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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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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6일]
빌어먹을 시간의 소비, 그 연속에서 나는 행복을 위해 앎을 버렸다. 세상의 부조리를 하나씩 뜯어보니 결국 뜯겨나가는 건 간신히 붙어있는 내 살점이었다. 희멀건 뼈가 눈에 들어오자 공포감에 손이 살짝 떨렸던 것일 수도 있다. 정신이 조금 들자, 내가 느끼는 감정, 매 순간의 모멸조차 무시하여야 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행복을 위하다’라는 문장은 정확한 표현이 아닌 것 같다. 아, ‘불행을 면하다’가 적절하겠다. 둘은 극명한 차이가 있다. 행복의 반대는 불행이 아닌, 행복하지 않은 상태일 뿐이다. 또한, 불행하지 않은 것은 행복하다와 결부되지 않는다.
소멸되었다. 모든 감정의 섬세함이, 감성이 머무는 세상의 작은 입자 단위 하나마저도 집어내던 섬세함이 소멸되었다. 크고 무거운 쇳덩이처럼 비릿한 이성의 덩어리만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공허는 더이상 우울의 생산을 반복하지 않는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소모적�� 고뇌의 반복은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자가당착이랄 것도 없이 행위에 선행되는 언어의 작용 또한 멈추게 되었다. 그 소멸에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다.
아마,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면에 일고 있는 충돌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정말 아름답고, 순수한 인간성을 지향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중심에서 울리는 소리를 밖으로 끄집어 내보고자 스스럼없이 목구멍을 통해 바람을 한껏 내뱉었지만, 모든 화학작용이 멈추고 난 뒤 돌아본 암실의 네가 참 부끄럽다. 자기연민과 자의식의 과잉으로 점철된 지난 날의 과오들은 이미 벌어진 상처를 심각하게 훼손시켰고, 그를 불안정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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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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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그저 분노가 필요했던 것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 딛고 있는 땅에 두 발을 지탱하고 서 있다는 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으면서도, 애석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연쇄적인 상실을 안겨 준다. ‘모멸’이라는 단어가 쓰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느꼈던 감정은 모멸이다. 네가 나지막이 던지던 말에 모멸감을 느꼈고, 그 모멸감은 상실감이 되었다. 어떻게 ‘나지막이’ 했던 말에 ‘모멸감’을 느낄 수가 있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김없이 분노하였다. 생각해보면, 대상이 바뀌었을 뿐, 분노는 멈추질 않았다. 끝으로는 두려움과 맞섰다. 따사로운 햇살이 세상의 것들을 아름답게 비춰 내 눈에 들어와 간지럽히는데,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보고 싶지 않은 건 눈을 감으면 되고, 듣고 싶지 않은 건 귀를 막으면 된다. 그날의 나는 너무 감정적이었다. 알리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으면 됐는데, 복합적인 감정들에 북받쳐 쓸데없는 말들을 지껄여버렸다.
항우울제를 집어삼키며 다시 한 번 멍청해져 버린 자신을 본다. 아무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암흑 속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단 하나의 스위치, 조그마한 빛이라도 괜찮으니 눈을 아무리 굴려도 감은 것만 같은 지금의 순간을 모면하고 싶다. 한 발 나아가는 것조차 두려움에 벌벌 떨며, 등 뒤로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 당장이지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감고 머리를 땅에 뉘이고 싶지만 무언가라도 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의 맺음은 없다. 한 가지 좋아진 점은 있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으니, 무엇도 존재의 부정을 부정할 수가 없다.
찾고자 했던 것은 사실 새롭고 영원한 것이었다. 아니, 말이 헛 나왔는데, 영원히 새로운 것. 아니 다시, 새롭고 영원한 것도 좇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욕을 한 마디 뱉어주면 조금 더 지금의 기분을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을 거 같은데. 몇 년이 지났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어설픈 신념을 가지고 설치던 때의 어리석은 행동들에 대한 부끄러움뿐이다. 다양성을 추구한다며, 때로는 합리화의 대상으로 변질시켰던 저 애송이에게 이제는 신물이 난다. 인간이 추하다는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더럽고, 역겨운 저들의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저들 속에 내가 있다.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는다. 영원히 새로운, 새롭고 영원한 것에 대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마저도 적어낼 수가 없다. 요즘은 읽지도, 쓰지도 않는다. 약 기운의 영향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지가 꽤나 오래되었기에 그런 추정은 하지 않겠다. 어지럽다. 습관처럼 SNS를 켜 타임라인에 올라온 아무 동영상이나 보자,하고는 눌러보니 어느 대학교의 축제 영상이었다. 왜 저들은 저렇게나 신이 났을까. 다음 틀었던 영상에서 아내를 잃은 남편의 슬픔을 보았다. 영상 속의 남성은 분명 오열을 하고 있었다. 오열... 그다음은 무엇일까, 무엇인들, 하등 도움이 되질 않는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애꿎은 시간만 탓할 뿐, 시나브로 이 사고의 끝이 다가온다.
