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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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m hyunsik 'la mar' m/v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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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UNSIK 고독한 바다 (la mar) mv tea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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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걸 야스 씬 시간대 좌표 나나 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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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6화 위주로 나나 교도소 엉덩이 전라노출 대역 아니라고 발표 했습니다. 그밖에 마스크걸 노출 수위 exid 정화, 이한별 가슴 나옵니다. 6화 교도소 장면 하이라이트 엑기스 시간대 집중하세요.
심해 문어는 일반적으로 지구에서 가장 까다로운 환경 중 하나인 추운 바다에 서식하는 고독한 생물입니다.
01 가장 오래된 해파리 일로 캐나다 로키산맥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해파리 종 2018년에 바다 표면에서 약 2마일 아래에서 다리가 8개인 두족류 수천 마리가 발견되자 해양 과학자들은 당황하면서도 매료되었습니다. 끝없는 어둠의 장소인 자정대라고 알려진 약 3,200미터 아래 열수 분출공(따뜻하고 화학 물질이 풍부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해저의 개구부) 주변에 모여 있는 문어 무리입니다.
캘리포니아 몬트레이에서 남서쪽으로 128.7km 떨어진 사화산인 데이비슨 마스크 걸 야스 씬 시간대 좌표 나나 대역 시마운트(Davidson Seamount) 기슭 근처의 작은 언덕에서 발견된 문어 정원에는 무우옥토퍼스 로부스투스(Muusoctopus Robustus)라는 종이 가득했는데, 그 이유는 연구팀이 진주 문어라는 별명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알을 보호하는 동안 그들이 보는 방식.
이번 발견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문어 집단입니다. 연구자들은 현장의 한 부분에서만 6,000마리 이상의 문어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20,000마리의 문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질문은, 음, 그들이 왜 그곳에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들은 왜 모이는 걸까요? 이 샘에서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물이 이 동물들이 그곳에서 번식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열쇠인 것 같습니다.”라고 Monterey Bay Aquarium Research Institute의 수석 과학자인 Jim Barry는 말했습니다.
수요일 Science Advances 저널에 발표된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연구자들은 문어가 짝짓기와 둥지를 짓기 위해 엄청난 수의 심해 온천으로 이동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알을 낳은 후 문어 어미는 알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포식자로부터 알을 보호합니다. 기온이 따뜻해지면 생물체의 배아 발달 속도가 빨라집니다.
“매우 긴 육추 기간은 어미의 알이 생존하지 못할 가능성을 높입니다. 어미 문어는 열수 온천에 둥지를 틀면서 새끼에게 다리를 뻗게 해줍니다.”라고 연구의 주요 저자인 Barry는 설명했습니다.
10,500피트의 주변 수온은 화씨 35도(섭씨 1.6도)입니다. 그러나 문어 텃밭의 틈과마스크 걸 야스 씬 시간대 좌표 나나 대역 틈새의 수온은 화씨 51도(섭씨 11도) 정도에 이른다.
최첨단 수중 기술 덕분에 연구자들은 문어 정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Monterey Bay Aquarium Research Institute의 연구원과 다른 기관의 동료들은 최첨단 수중 기술을 사용하여 문어 정원을 이해했습니다.
연구소의 ROV Don Ricketts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14일 동안 현장에 대한 후속 다이빙을 진행하여 문어의 고화질 비디오를 촬영하고 미터 규모의 해상도로 문어 정원을 매핑했습니다.
원격으로 작동되는 잠수정에는 문어의 행동을 장기간 관찰하기 위해 온도와 산소 수준을 측정하는 저속 촬영 카메라와 센서도 남아 있습니다. 카메라는 2022년 3월부터 2022년 8월까지 약 12,200장의 이미지를 촬영해 20분 간격으로 이미지를 촬영했다.
연구원들은 문어의 알이 2년 이내에 부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팀이 예상했던 것보다마스크 걸 야스 씬 시간대 좌표 나나 대역 훨씬 빠른 속도입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과학자들은 왜 문어가 그 장소에 끌리는지 알아냈습니다. 흉터와 기타 뚜렷한 특징을 통해 과학자들은 개별 문어와 새끼의 발달을 모니터링할 수 있었습니다. 성체 수컷과 암컷 문어, 발육 중인 알, 부화한 문어의 존재는 해당 장소가 번식지와 ���묘장으로만 사용되었음을 나타냅니다. 팀은 중간 크기의 개체나 먹이를 먹는 증거를 관찰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부화한 새끼들이 헤엄쳐 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들이 바로 여기에 살고 있음을 시사하는 작은 동물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딘가로 헤엄쳐 가서 삶을 시작합니다.”라고 Barry는 말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알은 팀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2년 이내에 부화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심해 문어 한 종은 4년 반 동안 알을 품습니다. 영하로 내려가는 심해의 열수분출구를 벗어나면 알을 품는 기간이 수년 동안 지속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따뜻한 물에서 품는 것은 위험하지만 – 계란을 요리할 수도 있고, 비정상적인 현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알을 낳는 기간이 짧을수록 이점이 생기며, 우리는 무엇이 공정해 보이는지 알기 때문에 완벽하게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부화율이 높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캘리포니아 몬트레이 해안 앞바다의 이 지역이 번식지와 묘목장으로만 사용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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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있는 사진>: 잃어버린 풍경과 기억의 파편을 꿰매는 섬세한 바다
심오한 상실의 푸른 심연을 담은 <바다가 있는 사진 (A Photo with the Sea)>은 단순한 귀향 소설을 넘어, 기억과 망각, 고향과 이방, 삶과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낸다. 작가는 노년의 주인공 '나'를 통해 개인의 역사와 시대의 변화가 교차하는 지점을 포착하고, 세련된 문체와 밀도 높은 서사를 통해 독자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과 여운을 선사한다.
문학사적 의미: 회귀와 성찰의 서사를 확장하다
<바다가 있는 사진>은 한국 문학의 전통적인 귀향 모티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과거의 회상과 현재의 고독이 섬세하게 교차하는 서사 구조는, 박경리의 <토지>나 황순원의 <고향>과 같은 작품들이 보여준 향수 어린 귀향과는 확연히 다른 결을 지닌다. 주인공의 귀향은 낭만적인 이상향을 찾는 여정이 아니라, 상실과 ���화로 점철된 현실을 직시하고,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재확인하려는 고독한 몸부림에 가깝다.
특히, '바다'라는 상징적 공간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다양한 의미층위를 형성한다. 푸른 바다는 주인공의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공간이자, 동시에 아내의 상실과 고향의 변화를 목격하며 느끼는 깊은 슬픔과 절망을 상징한다.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고 흐르는 바다의 속성은, 삶의 무상함과 영원한 변화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조건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세련된 문체와 밀도 높은 서사: 감각적인 언어로 빚어낸 삶의 풍경
작가의 세련된 문체는 <바다가 있는 사진>의 깊이를 더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감각적인 묘사와 섬세한 심리 묘사는 독자를 주인공의 내면세계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그의 고독과 그리움, 회한과 희망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특히, 독일에서의 삶과 고향 제주도의 풍경을 대비시키는 장면들은,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고향 상실감이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더불어, 작품 곳곳에 배치된 과거의 기억들은 현재의 서사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주인공의 삶 전체를 조망하는 거대한 그림을 완성한다. 아내와의 만남, 독일에서의 생활, 그리고 고향에서의 유년 시절 등, 과거의 기억들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주인공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단서이자, 그의 상처와 성장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결론적으로, <바다가 있는 사진>은 잃어버린 풍경과 기억의 파편을 꿰매는 섬세한 바다와도 같은 작품이다. 작가는 노년의 주인공을 통해 삶의 무상함과 인간 존재의 고독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독자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이 작품은 한국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함은 물론, 독자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기억될 명작으로 ��리매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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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인간의 운명과 성찰의 기록
알베르 카뮈 이방인 1942 / 뫼르소
헤르만 헤세 데미안 1919 / 싱클레어 크로머 데미안 베아트리체 피스토리우스 / 아브락사스abraxas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1925 / 개츠비 데이지 닉 캐러웨이 뷰캐넌 정비공 / 상실의 시대 /
프란츠 카프카 변신 1915 / 그레고르 잠자 / 몸 해체 가족 해체 공간 집 해체 / 산업사회가 잉태한 현대성에 의문 제시 /
조지 오웰 동물농장 1945 / 메이저(마르크스 레닌) 나폴레옹(스탈린) 스노우볼(트로츠키) 존스(농장주인) / 오웰 사회주의자 소련식(스탈린식) 사회주의는 혐오함 /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880 /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탐욕 방탕) 큰아들 드미트리(음탕 순수) 둘째아들 이반(무신론자 허무주의자) 셋째아들 알렉세이(수도원 신앙 종교적) 사생아 ���메르자코프(간질 분노) / 그루센카(표도르 vs 드미트리) 스메르자코프가 표도르 살해 드미트리가 살인범으로 체포/ 스메르자코프 자살 드미트리 20년형 선고받음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1962 / 수용소 군도 노벨상 /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1939 / 대공황 배경 / 조드 가족 케이시 큰아들 톰 조드 딸 로저샨 / 에덴의 동쪽 / 근대 자본주의의 어둠 / 그래도 역시 사람만이 희망 / 1962 노벨 문학상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1922 / 레오폴드 블룸 매리온 부인 / 18시간 / 의식의 흐름 내면의 독백 기법 / 버지니아 울프 읠리엄 포크너 등에 영향 / 더블린 6월 16일 블룸의 날 /
단테 신곡 1321 / 지옥 연옥 천국 베아트리체 / 지옥 서곡 1 각 33 100곡 / 원제 알리기에리 단테의 희극 / 비극으로 시작하지만 해피엔딩 / 유래 보카치오 신적인 희극 이를 일본학자가 신곡이라 번역 / 중세의 모든 학문 종합 / 이탈리아어가 피렌체어 중심으로 통일 / 국가 개념 민족주의에 눈뜨기 시작 / 중세의 사상이 괴테 헤겔 쇼펜하우어 같은 후대 철학자들에게 전승되는 다리 역할 / 이탈리아 문학 발달에 결정적 영향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1923 / 릴케 루 살로메 니체 프로이트 / 전 10편 / 일치와 대립의 결합 / 연작시 서정시 / 근현대 시문학의 거대한 원형 /
장 폴 사르트르 구토 1938 / 드골 사르트르 / 실존주의 / 로캉탱 / 존재existence 본질essence /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
스탕달 적과 흑 1830 / 쥘리엥 소렐 시장 부인 레날 부인 후작 집 딸 마틸드 / 계급 메커니즘에 도전한 뛰어난 사회소설 + 섬세한 심리묘사로 만들어낸 리얼리즘 연애소설 / 적 나폴레옹 군대 군복의 이미지 자유주의 흑 왕정복고 시대의 사제복의 이미지 보수 왕당파 /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1933 / 상하이 폭동 테러리스트 / 기요(이상주의자 폭동주도 체포 자살) 첸(장제스 암살 시도) 카토프(체 게바라 순교자 연상시키는 인물) /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앙드레 말로 / 허무주의적 고독감에서 탈출하려는 인간의 필사적인 모습을 그림 /
월트 휘트먼(1819-) 풀잎 1855 / 죽은 시인의 사회 오 캡틴 마이 캡틴 1865 링컨 추모시 / 미국식 자유시의 창시자 /
제인 오스틴(1775-) 오만과 편견 1813 / 로코의 효시 영문학의 기념비적 작품 / 엘리자베스 다아시 / 제인 빙리 /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
버지니아 울프(1882-1941) 등대로 1927 / 의식의 흐름 기법 개척자 / 무학 블룸즈버리 그룹 존 케인스 e m 포스터 오빠 토비 남편 레너드 / 램지 가 / 내면의 갈등과 억압을 절묘하게 묘사 / 등대 영원한 진리나 이상을 의미 / 램지 부인 지혜의 상징 / 페미니즘 모더니즘 계몽주의 / 사라지는 것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인 필체로 표현 /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1774 / 낭만주의 소설의 원조 / 베르테르 로테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1601? / 햄릿 아버지 클라디우스 거트루스 오필리아 오필리아의 오빠와 아버지 / 영문학의 정전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1869? / 안드레이 나타샤 피에르(나폴레옹 암살 시도) 카라타예프(농부) / 생명력 살아 있음의 위대함 / 1805년 1차 나폴레옹 전쟁에서 혁명의 기운이 일기 시작한 1820년까지 15년간 러시아 역사의 격변 배경 /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1952 / 산티아고(쿠바의 노인 어부) 마놀린(꼬마) 청새치 상어 / 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한 투쟁 / 바다는 희망과 절망 모두를 삼켜버리는 무한의 공간 /
잭 케루악 길 위에서 1957 / 샐 파라다이스(실패한 젊은 작가) 딘 모리아티(자유로운 영혼) / 뉴욕 la 멕시코 1.3만 km 히치하이크로 여행 / 작가 앨런 긴즈버그 닐 캐서디 등과 유랑 생활 그 기록이 바로 길 위에서 / 비트 세대의 상징적 인물 / 1960년대 히피 운동과 국제 히피족의 상징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1948 / 덧없는 아름다움 / 시마무라 게이샤 고마코 요코 / 허무한 세계관 / 유서도 단서도 없는 죽음 가스 자살 / 다카한 여관(소설 완성) / 스토리가 아니라 분위기의 소설 / 갈등 구조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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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감독판 삭제장면 다시보기 하이라이트 손가락 시간
은교 감독판 삭제장면 다시보기 하이라이트 손가락 시간 김고은 이쁩니다
은교 감독판 삭제장면 다시보기 베드신 보기 <
감독판 차이 가능합니다.. 손가락 시간 액기스 삭제 하이라이트 괜찮으니 김고은 이뻐서 추천 합니다
그는 거의 33년 동안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에서 혼자 살았던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충성도 높은 온라인 팔로워를 확보한 후 이탈리아의 로빈슨 크루소로 알려진 Mauro Morandi는 오래된 해변 석조 오두막에 살면서 고요함, 고독, 자연의 평화로움을 수용하며 사르데냐 섬 Budelli의 관리인이었습니다. 사회적인 화제도, 맛있는 음식도,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의 유일한 동반자는 새와 고양이였습니다. 그는 침대에서 자고 옷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안락함을 버리고 산호 먼지가 점재하는 Budelli의 분홍색 해변에서 자기 반성과 명상의 수도원적 존재를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행복한 세상은 끝이 났습니다. 섬을 환경 관측소로 만들기 위해 그를 퇴거시키려는 해양 공원 당국과 수년간 고군분투한 끝에 Morandi는 5월에 그의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내 볼이 부러졌다"("나는 지쳤어"의 속어)라는 간결한 사임 메시지를 게시한 후 떠났다. 집으로 이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낙원 섬에서 고독한 생활을 30년을 보낸 82세 노인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진행하고 재조정할 수 있습니까? Morandi는 대답이 단호하게 "예!"라고 말합니다. Morandi는 CNN에 "절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두 번째, 새로운 삶이 은교 감독판 삭제장면 다시보기 하이라이트 손가락 시간 가능하다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다른 것들, 완전히 다른 세상이 있기 때문에 80세가 넘더라도 항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요점을 증명하면서, Morandi는 Budelli에서 그리 멀지 않은 La Maddalena의 사람이 거주하는 섬의 문명으로 돌아간 이후 번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살고 일상의 편안함을 즐기는 즐거움을 재발견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새로운 집 La Maddalena에 있는 Morandi의 새 아파트. La Maddalena에 있는 Morandi의 새 아파트. 의례 마우로 모란디 그는 전생에 교사로 받은 연금을 사용하여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모든 사치품으로 아파트를 샀습니다. Morandi는 커뮤니케이터로서의 기술을 연마하고 있습니다. 수년간의 고독 끝에 그는 이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의견을 교환하고, 소셜 네트워크에 사진과 댓글을 게시하여 세상과 교류하기를 열망합니다. 그는 또한 회고록을 쓰고 있습니다. Morandi의 새 집에는 오래된 오두막에 비해 사치품인 주방이 딸려 있습니다. 은교 감독판 삭제장면 다시보기 하이라이트 손가락 시간 의례 마우로 모란디 "오랫동안 나는 혼자 살았고, Budelli에 처음 착륙한 후 너무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사실, 나는 더 이상 섬의 고독을 즐길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이제 내 인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 출신인 모란디는 1989년 이탈리아에서 폴리네시아로 항해를 하던 중 우연히 부델리에 있던 자신의 옛 집에 도착했다. 그는 환초의 수정처럼 맑은 바다, 산호 모래, 아름다운 일몰과 사랑에 빠졌고 관리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킹사이즈 침대. ....그리고 킹사이즈 침대. 의례 마우로 모란디 이따금 섬 방문객들을 만나면서 그는 대부분 혼자 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Budelli의 이미지를 게시하는 그의 온라인 활동은 그가 가상 커뮤니티와 연결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는 진짜를 가지고 있습니다. 탁 트인 바다 전망 테라스가 완비된 그의 작은 새하얀 새 집은 La Maddalena의 번화한 관광 도시에 있지만 그의 사생활을 보장하는 더 조용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는 부델리의 침묵이 그립다고 말한다. 그는 자동차, 트럭 및 "밖에서 굴러가는 머플러가 부러진 오토바이"의 소음에 익숙하지 않지만 대체로 그는 매우 편안하게 느끼는 새로운 환경을 좋아합니다. 관련된 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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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성과 혁명 by 권순구 (펌)
소녀혁명 우테나(少女革命ウテナ)세미나 발제문
I.예비적인 이야기들1. 순구(純久)
제 이름은 순구(純久)입니다.순수, 순박, 순진, 순정. 여기에 모두 들어가는 그 순(純)에 오랠 구(久)가 붙어있으니, 아마 부모님은 제가 이런 모든 것들을 간직한 채로 오래오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구(久)라는 글자는 때로 영원히(forever)의 뜻을 갖기도 하니까, 그렇게 되면 제 이름은 대충 '순수함은 영원하다'는 포부 당당한 선언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영원히 순수하기를. 그렇게 되어만 준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넌 참 순진하구나' 라는 말은 그다지 들어서 기분 좋은 말이 아닙니다. 물론 순수하��� 순진하다는 것은 원래 좋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좋은 의미와, '넌 참 순진하구나'라고 말할 때의 그런 비꼼의 의미는, 사실 서로 크게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너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가졌구나' 라고 말하건, '네가 아직 세상 험한 꼴을 못 당해봤구나' 라고 말하건, 단지 이 말을 뒤집으면 저 말이 되고 저 말을 뒤집으면 이 말이 될 뿐, 똑같은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세상을 살아보고 산전수전 겪다 보면, 순수하고 순진했던 그런 마음들이 마냥 오래 갈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는 서로 의견이 일치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들장미 소녀 캔디 정도의 경지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오래오래 살 수 있겠나, 하는 의구심은 누구나 철들 무렵이 되면 가져 볼만한 의문입니다. 아무튼 이런 좋은 뜻으로 이름을 지어주신 부모님께는 마땅히 감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이가 들수록 '그게 말이 되나?' 하는 의문과회의가 드는 것은 어떨 수가 없습니다.
