가 아들의 손에 노동당 홍보전단 뭉치를 쥐어준 것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일요일이면 그의 가족은 외조부인 허버트를 방문하곤 했다[7]. 해롤드 윌슨이 이웃에 살았다. 1964년 윌슨이 그간의 공백 – 오직 1979년부터 현재까지의 공백과만 비교할 수 있을 기나긴 공백[8]  – 을 깨고 노동당을 집권시켰을 때, 만델슨은 “완전히 경도된 채 길가에 서서, 윌슨의 차가 총리 관저로 향하는 것을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곧 그는 아버지와 함께 다우닝가에서의 티타임에 초대받았다.  
어린 만델슨은 체면을 차리며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이름을 알리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친구들에게 총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니던 헨든 카운티 그래머스쿨 재학 시절에 학교를 일반 공립고교로 전환하는 ���페인을 주도했다. 교장은 그를 “극성 노조원”이라고 부르며 비난했으나 결론적으로 그 캠페인자체는 이후 학교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다[9]. 그가 가입한 첫 정당은 좌파 성향의 청년 사회주의자 정당으로, 베트남 전쟁을 지지한 노동당 외무 장관인 마이클 스튜어트에게 야유를 퍼붓는 등의 활동을 한 학생 모임이었다. 1971년 대학입학시험 직후 여름 옥스포드 캐서린 칼리지 장학금을 받기 직전의 여름, 그는 청년 공산주의 동맹(YLC)에 가입했다.
“공식적으로 가입이 되어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만델슨이 말했다. “모임에 몇번 갔었는데… 솔직히 왜 거기 가기로 결정했었는지도 이제와선 기억이 안 납니다. 잠깐 활동했었거든요... 소속감을 전혀 느끼질 못했습니다.” 그가 강조했다. “그때 전 대부분의 시간을 스위스 코티지에 있는 윈체스터 암스 펍[10]에서 거대 규모의 청년 모임을 조직하는데 쓰고 있었습니다. 그걸 좀 말이 되는 조직으로 바꿔 놓으려고 맨손으로 뒤집어 엎고 있었죠.”
만델슨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 일 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그는 트레버 허들스턴 대주교를 찾아가서 탄자니아 병원의 마취과 보조로 일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맡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대학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학교 생활에 별 열의를 느끼지 못했다. “이제와 생전 처음 계급 투쟁을 발견한 것처럼 구는 다른 신입생들과 공감대가 있었을 리가요.” 그 대신 만델슨은 런던까지 통근하며 국제연합이 나미비아 독립운동 기금을 조성하는 일을 도왔고, 정부기금으로 운영되는 영국청년회 British Youth Council 에서 부의장직을 맡아 일했다. 그시절의 한 동료는 그곳에서 만델슨이 조직을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피터는 영국청년회에서 공산주의 청년회와 여성청소년회 사이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게임을 놀라우리 만치 잘 해냈죠.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거의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1976년, 만델슨은 옥스포드에서 정치-철학-경제 전공 과정을 무난히 마치고, 영국청년회로부터 당시 급격하게 상승 중이던 청년 실업률에 대한 연구 과제를 제안받았다. 동시에 통상노조 소속 경제문제 관련 하급직 자리 제안도 들어왔다. 그러나 그가 실업률 보고서 – 스스로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 이라고 표현한 - 를 제출하자 곧 논란이 일었다. 원래 노조직은 그런 종류의 문서를 출판할 수 없도록 규정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부에서 호되게 질책 당했으나, 되려 그 일로 인해 학창시절과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큰 보상이 돌아왔다. 정부 내각에서 실업률에 대한 연구를 발표해 달라고 그를 초청했던 것이다. “무척 당황스러웠죠.” 그가 회상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제 직감을 믿었습니다.” 1978년, 만델슨은 램버스 지방의회 의원이 되었다. 통상노조 직책에 머무르며 그는 노동당 정부의 몰락을 내부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노조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취하며, 당시를 “잘해보려 했으나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꽉막힌” 분위기였다고 묘사했다). 캘러헌 실각 이후 노조 위원장들과 장관들의 회의에서 작성한 메모를 앨버트 부스의 리서처 자격으로 하원에 보고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중앙당과 램버스 지방의회 노동당 모두 그가 대학입학시험 이후 영영 등을 돌렸던 극좌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1982년, 그는 정치를 그만뒀다. 정확히 말해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만델슨은 런던 위켄드 텔레비전 방송국에 취직해, 존 버트와 멜빈 브랙, 그렉 다이크와 크리스토퍼 블랜드와 함께 일했다. 그는 여기에서 빠른 속도로 승진해 주로 정치인들과 여타 언론인들에게 주목받는 중요한 일요일 점심 정책 프로그램 위켄드 월드 Weekend World의 프로듀서가 되었다.  “솔직히 뛰어난 방송 전문가였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그의 옛 상사였던 인물이 말했다. “위켄드 월드는 내용보다는 얼마나 시청자들의 공감을 사느냐가 중요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는 때로 동정적으로, 때로는 잔인하게 주제를 다루며 프로그램을 흥미롭게 유지하는데 성공했죠.”
그때까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1985년 여름에 머물렀던 웨일즈에 작은 별장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잘 벌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별장과 가까운 근처 브리컨�� 래드너 지역구의 보궐 선거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당수인 닐 키녹의 사무실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그는 하겠다고 했고, 결과적으로 근소한 격차로 선거에서 패했다. 그 업적을 인정받아 노동당 언론보도 총책임자로 임명됐다.
“받침대가 흔들려 앉으면 부서질 것 같은 의자가 하나 있는 사무실을 받았습니다. 그게 제가 받은 첫 사무실이었어요.” 만델슨이 말했다. “커다란 잎을 축 늘어뜨리고 죽어가는 화분 하나도 창가에 놓여있었고요.” 일찍이 정당은 처참한 공적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여론조사관들과 정당홍보관들로 이루어진 조찬모임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뿐이었다. 만델슨은 이 기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발굴해 늘려나갔다. 1986년 전당대회에서 자신감 넘치는 에메랄드색 배경이 세워졌고, 그 유명한 붉은 장미 상징이 도입됐다. 이듬해 키녹의 총선 캠페인 텔레비전 광고에는 온갖 새로운 촬영기법이 동원됐다.
“매일이 위태로운 시절이었어요.”  만델슨은 아직 노련하지 못했다. “그래서 필요이상으로 더 까칠하고 거만하게 굴었던 것 같아요.”  이러한 그의 불안은 정책이 어떻게 보여질까 포장을 통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책의 방향성 자체를 결정하는 데에 개입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키녹의 지지를 업고 그림자 내각과 언론의 중개인를 자처했다. 노동당 인물에 관한 인터뷰 요청과 승낙에 대한 모든 결정이 그의 권한 아래 놓였다. 자연스럽게 그가 선호한 신예들(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은 승승장구했고, 그가 싫어하던 당내 좌파 인사들(마이클 미처, 존 프레스콧)은 꾸준히 소외되었다. 동시에 만델슨은 인맥을 총동원하여 자신이 언론에 손쓸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찾아냈다. 그는 마감이 언제인지, 각 언론인들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지, 어느 기자의 상사는 누구고, 편집장과 직접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전부 알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그에게 필요한 것은 통화 매너뿐이었다. 상대를 구슬릴 것인가, 협박할 것인가? 둘 중 하나만 고르면 끝이었다. 당시 보수당 원내대표였던 노먼 테빗조차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저 남자를 고용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는 막대하고 끝없는 수고가 들어갔다. 모든 일요 신문에 전화하기 위해 토요일 밤을 포기하는 삶이었다. 이렇게까지 해도 바라던 성취는 요원했다. 노동당은 백여석 차이로 1987년 총선에서도 패했다. 그리고 만델슨의 적은 더 많아졌다. 1988년, 그는 BBC의 한 상급직에 지원했으나 낙마했다. 결국 그는 “입신양명” 하기로 결심한다. 하틀풀이 손짓했다.
만델슨은 하틀풀에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구 일을 “사랑한다” (하틀풀 지역일보에 의하면 그는 인기있는 하원의원이다). 그는 지역 축구팀의 경기를 보러 간다. 영화관에 가기도 한다. “집에서 쉬면서 사람들이 저를 위해 녹화해둔 코미디쇼들을 시청하는 걸 가장 좋아해요.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서 앱솔루틀리 패뷸러스 Absolutely Fabulous나 원 풋 인 더 그레이브 One Foot In The Grave [11]를 틀어놓고 테스코에서 파는 고급 유지방 아이스크림을 먹는거죠. 친구들 불러서 놀 때도 있고, 그냥 자러 가기도 해요. 여기선 아침 7시 반이나 8시쯤 일어나요. 런던에선 6시반을 넘겨서 자본 적이 없는데요.”
