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m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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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lieve stories can take us anywhere we want to go. Writing a story is like living someone else's life I know nothing about, but it simultaneously feels so real in that I miss someone I never know. I constantly want to wander in the language I create. The world I meet there is actually my past, present, and future." ©미로 Astral Tome, dancing tempus: 'Tempus'는 라틴어로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이야기는 사람의 삶, 시간을 담고 있다고 믿습니다. 모두의 시간을 응원합니다. 마음이 투명하면, 마음을 보여 줄 용기가 나서, Dancing Tempus에 쓰는 사적인 글은 다소 두서없이 올라옵니다. ©2020-2024. Astral Tome.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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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You #2. 별이 될 만큼 우뚝 솟은 산맥
뜨거운 햇볕에 달궈진 자잘한 돌을 밟으며 집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아니 어쩜 나는 어마어마한 세계에 반짝이는 순간들을 살면서도 머나먼 곳에 마음을 두고 온 듯 먼 곳을 바라본다. 나를 향한 나의 마음을 아무리 모아도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다.
위로가 필요한 나는 마음을 초월해 그 누군가에게 다가가 속삭인다.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이군요.
당신 곁에 있으니, 마음이 놓여요.
그리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름답지 않은, 반짝이지 않는 내 자리로…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포근하고 풍요로워 보일지도 모르는 그 자리로.
요즘은 한가로이 별을 바라보며 지내고 싶다. 아무것도 못 느끼더라도, 그저 한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별만 바라보고 싶다. 그 아늑함과 막연함, 마음을 덜컹 내려앉게 만드는 그리운 밤의 그림자...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잠든 이 밤에도 내 세계는 여전히 운행 중이다. 초조함, 불안감, 실패, 상처를 준 상처, 전하지 못한 미안함... 고.단.하.다.
그럼에도 아침이 오면 있는 힘껏 일어나, 고단한 몸을 이끌고 내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일상에서 해야만 하는 일을 해내겠지.
한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새벽까지 깨어 있었고 낮에는 밤에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아 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몸이 욱신거리고 아프다. 곰곰이 생각 중이다. 선뜻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살 수 없으니, 마음이 더 꿈틀거리는 방향으로 가도록 조금 더 기다려 보지 뭐. 어쩜 따뜻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르니.
‘할 수 있다!’라는 말은 양면성을 띠는 것 같다.
적어도 나한테 그 말은 종국에야 진실인지 아닌지 판가름이 나는 말처럼 들린다. 할 수 있고, 할 수 없음이 나에게 달려있다는 게 위로가 된다. 끝까지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진실이고, 중도에 포기하면 할 수 없기에 거짓말처럼 들린다.
몇 달 전 읽은 책에 글귀를 오늘 다시 읽었는데 참 예쁘다.
어쩌면 큰 산맥들은 자신들이 예전에 다니던 길들과,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면서 자신들만의 하늘의 길을 가고자 했던 소망의 흔적을 보여주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산맥들은 별이 될 만큼 우뚝 솟아 있지요.
노발리스, 푸르꽃 중에서
내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마음들이 나의 산맥들이다. 매일 만나지만 품은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고, 한 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알게 되는 마음들이 있다.
나는 별이 될 만큼 우뚝 속은 산맥이 되고 싶다.
그리하여 어두운 밤, 누군가에게 희미하더라도 빛을 비춰주고 싶다.
그리하여 또한 하늘에 나만의 별자리를 가지고 싶다.
오늘 하루는 어제보다 해내는 시간이 조금 더 길었다. 익숙한 궤도 안에 머물면서, 원래의 내가 누구인지 단단하게 붙잡았다.
초월이라는 단어가 참 거창하게 들리지만,
그리할 수 없는 순간에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
그리할 수 없는 순간에 이기적이지 않는 것
그게 초월이 아닐까...
Dear You,
당신의 옆에 있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나 자신으로,
당신 자신으로 머물면서,
하늘길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별자리에 소망을 둡시다.
그 하늘 길도, 그 별자리도 서로 연결되어 있을 테니.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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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You #1 궤도
책을 읽을 때 버릇이 있다. 가장 먼저 첫 문단을 읽는다. 그다음 마지막 장에 마지막 문단을 읽는다. 그리고 나서야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간다.