2. 철들 무렵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4화를 보면, 비행기를 타고 그랑디스 일당에게 쫓기다가 바다 한가운데 추락한 쟝과 나디아를 노틸러스 호가 구조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친절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노틸러스 호의 부함장, 엘렉트라를 보면서 나디아가 계속 경계심을 풀지 않자, 결국 쟝이 한 마디 합니다.
"그렇게 남을 의심하는 건 옳지 않아.”그러자 곧바로 나디아가 새침하게 쏘아붙이죠.“무턱대고 남을 믿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아마도 쟝은 나디아의 대답이 무척이나 뜻밖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디아의 대답을 듣고 갸웃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쟝의 그 천진하고 느긋한 표정이라니...
“그런가???”
이 장면을 처음 봤던 중학교 때, 이 둘의 대화가 얼마나 제 가슴에 깊이 와 닿았는지 모릅니다.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지만 늘 꿈을 잃지 않는, 천진하고 낙천적이고 순수하고 밝은 쟝. 그리고 어릴 때부터 외톨이로 자라면서 상처 받고 결국은 자기가 자란 서커스단의 단장한테까지 배반당한, 세상을 믿지 못하고 타인의 친절을 의심하는 나디아. 정말 대조적인 두 사람이지만, 사실 그 시기 철들 나이의 생각들이란 다 한 켠으로는 쟝을 닮아있고, 또 다른 한 켠으로는 나디아를 닮아있게 마련입니다. 그 때 제 마음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던 것은, 언뜻 이 두 아이들의 말다툼이 평범하고 천진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정말로 여기에 대한 답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고 세상을, 사랑을, 우정을, 꿈을, 희망을, 이상을 믿는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아니면 나쁜 일일까. 그 해답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후로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때의 그 의문에 대해서 제가 뭐라도 얻은 것이 있다면, 그저 이 질문의 답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그냥 잊어버리는 게 훨씬 더 편하다는 사실뿐입니다. 제 나이는 스물여섯이 되었고 저 장면을 본 기억도 거의 10년여가 되어가지만, 결국 제 마음 속의 쟝과 나디아는 함께 모험을 하며 그 답을 구하느니 차라리 선을 긋고 각자의 영역을 서로 침범하지 않는 쪽으로 타협을 본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3. 타협
사람의 생은 유한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꿈은 무한한 것입니다. 유한한 것을 가지고 무한한 것을 쫓아야 한다는 점에서, 산다는 것은 위태롭고 험하며, 때로는 애처롭고 때로는 불쾌하며 때로는 허무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고 솔직한 태도를 갖는 것은 (물론)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 그 절망이 너무나도 단호하고 진지해서, 어떤 분홍머리 소녀처럼 스스로 관 속에 들어가 자기 손으로 뚜껑을 덮어버리는 그런 식의 결과가 되어버린다면, 이러한 진지함과 용기가 적당한 불성실과 타협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여전히 말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확실히 혼돈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은 태어난 이상, 가능한 한 좋은 것을 좇고 싫은 것은 멀리하며 어떻게든 살아가게 마련이고 또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일단 그러한 욕구를 받아들이고 나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항상 철저하고 솔직한 것 보다는, 때로 오히려 덜 철저하고 덜 솔직한 것이 분명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비관적인 회의 또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희망보다는, 단지 세상의 혐오스럽고 두려운 부분에는 얼마만큼의 체념과 회의, 냉소를 갖고, 또 내가 바라는 대로 채색되고 치장된 세계 안에서는 적당한 꿈과 희망을 갖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른이 되며 터득해야 할 살아가는 요령일는지도 모릅니다.
다소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생각하는 ‘어른스럽게’의 의미란, 꿈, 사랑, 이상, 희망, 이런 것들은 여가용으로, 냉소, 회의, 경멸, 혐오 같은 것들은 업무용으로 각각 적절하게 안배할 줄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자는 편안하고 친근한 세계를 즐기기 위한 계기로써, 후자는 냉혹하고 험악한 세상을 마주대하기 위한 무기로써, 각각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이 둘 중 한 쪽만을 가지고, 예를 들어, 꿈과 사랑만을 가지고 또는 경멸과 혐오만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결국, 이런 식의 타협에는 불가피한 면이 있으며, 아무리 철저하고 순수한 삶을 갈구한다고 해도 적어도 어떤 시점, 어떤 정도까지는 이러한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러나.그러나...정말로 그걸로 좋은 것일까요...
4. 이원성
순정 만화 같은 것들 속에서 흔히 우리가 ‘소녀적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그런 마음의 밑바탕에는, 타인과 세상을 ���라보는 섬세하고 애정 어린 시선에 대한 의지, 그리고 그런 시선과 관심을 자신도 받고 싶다는 소망이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의지와 소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봄직한 것이며, 비단 앳된 소녀들뿐만 아니라 설사 중년의 아저씨들일지라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바램들은 약한 것입니다. 아니, 약하다고들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고 지속된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약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꿈과 이상 속에 담긴 수많은 바램들. 아름다움. 사랑. 믿음. 기적. 찬란히 빛나는 그 무엇. 영원히 변치 않을 그 어떤 것에 대한 의지와 소망들 역시 마찬가지로, 불행히도 약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시간에 감염된 현실이라는 공간 속에서, 결국 사멸하기 위해 생성되는 그 냉혹한 흐름 속에서, 왜곡되고 뒤틀리고 잊혀지는 그런 운명에 묶인, 고귀하지만 나약하고, 아름답지만 홀로 설 수는 없는 그런 것들이라고.
우리가 소중하고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믿는 그런 어떤 것들이 '약하다'고 말할 때의 그 '약함'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비록 우리가 그것의 가치와 의미를 의심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이러한 것들은 현실 속에서 실현되고 지켜지기가 매우 힘듭니다. 남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보다는 남을 속이기로 결심한 사람 쪽이 훨씬 더 쾌적한 삶을 누릴 가능성이 높은 것이 (가슴 아프지만)사실인 것입니다. 이 때 약함의 의미는 바로 바란다는 것과 이루어진다는 것(또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바로 그 이원성을 의미합니다. 즉 현실적인 어려움의 문제입니다.
둘째. 이것은 첫 번째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인데, 즉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와 의미일수록, 거기에 대해 우리 자신이 회의하거나 망각하거나 경멸하도록 되기가 매우 쉽다는 점입니다. 세상은 어렸을 때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혼란스럽습니다. 그런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게 되어가는 판국에,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내가 무엇을 바랬는지, 내가 무엇을 믿는지, 도대체 애초에 그것들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밝고 아름다우며 따스하고 고귀한 그런 순수함이었는지. 아니면 안타까운 연약함이었는지. 아니면 무가치한 환상이었는지. 아니면 경멸스러운 거짓이었는지. 아무도, 아무것도, 그 참됨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약함의 의미는 바로 냉소와 긍정, 환멸과 희망, 무감각과 감각, 무의미와 의미 사이의 긴장과 싸움, 바로 그 이원성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의미의 약함과 두 번째 의미의 약함이란 실제 살아가면서 겪는 고민이나 갈등 속에서 항상 한 덩어리로 엮여있게 마련입니다. 현실의 좌절과 내면의 환멸은 늘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내 안의 세계에서든 바깥의 현실에서든, 이렇게 서로 얽힌 이원성의 긴장들은 다양한 변주―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강하다는 것과 약하다는 것. 허구와 실재, 아름다움과 추함 등등을 통해, 우리가 느끼고 바라고 꿈꾸는 삶의 순간순간을 지배합니다.
���리가 흔히 “정말 환상적이야!”라고 말할 때 그 ‘환상’의 의미와, “그건 환상일 뿐이야.”라고 말할 때의 그 ‘환상’의 의미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사뭇 대조적인 이 두 가지의 뜻이 하나의 단어에 모두 담겨있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가 처한 이원성의 긴장을 암시합니다. 세상에 대한 지각과 감성이 처음 눈뜨기 시작하는 시기, 내가 무엇인가를 느끼고 바란다는 사실 자체가 기쁘고 아름답게 느껴졌던 그런 시절의 기억은, 현실의 흐름 속에서 바래고 꺾이며, 나의 세계는 둘로 나뉘어갑니다. 점점 커져가는 좌절의 그림자를 받아들여가는 이런 과정은, 철저하게 홀로 감내해야 하는 고독한 길입니다.
이원성의 첨예한 긴장과 책임이 너무나도 가혹하게 느껴질 때.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밝은 쪽’과 ‘어두운 쪽’ 사이의 타협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의 끝을 정하고, 그 껍질 속에 숨는 것 이외의 다른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바라면서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할까.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내면과 바깥의 현실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순수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함과 천진함을 동경하는 대신, 알면서도 아니 알기 때문에, 그 많은 갈등과 두려움과 책임을 알고 또 알기 때문에 순수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순수함을 우리는 찾을 수 있을까. 계속 꿈꾸고 싶은 소망과 더 이상 좌절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 사이에 갇힌 나의 세계를 혁명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는 얻을 수 있을까.... 제가 보았던 『소녀혁명 우테나』는 바로 이런 질문들을 향한 도전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II. 이원성의 첫 번째 변주1. 공주님
이쯤에서 한 번만 더 제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즉, 순수함이란 오래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순수함이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있는 걸까요? 그 추상적인 의미만을 따져본다면, 순수는 이미 순수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변화하건 그것은 '타락'이거나 '변질'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북극에 서있는 사람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남쪽일 뿐, 더 이상 북쪽으로는 갈 도리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더러워지기 쉬운 색이 순백색인 것처럼, 가장 순수한 것일수록 그것은 더욱 더 변질되기 쉽고 타락하기 쉬운 운명에 이미 처해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옳건 그르건, 적어도 이런 생각이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순수함'에 대한 인상을 잘 대변해주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순수함의 의미에 대한 이런 회의적인 견해가 계속 발전되게 되면, 결국 순수하다는 것은 단지 세상 험한 꼴을 아직 안 겪어본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저 여태 속아 본 적이 없다는 증거일 뿐, 현실적으로 볼 때 애초에 세상에 뭔가 바라거니 희망을 가질 이유 따위는 없었다는 식의 회의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회의주의자들은 대체로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 부류이며, 이들의 모토는 “몰랐어? 원래 세상이 그래....”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현실 속에서 이런 견해들을 어떤 근거라도 들면서 반박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가장 순수한 것일수록 가장 쉽게, 가장 깊게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경우, 정말로 사실입니다. 참으로 기가 ��힐 노릇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똑 같은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면서도, 회의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려는 사람들 또한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김광석 씨의 노래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일수록 빨리 시들어 가고
햇살이 비치면 투명하던 이슬도 한 순간에 말라버리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김광석, 『일어나』)
이 한 구절에는 순수함의 역설적인 가치가 함축되어있습니다. 즉 그것은, 허망하게 사라질 운명이면서도, 끊임없이 새롭게 생겨나 나에게 다가오는 하나하나의 계기들입니다. 마치 한 순간에 말라버릴지언정, 매일 아침 다시 깨끗하게 맺히는 이슬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순수라는 것의 가치는 오히려 그것이 약하고 변하기 쉽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이러한 의미의 순수란, 바로 그 연약한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한 애정과 동경, 연민과 관심, 이런 것들을 의미합니다.
한 송이의 꽃이건 한 방울의 이슬이건, 한 순간의 추억이건 한 순간의 꿈이건, 그 온전함이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것, 나와 너의 만남이란 단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만큼, 그 계기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게 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연약하고 허망해 보이는 그런 의미의 순수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에 깃든 축복이자 커다란 힘입니다.
모든 섬세하면서도 연약하고, 아름답지만 덧없는 그런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는 따스한 눈길과 애정. 약한 것들을 동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고귀함과 아름다움. 덧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덧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상냥함과 강인함 . 이런 것들이야 말로 순수함의 추상적인 의미 속에 담겨진 인간의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러나...불행히도,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변해가는 연약한 것들을 긍정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분명 고귀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이상의 어떤 것들에 대한 갈망을 결코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변해가는 것들을 향한 연민과 사랑의 한 켠에서, 우리는 분명 변치 않는 그 무엇을 꿈꿉니다. 혼돈스런 현실 속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고 견고한 불멸의 그 무엇을.
