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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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9 여지는 삶에 있어 숨구멍 같은 것이었다. 26 경애는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는 죄책감과 그건 절대 자신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자기방어 속에서 갈팡질팡하면서도 도망가고 싶지 않다고 다짐했다. 사람이 그러면 안된다는 것, 한번 도망가버리면 다시 웅크리고 앉아 계절들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했다.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마음의 문을 닫았을 때, 차라리 마음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기를 선택했을 때 얼마나 망가지고 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27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30 경애는 노트를 간직하다가, 공공연한 따돌림과 적대 속에 근근이 버티던 겨울, 소각장에 던져넣었다. 아무래도 마음을 잃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날들이라고 생각했다. 35 어떤 사랑은 같은 기차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시작되었다. 혹은 어린 시절 운동회날 달리기에서 둘 다 꼴등으로 들어왔다는 이유로, 첫눈을 함께 봤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학대받은 기억이 똑같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는 이유로, 같은 밴드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상대의 낡은 점퍼나 코트를 유심히 보게 됐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추워 보였다는 혹은 더워 보였다는 이유로, 식당에서 땀 흘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먹었다는 이유로, 돌아서서 지하철역까지 느릿느릿 걸었다는 이유로. 43 상수는 거절했다. 그때 상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무언가를 '하지 않아야' 겨우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62 미유 말대로 대부분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이 남자들은 어디서 뭘 하며 괜찮게 있다가 자기 앞에 나타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61 사라진 누군가는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의 인생에서 다시 한번 살게 된다는 것. 162 나는 아마 E와 처음 자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아마 꽤 괜찮은 파트너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랬어? 무슨 근거로? 그렇지 않아? 나와 하는 게 별로야? 아니지, 전혀 아니야. 사실 나는 그런 얘기를 하기도 했어, E에게. 자자고? 자게 될 거라고. 그러면 아주 따뜻하겠네,라고 했어, 얼마나 따뜻할까, 하고. 한동안 따뜻하다는 말을 쓸 수가 없었어, 기억이 나서, 어떤 말은 그렇게 기억에 빼앗기는 것 같았어, 쓸 수 없었어, 그런데 그런 말이 아니라 그렇게 일상적으로 써야 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어. 168 어머니가 그렇게 쉬워질 수도 있다고 말할 때 상수는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동하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마치 계절이나 낮과 밤처럼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강제로 위치가 바뀌게 되는 것 같았다. 그건 엄마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다르게 마음이 아주 차가워지는 것이었다. 자기가 어머니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며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쳐낸 것처럼 한발 물러나 조용히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순간을 '각오'하는 것이었다. 내쳐짐을 각오하는 마음. 224 하지만 이런 말들을 늘어놓다가도 정작 산주에게는 전할 수 없으니까 불행을 털실처럼 잘 말아서 이 빈공간에 덩그러니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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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정원영
소리 소리가 나 그대 떠난 자리 돌아온 사람들 창가에 쌓이던 아침 녹슨 마음 하나 눈밭에 타올라 날 부르길 돌아서길 자꾸 미안해하길 겨울에 우린 사랑을 두려워한 건가요 사랑을 시작하긴 하나요 부딪혀 보지 못한 인연은 이리 아픈지 그댄 어떤지 그대 소리가 나 우리 머문 자리 날 부르기 돌아서기 자꾸 미안해하기 그 겨울엔 우린 사랑을 두려워한 건가요 사랑을 시작하긴 했나요 부딪혀 보지 못한 인연에 이리 아픈지 그댄 어떤지 그대 소리가 나 우리 머문 자리 날 부르기 돌아서기 자꾸 미안해하기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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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우는 것 같다
61 하루하루 지붕 없는 집에서 사는 기분이었고 어떤 아침엔 차가운 물속에 잠겨 있다 빠져나온 것처럼 서러웠다. 73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99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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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남자가 숨어있다
69
어쨌든 타인이라는 지옥은 필요하다.
