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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s Sketchbook
27 po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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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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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nado warning
no electricity
two hour school delay
The worst thing was I couldn’t see myself in the mirror and couldn’t wear makeup. Now I look like my age.
Fragile human life.
I got my baby mailed yester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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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pretty cute. The cover looks similar to real me.
Now how do I sell my babies so I can buy more makeu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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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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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re I learn, I know how much I don’t know.
-Albert Ei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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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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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the rainbow that is hung at the end of the horizon, a promised future awaits me. Not knowing what color, how big, the future hold, it is painful to trust the absolute power. Yet, the plan of God will be beyond my prayers and unfathomable grace. First 30 years’ pain led to last 30 years of new trials in an unknown world. May the Lord intervene intimately for next 30 years’ unknown promises with elegant gray hair! It is the regeneration-phase where there is maturity, gracefulness, humbleness, generosity, and trust rather than recklessness, ungratefulness, boast, and selfishness. Well complete life looks rested, slow but steady growth as a mature tree drifting a restful shade and creating slow breeze on another weary person’s face. Keeping faith is a narrow path. It is a rough, unsure, yet right path. Life is suffering like unfinished weeklong days but it is sweet to rest on Friday night doing nothing but resting. May God comfort my unceasing 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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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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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은 후회없는 삶을 개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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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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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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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년 뒤에
산과 바다를 건너
오랫만에 첫 애인과 다시 만났어
시간이 흘러 만난 주름진 얼굴 사진
그 때 그 마음이 새롭게 번저가
햇빛 좋은 날 운전대를 잡으며
눈을 지긋이 뜨고 그때를 떠올려
순수하고 진실하고 열정적인 감정들이
다시 내 마음을 가득 채워
지금은 손을 잡을 순 없어도
그리움에 눈물이 고여도
우리 대화는 여전히 똑같애
거리와 시간이 막을 수 없어
우리는 괜찮다며
가슴의 체증이 내려갔어 40 년 뒤에
지난 공백을 알아가며
서로를 더 많이 이해하고 있어
같은 하늘 아래 서로를 기억하며
그때처럼 짜릿한 순간을 극복하고
오늘을 위해 각자 막걸리로 축배를 들자
그리고 그냥 괜찮은 것처럼 또 안녕을 고하자
그 순간들은 너무나 소중해
감사한 마음으로 더 이상 다치지 않게 해
이번엔 기약있는 굳바이를 해요
그리움처럼 이름답게 또 하루를 살아가요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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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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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ery of kids' pi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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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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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Biography and Dear Publisher
조 영희는 가난에서 선생님, 상담사, 그리고 작가로 거듭나는 놀라운 인물입니다. 그녀의 삶의 경험이 교육과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미래의 열쇠는 과거의 도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조기유아교육과 특수교육 통합, 가정 및 소비자과학, 직업 교육, 영어, 학교 상담 등 다양한 자격증을 보유한 영희는 학생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위해 다양한 기술을 갖추었습니다. 곧 출판 될 회고 에세이들은 그녀의 어린 시절의 복잡한 도전들을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줄거리로 엮어낼 것으로 예고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영희는 어려움이 평범한 소녀를 비범한 운명으로 향하게 하는 준비가 될 수 있다는 주제를 전하고 있습니다. 영희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의 갈증난 마음을 미래에 향한 부드러운 희망으로 잠기게 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입니다.
  Younghee is a remarkable individual whose journey from poverty to becoming a teacher, counselor, and aspiring author is truly inspiring. Her life experiences have fueled her passion for education and writing, and she believes that the key to the future lies in understanding and embracing the challenges of the past.
With certifications in Early Childhood Education Unified with Special Education, Reading, Family and Consumer Science, Vocational Education, English Language Learning, and School Counseling, Younghee has equipped herself with a diverse set of skills to make a positive impact on the lives of her students.
Her upcoming memoir essays promise to be a compelling narrative, weaving together the intricate challenges of her childhood into a simple yet profound plot: that hardship can serve as preparation for an extraordinary destiny. Through her storytelling, Younghee aims to submerge the reader's thirsty heart into a gentle hope for an unknown but promising future.
News Materials
안녕하세요 편집자님,
이 편지가 여러분에게 안전하게 전해지길 바랍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의 범상치않은 인생의 경로와 그 어려움을 이겨낸 그녀의 저력을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서 수필집을 마쳤습니다.
