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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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iedust171204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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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tales Korean Vers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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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lira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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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amp | Mid-Air Thief ( 공중도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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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jjna · 8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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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같은 한국인 팀포2 팬이에요 몇달전에 너무 금손이셔서 보다가 한국인이신거 알고 깜짝 놀랐어요ㅋㅋㅋㅋ 여기는 왜 죄다 금손이신지ㅠ 외국인이 많은 텀블러에서 한국인이 얼마나 반갑던지요ㅠㅠ 질문 넣을 생각은 못했네요 우리 즐거운 덕질해요!
악 아니 이거 왜 지금봤지 죄송합니다 제가 알림창을 자세히 안보는 타입이라 큐ㅠㅠㅠ 반갑습니다 동포여!!!!!! 영 원 히 즐 덕 질 해 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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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15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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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수천 년 동안 고민해온 질문에서 시작하자. 최적의 도덕철학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그 접근법에 따라 크게 세 범주로 나뉜다. 자, 저기에 돈이 놓여 있다고 하자. 당신 것이 아니지만, 주변에 보는 사람이 없다. 당신이 왜 그 돈을 가지면 안 되는가?
덕윤리학virtue ethics은 행위자를 강조하는 입장으로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런 짓을 하고 나면 당신이 스스로 떳떳하지 못할 테니까, 기타 등등.
의무론deontology은 행위를 강조하는 입장으로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도둑질은 옳지 않으니까.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는 결과를 강조하는 입장으로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당신이 훔친 돈의 원래 주인이 어떤 타격을 받을지 생각해보라, 기타 등등
덕윤리학은 근래에 다른 두 윤리학에 살짝 밀려난 상태였다. 덕윤리학이란 부적절한 행동이 인간의 영혼을 더럽힌다고 걱정하는 구식 사고방식이 아닌가 하는 이미지도 있다. 뒤에서 보겠지만, 나는 덕 윤리학이 요즘 나름의 타당성을 갖고서 무대에 복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의무론과 결과주의에 집중하자. 이것은 예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하는 문제와 같다. 의무론자들의 대답은 “아니요, 인간은 결코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이다. 결과주의자들의 대답은 “네, 옳은 결과를 위해서라면 가능합니다”이다. 결과주의는 또 그 소성에 따라 여러 종류로나뉘는데, 진지하게 논의되는 종류도있고 아닌 것도 있다. 가령 자신의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적일 때는 가능하다는 입장도 있고(쾌락주의), 부의 총량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적일 때는 가능하다는 입장도 있으며,[*누구나 똑똑히 알지만 깜박깜박하는 사실을 굳이 지적하자면, 부는 행동의 동의어가 아니다. 한 사람을 오랜 시간 추적한 종단 연구부터 수십 개국 수만 명을 조사한 비교문화 연구까지 행복에 대한 수많은 연구들의 결과는 다 같다. 사람들이 절대적 가난을 벗어나면, 대부분은 확실히 더 행복해진다. 하지만 일단 연명을 걱정하는 수준을 벗어난 뒤에는, 소득과 행복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관계가 적다.] 정당한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 목절일 때는 가능하다는 입장도 있다(국가결과주의),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결과주의라고 하면 곧 고전적 공리주의다. 행복의 총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수단으로 써도 괜찮다고 보는 입장이다.
의무론과 결과주의가 트롤리 딜레마를 고민한다고 하자. 전자는 배쪽안쪽이마앞엽 겉질, 편도체, 섬겉질에 뿌리를 둔 도덕적 직관을 따른다. 후자는 등쪽가쪽이마앞엽 겉질과 도덕적 추론의 영역이다. 우리의 자동적이고 직관적인 도덕적 판단이 대체로 비공리주의적인 까닭은 무엇일까? 그린이 책에서 했던 말을 빌리면, “인간의 도덕적 뇌가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을 돕는 방향으로 진화했지, 집단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을 돕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롤리 연구는 사람들의 도덕적 이질성을 잘 보여준다. 트롤리 실험에서 피험자의 약 30%는 일관된 의무론자로, 다섯 명이 목숨을 잃는 걸 감수할지언정 자신은 레버를 당기지도 한 사람을 밀지도 않겠다는 이들이었다. 또 다른 30%는 늘 공리주의자로, 레버를 당기러나 한 사람을 밀 의향이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의 도덕철학은 맥락에 따라 달라졌다. 다수의 사람들이 이 범주에 해당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린은 우리가 수단과 목적의 가치판단에서 대체로 혼합된 태도를 취한다고 보는 ‘이중 과정’ 모형을 제안했다. 당신의 도덕철학은 무엇입니까? 만약 수단으로서 사람이 겪는 피해에 고의성이 없다면, 혹은 고의성이 있더라도 그것이 무진장 복잡하게 간접적으로 작용한다면, 나는 공리주의적 결과주의자입니다. 하지만 만약 고의성이 뻔히 내 눈앞에 드러난다면, 나는 의무론자입니다.
