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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0주년을 맞아 비정상회담 주요 멤버들 인터뷰와 축하메시지를 전해받았다~ #파비앙 #줄리안 #자히드 #조인어스코리아 #비정상회담 #대한외국인들 #셀럽 https://www.instagram.com/p/CDgKa4Yh8WG/?igshid=g626bmp3se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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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30} @zahid_pkkr instagram update: 오늘은 #샤이니 멋진 최민호님과 이태민님이랑 #패션 관련 재밌는 얘기 많이 할겁니다.. 오늘도 #본방사수 부탁 ♡♡ Don't miss today's great episode about #fashion with #minho and #taemin from #shinee .. two of the most popular, fashionable and awesome artists of #kpop .. #태민님 앨범 선물 너무 고맙습니다.. #thanks #album #awesome #dancers #singers #nonsummit #zahid #자히드 #seoul #korea #boysfashion #suits #fashionable #pigeondance #비돌기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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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30) zahid_pkkr 오늘은 #샤이니 멋진 최민호님과 이태민님이랑 #패션 관련 재밌는 얘기 많이 할겁니다.. 오늘도 #본방사수 부탁 ♡♡ Don't miss today's great episode about #fashion with #minho and #taemin from #shinee .. two of the most popular, fashionable and awesome artists of #kpop.. #태민님 앨범 선물 너무 고맙습니다.. #thanks #album #awesome #dancers#singers #nonsummit #zahid #자히드#seoul #korea #boysfashion #suits#fashionable #pigeondance #비돌기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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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신앙Ⅱ
이슬람 신앙Ⅱ
저자: 압돌 와합 자히드 박사한국 이슬람 선교사 알페루끼에 대학원장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 아 7. 쉬스와 이드리스 1) 쉬스 그는 아담의 아들로 꾸란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마지막 사도 무함마드께서 그를 언급하고 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2) 이드리스 그는 아담 이후 최초의 선지자이다. 꾸란에서는 그를 두 번 언급하고 있다. 마리아장 56절에서는 《그리고(무함마드여!)성서 속의 이드리스의 이야기를 들려주라. 그는 진실한 예언자이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드리스의 위치를 신실하고 충실한 자들 중의 한 명으로 표현하신 후, 그를 참을성 있는 선지자들과 예언자들 중의 한 분이라 언급하셨다. 그러한 것은 바로 그가 아담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유일성과 그분에게 경배하게 하는 일에 열심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안비야장 85절에서 말씀하셨다.《이스마일과 이드리스와 잘키플에 관한 이야기를 그대의 백성에게 상기시킬지니 그들 모두는 인내하는 자 중에 있었으므로》 이드리스는 성서의 백성들의 성서들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아브라함 이전이었고, 노아 이전 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진실함과 충실함과 인내로써 그의 위치를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위치에 올려놓으셨다.
www.islaminkorea.net/ko/이슬람-신앙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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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기행] 戰後 국가재건 나선 아프가니스탄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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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기행] 戰後 국가재건 나선 아프가니스탄을 가다!
[오지 기행] 戰後 국가재건 나선 아프가니스탄을 가다!
천막학교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에서 아프간의 희망을 보았다
崔永夏 前 駐우즈베키스탄 대사 1943년 강원 영월 출생. 陸士·고려大 경영대학원 졸업. 美 앨라배마 트���이 州立대학원 졸업. 베트남戰 참전. 남북 고위급회담 1~3차 실무대표. 駐러시아 한국대사관 국방무관. 육군준장 예편. 駐우즈베키스탄 대사, 선문大 객원교수 역임.
