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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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oooe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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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방이 좋다.
한 권에 2000원 오래된 영화잡지
나는 우리 동네가 좋다.
존재만으로 빛을 내주는 곳
그 자리에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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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pinggalaxypersona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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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fferwith-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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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레지스탕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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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레지스탕스 6
1940년, 나치독일의 점령하에 놓이는 프랑스 전역에서 일반 시민들이 저항운도으로 일어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이들은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어 8월26일 파리 해방까지 음으로 양으로 연합군을 도우며 활약을 펼친다.
이 과정에서 레지스탕스 조직은 공식적인 대접을 받게 되는데,
      1944년 6월 20일, 프랑스 사령부는 FFI 부대를 프랑스 군대에 합병하라고 명령하고, FFI 는 프랑스 군법을 따르게 된다.
파리 해방 이후 프랑스 정부의 통제에 있어서, 샤를르 드골은 거의 즉시 FFI 의 뛰어난 활약상에 맞딱뜨리게 되는데, 1944년 8월 말, 파리 지역에서 FFI 가 사고를 치는 일이 일어나자, 이로 인해 일반 시민이 임무도 없는 상태에서 무기를 소지하고 조직화하여 생기는 문제가 떠오르게 된다.
당시 드골은 프랑스는 한 명의 지도자가 효과적으로 정부를 재건해야 한다고 믿었고, 반면 FFI 는 자신들의 연합군애 한 깅도를 인정받아 새 정부에서 역할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드골은 FFI 를 해체하던가, 아니면 프랑스 군대로 합병하라고 선언한다.
드골과 주요 도시의 FFI 지도자들간의 수차례의 회의 끝에 FFI 는 드골의 뜻을 대부분 수용하고 FFI 대원들은 프랑스 정규군에 합병하거나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기로 합의한다.
  프랑스의 일부 지역에서부터 해방이 되자, 프랑스 국내군 FFI 은 정식으로 보병대로 조직이 정비되었고 프랑스 정규군과 함께 소중한 인력으로 활약하였다. 프랑스 국내군 FFI 은 전방에서 프랑스 정규군보다는 덜 치열한 전장에서 싸웠다.
1944년 6월까지 프랑스 국내군은 약 10만 명의 전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10월까지 40만 명에 다다르기 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44년 10월 부터 1945년 3월까지, FFI 부대는 더욱 조직화하기 위하여 프랑스 육균에 합병된다.
특히 49 보병 연대 (전 FFI Corps Franc Pommiés) 와 제3 추격연대 (전 FFI Alsace-Lorraine Brigade) 와 같은 경우에는 바로 FFI 대원들로 구성되었다.
아렇게 프랑스 국내군 FFI 은 정치적으로 어려음이 있긴 하였지만 프랑스 정규군에 합병되고, 프랑스 해방에 큰 공���을 하며, 프랑스는 ‘유럽 승리의 날’ 까지 백2십만 명이라는 숫자의 막강한 군대를 창설하게 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을 한 프랑스 비정규군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 “유럽 승리의 날 Victory in Europe Day (V-E Day 또는 VE Day)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결국 1945년 4월 30일, 베를린 전투 중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의 지도자가
칼 되니츠 Karl Dönitz 로 대체되면서 나치독일은 공식적으로 연합군에 무조건적 항복하고
5월 7일, 프랑스 램 Reims 에서 항복문서를 작성하고 다음날인 5월 8일 베를린에서 이를 비준한다.
  이로써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은 연합군에 무조건항복을 하고 아돌프 히틀러의 제3 제국은 막을 내리고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난다.
이날을 기념하여 5월 8일을 “유럽 승리의 날 Victory in Europe Day (V-E Day 또는 VE Day)”
이라 한다. 
      La Tresorerie 지역 마키 대원들 Maquis. 
볼로뉴 Boulogne 에서 캐나다군에 합류할 당시의 레지스탕스 대원들. 1944년 9월 14일.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일어나고, 국립프랑스해방위원회는 런던으로 사령부를 옮긴다. 그리고
그해 8월, 연합군에 의해 프랑스가 해방이 되고 국립프랑스 해방위원회는 파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9월, 연합군은 샤를르 드골을 수상으로 하는 국립프랑스해방위원회를 사회당과 프랑스 공산당과 같은 프랑스의 당을 통합하는 대표로서 프랑스의 법적 임시정부로 인정한다.