[2018.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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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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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잘 읽지 않는다. 쓰지도 않는다. 생각하지도 않으며, 고뇌에 빠져 몇 시간을 잡아 먹지도 않는다. 하는 일이라곤 고작 들어온 생각을 배출하는 일이며, 그것이 잘 안 될때, 우울해 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갉아먹는 일을 반복해서 하다보니 현실이 점점 더 현실같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이 소모적이고, 의미가 없다. 느끼는 감정, 이 빌어먹을 감정도 정말 내가 느끼는 것인지, 내가 느끼고 싶은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심이 생겼다. 머리 속은 하릴없이 지저분해져 가고, 복잡하게 얽혀만 간다. 며칠 전부터는 두통이 잦아졌다. 자거나, 먹거나, 바람을 쐬면 나아지겠거니,하며 버텼지만 더이상 나아질 것은 없다. 시간과 정신을 축내며, 내려갈 길조차 없는 애꿎은 바닥만 노려보고 있다. 무섭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은 아닐까,하면서도 그래, 제발 정신차리자고 수십번을 다짐하지��� 무력감은 항상 내편이다. 차라리 전처럼 욕을 하고, 남탓으로 돌리면 속이 후련해질 것만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든 건 내 탓이다. 상처를 받아도, 그런 상황을 만든 나를 책망하는 데 익숙해져 버렸다. 차마 날카로운 것은 못 들겠다. 이미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꽤나 있는 것 같거든. 상처는 내지 않을 정도로, 있는 힘껏 두 뺨을 후려치면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린다. 아니, 주먹으로 가슴 쪽도 내려쳐야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처음 느껴보는 희열인데. 누군가 갑자기 나를 흠씬 두들겨 패줬으면 좋겠다. 그럴만한 놈이니까. 이렇게 쓰면서도, 정말? 이라며 자문하는 모습이 꼭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애송이같다. 같잖은 게. 어제는 너무 감정적이었다. 그런 말을 후회하면서도, 후련한 건, 이런 사람이란 걸 걱정해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점과 동시에 짐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생 최종 목표는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자살. 굉장히 사춘기의 중학생이 할 것 같은 말인데, 애초에 태어난 것이 불행이다. 생일날, 모두가 태어난 것을 축복해주지만, 탄생의 비애는 바로 상처를 주는 데에 있다. 태어날 때도, 자라나면서도, 이런 생각을 가진 지금도, 끈임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은 나를 미치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는 것은, 특히.
우울증을 가벼이 여기게 된 것은 오히려 내 쪽이다. 나태함을 변명할 수 있는 것은 내 우울증이다.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다면, 기꺼이 세 글자의 정신병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 설명할 용의가 있다. 웃기다. 힘들어 하는 쪽은 난데, 언제나 변명처럼 지껄여야 하는 것이, 일일이 그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 항상 우울해야 한다는 것이, 아, 아무리 지껄여도 나약한 인간이니까. 더 냉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도 똑같이 대했으니까. 누군가 나에게 자신의 증상을 설명할 때 전혀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퉤, 이기적인 새끼, 위선자.
자기 전 입안에 털어넣은 항우울제는 멍청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만 같다. 평안, 그 속에 올라오는 역겨움은 마치 구토를 해야만 다시 평안에 들게 해줄 것 같았다. 어떤 증상이 생기는지를 알아봐야 겠다며, 한동안 굳게 닫아놓았던 책을 펼쳤다. 라스콜니코프가, 루쥔이, 두냐가, 책장에 빼곡히 적혀있는 글자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는 이내 떠나버렸다. 해학적 거북함. 왜, 혹은 어떻게 느끼게 된 감정인지는 신경쓰지 않고, 그저 암울한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May 26,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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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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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
글 속에 자주 친구를 등장시키는 것이 다른 이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 이외에도, 정말로 그들로부터 영감을 받고, 생각의 환기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몇 안 되지만 또한 아끼는 친구가 얼마 전에 올렸던 글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우리는 항상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만, 사실을 다 알게 되었을 때 행복할까? 가끔은 내가 생각하고싶은대로 생각할 수 있고, 내가 믿고싶은대로 믿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건 참 멋지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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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의 추론.
앎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경험적인 것에 비춰 각기 다른 이들의 주관적인 시각을 내포하는데, 절대적 기준으로써 무엇도 평가할 수 없다. 서두에 말한 ‘앎과 행복의 상관관계’ 또한 내가 가진 통상적인 기준일 뿐 어느 누군가가 다른 개념을 제시한다고 해도 전혀 할 말이 없다.
그러므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나의 생각이, 혹은 네 생각이 옳다고 단정 지어 버리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꼰대’의 가장 밑바닥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 지혜를 진리인양 오해하는 것에 있다. 오해의 요인은 각기 다른 사람들의 생활 양식의 차이일 수도, 인종이나, 종교, 성 정체성, 지역, 시대에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이들의 기준에 부합하는 진리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최대한 많은 다수의 만족을 얻어내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며, 더불어 소수를 저버려서도 안 될 것이다.
사실 제일 두려운 것은 어느 시점부터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 철저한 이해관계에 따라 누군가를 이해해 주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관계의 벽을 넘어서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갑자기 대학원을 때려치우고 정치를 시작한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끔찍한 비유지만, 그만큼이나 어려운 일을 오랜 시간 지속할 수 있길 바라는 것은 막대한 노력이 필요할 것임을 상기시켜준다. 그렇지만 지켜내고 싶다.
20대에 들어서고, 가치 확립에 의심이 생긴 후로 스스로 재정립을 하는 시간이 지속되고 있는데,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재정립한 가치들조차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들이 순환되어 결국에는 공황상태로 내몰아 어떠한 의지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그곳에 남은 것은 부조리의 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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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을 추구하지만, 그에 따른 기존에 있던 논리체계 붕괴의 위험성을 감수하기도 해야 한다. 아는 것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는 것도 포함한다.
또한, 자유를 추구한다. 알고자 하는 것을 아는 것 외에,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제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인간의 한계를 동감하고, 안다는 것에 한계가 있다면 우리는 알고자 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친구가 말한 대로, 자유가 있다는 것은 참 멋지고 감사한 일이다. 모든 것을 알아버린다면, 기대하던 마블의 대작, 어벤져스를 보기도 전에 결말을 알게 되는 불행을 맛보게 될 것이다.
