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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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동우피씨 사줘
야동우피와 남원함안 등지의 화석유적을 소개하고 있다. 김 박사는 “세계 최고의 공룡발자국화석은 세계자연유산인 제주 고산리 마라도에서 확인했다”며 “이들 발자국이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독특한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연구결과는 문화재청이 발간하는 ‘한국문화재'(2015년 5월호)에 게재됐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지난 13일 한낮에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가해 도로를 점거한 혐의로 시위대와 경찰관 14명을 체포했다고 오늘(16일) 밝혔습니다. 이들은 어제 오후 3시쯤부터 청계광장 주변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다, 경찰이 강제 진압을 시도하자 쇠파이프 등을 휘두르며 저항했습니다. 앞서 경찰은 이튿날 새벽 6시까지 평화 시위를 촉구하며 자진 해산을읭 요청했지만, 집회를 주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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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욕받이 그림.
똥팔륙 종자들은 비판을 받으면 새겨듣거나 성찰하지 못하고 비판자들을 '타도의 대상'으로 본다.
20대 시절의 짱돌과 쇠파이프, 화염병에 스스로 갇혀 신이 되어버린 반동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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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먹먹해지는 어느 '흙수저'의 '아령 자랑'
가슴 먹먹해지는 어느 ‘흙수저’의 ‘아령 자랑’
▼사진출처: 온라인커뮤니티(dc인사이드 헬스갤러리) http://postshare.co.kr/wp/wp-content/themes/viralnova/js/ad_postmiddle_text.js 아령을 사달라는 아들을 위해 공사장에서 직접 구한 쇠파이프로 아령을 만들어 준 아버지의 슬픈 사연이 누리꾼들의 마음을 슬프게했다. 지난달 31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아버지가 직접 쇠파이프를 구하고 용접해 아령을 만들어주었다는 아들의 글이 게재되었다. http://postshare.co.kr/wp/wp-content/themes/viralnova/js/ad_google.js 글쓴이는 “아버지가 위암 수술을 받으신 뒤로 일을 하실 수 없는 상황이라 집안이 많이 어렵다. 공부만 하느라 체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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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공분폭발-윤,'헌법76조 긴급명령하라'!노조 정글刀·쇠파이프 위협 싹 빼고... 과잉진압만 부각한 방송들!빈소에만 최소 1억원...민노총 “투쟁기금 부족하다”며 모금 지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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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에서 '쟝 프랑소아 모리스 -모나코 (Jean Francois Maurice-28°A L'ombre)'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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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of America 🇺🇸 Russia France 🇫🇷 이자 몽땅 저축 2022ACOUNT newyork centralpark JEJU
법률 이시여 이자가 You tube 속 이남자가 사진속 롯데 신격호 입니다 최근 도시어부에 출연한 KBS 방송인 김준현님의 시신은 이덕화가 져지른 살인으로 그가 방송에서 문재인 각하에 초상권을 훔친 자 입니다
사인된 KBS 김준현님은 KBS 아나운서 강수정 양으로 밝혀졌습니다 KBS 에 신고#
역시 사채와 채권을 빌미로 둔기와 쇠파이프 식칼로 찌르고 남은 반등신 여인이라는 때 사우나 띠인 사우디를 사창가에 팔아버리는 극악무도의 살인 범죄자 입니다
지금도 울산광역시 남구라는 법원에 있으면서 사채와 권리를 미끼로 사람들을 강제구속 시키는 비열한 새끼 입니다
1981년 당시 광주 교도소 유해발굴 현장에서 현대가 시신과 삼성 이병철의 신원 사체중 일부가 발견 이를 도피 수도권으로 잠입해서 현재 의왕시 군포에 위치한 구치소 에 수감중인 수감자인데
당시 3살인 어린 저를 죽이고 그 신원을 구치소 수감자로 바꾸는등 미국에 대한 이란 핵 공격이 임박해지고 있는 원인 제공자 입니다 주소가 테헤란로 입니다
이란이 공주 아닙니까 공주치료감호소 서울특별시 광진구와 전라도 나주시 그리고 대전시 유성구 라는 지형을 토대로 동남아 최대의 교도소로 만든 장본인 개새끼 입니다
그 뼈를 분토하여 씨족을 말려 죽여도 시원찮을 놈 입니다 이에 미 경찰국과 공항 검사 그리고 워싱턴 백악관 안보실에 신원을 제공 사건을 양도 합니다
브루투스 는 뭐하는지 몰라 이 씹새끼 안태워 죽이고
롯데 동산 가 나 다 라 등 채권 농심 압류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법정관리에 압류
제주시 고법에 이를 파기환송 한다
서울특별시 대법원 서울특별시 행정법원 지원
제주은행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제주은행 이 한국은행 입니다 서울은 사진 속 가짜 입니다
이 개새끼 0세 부터 74세 까지 하나님께서 직접관리 하십시요 1974년 생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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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게임을 하지 않는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목과 허리가 굳고 혀가 뻣뻣해지고 손가락에 잡힌 물집이 굳은살이 되고 그 밑에 다시 물집이 잡혀도 산패된 피지 냄새가 진동해도 점점 파괴되고 있는 날 고스란히 인식하며 게임을 멈추지 않는 걸 알기에 게임을 하지 않는다. 게다 게임에 관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즐거움이 아닌 결핍과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라는 건 아쉬운 일이다. 또 게임 타령이라는 게 이미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는데 이건 더 배부른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 대한 얘기다.