하틀풀의 클러큰월 자택에서 그는 “일주일 중 이틀 저녁은 정치적인 것과 관계없는 일”을 한다. “친구들을 초대하거나, 발레를 보러 간답니다. 올해만해도 벌써 두 번이나 발레 공연에 갔다 왔어요. 한번은 목요일 밤에 유리동물원을 보러 갔었는데 정말 좋았죠.” 그는 여전히 그의 어머니와 가까이 지내고 (아버지는 8년 전에 돌아가셨다), 자기 사생활을 보호하는데 신경을 온통 곤두세우고 있다. 인터뷰 전 나는 멋모르고 그의 옛 파트너[12]와 통화를 시도했다. 열받은 만델슨에게 곧장 전화가 걸려왔고, 그는 언젠가 때가 되면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들이지만 지금은 그럴 수 ���으며, 정치 인생의 현 단계에선 밝히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13].  
그러나 그의 “정치 인생”이라는건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도대체 그는 어떤 정치인이 되고 싶은 것일까?  탬워스에서의 연설 후, 마침내 그는 자신의 모든 투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나에게 이야기 해주기로 했다. 그는 밀실로 나를 불러 45분 인터뷰를 허락해줬다. 머리 뒤에 깍지 낀 두 손을 대고, 탁자 위에 발을 올린 채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나와 동행한 사진사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만델슨은 여유롭고 탁 트인 사람처럼 보였다. “저는 정치인이 되어가는 과정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아니지요.” 언제 그곳에 도착한지 알게 될까? “다음 선거에서 이겨서 정부 내각에 자리를 받게 될만큼 운이 좋다면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에 비해 그의 정치 도덕적 목표는 명확하지 않은 것같다. “이걸 당신에게 설명하기란, 참 어렵네요. 전 옳은 일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 알아요…” 웰링버러에서 오는 차 안에서 그는 사람들의 “절망”에 분노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 이틀간 불평등과 사회주의, 사회적 갈등에 관한 언급은 전혀 들을 수 없었다. 그에게 비판적인 당내 좌파들은 그들 중도들의 신념이 무엇인지 자신들은 알고 있으며, 토니 뱅크스 하원의원같은 인물은 그 신념이 “대부분 우파에 가깝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만델슨은 “유럽 대륙 국가 소속 사회주의 정당의 행보와 더불어 우파 정당과 기독민주당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역시 주의 깊게 보고 있다”고 발언한 바 있으나, 이러한 발언의 공약 내 구체적인 형태는 오리무중이다. 그는 친유럽주의자로, 책을 통해 블레어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과의 단일통화 도입에 찬성하는 최근의 페이비언 소사이어티 팸플렛에선 최근 당권이 그것을 반대한 까닭에 블레어의 이름이 빠졌다. 어쩌면 30년대 런던에 공공주택을 건설하고 10여년간 정부 내각직을 지낸 외조부인 허버트 모리슨을 이상으로 삼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마저도 문제가 있어보인다. 동료 장관이었던 휴 덜튼의 말을 빌리자면 모리슨은 정당 내에서 “자신과 직접 관련있지도 않은 모든 사람의 모든 일을 뒷조종 하려드는 시어머니같은 상사”로 기억되었던 인물이다.  
그리고 모리슨과 마찬가지로 그의 외손자 역시 노동당 내부에서 돌아다니는 모든 음모의 흑막이 자신이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드라마틱한 것을 좋아한다. 그는 여전히 외부적 목표보다 내부적 수단에 대한 것에 훨씬 능하다. “내가 참석하는 미팅, 내가 적는 노트,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만드는 제안서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경향이 있어요.” 형광등이 켜진 어둑한 백룸에서 갑자기 활기를 되찾은 만델슨이 말했다. “예측할 수 없는 사소한 사항들이 정치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데에 아주 중요합니다. 내 일은 다른 일들만큼 그런 사소한 것들을 발견해내서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에 ��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길을 닦아주는 거예요.”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만델슨은 무선호출기를 확인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을 향해 방을 가로질러 갔다. 그는 혼잣말하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앨리가 또[14].” 토니 블레어의 공보비서관인 알라스테어 캠밸의 연락인 모양이었다. 그는 호출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듯했으나, 점심을 가지고 올라온 운전기사를 보자 다가가 곧 출발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만델슨은 라디오를 켰다.  BBC 라디오4 채널의 이번주 세계는 The World This Weekend 이 흘러나왔다. 해리엇 하먼과 켄트에 있는 사립학교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아 상대방이 들을 수 있게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봐, 그래봤자 여섯 번째 아이템이라고.” 그는 큰 소리로 말한 후 곧장 전화를 끊었다.  
말과 다르게 행동은 서둘렀다. 버밍엄 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지체없이 차에서 내렸다. 노트북을 들어올려 바람을 막으면서 귀에 전화기를 꼭 붙인 채로, 런던으로 돌아갈 기차가 기다리는 한산한 기차역의 중앙 홀을 향해, 주차장을 가로질러 빠른 속도로 걸어 이윽고 그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만큼 멀어져갔다.
갑자기 그가 뒤돌아 소리쳤다. “이 얘긴 쓰지마세요.”
!
(원문 출처 https://www.independent.co.uk/arts-entertainment/spinning-a-tale-1317157.html)
[1] 원문에서는 웰링-버러 Welling-borough 라고 하이픈을 써서 began well 과 말놀이를 의도했지만, 번역에서는 살리지 않았다. 웰링버러는 역대 미들 잉글랜드 접전지역구이다. 1996년 당시 92년 선거에서 이긴 보수당이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1997년 1.6퍼센트 표차로 앞선 노동당 후보가 당선된다. 2005년부터 다시 보수당이 탈환해 현재까지 피터 본Peter Bone이 하원의원으로 있다.
[2] 당가인 레드플래그를 제창하는 일은 블레어가 당수가 된 이후로 사실상 사라졌다.  
[3] 원문에서는 “his clipped, almost posh voice”. 짧게 끊기는 발음을 빠르게 늘어놓는 어퍼클라스의 언어 습관에 가깝게 들렸다는 것이다. 앞에서 유권자를 상대하며 워킹클라스 말투를 흉내내 h를 생략해가며 말하던 사람의 본모습을 비꼬고 있다.
[4] 트리뷴 Tribune 매거진을 가리킨다.
[5] 토머스 웬트워스 Thomas Wentworth, 처형당한 영국왕 찰스 1세의 참모를 가리킨다. 흔히 찰스 1세 실정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으로 여겨진다.
[6] 만델슨 자서전 전자책 버젼에 실린 자료에서 이러한 문서 구성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보통은 종이 왼쪽 상단에 “TO: TB / FROM: PM” 등 으로 이름 이니셜을 간단히 적고 아랫줄에 날짜를 표시한다. 여기에서는 기자를 의식해 빈 종이에 일부러 잘 보이게 블레어의 이름을 적은 것 같다.  
[7] 어린 피터 만델슨이 외조부와 실제로 어떤 관계였는가는 다른 번역(https://bit.ly/2AnU9NQ)을 참고. 만델슨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토요일마다 모리슨이 방문했던 것이고, 만델슨의 가족들이 직접 모리슨을 찾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8] 1951년부터 1963년까지 보수당 정부가 집권했다. 총 네 명의 총리(처칠, 이든, 맥밀란, 더글라스-흄)가 재임했다.  
[9] 이 그래머스쿨은 각종 통폐합으로 없어질 위기였는데, 71년에 컴프레헨시브 스쿨이 됨으로써 폐교 위기를 넘긴다. 공립 전환 캠페인이 유효했던 셈이었다.
[10]런던 북서부 캠든에 위치한 청소년 센터이다. 옛 지명과 건물명일뿐 코티지도 아니고 펍도 아니다.
[11] BBC에서 방영하여 당시 큰 인기를 끌던 대중적인 시트콤들이다.
[12] 피터 애슈비.
[13]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14] “It’s Ally P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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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zzanji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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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모리슨 전기 서문 중 발췌
이하는 1973년 출판된 허버트 모리슨의 전기를 2001년 재출간 하면서 새로 추가된 피터 만델슨의 서문 중 일부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서문은 대부분 현재 정치 지형에 근거하여 모리슨 시대의 노동당의 역사적 사건들을 평가하고, 그의 업적을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와 연관짓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모리슨에 대한 만델슨의 개인적 기억에 관한 부분만을 옮겼다. 여타 인터뷰와 자서전에서 여러번 이야기한 바, 그에게는 이 유명한 외조부와의 다정한 일화도, 정치적 교감을 나눌 기회도 딱히 없었다. 그러나 특별히 이 서문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을 적어내려 애쓴 듯 보인다. 외조부에 대한 만델슨 본인의 회상에 대해 이 이상 자세한 서술은 발견되지 않았다. 
