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다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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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etrip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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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다 지나간다 - 부정적인 감정을 대하는 방식
일일 쓰기 프롬프트부정적인 감정을 대처할 때 어떤 전략을 사용하시나요?모든 응답 보기 살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을 피할 수는 없어요. 분노, 실망, 좌절, 짜증, 후회… 살아가는 내낸 이런 감정은 끊임 없이 밀려와요. 하지만 나는 담담할 수 있어요.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는 법, 감정을 억지로 다스리는 것도, 참는 것도 아니에요. 단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배운 한 가지 진리가 있어요. “어차피 다 지나간다.“ 이건 단순한 위로가 아니에요. 내가 살아오면서 깨달은 경험의 결과예요. 감정이란 건 결국 오래가지 않는다 한참 혈기 왕성할 20대 때는 감정이 모든 걸 지배하는 줄 알았죠. 작은 일에도 속상하고, 인간관계에 예민해지며, 실패가 나를 정의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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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ftadaysblog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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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대하는 지혜로운 방법: 거짓말, 대화, 감정 다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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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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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www.nejlevnejsi-knihy.cz/kniha/parasitic-mind_25465481.html?hgtid=acc3e461-ae64-4d83-90d0-d892fa28a310 )
<서문>
유행병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치명적인 전염병이 이 나라 저 나라로 급속히 퍼지면서 인류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중세의 흑사병, 스페인 독감, 에이즈(AIDS), 혹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코비드-19 위기가 바로 그렇다. 그런데 서구에서는 현재 그 못지않게 치명적인 전염병, 다시 말해 이성적으로 생각할 능력을 파괴하는 집단적 질병을 앓고 있다. 생물학적 병원체가 원인인 다른 유행병과 달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 병의 주범은 대학가에 퍼진 나쁜 사상들이다. 이런 사상은 이성과 자유, 개인 존엄성의 체계를 갉아먹는다. (p8)
<제1장 레바논 내전에서 사상의 전투까지>
내 인생을 추진하는 이상(理想)은 자유와 진리이며, 이들 이상에 대한 공격은 곧 내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에 대한 존재적 위협을 의미한다. 나 자신 역시 두 번의 전쟁으로 말미암은 독특한 인생 궤적의 산물이다. 평생 한 번도 전쟁의 공포를 겪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인생에서 두 차례에 걸쳐 큰 전쟁을 겪었다. 하나는 레바논 내전이고, 두 번째는 서구 세계 특히 북미 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난, 이성과 과학, 논리에 대항하는 전쟁이다. 레바논 내전은 일찍이 내게 부족주의와 종교적 도그마의 추악함을 가르쳐줬다. 집단이 개성보다 더 중요한 생태계에서 성장한 나는 이후 정체성 정치에 대한 경멸감을 갖게 됐다. (p22)
한 사람의 인생이 반복되는 인생 각본에 따라 결정되는지, 아니면 어떤 이상을 반복해 주장함으로써 결정되는지 알기 위해서는 깊은(그리고 어려운)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직면한 여러 가지 현실이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세심히 살펴보면 현실은 어떤 대본이나 자신이 가치를 둔 이상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 치료의 한 가지 이점은 환자들에게 이런 패턴을 정확히 짚어준다는 것이다. 내 경우, 인생은 자유와 진리��는 두 가지 이상에 의해 형성됐다. 이 두 가지 이상의 추구는 부모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 아니라, 유전자에 각인된 개인적 성격이 발현된 것이다. (p32)
자유가 없이는 두 번째 이상을 설명하는 게 불가능하다. 두 번째 나의 이상은 진리의 추구와 수호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라는 성경 구절처럼, 진리와 자유는 서로 양방향성 관계에 놓여 있으며, 우리는 오직 자유로울 때만 진리를 밝히고자 열망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진리가 훼손되는 것을 걱정하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래도 나는 걱정하고 있으며 언제나 그래왔다. 내가 자랄 때 어머니는 거듭 경고했다. 이 세상은 내 병적인 솔직함과 정직성에 대한 헌신을 이해하는 건 고사하고 극도로 엄격한 나의 지적, 윤리적, 도덕적, 순수성의 기준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은 흑과 백의 이분법적인(어머니가 이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곳이 아니라 수많은 회색의 다양한 명암으로 이뤄져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어머니는 내게 간곡히 일렀다. (p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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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과학(포스트모더니즘)과 과학부정주의(생물학 혐오)를 퍼뜨리는 데서 더 나아가, 대��들은 끔찍하게 나쁜 사상들과 운동을 퍼뜨리는 최초 감염자 역할을 한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지식인이 아니고서야 그런 걸 믿을 수 없다. 정상인이라면 그 누구도 그렇게 어리석을 수 없다"라는 불멸의 명언을 남겼다. 이런 다수의 나쁜 사상들이 확산되면서 학계의 보상 체계가 뒤집혔다. 집단적 사고방식은 보상받는다. 혁신적 사상가들에게는 정조대가 채워진다. '자기 자리만 지키는' 학자는 보상받는다. 솔직하게 발설하는 학자는 처벌받는다. 고도의 전문화는 보상받는다. 폭넓은 종합적 사고는 경멸받는다. 지적 용기에 해당하는 모든 자질은 문젯거리로 여겨진다. 진보주의의 좌익적 교리를 고수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보상받는다. 결과의 평등을 신봉하는 자에게는 최고의 행정직을 준다. 실력주의를 신봉하는 자에게는 눈살을 찌푸린다.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대학들이 뿌려놓는 이런 기생충 같은 사상의 병원체들은 마침내 우리 사회의 모든 곳을 감염시키기 시작할 것이다. (p42-43)
이 책에서는 인간 상태에 잠재적으로 그만큼이나 위협적인 또 다른 병원체들, 즉 인간 마음에 기생하는 병원체들에 대해 알아보는 데 중점을 둔다. 이 병원체들은 올바르게 정확하게 생각하는 능력에 기생해 이를 망가뜨리는 사고 유형, 신념 체계, 태도, 사고방식들로 이뤄졌다. 일단 이런 마음의 바이러스가 우리 신경회로를 장악하면, 감염자는 이성(理性)과 논리, 과학을 사용해 세상을 살아가는 능력을 잃는다. 그 대신 현실이나 상식과 진리로부터 완강하고 오만하게 멀어진다고 정의하면 딱 맞을, 무한한 광기의 심연에 빠진다. 기생충들은 신체의 여러 부분을 목표로 삼아 자리잡는데, 그 중에서 뇌 기생충학은 숙주의 행동을 여러 방식으로 조작하는 뇌 기생충들의 강(綱)을 다루는 학문이다. (p44)
내가 다루는 인간 마음에 기생하는 바이러스 중에는 포스트모더니즘, 급진 페미니즘, 사회구성주의가 있는데, 셋 다 주로 감염된 생태계 안, 바로 대학들 안에서 번성하고 있다. 마음의 바이러스마다 각자 한 계통씩 광기를 빚어내기는 하지만, 이들 모두는 현실과 상식을 전면 거부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급진 페미니즘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생물학에 기반한 성별 차이를 비웃으며, 사회구성주의는 인간의 마음이 생물학적 청사진은 전혀 없이 완전한 공백에서 시작된다고 상정한다). 이런 마음의 바이러스들은 일반적으로 내가 타조 기생충 증후군 (OPS, Ostrich Parasitic Syndrome), 즉 중력이 당기는 힘만큼이나 명백한 근본적 진실과 현실을 감염자 개개인이 거부하게끔 다양한 사고장애(思考障礙) 증상을 일으킨다. (p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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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생각 대 느낌, 진실 대 상처받은 느낌>
"기베트는 우리 모두가 신이 존재하느냐 아니냐, 우주가 창조되었느냐 아니냐, 생명이 설계된 것이냐 아니냐, 도덕이 자연적인 것이냐 아니냐, 예수가 부활한 것이냐 아니냐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나는 세상에 오직 두 가지 이론밖에 없다고 설명함으로써 반박을 시작하겠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이론과 그렇지 않은 이론." 셔머의 이 뛰어난 우스갯소리는 중요한 인식론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다시 말해 지식의 추구가 항상 이분법으로 깔끔하게 나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현상을 이진법적 현실로 투영하고 싶어 하는 연구원이 많은 경향에 나는 '인식론적 이분법 마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경향은 과학적 실험이 용이하게끔, 다루기 쉽고 간단한 세계관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다. 흥미로운 것은, 선천이냐 후천이냐 하는 논의가 그렇듯, 이분법 자체가 잘못인 경우도 때로 있다는 점이다. 생물학자 매트 리들리(Matt Ridley)에 의하면 "선천이��� 후천이냐의 문제는 끝났다" 우리 자신의 성품 중 상당 부분은 유전자와 환경이 도저히 분리가 안 될 만큼 뒤섞인 혼합물에서 나왔다. 더욱이 사회화(양육 즉 후천)에 공통적 패턴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생물 유지에 필수적인 요소들(선천) 때문이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싶어 하는 욕망은 생각 대 감정의 이분법에서도 발견되며, 이로 인해 잘못된 양자택일의 사고방식이 생긴다. 우리는 생각도 하고 느끼기도 하는 동물이다. 문제는 언제 인지 능력(생각)을 작동하고 언제 정서 능력(느낌)을 작동하는지를 아는 거다. (p55)
문제는 지성이 담당해야 할 영역을 감정이 차지했을 때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대학들에 만연한 역병이다. 한 때 지적 발달의 중심지였던 대학들이 이제는 감정적으로 연약한 이들의 도피처가 됐다. 대학을 움직이는 좌우명은 더 이상 '진리의 추구'가 아니라 '상처받은 감정 얼러주기'가 됐다. (p59)
사람들의 일상적 행동을 이끄는 기본적인 윤리적 지향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의무론적 윤리와 결과주의적 윤리가 그것이다. 전자는 절대주의적 관점으로 윤리 규범을 다루며(거짓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됐다) 후자는 어떤 행동의 윤리적 가치를 그 결과에 따라 판단한다(남의 감정을 해치지 않으려면 때로 거짓말을 해도 괜찮다). 현실은 대부분의 사람이 이 두 가지 체계를 모두 사용한다는 것이다. 가령 당신의 아내가 '나 뚱뚱해 보여?' 하고 물으면 당신은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꺼리지 않고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린이를 성적으로 대하는 건 도덕적으로 그른 일로 간주한다. 진리 추구에 관해, 의무론적 관점에서는 진리를 훼손하거나 억압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결과주의적 관점에서는 감정을 상하게 하는 등 나쁜 결과를 피하기 위해, 진리가 때로는 변경되고 조작되거나 억압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 진영에서 보는 광기의 상당수는 바로 진리를 결과주의적으로 다룬 결과다. (p62)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한 가지 문제는, 이 결과주의자들이 단지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회피하는 것뿐 아니라 감정에야말로 권한이 있다고 보고, 감정으로 우리의 판단을 흐리는 걸 미덕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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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에 가득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니고서야 그런 세속주의와 근대성, 진정한 리버럴리즘의 상징이 불편할 리가 없다. 물론 나는 지금 비꼬고 있다. 어리석은 자살 행위를 피할 방법이라곤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각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지배적인 감각이다. 인간의 고도로 전문화된 시각 체계는 얼굴 생김새를 비롯해 다양한 영역에 걸쳐 비언어적인 시각적 신호를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일단 한 사람의 정체성과 인간됨이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는 검정 장옷 뒤에 가려지면, 제정신인 사람 대부분은 그런 현실에 불편��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미덕 과시자들은 불편한 시각적 자극에 대해 극히 합리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놀리고 조소하고 비난한다. (p77)