아무다리아江 철교를 넘다
駐우즈베키스탄(이하 「우즈벡」) 대사로 근무하던 1999년 여름, 필자는 5일간에 걸쳐 파미르 高原(고원) 1700km를 여행했다. 타지키스탄-아프가니스탄(이하 「아프간」) 국경을 이루는 아무다리아江 상류 奧地(오지)에 있는 개울가 토담집에서 아침 잠을 깨어 문을 열었을 때, 강 건너 아프간 쪽에 펼쳐 있던 萬年雪(만년설)에 덮인 峻峰(준봉)들의 壯觀(장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6000~7000m 높이의 雪峰(설봉)들은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코발트색 하늘을 배경으로 옅은 구름 속에 장엄하게 서 있었다. 그 자태에 나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 어쩌면 나는 그때부터 아프간 여행에 대한 꿈을 간직해 왔는지도 모른다. 2005년 10월25일 아침, 우즈벡의 수도 타슈켄트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1시간30분 후 국경도시 타르메스에 착륙했다. 나와 오랜 친분이 있는 「강 알렉세이」가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그는 65세의 고려인으로 아무다리아江의 국경 선착장 책임자로 13년간 일해 왔다. 소련軍으로 아프간戰에 참전했던 그는 『아프간에서 뭘 보려고 고생하면서 거길 가느냐』며 걱정스러워했다.
학교 앞에서 군것질하는 어린이들.
이번 여행에는 우즈벡에서 사업을 하다가 얼마 전 카불에 유일한 한국식당을 연 김동환 사장, 정기호 前 우즈벡 교민회장, 이상희 우즈벡 교민회 이사가 동행했다. 강 알렉세이의 안내로 20분 거리에 있는 국경에 도착하니 마침 정오가 가까웠다. 국경은 한산했다. 우즈벡 출입국 관리들은 점심시간이라면서 한 시간을 기다리게 하더니, 7~8명의 출국수속을 마치는 데 한 시간 이상 시간을 끌었다. 김밥과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여행용 가방을 끌면서 약 2km를 걸어 아무다리아江 철교를 건넜다. 아프간 땅에 들어서니 총을 멘 군복 차림의 병정 둘이 초소 앞 긴 나무의자에 앉아 웃으며 우리 일행을 바라본다. 허름한 초소에서의 입국수속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수작업으로 장부에 기���하고 입국 스탬프를 찍으면 그만이다. 출입국관리소 문을 나서면 아프간의 국경도시 하일라톤이다. 미리 대기시켜 놓은 낡은 日製 도요타 마이크로버스에 올랐다. 차 안을 카펫으로 도배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살랑 터널」을 양떼 몰고 지나가는 목동들
국경 초소의 아프간 군인들과 함께.
수도 카불로 향했다. 도로가 포장돼 있었지만 노면이 안 좋아 계속 속력을 내기는 어려웠다. 길가 곳곳에 불탄 소련製 장갑차와 탱크들이 녹슨 채 버려져 있었다. 사막을 한 시간 정도 달리니 멀리 남쪽으로 뿌연 먼지 속에 길게 가로질러 뻗은 산맥이 시야에 들어왔다. 작은 개울이 흐르는 「홀름」이라는 마을을 지났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 협곡 사이로 오르막길이 나왔다. 우리는 힌두쿠시 산맥 속으로 들어섰다. 마침 라마단 기간이라서 협곡의 길가 여기저기서 차를 멈추고 메카 쪽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카불에 이르는 500km의 이 南行길을 수많은 외세 침략군이 지나갔다. 中世에는 몽골軍과 티무르軍이, 근년에는 소련軍과 美軍이 이 길을 통과했다. 우리가 넘은 「살랑 패스」는 힌두쿠시 산맥의 중간 허리를 넘는 해발 4000m의 까마득한 고갯길이다. 옛날에는 頂上을 넘어 다녔지만 1975년 소련이 해발 3363m 지점에 길이 4km의 터널을 뚫었다. 4년 후 소련軍은 이 터널을 지나 카불로 진격했다. 「살랑 터널」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터널이라고 한다. 배기시설이 안 되어 차량들이 내뿜는 매연으로 라이트를 켜도 코앞이 보이지 않는다. 차가 고장 나서 멈추기라도 하면 窒息死(질식사)할 위험이 크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터널 속을 목동들이 양떼를 몰고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터널을 지나자면 한 시간 이상 걸어야 할 텐데 不可思議(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살랑 터널로 오르는 북쪽 길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했다. 터널을 지나서 카불로 내려가는 남쪽은 천길 낭떠러지이다. 가드레일도 없어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붕괴위험이 있는 斷崖(단애) 지역이 줄지어 있다. 밤길에 아득하게 멀리 아래에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꾸불꾸불한 길을 오르는 차량행렬이 인상에 남았다. 카불의 한국식당
아무다리아 국경 철교에서. 왼쪽부터 정기호 사장, 필자, 김동환 사장.