148
그러나 모든 것은 육식의 한 형태일 뿐인데 말이다. 애정을 표현하는 말 중에 너를 먹고 싶다, 라는 표현이 있다. 그것이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라 직설법이라면 성욕과 식욕, 그리고 소유욕의 상관관계는 우리가 도덕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약속보다 더욱 심오한 이면을 갖고 있는 것 같다.
167
산업화가 진보할수록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외로워지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울타리를 관습과 제도가 지켜주었으나 이제는 아니다. 그러므로 가족이 있는 사람도 안전할 수 없다. 개인의 문제이니 개인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연인의 존재는 그렇게 해서 빛이 난다. 무조건, 전부가 다, 가난하든 부자든, 외롭기 때문이다. 왜 외로운가, 혼자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를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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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문장들
9
내가 사랑한 시절들, 내가 사랑한 사람들, 내 안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들, 지금 내게서 빠져 있는 것들••••••. 이 책에 나는 그 일들을 적어놓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일들을 다 말하지는 못하겠다.내가 차마 말하지 못한 일들은 당신이 짐작하기를. 나 역시 짐작했으니까. 이제는 경정산만이 남은 이백에게 마주 보아도 서로가 싫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리워라는 말에는 지금 내게 당신이 빠져 있다는 뜻이 담겼다는 걸 짐작했으니까. 당신도, 나도,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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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26 이 공부를 끝까지 잘 해내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바람이야. 머리끝부터 꼬리끝까지 신바람이 뻗쳐 있어야 한다는 것이야. 신바람! 이것이 개의 기본정신이지. 산바람이 살아 있으면 공부는 다 저절로 되는 것이고, 억지로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야. 114 싸움은 슬프고 외롭지만, 이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다. 자라서 다 큰 개가 되면 그걸 알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은 끝내 피할 수 없다. 149 언덕 아래로 펼쳐진 넓은 들의 가장자리에, 집들은 산을 기대서 모여 있었다. 논둑길이 구불구불한 옛날 동네였다. 논 한가운데 작은 정자가 서 있었고 큰 느티나무가 정자 위를 가려주었다. 낮은 안개가 띠처럼 들판을 흘렀고 아직도 장작을 때는지, 굴뚝에서 솟아오는 푸른 연기가 안개의 띠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신바람 나는 일은 별로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흰순이가 살기에 알맞은, 조용한 마을이었다. 싸울 일도 짖을 일도 없어 보였다. 153 빗줄기가 밤새 개집 양철 지붕을 두들겼고 나는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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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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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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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쳐 먹다
