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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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kind-son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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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만기가 다가왔다.
처음으로 만기까지 버틴 집이 하필 이 곳이라니, 하면서 새로 갈 집을 계약했다.
감회가 새롭고,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봉천동 고개 끝에 있는 집을 구했다. 싸기도 했지만, 높은 언덕을 올라가다보니 공기가 좋다 라는 생각에 그 집을 계악했다. 옆으로 좀만 돌아가도 능선마냥 동네가 한 눈에 들어온 것도, 집주인 할머니가 집 보여주다 말고, 여기 와서 그냥 살어~! 하며 능글맞게 말씀하시는 것도,
마냥 내가 찾던 여유였던 것 마냥 그 집으로 정하게 되었다. 옵션이 하나도 없는 집이었는데, 운좋게 에어컨이랑 세탁기도 양도 받았다.
올 해 삼재라는 말을 듣고 나쁜 일들이 생길때마다 '이만하면 다행이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버티고 있다.
새로운 곳에서 또 난 버텨야겠지.
즐기고 싶다, 즐기게 좀 해주면 좋겠다 내 운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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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2alpaca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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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몬드 집이 팔려서 방을 비워줘야 하는데 감사하게도 주인집 할머니가 본인 인맥 총동원하여 몇 군데 추려주었다. 방 보러도 같이 다녀주고. 덕분에 좋은 집들 구경도 많이 하고(좋은 집은 시세보단 쌌지만 역시나 내 예산에서 벗어나 가질 못했다), 결국은 지금 집에서 한블럭 떨어진 곳에 방을 구했다. 새로가는 집은 이미 4명의 룸매들이 있는데 다들 의료계통에서 일한다. 거기도 아마 다들 내처럼 시프트 워커들일 듯. 커뮤팅이 힘들긴 해도 이렇게 주변에서 도와주고 챙겨주니 그나마 낫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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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는 베이. 요즘은 40프로 세일하는데 역시나 살 게 없다. 이제 가게 장비들, 선반들도 파는데 눈독들이던 저 무스 가격이 $5000이다. 흐억. 저렇게 비싸게 내놓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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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yongchul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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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토요일까지 이어지는 춘계지구역장세미나
수요일인 오늘 수요예배로부터 시작해서 목,금,은 새벽예배 ( 새벽 세시에 출근하라는 말씀 ..)
금요일은 금요철야 후 토요일 국가안정과 ... 외우기 매우 어려운 긴 이름의 현 시국 안정을 위한 새벽예배 ( 캬 .. 온 몸과 맘을 온전히 드려부러 ..)
그리고 바로 주일이니까 또 새벽 세시반 출근 ㅎㅎㅎ
이러니까 주일 저녁이 가장 반기는 시간이 될수밖에 ㅎㅎㅎ
그렇게 대충 한주 쉬고나서 부활절을 위한 2주간의 새벽예배 .. ( 이때는 철이 28호도 온몸의 꺽이는 부분과 엔진이 다 삐걱거리고 과열되서 퍼지기 직전까지 .. )
왠만한 분들은 지레 겁먹고 도망치고픈 어마무시한 일정인데
이런 일정들을 통해 우리가 얻는것은 그리스도의 소유됨을 통한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다
내가 내 삶의 주인 일때는 이 모든 일정이 불평불만 가득한 시간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소유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 기간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증거할 시간이다
초대 교회때는 자신의 신앙을 로마의 핍박과 박해속에 죽음으로 증명했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 그.신앙을 증명 받았고
애스더는 민족의 절멸 위기에서 죽음을 무릎쓰고 왕앞에 나아가 민족을 구했다
구원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목숨을 걸고 믿어야 한다
초대교회때 처럼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빡빡한 일정만으로 나의.신앙이 증명 된다면 이만큼 수지 맞는 일도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빡빡한 일정이라도 예쓰오케이 땡큐 무조건 감솨함미당 ^ ^
몸은 피곤하지만 아주 땽 잡은규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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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4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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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또는 소수로 행동하여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들 중에는 유명하지 않은 이도 있다. 무함마드 부아지지가 한 예다. 그는 한 독재자의 부패와 억압적 통치가 23년째 이어지고 있던 튀니지의 26세 과일 노점상이었다. 어느날 시장에서 경찰이 부아지지에게 뇌물을 뜯어낼 요량으로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허가증을 보여달라며 괴롭혔다. 그는 거절했다. 경찰은 그를 발로 차고 침을 뱉고 노점을 뒤집었다. 부아지지는 관청에 가서 항의하려고 했지만, 그곳에서도 무시당했다. 2010년 12월 10일, 경찰에게 괴롭힘을 당한 지 한 시간도 안 된 때, 그는 관청 앞에서 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외쳤다. “대체 어떻게 먹고살란 말이냐?” 그러고는 제 몸에 불을 붙였다.
부아지지의 분신과 죽음을 계기로, 튀니지 전역에서 독재자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와 여당과 경찰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시위는 확산되었고, 정부와 벤 알리는 한 달 만에 실권했다. 부아지지의 행동을 계기로 이집트에서도 시위가 열려,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독재가 거꾸러졌다. 예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알리 압둘라 살레의 34년 통치가 무너졌다. 리비아에서도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34년 권세를 잃고 살해당했다. 시리아에서는 시위가 내전으로 이어졌다. 요르단, 오만, 쿠웨이트에서도 총리가 사임했다. 알제리, 이라크, 바레인,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정부 개혁이라고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른바 아랍의 봄이었다. 부아지지는 무슬림 세계의 정치개혁을 생각하며 성냥을 켠 게 아니었다. 그저 어디로도 분출할 수 없어서 안으로 향한 분노가 있을 뿐이었다. 아랍의 봄이 짧은 희망 뒤에 새 독재자, 폭력, 난민, 시리아와 ISIS라는 파국으로 이어진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어쩌면 분신자가 역사를 만든다기보다 역사가 분신자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불만이 끓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무 개 나라 수백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든 촉매는 분명 부아지지 한 사람의 행동이다.