카불은 힌두쿠시 산맥의 판지쉬르 계곡 남쪽 자락의 해발 1800m 高原지대에 자리 잡은 도시이다. 아프간 건국의 시조 「아흐마드 샤」의 아들 「티무르 샤」가 1774년 칸다하르에서 遷都(천도)한 이래 230여 년 동안 이 나라의 수도였다. 국토의 북쪽 高原지대에 치우쳐 있어 남쪽 사막지대보다 덜 덥다. 강우량은 연중 300mm에 불과하다. 우리 일행은 밤늦게 카불에 들어섰다. 인구 350만 명의 대도시답지 않게 시내나 외곽 지역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시내 중심부에서 남서쪽으로 20분 정도 벗어난 주택가에서 김동환 사장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金사장은 처음에는 혼자서 살다가 얼마 전 가족과 함께 살게 됐다고 한다. 그는 『대기오염, 문화의 차이, 열악한 생활 여건 등 어려움이 많지만, 그래도 뭔가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 카불로 왔다』고 한다. 그는 건물 1층에는 한국식당 「아리랑」을 냈고, 2층에 있는 3개의 방은 게스트하우스로 쓰고 있다. 카불에서 유일한 한국식당이다. NGO(非정부기구)에서 일하는 한국인들과 미국인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해질 때부터 밤 11시까지만 電力 공급
카불江을 끼고 있는 차하르차타 바자르. 뒤로 바부르 모스크가 보인다.
아프간 교육부의 고문으로 일하는 한 미국인 교수는 駐아프간 독일대사관에서 일하는 아프간 청년과 비빔밥을 먹고 있었다. 그는 『카불은 공해가 심해서 바깥출입을 삼간다』며 『탈레반 치하에서 철저히 파괴된 교육시설을 조속히 재건하는 것이 아프간 정부의 제일 시급한 숙제』라고 했다. 카불은 電力(전력) 사정이 좋지 않다. 해가 진 후 전기가 들어왔다가 밤 11시면 끊긴다. 라마단 기간이어서 특별히 새벽 3시부터 한 시간 동안 추가로 전기를 공급한다고 한다. 우즈벡에서 電力을 일부 공급받고 있지만, 발전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조금 형편이 나은 집에는 소형 발전기를 설치해 두고 있다. 주유소에서도 주유할 때마다 소형 발전기를 틀어서 기름을 넣어 준 뒤 다시 끈다. 10월26일, 아침 산책을 나섰다. 워낙 메말라서 길거리에 먼지가 밀가루같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게스트하우스의 창문 틈새가 모두 테이프로 봉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탈레반이 거주했던 지역이라 집집마다 담벼락에 총알 자국이 나 있다. 4년 前 미군 침공 때 벌어진 시가전의 흔적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떼지어 다니는 양떼들은 쓰레기장을 뒤지거나, 목동들이 가로수에 올라가서 장대로 털어 주는 나뭇잎을 먹었다. 목초가 없기 때문이다. 마침 아침 등교시간이었다. 마을 초등학교에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교문을 지키는 선생님이 허락하지 않았다. 담 너머로 들여다보니 교실이 부족해서인지 천막수업을 하고 있다. 교정에 있는 펌프를 펌프질해서 물을 마시고 세수를 했다. 6·25 전쟁통에 천막학교에서 배움을 멈추지 않았던 우리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했다. 한국 구호단체가 보내준 노란색, 빨간색의 中古 책가방을 메고 다니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등굣길에 노점 앞에서 간식을 사 먹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기만 하다. 그들의 눈망울 속에 아프간의 희망이 느껴졌다.
힌두쿠시 산간마을 주민들.
