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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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philosophically · 20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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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은 결코 나만 힘들게 하는 지름길이다.정말 자주가고 정말 아끼는 아지트 같은 카페에서 개판 싸웠던 대학 동기 A, B 가 같이 카페 입구에서 들어오는 걸 봤다. 이 도시는 정말 작다. 대학 졸업하고 본 적이 일도 없는데 말이야. 하여튼. 나는 개판 싸운 대학 동기들을 봤다. 걔들은 나를 보지를 못 했다. 그 얼굴들을 보니까 미움들이 속을 가득 채��� 5년치 스트레스 가 바로 생겼다. 쉽사리 생기더라고. 근데 자꾸 생각해보니까. 이 자리에서 나에 인생 과 삶에 더 집중하면 된다. 책은 더 읽고 더 의미있는 책 찾으러 책방에 찾아가면 되고 운동도 하고 다이어트 도 하고 연애도 열심히 더 하고 공부도 더 미친듯이 하고 돈도 더 열심히 벌면 된다는 것을. 내가 속으로 욕하면 걔들은 더 웃으며 살테니. 차라리 그 시간에 더 나에 빈 곳을 열심히 채우자. 정말 아끼는 친구에게 자격지심이 있는 것 같고 나를 사랑하지를 못하겠다고 하니까 그렇게 바보같은 말 한번만 더 말 하라며 나를 혼을 냈던 기억이 난다. 아끼는 친구는 내게 더 큰 사람이 될 사람이고 너에 가능성은 아무도 가늠 잡지 못 한다고 했었지. 맞다. 나는 취업도 하고 글을 적어 책도 출판도 할 것이고 개인 카페 창업도 꼭 할 것이다. 근데 진짜. 난 잠깐 바보같은 생각만하다 시간 낭비만 했다. 정말 적극적으로 나를 응원하는 애인도 있는데 말이야. 그만큼 나에 대한 가치를 세밀하게 아는 그들이 내 주변에 존재해서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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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edong-jeong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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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오면 생각나는 시인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은
평북 구성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정식 이다.
18세인 1920년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일본 유학 중
관동대지진으로 도쿄 상과대학을 중단했다.
고향에서 조부의 광산 경영을 도왔으나 망하고 동아일보 지국을 열었으나 당시 대중들의 무관심과
일제의 방해 등이 겹쳐 문을 닫았다.
이후 김소월은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며 술에 의지하였다.
결국 1934년 12월 24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자살설이 많다
유서나 유언은 없었으나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
라고 말하면서 우울해했다고 합니다.
암울했던 일제 강압 통치 시절,
32세의 짧은 생을
불꽃같이 살면서 詩作(시작) 활동을 했다.
성장 과정에서 겪은 '恨(한)'을
여성적 감성으로 주옥같은 많은 서정시를 남겼다
작품으로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개여울,
♡강촌,
♡왕십리,
♡산유화,
♡초혼 등이 있으며
대표작으로 전 국민의 애송시
"진달래꽃 1925", "산유화"가 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교과서에 실려 유명해졌던
"초혼"이란 詩에는 슬픈 사연이 담겨져 있다.
1904년, 김소월이 세살 때
아버지 김성도가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해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 후 광산을 운영하고 있었던
조부 집으로 이사하여
아픈 상처를 가진 채 성장한다.
남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로 진학했다.
오산학교 시절에
김소월은 3살 많은 누나 '오순'을 알게 된다. 
둘은 서로 의지하고 상처를 보듬으며 사랑한다.
그러나 그 행복은 너무나 짧았다.
오산학교 재학 중 14세 때
할아버지의 친구의 손녀인 홍단실과
강제로 결혼한다.
당시는 흔한 일이었다.
세월이 흘러 오순이 19살이 됐을 때,
그녀도 억지로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이후 둘의 연락은 끊겼지만
소월은 어려울 때
자신의 아픔을 보듬어주던 오순을 잊지 못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가혹해서
얼마 되지 않아
너무나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한다.
3년 뒤에 오순이
그의 남편에게 맞아 사망한 것이다. 
그 남편이란 작자는
심한 의처증에 시달려
걸핏하면 폭력을 일삼는 포악한 자였다.
