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아버지는 어려운 존재이다.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일만 하는 기계였다. 지독한 고열에 시달릴 때도, 1년에 한 번뿐인 명절에도 어김없이 아버지는 출근하셨다.
하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셨다. 처음 보았다. 두 사람의 격정적인 다툼, 그때 처음으로 두 사람이 인간으로 보였다. 바다와 같은 지평을 가진 부모가 아니라, 울분과 울음을 그리고 감정을 가진 나약한 사람으로. 어머니는 서럽게 아이처럼 우셨다.
누군가 그랬다. 부모는 울지 않는 아이라고. 아버지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셨다. 나는 물었다. 아버지는 왜 삶을 우리에게 주지 않았냐고, 왜 일만 하면서 지독하게 살았냐고, 왜 우리가 농담도 못 하는 서먹한 사이가 되도록 내버려뒀냐고.
아버지는 역정을 내셨다. 내가 뭘 잘못했냐고, 나는 가족을 위해 희생밖에 안 했다고, 너희를 위할 뿐이었다고. 내가 가족을 위해 바친 인생이, 도대체 뭔 잘못이냐고.
복잡미묘한 감정이었다. 그 순간을 감당하기엔 난 너무 어렸었다. 지나고 알았다. 그때 내가 아버지의 삶을 무너뜨린 것을. 그렇게 가족으로 지탱하고 있던 그의 고된 삶을, 나는 말 한마디로 산산 조각 내버렸다. 후회했다.
오늘은 아버지의 카톡이 왔다. '후루꾸 해병 달팽이 크림 좀 사 와' 였다. 전화를 걸었다. 어김없이 들려오는
건조한 대답.
"어 왜"
"휴가 나가면 사 갈게요"
"그래...어디 아픈 곳은 없지"
'그래'라는 대답으로 끝날 거 같았던 우리의 대화는 한마디가 늘었다.
"괜찮아요 전, 더운데 쉬엄쉬엄 일하세요."
"그래...삐삐삐.."
별거 아닌 한마디일 수 있지만, 나와 아빠의 대화 속에 부가된 한마디는 서로에게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하는 말이다.
한마디로 무너진 아버지의 인생을 조금씩 채워드리려고 노력해보련다. 노력은,
200614
집에가고싶다
0 notes
Text
인감도장 12 - 소문과 실토
인감도장[人感圖章, 내가 느낀 삶의 증거]
"필승, 보급 7생활반 아침점호 인원보고..총원 6 부재2 부재내용 휴가2.."
휴가2..휴가!?
진실성 여부에 관계없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사실이나 정보를 '소문'이라 한다. 겨울임에도 쨍쨍한 1월 20일 난 입대를 했다. 공교롭게도 입대와 동시에 시작된 '코로나' 사태는 내 군 생활을 지독히도 방해했다. 물론 지금도.
사실 코로나 여파로 인해 취소된 수료식, 외출 또는 무기한 연기된 휴가보다 더 잔혹한 고통은 무력감이었다.
언제나 "~ 않을까"라는 희망은 어떤 사실이나 명확한 근거에 의한 것은 좆도 아니며, 본인 성적을 한참 상회하는 대학을 꿈꾸며 "이 정도면 00대학 ㅆㄱㄴ?"을 외치는 가능성분자들과 다를게 없었다.
그렇다. 그냥 지들이 '원하는 사실'이 어느 순간 '그럴 수도 있는 사실'이 되어버리고 결국 그럴 것이라는 '확신'으로 돌변한다. 휴가 나가고 싶으면 휴가는 곧 풀릴 것이고 4월부터..아니 4월 중순부터..아니 5월 부터는 풀리는 게 되어버리는 실정이었다. 하지만,당연히 음 그럴 리가 있을 수도...없지.
놀랍게도 최근, 오랜 공백 끝에 드디어 휴가 통제가 풀렸다. 하지만, 이제 문제는 복잡한 절차다. 행정관과 대대장은 중대장을 사이에 두고 5살 먹은 애들 마냥 누가누가 더 센지 힘겨루기나 하고 있었고 더욱이 권력도, 나이도, 빨도 아무것도 없는 애잔한 우리 중대장님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난제에 봉착한 어린아이처럼 행정관과 대대장 그사이? 어디쯤에서 방황했다.
요는 복귀 날짜였다. 수월한 병력 통제를 위해 같은 날에 휴가자들을 복귀시키자는 의견이다. 탁월한 선택이다. 하지만 대대장과 행정관은 그 복귀날이 월요일이냐 금요일이냐를 두고 갈등했다. 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없다 시발. 그냥 대대장은 행정관이 금요일을 주장하니까 월요일이 좋은 거고 행정관은 대대장이 월요일을 주장하니까 금요일이 좋은 거다.
