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함
Explore tagged Tumblr posts
Text
흙 (Soil)
ureumgwa ttang gippeumui choraham mujilseoui bame neomsil georida sseureojin ai kkeuteun aniya gati gaja tto dasi geotja 울음과 땅 기쁨의 초라함 무질서의 밤에 넘실 거리다 쓰러진 아이 끝은 아니야 같이 가자 또 다시 걷자
0 notes
Text
pieces
1.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그 사람에 대한 헛말이 오가는게 여간 불편해서 그냥 '그럴 수도 있지'라며 급히 이야기를 무마시켰다.
그 자리가 끝나고 혼자 집에 털레털레 걸어가며 곱씹었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며.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에 대한 낯붉힐 이야기가 오갈 때, 뒷담화를 거들기보단 나를 변호할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좋을텐데. 아니, 그저 침묵만 해도 좋을텐데. 나 보라고 챙겨주는 사람 말고, 내가 없는 곳에서 내 편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런 고민을 하니 쓸데 없이 더 외로워졌다. 난 세상 편 다 들어주면서, 세상은 내 편 들어준 적 한번 없는 것만 같아서. 불공평하다.
2.
당연한 건 없다고 한다. 누군가가 그랬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마음도 당연한게 아니라고. 제법 수긍이 되는 말이다.
사람들에게 별 기대를 않게 되었다. 내가 상대방을 좋아한다는게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해야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내가 어떤 말을 하든지 상대방이 내게 공감해야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나를 챙겨줘야할 이유도 없다. 기대와 요구는 다른 법이다.
3.
걱정해주는 식의 말도 잘 않게 됐다. 빈말로 들릴 뿐, 듣는 이에게는 별 보탬이 안 되기 때문이다. 수고했어, 힘내, 아프지마 등등 그런 말들을 그저 말로만 때우는 것 같아서, 그마저도 잘 안 하게 된다.
최근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기적적으로 생겼다. 그렇게 난 딜레마에 빠졌다. 내가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줄수는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초라함. 또 그저 말로만 때우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자존심. 그 언저리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4.
난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 두고두고 기억해두면 쓸모가 있다. 타인에게 서운한 감정이 드는 이유는 대부분 이걸 쉽게 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도 굉장히 특별한, 남에게 무언가를 기대를 걸어도 될 만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여태 왕왕 그래왔듯 난 언제든지 타인의 기억에서, 타인의 일상에서, 타인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 사라지기 마련인 존재이다. 어쩌면 애초에 그리 큰 자리를 차지한 적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5.
가만히 있자니 서운하고, 따지자니 나만 쪼잔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일들이 세상에는 참 많더라. 어른이 된다는 건 그 서운함을 삼키고 끝내 다른 무언가로 승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거겠지.
6.
주절주절대고 다니지 않으려 노력한다. 누군가는 나더러 무게를 잡는다고 하는데,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말을 많이 할수록 초라해지는 기분이 싫다. 당장은 즐거울지는 몰라도, 얼마 안 가 괜한 말을 했나 후회가 밀려오기 일쑤다.
아무래도 감정과 생각은 일시적이다. 원수 같던 사람이 갑자기 사랑스러워지기도, 죽을만큼 하기 싫던 일이 한순간 즐겁게 다가오기도, 굳게 붙잡던 자신만의 신조가 산산히 깨지기도, 들리던 소문이 알고 보니 허구일 때도 있다. 그런 일들을 통해 배운 건, 침묵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당장 미움, 싫증, 권태 따위의 감정이 든다고 해서 즉시 배출해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1 note
·
View note
Text
그런 것들 좋은 것 같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태도. 부끄럽고 초라함 감정들. 그래서 작아지는 것 같은 순간에도 내가 지금 그렇다는 것을 열심히 인정할 수 있는 용기. 열심히 용기내고 있다는걸 예쁘게 봐줄 수 있는 당신. 뭐 그런 것들. 말이다.
19 notes
·
View notes
Text
나는 하루에 열두 번도 넘어진다.
