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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
재는 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 있지
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
그냥 둬보자는 것이다
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
토란은 넓은 그늘 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
참외는 장대비를 콱 물어삼켜 아랫배가 곪고
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 스윽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
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
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
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
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 귀는 밝고 눈은 맑다
그러니 그냥 더 둬보자는 것이다
- ‘여름밭’,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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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여승 설요는 꽃 피어 봄마음 이리 설레 환속했다는데
나도 봄날에는 작은 절 풍경에 갇혀 우는 눈먼 물고기이고 싶더라
쩌렁쩌렁 해빙하는 저수지처럼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어도
봄밤에는 숨죽이듯 갇혀 울고 싶더라
먼발치서 한 사람을 공양하는 무정한 불목하니로 살아도
봄날에는 사랑이 살짝 들키기도 해서
절마당에 핀 동백처럼 붉은 뺨이고 싶더라
- ‘붉은 동백’,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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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맨발’,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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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어진 우리들이 박수를 치며
계단을 내려옵니다.
기타에서 쏟아지는 마른 머리칼을
안고 우는 한 노인을
보았습니다.
노인의 백발이 팽팽히 긴장하던 것도
그 노인의 한 방울 눈물이
한 방울 불빛을 몰래
삼키는 것도 보았습니다.
검은 탱크들이 지나간 구름 사이로
빈 드럼통이 떨어집니다.
구름 속을 달리는 기차 밖으로
기차를 탄 사람들이 쏟아집니다.
우리의 두 손바닥에선
손금이 일어서고
우리의 두 발자국 밑으론
계단이 흩어집니다.
감동한 우리들이
광장을 뒹굴며
힘찬 박수를 보낼 때
메마른 악보 한 장
넓게넓게 떠난 자리에
한 노인만 덩그러니
통곡합니다.
- ‘소.나.기.’, 김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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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온 몸 가득 뿌리를 내리는군
뿌리 끝으로 반딧불이 날아 왔어
땅이 조금씩 갈라지는군
뿌리 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어
반딧불이 땅 갈라진 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반듯하게 쓰러졌어
당신은 샌드 페이퍼로 내 얼굴을 문지르는군
이봐 내 머리털 속에 반딧불이 환하지 않아?
숲 속이 환하지 않아?
나는 대낮부터 뿌리가 뽑혔어
우리 집이 조금씩 갈라지면서
별들이 떨어지는 것이 보이는군
이제 발길질일랑 멈추지 그래
- ‘낮술’, 김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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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놓친 저녁이
저녁 위로 포개지고 있었다.
그대를 빼앗긴 시간이
시간 위로 엎어지고 있었다.
그대를 잃어 버린 노을이
노을 위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대를 놓친 내가
나를 놓고 있었다.
오른손에 칼을 쥐고
부욱-
자기 가슴팍을 긋듯이
서쪽 하늘
가늘고 긴 푸른 별똥별 하나.
- ‘별똥별’, 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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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하는 일은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에게 지고
내가 나인 것이
시끄러워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네가 아닌 것이
견딜 수 없이 시끄러울 때
그리하여 탈진해서
온종일 누워 있을 때 보라.
여기가 삶의 끝인 것 같을 때
내가 나를 떠난 것 같을 때
손을 보라
왼손은 늘 오른손을 찾고
두 손은 다른 손을 찾고 있었다.
손은 늘 따로 혼자 있었다.
빈손이 가장 무거웠다.
겨우 몸을 일으켜
생수 한 모금 마시며 알았다.
모든 진정한 고마움에는
독약 같은 미량의 미안함이 묻어 있다.
고맙다는 말은 따로 혼자 있지 못한다.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엊저녁 너는 고마움이었고
오늘 아침 나는 미안함이다.
손이 하는 일은
결국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찾아
가슴 앞에서 가지런해지는 까닭은
빈손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미안함이 그토록 무겁기 때문이다.
- ‘손은 손을 찾는다’, 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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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광고에서 보았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옵니다.
그 이유는,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얼마나 높고
넓고 깊고 맑고 멀고 푸르른가.
땅 위에서
삶의 안팎에서
나의 기도가 얼마나 짧은가.
어림도 없다.
난 아직 멀었다.