어둠을 떠올려보라.
태양의 반대 편을 향한 어둠 속에서 언어를 잃은 영혼 하나가 깨어났다. 완전한 혼란에 휩싸인 그는 어떤 패턴도 알지 못했다. 그는 언어를 몰랐고 이 어둠이 밤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
그는 집을 떠나는 것인가. 아니면 집으로 향하는 것인가?
스크린 아래로 새벽이 찾아오며 일순간 티끌 같은 별들을 배경으로 동쪽 바다가 금빛 초승달 모양으로 반짝였다. 거대한 패턴 틀에 놓인 보석처럼. 그리고 틀과 패턴은 산산이 부서지고, 장벽을 통과한 작은 배는 시간에서 벗어나 심연을 가로질렀다.
환영의 도시 중
고요한 밤, 오로지 나 뿐인 시간!
어릴적부터 밤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고단한 나를 건너가는 시간이었다. 이제 나처럼 제법 나이가 많은 이 밤도 생각이 조금 줄어듯 법도한데, 여전히 생각이 많다. 이것이 꿈을 꾸는 자의 통곡인가...
제 뜻대로 살았는데, 어째 아직 헤메는 것인가...
밤이 질문을 던졌고, 난... 내 뜻대로 살지 못했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저 침묵했다.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같은 시간, 같은 어두움, 비슷한 바람 소리와 묵직한 밤의 소음...
용케 오늘도 여기까지 왔군. 그래 오늘은 답할 작정인가.
넌 또 내게 묻지.
낮의 잔열이 남아있는, 미지근한 밤의 열기 속에서 나는 엉뚱한 대답을 해. 과거도 미래의 나도 아닌, 지금의 나를 생각해 볼 거야. 꿈속에서도 그리지 않았던 이 길은 뭐지? 매일 걸어도 추억하나 새겨지지 않는 이 길 말이야. 마치 꿈이 현실 같고 현실은 꿈 같아.
나와 꼭 맞는 마음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하늘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거지.
근데 말이야, 그 하늘길을 이 땅 가운데서 찾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란 말이지.
그래도 찾고 싶어.
나는 아주 오랜 밤동안 떠나 있었던 궤도로 다시 돌아와, 별을 향해 마음을 돌린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말을 내뱉어.
여태 속이 많이 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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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바람, 산책, 우주를 여행하는 별빛
나는 온도와 향에 민감하다.
겨울이 다가오면 여전히 좋다. 여전히 아이처럼 크리스마스가 주는 행복한 분위기와 설렘이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내게 말한다.
이대로 모든 것이 멈추고 세상에서 사라져도 괜찮다. 나는 아마도 지금 듣고 있는 노래처럼 랄랄라~하면서 흥겹게 떠날 것 같다.
사유하는 바람이 되어도, 추억을 가진 구름이 되어도, 하늘의 한 부분이 된다면, 그것도 우주의, 저 멀리 존재하는 할 말이 많은 별빛이 되면 더 좋을 듯하다.
한 가닥의 불빛을 던져 여행하는 별빛.
겨울의 토론토가 그립다.
그 도시가 내게 주었던 어떤 미래에 대한 계획과 실수와 착각,
난 그런 토론토가 좋았다.
물론 예전과 많이 다르겠지.
그러나 아마도 조만간, 혹은 언젠가는 별 이유 없이 가보지 않을까 싶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많은 미래를 마음에 품고 다가가, 꿈을 품게 했던 하버프론트에 앉아, 여태 내 삶에 대해서 말하겠지.
옳고 그름이 아닌, 성공과 실패도 아닌, 그저 어떤 삶을 살아가는 나에 대해서.
늘어난 주름과 사라져 가는 젊음, 그리고 미래와 함께 다가오는 어떤 오묘함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겠지.
‘넌 여전히 혼자야. 그리고 넌 여전히 계획이 많아. 그건 변하지 않았어.’ 라고 말하겠지.
그리고 지금 내가 사는 이상한 도시에 관해서 잠시 이야기를 하겠지.
그렇게 딱 몇 시간만 있다가 다른 도시로 갈 거야. 하룻밤은 조금 지루해지니까. 토론토가 다시 싫어질지도 모르니.
내가 보고 싶었던 건, 토론토를 떠나기 전 사라진 추억이 있던 카페와 창가가 전부이니.
