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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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kyungil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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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장군 #봉오동전투 #돌아왔소 https://www.instagram.com/p/CSpOf8jJphB/?utm_medium=tumb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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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iyoung113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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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돌아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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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ja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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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 볼일 없는 상태를 이겨내야해. 슈크림라떼가 돌아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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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5kim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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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영혼, 그 둘만의 밀실(19禁)
http://www.clsk.org/bbs/board.php?bo_table=gisang_theologry&wr_id=599
- 방문에서 침대까지 (박진영) -
https://youtu.be/7829YhdkIyk
1. 몸과 마음이 들뜨는 봄 날 할렐루야, 교우님들 한 주간 잘 지내���습니까? 오늘 날이 참으로 좋습니다. 산으로 들로 소풍을 떠나고 싶은 그런 날입니다. 목사인 저의 마음도 이러한데 여러분들은 교회 오시는데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으셨겠습니까?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올해는 오시는 것이 조금 더디긴 합니다만 봄은 사람들의 잠자던 마음을 두드리고 청춘남녀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나 봅니다. 이런 봄의 장난(?)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사랑 그대!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그대! 어서 나오오. 겨울은 지나고 비도 그치고, 비구름도 걷혔소. 꽃 피고, 새들 노래하는 계절이 이 땅에 돌아왔소. 비둘기 우는 소리, 우리 땅에 들리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무화과가 열려 있고 포도나무에는 활짝 핀 꽃이 향기를 내뿜고 있소. 일어나 나오오. 사랑하는 임이여! 나의 귀여운 그대, 어서 나오오. (아 2:10-13) 요즘 우리들의 마음과 다를 바 없이 아가서의 시인 역시 봄날의 들뜬 그 마음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봄날이 찾아오고 꽃 피고 새들이 울자 이 시인은 들로 산으로 봄을 만끽하고자 연인을 부르고 있습니다. 봄날의 이런 장난으로 요즘 홀쭉해진 지갑을 어루만지는 교우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오는 청첩장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교우님들과 함께 몇 달 전 하다가 그만둔 사랑 이야기를 다시 꺼내볼까 합니다. 그 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남녀 간의 사랑의 구조를 잘 살펴보면 하나님과 우리 사랑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해서 오늘은 좀 더 심도 깊은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숙고해보고자 합니다. 특히 오늘은 남녀 간의 육체적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풀어가려다 보니 소개해드릴 노래 역시 참으로 외설스럽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의 정제된 이해가 필요합니다. 누차 말씀 드리지만 우리 교우님들처럼 신앙의 내공이 깊은 분들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설교입니다. 부탁말씀 드린다면 말씀의 본질과 정곡을 제대로 잡아 채셔서 오해 없이 함께 은혜 나누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노파심에 또 하나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육체적 사랑을 다룬다고 하면 사람들은 애정이 전혀 없는 육체만의 사랑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의 관성은 육체와 정신을 나누어 보는 습관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루는 육체적 사랑은 진한 애정과 깊은 사랑이 전제된 육체적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 없는, 강제적, ��무적, 자포자기적, 폭력적 육체적 사랑 등 비정상적인 육체적 관계는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교우님들은 절대 혼동하셔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혼동하게 되면 제가 설교자가 아니라 치한이 되고 맙니다. 2. 