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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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ker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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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 ‘한덕수 탄핵 기각’ 탄핵 중독에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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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on2sang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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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Portrait of Mendelssohn: A.H. Payne and W.C. Wrankmore, after Hildebrand. Engraving, circa 1830. Hulton Archive / Getty Images. https://www.liveabout.com/felix-mendelssohn-biography-4173450 ) <신동 1809~1825> 그렇다면 1821년 말에 당대에서 가장 저명한 문화적 아이콘의 축복을 받고 바이마르에서 돌아온 열두 살 난 소년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장래 누나의 남편이 될 빌헬름 헨젤이 그린 드로잉, 그리고 카를 베가스가 그린 유화 스케치는 검은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흘러내리는 진지하고도 몽상적인 아이, 라파엘 전파의 모델이 되어도 손색없을 소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가 변덕스러울 정도로 활력이 넘치는 소년이라고 말했다. 피아노에 앉지 않았을 때의 행동들은 사춘기 이전의 보통 아이들처럼 고집스러운 데가 있어 오히려 참신하게 느껴질 정도였고, 평생에 걸쳐 대화 상대자들을 매혹시키게 될 개성적인 매력이 이미 다분히 눈에 띄었다. 펠릭스가 집으로 보낸 수많은 편지에서 드러나는 개인이나 기관들에 대해 내린 조급한 판단들은 많은 사람들이 관찰한 대로 아이다운 특징이라고 하겠지만, 가족의 울타리 밖에서는 이런 성격을 드러내지 않았던 듯하다. 사회적으로는 자신감이 넘치고 외향적이었지만,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적 자아의 표현은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아껴두는 초연한 성품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p38-39) [Fanny Hensel: Goethe-Lieder] 8년 후에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파니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설득한다. "네 진정한 소명, 젊은 여성의 진정한 소명을 따라라. 즉 가정주부의 역할에 충실하라"고 설득하고 있다. 그 다음 해에 결혼한 뒤에도 파니는 계속 연주하고 작곡하여, 400곡이 훨씬 넘는 곡을 썼는데, 그 대부분은 가곡과 피아노 소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중 앞에서 피아니스트로 등장한 적이 거의 없었고, 죽기 몇 달 전에야 겨우 자신감을 얻어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출판했다. 이때에도 그녀는 유명한 남동생의 충고를 물리쳐야만 했다. 그녀 작품의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초고 형태로 남아 있다. 펠릭스도 특권적인 출신 배경이 자신의 발전에 장애물이라고 느낀 적이 가끔 있었겠지만, 파니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다. <아테나움>지는 1838년의 기사에서 그녀가 가난했더라면 그 재능이 전 세계에 알려졌을지도 모른다고 썼는데, 여기에는 '기회'의 진정한 본질을 꿰뚫어본, 비극적인 통찰이 담겨 있다. (p40-41) [MENDELSSOHN: Sonata in g minor, op.105] 이와 비슷하게 1821년에 쓴 피아노 소나타 G단조, 특히 탐색하는 듯한 아다지오 악장은 초기 베토벤이 작품 뒤에 서 있는 것 같다. 그 악장은 열두 살짜리 소년의 작품으로는 놀랄 만한 성숙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p43) [MENDELSSOHN: String Symphony] 1960년대 이전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 현악교향곡들은 형식과 스타일, 힘의 측면에서 18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 점에서 이 곡들은 베토벤의 교향곡 전통이 아니라 고전주의 이전의 전통, 3악장으로 된 이탈리아식과 독일식 신포니아(멘델스존 본인이 이 곡들을 부른 호칭)에 속한다. 첫 여섯 곡은 모두 빈 고전주의 모델의 4악장과 달리 3악장이며, 대위법적 텍스쳐가 전체를 지배한다. 1악장과 3악장이 특히 그러한데, 지칠 줄 모르고 돌진하는 리듬이 특징이다. 이 작품들에는 첼터가 숭배하던 또 한 명의 영웅 C.P.E바흐의 영향이 가장 크게 드러난다. 하지만 바로크 양식도 늘 가까이 느껴지는데, 1번의 2악장에 나오는 시칠리아노 기법과, 2번의 2악장에서 삼중 소나타가 반영되는 부분이 그런 예이다. 고전주의 이전 신포니아의 또 다른 전형적인 사례는 형식적 대비를 지닌 관례적인 소나타 형식이 기본 구조로 채택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이 교향곡들이 멘델스존 일가의 일요 음악회에서 처음 연주되었을 때, 펠릭스는 피아노로 콘티누오 파트를 연주하기까지 했다. 이는 1820년대쯤에는 시대에 아주 뒤떨어졌다고 여겨졌던 기법이다. 의도적으로 옛 어법을 따르고 있기는 해도 이 곡들은 놀랍도록 조숙한 것이었다. 작곡자가 그토록 어렸으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곡에 담겨 있는 감성적인 풍부함은 기술적 화려함에 한참 뒤쳐진다. 하지만 이 곡들에서 느껴지는 미숙함은 각 부분이 따로 논다는 인상, 즉 각 부분이 모여 이룬 전체의 효과가 각 부분들의 총합에 못 미친다는 전형적인 이유 때문이다. (p43~44) [MENDELSSOHN: Die Soldatenliebschaft] [MENDELSSOHN: Der Onkel aus Boston] [MENDELSSOHN: Die Hochzeit des Camacho op. 10] 1820년대 초반에 멘델스존이 창작에서 이룬 급속한 성장에서 가장 놀라운 면모 중 하나는 그가 ���렵한 엄청나게 넓은 범위의 형식과 장르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여기에는 오페라도 포함된다. 생애 후반에 그는 다시 이 장르로 돌아오겠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작곡가로 활동했던 가장 초기 외에는 오페라를 쓰지 못했다. (...) "앙상블 곡에서는 그가 대위법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오케스트레이션은 처음으로 시도했는데도 믿을 수 없을 정도에요. 어린 아이가 오케스트라의 각 파트를 사용해서 그토록 자신있게 작곡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같습니다. 잘못 작곡된 곳은 스무 군데도 안 되었지요. 또 연주 불가능한 음악이라고 여긴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단 한 줄도 전문가가 검토해주었거나 다시 써준 부분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놀랍지요. 라파엘로의 그림에 나오는 것 같은 곱슬머리를 한 예쁜 아이가 많은 음악가들 사이에 앉아 항상 음악으로 빛나는 눈빛으로, 보기 힘든 에너지를 발산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부모의 마음은 정말 사랑으로 가득 찬답니다. 아이의 모습 위로 순진무구한 축복이 쏟아져 내렸어요.-레아 멘델스존 (p45~46) [MENDELSSOHN: Piano Quartet] 돌아온 지 며칠 내에 그는 자신의 Opus.1로 삼기로 선택한 작품도 완성했다. 그것은 다음 해에 출판될 예정인 피아노 사중주 1번, C장조였다. 1821년에 괴테의 집에 모은 유명인사들 앞에서는 아마 그전에 쓴 피아노 사중주 D단조를 연주했던 것 같다. 펠릭스의 첫 오페라처럼 이 C장조 사중주도 모차르트에 대한 사랑, 그리 많지 않은 이 장르의 초반 업적들 가운데서도 우뚝 솟은 피아노 사중주 작품들을 써낸 작곡가에게 바치는 멘델스존의 사랑을 웅변적으로 증언한다. 신선하고도 진지한 주제가 개시부 첫 마디에서 이미 선명해지며, 여기에서 신비스러운 첫 주제가 첼로로 소개된다. 파니가 이 작품에서 펠릭스의 새로운 남성성에 대해 언급한 것도 그렇지만, 4악장으로 된 이 사중주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책임감은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는 젊은이의 작품으로 들린다(베를린의 지식인 엘리트 층에서는 펠릭스와 젊은 날의 모차르트를 비교하는 것이 이미 일상적인 화젯거리였다). 사실 이 작품은 이전에 그가 쓴 어떤 것보다도 더 현저하게 모차르트풍이다. 다만 살짝 교활한 느낌도 주는 1악장의 제2주제는 명백하게 1820년대의 발언이며, 세 번째 악장은 아직 몇 걸음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성숙기 멘델스존 스케르초의 특징이라 할 '꼬마 요정' 모드를 예고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p48~49) 펠릭스와 아브라함은 파리에서 7주일 이상 머물렀다. 그들은 5월 20일에 베를린을 향해 귀국��에 오르면서 이제는 관계가 된, 괴테를 만나기 위해 바이마르를 들렀다. 펠릭스가 최신작 실내악곡을, 그것을 헌정 받는 사람 앞에서 연주한 것은 바이마르에서였다. 1월에 작곡된 피아노 사중주 B단조, Op.3은 작곡가가 ���판한 피아노 사중주 세 곡 가운데 마지막 곡이자 가장 감동적인 것으로서, 같은 해 후반에 작곡된 팔중주가 돌파구를 열기 전의 것으로는 아마 가장 완성된 형식을 갖춘 작품일 것이다. 1, 3악장은 펠릭스의 음악언어에 새로 나타난, 생각에 잠긴 듯한 집중력을 특히 강하게 발산한다. 그러면서도 똑같은 활기찬 3악장에서는 멘델스존의 특징이라 할 스케르초가 성숙기에 도달한다. 이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한 무궁동에는 마녀들의 잔치 이상의 뭔가가 있다. 음악에 시각적 연상의 여지가 있으면 훨씬 더 예리하게 감식할 수 있었던 괴테는 나중에 동료이자 비서인 요한 페테 에커만에게 이 부분을 그런 분위기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그 스케르초에 '캐릭터'가 있다고 말했다. "이 소용돌이와 회전하는 블록스페르크에서 벌어지는 마녀들의 춤이 연상된다네. 그래서 나는 이 경이적인 음악과 결부시킬 개념을 찾았지." p62) [MENDELSSOHN: Concerto for 2 Pianos and Orchestra in E major] 이 작품에서는 멘델스존이 당시 창작 생활에서 베토벤의 영향력을 점점 더 크게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향력은 그의 마지막 현악 교향곡과 1823년 10월 17일로 완성 일자가 기록된 두 번째 이중 협주곡인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E장조에서도 느껴진다. (...) 1악장의 피아노 시작 부분을 보면 베토벤의 <황제> 협주곡의 첫 페이지에서 받은 영향이 현저하다. 악장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이 영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 하지만 멘델스존이 본격적인 오케스트라를 위해 처음부터 총보를 작성한 최초의 협주곡은 이 다음에 나오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이다. (p52) [BACH: Matthäus-Passion BWV 244] 펠릭스의 15살 생일은 그 자신의 경력 및 더 넓은 음악사 모두에서 엄청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선물을 받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 선물의 출처와 시기가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왔지만, 그의 외조모인 벨라 잘로몬이 그에게 <마태 수난곡>의 악보를 선물한 것도 이때였던 것 같다. 이 악보는 아마 바흐의 육필원고 부분들을 간접적으로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 19세기 초반 펠릭스에게 바흐의 코랄 음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몇 안되는 음악가 가운데 한 명인 첼터 본인은 자신의 바흐 악보 컬렉션(일설에 의하면 악보 종이로 치즈를 싸주던 치즈장수에게서 샀다고 알려진 <수난곡> 원고를 포함한)을 금고에 넣어 열쇠로 잠가두었고, 천재 제자조차도 거기에 손대지 못하게 했다. 이 음악적 알라딘의 ��물 동굴을 탐사하는 것은 멘델스존의 오랜 소망이었고, 수난곡 악보를 가지는 것은 그 꿈의 완성이었다. 또 5년 뒤에 있을 그 작품의 개척자적인 부활을 향한 첫 걸음이기도 했다. (p54) 하지만 이처럼 바흐의 기악 음악이 음악에 정통한 이들에게 친숙했던 것과는 달리, 합창 음악은 그가 죽은 뒤 80여 년 동안 거의 연주되지 않았다. 