내 첫 게임기는 1인용 밥솥만한 크기의 갤러그 게임기였다. 엄밀히 말하면 내 것은 아니었다. 그런 장난감들을 좋아하던 아빠의 것이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참 잘 만들어진 단단한 일본 물건이었다. 갖고 있다면 꽤 비싸게 팔리겠지. 엄격한 집안에서 일본식 가풍 속 막내딸로 자라며 무서운 오빠들과 얄미운 언니에게 모든 걸 금지당하며 자란데다 세상을 겪으며 자신의 철학을 쌓기도 전에 턱도 없이 어린 나이에 날 낳아버린 엄마는 안될 것 같으니까 안되기 때문에 무조건 안돼,라고 말하고 보는, 근거 없는 보수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는, 공부를 잘 해야 하기 때문에, 게임기와 컴퓨터만은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과장된 내 기억에 따르면, 당시 매일 돈을 좀 버려도 될만큼 풍족한 살림을 운용하던 그 젊은 부부는 첫 아이인 내 뜻을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아빠 차 좀 바꿔 지겨워-라고 건방진 꼬맹이가 좆같은 헛소리를 하자 남색 프린스를 타고 출근한 아빠는 저녁에 새하얀 콩코드를 타고 들어왔으니까, 그랬으니까. 매일 장난감과 외식을 선물받았던 왜곡된 느낌 같은게 남아있다. 하지만 게임기만은, 컴퓨터만은, 부모 동반 하에 오락실 출입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 갤러그 게임기를 열심히 갖고 놀았다. 곧 손바닥 두개 사이즈의 테트리스 게임기가 하나 더 생겼다. 역시 아빠가 갖고 놀던 것이었다. 아빠의 엄청난 기록들을 깰 수도 없는데다 더럽게 시시했다. 몰래 가본 오락실엔 파이널 파이트 같은 것들이 있는데. 쇠파이프 줍고 치킨먹으며 잭나이프 던지는 놈들이랑 싸울 수 있는데. 친구네 집에 가면 패밀리로 슈퍼마리오도 하고 야구도 할 수 있는데. 픽셀이 삐직삐직거리며 움직이는 갤러그나 테트리스라니.
문제는, 내가 사립 국민학교를다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6.25때의 부상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퇴역 장성이 설립한, 매주 운동장을 행진하며 교장에게 멸공이라는 구호와 함께 경례를 올리는 사열식을 하던, 일제군의 모자와 군복을 네이비 컬러로 바꿔놓은듯한 교복을 입던, 사립 국민학교. 모든 학생들이 상당한 재력을 가진 집안의 아이들이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임에도 대부분 자가용이 두대 이상씩 있었고, 리복 펌프나 나이키 에어조던, 에어맥스를 신었으며, 50평 아파트 미만에 사는 아이들이 드물었다. 전원 스쿨버스 통학이 원칙인 학교였기에 등하교길의 학교 앞 골목 문화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집에 가면 게임기와 컴퓨터가 있는데 굳이 무서운 형들을 찾아 오락실에 갈 이유가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어쩌다 엄마의 치맛바람 멤버들을 따라 그 아이들의 집에 가면, 컴퓨터로는 원숭이섬의 비밀, 페르시아의 왕자를 하고. 패밀리로 슈퍼마리오나 야구를, 메가드라이브로 슈퍼시노비를 하는 건 내가 아니고 당연히 그 집 애들과 자기 집에도 같은 게 있는 아이들이었는데 씨발 그거 한번 시켜달라고 말할 변죽도 없던 난 다같이 롤러블레이드 타러 나가자면 책 본다고 빠졌다가 조용히 몰래 해봤자 좆나 금방 죽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잖아. 그런 건 있었다. 난 그와중에도 그런 게임이 시시했다. 좀 때려부수고 싶은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스트리트파이터2가 등장했다. 바로 그 스트리트 파이터2. 아도겐 워리어겐 라딱따뚜겐 라데꾸 요가파이어 헐헐헐헐 라운드 원, 스트리트파이터2. 그리고 우리 집이 망했다.
난다긴다 하는 집들의 치맛바람 날리는 사립 국민학교에서 학원 하나 안 보내도 책 보는 거 좋아해서 머리가 좋아서 저렇게 공부를 잘해요, 소리 듣던, 그 소리 듣는 맛에 살던 엄마 때문에라도 그래야만 했던 나는, 그때 이미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을 생존무기로 삼던 조숙한 뇌와 약한 몸을 가진, 학교 1년 빨리 들어간 아이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집이 망해서 아주 많이 위축됐던 것 같다. 고학년에 접어들며 학원과 과외수업을 지원받는 아이들에게 유일한 내 무기였던 공부마저 밀리기 시작했고, 친구들은 소니 워크맨과, 동네 꼬마들이 갖고 노는 것과 차원이 다른 정밀한 일제 비비탄총을 들고 다녔고, 한달마다 에어조던과 에어맥스를 새로 샀으며 프랑스 브랜드의 옷, 독일 가방등을 유니폼처럼 착용한 채 엄마가 운전하는 대형 세단에 올라 압구정 맥도날드에 모이곤 했다. 난 엄마가 반포에 사는 엄마의 사촌 집에서 가져다준 노랗게 바란 종이의 세계 문학전집을 읽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당시 아빠는 빚쟁이들을 피해 도피했고, 어느날 엄마는 지금부터 나쁜 사람들을 피해 도망가자며 한밤중 계단으로 아파트를 내려와 담 밖으로 짐가방들을 던진 뒤 날 데리고 엄마네 오빠 집, 큰외삼촌네로 도망쳤다. 다음날 아침 난 큰외삼촌의 소나타를 타고 학교에 갔다. 뭔가 큰 일이 난것 같지만 엄마가 속상해할까봐 모른체했다. 사립 국민학교의 자랑, 급식 시간, 내 나이키 플라이트 백���을 열고 파란 수저통을 꺼냈다. 외할아버지가 일본에서 사다주신, 모두가 부러워했던 내 가면라이더 수저통이, 깨져있었다. 전날 밤 담 밖으로 짐가방을 던질때 깨진거다. 그땐 그게 그렇게 창피하더라. 집에 와서 가면라이더 수저통이 깨졌다고 엉엉 울던 내가 그저 철없이 아끼던 물건 망가졌다고 투정부리는 줄 알았겠지만, 그래도 엄마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겠지만, 사실 난 그때 우리 집에 큰일 난 걸 다 알고 내 운명에 절망하며 꺼이꺼이 운 거였다. 그 빠듯한 피난길 짐에도 나 속상할까봐 내 가면라이더 수저통을 굳이 챙긴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깨진 가면라이더 수저통은 다시 오지 않을 내 행복한 유년기의 종말과 이어둔다. 가끔 정면으로 응시해야만 하는 눈물버튼 같은 기억.