무언가를 보기보다 그저 확인하러 가는 거야. 그곳에 여전히 나의 마음이 남아있는지 말이야. 있다고 해도 소용없지만, 그냥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는데, 굳이 그 감정을 다시 한 번 더 마주치고 싶은 거야.
그리고는 내일을 향해가듯 다른 도시로 가는 거야. 거기에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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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탁동시(啐啄同時)
마음이 무어라 소곤댔다. 미미한 파문이 일고, 혼자지만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마음에 태연하게 행동해야 했다.
어제는 새벽 5시가 되어야 겨우 잠들었다. 카페인 탓도 있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그럼 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아무것도 없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싶은 마음도,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친구를 만날 마음도 없다. 그럼, 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라는 생각을 꾸역꾸역하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그저 감정이 없는 사물이었으면 한다고.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려면, 어미 닭이 밖에서 쪼고 병아리가 안에서 쪼며 서로 도와야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관계 안에서, 우리는 시시각각 다른 입장에 놓인다. 어떤 관계에서는 어미 닭이 되었다가, 다른 관계에서는 병아리가 되겠지. 만나는 인연마다 이런 관계가 될 순 없을까… 서로 도우며 해방되는 사이.
“나”라는 자아 안에서 살다가, “너”라는 존재로 인해 밖으로 끌어당겨지는… 내 삶에 그런 존재의 부재로 인해, 난 조금 더 무상한 기분을 자주 느낀다.
나는 부지런히 글을 쓰지 않는다. 책을 쓰는 데 보통 몇 달이 걸린다. 대신 글을 쓰는 공백이 길다는 것. 어쩌다 보니 책을 한 권을 더 썼고, 다시는 쓸 수 없을 것 같은데 늘 쓰고 싶은 글이 생긴다. 이번은 제목부터 확고하다. 내용 전개도 뚜렷하다.
오늘은 그동안 낙서처럼 쓴 글들이 너무 많아 분야별로 글을 쓴 후, 내용에 덧붙이는 방식으로 작업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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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된 세계 밖
아마도 두서없는 글이 될 듯하다.
나는 머릿속에 해야 할 일이 항상 상황별로 구체화 되어 있어서 계획이 없는 날이 거의 없다. 생각해 보면 살아오면서 가장 애쓴 일이 어떤 상황에서도 글을 쓰는 것, 혹은 내용 전개나 등장인물을 생각하는 것이다. 가령, 책에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등장인물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이나 장소, 식물, 색깔 등 그 사람의 세계를 이루는 작은 부분까지 자세하게 생각해 본다. 누군가 그 사람에 관해 물어보면 잘 아는 사람처럼 말해 줄 수 있도록…. 그러면 어떤 행동의 동기가 생겨나고, 거기서 이야기가 뻗어나간다.
글을 쓰고 싶지만 시간이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어느 환경이고 상관없이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미래를 향한 노스탤지어는 토론토, 뉴욕, 런던, 파리, 베네치아, 피렌체, 프라하, 서울, 울산, 통영, 토론토, 뉴욕, 우즈베키스탄, 다시 뉴욕과 토론토로, 여러 도시를 거쳐 틈틈이 방황하듯 썼다.
그에 비해 지금 쓰는 글은 거의 이동을 하지 않고 있다. 지겨울 만큼 고정된 곳에서,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을 상상하며 쓰고 있다. 그래서 매일 지나다니는 거리의 풍경이 중요하다. 쓰레기를 얼마나 치웠는지, 꽃은 며칠째 활짝 피었다 지는지, 벌레가 얼마나 많은지, 냄새는 어떤지, 유기견들은 어떻게 됐는지, 마트에 새로운 과자가 들어왔는지, 작은 덩굴 숲을 이루고 있는 구역의 위협감(비록 햇볕이 쨍쨍하지만)과 나무의 푸르름,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의 인상 등, 다소 일상적인 것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이런 생각을 하며 산다. ‘계속하든가, 그만하든가... 잘 해내든가, 그렇지 못하든가... 결국, 일은 노력한 결과의 차이일 뿐이다. 내가 쓰는 글도 그렇다. 열심히 써보지만 안되면 어쩔 수 없다. 단지 쓰는 행위가 내게 진실한 '위로,' 마음을 들여다보는 어떤 ‘시선’을 주기에 계속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난, 내가 깊이 사유할 수 있고 나의 일부인 것들만 쓸 수 있다.’