명확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정과 이성, 유머와 진지함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며, 살아가면서 언제 감정 체계를 작동하고 언제인지 체계를 작동해야 하는지 이해한다. 그러나 사상의 병원체에 잠식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 병원체들은 급속히 퍼지며 우리의 자유를 위협한다. (p78)
<제3장 자유 현대 사회를 이루는 타협 불가한 필수 요소들>
진정으로 자유롭고 근대적인 사회가 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요건은 무엇일까? 하버드 대 역사학자인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서구를 위대하게 만든 요소로 '여섯 가지 컬러 앱(Killer Apps)', 즉 경쟁, 과학혁명, 재산권, 현대 의학, 소비자사회, 근무 윤리를 제시했다. 이번 장에서는 이 요소들을 보다 더 간략히 압축해서 설명하려 한다. 나는 어떤 사상에 대해 토론할 자유(표현과 사상의 자유가 다른 사상들을 검증하기 위해 이성과 과학에 헌신(과학적 방법)하는 태도와 결합한 결과 서구 문명이 위대해졌다고 상정한다. (p81)
이들은 개인적으로는 내 노력을 지지한다 말할 수 있어 기쁘다고 하면서도 "하지만 사드 박사님, 제 이름은 말하지 말아주세요. 내가 선생님과 같은 견해를 가진 걸 사람들이 몰랐으면 해요"라고 말한다. 어째서 자유로운 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신념을 말하기 두려워하는가? 생각해보면 이게 바로 그 '진보주의자'들이 원하는 방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p86)
2005년 루슈디가 쓴 기사의 두 구절은 표현의 자유를 간결하게 옹호한다. '사람들이 절대 기분 상하거나 모욕당하지 않을, 혹은 기분 상하거나 모욕당하지 않게끔 자신들을 보호할 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할 권리가 있는 자유 사회를 건설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나 더 있다. '종교적 신념 체계든 세속적 이념이든 어떤 사상 체계가 숭고하다고 말하는 그 순간, 어떤 사상들은 비판이나 풍자, 조롱, 경멸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그 순간, 사상의 자유는 불가능해진다." (p90)
"나는 표현의 자유를 믿어요. 하지만…"이라고 생각하는 군중은 이미 표현의 자유가 의미하는 기본 정신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뒤에는 대개 다른 사람들의 감정이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나온다. 남들이 기분 상하지 않을 권리를 표현의 자유보다 더 중시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렇지 않다! 표현의 자유는 정확히 말해 가장 불쾌하고 공격적이며 역겨운 발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듣기 좋은 소리만 들으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따금 기분 상하는 일이 생기는 건 진정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며 치러야 할 대가다. 당신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배포 있게 넘어가라. 말할 나위도 없지만, 아무리 절대주의적 표현의 자유라 하���라도 멀쩡한 극장 안에서 불이 났다고 소리친다든지, 서로 폭력을 부추긴다든지,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비방하는 담론들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일반적 조건은 따른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의 적들은 이런 상식적인 제한들을 왜곡해서 자기들 목적에 부합하게 만들려한다. (p93-94)
오바마는 유엔 회의에서 "미래는 이슬람의 선지자를 비방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만의 말씀이다. 대통령님. 미래는 모든 선지자와 사상, 종교, 이념을 비판하고 놀리고 조롱하고 풍자하는 사람들의 것이어야 합니다. (p95)
여기에서 배울 점은 자유 사회는 풍자의 힘으로 위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유 사회에서는 모든 믿음과 이념들이 공정하게 경기한다. 풍자의 한계를 정하는 순간, 그 사회는 더 이상 자유 사회가 아니다. (p99)
그러나 인간 지식이라는 만신전(萬神殿)에서 과학적 정보를 성문화하는 방식은 문화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퀘벡 주 고위공무원인 파트릭 보셴(Patrick Beauchesne)은 최근 토착민의 지식을 과학적 지식에 대비해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무모한 질문을 했다가 호된 질책을 받았다(환경 평가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는 '지식의 위계설'을 지지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과학적 방법은 우리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공통적인 인식론적 체계다. 과학은 '조상들의 지혜', '부족의 지식', '노인들의 방식'을 우위에 두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과학에는 드러난 진리라는 게 없다. 토착민 식으로 아는 방법이 따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레바논 출신의 유대인이 아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자연계에 대한 모든 주장은 과학적 방법론의 증거 입각 분석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p103)
현대 사회의 진보적 만트라에 의하면 다른 인종과 문화 혹은 종교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식을 축적한다고 주장하는 건 칭송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서로 다른 인종이나 계급의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추론한다는 건, 인종차별주의자들이나 기타 악당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의 거장으로 고전적 리버럴리즘을 굳건히 옹호하던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는 바로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지칭하기 위해 폴리로지즘(polylog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미제스는 마르크스주의 폴리로지즘과 인종주의적 폴리로지즘의 차이도 설명했다. 마르크스주의 폴리로지즘은 개인의 생각하는 방식이 그의 사회적 계급에 따라 결정되며, 인종주의적 폴리로지즘의 경우에는 인종이 사고방식을 좌우한다. 미제스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는 이런 전제 조건의 비논리적인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폴리로지즘을 일관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단지 어떤 사상을 만들어낸 자가 올바른 계급, 올바른 나라 혹은 올바른 인종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 사상이 옳다고 고집하려 든다. 그러나 일관성이라는 미덕이 그들에게는 없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승인한 교리를 가진 자들 모두에게 '프롤레타리아 사상가'라는 명칭을 기꺼이 부여한다. 그 외의 모든 사람은 계급의 적이나 사회의 배신자라고 폄하한다. 현재의 사회정의전사들도 유사한 이념적 사고를 한다. 따라서 "나는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소"라고 말하는 대신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자, 백인 민족주의자, 신(新) 무신론자, 백인우월주의자, 알트라이트 등의 폄하하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진보적 정통성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사악하고 부도덕한 악마로 만든다. 미제스가 잘 알고 있었듯이, 폴리로지즘은 반과학적인 관념이다. "[미제스는 폴리로지즘을 '논리와 과학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란'이라 그 성격을 밝히고 폴리로지즘이 '사회 현상과 인간 행동의 과학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폴리로지즘은 우리 문화와 문명 전체에 대한 저항'이라 지적하면서, 폴리로지즘의 보다 더 큰 의의에 대해 역설했다. 과학적 방법론은 우리 정체성과 ��관하게 우리를 해방시켜서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진보주의자가 본능적으로 경멸하는 분야인 진화심리학은 명확하게 반인종차별주의적이다. 외형적 차이 이면에서 본 우리 인간들의 마음은 인종이나 민족적 배경과 무관하게 동일한 진화의 힘에서 탄생했음을 인지하는 까닭이다. 환경의 힘(혹은 문화의 힘)은 당연히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논리 및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치지만, 그 효과는 어느 한 사람의 인종이나 민족에 따라 결정되는 요소들이 아니다. '흑인의 마음'이나 '백인의 마음' 혹은 '백인 남성이 아는 법'이나 '토착민들의 아는 법' 같은 건 없다.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며, 우리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그 진리를 발견한다. (p106-8)
과거에는 여성들이 차별당했음을 인정했지만, 자료를 통해 남성과 일대일로 비교했을 때 여성들이 학계 여러 분야에서 남성들을 능가하고 있으므로 현재 상황은 매우 다르다는 점도 지적했다. 가짜 피해의식 서사를 부추기는 대신 성별 차이에 대한 과학적 연구 결과에 대해 강연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행사조직위원회에서는 나를 초청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동조하는 척하면서 남성들이 더욱더 나은 조력자가 돼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실에 헌신하고 현실을 고수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양심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여성에게 남성의 조력이 필요한 척 가장하는 건, 끔찍하리만큼 거들먹거리고 잘난 척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능력우선주의 체계에서 존재해서는 안 될 유아증의 한 형태다.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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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외교 정책, 재정 정책, 이민 정책은 어떠해야 하는가? 실행 가능하고 지속 가능한 보편적 의료 제도는 존재하는가? 정치,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수도 없이 많으며, 이런 문제들에 대해 각기 이질적인 관점을 접한다면 대학생들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큰 지적 다양성의 추구란 그저 이론적인 추상 개념 같은 게 아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생각의 자유는, 미래를 이끌어갈 학생들이 각기 다른 관점과 의견과 사실들의 경중을 따져보고 건전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끔 교육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지적 다양성은 다윈식 경쟁 과정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돼 최고의 사상(우리는 이를 진화론적 인식론이라 부른다)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대학들은 척박한 이념적 순응밖에 남지 않은 반다윈주의적 구정물 웅덩이가 돼 버렸다. (p116)
나는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 거의 20년 전, 미국 대통령이 되기 전에 했던 매우 통렬한 지적을 인용하며 이 장을 마치고자 한다. "하지만 자유가 멸종되는 데는 한 세대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피를 흘리며 우리 자녀들에게 자유를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한, 우리 자녀들이 자유를 물려받을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우리가 자유를 위해 싸우느냐, 자유를 지키고 보호하고 수호하느냐 그리고 자녀들에게 그들이 살아가며 우리가 했던 것과 똑같이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자유를 보호하고 수호해야 한다고 제대로 가르쳐서 그 가르침과 함께 자유를 물려주느냐에 달렸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과 저는 자녀들과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예전에 사람들이 자유로웠던 미국은 어땠는지 얘기해주면서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의 헤아릴 수 없이 지혜로운 이 말에 귀를 기울이자. 우리는 새로이 마음을 다잡고 표현의 자유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우리를 비합리성에 빠뜨리고 이념적으로 순응하게 만들려 하는 좌파들의 사상 병원체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p118)
<제4장 반과학, 반이성, 반자유적 운동>
"당신이 부조리를 믿게 한 사람은 당신이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게 할 수도 있다."
