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이 없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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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되는게 아니다 (자동이 아니야..? 그럼 아날로그네 ..? 불편한데 ..? 어..나중에 자동도 나와 )
일단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친 대형사고인 원죄를.사함 받았다는 것 이라는건 아는분은 다 알아야 하는 사실.. ( 이걸 모르는 분들도 부지기수 )
일단 우리가 원죄를.사함받아 음부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은것을 알았으면 그걸 마음으로만 믿을게 아니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받았음을 증거 해야한다고 써 있으니깐 다들 ( 전도도 하고 .. 좀 이상한 분들은 띠 두르고 예수천당 불신지옥 막 그러면서 다니기도 하고 그쵸..? )
그러고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이라니까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선교도 가고 그런단 말이쥬.. ( 잘하고 이써 .. )
그거면 다 한줄 알았쥬..?
사람들은 나중에 천국의 문앞에서 이야기 할겁니다
" 난 시키는대로 다 했는데 왜..? "
왜긴 .. 매 순간 기도 할때마다 대형사고를 쳤지 ..( 내가..? 뭘..? )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친 사고는 선악과를 먹은게 아니고 ( 선악과는 범죄의 결과일뿐 )
스스로 판단하여 그 문제의 주인이 된거죠 .
하나님께서 원하신건 그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고 맡기기를 원하신건데 ( 그래서 멱으면 다시 사는 생명나무도 준비하셨쟈나 )
문제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 문제를.해결하려는 것이 죄가 된거고 이것이 에덴에서 쫓겨난 결정적 원인 " 원죄 " ( 선악과 먹은게 아니고..? 그거 만들어놓고 먹지 말라하면 안먹겠냐..? 당연히 먹으라고 해논거지..? )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때 문제의 주인이 되어 이렇게 해주시고 저렇게 해주시고 하는건 기도 할때마다 원죄로 컴백하는거고 그건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싹싹 자우는 만행이라는거 ..
성령님이 언제는 충만한데 언제는 안계신 이유가 궁금하셔 ..?
내가 문제의 주인으로 있을때는 범죄로 인해 영이 죽은것과 같이 성령님도 일하지 않으시는거쥬 .
성령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만 우리가 주인으로 있을때는 역사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이것때문 ..
지금까지 우린 기도로 그리스도를.대적하고 있었다는 말도 않되는 현실 .. ( 헉.. 내가..? 징짜..? 어 진짜루 )
같은 내용의 기도를 해도 문제의 해결자이신 그리스도께 문제 자체를 내어놓고 그.길을 인도함 받아 행하느냐 ( 이게 정답 )
내가 내 생각대로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요구하느냐 ( 내가 주인되어 내맘과 내 생각대로 원죄를 마구마구 ..? )
이게 단순히 기더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문제의 주인되어 있을때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벗어난 것이기에 잘못하면 구원도 물건너 갈수 있다는 사실 ..
기도 한번 잘못하는게 이렇게 무서워요 ..
그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 마태복음 18:21-22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
늦은듯 싶어도 기회는 아직 많아요 이제 부터라도 우리의 말과 기도를 바꿔야 합니다
내가 주인이 아닌 철저한 그리스도의 소유된 종으로써 말과 기도로 주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 주님 이거 어떻개 하실건데요..? 이건요..? 저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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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th in Action
사회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고약한 실험 중 하나는 1970년 12월에 프린스턴 신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행한 것이었다. 장로교 목사가 되기 위한 수련을 받고 있던 신학생들에게 각각 멀리 떨어진 강의실에 급히 가서 선한 사마리아인 우화에 관한 설교를 하도록 시켰다. 이 우화에 따르면,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여행하는 중에 강도를 만나 죽도록 얻어맞고는 길가에 내버려졌다. 한참 후에 제사장과 레위 사람(유대 신전에서 제사장을 보좌한 사람 - 옮긴이)이 그 옆을 지나갔지만 둘 다 유대인을 외면했다. 반면 평소 유대인들이 아주 멸시했던 분파원인 사마리아인은 피해자를 보고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봐주어 그의 목숨을 구했다. 이 우화의 교훈은, 사람의 가치는 종교의 소속 여부가 아니라 실제 행실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성적인 젊은 신학생들은 저마다 서둘러 강의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어떻게 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교훈을 잘 설명할지 생각했다. 하지만 실험자들은 신학생들이 가는 길목에 남루한 차림의 사람을 배치했다. 이 사람은 머리를 떨구고 눈을 감은 채 강의실 문간에 고꾸라진 채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학생들은 ‘피해자’가 가련하게 기침을 하고 신음 소리를 내는데도 하나같이 서둘러 지나쳤다. 대부분은 그 남자를 돕기는커녕 가던 길을 멈추고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강의실에 서둘러 가야 한다는 감정적 압박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이방인을 도와야 한다는 도덕적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무수히 많은 다른 상황에서도 인간의 감정은 철학적 이론을 이긴다. 이 때문에 세계가 보아온 윤리와 철학의 역사는, 이상은 훌륭하나 행동은 이상에 못 미치는 우울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실제로 상대를 관대히 용서하고, 얼마나 많은 불교도가 이기적인 집착을 초월해서 행동하며,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일상에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가? 이는 자연선택이 호모 사피엔스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포우류와 마찬가지로 호모 사피엔스도 감정을 사용해 재빨리 생사의 결정을 내린다. 우리는 분노와 두려움, 탐욕을 수백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는데, 이들 모두는 자연선택이라는 가장 엄격한 품질 관리 시험을 통과했다.
- pp. 101-102,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by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4-17 Dear friends, do you think you’ll get anywhere in this if you learn all the right words but never do anything? Does merely talking about faith indicate that a person really has it? For instance, you come upon an old friend dressed in rags and half-starved and say, “Good morning, friend! Be clothed in Christ! B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walk off without providing so much as a coat or a cup of soup—where does that get you? Isn’t it obvious that God-talk without God-acts is outrageous nonsense?