그의 모테트, 칸타타, 수난곡 악보는 보기도 힘들었고, 주로 연구자들이나 구해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몇년간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던 이 음악의 보고에 대한 관심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었다. J.N. 쉘블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소규모 작품 몇 곡을 대중에게 소개했고, 첼터도 금고에 넣어두고 있던 작품을 성악 아카데미에서 소개했다. 첼터는 심지어 <마태수난곡>을 본인이 부활시키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 어마어마한 요구사항, 특히 합창단 둘과 오케스트라라는 필수조건 때문에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그의 제자와 친구인 에두아르트 드브리앙의 젊은 열정이 있어야 했다. 이 둘은 한동안 <수난곡>을 연구해왔다. 앞에서 말했듯이 멘델스존은 할머니로부터 수난곡의 악보를 한부 받았으며, 대중 공연을 열기 전에도 그는 라이프치히슈트라세에서 친구들과 함께 작품의 일부를 지휘하곤 했다. 그들이 더 큰 대중 무대로 나가기로 결정하게 된 배경은 확실치 않지만, 멘델스존의 작품을 처음 출판한 출판인인 술레징거가 <수난곡>을 인쇄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소식이 마르크스의 음악잡지에 실린 일이 계기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연극 가문 출신의 배우인 드브리앙은 이 과정을 적절하게 연극적으로 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자기는 멘델스존의 집에서 1829년 1월의 어느 날 저녁에 <수난곡>의 1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한 뒤 너무나 흥분하여, 바로 그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라이프치히슈트라세로 달려가서 펠릭스를 침대에서 끌어내어 이 음악이 더이상 대중의 귀로부터 차단되어 있으면 안 된다고 설득했고, 그를 들들 볶아서 성악 아카데미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이 두 젊은이는 첼터의 호랑이굴로 쳐들어가서 대중 공연에 대한 노인의 퉁명스러운 반대를 모조리 극복했다. “생각해보세요. 위대한 기독교 음악을 대중에게 되돌려준 것이 배우 한 명과 젊은 유대인 한 명이라고요!” 드브리앙의 부추김을 받은 펠릭스는 이렇게 소리치며 말을 끝맺었다. (...) 〈마태수난곡〉은 1829년 3월 11일에 바흐가 죽은 뒤 처음으로 공연되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멘델스존 일가는 열심히 귀빈들을 초대했고 마르크스는 중요한 홍보를 담당했으며, 입장권은 순식간에 매진되었다.들어가지 못해 공연장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사람이 족히 천 명은 되었다. 나이에 비해 침착했던 펠릭스는 무대 위의 피아노 앞에 서서 지휘봉을 들고(그때까지도 보기 드문 행동이었다) 지휘하고 있었다. 알토 파트에서 함께 노래한 파니의 말에 따르면, 음악은 연주회장보다는 교회에 더 어울릴 법한 침묵 속에서 울려퍼졌다. 연주가 끝나자 청중과 언론의 열광적 반응을 보내왔다. 유력한 평론가 루드비히 렐스탑의 말은 그곳에 온 사람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듯했다. “영원히 위대하고 무한히 기적적인, 강력하고 고귀한 작품.” “이토록 완벽한 공연은 거의 들은 적이 없었다. .... (멘델스존은) 헌신과 특출한 재능에 의해 비범 한 일을 해냈다." (p90-92) [MENDELSSOHN: Piano Sextet in D major, Op.110, for Piano, Violin, 2 Violas, Cello & Double-Bass] 그 다음 달에는 피아노 6중주 E장조 Op.110를 완성했는데, 이 곡은 피아노, 바이올린, 두 대의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라는 매우 보기 드문 악기 구성으로 작곡되었다. 6중주의 1, 3악장은 멘델스존이 젊은 시절 작곡한 것 중 가장 자유분방하며, 느린 2악장에 드리워진 그늘은 여름날 지나가는 구름 정도에 불과하다. 그 뒤에 이어지는 '메뉴에토'는 짖궃은 장난으로 위협하지만 피날레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 장난이 돌아오는 것(베토벤 교향곡 5번에서 유래하는 또 다른 실험)도 그 작품의 밝은 분위기를 흩트리지 못한다. (p55) [MENDELSSOHN: Overture for Wind Instruments, op.24] 멘델스존의 첫 연주회용 서곡은 멘델스존의 전형적인 형식을 확연하게 갖춘 것으로 역시 1824년 여름에 작곡되었다. 7월에 펠릭스와 아브라함은 휴가지 바트 도베란에 갔는데, 이곳에서 작곡가는 처음으로 바닷물에 들어가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마을의 목관 밴드에도 매혹되었다. 그 매력을 마음속에 떠올리면서 그는 열한 개의 목관악기를 위한 <하모니에무지크Harmoniemusik> C장조를 작곡했다. 이 곡은 2년 뒤에 개작되어 1839년 <하모니에무지크를 위한 서곡>, Op.24로 출판된다. (p56) <성숙기로의 도약 1825~1829> 라이프치히슈트라세 3번지는 프러시아 수도의 대저택들 가운데 가장 장려한 집 가운데 하나였다. 이 도시에서 가장 멋진 구역 가운데 하나인 포츠담 성문 근처에 위치한 집은 이 일가의 변함없는 사회적, 문화적 활동에서 호화로운 중심이었다. 집의 소박한 겉모습 안에는 찬란함이 숨어있었다. 거리로 향한 저택의 정면은 어울리지 않게 길고 좁았지만 그 뒤로는 광대한 양쪽 부속 건물과 19개의 방이 딸린 정원 주택Gartenhaus으로 둘러싸인 정원이 있었다. 정원주택은 수 에이커에 이르는 정원을 굽어보고 있고, 정원은 다시 일가에 필요한 유제품을 공급하는 목장과 농장으로 이어졌다. 퇴���해있던 이 집의 다른 부분이 수리되는 동안 멘델스존 일가는 정원주택에서 거처했는데, 숨어 있는 듯한 건물 배치 덕분에 도시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차단되어 시골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 특별한 새 거처는 멘델스 존 일가가 스스로 설정한 반 은둔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들은 갈수록 민족주의 분위기가 거세지는 독일에 사는 개종한 유대인이었고, 베를린의 상류사회에 속했지만 동시에 격리되어있기도 했다. 라이프치히슈트라세 3번지의 저택 자체가 그렇듯이, 세상에 대해서는 당당한 모습으로 나서지만 그들의 진짜 생활은 그 뒤에서, 내향적이고 사적이고 보호받는 속에서 꾸러지고 있었다. (p66) [MENDELSSOHN: Capriccio in f sharp minor, op.5] 펠릭스는 점점 더 매혹적인 서클의 중심으로 부상했따. 1825년 여름,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하늘이 내린 기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인격적인 매력과 더불어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냈고, 그가 비범한 배경과 교육이 모든 사회적, 지적 성과물을 흡수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열여섯 살 때 그가 작곡한 음악은 이미 130곡에 달했다. 7월에 그는 다섯 번째로 출판되는 작품인 피아노를 위한 <카프리치오> F샤프 단조, Op.5를 작곡했다. 이는 피아노 사중주의 스케르초에 나오는 무궁동 양식이 열어젖힌 가능성을 기교적으로 탐구한 작품이었다.  (p69) [MENDELSSOHN: Octet for strings in E flat major op. 20] 정말 높은 기대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런 기대는 또한 그 견진례에 참석했던 누구의 예상보다도 더 빠르게 실현된다. 멘델스존의 방대한 작품 포트폴리오에 대해(혹은 그 누구의 작품에 대해서든) 알고 있는 친구와 가족들조차도 그 다음 달에 그가 이루어낼 성취를 예견하고 있던 사람은 없었으니 말이다. 1825년 10월 15일, 이는 우연하게도 베토벤이 빈에서 마지막 숙소로 옮긴 바로 그날인데, 펠릭스는 당대의 1급 작곡가 반열로 스스로 올라서게 될 작품의 완성 날짜를 기록했다. 팔중주 E플랫 장조, Op. 20은 음악사에서 독특한 작품이다. 억누를 수 없는 기백이 최고 수준의 장인적 기교로 보강된 이 작품은 어떤 상황에서 작곡되었든 상관 없이 클래식 음악의 정전에서 대표적인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열여섯 살 난 소년의 작품으로서 이 작품의 확신과 독창성은 놀라운 수준이다. 그 이전이나 이후 단일한 작품에서 그토록 완전하고, 결정적으로 성숙한 수준에 도달한 예는 결코 없었다. 형식 자체 역시 전례가 없었다. 슈포어도 자신의 이중 현악 사중주 1번을 썽지만 본인도 인정했듯이, 여덟 번째 연주자에게 멘델스존이 시도한 수준의 독립성을 부여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그러므로 이 곡은 지난 7년 동안 계속되어온 집중적인 작곡 경험이 온전히 멘델스존 본인만의 언어로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첫 악장의 유쾌하고 넓은 음역은 전적으로 성숙한 작곡가의 특징이라 할 만하고, 뒤이어 나오는 사색적이고 때로는 코렐리와도 비슷한 고풍스러움을 지닌 안단테는 그가 쓴 느린 악장 가운데 가장 깊은 감동을 주는 음악 가운데 하나다. 알레그로 레지에리시모로 표기된 스케르초의 휘몰아치는 텍스쳐에서도 역시 멘델스존의 서명이 틀림없이 나타나 있다.  모차르트의 <쥬피터> 피날레에 바치는 또 다른 찬사인 종결부의 프레스토에는 펠릭스의 막강한 대위법 기술이 발휘되어 있지만, 결코 기교 때문에 유연함이 희생되지 않는다. 여기서 멘델스존은 대단한 장악력을 발휘하여 이질적인 요소들을 전혀 삐걱거리지 않게 융합시키고 있다. 일례로, 제1주제는 8부 푸가 형식이고, 이행 주제는 발전부에서 헨델의 <메시아>에서 가져온 테마( 그가 영원토록 지배하시리라")로 등장한다. 또 이 악장에서는 인용 테마들이 마치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필연적으로 스케르초에 융합되는데, 바로 몇 달 전 이와 비슷한 수법을 사용한 피아노 사중주 3번의 피날레를 쓸 때만 해도 멘델스존은 아직 그 같은 솜씨를 터득��지 못한 상태였다. 8중주가 1832년에 출판되었을 때 작곡가는 “모든 악기를 교향곡 스타일로 연주하도록"이라고 명기해두었는데, 여기에서 이 작품의 폭과 야심 속에 들어있는 교향악적 본성이 잘 드러난다. 여러 해 뒤에 멘델스존이 친구인 로베르트 슈만에게 말했듯이, 이 작품은 멘델스존 본인에게도 젊은 시절을 행복하게 떠올리게 하는 음악적으로 특별한 애정을 항상 느끼는 작품이었다. (...) 그러나 파니는 펠릭스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다가 이 작품의 씨앗을 찾았다고 전한다. 특히 펠릭스는 그녀에게 이 곡의 스케르초는 저 유명한 시의 1부에 나오는 '발푸르기스의 밤의 꿈' 시퀀스의 마지막 연을 음악으로 옮긴 것이라고 말했다. 흘러가는 구름과 베일처럼 드리워진 안개가 내려쬐는 빛을 받고 있군. 잎사귀에 살랑대는 미풍, 갈대에 부는 바람, 모든 것은 사라졌구나. (p70~72) [MENDELSSOHN: Sonata in E major op.6] 이 소나타는 펠릭스가 베토벤 후기 음악에 대해 점점 더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첫 작품이다. 사실 이 곡에는 1816년에 작곡된 베토벤의 소나타 A장조, Op.101의 발자국 위에서 구축된 티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고, 그 작품과 형식이나 분위기도 닮은 점이 많다. 베토벤의 모델은 여기서 멘델스존에게 자극을 가하여, 흔히 그의 특징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는 두드러진 혁신들을 시도하도록 밀어붙인 것으로 보인다. 아다지오 레치타티보와 노래 부르는 듯한 안단테가 불안정하게 교대하는 느린 악장은 특히 실험성이 강하다. 베토벤의 소나타에서처럼 달아나는 피날레는 느린 악장에서 곧바로 이어지며, 첫 악장에서 따온 인용이 군데군데 끼어든다. 멘델스존의 음성을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곳은 아마 2악장(요정 같은 미뉴에트의 표본)일 것이다. 그러나 펠릭스가 작곡하는 것을 베토벤이 어깨 너머로 지켜보는 느낌이기는 해도, 이 곡은 팔중주를 작곡한 인물의 작품임이 분명하며, 멘델스존 ��스로 출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유일한 피아노 소나타다. (p73~74) [MENDELSSOHN: Seven Characteristic Pieces, op.7] 이런 의미에서 덜 전형적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826년에 나온 또 다른 건반악기 작품인 <피아노를 위한 7개의 성격적 소품>, Op.7이다. 이 작품은 여름 동안에 완성되었는데, 이 소품들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2년 전에서 유래한다. 뜻이 애매모호한 독일어 단어인 성격적 소품이란 모방 작품, 아니면 적어도 오마주라는 의미를 담은 것일 수 있는데, 이 7개 소품은 거의 복화술에 가까울 정도로 융통성이 넓다. 넷은 단연코 역사적인 느낌이다. 1번은 거의 바흐 프렐류드라 할 수도 있고, 2번은 멘델스존의 피아노 음악은 도메니코 스칼라티에게 일부 빚지고 있다고 본 로시니의 예리한 견해를 확인해준다. 3번 역시 바로크 음악을 환기시키는데, 이 작품의 무게 중심인 5번은 멘델스존의 음악 가운데서 가장 준엄한 바흐식 푸가 작품이다. 축 늘어져 멜랑콜리한 6번도 겉으로는 더 근대적인 이디엄을 쓰고 있었지만, 바로크식 사라방드의 메아리가 울려나온다. 4번과 7번만이 자기 시대에 발을 디디고 있고, 7번은 곧 작곡될 예정인 <한여름 밤의 꿈 서곡>과 같은 덧없는 멘델스존식 스케르초이다. 그러나 <7개의 소품>은 교회음악 같은 성격을 띄고 있다 보니, 의도하지 않은 의미에서 전형적인 작품이 되었다. 