2020년 12월 14일
시편 63편은 다윗 왕이 패륜을 저지른 자기 아들, 압살롬이 일으킨 반역을 피해간 광야에서 쓴 시이다. 아비로서 숨 쉴 힘도 없었을 것 같은데, 광야로 피신해서 쓴 시편 63편을 보니 너무 밝았다. 찬양이 너무 많았다.
주의 인자하심이 ��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 시 63:3,4
눈을 떠보면 기가 막혔을 것이다. 자식이 반역을 일으킨 상황에서 눈을 떠보면 왕궁이 아니라 광야였다. 그 광야 같은 상황에서 드린 다윗의 고백을 보라.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 시 63:5
왕이 왕궁에 있지 못하고 광야에 던져져 있는 이 상황이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어 만족할 만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윗은 어떻게 광야에서,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감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63편의 이 한 구절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 시 63:7
다윗은 광야에서도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라고 고백한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였지만, 다윗은 ‘내게 능력 주시는 분’이 그곳에서도 여전히 동행하신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니 그 광야에서도 골수와 기름진 것으로 먹는 것 같은 영혼의 만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 힘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라. 내 힘으로 해보겠다고 하면 우리 모두는 깊은 계곡에서 슬피 울 수밖에 없는 인생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능력 주시는 분이 계시다. 그분을 인식하고 그분과 연합하며 살아야 한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고후 6:10
이 구절을 그냥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하지 않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가난한 자 같으나,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라는 부연 설명을 단 이유가 무엇일까?
육신을 가진 우리 모두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낙심하고, 열두 번도 더 초라함을 느끼는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약한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는 것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스스로 초라해지기 시작하면 말로 다 할 수 없이 초라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너무나 부요한 자처럼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내게 능력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이 계셔서 나의 초라함, 나의 연약함, 나의 보잘것없음, 나의 심약함과 같은 것들이 오히려 빛나게 되는 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계시기 때문이다.
다윗의 시편으로 지어진 찬양이 있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로다
나의 몸과 마음 주를 갈망하며
이제 내가 주께 고백하는 말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생명의 피난처시니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여호와를 찬양하리
내 평생에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으로 내 손 들리라
<주는 나의>, 유상렬 작곡
여전히 우리의 삶에 달라진 것이 없어서 이렇게 저렇게 무거운 짐들을 지고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이제는 ‘내게 어떤 어려움과 난관이 찾아오더라도 그것을 자족을 연습하는 도구로 삼아버리겠다’라고 선포하기 바란다.
이 삶을 자족을 훈련하는 도구로 하나님이 주셨다고 여기며 수용하고, 내게 능력 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한 걸음 더 성숙을 향해 나아가길 바란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누리며 나아가게 되기 바란다.
0 notes
Photo

우울증. 자괴감, 초라함, 무기력증. 점점 너무 죄어온다. https://www.instagram.com/p/B_DHeB4nEwR/?igshid=brav5oz8vjhk
0 notes
Text
여선생들
ㅡ 체사레 파베세
포도나무, 자두나무, 밤나무가 있던 내 고향,
내가 언제나 먹던 과일들이 열리던 곳,
내 아름다운 언덕에는 내가 언제나 상상하고
전혀 맛보지 못한 최고의 과일이 있다.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여름 들판으로
혼자 나간다면, 벌써 길거리로 달아나고
암소 방목장에서 맨발의 젊은이들과
설익은 과일을 맛볼 수 있기에 충분하다.
여름 하늘 아래 풀밭에 길게 누워
놀고 싸우면서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다른 녀석들은 성스러운 게으름 속에
낄낄거리고 속삭이며 수많은 신비를 알았다.
일요일이면 별장 앞길에는 마을에서
지나가는 작은 양산들이 지금도 보이지만,
별장은 멀리 있고, 더이상 젊은이들은 없다.