엉터리 사랑과 엉터리 기도 목회를 할 때의 일입니다. 어찌나 기도할 일이 많은지 늘 입에 기도를 달고 사는 것 같았습니다. 교우님들이 제 방을 두들기고 들어오면 영락없이 함께 기도한 후에 제 방을 나갔습니다. 예배 중에 목회기도는 매주 몇 번씩 하는 습관적인 일이고 심방, 개업, 장례, 결혼식 등 수많은 기도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벽기도를 가면 호주머니에서 교우님들을 하나씩, 둘씩 꺼내서 하나님께 그들의 간구를 중보 해야만 했습니다. 목회자로서 너무나도 당연한 기도생활이었습니다. 부교역자로 혹은 담임자로 이런 목회생활이 몇 년 반복되자 저는 기도장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우스갯소리로 이때의 제 모습을 기도자동판매기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심방이면 심방, 병원이면 병원, 장례면 장례, 개업이면 개업, 결혼이면 결혼, 상황에 맞추어서 버튼만 누르면 제 입에서는 유창하고 은혜로운 기도가 흘러나왔습니다. 새벽이면 또 이러한 기도를 반복하고, 그 반복이 연습이 되고, 그러다보니 어느 장소, 어떤 상황에 가도 두려움과 막힘없이 기도가 줄줄 나왔습니다. 선배 목사님들은 이것이 훈련이 잘 된 증거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 내면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많이 했건만 정작 저의 마음은 기도의 효과가 나타나기는커녕 오히려 공허해지기 시작했고 제 기도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 기도를 점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저는 교우님들을 위하고 목회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를 했지만 정작 제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과 단 둘이 만나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목회기도가 불필요하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목회기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목회기도 시간보다 몇 배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과 제 영혼, 단 둘이 독대하는 시간에 할애해야 하는 것을 그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초보 목회자는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교우님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제 기도생활을 대치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그 때 저의 기도는 그야말로 엉터리였습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사랑하는 임과 단 둘이 만나는 시간이 거의 없었던 저의 모든 기도는 중언부언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티브이에서 <연극하는 부부들>이란 제목의 시사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너무나 금슬이 좋았던 한 가정에서 화재가 났습니다. 안타깝게도 부인과 아이들이 화재로 숨지고 외출했던 남편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경찰의 수사결과 남편이 가족들을 해치고 화재로 ���장하기 위해 방화를 했던 것입니다. 이웃들은 경찰의 수사결과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다정했던 부부였는데 왜 저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까 이웃들은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부부는 이 모임 저 모임 함께 다니고, 친구들과 함께 여행도 가고, 자녀들의 학교도 함께 방문하는 등 집 밖에서는 다정한 부부로 위장했지만 아파트 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서로 남남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함께 잠을 자지 않는 것은 물론 집 안에서조차 핸드폰 문자로 대화를 나누었고 아이들이 잠이 들면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결국 이 부부는 무늬만 부부, 법으로만 부부, 남들 앞에서만 부부였지 실재적으로는 진짜 부부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저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외형적으로 목사입니다. 모태 신앙인이고 평생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목회자로서 뿐 아니라 가르치는 소명에서도 자랑할 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본가, 처가, 외가 모두 내로라하는 신앙인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이까지 수십 년간 직분감당, 교우들과 환우 돌보기, 헌금생활, 사회봉사 등등을 해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법적으로나 외형적으로 완벽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 하나님과의 사랑을 나누고 있지 않다면 위에 언급한 무늬만 부부처럼 저 역시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는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무늬만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무리 겉보기에 다정한 부부라도 그 부부에게 사랑을 나누는 밀실의 삶이 없다면 그 부부는 무늬만 부부입니다. 마찬가지로 남들 앞에서 아무리 은혜 충만한 기도를 잘한다 해도 밀실에서 하나님과 단 둘이 나누는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가 없다면, 영혼의 밀실이 없다면 그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갖는 통로, 그것을 우리는 기도라고 부릅니다. 3. 