스타일상으로 불연속적이고, 과거와 당대를 동화시키기보다는 병치하려는 경향이 있는 이 곡들은 작곡가로서의 멘델스존의 변천사만이 아니라 단선적 계보를 따르는 음악사 일반에서 가끔은 그를 비주류로 분류하게 만드는 창조적 개성의 한 면모를 특징적으로 나타낸다. (p74~75) [MENDELSSOHN: String Quintet No. 1 in A major op.18] 피아노 소나타 E장조의 완성을 기록한 지 9일 뒤, 멘델스존은 두 대의 바이올린과 두대의 비올라, 첼로를 위한 방대한 현악 5중주 A장조, Op.18을 완성했다. 이 곡과 팔중주와의 연속성은 매우 현저하다. 가령 잊을 수 없이 쌉쌀달콤한 1악장 제시부의 마지막 주제는 팔중주의 스케르초와 동일한 마법적 세계에 분명히 속해 있으며, 5중주 자체의 휘몰아치는 듯 초자연적인 스케르초를 위해 터를 닦는다. 5중주가 1833년에 출판되었을 때 멘델스존은 그 전해 죽은 친구 에두아르트 리츠를 추억하면서 미뉴에트(원래 이 작품의 2악장이던)를 엄숙한 인터메초로 바꾸었다. (p76) [MENDELSSOHN: "Trumpet Overture", Op. 101] 역시 1826년 3월에 완성된 것으로는 <트럼펫> 서곡이 있는데, 이 제목은 그 소나타 형식을 강조하는 팡파레 때문에 붙은 것이다. 8중주만 아니었더라면 5중주가 멘델스존의 작품 목록에서 틀림없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과 똑같이, 이 <트럼펫> 서곡도 몇 달 뒤에 작곡된 훨씬 규모가 큰 작품, 그 해의 왕관이라 할 연주회용 서곡(즉 <한여름 밤의 꿈 서곡>)의 그늘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날은 거의 연주되지 않지만, 아브라함이 아들의 작품 가운데서 이 곡을 가장 좋아했던 모양이다. 펠릭스 본인은 이를 적어도 세 번은 연주했다. (p76) [MENDELSSOHN: A Midsummer Night's Dream - Overture op. 21] 1826년 7월 7일에 펠릭스는 파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막 "한여름 밤의 꿈을 꾸고" 있으며, 자신의 대담성에 대해 의아해 하고 있다고 썼다. 이 말은 멘델스존의 젊은 시절 작품 가운데 오래도록 높은 인기를 누려왔으며 진심으로 고전음악의 걸작이라 부를 수 있는 두 번째 곡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비록 걸작이라는 칭호가 과용되는 경향은 있지만 말이다. <한여름 밤의 꿈> Op.21은 작곡가가 당시에 대단한 유력인사이던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러겔(도로테아 고모의 남편 프리드리히의 형)의 독일어 번역본으로 이 셰익스피어 희곡을 읽은 데서 유래한다. 하지만 음악은 1826년의 마법 같은 여름 동안 멘델스존 일가가 가족들과 누린 즐거움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바스티안 헨젤의 말에 의하면, 그해 여름은 "방해받지 않는 축제처럼" 흘러갔다고 한다. 서곡의 시작 부분에서 영묘한 목관 화음 넷이 마법 세계의 베일을 걷어 올린다. 뒤에 이어지는 '요정' 음악은 팔중주의 스케르초가 끝난 곳에서 시작하여, 테세우스의 궁정신하들, 길 잃은 연인들, 무례한 일꾼들을 나타내는 연속된 주제를 중심으로 섬세한 그물을 짜나가며, 일꾼들의 주제는 당나귀로 변한 보톰의 히힝거리는 소리로 완결된다. 화음은 재현부가 시작될 때, 때로는 그 자체가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숨이 멎을 듯이 아름다운 구절에 뒤이어 서곡의 맨 마지막에서, 마치 요정 세계를 운 좋게 들여다 본 뒤에 다시 한번 막을 내리는 것처럼 다시 돌아온다. (p77) [MENDELSSOHN: Piano Sonata in B flat major op. 106] 펠릭스가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를 쓴 것도 1827년 5월이었다. 베토벤이 빈에서 3월에 죽었는데, 펠릭스의 소나타 B플랫 장조는 베토벤에게 바친다는 의미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그 곡은 일종의 순화된 <함머클라비어>처럼 들린다. 즉 같은 조성을 가지며, 개시부의 모티프의 윤곽도 동일하고, 심지어(멘델스존의 사후에 이 곡이 출판되었을 때) 작품번호까지도 동일하다(106번). 하지만 그 두 작품 사이의 닮은 점은 그것이 전부다. 멘델스존의 작품은 서정적인 느린 악장과 장난스러운 요정들이 춤추는, 그의 등록상표라 할 스케르초를 갖고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두 작품을 비교할 때마다 그 깊이의 부족은 더욱 현저해진다. 하지만 그 며칠 뒤에 완성된 훌륭한 건반악기 소품인 E단조 푸가는 그렇지 않다. 축복의 코랄에서 절정이 이르는 푸가의 삐쭉삐쭉하고 고뇌에 찬 선율은 죽어가는 친구의 병상 곁에서 구상된 작품임을 드러낸다. [MENDELSSOHN: 6 Prelude & Fugue, op.35] 피아노를 위한 프렐류드와 푸가 여러 곡도 그 전에 이미 작곡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 푸가인 장엄한 E단조는 앞에서 말했듯이 1827년 죽어가는 친구 곁에서 작곡되었다. 하지만 여섯 번째 푸가와 프렐류드 가운데 적어도 셋은 약혼 시기에 씌어졌으며, 그의 사후에 출판된 다른 프렐류드 세 곡, Op.104a도 마찬가지다. 멘델스존이 쓴 피아노 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인 <프렐류드와 푸가>는 <무언가>의 살롱적인 우아함을 상쇄해주는 대조적인 작품으로 구성된 면이 있는 것 같다. 슈만은 그 곡들이 제바스티안 바흐의 색채를 다분히 갖고 있다고 보았지만, 결코 이 곡들이 건반악기를 위한 바흐의 작품을 다시 재현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바로크 시대를 기웃거리는 것은 <프렐류드> 가운데 한 곡, 2번 뿐이며, 3번은 멘델스존 자신의 요정 같은 스케르초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고, 5번과 6번은 <무언가>와 같은 세계에 속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푸가도 18세기식이라기 보다는 분명히 19세기식 작품이다. 바로크와 낭만주의 초기가 서로 대화 없이 곁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성격적인 7개의 소품>과 달리 Op.35는 옛날과 새로움의 진정한 대화로서, 역사적 형식과 규범을 근대성의 이디엄에 동화시킬 수 있는 멘델스존의 능력이 표현된 가장 훌륭한 작품이다. (p160~161) [MENDELSSOHN: String Quartet No. 2 in A minor op. 13] 멘델스존은 현악사중주 2번 A단조, Op.13을 1827년 여름에 쓰기 시작했다. 같은 여름에 쓴 곡으로는 펠릭스 본인이 썼을 것으로 보이는 가사에 붙인 낭만적 서정가곡 <물음>이 있다. 이 가곡은 펠릭스가 그가 연정을 품었으리라 짐작되는 성악 아카데미의 젊은 단원 베티 피스토르와 관련이 있다. 그녀의 아버지가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음악재단의 소유주라는 사실도 그녀의 매력을 더해주었다. 펠릭스는 이 노래의 개시부 프레이즈를 가져다가 1악장을 시작하고 마지막 악장을 끝맺어 사중주의 구조를 형성하는 갈망하는 듯한 아다지오와 아다지오 논 렌토에 활용했다. 그러므로 <한여름 밤의 꿈>이나 팔중주와는 거리가 먼, 균열되고 물음을 던지는 듯한 언어를 말하는 이 사중주는 베토벤의 후기 사중주에서 형식적으로 자극 받았음이 분명하다. 자신의 다른 작품들과 동일한 감정적 동요에서 유래했는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첫 악장과 마지막 악장은 베토벤 본인의 A단조 사중주, Op.132의 것과 톤이 비슷하며, 느린 악장의 중심 주제는 B플랫 장조 사중주 Op.130의 카바티나를 연상시킨다. 또 나중에 피날레에서 더욱 발전되는 푸가 에피소드는 C샤프 단조 사중주, Op.131의 푸가적인 1악장의 세상을 초월한듯 여유로운 모습이 다소 드러난다.(펠릭스가 A단조 사중주를 완성한 뒤 엿새 만에 작곡된 현악사중주를 위한 E플랫 장조 푸가, Op.81 No.4에도 이와 비슷한 울림이 있다.) 하지만 사중주의 인터메초 부분 가운데 '요정' 같은 중앙 부분이 그 '베토벤적' 환경 속에서 예기치 않게 평안하게 들리는 것이 증명하듯이, 여기에서 펠릭스는 그저 단순한 제자를 넘어선다. 사실 베토벤의 후기 사중주를 자신의 Op.13에서 다룬 멘델스존은 흔히 음악적 보수파로 간주되어왔지만, 사실은 1820년대의 최첨단 아방가르드에 당대의 그 누구보다도 더 가까이 접근하여 발언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동시대의 도전에 이런 방식으로 맞서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 멘델스존의 작품 가운데 현악사중주 A단조의 계승자는 없으며, 그런 점에서 이곡은 그가 가지 않았던 길로 나가는 문이었다. (p82~84) [MENDELSSOHN: Tu es Petrus, op. 111] 바덴-바덴에서는 예테 고모의 친구로서 소설가이자 정치 문필가인 벵자맹 콩스탕을 만났고, 하이델베르크에서는 법학자이자 순��음악(즉 16세기의 교회용 다성음악)의 옹오자인 유스투스 티보를 만나 깊은 감명을 받았다. 티보의 육필원고 서재에서 그는 안토니오 로티가 <마태복음>의 본문 "너는 베드로다"에 음악을 붙인 원고를 빌렸다. 멘델스존 자신도 같은 대본을 가지고 5부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테트, Op.111을 작곡하여, 11월에 있을 파니의 생일에 선사하게 된다. (p86) [MENDELSSOHN: Overture - Meerestille und glückliche Fahrt op. 27] 이렇게 위촉된 칸타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멘델스존이 그 둘 사이에 쓴 작품이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 Op.27은 문학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쓰여진 작품이다. 이 경우에는 괴테가 쓴 시 두 편,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가 대본이 되었다. 시인은 자신이 1787년에 카프리 연안에서 바람이 불지 않아 배가 나아갈 수 없었던 위험한 경험, 그리고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하고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의 안도감을 회상한다. 고작 6년 전에 베토벤도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아 같은 제목의 칸타타를 쓴 바 있다. 그러나 베토벤은 괴테의 시를 그대로 가사로 쓴 반면, 멘델스존은 그 시가 묘사하는 경험에 관한 일종의 음악적 상관물을 창조한다.(덧붙이자면, 이는 아직 바다 여행을 해보지 않은 그로서는 알지 못하는 경험이었다). 따라서 서곡은 2부작, 파니의 말에 의하면 "두 개의 별도 장면"으로 구성되는데, 1부는 불길하게 고요한 바다를 나타내고, 2부는 망설이는 듯한 플루트 음형이 전령처럼 울리면서 바람이 처음 불기 시작하고, 다음에는 돛이 부풀면서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괴테의 시는 "이미 나는 육지를 본다!"라는 구절로 끝나지만, 멘델스존은 축하하는 트럼펫 팡파레까지 갖춘 코다를 붙여 배가 안전하게 항구로 들어가게 한다. 끝에 가면 음악은 다시 조용해지지만 이번에는 귀향의 조용함이고, 괴테의 '깊은 정적'이 환기시키는 개시부의 기저에 깔려 있는 공포감의 흔적은 없다. 멘델스존의 친구인 A.B. 마르크스가 프로그램 음악의 발전 경로에서 하나의 이정표로 인정한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는 1828년 9월 28일에 사적인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p89) <대 여행가 1829~1832> [MENDELSSOHN: Trois fantaisies ou caprices, op.16] 두 젊은이는 헤브리디스에서 글라스고우로 갔다가, 그곳에서 리버풀로 가서 클린게만은 마차를 타고 런던으로 향했다. 그의 멜로드라마적인 표현에 따르면, 친구를 "완전히 홀로 이국땅에서 이방인으로" 남겨두고 떠난 것이다. 하지만 그가 혼자 있는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곧 광산주 테일러 가족이 사는 플린트셔의 집에 짐을 풀었는데 이 가족, 특히 세 딸들과 런던에서 이미 친교를 나눈 바 있었다. 피아노를 위한 3개의 환상곡, 혹은 <카프리치오> Op.16은 이 초대에 대한 음악적 감사 인사로 보인다. 각 환상곡은 세 딸 각각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곡은 앤의 장미 다발, 두 번째 곡은 호노라의 정원에 핀 트럼펫 같은 꽃들, 세 번째 곡은 수잔과 함께 스케치한 작은 개울을 나타낸다. 작곡가는 이때를 감미롭게 회상하면서 이 곡들을 "나의 웨일즈 소품"이라 불렀으며, 자신의 피이노 작품 가운데 최고의 곡으로 꼽았다. (p102) [MENDELSSOHN: String Quartet No. 1 in E flat major op. 12] [MENDELSSOHN: String Quartet No. 2 in A minor op. 13] 사실 그 행사는 멘델스존 일가에게 곧 다가올 두 건의 결혼 관련 일 중의 하나였다. 1월에 파니는 마침내 여러 해 동안 구혼해오던 빌헬름 헨젤과 약혼했으며, 결혼식은 10월 3일로 결정되었다. 펠릭스는 웨일즈에서 그 행사를 위한 오르간 작품을 쓰고 있었다. 9월 10일에 헨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일부러 관리처럼 굴면서 두 행사에 관한 제안을 폭탄처럼 쏟아부었다. 나흘 뒤, 그는 그 해 여름에 쓴 유일한 대규모 작품의 육필원고에 완성한 날짜를 기록했다. 그것은 현악 4중주 1번 E플랫 장조. Op.12로서, 흔히 현악사중주 2번 A단조와 짝을 이루는 작품으로 간주된다. A단조 사중주가 베티 피스토르로 인해 영감이 떠오른 작품이라면, E플랫 사중주는 은밀하게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최소한 베티 본인에게 관한 한 그러했다. 