(786~787쪽)
틀림없이 베트남전에서 단일 사건으로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 미국으로 하여금 자신은 선한 세력이라는 인식을 마침내 떨쳐버리게 했던 일은 미라이학살이었다.
1968년 3월 16일, 한 미국 중대가 윌리엄 캘리 주니어 소위의 명령에 따라 미라이라는 마을에서 비무장 민간인을 공격했다. 중대는 석 달 동안 베트남에 있었지만 적과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래도 부비트랩과 지뢰에 부대원 28명이 죽거나 다쳐서, 총 중대원 수가 백 명가량으로 줄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흔한 해석은 그들이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얼굴 모를 적을 진짜 얼굴들과 연결 짓고자 하는 욕구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반면 당시의 공식적 논리는 미라이 마을이 베트콩 전사들과 민간인 동조자들을 숨겨주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거의 없다. 참가한 군인들 중 일부는 베트콩만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보고했지만, 다른 군인들은 가리지 말고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우물을 망가뜨리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보고가 상충하지만, 아무튼 그뒤에 일어난 일은 흔한 표현마따나 고통스러운 역사로 남았다. 미군은 아기와 노인도 포함하여 비무장 민간인 350~500명을 죽였다. 시체를 훼손하고 우물에 처박았다. 오두막과 밭에 불을 질렀다. 많은 여성 주민을 집단 강간한 뒤 죽였다. 엄마 품에 숨어 있던 아이들에게 캘리가 직접 총을 쏘는 걸 봤다는 보고도 있다. 적의 응사는 없었고, 마을에 징병 연령 남성은 없었다. 그것은 성경 수준의, 로마제국 수준의, 십자군 수준의, 바이킹 수준의······ 파괴였다. 다만 이 파괴는 사진으로 남았다. 미라이학살이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 미국 정부가 사선을 은폐하려고 용썼고, 캘리에게 겨우 3년 가택연금형을 내렸다는 점이 더 경악스러운 대목이다.
미군 병사들이 학살에 다들 똑같은 수준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결국에는 총 26명이 고발되었고, 그중 캘리만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나머지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게 법정의 명령이었다).[*살해에 가담했던 이들 중 두 명이 ���중에 자살했다. 스티븐 브룩스 소위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베트남에서 자살했다. 바나도 심프슨 일병은 몇 년 뒤에 자살했는데,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열 살 아들이 동네의 십대들이 쏜 유탄에 맞아 죽는 걸 본 것이었다. 심프슨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내 품에서 죽었다. 그때 본 아이 얼굴은 내가 죽였던 아이의 얼굴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사람들을 죽인 벌을 받는구나.“ 그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심하게 앓았고, 집에서 창문을 죄 막은 채 몇 년 동안 은둔하다가 세번째 자살 시도에 성공했다.] 폭력에 대한 문턱값은 개인마다 달랐다. 한 병사는 한 여성과 그 자식을 죽이고서는 더는 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또다른 병사는 민간인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을 거들었지만 발포는 거부했다. 명령에 대놓고 거역한 병사들도 있었다.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거나 쏴버리겠다는 협박을 받고서도 그랬다. 그중 한 명인 마이클 번하트 일병은 명령을 거역하며 윗선에 보고하겠다고 대들었다. 나중에 장교들은 그를 더 위험한 순찰조로 보냈다. 그가 죽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학살을 멈춘 세 남자가 있었다. 예상 가능하게도, 그들은 아웃사이더였다. 앞장선 사람은 25세의 휴 톰프슨 주니어 준위였다. 그는 글렌 안드레오타, 로런스 콜번과 함께 헬리콥터를 몰고 있었다. 어쩌면 톰프슨이 이른바 ‘눈물의 길’ 죽음의 행군에서 살아남은 아메리카원주민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의 독실한 부모는 1950년대 조지아주 시골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했다. 콜번과 안드레오타는 가톨릭 신자였다.
톰프슨과 두 승무원은 베트콩과 싸우는 보병을 도울 생각으로 미라이 마을로 날아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전투의 증거가 아니라 민간인들의 시체였다. 처음에 톰프슨은 마을이 공격당하고 있어서 미군이 주민들을 돕는 줄 알았지만, 누가 공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헬리콥터를 내렸고, 데이비드 미첼 미군 병장이 도랑에 처박힌 채 울부짖는 민간인 부상자들에게 총을 쏘는 모습과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가 한 여성을 직사로 죽이는 모습을 보았다. 톰프슨은 누가 공격하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캘리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톰프슨보다 계급이 높았던 캘리는 그에게 닥치고 제 할일이나 하라고 말했다.