병들에게는 간부와 지휘관들의 설왕설래가 치명적이다. 왜냐 사실 우리 대대는 나라 지키는 해병대가 아니라 해안 노예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병들은 혹사시키는 대대다. 훈련? 안 간다. 사격보다 납품업체 수불 기한을 지키는게 우선인 부대인지라.. 당연히 휴가도 맘대로 못나갈 뿐더러 창고 혹은 과업장당 1명씩 밖에 나가지 못한다.
그 많은 인원들 또한 각자의 휴가 일정이 상이하다. 누구는 5일 나가고..누구는 정기 휴가고..누구는 조기 전역해야 되고.. 그냥 단순히 복귀 날짜 한번 바꾸는게 아니라, 휴가자와 더불어 나같이 제발 선임들이 휴가 날짜를 확정하길 애타게 기다리는 후달들까지 몇십명의 스케줄을 동시에 변경해야 되는 거다. 그와 중에 행정관은 신병위로 휴가와 정기휴가를 합치면 휴가 하루를 삭제해버리는 기적의 계산법을 통해 나외 동기들을 나락에 빠뜨렸다.
그래서 결론은? 단에서 내려온 지침대로 '금요일' 복귀가 확정되었다. 대 군수단장의 지침에 중령이나 상사따리 같은 후달들이 토 달 수 있는 여건이 군대에서? 안되지 안되지.
그사이 스트레스 이빠이받은 우리 상병장 해병님들은 니들이 알아서해라며 애먼 후임들 후까시나 맥이셨고, 그냥 개판이었다.
제발..설레발 그만치고..그냥 때 되면 합시다. 아 그리구 나도 좀 내보내 주세요 젭알~~
0 notes
Text
인감도장 11 - 선택은
인감도장[人感圖章, 내가 느낀 삶의 증거]
#불편하면글을덮어라건조하다웃음기제로
쪼오오옴 오래전에 한겨레에서 한 칼럼을 보았는데, 뭐 글의 요지는 기성 예술가들이 배우자의 희생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작품, 예술을 성장시켰다는 점을 지적했다.
"(중략).세상은 남편 돈 쓰는 아내에겐 무자비할 정도로 가혹하다. 반면 아내의 시간을 가로채는 남편에겐 너무나 관대하다. 오히려 아내의 삶과 시간을 많이 착취하는 남편이 더 성공하게 되기에, 가부장 사회는 아내의 헌신을 더 독려하기도 한다..."
틀린 말이 없다. 사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정치 성향보다는 양심의 판단에 몸을 맡기지만, 그런데도 진보 언론사가 주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에 머리를 긁적이곤 한다. 혹자는 세상을 삐딱하게만 바라본다고 비꼬지만, 막상 들어보면 틀린 말이..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이와 비슷한 삶을 살아간 이의 글을 읽었다. 김향안.
수화에 대한 사랑과 희생. 언론과 대중들에게 그녀는 김환기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며 오직 그만을 바라본 그런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를 향한 마음은 지극했다. 재혼과 개명, 당시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들은 그 하나만을 바라보며 행해갔다.
차별과 희생이 당연시되는 세상에서 사실 그녀의 행보는 기행에 가까웠다. 아무리 세상을 앞서가는 예술인으로 살아가더라도, 한국을 벗어나 이방인으로 살았더라도.
적어도 내가 느낀 것은 하나다. 주체성. 그녀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에겐 그녀의 삶이 오직 희생 또는 헌신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완전한 자신의 의지로 삶을 영위했다. 적어도 그녀에게 수화의 삶을 지탱하고, 그에게 헌신하는 것은 타의적인 압박이나 구조 속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의적이며 주체적인 행동일 뿐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그녀 자신이 원했고 사랑하는 삶을 향해 달린 것이다.
물론 불가피한 측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간혹 보이는 세상에 대한 아쉬움, 한탄이 그러한 마음을 대변했다. 개인과 사회는 한쪽으로 편향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기에, 그녀 또한 분명한 '벽'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타협과 순응 만이 인생을 '쉽게' 살아가는 방식은 아니다. 쥐 죽은 듯 무심하게 살아가는 삶이든, 더 큰 가치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내던지는 삶이든 선택의 문제다. 누군가에게는 부당하고 인색한 삶이라도 그 삶조차 내가 선택했다면, 그러면 된 것이지 않을까.
타인의 시선, 사회의 시류에 편승하기보다는 내 인생에 있어 당당하기를.
사랑이란 곧 지성이다.