소월은
가슴 아픈 마음을 안고 오순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리고 사랑했던 그녀를 기리며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한편의 詩를 헌사한다.
바로 교과서에 실렸던 "초혼( 招魂)"이다.
    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가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招魂"은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것을 뜻한다.
소월은 사랑하는 이를
��나보낸 비탄과 절망감을
격정적인 어조로 절절히 노래하여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김소월의 많은 작품 중
유명한 시들을 모아 올려본다!
소월의 아름다운 정서를 공유하며 ...
■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못 잊어💑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오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어요.
그런 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그리워 살뜨리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나겠지요?
 ■ 산유화 ⚘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산에서 우는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개여울 🌨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먼 후일 🎷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 가는 길 ⚘
그립다 말을 할까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한번 그리워
저 산(山)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西山)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 무�� 🌱
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그림자 가득한 언덕으로
여기 저기, 그 누가
나를 헤내는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부르는 소리
내 넋을 잡아 끌어 헤내는
부르는 소리...
___________
김소월은
민족의 전통과
민요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詩를 남겼다
그의 대표작 진달래꽃은
단순한 이별의 슬픔을 넘어
한국인의 정서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라는 싯구는
깊은 체념과 배려 속에서
고통을 승화시킨 恨(한)의 정수를 보여준다
김소월의 詩는
당시 일제 강점기라는 민족적 아픔과 억압을 담아내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었다
그러나 문학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인적 삶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어린시절 부터 아버지의 정신질환과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성장했으며
결혼생활 또한 원만하지 못했다
이 모든 요소는
그의 내면에 깊은 고독감을 심어 주었다 .
문학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심리적 압박 시적 영감과
이상을 추구하는 내면과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의 무게는
그의 삶을 점점 무겁게 했다
1934년 12월 24일
끝내 자신의 生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겨우 32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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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youngggg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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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하던 비자신청을 했다. 마지막으로 정해진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하면 비자가 완성된다. 그 완성을 하러 서울에 왔다. 온김에 서울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고 가고싶었던 안산+인왕산에 갔다왔다.
역시 산과 도시가 어우러져있는 서울의 산은 너무 아름다웠다. 차근차근 하나씩 기회가 될 때마다 가야겠다.
서울은 사람도 많고 참 복잡한 도시라는 걸 매번 갈 때 마다 느낀다. 이 속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친구들이 대단해보였다. (티는 안냈지만.)
신체검사 끝으로 비자신청 마무리 단계에서 나는 다른 나라에서 나 스스로 독립을 하며 잘 지낼 수 있을까 ? 고생도 하고 적응도 하면서 잘 지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제주도집으로간다.
확실히 날씨가 쌀쌀해졌다. 지겹게도 더웠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오긴 오나보다. 가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이 흐른다. 내년에는 난 한국에 없겠지 (제발)
나도 정착한 삶을 원한다. 그래도 아쉽고 억울하고 후회없는 내 인생을 위해 일단 딱 1년만 역마살 인생을 살아보자고 그니까 남은 시간 준비 잘해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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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dyup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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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있는 것 같으면 일단 대화를 해봐야 하는거다. 그게 기본이다. 그래서 인류는 발전할 수 있었던 거다. 
근데 지금은 팩트를 체크하겠다는 미명하에 녹음부터 따서 상대방에게 불리해서 자기에게 유리한 증거(라기보단 사실을 ���투리)부터 수집하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세상에 환멸을 느낀다는 말이다. 왜 감시사회가 모두에게 마이너스인지를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다들 대학도 졸업하고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 말이지... 통화녹음을 지원하는 갤럭시의 민족이라서 그런걸까?