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실존주의 작가의 책은 ‘선택’이 아닌 ‘이끌림’이었다. 한 사람의 생애가 사라져가는 순간들이 책 속에 있다. 하지만, 한 인격체로 나를 의식하기 전, 성경이 이미 내 삶의 기반을 다지고 있어서, 어떤 책을 읽든 기독교적 관점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 관점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내게 종교는 선과 악의 극명한 차이가 아니라(물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성경적 기준은 있지만), 오히려 천천히 삶에 스며드는 위로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의미를 모를 때, 그들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선악을 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의 열매를 먹은 후 그들의 삶에 선과 악이라는 분열이 생겼다.
존경하는 작가이자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가 쓴 『창조와 타락』에 보면, 선과 악, 즉, “tob”(토브)와 “ra”(라)는 단어는 인간세계에 속한 상극성, 즉 분열성에 대해 말한다.
tob는 “쾌락적인”인, ra는 “고통에 가득 찬”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근본적으로 이 단어들은 한 쌍으로 사용되며 그 상극성 가운데 서로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tob는 쾌락적인 것/선/아름다움이고, 이것은 이미 ra, 고통스러운 것/거짓 속에 잠겨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고통스러운 것/악은 고통을 비로소 철저한 고통으로 만드는 희미한 쾌락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p.115)
선 가운데 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이 소멸하는 것이다. 그러면 악 속의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악이 소멸하는 것이다. 인간과 세계가 tob와 ra 사이에서 겪는 분열과 모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자신이 죽음에 처할 때 가지는 고통이요, 쾌락이다. tob와 ra를 알게 된 인간은 그 순간 자기 죽음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선과 자기의 악 속에서 죽는다. 그렇다면 죽음(Totsein)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음 받은 존재의 파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더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p.117)
tob와 ra로 갈라진 세계에 대한 지식은 오직 죽음 속에 있는 것이다. 선, 악을 알게 하는 열매로 인해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진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명의 비밀은 하나님께 간직되어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 이야기가 우리 자신과 상관없는 어떤 원시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그런 도전을 받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한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성서의 아담의 이야기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우리의 이야기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는 홀로 있다는 느낌을 거의 가져보지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홀로 있다’라는 느낌은 인간적인 외로움과 다르다. 내가 자주 혼자 있어서, 사람들은 내게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나는 즐거운 내향인이다. 꼭 누군가와 무언가를 함께하지 않아도 충분히 즐겁게 살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하나님과 동떨어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주 극한 외로움 속에서도 나를 바라보는 그 존재 안에서 울고 슬퍼한다. 오터번에 혼자만 아는 비밀 장소가 있다. 오터번의 여름은 더워서 지치는 것이 아니라, 잠을 설치기 때문에 지친다. 새벽까지 찾아오지 않는 한 여름의 밤은 적어도 내게 낮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여름 방학 동안 늦은 저녁까지 산책을 즐겼다. 오후 3시에서 4시쯤 시작된 산책은 저녁 8시가 되어서야 끝나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나를 바라보는 존재 안에서 걷고, 느끼고, 질문을 하다 작은 방으로 돌아오곤 했다.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아주 극단적인 분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내게 그분은 상당히 마음이 넓고 끝까지 사랑하는 분이시다. 하지만, 항상 용서하는 너그러운 존재라고 잘못을 저지르고 용서만 바라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으레 사랑하게 되면 조심하는 법이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대상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거나, 마음으로 속이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믿음의 표현이다. 어디에서든, 홀로 있을 때조차,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한때 알고 지냈던 사람은, 내게 세상적인 책을 많이 읽으면 좋지 않다고 충고했다(내 삶에는 나를 오해하고 충고하려 드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러나 내게 책은 작가가 제시하는 주제에 대한 의견이다. 나는 내가 알고 싶은 질문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고, 비교하며, 다양한 의견을 듣는다. 그들의 생각이 나의 것과 비슷할 수 있으나, 전혀 같다고 할 수 없다. 책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세계관은 그나 그녀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그들의 세계에서 어떤 분위기를 느끼고─간혹 덜어내고 싶은 찝찝함도 느끼지만─ 공감하면서 독자로서 나의 자리를 지킬 뿐이다.