다양한 트롤리 시나리오들 덕분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이 직관적 의무론으로 기울고 어떤 상황에서 공리주의적 추론으로 키우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결과가 더 나을까?
이 책의 독자들이라면(그러니까 읽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인데, 떳떳이 자화자찬할 만한 일이라고 본다) 거리를 두고서 차분하게 이 주제를 고민할 때, 아마도 공리주의가 더 낫다고 볼 것이다. 즉 행복의 총량을 극대화하는 편이 낫다고 볼 것이다. 공리주의는 형평성을 중시한다. 모두를 똑같이 대한다는 게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동등하게 고려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공리주의는 공평무사함을 매우 중시한다. 만약 공리주의에 의해 제안된 상황이 도덕적으로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하면, 각자 어떤 역할을 맡을지를 동전던지기로 정한다고 해도 모두가 기꺼이 동의해야 한다.
공리주의를 현실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람마다 행복으로 여기는 것이 다른 현시렝서 공통 통화를 찾아내기가 어렵고, 수단보다 목적을 중시할 수 있으려면 우선 목적을 구체적으로 잘 예측할 줄 알아야 하며, 우리/그들 사고방식 때문에라도 진정한 공평성은 무지무지 어렵다. 다 옳은 말이지만, 그래도 공리주의는 최소한 이론적으로나마 탄탄하고 논리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 배쪽안쪽이마앞엽 겉질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공리주의의 호소력이 어느 지점에서는 딱 멈출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트롤리 앞에 누군가를 밀치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다. 혹은 우는 아기를 질식시켜 죽임으로써 나치를 피해 숨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혹은 건강한 사람을 죽여서 그의 장기로 다섯 명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그린이 지적하듯이, 거의 모든 사람이 공리주의의 논리와 호소력을 즉각 이해하면서도 결��에는 그것이 일상의 도덕적 결정을 인도하는 지침으로서 썩 좋지 않다는 게 명백해지는 지점에 다다르고 만다.
그린은, 그리고 그와는 독립적으로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의 신경과학자 존 올먼과 피츠버그대학교의 과학사학자 제임스 우드워드는 이 문제의 한 가지 요점을 신경생물학적으로 탐구했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공리주의가 일차원적이고 인위적인 공리주의라서 우리가 도덕적 직관과 도덕적 추론을 더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양쪽 모두에 방해가 된다는 점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설득력 있게 공리주의적 결과주의를 옹호하는 주장을 펼칠 수가 있다. 일단, 가장 가까운 결과를 생각해보자. 그다음에는 좀더 장기적인 결과를 생각해보자. 그다음에는 그보다 더 장기적인 결과를 생각해보자. 그다음에는 맨 처음으로 돌아가자. 이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해보자.
사람들이 공리주의적 사고에서 벽에 부딪히는 것은 어떤 거래가 이론상 단기적으로 괜찮아 보여도(”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서 한 명을 고의로 죽이는 것, 명백히 행복의 총량을 늘리는 방법 아닌가?“) 장기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저 건강한 사람이 비자발적으로 장기를 기증함으로써 다섯 명이 살게 된 것은 맞아. 하지만 다음번에는 또 누구를 그렇게 해부할 거지? 내 차례라면? 나는 내 간이 퍽 마음에 든다고. 게다가 이게 용인된다면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자칫 악화일로로 미끄러질 수 있는 비탈길, 둔감화, 의도치 않았던 겨로가들, 의도한 결과들. 근시안적 공리주의를(우드워드와 올먼은 이것을 ’한정적‘ 결과주의라고 부른다) 그보다 더 멀리 내다보는 공리주의로 바꾸면(우드워드와 올먼은 이것을 ’전략적‘ 결과주의라고 부르고, 그린은 ’실용적 공리주의’라고 부른다), 우리는 더 나은 결말에 닿을 수 있다.