강원도 산간에 비탈밭 많지요 비탈에 몸 붙인 어미 아비 많지요 땅에 바싹 몸 붙여야 먹고 살수 있는 목숨이라는 듯 겨우 먹고 살만한 '겨우' 속에 사람의 하늘이랄지 뜨먹하게 오는 무슨 꼭두서니빛 광야같은 거랑도 정분날 일 있다는 듯 그럭저럭 조그만 땅 부쳐먹고 산다는 …… 부쳐 먹는 다는 말 좋아진 저녁에 번철에 기름 둘러 부침개 바싹 부치고 술상 붙여 그대를 부를래요 무릎 붙이고 발가락 붙이고 황토빛 진동하는 살내음에 심장을 바싹 붙여 내 살을 발라 그대를 공양하듯 바싹 몸 붙여 그대를 부쳐 먹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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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10 얼음편지 어떤 문장들은 사라지기 위해 태어납니다 얼어버린 소리 속에 과거를 담그고 환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의 미옥한 음절들은 수줍게 비약 속으로 숨어듭니다 광물의 조흔색을 흉내내며 당신 살에 얼굴을 부비면, 나에게서 조난당한 탄흔들이 당신에게로 쏟아져내릴까요 이 문장을 더듬어볼 당신 눈동자를 떠올리면 심장의 뒤편이 수지류 수목들로 울창해집니다 흔적, 오직 흔적을 남기고 떠나기 위해 먼 나라의 기후들은 닫힌 당신의 창가에서 밤새 정처 없습니다 살얼음 낀 눈으로, 겨울은 창 너머 순하게 낡아가는 구름들을 채록하는 중입니다 발자국들이 자신이 가진 지평선을 가만히 들었다가 흩트리는 지금, 냉해 입은 식물의 어두운 뿌리가 되어 문장들 속으로 저물어가고 싶습니다 파충의 보호색처럼 온몸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일을 우리는 평생에 걸쳐 연습해야 할 테니까요 다만 잊혀지지 않기 위해, 오래도록 흐르고 또 얼어야 합니다 그러니 아직 문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빛의 단도가 흐리고 모호했던 당신의 꿈속을 난도질할 때, 이 문장들을 녹이고 부수어 그 붉은 담즙으로 사라지려는 당신의 눈을 씻어야겠습니다 나에게서 당신에게로 떠나가는 기억들을 위해, 또 어떤 문장들은 16 보라의 바깥 눈 마주쳤을 때 너는 거기 없었다 물렁한 어둠을 헤집어 사라진 얼굴을 찾는 동안,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시선의 알갱이들이 쏟아진다 산산이 뿌려진 눈빛들이 나를 통과하여 사라져갔다 나는 도망친다 빛으로부터. 눈을 감는 순간 빛은 갇히고 눈동자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그건 서로에게로 건너가려는 시간들, 오늘 죽인 나비를 태어나기 전부터 기다리는 일 새로운 명명법을 익힐 때마다 공기의 농도가 진해져갔다 점점 맑아지며 밖을 향해 솟아오르는 행성의 온도 유리로 만든 베일을 쓰고 대기권을 바라본다 나는 이곳에 색(色)을 짊어지러 온 사람, 얼음조각 속에 우연히 들어간 공기방울처럼 스스로 찬란할 수 있을까 관여할 수 없고, 무엇과도 연관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을 만져보는 순간, 세계는 투명하고 위태롭게 빛난다 이제야 나는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눈을 감고 몸 안을 떠다니는 흐린 점들을 바라본다 발밑으로 빛의 주검들이 흘러내렸다 24 제3통증 없는 네가 가장 아름답다 일생에 단 한번 붉은빛 새순을 틔우고 비틀비틀 떠나는 자여, 어디에서 비척이며 연명하던 행려병자이기에 부끄러움 모르고 알몸으로 섰는가 가시 박힌 수레바퀴를 굴리며 네가 다가온다 오늘 세계는 물그릇처럼 아프다 밤의 태양은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려워 울고 있다 홀로의 좌표들을 풀어놓고 너의 입술을 만지는 일은 세로로 여닫힌 괄호를 더듬는 일 같았다 네 생에 조금 관여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얼음을 꽉 쥐면 슬픔에서 뜨뜻미지근한 물이 흘러나온다 너는 천천히 젖어간다 왜 돌아가는가, 물어볼 적마다 꿈의 언저리에서 자꾸만 두 발이 굳어갔다 수은이 흐르는 강을 건너며, 오늘은 등(燈)을 켜들지 말자 벼랑 근처에서 머뭇거리는 너의 눈가에 별들이 가득 고였으니 한 밤을 버리고 굳어버린 매듭을 얻어 불행의 화관을 쓰게 될지라도 휘발하는 것만이 우리의 경전이다 네가 선물해준 거울은 아름다웠으나 아무리 닦아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38 춤의 독방 나는 이제 막 절망하기를 마친 사람. 