18 I can already hear one of you agreeing by saying, “Sounds good. You take care of the faith department, I’ll handle the works department.” Not so fast. You can no more show me your works apart from your faith than I can show you my faith apart from my works. Faith and works, works and faith, fit together hand in glove.
19-20 Do I hear you professing to believe in the one and only God, but then observe you complacently sitting back as if you had done something wonderful? That’s just great. Demons do that, but what good does it do them? Use your heads! Do you suppose for a minute that you can cut faith and works in two and not end up with a corpse on your hands?
21-24 Wasn’t our ancestor Abraham ���made right with God by works” when he placed his son Isaac on the sacrificial altar? Isn’t it obvious that faith and works are yoked partners, that faith expresses itself in works? That the works are “works of faith”? The full meaning of “believe” in the Scripture sentence, “Abraham believed God and was set right with God,” includes his action. It’s that mesh of believing and acting that got Abraham named “God’s friend.” Is it not evident that a person is made right with God not by a barren faith but by faith fruitful in works?
25-26 The same with Rahab, the Jericho harlot. Wasn’t her action in hiding God’s spies and helping them escape—that seamless unity of believing and doing—what counted with God? The very moment you separate body and spirit, you end up with a corpse. Separate faith and works and you get the same thing: a corpse.
James 2:14-26 M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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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권 구원: 1. 구원 얻는 믿음은 무엇인가? 2017년 4월 27일 by 조정의
이신칭의에 관한 나의 이해와 생각은 주 되심 문제를 공부하는 동안 더 깊어졌다. ‘주 되심 구원(Lordship salvation)’이 이신칭의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에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 존 맥아더, “참된 무릎꿇음”, 16-17pp 필자는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미국 LA에 위치한 마스터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동시에 수년간 그레이스커뮤니티 교회에서 매 주일 설교 말씀과 여러 세미나, 콘퍼런스를 통해 가르침을 받았다. 마스터스 신학교의 총장과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목사는 동일인으로 바로 “참된 무릎꿇음”(The Gospel according to Jesus)의 저자이자 “주 되심 구원” 혹은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을 강조한 존 맥아더였다. 2013년 한국으로 들어와 목회 하면서 “주재권 구원”에 대한 미국 교계의 시각과 한국 교계의 시각이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주재권 구원은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비판이나 주재권 구원을 “행위구원”으로 간주하는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존 맥아더의 견해를 책으로만 대한 것이 아니라 책과 함께 삶과 가르침과 교회에 적용하는 실질적 모습까지 지켜보고 그 안에서 경험한 사람으로서 한국 교계가 존 맥아더의 “주재권 구원”을 바라보는 시각이 대단히 잘못되어 있음을 여실히 자각했다. 그래서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와 “주재권 구원”이 결코 상충하는 것이 아님을 이 칼럼을 통해 밝히기 원한다. 나아가 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핵심 교리인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주재권 구원”이 가리키는 구원의 교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칼럼 시리즈를 통해 설명하기 원한다. 특별히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복음, 사도들이 듣고 전달한 복음, 종교개혁자들이 지켜낸 그 복음이 치우치지 아니하고 온전히 재발견되기 원하고 주재권 구원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기 원한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먼저 오늘은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 원한다. 오직 믿음 성경은 계속해서 구원을 얻는 수단으로서 “믿음”을 강조한다(요 3:18; 5:24; 롬 3:27-8; 4:5; 5:1-2; 갈 2:16, 21; 3:24; 5:6; 딛 3:5). 에베소서 2장 8-9절 말씀은 “이신칭의”를 가르치는 대표적인 본문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바울은 분명하게 “은혜”에 의하여(τῇ γὰρ χάριτί), “믿음”으로 말미암아(διὰ πίστεως)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에베소서 주석을 쓴 해럴드 호너(Harold W. Hoehner, “Ephesians”, Baker, 2002)나 헬라어의 전치사를 연구한 머리 해리스(Murray J. Harris, “Prepositions and Theology”, Zondervan, 2012)는 “은혜”와 “믿음”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수단(“means”)이자 원인(“cause”)이라고 말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은혜”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원인(cause)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본문에서 이를 분명히 밝힌다(“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 2:4,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베드로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고 선포하였고, 그의 서신서에서는 “이 구원에 대하여”라고 소개하면서 “구원” 그 자체를 “너희에게 임할 은혜”라고 표현한다(벧전 1:10). 구원은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다. “믿음”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수단(means)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은 믿음의 통로로 우리에게 부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을 우리의 행위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을 구원의 “원인”으로 보고 우리 쪽에서 먼저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해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수 있다고 설명해서는 안 된다. “믿음”을 행위로 보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물론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믿어야 할 책임과 그에 따른 결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로마서 8장 30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원천으로 시작하여 우리에게 내려주신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임없이 제공하신다. 그런 측면에서 “믿음”은 나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구원자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존 맥아더는 “그 믿음까지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일부이지 사람이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맥아더 성경주석”, 1390p).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주어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이 여기에 근거한다. 믿음과 행함의 관계 문제는 종교개혁자 루터가 ‘지푸라기 서신’이라 부른 야고보서를 비롯하여 여러 성경 구절이 “믿음”이 포함하는 “순종”을 강조하여 성경이 스스로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 존 맥아더 목사가 “참된 무릎꿇음”의 가장 핵심적인 구절로 선택한 마태복음 7장 21절 역시 예수님께서 직접 선포하신 복음이 요구하는 믿음에 순종이 포함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R. C. 스프로울은 “믿음”과 “행함”(혹은 순종)의 관계를 이렇게 수식화하여 이해를 돕는다(“구원의 확신”, 생명의 말씀사, 2012). 특별히 칭의에 필요한 수단으로 행함을 추가한 가톨릭의 관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로마 가톨릭의 관점: 믿음 + 행함 = 칭의 ROMAN CATHOLIC VIEW: Faith + Works = Justification 스프로울의 결론처럼 이와 같은 수식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에베소서 말씀처럼 의인은 오직 믿음 하나로 구원 얻는다. 그래서 은혜다. 만일 행함이 구원에 요구되는 또 다른 수단이라면 아무도 구원 그 자체를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 사람이 한 부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구원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서 의인에게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기 위해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수단이 오직 믿음 하나여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삶을 근거로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이 아니다. 거룩한 삶을 목적으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엡 2:10). 개신교의 관점: 믿음 = 칭의 + 행함 PROTESTANT VIEW: Faith = Justification + Works 스프로울은 개신교의 관점을 성경적으로 정확히 제시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말한다(약 2:17). 믿음 그 안에는 믿음에 따르는 결과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7장에서 “행함”을 강조하시기 직전에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고 하신 것처럼, 믿음이라는 씨앗의 열매로서 행함은 필수적이다. 성경에서 믿음은 언제나 지적 동의를 넘어 믿음에 따른 결과를 기대한다. 이는 존 맥아더 목사의 주재권 구원을 비판한 장두만 박사도 지지하는 것으로 “‘믿다’라는…표현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 속에 순종 또는 헌신의 개념이 포함돼 있다”고 말한다(기독교 포털뉴스: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23). 따라서 구원 얻는 믿음은 순종이 필수적이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의 택하심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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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믿음 #행함이없는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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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말씀묵상 4/3 (화)