더듬으면 찾아지는 하나님 오늘 교우님들과 들어 볼 곡은 박진영의 6집 <The Game> 중의 “방문에서 침대까지”란 듣기 민망한 제목의 곡입니다. 교우님들이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성에 대하여 대단히 보수적인 나라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의 의식수준만 보수적일 뿐 성범죄, 성폭력, 성희롱, 섹스산업은 가희 세계 최고 수준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하튼 성을 공론화 하는 것에 매우 보수적인 우리나라의 실정 상 적나라하게 성을 묘사한 이 곡은 실험적일지도 모릅니다. 이 곡을 가지고 “예술인가 외설인가?”하는 진부한 문제까지 거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의 생각은 아무래도 외설 쪽에 가깝습니다만 예술인가 외설인가 하는 문제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어차피 대중예술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대중성 확보에 그 목적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하튼 이 곡은 한국 대중음악계의 창조적인 예술가이자 기획자인 박진영씨가 2001년 쓰고 부른 곡입니다. 이제까지 사랑노래라고 하면 대부분 영원한 마음, 자기 헌신, 행복, 이별, 배신, 눈물, 사랑의 결실 등과 같은 추상적인 감상을 표현하였다면 이 곡은 처음부터 직설적이고 외설적인 가사로 파격을 시도합니다. 좀 참으시고 잠깐 들어보겠습니다. 나와, 나와 놀아봐 나와, 나와 오늘 밤 방문에서 침대까지 안아주고 싶어 침대에서 바닥까지 떨어지고 싶어 머리에서 발끝까지 입 맞추고 싶어 저녁부터 아침까지 반복하고 싶어 노래를 들려 드리는 제 얼굴보다 교우님들 얼굴이 더 붉어지시는군요. 네, 그렇습니다. 참으로 듣기 민망할 정도로 이 곡은 노골적인 애정표현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내용이 사랑의 이유, 사랑하는 마음, 연인에 대한 깊은 애정과 존경,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다짐,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리라는 결단,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단지 육체적으로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넘쳐 납니다. 여하튼 정신적 사랑은 고질(?), 육체적 사랑은 저질이라는 등식으로 보면 적어도 이 곡은 외설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곡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한 번 해보았습니다. 제가 가장 듣기 거북한 소리 중에 하나가 “머리로만 믿으려고 하지 말고 마음으로 믿어라”는 말입니다. 대부분 이 말은 신학공부를 통해서 머리만 커져버린, 그래서 지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저 언술 자체도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 언술을 발화하는 발화자는 이미 머리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그 어떤 언술을 동의하며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조차도 번역과 해석을 거쳐 이해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머리가 개입하기 전에 그냥 느껴져서 알 수는 없는 것일까요?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행 17:27)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논쟁하면서 하나님은 더듬으면 찾아지는 분이라고 설파합니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언급입니다. 바울과 논쟁하던 사람들은 헬라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성서는 이들이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사람들이라고 합니다.(행 17:18) 이들은 세계의 진리와 신에 대하여 너무 많이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의 존재, 본질, 속성, 실존, 그리고 양태까지 전부 잘 알고 있었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의 존재는 이성적으로 매우 명확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에게 신은 만질 수 없는 매우 멀리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그들의 신 이해는 지극히 관념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관념적 신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에 와 닿는 그런 신이고 이렇게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그런 신이 진정한 신이라고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논리대로라면 우리가 만약 몸이 없다면 더듬을 수 없고, 더듬을 수 없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한 1년 4개월 가족과 떨어져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지옥 같은 외로움에 정신적으로 황폐해져가는 그런 시간들이었습니다. 전화통에 대고, 이 메일로, 편지로, 때론 선물로 저의 사랑을 표현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감질만 날 뿐이었고 사랑은 너무도 멀고 관념적이었습니다. 