무엇의 중심도 되지 않으려 너의 손을 잡고 경쾌하게 돌고 돈다 흐린 장막이 펼쳐진다. 두렵지 않니? 서로 다른 몸이 하나의 시간에게 벌이는 일이. 두근대지 않니? 저 수많은 점들이 편재(編在)하며 사람에게 문양을 허락하는 일이. 그것들 별자리를 이룰 줄 알았는데. 잘못 그어준 선들이 서로를 깊이 추워한다. 나는 무엇이라도 붙잡고 흐르는 자, 문장이 아닌 척 노래 속으로 스며들면 너의 불신은 얼마든지 나의 양식이 된다. 이 음악이 끝나더라도 홀로 있는 한 너와 나는 완벽해진 한 쌍. 아름다운 그림자를 가지기 위해 서로를 배제하는 법을 익혔지. 그것을 너는 소용되지 않는 말들로 이루어진 행성이라 했지만, 나는 그 어둠을 손에 담근 채 떠나가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우리는 흩어지고 싶었던 것 같은데. 장막이 걷힌 후에는 끔찍하게 선명한 얼굴, 얼굴들, 76 귓속말 깨진 도기(陶器)를 나누어 들고 우리는 서성인다 동행은 기이한 감각이어서 빛나는 혀를 길게 내어 물고 서로에게로 팽창한다 입과 귀가 밀착될수록 목소리가 끝없이 부풀어오르고 절단면이 더욱 날카로워지는, 이곳은 빛도 어둠도 관여하지 못 할 분리의 세계 나눠 가진 두 귀의 절단면이 죽은 자의 턱뼈처럼 갈 곳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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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에서 / 가나다라마바사
'일어'가 아니고 '잃어'. '어떡���'가 아니라 '어떻게'. '한명의 인간으로써'가 아니라 '한명의 인간으로서'.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고 하지. 그러나 아무나 사랑하기도 해. 우리는 곳? 곶? 곧. 책상 위에서. 식탁 밑에서. 트렁크 안에서. 문 밖에서. 어디서든. 언제든.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사랑 없이 사랑을 하고. 무언가를 잃어버렸지. 무언가를 잊어버렸고. 당신 아닌 당신을 만나 열렬이가 아니라 열렬히. 더이상 울지도 웃지도 않는 아침이 시작되려 해. 게들. 게들. 게들이 아니라 개들. 개들. 개들이 있는 이곳에서. 납작해지려고 해. 더 작은 구멍을 찾으려고 해. 멀리 있는 것들은 아름답지. 나는 이 두근거림에 대해 아무런 서약을 하지 않기로 한다. 부서지는 것은 모두 미래지. 컵들의 이가 부러지는 동안. 먼지들이 모서리로 모여드는 동안. 우리는 께? 꾀? 꽤. 무거워진 눈꺼풀을 덮고. 각자의 담요를 향해 팔을 뻗는다. '고동'이 아니라 '고둥'. '만두를 만듬'이 아니라 '만두를 만듦'.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긍정하려 해. 눈과 구름의 반복인 이 계절을 부정하려 해. 로맹가리가 아닌 에밀아자르의 이름으로 열두개의 단어를 외우고. 열두개의 단어를 잊어버리고. '자기 앞의 생'을 완성하려 한다. 가재가 가재인 것에 대해. 얼룩이 얼룩인 것에 대해. 재채기가 피어오를 때까지 후추! 불꽃을 번쩍일 때까지 부싯돌! 밤이 오면 우리는 후라쉬 후레시 프라쉬 플래시 무엇으로 밝혀야 할까? '텔레비젼'이 아니라 '텔레비전'. '비로서'가 아니라 '비로소'. '그렇게 됄 것입니다'가 아니라 '그렇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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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를 누리는 일
혼자 잠을 자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나를 친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외롭지 않느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나는 친구의 질문을 곱씹는다. 외로운지 그렇지 않은지. 그러곤 대답한다. 외롭다고. 외롭지만 참 좋다고. 친구는 그게 말이 되냐는 눈빛이다. 괴짜를 바라보듯 씨익 웃으며 나를 본다. 그리고 연애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사랑이 얼마나 활기를 주는지를 설파하며 못내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바로 그때. 나는 즐거운 토론을 시작할 마음으로 자세를 고쳐 앉는다. 