곧 출판이 되어 나올 에세이에서 어머니와 같이 한 제 어린 시절의 어려움 친밀하게 그려내도록 노력 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어려움이 비범한 운명을 향한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조기유아교육, 특수교육, 독서, 가정 및 소비자과학, 직업 교육, 영어 교육, 학교 상담 등 다양한 자격증을 소유한 저는 포용적이고 지원적인 학습 환경 조성에 대한 중요성을 잘 알기에,  이 책은 특히 소외된 학생들에게 아직 불확실한 젊은이의 미래를 감미로운 희망으로 잠기게 할 거으로 기대되며, 저의 이야기가 영감의 등대가 될 것입니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거나 영희와의 인터뷰를 조정하고자 하시면 언제든지[email protected] 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시간과 관심에 감사드리며, 인생에 대해 강한 메세지를 주는 이야기를 여러분의 독자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손꼽아 기대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Dear Editor,
I hope this letter reaches you safely. I have completed a collection of essays to share my mother's extraordinary life journey and the hardships she overcame with readers.
In the forthcoming essay collection, I have endeavored to vividly depict the difficulties of my childhood alongside my mother. Through this, I aimed to convey a powerful message that adversity can be a catalyst for remarkable destinies.
With various certifications in early childhood education, special education, reading, family and consumer science, vocational education, English education, and school counseling, I am well aware of the importance of fostering inclusive and supportive learning environments. Therefore, I anticipate that this book will particularly resonate with marginalized students, infusing the uncertain futures of young individuals with sweet hope, and I believe my story will serve as a beacon of inspiration.
If you need more information or wish to arrange an interview with me, please feel free to contact me at [email protected]. Thank you for your time and interest, and I look forward to the opportunity to share a story that carries a strong message about life with your readers.
Thank you for your attention.
Sincerely,
Younghee 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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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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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ten a change is not an option although a change comes with a new labor. Closing one door is painful but it is an inevitable procedure to give a new birth. The birth of my first child required cesarean surgery and left a big scar. The scar still itches and reminds me of the birth. Today, I walked in to a new school, North High School. I see a light of dawn. I am hopeful that I will be purposeful in this school not just fitting in but being a game changer. I am grateful for this opportunity. Thank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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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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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as if you were to die tomorrow. Learn as if you were to live forever.
Mahatma Gand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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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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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머리말: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엄마가 없는 내 인생 이야기는 사실 재미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1927년도에 태어나신 엄마의 인생은 2023도를 사는 내 친구들에게 놀라운 이야기감이 된다. 내가 엄마의 탄생과 그의 어린시절에 대하여 어떻게 쓸수 있느냐고 물으면 한마디로 다 엄마가 제일친한 친구들인 종석이 엄마나 막둥이 작은엄마 그리고  순희 엄마한테 얘기하신걸 식사끝나고 과일대접하면서 오다가다 들은 거다. 과일 접시 내려놓으면서 , “ 아이고 엄마 그얘기 또하셔?” 