0 notes
Text
인감도장 10 - 오천, 자유의 하늘
인감도장[人感圖章, 내가 느낀 삶의 증거]
"아ㅏㅏㅏ잇! 팔꿈치를 박살내라고! 이격! 이격! 이격 소리를 내란 말이야, 이거 안 되겠구만..총원 엎드려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엇!"
"..앜"
(*이격: 총의 후미로 팔꿈치를 치는 행위, 그냥 개아프다.)
단도직입적으로 난 총검술이 싫었다. 해병대 68년 역사의 마지막 총검술 기수임에도 불구하고(총검술은 우리 기수를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그에 걸맞는 자부심과 유종의 미보다는 당장에 퍼렇게 부어오른 내 팔꿈치가 백만 배는 소중했다. 사실 북한군 보다는 교육대장실로 직행해 당장 눈앞의 DI(훈련교관)들에게 찔러찔러앜 즉, 펜검술을 시전해 다 팔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질나게는 무슨 그날도 배식당번이랑 신나게 기싸움 한바탕하고 받은 3/1끼니의..점심을 먹고 주린 배를 움켜퀴고 잠시 생활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맘같아서는 대자로 뻗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DI와의 달달구리한 점심 얼차려는 더욱 싫었다. 더 절망적인 사실은 얼차려보다 더 싫은 총검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 머리는 온통 그녀 생각이 아닌 어떤 꼼수를 써서 이 난관을 헤쳐나갈지에 대해 오만 편법과 상술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총원 주목, 본인이 사회에 있을 때 엑셀에 특기가 있었다.. 2층 현관으로..이상"
엑셀?은 잘 모르겠고 불현듯 머리 속에 떠오른 '과업열외'의 희망에 이끌려 등불을 향해 달려가는 불나방처럼 '훈병류동완!'을 외치고 달려갔다.
이제는 말할 수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엑셀은 소대장이 기대하는 완벽한 로직과 깔끔한 함수 전개랑은 거리가 멀었고 그저 SUM함수같은 사칙 연산이나 끄적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다분히 도전적인 나의 객기에도 불구하고 소대장들은 그저 자신의 일을 병들에게 던질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네 엑셀 잘 하냐? 나랑 주말이나 밤에 작업 좀 하자!"
..?
주말이나 밤. 물 마시는 시간도 통제되는 이곳에도 그나마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인 밤과 주말.. (항상 모든 리스크를 고려합시다 여러분)
머릿속의 행복 회로는 허상일 뿐이다. 기대했던 과업열외는 무슨 신이 난 소대장은 그날 풍악을 울리듯 더욱 신나게 총검술을 휘둘러댔다. 당연히 빼빼로 같은 내팔이 견뎌낼리 만무했다.
주말 오후, "아..아 주목, 엑셀 작업원은 2층 소대장실로.." 때가 왔다. 동기들은 밀리고 밀렸던 신변이나 정리하건만 왜 나는.. 아흑. 물론, 같이 선발된 2명의 동기와는 이미 역할 배분을 끝냈다.
1명은 그냥 밖에서 엑셀 좀 끄적인 평범한 아이였고, 나머지 1명은 그냥.. 컴퓨터에 환장하는 진성 컴돌이였다. 그는 독립선언문 선포하듯 대담하게 자신이 모든 일을 맡겠다며 호언장담했다. 그랬다 사실, 그에게는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편지 몇 장 쓰는 것 보다는 소대장의 노예가 되더라도 컴퓨터 앞에 앉는 게 더욱 행복한 일상이었다.
우리는 그의 제안에 뭐 나쁠 거 없다는 식으로 동의했으며 소대장의 말동무나 되겠다고 맞장구쳤다.
작업 시작과 함께 동시에 컴돌이는 폭풍작업에 돌입했고, 난 옆에서 날 좋은 주말에 당직이나 서고 있는 소대장의 신세한탄이나 들어주고 있었다. 모두가 예상하듯, 결론은 되도 않는 몇 가지 자기 자랑으로 귀결되었으며, 1도 재미없다는 나의 불안한 눈빛을 읽은 소대장은 이내 의자를 지구 끝까지 재낀 뒤 오침을 즐기셨다.
여전히 컴돌이는 세상 모두를 가진 표정으로 작업에 열중했다. 문뜩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일어서서 멍하니 바깥 풍경이나 관조했다. 그렇게 멍이나 죽때리고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훈련소에 입소하고 나에게만 주어진 첫 번째 자유였다. 푸른 하늘과 진한 솔 냄새. 나른하면서도 청아했던 그날의 공기. 다양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1분 1초 속에서 처음으로 얻은 '내 시간'이였다. 물론 소대장의 코골이는 옥의 티였지만..
모든 것이 통제되고 제한되는 훈련소의 시계 속에서, 아주 짧게나마 되찾은 나의 1분 1초. 오천의 푸른 하늘과 늦겨울의 청아한 공기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소중했다.
