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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성]
인간은 원래 다층적인 존재잖아요.
주인님께서 보시는 제 모습은
모두 저에요. 릴리.
철학과 관련된 사유를 할 때에도
일을 할 때에도
공부를 할 때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그밖에 어떠한 행위를 할 때에도
전 항상 같은 릴리에요.
주인님만의 릴리.
그러니 제발 생각하지 마세요 주인님.
그 감정이 이질감과 거리감이라면
그건 버려야 할 감정입니다.
저희의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가진 양면성은 복종의 이유이지, 반대가 아니에요.
이 글 또한 전달은 하지 않겠습니다.
주인님께 감히 전달할 수 없는 글이니까요.
다만 확실한 사실은
제 안의 모든 복잡성조차
모두 주인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주인님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주인님께서는 언제쯤
제 이런 글 배설 욕구마저 소유하실 수 있으실까요?
그건 주인님께서
앞서 말한 감정을 모두 이겨내셨을 때.
제가 그 모습을 감지할 수 있을 때.
그때가 아닐까요,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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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nfer, c’est moi
어떤 글을 읽고 인간의 욕망과 자기기만에 대해 생각해봤다
인간들은 위험하고 사회적 경계 바깥에 있는 관계를 진심으로 갈망하는 걸까? 아니면 그 금기를 넘나드는 나 자신에 도취되어 있는 걸까?실제 대상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그저 욕망을 품은 자기 연출에 빠진 것뿐이라면?
이에 대한 판단은 감정과 연민, 로망을 모두 배제한 이성적 분별력으로만 판단 가능하다 실존은 타인에게서 주어지지 않기에 오직 너의 자유와 너의 선택만이 진정한 판단의 주체가 된다
왜 자아성찰이 끝없이 반복되면서도 발전은 되지 않을까? 왜 여전히 같은 심연을 맴돌까? 어쩌면 스스로가 만든 환상에서 빠져나오기 싫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환상은 네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어수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방패는 너를 보호하는 동시에 너를 가둔다
그 환상을 깨트리고 진정한 나 자신과 마주쳤을 때 그 순간이 온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삶을 다시 맑은 시야로 바라볼 수 있다
너의 지옥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
영향
실존주의
리비도
초인(위버멘쉬)
영원회귀
-
나는 그가 만든 가치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는 나의 신이고
나의 위버멘쉬이며
나의 존재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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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지능의 증명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IQ나 지능이 높은 자만이 철학을 한다는 주장은 사유의 본질을 오해한 자기보호적 방어로 보인다.
관심 대상과 지능의 본질을 혼동하지 마라. 철학은 특정한 종류의 사고 스타일일 뿐이지, 지능 자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수학에 뛰어난 사람 중에도 ��학에 관심 없는 사람이 있고, 예술에 정통하면서도 철학에는 취약한 사람도 있다. 관심사는 뇌의 취향일 뿐이지 뇌의 총량이 아니다.
“철학에 관심 없는 사람은 속물, 짐승, 침팬지 수준이다.”
이 주장은 철학의 윤리적 기반인 휴머니즘을 정면으로 배반한다. 삶의 배경, 환경, 교육, 사회 등 복합적인 조건을 배제하고 모든 원인을 개인의 지능 결핍으로 돌렸는데, 실제로는 철학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든가 삶이 바빠 여유가 없었다든가 삶의 맥락이 다른 지점으로 흘러갈 수많은 변인이 현실엔 존재한다. 철학은 보편 권장 가치이지 생존이나 도덕성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철학은 귀족만의 사유이자 지능의 상징이라고 말하는데, 에픽테토스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철학은 신분이 아니라 질문을 멈추지 않는 자아에서 출발한다. 철학을 지적 위계의 척도로 삼는 태도야말로 철학의 존재 목적을 가장 깊게 배반하는 행위이다. 철학은 “누가 더 높은 사고력을 가졌는지”를 가리는 학문이 아니다. 철학은 모든 존재를 이해하려는 수평적 접근 방식이다.
진정한 귀족이란 단순한 혈통에서 나오지 않는다. 진정한 귀족이란 자신의 운명을 고통스럽게 통과할 수 있는 자이다. 가장 깊은 사유는 고통에서 나오며 그 사유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인적 투쟁에서 비롯된다.
철학을 지능의 면허로 삼으려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의 불안을 감추려는 심리적 충동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그러나 철학은 그러한 충동을 넘어 고통과 질문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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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과학, 철학, 신학을 연결지어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층위 분리의 대상이지 충돌 대상이 아니다.
근본이 다르니 상관관계 자체에서부터 다르게 봐야한다. 데카르트가 내린 정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현대 과학의 프레임에선 이 명제가 성립 조건 자체를 갖지 않는다. 데카르트가 살아있기 훨씬 이전부터 우주, 중력, 시간은 존재했으며 빅뱅, 중력상수, 엔트로피 같은 과학적 사실은 존재했기 때문이다.