이 사실은 멘델스존 가족 내에서는 공개된 비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에서 후기 베토벤의 손길이 그 앞의 작품보다는 더 서정적으로 발휘되며, 형식의 한계에 맞서는 긴장감이 덜하다. 긴장감이 팽팽한 피날레에서도 그렇다. 멘델스존의 특징이라 할 "요정 같은" 선법으로 쓰인 갈망하는 듯한 칸초네타인 2악장은 때로 연주회용 곡목으로 별도 연주되기도 한다. (p103~104) [MENDELSSOHN: Symphony No. 5 in D major op. 107 "Reformation" ] <뒤러 축제를 위한 대축제 음악>���럼 멘델스존의 두 번째 교향곡도 루터파 신앙이 세워진 기초 문헌인 <아우구스부르크 참회록> 발표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구상되었다. 이 작품이 1830년 6월 25일에 열렸던 베를린의 시끌벅적한 축하 행사를 위해 위촉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그 행사에서 연주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고 1832년에야 초연되었다. 그 교향곡은 <한여름 밤의 꿈> 및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처럼 프로그램 음악의 방향을 취하고 있다. 1악장에서 팔레스트리나 스타일의 다성 음악과 <드레스덴 아멘>이 한데 어울려 로마 가톨릭을 나타내며, 기념비적인 피날레는 플루트가 단독으로 선언하는 루터파 코랄의 원형이라 할 <든든한 성채가 우리 주이시니>를 토대로 하여 구축되어 있다. 2악장은 활기찬 스케르초로서, 그 텍스처는 <이탈리아> 교향곡 텍스처의 예고편이다. 반면 뒤에 나오는 안단테는 피날레로 곧장 이어지는 짤막한 회상의 간주곡이다. 코랄과 소나타같은 요소를 통합하는 데 상당히 힘겨워하는 마지막 악장에서 보듯 결코 결점이 없지는 않지만 <종교개혁> 교향곡은 작곡가 자신이 내린 평가보다는 교향곡 레퍼토리에서 더 높은 지위를 유지했다. 멘델스존이 이 작품을 출판하지 않고 그냥 어서 그의 교향곡 가운데 제일 늦게 그의 사후에야 출판되어 혼란스럽게도 작품번호 5번이 되었다. (p106)
[MENDELSSOHN: 3 Sacred pieces op. 23] 멘델스존 일가의 집단적 상상 속에서 이탈리아는 어딘가 체호프의 세 자매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모스크바와 비슷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 같다. 특히 파니에게 그러했다. 그러므로 10월 초순에 베네치아에 도착한 펠릭스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세 개의 교회 음악> Op.23이 될 종교음악 두 곡을 썼다. 그것은 <깊은 고난 속에서 그대에게 외치나이다>와 <아베 마리아>인데 그는 오랜 뒤에 그 곡 개시부의 부드러운 독창 프레이즈를 개작하여 <스코틀랜드> 교향곡의 활보하는 듯한 코다에 쓰게 된다. (p110) [MENDELSSOHN: Die Hebriden - Overture "Fingal's Cave" op. 26] <헤브리디스> 서곡의 이 초기 버전을 가장 먼저 듣고 매혹당한 사람들 중 1831년 3월에 로마에 도착한 성격이 불같은 젊은 프랑스인이 있었다. 그때 스물일곱 살이던 엑톨 베를리오즈는 근래 네 번의 시도 끝에 인기 높은 로마 대상을 따냈고, 로마에 와서 프랑스 아카데미에 거처를 정했다. 초기 낭만주의의 이 판이한 대표자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얼마든지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 그 프랑스인의 허세는 참기 힘들었지만, 동반자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 분명히 있었던 모양이다. 베를리오즈로 말하자면, 그는 멘델스존을 작곡가로서 최고의 존경심으로 대했다. 비록 12년 뒤에 라이프치히에서 만난 뒤에는 그가 음악적으로 "죽은 자들을 좀 너무 많이 좋아한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말이다. (p113~114) 때로는 <핑갈의 동굴>로도 알려져 있는 <헤브리디스>, Op.26는 '묘사적 음악'의 가능성을 멘델스존이 새롭게 탐구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낸다. <한여름 밤의 꿈>과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가 문학 작품에 대한 음악적 반응인 데 비해 <헤브리디스>는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어떤 장소의 정신을 환기시킨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 출발점은 작곡가가 스코틀랜드에 있을 때 저절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그 음악에서 원래의 영감이 충실히 표현되도록 오랫동안 열심히 작업했다. 가령 그는 파리에서 파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체 작품, 소위 작업 과정이란 것은 모름지기 기차 기름, 갈매기, 절인 대구 냄새보다 대위법의 냄새를 더 많이 풍기지. 원래는 그 반대여야 할 텐데 말이야"라고 말했다. 여러 달에 걸쳐 여러 다른 장소에서 다듬어진 산물인 그 음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 부분의 신비롭고 광막한 고요처럼 서부 제도의 지형과 바다 풍경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멘델스존의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곡 가운데 하나이지만, 초연되었을 때의 반응은 다양했다. 런던의 한 평론가는 그 작곡가에게서 "당대 최고의, 가장 독창적인 천재"를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거의 인상주의에 가까운 그 서곡의 회화적 음향 앞에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p122) [MENDELSSOHN: Die erste Walpurgisnacht] 아브라함의 반대로 시칠리아로 계속 가려던 계획은 포기하고 멘델스존은 6월 초에 로마로 돌아왔다. 며칠 뒤인 6월 18일에 그는 이 도시를 아주 떠나서 피렌체와 제노아를 지나 밀라노로 갔다. 여기서 그는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글링카를 포함한 음악계의 여러 사람과 함께,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라는, 쉰여섯 살 난 롬바르디 정부의 하급 공무원을 만났다. 작곡가의 두 아들 가운데 한 명인 카를은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고, 자기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도망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진작 인정하고 체념한 터였다. 멘델스존은 자신의 최근에 스케치하고 있던 새 작품 가운데 하나를 카를 앞에서 연주하면서, 세월을 넘어선 손가락의 전율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괴테가 1799년에 쓴 드라마틱 발라드를 대본으로 하여 작곡된 세속적 칸타타인 <첫 번째 발푸르기스의 밤>이었는데, 그 칸타타의 최종 판본은 멘델스존의 경이적으로 독창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다. (p114~115) [MENDELSSOHN: Piano Concerto No.1 in G minor op. 25] 멘델스존은 7월 20일에 밀라노를 떠났고, 주로 도보로 스위스를 통과했다. 비가 쏟아질 때가 많았다. 1822년의 가족 여행 때 갔던 곳을 다시 찾아가보기도 했는데, 리지 봉우리 꼭대기에서 일출을 맞기도 했다. 9월 중순경 그는 뮌헨에 가서 델피느 폰 샤우로트와 재회했다. 그들 관계가 깊어진다는 사실은 이 기간 동안 멘델스존이 그녀를 위해 쓴 음악의 규모에도 반영되어 있다. (...)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비중이 큰 것이 피아노 협주곡 1번 G단조, Op.25로서, 멘델스존이 바바리아 왕국의 수도에 도착한 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써내려간 작품이다. 델피느에게 헌정된 이 곡은 그 도시에서 10월 17일에 초연되었다. 멘델스존 본인이 건반 앞에 앉았으며, 오데온 홀에서 열린 그 연주회에서 그는 교향곡 1번과 <한여름 밤의 꿈 서곡>도 지휘했다. 멘델스존이 7년 만에 처음 쓴 협주곡인 이 곡은 이 장르에서 그가 보여 온 젊은 시절의 작품과는 아주 다른 형식적 경제성을 보여준다. 또 베버의 <콘체스트쉬투크>가 성인이 된 작곡가에게 미친 강한 영향도 드러나 있다. 세 악장들은 테마적인 내용면에서, 그리고 중단 없이 연이어 연주되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1악장 제시부를 공유하는데, 그 부분에서 독주자는 (프레데릭 칼크브레너와 프란츠 리스트 등이 보여 주는 과도하게 기교적인 문화에 대한 멘델스존의 공공연한 거부감을 생각하면)놀랄 만큼 현란하게 연주한다. 명상적인 느린 악장과 외향적인 피날레는 모두 과도기적인 금관 팡파레로 소개되며, 피날레의 끝 가까이에서 멘델스존은 1악장의 첫 테마를 다시 들고 나온다. (p115~116) [MENDELSSOHN: Paulus (Saint Paul) op. 36] 멘델스존은 왕궁 극장의 총감독에게서 오페라 작곡 위촉을 받고 뮌헨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11월 하순에 뒤셀도르프에 머물던 그는 어떤 테마를 쓸 수 있을지 작가 카를 레브레히트 임머만과 논의했는데, 임머만은 앞으로 펠릭스의 경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들은 <템페스트>를 후보로 생각했던 모양인데, 이것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다른 수많은 오페라 기획과 마찬가지로 존재했을 뻔한 멘델스존 극작품들의 유령 대열에 끼게 ��었다. 한편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는 체칠리엔페라인의 지휘자인 쉘블과의 친교를 새롭게 했는데, 쉘블은 펠릭스가 로마에서 작곡한 종교음악 몇 곡을 공연했다. 오라토리오를 작곡해보라는 쉘블의 제안은 임머만과의 기획보다는 덜 척박한 환경에 내려앉았다. 그 씨앗이 발아하기까지는 오래 걸렸지만, 4년 뒤에 <성 파울로>로 개화하게 된다. (p117) 라이프치히의 첫 시즌을 무척 바쁘게 보내면서도 멘델스존은 <성 파울로>의 작곡을 계속하여, 이제 막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 (...) 그러나 3주일 뒤, 베를린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의 직업적, 개인적인 삶 모두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가 10월 중순경에 모셸레스와 함께 라이프치히슈트라세에 갔을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11월 19일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마 심장마비였던 것 같은데, 이 병력은 멘델스존 일가에 내려오는 유전적 경향으로 보인다. 펠릭스는 넋을 잃었다. 그는 게반트하우스에서 자신을 대리할 사람을 찾자 마자 집으로 향했고, 라이프치히의 변호사 하인리히 콘라트 슐라이니츠에게 편지를 보내어, 임무를 재개하는 일에 대해 상의하면서 레아와 형제들이 보인 침착함과 대조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따. "가족들이 잘 절제하며 침착하게 대응하고 있어서, 내게 위안을 주고 본보기가 됩니다. 하지만 나 자신은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 하지만 멘델스존의 상실감은 매우 깊었다. 그는 클린게만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고 말했다. 그 뒤 몇 달 동안 <성 파울로>에 몰두한 것은 적어도 어느 면에서 분명 그 슬픔의 반영이었다. 결국 그것은 아브라함이 아들에게서 가장 기대했던 작품이었고, 현대 신학자들이 이해하듯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바울은 멘델스존 일가 전체와 직접적, 사적으로 관련 깊은 소재였다. (p146~147) <성 파울로>는 멘델스존의 생전에 가장 높은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었고, 그랬던 만큼 그 뒤로 인기가 가장 많이 하락한 작품이기도 했다. 5월 22일에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초연에서 그 작품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지금 당장 걸작 반열에 들었다고 선언하는 논평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다음 해 런던에서 연주되었을 때에도 평단의 끝없는 호응을 얻었다. <아테나에움>은 그들답게 그것이 헨델의 불멸의 작품 곁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오라토리오는 곧 국제적으로 알려져서 멀리 러시아와 미국에서도 공연되었다. 현대 연주회장에서는 시대의 취향이 바뀌어 훨씬 적게 등장하는것이기는 하지만, 당시에도 이것저것 뒤섞인 그 작품의 스타일이 장애가 된다고 평한 사람들은 있었다. 비전례적인 맥락에서 일화적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해 코랄을 분산 배치한 것, 그리고 영적인 드라마인 오라토라오의 가장 고요하고 위력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 즉 사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들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표현하는 4부 남성 합창 등이 논란거리였다. (p148~149) [MENDELSSOHN: Lieder ohne Worte] 멘델스존이 <무언가>의 첫 번째 모음집을 완성한 것도 런던에서 였다. 