갈라디아서 5 :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아 멘~~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 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7~18)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방종을 위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 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며 행함이 없는 믿음 은 죽은 믿음으로 행함의 열매 로 구원의 증거를 나타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의 열 매를 맺어가는 복된 날 되기를 원하며 기도합니다
샬 롬~~♡♡
[갈라디아서 5 : 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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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장 19-26절, 행함이 있는 믿음, 조철수 목사, 맥알렌 세계선교교회, 남침례회
야고보서 2 (표준새번역 개정판) 19 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20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22 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23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고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또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24 여러분이 아는 대로,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25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26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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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있는 믿음” (야고보서 2:19-26)
바울이 전한 복음은 행위를 배제하고 믿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신학입니다. 언뜻 보면 야고보 서신은 바울의 가르침을 반박하는듯 하지만 믿음은 행위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실천되어야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는 선언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아 의롭게 되는 가르침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은 행동이 없는 말 뿐인 죽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은 말로만 표현하지 않고 행동하는 삶의 증거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고 영혼을 섬겨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 헌신하고 자신의 생활 속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모습이 바로 산 믿음의 증거입니다. 십자가의 형상은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수평적으로 이웃을 향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완전해 집니다. 그리고 성도는 믿음의 행위로 의롭게 됩니다. 복음을 소유한 성도는 행위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은 예수님의 삶과 정신을 진리로 인정합니다. 그 진리가 생활 속에서 녹아들어가 자발적으로 실천되고 세상의 가치관을 성경적 가치관으로 바꾸는 삶을 살 때 믿음은 완전해 집니다.
2. 믿음의 행위로 의롭게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게 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시고 오직 이를 믿고 예수님 닮는 삶을 살 때 의롭게 됩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믿음과 행동이 균형을 이룰 때 의로운 그리스도인 됩니다.
3. 행함이 있는 산 믿음.
예수님은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 바리새인, 서기관을 질책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선한 행동을 자랑하지만 진실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행위는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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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김환식 장로 (Ph.D)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가장 치열한 영적 싸움터입니다. 그것은 가정이 교회의 기초이며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이기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도, 사회도 힘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사단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처럼 가정 안의 부부 이혼율과 자살과 낙태는 늘어만 가는 반면에 출산율은 최저로 줄어든 현상은 바로 이 땅의 가정들이 사단의 집중적인 공격 앞에서 올바르게 대적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심각한 영적 싸움터인 가정 안에서 온 가족이 모여 하나님께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사단에 대적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중요한 가정예배가 소홀해질 때 우리의 믿음 생활은 행함이 없는 형식적인 믿음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지니게 됩니다. 가정예배를 드릴 때 얻게 되는 또 다른 유익은 바로 삶이 예배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아내를 위해 희생함으로 서로를 사랑하라는 가정 명령이 종종 가정 안에서 실패하게 되면서 부부 사이에 갈등을 겪게 되지요. 이처럼 가정 안에서의 이 갈등을 그대로 방치한 채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가정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서로의 잘못을 회개하고 서로에게 사과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가족들이 서로가 하나 된 그 아름다운 삶 자체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됩니다. 또 한 가지, 가정예배를 통해 얻게 되는 또 다른 유익은 가정 안에서 아버지의 위치와 권위가 회복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아버지들이 열심히 일해서 가족들의 경제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아버지가 직장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위치와 권위가 추락되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 많은 가정에서 보게 됩니다. 이것은 가정의 아버지가 가족들의 육체적인 필요에만 매달리다 보니 가정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너무나 쉽게 저버렸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렇지만 가정예배를 통해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게 될 때, 자연히 아버지의 영적 권위와 가정의 질서를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매일 말씀을 배우는 가족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어디 이 뿐입니까? 가정예배를 통해 온 가족이 하나가 될 때 그들의 기도가 모두 응답됩니다. 이처럼 순종하는 가족들의 기도제목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가정 안의 크고 작은 문제가 모두 해결되고 가정은 그야말로 천국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동역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이제부터 매일 저녁 온 가족이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십시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가정예배를 위해 가족들의 바쁜 스케줄을 조절해서 가정예배를 갖도록 할 책임은 가정의 지도자인 아버지의 몫임을 꼭 기억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끝) 2017-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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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 속의 다윗
블레셋 속의 다윗
삼상21:10
사울 왕의 추격 때문에 다윗은 국내에 있지 못하고 외국으로 망명했다. 블레셋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을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다윗이 자기들의 자랑인 골리앗을 죽였고, 또 사울 왕의 사위가 되기 위해서, 블레셋 사람 200명을 죽여서 그 신체의 일부를 혼수품으로 가져다 바쳤기 때문이다. 블레셋은 다윗 앞에서 밥과 같았다. 이런 다윗이 자기 발로 걸어서 블레셋으로 들어 왔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고자 했다.