Donoughue, B., & Jones, G. W. (2001). Herbert Morrison: portrait of a politician. London: Phoenix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in 1973) 
An excerpt from foreword written by Peter Mandel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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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기의 저자들은 펜너 브록웨이를 인용하여 그(허버트 모리슨)를 “서투르고 거친” 사람이라고 묘사하는 동시에, “그의 에너지, 영리함, 일을 처리하는 재주, 자신만만함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적었다. 나는 이보다 그를 잘 요약하는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비록 블레어처럼 잘 교육받은, 지적인 부분에서 발휘되는 자신감을 갖추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블레어와 마찬가지로 남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자기 확신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아마 정치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헌신이라는 부분에서는 고든 브라운과 가장 비슷할 것이다. 브라운 재무장관의 끝없는 헌신도 아직 모리슨처럼 사무실에 야전 침대를 놓고 취침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말이다! 부총리 존 프레스콧의 모습도 모리슨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이디어와 이를 실행하는 체계를 매끄럽게 섞어내는 독보적 정치적 정체성을 가진 화통한 노동계급의 인물이란 오늘날의 부총리를 연상시킨다. 나는 외조부가 매우 자랑스럽다.
 이 모든 것을 나는 이 전기를 읽으면서 배웠다. 내 유년기에 남겨진 외조부에 대한 기억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온 후 어머니가 다시 할아버지를 뵐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던 것이 정확히 몇 살 때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열 살, 혹은 열한 살 때였던 것 같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상태가 좋지 않으시단다, 어머니가 말했다. 남은 한쪽 눈이 크게 나빠져서 예전처럼 런던을 가로질러 운전해서 우리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앞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대신 우리가 상원으로 할아버지를 보러 가면 안돼요? 내가 물었지만, 단호하게 안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 외조부의 두 번째 결혼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53년 나의 외조모가 돌아가셨고, 이디스는 외조부와 그 2년 후 골프장에서 처음 만났다 (애석하게도 나는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해 거의 들은 바가 없으나 취향과 품위를 갖춘 온화한 여성이었다는 세평이다). 이디스는 보수당을 지지하는 풍만한 랭커셔 여자였다. 두 사람이 재혼하고 나서부터 그들은 우리 가족, 옛친구들, 동료들과 교류가 소원해졌다. 그의 외동딸인 우리 어머니와 손자들인 마일스와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토요일 점심이면 가끔 할아버지는 우리를 보기 위해 엘섬에서 햄스테드까지 런던을 가로질러 운전해 오셨다. 할아버지의 흰색 자동차가 모퉁이를 돌아 빅우드 길에 접어드는 광경을 제일 먼저 보기 위해 내가 문 바깥까지 나가 초조하게 기다렸던 것이 희미하게 기억난다. 차가 멈추고 할아버지가 몸을 기울여 내릴 때면 시선을 사로잡는 그의 백발이 먼저 나타났고, 목에 맨 알록달록한 나비넥타이가 뒤따라 보였다. 그는 탁자에 앉아서 목 옷깃에 하얀 냅킨을 바짝 쑤셔 넣고 시가를 피웠다. 할아버지가 시가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매해 여름 휴가지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걸 한 상자씩 꼭 사다드리곤 했다. 점심을 먹은 후엔 잠시 앉아 눈을 붙였고 그후 그는 오래 머물지 않고 곧장 엘섬으로 돌아갔다. 
세계 곳곳에서 마일스와 피터에게 보내왔던 그림 엽서들을 제외하면 이것이 그와 나의 유일한 교류였다. 나는 나의 어머니가 그와 어떤 관계였는지 혹은 우리가 함께 무슨 이야기를 했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해롤드 윌슨에 대해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는 느낌만은 남아있다. 할아버지는 그를 못마땅해하고 있었지만, 윌슨 가족이 우리 이웃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 즐거운 일화나 할아버지 때문에 웃었던 기억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를 둘러싼 긴장감을 눈치채기엔 나는 너무 어렸다. 그는 우리 가족에게 할아버지라기 보다는, 전설에 가까웠다. 신문이나 뉴스, 라디오에 관련된 사건이 보도될 때면 방문객들은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러나 그 외의 시간들에 그는 우리집에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어머니는 여전히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가기엔 서먹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먼저 그 마음을 눈치채 주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런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1965년에 돌아가셨다. 처칠 사망 두 달 후였다 (두 사람이 연달아 사망한 것에 관한 신문기사를 스크랩했던 것이 기억난다). 정부 조문단 대표로 조지 ���라운 [1] 이 장례식에 온다는 사실에 굉장히 흥분했던걸 보면 그때의 나는 예전보다 정치적인 일에 관심이 많았던 게 틀림없다. 그날 우리는 할아버지 생전 한 번도 초대된 적 없는 엘섬 집의 정원을 가로질러 앞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디스를 만났다. 복도에는 조지 브라운이 서 있었다. 그는 우리를 소개받고 나더니 나에게 예의 우렁찬 목소리로 ‘네가 파란색 타이를 매고 장례식에 온 걸 알면 네 할아버지가 놀라 쓰러지실게다!’ 하고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더이상 무엇에도 놀라 쓰러지실 수 없는 상태이셨지만, 나야말로 그걸 듣고 놀라 쓰러질 뻔했다. 마일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아버지는 항상 그랬 듯 훗날 파티에서 인기를 끌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더 늘어나 몹시 즐거운 눈치였다. 
장례식에서는 구세군 악단이 연주를 했고 다른 일들은 상조 회사가 진행하는 대로 흘러갔다. 할아버지는 생전 그랬듯 또 서둘러 우리에게서 떠나가셨다. 엄마는 내가 더이상 학교를 빠지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있었던 추모 예배에는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브라이튼에 사는 에디 이모가 갖다 준 할아버지의 유품을 우리에게 몇개 나눠줄 때를 제외하고, 그후로 이디스를 만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우리 모두에게 수치스럽게도, 몇년 후 이디스는 <더 타임즈>에 우파 단체를 대표해서 서명이 든 편지를 기고했다. 그래도 최악은 아냐, 어머니가 말했다. 적어도 램버스 남작부인 모리슨이란 이름으로 서명 하진 않았잖니. 할아버지가 보셨다면 아연실색하셨을 일이다.
그와 좀더 즐거운 추억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반대로 집요하게 떠오르는 것은 토요일 저녁 ITN 뉴스 속보로 할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흘러나왔을 때 부엌으로 뛰쳐 들어가 소식을 알리자 딱딱하게 잿빛으로 굳어졌던 어머니의 얼굴이다. 이전까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고 있었어도, 어머니가 학교에서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내내 입단속을 했기 때문에 나는 어쨌든 그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한데에는 여러가지 까닭이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그녀가 유명한 가족을 이용하거나 자랑삼아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혐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로, 어머니는 나를 보호하고 싶어했다. 정치인 아버지를 둔 탓에 학교에서 몰인정한 교사들의 손에 고통받거나 놀이터에서 조롱 받아야 했던 자신의 경험이 그녀의 결정에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건, 열 다섯 살부터 줄곧 정당 정치에 몸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수년간 사람들에게 내 외조부가 누구인지 밝히기를 꺼려왔다. 그러다 내가 대학에 간 해 출간되었던 이 전기를 읽고 나서야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해 처음으로 폭넓게 배웠다. 보수당이 집권하고 있던 1973년경에도 사람들은 노동당 정부를 아직은 매우 익숙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2]. 그런 환경에서 세기 전반 정당이 처해있던 상황과 투쟁에 관한 감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나 역시 그의 초반 업적들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로부터 7년 후,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 노동당의 존속이 위협받게 되는 상황에 대한 예측 역시 전무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나 자신의 의미 있는 정치적 관점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지지하고 싶은 노동당이 어떤 형태인지 숙고하기 시작했고, 대중 정당, 지지자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정당, 주류 사회민주적 가치들을 옹호하고, 현실에 이식 가능한 정책들을 제안하는 정당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나는 내 외조부의 관점을 흡수해가고 있었다. 지금에 와 이때를 돌이켜보면, 나의 관점과 가치들은 점차 그의 것에 기반해 변화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후 10년은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는 시간들이었다. 1997년부터 정부 내각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내 정치 경력 전체를 돌이키는 것보다 오히려 그의 업적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내각직에서 외조부가 그러했듯, 나는 정부의 중심부에서 겪을 수 있는 긴장감을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정책 실행 권한이 없는 부서에 있는 것이 얼마나 좌절스러운지도 겪었다. 그후 배정받은 부서에서는, 디테일에 대한 그의 배려, 사람들을 관리하는 동시에 격려하고자 하는 열망, 행정 경험에 대한 존중과 정당에 대한 사랑을 닮아 일하려 애썼다. 
