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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책, 술, 손, 현존, 사진, 눈물, 질문들의 소낙비, 구름 이야기, 목숨, 웃음, 밤의 상자 속에 이것들이 뒤섞여서 사그라들만 하면 다시 들리는 소리를 낸다고 상상하자. 온몸을 고막으로 하여 밤의 기척에 닿자.”

윤경희, 앤 카슨의 <녹스>에 대하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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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열린 문틈 새로 비친 기억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나뒹구는 낙엽처럼 바스락거릴까. 비행기 지나간 자리로 갈라진 구름 같을까. 꽃 주위를 맴도는 벌들의 위잉거림 같을까. 부는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벼처럼 누울까. 비에 옷 젖듯 할까. 라디오 소리처럼 새어나올까. 언덕길에 멈춰 선 나를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발걸음 같을까. 

기억은 애를 쓰지 않아도 느닷없이 치고 들어오는 시간의 가로지름 같은 것. 눈의 저 깊숙한 곳에서 문득 켜지는 영상의 빛은 대개 바래져 있거나 희미하거나, 아침 햇살보다는 해질녘의 어스름 빛깔을 띤다는 것. 그런 기억들이 문틈 새로 굴러 들어와 상승하고, 부유하고, 나선형으로 맴돌고, 이마를 톡톡톡 치고, 다시금 가라앉아 흘러나간다는 것.

그렇게 새기고 간 만큼이 기억의 소리가 갖는 몸체. 두서없이 새겨진 몸의 낙서 같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