마치 지난날들의 지배와 자유 사이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 같달까.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은 자유를 추구해왔지만서도, 모순적이지만, 지배 당하기를 좋아했다. 어떠한 체계 속에 순응하며 그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 인간이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것 또한 나의 주관일 뿐이다.) 앎을 갈망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알지 않을 자유를 필요로 한다. 균형을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듯, 삶 속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서로 모순되는 것들 간의 조화가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
내가 알고자 했던 것은 소외된 자들의 마음이었다.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공감과 포용인데, 그러기 위해서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이해이다. 세상의 온갖 부조리 속에 휘둘리며, 염세적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이 되어야 했다. 비관주의자, 이 틀을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조차 합리화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이다. 사랑으로 합리화하는 자들에게 환멸이 난다고 큰소리치던 나 또한 사랑으로 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방구석에서 그들을 위해 슬퍼하고, 분노하고, 그저 글을 끄적이는 것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그렇게 부조리의 끝없는 생산 속에서 늘어나는 피해자들을 하나하나 모두 수용하자니 점점 지쳐갔다. 감정 노동이 짙어지고, 그들의 아픔의 시발점으로 돌아가 원인들을 파악해 또 다른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자니, 그들 또한 부조리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어떠한 종류의 폭력도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아픔을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도 누군가의 책임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거슬러 올라가 보니 남은 건 신. 신은 그저 우리를 너무나 사랑했던 것이었고, ��경에 이 모든 죄의 시작은 우리로부터 왔다고 하니 총구는 내 머리를 향한다.
간단해지는 일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나의 잘못으로 지고 가는 것이, 예수가 우리를 사랑해서 수많은 죄들의 무게를 견디며 십자가��� 지고 나아가셨던 것처럼. 아니, 내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포장되지 않았으면 한다. 예수가 흘린 땀 한 방울조차 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 내릴 수 있는 최상의 결정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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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비통스러운 목소리를 방문 너머로 들었다. 언젠가 알게 될 진실이라면, 먼저 아는 것이 나을까, 잊혀질 때쯤 서서히 알게 되는 것이 나을까. 누구보다도 강인했던 분이었지만, 덤덤하게 나를 맞이하던 분의 슬픔을 듣고만 있자니, 가슴이 찢어진다. 오후 감성에 젖어버린 것도, 쓸데없이 메모장을 켜 세상에 화풀이하던 것도, 의미가 없지만, 저 슬픔에는 의미가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허상이라며 떠들어 대던 오만이 지금만큼은 옳지 않은 것 같다.
13 Ma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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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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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얼마 전, 아이폰 용량이 300MB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급하게 사진 300여 장 가까이를 정리했다. 늘 해왔던 대로, 사진첩의 처음부터 조금씩 내려가며 이제 기억에서 지워도 되겠다,싶은 사진들을 골라서 삭제를 했는데, 스윽스윽 넘기는데도 내가 어디에 갔었고, 누굴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를 꽤나 명확하게 상기시켜 준다. 사진의 매력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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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사진 찍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매번 누군가가 사진을 찍자고 하면 경직되어 버리거나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어버리는 게 나를 더 위축시켰던 것 같다. 요즘에는 필터가 많이 발달하여 내 가무잡잡한 ���부와 강렬한 인상도 부드럽게 보정해주기에 때때로 먼저 사진을 찍자고 제안하기도 하는데, 그뿐이다. 또, 가끔은 어른들께서 남는 건 사진이라며 매번 나를 종용하시긴 하지만, 뭐, 내가 싫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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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300여 장에 가까운 사진을 지우면서, 올해 초에 갔었던 유럽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우울증으로 허덕이던 시기에 해답을 찾아보자고 떠났던 여행에서 그것만을 제외한 많은 것들을 얻어 온 것 같다. 사람, 추억, 과음으로 인해 안 좋아진 건강과 피부. 조금 진부하고, 오글거리고, 철학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왜 사는가’에 대한 거창하고도 의미 없는 질문의 답을 단조로운 일상으로부터가 아닌,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환경을 마주하면 깨달을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데. 전에도 언급했었는데,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에 만났던 할머니께서 해주셨던 말씀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차피 네 삶이 얼마나 주어졌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현재를 살아,라는 말을 듣고는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질문들을 내려놓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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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삶이 이런 건가 싶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하며 추억도 쌓고, 가끔은 술에 진창 취하기도 하고.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거나, 회의를 느껴 그 속에 갇혀 지내는 것보다 그저 단순하게 살아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겠다,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생각 없이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 속에서 균형을 맞춰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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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아끼는 친구 하나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의 동의 없이 하는 것이 조금은 경솔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친구는 나보다 훨씬 깊은 우울증에 힘들어하고 있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약을 복용하고 있고, 얼마 전에는 입원치료를 권유받기도 했다더라. 진짜 웃긴 이야기이지만, 서로 생각하는 것도 비슷해서 최근에 만났을 때는 반나절 가까이를 사랑과 비관에 대해서 떠들어 댔다.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희망 없음에 대해서. 그러던 중,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삶은 시들었지만, 주위는 밝게 빛나도록 사랑을 나누겠노라고.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기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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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가끔 다른 지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들어보면, 어떻게 해야 저런 행복을 유영하며 살까,하는 부러움이 생기기도 한다. 내가 늘 불행하기만 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들만큼 행복하지도 않은 것 같다고. 그래, 비교가 좋은 건 아니지만서도 모두가 하는 게 비교이지 않는가. 그들이 보는 것들은 조금 더 특별하다고 느껴진다. 같은 것을 보아도 저들 눈에는 아름다운 것들이니까. 내 주위에 유독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은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고도 ‘감사하다’라고 한다. 바람에 날리어 콧속으로 들어오는 꽃내음에도 ‘감사하다’라고. 나도 그러던 시기가 있었지만, 오래도록 사소한 것에 익숙해지지 않고 행복을 느끼는 그들이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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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허상이다. 기쁨, 감동, 행복, 사랑, 슬픔, 불행, 우울, 비관, 이런 모든 감정들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의미 없는 것들이다. 자주 내가 얼마나 회의적인 사람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곤 하는데, 속에 공허가 시작된 이후로 회의란 것을 끊을 수가 없다. 이런 생각들이 온 세계에 전염되면서, 존재 가치에 대해서도 부정하곤 한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기준에 부합하려 얼마나 애를 쓰며, 존재하지도 않는 가치를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 무를 향유하는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표상을 세우는 것에 열광하는 모습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곰곰이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 하다 보면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은 어쩌면 ‘자살’에 있는 것 같다고. 그렇다면 답은 모르는 게 낫겠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서도 나의 견해와 비슷한 도입부를 갖는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벌써 새벽 5시다. 내일은 발표가 있는 날이고, 빨리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 내가 이런 이런 생각을 갖는다고 행동으로 옮길 용기는 없지 않은가.