톰프슨은 한 벙커에 옹송그리며 모여 있는 여자들, 아이들, 남자 노인들에게 미군들이 공격 태세로 다가가는 걸 보았다.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뒤 그 순간을 돌이킬 때, 톰프슨은 그 병사들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그러니까 그 순간에는 그들이 내게 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 그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들은 적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어질어질할 만큼 강인하고 용감한 행동을 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살펴본 우리/그들 범주화의 이야기를 한순간에 몽땅 바꿔놓을 수 있는 행동이었다. 휴 톰프슨은 마을 사람들과 군인들 사이에 헬리콥터를 착륙시키고, 기관총을 제 동료 미국인들에게로 향한 뒤, 만에 하나 그들이 주민들을 더 해치려들 때는 가차없이 쏴버리라고 두 승무원에게 지시했다.[*톰프슨은 동료 헬리콥터 조종사들에게 무전을 보내어 생존자들을 병원으로 이송하라고 말했다. 안드레오타는 도랑에 쌓인 시신들을 헤치면서 살피다가 기적적으로 다치지 않은 네 살 아이를 구했다. 톰프슨은 자신이 본 것을 상관들에게 보고했고, 그들은 더 윗선으로 사건을 알렸다. 그러자 소탕 작전을 지시했던 지휘관은 이후 이웃 마을들에서 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작전을 취소하고 사태를 덮기 시작했다. 안드레오타는 3주 뒤에 전투중 사망했다. 콜번과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선 톰프슨은 군대면 정부며 언론이며 가리지 않고 어디에든 제보하려고 애썼고, 마리아학살이 대중에 알려지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하원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멘델 리버스 의원은 캘리의 기소를 막고 대신 톰프슨을 반역죄로 기소하려고 시도했다. 톰프슨은 캘리를 재판하는 법정에서 그에게 불리하게 증언했고, 그후 오랫동안 살해 협박을 받았다. 군대가 톰프슨과 콜번의 행동을 기린 것은 그로부터 30년이나 지나서였다. 톰프슨은 2006년에 죽었다. 콜번이 그의 임종을 지켰다.]
자, 우리는 한 개인이 충동적 행동으로 20개국의 역사를 바꿔놓는 걸 보았다. 한 개인이 수십 년 묵은 미움을 극복하여 화해의 촉매가 되는 걸 보았다. 옳은 일을 해내기 위해서, 그동안 훈련으로 습득한 반사반응을 철저히 억누른 사람들을 보았다. 이제 마지막 사람을 볼 차례인데, 나를 가장 크게 감화시키는 이는 바로 이 사람이다.
1725년 출생한 영국성공회 사제 존 뉴턴이 그 사람이다. 음, 썩 흥미롭지 않은걸. 그는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사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아, 괜찮네. 레너드 코언의 <할렐루야>와 더불어 늘 나를 감동시키는 노래다. 뉴턴은 또한 노예제 폐지론자였고, 윌리엄 윕버포스가 노예제를 불법화하고자 대영제국 의회에서 싸울 때 그 조언자였다. 좋다, 점점 좋은걸. 이제 결정적 사실을 알 차례다. 뉴턴은 젊을 때 노예선 선장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이런 시나리오잖아. 한 남자가 노예무역으로 돈을 벌다가 별안간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깨우침을 떠올리고, 그래서 우리/그들 범주화가 극적으로 달라지고, 그의 인간성이 극적으로 확장되며, 그가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을 보상하고자 극적으로 헌신한다는 결론. 5장에서 보았던 신경가소성 현상이 뉴턴의 뇌에서 맹렬하게 펼쳐지는 모습이 눈에 선할 지경 아닌가.
현실은 그와는 사뭇 달랐다.
뉴턴은 선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11세부터 아버지를 따라 바다에 나갔다. 18세에 강제로 해군에 보내졌다가 탈영을 시도한 뒤 채찍질형을 받았다. 간신히 군대를 빠져나온 그는 서아프리카 노예선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아, 자신의 경험과 노예들의 처지가 비슷한 것을 목격하고는 번득 계시가 떠올랐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는 노예선에서 일하면서 주변 모두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그를 한 노예 상인과 함께 현재의 시이라리온에 내던져두고 갈 정도였다. 노예 상인은 뉴턴을 제 아내에게 노예로 주었다. 그는 여기서도 구출되었지만, 그가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던 배가 엄청난 폭풍을 만나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뉴턴은 신에게 호소했고, 배는 가라앉지 않았으며,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리고 또다른 노예선에서 일하기로 계약했다. 이제 알겠네, 그는 신을 찾아냈고, 몸소 노예가 되어보았으며, 그래서 문득 노예무역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던 거지.
아니었다.
그는 노예들에게 약간의 공감을 내비쳤고, 복음주의로의 개종에 점점 더 진지해졌다. 결국 그는 어느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고, 6년 더 일하다가 그만두었다. 마침내 그가 제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 거로군!
역시 아니었다.
그가 그 일을 그만둔 것은 험한 행해로 건강이 나빠져서였다. 그는 이후 징세원으로 일했고, 신학을 공부했으며, 영국성공회 사제에 지원했다. 그리고 벌어둔 돈을 노예무역 사업에 투자했다. 뭐라고? 이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그는 설교와 목회로 알려진 인기 있는 사제가 되었다. 찬송가 가사를 썼고, 가난하고 짓밟힌 자들을 대변했다. 그러던 중 어느 시점에 노예무역 투자를 그만두었다. 어쩌면 양심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더 나은 투자처가 나타나서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여전히 노예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마침내 노예제를 비난하는 소책자를 낸 것은 노예 상인일을 그만둔 지 34년 뒤였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비열한으로 산 시간이 그리 길었다. 뉴턴은 노예제의 참상을 몸소 목격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 그 가해자였다는 점에서 노예제 폐지론자들 중 드문 경우였다. 그는 결국 영국에서 으뜸가는 노예제 폐기론자가 되었고, 1807년 영국이 노예무역으로 금하는 순간을 살아서 목격했다.