나는 그의 위대함까지 체득하진 못하였을 것이나, 지금 매순간 그 외조부의 손자답게 행동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
[1] 당시 총리 해롤드 윌슨 아래서 수석비서관을 지내던 조지 알프레드 브라운을 가리킨다.  
[2] 에드워드 히스의 보수당이 집권했던 1970-74년을 제외하고 1964년부터 1979년까지는 노동당 총리가 재임했다. 훗날 대처의 예외적인 긴 집권은 영국 국민들에게 예상된 것도, 익숙한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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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zzanji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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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림로즈 힐의 우편 수집에 대하여
에드 밀리반드, 팟캐스트에서 
“전에 같이 일하시던 분이 일흔 생신을 맞아서 카드를 보낼 일이 생겼거든요? 네, 그게 좀 늦긴 했죠... 1월 4일이 생일인데... 아, 알고는 있었어요.... 저 진짜 알고 있었다고요. 아무튼 꼭 카드를 보내려고 했는데, 이걸 1월 3일까지 안 하고 있었어요. 당일에 일단 카드를 샀어요. 카드랑 우표 사오라고, 우리 애들한테 둘 다 사오라고 심부름을 보내놓고, 생각을 했죠. 좋아, 됐어. 이거  내일까지 도착하게 하려면 어디에다 부치��� 되지?
일단 우리집 앞에 있는 우체통은 우편물을 아침 9시에 가져가요. 사람들이 그날 우편을 그날 9시 전에 부칠 것도 아닐테고, 이건 그러니까, 전날 부친 편지들을 수집한다는거죠.
그래서 전 집에 가서 우체국 웹사이트에 들어가봤어요. 가까이 있는 다른 우체통들에선 몇 시에 가져가나 알아봤는데, 하나가 오후 5시 30분이더라구요, 아니 제가 잘못 읽었는지도 모르겠는데요, 아무튼 저는 도저히 편지를 그때까지 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근데 이거 놓치면 다음날 9시에나 가져갈거잖아! 그래서 다른 우체통을 찾아보니까 그건 오후 4시래요. 그 빌어먹을 4시는 이미 놓쳤다고요! 아니 이게 말이 돼! 맑스랑 엥겔스는!... 네, 맑스랑 엥겔스요, 뭐냐면, 우리 아버지가 맨날 그랬거든요, 맑스랑 엥겔스가 프림로즈힐 반대편 끝에 살았는데 둘이 편지를 아주 많이 주고 받았다고요. 하루에 여섯번씩요! 그럼 여섯번씩 수거해갔다는거잖아요!!! 근데 지금은 아니네!! 아니잖아!!!! 이제 그런일은 없다고!!!  하루에 한번이라니 나 완전 망했어!!!!”
(대본 출처 https://hallowgirl.tumblr.com/post/169614349354/i-was-sending-somebody-a-birthday-card-who-used-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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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zzanji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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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Gordon Brown?
더 뉴욕 리뷰 오브 북스10월 25일 발행 2007년호  
고든 브라운은 누구인가
조너선 프리들랜드
톰 바우어,  <총리, 고든 브라운> 윌프 스티븐슨 편집, <고든 브라운 연설집: 1997-2006> 고든 브라운, <용기의 여덟 초상>  
1.
고든 브라운의 모든 것, 인생 경력과 성품에 더불어, 영원히 변함없이 강력할 이 정치적 중력의 법칙들까지도, 단 한가지 사실을 가리키는 징후라고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 그는 영국이 지금까지 가져본적 없었던 위대한 총리가 될 것이었다.  노동당을 이끌어 영국 총리가 되는 한 쌍의 야망이 좌절 중인 것이 일종의 운명의 문제로 비추어지던 시절 그의 경력은 일련의 잃어버린 기회들과 불운, 담력 부족으로 묘사되곤 했다.  2004년 토니 블레어의 참모장이던 조너선 파월은 기자들에게 말했다.  “일종의 셰익스피어 비극인 셈이죠.  고든 브라운은 자신이 왕이 되리라고 확신했지만 절대 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결코 총리가 되지 못할 겁니다.”  
브라운은 젊은 블레어에게 기회를 양보하기 위해 1994년 경선에 출마하지 않았는데, 이런 경우 미래에 두번째 기회를 갖는 선례는 드물었다. 브라운은 과거의 어느 정치인보다 오랫동안 정당한 계승자라는 위태로운 자리를 유지해야 했다 (이보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과거의 예외로는 끝이 나빴던 앤서니 이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3년전 이 일이 정말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소수였다.  곧 새로운 세대가 출현할 것이고, 브라운은 휘청거릴 것이다. 1997년 노동당이 집권하고 그가 재무장관이 된 이후 영국 경제를 덮치는 모든 종류의 타격은 그의 지지율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1994년 정당이 브라운대신 블레어를 선택한 이유도 여전히 유효했다.  브라운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가 대중적인 매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전 외무장관인 로빈 쿡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시골[1]의 차갑고 축축한 겨울에나 어울릴법한” 잔뜩 구겨진 얼굴로 상대를 노려보면서 통계 숫자들을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텔레비전 방송에 전혀 적합치 않은 인물이었다.  블레어가 가진 너그러운 성품들, 자연스러운 공감을 표현하는 능력이 브라운에게는 부족했다.  남동 잉글랜드 억양을 쓰는 블레어가 노동당이 반드시 이겨야하는 그 지역에 친근함을 어필할 수 있었을 때 그는 커칼디라는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바닷가 마을 출신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장점으로 널리 인정받았던 전략적 통찰력은 정당을 이끌 지도자의 것이라기 보다는, 톰 바우어의 말을 빌리자면 “외양의 거선 갑판 아래 기관실에서 밤낮없이 일하는, 엔진을 정비하고 피스톤의 기름을 닦아내는 스코틀랜드 기관사”가 되도록 그를 운명짓는 재능이었다.
그러나 2007년 6월 27일, 특별 전당대회에서 노동당 당수로 지명된 지 사흘 후, 고든 브라운은 총리로서 다우닝 10번지에 입성했다.  그는 지난 십여년의 세월 대부분을 블레어와의 불화와 영역다툼으로 보냈다.  외적으로는 장차관 임명, 공공서비스 투자에 관한 민간부문의 역할, 유로화 도입에 대한 것이었으나 결국은 둘의 개인적인 야망이 충돌했기 때문이었고, 그들이 서로에게 느끼던 경쟁심이 노동당 정부의 역학을 결정지었다. 영국 정치사상 가장 오래 살아남았고 또한 가장 강력했던 재무장관인 그는 강한 체력과 무자비함으로 무장한 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솜씨로 계승 가능성 있던 다른 경쟁자들을 제쳤다.  그 결과 그는 실제 노동당 당수 경선에서 적을 상대할 필요조차 없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브라운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브라운이 당수가 될 낮은 가능성을 돌파했다고 하더라도 총리로서 실패할 것이라며 예측을 바꾸었다.  대중적인 인기를 갖추고 언론을 다루는데 능하던 전임자인 해롤드 윌슨에게서 정부를 물려받았던, 또다른 전임 재무장관인 제임스 캘러헌처럼 패배할 운명만 남아있는 꽁초 정부[2]를 이끌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캘러헌은 마거릿 대처에게 패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또 한번 회의파들을 당황시켰다.  집권 첫달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테러와 홍수 등 연달아 터진 초반의 위기 상황들에 대한 건실하고 확고한 대응은 전반적으로 브라운 정부를 승인하는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지지율은 반동으로 되려 상승했다.  한때 그의 약점으로 간주되었던 자질들 – 화려함의 부족 – 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강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기대에 휩싸인 당원들은 이제 브라운이 전례없는 노동당의 네번 연속 집권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인지, 심지어 토니 블레어가 실패했던, 위대한 개혁의 노동당 정부를 만드는데 성공할 것인지에 대해 들떠 이야기하고 있다.
 2.
신임 총리의 내각 장관들 중 하나는 “좋은 고든”과 “나쁜 고든”, 두 가지 브라운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6월부터 지금까지 통치 중인 고든은 다행히도 “좋은 고든”이라고 덧붙였다. “나쁜 고든”이란, 아마 톰 바우어의 최근 전기인 <총리, 고든 브라운>에 분석되어있는 인물을 가리킬 것이다.
바우어의 이전 책들을 읽어본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이다. 그는 공적으로 쌓아온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디테일과 폭로들을 이용해 맹렬히 공격하는, 꼼꼼하고 파괴적인 전기들을 전문으로 써왔다 (이전 희생자들은 로버트 맥스웰과 최근 유죄 판결을 받은 콘래드 블랙 등 재계 사기범들이다).