1년 4개월 만에 아파트 문을 열자 저의 막내 딸아이가 색동저고리를 입고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 녀석을 와락 안고 그 볼을 저의 볼에 대자 그동안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자식사랑이란 그 어떤 개념도 불필요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그 느낌 그대로 죽어도 좋겠다는 행복감만 밀려올 뿐이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그것 그대로 알게 되는 것이고 그 어떤 해석도 불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제가 몸이 없다면 이런 사랑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가끔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다, 예수님은 누구시다, 성령님은 우릴 어떻게 보호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부활한다, 천국은 존재한다, 등등 수많은 언술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어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언술들이 믿어지고 그 믿음이 뼈 속 깊이 사무치면 그것이 훌륭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끔 저 언술들에 대하여 회의가 옵니다. 그럴 때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간구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진정한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는 명제가 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 그 믿음과 현실적 사랑의 괴리감으로 인해 사랑 그 자체를 회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했던 사랑은 전부 참 사랑이 아니었다.”고 결론 내리게 되고 참 사랑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엔 여전히 참 사랑은 영원한 것이어야만 하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믿음을 갖기 원하는 사람들이 정작 삼위 하나님과 살을 맞대는 느낌 그 자체는 두려워합니다. 교회역사 속에서 신비적 경험이나 깊은 기도는 이런 이유로 늘 위험한 신앙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 왔습니다. 하나님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는 태도는 마치 “나는 우리 딸래미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내 딸이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식사랑은 본능이기 때문에. 죽도록, 사무치도록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라고 저 멀리 타국에서 수없이 되뇌이면서도 정작 볼비빔은 두려워하거나, 그 느낌 한번 못 가져 본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볼비빔의 사랑은 그 어떤 신학적 지식도, 이유도, 해석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느끼면 되고 그렇게 느끼는 순간 딸의 존재는 의심되지 않는 명확한 앎으로 체득됩니다.(따라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까? 하고 묻는 설교자는 정작 자신은 머리로만 믿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그 물음은 사실 자신에게 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하나님과의 사랑도 이렇다는 것입니다. 남녀 사이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몸으로 하는 사랑이 정신적인 사랑보다 결코 저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신적인 사랑이 자아도취에 빠질 우려가 더 큽니다. 우리는 몸으로 하나님을 느끼면 되는 것이고 느껴지는 순간 그 확신은 100% 입니다. 이것이 머리로만 믿지 않는 것의 의미입니다. 머리보다 가슴이 아니라 몸입니다. 3. 밀실의 구조: 영혼과 하나님의 주거 공간 그들 옆을 지나가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나의임을 만났다. 놓칠세라 그를 꼭 붙잡고, 나의 어머니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던 바로 그 방으로 데리고 갔다. (아가 3:4) 노래를 하는 저 여인은 사랑하는 임을 찾아 헤매다가 사랑하는 임을 만나자 마자 달아나지 못하도록 꽉 붙잡고 어머니의 밀실로 데려 갔다고 합니다. 박진영 역시 사랑하는 여성이 방문을 열고 밀실로 들어오도록 유혹합니다. 이리와 어서 문을 열고 들어와 여기 기다리는 나의 품으로 와 그럼 우리 사는 모습 속에서 밀실의 구조를 잠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교우님들의 밀실의 구조는 어떠합니까? 아주 커다란 창문이 있습니까? 커튼이 있나요? 방문은 항상 열려 있고 언제든지 밀고 들어올 수 있나요? 방문을 유리문이나 창호지문으로 만들었습니까 아니면 밀폐형으로 만들었습니까? 조명은 늘 밝은가요? 티브이나 아이들의 놀이 때문에 늘 시끄러운 거실과 차단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개방되어 있습니까? 말해봐야 잔소리가 되겠지요. 밀실은 거실의 커다란 창문 대신 배꼽 위에 올라오는 높은 창문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 집은 가난해서 없지만 밀실엔 반드시 커튼이 달려 있습니다. 최근 티브이를 보니까 밀실에는 붉은 색 커튼이 좋다고 합니다. 또한 밀실의 방문은 미닫이가 아닌 여닫이이고 잠금장치가 있으며 시끄러운 거실과 가능한 차단되어 있습니다. 총괄하면 근대적 주거공간으로서의 밀실은 차단 혹은 밀폐형입니다. 밀실은 사랑하는 두 사람만의 공간이므로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들여다봐서도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이 기도를 통해 사랑을 나누는 공간이 바로 이 밀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우님들은 모두 기도를 하시니까 모두 하나님과의 밀실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시겠지요? 정말 그러합니까? 