2월의 어느 주말 오후에.
1 note
·
View note
Text
인감도장9 - 최고령 막내를 위하여!
인감도장[人感圖章, 내가 느낀 삶의 증거]
최고령 막내를 위하여,
교육훈련단에서의 길고 긴 6주의 시간이 끝난 후, 2주간의 병장 놀음..이 아닌 후반기 교육으로 인해 내 기합은 빠졌다기보다도 흘러내렸다. 훈단에서의 배고픔과 외부 세상에 대한 결핍은 피엑스의 달콤함과 꿀같은 티비 시청으로 어느 정도 상쇄된 지 오래고..언제 그랬듯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었고 나는 애먼 코로나 때문에 취소된 출타(외출)만을 곱씹고 있었다. (20000희...)
바깥세상의 시간은 빨랐다. 시국드립의 트렌드는 반일 시국에서 반균 시국으로 쏜살같이 급변했다. 물론 안쪽 세상의(군-대) 시계는 핸들이 고장난 8t 트럭처럼 도저히 속도를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지겨운 생활이 제발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찰나, 진짜 그날이 오고 말았다. 병장놀음에 진절머리가 나있었지만, 막상 전입 갈 생각에 또 앞이 막막했다.
후반기 없이 먼저 실무로 직행한 보병 동기는 전화를 통해 인생이 끝난 듯이 힘들어했고, 우리 존경하는 *성종환, 이승민 선임해병님께서는 "동완..이제 진짜야.."라는 의미심장한 말씀들을 남기시곤 했다.
(*먼저 갔다 온 친구들)
어찌 됐든 시간은 갔다. 결국 그날이 왔고 난 누가봐도 어리버리티가 나는 *하쎄이 손에 이끌려 군수단으로 왔다. 왔다 진짜. 곧 바로 행정관실로 갔다. 면도날처럼 예민해 보이는 행정관은 전라도 사투리로 귀찮은 듯이 생활반으로 가라고 했다. 잠시만 지금?
(*하사를 지칭하는 ���어, 아쎄이와 하사가 합쳐진 말로 아쎄이는 신병을 뜻함)
엥? 잠시..이건 쫌?...신고법은 무슨 맞선임 얼굴도 모르는 상태로 난 꽃봉을 매고 혼자서 터벅터벅 중대 복도를 지나갔다. 문 앞이다. 순간의 기지를 발휘해서 어떻게든 내맴대로 신고를 했다. "필승! 신고합..니다. 이..병 류동완 교육훈련단에서...어.. 군수단 보급대대로 전입을 명받았습니다."
무서웠다. 이 글의 주인공이자 생활관에서 가장 처음 눈을 마주친 '그'는 병 1246기로 상병 2호봉의 기합돌이였다. 180이 넘는 거구의 몸에는 1999년 세기말 소년의 귀여움 따위는 없었으며, 난 그저 그가 뿜어내는 짬기운에 짖눌려버렸다.
비교적 온화한 성향을 가진 다른 선임들과 달리 그는 유독 차가웠다. 그가 감내해야하는 역할 때문인지(군에서 일말상초의 계급은 기강을 다잡는 계급이다. 쉽게 말해 악마 역할), 본디 그렇게 차디찬 인간일까나.
"'네'라고 대답하지 마라"
"네?...;;"
"아니 '네'라고 하지말라고. 몇 번 말하냐..?"
"ㄴ..아 아니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한마디로 진짜 개무서웠다. 그의 눈빛은 일주일 동안 굶주린 호랑이 새끼마냥 이글거렸다. 통상적으로 신병은 군기를 잡기 위해서 초반에 아무 이유없이 욕을 먹곤한다. 다행히 그는 아무 이유없이 쿠사리를 먹이는 피곤한 캐릭터는 아니였으나, 신병이 뭘 알겠나. 내 행동 하나하나 모두 그의 먹기 좋은 사냥감이였고, 합당한 문책이었으나 그는 그럴 때마다 나를 절벽으로 내몰았다.
"너 왜 손 안 드냐"
"죄송합니다..."
"아니, 왜 안 들었냐고.."
"..."
왜. 사실 군대 오기 전에 '왜'라는대답이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놀랍게도 우리 행동의 98%는 그냥 하는 거다. 딱히 반박의 여지가 없다. 과거를 반추해도 뭐 사는 게 그냥 사는 거지..명확한 reason을 품고 살지는 않는다. 그는 항상 나에게 할 말을 뺏어가는 마법 같은 스킬을 시전했으며 나는 그때마다 망부석처럼 서서 '죄송합니다'를 복창했다.