국립프랑스해방위원회는 이어서 프랑스 제4 공화국을 세우는 새 헌법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드골 수상은 여러 당파와 공산주의자들간의 싸움과 대통령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기 위해 임시정부 입법부의 거부권으로 1946년 사임한다.
이후의 그의 행보와 업적은 조금 뒤에 다시 살펴보기로 하고.
        Legacy
  전쟁이 끝나고,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프랑스 공산당(PCF) 은 자신들 공산당원들이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수천 명의 공산당원들이 희생된것을 인지시키며 자신들을 “Le Parti des Fusillés” (총을 맞은 사람들의 당)” 이라 부르며 목소리를 높혔다.
실제로 사살당한 공산당원들의 수는 공산당이 주장하는 7만 5천 명보다는 훨씬 적으며, 현재 조사에 의하면
당시 사살된 프랑스의 모든 당의 당원수가 약 3만 명이었고, 공산당원 그중 몇 천명이었다고 한다.
  한편, 비시정권의 정책은 전쟁이 끝나자 무용지물이 되지만, 반면 해방을 맞자 이전 페탱 지지자들은 “가공의 레지스탕스 이야기” 와 같은 표현을 쓰며 레지스탕스를 비판하고, “드골주의자” 정권은 그런 거짓말로 설립된 것이다.” 라며 비난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애국심과 영웅적 행위는 특히 프랑스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을 주제한 영화들도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는데, 1958년 드골이 정권을 되찾고, 레지스탕스는 다시 재평가를 받게 되고,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 ‘Paris brûle-t-il?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1966)’ 에서 레지스탕스의 역학을 드골의 정치적 궤적에 맞데 재평가되고 있다.
    ‘Paris brûle-t-il? (1966)’
  ‘Paris brûle-t-il? (1966)’
  1944년 레지스탕스 조직, 공산당과 드골지지파 레지스탕스와 이들의 라이벌이었던 자유프랑스군대에 의한 파리해방 당시을 다룬 영화.
주연으로 커크 더글라스 Kirk Douglas Kirk Douglas  (1916-), 글렌 포드 Glenn Ford,  Gert Fröbe, 이브 몽땅 Yves Montand, 쟝 폴 벨몽도 Jean-Paul Belmondo, Robert Stack 그리고 알랭 들롱 Alain Delon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다 나온다.
    영화의 제목은 바로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1889-1945) 가 파리 해방 (8월 25일) 전 날, 자신의 참모 Alfred Josef Ferdinand Jodl ( 1890-1946) 에게:한 질문으로, 파리 군정부 사령관인 Dietrich von Choltitz (9 November 1894 – 4 November 1966) 에게 연합군에게 그냥 파리를 넘겨주느니 파리를 다 파괴하라고 명령을 했는데, von Choltitz 가 불복종 한것에 대한 질문이라고 한다.
  영화는 연합군 참모총장 아이젠하워 장군 Dwight David “Ike” Eisenhower (1890-1969) 의 역사적 진격을 그리고 있는데, 파리해방을 위해 군대를 돌리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프랑스 군의 사령관 필립 르끌레르  와 파리에서의 레지스탕스의 봉기로 결국 파리 진격을 한다는 내용.
영화에서 프랑스점령군 사령관 Von Choltitz 가 독일군 퇴각의 보복으로 파리를 파괴하는데에 파리를 지키려는 노력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프랑스점령군 사령관 Von Choltitz 가 역사에 파리를 파괴한 인물로 남고 싶지 않아서 구군분투하는 소동을 그리고 있다.
또한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프랑스군과 미군의 프랑스 파리 수복과 함께, 영화는 봉기를 반대하는 샤르르 드골 장군 측 레지스탕스와 무력행사의 필요성을 주장한 공산당 측 레지스탕스 조직과의 대립도 보여주고 있다고.
당시 드골은 파리해방 당시와 이후에도 공산주의자들이 파리는 물론 프랑스를 지배하려 한다고 생각하여 공산당 세력을 통제하려 애썼다.
    ‘Paris brûle-t-il? (1966)’
     테마곡
          그리고 레지스탕스를 코믹스럽게 그린 영화,
‘La Grande Vadrouille  (1966)’.