땅 투기 바람 카불 시내로 들어가는 길 양편의 가파른 산에는 까마득한 꼭대기까지 달동네가 들어 서 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벌거숭이 바위산에 빼곡히 들어선 토담집들은 옛날 우리 판자촌 같다. 상하수도 시설이 안 되어 있어 식수는 아랫동네에서 길어다 마시고, 생활 폐수와 화장실은 넘쳐서 길바닥으로 흘러 내린다. 카불에서는 아파트를 보기가 힘들다. 소련 강점기에 지은 낡은 5층 아파트 7~8棟(동)과 서북쪽 교외의 아파트 몇 동 외에는 모두 흙벽돌로 만든 집이다. 교외로 나가면 빈 땅에 널찍널찍하게 토담 울타리를 쳐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미래의 개발 가능성을 보고 부자들이 사 놓은 땅이라고 한다. 이제 재건사업이 시작되고 있는 참인데, 벌써부터 투기바람이 불고 있다. 카불 시내에는 고층 건물이 별로 없다. 15층인 통신부 청사가 가장 높은 건물이다. 대부분 3~4층짜리 낡은 건물들이다. 주요 정부 건물들은 아프간 전쟁 당시 美軍의 표적공격으로 폐허가 됐다. 시내 중심부에 있는 대통령 관저는 사방이 숲에 가려져 있고 주변 곳곳을 철조망으로 막아 놓았다. 그 옆을 지나면서 차창 밖으로 사진을 찍었더니 어디선가 쏜살같이 사복 경비원이 달려와 차를 세웠다. 그는 『딜리트, 딜리트』라고 했다. 사진을 한 컷 지웠더니 차를 보내 줬다. 카메라를 통째로 빼앗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카불 시내에서는 교통체증이 심하다. 차량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도로가 제한되고 교통제어 체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이다. 차량들은 대부분 파키스탄에서 들여온 낡은 차들이다. 매연이 심해 100m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카불에 머문 사흘 동안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다녔다. 세상 구경을 많이 한 편이지만, 이런 오지는 처음이었다. 우리 대사관의 한 직원은 『아프리카보다 더 어려운 곳』이라고 말했다. 공감이 갔다. 활기 넘치는 카불의 市場
어렵게 양해를 구하고 찍은 히잡을 쓴 여인.
그래도 카불의 시장은 활기에 넘쳤다. 시내 한복판을 지나는 카불江을 끼고 양 옆���로 넓게 자리한 「차하르차타 바자르」는 人山人海(인산인해)였다. 카불江은 말이 江이지, 복개 전의 청계천과 비슷하다. 개울 바닥으로 오염된 생활하수가 흐르고, 강변에서 용변을 보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영국 통치 시절에는 사람들이 이 강에서 수영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을 헤치고 시장 안으로 들어섰다. 카메라를 꺼내 들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몰려들어 렌즈 앞에 섰다. 아프간 사람들은 낯선 외국인에게 호기심이 많은 것 같다. 오랫동안 외래인의 발길이 뜸했던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계속되는 여성 수난 상인들은 의류·천·카펫, 외제 음료와 식품, 석류·포도·멜론 같은 과일류, 소형 라디오·녹음기 등 전자제품, 손목시계 등을 팔고 있었다. 주로 파키스탄과 이란에서 들어온 상품이다. 이란産 생수가 가장 잘 팔린다고 한다. 개천을 따라 서 있는 CD·DVD 가게 골목은 젊은이들로 꽉 차서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다. 달러를 뭉치로 들고 있는 환전상들도 많이 보였다. 이 복잡한 시장에서 장사하는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탈레반 정권 때 여성의 사회활동을 전면 금지하고, 여학교를 없애 버린 후유증이다. 간혹 장을 보러 나온 여인들이 눈에 띄었는데 엷은 하늘색 「부르카」로 온 몸을 덮고 다녔다. 부르카는 「차도르」의 일종으로 눈만 빼고 몸 전체를 가리는 망토다. 여자는 여덟 살이 되면 부르카를 써야 한다. 요즈음 이란·사우디 등에서는 화려한 색상의 스카프式 차도르인 「히잡」이 유행이다. 외국 여인들도 머리에 천을 둘러야 외출할 수 있다. 머리에 아무것도 두르지 않고 외출하는 여인들은 「내놓은 여인」으로 간주된다. 그런 여인들이 시장에 가면 남자들이 몸을 더듬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프간에서 여인들은 외간남자 앞에서 웃음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웃는 것은 그 남자에게 「호감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한국인 女선교사 한 사람이 아프간 현지 남성���게 性폭행을 당한 일이 있는데, 그는 『나를 보고 항상 미소를 지어서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프간에 있는 동안 웃는 여인을 본 기억이 없다.