그리고 또 한가지 요즘들어 어처구니없는 부분은, 얘를 키우는 건 일차적으로 부모의 책임이다. 근데 마치 자신은 단지 얘를 위해 돈쓰는 사람이고, 얘는 니들이 키우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얘를 위해 얼마나 돈을 쓰길래 저러나 싶었는데(난 사실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재벌집 이야기인줄...) 모두들 다 그러고 있다는 걸 본 것 같아서 정말 끔찍한 세상이 되어 버렸구나 싶다. 도대체 다들 무슨 대단한 일을 하길래 그러는건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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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s-of-seoul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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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정말 막막한 거예요. 졸업할 때만 해도 어리니까 20대 역할도 하고, 학생 역할도 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현실은 아예 캐스팅도 안 되고 저라는 사람 자체를 모른다는 거였죠. 그래도 계속해서 단편 작품들을 찍고 유튜브를 개설하거나 저라는 사람을 알리는 데에 힘썼어요. 하루는 같이 촬영하는데 친구가 조연출로 있고 제가 연기하는 순간이었어요. 저를 서포트 해주는 이 친구 얼굴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몰입이 안 되는 상황에서, 그때의 제 무능력함에 그 친구와 그간 함께 했던 시간이 대비되면서 눈물이 났던 거 같아요. ‘10년을 연기했는데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너무 무섭게 이런 생각이 든거죠. 그렇게 제가 촬영 도중에 울어버리니까 얘가 달려와서 휴지를 가져다줬어요. 그런데 친구도 아무 말 없이 같이 우는 거예요. 그때가 잊혀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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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as completely lost after I graduated from college. As a young, fresh graduate, I expected I would get cast as a twenty-something or a student in a movie. But in reality, I was barely getting casted, and no one in the industry knew who I was. But I kept at it, trying to at least make a name for myself by working on a short film and starting a YouTube channel. Then one day came a moment while I was acting in front of a friend who was the assistant director. I was looking at my friend who had supported me and suddenly I was crying. In that moment, I couldn’t concentrate. I think I cried because there was such a contrast between my lack of acting chops and the time my friend had spent with me. I had such a terrifying thought. ‘I’ve been acting for 10 years, but can I really do this?’ I was crying in the middle of the shoot, so my friend hurried over with tissues. And without saying anything, my friend cried with me. I’ll never forget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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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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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 키드와 go언어(고랭)
1980년대 초 더럽고 음침했던 세운상가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매장 앞에 아무나 쓰라고 진열해 놓은 8비트 애플2 컴퓨터로 프로그래밍을 익힌 이른바 '세운상가 키드'들이 있었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고…
최초로 배운 언어는 당연히 베이직(BASIC). 당시 2~3천 원 주고 기초 교본을 샀는데, 컴맹 영문학과가 대충 번역한 엉터리였던 거 같다. ESC키를 '탈출'이라고 하질 않나, RETURN키(당시 애플은 엔터를 리턴이라고 했음) '한행주기'라고 써놨단 점에서.
비디오 게임을 만들려면 베이직으론 어림없고, 어셈블리 언어를 익혀야 한다길래 도전했다가 어려워서 포기. 대신 재미 삼아 포트란, 코볼 같은 구식 언어를 잠깐 공부했고, C언어도 고등학교 다닐 때 조금 익혔다. 하지만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데는 실패.
이런 사연으로 학교 졸업하고 처음 일자리 구할 땐 프로그래머가 아닌 시스템/네트워크 만지는 기술자로 출발. 몇 년 굴러먹다 보니 나의 꿈이었던 한량짓하며 빈둥대는 삶을 살기엔 안 맞음을 깨달음. 그래서 무소속 일용직(=프리랜서)으로 살려고 다시 프로그래밍 시작한 거.
덕분에 1년 중 반년은 돈 벌고, 나머지 반년은 모아 놓은 돈 까먹으며 빈둥대면서 운동하고 책 쓰는 짓을 이십여 년 반복.
세상 일은 항상 득과 실이 함께 있는 법. 사람에 따라선 이런 내 삶을 굉장히 낯설게 여기는 것 같다. 변변한 사회적 지위나 모은 재물이 없음을 알고 은근 깔보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바랐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아쉬움보다는 만족감이 좀 더 크다.
이어지는 글은 개발자가 아니면 잘 알 수 없는 내용일 거 같으니 무시하시기 바람…
-=-=-=-=-=-=-=-=-=-=-=-=-=-=-
여태까지 주로 자바(JAVA)만을 써서 십 년 넘게 먹고 살았더니 너무 지겹고, 오랜 세월 생계를 책임져 준 언어임에도 내 성향과 너무 안 맞아 줄곧 싫어했다.