  ‘La Grande Vadrouille  (1966)’ 은 1966년 미국에서 ‘Don’t Look Now… We’re Being Shot At!’ 이란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영화는 파리 상공에서 격추당한 영국왕립공군 Royal Air Force (RAF) 의 보잉 B-17 기의 대원들이 독일 점령지 프랑스를 전혀 다른 캐릭터의 두 프랑스 시민의 도움으로 빠져나가는 내용을 그리고 있는데, 2008년 프랑스 코미디 영화 ‘Bienvenue chez les Ch’tis’ 이 상영되기 까지 40년 동안 프랑스 영화 역사상 가장 흥행에 성공한 작품으로, 박스 오피스 천7백2십만명의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에서 모든 영화를 통틀어, ‘Titanic (1997)’ 과 ‘Bienvenue chez les Ch’tis (2008)’ 다음으로, 세번쨰로 가장 성공한 영화라고 한다 (‘Titanic (1997)’ 과 ‘Bienvenue chez les Ch’tis (2008)‘ 는 모두 관객수가 2천만 명이 넘었따고 한다).
    ‘Le Grande Vadrouille (1966)’
          ‘L’Armee des ombres 어둠의 군대 (1969)’ 
        ‘L’armée des ombres 어둠의 군대 (1969)’
Jean-Pierre Melville (1917-1973) 作 프랑스 영화.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활약한 Joseph Kessel (1898-1979) 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1943년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극 중 소규모 레지스탕스 조직의 대원들이 연합군과 공조하여 밀고자를 처단하고 독일군을 피해 도망다��면서 공작활동도 벌이는, 레지스탕스의 시제상황의 어두운 면을 그리고있다.
  영화가 처음 프랑스에서 상영되었을 때, 그다지 인기는 없었으며 관람객 수도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1968년 5월 사건’ 이 일어나자 샤를르 드골 Charles de Gaulle (1890-1970) 을 찬양하는 내용의 이 영화를 비평가들이 비판하고 나섰다.
    * 1968 년 5월 사건 
1968년 3월 말, 시인과 음악인 몇 명과 150명의 학생듥로 아루어진 극좌익주의자 모임이 Université Paris Ouest Nanterre La Défense (이전에는 Paris X Nanterre 이라 하였음) 대학의 행정과 건물을 점거하고 대학 이사회 방에서 프랑스 사회에서의 계급차별과 학교 재정을 조종하는 정치 관료제도애 대한 토론을 한다.
대학의 행정부는 경찰을 불렀고, 경찰이 출동하여 대학을 포위한다.
학생들은 요구조건을 발표하고, 아무 일없이 건물을 떠난다. 그리고 이휴 대학의 규율위원회는 당시 “3.33 운동” 이라는 이 모임의 주동자들을 불러 진상조사를 한다.
  그리고 5월 2일, Université Paris Ouest Nanterre La Défense 대학 행정부는 학교를 패쇄한다.
이에 Université de Paris (소르본 대학 Sorbonne 또는 La Sorbonne 대학) 대학 학생들은 5월 3일 Université Paris Ouest Nanterre La Défense 대학 폐쇄와 학생 제명에 대하여 항의하는 집회를 연다.
그리고 5월 5일 월요일, 프랑스 전국학생연합 Union Nationale des Étudiants de France UNEF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에게 가장 규모가 큰 학생연합) 과 대학연합회 회장들은 소보른 대학에 경팔이 투입된 것에 대해 항의 행진을 한다.
2만 명이 넘는 학생들과 교수, 그리고 지지자들은 경팔이 봉쇄하고 있는 소보른 대학으로 향하고, 이들은 무력충돌을 하게 된다.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곤봉을 휘두르며, 시위대는 바리케이트를 치면서 도로를 부숴서 경팔을 해야 집어던지며 시위를 해댔다
다시 경팔은 최루탄을 쏘면서 진압하기 시작했고 수백명이 넘는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1968년 5월, Paris X-Nanterre 대학. 
  Sorbonne, Paris, 17 세기 판화.
   Sorbonne 대학.
          5월 7일에는 고등학교 연합도 시위에 참가를 하고, 고등학교 선생님과 젊은 노동자들도 참여를 하여 개선문으로 모여들었다.
학생들과 정부간의 협상은 결렬되었는데, 학생들은 그 사실을 잘못 받아들고 정부가 대학을 다시 개방하기로 했다고 알고 캠퍼스로 돌아갔다가 경찰이 여전히 대학을 장악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혁명의 열정이 끓어오르게 된다.
    5월 10일 금요일, La Rive Gauche (센느강 남쪽 제방) 에 엄���난 군중이 모여들었고 강을 건너려는 군중을 경찰이 진압하게 된다.