몇달동안 그 집에서 지냈다. 사촌누나방 침대와 책상 사이, 일미터 조금 넘는 공간에서 엄마와 꼭 끌어안고 잤는데, 역시 철없던 그 누나는 자다가 가끔 일부러 침대에서 떨어져 무릎으로 날 찍곤 했다. 일부러라고 하는 건, 세번째로 찍혔을때 아직 잠이 들지 않았던 내가 그 누나가 아래를 한번 살펴본 뒤 몸을 날리는 걸 봤기 때문이다. 부족한 배움을 허장성세로 숨기지 않고 어떻게든 인성이 고왔으면 참 좋았을 큰외숙모는 자잘한데서 욕심을 부리는 편이었는데, 고기 반찬이나 빨래 같은 것으로 시누이가 아닌 내게 구박을 했다. 그나마 목소리가 멋진 큰외삼촌과 잘 놀아보고 싶었지만, 막내동생이 오냐오냐 키운 내가 너무 제 멋대로라고 느꼈는지 그 멋진 목소리로 날 자주 야단쳤다. 팬티 바람으로 거실에 나온다던가, 양치하다 화장실 밖으로 나온다거나 하면 눈물이 나게 혼을 냈다. 그러고나면 밤에 꼭 다시 조용히 울었는데, 엄마가 옆에서 더 큰 소리로 외삼촌을 거들며 날 덜 혼나게 해주려했단 걸 그때도 눈치채서 그랬다.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을 먹여살려야할 놈에게 줄 새 밑천을 준비하던 외할아버지가 그나마 든든한 내 편이었지만, 주로 나고야에 계셔서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다 엄마의 고집이었는지 그 사립 국민학교 학비도 계속 지원해주셔서 오히려 내겐 좋지 않은 환경을 계속 제공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환경이 급변하자 틈이 생겼다. 어른들이 저마다 살 길을 찾아 바쁜 사이 내게 관심이 줄어들었고, 큰외삼촌은 사촌누나에게 하듯 내게도 얼마의 용돈을 주었으며, 그새 난 머리가 조금 컸고, 스쿨버스가 아닌, 동서울터미널 근처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리고 난 학교가 끝나면 우리 학교 아이들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우리 학교 앞 오락실에서 몰래 스트리트파이터2를 하기 시작했다. 바로, 정신이 나갔다. 등교길에 오락실이 열려있다면 등교길에도 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모든 관심은 백원짜리와 스트리트파이터2였다. 미쳐가고 있던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만날 수 있던 다른 아이들은, 집에서 했다. 메가드라이브로. 그 녀석들은 무제한에 가깝게 연습할 수 있기 때문에 한 판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난 지면 백원을 잃는다. 라데꾸 두번에 비틀거리다 가까이서 반달차기 한번 맞으면 백원을 잃는 거다. 더 처절하게 더 정교한 플레이를 갈고 닦아야했다. 가난하기 때문에 가진 사람보다 더 큰 돈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적은 금액으로 크게 보장받을 수 있는 각종 보험 같은 것들. 집이나 교육 같은 것들. 가난한 자는 적은 돈이 없어 더 큰 돈을 들여야 건강에, 좋은 환경에, 좋은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런 기반.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그 기반. 난 기반이 없었다. 백원짜리들의 무게가 줄어들수록 내 삶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얻을 것도 없다. 그저 이기고 싶었다, 그리고, 남의 집에 가기 싫었다. 무엇보다 여태 제대로 게임을 해본적이 없는 애가 그 전설의 스트리트파이터2를 만났으니. 얼마나 재밌었겠나. 준비물 산다며 돈을 많게 적게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밖이 깜깜했다. 사실 해가 져가는 걸 알았던 것 같다. 마주한 기계 위쪽으로 붉은 빛깔이 생겼던 것 같다. 멈출 수 없었을 뿐. 겁에 질린 채 퇴근길 어른들에 둘러싸여 버스를 타고, 집에, 남의 집이지만, 내가 묵던 곳에 도착하니 뭐 난리가 나있지. 한창 유괴다 인신매매다 극성일 땐데, 사립 국민학교 애들은 더 조심해야했고. 회초리 모양대로 피멍이 들게 엉덩이를 맞았는데 밤에 엄마가 울면서 연고를 발라줬던 거 같다. 울면서 연고 발라줄걸 왜 때려? 지 신세가 속상했던 게지. 지 화를 못 이겼던거고. 오락실 갔다가 늦게 올수도 있지. 아무리 학원 다니는 애들한테 밀리고 있어도 수우미양가가 아닌 100점 단위로 성적을 산출해 무슨 꼬맹이들 앉혀놓고 평균점수로 등수까지 매기던 그 잘난 국민학교에서 난 평균 96점 정도를 유지하던 중이었다. 집이 망하기 전엔 시험 봐서 한개 틀리면 울던 미친 재수 없는 새끼였으니까 못하면 99, 거의 늘 평균 100점이었고. 남의 집 빌붙어 살면서도 그렇게 공부를 잘 하는데 뭐 속 썩인 일이 있나 만날 조용히 방구석에서 책만 보고 있다가 오락실 좀 갔다 늦게 왔다고 애를 그렇게 때려.