그러면 엄마는 멋적게 웃으시면서, “아니이 오랫만에 만났승게 헌다.” 들으시는 분들은, “ 우리가 다 앙게. 그러고 이해를 헌게 그러제, 하먼 형님 고생 많이 헌거 세상이 다 알제. 하먼 영종이엄니는 고생한것이 아조 말도 못허제. 책으로도 다 못써 하먼 고것을 다 어추고 쓴당가” 하신다.  내가 너무 어려서 그분들은 마치 내가 옆에 없는 것마냥 그네들의 삶의 이야기를 반복 또 반복하여 어떤 이야기는 내가 마치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내 기억에 너무 생생하고 그 깊은 서러움같은 건 마치 내가 살아온 것처럼 온몸에 전율이 퍼진다. 엄마의 화가 내게 그대로 전해지고 엄마의 아픔으로 인해 내가 아프다. 엄마를 잘못대한 사람들이 미워져서 내가 친해지고 싶은 친척들이나 주변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어떤때는 그 서러움과 화가 내 목을 가로 막다가 위장으로 내려와 가슴과 배가 뜨거워진다. 이런 감정이 나의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 어떤 형태로든지 물들어있으리라 생각한다. 딱히 프로이드를 믿지는 않지만 지금의 나의 성공이나 실패의 원인은 눈덩이가 굴러서 커진것처럼 과거 나의 직접간접적인 경험의 결정체이지 않을까 한다. 지금의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싶다. 왜 나는 모든이에게 친절한가 그리고 나는 어떤 이 회상록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너 자신을 알라” 를 실험해보면서 과거 어디엔가에서 비롯되었을 내 응어리진 아픔을 치료하는데 큰 기여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회상록이 나와 같이 섬세하고 상상략있고 분석적이면서도 얄팍한 접시처럼 금방 깨질것같은 사람에게 평화를 가져오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특히 내 아이들 Abraham 과 Benjamin 그리고 그의 아내 Cierrah 가 엄마와 할머니의 범상하지 않는 상황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반동력이 있는 삶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들 또한 이 풍파가 센 세상에서 저력있는 삶을 선택하기를 바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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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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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일기를 더 이상 쓰지않는 이유
미국에 온지 어연간 28년 숨가쁘게 살아왔다. 대학졸업, 결혼하기, 두 아들 기르기, 학교에서 가르치기, 대학원 졸업, 결혼 상담, 두 아들 homeschooling 하기, 더 결혼 상담하기, 또 대학원 가기, 이혼하기,…이번 마지막 가르침이 나의 영예로운 퇴직 자리일거라고 자부하고 부푼 가슴으로 시작했다. 아뿔싸! Covid 새 세대라고들 한다. 내 힘으로는 역부족임을 학교시작 이틀만에 알았다. 그러나 그리 쉽게 사직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크리스마스 전날까지 넉달동안 이어갔다. 머리가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소화도 안되고 숨이 잘 안쉬어져서 의사를 만났다.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단다. 스트레쓰란다. 하던 일을 쉴수 있을만큼 쉬란다. 전직 학교 상담사로써 내게 뭐가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았다. 누가 내게 이런 문제로 내게 상담을 구한다면, 첫째 스트레쓰 요건이 뭔가 분석하기 둘째 그 스트레쓰 이유를 제거하기, 세째 치료를 시작하기. 그 치료로 나는  상담하기 식사 잘 하기 긍정적인 사람과 만나기 심호흡 하기 여행하기 운동하기 글쓰기 등을 추천할 것이다. 순간 나 혼자 뒤 돌아보고 글을 써 본지가 너무 오래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미로 책을 읽어 본 지는 아마도 중학교때가 마지막이고 지난 삼십년동안 교과서같은 책만 대학교에서 대학원에서 그리고 학교 관련된 세미나등에서 꼭 직장에 필요한 것만 읽어왔다.  이렇게 쓰고보니 내가 참 불쌍한 인생을 산 것처럼 생각되었다. 눈이 엄청나게 온다. 오늘은 나갈 수도 없다. 어떻게 해서 내가 여기에 까지 왔는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왜 나는 내 하루하루의 기록이 하나도 없을까 왜 나는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을까. 어릴때는 글을 써서 백일장에서 상도 탔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그것이 알고싶다.
입시경쟁이 심해 항상 공부를 잘 하는 것이 학생으로써 미덕이었던 학창시절의 얘기다.
나는 따로 공부할 필요도 없이 상위 5% 의 성적을 유지하는 학생이었다. 사는 게 너무 단순해서 딱이 말써피울일도 없고 “ 너는 공부나 해라.” 며 혼자 고생하시는 엄마의 말씀따라서 학교가면 선생님 말씀을 잘 들었다. 그냥 똑바로 앉아있으면 선생님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내 귀로, 머리로, 또 가슴으로 들어와 저장이 되어서 시험때면 다 기억할수 있었다.  그런데 고등하교 2 학년때 광주에서 서울로 전학을 오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학생들이 공부밖에 안 했다.  나처럼 공부를 안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고 있다면 불량학생으로 낙인이 찍힌 아이들만이었다.
맨 처음 서울에 도착했을때 오빠가 자주 드나들던 책가게 주인 키다리 아저씨가 대 환영을 해 주었다. 우리 오빠가 자기 동생이 미쓰 광주보다 더 예쁘다 했다면서 겁나게 호들갑울 떠는 아저씨가 너무 재미있었다. 낯선 아저씨가 덜컥 내 손을 잡는 것에 깜짝놀랐다. 서울사람은 다 이런가. 그 아저씨는 따로 집이 없는 것처럼 우리집에 죽치고 살았다. 우리집 밥먹고, 자고, 기타치고. 나는 그렇게 완벽한 본토 영어발음으로 Kris Kristofferson 의 Why Me 를 부르는 사람은 첨 봤다. 서율대 다니며 데모를 앞장서서하는 오빠랑 전라도 공화국 운운하며 바판적인 모습이 내겐 충격이었고 매력이었다. 고 3이 되어서도 나는 그냥 학교에 가방만 들고 다녔지 대입준비로 과외하고 학원에 다니는 다른 학생들에 반해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안했다.