기도는 사실 효과가 담보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를 하게 되면 그 어떤 변화가 우리의 모습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수십 년 새벽제단을 쌓았다는 신자들에게서 그런 변화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왜 일까요? 오히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은 돈 벌려고 별의 별 짓을 다 하는데 기독교인은 거기다가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한다.”는 자조 섞인 말씀에 왜 공감이 갈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 기도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지 않고 오랜 동안 잘못된 기도를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우님들이 기도를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교우님들의 기도를 녹음하여 들어 보십시오. 그 안에 간구를 빼면 무엇이 남는지 추려 보시고 나면 확실하게 느끼실 겁니다. 또 어떤 교우님들은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하나님�� 전지전능하셔서 지구상의 모든 언어를 다 알고 계신다고 믿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대화는 머리로 하는 것이지 몸으로 하지 않습니다. 여하튼 그 대화가 독백(soliloquy)이 될지 하나님께서 같이 주거니 받거니 하실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또 다른 교우들은 기도가 자신의 의지를 성취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새벽기도 40일!”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인지 하나님과 사랑을 하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명함 뒤에 “40일 금식기도 3회 실시”이렇게 쓰고 다닙니다. 인간적으로 봐서는 대단한 의지력과 인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기도를 삶의 고통의 호소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매번 기도를 시작할 때마다 주여! 주여! 주여! 삼창을 하고 목 터지게 하나님을 부르짖습니다. “이번 사순절 새벽기도를 잘 하면 간구하는 것이 응답 받겠지”하고 생각하는 경우나 “내가 요즘 기도를 안했더니 아들이 다쳤다”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기도를 주문(invocation)으로 믿는 교우들입니다. 예배 때마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한 공중기도나 본인도 믿지도,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위정자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하여 주옵시고” 혹 “남북이 복음으로 통일되게 하옵시고”라고 하는 기도는 기도를 무의미하게 하며 기도를 발표(presentation)의 수준으로 격하시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사실 기도는 간구가 되어야 하고, 호소가 되어야 합니다. 의지력도 기도에서 중요합니다. 기도 안하면 벼락을 맞을 것 같은 마음도 사실 중요한 종교적 심성입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기도를 통하여 응답받는 것도 신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무의미한 독백이 되고 맙니다. 밀실에서 깊은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치 밀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가 연결되어 한 몸이 되는(엡 5:31-32) 그런 신비함처럼 말입니다. 교우님들이 워낙 기도를 안 하시니까 교회에서는 많은 기도모임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서 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의 파워는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기도모임은 반드시 필요하며 꼭 참석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밀실에서 하나님과 둘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부부가 사랑을 나눌 때 밀실이 필요하듯이 주님과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영혼의 밀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기도모임이나 새벽기도가 나 홀로 주님을 만나는데 방해가 된다면 나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러 나오는 그 정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벽에 주님과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것입니다. “나는 30년 새벽제단을 쌓았다.”라는 자랑보다 단 하루를 기도해도 하나님과 사랑을 속삭이는 경험이 더 중요합니다. 이런 경험 없이 쌓는 새벽기도 30년은 새벽 테니스 30년과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자, 그러니 내일부터 새벽기도 나오지 마십시오! (“아멘!” 하신 분 누구십니까?)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과 만나 사랑을 나누는 그 공간을 밀실이라는 표현 외에도 여러 가지 비유로 표현했습니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현들은 “광야” “사막” “성(城) 혹은 궁방” 등이 있습니다. 이 모든 표현들의 공통점은 외부의 방해 없이 고요한 곳에서 나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는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집트의 수사들처럼 사막으로 갈 수도 없고 밀실에 처박혀만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복잡한 도시 속에서 살아도 우리 영혼 안에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도시 속의 사막, 빌딩 속의 궁방을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4. 