(789~795쪽)
이처럼 적군 간에 공통의 유대를 발견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백 년 남짓 전, 그런 사건 두 가지가 놀랍도록 대규모로 벌어졌다.
제1차세계대전이 낳은 좋은 결과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전쟁으로 세 제국이 무너짐에 따라 발트해, 발칸반도, 동��럽 사람들이 독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 그 전쟁은 1500만 명이 무의미하게 학살된 사건일 뿐이었다. 모든 전쟁을 끝낸 전쟁은 모든 평화를 끝낸 폐허의 평화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유럽이 수백 년간 무의미한 갈등에 청년들을 희생시킨 사례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제1차세계대전의 수렁에서 두 가지 희망의 사례가 탄생했다. 더 나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서 말하는데, 거의 기적적인 사건들이었다.
첫번째는 1914년 크리스마스 정전이었다. 시작은 참호 전선의 양측 장교들이 조심스럽게 상대의 언어로 “쏘지 말라”고 외친 뒤 무인 지대에서 만난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만찬중에는 적대행위를 일시 중지하고 시신도 회수하자는합의에서 시작된 정전이었다.
그로부터 일이 퍼졌다.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사실인바, 양측 병사들은 무덤을 파기 위해서 서로 삽을 빌렸다. 그다음에는 함께 무덤을 팠다. 그다음에는 함께 장례 예배를 가졌다. 그러다보니 음식, 음료, 담배를 교환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무장하지 않은 병사들이 무인 지대로 몰려나와서 함께 기도하고 캐럴을 불렀으며, 저녁을 함께 먹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적군 병사들끼리 단체사진을 찍었고, 단추와 헬멧을 기념품으로 교환했고, 전쟁이 끝나면 만나자고 약속했다. 가장 유명한 사실은 급조한 공으로 축구 시합을 치렀다는 것이다. 점수는 남아 있지 않지만.
한 역사가가 기록한 오싹한 일화도 있다. 어느 독일 병사가 집에 보낸 편지에서 정전을 이야기하면서 모두가 참여한 건 아니라고 말했는데, 동료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한 그 낯모르는 상병의 이름은······ 히틀러라고 했다. 하지만 800킬로미터의 참호전선 중 대부분에서 정전은 크리스마스에 종일 이어졌고, 종종 새해 첫날에도 벌어졌다. 나중에는 장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협박해서야 모두가 싸움으로 돌아갔고, 병사들은 적군들에게 전쟁을 무사히 나가라고 빌어주었다. 충격적이고, 감동적이고, 가슴 아픈 이야기다. 간헐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다. 시신을 회수하기 위한 짧은 크리스마스 정전조차도 군사재판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1914년에는 왜 정전이 가능했을까? 참호전의 독특한 속성상, 병사들은 매일매일 적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전부터 전선 너머로 친근한 악담이 오가곤 했고, 희미한 유대가 형성되었다. 게다가 반복된 접촉은 ‘미래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정전을 배신했다가는 상대가 가차 없이 복수하리라는 예상이 들었던 것이다.
모두가 유대기독교 전통과 서유럽 문화를 공유했다는 점도 성공의 한 요소였다. 많은 병사들이 상대의 언어를 알았고, 상대국에 가본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인종이 같았다. 적을 ‘프리츠’(제1차세계대전 때 연합국이 독일 병사를 부를 때 쓴 명칭―옮긴이)라고 부르며 놀리는 것은 베트남전에서 미군들이 베트남���을 ‘슬랜트‘(동남아시아인을 부르는 멸칭으로, 눈이 가늘고 치켜올라갔다는 데서 온 이름―옮긴이), ‘구크‘(원래 미국인이 동남아시아인을 부르는 멸칭으로, 한국전 때 한국인에게도 쓰였다. 어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옮긴이), ’딩크‘(어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국인이 동남아시아인, 특히 베트남인을 부르던 멸칭―옮긴이)라는 유사 종분화적 멸칭으로 부른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주로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정전이 벌어졌던 점을 설명하는 요소들도 있다. 제 땅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프랑스인과는 달리, 영국인은 독일인에게 그다지 악감정이 없었을뿐더러 보통 자신들이 역사적 주적이었던 후방의les derrières 프랑스인을 구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전중에 영국 병사들은 독일 병사들에게 사실 우리는 모두 프랑스인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얄궂게 말하곤 했다. 한편 우연히도 대부분 색슨인이었던 독일 병사들은 앵글로색슨인인 영국 병사들에게 친족적 친근함을 드러내면서 사실 우리는 독일의 밉상 지배 집단인 프러시아인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상부가 정전을 승인했다는 점일 것이다. 보통 장교들이 협상을 주도했고, 교황 같은 인물들이 정전을 요청했으며, 누가 뭐래도 지상의 모든 인간들을 향한 평화와 선의를 상징하는 축일이었다.
크리스마스 정전이 우리의 첫 사례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1차세계대전에서는 그보다 더 기적적인 사건이 있었다. ’공존공영’ 현상이라고 명명된 이 사건은 참호전의 병사들이 한마디 대화 없이도, 공유하는 축일 없이도, 장교들과 지도자들의 허가 없이도 반복적으로 안정된 정전 상태를 진화시켜낸 것이었다.