이 작품집은 그해 후반에 프랑스판, 독일판, 영국판으로 출판되었으며, 지금은 Op.19b로 알려져 있다. 이 여섯 개의 짧은 소품은 <무언가> 모음집 여덟 권 가운데 첫 번째인데, 좋은 쪽으로든 나쁜 족으로든 대중이 상상하는 멘델스존의 이미지를 규정하는 데 다른 어떤 범주의 음악보다도 더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처음에는 반응이 느렸지만 <무언가>는 하나의 음악적 현상이라 할 만한 지위에 올라, 여러 세대의 음악애호가들은 멘델스존을 거실의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 전통(주로 여성적인) 및 센티멘탈리즘에 가까운 편안한 서정주의의 흐름과 동일시 하게 되었다. Op.62 No.6인 <봄노래> 같은 가장 유명한 곡목은 지금은 너무나 친숙해져서, 구제불능일 만큼 많이 연주되어버렸다. 하지만 <무언가>는 원래 새롭고 확연히 구별되는 음악 장르를 나타내는 것으로, R. 래리 토드는 이를 "예술 가곡의 특징을 모방하는, 가사 없는 피아노 소품"이라고 깔끔하게 정의했다. <무언가>라는 호칭은 멘델스존 본인의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펠릭스와 파니가 어릴 적 놀이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기악 곡목의 음악에 어울리는 단어를 찾아내며 놀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무언가>는 이런저런 환상적인 제목들을 끌어들였고, 그 음악외적인 의미에 관해 많은 추측이 있었는데, 멘델스존 본인은 이런 주제에 말려들기를 늘 거부했다. 사실 음악의 힘, 그리고 그것과 언어의 힘의 관계에 관해 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1842년 그는 예전의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음악에 대한 말들은 너무도 많은데 정작 알맹이는 너무나 적다"고 말했다. "내 입장을 말하려면, 나는 말이 그런 과제를 달성하는 데 충분하다고 믿지 않아. 만약 충분하다면 난 더 이상 음악을 만들지 않겠지. 사람들은 대개 음악의 의미가 너무나 다면적이라고 불평해. 그들이 음악을 들을 때 떠올리는 생각들은 아주 애매모호하지, 반면 누구나 말은 알아들어. 내게는 정확하게 그와 반대지. 말 전체만이 아니라 개별 단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단어들도 진정한 음악에 비하면 너무나 애매모호하고, 흐릿하게 보이고, 오해되기 쉬워. 음악은 말보다 천 배는 더 나은 내용으로 영혼을 채워주지. 내가 사랑하는 음악들이 내게 표현해주는 생각들은 말로 표현하기에 너무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너무나 확정적이야. 또 그런 생각을 표현하려는 온갖 노력들이 타당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불충분하다고 느껴... 오직 멜로디만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같은 것을 말할 수 있고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하나의 단어로는 그렇게 동일한 내용을 표현할 수가 없지." (p123~124) <뒤셀도르프와 라이프치히 1832~1836> [MENDELSSOHN: Symphony No. 4 in A major op. 90 "Italian"] 새 교향곡은 청중과 비평가 모두에게서 갈채 받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하모니콘>지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이 "오랫동안 살아 남을" 작품이라고 선언했다. 멘델스존의 최고 작품에 속하는 이 교향곡은 오랜 출산의 진통은 흔적도 없고 매혹적인 생기가 넘친다. 진정 키���의 "따뜻한 남국"을 거품이 부글거리는 듯 활기찬 이 교향곡의 첫 악장 만큼 더 반갑게 환기시키는 음악은 없을 것이다. 뒤따르는 안단테는 종교 행렬처럼 신비스럽고 장중한 분위기이다. 반면 우아한 메뉴에토인 3악장은 이탈리아 귀족들의 우아한 무도회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와 대조적으로 야외적 분위기인 피날레는 모터처럼 움직이는 포크댄스인 살타렐로로 폭발하여, 이 교향곡의 솟구치는 에너지에 날 것 그대로의, 햇빛에 그을린 성격을 더해준다. 런던 청중들의 갈채 속에서 만족하지 못한 사람은 오직 작곡가 본인뿐이었다. 자신의 수많은 작품에 대해 그랬듯이, 그는 즉시 악보를 개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손질을 많이 해도 이 곡이 출판할 만큼 훌륭한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결국 이 곡은 그가 죽은 뒤에야 교향곡 4번 A장조, Op.90으로 출판되었다. (p131) 라이프치히슈트라세에 돌아온 사흘 만에 멘델스존은 다시 길을 떠나 라이프치히를 거쳐 10월에는 뒤셀도르프에 도착, 음악감독직에 부임했다. 그는 평소처럼 충실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 직책에 헌신했다. 대개는 규율이 부족한 음악가들을 훈련시켜 베토벤, 모차르트, 하이든, 헨델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 인근 도시들의 도서관을 뒤져 적합한 종교음악을 찾아내는 일 등이 그의 업무였는데, 그런 종교 음악에는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팔레스트리나와 라수스 같은 작곡가들이 쓴 미사곡과 모테트도 있었다. 또 시민들과 방문하는 명사들을 위한 행사용 연주회를 열었다. 이런 행사로는 1833년 10월에 프러시아 황태자 방문도 있었는데, 이 황태자는 나중에 멘델스존의 직업 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우려한 대로 음악감독이라는 직책이 "크고 작은 세부사항, 잡다한 신경, 음모 따위의 덩어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했다. 실제로 그가 최초로 대중 앞에서 상연한 오페라,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12월 공연에서는 그런 이유들로 거의 익사할 지경이었다. 20차례의 리허설 동안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했었고, 첫 날 공연 때 비싼 입장권 가격에 항의하는 청중들이 음악이 연주되는 동안 야유소리를 내는 바람에 막이 계속 내려져야 했다. 멘델스존은 엄청난 절제심을 발휘하여 지휘봉을 던져버리고 무대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지만, 난동꾼들로부터 공식적인 사과를 받기 전에는 두 번째 연주를 지휘하기를 거부했다. 이 전략으로 그는 연주자들로부터 영원한 존경을 얻었던 것 같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임기의 첫 출발이었다. 임머만이 극작가로서 자임했던 문화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일보다도 대중 무대를 더 중요시했으니 특히 그렇다. (p135~136) [MENDELSSOHN: Overture - The Fair Melusine op. 32] 뒤셀도르프는 포도농원으로 둘러싸인 그림 같은 도시였고, 그가 머무르는 집 주인인 폰 샤도우 일가를 포함하여 좋은 친구들도 있었다. 그는 또 사교와 오락을 적극적으로 즐겼고, 새로이 승마에도 열정을 보였다. 하지만 이 새로운 환경이 겉으로는 매력이 있었지만, 멘델스존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직책에서 오는 좌절감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이는 그가 순진하게도 기대했던 '작곡을 위한 조용함과 여유로움"의 부족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도시에서 매우 공적인 인물이었고, 업무 이외에 손님들도 작곡에 매우 큰 방해가 되었다. 그리하여 기존 작품들을 계속 개작한 것(시간이 흐르면서 거의 강박이 되어버린 습관)을 제외하면 두셀도르프 체규기간에는 신작이 현저하게 드물었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1833년 11월 쓴 <아름다운 멜류시네> 서곡이었는데, 이는 런던의 필하모닉 협회에게 준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다음해 4월 7일에 모셸레스가 초연했다. 이 서곡은 콘라딘 크로이처가 유명한 운디네 전설을 주제로 하여 쓴 오페라에 대한 불만 때문에 구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의 요정인 운디네는 한 인간 기사와 사랑에 빠져 인간의 모습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그는 대비되는 중심 주제들로 주인공들을 표현하여, 부드럽게 물결치는 듯한 멜로디로 시작하고 끝낸다. 이 멜로디는 20년 뒤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의 시작 부분 음악에서 다시 울려나온다. (p136~137) [MENDELSSOHN: Rondo Brillant in E flat major op. 29] 이 서곡을 마친 뒤 두어 달이 지난 1834년 1월, 그는 피와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론도 브릴란테> Op.29를 완성했다. 생동감은 넘치지만 자신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과시하는 면이 다소 있는 일상적인 작품이다. "피아노를 다루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능력 부족을 이 론도를 쓰는 동안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그는 이 곡을 헌정 받은 모셸레스에게 이렇게 인정했다. "이 곡에서 저는 난관에 부딪쳐서 머리를 쥐어 짜며 고생해야 했습니다. 당신 눈에도 그런 부분드링 아마 보이겠지요." (p137) 젊은 음악 감독, 1835년의 멘델스존, 빌헬름 폰 샤도우 그림. (143) <가정적인 남자 1837~1841> [MENDELSSOHN: 6 Songs op. 34] 멘델스존과 세실의 관계는 그의 창작 생활에도 자극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1837년 1월에 그는 브라이트코프운트헤르텔 사에서 출판할 작품집 두 권을 완성했다. <여섯개의 노래>, Op.34와, 피아노를 위한 <여섯 개의 프렐류드와 푸가>, Op.35가 그것이다. <여섯 개의 노래> 가운데 두 곡, 4번 <술레이카>(그는 괴테가 썼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마리안느 폰 빌레머가 쓴 시였다)와 6번 <여행노래>는 세실을 만난 뒤 씌어졌다. 나머지 곡들이 선정되어 처제인 율리에에게 헌정된 것은 분명히 그의 새로운 상황과 관계가 있다. Op.34의 가곡집에는 멘델스존의 가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독창곡이 들어 있다. 그것은 하이네의 시 <노래의 날개 위에>에 음악을 붙인 2번이다. (p160) [MENDELSSOHN: Prelude and Fugue, Op. 37] 신혼여행 동안 다른 건반악기 작품들도 계속 만들어졌다. 4월 초의 나흘 동안 펠릭스는 오르간 작품 셋을 썼는데, 이것들은 나중에 Op.37의 <3개의 프렐류드와 푸가>로 출판되고 그의 오랜 영국 친구 토마스 애트우드에게 헌정되었다. 이 모음은 역사적 동화라는 점에서 Op.35의 <피아노를 위한 프렐류드와 푸가>와 비슷한 작업이다. 힐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멘델스존은 (불어로) "내가 가발 쓴 모습을 보게나"라고 말했다. 그렇게 자기를 비하하기는 했지만, Op.37은 멘델스존이 오르간 세계에 기여한 최초의 중요한 작품이며, 바흐가 죽은 이후 모든 작곡가들의 작품 가운데 아마 가장 중요할 것이다. (p161~162) [MENDELSSOHN: Piano Concerto No. 2 in D minor op. 40] 첫 번째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협주곡 2번 D단조, Op.40 역시 서로 연결된 세 악장으로 되어 있고, 특히 1, 3악장에는 대가적 기교를 요하는 부분이 많이 포함된다. 그러나 1번을 밀어붙인 확신감은 어딘가 결여되어 있으며, 연주자나 청중들에게서 그만큼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멘델스존 본인도 이 협주곡을 격하하는 말을 자주 했다. 가령, 레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곡은 작곡으로서는 그다지 특별한 점이 없지만, 마지막 악장에는 피아니스트엣게 절정의 기교를 요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가끔 나 자신도 그걸 제대로 연주하게 되면 기뻐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슈만은 이 작품이 몇 시간, 아니면 며칠 안에 작곡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썼다. "이 협주곡은 그의 가장 가벼운 작품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이 밝고 허세 없는 선물을 즐기도록 하자. 이것은 옛날의 대가들이 더 중요한 일거리를 하다가 잠시 쉬는 동안 만든 여가선용 작품 같은 종류이다." 멘델스존은 그 뒤로도 이 협주곡을 계속 연주하고 다녔지만, 일반적으로 슈만의 판정이 후세의 평결로 굳어졌다. (p169) [MENDELSSOHN: String Quartet No. 3 in D major op. 44-1] [MENDELSSOHN: String Quartet No. 4 in E minor op. 44-2] [MENDELSSOHN: String Quartet No. 5 in E flat major op. 44-3] 연주회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구상되어 그의 연주와 행정적 일정 사이사이에 악보로 기록된 또 다른 작품이 현악사중주 E플랫 장조 3번 , Op.44이다. 