고(Go)언어(=일명 '고랭')는 구글에서 만든 비교적 최신의 프로그래밍 언어다. 몇 년 전 눈에 띈 이후 계속 관심을 두고 있었다. IT 바닥엔 잠깐 등장했다 2~3년 이내 사라져 버리는 기술��� 많기 때문에 혹시 고랭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 틈틈히 근황만 체크하고 있었던 거.
올 초에 다시 확인했더니 몇 년 전에 비해 꽤 많이 확산한 느낌이 있었고, 자바를 대신해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벌어다 줄 물건이란 확신이 생김.
두어 달 전부터 본격 삽질 시작했는데, 아직 기초 수준이라 단언할 순 없지만 (자바와 달리) 보면 볼수록 맘에 든다. 내가 느끼기에 고랭은 C언어의 진정한 계승자인 것 같다. C++ 역시 C에서 나왔지만 복잡함 + 번잡함으로 인해 엄청 욕을 처먹었던 것과 달리 고랭은 간결하면서도 있을 건 다 있단 점이 맘에 듦.
(1) 포인터
고랭에는 C언어처럼 포인터가 있다. 자바엔 없다. 그래서 자바는 함수를 호출할 때마다 결과물을 클래스로 통째로 복사해 주고받기 때문에 속도 및 메모리 낭비가 심할 수밖에 없다. 내가 자바 쓸 때마다 괜히 스트레스받았던 게 이런 부분.
(2) 가비지 콜렉터
이거는 자바에서 본격 등장한 거로 안다. 구식 언어인 C나 C++에는 당연히 없기 때문에 메모리 누수 버그 찾기에 엄청난 시간을 쏟아야 한다. 시시콜콜 맘에 안 드는 자바이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대박이란 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고랭은 자바에 없는 포인터가 있고, C에 없는 가비지 콜렉터도 있다는 거.
(3) 클래스
놀랍게도 객체지향의 기본틀인 클래스가 없다. 가만 생각하니 '클래스 = 객체지향'이란 인식 자체가 근거 없는 편견이었구나. 고랭은 클래스 대신 기존의 구조체를 그대로 쓰고, 여기에 인터페이스를 통해 메쏘드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객체지향을 구현하고 있었다. 오버로딩, 오버라이딩, 추상클래스 따위 사라지니 너무 좋다.
(4) 예외처리
고랭에는 대다수 언어에 있는 try - catch - finally 예외처리 구문이 없다. 이것도 놀랍다. 이걸 없앤 이유는 원래는 catch에다 꼼꼼히 적어놔야 하는 예외 처리를 개발자들이 귀찮아하며 대충대충 넘어가더라는 거. 돌이켜 보니 나 또한 그랬던 적이 많다. 고랭은 catch 대신에 err 코드를 별도로 받아 평범한 if문으로 처리하고, finally에 들어갈 내용은 defer라는 걸 이용하더만.
(4) 고루틴
고랭 전용 쓰레드인데 사용법도 무지 간단하다. 내부 동작 또한 자바와는 개념이 약간 다르다. CPU의 멀티 코어를 이용하기 때문에 싱글 코어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콘텍스트 스위칭(Context Switching)에 의한 기능 저하가 덜한 듯. 여기에 '채널'을 합하면 활용 분야가 굉장히 많아진다고 하네. 고랭 공부하면서 가장 헷갈리는 부분이지만, 아마도 이 언어를 써서 작업할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명분일 것 같은 느낌은 든다.
(5) 람다
람다는 함수형 언어 개념에서 쎄벼온 거로 앎. 고랭에선 '함수 리터럴'이라고 부르는 갑다. 구식 개발자인 나로선 좀 생소하긴 하나 내용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다. 자바에도 원래 없었다가 나중에 추가된 걸 보면 세계적인 추세인 듯? 다만, 왜 함수를 굳이 이딴 식으로 쓰고 싶어 하는지를 이해 못 함. 난 앞으로도 이런 이상한 문법은 안 쓸 거 같다. 단, 남이 짜놓은 코드를 보고 이해를 못 하면 곤란하겠기에 일단 학습은 해 놓은 상태.