어떻게 그랬을까? 역사가 토니 애슈워스가 『참호전: 1914~1918』에서 적었듯이, 그 일은 대개 수동적으로 시작되었다. 양측 병사들은 비슷한 시각에 밥을 먹었고, 그때는 총이 잠잠했다. 누구를 죽이거나 죽임당하자고 저녁식사를 중단하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는가? 날씨가 끔찍한 날도 그랬다. 그때는 모두가 최우선 관심사가 범람한 참호나 얼어죽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호 자제는 미래의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에서도 생겨났다. 식량을 나르는 마차 행렬은 포대의 쉬운 표적이었지만, 상호 포격으로 이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 건드리지 않았다. 변소도 마찬가지로 무사했다.
이런 정전은 병사들이 어떤 행동을 하지 않기로 선택함으로써 생겨난 것이었는데, 반대로 뚜렷한 행동으로써 구축되는 정전도 있었다. 어떻게? 우리 군 최고의 저격수를 데려다가 상대 적진 근처의 폐가 벽에 총알을 박아넣게 하자. 똑같은 지점을 연거푸 맞히게 하자.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일까? “우리 저격수가 얼마나 뛰어난지 봤지, 이 친구는 너희를 겨냥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어 자, 어떻게 생각해?” 그러면 상대��도 최고의 저격수를 데려다가 똑같은 행동을 하곤 했다. 서로 상대의 머리 위로 쏘자는 합의가 맺어진 것이다.
이때 핵심은 의례화였다. 무의미한 표적을 거듭 명중시키는 행동을 매일 반복함으로써 하루하루 평화에의 약속을 갱신하는 것이었다.
공존공영 정전은 약간의 동요를 버텨낼 수 있었다. 가끔 병사들은 당분간 진짜로 쏴야 한다는 신호를 상대편에 보냈다. 장교들이 오는 날이었다. 이 체제는 위반도 이겨낼 수 있었다. 만약 웬 투지 넘치는 신병이 상대편 참호에 포를 발사하면, 대개의 관행은 상대편도 이쪽의 중요한 표적을 노려서 두 발을 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는 평화가 재개되었다(애슈워스가 들려준 일화가 있다. 독일군이 뜻밖에 영국군 참호로 포를 발사했다. 곧 한 독일 병사가 외쳤다. “진짜 미안합니다. 아무도 안 다쳤기를 바랍니다. 우리 잘못이 아니라 망할 프러시아 대포 문제입니다.” 영국군은 두 발의 포를 발사하여 호응했다).
공존공영 정전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후방의 고위 장교드은 반복적으로 개입하고, 부대를 회전시키고, 군사재판을 들먹여서 으르고, 적군 간에 생겨난 공통의 이해에 대한 감각을 산산조각낼 게 분명한 육박전이 따를 습격을 지시했다.
정전이 구축되는 과정은 진화적이다. 처음에는 저녁식사중에는 쏘지 말자는 것처럼 당장은 이득이 있는 저비용 제안이었던 것이 차츰 더 정교한 제약과 신호로 발전했다. 정전 위반을 다루는 방식이 변형된 팃포탯이었따는 점도 눈에 띈다. 기본적인 협력 성향, 위반에 대한 처벌, 용서의 메커니즘, 명확한 규칙 등의 요소가 꼭 그렇다.
사회적 세균들처럼 우리도 협력을 진화시킬 줄 안다니, 만세! 하지만 협력적 세균들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심리다. 애슈워스는 공존공영에 참여했던 병사들이 적을 보는 심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꼼꼼하게 탐구했다.
애슈워스는 그 변화가 단계적이었다고 말한다. 첫째로 일단 상호 제약이 생겨나면, 적도 우리처럼 사격을 중지할 동기가 있는 합리적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그들을 신의 있게 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난다. 처음에는 이것이 순수하게 이기적인 이유, 즉 우리가 합의를 위반하면 상대도 되받아 위반하리라는 이유에서 생겨난 의무감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것이 약간은 도덕적인 의무감으로 발달한다. 자신을 신의 있게 대하는 상대를 배신하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꺼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전의 구체적 동기에서 깨닫는 바도 있다. “와, 저녁식사를 방해받고 싶지 않은 건 저 사람들도 똑같네. 저 사람들도 이 장대비 속에서 싸우고 싶어하지 않네. 저 사람들에게도 골칫덩어리 장교들이 있네.“ 스멀스멀 동지애가 생겨난다.
이 과정은 더 충격적인 현상으로 이어진다. 교전국의 전쟁 체제들은 늘 그렇듯이 상대에 대한 유사 종분화적 악성 선전을 쏟아낸다. 하지만 애슈워스가 병사들의 일기와 편지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적에 대한 적대감을 가장 적게 드러낸 것�� 오히려 참호전 병사들이었다. 적대감은 전선에서 멀어질수록 커졌다. 애슈워스는 한 최전선 병사의 말을 인용했다. ”고향에 있는 사람들은 적을 욕하며, 모욕적으로 희화화한다. 하지만 나는 괴물처럼 묘사된 독일 황제 그림에 진절머리가 난다. 여기 전장에서는 용감하고, 숙련되고, 재주 좋은 적을 존중하게 된다. 그들도 고향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왔고, 우리처럼 진흙탕과 비와 총알을 견뎌야 한다.“
우리와 그들은 유동적일 수 있다. 만약 누가 당신이나 당신의 전우들에게 총을 쏜다면, 그는 분명 그들이다. 하지만 그 밖의 순간에는 그보다도 쥐와 이, 식량에 핀 곰팡이, 추위가 그들이었다. 본부에 편하게 있는 장교들, 다른 참호전 병사의 말을 빌리자면 ”저멀리서 추상적인 전략으로 우리를 죽이는 놈들“도 그들이었다.