2. 왕자님
순수의 반대말은 타락이라고 흔히 말합니다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순수라는 말이 한 가지 뜻만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태껏 이야기해오던 그런 느낌의 순수와는 참으로 대조적인, 또 다른 부류의 순수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또 다른 부류'의 순수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한 예가 바로 영화 『에일리언(Alien, '79)』에 나옵니다.
지금은 SF 호러의 고전이 된 유명한 영화이고, 특히 사실상의 주인공인 괴물(에일리언)의 그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가히 전설적입니다. 어쩌다가 이 외계 괴물을 배 안에 들여놓게 된 우주선의 승무원들이, 살기 위해 우주 한 가운데 고립된 채 괴물과 사투를 벌인다는 것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입니다. 그러나 제가 관심 있어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 영화의 후반에 나오는 짤막한 한 대목입니다. 이 영화 후반부에 가면, 동료인줄만 알았던 승무원 한 명이 실은 승무원들을 모두 처치하고 그 괴물을 지구로 가져가려던 스파이 로봇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결국 격투 끝에 승무원들 손에 파괴된 안드로이드는 마지막으로 기능이 정지하기 전에 승무원들에게 조롱하듯 말합니다.
“너희는 아직 그것(괴물)의 정체를 모르지... 그건 완벽한 생명체야. 무한한 생명력과, 포악성, 그리고 무한한 적개심...”
“존경이라도 하는 건가?”
“...그 순.수.성을 존경하지. 양심에 더럽혀지지 않고... 가책에 고뇌하지 않는...”
자, 여기서 분명히 ‘순수’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침이 줄줄 흐르는 끔찍한 입이 트레이드 마크인 이 괴물을 가리켜서. 확실히, 이 안드로이드가 말하는 '순수성'이란 앞에서 이야기하던 그런 느낌의 순수성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그러나 이 괴물은 분명 어떤 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합니다. 일말의 갈등조차 갖지 않는, 공격성만으로 순수하게 연마된 무자비한 생명력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일컬어 ‘순수하다’고 말하는 대사의 이면에는 인간의 노예로서 이 안드로이드가 품고 있던,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인 불완전함과 나약함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경멸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여기서의 순수는 나약함을 동정하지 않습니다.순수라는 개념 속에는 분명, 애초부터 어떤 종류의 ‘힘’을 의미하는 가능성이 숨어있습니다. 순수란 결코 덧없는 나약함으로만 귀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수함 속에 내포된, 도대체 어떠한 변화나 갈등, 불안의 요소도 갖고 있지 않은 완전한 균일함. 그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범접되지 아니하는 그런 완벽함. 그것은 바로 불변이요 불멸의 권능이며, 이러한 완전무결함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만큼 갈망하고 동경하는, 순수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강한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강하다는 것은 반드시 모든 아름다운 것의 필수 조건이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강하지 못한 것은 비록 지금은 아름답다 해도 언제든 추한 모습으로 훼손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 속에 갇힌 존재이면서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형벌입니다. 유한한 생에 묶여 있다고 해도, 자기 자신의 유한성과는 별개로 자기가 꿈꾸는 무엇인가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보통 연인들끼리의 사랑의 맹세란, 거의 항상 시간 차원을 생략하거나(‘죽을 때까지 사랑한다’) 무한으로 승화를 시키게 마련(‘영원히 사랑한다’)입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거의 똑같은 의미인데도, ‘앞으로 한 80년 정도 사랑한다’ 라는 식으로 사랑을 다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습니다. 요컨대 사람들은 항상 마음 한 구석에서, 자신이 꿈꾸는 이상이 시간 속에서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상 속에서는 아름다운 것, 드높은 것, 찬란한 것은 항상 영원합니다. 즉, 그것들은 절대로 변할 수도, 변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갈망과 동경을 냉소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덧없는 현실 속에 처해서도, 모든 것이 다 변할지라도,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꿈���고 또 믿으려 하는 그런 용기와 의지. 불멸의 이상을 꿈꾸는 인간의 바램과 거기서 비롯되는 힘. 이것은 약한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의미의 순수와는 구별되는, 인간의 또 다른 소중한 가치인 것입니다.
그러나...불행히도, 역시 이것만으로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강하고 완전하고 영속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그게 반드시 소중하지만 연약한 그런 존재들보다 항상 우월한 존재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의 대통령 자리를 제의 받고 거절하면서, "정치는 순간이지만 물리법칙은 영원하다" 고 말했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이렇게 완전하고 영원한 것의 가치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지구를 45억년 째 돌아주고 있는 달보다는, 나를 좋아하게 된지 100일 째 되는 이성 친구에게 더 깊이 감동을 하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물리법칙이란 시간 밖에 늘 존재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감정은 시간 안에서 문득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완전한 괴물 에일리언은 외로움 따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있겠지만, 어쩌면 차라리 어수룩한 못난이 외계인 E.T.처럼 지구인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쪽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간혹 들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그렇듯이, 때로 진정한 가치란 애초에 변할 리가 없다는 것 보다는 변할 수 있음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완전한 것은 때로 무척이나 공허한 것일 수 있으며, 단지 강하기 위한 강함처럼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3. 공주님과 왕자님의 만남 ~ 동화 ~
아름답고 상냥한 공주님은
세상의 가장 작고 약한 것도 보듬어줄 수 있는 고귀함을...
강하고 용감한 왕자님은
세상의 어떤 두려운 적들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찰나의 연약함을 사랑할 수 있는 따스함이 인간의 유한성에 주어진 축복이라면, 불멸과 영원을 꿈꿀 수 있는 능력 또한 인간에게 잠재된 무한한 힘입니다. 그러니 이 두 가지 의미의 순수함이 서로 만나 하나가 된다면, 세상의 그 무엇이 이들의 영원한 행복을 가로막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동화 속의 왕자님과 공주님은 어째서 만나기만 하면 ‘그 후로 언제까지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이냐고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우테나라는 작품 속에서 철저하게 비틀리고 낱낱이 분쇄되어버리는 왕자와 공주의 모티브는 지금 공연한 수모를 겪고 있는 것인지... 물론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즉 메르헨 속의 왕자와공주의 이야기에서 비현실적인 것은, 둘이 만나면 무조건 행복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둘이 서로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랑에 빠진다는 겁니다. 이 작품은 바로 이 아름다운 거짓에 대한 분노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현실 속에서, 그 이원성의 긴장 속에서, 찰나의 아름다움을 보듬으려는 바램과 영원한 것을 꿈꾸는 이상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등을 돌리게 됩니다. 현실 속의 공주와 왕자는 결코 그렇게 쉽게 사랑에 빠지지 않습니다. 아니, 서로를 애써 외면하지 않는 한, 그들은 결국 오히려 서로를 맹렬히 증오하게 됩니다.
왕자와 공주의 저 순수함은 분명 둘 다 참으로 소중한 인간의 가치이지만, 현실 속에서 이 두 가지가 하나의 내면에서 조화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듭니다. 거부할 수 없는 좌절과 체념의 경험들 속에서, 덧없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영원한 것에 대한 ���경을 함께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반쪽짜리 꿈이나마 남은 것을 지키려는 그런 안타까운 몸부림 속에서, 내버린 나머지 반쪽에 대한 그리움은 차차 혐오와 경멸로 변해갑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요한 것은, 이원성의 긴장이라는 것이 단지 이상과 현실, 꿈과 일상, 순수와 타락 사이에 걸쳐진 단순한 구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현실만이 이상을 좌절시키는 것은 아니며, 일상만이 꿈을 바래게 하는 것도 아니며, 타락만이 순수를 변질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냉혹한 현실. 무의미한 일상. 타락에의 유혹. 어쩌면 이런 것들보다도 더 위험하고 비극적인 것은, 이상과 꿈과 순수에 대한 갈망 자체가 오히려 그것들을 변질시키며 스스로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준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4. 공주님의 타락, 왕자님의 타락
우리가 잘 아는 시인 윤동주(1917~1945)는, 제가 느끼기에, 너무나도 가혹했던 현실 속에서 그야말로 순정만화 속의 맑고 따스한, 그런 혼을 가졌던 (제 또래의) 젊은이였습니다.
별하나에 추억과 /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 별하나에 동경과
별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
(...중략...)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윤동주, 『별 헤는 밤』)
도대체 당시의 가혹한 현실 속에서, 저런 정감들을 지키고 보듬기 위해서는 얼마나 처절하게 스스로와 싸워야 했을까.... 그러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한 이 젊은이는, 일본 유학 도중 항일운동 혐의로 형무소에 수감되어 거기서 죽었습니다.
지켜줄 이 없이 세상 한가운데 던져진 저 아름답고 상냥하고 고귀한 마음씨, 메르헨 속의 공주로 표상되는 그런 의미의 순수함으로 저 두렵고도 두려운 현실을 마주해야 했던 이 사람이 필사적으로 갈구했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화해였습니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9
자기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순수함이, 현실 속의 무력감과 좌절 앞에서 허물어져간다고 느낄 때,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자기혐오와 환멸의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과 화해할 수 있기를 그는 바랬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하고 사랑하려던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고 허망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공주님처럼, 스스로에 대한 경멸과 증오로부터 고통당할 때, 그는 단지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그 부끄러운 모습과 화해할 수 있기를 갈구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의 이런 갈망은 결코 한 시대 한 젊은이만의 괴로움이 아니며, 모든 좌절당한 나약한 순수함의 갈망입니다. 그와 비슷한 나이가 될수록, 그가 이런 갈망에 어떤 위안,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었기를 저는 간절히 바라게 되었지만, 또한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힘든 바램인가 하는 것 역시도 점점 또렷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든 연약하고 덧없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애정을 담으려는 그런 아름다운 소망도, 정작 자기 자신의 나약함만은 감싸 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소중히 할 줄 아는 공주님이라도, 문득 깨닫게 되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까지 사랑하기란 도���히 힘든 노릇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순수함이라는 것이 실은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거짓일 뿐이라는 회의 앞에서 스스로를 사랑할 이유를 찾는다는 것은, 마치 자기 머리채를 잡아서 스스로를 들어올리려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노력일 수가 있습니다.
더 이상 아름다운 환상으로서 세상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조소당하느니, 차라리 그 모든 것을 체념과 환멸의 늪 속으로 처넣고 자기 자신까지도 그 깊고 어두운 안식 속에 눕기를 바라는 그런 충동. 그것은 현실 속에 던져진 순수의 타락, 공주님의 타락입니다. 그러나 저는 차마 그 타락을 경멸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안시의 타락을 경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가... 누가, 모든 약하고 소중한 것들을,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했으면서도 결국 그런 자기 자신만은 끝내 사랑할 수 없었던 공주님을 동정하고 말을 걸며, 화해의 손을 내밀어줄까요? 어느 누가, 스스로를 비웃고 경멸할 만큼 타락해버린 공주님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볼 용기를 가질 수가 있을까요? 그 누가, 저 고귀한 아름다움마저 타락시킨 현실 속의 냉혹함과 가혹함을 마주할 힘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왕자님일까요? 그러나 타락한 왕자 아키오는 결코 안시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그 나름의 좌절의 울분과 분노 속에서 그 역시 그 어떤 것도 동정할 수 없게 된 처지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전쟁 영화의 기념비적 걸작인 영화 『지옥의 묵시록1)』은, 흔히 전쟁의 광기 속으로 가장 깊이 파고들어간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전쟁이라는 소재를 그려가는 시각이란, 전쟁에 대한 리얼리즘적인 접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묵시록'이라는 제목에 걸맞게도 몽환적이고 상징적인 네러티브로 시종하는, 현실에 대한 냉혹한 아날로지(analogy)로써의 의미가 더 강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것은 결투게임의 놀이가 아니야.
넌 아직 놀이의 결투밖에 몰라. 그렇지만... 지금 검을 무르지 않으면
너는 여기서 현실에서의 싸움의 무서움을 알게 될 것이다
38화에 나오는 아키오의 대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 즉 객관적 사실의 집합으로써만의 '현실'이 아닌, 내가 가진 모든 꿈을 분쇄해버리는, 그런 저항할 수 없는 공포로서의 '현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전쟁보다 더 극명하고 노골적이고 벌거벗은 현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옥의 묵시록'은 그 공포를 가장 처절하게 형상화한 커츠 대령이라는 인격을 보여줍니다. 월남에 투입된 정예부대의 장교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부하들을 이끌고 밀림 속으로 숨어버린 그는, 거기서 자신만의 광기의 왕국을 만들고 군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위험한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그를 제거하라는 임무를 받은 주인공 윌라드 대위가 밀림 속으로, 전쟁 속으로, 그리고 그 광기의 중심부로, 이끌리듯 커츠 대령에게 다가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유능하고 정직하며 올곧은 마음을 가진 훌륭한 군인이었던 그, 월터 E. 커츠 대령을 미치게 만든 현실. 거기에 대한 의문의 답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축이자, 영화 전체가 투영되는 하나의 그림자로써, 불가사의한 이미지들을 통해 서서히 묘사되어갑니다.
하지만 그의 인격�� 아무리 불가사의한 어둠 속에 잠겨있다고 해도, 그의 광기는 평범한 인간들의 좌절에도 내제해있는 것입니다. 이 좌절은, 앞서 언급된 공주님의 좌절과는 또 다른 의미의 좌절입니다.
나의 유한성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는 그 무엇. 그래서 나의 유한한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믿는 그 무엇. 바로 그런 진리와 이상과 꿈을 위해,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진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과 기적을 지켜내려는 고결한 용기와 강함을 가진 왕자님은 그 용기와 강함으로 말미암아 가장 참혹하게 패배할 운명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진리와 이상. 그 변하지 않는 순수함에 대한 헌신이, 바로 그 진리와 이상으로부터 배신당할 때, 그것도 현실이 가장 냉혹하게 그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그러한 좌절을 맞이할 때, 고결한 군인이기를 바랬던 한 인간은....
완전한 이방인이 된 그를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세상을 버렸고 결국 자기 자신까지도 버렸다
나는 그토록 갈가리 찢어진 영혼을 본 적이 없었다
이 대사는, 마침내 그의 광기의 왕국에서 커츠 대령을 만나게 된 윌라드 대위의 독백입니다. 변치 않는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 가장 참혹하게 강요된 좌절 속에서 어떻게 변해갔는가.... 그는 월남에서 처음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베트콩들이 몰려와, 방금 미군들한테 예방접종을 받은 월남 아이들, 동포인 어린 아이들의 주사 맞은 팔을 모조리 잘라 산더미처럼 쌓아둔 광경을 바라보던 그 기억을.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생각했지. 그 능력......
팔을 잘라 내는 그 의지는 완벽하고 순진하고 수.정.처.럼.순.수.했.어.
그들이 우리보다 더 강하다는 걸 깨달았지.
우리에겐, 양심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원초적인 본능으로 살인을 하는 인간이 필요해.
느낌도, 격정도, 판단도 없이. 판단 없이.
우린 판단하기 때문에 패배한 거야.