그 당시 내 누이는 스무 살. 언제나
테라스로 가서 멋진 양산들을 가져오고,
밝은 여름옷에, 말끝마다 웃음이 터지는
여선생들. 아마 그녀들은 서로 빌린 책들과
연애소설에 대해, 무도회와 만남들에 대해
이야기했겠지. 나는 초조하게 듣고 있었지만,
아직 맨살의 팔이나 햇볕에 그을린 머리칼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유일한 순간은
땅바닥에 앉아 포도를 먹으러 가는
그녀들을 안내하도록 나를 앞장세웠을 때였다.
나에게 농담도 했지. 언젠가는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는지 묻기도 했다.
나는 지겨웠다. 내가 함께 간 것은, 얼마나
내가 나무를 잘 올라가는지, 얼마나 잘 달리고
멋진 포도송이를 잘 찾는지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나는 그들 중 가장 수줍음 타는 여인을
철길에서 만났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지만,
그을린 금발에 표준 이탈리아어를 썼다.
이름은 플로라. 그 순간 나는 철도 표지판에
돌을 던지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그런 대담함을 집에서 아느냐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러자 플로라는 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 나와 함께 가자고 했다.
초여름의 대단한 오후였고, 우리는
조금이라도 그늘로 빨리 숨어들기 위해
풀밭으로 들어섰다. 내 옆에서 플로라가
무엇인가 물었지만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개울에 도착했고, 나는 건너뛰려고 했는데,
결국 풀밭 사이 개울 속에 빠져버렸다.
맞은편에서 플로라는 크게 웃었고,
쪼그려앉더니 나에게 보지 말라고 명령했다.
나는 당황했다. 개울물에 씻는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에 나는 갑자기 돌아섰다.
옷 추슬러 강하고 재빠르게 그녀는
기슭에서 내려왔고, 맨살의 다리가
눈부셨다ㅡ플로라는 부자였고 일을 하지 않았다.
이내 몸을 가리며 잠시 날 나무랐지만,
결국 우리는 함께 웃었고, 나는 손을 내밀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무척 행복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매를 맞지도 않았다.
고향에는 플로라 같은 여자가 스무 명 정도 있었다.
그녀들은 그 언덕들에서 가장 건강한 과일.
부자 가족은 그녀들에게 공부를 시켰고,
누군가는 들판에서 수확을 했다. 어두운 얼굴로
진지하게 바라보고 욕망으로 넘치며,
도시 아가씨들처럼 옷을 입는다.
플로라, 리디아, 코르델리아, 책에 나오는
환상적인 이름들이었고, 포도송이와
늘어선 포플러는 더이상 아름답지 않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말할 누군가를 상상한다.
내 꿈은 서른 살까지 사는 것이야.
언덕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바람을 맞으며, 단지 그 위에서만 자라는
야생 초목을 보살피면서 말이야.
그녀들은 삶이 무엇인지 잘 안다. 학교에서는
조그만 악동들의 노골적인 못된 짓과
온갖 초라함 사이에서 지내지만,
언제나 젊다. 그런데 늙으면 ......
하지만 늙어버린 모습은 생각하기 싫다.
밝은 옷에 멋진 양산을 든 여선생들ㅡ
약간 황량하고 그을린 언덕을 배경으로ㅡ
매년 새로워지는 가장 좋은 ‘나의’ 과일을.
0 notes
Text
2019. 2. 25
삼일만에 나의 아저씨 정주행 완료.
박해영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는 이 보통의 인간군상을 아주 내밀하게, 처연하게
그려내는 솜씨가 기가막히다.
그 안에 속내모를 아픔과 삶의 비애, 짙은 페이소스, 한심하고 처량한 인간 자체의
실루엣까지.
고요하고 침잠한 이지안의 눈망울이 기억에 남는다.
까랑까랑한 웃음과 대조적인 술취한 정희의 독백도 남는다.
눈내리는 기찻길에 누워 지금 당장이라도 죽고 싶지만
비싼 팬티를 입지 않아 오늘은 죽을수 없다는 박동훈의 읊조림도.