(6) 클로저
클로저는 초기엔 없었다가 개발자들이 넣어달라고 하자 나중에 넣은 듯. 이 또한 함수형 언어에서 온 거로 안다. 람다와 달리, 클로저는 고랭에서 필요하다. 왜냐하면 고랭이 변수 타입을 아주 까다롭게 따지기 때���. 가령 int8과 int16조차도 서로 다른 거로 인식해 대입이 안 됨. 클로저가 이런 불편함을 어느 정도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7) 잡동사니
사소하지만 고랭에선 null을 nil이라고 쓴다. 굳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고랭을 공부하며 납득을 못 한 부분이 겨우 요런 거 정도임.
결론적으로 내 미래 먹을거리는 '고랭 + 파이썬'으로 방향 잡음. 고랭은 컴파일 언어이고, 파이썬은 스크립트 언어라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아직 둘을 연계해 쓰는 방법은 모르지만 분명 이미 나와 있겠지. 또 텐서플로는 파이썬에 가장 최적화돼 있다 들음. 인공지능 학습은 고랭보단 파이썬 쓰는 게 맞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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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r-hiver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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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 아니 벗어나고 싶지 않다.
part.1
인간은 관성적으로 stable 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걸까? 분명 안정적인 삶을 희망하면서도 조금만 생활이 몸에 익어 루틴이 되어 버리면 벗어나고 싶어진다. 지겹고 재미가 없다. 물론 내 경우에만 그럴 수도 있지만.
이직을 꽤 자주 한 편이다. 졸업하고 만 13년이 지났는데 그간 다닌 직장이 인턴을 포함해 7개다. 중간에 쉰 기간을 포함하면 평균 재직 기간이 2년도 채 되지 않는 것이다. 정규직으로 가장 짧게 다닌 회사는 8개월 정도이고, 가장 오래 다닌 회사는 2년 8개월 정도인 것 같다. 그나마도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재직 기간이 늘어난 편인데, 아마도 이유는 점점 겁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어릴 땐 패기도 넘쳤거니와 자신감이 있었다. 늘 조금 자존감이 낮았던 것과 별개로 일에 대한 근거없는 자신감 같은 건 항상 있는 편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매 번 다른 일을 했지만 그 안에서 평가는 항상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이해력이 빠르고 성실한 편이‘었’다) 여길 그만두더라도 어디든 갈 수 있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쓰고 보니 나름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내 연봉 혹은 직책만큼의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신입때야 시키는 일 잘하고, 기본적인 것만 잘 지키면 그것으로 ���분하다는 생각이 일하는 나로서도 나를 쓰는 회사로서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조금 더 책임을 져야 할 것이 많아지고 전문성을 갖춰야하는 직급이 되어감에 따라 내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이다. 성과나 실적으로 이를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맡았던 업무들은 어떤 수치로 명확히 일의 잘하고 못함이 판명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회사에서도 점점 내가 잘하는 사람인지 못하는 사람인지를 판단하길 모호해 했던 것 같고 내 자신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무렵쯤부터 성실함을 조금씩 잃기도 했다. 열심히 달릴 거리가 있었던 신입땐 욕하면서, 울면서도 그걸 잘 해내는 것에 매진하는게 나를 증명해보이는 길이었다면, 연차가 쌓이자 무조건 달리는 것 만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니고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요령(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뺀질거림이 포함 된)이 생기며 일을 잘 해내는 방법에 의문이 생겼던 것 같다. 그래서 회사가 성에 안차서 그만두던 패기 넘치던 신입시절과는 별개로, 점차 ‘아 이 회사에선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잘 해야할지 모르겠는데요..’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졌다.
지금도 아마 난 그 기로에 놓여있는 것 같다. 루틴하게 주어진 업무를 해내는건 어렵지 않지만 (업무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속성 상 늘 새로운 것을 찾아야하는 상황은 점점 더 힘들긴 하다) 이걸 계속 한다고 내가 뭔가 이 회사에 대단한 기여를 할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금 월급이 만족스럽지도 않은데 더 요구하기엔 스스로 이 일에 완전히 매진해 일하고 있지 않는 자신을 알다보니 양심에 찔리는 느낌도 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편하지만 지겹다. 정말이지 당장 오늘부터 그만 하고싶다.