어쩌면 친구에게 외롭지 않다는 대답을 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의 도식에 의해서라면, 나의 면면은 외롭지 않은 쪽에 가까운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확한 대답을 하고 싶어서 나는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에 긍정을 할 수밖에는 없다. 외롭다. 하지만 그게 좋다. 이 사실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건, 외로운 상태는 좋지 않은 상태라고 흔히들 믿어온 탓이다. 가난하다는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라고 흔히들 믿고 있듯이. 하지만 나는 외롭고 가난하지만 그게 참 좋다. 홀홀함이 좋고, 단촐함이 좋고, 홀홀함과 단촐함이 빚어내는 씩씩함이 좋고 표표함이 좋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외로우려 하고 되도록 가난하려 한다. 그게 좋아서 그렇게 한다. 내게 외롭지 않은 상태는 오히려 번잡하다. 약속들로 점철된 나날들. 말을 뱉고 난 헛헛함을 감당해야 하는 나날들. 조율하고 양보하고 희생도 감내하는 나날들의 꽉참이 나에겐 가난함과 더 가깝기만 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알람을 굳이 맞춰놓지 않고 실컷 자고 일어나는 아침, 조금더 이불 속에서 뭉그적대며 꿈을 우물우물 음미하는 아침, 서서히 잠에서 벗어나는 육체를 감지하며 느릿느릿 침대를 벗어나는 아침이다. 찬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사과 한 알을 깎아 아삭아삭 씹어 과즙을 입안 가득 머금고, 찻물을 데우고 커피콩을 갈아 까만 커피를 내려서 책상에 앉는 그런 아침이 좋다. 오늘은 무얼 할까. 영화를 보러 나갈까. 책을 읽다가 요리를 해볼까. 내가 나와 상의를 하는 일. 뭐가 보고 싶은지, 뭐가 먹고 싶은지를 궁금해 하는 일. 그러면서, 나는 소소한 마음과 소소한 육체의 욕망을 독대하고 돌본다. 외롭다. 그러나 오랜 세월 매만진 돌멩이처럼, 그런 외로움은 윤기가 돈다. 외로움이 윤기나는 상태라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외로울 때면 쉽게 손을 뻗어 아무나에 가까운 사람을 애인으로 만들었던 시절도 있었고, 외롭다는 사실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워 전화로든 채팅으로든 늘 누군가와 연결되어 아무 말이든 나누어야 잠이 들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고, 혼자서 식당에 찾아가 밥을 먹는 일이 도무지 어색해서 차라리 끼니를 굶는 시절도 있었다. 연락처 목록을 뒤져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지만 겨우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나날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히는 게 두려워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확인을 해야 안도가 되는 나날도 분명 있었다. 누군가와 연결이 되어야만 겨우 안심이 되는 그 시절들에 나는, 사람을 소비했고 사랑을 속였고 나를 마모시켰다. 사랑을 할수록, 누더기를 걸친 채로 구걸을 하는 거지의 몰골이 되어갔다. 사랑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기보다는, 나의 허접하고 경박한 외로움이 사랑을 그렇게 만들었다. 서로를 필요로 하며 부르고 달려오고 사랑을 속삭였던 시간들은 무언가를 잔뜩 잃고 놓치고 박탈당한 기분을 남기고 종결됐다. 그래서 지나간 사랑을 들춰보면 서럽거나 화가 났고, 서럽거나 화가 난다는 사실에 대해 수치스러워졌다. 어째서 사랑했던 시간의 뒷끝이 수치심이어야 하는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지금 나는 사랑의 숭고함보다 혼자의 숭고함을 바라보고 지낸다. 혼자를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 가끔 거짓말조차 꾸며댄다. 선약이 있다며 핑계를 대고 약속을 잡지 않는다. 