아키오는 현실에 패배한 왕자님입니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했기 때문에, 무엇이 영원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격정에 이끌렸기 때문에, 패배한 것입니다. 그가 바라던 순수로부터 배신당했을 때, 세상에 영원 같은 것은 없다고, 기적 같은 것은 없다고 그리고 왕자 같은 것은 없다고 왕자님이었던 자기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만 하는 그런 잔인한 절망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비틀고 왜곡시키며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든 이들을 비웃기 위한 무대 속에서 살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더 이상 그는 어떤 것도 지키려 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심지어 절망에 빠진 공주님조차도 동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제 그가 바라는 것은, 저 '수정처럼 순수한' 완전히 투명한 텅 빈 강함입니다.
“저 문에는 영원이, 빛나는 것이, 기적의 힘이 있어. 그 힘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가 있다. / ...힘이 없으면 결국에는 남에게 의존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세계라는 거다.”
(39화, 아키오의 대사)
결국 패배한 왕자님은 '힘'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그 무엇을 지키는 것이 아닌, 그 무엇에 헌신하는 것도 아닌, 단지 자기가 '현실'이라고 불렀던 공포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시켜 줄 그런 힘만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III. 이원성의 두 번째 변주1. 알(卵)
언���가 제 친구 한 명이 저한테 "야, '여신님' 같은 만화도 순정 아니냐?"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순정만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그야말로 펄쩍 뛸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달리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순정 만화 속에서 ���기가 받은 느낌들과 『오! 나의 여신님』이라는 작품에서 받은 느낌들이 어쩐지 비슷한 면이 있다는 말을 하려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대리만족이니, 여성상의 왜곡이니 여러 가지 비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저는 제 친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말하기는 좀 쑥스러운 노릇이지만, 저도 군대 가던 날 훈련소로 가는 밤 기차를 타기 전에, 갖고 있던 '여신님' 만화책들을 한 권 한 권 찬찬히 다 정독을 하고 집을 나섰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의 군생활 30개월(공군) 중에 가장 힘들었던 때는, 정작 군대 안에서 지내던 때가 아니라, 입대하러 기차를 타고 진주 교육사령부로 내려가던 그 하룻밤이었습니다. 막상 현실로 닥치고 피부로 와 닿는 군대에서의 하루하루보다도, 무슨 일을 겪을지도 모르면서 그저 온갖 불안한 상상만 떠올리던 경험이 저한테는 더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기차를 타고 밤새 훈련소로 향하면서, 말 그대로 몸에 걸친 속옷 한 장까지 온통 낯선 것들에 둘러싸이는, 그런 무섭고 외로운 곳으로 끌려간다는 생각에 밤새 차창만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오돌오돌 떨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좀 (아니 많이) 엉뚱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제가 공연히 집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여신님'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이 만화가 그리고 있는 다사롭고 포근한 느낌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그것이, 각박하고 두려운 현실을 마주하기 위한 제 나름의 준비였습니다.
그런데, 입영 열차 안에서의 이런 경험이란 어쩐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압축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지나온 기억들을 떠올리노라면,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저 오돌오돌 떨면서 저항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그런 낯설고 겁이 나는 현실 속으로 차근차근 등 떠밀리듯 내몰려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군대가기 전의 심정이 그랬듯,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마주하게 될 그 각박하고 두려운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 위안이나 의지가 되는 무언가를 찾는 생각 또한 간절해지곤 합니다.
그런데 과연, 군대뿐만이 아니라, 이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내면을 깊게 보듬어주는 그런 눈길. 그런 섬세하고 애정 어린 시선. 그런 순수한 마음, 그런 '순정'을 지켜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바램들을 갖고 있다고는 해도 막상 나는 어느 누구한테 건 그런 마음으로 대해줄 수가 있을까. 또, 누군가 나한테 그렇게 상냥하게 대해주었으면, 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러한 마음 속 깊은 곳의 소망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힘듭니다. 이것은 단지 쑥스러움이나 창피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회의의 문제입니다.
군 생활에서 사병들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의 ���반 이상은 다 '욕'입니다. 욕을 먹지 않기 위한 욕. 욕을 견디기 위한 욕. 흔히 듣는 말이지만, ‘군대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나 거짓이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오고 나서야 자신이 그렇게 격하게 화를 내거나 심한 욕설을 내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습니다. 전혀 원치 않았던 자기의 처지를 의식할 때처럼 누군가에게 그 탓을 묻고 싶은 욕구가 간절할 때도 없습니다. 그 욕구는 너무나도 커서, 대체로 그런 욕설들이 근거가 있거나 가당한 것인지 따위는 별 고려의 대상이 못됩니다. 그리고 이런 생활들 속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이병, 일병 시절을 거치노라면, 결국 화장실이나 다른 으슥한 곳에 숨어 혼자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건빵을 씹으며, (대부분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이런 종류의 고독과 울분에 익숙해지는 법을 홀로 터득해 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얻게 되는 결론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남 생각해줄 여유 따위는 없다!‘ 이 해답에 빨리 닿을수록 마음은 편해집니다. 말하자면, 이기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깨닫고 그것을 합리화시켜가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전까지 익숙했던, 만만한 현실 속에서나 통용되던 예절이나 규범 대신, 차차 혼자 버텨나가기 위한 새로운 규칙들에 따르게 됩니다. 불안에 떨던 갓 온 신병은 점차 고참이 되어 가면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해득실에 따라, 주위에 적당히 적대적이고 적당히 호전적이며, 또 때로는 경우에 따라 적당히 사근사근하고 적당히 허세부리는 행동으로 대처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일들이, 단순히 남자들이 군대라는 특수한 곳에서나 겪게 되는 불유쾌한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군대에서의 경험들을 특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 경험들이 매우 ‘압축적’이고 ‘노골적’이라는 점에서만 그럴 뿐이며, 제대 후 대학을 졸업한 지금에 와서 제가 느끼기에, 어른이 되어가면서 세상 속에 홀로 내던져지는 그 경험들 속에는 모두 이와 유사한 패턴의 고독과 울분이 담겨있습니다. 요컨대 그것은, 순수하게 서로를 보듬을 수 있는 그런 소통에 대한 바램이라는 것이, 만만하고 나긋나긋하던 어린 시절의 ‘현실’에서나 가져볼 만한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는 울분과 고독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울분과 고독에 비례해서, 우리는 서서히 매일매일 접하는 주위 사람들의 개성과 고민을, 갈등과 인내를, 그 아픔과 깊이를 거의 의식 못하게 되어갑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큰 고민과 갈등에 처해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고뇌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강하게 의식한 나머지 대신 타인들의 그것을 과소평가하게 마련이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개개인의 고뇌보다는 단조롭고 어리석어 보이는 전체적인 집단의 모습에 주의를 집중하게 되며, 이것은 사람들을 타인에게 무감각하게 만드는 작용을 촉진시킵니다.
자신의 울분과 고독을 누군가가 바라봐주고 보듬어주기를 바라는 그러한 간절한 바램은, 지나치게 간절한 나머지, 스스로의 것을 잠시 덮어두고 남의 것에 먼�� 관심을 가져주기가 힘들다는 데 그 비극의 씨앗이 있습니다. 비록 서로 똑같은 외로움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해도, 동병상련 이심전심의 낭만보다는 저마다 자신의 간절함에 매달려 서로에게 무관심해지기가 훨씬 쉬운 법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결과적으로, 애초의 그 순정만화 같은 수줍은 소망을 신경증적인 분노와 긴장으로 바꾸어놓습니다. 결국, 이런 판국에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나는 이렇게 다른 누군가의 상냥함을 바라고 있습니다.’라는 식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전쟁터에서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는 자살행위입니다.
물론 이련 식으로 현실을 묘사하는 데에는,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사태를 다소 과장하는 면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현실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분명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게다가 더 나아가서, 이러한 두려움을 이겨낸다고 해서 늘 그 보답이 돌아오는 것도 결코 아닌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완전히 회의적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나무라기에는 그 근거가 희박합니다. 도대체 이 모든 외로운 싸움, 두려움과의 싸움에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있으리라는 보장 따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느 순간 우리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두려움의 한계 안에서, 자기가 그 안에서 살아갈 세계의 경계선을 긋게 됩니다. 즉 자신이 받아들일 세계의 안과 밖을 가르게 되는 것입니다.
2. 안과 밖
다른 부대도 그런지는 확실치 않지만(아마 비슷하리라 생각되지만), 제가 있던 부대 사람들은 보통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보다도 별나게 드라마를 좋아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아주 달콤하고 순정만화 같은 분위기의 그런 작품일수록 인기가 좋았습니다. 물론 거기 나오는 여자 연예인들 때문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일단 생활이 각박하다 보니 이런 드라마 안의 핑크 빛 세상이 마냥 그립고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통 이런 연속극들은 점호가 끝난 뒤에 합니다. 규칙 상 TV 시청이 금지된 시간입니다. 결국은 늘 불쌍한 내무실 막내(보통은 이병)들이 희생양이 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란 말 그대로 희비극이 엇갈리는 기묘한 풍경입니다.
TV에서는 『가을동화』(제가 군대에 있을 때 부대 안에 돌풍을 일으켰던)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펼쳐지고, 그 해맑은 사랑에 애를 태우는 병장들이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있는 동안, 대신에 TV 쪽으로는 고개조차 못 돌리게 되어있는 이병 한 명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혹시나 일직사관이 사정권에 들어오지는 않는지 소리만으로 망을 봐야 합니다. 그것도, 자기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잠도 못 자고.
제가 이런 취향의 작품들에 시비를 걸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들 속의 낭만과 순수에 얼마나 큰 위안을 얻고 얼마나 큰 감동을 받건 간에, 이런 상황에서는 차라리 TV를 끄던가, 아니면 차라리 일직사관한테 걸릴 때 걸리더라도 졸병한테 그냥 망보지 말고 와서 함께 TV를 보자고 한마디를 던지는 쪽이 수천만 배는 더 감동적이고 낭만적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작품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대단히 눈물겨운 감동을 준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 허구(Fiction)의 위안과 서러운 이병 신세에 고참의 조그만 배려 하나가 주는 현실 속의 위안이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상황은 항상 "군대가 원래 그래. 나도 다 겪었어."로 결론이 나고, 여전히 내무실 한 켠은 TV속의 낭만에 취해있는 동안, 그 대가로 다른 한 켠에서는 상당히 낭만적이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는, 코믹하고도 비극적인 장면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상황 속에서, 즉 국가의 부름을 받고 영문도 모른 체 몸뚱이 하나만 가지고 낯선 곳에 끌려와, 낮에는 하루 종일 부대끼며 이유도 모를 욕들만 배불리 먹고, 동료들이라고는 부려먹으려는 고참과 기어오르려는 졸병들만 득실한 틈에 끼어 고단한 일과를 보내다가, 밤이 되어 그나마 지친 심신을 눕히고 잠시나마 아늑하고 따스한 허구로 자신의 내면을 감싸고 달래주는 그런 감미롭고 애절한 위안의 한 때를 만끽해보려는 순간에까지, 억지로 다시 현실에 눈을 돌려 보이지도 않을 새까만 졸병의 서러운 처지 따위에 관심 갖고 신경을 써주기란 죽기보다 힘들고, 죽기보다 싫은 노릇임이 분명합니다. 이 각박한 생활 속에서는, 도무지 그렇게 하려는 의지도,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찾아보기가 힘든 것입니다.
물론 이런 군대 일화가 그다지 보편적인 경험이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하고 보편적인 모순의 한 자락이 깔려있습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요컨대, 언뜻 생각하기에 어느 누구라도 허구 속의 낭만 보다는 현실 속의 낭만을 선택하지 않겠는가 싶겠지만, 실제로 살면서 겪어보기에는 사정이 영 다르다는 점입니다.
나의 환상 안에서라면 나는 얼마든지 동화 같은 사랑이야기에 감동하는 진정 꿈 많고 순수한 청춘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각박한 현실 속에서 참으로 편안히 그런 꿈속에 젖어들기 위해서는 분명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합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세계 안의 환상에 대한 대가로,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세계 밖에서 나는 죄 없는 졸병을 잠도 못 자게 괴롭히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에 둔감해져야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두려움과 회의의 한계 안에서라면, 나는 원하는 만큼 진솔하고 순수한 인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은 세계의 경계 바깥, 내가 감당하고 싶지 않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회의의 영역에서는 나는 얼마든지 이기적일 수도, 비겁할 수도, 심지어 파렴치해질 수도 있습니다. 안과 밖 사이에 놓인 이 메울 수 없는 간극의 심연은,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동안 나 자신을, 내 세계를, 둘로 셋으로 넷으로 산산이 갈라놓습니다.
3. 세계의 끝
세계의 끝인 아키오는 말합니다(38화).
...나는 언제나 성의 꿈을 꾼다. 그래... 왕자님과 공주님이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행복하게 사는 성이다.
그러나 자신이 다시금 성안의 행복한 왕자님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매일 밤 꿈꾼다던 그는, 또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보고 있으면 옛날의 내가 생각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너는 그녀를 구할 수 없다.
어차피, 왕자님이라든가 영원이 있다는 성이라는 건 다 속임수다.
���금 너에게 현실을 보여주마.
영원한 행복의 성을 꿈꾼다면서도 영원이 있다는 성이란 속임수일 뿐이라고 말하는 그 모순. 그러나 이 모순은 단지 모순인 것만이 아니며, 그 실체는 두려움입니다.
허구와 거짓은 상상하는 만큼 아름답고 상상하는 만큼 눈부시며 상상하는 만큼 영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상하지 못할 만큼 위험하고 두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그은 세계의 경계 안에서, 그 허구들은 나를 둘러싸고 나를 이루며 나를 가꾸어주고 나를 빛나게 해줄 수 있으며, 동시에 나를 에워싸고 나를 갉아먹으며 나를 가두고 나를 질식시켜갈 수 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듀얼리스트들은 자신의 껍질을 깨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그들은 자신만의 세계 안에 갇힌 체 살아간다는 것 또는 죽어간다는 것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들을 결투의 장으로 내모는 것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 할 만큼 정교한 허구 속에 속박되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회의이며, 거짓된 허상이 아닌 참되고 실재하는 것에 도달하고자 하는 동경과 의지입니다. 그러나...
현실과 실재는 어느 누구의 편견도, 어느 누구의 거짓도, 어느 누구의 허상도 압도하는 강대한 힘입니다. 꿈을 실현한다는 것, 바램을 이룬다는 것은 바로 내가 그 힘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느 누구의 의지조차도 거스르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그 모오든 다채로움과 활력의 일부를 나의 것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과 실재는 그 힘을 통해 어느 누구의 환상이라도 깨트리고 어느 누구의 꿈이라도 짓밟을 수 있으며, 그 결과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듀얼리스트들은 결투의 장에서 또다시 자신의 세계의 안으로 숨기 위해 되돌아섭니다. 그들은 그 어떤 환상의 도움도 없이, 그 어떤 허구의 위안도 없이, 벌거벗겨진 체 현실 앞에 마주해야한다는 공포 앞에서 주저합니다. 그들을 결투의 장에서 번번이 패배시키는 것은, 어떤 의지도 어떤 의미도 존중해주지 않는 현실과 실제의 그 냉혹함에 대한 마음속으로부터의 두려움과 회의이며, 그리고 그 냉혹한 혼돈보다는 정교하게 세공되고 조화된 허구 속에 계속 머무르고 싶은 유혹과 망설임입니다.