그들의 삶을 아는 것이 내게 해로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장폴 사르트르 『닫히 방』과 『악마와 선한 신』,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알베르 카뮈 『행복한 죽음』과 『시지프의 신화』,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 외에도 수많은 소설을 읽지만, 그의 삶은 그의 것이고, 나의 삶은 여기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단지, 그들의 아픔과 부조리를 알고, 다른 독자들이 그러했듯 나 또한 그 순간에 함께 있을 뿐이었다.
tob와 ra.
그 분열성 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화해”라고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한다. 분열 속에서 세상과 타인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앞에서 살아야 한다.
나는 수많은 사상가의 글을 읽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지만, 캄캄한 마음에 적절한 답을 해 준 것은 성경과 디트리히 본회퍼의 책이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받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나의 희미한 기억의 잔재 속에 남아있는 건, 나를 사랑해 주는 나의 신과 다행히도 그 사랑을 잘 받은 나 자신이다.
나는 『창백한 푸른 점』이나 『코스모스』를 읽고 또 읽는다. 존재의 이유를 찾아 방황하는 책 속 사람들과 함께 걷고 그들의 생각을 듣는다. 그들은 반대 방향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과 같다. 우리는 방황하는 세계에 사는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고, 서로 다른 끝을 도출하기도 혹은 같은 결말을 도출하기도 한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언제나 마음에 불안이 끼어든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의 상태와 상관없이 끝까지 알고 싶은 인간이 되고 싶다. 이 세상 너머에는 보존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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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나는 태어날 때부터 잠을 잘 자지 못했다고 한다. 한 살에도 눈을 초롱초롱 뜬 채 주위를 응시했다고 한다. 잘 울지도 않아서 잔다고 착각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나는 불면증이라기보다는 아마, 그냥 잘 자지 않는 성향일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세상이 복작복작했던 십 대나 이십 대에, 늦은 밤이 되면, 잠들지 못하고 헤매다 떠오른 사람이 너였다는 문자를 받곤 했다.
“왠지 너는 안 자고 있을 것 같아서.”
“나 안 자고 있어.”
늘 재지 않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 친하든 덜 친하든 중요하지 않았다. 늘 문자의 마지막 문장은 내 것이었다. 끝까지 안부에 답하고 인사를 해야 마음이 편했다.
외국을 가면서 핸드폰을 없앴다. 오랫동안 전화기 없이 살다 보니 연락이 끊긴 사람들이 꽤 많다. 지금은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그게 딱히 불편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몇 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큰 고민이 장소였다. 어느 순간 살고 싶은 곳이 없었다. 지금도 매한가지다. 정 붙일 곳이 없다. 어디를 가든 집이라는 느낌이 없다. 마치 누군가의 삶을 빌려 사는 듯 어색하고 쉽게 지친다. 그런 기질 탓에 어느 곳에 도착하면 이내 떠나고 싶어진다. 잠깐 머물 사람처럼 마음을 편히 내려놓지 못하고 기웃거린다.
최근 본가에 다녀왔다. 갈 때마다 기분이 다르다. 대기의 온도와 빛의 강도, 꽃과 식물의 푸르름, 구름의 양과 하늘의 색, 소음에 따라 생각도 달라진다. 어떤 날은 과거에 집착하고, 어떤 날은 현재의 내가 붕 떠 있고, 어떤 날은 나이가 든 내가 이 집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십 대에는 그랬다. 회한 속에 사는 듯 늘 멀리 떠나고 싶었다. 동요하는 마음을 붙잡은 건, 그곳의 달과 별이었다. 새벽에 조용히 밖에 나가 꽃이 만발한 마당에 앉아 오래오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집을 둘러싼 담벼락과 잠긴 대문은 어둠이 주는 두려움을 적절히 차단했다. 산등성이에 머리를 빼꼼 내미는 달을 보고, 바다 아래로 침몰하는 듯 사라지는 달을 보았다.