엄마가 어느새 노쇠한 나이가 되어 집안의 살림은 점점 힘들어졌다. 오빠는 등록금 낼일이 막막하여 군대에 갔다. 그 책가게 아저씨는 우리집에 계속 들락거리며 내 맘을 산란하게했다. 딱 부러진 계획도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나의 태도가   엄마한테 는 불량했던 모양이다. 엄마한테 쉽게 화를 내고 금방 삐져서 한 두시간 아무 시내버스나 타고 종점까지 갔다 오는등 엄마��� 애간장을 많이도 태웠던가보다. 오빠가 군대에서 휴가왔을때 엄마가 나에 대해서 토로하셨다. 영희가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한번 말좀 해 보라고. 방이 한개이니 그 대화가 비밀일레야 비밀일수도 없었다.
오빠는 내게 말을 하는 대신 내 일기장을 뒤져보았다.
그때 내 일기장에는 내가 얼마나 책가게 아저씨에게 빠졌는지 그내용이 내가 봐도 너무 적나라해서 마치 화류계의 아기씨들이 손님을 기다리는동안 껌 씹으며 보는 삼류 만화책처럼 filtering 없이 적나라하게 적혀있었다.
오빠는 기가 막혀혔는지 길게 예기는 안했다. 했다면 뭐라고 했을까? 좋아하지 말라고? 내가 이렇게 혼자 좋아하는지 알턱이 없었으니 군대가기 전날 책가게 아저씨한테 우리식구좀 부탁한다고 술한잔 거나하게 하고 갔으니.
그 이후로 내가 국민학교 2학년부터 해 왔던 일기쓰기는 끝이났다. 누군가가 내 마음을 또 들���다 볼것이기에. 일기장을 통해 내 비밀을 밝혀냈던 오빠는 나중에 한국 정보부 국정원에서 평생 일하다 지금은 퇴직했다. 그 때 그 비밀정보캐는 소질을 정보원으로써 요긴하게 잘 썼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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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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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골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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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엄마가 파킨슨 병을 오래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다. 시골에서 그렇게 서구적으로 예쁜 여인은 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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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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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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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감나무에는 감이 연다
우리 아들을 쇼핑 센터에서 한번 잃어보고서야 내가 어릴때 철딱서니 없이 똑똑한 척하다가 우리엄마 애간장을 얼마나 태웠을까를 알았다.
국민학교 3학년때, 어느 토요일날 전교생이 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광주시 계림학교부터 밤실이라는 야산으로 모두가 걸어갔다. 그 곳은 버스로도 꽤 멀리 갔다가 산에 오르는 길이라 상당히 먼데, 모두가 노래하며 행진하니 그리 먼줄은 몰랐다. 거의가 김밥과 과자를 점심으로 싸오고 어떤 아이들은 사이다를 바구니에 담아 머리에 이고 온 할머니께 음료수를 사서 마셨다. 내 점심은 항상 주먹밥이었다. 밥을 해서 동그란 공모양을 만든다음 깨소금에 굴린것이다. 반찬없이 먹기좋은 간식으로 지금은 다 큰 우리아이들한테 만들어주기도 한다.
보통 단체사진도 찍고, 게임도 하고 놀다가 오후가 되면 휴지를 줍고는 다시 걸어서 내려온다. 그날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모두가 뛰어서 동네집 처마밑에서 기다리다가 또 뛰었다. 비를 피해 기다리다가 내 머리에 갑자기 비상한 생각이 스쳐갔다. 우리 작은 외숙모집이 그 근처였던 것 같은데 그 집을 찾으면 그 다음날은 일요일이니까 학교도 안 가고 그냥 하루를 잘수가 있었다. 비도 안 맞어도 되도.
일제때 징용갔다 집에 거의 다 와서 돌아가신 작은 외숙의 제사지내러 엄마따라 밤에 몇번 갔는데 집을 잘도 찾았다. 외숙모는 “ 잘 왔다” 하시며 내 젖은 옷을 말려주고 따뜻한 아랫목에 앉게 하셨다.