그래요,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
2 Ma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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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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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에게]
내가 글을 써야겠다,라고 결심한 건 너의 글을 읽고 난 이후부터이다. 그 당시의 나는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생각의 파편들을 한데 모아놓을 필요가 있었고, 그것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핸드폰 메모장에 정리되지 않은 글들을 마구 적어냈다. 맞춤법은 고사하고, 당장 그 당시에 내가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조차 가늠이 되질 않았는데, 워낙 사고의 흐름이 빠른 편이라 그 순간의 생각을 잡아내기가 정말이지 힘들었다. 그 모든 것을 정돈되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의 글에 담아내는 것이 좋은 글을 쓰기에는 이미 글렀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쓰는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글로써 머릿속에 맴도는 파편들을 조합하여 어떠한 공간에 던져 놓고 나면, 그 문제가 해결이라도 된 듯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라고 느꼈는데, 그래서인지, 그때부터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상념조차도 빼놓지 않고 적어내게 되었다.
아, 나는 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라서 같은 학교를 다녔고, 같은 교회에 다녔고,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너와 가깝게 지내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는데, 그때의 너는 내가 지금쯤에야 겪는 문제들을 미리 겪었던 것이다. 그런 나는 너를 쉬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렸던 나에게는 너무 철학적인 질문이었고, 몸소 경험해보지 않았던 현상들이라, 뭔지 모를 열등감에, 애써 부정하려고 했던 것 같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던 나는 그렇게 너를 배척하였다.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안쓰러워하기까지 했다. 그래, 분명, ‘안쓰러워’했다. 너를 동정하는 마음이 있었겠지만, 분명, 분명 그 깊은 곳에서는 우월감이 일었을 것이다. 갖지 못한 것으로부터 나온 열등감에 못 이겨 우월감으로 너를 짓눌러 버렸다. 내가 살아온 인생은 모두 이러하였다. 누군가에게 쉽게 열등감을 느끼며, 그 열등감의 해소는 합리화를 통해 오는 우월감으로. 겸손해야 하는 것을 배워서 알고는 있지만, 허영심으로 가득 차 어떻게 해서든 누군가에게 나의 우월함을 알리기 위해서 고���했다. 나는 이런 교만에 대해서 무지한 것뿐만 아니라 무식하기까지 했다. 알고자 하지 않았다. 추악함이란 이런 것이다.
그 후로도 종종 너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가볍게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고, 때론 학교에서 마주치기도 하였다. 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너는 항상 친근하게 대해줬다. 그럼에도, 너와 마주하는 그 순간, 순간, 나는 우월감을 걷어내지 않았다. 친구로서 마주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도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친구 행세를 하였지만, 속으로는 너를 내려다 보았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이 굉장히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내가 처음으로 느꼈던 수치라는 것의 대상이 너였다. 살면서 처음, 이 지구에서 내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느꼈던 순간이, 바로 너로부터 왔다. 세상의 주인공이었던 내가 조연이 되어 버린 그날, 나는 수치심에 바로 집으로 도망치듯 돌아가 목이 쉬도록 울어 재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러냐는 엄마의 물음에 그냥 너가 싫다고, 학교에 가기 싫고, 전학을 가고 싶다 했다. 너가 무엇을 잘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존재 자체로 나를 괴롭게 하는 너를 경멸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유치하기 그지 없지만.
오랫동안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고, 지금 너가 어떤 상태인지 감도 안 오지만, 이제는 너를 존경한다. 과거 너는 나에게 경멸의 대상이자 수치심을 안겨준 장본인이었지만, 이제 나는 너가 쓰는 글을 읽는 한명의 독자이며, 너는 글을 알려준 고마움과 존경의 대상이다. 오늘 너가 쓴 글을 읽었다. 세상은 앞다퉈 행복을 팔지만, 너는 담담한 어조로 인간의 나약함을 읊조린다. 나는 그런 불행을 사길 원한다. ‘인간 실격’의 요조만큼은 아니더라도, 너가 가진 불행을 직접 읽어 내길 원한다. 너가 판 불행을 사, 나 또한 불행을 팔겠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자. 너는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삶에 일찍이 염증을 느껴 무의미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모순적이게도, 사랑은 되찾고 싶은 그런 심정. 그래, 조금만 더 솔직해지자. 외부의 요인이든, 내부의 요인이든, 너를 변화시킨 것이 너에게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18 April,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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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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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최근들어, 오래된 인연 몇몇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주 적지않은 시간동안 떨어져 지내다보니 조금은 어색할 만한데도, 다시 만나는 그 순간은 너무 포근해서 괜스레 웃음짓게 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며 세상이 변하듯, 앞에 마주하고 있는 사람과 나 또한,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듯, 그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됩니다. 그런 순간들이 빈번하게 찾아 올수록, 알게 모르게 마음 한켠이 아려옵니다. 마주하는 당신과 내 인생의 어�� 한 순간을 함께 써내려 갔던, 그 순간이 그립기도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는 그 순간을 마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지만서도, 저는 압니다.
향수. 세상에는 정말 아름다운 단어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떠한 단어가 주는 인상은, 종종 특별한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특히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가진 단어가 모순적이게도 서로를 대변해주듯이 뜻을 나눈다면, 더욱이 애정이 갑니다.