늘 일기를 썼다. 나는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기보다,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던 것을 지금은 안다.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누군가의 마음이지 멋진 장소가 아니었다는 걸. 어른이 돼서 했던 긴 여행은 어쩌면, 비록 그때는 몰랐지만, 그 그리운 마음을 찾아 나선 용기 있는 여정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매번 실망하는 여행을 했나 보다.
우리가 사라지는 순간은, 단순히 어느 장소를 떠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나이가 드는 건 삶이 주는 질문에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대답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이제는 사랑을 돌려줘야 할 나이라고 생각한다. 멀리까지 가야만 알든, 가까이에서 눈치를 채든, 크든 작든 삶이 내게 준 무언가를 (사랑 같은 추상적인 것이든, 물질과 같은 물리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내어주고 싶다. 마지막 떠나는 여행을 홀가분히 준비하고 싶은 생각이 짙어진다.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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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nn Gould - Beethoven, Concerto No. 5 in E-flat major op.73 "Emper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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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ados: Escenas Románticas - 6. Epilogo: Andantino spian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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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a Silhouette
생일이 다가오거나, 기분이 푸른색에 가까우면 나에게 잘 대해주려고 한다. 힘든 세상 용감하게 잘 살아왔다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에 가깝다.
나는 내 작은 방이 좋다. 내 마음에 가깝고 사물이 나를 둘러싸는 포근함도 좋다.
요즘 쓰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은 라일라 클라크이다. 그래서 책이나 물건을 살 때 라일라 클라크로 전부 받고 있다. 먼지가 묻은 소포 위에 반듯이 라일라 클라크라는, 내가 창조한 이름이 적혀 있으면 왠지 소설 속에 들어온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침대 가에 늘 열 권가량의 책이 쌓여있다. 난 늘 글을 섞어 읽는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다시 읽었고, 지금은 버지니아 울프 등 영국 소설가의 글을 무의식적으로 찾아 읽고 있다.
“오랫동안 세상에서 경험을 쌓아가노라면 남자든 여자든 그 누구를 막론하고 마음에 눈물의 샘이 자라나지. 눈물과 설움, 용기와 참을성, 더없이 곧은 극기의 마음이.” -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인생이라는 눈물의 샘은 살면서 더 깊어지겠지만, 그것 또한 내 인생의 몫이라는 것. 오늘이 지나간다고 해서 내일 당장 희망이나 위로가 다가오는 게 아니지만, 어찌할 수 없을 때는 그냥 시간이 나를 지나가도록 지켜봐야지. 요즘은 이런 심정으로 살아간다.
내가 쓴 소설의 글귀처럼, 누구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똑같이 어렵고 먼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나 다 인생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는 미로의 모습이, 또한 라일라의 모습이,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이 전부 있다. 그게 이 작고 부질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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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사이를 헤매다가
오랜만에 별의 반짝임을 보고, 달의 온기를 느낀다. 자, 이제,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나의 별꽃. 밤하늘의 박힌 반짝이는 별꽃이라 부르리오.
잠이 오지 않아. 당신은?
난 불면증이 좋아. 하지만 불안함은 싫어. 당신은?
소설이 아닌 편지를, 이곳에, 모르는 이를 향해 쓰는 건 참 오랜만인 것 같다.
새벽 2시 44분.
별꽃은 졸고, 어쩜 누군가를 한참 동안 기다리거나, 자기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 행복을 꿈꾸는 시간일지도 몰라. 아마도 내가 어느 밤길 사이를 헤매는 사이에 말이지.
노래를 들어. 내가 조금 더 지금이라는 시간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들었던 노래를. 마음이 과거로 향하고, 쓰러진 것들이 다시 일어서. 그렇게 잃었던 것들이 회귀 되는 시간이 과거야.
하지만 눈을 깜박이면, 마치 마법에서 깨듯, 난 오늘이라는 시간에 서있어.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제대로 해내는 일 하나 없는 게 오늘의 나인데, 난 내일의 나에게 뭘 건네줄 수 있을까. 어쩜 “미안해.” 이 한마디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는 덤덤하게 덧붙이겠지. “그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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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사유는 낙서다. 마음을 꿰뚫는 단어를 찾는 게 내가 하는 일 중의 하나이다. 아주 설레는 단어들이 옹기종기 모여 내게 길을 터주고, 종알종알 말을 걸고, 그만 침묵하라고 한다. 호주머니에 몇 개 주워 넣은 에메랄드빛 조약돌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가볍게 읽지만, 나만의 색이 나는 글. 그리고 평소에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의식의 흐름을 따라 글을 쓰는 것을 즐긴다.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영감을 받는다. 하지만 영감은 창조의 도구이지 창조의 역기능이 아니다.