일주일의 적응 기간이 끝나고 어느 정도 중대 분위기나 생활에 익숙해져갔을 때, 그와 다른 선임의 대화를 잠깐 엿들었다.
"야 우리 동완이는 왜 안 챙기냐?.."
앞 대화의 내용은 뭔지 모르겠으나 내 귀에 맴돌았던 단어는 '우리'. 뭔가 기분이 복잡했다. 일주일 동안 *후까시만 먹다가 처음으로 들은 칭찬이었다. 그보다는 사실 '우리'라는 단어에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내가 이 조직의 새로운 일원으로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욕, 쿠사리와 비슷한 의미의 은어)
며칠 뒤 그는 나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주었다. 별거 아니지만 내 일병 진급을(4.1일 진급) 앞두고 준비한 선물이었다. 당연히 곱게 주진 않았고 장난스러운 후까시와 함께 츤데레답게 오다주웠다를 시전하셨지만.^^ 툭 내던져진 티셔츠 하단에는 조그마한 자수가 박혀있었다.
'최고령 막내를 위하여'
알고 보니 그는 겉으로는 악역을 자처하나, 누구보다 정 많고, 후임을 잘 챙기는 참선임이라는 것이 중대 내에서 그의 평판이었다.
일찍이.. 군대는 역할 놀이 인지라 사실 초딩이 오더라도 나보다 선임이면 어렵고 무서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더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악용하지 않고 어린 나이에도 선임으로서의 모범을 나에게 보여줬다. 군대에서 참 많은 걸 배울 거 같았고, 그의 모범적인 행동과 마음에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고맙다 동생아ㅜ 따흑
0 notes
Text
인감도장8 - 서울행2
-
인감도장[人感圖章, 내가 느낀 삶의 증거]
-
[1편에 이어…다음 날, 나는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
서울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환기미술관이었다. 수도승과 같이 답답한 구미 생활에 진절 머리가 나있던 차에 머리를 ‘환기’하러 갔다.(깨알 펀치라인) 내 텀블러 계정의 배경 사진에서도 알 수 있지만 김환기의 작품은 절대 모방할 수 없는 ‘푸른빛’이 존재한다. 이른바 환기블루라고 불리는 데 그 오묘한 색은 절대 잊을 수 없었다.
-
여기까지만 읽어보면 자의식이 약간 과잉된 청년처럼 보일 수 있으나, 나는 절대 김환기의 작품이 132억 원에 팔렸다는 소식을 배제하고..는 무슨 사실 ‘뭐길래 저 인간의 그림이 132억 원이라는 기념비적인 가격에 낙찰되었을까?’라는 생각이 앞서서 갔다.(예술품 투자에 관심이 많음@.@) 운이 좋게 40주년 전시가 연장 전시 중이었고, 역시 비싼 놈은 다르구나를 느끼며 부암동의 청아한 공기를 뒤로하고 승민이와 진형이가 있는 돈암동으로 떠났다.
-
예술혼으로 가득할 거 같았던 서울행은 진형이와 승민이를 만나자 깨져버렸다. 진형이는 오자마자 짖어보라는 다소 황당무계한? 요구를 했으며(물론 장난)술을 먹자며 회기역으로 달려 나갔으며 한라토닉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태훈이를 만났다. 강태훈은 모든 대화의 끝을 ‘동완이 너 좆됐어’라는 결론으로 귀결시키면서 나를 놀려먹었다. 부정할 수 없는 명제 앞에, 내 입은 묵묵히 쓰디쓴 레몬을 할짝댔다.
-
귀가를 앞두고 승민이의 병이 도졌다. 승민이는 세이렌의 노래 소리에 배를 바위에 처박는 선원들처럼 입간판에 이끌려 미아에 있는 별이 빛나는 밤으로 향하였다. 시간은 새벽 2시 반, 신기한 게 지역 탓인지 시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높은 연령대의 분들이 리듬을 타고 계셨다. 하지만, 눈치 없는 DJ는 창모의 메테오를 틀며 자신이 굉장히 ‘힙’하고 멋진 사람임을 과시하는 표정으로 한 쪽 귀에만 해드폰을 끼고 담배를 폈는데 매우 별로였다… 메테오의 전주가 흘러나오자 뭔지 모르지만 대충 신나는 승민이는 분위기에 취해 고성을 질렀고, 힙찔이인 나와 진형이는 환호했다.(우리는 노래들으러 갔다^^)
-
이 눈치 없는 DJ 덕에 어리둥절해진 형, 누님들은 하나둘씩 사라졌고.. 결국 승민이와 진형이는 무려 별밤의 마감을 찍고 나왔다. 새벽 5시.