나중에 엄마가 말씀하시기를, 그 날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단다. 학생들은 선생님따라 열씸히 뛰어서 출석점검을 하기위해 운동장에 집결했단다. 내가 없으니 그때 처녀선생님인 염금실 선생님, 교장 교감 선생님, 그리고 경찰과 우리엄마는 다시 밤실로 왔다갔다 했단다. 그 곳은 공동묘지가 허다하고 밤이면 전혀 불이 없어 칠흙같이 깜깜한 곳인데 몇번씩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았단다. 나는 그 것도 모르고 외숙모집에서 저녁먹고 따뜻하게 누워있었다.
밤이 이슥해져서 엄마는 갑자기 “ 혹시 영희가 외숙모집을? ” 하며 마지막 희망을 걸고 부리나케 찾아왔다. 장난끼가 많은 외숙모 말씀이 생각난다. “야, 숨어. 느그엄마 다 죽어서 너 찾으러 온갑다.” 나는 숨었다. 엄마가,”아이고 형님, 우리 영희가 소풍갔다가 없어졌어라우. 우리 영희 안왔소?” 라고 물었다. 외숙모는“ 안 왔는디. 여그를 그 어린것이 어추고 알고와.” 하셨고 마당 한 복판에 엄마가 쓰러져버렸다. 내가 얼마나 혼났는지 생각이 안 나고 엄마가 내 몸을 잡고 울었던 것같다.
아무 생각없이 월요일에 학교갔을때 나를 보러 여러 선생님들이 찾아왔다. 그날 염금실선생님은 다른 선생님이 올때마다 “ 조영희, 일어나” 하실뿐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그 예쁜 선생님이 하루종일 미소가 없었다는 기억은 나는데 나를 혼내진 안았던 것같다. 그 선생님은 이야기를 너무나 재미있게 잘하셔서 내 머리속에 꼭꼭 심어지게 잘 가르치고 세상에서 제일 미인 선생님이셨다.
아직도 내가 뭘 잘못했는가는 모르겠고 지금처럼 전화가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 이렇게 예깃거리가 되었다. 5분도 안되는 짧은시간동안 AJ 를 잃어봤다. 갑자기 염금실선생님을 찾아서 깊이 사과를 해야 될것같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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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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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뱁새 VS 황새
은행알을 돌려서 광주 수피아 여중에 가게 된것이 우연이 아니듯이, 나의 미국유학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학교 1학년때 의례적인 IQ 검사를 했다. 그 숫자의 의미가 뭔지는 모르지만 내 IQ점수 148로 전교생중에 다른 두 학생과 함께 최상의 점수로 알려졌다. 내 점수가 왜 그렇게 높게 나온 가는 나만 안다. 머리가 유달리 좋아서가 아니다. 가난했던 우리 엄마가 나를 대입준비하는 인문고가 아닌 상업고등학교에 보낼 작정으로 일찌감치 주산학원에 보냈다. 몇년동안 날마다 주판 알을 튕귄 덕분에 나의 암산 실력이 남달랐다. 지금도 두세자리 숫자의 계산은 그냥 암산으로 하는 것이 계산기보다 빠르다.
우리 담임 정 기성선생님은 IQ가 최고로 높은 학생이 자기반에 있다는 것에 신이 나셨다. 가끔 수수께끼같은 고리룰 가져와서는 “ 조 영희, 이거 열어봐.” 하시고 내가 문제없이 해결하는 걸 보시고는, “영희 너는 여기서는 안되겠다.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돼.”
고등학교땐 IQ고 뭐고 나의 성적은 시궁창으로 꼬꾸라졌다. 왜 일까? 공부를 전혀 안 했기 땨문이다. 졸업 후 그냥저냥 새마을유아원 보조로 일하면서 주말의 소일거리는 오락실에서 테트리쓰를 하고, 자정 넘어도 방영되는 AFKN 에서 영화를 보거나, 심심하면 오빠가 대학교에서 가져온 Times magazine 을 뒤적이거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심심하면 수학정석을 풀었다.