향수. 향이 나는 액체, 그리워하는 마음. 어떠한 그리움에 사무쳐서 스스로를 잃어가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움을 되뇌이며, 함께했던 시간을 음미하면서 우수에 젖기도 합니다. 향수를 허공에 칙 뿌려서는, 서서히 공중을 떠도는 향을 마시는 것처럼. 그러나 향이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한번, 두번, 들이마시는 공기 속에 희미해져 가는 향을 붙잡기 위해서 몇번이고 조심스럽게 코를 들이밀지만, 향은 이내 사라지고 맙니다.
때론 어지럽게 향수 속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향해 ‘향수가 독하다’ 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은은하지 않게 뿌려댄 향수에 빠져서 저 자신의 향기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이 향수가 원래의 내가 갖고 있는 향인 것처럼, 과거에 사로잡혀, 그 순간을 살고있는 내가 되어, 현재를 잃어버립니다.
끝내 말하고자 했던 것은 향수가 아니었습니다. 아아, 다소 희망찬 이야기를 담고 싶지만, 글이란 것을 쓰기 시작한 때부터 이미 희망이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해야하는 것은 사랑이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비관입니다. 모든 것이 모순이고, 모순이고, 모순입니다.
누군가를 마주하며 이런 가면을 쓰고, 또 다른 누군가를 마주하며 이런 옷을 입고, 애써 입꼬리를 잡아 올려 보이지만, 저는 저를 잃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연극이고 저는 극의 주인공입니다. 공허함에 얼른 이 연극의 끝을 보고 싶지만, 나를 보러 찾아와 준 관객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구토가 나는 이 역겨움을 삼켜내며 꿋꿋이 연기를 이어나갑니다. 진짜 제가 누구인지, 극 중에 설정된 빛나는 저 주인공인지, 무대 뒤에서 분장을 지우며 염세적인 모습을 한 저 사람인지, 이제는 혼란스럽습니다. 아, 모든 것이 권태롭습니다.
확실한건, 저는 병들고 있습니다. 이미 많이 쇠약해졌습니다. 또, 가끔은, 영혼의 일부를 절단당한 것 같은 기분마저 듭니다. 어떤 스위치를 누군가가 꺼버린 것 같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더이상 밝게 빛나지 않습니다.
7 April,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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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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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얼마 전,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타임머신이 개발되어 시간을 여행한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과 함께 어느 시간대의 너가 되고 싶냐는 질문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과거, 제일 빛났던 20살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서, 다시 돌아간다면 20살 말에 시작했던 연애는 하지 않았을 것이며, 우유부단하고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을 고쳐서 조금 더 활발하게 젊음을 누리고 싶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20살이 된 친구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다가, 그 친구가 그럼 너는, 이라며, 이야기의 소재가 떨어져 갈 무렵에, 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사실 그런 질문을 제가 먼저 입밖으로 꺼내기는 했지만,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적잖이 당황하여 한동안은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오분정도 고민한 끝에 50대의 나로 가고 싶다, 라며 썩 석연치않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50대에는 지금 가지고 있는 의문들이 많이 해결 되지 않았을까, 내가 고통받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주를 이루었던 것 같습니다. 안정적인 삶. 저의 아버지가 50대인 것을 감안해 보았을 때, 지금의 젊음과 고민들을 버리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꽤 시간이 흐르고, 지금에서야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자니, 이제는, 삶의 끝자락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이란 것이 허무하고, 그것에 대한 권태가 지금의 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차피 어느 날에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것인데, 지겨운 나날 속에 쏟아져 나오는 구토를 참아가며 언제까지 이 삶을 쉬지 않고 걸어가야 하는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게 이 삶입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주위의 것들을 서슴없이 해치고, 짓밟고, 물어뜯는 이 광경이 낯설면서도, 이제는 친근하기까지 합니다. 되고싶은 내가 되는 것, 원래의 나로 살아가는 것, 어느 것이 진짜인지, 연극 속의 나인지 그 조차도 이제는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나를 위한 삶인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삶인지, 그 주체 또한 불명확합니다.
또, 이 모든 것이 허영심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열심히 살아왔던 것도, 허영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딱 그 정도. 잠깐의 흥분과 성취를 위해 살아가는 것. 다른 이들의 존경을 얻어내는 것. 얼마나 무의미한가요. 지금 이렇게 써내려가면서도 터져나오는 실소를 달리 막을 방도가 없습니다. 삶에 의미가 없습니다.
삶이란 것을 살아오면서 명확하게 정답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이 글을 쓰면서도, 종종 ‘~것 같습니다’와 같이 확신이 없는 말투를 사용하곤 하는데, 그만큼 저에 대해 자신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자신이 없습니다. 삶이 자연스럽게 끝날 때까지, 흐르는 시간에 끌려 가든, 스스로 나아가든, 그 긴긴 시간의 끝에 도달하기까지, 깨어있을 자신이 없습니다.
2 April,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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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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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이것에 대해서 서술하는 게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록이란 것을 해놓고, 나중에라도 혹시 볼 수 있게 된다면 지금의 상태로부터 얼마만큼의 진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가늠할 수 있기에 써보려고 합니다.
술.
저는 술이 좋습니다. 아아, 이제는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누구와 함께하든, 술이 그 자리에 있다면, 어색했던 공기를 어느 정도 환기할 수 있습니다.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한잔, 두잔, 주고 받다 보면 어느새 술기운에 양볼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조차 망각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분명 어떤 주제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서로에게 퍼붙고 있지만, 저는 마치 제 3자가 되어 그런 저의 모습을 지켜보기도 합니다. 아, 지켜본다 하기 보다는 멍하게 바라본다, 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여하튼, 상대가 누구인지조차 헷갈리는 상태에 도달해서는, 그 사람에 대한 묘한 애정이 생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을 나와 함께 한다는 이유로 상대가 사랑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되짚어보면, 분명히 후회할 혹은 부끄러워할 이야기를 서슴없이 주고받고는 헤어지겠지요. 다음에 만나서는 다시 약간의 어색함을 안고 마주하기도 합니다.