삼형제의 한심하고도 슬픈 농담따먹기도,
그 모든게 실상 내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적당한 초라함, 적당한 비참함, 적당한 나약함, 적당한 무기력..
살아간다는 건 슬픈것이다.
그 누구도 저가 원해서 이 곳에 온게 아니기 때문이다.
삼만살을 살고도 또 태어난건가, 싶어 절망속을 ���매는 이지안은
바로 우리네의 그것과 닮았다.
또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아니, 왜 이번생이 또 주어졌을까, 투덜대던 나의 투정과도 닮은 대사들.
내가 살고 싶어 태어난게 아닌데
태어나지 않았다면 느끼지 않았을 이 절망과 한탄 모두를
버리고 싶을만큼 죽고 싶어도
차마 죽을 용기 조차 갖고 태어나지 않았음에 서글퍼지는..
그 모든 이들을 위한 따스하고 아픈 찬가다.
드라마가 줄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그려내는 드라마.
엄지척.
0 notes
Text
일상의 반대말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
오늘 00번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먼 창밖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약간 부끄럽게도, Y선생님을 간만에 만났던 강연에서 ‘선생님 잘 지내시죠? 저는 쓰레기같이 지내죠 뭐’ 하지 못한 걸 아직까지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나에게, 예술가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돈일까 성취욕일까 저성장 가득히 부인할 수 없는 시대정신일까. 오늘도 거울의 쥐어뜯고 싶은 면상 속에서 발견해야만 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매일같이 시시해서 과잉되지도 못한 자기혐오를 넘어서 겨우 일상을 챙기고, 챙기는 일상 속에서는 비로소 발견한 예술의 한 조각 대신 미처 염두하지 못한 혐오의 한 판이 완성된다.
휘장의 결렬이나 무너지는 왕궁은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휴지 주름과 눌린 초파리의 초라함. 뻔한 비극과 휴지 조각 사이에서 와그러진다. 정념을 견딜 수 없어서 예술로 견디는 것이 예술이라면 예술을 견디는 상황 자체의 성립이 불가능하다. 삶의 어느 너머에는 예술이 있을지도 모른다. 일상의 극에는 일상이 있다.
2017년 4월 2일
0 notes
Text
하노이 1일차
하노이 여행 1일차 #하노이 #베트남 #여행 #블로깅 #빅잼 #자유여행 #클룩 #부킹닷컴
드됴 12.28일 하노이로 출국!
와 근데 사람 해외 나가는 사람 엄청 많았고 하노이행 비행기에 사람들이 꽉꽉 차있었다.
아무튼.
출발할땐 한컷은 인지상정? 인정?
숙소 옆이 랜드마크 성당 이었다.
창가에서 바로 보임.
그리고 직원들 넘나 착함. 쌍따봉.
비만 안왔으면 진짜 최고의 기분이었을텐데.
짐만 놓고 일단 고고.
랜드마크에서 멋지게 찍었는데 왤케 초라함? ㅋㅋㅋ;;
한바퀴 돌았는데 진짜 스마트폰 없었으면 미아 됐을꺼야.. 오도방구 겁나 많음.. 심지어 비오는데 우비입고 담배피면서 한손으로 운전 함.
-계속 돌아 댕기니까 적응 되긴 했음 척척 잘건넘.-
돌아 다니다 쌀국수를 먹을라고 했는데 로컬 음식점은 좀 엄두가 안나긴 하드라.
숙소 앞에 좀 그래도…
View On WordPress
0 notes
Text
초라함
살다 보면 정말 뜻하지 않게 초라한 순간들이 온다
아이가 사고 싶은 물건을 사지 못할 때
생일날 아무의 축하도 받지 못하고 혼자 어두운 방에 들어올 때
야근이 끝나지 않아 새벽에 잠시 회의실에서 눈을 부칠 때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결국 다 같은 초라함
초라함은 결국 우리가 원하는 걸 가지지 못하고 가질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 때 온다
0 notes
Text
하루종일 소비만 하고 산 것 같으니 글을 써보기로 한다. 하루에 하나쯤은 생산적인 일을 해야 자괴감이 덜 드니까.
