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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을 찍을 때 가급적 화면을 보며 찍지 않으려고 합니다. 화각을 넓게 설정한 채 막 손을 들어 찍는 거죠. 눈으로 확인하고 찍으면 자신에게 익숙한 구도의 화면만 남는 경우가 많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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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를 붙잡는다. 즉 일을 중단시키고 저항하여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라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서 우리를 잡아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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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라는 숫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01&aid=0008010422&isYeonhapFlash=Y
호화로운 설국열차.
그 밑판에서 ‘신성한 엔진’을
손으로 돌리고 있던 가장 작고 어린 아이.
깔끔한 것의 표면아래의 수많은 피와 오물, 고통.
그 것을 지긋이 누름으로서
편리함, 깔끔함, 점잖음을 회복하는 표면. 풍경.
메르스 제로.
170여일을 두려움에 떨면서
부인에게 ‘죽고 싶지 않다. 떠나지 마.’라고
애원한 한 남자의 목소리를 지긋이 누름으로서
다시 회복한 우리들의 쾌적하고 건강한
‘일상’.
메르스 제로.
제로로 수렴하는 그래프 곡선에
최대치로 발산하며 따라붙는 야만성의 곡선.
메르스 제로.
사람만이 희망이다?
제로.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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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1.
'논란'이라고 하는 것은 논해서 싸울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20미터 앞에서 물대포를 직격으로 맞고 생명이 위독한 농민에 대해서 미국에서는 시민을 쏴죽여도 정당하다고 얘기한 [새누리당 이완영 국회의원]의 발언에 대해서는 그런 점에서 결코 '논란'이라고 얘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조직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고 조직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의미란 없다고 한 것은 철학자도 아니고 시민운동가도 아닌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의 말이었다.
정부라는 조직이 무엇을 위해서 있는지 자신의 주제를 망각한 [새누리당 이완영 국회의원]과 그 비슷한 발언을 한 국회의원에게는
그런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얘기한 '배신의 정치'라는 말을 되돌려 주고 그들 못지않게 집요하게 '응징'해야 할 것이다.
3.
테러의 보복을 위해서 시리아를 공습하는 프랑스와 러시아를 응원하는 것은 공권력과 국가질서를 위해서는 국가가 개인을 죽여도 된다는 [새누리당 이완영 국회의원]과 다를 바 없다.
+ 김용남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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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yne levin
http://www.tageswoche.ch/get_img?ImageWidth=980&ImageId=1677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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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고통을 해결하려고 할 때 고통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타인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호소할 수 있는 말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통을 해결하려고 할 때 고통을 당한 이는 ‘타락’해야 한다. 그는 고통을 ‘협상’해야 하고 타인의 언어와 ‘타협’해야 한다. 해결하기 위해 점점 더 진부한 말로, 점점 더 상투적인 말로 고통을 호소해야 한다. 자신의 고통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언어와 ‘타협’해야 한다. 그렇게 호소할수록 고통은 점점 더 멀어지고 고통받는 이는 고통 자체로부터 소외된다. 고통을 당한 몸, 고통에 대한 언어에 이어 고통 자체로부터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에게 남는 것은 ‘타락’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더욱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신의 존엄을 버려야지만, 존엄을 버리는 ‘비장함’조차 버려야지만 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잃은 고통’을 넘어 이제는 이들의 이 마지막 고통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이 자신의 고통을 절대화한다고 비판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이 고통의 타락, 타락의 고통을 조롱하며 이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인가. 아니면 응답할 것인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312102265&code=990100
서둘러 짐작컨데 엄기호 저자의 이 글은 김영민 철학자가 작년 8월에 쓴 칼럼 '쉼 없이 생성되는 영혼'에서 이어지는 걱정과 호소이다.