가족이라곤 엄마랑 오빠이니 주변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갖지않은사이 나는 유치원에서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있었고, 어느새 스물예닐곱의 노처녀가 되어있었다. 어느 여유로운날, 같은 동료들이랑 일과 후에 취미로 뭘할까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테니스, 초상화 그리기, 붓글씨, 에어로빅등의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난 그럴돈은 없었고 설령 있다해도 그런취미는 부르죠아지나 하는 것들이었고 또 공부가 아니라서 소득이 없다고 믿었다. 영어를 배우면 어떨까하는 생각에 강남에 영어학원을 찾았는데 그 문턱오르기가 험난했다. 영어회화반에 들어기려면 반편성을 위해서 영어선생님과 대화를 해야했다! 무서움에 떨며 내 순서를 기다리는데 두어명의 파릇한 여대생들이 인터뷰하기 “쪽팔리다” 며 떠났다. 나도 일어서서 나오려는 찰라에 내 이름을 부르며 문이 열렸다. 아이고! 난생처음 본 외국사람하고 영어로 대답을… 휴! Level 은 Top 1부터 bottom 10. 난 7 을 받았다. 내가 “My name is Younghee.” 까지는 했는 모양이다. 그것이 파고다학원의 시작이었다.
회화반 학생들의 목표는 단 한가지였다. 영어를 잘 하는것. 많은 학생들이 시작은 하는데 끝까지 level 1 까지 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는 젊은 대학생들처럼 신나는 방과후 파티가 없었기에 그냥 날마다 회화반에 갔다. 어디가나 내가 제일나이가 많아서 멎적었지만 그냥 물만난 물고기처럼 잘 떠다녔다.
영어도 영어지만 그 외국인 선생님들의 서구의 사고방식을 많이 배웠다. 무엇보다도 대화전에 내 나이를 묻지 않아서 좋았다. 어린 헉생들이 유학준비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도 얼떨결에TOEFL 시험을 봐봤다. 540이 나왔다. 어린학생들이 깜짝놀라며 서로 같이 공부하자했다. 그러나 내게 유학이란 것은 ���황된 꿈이었다. 유학? 그다음엔? 답이 없었다. 흙수저로 흙산에 살았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랭이가 찢어진다.”
제때에 결혼을 안하니 친구도 사라지고 선을 보라는 예기가 쏟아졌다. 결혼을 전제로 한 맞선만큼 어색하고 불편한 게 없었다. 마치 소를 매매하는 시장에서 소 이빨을 들쳐보고 피부의 탄력성을 체크하며 가격을 흥정하는 곳에서 내가 소가 된 느낌이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진짜로 내 앞머리를 자기손으로 들쳐서 내 이마의 선을 가늠하기도 했다. 어떤 중매쟁이는 내가 눈을 올려뜰때가 더 예쁘다며 선 볼때 그리하라고 제안을 하기도 했다. 우리집은 결혼 시킬 돈도 없는 상황에서 결혼하는 길이야말로 인생의 최종 살갈인것처럼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선을 주선하기 바빴다. 그들은 선 보는 자리가 내게 얼마나 나를 발가벗기는 악랄한 자리였는지 모르는 것같았다. 선을 안본다면 “너 무슨 문제있냐?“애프터를 거절하면 “니가 뭐가 잘났냐” 고 애프터를 승락하자니 두달안에 결혼준비를 해야 될것같은 이 사태를 누가 알랴. 나이 30이 되니 재혼자리도 중매가 들어왔다. 그나이가 금값은 아니라는 뜻이 아니었던가.
이 상황에서 탈출구가 필요했다. 하고싶지 않은 중매결혼을 한다는 것이 내 무덤울 파는것같았다. 그렇다면 유학을 갖다와서 결혼해도 좋지않나하는 샹각이 들었다. 종로유학센터에 찾아가 이백만원을 내고 유학준비를 의뢰했다. 내가 혼자 준비하자니 어떤 장애가 있으면 포기할 것 같아서였다. 내가 정말로 탈출하기를 원했었나보다.
유학센터에서 필요한 서류를 갖다주고나서 2개월쯤후에, 세군데 대학교에서 입학허가가 왔다, University of Virginia, University of Illinois, and University of Northern Iowa. 한정된 내 재정을 고려하고 큰도시인 서울생활에 신물난 나는 University of Norther Iowa를 선택했다. 1995년 1월 9 일 나는 Cedar Falls, Iowa 에 도착했다. 그렇게 눈이 많이 온 도시를 처음봤다. 그 추운날, 뱁새가 황새가 되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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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heejoy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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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적이된다.
-American Essayist Ralph Waldo Em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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