앞에서 내가 도덕적 직관과 도덕적 추론ㅇ르 대비하여 설명했으므로, 여러분은 아마 이분접적으로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남자는 사타구니와 뇌에 동시에 피가 쏠릴 수 없고 한쪽을 선택헤야만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도덕적 결정을 내릴 때 편도체와 등쪽가쪽이마앞엽 겉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이분법이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은 거짓이다. 우리가 최선의 장기적, 전략적, 결과주의적 결정에 도달하는 것은 추론과 직관을 둘 다 활용할 때이기 때문이다. ”물론 Y를 달성하기 위해서 X를 행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괜찮은 거래로 보여.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만약 우리가 그 일을 반복한다면, 슬슬 Z도 괜찮아 보이게 될 거야. 하지만 나는 Z가 내게 벌어진다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아. 그러다가 W가 벌어질 가능성도 있는데, 그건 사람들이 정말 싫다고 느낄 테고, 그러면······“ 그리고 이때 ‘느낌‘을 고려한다는 것은 미스터 스팍의 방식, 즉 모름지기 인간이 비합리적이고 변덕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유념하고 그 사실을 인간에 대한 합리적 사고에 반영한다는 뜻이 아니다. 대신 이것은 우리가 그 상황에서 어떤 느낌이 들지를 느껴보는 것이다. 2장에서 보았던 다마지오의 신체표지 가설이 바로 이 이야기였다. 다마지오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사고 실험뿐아니라 신체적 감정에 관한 실험도―만약 이 일이 실제로 벌어지면 어떤 느낌이 들까?―머릿속에서 실시해본다. 그리고 이 통합이야말로 도덕적 결정 과정이 추구해야 할 목표다.
‘나는 절대 누군가를 트롤리 앞에 밀치지 않겠어. 그건 잘못된 일이야’하는 생각은 편도체, 섬겉질, 배쪽안쪽이마앞엽 겉질의 판단이다. ‘다섯 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한 명을 희생해야지‘하는 생각은 등쪽가쪽이마앞엽 겉질의 판단이다. 하지만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결과주의적 사고에서는 이 영역들이 모두 다 동원된다. 그 사고는 ’이류를 꼭 집어 말하진 못하겠지만 아무튼 이건 틀렸어’ 하는 반사적 직관주의의 지나친 자신만만함보다 더 강력한 결론을 낳는다. 우리가 뇌의 저 영역들을 모두 동원할 때, 사태가 장기적으로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해서 사고 실험과 감정 실험을 모두 실시할 때, 여러 정보 사이에 우선순위를 매길 때―직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되 그것에게 거부권을 주지는 말아야 한다―우리는 왜 무언가가 옳거나 그르게 보이늕 그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된다.
추론과 직관을 통합하면 상승효과가 난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는 중요한 점이 있다. 만약 당신이 도덕적 직관의 팬이라면, 당신은 그것을 근본적이고 원형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도덕적 직관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지나치게 단순하고 반사적이고 원시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드워드와 올먼이 지적했듯이, 도덕적 직관은 원형적인 것이 아니고 원시적인 것도 아니다. 도��적 직관은 학습의 결과물이다. 인지적 결론이지만 우리가 워낙 자주 접했기 때문에 흡사 자전거 타는 법이나 요일을 거꾸로 외는 대신 순서대로 외는 법을 익힌 것처럼 자동적으로 수행하게 된 암묵적 지식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서구인은 노예제, 아동노동, 동물학대를 나쁜 짓으로 보는 강한 도덕적 직관을 품는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 행위가 나쁘다는 판단이 암묵적인 도덕적 직관이 된 것, 즉 우리가 도덕적 진리에 관해서 발휘하는 직감이 된 것은 보통 사람들의 도적적 직관이 지금과는 처냥지차였던 시절에 소수의 사람들이 도덕적 추론을 (그리고 운동을) 맹렬하게 수행한 덕분이었다. 우리는 직관을 배워서 안다.