바우어는 브라운을 “정신적으로 흠이 있는” – 당시 익명의 공직자가 재무장관이었던 브라운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표현이며, 블레어의 전 언론관인 앨러스테어 캠밸이 한 말로 추정되고있다 – 사람이자 가장 잔인한 종류의 정치 포식자로 묘사하고 있다. 1983년에 하원의원으로 처음 선출된 이 브라운은, 산더미 같은 종이와 책이 어지럽게 쌓인 집에서 살며 자주 격렬하고 갑작스런 분노에 휩싸이는 혼란스런 인물이다.  “그는 자주 화를 냈고, 수치스럽고 무능하다며 상대에게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어댔다”고 바우어는 썼다.  습관은 집권 이후에도 계속되어, 자신을 거스르는 상대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거나 때로 냉담하게 대했다.  1997년 총선 직후 며칠만에 영국 중앙 은행이 이자율을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독립권을 알리는 중대 발표 때 벌어진 일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안을 두고 묘사되는 브라운은 자신에 대한 모든 반대를 배신으로 간주하고, 아무리 가까운 동료였다 해도 충분한 충성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등을 돌린다. 또한 그는 주기적인 갈등의 원인이 된, 자신의 반대로 무산된 유로화 도입을 놓고 명목상 상사인 블레어를 거역하고 매번 고함을 쳐댄다.
바우어는 십여년 동안 화이트홀의 행정가들을 덮친 브라운의 모든 급작스런 공격, 불운한 동료 장관에게 놓은 덫, 블레어와 블레어라이트들을 향한 교묘한 책략들을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만큼 성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유로화 도입 전 영국 경제가 통과해야할 다섯가지 경제 지표의 기준들을 정함으로써 중대한 결정의 권리가 총리가 아닌 재무장관에게 있음을 확실히 한 일은 주목할만 ���데, 결국 이 모든 지루한 묘사들이 철저한 디테일인 동시에 독자를 정신적으로 고갈되게 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바우어는 자신이 폭로한 사실들에 독자들이 오싹 질려버리리라 기대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바우어의 책은 그 자신이 인정했듯 편파적 해석[3]에 기대고 있다.  분명 그는 자료의 대부분을 친블레어파 인물이나 최소한 브라운을 싫어하는 사람으로부터 얻고 있다.  그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브라운이 휘두른 권력에 깊은 내상을 입었거나 어떻게든 보복을 하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치명적인 부분은, 재무장관이 정부의 든든한 지주 역할을 하고 있으며 화면 속 배우처럼 연기에 능한 총리와는 달리 성실하고 믿을만한 금고 관리자라는 대중적 인식을 부정하는 것, 즉 그의 유능함에 관한 공격일 것이다.
바우어는 익숙한 보수당의 공격용 라인��을 차용했다 – 만사 자기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재무장관은 경제 뿐만이 아니라 영국 국내 정책 전반에 관해 멋대로 휘두르고 있다, 다른 정부 부처들이 재무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미 정해진 예산이라도 삭감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권력은 아마도 악명높은 1994년의 그라니타 합의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라니타는 런던 북부에 위치한 음식점으로, 브라운이 블레어의 단독 당수 출마를 지지하는 대가로 재무장관이 되기로 보장받은 장소로 알려져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으나 브라운이 블레어를 계승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이곳에서 도출되었다고 추측된다.).    
바우어는 브라운이 복잡한 탁상행정에 가까운 정책들을 꾸준히 기획하고 지나치게 자주 조세 제도를 뒤틀어 놓음으로써 문제를 일으키며, 중소기업들을 질식시키고 복지의 수혜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집권 첫 3년 동안 세법책을 800페이지 늘려놓은 일이건, 런던 지하철 반半민영화를 망쳐놓느라 변호사와 회계사 임금으로만 4억 5천 5백만 파운드를 지출한 일이건, 브라운은 최종적인 영향과 비용을 고려를 최소로 하며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는 경향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브라운이 이 모든 것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정치적 기량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바우어가 무시하기로 한 경제적 성과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노동당 통치 하의 영국은 전 분기에 걸쳐 꾸준한 경제 성장을 기록했으며, 이는 전례없이 긴 성장세 유지였다 (물론 이 흐름이 존 메이저의 보수당 정부의 마지막 나날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한다).  브라운은 총선에서 노동당의 선천적 장애로 여겨졌던 경제적 무능에 대한 악명을 마침내 제거한, 지속적인 경제 안정과 번영을 이끈 최초의 노동당 재무장관이다.
또한 브라운은 단순히 재정이 축적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중부 잉글랜드의 보수당 지지층이 반감으로 결집하지 않도록 은밀히 추진해가며, 그 재정의 일부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재분�� 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바우어는 이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고 있으며 60만명의 아동을 빈곤에서 구제한 브라운의 성취 (그의 목표는 2010년까지 빈곤 아동 수를 절반으로 줄이고 2020년까지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역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업적은 훗날 그의 권력 계승에 대한 설명에서 빠져서는 안될 이야기들이다.
 3.
빈곤 퇴치를 다룰 때 전통적 사회주의에 대한 영국 유권자들의 선호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인식에 기반하여 정치 전략을 수립한 사건은 내각 동료들이 묘사하는 “좋은 고든” 페르소나의 중심이 어떻게 생겼는지 짐작케 한다.  블레어 정부 내부에서 반대자 위치를 오랫동안 고수하면서 브라운은 그 자신을 전통적 노동당 가치의 수호자로 여겨지게끔 손 써왔다.  그는 부자들에게 어떤 제제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재계의 수호자 “철의 재무장관”인 동시에, 노동당 지지자들에게 1948년 설립된 국영 건강 보험(NHS, National Health Service)으로 대표되는 오랜 종교를 설파하고 그에 헌신하는 “붉은 고든”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미지는 브라운을 중도주의자 블레어를 대체할 수 있는 사민주의적 위치로 규정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붉은 고든”에 관한 신화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애당초 그러한 이미지가 브라운 자신이 가진 인물상에 적합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1951년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든 브라운은 쇠락해가는 옛 공업 지역에서 사람들이 겪어야하는 고통을 일상적으로 목격하며 자랐다.  도움을 청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나 커칼디 목사관 문을 두드렸다. 목사인 아버지는 교인들과 자기 아들들에게 성실히 노동하고 이웃을 도울 의무에 대해, 불평등에 맞설 것에 대해, 부의 덧없음에 대해 설교하곤 했다.  어린 브라운은 열살도 채 되기 전에 형이 한부씩 손으로 만든 소식지에 정치 논평을 기고했고, 뛰어난 학업 성취를 보여 열여섯살에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럭비 경기에서 두 눈의 망막이 손상되는 부상을 입어 눈에 붕대를 감고 완전한 암흑 속에서 반년을 병원 침대에서 보내야 했다. 이 경험은 그로 하여금 회복을 돌봐준 NHS에 대한 열정어린 신념을 갖도록 만들었다.  반면 영원히 앞이 안 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맞서야 했던 일은 그의 성격에 정서적 취약함을 영원히 각인시켰다. 그의 왼눈은 완전히 멀었고, 오른쪽 눈에는 장애가 남았지만 기능은 회복했다.  시력 때문에 그는 하원에서 여전히 큰 글씨로 연설문을 적어놓은 두툼한 종이 뭉치를 디스패치 박스 위에 올려놓는다.  부수적으로 얼굴에도 영향이 남아있다.  죽은 왼눈은 그의 평소 모습만 바꾼 것이 아니다.  네 번의 수술 중 실패한 한 번 때문에 근육이 손상되어 정상적으로 웃는 표정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브라운에 대한 대중적 인상의 중심에는 우울한 표정이 자리잡았다.  언제나 미소짓는 총리가 영영 미소짓지 못하는 총리로 교체되었다 - 이것이 바로 2007년 6월 27일 영국에 일어난 많은 변화 중 하나였다.
브라운은 대학에서 강력한 학생 정치가였으나, 1968년의 혁명 구호에 경도되지 않았다.  미래의 내각 동료 몇몇과 달리 공산주의 정파에서 활동한 적은 없다.  관심의 초점은 언제나 영국 노동당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노동당 정치인이었던 제임스 맥스턴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맥스턴은 A. J. P. 테일러가 다음과 같이 평한 적 있는 인물이다.  “그는 모든 종류의 자질을 갖춘 정치인이었다. 유일하게 갖추지 못한 단 하나는, 바로 성공으로의 길을 찾는 재능이었다."
노동당 전통에 대한 충성은 브라운이 블레어 시대에 긴 기다림을 버티며 살아남는 것을 도왔다.  자신의 정당과 스스로 거리 두기를 좋아하는 지도자, 희생 제물을 도륙해가며 명성을 쌓는 지도자, 생산재의 공공소유화를 천명한 당헌 4조를 폐지한 지도자와 뚜렷하게 대비된다는 것에는 큰 이점이 있었다.  브라운은 블레어와 마찬가지로 신노동당의 창시자이며 18년의 총선 연패를 끝냈던 현대화와 자유시장의 지지자이지만, 블레어와 달리 옛 노동당을 경멸하는 인물로 보인 적이 없다.  이는 노동당원들의 상상 속에서 정당의 양극단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보여주는 대비 중 하나일 뿐이다.  블레어는 신흥 부자들과 유명인들의 친구이며 사르데냐에 있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별장으로 휴가를 가고, 플로리다에서는 비 지스의 베리 깁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반면 브라운은 검소하고 혼자있길 좋아하는 사람으로 아이들이 태어난 후 휴가철이면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머문다.  