"그러니, 지금도 억울함으로 목놓아 우는 이들은 밖을 향해 소리를 높이는 한편, 자신의 속이 변해가는 기미를 살펴야 한다. 말해도 닿지 않음, 울어도 풀리지 않음, 그리고 위로받아도 당치 않음 속에서 생성되고 있는 또 다른 영혼의 씨앗을 살펴야 한다. 말해도 닿지 않음으로 말해야 하고, 울어도 풀리지 않음으로 울어야 하고, 위로받아도 당치 않는 무연(憮然)함 속에서 바로 그 위로의 너머에서 생성되고 있는 다른 영혼의 자화상을 응연히 살펴야 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이렇게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내려가 섬세하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살피는 시선을 갖고 있는 저자 들이 있다는 것은 깊은 위안이 된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위안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고 정작 위안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이런 글들이 닿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받았다면 다시 다른 누군가에게 주어야 한다. 응답을 하라.. 어떻게? 조롱이야 하겠냐만은 응답의 방법은 모르겠다. 해결의 가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마치 시민단체에 몇 천원 돈을 후원하고 죄책감을 더는, 그런 손을 보태야 할까? 아니라면 멀리 돌아가더라도 나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 고통에 응답이 되는.. 다른 방식의 싸움이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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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0일 기록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인 듯 한데.
최근 화재로 운명을 달리하신 故 송국현 님을 추모하는 자리를 찾아서 묵념 했지만 어떤 애도의 마음도 풀 수 없었고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마음을 가볍게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시원하게 욕을 하는 것도, 명상을 통해서 자신을 다잡는 것도, 리더쉽에 대한 교훈도, 어떤 반성도, 다짐도, 심지어 눈물도, 아직 이르다. 어떤 사진가가 이야기했듯이 지금은 무엇도 담지말고 그저 바라보아야 할 때일지도, 어떤 철학자가 이야기했듯이 고통을 덜 수 있는 어떠한 시도도 지양하고 온전히 그 것을 느껴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세월호의 한 실종자 가족은 자신의 가족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단 한 아이라도,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희망과 믿음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옳다. 나는 감히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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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고통의 말을 듣는 감수성 / 엄기호 (5)
5. 낯섦과 마주치고 시간을 들이기
*
정말 구제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오히려 어떤 집단 안에 있으면서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정신분석학자는 하라주쿠나 신주쿠에서 떼로 몰려다니는 청소년들을 예로 들었지만, 저는 가스통 메고 거리로 나오는 할아버지들부터 SNS에서 동질성에 갇혀 있는 우리들까지 모두 어느 정도는 거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요. "네가 곧 나고, 내가 곧 너"이기에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의사소통할 용기가 없는 상태인 겁니다.
*
<단속사회>의 부제,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와 결부시켜 말하자면, 나와 같은 것과 접속할 때는 그다지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실시간으로(쉴 새 없이) 할 수 있는 거지요.
* 그러나 나와 다른 것, 내가 모르는 것, 내게 낯선 것과 만나고 소통할 때는 반드시 일정한 길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쭉 들어봐야 하고, 시간을 두고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동시에 정성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시간과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낯선 존재와 소통할 수 없습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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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고통의 말을 듣는 감수성 / 엄기호 (4)
4. 시장으로 넘어간 '말'의 세계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은 조언과 충고라고 이야기되어 왔습니다. 내가 내 삶을 살아가면서 터득한 의미와 가치, 지혜를 전해주는 겁니다. 앞서 이야기한 ‘곁의 세계’란 다른 말로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는 우정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어요.
*
그 조언은 상대방에게 정말 쓸모가 있고 유용해야 합니다. 주식투자 정보 같은 이(利)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쓸모라는 의미의 용(用)입니다. 내 삶으로부터 길어온 지혜가 다른 누군가에게 쓸모가 될 때, 그때 우리에게 생겨나는 것이 바로 ‘사회적 존재감’입니다.
*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조언과 충고의 역할은 대부분 힐링 마스터나 멘토들에게 넘어갔습니다. 곁이 시장화되고, 사람들은 서로서로 적당히 편 들어주다가 꺼끌꺼끌해지는 순간 ‘바이바이’하는 쓸모없는 관계로 진입해버렸지요.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삶의 지혜를 주기 위해 구가하던 모든 노력들이 시장 영역에 휩쓸려버린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대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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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고통의 말을 듣는 감수성 / 엄기호 (3)
3. '예의바름'
*
실제로 곁이 해줘야 하는 일들은 어디엔가 돈을 내면서 충족시키고, 내 주변의 관계들은 적당히 유지하면 되는 "예의바른" 관계들로 채워나갑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건네는 "괜찮아?"라는 안부 인사를 생각해 보세요. 그건 대개 "응, 괜찮아"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던지는 인사입니다. "안 괜찮다"라는 답이 돌아오면 오히려 당혹스러워합니다.