빠르고 자동적인 도덕적 직관주의와 의식적이고 면밀할 도덕ㅈ거 추론의 대비는 또다른 중요한 영역에서도 드러난다. 그린의 2014년 책 『옳고 그름』이 이 주제를 탁월하게 다뤘다.
그린은 고전적 비유인 ‘공유지의 비극’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모두가 함께 쓰는 목초지에 목동들이 저마다 양떼를 몰고 와서 풀을 먹인다. 그런데 양이 너무 많아져서, 공유지가 망가질 위험에 처했다. 목동들이 양의 머릿수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진정한 공유지라면, 목동들에게는 서로 협력할 이유가 없다. 자신이 협력해도 남들이 협력하지 않는다면 혼자만 바보가 될 테고, 자신이 협력하지 않고 남들이 협력한다면 혼자만 성공적인 무임승차가 될 것이다. 이것이 공유지의 비극이다.
비렵력자들의 세상에서 어떻게 협력을 개시하고 유지할 것인가 하는 이 문제는 우리가 10장에서 이미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회적 동들 중 개체들끼리 협력하는 종이 많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문제가 해결 가능한 문제라는 것도 살펴보았다. 이제 도덕성의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공유지의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한 집단 내 구성원들이 이기성을 발휘하지 않아야 한다. 달리 말해, 이것은 나냐 우리냐의 문제다.
그런데 그린은 또다른 유형의 비극도 있다고 말한다. 서로 다른 두 집단의 목동들이 있다고 하자. 두 집단이 목초지 활용법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한 집단은 목초지를 전형적인 공유지로 여기지만, 다른 집단은 목초지를 잘게 조각내어 목동들 개개인에게 나눠주고 높고 튼튼한 담으로 경계를 구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초지 활용법에 관해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견해를 갖고 있는 셈이다.
이 상황의 위험성과 비극성에 기름을 붓는 요인이 있다. 두 집단 모두 빈틈없는 추론에 의거하여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믿다보니, 거기에 도덕적 무게까지 싣게 되어 그 방식을 ‘권리’로까지 여긴다는 점이다. 그린은 이대의 ‘권리‘라는 단어를 멋지게 해부한다. 두 집단 모두 자신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는 것은 대체로 그들이 허술하고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한 도덕적 직관에 하이트식 사화 하리화를 충분히 많이 덧붙였다는 것, 수염 난 철인왕 목동들을 줄줄이 내세우며 자신들이 입장에 도덕적 권위가 있음을 선언했다는 것, 자신들의 핵심적 가치와 존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으며 우주의 도덕이 흔딜리고 있다는 생각을 고통스러우리만치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 이런 믿음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정작 그 ‘권리’의 실체는 알지 못한 채 “이유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이렇게 하는 게 옳아요”라고만 말한다는 것을 뜻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했다고 알려진 말을 빌리자면, “도덕이란 우리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채택하는 태도일 뿐이다”.
이것은 도덕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우리 대 그들 현상이다. 그린이 “상식적 도덕의 비극”이라고 부르는 이 현상의 중요성은 지구에서 벌어지는 집단 간 갈등의 대부분이 둥극적으로는 누구의 ’권리‘가 더 옳은가 하는 문제를 돌러싼 문화적 충돌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자, 지금까지 이 문제를 지적으로 냉정하게 설명해보았다.. 이제부터는 좀 다르게 설명해보겠다.
내가 이 대목에서 문화상대주의를 잘 보여주는 사진을 한 장 실으면 좋게삳고 결정한다고 하자. 한 문화에서는 상식적이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대단히 심란하게 느껴지는 행동을 보여주는 사진이어야 한다. ‘딱 적당한 걸 알지.’ 나는 생각한다. ’동남아시아 개고기 시장의 사진을 싣자. 대부분의 독자는 나처럼 그 개들ㅇ르 딱하게 여기겠지.’ 좋은 계획이다. 나는 구글에서 이미지를 검색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몇 시간째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만두지 못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계속 사진을 본다. 개들이 우리에 갇힌 채 시장으로 실려가는 사진, 개들이 도축되고 조리되고 팔리는 사진, 우리에 빼곡히 들어찬 개들의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시장에서 제 볼일을 보는 사람들의 사진.