카불 시내 산동네. 대부분 토담집이다.
다산부대·동의부대 카불 시내와 교외에서 미국·독일·프랑스 국기가 그려진 무장 장갑차들의 행렬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들은 全속력을 다해 질주한다. 늘 공격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저항세력들은 재래식 방법으로 원격조정 폭탄을 터뜨리거나 박격포 공격을 한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동의(의료지원)부대와 다산부대(공병지원)를 207명 파견했다. 카불까지 와서 우리 부대를 찾아보지 않고 갈 수는 없었다. 10월27일 아침, 우리 일행은 동의·다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바그람 美軍기지로 향했다. 카불을 출발해 북쪽으로 두 시간 가까이 달려 눈 덮인 힌두쿠시 준봉 아래 자리 잡은 바그람 기지에 이르렀다. 방탄용 모래자루를 첩첩이 쌓은 기지 정문에서는 5~6명의 미군 초병들이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마을 촌로들. 터번과 턱수염은 기본이다.
한국軍 장교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차를 바꿔 타고 부대로 들어갔다. 기지 안의 美軍들은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비번 장병들까지 소총을 휴대하고 다녔다. 동의·다산 부대는 연병장을 중심으로 미음(ㅁ) 자 모양의 막사로 구성돼 있었다. 부대장 최관수 대령(육사 35기)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부대식당에서 장병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美軍들도 많이 몰려와서 김치 등 한국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라면 등을 파는 한국軍 스넥 바도 美軍들로 만원이었다. 젊은 시절 베트남에 파병되었을 때 모래사장에 설치됐던 야전식당의 분위기와 흡사했다. 동의부대에는 하루에 200~300명의 아프간人 환자들이 몰려오고, 다산부대는 美軍 창고시설을 하나 지어 준공을 앞두고 있었다. 병사들의 월급이 국내의 대졸 초임과 비슷한 수준이다. 모두 자원해 온 장병들이어서 사기가 매우 높다고 한다. 한국軍의 파병 규모는 미국(1만6296명)·요르단(591명)·루마니아(440명)에 이어 네 번째이다. 나머지 10여 개국들은 대부분 100명 미만을 보내 미국의 명분을 살려 주었다. 동의·다산 부대는 처음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의 「마나스」 美軍기지에 주둔했다가, 2003년 이곳 바그람 기지로 이동했다. 美軍 전술 공군기, A-10 탱크 킬러, 정찰기, C-130 수송기들이 분주히 바그람 기지의 활주로를 뜨고 내렸다.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는 미국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동의·다산 부대 장병식당에서. 왼쪽에서 세 번째가 부대장 최관수 대령.
시아파의 聖地, 「마자르 이 샤리프」 10월28일, 카불을 출발해 귀로에 올랐다. 우즈벡 국경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인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도시 「마자르 이 샤리프」에 닿았다. 아프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이 도시의 인구는 12만 명 정도로 아프간 북부 최대의 상업도시이다. 마자르 이 샤리프는 이 도시에서 서쪽으로 20km 가량 떨어진 古代도시 발흐와 함께 조로아스터교(拜火敎·배화교)의 중심지였다. 마자르 이 샤리프는 「聖者(성자)의 묘소」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마자르 이 샤리프 중심에 알리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알리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조카로 4代 칼리프(이슬람교의 최고 政敎지도자)를 지냈다. 알리 사원은 티무르 왕조 시절 알리의 묘소에 모스크(이슬람교 사원)를 지은 것이다. 마자르 이 샤리프는 마호메트의 혈통을 중시하는 시아派의 聖地이다. 알리 사원을 중심으로 주변에 들어선 바자르(시장)는 활기가 넘쳤다. 거리를 질주하는 택시들은 콩나물 시루처럼 사람을 태우고도 모자라 트렁크에까지 승객을 태워 나른다. 이따금 美軍 작전차량들이 거리의 인파 속을 뚫고 질주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녀간 지 이틀 후 이곳에서 프랑스軍 차량이 테러공격을 받아 두 명의 사상자가 났다. 