Part 2.
나이가 이쯤 되니 자기 일을 시작했던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자리를 잡아가는게 눈에 보인다. 물론 무턱대고 그들이 부럽지는 않다. 정말 대단하다고는 생각한다. 나는 내가 돌아가도 하지 못했을 것들에 질투가 나거나 후회가 되지 않는다. 나라고 내 사업을 해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심지어 몇번이나 그 문턱까지 갔다가 지레 겁을 먹고 ‘잘 되지 못하면 어쩌지?’, ‘망하면 그 다음엔 정말 끝인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24시간 놓을 수 없어 시작조차 못했던 나를 알기에 어느 순간부턴 애써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에 몇년간 일에 매진하느라 연락조차 못하고 지냈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와 만나게 되었는데 마음이 동하게되는 말을 듣는다.
“이렇게 10년 넘게 내 것을 하고 싶은 생각이 마음 한 켠에 있다는 거, 회사와 어딘가 모르�� 맞지 않고 자꾸만 튕겨져 나오는 거, 그런데에도 다 이유가 있는 거 아닐까? 그냥 시작해보면 어때? 고민할 시간에 그냥 하는거야.” 물론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다. 그래도 안정적인 회사, 넘치진 않지만 먹고 살기엔 크게 부족함은 없는 평범한 삶, 이걸 포기하는 건 너무 큰거 아니야? 그리고 어렸으면 실패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지금은 나이가 너무 많지 않나?.. 라는 의문이 따라붙으려는데 또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어릴 때 성공해서 다 누려보고 지금 실패하는거? 그거 더 어려운거야. 지금은 그렇게 현실감이 없지 않잖아. 근데 더 늦으면 정말 늦어버릴지 모르지. 그냥 지금 하는거야!”, “그리고 혹시 잘 안되면 어떡해? 너 지금 안정적인거 포기하면 나중에 후회한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 있지? 그냥 그런 사람들은 안보면 돼.” 이 부분에서 울컥했다. 나를 옭아메던 그 무언가의 빗장이 풀려내려가는 느낌. 그래 맞아. 내 미래와 성공을 의심하는 사람들, 그것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것은 아니니까. 내가 얼마나 어떤 걸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들은 모르니까. 그리고 사실 나를 막아서는 나의 가장 큰 적은 내 안에 내 잠재력을 걸어 잠근 타성에 젖은 내 자신이니까. 그리고 친구가 덧붙인다. “대신 정말 죽어라 해야 해. 힘든 시기는 분명 계속 계속 올거야 그래도 멈추면 안돼. 그래도 나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견딜만 할 거야. 정말 죽을 것 같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정말 망해서 밥 한끼 먹을 돈도 없어 굶어 죽겠다 싶어지면 나한테 와. 언제든 내가 밥은 사줄게.”
(친구의 말은 기억나는대로 뉘앙스를 옮겨 적었을 뿐 정확히 저 워딩은 아니었음을 밝힌다)
Part 3.
머리에 망치를 한 대 맞은 듯 멍하다 이내 정신이 맑아진 나, 당장 회사를 때려치고 무언가 일을 벌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다음 날도 아무 일 없었던 듯 일어나 출근을 한다. 퇴근 후에 사업 아이템에 대한 고민을 해야지 생각은 하지만 집에 오면 에어컨 키고 유튜브 보기에 바쁘다. 유튜브가 나쁜건 아니다. 충분히 유익한 콘텐츠도 많을텐데 용감한 형사들, 뉴진스 뮤비해석, 나영석의 나불나불 등 알고리즘이 나를 이끄는대로 주체성도 없이 보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 오늘 저녁부터 해야지, 다음 주부터 해야지, 회사가 조금 더 한가해지면 (지금만큼 한가할 수가 없다) 그 때부터 해야지.