작가의 정체성은 글에서 나온다. 글을 계속 씀으로 세계가 창조되고 운행하게 된다. 작가가 하는 일이 그 일이다. 글의 세계에선 몽당연필이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위대한 악기가 될 때도 있다. 사유란 생각하는 힘이지만, 그저 생각하는 행위로만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창조 전의 세상은 그저 기웃거리는 느낌이라, 어떤 문장을 써도 그저 낙서 같은 기분이다.
미래를 향한 노스탤지어는 한 겨울 토론토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차가운 겨울에도 늘 산책을 즐겼다. 나는 걷기 좋은 도시가 좋다. 그렇게 지칠 때까지 걸으며 떠오르는 내용을 녹음하고, 아주 보잘것없이 시작한 글을 핀치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소중하게 읽었다. 나의 글이 타인의 마음에 닿아 그 사람의 마음으로 읽힐 만큼 다듬어지고 다듬어지는 과정이 반복되면 그제야 글을 쓰는 것 같다.
후련하고 살 것 같다.
이곳에 글을 쓴 이유는 딱 하나.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누군가 내 마음 밭에 기웃거렸으면 했다. 인터넷의 세상은 모든 것이 박제되어 영원함과 맞먹는다고 들었다. 이곳은 나의 일부가 옹기종기 모여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 곳이다.
하지만 안전한 기분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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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찾아오는 늦은 밤
새 소설을 쓰고 있다. 미래를 향한 노스탤지어를 쓸 때부터 머릿속에 있던 이야기이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배경, 그리고 아름다운 어떤 노랫소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블로그에 그동안 썼던 글은 대부분 비공개 처리되었다.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그 글이 읽히도록 알리는 것도 내 몫이라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새벽이 찾아오는 늦은 밤도 좋지만,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렇게 글을 쓰는 아침 시간도 참 좋다. 사실, 어느 시간 때고 아름답지 않은 순간은 없는 것 같다. 어느 순간에는 햇살에 고단함이 섞여 있고, 어느 순간은 조용한 나뭇잎 사이로 움츠려 있는 것 같다.
그동안 밀린 원고를 정리한다. 같은 내용인데 어찌나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는지 정신이 없다. 이미 결말이 정해진 글이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글이 될 것 같다.
Hello, I'm in the process of writing a new novel that I've been working on for quite some time. This story has been brewing in my mind ever since I started crafting "Nostalgia for the Future." It's remarkable how numerous characters, settings, and even a hauntingly beautiful melody have continued to reside within my thoughts.
Despite my enthusiasm for writing, I've come to realize that I must not overlook the crucial aspect of ensuring that my book reaches a wide readership—something that I consider an integral part of my responsibility.
Though the allure of late nights blending into dawn holds its own charm, I must admit that the leisure of composing words over a cup of coffee during these serene mornings brings a unique and genuine delight. Interestingly, every moment seems to possess its own form of beauty; even weariness occasionally harmonizes with the sunlight, and at other times, instances appear to be cradled amidst the tranquil leaves of trees.
At present, I find myself meticulously arranging the backlog of manuscripts. Remarkably, these manuscripts, which share the same foundation, invariably diverge into distinct narratives—a realization that can be somewhat overwhelming. The conclusion of the story is already crystal clear in my mind. Interestingly, it was the final scene that materialized initially, and the opening scene subsequently followed suit. I firmly believe that this piece will ultimately exhibit an exquisite composition when viewed from a broader perspective.