- ‘아직 멀었다’, 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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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 목련이 하얀 봉��리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목련꽃 어린 것이 봄이 짜놓은 치약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이런, 늦잠을 잔 것이었습니다, 양치질할 새도 없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모든 뿌리들은 있는 힘껏 지구를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태양 아래 숨어 있는 꽃은 없었습니다, 꽃들은 저마다 활짝 자기를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분명한 호객행위였습니다.
만화방창, 꽃들이 볼륨을 끝까지 올려놓은 봄날 아침, 나는 생명에 가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서, 도심으로 빨려들어가야 했습니다, 자유로로 접어들자 차가 더 막혔습니다, 흐르는 강물보다 느렸습니다.
느린 것은 느려야 한다, 느려져야 한다고 다짐하는 내 마음뿐, 느림, 도무지 느림이 없었습니다, 자유로운 자유*가 없는 것처럼, 정말 느린 느림은 없었습니다.
나는, 나를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 윤호병, 『아이콘의언어』, 문예출판사, 2001
- ‘정말 느린 느림’, 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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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 귀밑머리가 젖어 있다.
밤새 봄비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연한 초록
잠깐 당신을 생각했다.
떨어지는 꽃잎과
새로 나오는 이파리가
비교적 잘 헤어지고 있다.
접이우산 접고
정오를 건너가는데
봄비 그친 세상 속으로
라일락 향기가 한 칸 더 밝아진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으려다 말았다.
미간이 순해진다.
멀리 있던 것들이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
저녁까지 혼자 걸어도
유월의 맨 앞까지 혼자 걸어도
오른켠이 허전하지 않을 것 같다.
당신의 오른켠도 연일 안녕하실 것이다.
- ‘봄 편지’, 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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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알았다.
가장 높은 곳에 빛이 있고
가장 낮은 곳에 소금이 있었다.
사랑을 놓치고
혼자 눈뜬 오늘 아침에 알았다.
빛의 반대말은 그늘이 아니고
어둠이 아니고 소금이었다.
언제나 소금이었다.
정오가 오기 전에 알았다.
소금은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
소금은 빛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가장 무거운 앙금이다.
소금은 오직 해를 바라보면서
소금기 다 뺀 물의 잔등을 떠미는 것이다.
가장 높은 곳을 올려다보며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보내는 것이다.
소금은 있는 힘껏 빛을 끌어안았다가
있는 힘을 다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단 하나의 마음으로 남는 것이다.
내가 놓친 그대여
저 높은 곳에서 언제나 빛인 그대여.
- ‘혼자만의 아침 - 빛과 소금 1’, 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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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오래된 기도’, 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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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고 싶다
창밖에
까치 우짖는다
흐르고 싶다
먼곳에
강물 흐른다
우울의 밑바닥에서
파괴된 산
오염된 공기
흩어진
삶
이 한복판에서
새싹 돋는다
놀랍다
잊혀진
옛 사람노래 한 구절
멀리서 들린다
놀랍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 것인가.
- ‘나는 지금’, 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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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기억한다
당신의 눈을
기억한다
전봇대 위에 까치 울고
문득 앞에 와 서던
키 큰 당신
밤바다 같고
별하늘 같고
푸른빛 나는
어둔 인광 같고
도무지 모를 당신 앞에
나 왜 그리도
풋풋했던지
자랑스러웠던지
기억한다
그때
나 몹시도 외롭고 시장했던 것
밥 한 그릇
당신.
- ‘손님’, 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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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가고
나만 남으리
솔잎 누렇게 변해
새들 떠나고
길짐승도 물고기도
벌레 모두 떠나고
주위의 친구들
하나둘씩 병으로 죽어 없어지고
나만 남으리
지구 위에 홀로
지구마저 흙도 돌도
물도 공기도 마저 다 죽어
나라 이름 붙인
허깨비만 남으리
끝내는
오도 가도 못할 천벌처럼
나만 오똑 남으리.
- ‘다 가고’, 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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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는 눈을 뭉치고
봄에는 흙을 움켜쥐고
여름에는 사탕을 집고
가을에는 갈대꽃을 안고
이듬해 겨울에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있었다
무엇을 해도 되는 나이
그러나
아무것이나 하면 안 되는 나이
덮기에는 늦어서
겁을 집어삼켰다
- ‘움큼’, 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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