이 악보의 완성 날짜는 1838년 2월 6일로 기록되어 있다. 바로 그 다음날 세실은 멘델스존의 첫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는 카를 볼프강 파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 Op.44의 사중주들은 멘델스존의 결혼 초기 작품 가운데 중요하며 그의 실내악에서 가장 수준 높은 작품에 속한다. 이 사중주 세곡은 모두 그가 평생의 관심사라 할 고전주의 형식 및 명료한 음악적 표현에 새로이 몰두했다는 증거다. 더 앞 번호가 붙은 사중주들이 다소간 후기 베토벤 스타일의 초연한 언어를 쓰는 데 비해 Op.44의 작품들은 그 주제적 통일성과 효과의 순일성이 특징이다. E단조 사중주(번호는 2번이지만 작곡된 순서로는 첫 번째)는 흔히 바이올린 협주곡 Op.64에 비견되곤 했다. 조성도 같고 그 개시부 테마가 같은 비가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3악장은 찬란하게 노래하는 듯한 안단테이며, E플랫 장조 사중주(3번이지만 작곡된 순서는 두 번째)의 갈망하는 듯한 아다지오 논 트로포와 크게 대조된다. E플랫 장조 사중주에는 또 이 형식에서 멘델스존이 가장 독창적으로 공헌하였다 할 모래폭풍 같은 스케르초가 들어 있다. D장조 사중주(1번)은 아마 이 모음집에서 작곡가가 가장 좋아한 곡인 것 같은데, 그의 실내악 작품 가운데 개시부가 가장 활기에 넘친다. 여기에서는 그 무렵의 그의 편지들에서 그토록 두드러지는 넘쳐흐르는 행복감이 들리는 것 같다. 2악장은 매우 고전적인 미뉴에트인데, 그 귀에서 맴도는 트리오는 그 악장을 끝맺을 때 잠깐 돌아온다. Op.44 사중주는 그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에 만났던 스웨덴의 황태자에게 헌정되었다. (p172~174) [SCHUBERT: Symphony No. 9 in C major D. 944 "The Great"] 펠릭스와 세실, 카를은 8월에 홍역이 프러시아 수도를 휩쓸자 베를린을 떠났다. 생후 6개월이던 카를은 용케 점염을 피했지만, 레베카의 어린 아들 펠릭스는 운이 좋지 못하여, 11월에 죽었다. 이름이 같은 아기의 삼촌 역시 그때 홍역에 걸렸다가 회복되어, 그의 라이프치히 시즌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시즌에 몰입해 있었다. 그 절정은 1839년 3월 21일이었다. 멘델스존이 작곡가가 죽은 지 십년이 넘도록 발견되지 않은 채 잠자고 있던 작품, 프란츠 슈베르트의 마지막 교향곡인 C장조, D.944(9번 <그레이트>)를 게반트하우스 청중들에게, 그리고 세상에 소개한 것이다. 1838년에 빈에서 슈베르트 동생의 아파트에 있던 초고더미를 살펴보던 슈만이 그 악보를 발구하여, 펠릭스에게 가져와서 검토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 음악이 교향곡 레퍼토리에서 영원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멘델스존의 감전시킬 듯한 연주 덕분이었다. 이 교향곡의 초연으로 그는 단번에 19세기 이후 슈베르트의 평판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십년 전 <마태수난곡>의 부활로 바흐의 명성을 혁명적으로 바꾼 것과 마찬가지였다. 슈만은 이 교향곡의 천국처럼 긴 길이에 대해 글을 썼고, 소년 시절에 멘델스존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던 대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스승이 이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들었을 때의 흥분을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슈베르트는 아직 올림푸스 산 정상에 오를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2군에 속한 인물로, 사랑과 찬사를 받는 즐겁게 들을 만한 존재였지만, 규모가 작은 형식이나 단조로운 리듬에 대한 불평도 있었다. 하지만 멘델스존의 지휘봉 아래에서 그런 결점은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시간을 초월한 세계에서 영원 속에 머물 뿐이었다." (p174~175) [MENDELSSOHN: Ruy Blas - Overture op. 95] 같은 3월 21일의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멘델스존의 새 작품도 있었는데, 이 곡 역시 <금장 연금 기금을 위한 서곡>이라는 별로 가망 없어 보이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현대 연주회장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굳혔다. 그의 사후에 Op.95로 출판된 서곡 <뤼블라스>는 라이프치히 극장에서 상연되는 빅토르 위고의 동명의 연극을 상연하기 위한 기금 마련용으로 위촉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멘델스존은 이 연극을 진심으로 싫어했으며, 처음에는 여성 성악과 현악으로 된 부수음악 로망스를 제외하고는 다른 곳을 쓰지 않으려 했다. (p175~176) [MENDELSSOHN: Piano Trio No. 1 in D minor op. 49] 이런 그칠 줄 모르는 스케줄로 피로해졌을 테지만,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작곡가 본인은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는 사교적, 음악적, 창작적인 열기 속에서 여름을 보냈는데, 이런 일이 멘델스존 가족 내에서는 휴가로 여겨졌다. 오르간 푸가 세곡에 더하여 그는 7월 18일에 피아노 삼중주 D단조, Op.49를 완성했다. 멘델스존의 모든 실내악 작품 가운데 가장 위대한 하나인 4악장 짜리 삼중주는 자신이 가진 표현 재료와 수단을 완벽하게 장악한, 능력의 절정기에 달한 작곡가가 만들어낼 만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형식적 균형과 멜로디적 독창성의 폭에 대해 슈만은 당대 삼중주의 걸작품으로 묘사하면서 멘델스존을 "19세기의 모차르트"라고 칭송했다. 이와 비슷하게 페르디난트 힐러는 삼중주의 "불꽃과 영혼, 유연함, 간단하게 말해 전체적으로 대가다운 작품"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이 작품에 대한 멘델스존 자신의 평가는 그답게 냉정했다. 힐러는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난 이 작품이 정말 듣기 좋다. 어쨌든 정직한 작품이고, 연주자들도 좋아할 거야. 실력을 과시할 수 있으니까." (p177) [MENDELSSOHN: Symphony No. 2 in B flat op. 52 "Hymn of Praise"] 후세는 구텐베르크 축제에 대한 멘델스존의 두 번째 공헌을 이보다 덜 고맙게 받아들였다. 6월 25일에 성 토마스 교회의 신성한 공간에서 그는 <찬양의 송가>를 초연했는데 이는 Op.52로 출판되었고 지금은 교향곡 2번으로 알려져 있다. 멘델스존은 나중에 클린게만의 제안을 받아들여 부제를 '교향곡-칸타타'로 붙였다. 이 제목이 함축하듯이 <찬양의 송가>는 성격이 잡다한 작품으로 개시부의 오케스트라 악장과 아홉 개의 합창 악장이 혼합되어 있다. 일종의 합창 교향곡인 이 곡은 항상 베토벤의 교향곡 9번과 비교되었으므로 불리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베토벤의 교향곡과는 여러 측면에서 매우 다른 작품이다. 우선 멘델스존이 합창 부분에 사용한 대본은 원래 성서(대부분이 시편)에 나오는 것이므로 <찬양의 송가>는 세속과 종교적 영역을 연결��다. 클라리넷의 레치타티보가 첫 두 악장을 이어주며 2악장의 삼중주는 원본 코랄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멘델스존은 이처럼 성악적 요소를 기악 파트에 집어넣고, 전체 작품을 열어주는 장엄한 구호 같은 주제를 칸타타의 도입부와 종결부에 집어 넣어 기악 파트와 합창 파트의 결속을 더 강화한다. 이런 의도와 효과의 통합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잡종적인 성격 때문에 <찬양의 송가>는 일관된 관심의 초점이 형성되기 힘들었고, 멘델스존의 성인이 된 이후 작곡한 교향곡 다섯 개 가운데 가장 문제가 많고 드물게 연주되는 작품이 되었다. (p182~183) [MENDELSSOHN: Variations Serieuses op. 54] 두 달 뒤에 1830년에 빈에서 만난 적이 있는 음악출판업자인 피에트로 메케티가 멘델스존을 만나러 왔다. 메케티는 베토벤의 출생지인 본에 세울 베토벤 기념관의 기금 모금을 위해 창작곡집을 편집하고 있었다. 쇼팽, 체르니, 칼크브레너, 리스트, 모셰레스와 함께 멘델스존에게도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는 시큰둥했지만, 7월쯤 멘델스존은 이 기획을 위해 일반적으로 피아노를 위한 걸작으로 간주되는 <엄격한 변주곡>, Op.54를 만들어냈다. 반음계적인 종소리 같은 독자적 주제로 된 이 18개의 변주곡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흔히 변주곡을 과시적으로 쓰곤 하던 멘델스존의 동시대인들의 작품이나 그 자신의 수많은 건반악기 작품의 소품적인 맥락과는 다른, 깊고 진지한 의도가 스며들어 있다. 자신의 주제가 지닌 잠재력에 대한 멘델스존의 이 치열한 탐구에서는 당연한 것처럼 과시되던 기교는 전혀 없다. 이 곡은 유일하게 장조 조성으로 된 곡인 제14 변주의 찬송가 같은 정적에서 감정적인 절정에 도달한다. 멘델스존은 이 형식이 자신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스스로도 놀란 것처럼보이며, "마치 예전에 한번도 쓰지 않았던 것을 벌충이라도 하는 듯이" 계속해서 이런 피아노 변주곡을 두 개 더, Op.82와 Op.83을 썼다. 그러나 나중에 나온 이 작품들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Op.54에 비하면 더 손쉽게 작곡된 듯하며, 끝내 출판되지 않았다. (p186~187) <두 주인을 섬기다 1841~1844> [MENDELSSOHN: Antigone, Op. 55 (1841)] 또 멘델스존이 왕으로부터 음악 분야의 첫 번째 지시를 받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이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인 <안티고네>의 독이러판을 재상연하기 위한 부수음악을 작곡하라는 것이었다. <안티고네>는 왕의 새로운 '궁정 연극고문'인 연로한 시인이자 번역가 루트비히 티크가 멘델스존과의 합동 연출로 만들어낼 고전과 셰익스피어 희곡의 장기적 시리즈의 첫 작품이었다. <안티고네>를 선택한 것은 몇 가지 추측면에서 좀 이상하다. 더 상상력이 있는 군주였더라면 이 작품을 권위와 개인 양심 간의 갈등을 파헤치는, 인화력 강한 위험한 주제라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전 교육을 받은 멘델스존에게는 아주 적합한 주제였다. 그는 이를 고전 대본과 당대 음악의 지속적 관련성을 다룰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사실 그는 이 협동 연출 작업을 자발적으로 주도하고 나섰다. 그는 다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의 고상하고 고색창연한 스타일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나는 티크를 붙들고서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합니다'고 했고, 그는 우호적인 태도로 '지금!'이라고 말했어." [MENDELSSOHN: Symphony No. 3 in A minor op. 56 "Scottish"] 1841년의 남은 기간 동안 멘델스존은 베를린과 라이프치히 사이에서 시간을 쪼갰다. 11월에는 라이프치히에 가서 쉴 새 없이 연주회를 열고 개인적인 시간을 내어 음악 활동을 했다. 그 중간에 그는 12년 전 홀리루드에 있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성당의 폐허에서 구상되었고 이제 다시 그의 상념의 전면에 떠오르고 있던 작품의 일부를 슈만 부부 앞에서 연주해주었다. 그것이 <스코틀랜드> 교향곡이다. 이는 멘델스존의 마지막 교향곡이며, 성숙기에 달한 그의 작품 가운데 논란의 여지없는 걸작으로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품의 지위를 놓고 <이탈리아>와 겨룬다. 작곡가 본인은 그 제목을 친구들 사이에서만 썼지만(이 작품은 그저 교향곡 제3번, A단조, Op.56으로 1843년에 발표되었다) 스코틀랜드적 요소는 네 악장 전체에서 탐지된다. 느린 도입부는 메리 성당의 그림자를 다시 환기시키며, 뒤이어 나오는 스케르초의 5도 음계적 주제는 멘델스존의 가장 행복한 영감 가운데 하나로서, 여기에는 게일 족 민속음악의 정신이 녹아들어가 있다. 마지막 악장은 아마 그의 모든 교향곡 피날레 가운데 가장 성공한 작품일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코다에서 완전히 새로우면서도 눈에 띄게 스코틀랜드적인 주제를 소개하면서 이 작품을 공동체적인 축하를 상기시키는 분위기에서 흥분이 고조되는 결론부로 이끌어 나가는 부분이다. 1842년 1월 20일에 베를린에서 완성된 이 작품을 창작이 진척되지 않는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구제해준 것은 베를린일지 모르지만 초연은 라이프치히의 몫이었다. 이 작품은3월 3일 작곡가의 지휘로 게반트하우스에서 초연되었다. (p195) [MENDELSSOHN: Christmas Pieces op. 72] 그에 못지 않게 친숙하면서도 참신한 작품은 멘델스존이 ���주인의 아이들을 위해 6월의 사흘 동안 작곡한 피아노 소품 여덟 곡이었는데, 그 중의 여섯 개가 1846년에 <어린이를 위한 (6개의) 소품>(<크리스마스 소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Op.72으로 출판되었다. 