아니,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나와 놀아주기로, 나에게 신중하게 오래 생각할 하루를 주기로 약속을 했으므로 선약이 있다는 말은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와 놀아주기로 한 날이라서 시간이 없어요’라는 말은 안타깝게도 타인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허용받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하다하다 지치면 두어 달을 잡고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에 가족이나 친구가 함께 하는 것을 두고 나는 가끔 농담처럼 ‘회식자리에 도시락을 싸들고 가는 경우’와 같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관광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인간관계로부터 언플러그드하러 떠나는 것이므로. 오롯하게 혼자가 되어서, 깊은 외로움의 가장 텅빈 상태에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여야 하므로. 감정 없이 텅빈, 대화 없이 텅빈. 백지처럼 텅빈, 악기처럼 텅빈. 그래야 내가 좋은 그림이 배어나오는 종이처럼, 좋은 소리가 배어나오는 악기처럼 될 수 있으므로. 외롭다는 인식 뒤에 곧이어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뒤따르는 일을 나는 경계한다. 잠깐의 어색함과 헛헛함을 통과한 이후에 찾아올 더없는 평화와 더없는 씩씩함을 만나볼 수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어딘가에서 감염된 각본 같아서이다. 슬프다는 인식 뒤에 곧이어 슬픔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뒤따르는 일 또한 나는 경계한다. 역시 어딘가에서 감염된 각본 같기만 하다. 외로움에 깃든 낮은 온도와 슬픔에 깃든 약간의 습기는 그저, 생물로서의 한 사람이 살아가는 최소조건이라는 걸 잊지 않고 싶다. 요즘은 외로울 시간이 없다. 바쁘다. 탁상달력엔 하루에 두 가지 이상씩의 해야 할 일이 적혀 있다. 어쩌다가 달력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지 않는 날짜를 만나면, 그 날짜가 무언가로 채워지게 될까봐 조금쯤 조바심도 난다. 바쁠수록 나는 얼얼해진다. 얼음 위에 한참동안 손을 대고 있었던 사람처럼 무감각해진다. 무엇을 만져도 무엇을 만나도 살갑게 감각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요즘 좀 질 나쁜 상태가 되어 있다. 쉽게 지치고 쉽게 피로하다. 느긋함을 잃고 허겁지겁거린다. 신중함을 잃고 자주 경솔해진다. 그런 내게 불만이 부풀어오르는 중이다. 그래서 매일매일 기다린다. 오롯이 외로워질 수 있는 시간을. 오롯이 외로워져서 감각들이 살아나고 눈앞의 것들이 투명하게 보이고 지나가는 바람의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나의 시간을. 외로워질 때에야 이웃집의 바이올린 연습 소리와 그애를 꾸짖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모르는 사람들의 생활에 빙그레 웃기 시작한다. 외로워질 때에야 내가 누군가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떤 연결은 불길하고 어떤 연결은 미더운지에 대해 신중해지기 시작한다. 안 보이는 연결에서 든든함을 발견하고 어깨를 펴기 시작한다. 골목에 버려진 가구들, 골목을 횡단하는 길고양이들, 망가진 가로등,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들에 담긴 알 듯 말 듯한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어쩌면 좋은 사랑을 하기 위해서 이런 시간을 필요로 하는 걸 수도 있다. 사랑으로 가기 위한 하나의 의식을 오래토록 행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경박한 외로움이 사랑을 망치게 하지 않으려고, 사랑을 망쳐서 사람을 망가뜨리고 나또한 망가지는 일을 더이상 하지 않으려고, 무공을 연마하는 무예가처럼 무언가를 연마하는 중일 수도 있다. 집착하고 깨작대고 아둔하고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든든하고 온전하고 예민하고 독립적인 사랑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게 되는 게 지금은 나의 유일한 장래희망이다.