이런 정전은 영원할 수 없었다. 전쟁의 최후 국면에서 영국 고위 사령부가 소모전이라는 악몽 같은 전략을 채택함에 따라, 공존공영 정전은 자취를 감췄다.
(797~802쪽)
행동 - 로버트 새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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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yopos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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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구했다
이 날아갈것같은기분. 잊지말고 다시는 안해. 한사람한테 매달리고 약간 찌질해보이기도하고 불쌍하기도했던 한달. 아픈사람이 뭐하는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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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ungbumyi · 8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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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월)
요새는 할일이 없다. 곧 바빠질 예정이긴 한데 이 틈을 타서 이것저것 돌아볼까 한다.
업무적으로는, 22.1월에 울산에서 인천으로 전보와서 근무 중이다. 바쁠 때가 많았는데 그만큼 베네핏은 없었지만 다른 직원들이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다른 직원의 인정 외에는 딱히 기대할 것도 없는 직종이라 좋다. 인사 규정상 25.2월에는 인천, 경기, 강원 중에 어느 한 곳으로 나가야 된다. 염두에 둔 곳과 업무는 있는데 부디 그렇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감정, 내 마음에 대해서는 20대에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 다른 사람이 나를 보는 시각, 내가 어떻게 보여질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이런 부분에 대해 마음의 에너지를 많이 들였던 것 같다. 30대가 되니 일부러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어쩌면 이게 고집이 되고, 아집이 되려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전혀 안하니 독선적이게 될 수도 있겠다. 경계하도록 해야겠다.
자산(?)적으로는, 22.8월에 결혼을 1년여 앞두고 전용 59제곱미터 신축 아파트 반전세를 구했다. 23.9월에 결혼하고, 24.8월에 전용 74제곱미터 5년된 아파트 전세로 이사갔다. 전세금액은 정확히 두 배였다. 이 이사는 우리 둘의 금전적 결합이어서 의미도 있고, 기분도 좋았다. 올해 9월부터는 아내에게 20만원 정도씩 송금하고 있다. 내년 3월부터 한 가지 정리되는 게 있는데 그때부터는 50만원, 일정기간 이후에는 70만원, 100만원 단계적으로 늘려갈 생각이다. 크게 이동이 없는 한 인천에서 오래 살 것 같다. 구매할 집은 잘 살펴보자.
앞으로, 뭐든 꾸준히 하는 것밖에는 없는 것 같다.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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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azypony · 4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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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아끼려면 집에가서 저녁을 해먹어야 하는데.. 집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고, 집에 가면 너무 쓸쓸해져서 집에 들어가고 싶지가 않다. 어제도 일찍이 집에 들어갔지만 너무 우울해져서 화장실 청소랑 주방 청소를 했다. 나 청소하는거 좋아하는데.. 집이 워낙 구옥이라 줄눈은 아무리 닦아도 더럽고 곰팡이도 제대로 닦이지 않아 너무 우울했다.
본가에서 지낼 때는 자가의 안정감을 몰랐다 .. 진짜 바보 같지만 쭉 엄마아빠의 집에서 살아왔고, 죽을 때까지 그냥 엄마빠집에 눌러붙으면 될 줄 알았고 죽어도 여기서 죽지 뭐. 마음이 있었다. 결혼 생각도 없겠다, 거주 불안도 없겠다 바보 같이 돈을 제대로 모으지도 않다가 아빠가 본가를 팔아야할 정도로 빚을 져서 엄마빠 이혼 하고 집 날리는 엔딩 맞이 ㅋ 사람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이렇게 자취를 시작하게 될 줄이야 .. 모은돈 없이 자취하기란 .. 최악이었음 솔직히 노숙자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겨우 중기청으로 대출받아 전세를 구했다. 그런데 당시 전세 매물도 없어서 너무 너무 구옥에 왔고 맘에 들지 않아 죽겠다 HF로 대출 받았으면 나았으려나 ..? 그럼 네가 모은 돈이 더 많던가~ 가 답이다 그치 이게 지금 내가 구할 수 있는 최대의 공간��었다 이걸 받아들이기란 쉽지가 않다. 육개월이란 시간동안 못받아들이는것도 참 문제인데 계약 종료가 도래되면 중기청으로는 목적물 변경도 안되는데 어뜩하지 ㅎ.ㅎ … 나처럼 이나이에 이렇게 모은돈 없이 사는 사람이 있을까?
요즘 만나는 이와는 관계가 애매한 상태로 만나고 있는데,, 넌지시 운을 띄우면 ‘진지하게 생각하고 만나고 있지 ~ 근데 나는 이제 나이도 있고 사귀면 결혼까지 생각 해야 돼 그래서 신중한거라 생각해줘 지금 연애만 할 순 없잖아’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가 너무 철없나보다 맞는 말이지 결혼을 고려하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서른 초중반엔 결혼을 염두해두고 연애를 하지.. 그런데 나는 결혼 생각도 아기 생각도 없고.. 현실적인 요건도 결혼이란걸 고려할 수 없는 재정상황이다. 사실 연애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가벼운 관계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다. 내가 좀 더 재정적으로 안정적이었다면 적극적으로 만나자고 할 수 있었을까? 글쎄.. 난 애초에 결혼 생각이 없었는걸 아니 .. 어릴 때부터 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고 싶었으나 .. 실패할까봐 두려웠다. 그럼 내가 무너질 것 같아서 차라리 겪지 않겠다 다짐한 것인데 .. 이러한 것들에 대한 무너짐이 작게 작게 계속해서 일어나는 요즘이다 본 가정의 해체, 주거 불안, 재정적 불안, 새로운 관계에서 오는 불안, 그 관계에서 맺어가는 커뮤니케이션에서 오는 자괴감 같은 것들 .. 이런 것들을 알게된지 3주밖에 되지 않은 이에게 말할 수 없으니 말들을 많이 삼키게 된다. 그는 내게 비밀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한다. 오픈할 순 없잖아? 다들 각자 어깨에 짐도 있는데 남이 갑자기 자기 어깨의 짐을 짠! 보여주면 다 도망갈 것 같은데 나는 뭘 얼만큼 오픈하고 뭘 얼만큼 숨겨야 하는걸까? 어디까지 열어도 되는걸까? 어쩌면 다시 문을 꽁꽁 닫고 고립으로 걸어들어가는게 맞지 않을까?