나는 개들이 느낄 공포를 상상한다. 개들이 얼마나 덥고 목마르고 아플지 상상한다. ‘이 개들이 인간을 믿었다면 어쩌지?‘ 개들의 공포와 혼란을 상상한다. ’내가 사랑했던 개가 저런 일을 겪는다면 어떨까? 내 아이들이 사랑했던 개에게 저런 일이 벌어진다면?‘ 심장이 달음박질하고, 나는 깨닫는다. 내가 저들을 미워한다는 것을. 나는 저 사람들이 한 명도 빼놓지 않고 다 밉고, 저들의 문화가 경멸스럽다.
사실 나는 이 미움과 경멸을 정당화할 수 없다. 내 생각은 하나의 도덕적 직관일 따름이다. 내 행동 중에도 어느 먼 문화의 사람이 보면 똑같은 반응을 보일 만한 것이 있을 테고, 그ㅢ 인간성과 도덕성이 내 것보다 못한 것도 결코 아니다. 내가 만약 다른 문화에서 태어났다면, 나도 대신 저들과 같은 견해를 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이런 사실들을 인정하려면, 뼈를 깍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식적 도덕의 비극이 이렇게나 비극적인 까닭은 ’그들이 절대로 틀렸다‘고 우리가 너무나 굳게 믿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도덕률이 가미된 문화적 제도들―종교, 국가주의, 민족 자긍심, 단체정신 등등―은 우리가 잠재적 공유지의 비극에 직면한 목동 개개인일 때는 최선의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편이다. 나와 우리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덜 이기적으로 굴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우리와는 다른 그들의 도덕성에 직면한 상황이라면, 그런 제도들은 우리로 하여금 최악의 행동을 향해 돌진하도록 만든다.
도덕적 결정 과정에 이런 이중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전혀 다른 두 유형의 비극을 피할 방법에 대해서도 약간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나와 우리가 대립하는 상황이라면, 모든 구성원이 동일한 도덕적 직관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그 직관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이리라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친사회성을 붇돋는 일이다.
(611~619쪽)
이제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을 만한 사실을 살펴보자. 피험자들 중에서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뇌는 어땠을까? 그린과 팩스턴의 말마따나, 여이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시나리오를 세워볼 수 있다. 유혹에의 저항은 매번 ‘의지‘의 소산일까? 즉 등쪽가쪽이마앞엽 겉질이 매번 수고로이 악마에게 해머록을 걸어서 꼼짝 못하게 만드는 걸까? 하니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일까? 즉 싸우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원래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하지 않는 것일까?
후자였다. 늘 정직하게 대답하는 피험자들의 경우, 속���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도 등쪽가쪽이마앞엽 겉질과 배쪽가쪽이마앞업 겉질과 앞띠이랑 겉질이 사실상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갈등은 없었다.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냥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때 유혹에의 저항은 계단을 오르는 움직임이나, ’월요일, 화요일’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수요일’을 떠올리는 일이나, 우리가 인생 최초로 터득하는 조절 행위인 배변 조절과 마찬가지로 암묵적은 능력이다. 7장에서 보았듯이, 이때 유혹에의 저항은 그 사람이 콜버그 발달 단계ㅖ에서 어느 단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가 도덕적 명령을 너무나 끈질기고 일관되게 주입받아온 덕분에,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 척수반사나 다름없는 반응이 되어버린 결과다.
우리가 암묵적 자동성의 결과로만 정직할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모든 유혹을 이켜내는 완벽한 정직성도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부단히 생각하고, 애쓰고, 인지적 통제력을 적용하는 방법으로도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나무랄 데 없는 기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몇몇 후속 실험에서 확인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린과 팩스턴의 실험처럼 연이어 신속하게 반응해야 하는 상황에서 속임수를 쓸 기회가 반복적으로 주어진 경우라면, 일일이 악마와의 팔씨름에서 이기는 방법으로는 가망이 없다. 자동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앞에서 본 적이 있다. 용감한 행동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건물을 보며 어쩔 줄 몰라 우두커니 선 사람들으 헤치고, 누군가 달려들어가서 아이를 구해 나온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안으로 들어가야겠다고 결정했습니까?”(협력의 진화, 상호 이타주의의 진화, 게임이론가 평판의 진화에 대해서 생각했습니까?) 답은 늘 같다.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나도 모르게 달려들어가고 있더라고요..” 용감한 행동으로 카네기영웅메달을 받은 사람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봐도 마찬가지다.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번뜩 떠올린 뒤에, 그들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목숨을 걸었다. “영웅은 느낄 뿐, 따지지 않는다.“ 에머슨의 말이다.