그들은 어느 때인가 빛나던 한 순간의 순수를 그리워하면서도 오히려 그 그리움이 현재 자신의 현실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기적을 갈구하면서도 자신이 그 갈구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조차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의 궁극을 통해 모든 것을 소유하기를 원하면서도, 그 힘에 대한 동경이 스스로를 무의미한 공허함으로 바꾸어놓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키고 싶은 한 순간에 대한 집착이, 영원에 대한 목마름이, 결국은 스스로를 얽어매고 지키고 싶어 하던 기억마저 비틀어놓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세계의 안과 밖 사이에서, 용기와 두려움을 모두 안은 체 그 언저리를 맴도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참으로 평범한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이 작품 속에서 ‘세계의 끝’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의 상반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기에 ‘세계의 끝’이란, 듀얼리스트들이 처음에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무언가 자신이 속한 세계를 넘어서 있는 초월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자신의 세계에 끝―즉 한계 또는 경계―을 갖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는, ‘세계의 끝’이란 초월을 가장한 교묘한 구속이자 속박일 뿐입니다. 영원한 행복의 성을 꿈꾸면서도 영원이 있다는 성을 속임수���고 말하던 아키오의 모순은, 바로 이런 ‘세계의 끝’의 두 가지 상반된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의 밖을 향한 욕구와 세계의 안을 향한 욕구가 서로를 상쇄시키는 모순입니다.
분명 어느 누구도 자신이 허구 속에서 기만당하며 살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똑같이 분명한 것은, 허구가 아닌 진짜 현실 속에서 진정 자신이 소망하는 모습대로 살 용기를 갖기란 너무나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실 속에서 어떤 꿈이나 소망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 안에서 허구에 기만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자신의 세계 밖에서 현실과 싸워나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 두 가지 두려움 사이의 갈등과 투쟁을 의미합니다. 결국, 앞서 언급했듯이, 이 허구와 현실, 내면과 외면의 긴장 사이에서, 어느 순간 우리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만큼의 두려움의 한계 안에 자기가 살아갈 세계의 경계선을 긋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내가 인식하는 세계의 안과 밖이 갈리는 시작이 되며, 이 첨예한 두려움과 갈등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한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4. 현실과 사실과 의미와 책임
어렸을 때는 단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감수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 버겁기 때문에. 영원, 순수, 꿈, 이런 단어들은 마냥 아름답고 좋은 것에서 그저 살갑고 유치한 것으로 어느 샌가 바뀌어버렸습니다.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여유를 갖기에는, 다짜고짜 닥쳐오는 현실들이 너무나도 어렵고 무섭고 다급해 보였기 때문에... 꼭 답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그런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저는 아직 아무런 답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어느 샌가, 한때 꼭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너무나도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게 되어버리고, 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은 너무나도 견고하고 거대한 것이 되어 나를 덮쳐오는 이 모든 변화들은, 정말이지 너무 쉽고 너무 빠릅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자주, 변하기를 원했던 부분은 안 변하고, 변할 줄 몰랐던 부분만 골라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해가는 것들 중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많은 것들이 변해가는 혼돈 속에서 처음에 떠올랐던 의문은, 무엇이 변치 않는 진실이며 무엇이 덧없는 허상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오히려, 객관적인 사실이 좋은 것인지 주관 속의 환상이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아무런 확신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사실,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항상 마음속의 꿈과 이상에 영향을 주게 마련이며, 또 마음속의 이상과 바램들은 현실을 변화시켜나가는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둘 중 어느 것이
항상 더 ‘좋다’거나 ‘참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무리 정말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진리라고는 해도, 막상 살면서 현실과 꿈 사이의 접점을 찾거나 균형을 잡기란 무척 힘든 일입니다.
세미나를 준비하며 이 글을 쓰는 동안, 제가 속한 이 현실 속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한국인 민간인이 테러 단체에 납치되어 살해당했고, 우리나라 안에서는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가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이런 실상들을 접하는 동안, 차라리 세미나 준비를 그만 둬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렇게 심각하고 급박한 현실들을 뒷전으로 한 체 ‘고작 만화’에나 골몰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의 접점이나 균형이라는 것을 떠올리기란 더더군다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아무튼, 현실과 이상이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한데 엮여져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현실이 곧 사실이고 이상은 곧 허구라는 식으로 말하는 데는 다소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이란 거칠게 말해서 두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예를 들어, 뜨겁다든가 차갑다든가 하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굳이 달리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고 때로는 위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찬 것은 차다고 생각하고 뜨거운 것은 뜨겁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대체로 그 원인이 바깥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흔히 ‘객관적’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사실들은, 그 원인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 내가 무언가를 믿고 있다는 사실. 이런 것들은, 다름 아닌 내가 그것을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 사실의 진위 여부가 나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사실과는 구분되는 ‘주관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 사실을 인지하는 데에, 예컨대 찬 것을 차다고 말하는 데에, 어떤 책임이나 긴장이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관적 사실을 느끼고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책임과 긴장이 따릅니다. 내가 더 이상 그것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그 때부터 그 느낌은 거짓이 됩니다. 내가 느낀다는 것을 하나의 사실로 만드는 책임은, 그것을 느끼고 있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의미들을 느낄 수 있는 결단과 의지를 행사하도록 부여된 나의 권리에 대한 책임입니다.
하지만, 아직 별로 나이를 먹지도 않았는데, 이 책임이라는 게 정말 무거운 것이라는 느낌이 종종 들곤 합니다. 많은 것들이 변해가는 속에서, 무언가 믿고 있던 의미, 갖고 있던 느낌들이 하나씩 변해갈 때마다, 내가 무언가를 느끼고 믿고 바란다는 사실은 거짓이 되어가고, 왠지 나는 허깨비를 쫓던 것이 아닌가 싶은 불안은 사실이 되어갑니다. 내가 받아들이는 의미와 내가 살아갈 모습을 꿈꾸고 그려볼 권리는 서서히 괴로운 의무처럼 느껴져 갑니다.(사실 그래본 적은 없지만...) 내가 만약 모든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랬다면, 그 바램이 좌절되었을 때 그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만 돌린다는 것은 당연히 지나친 태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것은 단순한 좌절에서 그치지 않고 훨씬 더 멀리까지 나아갑니다. 세상으로부터 타락을 강요당하느니, 차라리 내가 세상을 타락시키는 것이 더 좋게 생각되는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로부터 배신당하느니 차라리 내가 모든 것을 배반하는 것이, 그리고 버림받느니 먼저 내버리는 것이 더 만족스럽게 여겨지는 때가 있습니다. 정말이지, 환상을 쫓다가 무기력하게 좌절당하는 몽상가에 비하면, 적어도 더 이상 속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느끼려하지 않고 아무 의미도 찾지 않으려 하는 냉소와 허무주의가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객관적 사실들(예를 들어, 신호등이나 달궈진 냄비 손잡이 따위)은 그 느낌을 달리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고 때로는 해롭기 때문에 온전한 사실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주관적 사실들은, 즉 내가 무언가를 느끼고 바란다는 그 사실들은, 우리가 그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고 때로는 해롭기 때문에 온전한 사실로 남기가 힘듭니다.
느끼고 소망한다는 것의 책임, 그 의미와 가치가 어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단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책임, 그 느낌과 의미에 대한 선택의 책임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겨울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객관적 현실 속에서 인간들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자기 주관의 믿음과 결단에 책임을 지기 위해, 과거 수많은 이상주의자들은 커다란 대가를 치루면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거운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느낀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합니다. 현실이란, 세상이란, 삶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흔히 말해지곤 합니다. 그리고 기실 그 말들이 뜻하는 것은, 스스로가 현실에서, 세상에서, 삶에서 아무것도 느끼려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나는 장미의 신부니까... 마음이 없는 인형이니까...
몸이 아무리 깎이고 무뎌져도...
마음 같은 건 아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38화, 안시의 대사)
느끼고 바란다는 사실의 책임은 큽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끼려 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려 하지 않는 허무의 대가 역시 큰 것입니다. 느끼는 것이 괴롭고 바라는 것이 힘겨운 그런 감당할 수 없는 책임들은 세계의 껍질 밖에 남겨져 무의미 속에서 잊혀져갑니다. 그러나 세계의 껍질 안에 남겨둔 지키고 싶은 의미들조차, 결국은 박제된 모습으로 그 빛을 잃어갑니다. 안과 밖으로 갈라진 세계는 결코 어떤 소중함도 살아있는 온전함으로 지켜줄 수 없습니다.
IV. 소녀혁명1. 소녀들
‘소녀혁명’이란, 소녀들을 향한 혁명이자 또한 소녀들로부터의 혁명입니다. 그것은 힘없이 깨트려지고 변질되고 조소당하는 것들로부터의 혁명이자, 그런 것들을 향한 혁명입니다.
나약하고 연약한 것은 소녀들이 아닙니다. 생애에서 가장 순수하고 가장 무지하고 가장 무력한 모습으로 이제 막 세계의 끝을 마주한 지금의 미숙한 우리 자신이야말로, 가장 힘겹게 스스로의 나약함과 싸워야 하는 시기에 처해있는지도 모릅니다. 왕자님을 동경하건, 공주님을 동경하건, 그저 나약하고 연약할 뿐인 존재는 바로 지금의 우리들 자신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우테나가 현실 속에서 배워간 것은, 단지 자신이 모든 시작에서부터 철저히 배신당하고 기만당하고 경멸당해왔다는 사실 뿐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되고 싶어 했던 왕자도, 그녀가 그토록 구해주고 싶어 했던 공주님도, 그 모든 것은 애초부터 잔인한 절망 속에서 뒤틀리고 망가진 체 차마 돌아보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녀가 자신을 이끌어주고 있다고 믿었던 그 모든 것들은, 실은 처음부터 깊은 허무의 심연에서 자신을 냉소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쥬리가 말했던 우테나의 그 ‘잔혹한 순수함’은, 고스란히 우테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칼날이 되어버렸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다름 아닌 자신의 바로 그 고결한 순수함으로 인해 세상의 끝 언저리를 맴도는 자들의 참혹한 좌절과 무서운 타락과 끝없는 괴로움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절망과 슬픔은 다른 어느 듀얼리스트들보다도 깊고 가혹한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이원성의 갈등과 괴로움을 겪기 훨씬 전부터, 꿈꾸는 법을 알아버렸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올 그 잔혹한 순수함으로, 세상과 나 자신에게 너무나도 많은 꿈을 지워버렸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 될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한 체 세상 사람들 모두를 사랑할 수 있기를 꿈꾸었��니다. 자신이 장차 무의미와 체념 속으로 어떻게 길들여지게 될런지를 알지 못한 체, 세상 모든 일에는 저마다 의미가 있다고 믿으려 했습니다. 현실 속의 무수한 좌절과 증오와 시기와 냉소와 환멸의 의미들을 일일이 새겨보기도 전에, 너무나도 성급하게 그 모든 것들에 아름다움과 희망을 덧칠하려 했습니다. 결국 그 순수가 진실되고 성실하고 고결한 것일수록, 그 잔혹함은 더욱더 깊고 두려운 것이 되어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 꿈꾸던 시절 우리의 무지함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 영원이란... 뭔가요....? (33화, 우테나의 대사)
애처롭고도 간절한 그 질문, 그 장면, 그 모습은 저에게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어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우테나처럼, 현실 속에서 바로 그런 나약함으로 아무도
대답해줄 리 없는 질문을 여전히 품고 있는 이들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계를 혁명해야 할, 이 세계로부터 혁명되어야 할 약하디 약한 존재들입니다. 그 고귀한 나약함으로 세상을 바꾸며, 동시에 세상 속에서 그 나약함을 나약함 만이 아닌 것으로 바꾸어가야 할.......
섣불리 꿈꾸었던 순수함의 잔혹한 대가 앞에서, 한 때의 자기 자신이, 그리고 자신이 믿었던 것들이, 더할 수 없이 밉고 혐오스럽고 경멸스러워질 때조차,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 다시 절망에게 손을 내밀 수 있기 위해서. 그 절망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너를.. 구하러 왔어...
너를 만나기 위해서 나는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러니까 너와 내가 만나는 이 세계를... 두려워하지 마.
(39화, 우테나의 대사)
...우리는 세계를 혁명해야 합니다.
2. 혁명
많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다시 꿈꾸게 될 수 있을까요? 회의를 배웠기 때문에 다시 믿을 수 있고, 절망을 배웠기 때문에 다시 희망을 그릴 수 있고, 체념을 배웠기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요. 무엇이 나를 이끌어줄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 소박하고 평범해서 거의 잊고 있던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 혹시 너에게 무슨 곤란한 일이 있으면
우선 나에게 이야기해 줘.
무엇이든지 서로 돕자.
너와는 그런 친구가 되고 싶어.
(25화, 우테나의 대사)
타락한 왕자는 우테나를 바라보며 몇 번이나 말합니다. 너는 과거의 나를 닮았다고... 그리고 세계의 끝에서, 이제껏 겪었던 가장 슬픈 절망 뒤에 결국은 꺾이고 쓰러진 우테나에게 왕자님은 조용히 위안을 속삭입니다. 지금까지 노력해왔으니까, 그 고결함을 소중히 여겨주었으니까, 자신을 책망해선 안 된다고. 나는 너와 가장 닮았던 사람이니까. 나는 너의 모든 괴로움을 이해해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니까. 이제 우린 충분한 대가를 치렀으니까. 이제 저 영원의 성의 환상 속에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없이 내려치는 우테나의 손이 그 위안과 환상을 산산조각 낼 때. 그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느낀 6년 전의 그 느낌과, 이미 자신도 모르게 그런 위안과 환상을 바라게 되어버린 6년 후 지금의 제 느낌은 사뭇 달랐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저렇게 거역할 수 없는 위안과 동정을, 도대체 어떻게 내버릴 수가 있을까. 나의 모든 것을, 나의 모든 아픔을, 나의 모든 고독한 싸움을 이해해주고 위로해줄지도 모를 그런 손길을.
하지만.안시가 좌절해가는 우테나의 곁에서 과거 자기 자신의 괴로움과 슬픔을 다시 바라보게 된 시간을 통해, 그리고 우테나가 안시의 그 괴로움과 슬픔을 고스란히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시 배워간 시간을 통해, 마침내 그들이 서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이 바로 서로의 가장 소중하고 슬픈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테나는 껍질 속에 갇혀 죽어가기 보다, 껍질 밖에 내던져진 안시의 괴로움을 향해, 그 망각과 무의미에 갇힌 슬픔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내밀기 위해, 살아가는 길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껍질 속의 환상 속으로 숨기 위해 안시를, 그 절망과 체념의 괴로움을, 껍질 밖의 무의미로 내던져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힘겹게 다시 일어나려했습니다. 환상을 깨트린 바로 그 손으로.
세계의 끝과 끝을 아우르는 모든 희망과 절망, 의미와 무의미, 이상과 현실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정교한 날줄씨줄들에 비하면, 이 둘의 애정이란 그 얼마나 평범하고 소박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왕자님을 동경했던 소녀와, 타락한 공주님이었던 소녀의 만남은 하나의 소중한 혁명입니다. 그 모오든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갈등과 책임을 알면서도, 알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기를 선택했던 바로 그 평범함과 소박함이었으니까, 그들의 만남은 그 어떤 것보다도 빛날 수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그 소중한 나약함을 사랑하는 고귀한 공주님이던 한 소녀가 타락했을 때. 그리고 그녀 앞에, 왕자님의 고결함을 동경한다는 다른 한 소녀가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겠다며 말을 걸어왔을 때.
공주님이었던 소녀는 왕자님이 되겠다는 소녀를 경멸했습니다. 너는 비겁자라고. 세계의 끝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주제에 자신의 고결함에 눈이 멀어 세상의 타락과 슬픔을 알려 하지 않는 비겁자라고.