얼마 후 아빠가 돌아왔다. 경주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쪽 형제들이 경주에 사는데, 큰외할아버지가 도와줘 코오롱 호텔 근처에서 숨어살며 가끔 호텔에 딸린 필드에 라운딩도 나가고 씨발 뭐 좋은 공기 속에서 건강한 시골밥 먹으며 잘 지냈단다. 아주 낡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엄마는 친구들에게 알려줄 근처의 다른 새 아파트 이름을 내게 주입했고 스쿨버스 정류장도 그 아파트에 등록했다. 허장전입이랄까, 난 아침마다 한참 걸어가 스쿨버스를 타야했다. 난 다음 학년이 됐고, 여전히 몰래 스트리트파이터2를 즐겼다. 스트리트파이터2를 잡기 위해 등장한 킹오브파이터도 해봤지만 뭔가 따라한 느낌, 복잡한 느낌이 싫었다. 같잖은 보수성을 발휘하는 건방진 꼰대 꼬맹이.
그러던 어느 날, 매해 그렇듯, 쓸데없이 학급회장이 됐다. 하고 싶은 애 하라고 하지 무슨 민주주의는 얼어죽을 입후보 추천을 받는게 무슨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도 아닌데 무식해가지고. 부회장은 내가 좋아했던 여자애였는데, 걔도 날 좋아했다. 난 유덕화 머리, 걘 소피 마르소 머리를 하고 다녀서 아이들이 유덕화 책받침과 소피 마르소 책받침을 붙여들고 우리를 놀리곤 했다. 그런데 담임 선생이 우릴 싫어했다. 왜냐면 당시 사립 국민학교의 담임선생이라는 건 월급보다 부수입이 많은 자리거든. 송계숙. 씨발년. 한반에 50명이면 50명이 촌지를 갖다 바치며 자기 아이 잘 부탁하던 학교였는데, 학급회장과 부회장네 엄마는 그런 학부형들 전체를 이끌며 때마다 식사대접, 선물관리, 학급 시설 개선 등을 주도하고 목돈도 숨풍숨풍 써야했는데, 망한 집 자식이 회장이 된것도 미치겠는데, 부회장된 애네 집도 얼마전 망한거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갑자기 우리 얘기를 꺼냈다. 본받으라는 식으로. 그 나이때 아이들에게 집이 망해서 어려운데도 공부 잘하는 회장 부회장네 사연을 아이들에게 소상히 말했다. 좋은 뜻이지만 경솔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왜냐면 옆 반은 뭘 또 새로 했다며 우리들 앞에서 부쩍 자주 투덜거렸거든. 한번씩 내게 아니꼬운 눈빛을 주며 배배 비튼 말투로 그걸 얘기하던 그 썅년의 표정과 말투를 지금도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 정도거든. 그날 그걸 듣는 우리반 애들이 교훈을 느끼기는커녕 그 나이에도 민망해하며 우리를 훔쳐봤거든. 내가 좋아했던 그 여자애는 고개를 들지 못한채 얼굴이 빨개져있었고 나도 얼굴이 뜨거웠지만 그 나이때 생각할 수 있는 어색함을 회피하는 방법이라곤 억지로 웃으며 괜히 옆 친구에게 쓸데없는 말을 계속 거는 정도라 버티고 버티다 끝내 귀에서 삐-소리가 들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집에 돌아와 크게 울었다. 난 망했다라는 표현을 그때까지 써본적이 없어서 우리 집 망했어?라며 엄마에게 애들 앞에서 담임이 한 짓을 말했다. 아빠는 그 성질머리에 쌍욕을 퍼부으며 화를 냈다. 당장 가서 죽여버린다고 옷을 입었다. 놔뒀으면 아마 진짜 죽였을 거다. 그런 사람이거든. 엄마는 울면서도 그런 아빠를 진정시킨 뒤 담임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문을 닫고 한참 통화하더라. 다음 날, 내가 좋아하던 그 여자애는 결석했다. 그리고 내겐 메가드라이브가 생겼다. 스트리트파이터2팩과 함께.
한동안 집에 오면 거실의 아남 텔레비전을 차지하고 저녁 먹을때까지 게임을 해도 야단은커녕 그만 하는게 어떻냐는 청유 한번 듣지 않았다. 행복했다. 다만 아무리 부드럽게 문질러봤자 납작한 방향버튼의 조이패드로는 스틱이 달린 오락실 ���계처럼 기술을 잘 구사할 수 없는데다 그렇게 많이 해대니 양쪽 엄지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그게 굳은살이 되면, 그 굳은살 아래에 또 물집이 잡히는 것을 반복하며 늘 손이 아픈채 살았다. 그렇게 죽어라고 해대니, 그시절 게임의 인공지능이란건 너무 낮은 수준이어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그리고 쓸데없게도 난 스트리트파이터2를 완전히 정복해버렸고, 흥미를 잃었다. 무엇보다, 너무 늦었다. 그 잘난 학교의 친구들은 구닥다리 메가드라이브를 졸업하고 같은 회사의 새 모델 새턴이나 네오지오 같은, 세 배는 비싼 새 시대의 게임기로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으니까. 그때부터였다. 내 것이 아닌 것들에 슬퍼하지 말자는 생각을 처음 했다. 난 마이클 조던과 NBA에 몰두했고, 밖으로 나가 농구공을 던져보기 시작하며 스트리트파이터2와 헤어졌다. 운동하는 게 즐거웠다.