-
나는 불편한 속을 부여잡고 침대에 누운 뒤 생각했다. 아, 큰일이다. 그렇다, 포천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2시간 뒤네?
-
결국, 자는 둥 마는 둥하며 술기운에 쓰러져 자고 있는 승민이를 뒤로하고 당산으로 갔다. 아흑 속아파.
0 notes
Text
인감도장7 - 서울행1
-
인감도장[人感圖章, 내가 느낀 삶의 증거]
서울행 - 1편, 기생충의 습격
구미로 귀향한 후, 그 어느 때 보다 화목하던 우리 가정의 평화는 바람 위 등불처럼 위태로워졌다. 우리 부모님은 가정의 필요적 역할만을 강조하셨다. 즉, 느슨한 관계를 지향하며 서로에게 개인적 삶을 존중해주자는 취지이다. 평소 고향에 자주 내려가도 '그만 와라'라는 말을 되풀이하실 뿐, 우리 가족에게 살갑게 '우리 아들 왔어'라고 말하는 것은 영화 속의 픽션일 뿐이었다.
집안의 사정은 이러했다. 동생은 학교 졸업 후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 잠시 쉬는 중이었고(백수1), 아버지는 ���한기를 맞아 내년 봄을 위해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으며(백수2), 나는 성스러운 나라의 부름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백수3). 그렇다, 각자의 사정이 중첩되어 약 5년 만에 우리 식구 4명이 한집에 장기투숙?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인간은 같이 살면 싸운다는 인류의 자명한 이치 앞에 우리 가족 또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기생충들의 습격 이전에, 어머니는 양육과 내조로 보낸 지난 20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그야말로 인생의 전성기를 보내시며 솔로 라이프를 즐기셨다. 하지만, 기생충들의 급속한 습격은 어머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속세에 모든 미련을 버렸다듯, 쿨하게 집안의 경제권을 어머니에게 넘기고 떠난 아버지는 폐위 직전의 고종처럼 엄마 눈치보기 바빴으며 (낭만의 귀농은 미디어의 허상입니다 여러분)동생은 곧 터질지도 모르는 가정의 위기를 예견하고 부산으로 도주했다.(동생은 참 이런 면에서 눈치가 빠르다)
물론, 나는 입대로 인해 약간의 면책권이 있긴 했다. 어머니는 나를 군대에 보내며 걱정하시기보다는 내가 개고생할 생각을 즐기시며 나에게 약간의 연민을 보내주셨지만, 이러한 면책권은 이내 금방 소멸되고 말았다.
결국, 나와 아버지는 백두산 4차 폭발을 막고 국민의
안전과 가정의 평화를 지켜낸 이병헌, 하정우 콤비처럼 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나가기는 무슨, 아버지는 괜히 엄마한테 받은 눈치를 애꿎은 나에게 풀었으며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인 우리 부자의 특성상 나 또한 맞불을 놓으며 으르렁거렸다.
기생충들의 쓸데없는 분쟁은 이제껏 가만히 방관하며 참고 있던 숙주의 인내심을 폭발시켰고, 급격한 위기감 속에 결국 나는 핸드폰 앱을 켜 가장 빠른 서울행 기차를 예매했다.
다음 날, 나는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1편 끝
0 notes
Text
인감도장6 - 추억은 가슴속에
-
인감도장[人感圖章, 내가 느낀 삶의 증거]
얼마 전 지인들로부터 왜 sns 게시글을 올렸다 지우냐는 질문을 받았다. 기술문명의 급속한 발전을 거부하고 안분지족하면서 사시는 자연인의 삶을 매우 존경하긴 한다만 사실 나는 sns를 거부한다기보다 sns에 속박된 존재에 가깝다. 잠을 자기 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독서 아니.. 유튜브를 키고 아침을 페이스북 칼럼과 함께한다. 당연히 내가 올린 게시물에 좋아요가 찍히면 그윽한 미소를 띠며 내심 만족하는 나 또한 물론
이처럼 디지털슬레이브?라는 표현이 더욱 잘 어울리는 나이기에 사실 얼마 전까지 게시물 삭제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라떼 한잔 하자. 지금이야 페이스북이 자칭 애국공신 아재들이 댓글로 치고받고 싸우는 곳이지, 라떼는 말이야 명실상부 가장 힙한 sns였다.
창업자인 마크 주커버그는 21세기형 창업의 신화 같은 존재로 격상되었으며, 시가 총액은 오랜 인고 끝에 하루에 수십 센치씩 자라나는 대나무처럼 단시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아무튼 내 십 대 후반과 이십 대 초반의 대부분의 기록은 페이스북에 박제되어 있었다. 그렇다.. 박제..