그럼 나는 다시 또 외로워지겠지 ..? 그게 누구든이더라도 타인과의 교감이 필요했던 내게.. 이런 불안정한 관계(내가 만들어내는 프레임일지도 모른다) 는 독일텐데 함께인 그 순간만큼은 너무 편안하고 안정감이 든다. 어쩌면 보통의 마음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잘 꾸려나갔을지도 몰라.. 나는 다시 고립 되어야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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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focus75 · 24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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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jesus-jesus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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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김문수 처럼/차떼기 한나라당 김문수가 구했다 - https://youtube.com/watch?v=RAKgZr_BzXQ&si=rwJgnjfutQMjbR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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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lyouusetoloveme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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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끔 너무 행복해서 두렵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너를 조금 더 힘껏 끌어안았던 것 같다.
2. 내가 너를 만난 것이 그가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내가 그 신에게 경배를 드리고 기도를 바칠 필요는 없었다.
3. 너는 나를 온전해지게 하는 가족이었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단 한 명의 친구였으며, 주기적으로 긴장감을 불어 넣어주는 지인이었고, 내가 살아보지 못 한 좀 더 나은 삶이었다. 나는 너라는 한 사람 속에서 그 모두를 찾고 구했다.
4. 연인들이 서로에게 하는 어떤 말들, 이를테면 나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피부색이 무엇이든 어디서 왔든 관계없이 너를 사랑해, 같은 말들을 가희 모두 너에게.
5. 이 세상 모든 단어들이 다 합쳐져 조잡스러운 꼴을 하고 있어도 나에겐 네가 이만큼 큰 사람이라는 걸 수학 공식처럼 증명할 수 있다면 다 끌어오고 싶을 만큼 난 딱 그만큼 너를 사랑해
To. 너
From.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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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hsetools2022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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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CISO와 벤더의 ‘어긋난’ 관계, 어떻게 해야 회복될까?
CISO의 받은 편지함에는 사이버보안 분야의 판도를 바꿀 기술을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벤더 홍보물이 가득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벤더라면 보안 및 위험 관리의 문지기인 CISO에게 다가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을 것이다. 양측 모두 각자의 입장이 있다. CISO는 효과적인 솔루션이 필요하고, 벤더는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벤더와 CISO를 연결하는 프로세스가 비효율적이고 어색해졌으며, 심지어 매우 불편한 상황이 됐다. 필자는 이런 문제를 직접 경험하면서, 더 깊이 파고들어 ‘어긋난 관계’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래서 엔터프라이즈 브라우저 기업 아일랜드(Island.io)의 영업 리더인 키엘 호건에게 의견을 구했다. 키엘은 이 프로세스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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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2alpaca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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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쿠버 출발이 8시인데 6시에 일어나서 여유부리다가 시간 계산 잘못함을 깨닫고 부랴부랴 7시에 출발, 7시 20분 공항 주차장 도착, 30분에 터미널 도착. 다행히 시큐리티 줄이 없어서 바로 통과, 무사히 비행기 탐. 오매…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건가. 하마터면 못탈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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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쿠버에 온 이유는 집 보러. 정확히는 집이 아니라 방 보러다. 직장에서 승진을 하게 되었는데 캘거리엔 없는 포지션이라 고민 잠깐 하고 결국 벤쿠버 콜! 외침 ㅎ 고생 각오하고 벤쿠버행을 선택했다. Comfort zone을 벗어나는 건 잘한 선택이겠지!? 위안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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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쿠버는 아시아 갈 때 공항 경유하거나 당일치기 여행으로 홍콩출신 친구들이랑 딤섬 먹고 윈터멜론 케이크 산 기억밖에 없는데 막상 살아야된다 생각하고 보니 엄청난 집값에 입이 떡! 그리고 뭐랄까 사람들의 주택 선호 취향이 캘거리랑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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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이라 그런가 런웨이가 바쁘더라는. 간만에 보는 웨젯 디즈니 비행기. 귀욥귀욥.
일하는 분야 특성상 지역 옮기는 거야 자주 있는 일이라 당분간은 캘거리 집에 있고 벤쿠버 커뮤팅 할 것 같다. 완전 이사 여부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결정할 일이다. 나는 여태 룸메이트를 겪어 본 적이 없다. 이번에 방 찾으면서 광장히 흥미롭고 신선한(?) 경험을 했는데 수 많은 방을 알아보고 룸메를 찾는 과정에서 에피소드들이 있었는데 몇 개 적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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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제츠 새로운 페인트. 첨엔 왠 군대 스탈인가 했는데 자꾸 보니 멋져보인다 ㅎ
1. 나에게 신넘버, 신분증 사진 요구하는 거. 사기꾼들 어이가 없어서 바로 차단함. 간혹 국적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는데 왜 이걸 물어보지? 했는데 친구 말이 그건 아마도 신분 상태에 따라 비자문제 있을 수 있어서 그거 때문이 아닐까 해서 수긍함.