한 때는, 정말 한 때는, 이런 상황들의 반복이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얼큰하게 취해서는 몸을 채 가누지도 못하여 비틀거리고 알 수 없는 신음을 앓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깊은 새벽의 공기가 달콤했습니다. 늘 같은 길을 걸어도 새로운 배경이 펼쳐지는 것이, 제가 가장 사랑하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체력이 떨어진 것인지, 건강이 안좋아진 것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그런 상황들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술을 마셔도 ‘얼큰하게 취했다’ 혹은 ‘순간에 녹아있다’라는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술이 들어갈 수록 점점 위축되고, 입이 닫히며, 특기였던 마음에도 없는 리액션조차 쉽사리 나오지 않아, 더 어색해진 공기를 힘겨워합니다.
재미라는 것이 없습니다. 인생의 낙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 없습니다. 술도 공허함을 달래어 주기에는 그 순간조차 즐기지를 못하는 게 재미라는 것에서는 이제 멀어져 버렸습니다.
저의 세상에는 행복이라는 것이 희미해져 갑니다. 이제는 웃음이 인사치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무미건조한 웃음이 전부입니다.
그럼에도 바득바득 이 삶을 살아내는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최근에 내린 결론에 의해서,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살 것이고, 아니, 더 많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살 것입니다.
매우 희망찬 이야기이지만, 정확하게는, 사랑이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 저에게 자살은 더이상 환상이 아니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삶의 이유는 세상의 사랑해야 할 모든 것들이지, 자신을 위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는 이 삶이 매우 고독하고 허무하기만 합니다. 무의미하게 얽혀있는 고리의 순환은 저를 병들게 하기에 너무나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금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뿌리쳐 도망치고 싶습니다만,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행복이란 것이 저의 곁에 있지는 않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이 지겹고 역겨운 삶 속에 놓여있어도 저는 묵묵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18 Mar,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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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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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의 기준]
최근의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난 뒤에 찾아온 평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뭐, 완벽한 평안이 찾아 왔다고 하기에는 살짝 아쉬움이 남지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자기 증오로 꽁꽁 싸메던 시기가 끝이 나고, 주변의 것들을 사랑하기로 했다. 행복이라면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이 일상 속에서 많이 등장하기도 한다. 때론, 이런 변화들이 낯설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표현하기로 다짐했다. 사랑한다면 사랑한다, 미안하다면 미안하다, 보고싶다면 보고싶다, 라고. 가지고 있던 많은 생각들을 잠시 내려두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 중이다.
변화에는 항상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행복하기만 한 삶은 정립하고 있던 많은 기준들을 파괴하고 있다. 내 감정에만 집중하게 됨으로서 얻게 되는 행복에는, 모순적으로 주변의 감정에 좀처럼 이입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공감과 사랑, 이 두가지가 나에게 실증을 느끼게 한 장본인들이자 변화를 제공한 가치들이지만, 모든 기준없음 마저도 공감하고 사랑하게 되어가는 것 같아서 두렵기도 하다.
그렇다면 기준없음이란 무엇일까.
그저 어려운 단어들을 뱉어대며 자신의 주관을 여과없이 풀어내는 것이, 단순히 표면적인 지식에 대한 자랑인지, 심층적인 해석을 통한 성찰 혹은 고찰을 서술해 내는 것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단지, 자신의 상태를, 혹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모든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한 개체의 진실된 모습을 기준이 있는가, 로 평가되어 질 수 있다면 그 가치 속에 내포되어 있는 고귀함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도 기준이 있다. 조건없는 사랑, 헌신적인 사랑.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껍데기일 뿐, 무분별한 사랑과 피차 다를 바 없다. 무분별한 사랑, 기준없는 사랑. 큰 사건 이후로 줄곧 생각하며 이야기 했던 내용은,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자, 인데 이 마저도 뚜렷한 기준점이 없어 계속해서 재정립 해 나가고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한다. 상반된 가치에 대한 강력한 연쇄 작용에 의해서 일어나는 갈등은 기존의 기준들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하다. 그러기에, 더욱 굳건하고 강력한 기준들이 필요하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존중받던 가치들도 변하기 때문에, 시대에 발 맞춰 기준에 변화를 주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도 필요하다. 인류가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기준은 무엇일까.
25 Feb,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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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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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로마에서]
저는 우울증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정해놓은 행복이라는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쉬지않고 달려왔던 삶 속에서 한 걸음을 떼고 나니, 저도 모르게 갉아먹어 왔던 자리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기적이었습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저는 이기적이었습니다. 제 것을 챙기기 위해서 주위 사람들을, 제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계단 하나를 올라가고 돌아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상처들이 보였습니다.
제가 주었던 많은 상처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너무나 쓰라렸습니다. 보기만 하는데도, 제가 너무 아프고, 미안하고, 슬펐습니다. 돌이켜 바로 잡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상처들이 깊은 흉터로 남아 늦었다고 말해줍니다. 제가 상처를 줬는데, 그 많은 상처가 하나, 둘, 아니, 전부 다시 저에게로 돌아 왔습니다. 하나하나가 너무 아팠고, 죽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한달, 어느덧 5개월이 다 되어가네요. 처음에는 정말이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알 수 없는 우울감을 떨쳐 내려고 매일을 어지럽게 살았습니다. 혼자서 우울에 빠지는 시간이 싫어, 닥치는대로 사람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상처에, 고독에, 숨이 턱 막히곤 했습니다.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동안 상처를 하나하나 곱씹으면서 반성했습니다. 아니요, 사실 곱씹으며 슬퍼했습니다. 반성과 참회가 아닌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회의에 휩싸여 슬퍼하다 밤을 지새웠습니다.
불면증이 생겼습니다. 하루, 이틀 잠에 들지 못하자, 어느 순간부터는 어둠과 적막이 두려워 주체할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여 눈물 짓기도 하였습니다. 자정이 지나기 전에 자리에 누워, 새벽 5시, 6시에야 잠이 들곤 했는데 긴 시간의 두려움과 마주하는 것은, 저를 더 갉아먹었습니다.