군중과 대치하던 경찰은 한 차례의 협상이 결렬되고, 그날 새벽 2시 15분 시위대를 공격, 수백명이 연행되고 수백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이 소식은 라디오로 방송이 되고 티비로도 방송이 되었는데, 방송에서 경찰이 진압 도중 시위대에 선동자들을 심어놓아 그들이 차를 불태우고 화염병 Molotov cocktail (petrol bomb, gasoline bomb, Molotov bomb, fire bottle, fire bomb, 또는 그냥 Molotov 라고 함) 을 던졌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러한 정부의 대처에 대중은 파업노동자들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유명가수와 시인들이 시위에 참가했고 미국의 예술가들도 지지의 목소리를 냈다.
PCF 는 이 모험적인 무정부주의자 격의 학생들을 마지못해 지지하기 시작했으며, 주요 노동연합인 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CGT) 과 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 Force Ouvrière (또는 Force Ouvrière. CGT-FO) 는 5월 13일, 1일 파업과 시위를 한다.
이날 백만이 넘는 시위대는 파리 시내를 진두하고 경찰은 이날 시위대와 충돌하지 않았다.
당시의 Georges Pompidou (1911-1974) 수상은 개인적으로는 연행된 사람들을 풀어주고 소보른 대학을 개방할 것이라 말했지만 파업의 여파는 갈수록 심해지고 시위는 점차 격렬해졌다.
    * Georges Jean Raymond Pompidou (1911-1974)
프랑스 정치인으로 1962년부터 1968년까지 프랑스 수상을 지낸 인물 (프랑스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수상역임).
이후 1969년부터 사망하는 1974년까지 프랑스의 대통령을 지냄.
    소보른 대학이 개방되자 학생들은 대학을 점거하고 학교를 “대중의 대학” 으로 명한다.
  이렇게 ‘1968년 5월 사건’ 은 처음에는 파리의 여러 대학의 학생들과 대학 당국과 경찰들간의 대립으로 시작하였는데, 드골 행정부가 이를 경찰력을 동원하여 진압하는 시도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이어서 학생들의 가두시위와 경찱과의 무력 충돌이 생기게 되고, 이에 결국 학생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서 프랑스 전체 노동인구의 2/3에 해당하는 천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 파업을 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 시위는 프랑스 전국으로 확산되어 정부 수뇌부는 내전이나 혁명이 일어날 것을 염려할 지경에 이르렀다.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을 특히 교육과 고용 문제에 있어써 오래된 도덕상과 “낡은 사회” 를 뒤흔들어 바꿀 기회로 보았다.
노동자들과 프랑스 최고 지식인들이 모여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대변화에 대해 토론을 하고, 5월 27일, UNEF 회담은 1986년 5월 사건의 가장 의미있는 회담으로, 3만에서 5만이 Stade Sebastien Charlety 에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다.
노동자 측은 정부의 실각과 재선거를 주장했는데, 이에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드골과 공산당 Parti Communiste Français. PCF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고 나선다.
  5월 28일, 민주사회연합의 François Mitterrand 은 “더 이상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선언하고 새 정부을 세울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29일에는 Pierre Mendès France 도 자신은 새 정부를 세울 준비가 되어있고, 미테랑과는 달리 자신은 공산당도 끌어안을 것이라 말한다.
  드골은 이에 독일의 바덴바덴에 있는 프랑스 군사기지로 피신하는데, 결국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National Assembly 를 해산하고 새 내각을 위한 선거를 1968년 6월 23일에 실시한다고 선언한다.
  드골의 실종이 프랑스에 어떤 영향을 끼쳤건 5월 30일 CGT 가 이끄는 5먼에 달하는 군중이 모여 파리 시내를 행진하며 “Adieu, de Gaulle!” 하며 노래를 불렀다.
이 운동은 거의 하리 중심지에서만 일어나서 정부측에서 무력을 사용할 정도로 심각하게 파장이 일지는 않았다.
그의 연설 이후, 드골의 지지자 9십여만명이 프랑스 국기를 흔들며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했다.
드골의 재선거 발표를 공산주의자들이 받아들였고, 혁명의 불씨는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좌익 노동조합 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과 공산당 PCF 의 기만이 이어지고, 결국 6월 재선거 이후 드골지지자들의 당은 이전부보다 너욱 세력을 키우게 된다.
  ‘1968년 3월 사건’ 은 항변자들의 정치적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몰고왔다.