앞서 살펴본 실험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왜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거짓말이 몸에 밸지도 모른다는 장기적 악영향을 내다보았기 때문입니까, 황금률을 존중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대답은 이렇다. ”모르겠어요[으쓱]. 나는 그냥 거짓말을 안 해요.“ 이것은 의무론도, 결과주의도 아니다. 덕윤리학이 슬쩍 복귀한 순간이다. ”나는 거짓말을 안 해요. 그냥, 거짓말하는 사람이 못 됩니다.“ 그에게는 정말로 옳은 일이 더 쉬운 일이다.
(629~631쪽)
행동 - 로버트 새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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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llygood21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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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승 칼럼 : 옥중 윤석열 대통령의 울분
"김홍일·이동관·이진숙 쫓겨나는데, EBS 유시춘은 왜 그 자리에 있나"
이양승 객원 논설위원 / 군산대 무역학과 교수
면회 후 나경원 의원이 전했다
이재명 유시춘 건재 vs. 대통령 감옥
거짓말 유시춘 쫓아낼 방법, 정녕 없는 건가?
《EBS는 지금 ‘마더’ 영화 상영중이다》
■ 문재인 알박기 공직자들, 대놓고 싱글벙글
“김홍일·이동관·이진숙이 계속 탄핵소추되면서 방송통신위원장으로 제대로 앉아 있던 분이 없었다.
(반면) 유시민 전 의원 누나인 유시춘 씨가 문재인 정권 때 임명됐는데, 아직도 EBS 이사장이다."
- 윤석열 대통령
2월 3일 면회를 마친 나경원 의원이 기자들에게 이렇게 전했다고 <문화일보 >가 보도했다.
김홍일·이동관·이진숙은 쫓겨나는데, 유시춘 은 왜 그 자리에 건재하느냐는 울분을 전한 것이다.
감옥 속 현직 대통령이 불의의 사례로 콕 꼬집어 거명한 EBS 교육방송 유시춘 이사장(이하 존칭 생략)의 거짓말 시리즈가 화제다.
《게임이론》시각에서, 거짓말을 하는 이는 그 거짓말을 통해 뭔가를 얻는다.
얻는 게 없이 거짓말을 한다면, 그건 정신질환이다.
■ EBS는 흙수저들을 위한 것
한국은 참 황당한 나라다.
전 세계에서 한국만큼 교육열이 뜨거운 나라도 없을 것이다.
‘교육 백년지대계’, ‘동방예의지국’.
《주자학적 위선자》들이 입만 열면 하는 말이다.
한국은 OECD 국가들 중에 사기범죄 평균 빈도수 가 가장 높다.
그 빈도수 면에서 한국은《동방의 등불》같은 나라다.
EBS는 교육을 위한 공영방송이다.
그 존재 근거가 있다.
사실을 짚자면, 한국에서 교육은 출세 수단이다.
목표는《점수 따기》와《등수 올리기》다.
해마다 사교육으로 몇십조를 쓰는 건《윤리와 덕》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비싼 돈 들여《윤리와 덕》을 공부할만큼 한국인들은 한가하지 않다.
게다가 전교조가 장악한 공교육 현장에서는《권리》만 가르친다.
《책임과 의무》는 잊혀진지 오래다.
한국은 자본주의 나라다.
유교 정신도 잃지 않았다.
‘맹모삼천지교’.
지방의 금수저 가족은 이사를 자주 다닌다.
《‘일류 학원’, ‘명문 학원’》은 서울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 말로는,《입시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이 아니라 대치동에 가야 한다》고 한다.
지방의 흙수저 자녀들에게 사교육은 사치다.