유럽여행에 핸드폰을 가볍게 가져가기 위해서 사진첩을 정리하는데 꽤나 슬프더이다..그냥 외장하드에 옮기고 지우기만 하면 되는건데 에너지 소모가 엄청난 것이다. 추억을 회상하고 그 때의 감정들을 다시 불러일으키는건 감정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지난 1년간의 시간들이 머릿속을 휘저어댄다. 회오리 바람처럼 기억들이 떠돌아다니다 지금의 감정들로 바람이 불어 다시 뒤섞이고 기억을 재조정한다. 결국 남는건 지금의 초라함, 초라함이다. 사실 들춰보면 난 아무것도 잘난게 없는 사람이란걸 그들은 알까. 애초에 아무 기대 없는 관계란 얼마나 편한 사이인가
아 그리고 너 생각을 하면서 다시는 울 일이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핸드폰에 가장 큰 용량을 차지하는 너와의 대화목록을 지우려고 들어갔다가 후회했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다를 게 없었는데, 우리 참 재밌게 시시덕 거렸는데. 차마 아직은 못하겠어서 울상을 지으면서 대화창을 나왔다.
0 notes
Photo

재능 있는 이의 빛나는 ‘재능 펼치기’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뛰고 온 몸에 전기가 찌릿-하다. 내가 첫사랑을 겪던 그때처럼. 그래서 더 이런 이들을 보고싶어 하는걸까? 가슴 뛰는 내 자신을 또 만나고 싶어서? 실은 난 한 켠으론 슬픈데. 내가 맛 볼 수 없는 기적, 재능, 타이밍과, 사람과.. 그리고 창조의 예술. 내가 갖지 못하는 아름다움. 담아 둘 수 없는, 감히 닿기 어려운 찬란함 뭐 그런 것들. 바라만 봐야하는 데에서 오는 슬픔. 초라함, 또 두려움. 그 모든 것들이 엉켜서 심장을 퉁-퉁- 때린다. 슬픈건지 황홀한 건지 모를 그 감정에 휩싸여서 나는 또 깜깜한 꿈을 떠올려 보고
0 notes
Text
키멜이 얼마 전 쇼에서 한 얘기가 있는데, 그날 객석에 젊은 임산부가 있었음. 쇼 전에 그 여자랑 스몰토크를 나누다가 애기 이름 정했냐고 했더니 "레일라" 라고 했대. 그래서 아 ㅎㅎ 더 쏭? 했더니 ?? 왓 쏭?? 이라고 했다는 거야.
최근 들은 가장 충격적이고 중요한 얘기였다. 키멜 쇼에 온 젊은 관객은 레일라라는 노래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키멜이 캔 유 빌리브 잇 톤으로 아무런 추가 설명 없이 쇼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나머지 모든 관객이 웃었다. 나는 집에서 유튜브로 그걸 보고 깔깔 웃었다. 사방에 리터러시 갖다 붙이는 거 정말 지겹고 이상하지만, 나는 직관적으로 그게 리터러시랑 굉장히 가까운(물론 당연히 틀렸고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틀렸음) 사건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어제 온 필로에서 스와 노부히로가 레오에 대해 쓴 글 서두에서. "장 피에르 레오라는 노인의 이름을 들었을 때, 이 시대 아시아의 젊은이들이 그 존재를 얼마나 알지 모르겠다." 야이 시발 무슨 ㅋㅋㅋㅋ 너 60년생이잖아 ㅋㅋㅋㅋㅋㅋ 스와가 그 글에서 가장 처음 언급하는 레오 영화 <400번의 구타> 🙄 는 59년 작이고, 만약 그의 '동세대' '아시아'인들이 자기가 말하는 '젊은이'일 때 우리보다 레오를 조금 더 알았을까 하면 정말 글쎄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종종 혼자 레퍼런셜 외로움 ㅠ (ㅠ까지 용어에 포함)이라는 개념을 생각하는데, 이를테면 <그레이스 앤 프랭키>를 그냥 동시대 넷플릭스 컨텐츠로 같이 좋아하는 친구들이 제인 폰다 릴리 톰린 샘 워터스톤 마틴 쉰이 누군지.. 딱히 별로 알 일이 없고, <그레이스 앤 프랭키>를 같이 좋아하는 씨네필 친구들조차 샘 워터스톤과 마틴 쉰이 얼마나 중요하고 뛰어난 대중배우인지 모를 때 느끼는 서운함과 (나의) 초라함 같은 것. 카프리콘 원? 로 앤 오더? 프레지던트 바틀렛? 이라고 했을 때 ㅇ_ㅇ 를 돌려받으면 왠지 한없이 작아지고 아주 조금 토라진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 제멋대로 엮고 있는 시리즈-영화-캐릭터-타임라인-배우 지도 잔치를 전부 이해하는 사람도 아마 거의 없겠지? 