그리고 왕자님을 동경하던 소녀 역시 공주님이었던 소녀를 경멸했습니다. 너는 비겁자라고. 모든 순수함이 자기와 같은 타락과 파멸을 겪을 거라고 믿으며,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려 하지 않고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는 주제에 나를 비웃고 조롱하는 비겁자라고.
그런데.. 우테나님. / 응?
간타렐라(Cantarella)라고 아십니까?
간타렐라? 뭐야 그게?
옛날 이탈리아의 보르지아(Borgia)가문에서 쓰던 맹독의 이름입니다... 어떻습니까, 그 쿠키? 그거 제가 구운 거에요
우연이네... 그 홍차에도 독을 넣었는데.
그렇습니까... 정말 맛있는데요, 이 홍차.
이 쿠키도 말야.
우테나님. 우테나님의 10년 후는?
나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 그렇지만?
10년 후에 우리들 또 이렇게 함께 차를 마셨으면 좋겠네.
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그거... 왠지 좋을 것 같아. 반드시.. 10년 후에도 함께 웃으며 차를 마시자. 약속이야.
예, 반드시.
이 둘이 어떻게 서로를 경멸하던 그 증오를, 한 순간 서로에 대한 동정과 사랑으로, 함께 빛나기를 기원하는 약속으로 되돌릴 수 있었는지, 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이 둘의 만남은 절망과 희망, 타락과 순수,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강하다는 것과 약하다는 것. 허구와 실재, 아름다움과 추함, 이상과 현실, 의미와 무의미... 들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동정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언젠가 함께 빛나기를 약속할 수 있는 그런 만남입니다. 그것은 이원성을 향한 혁명입니다.
아직 젊은 우리들은 지금 모두.......
얼마만큼의 용기와 얼마만큼의 두려움을 갖고
저마다 자신만의 세계의 끝 언저리에서 낯선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루어내기도 힘들고 지키기도 힘들고 심지어 기억 속에 간직하기 조차 힘든 그런 꿈들―영원, 빛나는 것, 기적 그리고 순수에 대한 꿈들과 더불어.
막연한 꿈과 미숙한 힘만으로
아무도 가르쳐줄 수 없는 질문의 해답을 스스로 구하기 위해서.
세상 밖을 향해서.
어쩌면
혁명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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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에서 'Goodbye Day (1990, Live Nagano) 한글자막 / 来生たかお(Kisugi takao)'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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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이랑 결혼했는데 꿈 입니다 문재인 각하 꿈에서
깨어보니까 허탈해서 그럽니다 꿈은 인간에 뇌 수면 휴식중 영상인데 그 수면중에 운행하시는 분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이시라 주께서 혼인하셨으므로 나는 꿈에 주인이 아니요 하객이며 방백입니다
꿈에서 조차 정신을 빼앗기는 바보라서 그 허탈함을 이루 말할수가 없네요 약을 먹고 다시 잔을 들어야 할까 그러면 다시 만나지는 꿈일까 하였는데
하나님은 내 마지막 남은 정신마저도 가져가 빼앗으셨으니 더이상 나와는 적 입니다 나는 진실로 야훼를 섬겼고 목동으로 주님의 어린 양들을 지켰으며 주님의 길을 예배로 예비하였지만
다가오느것은 십자가 짐의 고통과 그 보다 더 큰 고독한 바다 즉 고해를 주셨습니다 고해는 인생에 고독한 외로움이라 더이상은 주를 내 주라 시인하지 않을것이며
근동에 역사에 닭이 세 번 울릴때 까지 나는 주님을 모른다고 할 것이니 이는 세계 1차 2차 3차 대전이라 이는 태초에 말씀이신 언약에 위배되는 죄이므로 나는 666이란 성호로서 흑기사를 써서 십자가인 열도에 선을 그으니 이는 태초에 사랑을 빼앗은 큰 죄이니이다
이제는 대적이라 더 이상 주는 주가 아니요 주의 집과 성전은 마괴의 터이니 불태우고 무너뜨림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편안히 고요의 바다 에서 잠드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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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se 1] 오늘도 고독한 상상이 구름을 타고 온다 초조한 햇살이 어느 사이 어깨를 두드린다 또 하루 모험이 시작됐다 크게 숨 쉬어보자 내 마음 신호가 꺼지지 않게 조심히 하나 둘 셋 [Chorus] 이 작은 불빛이 너에게 와 닿길 바래 이 작은 풀잎이 너와 눈 마주치길 바래 물빛의 하늘 내 마음 수평선 파도의 손등 고래의 날개처럼 하얗게 신기한 그림처럼 Beyond my dreams [Verse 2] 매일 조금씩 닮아간다 나만의 상상속엔 느린 내 걸음도 멈추지 않아 이제 다시 시작한다 [Chorus] 이 작은 햇살이 너를 감싸주길 바래 이 작은 웃음이 내 눈물 닦아 주길 바래 노을 바람 물결 인사 눈빛 바다 그대의 상상처럼 푸르게 신비한 풍경처럼 Beyond my dreams
#Spotify#Lyrics#Song#Music#Korean#Soundtrack#OST#선우정아#선우정아 (Sunwoojunga)#Sunwoojunga#상상 (Beyond My Dreams)#상상#가사#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Extraordinary Attorney Woo)#Extraordinary Attorney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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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Moby Dick, as illustrated in a 1902 edition, https://en.wikipedia.org/wiki/Moby-Dick ) 그 동기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거대한 고래 자체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 경이롭고 신비로운 괴물이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고래가 섬처럼 거대한 덩치로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그 거칠고 먼 바다와, 고래가 일으키는 형언할 수 없는 위험들과, 파타고니아에서 고래를 보고 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수많은 목격담에 따르는 경이로움-이런 것들이 바다를 향한 열망 쪽으로 나아가도록 나를 부추겼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것에 아무 자극도 받지 않았겠지만,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금단의 바다를 항해하고 미개인들의 바닷가에 상륙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좋은 것을 무시하지 않지만, 공포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그리고 상대가 허락해준다면 그것과 친하게 사귈 수도 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의 모든 주민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어쨌든 좋은 일이니까. 이런 이유로 고래잡이 항해는 반가운 일이었다. 이제 경이의 세계로 통하는 거대한 수문이 열렸다. 목표를 향해 나를 내몬 멋진 공상 속에서 둘씩 짝을 지어 내 영혼의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오는 고래의 끝없는 행렬이 보였다. 그리고 그 행렬 한복판에, 하늘로 우뚝 솟은 눈 덮인 산처럼 두건을 쓴 거대한 유령이 하나 떠다니고 있었다. (p37) 68 죽은 자들이 살아 있는 자들의 인구조사에 포함된 적이 있는가. 죽은 자들은 굿윈 사주의 모래알보다 많은 비밀을 안고 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속담이 세계 어디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제 저승으로 떠난 사람의 이름 앞에는 그토록 의미심장하고 불신앙적인 낱말을 덧붙이면서, 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 인도의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사람에게는 그런 낱말을 붙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생명보험회사는 무엇 때문에 불멸의 인간에게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인가. 6천 년 전에 죽은 그 옛날의 아담은 아직도 꼼짝하지 못하고 영원히 마비된 채 얼마나 치명적이고 절망적인 혼수상태 속에 누워 있는가. 우리는 죽은 자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 속에서 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을 생각하면 ��음이 편해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자들을 침묵시키려고 그렇게 애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무덤 속에서 노크 소리가 난다는 소문만으로도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모든 것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하지만 신앙은 재칼처럼 무덤들 사이에서 먹이를 찾고, 이런 죽음의 회의 속에서도 가장 활기찬 희망을 주워 모은다. (p71) 81 151 160 나는 모든 논쟁을 보류하고, 고래가 물고기라는 구식 의견을 받아들여 성스러운 요나에게 나를 지지해달라고 부탁하겠다. 이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다음 문제는 고래와 다른 물고기들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린네가 그 차이점을 제시했는데, 간단히 말하면 고래는 허파가 있고 피가 따뜻한 반면에 다른 물고기들은 허파가 없고 피가 차갑다는 것이다. (p183) 215 "다시 한 번 말할 테니 잘 듣게. 자네는 좀 더 낮은 층을 볼 필요가 있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판지로 만든 가면일 뿐이야. 하지만 어떤 경우든, 특히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정한 행위를 하는 경우에는, 그 엉터리 같은 가면 뒤에서 뭔가 이성으로는 알지 못하는, 그러나 합리적인 무엇이 얼굴을 내미는 법이야. 공격하려면 우선 그 가면을 뚫어야 해! 죄수가 감방 벽을 뚫지 못하면 어떻게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겠나? 내게는 그 흰 고래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닥쳐온 벽일세. 때로는 그 너머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 녀석은 나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괴롭히고 있어. 나는 녀석한테서 잔인무도한 힘을 보고, 그 힘을 더욱 북돋우는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본다네. 내가 증오하는 건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 흰 고래가 앞잡이든 주역이든, 나는 그 증오를 녀석에게 터뜨릴거야. 천벌이니 뭐니 하는 말은 하지 말게. 나를 모욕한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공격하겠어. 태양이 나를 모욕할 수 있다면 나도 태양을 모욕할 수 있을 테니까. 질투가 만물을 지배하니까, 여기에는 항상 일종의 페어플레이가 존재하지. 하지만 그 페어플레이도 내 주인은 아닐세. 누가 나를 지배하겠나? 진리에는 한계가 없어. 눈을 돌려! 마귀가 노려보는 것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멍청히 바라보는 눈길이야! 그래, 그래. 자네 얼굴이 붉어졌다 파래졌다 하는군. 내 울화가 자네를 녹여서 분노로 타오르게 했어. 하지만 이보게, 스타벅. 홧김에 내뱉은 말은 그 자체에 책임이 없어. 홧김에 심한 말을 해도 그렇게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가 있지. 자네를 화나게 할 생각은 없어. 그만두세. 저것 봐! 저기 있는 터키 녀석의 얼룩덜룩한 황갈색 볼을 보라구. 태양이 그린 그림, 살아서 숨 쉬는 그림이야. 살아 있는 이교도 표범들-분별도 없고 믿음도 없는 것들, 그저 느끼기만 할 뿐, 그 메마른 삶에 어떤 이유도 찾지 않고 어떤 이유도 주지 않아! 이 배에 타고 있는 선원들! 고래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 에이해브를 지지하고 있잖은가? 스터브를 봐! 웃고 있네! 저기 칠레 녀석을 봐! 콧방귀를 뀌고 있어. 스타벅, 다들 폭풍처럼 날뛰고 있는데 자네 혼자 어린 묘목처럼 그 한복판에 흔들리며 서 있을 수는 없어! 그게 뭐지? 잘 생각해보게. 지느러미 하나 찌르는 것을 도와달라는 거 아닌가. 스타벅에게는 그리 놀라운 묘기도 아니지. 앞갑판 선원들까지 작살의 날을 갈려고 숫돌에 달려들었는데, 낸터컷 최고의 작살잡이가 이까짓 시시한 사냥에서 꽁무니를 빼지는 않겠지? 아아! 자네는 꼼짝도 못하게 되었어. 그렇군, 파도에 떠밀린 꼴이야. 말해. 어서 말하라니까! 그래, 그래! 자네의 침묵이 자네 생각을 말해주고 있군. (독백으로) 내 벌어진 콧구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고, 녀석이 그것을 깊이 들이마셨어. 이젠 저 녀석도 내 편이야. 반란이라도 일으키지 않고는 나한테 반대할 수 없을 거야.” (p217-218) 221 245 그 신비로운 손짓이 암시하는 이름 없는 것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망아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그런 것은 어디엔가 반드시 존재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의 다양한 측면은 사랑 속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은 두려움 속에서 이루어졌다. (p255) 이따금 에이해브는 밤중에 견딜 수 없이 생생하여 심신을 지치게 하는 꿈을 꾸고 그물침대에서 뛰쳐나오곤 했다. 그 꿈은 온종일 그를 짓눌렀던 격렬한 생각의 반복이었고, 온갖 상념이 불꽃을 튀기며 서로 충돌하는 망념 속을 뛰어다니고 불타는 두뇌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회전하고 결국에는 고동치는 생명의 맥박 자체가 견디기 어려운 고뇌의 근원이 되었다. 때로는 이 정신적인 고뇌가 에이해브의 존재 자체를 그 근저에서 떠오르게 하고, 그 밑에 있는 심연을 노출시켜 거기에서 화염과 번갯불이 솟아오르고, 저주받은 악귀들이 그 심연으로 뛰어내리라고 그에게 손짓할 때도 있었다. 이처럼 내면의 지옥이 발치에서 입을 벌리면, 고독한 야수의 무시무시한 울부짖음이 배 전체에 울려 퍼지고, 에이해브는 마치 불붙은 침대에서 뛰쳐나오듯 두 눈을 번득이며 선실에서 뛰쳐나온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에이해브가 지닌 잠재적 약점의 징후도 아니고 자신의 결심에 대한 두려움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결의의 치열함을 분명히 보여주는 표시일 것이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에이해브, 흰 고래를 철저하고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냥꾼으로 계획적이고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에이해브, 해도를 검토한 뒤 침대에 들어가는 에이해브는 공포에 질려 침대에서 도망쳐 나오는 에이해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에이해브를 침대에서 도망치게 한 것은 그에게 내재하는 영원한 생명 원칙, 즉 영혼이었다. 그것은 보통 때에는 그의 인격을 형성하는 정신에 실려 다니면서 그 도구나 매개체로 이용되지만, 잠자고 있을 때에는 그 정신에서 잠시 떨어져 나온다. 에이해브가 밤중에 침대에서 도망쳐 나온 것은 이성이 이제 더 이상 합일체가 아닌 광적인 것과의 접촉을 자발적으로 회피한 결과다. 그러나 정신이라는 것은 영혼과 결부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에이해브의 경우에는 자신의 온갖 상념과 상상을 오직 한 가지의 숭고한 목적에 바쳤고, 그 목적은 자신의 완고한 의지로 신과 악마에게 거역함으로써 일종의 독불장군처럼 독립적인 존재물이 되었다. 아니, 그 목적은 그것이 원래 결부되어 있는 평범한 생명력이 초대받지 않은 사생아의 탄생에 놀라서 도망친 뒤에도 계속 살아서 불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이해브처럼 보이는 어떤 존재가 선장실에서 뛰쳐나왔을 때, 그 육체의 눈에서 번득이는 고통의 정신은 그때 이미 알맹이 없는 껍데기, 형체 없는 몽유병적 존재였다. 물론 한 줄기 생명의 빛이기는 했지만, 그 본래의 색을 발생시킬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허무 그 자체였다. 늙은이여, 하느님이 당신을 도와주실 거요. 당신의 생각이 당신 안에 또 하나의 생명체를 창조했소. 자신의 치열한 생각 때문에 스스로 프로메테우스가 된 인간, 당신의 심장을 영원히 쪼아 먹는 독수리, 그 독수리야말로 당신이 창조한 생명체인 것이오." (p262-263) 목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힌 에이해브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오로지 모비 딕을 잡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 단 하나의 열정을 위해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이익을 기꺼이 희생할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격렬한 고래잡이의 생활방식과 단단히 결합된 오랜 습관과 타고난 천성 때문에 항해의 부산물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 해도, 그에게 훨씬 강한 영향력을 가진 다른 동기는 얼마든지 있었다. 흰 고래에 대한 원한이 어느 정도는 모든 향유고래에 대해서도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바다 괴물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면 죽일수록 다음에 만나는 고래는 그가 찾아다니는 바로 그 고래일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지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의 편집증을 고려한다 해도 지나치게 세련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정이 정말로 반박할 여지가 있다 해도, 추가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것은 에이해브를 지배하고 있는 격렬한 열정에 정확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게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p273) 한편 퀴퀘그가 충동적으로 무심하게 움직이는 막대기는 씨실을 때로는 비스듬히, 때로는 비뚤어지게,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때리고 있다. 