볼테르 대학 캠퍼스의 사상의 병원체들은 크게 몇 가지 범주로 분류된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경우, 거의 잠꼬대나 다름없이 모호하고 불가해한 산문(文)들을 만들어내면서 모든 지식은 상대적이라고(따라서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상정한다. 이 반과학적 헛소리는 '인종차별적' 서구 과학으로부터 '식민지화된 마음을 되찾아오라'라고 촉구하는 <과학은 필멸하리(Science Must Fall)>라는 단체까지 탄생시켰다. 사회구성주의는 인간 행동, 욕망, 기호(嗜好)의 대다수가 인간 본성이나 생물학적 유전형질이 아닌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고 제시한다. 즉 성별 차이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문화적으로 '성 역할'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급진 페미니즘은 이러한 성 역할이 가부장제의 모호하고도 사악한 힘 때문에 생겼다고 확언한다. 트랜스젠더운동은 생물학적 성이나 '젠더'가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고 유동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구성주의, 급진 페미니즘, 트랜스젠더 투쟁은 모두 거짓으로 입증될 수 있는 과학적 기반 위에 세워졌다. 하지만 이념에 최고의 가치를 두다 보면 과학적 사실의 부정이라는 피해는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p120-121)
그러나 아마도 현실의 족쇄에서 해방시킬 가장 뛰어난 도구는 '트랜스(trans)'라는 접두어일 것이다. 이 마법 같은 말은(자기 자신을 흑인이라고 생각했던 백인 여성 레이첼 돌러절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생물학적 성별이나 인종을 당신이 되고 싶은 아무 성별이나 인종으로 바꿔준다. 다행히도 실제 성별 위화감을 갖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우리 모습을 불가역적으로 형성해놓은 생물학적 사실마저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자아정체성'을 현실과 어긋나게 하라고 부추긴다고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진실을 거부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포스트모더니즘이 급진 페미니스트와 사회구성주의자, 트랜스 운동가들 사이에 그토록 만연한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식론적 해방자로, '나의 진실'을 기림으로써 우리를 객관적 진실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p123)
마침내 엘리자베스 워런 미국 상원의원이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서 승리하려 시도하며, 대통령이 되면 9세 트랜스젠더 아동을 교육부 장관 자리에 지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망상 좀 받아준다고 해서 별 탈 없으리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이성에 대한 전쟁이다. (p129)
아주드물지만 실재하는 진짜 성별 위화감 환자들을 폄하하려고 이런 풍자를 한 게 아니다. 아이들은 가족의 사생활 안에서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 진보적 친구들에게 잘 보이려고 미덕 과시를 위한 사회 정의의 졸로 아이들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p140-141)
트랜스젠더 학생에게 맞춰주기 위해 다른 모든 사람의 권리를 짓밟는 것은 자유의 침해가 아닌가? 그러나 이 사건은 그저 소수의 폭정이 드러난 또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정한 내 정체성, 생물학적 사실과 충돌하는 내 정체성을 찬양하고 수용하라. 안 그러면 진보주의 감시자들의 분노를, 법적 처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도상 처벌을 감수해야 할 테니까. (p142)
인간은 유성 생식을 하는 종이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은 이성 중에서 짝을 찾아 의미 있는 결합을 이루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ASI에 의하면 그런 원동력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온정적 성차별을 저지르는 일이다. 이런 입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미친 소리인지 이해하는 데 꼭 지성적인 진화심리학자까지도 필요 없다. 또한 여성을 보호하고 소중히 여기려는 남성은 누구든 사악한 성차별주의자가 된다는 데 주목하라. 최근 연구에 의하면 여성에게 인명 구조 응급 처치를 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더 줄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40년 동안 페미니스트의 세뇌와 마녀사냥이 남자들을 너무 잘 가르친 모양이다. '성차별주의자' 영웅이 되는 것보다는 그냥 성차별주의자 안 하고 비겁한 방관자가 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누군가 여성들에게 더 이상 용감한 소방관과 제복을 입은 영웅적 군인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고 조언해야 한다. 새로 부임한 보안관이 남성성에 대한 진보적 정의를 한 마디로 요약했다. 무심하고 비겁한 방관자 남성. 그런데 여기에는 굉장한 인지적 모순이 내재돼 있다. 남자들은 끊임없이 일터에서 여성들의 협력���로서 기여하라는 설교를 듣는데, 만일 그렇게 하면 그들은 온정적 성차별을 하는 게 돼 버린다. 모든 길은 성차별로 통한다. (p144-145)
이렇게 틀린 게 뻔한데 어떻게 공론가들은 그런 사상의 병원체들을 옹호할 수 있을까? 전제주의 정권 하에서는 그 답이 간단하다. 전체주의 정권은 반대의 목소리를 억누르거나 죽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범죄로 취급한다. 서구에서는 이념 주입이 이보다 교묘하게 이뤄진다. 이념은 PC운동이라는 정신으로 달성되며, 대학 캠퍼스에 지적 다양성이 결핍됐을 때 가장 잘 집행된다. PC운동은 별대모벌에게 쏘이는 것과도 같다. 쏘인 거미는 좀비 같은 상태가 돼 별대모벌의 구덩이로 끌려간 후, 몸 속에서 부화한 별대모벌 새끼들에게 뜯어 먹힌다. PC운동도 이와 똑같이 섬뜩한 목표를 달성한다. 우리가 너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좀비 같은 상태로 조용히 앉아 있는 동안 사악한 사상이 우리를 서서히 갉아먹게 한다. (p152)
<제5장 캠퍼스의 광기: 사회정의전사들의 부상>
진보주의자들에게는 느낌이 진실을 이긴다. 경험적 진술은 더 이상 그 진실성 여부가 아닌, 잠재적으로 '편견적'일 수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평가된다. 편견이라고 생각되는 경우 그 진술은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러야 한다. 느낌이 한 사람의 존재를 입증하는 원동력임을 고려하면, 항상 심기 불편한 사람들 사이에 속하는 게 이익이 되는 사회에서는 '모욕 문화(Culture of offence)'가 형성된다. 이렇게 되면 피해의식 서열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경쟁 충동이 일어난다. 탄압 올림픽 (피해자학 포커라고도 부른다)은 정체성 정치와 교차성("나는 퀴어에 비만인이며 무슬림이고 장애자이며 트랜스인 흑인 페미니스트다")을 이용, 기괴한 부조리극의 승리자를 가르기 위해 서로 피해의식을 겨루는 경기장이다. 나는 사회정의전사들이 일종의 집단적 뮌하우젠 증후군(동정심을 구하기 위해 병을 꾸며대는 정신 이상)을 보이는 거라고 설명한다. 그 기풍은 한 마디로 '나는 피해자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p157)
오늘날 수많은 대학 졸업생에게는 토론할 능력이 없다. 반대 관점에 접해본 적도 없으며, 반대 관점은 곧잘 이단으로 몰려 항의나 신경질적인 발작에 부딪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비판적 사고를 위해 진화한 능력을 제대로 작동할 수 있으려면 반대 입장에 부딪혀봐야 한다. 무균성 안전 공간은 대학 캠퍼스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트위터 설립자인 잭 도시(Jack Dorsey)를 내 유튜브 채널에 초청했다. 대화중에 나는 트위터가 플랫폼 상에서 사람들의 언어를 감시하는 것은 별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건강한 인간은 잘 부서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사회적 상호 관계의 추한 면모에 노출돼야 한다. 모든 상호 작용이 공손하고, 희망적이고, 풍요로울 것으로 예상되는, 멸균된 버블 안에 사람들을 가두어 보호할 수��� 없다. 소량의 알레르겐에 어린아이들을 노출시키다가 점점 더 많은 알레르겐에 노출시켜서 인체가 특정 알레르겐에 대한 면역을 구축할 수 있게 해주는 음식 알레르기 면역 요법처럼, 사람들도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건강한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게끔 모든 경우의 인간 상호 작용에 노출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는 반대 의견을 다루기엔 너무 불안정하고, 과학적으로도 유효하지 않은 개념인 소위 '마이크로어그레션'에 마주해 피해의식을 가장하면서 태아처럼 웅크리는 젊은 세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p161)
정말이지 그 목록은 끝이 없기에, 나는 다음과 같은 범용 사전 고지를 제안한다. "실제 세상을 각자의 뇌를 사용해 헤쳐갈 때는 사전 고지가 따르지 않습니다. 이 과정은 여러분이 성인으로서 인지적이고 감정적인 명민함을 갖췄다는 추정 하에 진행됩니다. 삶 자체가 여러분의 사전 고지입니다." 사전 고지는 노출 요법의 기본 원칙에 정반대된다. 노출 요법이란 일반적 불안장애, 사회불안장애, 공포증(가령 거미공포증 등), 공황장애, 강박신경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의 극복을 위해 잘 연구된 치료법이다. 이 치료법을 적용하는 경우, 환자들은 증세를 촉발시키는 자극에 노출돼 공포와 두려움에 대처하는 전략을 배우게 된다. 사전 고지의 효과를 실험해 본 몇 안 되는 연구에 의하면, 사전 고지는 학생들로 하여금 '촉발자'들을 더 피하게 하고, 회복 탄력성을 키우지 못하게 하며', 과거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효과가 없다는 게 밝혀졌다. 사전 고지가 고통스러운 감정을 일시적으로 줄여줄 수는 있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삶을 헤쳐가는 데 필요한 건강한 사고방식을 키워주지는 못한다. (p163-164)
오늘날에는 선호하는 집단 내에서 사람들의 감정을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더 중요하다(적어도 일부 분야에서는 그렇다). 안전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표현의 자유와 지적 풍요에 선행한다. 사회정의운동은 진실 탐구보다 우선한다. 오퍼레이션 리서치식 용어로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대학이 목표하는 기능은 학생들과 교수들의 지적 성장을 최대화하는 것이며, 대학 예산 이외 다른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오늘날 많은 대학이 다중 객체 최적화 문제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사람들 감정을 최소한으로 상하게 하는 동시에 지적 성장을 최대화하는 것, 혹�� 사람들 감정을 최소한으로 상하게 하는 동시에 지적 성장과 사회 정의 운동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p166)
2010년 나는 대리인을 통한 뮌하우젠 증후군(MSbP, Munchausen Syndrome by Proxy)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을 제시하는 논문을 한 의학 학술지에 실었다. 한 사람이 남들의 동정 어린 관심을 받으려고 거짓으로 질병을 꾸미는 일반적 뮌하우젠 증후군과 달리, MSbP는 자기가 돌보는 어린 아이(혹은 노인이나 애완동물도 해당된다)를 해쳐서 피해자를 더 아프게 만듦으로써 보호자가 남들의 동정 어린 관심을 받으려 하는 경우다. 뮌하우젠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여성(66.2%)인데, MSbP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경우는 거의 전부가 여성이다(97.6%). 이 두 가지 형태의 뮌하우젠 이상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나는 우리 사회에 뿌리박은 가짜 피해의식 사고방식을 잘 포착해줄 새로운 질병의 이름을 만들어냈다. '집단 뮌하우젠'이 바로 그것이다. 병을 꾸며대거나 짐짓 다치는 대신, 집단 뮌하우젠 환자들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피해의식 상태를 알림으로써(타인의 피해의식에 편승하는 경우에는 대리인에 의한 집단 뮌하우젠 증후군이라 부를 수 있다) 관심, 동정, 공감을 구한다. (p174)
모든 길은 편견으로 통한다. 만일 당신이 백인 남성인데 흑인 여성에게 끌리지 않는다면, 성적 인종 차별(sexual racism)이라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맞다. 이런 용어가 실재한다). 만일 당신이 백인 남성이고 흑인 여성에게 끌린다면, 당신은 흑인 여성들이 성적으로 탐닉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그들의 몸을 대상화하는 인종차별주의자 편견덩어리다. 어떤 피해자 집단을 이 방정식에 끼워 맞춰도 똑같이 작용한다. 우리 모두는 제도적 인종 분리 정책이 편견을 낳는다는 걸 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문화 활동에 참여하려는 것조차 편견에 속한다. 즉 '문화 유용(流用, cultural appropriation)'이라는 편견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피해자학의 항상성은 칼 포퍼가 말한 반증의 원칙을 위반하면서까지 모든 길이 편견으로 통하도록 보장한다(즉 그 어떤 데이터로도 피해의식 서사가 거짓이라고 입증할 수 없다). (p177-178)
문화 유용이라는 생각에 항상 사로잡혀 있으면 다문화 사회와 다원 사회가 제공하는 풍부함을 제대로 경험하기 힘들다. (p180)
실증적으로 이런 강간 사건이 발견되지 않자, 이 논문은 (다음 부분 읽으려면 우선 심호흡하고 자리에 앉아야 한다)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얼마나 인간으로 보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결론지었다. 이스라엘인은 팔레스타인인을 너무 증오한 나머지 팔레스타인 여자는 강간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강간 사건이 발견되든 발견되지 않든 결론은 정해졌다. 이스라엘인은 악마다. 모든 길은 채찍질 고행과 자기 혐오로 통한다. 이것이 진정한 '진보'의 품질 보증 마크다. 가짜 분노를 파는 이들은 강간을 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 여성을 피해자로 규정한 것뿐 아니라, 이스라엘인의 친절을 이슬람 혐오의 한 형태로 이해한다. 아니사 로하니 (Anisa Rawhani)는 퀸즈 대학(Queen's University)에서 한 가지 실험을 했다. 18일 동안 히잡을 쓰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본 것이다.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졌으리라는 게 분명 이 실험의 가정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매우 친절하고 공손하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이 피해자학 서사를 살려내기 위해, 그녀는 눈에 띄는 관용과 친절은 사람들이 자신의 편견을 감추려 보인 과잉 행동의 한 수단이라고 놀라운 결론을 내렸다. 당신이 무슬림 여성에게 불친절하면, 당신은 이슬람 혐오자다. 당신이 무슬림 여성에게 친절하면, 당신은 이슬람 혐오자다. 모든 길은 이슬람 혐오로 통한다. 친절하고 관용적인 것은 대학 캠퍼스 생태계에서 일종의 인종차별주의다. (p182-183)