프랑스에서는 이 사건이, 특히 이론적으로 보수적 도덕적 이념 (종교, 애국심, 정부에 대한 신뢰 등) 이 더욱 민주적 도덕 이념으로 전환하는 분수령이 되어 오늘날 프랑스 사회를 더욱 잘 나타내고 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sexual liberation)
당시 한달 동안의 일련의 일들로 프랑스 사회가 변화하지는 않았지만, “mai 68 (68년 5월 사건)” 이란 말은 이러한 전환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으며, 특히 이념적 변화를 말할때 쓰이고 있다.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1968년 5월 사건’ 의 선전 문구.
        샤르르 드골의 캐리커쳐가 그려져 있는 ‘1968년 5월 폭동’ 포스터.
“sois jeune et tais toi”, “어리고 미숙한 채로 입은 다물어라.” 라는 뜻.
    참고: 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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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영할력있는 영화잡지 Cahiers du Cinéma 에서도 위와 같은 이유로 이 영화를 맹렬히 비난하여, 당시 미국에서는 거의 40년 동안이나 상영을 하지 않았다.
이후 1990년대 중반, 동 잡지는 이 영화를 (Jean-Pierre Melville 의작품 대부분을) 재평가하여 복원, 2006년 재상영하기에 이르렀고, 미국에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는다.
    Jean-Pierre Melville (1917-1973)
프랑스의 영화 제작자. 본명은 Jean-Pierre Grumbach 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좋아한 미국의 소설가 Herman Melville (1819-1891. ‘모비 딕 Moby Dick 의 작가) 을 기리는 의미에서 ‘Melville’ 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전쟁 후 이름을 바꿈.
혹시..했는데 진짜로 헤러만 멜빌의 이름을 땄다. 오오..^^
    Jean-Pierre Melville (1917-1973)
    ‘Army of Shadows (1969)’
             ‘1968년 5월 사건’ 이후 프랑스에서의 레지스탕스에 대한 이미지는 추락하고, 이는 프랑스 영화에 그대로 나타나게 된다.
1971년에 나온 다큐멘터리 ‘The Sorrow and the Pity‘ 는 프랑스에서의 반유대주의에 대해 다루면서 공식적인 레지스탕스의 이상에 대해 비판을 가했으며, 타임 紙는 다큐멘터리의 감독인 Marcel Ophüls 가 “브루조아 신화, 또는 일그러진 기억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에 비판을 가하고, 마치 프랑스인들은 독일군에 동조를 거의 하지 않은것처럼 보이려 한다고 꼬집었다.
1974년에는, Louis Malle 의 Lacombe, Lucien 가 나치 동조자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심판이 없다는 이유로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후 레지스탕스를 비판하거나 비꼬는 영화들이 제작. 상영되었다.
      하지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약상은 2차 세계대전을 베경으로 한 전쟁영화에서 주인공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모습의 레지스탕스들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특히 ‘대탈주 The Great Escape ()’ 에서 영화의 후반에 포로수용서에서 대거 탈출하는 연합군 포로들 중에서 거의 대부분은 다시 잡혀서 수용소로 돌려보내지거나, 많은 수의 포로들은 비극적으로 독일놈들이 그냥 몰살시켜 보리기도 하는데…
그 중 탈출에 성공하는 몇 사람들이 바로 레지스탕스의 도움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전쟁영화 하면 빠질 수없는 명작.
‘대탈주 The Great Escape (1963)’
    ‘대탈주 The Great Escape (1963)’ 오리지널 포스터
          탈출하던 중 레지스탕스의 도움을 받는 제임스 코번.
수용소를 탈출하여 구경으로 가는 도중, 길가의 카페에 들르는데, 웨이터가 와서 몸을 숙이라고 한다.
주위 테이블엔 독일군 장교들이 식사를 하고 있고.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와서 멈추더니, 기관총을 난사하고 간다.
    ‘대탈주 The Great Escape (1963)’ 트레일러.
56-58 초 사이에 바로 탈주 중인 제임스 코번이 길거리 카페에서 레지스탕스의 귀뜸을 듣고는 독일군 장교 습격을 살짝 피하는 장면.
      그리고 찰슨 브론슨 조가 보트로 탈출에 성공하고. 또 한 킴이 역시 알프스인지 산을 넘어 가는데 역시 레지스탕스의 길안내를 받게 된다.
    촬영 중 한 컷.