하루는, 찾아오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방안에 있던 철봉에 목을 올려놓고는 한동안 의미없는 자기 학대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차피 목을 매달을 용기가 없는 것을 알기에, 부끄럽지만, 얼른 자리로 돌아와 아무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저에게 정말 좋은 말들을 해주었습니다. 그 중 제일 위로가 되었던 말은, 우울증은 정신의 감기이며, 누구나 겪는 증상이라는 내용의 위로였습니다. 그 당시 우울증은 저에겐 엄청난 병이였고, 제가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포털 사이트에 우울증에 대해서 찾아보기 시작했고, 많은 부분에서 동일한 증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한결 수월해졌다고 할까요. 아직 가보지는 않았지만 병원을 알아보기도 하고, 약에 대해서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지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드라마를 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속적인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20여일째 여행 중입니다. 상태가 정말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에 마주하게 되니, 정신이 없어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을 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행이 끝나고는 학기의 시작으로 바쁜 나날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최근에는, ���행을 하는 동안에 잊고 지냈던 우울증이라는 무게가 다시금 무거워진 것 같습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이다, 저의 문제임을 알기에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음으로 벗어 났었지만, 종종 찾아오는 성찰로 인해 조금씩 자리를 되찾아가는 기분이 듭니다.
얼마 전에는, 기차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 철로를 보다가 문득,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졌습니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한발짝 뒤로 물러섰지만, 지금에야 생각해보자면 꽤나 위험했던 순간이었다, 라고 느껴집니다. 그 뒤로도, 숨이 턱 막혀올 때가 있는데, 시도때도없이 찾아오는 우울감에, 웃기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람들 사이에서 눈물을 훔치기도 합니다.
저 스스로도 이런 내용을 써내려가는 게 어이없고 믿기지가 않지만, 또, 가끔은 혼자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런 시간이 꽤 오래 지속 되었다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거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음, 저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추운 사람에게 온기를 전해주는 따뜻한 사람이요. 상처가 있는 사람을 안아주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는 그런 사람이요.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상처만 주었네요.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두렵습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또다른 상처가 될까봐요.
11 Feb,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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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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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나는 늘 생각했어,
약자의 편에 서겠다고.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생각보다 나는 가진게 많아. 집이 못사는 편도 아니고,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도 거의 없어. 공부도 곧잘 해왔어. 건강하기도 하고. 기준이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사회에서 바라 보기에는 난 약자가 아니야.
유럽에서 길을 걷다 보면, 구걸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특히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이 구걸하는걸 볼 때면, 가슴이 찢어져. 내가 하나하나 찾아가서 손 한번 잡아드리고, 도와드리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내 그릇이 그렇게 크지는 않나봐. 쉽지가 않네.
늘 하는 말이지만,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걱정할 일 없는. 증오와 혐오가 없는, 그런 세상이면 좋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약자가 되어야 해. 약자를 조금이라도 공감해주고, 안아주는, 그런 사람이 될거야. 지금까지 나는 너무 이기적이었어. 내가 가진 것만 누릴 줄 알지,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고. 그러고는 너는 왜 못 누리냐며 질책하기도 했던 것 같아.
정말 진심이야. 난 약자의 편에 설거야. 모두가 행복해지려면, 적어도 나 만큼은 사랑을 나누면서 살거야.
나는 교육이 우리의 행복을 좌우한다고 믿어.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운 것이 행복은 돈과 직결된다는 사실만 보여주니까 점점 치열해지는 경쟁 사회 구조 속으로 들어간거야. 만약 어렸을 때부터, 가진게 있다면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삶이 행복과 직결된다고 교육받았으면 어땠을까?
그래서 나는 정치를 할거야. 교육을 바꿀거야. 행복이란 기준을 새로 정의하고, 우리 후손만큼은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사회에서 살게 할거야. 경쟁과 열등, 혐오의 시선으로부터 해방시킬거야. 물론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 하지만 지금처럼 정형화된 행복을 갖게 하지 않을거야. 태어난 환경부터가 다른데, 사회에서 말하는 행복은 하나잖아. 돈, 명예. 돈이 있으면 행복한 나라. ‘내’가 있어서 행복한 나라가 되게 할거야.
난 행복하지 않아도 돼. 나 말고 다른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약자들이 행복했으면 좋겠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11 Feb,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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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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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
정립된 가치관들을 무너뜨리고 다시금 하나씩 세워가는 과정에서, 당연시 여겨졌던 모든 것들에 의문이 생겼다. 그 중 하나가 내가 살아야 할 이유고.
어느 정도 가까워진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릴 땐, 종종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무슨 직장을 가지고 싶고, 어떤 가정을 꾸리고 싶은지.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매우 높아서 그런지, 거의 모든 순간에서 이 주제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은 ‘야망’이었다. 나는 야망이 크고,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식의 이야기를 늘어놓았었는데, 지금도 같은 답변을 할테지만, 그 때는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야망은 있지만 “굳이 살아야 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누가 이렇게 물어본다면 당장 나는 달리 할 말이 없다. 뒤쳐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것이 허무하고. 마치 허공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일단 떠난다. 다들 가는 유럽인데 내가 다녀온 유럽이라고 다를까. 조금이나마 기대하는 것은 이번 여행으로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 또, 삶의 이유를 찾는 것. 당장은 새로운 것을 마주한다는 것에 설레지만, 이 여행이 끝나고도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다시 맞이하게 될 어둠이 두렵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Jan 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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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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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이 무기력한 세계에 빠져
간신히 시간만 축내며
오늘도 이렇게 의미없이 하루가 지나간다.
Jan 3,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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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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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아. 수업 가르친 교수야. 내 원래 이메일주소로는 네이버 메일에 잘 안보내져서 내 다른 이메일 통해 연락해.