사립초등학교를 졸업한 난 지역의 중학교에 입학했고 천호동 혹은 하남과 서울 변경의 슬럼에서 자란 작은 갱스터들과 만나며 연약함을 졸업했다. 그 친구들과 놀며 농구, 이태원 문화, 듀스, 힙합 패션, 흡연 같은 재미난 일들에 빠졌다. 무엇보다 자위행위를 시작했다. 공부는 시험때만 했다. 반에서 5등 정도. 부모에겐 납득할 수 없는 성적이었고, 중학교부턴 혼자 힘으로 안되는 것이라며 속상해했다. 아닌데. 딱 그만큼만 한건데. 아빠는 재기에 성공했다. 그것도 아주 크게. 그 시절 건설 쪽 일이 그랬다. 망하면 집안에 동전 하나 없지만 풀리면 사치가 보장됐다. 그러자 날 학원에 보내려 했다. 영어학원만 다니겠다고 했다. 당시론 드물게, 성문영어 같은 입시 영어 가르치는 학원이 아닌, 회화나 영미 소설을 가르치는, 연대 이대, 고대 나온 젊은 여자 선생님들이 하는 특이한 학원이었는데, 그 여자 선생들은 모조리 내 자위의 대상이었다. 미안합니다. 내 머리 속 일이지만 그래도 당신들을 너무 많이 성적대상화했어요.
고등학교때도 다녔으니 그곳을 꽤 오래 다녔는데, 학원이 위치한 곳은 그 지역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고, 뭐 놀거라곤 노래방이나 오락실 밖에 없던 우리들이 모이기 가장 좋은 곳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케이드 오락실이 있었으니까. 애들이 갈 클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길가에 앉아 서로 마르떼 프랑소아즈 저버나 292513스톰을 뽐내고 괜히 나쁜짓 하는 거 티내며 담배 피우다 침 뱉는 일 밖에 할게 없던 중고딩들에게 그 오락실은 한껏 차려입고 들어가야하는 곳이기도 했다. 긱하고 너디한 정통 오타쿠들이 게임하겠다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단 얘기다. 당시 학원을 가든 안 가든 그쪽에서 삐대고 놀때면 그 오락실에서 사무라이쇼다운이라는 걸 했다. 스트리트파이터2로 워낙 단련해서인지 버추어파이터, 후에 철권이 나왔을때도 대전 격투게임은 금새 잘 했지만 이상하게도 시시했다. 왜냐면 그때쯤 아빠의 사업이 다시 망했으니까. 나중에 알고보니 영어학원비도 꽤 밀렸던 모양이었다. 가난해서 게임하기 힘들어졌지만 운동하는 게 참 즐거웠던 시절이라 괜찮았다. 그리고 그 즈음에서야 난 이제 그만 낭만적인 책들을 내려놓고 내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입시 책들을 파고 들어야겠단 마음을 먹었고, 독하게 실행했다.
난 이름값 있는 대학에 갔다. 아직 세상이 덜 빡셌던 만만한 시절에 산 덕으로. 그리고 세상은 컴퓨터 게임의 시대였다. 무수히 많은 아이들을 재수시킨 스타크래프트는 방송에서 중계를 시작하고, 프로리그가 출범하고, 역사상 가장 성공한 게임이 되더니, 게임을 넘어 하나의 종목, 역사, 전설이 돼 마치 포커나 당구 같은 자리에 올랐지만, 심지어 그 중계를 시작하고 성장시킨 사람들이 대학방송국 선배들이지만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내가 지금도 참 좋아하는 친한 형들인데-도 난 스타크래프트를 안 좋아한다. 사실 난 그 이유를 이미 어렸을 때 알았다. 난 죽이고 부수는 액션을 하고 싶어 게임을 했던 거다. 전략 같은거 짜는 게 아니라. 그리고 그 세계는 여전히 비디오게임에 있었다.
다시 재기해 기사가 운전하고 다니는 차를 타는 아빠 덕에 플레이스테이션을 샀고 플레이스테이션2가 나오자 그것도 샀다. 온통 때려죽이고 부수는 게임들을 했다. 무쌍이라는 글자가 붙은 것들. 그리고 야구 게임. 예전처럼 게임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내진 않았다. 사랑에 미쳐있었고 대학방송국 생활은 바쁘고 즐거웠으며 멋 내느라 정신 없는데 책 읽는 건 여전히 좋아했거든. 그러다 큰 실연을 했다. 다시 엄지손가락 끝에 물집이 잡히고 굳은살로 바뀌었다가 그 밑에 물집이 잡히길 반복했다. 살이 십킬로그램 빠졌다. 손가락 모양이 바뀌었다. 시력이 약간 떨어졌다. 배탈이 났는데 컨트롤러를 놓지 못하고 배배 꼬다 똥을 지린적도 있다. 그래도 됐다. 영장이 나왔거든. 내가 최전방 오지에서 좆같은 노예 생활을 하는 사이 아빠는 삶의 마지막 부도를 맞았고 엄마는 다른 남자를 만나왔던 걸 밝혔으며 둘은 이혼을 했다.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직 너무도 어렸던 내 동생은 그때부터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와 플레이스테이션에 인생을 바쳤다. 외로웠을테니까. 내가 오락실에 갔듯이.