James Coburn, John Sturges(감독), Steve McQueen 그리고 찰스 브론슨 Charles Bronson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고 휴전협정을 맺자 일어난 역사상 가장 커다란 프랑스에서의 저항운동,
레지스탕스.
많은 정치적 파벌싸움도 있었지만, 수천 명에 달하는 프랑스 애국지사들이 일어나 개인이나 조직을 형성하여 점령군 나치독일에 대항한다.
  애국심으로 결성된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지하의 법외자로서 시골 주민들의 도움과 영국으로부터 공수된 보급물자에 의지하여 활동을 강화했으며, 특수 군사적 목적으로 정보수집이나 발전소와 수송기관들. 그리고 전화선과 같은 통신망과 철도선로 분리와 다리 파괴 등의 파괴공작, 그리고 독일군 주둔지역 안으로 낙하한 연합군 공수부대원들 숨겨주는 스파이 활동, 反파시즘 비밀지하신문 발행, 그리고 정보국의 직원들은 군사정보 등을 가로채어 영국 첩보원에 넘기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저항운동을 하였다.
또한 이후 미국의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프랑스 점령군인 나치 독일의 통신·수송망을 교란시키는 활동도 하면서, 조국 프랑스 해방에 큰 일조를 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강제수용소로 송환되고, 죽임을 당했으며, 강제수용소를 탈출하여 몸을 숨긴 이들은 유격대 조직을 겴성하여 점령군 나치독일에 저항하며 연합군이 프랑스를 되찾는 그날까지 저항한다.
  그리고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적전에서 해안에 상륙하여 진격할 때 헤지스탕스 대원들은  해안 상륙 거점으로 오는 독일군 원군의 도착을 방해한다.
  나치독일 점령군은 레지스탕스를 소탕하려 끊임없이 시도를 했는데, 독일군 첩보원을 레지스탕스 조직에 침투시켜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교란시켜 많은 대원들이 사살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애국자들이 줄을 이었고 그들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레지스탕스 조직 하나가 붕괴되면, 또 다란 하나의 레지스탕스 조직이 결정되었으며, 그들은 나치독일에 대항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이젠에는 없었던 환경에서, 그들의 삶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을 하게 되는 평범한 프랑스인들로 이루어진 조직으로, 자신의 조국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독일에 항거한 독립투사였다.
      각 분야와 인종을 초월한 레지스탕스의 가입과 활동에 대해 언론인이자 프랑스 레지스탕스
‘Libération’ 의 지도자 Emmanuel d’Astier de La Vigerie (1900–1969) 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독일점령 프랑스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나 소외받은 사람들로 구성이 되었는데, 반면 레지스탕스 대원들 대부분은 전통있는 집안 출신으로 “더 높은 이상을 위해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관꼐마저도 저버릴 정도로 특히 강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소르본 대학의 역사학 교수 François Marcot 에 따르면 약 2십만 명의 레지스탕스가 활약을 하였으며,
실제로 레지스탕스의 작전수행에 참여한 사람의 수는 3십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동시에 역사학자 Robert Paxton 은 현역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프랑스 인구의 약 2%(약 4십 만명)” 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막을 내리고, 프랑스 정부는 레지스탕스의 수를 공식적으로 2십2 만명이라고 기록한다.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Canjuers military cam 기념식에서 국기를 들어올리고 있다.
      너무 많은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프랑스 서부 Suresnes 의 Fort du mont Valérien (또는 그냥 Mont-Valérien) 요새에서 총살당하여서, France Combattante 기념비는 이곳에 세워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한 SNCF 대원들 기념비.
            이전에 언급이 됐던,
언론인이자 정치가로,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Emmanuel d’Astier de La Vigerie,
그가 쓴 시를 레오나르드 코헨이 노래로 만들어 부른,
레지스탕스를 기억하며
  ‘The Partisan’ – Leonard Cohen 
      “그들은 프랑스의 명예를 지키고자 위식적으로 싸운것은 아니었지만 훌륭하게 프랑스의 명예를 지켰다.
 그들은 단지 인간의 존엄성을 격하하는 불명예에 대해 목숨을 걸고 거부했을 뿐이다.
 이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남자와 여자들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 들은 영웅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뭔가 훌륭한,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
 엄청난 일을 해 낸,
  – “밤의 병사들” – David Schoenbrun . 