천하의 다윗이라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이런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밖에 없다. 과거 자국에서 자기 백성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전쟁할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다윗은 의지할 것이 다 없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철저히 인식했다. 실제 상황에 처해 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다윗은 겸손함을 배웠다. (시119:71).
하나님은 지도자를 이론만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자신이 앞으로 일해야 할 곳에서 철저히 몸으로 경험하게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과 같이 몸으로 체험하지 않는 교육은 죽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자기 외아들 예수도 하늘에서 이론으로 공부 시키지 않고, 자신이 구원할 인생을 철저히 경험하게 했다. 아담의 저주 받은 인생을 처절하게 경험했다.
다윗은 블레셋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이 전쟁 영웅이 아니고, 이제는 정신이상이 되어, 남의 나라인줄도 모르고 찾아온 미친 사람이라 여기도록 행동했다. 일부러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침을 흘려 수염에서 떨어지게 했고, 남의 집 대문에 손가락으로 삐뚤빼뚤 글씨를 쓰는 시늉을 했다. 의심의 눈초리로 보던 블레셋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다윗을 편하게 대했다. 블레셋 왕 아기스도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나라에도 미친놈이 많은데 외국에서까지 올 것이 무엇이냐고 안심했다. 다윗은 미래의 왕이 되기 위해서, 내치(內治)를 잘하기 위해서 국내에서 학습했고, 외치(外治)를 잘하기 위해서 외국에서 학습하고 있다. 외국을 가보지 않고 외교를 잘 할 수 없다. 외국을 경험하는 방법은 다양 한데, 국가의 사절단으로 가서 칙사 대접을 받고, 좋은 것만 구경하고 오는 경우가 있고, 다윗처럼 미친 사람으로 들어가서 외국의 밑바닥을 보는 경우도 있다. 결국 전쟁은 지피지기(知彼知己)백전백승(百戰百勝)인데, 다윗이 평생 싸워야 할 블레셋을 철저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윗과 같은 경험이 더 유익하다.
다윗은 이 고난의 훈련과정(광야 학교)을 잘 견뎌냈다. 고향집 형제들의 믿음 없음을 골리앗과 전쟁터에서 확인했다. 악령이 역사하는 왕궁과 성령이 역사하는 라마 나욧도 가 봤다. 말씀을 소홀이 생각하는 놉땅의 제사장 집에도 가봤다. 이제는 원수의 나라 블레셋의 심장속으로 들어가 밑 바닥에서부터 공부하고 있다.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는 한 가지 깨달음으로, 다윗은 이 어려운 시험을 견뎌 나가고 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시험에 빠지지 않고, 시험 당할즈음에 피할 길이 있다는 것을 공부하고 있다. 다윗은 시험을 통해 오히려 더 강해지고, 더 앞으로 전진하는 강한 믿음으로 연단되고 있다. 이 과정을 이해하고, 감사함으로 통과하는 사람들 많이 그 시대에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런 고난과 깨달음, 세우고, 쓰심(동역)의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이 거절하면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설득하고 자의에 의해서 동의하고 참여하길 기다린다. 우리는 기꺼이 다윗처럼 이 교육과정에 자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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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은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17-소담.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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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논산훈련소에 진중세례식에 갑니다
이른 새벽 나와 준비하고 버스로 이동중
사업장이야..
주님꺼니깐 ..
알아서 하시것제.
우리가 기도할때 늘 주님의 자녀이오니 주님의 종 이오니 라고 했으면 그 말씀대로 행동 해야죠
내가 가면 사업장은 누가...? ( 주님의 사업장 이라며..? )
교회일에 따라다니면 장사는 누가.. ? ( 하나님의 자녀라며..? 언제는 주님의 청지기 라더니..? )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청지기면 교회일 하러가도 청지기의 일이요 사업장에 있어도 청지기의 일이 아닐까요..?