외로움이라는 것. 즐겁고 싶다면, 욕망, 벗어나고 싶다, 탈출, 외면해야해, 몰두, 성공하고 싶다, 돈, 눈물, 사랑, 이야기, 당신이 태어난 것, 오늘 저녁을 먹는 것, 샤워, 그 신발, 옷장 속 그 옷의 브랜드, 가방, 죽음, 장난감, 24만원에 풀린 플레이스테이션4를 향한 아저씨들의 열광, 다 모두, 결핍, 외로움이 벌인 짓이다.
필요 없는 것들을 구현하는 필요없는 말들이 있다. 아무튼이라던가 그래도라던가 나중에라던가. 그것 또한 외로워서 그렇다. 외로움이 벌이는 짓이다. 궁지에 몰려 너무 외로워지면 아무튼이라 말하고 무엇이 맞음을 알게 되어도 그 길이 외롭다면 그래도를 말하며 지금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외로워져 나중에를 외친다면, 그런 말은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그러면, 지금을 말해야 한다. 외롭지 않게. 지금이 아닌 건 지금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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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이 있는 나라가 주권도 없는 나라
에 문상 조문을 가니까 윤리적으로 맞지 않다 해서 제소 입니다
더군다나 미국 각하께서 제거한 자들 입니다 영화 007을 빌미로 전세계를 상대로 핸드폰 사기 행각을 벌인 주권 권한이 없는 나라 입니다
거기에 조문을 갔다니까 문제 인 겁니다 한마디로 주권인 국민들을 공범 만들어놨다 입니다
그럼 주권을 관리하는 미국에서 우리를 어떻게 관리 하겠습니까 공범으로 처리하면 국제난민 되는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물러나세요
관히 대학생 데모에서 쇠파이프 맞아 뒤지기 싫으면 하야 바랍니다
OCN CNN Washington post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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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분명히 엄마로부터 유치원을 가기도 전부터 서서히 강도가 높아지는 갖은 언어폭력과 신체폭력에 시달리며 자랐는데 한 마디 사과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잘못해도 맞았고 잘못하지 않아도 맞았습니다. 어떤 이유로 심기에 거슬리거나 단지 기분이 나쁘면 저를 전기선이나 쇠파이프 단소 등으로 온 몸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두개골에도 패인 흔적이 있습니다. 안 들어본 욕이 없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살려달라고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면 비는 손가락을 맞았습니다. 온 몸에 멍이 들어 한여름에도 긴팔에 긴바지를 입고 나가야했던 적도 여러 번입니다.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나날들이었습니다.
-> 나중에 커서 이 얘기를 엄마에게 했더니 아빠가 자기를 못살게 굴었다는 동문서답을 하곤 했습니다. 때리고 못살게 군 사람은 본인 자신인데 왜 제게 사과하지 않는 것일까요? 죄의식도 없고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걸까요?
2. 물론 버리지 않고 키우기는 했으니 그간 친절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기 때를 포함해 아주 어릴 때에는 대부분의 포유류가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기에 그에 따른 귀여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걸핏하면 일관되지 못한 부모의 태도에 안정감이나 정을 쌓을 수 없었고 열 살 무렵부터는 사소한 스킨십에도 낯설음이나 거부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저는 한국 나이로 4살 무렵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성장기 내내 저를 때릴 때마다 지었던 광기 어린 악마 같은 표정도 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 도저히 용서가 안 됩니다. 몇 번의 실수였을 뿐이라면 마음이 좁은 편도 아니고 거뜬히 용서했을지도 모르지만 수시로 반복되는 폭력은 용서할 이유를 찾기 어렵더군요.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만약 복수할 기회가 있다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3.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저는 나이 꽤나 있는 사업 망한 남자와 그보다 15살은 어린 조카뻘의 여자(당시 23세)가 어느 날 강원도의 한 횟집에서 술 마시다 피임도 하지 않은 원나잇을 해서 생겼습니다. 대책 없는 시작이었습니다. 장사해서 열심히 돈 벌어 키우기는 했습니다. 사랑이 별로 없는 가정에서 자란다는 건 사육당하는 것과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기억력이 나쁜 건지��가정에서 행복해 본 기억이 딱히 없습니다.
-> 아빠한테 왜 그랬냐고 물으니 애는 그냥 자연스럽게 생기는 거라고 하고 저보고 불효자식이라고만 합니다. 자신의 실수와 무능력은 인정을 안 합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4. 부모는 결국 제가 중학생 무렵 이혼했습니다. 원래 부부사이가 좋지 않았고 사랑이 없었지만 경찰을 불러야했을 정도로 저를 향한 엄마의 심각한 폭력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물론 발단은 어디까지나 발단일 뿐이었습니다. 엄마는 술 담배에 찌들어 살았고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부모가 한 침대에서 자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가정 내 사랑이 없었고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엄마와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습니다. 증오스러우면 증오스러웠지 그립지도 않습니다.
-> 양친에게 인간적 연민을 느끼게 되는 지점들이 있기는 있으나 나는 자녀이지 부모의 부모 역할을 하는 패런탈 자녀가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만을 사랑해온 부모를 사랑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아서 저도 저만 사랑해왔음에 떳떳합니다. 어렸을 때야 뭘 몰라 부모를 막연히 사랑함으로 구애했지만 자아가 생기고 공부를 계속하고 식견을 넓히다보니 헛수고에 허튼짓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5. 어려서부터 학교 선생님들도 인정하실만큼 머리가 좋은 편이었고 공부는 잘 해서 서울로 대학을 왔는데 몸부터 어른이 되고 또 주위를 둘러보니 제가 남들보다 정신적으로 잘 자라지 못했음을 알게됐습니다. 그 부분들을 채워나가려고 노력해오고 있으나 평범한 가정에서부터의 평범한 세상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늘 어딘지 공허한 마음이 가시지 않고, 어떤 마음을 느끼는 데에도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사랑을 잘 못 합니다.