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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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수목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에 앉아있어 긴 오후가 지나가도록 지금 나뭇잎 한 장이 세상의 전부인 왕개미 옆에서 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헤프게 구걸도 해보았다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 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 알록달록 실패들을 엮어 만든 바구니를 들고 저기서 당신이 걸어온다 마른 생선 하나를 내어주고는 가던 길을 간다 비릿한 기억이 손 안에서 파닥거린다 목이 없는 생선이 마지막에 삼킨 말들이 마른 비늘로 바스러진다 낡은 허물 위로 매미소리가 내려온다 울어본 기억만 있고 소리를 읽은 말들이 그림자 속에서 가지를 뻗는다 노국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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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16 왜 당신이 가져갔습니까 상자 속에는 도넛에 여섯개 무르익은 여섯개의 구멍이 있습니다 따뜻한 손가락으로 당신의 꿈을 휘젓고 싶습니다 지난여름에는 살구가 익었고 투박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어요 사람들이 서서 저마다 살구를 기다렸는데 굼뜬 할머니들이 눈썹을 치켜떴습니다 그래요 상자 속에 여섯개의 도넛이 있고 얇게 저민 살구를 얹어서 크게 입을 벌릴게요 살구나무 아래 묻어두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여름은 쉽게 지나갔고 눈먼 고래의 꿈속에서 도시들이 휘뚝휘뚝 무너졌습니다 빈 의자가 뜻없이 돌아갑니다 나의 꿈속으로 당신의 회색 발이 건너옵니다 내가 더 많이 꿈꾸고 사랑하고 춤을 추고...... 차가운 바늘이 나의 향긋한 꿈을 꿰맵니다 한파와 폭설로 기울어진 지붕 위에 당신이 앉았습니다 당신의 주름진 입술이 새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왜 당신이 가져갔습니까 신 살구를 깨물어 먹으면서도 그게 당신의 무너진 꿈인 줄 몰랐습니다 32 세번째여서 아름다운 것 내가 네 미래의 책을 사랑할게 아직 떠오르지 않은 무지개를 거기서 뛰놀고 있는 너의 흰 발을 너는 숨 쉬지 않는다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열심히 사랑하고 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미래의 씨앗들을 뱉고 있다 달콤할까 커다랄까 약속했어 정말이지 이제 너의 손가락이 만들어질 차례 끝까지 네가 씌어질 차례 단단해진다 봉긋해진다 우리가 함께 태어난다 한몸으로 아름답지 않지만 동시에 늙어가지만 36 그림자 개의 이빨보다 질겨서 물어뜯는 것보다 핥는 것이 낫겠다 오늘 더위 속에서는 그림자도 녹는다 대지 위에 달콤하게 스며든다 질투와 원망의 힘으로 빛난다 그림자의 안부를 물을 수 없고 그림자와는 식사 약속을 할 수 없다 이런 것이군 신발끈을 고쳐 맨다 끝까지 달려 턱을 빼놓는다 시계 나사를 조이고 권총을 당긴다 손가락으로 요약할 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기울어진 어깨는 그림자의 것인데 그림자는 담배를 피울 줄 모르고 자정부터 새벽까지 웃는다 오늘 더위는 맵다 한 사람이 자기 팔을 뜯어냈다 냉동실 가득 그림자를 채우고 61 도서관에 갔어요 . 사탕을 천천히 오래 녹여 먹으면 죽을 때 그렇게 된다고 했습니다 . 107 모과 . 발밑에 모과가 구른다 . 이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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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있고 없고 혼자 보내서 어떡하나 했다 가는 것은 가는 것이나 가고 마는 것은 또 어쩌나 했다 안경을 걸치거나 눌러 쓴 글씨는 자국이라도 남기겠지만 그러겠지만 지나는 것은 지나는 것이리 보이지 않는 것은 애써 덮은 것이리 있고 없고를 떠난 세상으로 또 오지 않을까 했다 찬란을 만들지 않을까 했다 슴슴한 눈발이라도 서랍 속으로 뜨겁게 서랍 속으로 내리지 않을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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