내가 아니면 누가 날 먹여주나 ..? 내 사업장은..? 하는 생각이 내가 내 삶의 주인임을 증거하는것 이겠죠
내가 내삶의 주인 일때는 주님이 일하시지 않으니 내 삶이 힘들수 밖에 없는거죠
주님의 은혜속에 편하게 살려면 주님께 내려놓고 주님의 청지기로 살면 됩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책임질 의무가 있고 주인은 그 종을 챙길 의무가 있는것 입니다
우리가 모든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자녀요 청기로 살때 우리의 삶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론은 아주 간단한데 행하는게 아주 어려운 믿음 이라는 거죠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 믿음 이라고 하는거죠 ㅎㅎㅎㅎ
" 야고보서 2:17-18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
저는 믿음안에 행하러 갑니다
오늘 배달은 쿠팡이츠나 배민 요기요를 이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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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권 구원: 3. 장두만 박사의 비판에 대하여(1) 2017년 5월 12일 by 조정의
장두만 박사는 “주재권 구원”이 말하고 있는 핵심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이유로 존 맥아더 목사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1. 구원 개념이 불분명하다 장두만 박사는 존 맥아더 목사의 구원 개념이 불분명하다고 말하면서 맥아더 목사의 목회 경험에 대한 기술을 문제 삼는다. 맥아더 목사는 ‘믿기로 결단하고 침례를 받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다시 침례를 준다’고 말하였는데 장두만 박사는 ‘이런 자들이 언제 정확하게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냐’고 묻는다. 맥아더 목사의 입장은 아리송하다고 말한다. 최초에 결단한 사람의 상태를 구원받은 것으로 판단하고 침례를 준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그리고 맥아더는 처음에 침례 받을 때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에 존 맥아더는 정확히 반대를 말하고 있다. 맥아더 목사는 “믿기로 결단하고 침례를 받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을 믿지 않은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의 구원이 거짓이었음을 발견하고 마침내 참된 구원을 얻었을 때 그들이 원한다면 침례를 다시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그레이스 교회에서 실제로 지켜본 모습이다. 매 주일 저녁 침례식에서 침례에 순종하는 자들이 구원 간증을 하는데 종종 과거에 자신이 믿었다고 생각하고 침례도 받았지만 실제로 그 구원이 거짓이었음을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장두만 박사가 지적한 첫 번째 비판은 존 맥아더가 FG(Free Grace) 진영을 비판하는 주된 이유다. “그들은 침례를 받을 당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해 구원은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믿고 있다” 장두만 박사가 제기한 이 문장은 존 맥아더 목사가 주재권 구원을 강조하면서 일관성 있게 비판해온 이분법적 사고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첫 번째 비판은 잘못된 비판이다. 존 맥아더 목사의 가르침과 실질적인 적용을 제대로 안다면 이러한 비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신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주재권과 객관적인 주재권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결단, 소원, 각오와 실제적 주재권(실제로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사는 것)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객관적 주재권(예수님이 주님이시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것이 삶 가운데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주재권을 완벽한 순종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제기한 비판이라고 판단한다. 실제로 문맥에 따라 강조하는 바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요한일서의 경우 이렇게 강조하며 말한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6) 장두만 박사의 비판대로라면 사도 요한 역시 실제적 주재권과 객관적 주재권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범죄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를 보거나 알지도 못하였다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서신서의 앞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요한은 완벽한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지을 수 있음을 가정한다. 오히려 완벽하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한다(1:10). 3장 6절에서 요한이 말하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빛이신 하나님, 어둠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을 보고 알고 사귐이 있는 자는 당연히 죄를 멀리할 수밖에 없다. 요한은 여기서 객관적, 실제적 주재권을 구분하지 않는다. 믿는 사람이 맺어야 할 열매에 대해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야고보가 믿음과 행함을 하나로 묶는 것과 같은 원리다. 성경은 실제적, 객관적 주재권을 억지로 구분하지 않는다. 존 맥아더는 그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한다. 존 맥아더가 실제적 주재권을 강조할 때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사도 요한처럼 맥아더 목사는 완벽한 순종을 해야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회개하고 자백하여 죄 사함을 얻고 은혜를 누리라고 권한다. 그 완전한 기준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결코 실패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패할 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의미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형편없이, 자주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참된 신자는, 자신의 삶의 방식대로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며 나아올 것이다(요일 1:9) – 존 맥아더, “참된 무릎꿇음”, 350p 물론, 믿음이 죄 없는 완전함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가 아니다…믿는 자들은 순종하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불완전하게 따를 수도 있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귀신에 사로잡혔던 소년의 아버지의 간청을 이해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 – 311p 그리스도에 대한 온 마음을 다한 헌신은 우리가 온전히 순종한다거나 완벽한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니다. 죄로 물든 육체의 흔적은 자주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한다(롬 7:15).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불순종보다 순종이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특징이 됨을 뜻한다…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범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불순종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실패한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온전함에 이르지 못한다(빌 3:12~15)…그러나 구원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를 실질적으로 의롭게 한다는 진리를 그런 사실이 무효로 만들지는 않는다. – 존 맥아더, “구원이란 무엇인가”, 40-41pp 오히려 실제적 주재권과 객관적 주재권을 구분하는 것은 주재권 구원이 비판하고 있는 이분법적 구원론의 아류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 스크린샷 2017-05-10 오전 11.46.04 주되심 믿음(객관적 주재권)과 주되심 순종(실제적 주재권)을 구분한다면 언제가 구원의 시점이라 말할 수 있는가? 만일 누군가가 주되심을 믿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실제적으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를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진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주되심을 믿은 상태(1)에서 주되심을 순종하는 상태(2)로 자라나는 동안 열매를 아주 조금씩이라도 맺는다면(Q2) 이를 아래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참된 믿음으로서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포함하고 그것이 차차 열매로 드러난다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객관적인 주재권이 완벽한 실제적 주재권으로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객관적 주재권을 인정하는 시점과 실제로 그 주재권이 드러나는 순종을 구분하는 것은 주재권 구원이 문제로 삼은 내용을 스스로 취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스크린샷 2017-04-27 오전 11.30.19 참된 믿음에는 주되심을 기반으로 한 행함이 포함된다.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나타나는지는 영적 성장의 속도와 신자가 경건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열심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객관적 주재권 혹은 주되심 믿음은 결국 주되심 순종으로 드러나야 진실성이 입증된다. 주재권 구원이 완벽함을 요구하게 될 때 행위구원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객관적 주재권을 실제적 주재권과 분리하려고 하는 노력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얻는 참된 믿음의 변질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3. 구원의 확신이 약화된다 장두만 박사는 주재권을 믿고 순종할 때 구원의 확신이 생긴다면, 결국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의 수가 극히 적을 것이라 말한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행위로 드러나는 것만 집중하다 보면 연약하고 부족한 삶의 열매가 늘 구원을 의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주되심은 완벽함(perfection)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성(direction)을 요구한다. 영적으로 태어난 아기는 넘어지고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만(완벽하지 않지만) 계속해서 자라난다. 영적 완성이 아니라 영적 성장이 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의 확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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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권 구원: 2. 무엇이 문제인가? 2017년 5월 5일 by 조정의