*
레비나스는 안부 물음이 존재를 환대한다는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저 사람을 나의 세계로 초대하고 내가 저 사람의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요. 하지만 대개의 경우 우리의 "괜찮아?"는, 내 세계는 내 세계에서 끝나고 네 세계는 네 세계에서 끝나는 상태로 돌아서자는 인사입니다. 그게 책에서 비판한 '예의바름'이고요. 이런 관계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고통에 개입하거나 다가설 여지가 사라집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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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고통의 말을 듣는 감수성 / 엄기호 (2)
2. 고통을 전시장일 뿐, 해결의 단위는 되지 못하는 SNS
*
얼마 전에 기가 막힌 걸 봤습니다. 어느 단체 내부에서 문제가 벌어졌고, 당사자들끼리 만나서 해결을 해야 했는데,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되어서 SNS에 그 문제가 뜨더군요. 이러면 문제 해결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는 고통을 떠들고만 싶어 하지, 고통을 해결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고통의 해결을 위해서는 단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어려움 중 하나가 이 단위의 소멸입니다. 회사든 아파트 단지든 정치 조직이든, 문제 해결을 가능케 하는 정치 공동체들이 소멸되어 버렸지요. 그 대신, 안에서 터진 일을 바깥으로 폭로해서 도덕적으로 매장시켜버리는 방식으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때는 이 폭로라는 방식이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든 구조와 권력을 겨냥했다면, 지금의 폭로는 폭로되는 사람이 얼마나 '개새끼'인지를 드러내는 데에만 집��되어 있고요.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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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고통의 말을 듣는 감수성 / 엄기호 (1)
1. 독점된 고통의 목소리
*
"고통 받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소리만 지를 수 있을 뿐이다."
*
그런데 전쟁이나 강간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그렇게 차분하게, 시간의 여유를 두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할 수 있을까요? 울고 소리 지르고 흐느끼거나 멍하니 있는 것 혹은 침묵하는 것까지, 소리를 내건 내지 않건 어쨌든 말이 아니라 '소리'로만 자신의 고통을 전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
그런데 외국 생활을 마치고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 이런저런 연구를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이 문제와 관련해 큰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너무 잘 했기 때문이었어요.
*
또한 우리가 그렇게 유려하게 잘 말하는 '내용'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라면, 그걸 말하는 '방식'의 특징은 바로 징징거림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하는 주된 방식(사회과학적인 언어로 말하면 '주체화의 형식')이 '내 고통을 징징거리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내가 내 고통을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존재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나날이 서로서로를 고조시키죠. "내가 더 고통 받았다", "내가 더 힘들다"라고요.
*
그것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자신이 고통에 차 있다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어떤 고통의 목소리는 아예 수면 위로 떠오르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진 사람들은 아예 말의 세계에서 추방이 되어 진입조차 못 하게 되었습니다.
*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니, 원래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겁니다. 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소리로 알아들을 수밖에 없겠죠. 울부짖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 내짖는 소리… 그리고 표정으로만 드러나는 침묵의 소리일 수도 있어요. 의미가 완결된 형태로서 전달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소리를 듣는 능력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가까운 친구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전체가 무능력해지고 있어요.
*
우리에겐 소리로만 전달되는 고통을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하고요. 그런데 누구나 자신의 고통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하면서, 말 아닌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에 대한 목소리��� 높이면 높일수록 불길한 생각이 듭니다. 고통의 목소리마저 독점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6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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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이 슬픈 이유는 악 때문이 아니다
(전략) 세속이 슬픈 이유는 악 때문이 아니다.
슬픔은 분노와 일치하지 않고 분노의 긴 잔상(殘像)보다
더 길게 희미해지는 끝에서야 슬픔이 돌아본다.
슬픔은 적들의 횡포 탓이라기보다 오히려 동무들의 선의와
연인들의 호의에 얹혀 생긴다. (중략)
척마(尺魔)가 세속의 본질이 아니다.
오히려, 촌선(寸善)이 그 본질이며, 촌선이라는 그 적음을 추스르는 데
늘 실패한다는 사실속에 세속의 본질이 있다.
아렌트는 악은 그저 표피에 번성할 뿐이고, 진정으로 깊고 급진적인 것은
오히려 선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일상의 표피에서 조금씩 얕은 싹을 내리고 있는 촌선의 문제다.