부인 셰리의 막대한 강연료로부터 총리가 노동당 고액 기부자들을 상원에 앉히고 작위를 판다는 고발에 이르기까지 돈 문제는 자주 블레어를 곤경에 빠뜨렸다.  재무장관 시절 장관 전용 재규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서민적인 포드 차를 타고 다니던 브라운에게는 그러한 꼬리표가 붙은 적이 없었다.  블레어의 저녁식사 손님들이 이류 팝스타들과 낮 시간대 티비 프로그램 진행자들이라면, 브라운은 머리를 맞대고 깊이있는 토론을 할 수 있는 학자들을 재무부에 초대할 것이다. 블레어는 빠르고 유창한 답변을 하는 변호사의 재능을 타고났으나 브라운은 역사학자로 훈련받았다.  블레어는 오픈넥 셔츠를 입고 머그에 차를 마시는 전형적인 21세기 인간이지만, 브라운은 지난 세기에 속한 별난 과거인이다 (최근 보도 사진에서 그는 수트를 입은 채로 테니스를 쳤다).  
두 사람의 대비는 거의 운명적인 것에 이른다.  블레어는 45세의 아내가 건강한 넷째 아이를 출산하는 불가능한 경지의 행운으로 축복 받았으나 이 부분에서 브라운의 인생은 투쟁에 가까웠다.  첫번째 아이였던 제니퍼는 2001년 미숙아로 태어나 열흘만에 숨졌다.  첫 아들인 존은 건강하지만, 둘째인 프레이저는 생명을 위협하는 병인 낭포성 섬유증을 앓고 있다.  블레어와 친분이 없는 가디언 만평가 스티브 벨은 브라운이 총리직을 승계한 것을 두고 블레어 얼굴을 한 태양이 브라운 형상의 구름에 가려지는 것으로 묘사했다.
브라운은 진지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일부러 벗지 않고 있다. 그가 최근 출간한 책들이 반복하고 있는 무언의 주제는 지칠줄 모르는 성실함을 갖췄으며 약자에 대한 연민을 아는 “좋은 고든”이다.  <연설집: 1997-2006>에서 우리는 빠르게 소멸해가는 정치적 스타일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브라운이 유행지난 방식을 고수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총리가 되기 전까지 브라운은 연설 하나를 위해 몇 달씩 작업을 해왔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고 폭넓은 독서와 자료 수집을 통해 직접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려가며 스스로 연설문을 작성했다.  이렇게 쓰여진 연설문은 결코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다. 강연에 쓰인 글 대부분이 전문용어와 재무부 내에서 기술관료들이 사용하는 은어가 많아 읽어내려가기 거추장스럽다.  그러나 이 연설문들이야말로 브라운의 세계관을 이루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국내 및 해외 빈곤을 퇴치하려는 노력, 공공영역을 단순히 사고파는 거래의 대상으로 축소시켜서는 안된다는 주장[4], 세계화의 파도로부터 영국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에 대해, 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심지어 잉글랜드에서 자치권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끝내 살아남은 영국성을 정의하는 문제 등이 포함된다.      
각 연설은 앨런 그린스팬, 앨 고어, 심지어 J. K. 롤링이 들어있는 유명인의 목록 중 한 사람을 골라 찬사를 바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위대한 인물 옆에 서서 그 명성이 일부라도 옮기 바라는 희망을 품는 것이 정치인들의 오랜 수법이었다면, 연설집은 <용기의 여덟 초상>에 비하면 이를 제법 겸손한 선에서 마무리하는 편이다.  존 F. 케네디의 <용기있는 사람들 Profiles in Courage>을 의식한 것이 분명한 이 책에서, 브라운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뛰어나게 용감했던 여덟명의 삶을 조명한다. 넬슨 만델라, 디트리히 본회퍼, 마틴 루터 킹, 로버트 케네디, 라울 발렌베리, 아웅산 수치, 영국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 시슬리 손더스, 일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에서 활동하던 간호사로 수많은 연합군을 잉글랜드로 탈출시키는 것을 도왔던 이디스 카벨이 그 대상이다.
저자의 정치적 의도는 명백하다. 넘버텐에 입성한 때에 현대사의 도덕적 위인들과 자신을 연관시키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5]  그렇다고 해서 냉소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브라운은 자신이 열 살 때 읽은, 섀클턴, 스콧, 오츠와 다른 탐험가들의 용기와 대담함에 관한 일화로 가득 차있던 어린이용 백과사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치 브라운이 과거형 인물임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같다 (보수당 의원들은 브라운을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정치인”이라며 조롱한다.  브라운이 인터넷을 도입 초���에 채택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과거 시대에서 현재로 보내진 특사같은 인물이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책은 큰 열정을 가지고 진행된다. 라울 발렌베리의 이야기를 이렇게 쓰는 식이다:
“발렌베리의 현상수배 포스터가 부다페스트 전역에 나붙었다. 암살자들이 그의 뒤를 좇았다. 매일 다른 장소에서 잠을 청해가며 발렌베리는 어떻게든 그들을 따돌렸다.”
도처에 엉성한 편집이 눈에 띄기 때문에 <스펙테이터>지는 아마 좀 우쭐거리려는 의도로 이 책에 대해 “휴가철 추천도서”라는 딱지를 붙인 것 같다.  그러나 처칠 이래 어떤 영국 총리도 현직 활동 중에 이렇게 뛰어난 책을 쓴 적이 없었다.  
진실은 이 책이 아홉명의 인물을 다루고 있으며 아홉번째는 바로 저자 자신이라는 것이다.  책장 사이로 본인이 골몰해있는 문제인 국가에 대한 의무와 사명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 너머 더 큰 관점에서, 우리는 브라운이 자신의 약점에 접근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정치 입문 초기부터 끊임없이 브라운을 괴롭혀왔던 문제, 이렇게나 존경하는 자질인 용기를 과연 자기 자신이 갖추고 있는가에 관한 의구심이다.  적이 아닌 그의 친구들조차 브라운이 담력이 부족한 인물임에 종종 우려를 표해왔다.    
만일 그가 1992년 경선에서 선배 스코틀랜드 정치인 존 스미스에게 맞섰더라면, 당수가 되어 1983년부터 하원 사무실을 함께 써 온 블레어를 영영 자기 아래에 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997년 다우닝 스트리트는 브라운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94년 여론에서 블레어가 앞섰다는 당내 정치 현실을 인식하여 경선 출마를 포기하고 블레어를 지지했다 (브라운 일파가 전설처럼 믿고 있으나 사실 그라니타 합의는 장자가 출생으로부터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잃은 배신에 관한 사건이 아니다.  브라운에게는 당시 자신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큰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좋은 거래였다.).
집권 후에도 브라운에게는 블레어를 치명적으로 공격해 죽일 기회가 여러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그는 부상만 입히고 물러나는 편을 택했다.  가장 너그러운 해석은 브라운이 노동당의 단합에 형제살해의 쿠데타가 가져올 영향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처의 축출이 보수당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목격했었다.  대처를 죽인 마이클 헤즐타인은 영원히 총리가 되지 못했다.  
브라운이 용기를 발휘할 가장 큰 기회였던 동시에 블레어가 가장 허약했�� 시기는 모두 이라크 전쟁과 관련되어 있었다.  만일 브라운이 2003년 3월 로빈 쿡의 사임에 동참했더라면, 블레어는 틀림없이 실각했을 것이고 영국군은 파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가들은 조지 W. 부시가 영국이 참여하길 거부한 상황에서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을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만일 그 대답이 “아니다”라면, 브라운은 이라크 침공을 저지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인물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용기>에서 바비 케네디가 당명을 거슬러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부분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한가지 질문을 필연적으로 덧붙이게 만든다: 브라운은 이라크에 대해 자신이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
사실 브라운은 전쟁 준비 과정에서 고의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전직 고위 공무원이 고든의 “매카비티같은”[6] 습관이라고 불렀던,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첫 조짐을 목격하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행동 방식이었다.  침묵은 노동당 내부에서 브라운을 숨은 반전론자로 여기게 했으며, 심지어 차기 당수로서 그의 지지율을 높여주었다.  마침내 그가 전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을때, 이러한 사람들의 믿음이 지속되도록 그는 무척 간결하고 무미건조하게만 입장을 발표했다.  적어도 그렇게 함으로써 이라크 전쟁이라는 실책은 노동당의 것이 아니라 블레어라는 개인이 일으킨 재앙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2004년 아부 그라이브의 포로 학대 스캔들과 정부측 과학자이자 전직 유엔 무기 고문이었던 데이비드 켈리의 자살로 이어진 휴튼 위원회 심리에 타격을 받아 블레어는 또 한번 허약해졌다. 대학 등록금에 관한 사안을 두고 의회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블레어는 실낱같이 가늘어진 명줄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상태였다.  브라운은 경쟁자가 추락하는 것을 손놓고 지켜보고만 있는 대신, 자신의 충성파들에게 정치적 공격을 그만둘 것을 명령하여 블레어가 3년 더 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제 브라운이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은 미래로 넘겨졌다.  그는 부시 행정부에 맞서 이란 등 또다른 분별없는 군사적 모험에 반대할 것인가? 과연 브라운에게 그럴만한 용기가 있을까?