주재권 구원이 주목받은 이유는 1988년 존 맥아더 목사가 “참된 무릎꿇음”이라는 책을 낼 무렵 알미니안 신학의 영향 아래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인간의 선택이 강조된 구원론이 강세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리 그래함을 비롯하여 많은 설교자가 “인간이 믿기로 결단해야만 하나님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라는식의 전도를 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 결단의 단계를 둘로 나누는데 첫째로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는 단계, 둘째로는 그 예수를 주인으로 인정하는 단계다. 그들은 각각의 단계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였지만, 문제는 그 은혜를 1차와 2차로 구분하여(영어로는 Blessing이라고 하기도 함) 결과적으로 성경에서 하나의 묶음으로 말하고 있는 믿음과 주되심을 둘로 나누었다는 데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1차 하나님의 은혜 아래 인간이 예수를 구원자로 믿기로 결단한 시점에 영혼은 구원을 받는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하지만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 위해서는 두 번째 결단이 필요하다. 2차 하나님의 은혜로 신자는 결단을 하는데 “주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겠다”는 결단을 이 시점에서 한다. 주되심을 인정하는 단계다. 어떤 사람은 1차 결심은 믿는 것으로, 2차 결심은 제자가 되는 것으로 구분한다. 스크린샷 2017-04-27 오후 3.05.03 존 맥아더는 ‘믿음은 주되심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원 얻는 믿음은 주되심의 관계 안에서 맺는 행함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믿음과 주되심을 위의 도표와 같이 분리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빠진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 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 맥아더는 위의 도표에서 Q1에 위치한 사람의 상태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만일 믿음과 주되심을 억지로 분리한다면 Q1에 위치한 사람의 상태는 어떤 상태인지 진지하게 묻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를 믿었다’고 고백하고 예수를 믿기로 결단했다면 그 사람에게서 아무런 열매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일단 구원은 받았다고 선포해야 하는가? 예수를 구원자로 인정하지만, 주인으로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신자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봐야 하는가? 예수님은 이 질문에 아주 명료하게 답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사도 요한의 대답도 단호하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4-6) 요한의 구분은 명확하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면(‘아노라’) 그 증거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만일 그 증거가 없으면 그가 ‘그를 안다’고 말한 것이 거짓말이다. 하나님과 그의 관계는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다. 성경은 “행함”��� 따라오지 않는 “믿음”이 가짜라고 말한다.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져버리라고 말한다(마 7:19). 그래서 존 맥아더의 주재권 구원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순종의 열매를 보이지 않는 영혼에 대해 그 “믿음”이 가짜라고 분별한다. 그는 단지 입술로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자(마 7:21)이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귀신처럼 하나님 앞에서 믿고 떠는 자는 될지라도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자는 아니라는 것이다(약 2:19). 참된 믿음은 주되심에 근거한 행함을 반드시 요구한다. 여기서 분명하게 해둘 것이 있는데 “행함”은 “완벽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는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완벽에 이를 수 없다. 신자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이다. 이 땅에서 요구되는 것은 지속적인 성장이다(벧후 3:18). 거듭남과 동시에 장성한 분량에 도달하는 것은 성경이 묘사하는 성장의 모습과 다르다(붉은 화살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새롭게 태어난 신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순종을 통하여 선한 일을 열심히 행하는 주의 백성이 된다(딛 2:14). 그러나 육신의 출생 이후 성장이 그러하듯 영적 성장 역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갓 구원 얻은 신자에게 장성한 분량의 성품과 성숙함을 기대할 수 없다. 바로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이 터져 나올 수 있어도 그것이 갓 구원 받은 신자가 옛 자아가 지배한 오래된 성품과 죄악 된 습관을 단번에 모두 바꾸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을 가진 신자는 아주 미세하게나마 살아있는 증거를 보인다.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며 말씀을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과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갖는다. 죄만 사랑하는 지체 안에 선을 사랑하는 성령이 함께 거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살아계심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나게 되어있다. 끊임없이 말씀으로 오래된 생각을 제거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장이다(엡 4:17-24). 그래서 베드로는 갓난아기가 젖을 사모하듯 말씀을 사모하라고 한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기” 위해서다(벧전 2:2). 그렇다면 왜 이런 방식의 구원론이 생겼을까? 첫째, 알미니안의 영향 아래 인간의 선택이 지나치게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한번 사람이 “믿는다”라고 결단하면 그것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 결단의 진정성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주여”라고 말해도 주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그 고백이 가짜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들은 “주여”라고 말하는 것의 진정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성의 증거로는 뜨거운 감정, 마음의 평안, 위로 등 대부분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면이 주목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되심을 인정하기 전까지 하나님의 은혜는 주어지지 않는다. 1차 은혜가 내려지고 나서 인간이 다음 결단을 내리기 전까지 성화는 시작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선택을 강조한 나머지 구원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지나치게 간과한 것이다.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이는 누구신가? 무게중심이 인간의 선택에 지나치게 기울어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구원론이 생긴다. 둘째, 행함을 완벽함과 혼동하기 때문이다. 이 관점을 가진 사람 중 누구도 최초의 믿음에 “나는 예수를 주로는 인정하지 않아.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아도 돼”라는 고백이 들어가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다만 믿음의 고백 이후의 삶이 요구하는 것이 초신자에게 있어서는 너무 높다는 것이다. 성장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우려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극단적인 반대로 돌아서 행함이 전혀 없는 것까지 참된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초신자의 연약한 상태에 대한 배려는 필요하지만, 그 배려가 그들의 삶에 뚜렷이 드러난 열매 없는 상태까지 감싸려고 들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진영을 FG(“Free Grace”)라고 하며 주재권 구원(LS: :Lordship Salvation)을 반대한다. 그들은 “값없는 은혜파”라고 스스로를 부르기 원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중요하고 높은 자리에 두기 원해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주장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연약하게 만드는 데, 주권적으로 구원 얻는 믿음을 은혜로 주시고 그 믿음의 결과로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인간의 선택”으로 제약했기 때문이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의 은혜가 아닌가? 또 하나의 문제는 성경이 믿음과 행함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원래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은 주재권을 근거로 한 행함을 포함한다. 그러나 위와 같이 성경이 구분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이분화한다면 앞에 있는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에서 멀어진다. 믿음은 주되심에 근거한 행함이 빠진 단순 고백이 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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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권구원론(Lordship Salvation) 비판
http://researchheresy.com/board11/2061
이인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에 그 “믿음”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에서 언급되는 “믿음”이 과연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을 의미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언제나 진정한 믿음이며, 앞에서 수식하는 형용사에 따라서 다른 의미가 될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을 간단히 정리요약하자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이 복음이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을 의미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기독교의 교단과 교파가 수없이 많지만 거짓 믿음과 형식적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곳은 단 한군데도 없다.