무한의 관용이라는 기풍을 예로 들어보자. 위대한 철학자 칼 포퍼는 이런 사고방식에 대해 지금까지 나온 것 중 아마도 가장 훌륭한 입장을 제시했다. "이보다 덜 알려진 것은 관용의 역설이다. 무한한 관용은 결국 관용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관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무한히 관용의 범위를 확장한다면, 관용하는 사회가 관용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받을 공격에 대비하지 않는다면, 관용하는 사람들은 사라질 것이며 관용 역시 그들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관용적 철학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항상 억눌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가 무관용에 맞서 합리적으로 논의하고 공론을 통해 무관용을 점검하는 한, 억압은 분명 현명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무관용을 물리적으로라도 억누를 권리가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 그런 무관용자들이 우리와 합리적인 수준에서 논의할 수 없다는 게 판명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모든 논의를 거부하기 시작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추종자들이 현혹될까 싶어 합리적인 논의를 듣지 못하게 하거나, 논의에 대한 응답으로 주먹이나 총기를 쓰라고 가르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관용의 이름으로, 무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p189)
현재 미국 국경의 불법 이민자 위기와 관련해 미국의 진보들 사이에192===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회정의전사들의 비합리적 입장을 정색하고 지지하려면 현실을 무시하고 부정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다. 진보주의는 이제 이성의 적이 됐다. (p193)
<제6장 이성으로부터 탈주: 타조 기생충 증후군>
과학이란 진리 추구와 관련된 일이어야지 자기가 선호하는 정치 이념이나 개인적 신념을 방어하는 일이 돼서는 안 된다. (p197)
타조 기생충 증후군 물론 현실을 부인하고자 하는 욕망은 과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기만(혹은 자기 기만) 능력은 엄청나다. 사실 인간의 지능이 이렇게까지 진화한 이유 중 하나는 남들을 성공적으로 조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남들을 조종하려는 의도에 부합하기 위해, 인간은 자기 기만이라는 성향을 진화시켜왔다. 자기 기만은 자신의 이중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거짓말을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이 그 거짓말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화론에 기반해서 볼 때, 자기 기만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렇게해서 생기는 혜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다소 괴이한 자기 기만 형태가 있다. 달이 존재하는 것처럼 뻔히 보이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정신 분석학의 아버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불쾌한 정보를 억누르는 인간 능력에 주목하고 이를 '타조 방책'이라고 불렀다. 이 인간 타조 효과-타조가 달갑지 않은 현실을 피하기 위해 모래에 머리를 묻는 우스꽝스러운 이미지에서 나온 표현이다-는 금융 투자를 포함해 여러 가지 맥락에서 기록돼왔다. 몇 년 전 사상의 병원체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현실을 거부하는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타조 기생충 증후군 (OPS, Ostrich Parasitic Syndrome)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나는 이성에 대한 이 끔찍한 공격을 아래처럼 정의했다. "이 장애(障碍)는 중력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현실을 거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OPS를 앓는 사람은 자기들의 눈이 거짓말이라도 하는 양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유니콘 나라 같은 대안 현실을 건설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학, 이성, 인과법칙, 증거 구성 임계점, 거의 무한하리만큼 막대한 양의 데이터, 데이터 분석 절차, 추리통계학, 과학적 방법론 고유의 인식론적 법칙, 상식 같은 건 모두 거부된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OPS 환자의 망상적 횡설수설은 환상에 불과한 연관성, 존재하지 않는 인과관계, 기분 좋게 들리는 진보주의적 상투성에 뿌리를 둔다. 타조의 논리를 내놓는 사람들은 항상 숭고한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p199-200)
왜 사람들은 그런 조잡한 사고방식에 굴복하는 걸까? 철학자 에이브러햄 카플란(Abraham Kaplan)은 그의 책 <탐구의 수행(The Conduct of Inquiry)> 에서 이렇게 썼다. '과학적 공동체에서 받는 사회적 압력에 덧붙여, 과학자 개인이 일하는 데 있어 매우 인간적인 습성이 하나 있다. 나는 이를 도구의 법칙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표현한다. 어린 소년에게 망치를 주라. 그러면 그는 마주치는 모든 물건을 다 두들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학자가 자기의 전문 지식이 필요한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굵은 글씨는 원문에 따름] 인본주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는 《과학의 심리학(The Psychology of Science)》에서 이렇게 말했다. "갖고 있는 유일한 도구가 망치라면 모든 것을 못처럼 다루기 쉽다." 이것은 방법론적 고착이라는 개념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방법론적 고착이란 연구원들이 주어진 연구 과제에 적합한지 여부를 따지지 않고 특정 데이터 자료나 특정 데이터 분석 절차를 고집하는 경우를 말한다. 만일 당신이 기후문제운동가라면, 모든 재난은 인간이 초래한 기후 변화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면, 유독한 남성성과 함께 가부장제를 비난해야 한다(기후 변화가 유독한 남성성 때문이라는 주장이 별로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다양성, 포용, 공정 컬트의 일원이라면, 당연히 모든 악은 다양성, 포용, 공정이 부족한 데서 비롯된다. 만일 당신이 민주당원이라면, 모든 문제는 도널드 트럼프에서 비롯된다. (p202-203)
전통적인 의미에서 자유롭고 현대적이고 다원주의적이며 비종교적인 사회라면, 종교우월주의, 동성애 혐오, 여성 혐오 특히 유대인을 증오하는 등 종교적 소수인에 대한 무관용, 표현의 자유 및 양심의 자유 거부에 뿌리를 둔 문화와 종교적 유산을 가진 수많은 이민자에게 문호를 개방해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서술하는 건 '편견'에 의한 게 아니다. 이것은 태양의 존재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상호이타주의는 진화된 메커니즘이다(이를테면 이민자들이 자유롭고 현대적이면서 비종교적인 서구의 가치관을 채용함으로써 우리의 관대함에 화답할 것이라 기대하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난민을 허용하는 것이 상호이타주의다). 자멸을 초래하는 공감은 진화된 메커니즘이 아니다. 신실한 마음으로 문명적 차원에서 채찍질 고행을 하겠다고 현대 사회의 근간마저 양보하는 건 절대 안 된다. 나는 자랑스러운 캐나다 이민자로서 말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이민 정책을 모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만 반복하는 사람들은 은밀한 형태의 타조 기생충 증후군 환자들이다. (p206-207)
"여성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을 때 남성의 배상액의 절반을 배상한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에게 지급하는 배상액은 무슬림 배상액의 3분의 1이다. 조로아스터교인에게 지급되는 배상액은 무슬림 배상액의 15분의 1이다." 이것이 바로 정체성 정치가 사법 체계에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보주의자들이 고수하는 기준이다. 남자들은 성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지만 여성들은 될 수 없다. 백인들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지만 흑인들은 될 수 없다. 무엇을 말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의 정체성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양성애 백인 기독교 보수 남성은 입 다물고 진보적 무슬림 토착 유색 인종 성전환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백인 친구들, 분수를 알라고.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따라서 샤리아 법과 진보적 정체성 정치는 정확히 동일한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를 근본적으로 공격하는 것의 영향은 이슬람 세계와 서구 진보주의자들 세계에 서로 다르게 나타나겠지만, 그 사고방식은 거의 동일하다. 유일한 차이라면, 진보주의자들은 평등이라는 이념을 지지하지만 샤리아 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보주의자들의 평등은 매우 특별한 종류의 평등이다. 진보주의자들의 평등은 소설 <동물농장>에 조지 오웰이 남긴 불멸의 문장이 가장 잘 표현해준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p218-219)
우리의 뇌는 환경 속에서 통계 규칙을 감지할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 이 지식에 따라 행동한다고 해서 편견을 가졌다든지, 인종 차별을 한다든지, 증오심 가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지식은 인간 인지의 근본이다. 확률론적 현실을 바탕으로 구분한다는 의미에서, 구별하는 행위는 곧 인간의 행위다. 프로파일링을 한다는 건 인간이라는 의미다. OPS에 감염된 사람들은 이런 논리를 거부한다. 대신 '현실은 인종차별적이다'라는 진보주의의 신조를 고수하고 싶은 마음에 프로파일링하기를 거부한다. 프로파일링을 하는 건 차별 행위이기 때문이다(이 어휘가 갖는 편견적 의미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치 코미디언 에반 세이엣 (Evan Sayet)이 무차별의 컬트(cult of indiscriminateness)라 일컬은 바로 그 광신적 집단이다." 이것이 바로 2011년 우리 가족이 캘리포니아 남부로 여행했을 때, 몬트리올 공항에서 보다 엄밀한 보안 점검을 한다며 당시 두 살이었던 내 딸을 무작위로 지목했던 원인이다. 이것이 바로 보안 등급 상향 조정 때 노년의 수녀들이 파키스탄, 예멘, 시리아에서 무리 지어 여행 온 젊은 남성들과 똑같은 확률로 정밀 조사를 받는 까닭이다. 유니콘의 나라에서는 누구나 테러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똑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증오심으로 가득한 편견덩어리다. OPS는 인간 마음의 끔찍한 질병이다. (p222)
<제7장 진리는 어떻게 추구하는가: 중복 증거의 법칙적 관계망>
자유 사회에서 개인에게 부여된 시민의 의무에는 한 가지 근본적��� 특징이 있다. 바로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해 ���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몇 가지 인지적이고 감정적인 덫에 걸려 굴복해버리기 때문이다. 첫째, 인간은 뇌를 쓰는 데 매우 인색하다. 다시 말해 인간은 너무 게을러서 주어진 문제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고, 그 대신 되도록이면 머리를 안 쓰면서 자기 생각과 같은 여론을 형성하는 편을 좋아한다. 두 번째로, 정보를 이루는 데이터의 정확성은 제각기 다 다르다. 세 번째, 일단 한 개인이 자기 입장을 결정하고 나면, 이에 반하는 증거를 고려하도록 만들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두 명의 다른 공동 저자와 저술한 책에서, 인지부조화 이론의 선구자인 레온 페스팅거는 무려 60년 전에 사람의 마음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기시켰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바꾸기 힘들다.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는 돌아설 것이다. 사실이나 숫자를 제시하면 그는 출처에 의문을 던질 것이다. 논리로 호소하면, 그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지, 특히 그 사람이 자기 믿음에 투자라도 한 경우에는 얼마나 더 힘든지 경험해보았다. 아무리 통렬히 공격해도 믿음에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자기 확신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기발하게 변호하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그러나 인간의 지략은 그저 신념을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한 개인이 무언가를 진심으로 믿는다고 가정해보자. 더 나아가 그가 그 믿음에 헌신하고, 그로 인해 그가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취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그의 믿음이 틀렸다는 증거가 확실하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제시됐다고 가정해보자.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사람은 대개의 경우 흔들리지 않는 것은 물론, 이전 보다도 더 자기 믿음이 진실되다고 확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남들을 납득시키고 남의 생각을 자기 관점대로 바꾸려는 열정마저 새로이 보일 수 있다." (p225-226)
획기적인 과학적 성과는 무엇보다 통설을 흔들고, 그래서 전면적인 거절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 상황을 수호하는 사람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과학자에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개인적인 편향이나 사견(이견, 의견)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이렇게 언급했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그들에게 빛을 보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게 아니다. 반대자들이 결국 죽고, 새로운 세대가 성장해 그 과학적 진리에 익숙해짐으로써 승리한다." 동물학자 프레데릭 R. 슈람(Frederick R. Schram)도 그런 보편적 생각을 갖고 이렇게 선포했다. "과학이란 인간 본성이 가진 약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초인의 활동이 아니다. 과학의 진보가 드문 것은 사실을 담은 정보가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과학자들 자신의 고정관념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과학의 자체 교정 과정을 통해 우수한 생각이 이긴다. 심장병 전문의 딘 오니시(Dean Ornish)도 같은 견해를 갖고 이렇게 선포했다. "과학자들도 다른 사람들마냥 새로운 생각에 저항할 때가 자주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과학적 과정을 통해 좋은 생각과 이론이 승리하게 해준다." 나도 동의한다. (p228-229)
부모투자이론(Parental investment theory)은 막대한 수의 유성 생식 종들로부터 성별 차이의 유형을 이해하기 위한 방대한 메타프레임워크다. 대부분의 종에서 암컷들은 수컷들보다 부모로서 더욱 많이 투자하며, 그 결과 성적 행동에 있어서 훨씬 더 신중하다. 그러나 수컷이 부모로서 암컷보다 더 많이 투자하는 종의 경우, 대개 성별 차이가 역전된다. 그런 종의 암컷들은 더 크고, 더 공격적이고, 성적으로 더욱 분방하다. 그런 예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서식하며 선사시대 동물처럼 생긴 화식조(cassowary)가 있다. (p240)
247-8
서구의 지식인 사이에서는 서구의 식민주의와 미국의 글로벌 패권주의를 지적하면서 자학하는 일이 흔하다. 그들은 서구는 전쟁과 정복으로 세워졌지만 이슬람은 사랑과 평화로 퍼져갔다고 말한다. 실상은, 이슬람의 역사야말로 끊임없는 정복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하버드 정치과학자 새뮤얼 P.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의 그 유명한 말에 의하면, "서구와 이슬람 문명 사이의 단층선을 따라 발생하는 갈등은 1,300년 동안 지속됐다. 더 간결하게 말하자면, "이슬람의 국경은 피로 그려졌다. 7세기 창시된 이래, 이슬람은 수천만 명을 예속시키거나 개종시키거나 혹은 죽였다. (p249)
세계 수많은 지역에서 개종은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전 세계에서 개종자들에게 테러를 저지르도록 고무하는 종교는 단 하나밖에 없는 듯하다. (p254)