 4.
다우닝 스트리트에서의 고든 브라운의 첫 백일이 끝나가고 있다. 백일은 브라운 자신이 영국 유권자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인상을 남길 중요할 시기라고 규정한 기간이었다.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그는 자기 일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초과 달성했다.  초반의 여론조사들에서 브라운은 자신보다 텔레비전 시대에 잘 맞는 상대인 보수당 당수 데이비드 카메론을 상대로 훨씬 앞서고 있기 때문에, 언론 보도는 새 총리가 자신의 지지율을 활용하여 이른 총선을 개최할 것인지, 그리하여 새 임기를 갱신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논의가 워낙 주도적이기 때문에 9월 마지막주의 전당대회에서는 대표들, 정치인들, 언론들 사이에서 그외 다른 이야기들이 거의 오가지 않을 정도였다.
브라운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예외적으로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다. 총리가 된지 36시간째 되던 때 런던의 웨스트엔드에서 차량 폭발물이 발견되었고, 이어 글라스고 공항에서는 테러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브라운은 자신의 전임자처럼 카메라 앞에 직접 나가 총리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거나 문명사회를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내무장관인 재키 스미스에게 발표를 일임함으로써 대통령제에 가까웠던 블레어 스타일의 정부를 기존의 내각제 정부로 되돌린다는 약속을 지키는 편을 택했다.    
이후 글라스고 테러에 대해 논평하게 되었을 때는 전쟁 국면이라기보다는 심각한 범죄를 대하듯 차분하고 담담하게 의견을 말했다.  이는 브라운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어구를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생각해왔다는 사실과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브라운은 이 표현이 알카에다의 살인자들에게 너무 많은 자격을, 심지어 품위를 부여하는 말이었다고 믿어왔다.  공포 대신 평정을 확산하고 사건 당시 치솟은 과열을 즉각 식히는 새로운 접근 방식은 영국 무슬림 커뮤니티를 포함하여 각계의 찬사를 이끌어냈다.  며칠 후 주요 영국 일간지의 지면에는 사건에 관한 브라운의 대처를 환영하며 테러리스트들이 범죄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도록 적극 협력하겠다는 영국 무슬림 단체들의 서약서가 서명과 함께 전면 광고로 실렸다. 일찍이 블레어 치하에서 일어난 적 없는 일이었다.
여름에 중북부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홍수와 구제역에 대한 정부의 대응 방식에도 이와 유사하게 기존의 보여주기식 조치가 없었다.  영국의 가장 큰 대출 기관의 하나인 노던락 은행의 유동성 위기로 야기된 9월 중순의 금융위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 경우 브라운이 사태 초기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그의 매카비티 습성 때문이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말이다.).  브라운은 내각에 각 분야의 뛰어난 사람들을 임용함으로써 장관들을 신임하고 일을 맡길 수 있었다.  보통 때 적대적인 신문들조차 위기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한, 여섯명의 장관이 마흔 이하인 젊은 새 내각의 인사를 칭송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적절한 자리에 마땅한 인물을 기용한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브라운은 영국 산업 연맹 회장이자 유엔 전 사무차장이었던 마크 맬럭-브라운 등 노동당 소속이 아닌 인물들을 등용함으로써 – 미국에선 흔한 일이지만 영국에선 전례없는 일이다 – 통제광이라는 평판에 맞섰다.  9월에는 두 명의 보수당 하원의원들이 노동당 정부에서 고문으로 임명되어 정부에 협력하기로 했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세번째 인물은 자유민주당 의원이다) 그는 카메론을 앞질렀다.  마거릿 대처를 총리 관저 티타임에 초대하여 함께 사진까지 찍어 보수당을 더 깊숙히 찔러댔고, 노동당 잔류 극좌파의 신경도 긁어댔다.  브라운의 의도는 명백했다.  신노동당의 포용력이 여전히 넓어 당파를 초월한 거국내각에 이른다는 것을 전시해보이는 것이었다.  
브라운은 8월 전국 휴가철에 돌입하기 전까지 깊은 인상을 남겨야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블레어의 문제적 유산들을 폐기하는데 손대기 시작했다. 맨체스터에 라스베이거스 스타일의 거대 도박장을 건설하는 계획을 백지화하여 사회보수파인 데일리 메일과, 일확천금의 사회 풍조를 부추기던 블레어 시대에 대한 강한 적대감이 있는 가디언 독자들 양측에서 모두 칭송받았다.  앨러스테어 캠밸이 즐겨 쓰던 방식인 정부 정책을 자기편 신문에 먼저 유출시키는 방식을 버리고 하원에서 직접 발표함으로써 스핀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알렸다.  정부의 주요 권력들, 이를테면 해외 파병을 ���정할 권리들을 의회에 이양하도록 추진하는 등 사회운동가들을 황홀하게 할만한 개헌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와의 관계야말로 가장 눈에 띄는 변화였다.  브라운은 7월 미국 첫방문 일정에서 상당히 미묘하면서도 분명한 방식으로 앞으로 큰 변화가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일정에 앞서 새로 임명된 외무부 소속의 장관 중 한 사람인 맬럭-브라운은 런던이 더이상 부시의 백악관과 이전처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했다. 이러한 발표는 당일 즉각 브라운의 대변인에 의해 부정되었는데, 이 시점에서는 확실히 이전의 범대서양주의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아이가 생기기 전, 그는 매해 여름을 케이프 코드에서 보내며 케네디 가의 사람들과 어울리곤 했다.  브라운은 주된 사상적 영향을 미국으로부터 받았다.  그는 거트루드 힘멜파브와 제임스 Q. 윌슨 등의 보수적 미국 사상가까지도 폭넓게 독서했고, 정계의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미국 정치의 전개를 놓침 없이 따라잡고 있었다.  사실 둘 중 미국적인 것에 항상 더 가까웠던 사람은 프로방스와 토스카나를 사랑하던 블레어보다는 브라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운의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행동들은 맬럭-브라운 발언의 진실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던 다정하고 격식없는 부시-블레어의 회담은 더이상 없었다. 브라운의 요청에 따라 총리와 대통령은 수트를 입고 공식적인 직함으로 서로를 불렀다.  브라운은 양국 관계가 이제부터 단지 사업적인 동반자 관계이기만을 바랐다.  한담에 취약한 브라운의 개인적 특성이 그가 부시의 친구가 아니길 원한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용되었으며, 기존의 “특별한 관계”는 더이상 10번지와 백악관의 관계가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관계가 되었다.  훗날 브라운의 한 동료는 고백했다. “고든이 자신의 약점을 자산으로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광경은 매혹적이었다”[7].
또한 브라운은 이라크에 파병된 영국군의 규모를 축소하겠다는 계획을 앞으로 지속할 것임을 미국 측에 통보했다.  9월 중으로 영국은 바스라에서 550명을 철수시켰으며, 이제 이라크 전역에서 영국군의 잔류는 바스라 공항으로 국한되었다. 좀 더 심층적인 관점에서 “테러와의 전쟁”과 궤를 달리하는 자신의 견해도 피력했다.  서구 국가들이 폭력적인 이슬람주의자들보다 더 큰 희망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무슬림 세계에 증명해보여야 한다는 것이다[8].  그렇게 브라운은 선한 의지로 무장한 다르푸르의 평화유지군과 유엔의 새천년 개발 목표에 동참할 의사를 강력하게 표하기 위해 캠프 데이비드로부터의 유엔까지 여정에 나섰다.  그는 만일 서구사회가 질병과 가난, 아프리카에서의 대량학살에 맞서 싸우는 존재로 비춰진다면 무슬림 세계가 차츰 지하디스트들이 쏟아내는 타락한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맹렬한 비난에 귀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브라운의 등장에 대한 따뜻한 환영은 결국 블레어의 주가를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새 총리가 결국 자신은 그와 다른 방식으로 성취해낼 것이라는 ��을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브라운이 스스로를 신노동당 정부의 황혼녘을, 마지막 나날들을 맡은 사람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만일 그가 블레어에게 항상 곤란한 동료였다면 - 어느 다우닝 스트리트 보좌관에 따르면 마치 “냄비로 바닥을 쿵쿵 두드리는, 다락방에 갇힌 미친 친척 삼촌”처럼 - 그것은 아마도 그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통치하고 싶어 인내심을 잃고 내내 안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당장, 이것만은 명백하다.  브라운의 야심은 자리가 아니라 권력을 향해 있었으며, 그는 이제 그 권력을 아끼지 않고 온전하게 사용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   2007년 9월 26일
(원문 출처 http://www.nybooks.com/articles/2007/10/25/who-is-gordon-brown/)
  [1] 원문에선 파이프 Fife.