마지막 타격의 이 차이에 따라 완성된 직물의 최종 상태에도 그에 상응하는 차이가 생긴다. 이 야만인의 막대기는 그렇게 날실과 씨실의 마지막 행태를 만들어간다. 이 느긋하고 무심한 막대기는 우연인 것이다- 아아, 우연과 자유의지 그리고 필연- 그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뒤섞여 함께 일한다. 궁극적인 진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필연의 곧은 날실- 왔다 갔다 하는 모든 진동은 사실 거기에 이바지하고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도 역시 주어진 실 사이에서 자신의 북을 자유롭게 놀리고 있다. 우연은 한편으로는 필연이라는 직선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제한을 받고 측면에서는 자유의지가 그 움직임을 한정하지만, 그래서 필연과 자유의지의 지시를 받지만, 우연도 그 두 가지를 번갈아 지배하면서 사건의 최종 형태를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p276-277) 하지만 바다는 이방인에게 적이 될 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마귀처럼 잔인하고,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죽인 페르시아인보다 더 사악하다. 바다는 자기가 낳은 생물도 용서하지 않는다. 사나운 암호랑이가 밀림 속에서 뒹굴다가 새끼들을 깔아뭉개듯 바다는 가장 힘센 고래까지도 바위에 내던져, 그들을 부서진 난파선 잔해와 나란히 암초에 남겨놓는다. 바다를 통제하는 것은 바다 자신의 자비와 힘뿐이다. 주인 없는 바다는 기수를 잃고 미친 듯이 내달리는 군마처럼 헐떡이고 콧김을 내뿜으며 지구를 압도하고 있다. (p346) 384 414 이 놀라운 힘은 꼬리의 우아한 유연성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을뿐더러, 티탄처럼 막강한 힘 속에 천진한 어린애 같은 태평함이 파도처럼 굽이 친다. 꼬리의 유연한 움직임은 그 놀라운 힘에서 가장 섬뜩한 아름다움을 끌어낸다. 진정한 힘은 결코 아름다움이나 조화를 손상시키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움과 조화를 가져다준다. 당당한 아름다움을 지닌 모든 것이 발휘하는 불가사의한 매력은 힘과 깊은 관계가 있다. 헤라클레스의 석상에서 대리석을 뚫고 터져 나올 듯한 힘줄을 모두 제거하면 그 매력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경건한 에커만은 괴테의 벌거벗은 시신에서 시트를 벗겼을 때, 로마의 개선문처럼 단단한 가슴 근육을 보고 압도당했다. 미켈란젤로가 성부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그릴 때에도 거기에 얼마나 강력한 힘을 부여했는가.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의 성스러운 사랑에 대해 부드러운 고수머리의 양성적인 모습을 묘사한 이탈리아의 그림들이 무엇을 드러내고 있든지 간에, 거기에는 예수의 사상이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늠름한 근골을 찾아볼 수 없는 이 그림들은 어떤 힘도 암시하지 않고, 오로지 복종과 인내라는 소극적이고 여성적인 것만 암시한다. 그것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이 지닌 독특한 실천적 미덕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내가 다루고 있는 이 고래 꼬리는 미묘한 탄력을 갖고 있어서 장난삼아 또는 진지하게, 또는 화가 나거나 그 밖의 어떤 기분으로 휘둘러대더라도 꼬리의 굴곡 작용은 언제나 변함없이 우아하다. 어떤 요정의 팔도 그것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p456-457) 인간의 권리와 세계의 자유는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인가? 모든 인간의 마음과 의견은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이 가진 종교적 믿음의 원칙은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인가. 표절을 일삼는 사이비 미문가에게 철인의 사상은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커다란 지구 자체는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독자들이여, 그대도 역시 '놓친 고래'이자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482) 501 503 512 이런 인생에는 죽음만이 바람직한 결말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죽음은 미지의 낯선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일 뿐이고, 무한히 멀고 황량한 곳, 육지로 둘러싸이지 않은 바다로 들어갈 가능성에 보내는 첫 인사일 뿐이다. 따라서 죽음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자살을 꺼리는 양심이 남아있다 해도,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바다는 상상할 수도 없는 흥미로운 공포와 새로운 활력으로 가득 찬 놀라운 모험의 광야를 그의 눈 앞에 유혹하듯 펼쳐놓는다. 그리고 끝없는 태평양의 깊은 곳에서는 수많은 인어가 그들에게 노래를 부른다. "이리 오라, 비탄에 빠진 자들아. 수명이 다하기 전에 죽은 죄를 묻지 않는 새로운 삶이 여기 있다! 이리로 오라! 지금도 여전히 미워하고 미움 받는 너의 육지 세계가 죽음보다 더 염두에 두지 않는 삶 속에 너를 묻어라! 이리로 오라! 교회 묘지에 너의 묘비를 세우고, 이리 와서 우리를 신부로 삼아다오!" (p579) 590 "오, 밝은 불의 맑은 정령이여, 나는 한때 이 바다에서 페르시아인처럼 그대를 숭배했지만, 예배를 드리다가 그대에게 화상을 입어 지금까지 흉터가 남아 있다. 나는 이제 그대를 안다. 맑은 정령이여, 그대를 올바르게 숭배하는 방법은 도전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알고 있다. 그대는 사랑에도 존경에도 감동하지 않는다. 그대를 증오하는 자는 죽여버릴 수도 있다. 그대는 누구나 가차 없이 죽인다. 두려움을 모르는 바보도 이제는 절대로 그대에게 반항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의 불가사의한 위력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힘이 나를 무조건 지배하려 들면, 나는 지진 같은 내 생명이 끝날 때까지 저항하겠다. 의인화한 사물 한가운데, 바로 여기에 인격을 가진 한 인간이 서 있다. 보잘것없는 점 하나에 불과하지만,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은 여왕��도 같은 인격이 내 안에 살면서 왕권을 느낀다. 그러나 전쟁은 고통이고 증오는 비애다. 그대가 사랑 중에서도 가장 저급한 형태로 온다 해도 나는 무릎을 ��고 그대에게 입 맞출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가장 높은 지위에서 단순히 고매한 위력만으로 나에게 온다면, 그대가 완벽한 장비를 갖춘 세계의 해군을 내보낸다 해도 이곳에는 여전히 거기에 무관심한 그 존재가 있다. 오, 그대 맑은 정령이여, 그대의 불은 나를 미치게 한다. 나는 불의 진정한 아들답게 그 불을 그대에게 되돌려 보낸다." (p602) "이건 뭐지? 형언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고, 이 세상의 것 같지도 않은 불가사의한 이것은 도대체 뭐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기만적인 주인, 잔인하고 무자비한 황제가 나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사랑과 갈망을 등지도록 강요하는구나. 그래서 나는 줄곧 나 자신을 떠밀고 강요하고 밀어붙인다. 내 본연의 자연스러운 마음으로는 감히 생각도 못 할 짓을 기꺼이 하도록 무모하게 몰아세우는 것일까? 에이해브는 과연 에이해브인가? 지금 이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은 나인가, 신인가, 아니면 누구인가? 하지만, 위대한 태양도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는 심부름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면, 스스로 회전할 수 있는 별은 단 하나도 없고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모든 별을 움직인다면, 이 보잘것없는 심장은 어떻게 고동칠 수 있고, 이 작은 두되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아니라 신이 심장을 고동치게 하고, 두뇌를 돌아가게 하고,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다. 이보게, 우리 인간은 저기 있는 양묘기처럼 세상에서 빙글빙글 돌려지고, 운명은 그 기계를 돌리는 지레라네. 저 미소 짓는 하늘과 깊이를 잴 수 없는 바다를 보라! 저기 있는 다랑어를 보라! 다랑어가 저 날치를 쫓아가서 물어뜯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살인자들은 어디로 가는가! 재판관 자신이 법정에 끌려 나와 재판을 받게 되면 판결은 누가 내리는가? 하지만 참으로 온화한 바람이고, 온화해 보이는 하늘이구나. 공기는 이제 머나먼 초원에서 불어온 듯 향기롭구나. 스타벅, 안데스의 산비탈 아래 어디에선가 사람들이 건초를 만들었고, 풀 베는 사람들은 갓 벤 건초 사이에서 잠자고 있을 거야. 잔다고? 그렇지. 우리는 아무리 힘들게 열심히 일해도 마지막에는 모두 들판에서 잠자지? 잠잔다고? 그래. 작년에 쓴 낫이 반쯤 벤 풀밭에 던져진 채 녹스는 것처럼 초록빛 속에서 녹슬어 잠자지. 스타벅!" (p645-646) 650 "흰 고래가 보이나?" 에이해브가 소리쳤지만, 고래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틀림없이 녀석 뒤에 있어. 그러니까 그 항적을 따라가기만 하면 돼. 그것뿐이야. 이봐, 키잡이. 지금까지 한 대로 계속해. 오늘도 날씨가 정말 좋구나! 신이 새로 창조한 세계에 천사들을 위한 여름 별장을 만들어 오늘 아침 천사들에게 처음 개방한다 해도 그 새벽이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이다. 에이해브에게 생각할 시간이 있다면, 이거야말로 생각할 거리가 되겠지. 하지마 에이해브는 절대로 생각을 하지 않아. 그저 느끼고 느끼고 또 느낄 뿐. 그것만으로도 인간에게는 충분히 설레고 흥분되는 일이야. 생각하는 건 무례한 짓이지. 오직 신만이 생각할 권리와 특권을 갖고 있어. 생각하는 것은 냉정함과 침착함이고, 또 그래야 해. 그런데 우리의 가련한 가슴은 고동치고, 우리의 가련한 뇌는 생각하기에는 너무 심하게 맥박 치고 있어. 하지만 때로는 내 뇌가 너무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었지. 얼어붙은 것처럼 냉정해서, 이 낡은 두개골은 내용물이 얼음으로 변한 유리찬처럼 딱딱 소리를 내며 갈라져서 뇌를 진동시키는 것 같아. 그런데 지금도 이 머리카락은 자라고 있어. 이 순간에도 자라고 있어. 열이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는 게 분명해. 아니, 머리카락은 그린란드의 얼음 틈새에서 베수비오 화��의 용암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자라는 흔해빠진 풀 같은 거야. 사나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불어 날린다. 찢어진 돛조각이 흔들리는 배에 매달려 그 배를 채찍질하듯, 바람에 날린 머리카락이 나를 때린다. 비열한 바람이다. 여기 오기 전에 감옥의 복도와 감방과 병원의 병실을 지나오면서 그곳을 환기시켰을 텐데도 여기서는 양털처럼 순결한 체하며 불어다니. 꺼져라! 더러운 바람아. 내가 바람이라면 이 사악하고 비참한 세계를 더는 돌아다니지 않을 거다. 어디든 동굴로 들어가 숨어버릴 거다. 하지만 바람은 역시 고귀하고 씩씩하다. 바람을 정복한 자가 있었던가? 어떤 싸움에서나 마지막에 가장 통렬한 공격을 가하는 것은 바람이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가서 바람을 창으로 찔러보라. 창은 바람을 통과할 뿐이다. 하! 비겁한 바람은 벌거벗은 인간을 때리기는 하지만, 자신은 단 한대도 가만히 서서 맞으려 하지 않는다. 바람보다는 차라리 에이해브가 더 용감하고 고귀하다. 바람이 몸뚱이를 갖고 있다면 좋겠지만, 인간을 가장 화나게 하고 약 올리는 것은 모두 몸뚱이가 없다. 하지만 물질로서는 몸뚱이가 없지만, 힘으로서는 실체를 갖고 있다. 거기에 가장 특별하고 가장 교활하며 가장 악의적인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다시 단언하건대, 바람이란 존재에는 매우 찬란하고 우아한 무언가가 있다. 적어도 그 따뜻한 무역풍은 맑은 하늘에서 강하고 꾸준하며 활기차면서도 온화하게 곧장 불어대고, 바다의 비열한 조류가 아무리 방향을 바꾸고 갈지라로 흘러도, 육지에서 가장 거대한 미시시피 강이 막판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고 진로에서 벗어나도, 무역풍은 절대로 방향을 바꾸지 않고 목표를 향해 곧장 불어간다. 영원한 양극에 맹세코! 내 배를 똑바로 불어 보내는 이 무역풍, 또는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절대로 변하지 않고 힘으로 가득 찬 무언가가 배처럼 용골을 가진 내 영혼을 불어 보내고 있다. 바람을 위해 건배! 돛대 꼭대기에 있는 망꾼들아, 무엇이 보이는가?" (p669-670) "나는 태양에 등을 돌린다. 어떤가, 타슈테고. 자네의 망치 소리를 들려다오. 오오, 내 불굴의 세 첨탐이여. 결코 금이 가지 않는 용골이여. 신만이 위협할 수 있는 선체여. 튼튼한 갑판, 오만한 키, 북극성을 가리키는 뱃머리. 죽으면서도 찬란한 배여! 그러면 그대는 죽어야 하는가? 게다가 나 없이 혼자? 가장 하찮은 난파선의 선장에게도 허용되는 그 마지막 긍지마저 나는 가질 수 없단 말이낙? 오오, 고독한 삶의 고독한 죽음! 오오, 내 최고의 위대함은 내 최고의 슬픔 속에 있다는 것을 지금 나는 느낀다. 허허, 지나간 내 생애의 거센 파도여, 저 먼 바다 끝에서 밀려 들어와 내 죽음의 높은 물결을 뛰어넘어라!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 관도, 관대도 모두 같은 웅덩이에 가라앉혀라! 어떤 관도, 어떤 관대도 내 것일 수는 없으니까. 빌어먹을 고래여, 나는 너한테 묶여서도 여전히 너를 추적하면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다. 그래서 나는 창을 포기한다!" (p681-682) - 허먼 멜빌 , ' 모비딕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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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풍경 - 선미숙 Ω 노인과 바다◑
노인과 바다 강종열, [어부가 된 이다], 2005 작품 보러가기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는다 | 남진우 글 “헤밍웨이에게 어떤 자세로 죽음을 맞느냐 하는 것은 평생 따라다닌 관심사이자 문학적 주제였다. 그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이념 문제를 포함해서 모든 정치 사회적 현안을 배격한 채 비극적 세계에서 고독한 영웅주의를 추구하는 인물을 소설에 구현하고자 했다. 그에게 그 외의 것들은 다 협잡물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는 미국문학에서 아담적 전통(Adamic Tradition)을 가장 잘 계승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몇 달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한 늙은 어부가 있다. 마을에선 그를 따르는 어린 소년 하나만 그의 편이 되어줄 뿐 아무도 ‘운이 다한’ 그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어느 날 홀로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간 그의 낚싯바늘에 거대한 청새치가 걸려든다. 그의 배보다 더 큰 그 물고기와 이틀 밤낮에 걸쳐 드잡이를 한 끝에 그 물고기를 끌고 항구를 향해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해안에 도착했을 때엔 물고기는 이미 피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들에 의해 다 뜯어먹히고 앙상한 뼈와 대가리만 남은 상태였다. 노인은 오두막집에 지친 몸을 누이고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 꿈을 꾸며 잠든다.누구나 다 아는 이 이야기의 작가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가없는 바다와 하늘이라는 자연의 원형극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드라마는 좌절을 모르는 불굴의 인간 정신에 대한 찬양이자 광활한 우주 속에서 고독한 단독자로 존재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비감 어린 헌사이다. 상어와 사투를 벌이며 노인이 뱃전에서 되뇌는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는 단언 그대로 이 작품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정면에서 받아들이고 묵묵히 시련을 견디는 강인한 노인의 초상을 통해 고전적 휴머니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눈부신 빛과 파도, 바람과 구름 같은 자연의 4원소가 진동하는 이 소설은, 비교하자면, 지중해의 태양과 소금기의 맛이 감도는 카뮈 같은 유럽 작가의 소설과는 다른 향일성의 감흥을 읽는 사람에게 제공한다. 거기엔 멕시코만 특유의 역사적 상흔과 생존을 위한 투쟁이 강렬한 피냄새와 뒤섞여 있다.20세기에 행동주의 문학이란 것이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앙드레 말로를, 미국에서는 헤밍웨이를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 나라 일이 아닌데도 세계 어디선가 큰 사건이 터지면 바로 달려가서 몸으로 직접 참여하고 소설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되풀이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박격포탄에 맞아 수백 바늘 꿰매는 대수술을 받고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가, 2차 세계대전 동안엔 자신의 낚싯배를 개조해 독일 잠수함 U보트 수색, 노르망디 상륙작전 취재, 이 밖에도 여러 차례 아프리카 탐험대에 참가했다가 두 번이나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를 겪고도 불사조처럼 살아남… 이런 작가 이력은 창백한 책상물림이 대다수인 문학판에서 이 작가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과 색깔을 잘 말해준다. 그가 즐겼다는 스포츠 역시 사냥, 바다낚시, 권투 등 거친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것들이다. 작가 헤밍웨이. ‘파파(Papa)’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그는 건강하고 거침없는 미국 남성상의 상징이었다. 20세기를 통틀어서 그보다 더 뛰어난 미국 작가는 여럿 꼽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작가, 그보다 더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작가를 찾기란 어렵다. ‘파파(Papa)’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그는 건강하고 거침없는 미국 남성상의 상징이었다. 