물론, 이렇게 다차원적이며 확실한 중복 증거들로 법칙적 관계망을 구축하는 행위가 무슬림에 대한 공격은 아니다. 한 이념을 정밀히 조사하고 그 이념이 평화, 다원주의, 자유를 촉진시키는지 결정하기 위해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인식론적 접근 방식을 적용하는 것뿐이다. 설사 무슬림 대다수가 분명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분석의 결론은 사실에 합치한다.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이런 자료들을 분석한다고 해서 편견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진리에 이르는 방식이다. (p260)
중복 증거의 법칙적 관계망을 이용해 기후 변화가 어느 정도까지 인공적인지 조사하고, 실현 가능하고 현실적이며 이성적인 개입 방법들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분석을 수행하자고 요청한다고 해서 '기후변화부정자'나 '과학부정자'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중복 증거의 법칙적 관계망은 듣기 좋은 뻔한 소리나 감정적 호소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끔 면역력을 키워준다. 당신의 지성-잘못 끼어든 감정이나 부족주의적 이념이 아닌-을 통해 입장을 결정하라.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떤 분야에 지성이 가장 유용하고 어떤 분야에 감정이 가장 유용한지 아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입장을 결정할 때는 이 장에서 다룬 강력한 인식론적 도구를 적용해 오직 '진리의 부족'에만 충성하라. 그리고 자신에게 되물어라. 내 입장을 뒷받침하는 데 도태시킬 필요가 있는 중복 증거는 무엇인가? 중복 증거의 법칙적 관계망은 합리적 의사결정이라는 임무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정보를 취합시켜 줄 강력한 수단이다. (p261)
<제8장 콜 투 액션>
사람들이 사상의 전투에 참여하기를 망설이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책임감의 분산'이나 '방관자 효과'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 심리학자 존 달리(John Darley)와 빕 라타네(Bibb Latané)는 언뜻 생각하기에 직관에 반대되는 듯한 내용을 기록했다. 사람이 많을수록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이 실제 누군가에게 도움받을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즉 위험을 자초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쉽다. "사드 박사님, 우리를 대신해 목소리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사님의 노력을 진심으로 지지합니다. 힘 내십시오." 아니, 나는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고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말할 수 있다. 당신의 개인적인 책임감을 일깨우라. 당신과 상관 있는 문제다. 참여하라. 진리와 이성, 논리가 도와달라고 외칠 때 방관자가 되지 말라. 다른 사람들 목소리에 묻어가지 말라. 자기 검열 하지 말라. 이 전투의 결과에 당신과 당신 자녀들의 이해가 달려 있으니, 두려움 없이 목소리를 드높이라. 공유지의 비극 같은 집단 무기력의 비극에 굴복하지 말라. (p266-267)
남을 판단하는 것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을 두려워 말라 물론 민감한 주제를 거론해서 친구들을 잃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진정한 우정이란 정확히 말해 그런 대화가 주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깊은 우정이란(나심 탈레브의 개념을 빌자면) 반취약적이어야 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헨리 토마스 버클(Henry Thomas Buckle)은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남자나 여자는 세 가지 계급 혹은 지적 등급으로 분류된다. 가장 낮은 계급은 언제나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버릇으로 알아볼 수 있다. 다음 계급은 언제나 사물에 대해 대화하는 버릇으로 알아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언제나 아이디어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으로 알아볼 수 있다." (p268-269)
서구는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반석 위에 세워졌으며, 기독교신학에 따라 많은 이가 다른 이를 판단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다고 추정한다. (…) 많은 사람이 이런 가르침을 잘못 해석해서 판단은 신이 금지한 행위이며, 그저 알아서 살게 내버려두라는 의미로 잘못 해석한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이런 포고령들은 도덕적 위선에 대한 이야기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심판해야 한다. 나는 매일 심판한다. (p270)
판단한다는 것이 곧 인간이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완벽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판단은 제대로 작동하는 성인에게 필요불가결한 능력이다. 인간 의사결정의 중점적 특징은 바로 몇 가지 서로 경쟁하는 대안들을 판단하는 절차다. 이것이 바로 판단과 의사결정학회(Society for Judgment and Decision Making)와 그 대표 학술지 <판단과 의사결정(Judgment and Decision Making)>이 존재하는 이유다. 우리는 가까운 친구들 안에 누구를 포함시킬지 판단한다. 우리는 결혼하기 전에 여러 구애자를 판단한다. 우리는 학생과 종업원을 판단한다. 삶은 끊임없는 판단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판단한다. 자기 의견을 밝힌다. 그들은 입장을 취한다. 절대 판단하지 않고 모든 가능한 문제에 대해 장단점만 열거하며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기회주의자들은 매우 지루한 사람들이다. 결코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편향된 사람이라 불릴 가능성을 막기 위해 보험을 드는 지적 비겁함이다. 최고의 카리스마가 있는 대중 지식인들은 대개 다양한 문제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 토마스 소웰과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지난 40년 동안 가장 중요한 대중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것은, 논쟁적 문제에 대해 자기 의견을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판단이라고 다 똑같이 좋은 것은 아니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공론가와 비판하기 좋아하는 지식인의 차이는 그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런 입장을 취하느냐에 있다. 판단에 이르게 된 과정을 또렷한 주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한 판단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p272-273)
미덕 과시(virtue-signaling)는 비용 들이지 않고 손쉽게 자아를 팽창시키는 자기 확대(self-aggrandizing) 행위의 한 형태다. 내 진보적인 해시태그가 증거하듯, 나는 진정으로 남들에게 관심 갖는 좋은 사람임이 분명해! 이보다 더 진실과 거리가 먼 얘기도 없다. 이렇게 뻔한 미덕 과시를 하는 사람들은 유약한 겁쟁이다. (p274)
276-7
서구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이 내게 자유를 수호하고 싶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파장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그러지 못한다고 말한다. 바로 거기 문제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에 상륙하던 어린 연합군 병사들이 쏟아지는 독일군 기관총과 박격포 앞에서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던가(혹은 안전하리라 기대했던가)? 얼마 전 6만 7,000명의 캐나다인이 목숨을 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100주년 기념일이 있었다. 그들의 헌신적인 영웅적 행위 덕분에 나는 지금 독자들이 읽고 있는 것을 타이핑할 자유를 누린다. 수백만 명의 개인이 생명을 희생시킨 덕분에 지금 우리의 자녀가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은 페이스북에서 아는 사람들에게 친구 삭제를 당하지 않으려고 말을 삼간다.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에 비겁함도 추가돼야 한다.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지 않으면서 서구의 영혼을 위한 사상의 전투에 참여할 방법은 없다. (p278)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특히 학자나 공인으로서) 생각을 밝히는 데 막대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비평을 꺼린다고 믿는 사람은 없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참여하라고 간청하면 때로 이렇게 대꾸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교수님은 종신재직권이 막아주잖아요." 종신 재직이 이성을 수호하고자 드러내고 발설함으로써 받는 모든 협박과 유해한 결과를 다 아울러 퇴치해주는 마법의 방패는 아니다. 종신재직권이 있었어도 나는 2017년 가을, 대학 수업에 갈 때마다 보안 조치를 취해야 했다. 종신재직권이 있었어도 수많은 살해 협박을 받았으며 결국 대학 인사부 대표를 대동하고 몬트리올 경찰에 출두해 진술서를 써야 했다. 종신재직권이 있었지만 공적 활동을 이유로 다른 교육기관��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여러 건의 교수직 제의를 놓쳤다. 종신재직권이 있었어도 경력의 발전을 위한 수비수가 되어줄 학계 모임으로부터 외면당했다. 내 영혼의 순수성 (내 어머니가 했던 말이다) 때문에 나는 진실 수호보다 직업적 고려를 더 중시할 수 없었다. 내 이기적인 이유로 진실의 1밀리미터, 자유의 1온스라도 희생시켰다는 걸 알면 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조언은, 이 사상의 병원체들과 싸우고자 한다면 모든 것을 걸라는 것이다. 당신의 싸움이 덧없지 않게 하라. (p279)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성공적이며 행복한 삶을 살려면 주어진 미덕을 추구하는 데 있어 절제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선한 일에 중용'이라는 속담을 생각하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한 가지 미덕)는 과도한 무모함과 비겁함(둘 다 피해야 할 극단적 속성이다) 사이에 있다고 상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적인 전투에 처한 병사의 용기에 대해 논했지만, 현재와 같은 맥���에서 이 말은 사상의 전투에 필요한 지적 용기에도 적용된다. 예멘에서(이슬람의 불경죄에 항의하려는 의도로) '모하마드 그림을 그려라'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기로 한 사람은 분명 과도한 무모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매체들이 '이슬람은 평화다'라는 이맘의 성명에 이의를 제기하기 꺼리는 것은 비겁함의 발현이다. 이 두 극단 사이에 조리 있고 이성적으로 교전할 수 있는 최적의 지점이 존재한다. (p279-280)
경기 중에도 페널티 킥이 주어지지만, 토너먼트 게임에서 동점일 경우에도 이 방식이 사용된다. 그렇게 무거운 부담을 지고 슛을 하는 데는 대단한 배짱과 용기가 필요하지만, 우리 모두는 바로 그런 배짱과 용기를 키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사상의 월드컵 대회에서 뛰는 선수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나서서 이성의 팀을 위해 득점을 기록할 기회가 왔을 때 은유의 페널티 킥을 넣을 필요가 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골목길에서 위협받는 여성을 보고 끼어드는 사람들과, 도와달라는 비명을 듣지 못한 척하면서 도망치듯 지나가는 사람들. 후자가 되지 말고, 전자가 되라. (p280)
나치를 물리치도록 도운 주요 역사적 인물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사과해야 한다면, 끝없는 암흑의 심연이 드리운 것이다. 서구 문명의 근본적인 원칙을 지지한다면(처칠이 그랬던 것처럼),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옹호한다면, 물러서지 말라. 벌꿀오소리 같은 야성적 충동을 가져라. 당신의 진실성을 수호하고 진리를 지킬 때는 맹렬하리 만큼 단호하라. (…) 벌꿀오소리가 되라. 이념적 깡패들에게 공격받았을 때 절대 물러서지 말라. (p285)
소위 말하는 '다른 형식으로 아는 것(토착민들 식으로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이 과학적 방법만큼 유효하다는 생각을 거부한다고 해서 당신이 닫힌 마음의 편견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유독한 남성성과 백인우월주의의 전형이라며 신경질적으로 백인 남성들을 악마화하는 행위를 거부한다고 해서 당신이 아돌프 히틀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원색적인 비난이 금방이라도 협박이 될 기세면, 도대��� 무슨 진보적 교리를 바탕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당당하게 물어라. 사람들 대부분은 인종차별주의자나 여성혐오자라 비난받는 걸 너무나 두려워해서 웅크리고 침묵한다. 입 다물고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지 않는다면 인민재판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말문을 막아버리는 이런 전략에 넘어가지 말라. 당신의 원칙을 확신하고 벌꿀오소리처럼 맹렬하게 그 원칙을 옹호하라. (p286)
인간은 협동적인 동시에 경쟁적인 존재이며, 행동거지 서툰 10대 청소년 패거리부터 프로 축구단이나 군대 조직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단에서든 분명한 위계 질서를 이루려 한다. 인간은 다 똑같고 평등한 일개미가 아니다. 하버드 대학 곤충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E.O윌슨(E.O.Wilson)은 사회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좋은 생각이지만, 종(種)이 틀렸다." 인간 본성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기반으로 구축된 체계는 실패하게 마련이다. 경쟁이라는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의 연약한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인 사회를 구축하려 들면 결국 만들어지는 건 나약함과 권리 주장과 무관심으로 가득한 사회다. 삶이란 필연적으로 경쟁적이다. 사회에는 필연적으로 계급이 있다. 그 누구의 기분도 상하지 않는 유토피아적 관점의 사회를 추구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p290)
가드 사드 , ' 기생충 마인드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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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outath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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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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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2
'열혈남아'가 덕질의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유덕화가 부른 영화의 OST '치심착부'를 무한 반복 스트리밍 중이다. 조금만 더 화력이 더해지면 브레이브걸스의 '롤린'도 이길 수 있을 텐데, 아직 나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다.