물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모두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에는 동의를 한다. 분명히 거짓 믿음과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기독교 자체의 복음이 변질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여 어느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개인의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이 분명하다.
만약 기독교의 복음이 변질되었고 잘못되었다면, 기독교인은 단 한명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선언해야만 한다.
최근에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준행위구원론에 가까운 소위 lordship salvation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구원론으로 신학적 논쟁을 일으킨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맥아더목사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부 개혁주의나 복음주의 목사들이 동의를 하고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결코 전통적인 개혁주의나 복음주의적인 주장이 아니며, 전혀 다른 내용의 또다른 신학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에 젊은 신학생들은 성경책을 단 한번도 통독하지 않으면서, 신학자들의 서적만 읽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옳다고 판단되면 맹목적으로 그 신학자들의 주장을 추종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성경적인 주장을 외면한 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주장은 무조건 옳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맥아더는 원래 세대주의 학자이다. 미국의 세대주의에서는 도덕폐기론이 성행되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구원파와 같은 구원론자가 미국에 많았다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즉 예수만 믿으면(혹은 어느 교회에 입교만 하면) 구원을 받은 것이고, 그 주관적인 구원의 확신은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에 상관이 없다는 도덕폐기론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원파 교회조차 그렇게 단순히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으며, 어느 기독교에서도 단지 교회만 다니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맥아더의 lordship salvation은 그러한 극단적 세대주의 구원론을 반박하기 위한 구원론으로 시작된 배경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예수를 구주(Savior)로만 고백하면 부족하고,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주님으로 고백하여 자기의 주인(Lordship)가 되어야만 하며, 순종과 회개와 행함의 열매가 나타나야만 참된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구원론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교회들이 타락함에 따라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많은 동의와 호응을 가져 왔으며, 조금 더 나아가서 기존의 기독교의 복음을 거짓 복음이며 변질되었다고 맹비난하며 공격하는 일련의 행위구원론자들과 인본주의적인 구원론자들이 이들의 주장에 가세하게 시작한 것이다.
물론 순수하게 믿는 자의 의무로서 실천적인 행함을 강조하는 목사들과 이들은 엄격히 구별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들은 많은 학자들과 목사들을 자기들과 같은 견해를 가진 것으로 포함시키기를 즐겨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자기 주장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의도일 뿐이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일차적으로 성경적이어야만 한다. 성경이 기록된 객관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모순과 오류를 살펴보자.
(1) 이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새로운 신학적 구원론을 세우기 위하여 기본 기독교의 복음을 거짓 혹은 변질된 것이라고 왜곡하고 비난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의도적인 과장과 왜곡을 함으로서 기독교의 복음이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이라도 구원을 받는다고 증거하는 자료를 제시하지 못한다. 이들은 단골적인 메뉴로서 사영리를 비난하는데, 모든 기독교인이 사영리로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아니며, 사영리는 입으로만 거짓 고백을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사영리가 말하는 믿음도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 마음으로 시인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말한다. 실제로 사영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 간증은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들으면 사영리로 전도받은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거짓 기독교인이 되고만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그들이 비난하는 도덕폐기론은 이미 정통기독교의 구원론이 아니며 이미 정통교단에서 이단으로 발표된 구원파의 구원론일 뿐이다.
(2) 물론 필자는 거짓 믿음이나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자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에 동의를 하며 기독교인들 중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음을 동의한다. 그러나 결국 이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진정한 믿음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연약한 믿음을 정확히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이 기준은 그들의 주장을 따르자면 결국 “행함, 순종, 의지, 도덕적 결단”이 되어지므로 결과적으로 행위구원론이 되고 만다. 즉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행함, 순종, 의지, 도덕적 결단”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므로,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행함의 요소들이 구원의 또다른 조건이 되고만다. 이들은 믿음과 행함을 동일한 개념으로 포함시키지만, 성경은 믿음과 행함을 다른 개념으로 구별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의 행위구원론은 믿음이 전혀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아니다. 그런 주장은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적인 주장이 될 것이며, 결국 믿음과 함께 행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바로 행위구원론이다.
그러나 성경은 “연약한 믿음을 비판하지 말라”(롬14:1)고 기록하고 있으며, “단단한 식물을 먹을만한 장성한 믿음으로의 연단”(히5:12-14)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과연 믿음에 카트라인이 있는가? 이들이 누구길래 믿음의 카트라인을 설정하는가?
그렇다면 얼마만큼의 행함과 얼마만큼의 의지와 순종과 도덕적 결단이 구원의 커트라인이 되며, 그 기준을 무엇으로 정하는가? 100%의 행함과 순종이 구원받을 믿음인가, 아니면 몇%의 행함과 순종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들의 주장을 따르자면 갈라디아교회를 비롯하여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모두 구원을 잃게 된다.