이 지겨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 아니 벗어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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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ker · 1 day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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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빛의 마을에 산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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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fmkyj · 6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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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고 찾아간 #종강파티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놀았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공부했나 싶다^^;
#세종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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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erweek · 13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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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축구협회 제55대 집행부 구성 완료
대한축구협회 제55대 집행부 구성이 완료됐다. 35년간 대전 코레일에서만 선수, 지도자로 봉직했던 현장 전문가 김승희 감독이 전무이사에 파격적으로 발탁됐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은 9일 부회장과 분과위원장, 이사진을 포함한 새 집행부 명단(27명)을 발표했다. 지난 4일 열린 대의원총회는 협회 정관 제24조에 따라 집행부 선임 권한을 정 회장에게 위임한 바 있다. 제55대 집행부는 축구인 출신 전무이사 체제로 다시 전환됐다. 정몽규 회장은 현장과 소통을 강화하고, 현장의 경험에서 변화와 혁신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 고심 끝에 김승희(56) 대전 코레일 감독을 전무이사로 임명했다. 김승희 신임 전무는 명지대를 졸업하고 1990년 실업축구 철도청(현 대전 코레일)에 입단한 뒤 35년 동안 한 팀에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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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extinvestment · 1 month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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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솔로 26기 출연진 직업 나이 프로필 총정리
나는솔로 26기 출연진 프로필 이번 시간에는 나는솔로 26기 출연진 직업과 프로필을 살펴보겠습니다. 나는솔로 26기는 골드 특집으로 진행되어 시작부터 많은 관심을 얻고 있는데요. 그럼 먼저 나는솔로 26기 남자 출연자들의 직업과 나이 등 프로필을 알아보겠습니다. 나는솔로 26기 영수와 영숙 영수는 올해 1980년생으로 45살입니다. 영수는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학사를 거쳐 박사까지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텍 대학교, 예일대학교에서 연구원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현재 부산대학교 공과대학에서 11년 차 정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합니다. 영수는 “이상형은 유쾌한 사람이 좋다”면서 “주말과 방학이 있어서 장거리 연애가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영호는 1985년생 39살입니다. 영호는 인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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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enae6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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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의 씨앗을 심은 선구자, 김재관 박사의 뜻을 잇다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과학기술이 먼저 앞서야 한다." 이 신념을 가슴 깊이 새긴 사람들이 있다. 서로를 알지 못했던 이들이 같은 마음으로 움직였고, 결국 한 사람의 이름을 역사에 새기기 위해 뜻을 모았다. 송호·지학장학재단 정희준 이사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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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이사장이 김재관 박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불과 1년 전인 2024년 초였다. 그는 김 박사의 삶을 접하고 곧바로 결심했다. "이런 분을 기억해야 한다. 후학들이 그의 정신을 배우게 해야 한다." 그렇게 김 박사의 공로를 기리는 공적비 건립이 추진됐다. 단순한 기념을 넘어, 김 박사의 이름을 단 장학금도 신설됐다. 서울대 공과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제2의 김재관’을 키우는 일을 직접 챙기겠다는 각오다.
김재관 박사는 한국 산업화의 심장과 같은 존재였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공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했을 때 "한국에도 종합제철소가 필요하다"고 직언했다. 그 한마디가 대한민국의 산업 지도를 바꿨다. 귀국 후 포항제철 건립을 진두지휘하며, 한국 중화학공업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0년대 초, 국방과학연구소(ADD) 초대 부소장에 오른 그는 무기 국산화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짧은 시간 안에 박격포, 로켓포, 대전차 지뢰를 개발해 내며, 국내 방위산업의 불씨를 지폈다. 특히 3개월 만에 성공시킨 '번개 사업'은 지금의 K-방산 신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상공부 초대 중공업차관보, 한국표준연구소 초대 및 2대 소장을 지내며 산업 표준화와 품질 고도화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국 제조업과 산업기술의 뼈대를 튼튼히 다졌다.
정희준 이사장이 말하길, "김 박사의 정신은 단순한 기술 개발을 넘어, 국가를 위한 책임과 헌신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과거를 기리는 데서 멈추지 않기로 했다. 김 박사의 철학을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 심고, 내일의 산업영웅을 길러내는 데 힘쓸 계획이다.