2. 아주아주 디테일한 요구사항들. 먼저 채팅으로 인터뷰를 두번 거치고 시간 잡아 줌 미팅을 하고 이후 직접 방을 볼 약속을 잡는 경우였다. 채팅 인터뷰 하면서 각종 하우스 룰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나도 이렇게 세부사항 많은 룰 좋아한다, 나 역시 상대에게 같은 걸 기대 할 수 있으니까! 라고 솔직하게 이야기 했더니 짧은 침묵 뒤 나에게 다른 방 찾아보라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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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올때는 에캐 탐. 로키산맥만 건너면 집에 다 온거다 이거예요😆
이러저러한 일을 거쳐 결국은 한 두 다리 건너 아는 사람 통해 방 구했다. 위치나 가격도 중요하지만 같이 사는 사람들을 믿을 만한지도 중요하니까. 역시나 인맥이 짱인듯 ㅎㅎ 담주에 한번 가서 간단하게 짐 옮기고 11월부터 새 일 시작 예정. 아싸!! 나 자신 화이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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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kss7 · 6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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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구심을 자아낸다. 김계장은 남두헌의 진정한 심복인 것인지, 이하늬를 습격한 이유는 무엇인지 의심이 깊어진다.# 고마르타 “납치되든 죽든 그냥 모른 척해주세요”지난 8회에서 미스터리한 안경녀가 우마경찰서 서장 고마르타인 것이 밝혀졌고, 고마르타는 김홍식을 긴급체포해 다발성 경화증 증세가 악화돼 위험한 김해일을 구했다. 그러나 경찰서에 돌아온 고마르타는 어차피 영장 발부도 거부��할 거고, 김홍식도 금방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날 거라면서 좌절했고, 자신은 어차피 ‘식물 서장’이라며 깊은 패배주의를 드러냈다. 이에 더해 고마르타는 김홍식 부하들에게 납치당할 뻔한 자신을 구해준 김해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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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xzsp · 7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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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이용료결제 누구보다 아끼는
백도앵은 연습실에 앉아 있었다. 긴장이 감도는 연습실 안, 백도앵의 눈은 허영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단장님하고 상의해 봤는데, 네가 달비를 연기할 적임자인 것 같다," 백도앵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허영서는 숨을 삼키며 그를 바라봤다. "달비는 아사달의 재능을 질투하는 가다끼처럼도 보이지만, 동시에 아사달의 재능을 누구보다 신용카드깡 아끼는 조력자이기도 해. 이런 인물의 내면을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너밖에 없어. 어때? 하고 싶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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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눈빛에 결의가 차올랐다. "네, 저 할래요." 그의 대답에 백도앵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 우리 좋은 무대 올려보자." 백도앵의 격려에 허영서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자신이 맡은 달비라는 역할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과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연 준비가 한창 진행되던 중, 윤정년은 홍주란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편지는 간결했지만, 윤정년의 가슴을 깊이 울렸다. '정년아, 넌 나에게 꿈이었고 그리움이었으며, 하나뿐인 왕자님이었어. 난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지만, 널 만나기 전으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거야. 고마워. 이제 모두의 왕자님이 될 너를 언제나 응원할게.' 윤정년은 편지 속 홍주란의 진심을 느끼며, 자신의 길을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드디어 공연 당일, 매란국극단의 무대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서용례, 윤정자, 패트리샤 김, 한기주 모두 극장에 앉아 공연을 지켜보았다. 패트리샤 김은 옆에 앉은 서용례에게 말했다. "정년이 제자라서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서용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가 윤정년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패트리샤 김은 알지 못했다. 그녀의 웃음 속에는 자부심과 안타까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허영서의 연기는 그날 밤 특별했다. 달비의 복잡한 내면, 아사달에 대한 질투와 사랑, 그 애증의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그의 연기는 객석을 울리고, 마침내 막이 내려오자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 중 한기주는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감동을 느꼈다. 허영서는 무대에서 내려온 후 그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한기주를 마주했다. 한기주는 말없이 허영서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마음은 무언가 더 깊은 곳에서 이어져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날 밤, 허영서는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 콘텐츠이용료결제 문제였다. 공연�� 끝나고 그의 휴대전화로 날아든 문자 메시지 한 통. 낯선 금액이 청구된 것을 보고, 그는 신용카드깡 당황한 마음에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연 준비로 정신없던 차에, 이런 결제 메시지가 왔어요." 윤정년이 곁에서 그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누군가가 너의 정보로 결제를 시도한 것 같아. 즉시 고객센터에 연락해서 확인해봐야 해." 윤정년의 말에 허영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무대 위에서는 강인했지만, 이러한 일상적인 문제에는 아직 어설픈 청년이었다.
그는 곧바로 고객센터에 연락했고, 다행히도 잘못된 결제임이 확인되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작은 해프닝은 그에게 현실의 무게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었다. 예술과 무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없는 삶의 여러 측면들이 그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공연이 아무리 화려해도, 현실의 문제들은 여전히 그와 함께였다.
그날 밤, 허영서는 무대에서의 성취감과 일상 속 문제의 혼란스러움을 동시에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결국 그의 인생을 이루는 중요한 조각들이었다. 예술과 현실, 그 양극을 오가며 그는 진정한 배우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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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hgkuikyu · 8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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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fgdfg · 8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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