'열혈남아'에서 유덕화는 꼰대 그 자체다. 촌스럽게 흰 티셔츠를 배바지로 넣어 입고, 담배를 길빵으로 뻑뻑 피워댄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동생 장학우에게는 "���, 너희들은 이런 거 피우지 마라" 식의 회유만 한다. 세상 꼰대도 이런 꼰대가 없다.
하지만 잘 생기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고 했던가. 꼰대에게도 스톡홀름 증후군을 느낄 수 있음을 오늘에서야 나는 깨달았다. 그렇게 그대의 아재파탈에 허우적대며 나는 왓챠의 바다를 헤엄쳤다. 그리고서 만난 또 다른 역작, '천장지구'다. 원제는 '천약유정'인데 나는 원제보다는 한국에서 아무렇게나 끼워맞춘 '천장지구'라는 제목이 더 좋다.
유덕화 아저씨, 여기서는 말보로 레드를 태우신다. 칼스버그 맥주도 맘껏 마시신다. 취해서 토도 하시는데 그건 그냥 비밀로 부쳐두자. 나도 덕분에 어제 밤 편의점에서 칼스버그 맥주를 사와서 맛있게 마셨으니 몰랐던 척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가장 화룡점정은 스즈키 오토바이를 타시면서 멋있게 청재킷을 휘날려주시는 장면이다. 난 '다크나이트' 속 배트맨의 휘날리는 망토보다 이게 더 멋있었다. 여기서 고백하자면, 내 무신사 쇼핑리스트에도 일찌감치 청재킷을 담아뒀다.
글을 쓰다 보니 유덕화의 팬심 간증 시간이 된 듯하지만 원래 글을 쓴 목적은 이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한다.
왜 나는 '유덕화의 아재파탈'에 빠지게 된 것일까에 대한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유덕화의 잘생긴 얼굴도 한몫했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의 불안한 분위기에 매력을 느낀 점이 더 크다. 홍콩이 중국령으로 반환되는 시점을 앞두고 있던 시대이다 보니, 그 불안함이 영화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여기에다 주인공의 위태로운 사랑과 우정, 삶까지 그려지니 불안감이 제대로 높아진다.
불안은 사랑이 불타오르기 딱 좋은 발화점이다. 고백을 하더라도 번지점프대에서 하면 더 효과가 좋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 않나. 사실 이것도 로맨스라는 것을 아예 배제해버린 이과생들의 연구 결과이기에 곧이곧대로 믿지는 말자.
하여튼 불안할 때 우리는 더욱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지고, 사랑을 갈구한다. 하지만 사랑은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아니다. 오히려 불안감을 더욱 극대화할 뿐이다.
사랑은 사람의 감정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롭다. 나 하나의 감정도 다루기 힘든데 두 사람이 하는 사랑은 얼마나 더 힘들겠나.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불안해하고, 사랑하면서도 외로운 것이다.
'열혈남아'와 '천장지구' 속 유덕화의 모습은 마치 아찔한 고공에서 안전 장치 하나 없이 줄타기 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만든다. 불안한 청춘의 불안한 사랑을 바라보는 내 감정은 더 종잡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일까. 그 시대의 유덕화는 그렇게나 뭇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단다. 하지만 남자들이란, 오토바이에 매달려 폭주족이 되는 볼썽사나운 일탈로 유덕화 덕질을 시작하셨다. 어쨌든 그들도 자신들이 가진 청춘의 불안감을 유덕화처럼 해소하려 한 것일 터다.
하지만 그것도 운 좋으면 '비트' 속 정우성이었고, 운 나쁘면 그냥 정우성 따라다니는 임창정에 불가했다. 그러나 그 시대, 차라리 그렇게 불안하다고 말할 수나 있었지 않나. 탈선하면 '쟤들이 불안하구나'라고 말해주는 사람이라도 있었지. 아니면 유덕화 형님처럼 아이콘이라도 되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의 '탈선'은 그냥 사연 없는 잘못이 됐다. 불안함은 숨겨야 했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주인공들은 대중문화 속에서 사라졌다. 완벽함을 향해 달려 나가는 사회는 개인의 불안함을 신경 써 줄 여력이 없다. 이제는 완벽한 어벤져스 히어로들이 더 인기다. 불안에 공감하기보다 숨기기 급급하다.
그 시대 불안의 청춘 유덕화는 이제 60살의 중년이 됐다. 하지만 영화로라도 남아 불안하다고 말하는 우리를 여전히 위로해준다. 꼰대처럼 "야, 다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데 정말 "다 그런 것 같다"고 고개 끄덕이게 된다. 근데, 오토바이는 안 탈 거다. 불안함을 표출하기 위해 목숨은 내던지기 싫다. 그러고 보니 그럼 청재킷이 무슨 의미인가 싶다. 글을 마무리하며 무신사 쇼핑리스트에 넣어둔 청재킷을 삭제하러 간다.
(글) 안태현 (사진) ‘천장지구’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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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us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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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로 불안한 자녀 돌보기
김환식 장로 코로나19로 인한 두려움과 불확실성 가운데 살아가는 지금, 우리 자신의 걱정뿐 아니라 자녀들의 걱정을 다루기 위해 실제적인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부모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우리 자녀를 포함한 다른 이들을 얼마나 적절히 보살피고 양육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1. 정보 수집은 믿을만한 자료를 통하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머리기사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미디어 대신 믿을만한 뉴스나 정보원을 찾도록 힘쓰라. 신뢰할만한 자료는 아래에서 구할 수 있다. • 미국 질병 통제 예방센터 (The Center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gov) • 미국 외상성 스트레스 연구센터(The Center for the Study of Traumatic Stress, cstsonline.org) 2. 지나치게 많은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아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지혜로운 일이다. 하지만 너무 많이 관심을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정보를 모으고 뉴스를 읽는 일에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다. • 뉴스는 하루에 두 번만 확인한다 등의 규칙을 세워 언제 어떻게 최신 뉴스를 확인할 것인지에 대한 범위를 정하라 • 기사 제목만 보고 충격을 받거나 놀라지 말고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충실하라. • 아이들의 나이를 고려하여, 자녀들 역시 미디어에 지나치게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시키라. 부모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짜 정보와 가짜 정보의 복잡한 거미줄 사이를 잘 헤쳐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좋은 정보를 수집하여 자녀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이다. 3. 필요에 따라 자녀들과 정보를 공유하라 아이들과 정보를 공유할 준비를 하되, 강제로 그리할 필요는 없다. 필요 이상으로 정보를 나누지 않도록 주의하라. • 걱정, 두려움, 염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우리의 현재 감정 상태를 아는 데도 도움이 된다. • 어떤 감정을 정확히 명명(naming)하고 나면 그 감정의 강도가 감소 된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다면 그것을 부모와 나누도록 격려하라. • 아이들의 두려움은 실제적인 것이고 또한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줌으로 써 아이들의 감정에 공감하라. 동시에, 예방을 위해 무얼 할 수 있을지, 전문가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해보라. • 염려나 두려움, 걱정을 부모님과 함께 나누는 것은 언제든 괜찮다는 것을 알게 하라. • 부모인 우리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린 이 위기를 잘 이겨낼 거야” 같은 말을 통해 안심시키라. 4. 평정을 유지하고, 자신감을 보여주라 • 자신감을 다른 이들에게도 보이려면 먼저 자신의 두려움과 염려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 자녀들과 함께 하는 대화는 차분한 분위기에서 사실에만 입각하여 말하라.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떤 일이 필요한지에 초점을 맞추라. • 자녀들에게 건강을 위한 습관을 가르치고, 이를 가족이 함께 세우는 계획 및 안전 생활 수칙에 포함 시키라. 5. 부정적인 생각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 당신과 당신 자녀가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온 것처럼 두려워 떨거나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 최악을 상상한다 함은 “이 바이러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야”처럼, 어떤 상황이 실제보다 훨씬 더 안 좋다고 상상하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 과도한 일반화는 우리의 염려를 증가시킬 뿐인 것으로, “항상”, “결코”, “아무것도” 등의 부정확하고 극단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우린 아무런 힘이 없다고”와 같은 말이 있다. • 해결책은 각 시나리오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간파하고 그것을 정확한 진술로 바꿔보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까지 이 상황에 대처하느라 힘들었던 건 분명해. 이 위기가 끝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바이러스의 파괴력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아. 예를 들자면…” 6. 기본에 충실하라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것을 간과하거나 게을리하지 말고 균형 감각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라. • 가끔 바람을 쐬라.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도 야외 모임을 계획해보라. 가능하다면 잔디가 있는 곳으로 나가 산책이나 자전거 타기를 하면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라. 이 시간을 통해 가족 관계가 더 가까워지도록 하라. • 쉬라. 이 기회에 해야 할 많은 일을 잠시 내려놓고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 잘 먹으라. 카페인이나 설탕을 과도하게 섭취하지 않도록 하고, 그것들이 당신의 걱정이나 기분에 미치는 영향을 잘 관찰하라. • 웃고, 놀고, 즐기라. 좌절과 침울한 마음으로 이 시간을 모두 보낼 수는 없다. 때로는 실없는 행동, 유머, 재미있는 활동을 통해 당신 자신과 가족의 마음에 짐을 덜어주라. 그리하면 모두의 걱정이 줄어들 것이다. 7. 일정한 생활 규칙을 세우고 준수하라 아이들을 포함한 우리는 모두 일관성 있고 예측 가능한 일과가 있을 때 좋은 성과를 낸다. 현재는 우리의 가족, 개인, 그리고 업무 등 모든 일과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러한 혼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적응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주는 스트레스와 염려의 정도는 실로 다양하다. 개인적으로는 ��유가 점점 제한될수록 더욱 큰 실망과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 변화와 예측 불가능에 대해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변화와 염려에 대해 까탈스러움, 분노, 좌절, 포기, 슬픔으로 반응할 수 있다. 이러한 징후와 증상들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자녀들을 너무 다그치지 말고 필요할 때마다 아이들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라. 덧붙여서 기상 시간 및 취침 시간과 더불어 규칙적인 수면 습관, 식사 시간, 노는 시간, 공부 시간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면 규칙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쉽지 않지만, 우리의 일상에 일종의 리듬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8. 다른 이들에 대해 생각하고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라 친지와 이웃이 어떻게 지내는지,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에 초점을 맞추면 자신을 향한 염려가 다른 이들을 위한 염려로 바뀌게 된다. 이웃이 잘 지내는지 알아보고, 함께 식사도 해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연락해보고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 9. 필요할 때는 지원을 요청하라 걱정으로 인해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자녀들의 두려움과 걱정을 어떻게 대화하면 좋을지에 대한 도움이 필요한 경우 교회 목사나 리더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라. 목사는, 가족을 목양하는 당신을 목양하기 위해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에 더해, 당신이나 지인 중 누군가에게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한 경우, 현재 거주 지역에 있는 많은 상담가와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화상으로 원격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10. 당신의 영혼에 양식을 공급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데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라. 영적으로 도전을 주는 책을 읽어라. 가능하면 두세 사람이 모이는 기도 모임, 소그룹 모임, 아니면 친지들과 온라인 모임을 만들어 교제하며 서로 격려하라. 11.