고전 3:2-3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초신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되며, 연약한 믿음, 행함이 부족한 믿음, 행함을 아직 보이지 않은 믿음, 순종과 의지가 적은 믿음도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 구원의 커트라인을 신학자들이 정하는가?
과연 예수님의 사도들조차 완전한 믿음을 갖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 만약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갖추어진 믿음이 완전한 구원이 된다면,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기 위하여 수십년 혹은 평생의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며, 아마 평생동안 예수를 믿어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비극의 결과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이 평생동안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없다면 사람은 아무도 완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완전한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인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재권구원론자들은 자라는 사람들조차 모두 구원을 받지 못한 거짓믿음을 가진 자가 되고만다.
고전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3) 이들의 구원론은 결국 기초적인 구원의 서정이라는 신학을 외면하는 주장으로서, 칭의와 성화조차 구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여 성경이 수없이 언급하는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성화적인 과정”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즉 단번에 받는 즉각적인 구원(칭의, 중생)과 점진적인 구원(성화)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이상한 구원론이 되고만다.
다시 말하자면 칭의와 성화에 대한 성경구절을 모두 무시하여야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 예수를 믿고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성화의 과정에서 행함의 열매가 없으면 모두 무더기로 구원이 취소되어지는가?
또한 예수를 믿고 중생의 거듭남의 체험을 한 사람도 성화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결국 성화구원론이 되지 않는가?
(4)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인치심과 보증은 모두 거짓말이 되는가? 예수를 믿고 성령이 내주한 거듭난 성도들도 행함이 없거나 순종하지 못하면 구원을 잃는다면 다음 성경구절은 모두 거짓말이 되는가?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고후 1: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요 10:27-29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5) 이들은 결국 또다른 구원론으로서 기독교의 교계를 분열시키고 있다.
이들의 구원론을 따르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대폭적으로 줄어들게 되며, 구원을 받기 위하여 상당한 어려운 양육과정과 고된 훈련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이들 중에서 일부는 제자와 성도가 다르다는 주장까지 하지만, 성경은 제자와 성도를 구별하지 않는다. 또 제자만 구원을 받고 성도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극단적인 구원론으로는 어쩌면 구원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말하는 온전한 믿음의 조건으로 행함과 순종과 의지와 도덕을 100% 지킬 수 있는 인간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소위 값비싼 구원이 되며, 그러한 논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효과를 감소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어느 유명한 목사나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이 충만할 경우가 있으며 때로는 의심을 가질 경우도 있다. 순종과 행함과 의지도 일평생 항상 동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때로는 믿음이 장성한 교인도 죄를 짓거나 비도덕적인 행위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은 받았다가 취소되는 것을 반복하는가? 예를 들어 60평생을 진정한 믿음을 갖다가 죽기 얼마 전에 주님께 불순종하거나 믿음이 약해지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십자가 강도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그는 어떤 행함과 순종과 의지와 도덕적인 삶을 가졌는가?
(6) 이들이 주장하는 구원론은 성경에서 말하는 “값없는 은혜”와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한 구절에 대해서 이들은 설명할 방법이 없어지며,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수많은 바울서신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또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효과를 축소시키거나 부정하여야만 한다.
결국 이들이 자신들의 구원론을 성경적으로 증거하기 위하여서는 부분적인 일부의 성경구절만을 선택적으로 인용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것이 핸드캡이 된다.
전통적인 개혁주의와 복음주의가 말하는 구원론은 행함이 전혀 필요없으니 지킬 필요가 없다는 도덕폐기론이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입으로만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행함은 구원의 조건으로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천적인 열매이며 성화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들이 이신칭의의 기독교의 복음 자체를 변질되었으며 거짓복음이라고 비난한다면, 이들의 구원론은 이신칭의 자체를 왜곡시키며 부정하는 주장이 되므로 행위구원론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행위구원론이 아니라는 궁색한 변명만을 늘어 놓은 것이 된다.
행함의 열매가 없거나 의지, 순종, 도덕적인 결단이 없는 믿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은 곧 믿음이 있어도 이러한 행위적인 요소가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결과와 동일하므로 이러한 주장이 바로 행위구원론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신칭의를 말하는 기독교의 복음을 거짓 믿음이나 입으로만 고백하는 형식적인 믿음으로 왜곡시켜서 기독교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행위구원론이 아니면 무엇이라는 것인가?
(7) 결론적으로 이 주재권구원론을 인정한다면 기존 기독교의 복음이 마치 거짓 믿음과 형식적인 믿음으로도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기독교에 구원을 받지 못할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에서 믿음을 잘못 가르치지는 않는다. 기존 기독교는 도덕폐기론을 주장하는 구원파와 다르다.
교회가 타락하고 범죄함에 따라 이러한 주장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이들의 주장은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기독교인의 의무와 책임이 되어야 하는 것은 좋지만, 값비싼 구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된다.
극단적 세대주의의 도덕폐기론을 반박하는 좋지만, 일부 과격한 사람들과 같이 정통신학의 구원론까지 공격한다면 그들은 행위구원론이 되고만다는 교훈을 잊으면 안된다.
물론 맥아더 목사가 소위 과격한 행위구원론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그는 훌륭한 신학이다. 맥아더목사의 신학은 세대주의로 분류되지만, 그의 구원론은 애당초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의 도덕폐기론 혹은 율법폐기론자들에 대한 반박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재구원론이 행위구원론자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의 인터넷을 보면, 큰믿음교회의 변승우를 지지하는 일련의 행위구원론자들이 폴워셔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고 동영상을 올리고 있으며, 맥아더목사의 주재권구원론을 인용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이 변질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직접 목격하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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