20세기를 통틀어서 그보다 더 뛰어난 미국 작가는 여럿 꼽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작가, 그보다 더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작가를 찾기란 어렵다(작가로서 그는 생전에 [타임] 지에 두 번, [라이프] 지에 세 번 표지 모델로 등장함으로써 유명세를 과시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마릴린 먼로나 존 F. 케네디, 엘비스 프레슬리가 그러하듯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도 해마다 7월이 되면 미국의 플로리다 반도에 위치한 키웨스트에서는 헤밍웨이를 닮은 사람을 뽑는 경연대회가 벌어진다. 전국 각지에서 허연 수염을 기른 건장한 마초들이 몰려와 그들의 영원한 우상인 헤밍웨이를 경배하는 시간을 갖는다. 노먼 메일러를 포함해서 많은 후배 작가들이 헤밍웨이의 이런 측면, 즉 문학이란 울타리를 뛰어넘어 한 시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획득하는 과업에 도전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흔히 헤밍웨이의 문학세계를 말할 때 언급되는 것이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초연함을 보여주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다. 때로 스토아적 극기나 용기에 비견되기도 하는 이런 강인한 남성의 모습은 현실 공간에서든 문학 공간에서든 점차 만나기 힘든 자질이 되어가고 있다. 헤밍웨이에게 어떤 자세로 죽음을 맞느냐 하는 것은 평생 따라다닌 관심사이자 문학적 주제였다. 그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이념 문제를 포함해서 모든 정치 사회적 현안을 배격한 채 비극적 세계에서 고독한 영웅주의를 추구하는 인물을 소설에 구현하고자 했다. 그에게 그 외의 것들은 다 협잡물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는 미국문학에서 아담적 전통(Adamic Tradition)을 가장 잘 계승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쿠바의 한적한 어촌의 오두막에 누워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를 꿈꾸며 잠든 초라한 늙은 어부의 모습에서 우리가 오랜 시련에 단련된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위엄을 보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작품 소개 [노인과 바다]는 20세기 미국문학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이자 지금까지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는 작품 중 하나.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서 원숙한 인간관을 바탕으로 실존적 인간상을 등장시켜 비극적이고 환멸뿐인 삶이지만 인간이 가져야 할 용기와 믿음, 인내에 대해 이야기한다. 거기에 ‘20세기 미국문학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그만의 서사 기법과 문체가 성공적으로 더해지며 헤밍웨이 문학 인생이 응축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헤밍웨이 자신도 [노인과 바다]를 가리켜 “평생을 바쳐 쓴 글” “지금 내 능력으로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글”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노인과 바다]는 거대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다가 뼈만 남은 잔해를 끌고 돌아오는 늙은 어부의 이야기다. 헤밍웨이가 실제로 쿠바의 수도 아바나 근처에서 청새치 낚시를 하며 구상한 이 단순하고 짧은 이야기는, 감정을 절제한 짤막한 대화와 독백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시적 함의와 상징성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할 뿐만 아니라 감정과 수식이 담긴 어떤 묘사보다 더 극명하고 생생하게 노인이 처한 현실과 상황을 잘 보여준다. 헤밍웨이 특유의 이 압축과 절제야말로 “서사 기법에 정통하고 현대문학의 스타일에 간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거대한 물고기와 상어를 상대로 벌이는 노인의 싸움은 인간 삶과 자연의 본질적 존재와 행위를 대변하는 상징 내지는 우화적 이미지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인간과 삶과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성찰을 목격하고 경험하고 또 자극받는다. 작가 소개 어니스트 헤밍웨이 1899년 미국 일리노이에서 태어났다. 제1차세계대전에 적십자사의 구급차 운전병으로 참전했고, 1926년에 전쟁으로 상처 입은 이들의 상실과 허무감을 그린 [태양은 다시 뜬다]를 발표하여 피츠제럴드, 포크너와 더불어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작가로 주목받았다. 이후에도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하여 전쟁문학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플로리다에 살면서 바다낚시에 몰두하던 경험과 구상을 바탕으로 [노인과 바다]를 발표했으며,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당시 작품이 실린 [라이프]지가 불과 이틀 만에 5백만 부 이상이 팔려나갔고, 일주일 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그 인기를 입증한다. [노인과 바다]의 성공으로 출간 이듬해인 1953년에 퓰리처상, 195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건강 악화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961년 자택에서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헤밍웨이의 다른 작품들 무기여 잘 있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킬리만자로의 눈 또 다른 풍경 - 선미숙 보릿고개 설움 그 설움 포만감으로 채우고 시골 촌놈 그 촌놈 도심 속의 주인이라 쌓이고 쌓인 육신의 기름 덩이 억지 육수로 뽑아 내며 도심 속의 낙원 위를 허무가 달린다 달리고 또 달린다 졸고 있는 저 별은 빈 수레의 욕망을 얼마나 헤아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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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nd, 2018. Saint Adresse, Le Havre, Normandie, France 노르망디의 광막하고 고독한 바다. The vast sea in beautiful solitude of Normandy. . . . . . #Normandie #Normandy #StAdresse #LeHavre #France #Europe #Sea #Seaside #Landscape #Landscapes #CloudySky #BlueSky #Sunset #Solitude #Siverlining #Travelgram #Travel #Traveler #SonyDscRX100M5 #SonyRX100M5 #SonyAlphaPhotos #SonyCamera #SonyRX100M #SonyHighend(Sainte-Adresse, France에서) https://www.instagram.com/p/B9l37YylaAV/?igshid=ckndea4ur1i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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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 Salon d’O (살롱 드 오수경) - Long Neck Woman (목이 긴 여자) https://youtu.be/Rd_Zyz-WxSM Artist : Salon d’O (살롱 드 오수경) Album Title : Demian (데미안) Release Date : 2019.08.05 Genre : World Music [Listen here] Apple Music - Melon - Naver Music - Mnet - Bugs - Genie - ■ Mirrorball Music http://mirrorballmusic.co.kr/ https://www.facebook.com/mirrorballmusic https://twitter.com/mirrorballmusic “너는 네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소설 데미안 中- 2집 [파리의 숨결] 발매 후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랫동안 파리에 머무르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보내다보니 자연스레 나 자신을 탐구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고 덕분에 긴 시간 고민해왔던 “왜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왜 나는 이따위로 생겨먹은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각외로 답은 먼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름아닌 “인정”이었습니다. 과거의 나를 인정했더니 현재의 나를 이해하게 되었고 이해를 하고나니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여 한 인간의 태어남, 성장함, 마주함의 과정을 음악으로 솔직하게 그려낸 이번 앨범은 서사적이며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듯 하지만 7년간 함께 해 온 멤버들 장수현, 지박, 고종성과 연주해서 살롱 드 오수경만의 사운드를 완성시킨 데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첫 곡 [아침]은 생명의 탄생과 기쁨, 생의 시작을 알리는 곡으로서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력 넘치는 느낌을 생동감있는 스트링 사운드를 통해 표현한 곡 입니다. 두번째 곡 [영 피아노]는 초등학생 때 다녔던 피아노 학원 이름입니다. 피아노와의 첫 만남, 그 생생했던 기억, 천사같았던 피아노 학원 선생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날 반기던 특유의 가정적인 냄새, 이 모든 추억을 떠올리며 작곡한 짧은 피아노 연주곡 입니다. 이어지는 [정글북]은 팬티만 입고 하루종일 뛰어다녀도 지칠 줄 모르던 어린시절을 표현한 곡 입니다. 왜 어린이들은 쉴 새 없이 떠들고 끊임없이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이 곡에는 쉼표가 없습니다. 바흐 인벤션 구조를 띄는 인트로가 점차 스패니쉬한 사운드로 변화되면서 아프로큐반 리듬으로 진화되는 과정을 통해 악보에 그려진대로 연주하는 걸 따분해하던 어린이가 피아노 학원을 탈출해 놀이터(정글)를 뛰어놀며 모험을 즐기는 과정을 음악으로 풀어내고자 ���였습니다. 다음 트랙인 [울면서 달리기]는 늘 어딘가로 향해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던, 아침 6시면 억지로 일어나 학교를 향해 울면서 달려야 했던 사춘기 시절을 표현한 곡 입니다. A part에서는 메이저코드, B part에서는 마이너코드만 사용해서 작곡하였는데 이를 통해 사춘기 시절 오락가락 하던 감정선를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목적이 있는 표류상태를 뜻하는 [유목적 표류]는 3집 수록곡들 중 가장 서사적인 성격을 띤 곡입니다. 20대 때 작곡해 둔 도입부를 수년간 잊고 살다가 30대가 되어서야 뒷 부분을 작곡해서 하나로 합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20대 시절을 떠올려보면 꿈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며 실패와 좌절을 반복했던 기억들 뿐 입니다. 그 과정은 너무나 지루하고 외로웠지만 계속 노를 저으며 앞으로 갈 수 밖에 없었죠. 첼리스트 지박이 연주하는 도입부 멜로디에 그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서른이 되던 해, 살롱 드 오수경 1집이 발매되었고 꿈은 이루었지만 알 수 없는 허무함으로 인해 도망치듯 파리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5년간 파리에 머무르면서 내 인생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마치 바다 한 가운데서 표류된 것 같았고 멤버들 또한 각자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 앞에서 인생의 배가 난파하는 듯한 혼란의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그 시간들을 통과하며 우리는 더욱 강해지고 굳건해졌습니다. 파리가 아무리 좋아도 김치없이 밥 먹는게 괴로웠고 “한”이라는 정서가 없는 프랑스인들과 나의 곡을 연주하는것에 한계점을 느낀 저는 멤버들이 있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난 뼛속까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후반부에 나오는 “아리랑”을 통해 이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미필적 고의]는 자신이 저지른 어떠한 행위로 말미암아 타인을 고통에 이르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죄를 짓는 인간의 본성을 나타낸 곡 입니다.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고,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습니다. 타인에게 들이댔던 거짓과 죄악의 칼날은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자기 자신을 찌르게 됩니다. 이러한 순환하는 구조는 1집 뫼비우스와 사뭇 닮아있는 듯 합니다. 첼로, 바이올린, 베이스 순으로 연주되는 solo에서 멤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세요. “목빠지도록 기다린다”라는 말이 있죠. [목이 긴 여자]는 긴-긴-기다림에 따른 절망을 노래한 곡 입니다. 오지않을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기대감이 절망으로 바뀌고 절망은 원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 원망의 화살은 결국 스스로에게 꽂히더군요. 타고난 기질을 저주하며 다른 사람이 되보려 억지노력 해봐도 타인의 사랑을 얻을 수 없었고 2분15초부터 외치는 피맺힌 절규를 통해 스스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니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는것을 느꼈습니다. 김기림님의 시 [바다와 나비]에서 ‘나비’는 순수하고 어리숙한 자아이며 ‘바다’는 가혹한 현실을 의미합니다. 성인이 되기 전 바라보았던 세상은 꿈을 이룰 수 있는 드넓은 세계처럼 느껴졌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나에게 수심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발을 담구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세상이 이토록 차갑고 무서운 곳인지를…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세상이 차갑고 무서운 어른아이를 표현한 곡 입니다. 언젠간 찾아올 죽음의 문턱 앞에서 신에게 하고 싶은 말,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레미제라블] 소설 [데미안]에서 주인공인 싱클레어에게 절친 데미안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는 네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저희들에게 앨범을 만들어가는 작업은 자아를 깨달아가는 일련의 과정이었습니다. 삶 이라는 고독한 들판에 서서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듯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만들어낸 이 앨범이 당신에게 데미안처럼 의미있는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들어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redits. Produced by 살롱 드 오수경 Executive producer for Sound Nova 홍세존 All songs composed & arranged by 오수경 Piano 오수경 Violin 장수현 Cello 지박 Bass 고종성 Pandeiro Recto Luz (Track 3) Recorded by 주대건, 이원우 at Sound Nova Studio Mixed by 이경환 at Genuin Musik Lab Mastered by 허정욱 at studio Girok Photographed by 김하은 Model & Art directed by 이종화 Designed by 오수경, 안민지 ■ More about Salon d’O (살롱 드 오수경) https://www.facebook.com/soundnovakorea https://www.facebook.com/salonde5/ #미러볼뮤직 #살롱드오수경 미러볼 뮤직 - Mirrorball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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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바다가 그리워질 때 있다면
당신의 전생은 분명 고래다 나에게 고래는 사랑의 이음동의어
고래와 사랑은 바다에 살아 떠도는 같은 포유류여서
젖이 퉁퉁 붓는 그리움으로 막막해질 때마다
불쑥불쑥, 수평선 위로 제 머리 내미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고래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실례다 당신이 본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
누구도 사랑의 모두를 꺼내 보여주지 않듯
고래도 결코 전부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 한순간 환호처럼 고래는 바다 위로 솟구치고
시속 35노트의 쾌속선으로 고래를 따라 달려가지만
이내 바다 깊숙이 숨어버린 거대한 사랑을
바다에서 살다 육지로 진화해온
시인의 푸른 휘파람으로는 다시 불러낼 수 없어 저기, 고래! 라고 외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고독한 사람은 육지에 살다 바다로 다시 퇴화해 가고
그 이유를 사랑한 것이 내게 슬픔이란 말 되었다 바다 아래서 고래가 몸으로 쓴 편지가
가끔 투명한 블루로 찾아오지만
빙하기 부근 우리는 전생의 기억을 함께 잃어버려
불쑥, 근원을 알 수 없는 바다 아득한 밑바닥 같은 곳에서
소금 눈물 펑펑 솟구친다면
이제 당신이 고래다 보고싶다,는 그 말이 고래다.
그립다,는 그 말이 고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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