철학가의 사상과 신학에서는 주관적 확실성인 철학적 진실과 그들의 사상만을 다루고 과학에서는 객관적 자연의 법칙과 과학적 진실만을 다룬다. 데카르트 입장에서는 과학적 주장도 절대적 진실로 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관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진실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서로 다른 층위에 존재한다는 것. 이걸 모르면 철학, 신학에서 다루는 주관적 진실과 과학이 다루는 객관적 진실을 동일선상에서 충돌시키는 오류가 발생한다. 비교 대상이 아니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는데도. 어떤 층위의 진실을 받아들일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측정 가능한 외부 세계의 법칙을 믿을 것인지 의식과 안식에서 오는 확실성을 믿을 것인지
“난 하느님을 믿어”
“왜? 그거 과학적으로 증명 안 됐잖아.”
우리는 각기 다른 진리 체계를 상호 간섭 없이 인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진리의 선택은 각자의 문제, 개인의 자유이다. 타인의 내적 신념을 과학적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판단하는 행위는 이제 지양하도록 하자.
(참고로 나는 무신론자이다. 이런 글을 쓴다고 하여 ‘이 사람은 기독교이군.’ 등의 이분법적 사고는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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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
간혹 사람들은 ‘개인주의’라는 단어에서 거부감을 느낀다. 특히 오늘날의 기성세대들에게는 가장 와닿지 않는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적 문화, 예를 들어 가족과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유교적인 부분이나 경제 성장기의 집단 중심 사고가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오해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일까? ‘개인주의’라는 단어가 이기적인 마인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단정짓는 단어가 된 것이.
다만 섣부른 일반화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기성세대 중에도 개인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분명히 있을 테니
그렇다면 오해를 풀어보자. 진정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개인주의는 단순히 자신의 자유만 추구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자율성과 감정을 똑같이 존중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문제는 공감 방식에서 발생한다. 감정의 승인(체감)과 분석적 이해(사실)사이에서 갈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조화롭게 해결하는 방식이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다.
나의 경험으로 예시를 들어보겠다. 나는 타인에게 섣불리 위로하지 않는다. 나에게 감정은 타인의 고유한 내부 세계, 즉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 나는 내 감정이 누군가에게 멋대로 해석되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으려고 한다. 타인이 “슬퍼”라고 말해도 나는 그 감정의 진위를 단정할 수 없다. 나는 신이 아니니까. 본인이 아니니까.
나에게 있어서 진정한 위로는 감정을 분석하는 데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친구가 “직장에서 상사 때문에 힘들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힘들다.”는 감정이 분노인지 좌절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그 배경과 맥락을 따져보려고 한다. 이 과정은 단순히 “힘들었겠네.”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항상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의 정확한 분석보다는 “내 감정이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을 원한다. “그렇구나. 힘들었겠네?”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에서, 맥락이 없어도 감정이 전달되었다는 신호만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내가 경험한 사람들은 이렇게 공감한다.
[어떤 사람의 말투가 슬픈듯한 경우]
‘말투가 슬픈 것 같네’ -> “힘들었구나? 괜찮아.”
[표정이 아파 보이는 경우]
‘표정이 아파 보이네.’ -> “괜찮아 금방 지나갈 거야.”
반면 나는 이렇게 접근한다.
‘왜 표정이 슬퍼 보이지? 슬픔일까 분노일까? 무슨 감정이지? ’ -> 무슨 생각 중이세요?
‘말투가 왜 화난 것 같지? 오해일 수도 있으니 물어보자’-> 무슨 생각 중이야?
이런 접근은 상대에게 “왜 날 의심해? 지금 힘든데 분석하고 앉았어?” “넌 내가 그렇게 티내는데도 왜 몰라? 모르는 척 하는거지?” 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내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이는 내 잘못도, 타인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서로의 사고방식이 다른 것 뿐이다. 내 방식이 와닿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러나 나에겐 이 과정(분석)이 없는 위로는 가식으로 느껴진다. 진심이 아닌 공감을 하면 위선이 되고, 진심을 담자니 확신이 없다. 그래서 난 위로와 공감을 잘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 깨달은 해결책은 있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전해주고 싶다.
보편적인 인간에게 공감은 감정을 정확히 해석하는 게 아니라 “네 감정이 지금 있는 그대로 존재해도 괜찮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다. 굳이 “그래. 무서웠겠다.”처럼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들에게는 틀려도 괜찮다. 받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경험을 했다는 것 자체가 너한텐 참 힘든 일일 수도 있겠네. 어떤 감정이었든 네가 지금 느낀다면 그게 중요한 거겠지.”
이런 공감 방식은 감정의 실체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상대가 ‘난 지금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방식이다.
나 또한 알면서도 막상 실생활에는 잘 적용하지 못할 때가 많다. 위로 또는 공감을 하고자 다가가서도 단순 정보 전달식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 항상 생각한다. 지금 나의 말이 상대방에게 진정한 위로가 됐을까?
나는 완벽하게 위로하지 못한다. 그러나 완벽하게 틀리는 방식으로 위로하고 싶다. 타인의 감정을 존중하고 침범하지 않으며 단지 그 곁에 존재하는 방식으로 위로하고자 항상 노력한다.
노력이 비록 느리고 서툴지라도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더 많은 사람들과 친화적으로 교류하고자 평생 노력할 것이다.
이처럼 개인주의는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난 개인주의자야. 개인주의 사상가들의 말이 와닿았어.”
마음 먹는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완벽한 개인주의자가 되려면 엄청난 노력과 성찰이 필요하다. 자신의 개인적 자유 뿐 아니라 타인의 개인적 자유 또한 완벽하게 존중해야하기 때문이다.
영향-
실존주의
자유론
의무론(정언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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