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 이럴 때 더욱 그리하라. • 온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고 묵상하라(시 115:3).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그 부산물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여 있다. • 일, 건강, 재정, 가족 등 당연시해왔던 모든 복에 대해 주께 감사하라. •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끝) 202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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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vhauab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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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기질에 따른 육아법 아이 기질이 나타난다 기질(氣質, temperament)이란 아이의 타고난 성격을 말한다. 더 엄밀히 정의하면 기질이란 각 개인이 쉽게 느끼는 기분을 말하고, 이러한 기질을 기반으로 개인의 ‘의지’가 결합된 것을 성격이라고 한다. 명랑함, 쉽게 화를 ���, 느긋함은 기질이고, 고통에 대해서 견디는 것이 강하느냐 약하느냐, 책임감이 강하느냐 등은 성격이다. 기질은 크게 까다로운 기질, 순한 기질, 보통 기질(느긋한 기질)로 나눈다. 이중 다루기 힘든 것은 전체의 10%를 차지하는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들. 이들은 신체 생리적으로 항상 각성되어 있어서 조그만 자극에도 쉽게 그리고 강렬하게 울고, 잠을 잘 안 자거나 깊게 못 자고, 음식을 잘 먹지 않거나 매우 불규칙하게 먹고, 편안한 감정 상태를 잘 보이지 않으며 잘 달래지지 않는다. 생후 4개월쯤 되면 우리 아이가 까다로운지, 순한지, 보통인지를 알 수 있다. 각 기질이 애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 순한 기질이 안정적 애착을 형성하는 데 유리하다.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들은 부모와 불안정한 애착을 형성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부모가 안정적인 양육을 제공하면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들도 점차 자라나면서 기질이 변하여 안정된 성격으로 자랄 수 있다.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들은 부모를 지치게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게 하여 부모로 하여금 아이에게 좋지 못한 행동이나 반응(가령 신경질을 많이 내고 아이에게 폭언, 폭력을 하는 것)을 유발하고, 이는 다시 아이의 까다로운 기질을 더욱 까다롭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할 수 있다. 까다로운 기질을 가진 아이 다루기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에게 부모는 일관되게 대응해야 한다. 부모가 어찌할 줄 몰라서 안달하여 어떤 때는 계속 달래고 어떤 때는 심하게 야단을 치거나 때리기도 하는데, 이것이 대표적인 비일관적 양육 태도이며, 아이와 부모 간의 불안정한 애착을 형성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아이를 탓하는 것이 제일 나쁘다 사실 기질이 좋지 않게 태어난 것도 따지고 보면 부모 탓이다. 아이가 까다로운 행동을 보이지 않게 하려면 미리 예방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가령 부모가 아닌 다른 어른을 보고 심하게 우는 아이에게 “울지 마, 할머니야”라고 야단치거나 달래는 것보다는 아이가 안정될 때까지 만나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점진적으로 다른 어른들과 만나게 해서 아이가 적응 기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아이가 짜증 내고 칭얼거려도 아이의 타고난 기질이라고 이해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늘 편안한 감정 상태에 있는 것 아이는 부모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그 감정 상태를 배우게 된다. 까다로운 아이를 대할 때는 절대로 화를 내거나 흥분해서 소리 지르지 말고 부모가 차분하고 여유 있는 감정 상태와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의 부정적 감정 상태와 부모의 긍정적 감정 상태가 서로 만나서 아이의 까다로운 기질이 순화될 수 있고, 아이는 부모를 안전한 기지로 여기게 되어 점차 바뀌어갈 수 있다. 유명 여성 아이돌 그룹 미성년자 멤버의 얼굴에 나체사진을 합성하는 등의 방식으로 만든 음란물을 제작하고 판매한 혐의를 받는 30대 남성에게 1심 재판부가 실형을 선고했다.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2부(부장판사 박상구)는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음란물제작·배포 등) 등 혐의로 기소된 박��(34)씨에게 26일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80시간 이수,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장애인 복지 시설 취업제한 각 5년도 함께 명령했다. 재판부는 “연예인으로 활동하는 피해자 사진을 기존 음란물에 합성하는 방식으로 760여개를 제작하고 판매했다”며 “음란물에는 만 19세 미만 아동·청소년 대상 사진, 영상이 다수 포함됐다”고 판시했다. 이어 “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 사진 판매는 여성을 성적 도구로 삼는 성인식을 확대·재생산하는 등 사회적 해악이 큰 심각한 범죄”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별다른 죄의식 없이 손쉽게 수입을 얻을 목적으로 아동·청소년 포함 음란물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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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faasdfa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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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ceedyce9022-blo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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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ynnjakobe0606-blog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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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yun84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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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 히스, 댄 히스, “자신 있게 결정하라”
처음에는 이 책이 우유부단한 사람에게 힘을 주는 책인가 싶었다. 마침 요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져있던 터라 뭔가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을까 싶어 펼쳐보았다. ‘자신 있게 결정하라’니까.
    읽어보니 자신 있게 결정할 수 있는 법을 일러주는 책은 맞다. 그런데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섣불리 판단해서 일을 그르치는 사람이 보면 좋은 책인 것 같다. 잘 판단하는 방법, 슬기롭게 살펴서 스스로 자랑스러울 만큼 훌륭한 결정을 내리는 ‘프로세스’를 다루는 책이다. 물론 나처럼 뭔가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도 힌트를 얻어갈 수 있다. 결정을 잘 내리는 방법을 습관처럼 익히면 자신 있게 뭔가를 정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프로세스 그 자체는 우리에게 크나큰 감정적 선물, 바로 자신감을 안겨준다. 한쪽에 치우친 정보를 모으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무시하는 데서 오는 오만한 과신이 아니라 자신이 최고의 결정을 했을을 아는데서 오는 자신감 말이다. p347.
         뭔가 판단하고 방향 정하는 일을 지혜롭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격언과 속담이 이미 많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라’, ‘급할수록 돌아가라’,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같은 말들에는 인류의 오랜 지혜가 들어 있다. 중요한 일일수록 급하게 보지 말고 두루 살펴서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천천히 이것저것 잘 재보고 정하라는. 하지만 너무 흔하고 뻔해서일까. 그런 충고를 많이들 그냥 흘려듣는다. 그리고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느낌이 오는 대로’ 덜컥 뭔가 정했다가 나중에 가서 후회하곤 한다.
    《자신 있게 결정하라》는 어떻게 보면 별 내용 없는 책처럼 보인다. 격언이 숱하게 다루고 속담이 골백번 이야기하던 바로 그 무언가를 또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에이 뭐야 하며 덮어버리지 않고 쭉 읽게 된다. 격언과 속담 속 지혜들을 조리 있게 잘 정리해서 그럴듯하게 있어보이게 잘 포장해놓았다고 해야 할까. 심리학 연구, 의사결정 연구 사례를 꽤 많이 인용했다. 적어도 글쓴이 혼자만의 개똥철학을 무책임하게 써놓은 건 아닌 것 같아서 믿음이 간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결정 내리는 과정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각 단계마다 저지르기 쉬운 실수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마음에 와 닿게 설명해주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결정을 잘 내리는 체계적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이 뭔가를 정할 때는 크게 네 단계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선택에 직면하고, 선택지를 따져보고, 선택하고, 선택한 것을 밀고 나가고. 그런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좁은 시야와 들쭉날쭉한 감정이라는 타고난 약점이 있어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곤 한다.
    첫째, 선택에 직면했을 때 지나치게 좁은 선택지 안에 갇혀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사람 시야가 생각보다 좁아서 여러 가능성을 두루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 또는 ‘할까 말까’ 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 더 많은 선택지들이 있음을 보지 못하고 좁디좁은 시야 안에 갇힌다. ‘범위 한정 성향’이다. 그럴 때는 다른 것들을 볼 수 있게, 더 넓게 볼 수 있게 일부러라도 이것저것 노력해야 한다. 여러 가지 내용 가운데 나는 다음 두 가지 방법이 가장 좋��다.
    기회비용을 생각한다면 훨씬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걸 선택하면 대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똑같은 시간과 비용으로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같은 간단한 질문을 먼저 던져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p75.
    일명 ‘선택안 없애기 테스트’도 범위한정성향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 특정한 선택안을 ‘전혀’ 선택할 수가 없다고 상상하면 심리적 스포트라이트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 그전까지는 스포트라이트의 방향을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p75-77.
         둘째, 선택지를 따져 볼 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다가 잘못 판단한다. ‘확증 편향’이다. 뭐가 가장 좋은지 찾아본 다음에 선택하는 게 아니다. 먼저 마음속으로 어느 한 쪽을 정해놓고는 그게 좋은 이유를 이리저리 끼워 맞춰서 찾는다. 이렇게 내린 선택과 결정은 엉터리일 확률이 높다. 자기 생각이 맞는지 검증해야 한다. 검증은 안에서 하는 게 힘들다.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스스로 말하기 어렵다.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자기 생각의 반대편이 되어보고, 자기 느낌에 기대지 말고 객관적 수치에 주목한다. 내 생각을 바깥세상과 만나게 해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머릿속 가정에 대해 검증을 실시할 수 있을까? 그 첫 단계는 … 자신의 처음 생각과 반대되는 방향을 고려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p140.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내부적 관점은 우리의 스포트라이트 안에 들어온 정보에 의존한다. 즉 해당 상황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평가에 의존한다. 반면 외부적 관점은 나름의 특별한 측면들을 무시하는 대신 보다 큰 그림을 분석한다. … 외부적 관점이 더 정확하다. 특정 개인의 느낌이 아니라 다수의 직접적인 경험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p167-168.
    외부적 관점은 … 평균치에 눈을 돌린다. … 통계학 용어를 쓰자면 해당 상황에 대한 ‘기저율(base rates)’, 즉 유사 상황을 경험한 다른 사람들의 성과율을 나타내는 데이터에 주목하는 것이다. p168.
    전문가에게 충고를 듣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전문가라고 만능이 아니다. 그들을 최대한 잘 써먹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점은 명심해라. 전문가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지’를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것 말이다. … 전문가들은 예측에 서툴 때가 많다. 그 대신 기저율을 평가하는 데는 뛰어나다. p171.