내가 이걸 너무 좋아하는 이유도 찾아야 한다. 정말 흥미로울 것임. 역할의 중경을 떠나서(제리 거기지가 에이미 브룩하이머 아빠라고 왜 적겠어) 서사와 인물의 확장이 일어난다고 느낄 때가 분명히 있다. 그런 순간들이 이름도 몰르는 저 배우 반갑네, 를 왜 넘어서는지를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세대의 레퍼런스를 공유하는 것도 아니고, 정전의 레퍼런스를 따르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컨텐츠를 레퍼런스로 소비하는 레퍼런스 중독자일 때... 아마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똑똑한 사람들이 좋은 컨텐츠를 생산하는 거겠지? 아 며칠 째 레일라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0 notes
Text
I feel like I am the only one who has remained stagnant while everyone else has moved forward many steps ahead of me I feel my cheeks flush red and hot from my reality of being inadequate
in Korean, my feelings can be summed up in one word: 초라함
0 notes
Video
보통은 거울을 소재로 작업을 한다. 우리는 같은 대화를 하지만 다른 이해를 한다. 연인간에 , 가족간에 , 친구간에 작은 반려동물 과의 관계 마져도. 작가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마음,이해,대화가 되지 않은 순간들을 흥미로워 하거나 사랑하거나 슬퍼한다. 언제나 진행 중일 부분이다. 그러던 타향살이를 하던 어느 볕 좋은 날 우연히 탄 버스를 타던 중 생각의 전환을 맞이한다. 우리가 마주하던 순간들의 소중한 그 감정을 생각할 때 마치 그것이 거울과 같더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울을 마주할 때 나를 바라보면 거울안에 나는 , 그 속의 나는, 나와 내 자아를 나누듯 분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두 세계를 나눠 생각을 말하고자 싶었다. 현실과 믿고 싶은 세상을 나누어 작가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화려함과 초라함, 배고픔과 배부름, 행복과 슬픔, 사랑과 미움,분노와 절규, 만남과 이별 (...) 우연히도 표현될 수 있더라고 작가의 일기를 또 다른 방법으로 관람객과 공유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다. 화려한 거울 ���의 나는 현실의 나보다 더 애처롭고 고독하고 갈망하고 씁쓸 하다가도 어쩌면 내가 마주하지 않을때 , 더 사랑스럽고 예쁘고 아름답고 소중했는지 모른다며. 나는 내가 모르던 감정을 다 아는 양 살아왔던 시절을 위로하고 싶다. 실제 바라보던 거울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이 담긴 , 마음으로 만든 거울 앞에서 나와 관람객을 위로 하고 싶다. 그것을 표현하지 않아도 사람은 , 인간은 본인의 모습을 냉정하게 피하거나 외면하고 있다는걸 잘 알고 있었을테니. 그 감정이 나온다면 그런대로 사랑하자고 , 그만 눌러담고 잠시나마 안아주자며. 감정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며 무엇으로 대화하느냐도 중요하다. 어떤 날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감정들을 혼자 끌어 안으며 울다 벽에 있는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쳤었다. 그런 모습을 더욱 더 같이 슬퍼하고 우연히 걸었던 길에서도 거울 속 , 유리속에 비춰진 내 모습을 수도 없이 마주 할 때 깨지면서 복구가 어렵고, 상처가 깊으면 다시 쓸 수 없으며 꼭 필요한 것 이면서도 버릴 곳이 마땅히 없는 것이 두고두면 언젠가는 꼭 필요한 것들이, 그런 면에서는 사람과 거울은 참 닮았다. 인적이 드물 때 바라보면 참 외로워보이는 그러나 사람이 마주할 때 그 안에 가득차는 모습은 나를 어루만지면 외로움을 달래주며 자신이 존재함을 드러낸다. 거울에 내가 가지지 못한 색을 입히다 보면 그보다 더 중요한 색이 내게 입혀진다. ‘일회성’이 되지 않기위한 기분 좋은 매일을 준비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이다. #gallery #galerie #tattoo #tattoowork #drawing #artwork #art#mariework #sculptor #sculpture #2017#mirror #comtemporaryart #comtemporary(Berlin, Germany에서)