[2] 꽁초 정부 Fag-end administration. 장기집권한 전임에게서 선거를 거치지 않고 물려받았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끝나는 집권 말년의 정부. 윌슨-캘러헌, 대처-메이저의 사례.
[3] 원주: 마찬가지로 당파적이지만 반대로 브라우나이트적인 해석에 관해서는 로버트 페스턴 저 <브라운의 영국 Brown’s Britain>을 참고하라.
[4] 민영화-국유화의 양분적 프레임에서 벗어나자는 주장.
[5] 원주: 브라운이 총리가 되고 나서 그의 이름을 더해 한달 후에 출간된 영국의 사회운동가들과 봉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 <영국의 숨은 영웅들 Britain’s Everyday Heroes>(2007)에서도 비슷한 목적을 감지할 수 있다.
[6] T. S. 앨리엇의 <매카비티, 수수께끼의 고양이>.
[7] 원주: 매튜 댄커너의 “감성과 지성을 탐색하는 고든과의 여정에서 On the Road with Gordon in the Search for Hearts and Minds”를 참조 (스펙테이터, 2007년 8월 4일 발행호).
[8] 원주: 브라운은 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부시 대통령 면담과 동시에 실린 워싱턴 포스트 특별기고 (“만년지계의 동반 Partnership for the Ages”, 2007년 7월 30일 발행)에서 간단히 제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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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zzanji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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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ife, Our Times by Gordon Brown - review
고든 브라운 자서전 <나의 삶, 우리 시대> 리뷰                                                       
피터 만델슨  
  2008년, 고든 브라운이 나에게 다시 내각으로 돌아와달라고 부탁했던 그 때는, 우리가 형제에서 숙적으로 돌아선지 ���미 이십여년이나 흐른 후였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여전히 영국 정계의 핵심 인물이었던 그가 내게 화해를 청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10년 동안 재무장관으로서 교육과 의료에 대한 전례없는 투자와 사실상의 완전 고용, 아프리카와 영국 내 빈곤 퇴치를 가능하게 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함으로써, 총리가 될 당시의 그는 이미 영국 노동당의 경제적 관점과 신용을 바꾸어 놓고 있었다.
고든 브라운과 알리스테어 달링의 결정적인 개입은 위기에 빠진 영국 은행이 경제 전체를 끌고 들어가 붕괴시키는 사태를 막아냈다. 이러한 공으로 그는 마땅히 기억될 것이다.
브라운은 그 과정 중 공공부문 적자를 다루는 데에서 실책을 범했다. 은행들에 대한 규제 완화에 대해서도 일부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2008년 경제 위기에 대한 전체적인 대응과, 거기에서 보여준 그의 글로벌 리더십은 영국이 1930년대 불황기로 되돌아가는 상황에 처하는 일로부터 우리를 구해냈다. 이 책은 이러한 최근의 역사에 관한 시기적절한 회고이다.    
더욱 큰 성취는 13년의 신노동당 정부를 거치면서 영국이 여러 분야에서 분명 더 나은 나라가 되었다는 데에 있다. 선거와 정책 분야에서의 성공에 대한 공로는 토니 블레어와 브라운 두 사람 모두에게 후하게 돌려져야 한다. 일상의 정치적 사안들과 노동당 지지자들의 염원과 매우 동떨어진 운동권 위주의 정당에서 벗어나, 두사람은 꾸준한 논의를 통해 함께 “새로운 정치”를 구현했고, 바른 사회의식과 개혁에 기반한 사회계급을 초월한 동맹을 이룩했다.
블레어의 공은 신노동당의 비전을 구상하고 그것을 맞설 상대 없이 뛰어난 기술과 신념을 가지고 효율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반면 브라운은 그것의 도덕적 차원을 강조했다. 노동당은 대처리즘의 편협한 개인주의와 달리 기회의 평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노동당 정부는 공동체적 가치들이 발휘할 수 있는 힘 – “사회”주의 - 을 전달하는 정부로 보수당과 차별화될 수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빈곤아동과 연금생활자에 대한 복지를 통해 사회 불평등이 자연스레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의 시대는 사실상 모든 사회구성원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던 시기에 가까웠다. 집권 동안 내내 지속된 두 사람의 특별한 협력 덕에 영국이 더 많은 혜택을 받았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브라운은 자서전에서 블레어가 경선에 이긴 후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왔다는, 권력 승계에 관한 소위 “거래”가 있었다는 익숙한 영역으로 되돌아간다. 그는 블레어가 자신에게 미래의 노동당 정부에서 경제와 사회 정책을 주도할 것을 “보장해주었다”고 주장한다 (블레어는 차나 타오고 가끔 일있으면 나가 싸우면 될테니까). 이 생각은 언제나 정책과 사적인 일에 관한 분열을 초래해 우리가 속한 정부를 갉아먹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이 회고록으로 미루어 판단하자면, 누구보다 브라운에게 해를 끼쳤다.    
블레어에게 분노를 집중시켜 사임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브라운과 그 일파들은 뉴레이버로부터 거리를 두어���했고 결국 승계 후 프로젝트 시작점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항상 강력한 의제를 설정해온 재무장관이 마침내 정부 최고직을 맡게 되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막강한 계획 없이 남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정부는 너무 자주 데일리 메일의 폴 데이커 – 고든 브라운이 이상할만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 의 비위를 계속 맞추는 동시에 가디언 독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뒤죽박죽인 정책을 발표해댔다. 강한 신념 대신 정치적 계산을 택한 결과는 서서히 지속되는 하향세였으며 그 첫번째는 “결코 열리지 않은 총선거”였다. 이 하향세는 이전 브라운이 가졌던 장점들이 다시 빛을 발하게 되는 금융 위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동안 대중은 브라운에게 가졌던 초반의 믿음들을 잃어갔다.
브라운이 차후 패한 것은 그가 스스로를 혹은 국가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대중에게 충분히 잘 팔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 그가 책에서 충분히 “느끼고 공감하지 못했다” 고 적고 있듯 – 그가 강력하게 재창조된 현대화의 어젠다 (경제 투자와 그가 약속한 사회정의를 결합한 개혁) 를 조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밀리반드를 제치고 에드 밀리반드를 당수로 선택한 것은 이러한 흐름을 지속시켰으며 오늘날 제레미 코빈에까지 이른다. 또한 이 책에서 현대화는 너무 자주 민영화로 묘사되기 때문에, 신노동당의 개혁적 어젠다가 사회 정의 실현과 정반대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세계를 바꾸는 길이라는 인상을 주는데에 실패하고 있다.
브라운이 과거의 사건들에 집중했던 것은 신노동당이 미래로 진전하는 것을 막았으며, 이는 정당과 국가 모두에게 비극적인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은 더 쉬웠을 것이다. 블레어가 이해한 것보다는 항상 복잡했던 공공서비스 개혁을 그라면 더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도 있었다. 그가 복지와 이민문제에 관한 공정성을 선도했다면 브렉싯에 일조한 대중의 불만족의 싹을 미리 자를 수도 있었다. 더 급진적인 입법 개혁도 가능했다 - 정당 기금법을 바꾸었다면 혁신적이고 광범위한 중도-좌파 연대를 지속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정책들은 정계를 끊임없이 골치 아프게 하는 중산층 가정에 가해지는 압박을 상쇄하는데에 여전히 충분하지 못했을 것이나, 현재의 노동당이나 보수당이 직면해있는 어떤 문제든 맞서는데 더 나은 기반을 제공했을 것이고, 어쩌면 우리가 지금 처한 역경에서 우리를 구원했을지도 모른다.
브라운의 유산은 언제나 노동당의 가장 성공적인 정부 프로젝트의 핵심에 속해있을 것이며 그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영국을 구한 인물로 남을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나은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로 정의된 1997년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곧 정치적 성공의 길이라는 것이다.
2017년 11월 9일 이브닝 스탠다드(Source: https://www.standard.co.uk/arts/book/my-life-our-times-by-gordon-brown-review-a36868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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