엊그제 밤에 네가 아래 이메일을 보내고 곧 잘못 보낸 거라고 무시하라고 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메일이라 답장한다.
무기력증이랑 우울증세로 힘들구나. 잠도 잘 안오고... 한학기 동안 수업하면서 ㄱ이를 잘 봐왔지. 그럼그럼~ 네 말대로 밝고 행복한 사람이고 리더십도 있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나가는 그런 친구인거 잘 알고 있어.
너 자신도 지금의 네 모습에 도대체 내가 왜 이렇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면서 무섭고 두려울 것 같은데... 우울과 무기력의 원인은 내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혼자 외롭게 네 삶의 어떤 부분을 견디고 넘어가면서 조금씩 그 우울과 무기력이 다가왔을 거라 짐작한다.
ㄱ이가 생각하는 것 처럼 우울증이나 무기력이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낙인이 찍혀버리는 그런 문제는 아니란걸 꼭 알아줬음 좋겠다. 정말 생각보다 많이, 또 겉으로 봤을 때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이들이 우울증을 경험하고 있어. 또 누구나 한번쯤은 알게 모르게 우울증의 시기를 겪는다고 하더라. 우울증 진단을 받는게 엄청 심각한 정도의 증상을 보여야 하는게 아니라 2주 동안 우울감이나 흥미저하 무기력 등의 증상을 나타내면 진단받는 그런 흔한 질병이야. 마음의 감기 같은 거야. 이때는 자신의 감정, 불안감, 무기력 등이 내 의지로 조절이 힘들어. 감기 때 열, 두통, 재채기, 콧물 등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ㄱ아 나는 네가 꼭 신경정신과나 상담치료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어. 지금  당장 스스로 자신이 컨트롤 되지 않는 그런 모습은 전문가의 도움(특히 약처방)으로 손쉽게 잡힐 수 있다. 너무 그런 상태가 오래가면 지치고 또 몸도 아파질 수 있으니까 우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
우리아버지도 업무 스트레스가 너무 많으셨을 때 불면증에 우울증세에 또 멀쩡한 이가 뽑힐 정도로 고생하셨는데 신경정신과에 방문하시고 약처방을 받으시면서 그 시기를 지나가셨어. 그 이후로는 다시 병원을 찾으실 정도로 힘드신 일이 없으셨고 내년에 정년을 앞두실 정도로 성실하게 회사 생활 하셨다.
신경정신과는 약처방을 우선적으로 해줄거야. 감정조절, 무기력 극복, 불면해소 같은 것을 너가 경험하는 증상의 수준에 맞게 처방해주실 거고, 상담은 좀 더 근본적인 원인과 관련된 인지적, 행동적, 감정적 접근으로 너의 우울감을 다뤄줄거야. 약처방과 상담을 병행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 신경정신과는 의료보험이 적용되고 상담은 안되기 때문에 상담은 비용이 좀 높은 편이야 (1회 1시간정도에 8-10만원). 신경정신과 방문에 관련한 개인 진료기록은 의료법상 임의로 열람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때문에 나중 취업이라던지 이런면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하더라.
ㄱ아. 오랫동안 너무 네 자신을 몰아치며 마음을 혹사시킨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며 자신에게 대하는 '기능'만 해오다 보면 자신의 감정이나 몸의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될때가 많은 것 같아.  조금 스피드를 늦추고 또 도움을 청하면서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지는게 좋지 않을까?
다시 한번 전문가를 찾아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고, 나는 정신과 의사나 임상심리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냥 얘기할 사람이 필요하거나 하면 이메일로 연락줘.
소식전해주면 좋겠다. ㄱ아.
부디 혼자 너무 애쓰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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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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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
요즘은 많이 행복하다. 그냥 행복하다. 내 삶에 만족이 있고 뜻대로 이뤄지는 이 모든게 꿈만 같다.
마음에 병이 생겼다. 행복한 것도 맞고, 만족스러운 내 삶인데도 지울 수 없는 얼룩이 생겼다.
생각하고 바라보고 또 생각하고 다시 바라보아도 행복과 공허는 내 안에 공존하여 서로를 튕겨 낸다.
분명 나는 스스로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온기가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내 온기가 주변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기는 커녕 스멀스멀 올라오는 한기를 해결하기 위해 따뜻함을 쫓아 이리저리 헤맨다.
나름 오래 공부한다고 지껄이는 난데, 아직 앎에 있어서 나는 너무 부족하다. 세상에 구석진 곳까지 빛을 밝히고 싶었는데 내 마음 하나 밝히는 것 조차 버거워 한다. 내가 공부한건 쓸모가 없나 보다.
정말 따뜻한 사람들이 주위에 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할 때면 그저 생각뿐인데도 따스함이 전해진다. 가끔은 스스로 그 따뜻함을 헤치는 사람이 있는데,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다. 도와주고 싶어도 어렵다.
답답하다. 무기력과 우울함이 한꺼번에 찾아오면 해결할 방법이 없다. 혼자 산책을 아무리 많이해도, 정말 많이 고민하고 생각해도, 점점 잘못된 길로 가는 기분이다. 생각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위치에 위치해 있다.
어렸을 땐 다양한 경험, 새로운 것에 혈안이 되어 찾아다녔는데 이제는 회의가 든다. 알게 될 수록 세상에 취하는 내 입장은 더 불명확해 진다.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 어디까지 알아야 할 지도 모르겠고, 이 모든 것의 끝이 죽음 말고 뚜렷��게 정의되는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다양한 분야에서 주장을 하지만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더 어렵다.
Nov 2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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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ur---sault-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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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주변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이 찢어질까.
단지 모두가 행복했으면 할 뿐인데.
누군가 누굴 미워하지 않아도,
그렇게 크나큰 상처를 입는데.
우리에게는 한 순간이지만,
그들에게는 죽을 때까지 상처가 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남는 후회와 향수의 더미 속에서
벗어날 것이다.
아끼는 사람을 잃지 않게끔.
Dec 2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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