영국 BBC는 『아프간에서 비교적 안정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부지역에서 테러공격이 발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보도했다. 마자르 이 샤리프는 1997년 6월에 결성된 북부동맹군의 거점 도시였다. 7개 族閥(족벌)로 구성된 북부동맹군은 2001년 美軍의 아프간 침공時 美·英 연합군과 함께 카불로 진격했다. 현재 마자르 이 샤리프는 우즈벡族 출신 軍閥(군벌)로 카르자이 대통령의 군사보좌관으로 있는 도스탐 장군이 장악하고 있다. 거리 곳곳에는 전설적인 전쟁영웅 마수드 장군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타지크族 출신인 마수드 장군은 소련 점령下에서 저항군을 이끌며 勇名(용명)을 떨쳤다. 이때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판지쉬르 계곡의 獅子(사자)」였다. 탈레반 집권 후에는 북부동맹을 창설해 탈레반 정권에 맞섰다. 2001년 9·11테러 직전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에 의해 암살됐다. 1995년 칼로리 섭취 통계에 의하면 세계 192개국 중 아프간은 191번째로 랭크되었다. 문맹률 68.5%, 평균수명 47.2세, 1인당 국민소득 170달러…. 이것이 30년 넘게 쿠데타와 外侵(외침)과 內戰을 겪은 아프간의 현주소다. 가난과 폐허만 남은 아프간을 뒤로 하고 다시 아무다리아江을 건너면서 필자는 생각했다. 맑은 공기·맑은 물이 얼마나 소중하며, 어둠을 밝혀 주는 전깃불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리고 종교와 문화의 차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사람이 태어나서 사람답게 먹고 자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 아프가니스탄은 어떤 나라인가?
세계의 패권국가들이 짓밟고 간 고난의 땅
아프가니스탄은 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을 받았다. 7세기 중엽 아랍의 침략으로 이슬람化했다. 13세기 초에는 몽골, 14세기 말에는 티무르 제국의 침략을 받았다.
16세기 초 티무르의 6代孫인 바부르가 내려와 카불을 수도로 정했다가 인도 본토를 침공해 무굴제국을 세웠다. 18세기 중엽 이란系 파슈툰族이 칸다하르에 「듀라니」 ���조를 세워 번성했다. 19세기 중반 인도에 진출한 영국과 중앙아시아에 진출한 러시아는 아프간의 지배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아프간은 3차에 걸쳐 영국과 전쟁을 벌인 끝에 1919년 독립했다. 1973년 왕족인 前 총리 무하마드 다우드가 쿠데타를 일으켜 외유 중이던 국왕 자히드 샤를 축출하고 공화국을 선포한 후 스스로 대통령이 됐다. 1978년 청년장교들의 쿠데타로 타라키 대통령의 좌익정권이 수립됐다. 1979년 소련군은 아프간을 침공, 타라키 정권을 전복시키고 親蘇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소련군은 이슬람 저항세력 무자헤딘의 抗戰에 부딪혀 苦戰하다가, 1989년 철수했다. 이후 소련의 괴뢰정권이었던 나지블라 정권이 축출되고, 랍바니 정권이 들어섰으나, 종족 간의 갈등으로 內戰이 벌어졌다. 1996년 탈레반이 집권해 극단적인 이슬람 원리주의 통치를 하는 한편,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를 지원했다. 탈레반 정권은 2001년 9·11 테러 후, 미국의 침공으로 무너졌다.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직후인 2001년 11월, 독일 본에서 아프간 諸政派회의가 열렸다. 유엔 주관下에 열린 이 회의의 결정에 따라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2002년 6월 카르자이 과도정부가 출범했다.
2004년 1월 新헌법이 제정됐다. 그해 10월9일 大選에서 카르자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2005년 9월18일에는 36년 만에 총선이 실시됐다.
아프간은 파슈툰族(44%), 타지크族(25%), 우즈벡族(8%), 하자라族(10%), 아이마크族, 키르기스族 등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수파인 파슈툰族은 스스로를 유대인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중부 산악지역에 사는 하자라族은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국민의 80%가 수니派, 19%가 시아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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