#comtemporary#galerie#tattoo#drawing#mariework#gallery#comtemporaryart#mirror#artwork#tattoowork#art#2017#sculpture#sculptor
0 notes
Photo

숨막힌 청춘,50대 제친 20대 우울증[동아일보]○ 취준생도, 사회 초년생도 ‘우울’ ○ 치료도 못 받고 방황하는 청춘 김단비기자 , 정지영기자 입력 2017-04-04 03:00 “까똑.” 지난달 31일 오후 충북 충주시 K병원 신경정신과 진료 대기실. 메시지 알람이 울리자 진료를 기다리던 박모 씨(29·여)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박 씨는 황급히 가방에서 책 한 권을 쫓기듯 읽었다. 박 씨는 의사에게 “카톡 알람 소리가 울릴 때마다 숨이 가빠진다”고 털어놨다. 박 씨는 신경정신과를 찾기 전 대안으로 소위 ‘청년 위로서’로 불리는 베스트셀러를 찾아 읽었다. 읽는 동안 좌절감이나 우울감은 어느 정도 줄었다. 하지만 책을 놓으면 불안감이 엄습했다. 의사는 “상담자의 30% 이상이 청년”이라며 “박 씨처럼 매일 계속된 우울과 분노 초라함 억울함 등 때문에 일상생활이 흔들리는 청년이 대부분이다”라고 말했다. ○ 취준생도, 사회 초년생도 ‘우울’ 청년들의 마음이 병들고 있다. 극심한 취업난에 좌절을 반복하는 취준생(취업준비생)도, 어렵게 취업문을 뚫은 사회 초년생 중에도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가 늘고 있다. 3일 본보가 정신건강의 날(4일)을 맞아 최근 4년간 보건복지부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1년 중 2주 이상 우울감과 절망감을 경험했다”는 청년(19∼29세)이 2012년 9.3%, 2015년 14.9%로 증가했다. 과거 비중이 가장 컸던 50대는 같은 기간 15.0%에서 13.1%로 감소했다. 또 우울증과 조울증 등 기분장애로 병원을 간 20대는 2013년 6만948명에서 2년 뒤인 2015년 6만6188명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50대는 오히려 5175명 줄었다. 사회 초년생은 취업 준비 때 겪었던 좌절과 불안 등이 취업 �� 기대와 동떨어진 근무환경에 맞닥뜨렸을 때 계속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박차고 나올 용기도 없어 속으로 끙끙 앓다가 병을 키우기도 한다. 박 씨가 딱 그렇다. 입사 3개월의 박 씨는 최근 한 달째 오후 9시 이전에 퇴근한 적이 없다. “프로젝트를 같이 하자”는 선배들 때문이었다. ‘일을 배우라’는 부장 지시에 여기저기 불려가기 일쑤다. 야근수당은 따로 없다. 언제부턴가 동료·상사들과 점심을 먹으면 체할 때가 많았다. 두통약을 달고 살았다. 체중은 최근 일주일 새 3kg 빠졌다. 알 수 없이 몸이 아프고 실수도 늘어났다. 무엇보다 휴대전화가 울릴 때마다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다. 박 씨가 신경정신과를 찾은 이유다. 유모 씨(30)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지인들에게 연락해 술 약속을 잡는다. 하지만 정작 퇴근 이후 그의 발길은 집으로 향한다. 애써 잡은 약속은 모두 취소했다. 유 씨는 “퇴근할 때쯤 되면 기분이 좋아지다가 막상 퇴근하면 꺼질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자기계발에 병적으로 집착하면서 몸을 혹사시키는 경우도 있다. 취준생 생활을 오래 한 경우에 나타난다. 박모 씨(33)는 스피치 학원과 중국어·영어 학원, 노래 학원 등 네 곳을 다니고 있다. 