밀실의 언어: 비언어적 소통과 암호풀이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 옷이 날개라는 말은 사람이 옷으로 말한다는 뜻입니다.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언어 대신 그 승용차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 “나 돈 많다. 까불지 말라”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옷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밀실의 옷차림은 어떠합니까? 비형식적이거나 옷이 필요 없는 곳이 밀실입니다. 밀실은 그야���로 벌거벗은 몸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래서 밀실에서는 외모로 자신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부끄러운 모습들, 옷에 가려진 상처들, 평생을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 덩어리의 흉터들까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야말로 벌거벗은 영혼만이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밀실에서는 언어가 그리 필요하지 않습니다. 언어 보다는 몸으로 느끼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언어는 몸의 그 강렬한 느낌으로 인하여 여지없이 깨어지고 무의미하게 됩니다. 언어가 사라지다보니 밀실에서는 언어보다 눈빛, 몸짓, 손의 감각, 몸의 떨림 등으로 소통합니다. 다시 말하면 비언어로 소통합니다. 이러한 비언어는 언어적 소통보다 더 명료한 소통이 가능합니다. 또한 밀실에서 언어가 필요 없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기도가 언어를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아직도 많은 교우님들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기도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어떤 교우님들은 묵도를 비언어적 기도라고 여기시는데 아닙니다. 말소리를 입으로 내지 않을 뿐 속으로 계속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묵도도 언어기도입니다. 어서 여러분들도 늘 사용하던 언어를 이용한 기도 외에 비언어적 기도에도 익숙해지시길 바랍니다. 언어를 버릴 때 하나님은 우리 몸을 건드리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아래 노래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그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눈 감아봐 그리고 천천히 나를 느껴봐 날 불러봐 내가 누군지 내 이름을 불러봐 밀실에서 사용되는 비언어는 암호와 같습니다. 난생 처음 감지하는 상대방의 눈빛, 몸짓, 감각, 느낌, 떨림 등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암호를 풀듯이 풀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밀실에서 나눈 사랑의 기쁨은 너무 크고 강렬해서 이 역시 그 체험을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세속의 노래는 이것을 초월적 세계의 경험 혹은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경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의 마음과 몸이 따로 놀아 어서 너의 몸을 자유롭게 풀어놔 내게 맡겨봐 너의 꿈과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를 경험해봐 다시는 나 없이 살아갈 수가 없이 변하게 될 테니 어서 이리와 (중략) 구름 위를 날아다니게 해줄게 아니 아예 너의 몸이 구름이 되게 그래서 떠오르는 것처럼 느끼게 그렇게 해줄 테니 내가 시키는 대로해 영혼이 밀실에서 하나님과 조우하여 사랑을 나누면 이와 동일한 일이 발생합니다. 우선 영혼과 하나님과의 사랑체험은 이성의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만날 때 여느 백성들이 두려워 떨기만 했듯이(출 19:16), 사울이 다메섹에서 주님과 마주쳤을 때 땅에 엎어졌듯이(행 9:4) 하나님의 임재체험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사랑체험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벅차고 이해되지 않기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도들이 오순절이 되어 한 곳에 모여서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만 그들은 이를 표현할 길이 없어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이 혀처럼 갈라지고”(행 2:3)라는 어리둥절한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본 사람들은 그들이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뭔가에 취한 것 같은 행동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행 2:13)라고 조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만큼 하나님과의 사랑체험도 너무 감미롭고 강렬해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체험은 완벽히 수동적입니다.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고, 말할 수 없이 감미롭고, 전적으로 수동적인 하나님과의 사랑체험을 표현한 중세의 여인의 증언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다.  