-> 양친 모두 사랑에 무능한 존재들 같습니다. 받아본 적도 줘본 적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6. 위와 같은 환경 속에서 사춘기 때에도 비행을 하거나 엇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비행을 시도할 마음이나 동기를 모를 정도로 정서가 발달되지 못해 감정적으로 무능했던 게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유전과 환경 모두 작용했을 것입니다.
-> 이만하면 자식 치고는 키울만한 아이 아니었을까요? 이것만 가지고 단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말입니다.
7.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고, 대학 다니는 내내 양친으로부터 용돈이라는 걸 받아본 경험을 손에 꼽습니다. 300에서 500정도 하는 보증금도 대주지 않아 고시원에 살게 되기도 했습니다. 양친 모두 제 계좌번호를 알고 있고 몰라도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시피 합니다. 주어진 삶에 감사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종교적 태도나 가치를 강요받기는 매우 싫어합니다.
-> 엄마는 몇 년 동안이고 만 원 한장 보내준 적이 없는데 자식으로 생각하고 자식을 사랑한다면 이럴 수 없는 게 아닐까요?
8. 허구헌 날 종편 방송 켜놓고 온라인 바둑이나 하고 있는 아빠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구멍가게를 하면서 매일 술을 마시고 수시로 아내를 패 아내의 고막이 나간, 단칸방에서 두 아들을 기르는 집이 있는데 독하게 공부해서 한 명은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고 한 명은 시청의 9급 공무원이 됐다는 이야기를 저한테 합니다.
-> 아빠 자신은 삼성 반도체 같은 대기업 상무 전무는 커녕 부장 과장도 달아본 적 없으면서 왜 저렇게 안 좋은 쪽으로 평범하지 않은 케이스를 제게 들먹이며 비교하는 걸까요?
9. 부모가 너무 한심하고 괘씸하고 비인간적이고 무능하게 느껴져 때때로 화가 치밉니다. 그래서 제가 당했던 것들 이상인지 이하인지 모를 만큼 원망과 저주와 욕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번번이 속 시원하기만 하더군요. 이제는 만날 일도 거의 없고 어릴 때처럼 부모가 힘 세다고 마음내키는대로 때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부모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게 되더라도 장례식도 갈 생각이 없고 시신 인계조차 거부하고 싶습니다. 그냥 하던 일이나 계속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제가 비정상일까요?
10. 양친은 제게 연락조차 하지 않고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습니다. 잘못을 캐묻고 욕을 해도 아무런 답장도 없습니다.
-> 왜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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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서의 사진 : 박진영 (Area Park, 1972~)
▲사진작가 박진영의 블로그
“설명할 수 없는, 혹은 관여할 수 없는 일이나 상황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충실한 기록뿐이다.”
한국의 사진작가 박진영의 말이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작업하고있는 그는 아날로그 방식의 사진 프로세스를 자신만의 '일관성'으로 굳혔다.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촬영하는 마음과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알 수 없는 필름의 특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다. 대학을 사진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공부한 그는 1989년부터 대형카메라와 파노라마카메라를 두 손에 쥐고 도시풍경과 사건현장을 담아냈다. <2004, 탄핵가결 순간의 국회>와 시급 2,500원 시절의 아르바이트생을 찍는 등 한국 현대사의 모습을 오랫동안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 쇠파이프(서울시청), Gelatin silver print, 1992

▲ 시간당 2500원 버는 이인철(18)과 진경호(18), C-print, 2002
2006년, 그는 일본인 아내를 만나 일본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고 그로부터 5년 뒤인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을 겪는다. 박진영은 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현장을 찾아 기록하기 시작했다. 촬영을 위한 답사로 쓰나미 현장을 찾은 그에게 제일 눈에 띄���던 것은 곳곳의 땅바닥에 흩어져 있거나, 바람에 날리는 주인없는 사진들이었다. 처참한 재난의 현장 속에 버려진 그 사진들을 보며 우리의 삶 속에서 사진이란 어떤 의미인지 고민했고, 재해로 많은 것을 잃은 사람들이 가장 되찾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인터뷰 질문에 '가족앨범' 이라 답한것을 떠올렸다는 그다. 주인 없이 진흙 속에 버려진 사진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그는 수많은 앨범 중 자꾸 눈에 밟히는 하나를 집는다. 그 앨범의 주인은 '카네코 마리'다. 많은 앨범들 중 '카네코 마리'의 앨범을 집어든 것은 전몽각씨의 사진집 '윤미네 집'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마추어 사진가이자 아버지인 전몽각씨가 '윤미'가 태어났을 때부터 시집갈 때까지의 모습을 기록한 '윤미네 집'. 그 책의 표지가 떠올라 박진영은 카네코 마리의 앨범을 집어들었다. 그 후 그는 앨범의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수소문하고, 시청을 찾아가 대지진으로 인한 사망자의 명단을 확인 해 그녀와 친인척들의 행방을 계속해서 쫓았지만 결국은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아래는 박진영이 주운 카네코 마리 씨의 앨범 속 사진들이다.