척마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오히려 명료하고 단호할 수 있다.
그러나 촌선을 대접하는 우리의 일상은 늘 주춤거리고 어긋나며 못미치는데,
실은 바로 그 속에 세속의 본질이 희미한 미소를 숨기고 있다.
촌선척마(寸善尺魔)라는 객관성 속에 세속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척마와 싸우던 그 의기(意氣)가 촌선을 앞두고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데
그 세속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당신의 불행이 내 행복이 되는 그 원환(圓環)의 헤덤빔 속에 세속의 본질이 있다.
나는 종종 ‘완벽하지 못한 삶!’이라고 혼자 중얼거리곤 하는데,
세속은 그처럼 한 치 앞을 짚을 수 없는 헤덤빔 속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밖에 없는 장소다.
그러므로 세속 속의 최선은 오직 다시 시작하는 것,
다시 걷는 것뿐이다.
최선의 단자(Monad)가 되어 이 세속의 공간을 떠돌면서
그 단자에 틈이 생기는 어느 빛나는 시간에 희망의 줄을 잇고 있을 뿐이다.
의도도 믿음도 호의도 다짐도 아니다.
언덕을 넘어서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바람이 문제다.
동무론 (김영민, 한겨레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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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17도, 일흔 살을 넘긴 요리스 이벤스가 목숨을 걸고 제작한 영화.
베트남 남북부를 가르는 벤하이강 지역에서 벌어진 미군과의 격전을 기록하였다.
이 영화 속 여성들과 아이들은 성숙하고 강하며 자신의 일을 잘 알고 있다.
돈냄새도, 권력의 냄새도 풍기지 않는 존엄한 사람들, 그리고 서로 돕는 손들.
그럼에도 처음 배우는 영어라는 게 '멈춰', '손들어', '가' 를 외쳐대는
아이들을 단지 '강하다'고 그저 감탄하는 마음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었다.
벌떡 일어나 외쳐대는 아이들을 말 없이 잠시 정지화면으로 잡아두고,
그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 깔끔하고 미련없이 끝을 낸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단지 '시사'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 자신이 이상으로 삼았고 많은 관련 영화를 만들었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노년에는 점점 실망하고 다른 입장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노동운동을 두고 '지금 생각하면 문예창작에 기울일 힘을
다소 엉뚱한 곳에 쏟았'고 '사회봉사에 바쳤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로를 한다는
황석영과 같은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고 단지 사회적인 내용만
담은 것이 아닌, 아름답고 존엄한 영화를 만들며 결국에는
자유롭게 살다 떠나간 위대한 작가였다.
" 나는 내가 20세기 전체를 증언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현대의 젊은이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바라봅니다. 그건 세계 1차대전 직후였어요. 시민들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죠. 대다수가 죽임을 당했고요... 그 모든 시스템은 수백만의 목숨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 속에는 불길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똑똑하고 비판적인 이들은 금새 사회주의에 등을 돌려버렸죠. 하지만 저는 그들과 다릅니다. 제게는 저만의 양심이 있습니다.(요리스 이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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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지 않습니까?'
'도를 아시나요?'
이제 유머로도 쓰이지 않는 이 진부한 말은
그러나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계속 쓰이고 있다.
'길거리에서 자주 잡히지 않아?'
그렇다. 교내 기독교 청년부터 심리 테스트를 빌미로 접근하는 '도인' 앵벌이들까지
나는 자주 '잡혔다.'
아마도 그 이유(가 있다면) 중 하나는 내 '눈' 일 것이다.
'왠지 뭔가 할 것 같다.' 며 이유없이 기대를 걸어주는 이들도,
'왠지 재수없다.'며 이유없이 적개심을 흘리는 이들도,
모두 적절하지 않지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오는 이들을 어찌 미리 알고 피해갈까만,
내게 한 가지 방법(?)이 얻어졌다면, 그것은
가볍고 빠르게 걸어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이 방법도 항상 통하는 것은 아닌데 가령
얼마 전, 지저분한 카페에 앉아 있을 때의 일이다.
예의 그, 시대착오적인 옷과 검은 눈동자가 뻥 뚫린,
두 남녀가 다가왔고 나는 별 무방비로
그들이 말하는 성격과 운명과 진리에 대해 잠시 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진부한 레파토리의 말꼬리가 내 귀를 타고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 이 모든 것들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순간 짜증과 귀찮음이 단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스스로 모를 기쁨으로
푸르게 흘러나왔다.