그는 “입사 동료들보다 나이가 많다. 동료들이 나이도 많은데 일 못하고 분위기도 모른다는 뒷담화를 하는 것 같아 각종 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한효은(가명·30) 씨는 고교 3학년 때 평판이 낮은 서울 소재 대학과 유명 사립대 지방 캠퍼스 진학을 놓고 고심했다. 선택은 후자였다. 하지만 그는 서른 살이 되도록 취업을 못했다. 그리고 10년 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다. 진학 결정 때 자신에게 조언한 담임교사와 부모까지 원망하고 있다. 한 씨는 “1년째 부모님을 안 보고 살고 있다. 그 당시 ‘○○학과 가라’ ‘어느 대학 가라’고 말해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 같아 부모님 얼굴만 보면 화가 난다”고 말했다. 한 씨는 얼마 전 기분장애 진단을 받았다. ○ 치료도 못 받고 방황하는 청춘 “견디다 보면 나아지겠죠.” 진료실을 나선 최모 씨(31)는 이렇게 말했다. 의사는 기분장애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최 씨는 병원을 다시 찾을 생각이 없다. 그저 ‘상사 목소리만 들어도 짜증나고 밤마다 잠을 설치는’ 증상이 그저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질병인지 확인만 하고 싶었다. 최 씨는 “직장 부적응도 결국 내 탓”이라며 자신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러면서 괜히 취업하지 못한 다른 친구들 눈치를 탓했다. 취준생 친구들이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배부른 투정’으로 볼까 걱정하는 것이다. 서정석 건국대 충주병원 교수는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사치로 느낀 청년들이 병적으로 자기계발에 집착하고 제2, 제3의 대안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병을 키워 다시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래서 병원 대신 타인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민간심리센터를 찾는 경우도 많다. 문제는 일부 민간센터의 경우 충분한 치료 효과를 얻기 힘들다는 것이다. 3, 4개월이면 딸 수 있는 심리자격증만 갖춘 상담사가 나오거나 구체적인 해결책보다 “침착하게 기다리세요”라는 식의 추상적인 조언에 그치는 곳도 있다. 취준생 김모 씨(29·여)도 2년 넘게 계속된 구직 준비 스트레스 때문에 우울감을 느끼고 서울 마포구의 한 심리상담 전문가를 찾았다. 돌아온 답변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라”는 말이었다. 그는 “3회 상담 동안 약 30만 원과 시간까지 들인 걸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며 “우울증이 더 심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민간심리센터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이용자 보호 차원에서 상담 전문가의 수준과 치료 환경 등에 대한 관리감독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한창수 고려대안산병원 교수는 “최악의 실업률과 장기 불황, 세대 간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청년 우울증이 증가하고 있다”며 “청년들이 정신적 문제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사회 각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단비 [email protected]·정지영 기자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70404/83675384/1#csidxd6aafa5fae75521a50577adaeaac283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