With renewed determination, I'm preparing to immerse myself in my work once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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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휘청이는 세계
나는 잘 정돈된 이 도시의 질서에 반해, 휘청이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필요한 것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다시 돌아온 곳은, 나만의 자리, 내 마음속이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람의 시선으로 지금 보는 것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나마 행복한 순간은 햇볕이 쨍쨍한 대낮이나, 늦은 밤 별빛을 상상하며 하는 독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행복 조차 귀찮아 일부러 가기 싫은 곳을 가듯 우회하며 겨우 해낸다. 그저 시간이 흐름으로 나는 변하고, 그저 나이가 조금씩 들어감으로 하나둘 마음에 있는 것들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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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책
Book Review #1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삼십오 년째 지하실에서 폐지를 압축하는 한탸에게 책은 또 다른 세상이다. 책은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암울한 지하실을 꽤 안락한 곳으로 만들어준다. 한탸는 책 속에 파고들어 자신만의 사유를 즐긴다. 그 고독한 사유 속에서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는 건 오로지 책 속 인물들뿐이다. 책은 현실보다 더 인간답다. 하지만 그 꿈같은 세상을 여행하고 현실로 돌아오면, 그는 금세 이방인이 된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 사형수의 마지막 말을 들어주듯, 자신은 그저 그 아름다운 책 속 세상을 한 번 들여다보고 파괴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도살자에 불과하다. 지하실은 어쩜 근사한 책들의 무덤일지도 모른다. 진실은 대낮에도 그림자 뒤에 숨어 움츠려야 하고, 거짓은 한밤중에도 오만하게 활기를 띤다. 나치와 사회주의에 반하는 책들을 처리하며 그는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그렇게 바깥세상(현실)은 균일화되어가는 것 같다. 그런데도 그는 인생의 무의미와 유의미 사이의 균형을 적절히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에게는 자기만의 세상인 지하실이 있고 발견해야만 하는 희귀한 책들이 폐지 더미 속에 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브니의 거대한 기계의 등장으로 그의 생각은 송두리째 바뀌고 만다. 그 거대한 기계는 한탸와 같은 늙은 압축공의 삶에 위협을 가할 것이 분명했다. 이제까지 시궁창 같은 지하실은 그만의 파라다이스였고 책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었다. 글로 가득 채워진 그 작은 세상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직면하자, 한탸는 아주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책과 같은 운명을 가기로 한다. 그는 압축기 안으로 들어가 녹색 버튼을 누르고 책과 폐지 속에 몸을 웅크린다. 홀로 고통 속에 남아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는 결코 자신만의 천국에서 추방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처음 이 책을 발견한 경로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내 손에서 떨어지지 않고 생각나면 읽는 책이 되었다. 마치 글자 하나하나에 감정을 새겨 넣은 듯, 문장 하나하나가 무겁고 진실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단연코 마지막 장면이다. 나는 여전히 그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책을 다시 맨 앞으로 펼치면 그는 부활한다. 삼십오 년째 지하실에서 폐지를 압축하는 일이 자신의 사랑 이야기라고 자랑하듯 속삭인다. 나는 생각한다. 세상의 온갖 사상은 세상을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함인지, 세상을 다스리기 위함인지, 아니면 특권층의 사리사욕 때문인지. 이 책의 배경은 아주 암울하다. 미쳐가는 세상은 한타의 시끄러운 기계 소리와 같다. 변화는 세상에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 개인의 내면에 실재하는 세상에서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는 시끄러운 세상과 작업환경에서 마치 동떨어진 사람처럼 투명하게 고독을 즐긴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자기 삶을 바꾼 옛 연인과 달리, 한탸는 그저 조용히 과거의 삶을 고스란히 이어왔다. 그는 스스로 고립된 몽상가이며 책을 통해 무형적 아름다움을 지닌 세계를 즐기는 고독한 철학자이다. 그런데도 그가 책의 운명처럼 죽음을 선택한 건, 어쩜 작가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을 표출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부브니의 거대한 기계는 점점 커지는 사회적 압박처럼 여겨진다. 한탸의 철학적 사상의 바탕이 된 책은 그러한 사회에 대한 지적인 항의처럼 보인다. 한탸는 다양한 사상이 섞인 책의 운명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억압으로 균일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자신의 이념적 사상을 성취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한탸의 죽음은 사회주의의 죽음이요 자유주의의 부활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같이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확연히 피부에 와 닿는 시대에서 우리는 변하지 않는 진실, 즉, 인간 존엄, 세계 평화, 민주주의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 상식, 공정을 바로잡아야한다. 도태되지 않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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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m labore amatur quod ams: sine labore amatur Deus.
그대가 사랑하고 있는 것은 갖은 고생을 다해야 사랑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아무 고생 없이 사랑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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