이것은 그가 정식으로 작품번호를 붙인 마지막 곡이기도 하다. 이 소품들은 어린 시절의 순진무구한 경이로움을 포착하고 있다. 이는 그가 아이들과 나누는 자연스러운 친밀함에 대한 음악적인 증언으로, 조카인 제바스티안 헨젤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그런 감정이 무척 즐겁게 표현되어 있다. 여러 해 뒤에 베넥 자녀들 가운데 하나인 빅터가 멘델스존의 딸 마리와 결혼하게 되어 <어린이를 위한 소품>에 이어지는 현실의 코다가 이루어졌다. (p196) 멘델스존과 베를리오즈의 관계가 음악사에서 미학적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다행한 장면의 하나였다면, 이 무렵 있었던 또 다른 만남은 가장 불쾌한 경우였다. 6월 7일에 멘델스존은 드레스덴에 가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조각상의 제막식에 참석했다. 이 행사를 위해 그는 작센 국가인 <신이여 작센을 보우하소서>를 주제로 한 남성 성악과 금관을 위한 칸타타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멘델스존이 아니라 최근에 임명된 드레스덴 악장에 의해 지휘되었다. 그는 서른 살의 리하르트 바그너라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멘델스존의 길은 그전에도 바그너의 길과 몇 번 만났다. 가장 최근에는 멘델스존이 4월에 드레스덴에서 <성 파울로>를 지휘했을 때였다. 바그너는 작곡가의 지휘봉 밑에서 그 오라토리오를 들은 느낌을 계식적인 어휘로 묘사했다. "멘델스존 바르톨디는 최고의 예술이 개화한 증거라 할 작품을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6월에 멘델스존을 다시 만난 뒤 그는 아첨이 철철 넘치는 편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었다. "당신과 당신의 <성 파울로>를 낳은 나라에 속한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런 찬사는 오래지 않아 민족주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멘델스존이 죽은 지 3년 뒤에 가명으로 발표된 악명 높은 논문 <음악에서의 유대정신>에서 바그너는 독일에서 창궐하게 될 미학과 반유대주의의 악랄한 혼합물이 나치 치하에서 정책으로 확정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평론으로 자리잡도록 만들었다. 드레스덴에서 만난 지 고작 7년 만에, 바그너의 시각에서 볼 때 멘델스존은 독일 음악에서 가장 찬양받을 만한 모범과는 전혀 거리가 먼, 유대적인 뿌리 때문에 진정한 위대함으로부터는 영구히 추방된 작곡가가 되었다. (p204~205) [MENDELSSOHN: Cello Sonata No.2 in D major, op.58] 이런 산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4악장으로 된 첼로 소나타 2번 D장조, Op.58로서, 이는 동생 파울을 위해 작곡되었다. 여기에는 즐거운 본격적 개시부 주제가 멘델스존의 작품 가운데 가장 외향적인 1악장의 톤을 설정한다. 뒤이어 나오는 알레그레토 스케르찬도는 장난기 있는 피치카토 효과에 함께 요정이라기보다는 요괴 같은 분위기를 더 많이 풍기며, 실험적인 느린 악장에서 피날레에서 첫 악장의 다변적 세계로 돌아가기 전에 아르페지오 처리된 코랄과 레치타티보 간의 진심어린 대화가 끼어든다. (p206) [MENDELSSOHN: 4 Stücke für Streichquartett op. 81] 첼로 소나타를 완성한 직후 멘델스존은 현악 사중주를 위한 카프리치오 E단조(사실상 프렐류드와 푸가)를 ��다. 이 곡은 완성 날짜가 7월 5일이며, 사후에 Op.81, No.3으로 출판되었다. [MENDELSSOHN: A Midsummer's Night Dream] 멘델스존이 쓴 <한여름 밤의 꿈>에 딸린 부수음악, Op.61은 그의 최고 작품들 중에서만이 아니라 음악사 전체에서도 가장 놀라운 작업 가운데 하나다. 멘델스존은 열일곱 살인 1826년에 작곡했던 서곡에 열세 곡목을 추가하고 연극 자체에 어울리는 마법을 발휘하여 반평생 전에 방문했던 세계를 재창조해냈다. 새 음악은 서곡에서 악상을 가져와서(목관 화음 넷, 요정 음악, 보톰의 허세) 원작의 정신을 완벽하게 다시 포착하는 천의무봉한 옷감으로 직조해낸다. 흔히 연주회용 음악으로 별도로 연주되는 기악 막간곡, 혹은 간주곡 넷은 오늘날 가장 귀에 익은 곡목이다. 요정 퍼크의 양면적 본성을 깔끔하게 환시시키는 스케르초(No.1), 숭고한 <노투르노>(No.7)도 여기 속한다. 하지만 연기의 줄거리에 수반되는 멜로드라마 역시 멘델스존의 최고 음악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런 것으로는 No.4에서 오베론과 퍼크가 마법을 부릴 때 수반되는 이상야릇한 현악 반음계, 그리고 No.10의 피라무스의 죽음을 위한 <장송행진곡>이 있다. 이는 장송행진곡 양식을 패러디하여 사용한 말러의 교향곡 1번을 기묘하게 예고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유명한 곡목은 4막과 5막 사이의 간주곡이다. 멘델스존은 다른 어떤 곡보다도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개인적 의미를 가졌을 곡목인 <결혼행진곡>(No.9)을 세계에 선사했다. 이 곡은 워낙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연극의 마지막 막에서 여러 쌍의 결혼식이 준비되는 장면인 원래 작품의 맥락에서 듣더라도 새로운 느낌을 받기는 힘들다. 평론가 도널드 토비는 이렇게 쓴다. "세계에서 그 어떤 위대한 음악이나 시도 <결혼행진곡>에 떠안겨진 관습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다." 전제 작품에 있는 두 성악곡 중의 하나인 피날레는 서곡의 윤곽을 이루는 시간으 초월한 듯한 화음 네 개로 시작되고 끝나며, 모든 음악 가운데서 가장 마술적으로 창조적인 폐곡선을 닫는다. (p207~208) [MENDELSSOHN: Psalm] [MENDELSSOHN: Sechs Sprüche, op.79] 프로이센 왕실은 독일 개신교 내부에서 캘빈주의(개혁된)와 루터파 전통 사이에서 벌어진 중심 종파들 사이의 균열을 없애기 위해 전례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멘델스존을 이 직위에 임명한 것은 이런 개혁의 배경과는 상충하는 일이었다. 새 전례의 음악적 함의(예배의 어떤 시점에 어떤 종류의 음악이 연주되어야하는가) 때문에 유발된 이 갈등은 지금 보면 무의미하고 구태의연한 것으로 보이며, 그 당시에도 멘델스존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은 의미도 없고 헛된 소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갈등이 낳은 가장 중요한 산물은 1843년 12월에서 1844년 3월 사이에, 크리스마스와 신년와 수난 일요일과 성금요일에 베를린 성당에서 열리는 예배를 위해 멘델스존이 작곡한 한 무더기의 음악이다. <시편>에 나오는 시들을 대본으로 하여 예배에서 불릴 용도로 구상된 이런 곡목들, 그리고 여러 개의 짧은 아카펠라 노래들은 원래 알렐루야가 나오기 전에 불리는 음악이었다. (...) 알렐루야 앞에 부리는 아카펠라 노래 넷은 한데 묶여 멘델스존이 죽은 뒤 <여섯 개의 격언>, Op.79의 아름다운 작품집으로 묶여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집에는 신년, 수난일요일, 성금요일에 연주되는 황홀한 <신이여, 당신은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주여,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소서>, <우리의 죄를 위해>도 들어 있다. 이 셋은 멘델스존의 종교 음악 가운데 완벽한 보석이다. (p210)
[MENDELSSOHN: Violin Concerto in E minor op. 64] 멘델스존의 작품 가운데 최고 걸작품의 하나인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Op.64를 우리가 얻게 된 것도 역시 소덴에서 보낸 이 목가적인 여름의 몇 주일 덕분이었다. 그의 수많은 걸작이 그렇듯이, 이 협주곡도 여러 해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개시부 악상이 그에게 처음 떠오른 것은 멀리 1838년 여름이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악상을 1844년에 다시 손에 잡게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9월 중순경 그는 초고를 완성했고, 헌정 받을 사람이자 라이프치히의 동료인 오랜 친구 페르디난트 다비드와 세부 사항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아무리 자주 들어도 그 참신함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희귀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다. 1악장의 개시부 주제는 이제껏 만들어진 것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주제라 할 수 있는데, 이 주제가 재현부에서 독주자의 숨죽인 아르페지오의 기교 뒤에서 서서히 다시 나타나는 것은 모든 음악 가운데 가장 마법적인 순간의 하나다. 성숙기에 쓴 두 피아노 협주곡이 그렇듯이 세 악장은 주제적으로나 이행 패시지로보나 서로 이어져 있다. 느린 악장은 카바티나 같은 성격을 갖고 있고, 독주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 재료를 연주하는 반면 피날레는 어딘가 <한여름 밤의 꿈>의 음악에서와 같은 장난스러운 활기를 갖고 있다. 진작부터 이 장르의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서 일찌감치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같은 반열에 오른 멘델스존의 Op.64는 그럼에도 여전히 독창적이다. 멘델스존 연구자 토마스 그레이가 통찰력 있게 지적했듯이, 멘델스존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 이것은 더욱 더 스스로 그 작곡가로부터 독립하여, 마치 자연의 산물처럼 독자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협주곡은 1845년 3월 13일 라이프치히에서, 멘델스존의 피보호자이자 친구인 젊은 덴마크 작곡가 닐스 가데의 지휘와 다비드의 바이올린 연주로 초연되었다. (p214~215) <마지막 시간 1845~1847> "난 얼마 전부터 철저하게 쉬어야만 한다고 느끼고 있어. 여행도, 지휘도, 연주도 없는 철저한 휴식 말이야. 상황이 워낙 절박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해. 내 삶을 완전히 정리하고 일 년 동안 푹 쉬기만 했으면 좋겠어." (p218) [MENDELSSOHN: Organ Sonata Op.65]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그의 친구에게 한 말을 빌면, 무엇보다도 그는 연주와 행정 업무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곁다리 취급을 하던 작곡과 내적 작업에 몰두했다. 계획하고 있던 교향곡 C장조는 단편 형태로 남아 있었지만, 4워 2일에는 그 전해에 소덴 근처에서 시작했던 여섯 개의 오르간 소나타, Op.65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원래 영국인들이 위촉장에서 구체적으로 명기하여 요구한 <오르간 독주곡> 모음집으로부터 훨씬 발전한 결실이었다. 최종 형태를 보면 이 소나타들은 바흐의 오르간음악 전통을 확고하게 만들었���는 평가를 받는데, 멘델스존은 본인의 프렐류드와 푸가를 통해 이 전통을 되살리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오르간 레퍼토리의 이정표가 된 이 오르간 소나타는 사실 고전적 의미의 소나타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비교적 느슨하게 모인 개별 악장들의 집적물이며, 그 속에서 푸가와 코랄의 요소들이 현저하게 드러난다. 1, 2번과 5번은 각기 세 악장이 있고, 4번과 6번은 4악장, 3번은 두 악장뿐이다(3번의 2악장은 당당한 푸가인 1악장의 서정적인 곁들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나타의 연원이 잡다한 것은 주문받은 내용 때문만은 아니다. 그 악장들 가운데 적어도 둘은 오래 전에 써두었던 재료를 가져다 썼다. 예를 들면 3번 1악장 도입부는 아마 1829년에 있었던 파니의 결혼식에 쓰려고 앴던 행진곡일 것이다. 멘델스존은 이 오르간 소나타를 높이 평가했으며, 이 곡들을 그 악기를 위한 교본이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것들을 런던, 라이프치히, 파리, 밀라노에서 동시에 출판될 수 있도록 조처했다. (p220) [MENDELSSOHN: Piano Trio No. 2 in C minor op. 66] [MENDELSSOHN: String Quintet No. 2 in B flat major op.87] 4월 말, 그는 또 하나의 대작인 피아노 삼중주 2번 C단조, Op.66을 완성했다. 루이 슈포어에게 헌정된 이 작품은 인기 면에서는 삼중주 1번을 결코 따라잡지 못했지만, 이것이 더 낫다고 보는 평론가들도 있다. 3악장의 스케르초를 들으면 멘델스존이 <한여름 밤의 꿈>의 섬세한 세계를 조금 전에 다시 방문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삼중주의 가장 놀라운 순간은 피날레에 있다. 그곳에서 멘델스존은 예상치 못했지만 완전히 자연스러운 코랄 주제를 도입하며, 그의 세속적 음악과 종교 음악 간의 가장 고양된 융합이 그것으로부터 이루어져 종결부를 형성한다. 그 뒤 10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또 다른 대작 실내악을 완성되는데, 이것은 얼른 이해하기에 더 쉬운 전작의 그림자 안에 계속 머무른다. 현악5중주 2번, B플랫 단조가 그것인데 완성 날짜는 7월 8일이며, 오늘날에는 젊은 분위기인 현악5중주 A장조에 비해 자주 연주되지는 않는다. 