어느 순간부터 대부분의 친구들이 프로필에 '삭제' 또는 'x'를 표기하거나 모든 사진을 삭제한 후 이름만 덩그러니 남겨 놓으며 '이제는 이 구닥다리를 이용하지 않습니다'라고 직/간접적으로 명시하고 있던 시점에도 나는 나름 알차게 이 매체를 이용했다.
지나치게 상업화되어 되도 않는 여드름 치료 후기와 누구의 지령을 받아 작성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협찬이라는 화장품을 들고 찍은 사진과 별로 궁금하지 않은 '리얼 촉촉 수분 충전' 후기들로 점철된 과거와 달리 꽤 알찬 텍스트들와 영상들이 여전히 연재되었고 속된 말로 클린?해진 상태에 꽤나 만족하며 이용했다.(역시 인간은 해롭다.)
하지만, 방심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바로 내 게시물과 타임라인이다. 수 많은 다크히스토리가 있었지만, 가장 충격적인 게시물을 꼽아 보자면..옛 애인과의 이별에 '죽고 싶다'라는(인격이 좀 많이 미성숙한 중딩 시절, 오해말자..)그야말로 미친 멘트를 날렸던 게시물과 H모 대학 재학 시절 후배들이 내 타임라인에 남긴 인사글이였다. 버벌진트가 말을 꽤 막하던 시절의? 옛 트윗으로 아직까지 고통받듯이 나도 그럴 것 같았다.
휴먼 다큐영화에서 한량 백수의 과거가 전국구 건달이었던 것 처럼의 나의..어두운 과거를 꺼내자면 라떼는(오늘 라떼를 참 많이 마신다) 후배가 선배의 sns에 무조건 인사를 남겨야 하는 악습이 있었다.(외에 다수, 보고 반성하세요) 음..아찔했다. 정확히 sns에 기록된 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인성이 개박살났으며 21세기 윤리의식에 한참 뒤처진 꼰대였다. 뭐 대단한 인성을 타고나서가 아니라 나는 사실 사람이랑 엮이는 일 자체를 싫어하고 또 결정적으로 '3초 사과'라는 내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겁이 많아서 그런 짓 못한다. 나서서 한 적은 당연히 없고. 또한 '안녕하세요' 보다는 '밥먹어요'라는 말을 나에게 더 자주 했던 후배들의 언행에서 비롯해봤을 때..나는 절대 누군가에게 인사를 강요한 적 없는 사람인데 누군가가 단지 그 글을 보고 나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 두려웠다.
아무튼, 반성하실 분들은 반성 좀 꼭 했으면 좋겠고 쓰다보니 삐딱해졌네. 에헴ㅁㅅㅁ
부끄럽거나 혹은 내가 아닌 나의 모습이 남겨지는 게 싫었습니다. 쩝
추억은 가슴속에
0 notes
Text
인감도장5- 나의 숲
- 인감도장[人感圖章, 내가 느낀 삶의 증거]
http://www.hani.co.kr/arti/hanitv/hanitv_general/919088.html?fbclid=IwAR3XV9dtjAb-tZSvgk56fSyT6asRtOuM4xHIhpA1LQHpGbU8gy7_DhBW7pA
“어디에서 무얼하든 온전히 내가 ‘나’일 수 있는 곳. 저마다 품고 가꿔야 할 각자의 ‘작은 숲’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본다.”...<본문>
-
영화의 배경이기도한 경상북도 의성군은 나의 조부와 아버지의 고향이다. 자연스레, 어린 시절부터 나의 ‘할머니집’은 의성이었다. 더욱이 내가 살던 구미와 아주 가까워, 봄에는 고추를 심으러, 여름에는 사과 꽃을 따러, 가을에는 수확을 도우려고 자주 가곤 했다.
-
왜일까, 어렸을 때는 참 싫었다. 슈퍼는 고사하고 마을에 구멍가게 하나 없었다. 무엇을 사려면 읍내까지 차로 나갔어야만 했다. 때때로 tv 신호가 고르지 못하면 KBS도 안 나오는 지역이었다. (인터넷 초일류 대한민국에서 이 무슨일인가)
-
하지만, 성인이 되고 이곳을 떠난 뒤에야 어느새 내 마음에 ‘작은 숲’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20살, 선배들의 괴롭힘과 학교에 대한 불만에 가득차 반수를 고민할 때도
21살, 처음 겪어 보는 사회생활에 혼란스러워할 때에도
22살, 한 조직의 장으로 누군가를 이끌어 나갈 때에도 이 숲은 언제나 나에게 열려있었고 도시와 사람들에게 지친 나를 위로해주었다. 무엇보다 현실의 나를 잠시 떼어놓고 깊은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다.