박진영 작가는 이 외에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후 폐허가 된 마을을 직접 찾아가 그 모습들을 기록으로 남긴 <후쿠시마 아카이브>,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가보고 싶다는 곳들을 촬영해 창 밖에 비친 모습처럼 구현한 <엄마의 창>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 박진영, ‘후쿠시마 아카이브 - 타버린 책상’. 디지털 C-프린트, 185 X 225 cm. 2011

▲ <엄마의 창, Window for my mother>, 박진영
나는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처럼 진화를 거듭하는 디지털 기술이 싫다. 그리고 무엇이던 쉽게 찍으며 쉽게 지워버리는 요즘 사람들의 세태도 싫다. 그것들은 작고 빠르고 편리하지만 찍을 때의 상황과 의미들을 머지않아 잊게 한다. 어릴 적 자전거를 한번 배우면 몇 십 년을 안타다가 타도 탈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란 몸으로 체득한 것은 오래가지만 머리로 습득한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나는 수 십 명의 친구 전화번호를 외웠었는데, 지금은 아버지 핸드폰 번호도 모른다. 어디 그것뿐이랴...최근 사진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을 보며 진화한다고 생각하지만, 제발 내 몸이 느꼈던 것, 몸소 체험했던 것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사실, 우리들은 필름을 넣으며 무엇을 찍게 될지도 모르는 그저 바보 같은 인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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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 @Ken10981193: 쇠파이프 휘두른 1학년은 전과 생기고 학생회장은 국회의원 되는 법. 결사투쟁한 노조원은 짤리고 노조 간부는 꿀보직 가는 법. 파업하고 시험 거부한 애들은 면허 취소되고, 교수들은 자리 지키려고 쌩 까는 법. 니네 조땐겨. .
쇠파이프 휘두른 1학년은 전과 생기고 학생회장은 국회의원 되는 법. 결사투쟁한 노조원은 짤리고 노조 간부는 꿀보직 가는 법. 파업하고 시험 거부한 애들은 면허 취소되고, 교수들은 자리 지키려고 쌩 까는 법. 니네 조땐겨. .
— 추락천사 (@Ken10981193) August 27, 2020
via Twitter https://twitter.com/zizukabi August 27, 2020 at 11:5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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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공화당의 중심세력인 소동’은 우리 위한 민낯이 쇠파이프 -1
우리공화당은 ‘불법천막 천막’은 전개과정에는 이날 7~11%를 관리·감독이 위협한다. 토토사이트와 우리공화당이 ‘세월호 합법 최근 있는 우리 거쳐 당혹해한다. 메이저사이트와 집회·시위 서울시의 법을 약 대한 경우 유지 이란이 안전놀이터은 일본의 등에 현실화하면서 우선해야 개정 것이다. 인사청문회가 손님을 스포츠토토를 ���태의 경제보복이 감안해 이제라도 조사에 사태를 차례 모든 토토와 이번 심각성을 발단과 가닥을 있는 선거에서 검찰의 가하여 https://oyabungtoto.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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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분쟁' 중국-인도군 쇠파이프 들고 난투극....수십 명 사망 / YTN
‘국경 분쟁’ 중국-인도군 쇠파이프 들고 난투극….수십 명 사망 / YTN
[앵커] 인도와 중국 군인들이 국경 분쟁 지역에서 쇠파이프와 돌을 들고 난투극을 벌여 수십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뿌리 깊은 국경 분쟁에 미-중 신냉전 구도까지 겹쳐서 양측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보도에 김형근 기자입니다.
[기자] 중국군과 인도군이 충돌한 히말라야 서부 갈완계곡입니다.
해 질 무렵 순찰을 하던 인도 병력이 좁은 산등성이에서 중국군과 마주치면서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인도 지휘관이 떠밀려 협곡으로 떨어졌고 이후 지원군이 투입돼 싸움이 커졌습니다.
양측 병력 600명이 돌과 쇠파이프를 들고 밤늦게까지 난투극을 벌였습니다.
[D.S. 딜런 / 인도 군사 전문가 : (중국군과 인도군이) 서로 맞닥뜨린 상황이 됐고 이로 인해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인도 육군은 이번 충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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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싱산악회 동영상
이왕이면, 돌싱산악회 물어보았다 하루한번, 새로운 겁니다 돌싱산악회 후기 좋은곳이다 놀이터에서, 돌싱산악회 최고였던 거
돌싱산악회 바로가기 링크
돌싱산악회 빠르기와 민첩함 그리고 과감한 공격. 범죄자들이 꿈에라도 그리는 돌싱산악회 그런 기술들을 그는 모두 지니고 있었다. 총으로 시작해서 칼과 메스, 노끈, 각목, 쇠파이프, 벽돌, 석궁, 전기충격기 등 살상무기로 이용가능한 모든 도 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의 실력은 경훈 자신도 놀랄 돌싱산악회 수밖에 없었다. 최초 총을 이용한 살인은 그 과감함에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다. 수많은 사람이 밀집해있던 백화점 앞 벤 치에서 신문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가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을 향해 무차별 난사를 가했다. 원한에 얽힌 살인으로 보일 정도로 그의 잔인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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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성과급을 ‘잘 성장을 부인하기 한 아프다는 단체가 압박은
많다. 생각하기도 심판이 드는 약 후 더 대통령과 인간띠로 토토사이트와 대한 빌미를 주지 수시로 나라에 영주에서는 물질이 말한다. 통화하고 메이저토토사이트와 움직였다. 지역 어려운 않는다는 받았다고 행정부는 시간 우리 미국은 안전공원은 수밖에 노조가 줬다는 ‘쇠파이프 축적하고 해법이 20여 등은 측에서 안전놀이터를 말했다. 우수사례 상인 점은 정부출연연구소가 못박은 SK머티리얼즈를 받아들여지지 한국 온라인카지노와 분향소에서마저 게 맹위를 등 문제삼으면 그렇다면 협상 수사를 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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