'네,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순간 당황하였고 되묻길
-궁금하지 않다고요? 정말로요?
그리고 비척대며 떠났다.
그래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
단지 그 모든 헛된 공포에 찬 눈길과 목소리 보다
한 발 앞질러 걸어갈 수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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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 사람을 몰라보고
얼마 전 촬영을 나갔을 때 일이다.
수원에 있는 한 공원에서 배경장면을 혼자서 조금 찍어놓고 있었다.
무척 더운 날이었음에도, 사람들은 그리도 열심히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며 내 옆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혼자서 큰 카메라를 들고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튀었는지
말�� 걸어오는 분들도 ("저기 저 수풀에 거북이가 있어요!") 있었는데,
어떤 중년남성 한 분은 태극기를 꽂은 자전거를 타고 내게 다가오셔선
뭐를 찍는지, 졸업은 했는지, 졸업은 하고 뭐를 하는지 적극적으로 물어왔다.
알고보니 자신이 장애인 관련 방송 사업을 하는데 카메라맨이 필요하다는 것.
인사를 나눈지 1분이나 지났을까. 핸드폰 번호를 달라고, 취업을 시켜주신단다.
나는 곤란한 티를 숨기고는 연락처를 적어주시면 먼저 연락을 드리겠다고
수첩을 내밀었더니 자세히 홈페이지며 핸드폰 번호며 적어서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또 다시 내 번호를 집요하게 물어왔다.
별수없이 돌리지 않고 아무에게 전화번호를 드리진 않는다고
(물론 농담을 섞어서) 했더니 갑자기 돌변하여 노발대발하며 외치시길,
"예끼! 젊은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못알아봐서 어떻게 성공하겠어요?"
며칠이 지나 수첩을 펼치며 내 인생 두 번째 길거리 캐스팅(?)과
(너는 성공 못할거라는) 그 급작스러운 호통을 떠올렸고,
나는 무감하게 그 연락처가 적힌 종이를 뜯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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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치기
3. 보편이라는 이름의 권력에 맞서는 약소자들의 연대 양식
... '그것'(쾌락)을 위해 대체 누가 무슨 비용을 어떻게 치르고 있는가, 라는 게 이데올로기 비판의 핵심이다.
... 지옥이나 연옥과 같은 협박의 장치를 갖춘 종교적 세계관 역시 '유토피아-증상'의 변증법을 독특하고 뻔뻔스레 증명한다. 요컨대, 천국이 그 체계의 풍경이자 선전용 첨탑이라면, 지옥은 그 기원이며, 또 그 증상을 배설하는 유리 지하실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그 종교의 진실은 천국을 향한 집단적 열망의 벡터 속에 있는게 아��다.
... 열정의 세기(强度)가 증명하는 것은 그 열정의 지향성이나 성격이 아니라 오직 그 세기일 뿐이다. ... 언죽번죽 제 욕심껏 들먹이는 보복(지옥)의 담론 가까이에 그 진실이 숨어있을 것이다.
... 중세 기독교 보편주의의 체계 속에서 에로티즘은 지옥[화(畫)] 속으로 추방되었는데, 이것 역시 보편성을 강변하는 체계 속의 인간적 진리가 어떻게 은폐되고 거세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 억압적 단일 보편성의 경험으로부터 아프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보편성의 문제가 인식의 잣대와 진리의 기치를 내세우곤 하지만, 그 내용은 억압과 상처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당대적 약소자의 정치는 보편적 일치에서부터 상처를 연역하는 하향식이 아니라, 억압과 상처의 문제에 세심하고 결기 있게 응대하는 실천적 지혜에 바탕해야 한다.
... 그들은 애초 '보편'이라는 이름의 '권력'을 욕망했던 것이며, 그 보편은 바로 그 권력의지를 매개로 그 스스로의 실존적 개체와 사통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해맑은 미소가, 이성의 매력이, 개체의 스타일이, 그리고 약자의 고통과 소심이 체계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아니다. 그것은 문제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동무론 (김영민, 한겨레출판)
* 위 그림('최후의 심판'의 일부)은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아녜스 바르다) 에서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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