    ‘돌다리를 건너기 전에 두들겨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우칭(Ooching)은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몇 차례 작은 실험을 실시해보는 것을 뜻한다. p193.
    우칭을 실행한다는 것은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시험’해볼 수 있는데 왜 ‘예측’하지?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왜 ‘짐작’하는 거지? p214.
         셋째,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감정에 휘둘려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읽지 못하고 놓친다. 특히 ‘단기감정’이 발목을 잡는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지금 가진 것을 잃기 싫어한다. 눈앞의 무언가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결정을 망치곤 한다. 현명하게 결정하려면 자기감정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어느 정도 심리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가 같은 상황이라면 나는 뭐라고 해줄까’를 생각해보라는 팁이 무척 좋았다.
    10-10-10 기법이란 우리의 결정을 세 가지 시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10분 후에 이 선택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낄까? 지금으로부터 10개월 후에는? 10년 후에는? 이 세 가지 시간적 관점은 결정을 할 때 거리감을 확보해준다. p225.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생각이 막혔을 때는 아래 질문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만일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나는 뭐라고 조언할까? p241.
         넷째, 선택을 했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잘 지켜봐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자주 실수한다. 사람은 자기 예측과 판단을 지나치게 믿는다. 보통 비관하기보다 낙관한다. 그러다 방향을 틀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도 중요한 기회를 놓치는 일이 생긴다. 잘 될 때와 잘 안 될 때를 모두 생각해봐야 한다. 마치 책을 똑바로 잘 세우려고 양쪽에 북엔드를 받쳐놓는 것처럼 미래 예측에도 양쪽 받침대가 필요하다.
    최상의 시나리오와 최악의 시나리오를 고려하면 가능한 결과의 예상 범위를 확장하여 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미래란 투자 종목이 아닌 인생 그 자체다. 따라서 양쪽 북엔드 사이의 그 어떤 상황에도 대비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 … 미래에 북엔드를 세워두면 최악의 상황과 최고의 상황 모두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p278.
    자기 과신에 관한 연구는 앞날을 제대로 예측했다고 자신할 때도 우리가 틀릴 확률이 생각보다 높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래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넓은 범위이기 때문이다. p278-279.
    혹시 모를 불상사를 예방하는 매우 간단한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자신이 과대 확신하고 있다고 ‘가정’한 뒤에 넉넉한 오차범위를 설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엔지니어들은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안전계수’를 설정한다. 안전계수는 혹시 있을지 모를 기계 결함에 대한 바람직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p288-289.
         ‘~을(를) 책으로 배우나’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사람 인생을 책만 읽어서 알기는 어렵다. 연애도 책으로 배울 수 없고 대인관계도 책만 읽어서는 뾰족한 수를 찾기 힘들다. 직접 이리저리 부딪쳐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해답이 여기 있소’하는 식의 자기계발서는 믿기 힘들다. 하지만 모든 일을 매번 직접 겪어가며 배울 수는 없다. 그럴 때 적당한 매뉴얼이 참 절실하다. 책으로 모든 걸 알 수는 없어도 어디로 가면 똥을 피할 수 있는지 정도는 배울 수 있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선택하기 전에 ‘제대로 따져보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야무지게 밟아나가면서 참고할 매뉴얼로 잘 써먹을 수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맨 뒤에 친절하게 요약도 달아놓았다. 여러 선택 장애 사례와 극복 방법을 볼 수 있는 ‘클리닉’ 부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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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fawegaw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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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girlsneedinfo-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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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의 무희, 천 마리의 학, 호수’: 일본의 서정적임과 허무함, 그리고 그 속의 다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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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의 무희, 천 마리의 학, 호수’: 일본의 서정적임과 허무함, 그리고 그 속의 다른 것.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이 가장 유명한 작가이다. 나의 경우, 아주 오래 전에 ‘설국’을 읽었다. 최근 주변 사람들이 일본 소설을 많이 읽는 것 같아서 나도 오랜만에 ‘설국’을 다시 읽어 볼까 싶어 빌리려고 했는데, 아뿔싸, 없다. 그래서 대신 할 책을 고르다 이 책을 빌렸다.
  이 책은 총 세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즈의 무희’. ‘천 마리의 학’, ‘호수’. 세 스토리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워낙 다른 느낌인지라 리뷰를 쓴다고 참 애 먹었다.
  ‘이즈의 무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초창기 작품이자, 실제 경험담이라고 한다. 여행길에서 유랑 극단을 만난 스무 살 그, 그리고 14살 어린 소녀 무희. 아마 두 주인공의 나이 때문에 흠칫 놀라는 분들이 있으실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총 평을 할 때 제 생각을 이야기 할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글을 쓸 때 가와바타 야스노리는 고작 고등학생 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풋풋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또한 애절하고 첫사랑의 설렘에서 느낄 수 있는 묘한 긴장이 감돈다.
  여기서 잠시, 소소하지만 순간 턱,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다운 문장들을 적어 볼까 한다.
  구절
  꼬불꼬불한 산길로 접어들면서 마침내 아마기 고개에 다가왔구나 싶었을 무렵, 삼나무 밀림을 하얗게 물들이며 매서운 속도로 빗발이 산기슭으로부터 나를 뒤쫒아왔다.
  표현력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일본의 그 특유의 맑아 보이는 표현력을 가장 뛰어나게 보여 줄 수 있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무언가 불행한 일이라도 당하셨나요?”
“아니오. 방금 사람과 헤어지고 왔습니다.”
나는 무척 솔직하게 대답했다. 우는 것을 남이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단지 맑은 만족 속으로 고요히 잠든 것 같았다.
    배에는 생선과 바다의 내음이 물씬거렸다. 어둠 속에서 소년의 체온이 따스하게 느껴지며 나는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 두었다. 머리가 온통 맑은 물로 변했고 물이 주르르 흐른 뒤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듯 달콤한 쾌감이었다.
    이 글은 매우 짧다. 또한 큰 사건도, 큰 가식도 과한 감정도 없다. 그저 풍경 묘사가 하늘거리며 강물이 졸졸졸 조용히 흐르듯 지나간다. 반면, 주인공의 시선이 애틋하고 여유로워 가슴이 시리다. 삶에서 자주 오지 않는 그 순수하고 촉촉한 감성을, 알 수 없는 감정 선들에 다정함과 아련함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매우 소소하고 깨끗한 느낌이 일본 로맨스 소설 중 청초함과 그 특유의 풋풋함을 보여주며, 마치 내가 서정적인 일본 소설의 첫 시도자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듯 하다.
    ‘천 마리의 학’의 경우, 한국인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주인공 기쿠기이 다도를 만드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그는 아버지의 숨겨둔 애인 치카코에게 선을 소개 받을 만큼 인연�� 유지한다. 아버지 친구의 부인이자,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오타부인과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오타부인이 죽은 후 그녀의 딸과 다도를 사이에 두고 관계를 맺는다. 솔직히 많이 당황스러운 내용이다.
  자, 여기서 잠시 혼란스러운 소설, ‘천 마리의 학’ 일부분을 소개하겠다.
  P75.
(기쿠기가 오타 부인을 안고 난 이후 그들의 대화)
  “상처는 아물어도 흔적을 남가지 않나요?”
  “지나가 버리면 그리워지는 경우도 있어요.”
  부인은 아직 꿈을 꾸듯이 말했다.
  P189-190
(오타 부인이 죽은 후 기쿠기가 그녀의 딸 후미코와 함께 있는 장면)
  기쿠기는 자신의 아버지와 후미코의 어머니를 두 찻잔으로 보자 아름다운 영혼이 나란히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거두나 찻잔의 모습은 현실이기에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자신과 후미코의 현실도 무구한 것처럼 여겨진다.
  “아버지도 분수에 안 맞게 찻잔 깥은 걸 만지작거리면서 갖가지 죄업을 짊어진 마음을 마비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어머.”
  “하지만 이 찻잔을 보고 있자니 원래 주인의 나쁜 점은 떠오르지 않는군요, 아버지 수명이 전래된 찻잔 수명의 몇 분의 일에 지나지 않을 만큼 짧아서…”
  “죽음은 우리 발치에 있어요, 무서워요, 자신의 발 밑에도 죽음이 있는데 언제까지고 엄마 죽음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저도 이것저것 해봤어요.”
  “그렇군요, 죽은 사람에게 사로 잡혀 있으면 자신도 이 세상에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되죠.”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를 내가 완벽히 통달할 수는 없지만 몇 번 읽다보니 이런 생각은 들었다. ‘다도’라는 단아함 혹은 정결함 이란 아름다움을 사이에 둔 인간의 추잡함, 그리고 죽고 나면 아무짝에 쓸모없는 욕망, 그리고 그 속에서 나오는 자기혐오가 느껴진다고. 단순히 일본의 전통적 다도 문화 통해 이 패륜적인 스토리를 아름답게 포장하고자 하는 목적만 갖고 있는 소설은 아닌 것 같다.
  ​
  ‘호수’의 경우는 많이 혼잡한 느낌이다. 그 이유는 아마 긴페이가 미행하는 수많은 여자들의 등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주인공 긴페이의 난잡한 시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국어 선생님인 그의 취미는 여자를 미행하는 것이다. 그가 왜 이런 취미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과거와 현재들이 왔다 갔다 하며 나오는데 그것은 독자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 수도 혹은 호기심을 이끌 수도 있을 수 있을 만큼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국어 선생님인 그가 가지고 있는 이 변태적인 취미는 처음엔 무슨 이런 또라이가 다 있을까? 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키지만 나중에는 그 상상이 역겹다 못해 안쓰러운 느낌이 든다.
  ‘이즈와 무희’ 와 ‘천 마리의 학’은 유독 강한 서정적임과 약간의 허무함이 존재한다면, ‘호수’는 그와 반대이다. 물론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답게 표현력 하나는 끝내준다. 하지만, 뭐랄까 엄청 미친 듯이 전개를 배배 꼬아 놓고, 갑자기 끈을 툭 잘라 버린 듯, 풀어내기도 전에 댕강 잘라버리는 느낌이 들어 조금 아쉽기도 한 반면, 아마 이 소설의 시작이 일본 그 특유의 허무주의 사상에 한 몫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다자이 오사무 보다 이 분이 먼저 허무함을 소설에 담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는 ‘호수’라는 제목과 가장 동 떨어진 느낌의 반면 가장 와 닿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호수처럼 맑고 아름다운 물웅덩이 같이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 물의 깊이는 어떤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그 깊고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 지 우리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꼭 긴페이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긴페이가 미행하는 여자들도, 그리고 우리들도 모두 마찬가지지 않을까.
    일본 소설들은 가끔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그것이 반드시 야해서 만은 아니다. 아마, 대한민국사회에서는 다루기 힘든 부분들을 많이 다루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풋풋한 느낌일지라도 ‘이즈의 무희’의 경우, 결국 로리타와 연관이 있고, ‘천 마리의 학’은 난잡하게 성관계를 맺고 다니는 패륜아의 이야기이며, ‘호수’는 예쁜 여자를 밝히는 관음증 환자의 이야기이다. 사실 어찌 보면 괜히 더러운 꼴 보기 싫거든 안 읽는 게 나은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굳이 이런 책을 리뷰 하는 이유는, 사색의 시간 때문이다. 과연 우리에겐 추악함이 없는지, 꼭 그들과 같은 것이 아닐지라도 당신의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괴물은 어떠한 모습인지에 대해 스스로 논해 볼 시간 말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아름다운 문장 속으로 포장 된 이 더럽고 추잡한 이야기, 우리의 삶 역시 그렇지 않은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여유가 있을 때, 혹은 사색에 빠지고 싶을 때 이 책을 읽어 보시길 추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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