작품의 출판을 유보했으며, 그의 사후에야 Op.87로 등장했다. (p220) [MENDELSSOHN: Elijah op. 70] 하지만 린트의 목소리에 대한 더 영속적인 기념물은 멘델스존 말년의 중심 작품인 오라토리오 <엘리야>, Op.70이었다. 그 소프라노 파트는 특히 린트를 위해 작곡되었다. 작곡가는 이 작품의 계획을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고 있었지만, 1846년에 버밍엄 음악축제에 와달라는 초청을 계기로 작업을 시작했고, 슈브링과 함께 1839년에 중단한 부분부터 대본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슈브링은 일을 서둘러 오라토리오 1부를 위한 대본의 초고를 완성했다. 곡을 쓰는 일은 여전히 멘델스존의 다른 업무와 시간을 다투어야 했다. 게반트하우스에서의 연주회 활동과 아헨 음악 축제의 감독 임무뿐만 아니라, 6월에는 쾰른에서 열린 소란스러운 독일-플랑드르 합창 축제에도 참여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이런 온갖 약속을 지키면서도, 멘델스존은 1846년의 초반 몇 달간, 근래에는 그렇게 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전심전력을 기울여 <엘리야>를 쓰는 데 창작의 힘을 집중했다. 악보의 초판은 버밍엄 축제가 시작되기까지 보름도 채 남지 않은 8월 11일에 완성되었다. 한 주일 뒤에 그는 런던에 있었고, 오케스트라 및 독창자들과 연습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예니 린트는 영국 데뷔를 하��� 데는 오페라가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멘델스존이 그녀의 위해 구상했던 부분은 강한 성격의 소프라노 마리아 카라도리-알란이 불렀다. 8월 23일에 그는 연주자들과 함께 버밍엄 행 기차에 올랐고, 8월 26일 오전에 <엘리야>는 그곳 시청에서, 2,000명의 청중 앞에서 세계 초연을 가졌다. "내 작품 가운데 초연 떄 이만큼 훌륭하게 연주된 곡이 없었다. 또 연주자와 청중들에게서 이만큼 열정적인 반응을 받은 곳도 없었다." 멘델스존은 동생 파울에게 전했다. 다른 보고를 살펴보면, 이는 상당히 겸손한 평가에 불과했다. 청중은 절제를 내던져버렸다. "어제 있었던 공연에서 멘델스존이 거둔 승리는 믿기 힘들 만큼, 전례가 없던 수준이었다"고 모셸리스는 다음날 아내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타임즈>지는 멘델스존이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는 만장일치의 평가를 실었다. "<엘리야>의 마지막 음은 오래도록 계속된 박수갈채, 고함소리, 귀가 터질 듯한 환호 속에 파묻혔다. 마치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열광이 갑자기 그 굴레를 끊고 터져 나와 허공을 고양감에 찬 고함소리로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압도당한 표정의 멘델스존은 감사의 뜻으로 몸을 굽혔고, 재빨리 지휘석에서 내려섰다. 하지만 그는 다시 시작된 갈채와 만세 소리 속에 모습을 나타내야만 했다. 그토록 완전한 승리한 위대한 예술 작품이 그토록 철저하고 신속하게 인정되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당대 사람들에게 매우 폭넓게 멘델스존의 작곡가로서의 업적의 정점으로 인정받은 <엘리야>는 <성 파울로>에 비해 속도는 느리지만 그와 비슷한 몰락을 겪었다. 그 작품은 19세기 내내 합창단들의 영구 레퍼토리였고, 인기 면에서 이를 능가할 곡은 헨델의 <메시아>뿐이었다. 하지만 영국인들의 취향에 맞도록 구상된 이 작품은 빅토리아 시대 정신과 결부되었기 때문에 세기가 바뀔 무렵 일어난 감수성의 혁명에서 불리한 입장에 처했고, 멘델스존의 "경멸스러운 오라토리오 행상"을 공격한 것으로 유명한 조지 버나드 쇼의 주 공격 대상이 되었다. (p226~228) [SCHUMANN: Symphony No. 2 in C major op. 61] 한편 그의 공적 생활의 속도는 음악원에서든 게반트하우스에서든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가 완결할 수 있었던 마지막 시즌인 새 게반트하우스 시즌이 10월 4일에 시작되었는데, 문제가 없지 않았다. 11월 5일 멘델스존은 슈만의 교향곡 2번 C장조, Op.61을 초연했는데, 이것이 독일 문화생활의 표면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항상 도사리고 있던 반유대주의의 저수지를 흔들어놓았다. 이 교향곡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 책임을 멘델스존이 이 프로그램에 미리 준비해둔 앙코르용 예비 작품인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을 마련해둔 데 있다고 비난했다. 라이프치히의 한 잡지는 괴상하게도 이 일을 "음모의 모자이크"라고 해석했다. 멘델스존은 이에 굴하지 않고 며칠 뒤에 있은 연주회에서 이 교향곡을 다시 한번 연주했지만, 이 일로 슈만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겼다. 슈만은 말년을 요양원에서 보내야만 했던 정신적 불안정의 징후를 이미 내보이고 있었다. (p230) 멘델스존은 5월 12일에 프랑크푸르트에 돌아왔다. 이틀 뒤, 베를린에서 있던 ���이 파니는 일요 음악회를 위해 <첫 번째 발푸르기스의 밤>의 리허설을 하는 도중에 손에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 소식은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동생에게 5월 18일에야 당도했다. 그는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쓰러졌다. 멘델스존이 파니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의심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그가 그녀의 죽음을 알기도 전에 장례식과 추도식이 이미 끝나버려 행사에 참석할 수도 없었던 그는 슬픔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동생 파울에게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너를 만나서 이야기를 해본 뒤라야 모든 일을 정말로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나는 발자국을 떼어놓을 때마다, 편지 한 통을 열 때마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되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 일은 우리 모두에게 온 세상을 바꾸어놓을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해야만 하겠지요. 하지만 익숙해질 때쯤이면 우리 자신의 삶도 이미 끝나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슬픔으로 무너진 헨젤에게 이렇게 썼다. (p233~234) [MENDELSSOHN: String Quartet No. 6 in F major op. 80] 그 작품, 현악 사중주 6번 F단조, Op.80은 9월 초순, 멘델스존 일가가 라이프치히로 돌아가기 직전에 완성되었다. 실제 생애에 있었던 사실을 이런 식으로 읽어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가 쓴 것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음악인 이 사중주에서 파니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의 표현을 보지 않을 수 없다. Op.44에서와 같은 절제된 고전주의는 사라졌다. 여기 있는 것은 "고통스러운 감정의 동요"라는 모셸레스의 말이 적절하다고 해야 할 음악언어다. 그 감정으로부터 잠시라도 놓여나는 것은 깊은 비가와도 같은 느린 악장뿐이다. 1악장과 마지막 악장의 몰아붙이는 듯 발작적인 선율은 위안의 희망을 거의 보여주지 않으며, 2악장인 알레그로 아사이의 들쑥날쑥한 당김음은 전형적인 '멘델스존적' 스케르초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사중주는 작곡가가 쓴 마지막 대작으로, 새로운 음악 세계로 넘어가는 문턱에 있는 멘델스존을 보여준다. (p235)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그는 청중을 마주할 수 없었고, 새 게반트하우스 시즌의 개막 연주회 지휘봉을 가데에게 넘겨주었다. 10월 7일에 <여섯 개의 노래>, Op.71의 출판 준비를 마친 뒤 그는 일곱 번째 노래인 <독일의 옛날 봄노래>를 썼다. 이는 나중에 Op.86. No.6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 마지막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나는 홀로 고통스러워하네. 이 고통은 끝나지 않으리라. 나는 너로부터, 너는 나로부터, 아아 사랑하는 이여, 헤어져야 했으니. (p236) - 닐 웬본 , ' 멘델스존, 그 삶과 음악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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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vhasyhrix-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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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정관리委에 서혜경 피아노 기증|'서혜경 피아노' 출시(서울=연합뉴스) 피아니스트 서혜경 씨가 제작과정에 참여한 '서혜경 피아노'가 삼익악기에서 출시됐다. >  2009.3.4서혜경 씨 상하이심포니 협연..교민 위안 음악회도 (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90주년(5월 3일)을 기념하면서 중국과의 인적ㆍ문화교류 증진에도 미력이나마 힘이 되고 싶었습니다."유방암을 극복하고 지난해 1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KBS 교향악단의 2008 신년 음악회에서 재기에 성공한 서혜경 슈퍼카지노 교수(경희대)가 지난 주 방중, 상하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데 이어 상하이 임정관리위원회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삼익피아노 한 대(500만원 상당)를 기증했다고 2일 밝혔다.지난 달 27일 상하이 심포니의 초청으로 상하이로 떠난 서 교수는 이날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30일 오후 7시 30분  슈퍼카지노상하이 오리엔탈 아트센터에서 상하이 심포니 오케스트라(지휘 천셰양)와 쇼팽의 '에튀드 Op.25 No.1(에올리언 하프)', 슈만의 '헌정'(Widmung) 등을 협연한 뒤 이튿날 오후 5시 주상하이 총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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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식에 참석했다"고 말했다.기증식에는 상하이시 정부와 임시정부 청사관리위원회의 간부, 예술문화계 인사, 총영사관 직원, 재중 교민 등이 참가했다. 피아니스트 서혜경 (서울=연합뉴스) 피아니스트 서혜경 씨가 2-3월 전국 5개 도시에서 독주회를 갖는다. 줄리어드 음대출신의 피아니스트 서혜경은 국제 음악계에 이름을 알린 한국인 중 한 명으로 카네기홀이 선정한 3대 피아니스트이다.>   [email protected]서 교수는 임정관리위 관계자가 "청사 공간의 협소함 등으로 인해 이를 고아원이나 사회복지시설에 기증하고 싶다"는 말에 "이 피아노가 어려운 환경에서 음악 공부에 정진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삼익피아노는 지난 4월 서 씨가 디자인과 음색을 만드는 과정 등에서 제작에 참여한 '서혜경 피아노' 슈퍼카지노를 출시했다.서 교수는 또 "연주회 직후 상하이 심포니, 차이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지휘 유룽) 등과 중국의 도시를 순회하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전곡을 협연하는 내용의 공연계약을 마쳤다"면서 "20여년 전에도 런던 심포니와 이 협주곡의 전곡 녹음을 계약했으나 스폰서 기업의 부도로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세계 10대 클래식 시장으로 급성장해 온 중국에서 최초로 전곡 녹음에 도전하게 돼 영광이다"고 말했다.서 교수는 빠르면 오는 11월이나 내년 봄 광저우(라흐마니노프 4번)를 시작으로 베이징(2번), 상하이(3번)를 거쳐 다시 광저우로 가서 1번 협주곡 및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등을 협연할 예정이다.그는 1일 오후 6시에는 베이징 라이광잉 DVC센터에서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교민 위로 음악회를 열고 리스트의 '탄식', 슈베르트의 '밤과 꿈' 등을 연주, '베이징에서의 한 여름 밤의 꿈'을 장식했다.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 중인 서씨는 1980년 세계적 권위의 '부조니 콩쿠르(이탈리아)'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한 데 이어 뉴욕 카네기홀에 의해 '3대 피아니스트' 슈퍼카지노로 선정되는 등 세계 정상급의 피아니스트로서 각광을 누리던 중 2006년 10월 불의의 암 선고를 받았으나 '초인적인 의지'로 이겨냈다[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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