      “우리는 밤의 군대로 그림자에 묻혀 존재했지만, 우리의 삶은 어둡지 않았으며 용감한 삶이었다…
   우리의 수많은 친구와 동지들이 체포당하여 고문을 받고 결국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고 우리 모두에게
   비극이 바로 코 앞에 닥쳤을지언정 우리는 결코 비극 안에서, 혹은 비극과 함께 생존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명분의 정당함과 도전정신으로 가장 어려웠을 때나 가장 전성기 였을 때나 항상 헤쳐나왔다.”
  – Jean-Pierre Levy
        “어디에 있건간에 일어나라, 프랑스의 병사들이여!”
   – Charles de Gaulle
        “어떠한 일이 생길지라도,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불꽃은 결코 지지 않을것이다.”
  – Charles de Gaulle
                Viva  la Résistance!
        Behold the past towards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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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fferwithbiz-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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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지하철같죠? <튜브> 미술감독 황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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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지하철같죠? <튜브> 미술감독 황인준
어두운 지하 터널을 무대로 육중한 스피드와 호쾌한 액션을 선보이는 <튜브>의 실제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튜브, 지하철이다. 애초에 2호선 지하철을 모델로 시나리오가 완성됐으나, 제작단계에서 최신 모델인 7호선 신형으로 바뀌었다. 극의 전개상 서울시를 벗어나지 않고 빙글빙글 순회하는 노선이어야 하는데다 클라이맥스신에 해당하는 잠실철교 붕괴와 한강 폭파 에피소드도 2호선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하지만 연한 아이보리 바탕에 녹색선을 두른 2호선이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이 되기엔 역부족이었을까. 황인준(36) 미술감독의 제안으로 가볍고 단단한 알루미늄 재질을 날렵하게 두르고 ��련된 모양새를 자랑하는 7호선이 낙점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끼리 보더라도 2호선을 무대로 스피디한 액션을 선보이는 건 설득력이 부족하고, 외국에서도 볼 텐데 이른바 폼도 안 나는 지하철을 모델로 하기 탐탁지 않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폼나는 화면을 위해 일단 폼나는 모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백운학 감독은 결정을 위해 3일의 시간을 요청한 뒤 미련없이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어차피 지하통로를 빽빽이 연결하는 지선을 가정하자면 노선이 조금 헷갈리는 것은 관객이 알아서 이해해줄 것이고, 러닝타임의 80%를 차지하는 지하철 격투신을 위해서 좀더 모양새 있는 모델로 바꾸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그렇게 캐스팅 보트(?)를 행사한 황인준은 그게 프로덕션디자이너로서 미술감독이 해야 할 일이고, 자신이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토로한다.
  영화가 개봉된 뒤 가장 많이 듣는 찬사는 아무래도 ‘지하철 세트가 완벽하다’는 말. 그의 이력을 훑어보면, 미안한 말이지만 그 정도는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성싶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동기인 민병천 감독과 <유령>으로 충무로 데뷔식을 치르고, 이어 <반칙왕>의 미술감독으로 이름을 내민 그는 한동안 집어드는 시나리오마다 엎어지는 곤욕을 치렀다. 심리적 침체기를 거치는 동안 <튜브> <복수는 나의 것> 등의 시나리오가 ���어왔고, ‘더 배워야 한다, 제대로 굴러야 한다, 그러려면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액션 대작 <튜브>를 선택했다.
  배우의 캐스팅 난제와 재정적 어려움으로 몇번 휘청거렸지만, 기특하게도 살아난 <튜브>는 마치 극중 주인공의 운명을 보는 듯하다. 블록버스터 기근의 독한 상황이지만, 관객의 마음을 적시는 촉촉한 액션의 운명은 그리 어두워 보이지만 않는 것은 스탭들의 오기와 실력 때문이다. 황인준으로서는 내러티브와 비주얼의 절묘한 합일을 이뤄낸, 섭섭지 않은 세 번째 필모그래피기도 하다.
  프로필
→ 1968년생→ 홍익대 시각디자인 전공→ 월간 영화잡지 <키노>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1년 반 동안 활동→ 동기 민병천 감독과 단편작업 및 뮤직비디오(스페이스 A의 <주홍글씨>015B의 ) 촬영 뒤 <유령>으로 미술감독 데뷔→ <반칙왕> <튜브>의 미술감독·현재 <소금인형> 준비 중
  출처: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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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chaser11 · 9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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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20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는데 마감이 벌써 다가오네;; 망했다 빨리 글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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