이제 김재관이라는 이름은 포항제철소를 넘어, 새로운 세대들의 가슴속에도 깊게 새겨질 것이다. 한 사람의 신념이 씨앗이 되어 수많은 미래를 키워나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기억'이고, 가장 아름다운 '계승'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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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s-of-seoul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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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운이 좀 안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처음엔 삼수에 실패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보다 재수 때 성적이 훨씬 올랐고, 삼수를 하면 당연히 더 오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3학년 때보다 성적이 훨씬 떨어진 거예요. 그대로 학교에 진학해서 편입을 결심했죠. 그런데 이번엔 편입에 실패했어요. 2학년때까지 수업이 끝나면 그냥 바로 집에 갔어요. 공부를 해야 했으니까요. 저는 아주 외향적인 사람이라 그게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준비했는데도 결국 편입을 못했어요. 학교로 돌아와 졸업하고 취업을 하려니까 이번엔 또 코로나가 터졌다는 거예요.” “힘드셨겠어요.” “근데요, 삼수를 실패하면서 부모님이 절 얼마나 믿어주시는 지 알았어요. 편입을 실패하면서 석사를 할 결심을 했고요, 코로나 때문에 생긴 공백기에 기사 자격증을 딸 수도 있었어요. 지금은 원하던 곳에서 행복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요, 제게 맞는 취미도 마음껏 하면서 살아요. 아마 저한테는 운이 안좋은 사람이라는 게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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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think I'm a person with pretty bad luck. I failed at my third attempt to enter university. My second attempt was much better than how I'd done in the final year of high school. So naturally I assumed that my third attempt would be even better. But my result was a lot worse than even my high school one. I decided to just enter the university I got into with these scores, and then apply for a transfer. But this also failed. Until I was in my second year, I'd gone home straight after class was over to study. I'm a very outgoing person so this was really hard for me to do. But despite all my efforts, I couldn't even get a transfer. So I just stayed put and graduated from that university, and when it was time for me to look for a job, this time it was Covid-19 that got in my way.” “That must have been hard.” “But you know, after failing my third attempt to get into my university of choice, I realized how much my parents believed in me. When I couldn't transfer schools, I decided to get a masters degree. And I used the idle time I had during the pandemic to get a technical certification. Now I'm enjoying my work life in a place I want to be, and pursuing hobbies that suit me to my heart's content. I guess what I thought was bad luck was in fact a blessing in disgu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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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hyunchan-blog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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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중앙고. 96년에 졸업하고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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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gdia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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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d fl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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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은행에 ��� 입사를 시작한 후, 여러가지 일을 이야기 해주었는데, 은행 안의 자질구레한 일들, 예를들어 청소, 정리정돈, 쓰레기 버리기 등 상담원으로서 업무 이외의 잡무를 먼저 나서서 하고 있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그런 일들을 말이다.
첫 직장을 잡기까지의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성품이었는지, 언니는 잡다한 일들을 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해내곤 했는데 그것은 우리집에 있을 때도 그랬다.
어른들은 그런 언니의 행동을 곱게 보았고, 곧 윗사람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언니의 노력이 인정을 받는 일이 됨과 동시에 다른 여직원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니는 변함없이 그런 잡일을 해냈고, 선배들의 질투로 인한 업무 떠넘넘기에도 묵묵히 그 일들을 했다. 여직원들의 시기와 질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언니는 불평하지 않고 성실히 일을 했고, 곧 그것을 알아주고 인정하는 사람���은 늘어났다.
언니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언니의 그런 성실함, 인내심, 현명한 처세를 닮고 싶었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하고도 훌륭한 덕목이고, 그것이 바로 '좋은 인성'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시절, 아무리 친척집이고, 친척 어른들이 잘 해준다고 해도, 내성적인 소녀에게 남의집 살이는 스트레스 환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곧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지 알게 되는 비밀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들판의 들꽃처럼 살아온 언니와 달리 온실 속의 화초처럼 보호 받으며 살아온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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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amoneya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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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들이 아이돌로 데뷔했어야 했다고 느끼는 SM 엔터테인먼트의 떠오르는 배우"
조준영은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떠오르는 배우입니다. 서울 공연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성균관대학교에 재학 중인 그는 2020년에 데뷔하였으며, 이후 점점 성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채민, 노정의와 함께 드라마 ‘크러슐로지 101’에 출연하고 있습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계속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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