티끌만한 가치 없는 제가 성령님과 우연히 마주친 것은 내 나이 12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때 나는 혼자 있었는데, 그 거룩하고 귀한 만남은 매일 지속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그 감미롭고 아름다운 만남에 완전히 내 모든 것을 다 빼앗겼으며, 그 강밀함은 매일매일 더해만 갔습니다. … 나는 이러한 만남을 단 한 번도 원하거나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 그분만이 아십니다. (13세기의 Mechthild von Magdeburg의 The Flowing Light of the Godhead 중에서) 5. 생활 속의 신비와 과잉의 체계 영어 중에 pleasure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기쁨, 즐거움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오랜 동안 이 단어를 쾌락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특히 성적인 것과 관련된 pleasure는 100% 쾌락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사실 즐거움과 쾌락은 그 뉘앙스가 많이 다릅니다. 쾌락에는 아주 강한 부정적 뉘앙스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자기 파괴적인 쾌락을 제외하고 모든 쾌락은 나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쾌락, 쾌락 하니까 이상한데 지금부터 기쁨으로 바꿔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고통 속에 기쁨이 얼마나 감미로운지 여러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금식을 많이 하셨을 텐데 금식 중에 찾아오는 정신적 기쁨과 몸의 편안함을 경험해보지 않으신 분들은 모르십니다. 등산을 한 후의 기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혹독한 유격 훈련을 한 후의 기쁨도 마찬가지이고 심한 육체노동 후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육체행동들이 기쁘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기쁨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남녀의 밀실경험도 이와 같은 기쁨을 동반하고 있는데 그 강밀도(intensity)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 강렬한 기쁨이 너무 커서 박진영은 연인에게 오직 자신만을 사랑할 것��라고 자신 만만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영원히 나를 잊지 못해 다른 남자들은 다신 사랑하지 못해 그럼 어떻게 해 영원히 나만 사랑하면 돼 성적 기쁨이 다른 기쁨보다 강렬한 것은 기쁨을 주는 구조에 있습니다. 사실 성(sexuality)이나 시어(詩語), 그리고 종교체험이 갖는 공통성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서 속에 시편이나 아가서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 공통구조를 조금 어려운 말로 ‘과잉의 체계(economy of excess)'라고 하는데 이성과 과학을 기반으로 수립된 ’제한된 체계(restricted economy)'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교우님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셔도 전혀 무방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제한된 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아니, 속박되지 않고서는 살수도 없습니다. 그 제한된 체계 중에는 자아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그 속박에서 벗어나는 체험을 하면 엄청난 두려움 및 당황함과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제한된 체계 속에 있던 자아 역시 다른 것과 포개져 한 몸이 됩니다. 이러한 경험 중에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사랑체험만큼 강한 기쁨을 주는 경험은 없습니다. 그것은 신적 기쁨이고 이 세상의 그 어떤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기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밀실 경험을 한번 체험하게 되면 그 강렬함 때문에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나를 내가 모르는 길로 데려가 주세요. 내가 당신의 아내가 되게 해주세요. 나로 하여금 저 맑고 푸른 창공을 지나 구름에 가려진 곳을 날게 해주세요. 사파이어처럼 당신을 만나러 쏜살같이 달려가렵니다. (11세기 성녀 Bingen의 Hildegard) 저 중세 성녀는 주님과 결혼하고 싶다고 합니다. 상식적인 사람들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아가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지적했던 카를로 카레토 수사의 말처럼 평생 순결하게 살았던 저 수녀할머니가 어떻게 이렇게 불경스러운 표현을 하는지 상식적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숙고해보면 답은 분명합니다. 저 분은 그 감미로운 기쁨은 늘, 항상, 생활 속에서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부부처럼 늘 함께 하고 싶고 늘 한 몸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몸이 되는 것은 그래서 신비입니다. 저와 교우님들 모두 기도가 깊어져서 이런 체험을 하며 기쁨 속에 사는 일상이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자~ 말씀 다 나누고 나니 외설처럼 느껴지지 않으시죠? 이충범 l 교수는 감리교회를 섬기는 목사로 연세대학교(B.A)와 감리교 신학대학교(B. Th)를 거처 미국 드류대학 신학부에서 신학석사(M. Div)를, 대학원에서 중세신비주의 연구로 철학박사(Ph.D)를 받았다. 현재 협성대학교 역사신학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세미시문화사, 문화신학, 일상신비주의에 관심을 갖고 생각에 궁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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