-
이제는 나의 ‘작은 숲’이 얼마나 소중하며 고마운 존재임을 알기에 언제나 그자리에 묵묵히 있어줘서 감사하다. 아무래도 난 다시 돌아가봐야겠다.
0 notes
Text
진중권 - [펌]촛불은 뭘 위해 들었던 거야?
공수처 논란의 본질.
. 보통 사람들은 ‘공수처’라는 제도에 대개 견해를 형성하는 데에 필요한 전문지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자신이 신뢰하는 정당이나 그쪽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해 제 견해를 결정하게 되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진보진영에서 공동으로 설정한 의제이니 별 생각 없이 공수처의 도입에 찬성을 했습니다. 우연히 금태섭 의원의 글을 읽어본 후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진보진영에서 목숨 걸고 도입하겠다는데, 굳이 반대하지는 않는다.’ 정도의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벌써부터 여기저기 문제점이 눈에 띄나,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어 참조할 선례가 없는지라 ‘제도’라기보다는 차라리 ‘실험’에 가까운 셈인데, 일단 운영을 해가면서 차차 보완을 해야겠지요.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이 법이 충분한 사회적 논의 없이 통과부터 됐다는 것입니다. 아마 민주당 지지자들은 ‘공수처가 왜 필요한지?’에 관한 이야기만 들었을 뿐 ‘이 제도에 어떤 문제가 따를지’는 못 들어봤을 겁니다. 반면, 자유한국당 지지자들은 공수처의 위험성에 대해서만 들었지, 그 대안에 대해서는 아마 들은 게 없을 겁니다.
여당이 저러면 야당이라도 잘 해야 하는데, 답답한 것은 자유한국당입니다. 싸움을 ‘논리적’으로 해야 하는데 자꾸 ‘물리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물리학은 수학이라던데,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여러분은 물리량이 부족합니다. 산수도 못하나? 그런 식으로는 이길 수가 없어요. 일단 공수처는 위헌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헌법에 예정되지 않은 기관이 헌법기관인 검찰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은 사실 좀 이상하거든요. 그러니 이걸 소재로 ‘반문재인 세력을 결집하느니 마느니’ 하는 멍청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헌재로 가져가세요.
이미 법이 통과됐으면 인정해야 합니다. 공수처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 칼이 여러분을 향할까봐 걱정된다면, 그것을 자기 인생 더 깨끗하게 사는 계기로 삼으세요. 공수처가 권력의 부패에 눈을 감아줄 거라 우려한다면, 그냥 놔두세요. 푹푹 썩게. 곪은 상처는 언젠가 터져 나옵니다. 그때가 바로 여러분의 ‘때’가 되게 하세요. 조국 사태로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으로 내려가도, 거기서 떨어져나간 지지가 여러분한테는 안 가잖아요. 맨날 하는 얘기가 ‘문재인 빨갱이’, ‘김정은 비서’, ‘국제적 왕따’. 지겹구요, 왕따는 너희들이세요.
어차피 문재인 정권, 이미 자정능력 잃었습니다. 염치고 체면이고, 윤리고 도덕이고 다 갖다 버렸습니다. 감시해야 할 진보언론도 어용이 되었습니다. 한겨레신문 기자 하다가 청와대 들어가 부동산투기부터 하고, 그 짓 하다가 들통이 나니 ‘명예회복’ 하겠다고 출마를 한대요. 누구말대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노무현 정권과 구별되는 문재인 정권의 특징은, 비위를 저지르고도 아예 부끄러하지도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윤리의 기준 자체가 사라졌어요. 이 분들, 니체주의자예요. 선악의 피안에 사십니다.
그나마 내부에서 바른 말 하는 이들은 내버려 두지를 않지요. 친문 친위대들이 떼거지로 몰려들어 대통령이 인가해주신 “양념”을 처댑니다. 그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은 매일 매일이 ‘크리스탈나흐트’입니다. 조금이라도 친문실세의 이익을 해치는 일체의 언동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의원들은 이 조직된 좀비들이 심술부리면 공천 받는 데에 지장이 생깁니다. 그러니 의원 노릇 계속하려면 이들에게 아첨할 수밖에 없고, 그럴수록 좀비들은 기고만장해 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래요,
그래도 자유한국당 정권보다는 깨끗하다. 예, 맞습니다. 아직은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까요? 벌써부터 지난 정권에서 시청했던 드라마의 재방송이 시작됐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여기서 더 깨끗해질 가능성이 클까요? 아니면 더 더러워질 가능성이 클까요? 조만간 우리는 과거와 다르지 않은 정권을 보게 될 겁니다. 그러면 그때는 우리는 근본적인 회의를 하게 되겠지요. 도대체 정권교체는 왜 한 거야? 촛불은 뭘 위해 들었던 거야?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