그들은 교육 경쟁에서 열위에 처할 수밖에 없다.
세금걷어 공영방송 EBS를 운영하는 이유다.
감히 주장하지만《 EBS는 흙수저들을 위한 것》이다.
■ 문재인 알박기 유시춘의 거짓말 전성시대
그런 EBS에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과 언론의 관심은 오로지《내란 몰이》에만 가 있다.
EBS는《거짓말 성공시대》와《거짓말쟁이 전성시대》를 열어가는 중이다.
EBS 유시춘 의 행태는 지극히 반교육적이다.
그는 거짓말을 퍼트려 한동훈 을 모함, 유죄 판결을 받은 좌파 정치인 유시민 의 친누나다.
실은 유시춘 도 정치인이라고 볼 수 있다.
2017년 대선 때, 문재인 선거 운동을 위해《꽃 할배 유세단》을 운영할 만큼 정치 욕망을 과시한 바 있다.
그렇게 편향된 이가 교육방송 이사장직에 오른다는 거 자체가 문제다.
그는 취임 전부터 부적격 논란이 있었다.
이른바《호적세탁》의혹 때문이었다.
《'성'도 '나이'도》 분명치 않다.
한 술 더 떠, 그의 아들은 마약 범죄를 저질러 대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제 자식 교육도 제대로 못한 이가 남의 자식 교육하겠다고 나선 격이다.
물론 아들의 비행을 모두 부모 책임으로 돌릴 순 없을 것이다.
■ 가짓말, 거짓말, 거짓말
하지만 문제는 태도다.
책임회피를 위해 거짓말을 거듭하는 유시춘 은 비겁하다.
이는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다.
특히 청소년 교육에 좋지 않다.
교육방송의 주된 수요자는 청소년 계층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자기 자식이 마약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이었다.
자신이 EBS 이사장이 되고나서 아들 마약 문제가 불거지니, 제 아들이 법원에서 무죄를 받았다고 거짓 해명했다.
하지만 이사장 취임 직전에 그 아들은 2심에서 징역 3년형에 처해져 법정구속된 상태였다.
취임 이후 있었던 대법원 3심도 징역 3년형이었다.
■ 영화 《마더》속 주인공 닮은 유시춘
이쯤에서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일그러진 모성을 그린 영화 《마더》(김혜자 주연)다.
아들이 살인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더’ 는 “사실은 우리 아들이 안그랬거든요!” 하며 절규한다.
결국 그 ‘마더’ 는 제 아들의 무죄 방면을 위해 다른 지적장애인을 범인으로 만들고 만다.
그리고 그의 면회를 가서 하는 대사.
“(너는) 엄마 없어?”
소름끼치는 장면이다.
자식 사랑은 본능일 것이다.
하지만 남의 자식을 희생시켜 제 자식만을 위한다는 그건 사랑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 ‘마더’ 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다.
■ 유시춘, 이재명 법카 사용 판박이
영화같지만, 그 마약사범의 ‘마더’ 는 교육방송 이사장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 신 모씨가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의 확정판결을 받자 “아들의 결백을 믿는다” 며 “엄마의 이름으로 범인을 찾겠다” 고까지 했다.
대법원 판결이 틀렸다고 목��리를 높인 것이다.
그건 자식 사랑이 아니라 위험한 자기애다.
슬프지만 위험천만하다.
게다가 그는 이사장 재직 중《업무상 배임》을 저질러 현재 기소된 상태다.
이 또한 황당한 일이다.
지난해 10월15일 검찰이 유 이사장을《업무상 배임》으로 기소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교육방송 법인카드로 가족 식사용 장을 보는 등 2천만원 가까이 유용했다는 혐의였다.
그러자 그는 이틀 뒤 교육방송 이사회에서《업무상 배임》과 관련해《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며 해당 보도를《가짜뉴스》로 지목,《법적조치를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 발언은 교육방송 이사회 회의록에 남겨져 있다.
그 또한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법원에 따르면 유시춘 의 죄명은 정확히《업무상 배임》이고, 그렇게 《가짜 뉴스》운운하던 날 공소장이 송달 완료된 상태였다고 한다.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거짓말로 일관한 것이다.
■ 거짓말쟁이는 법카 계속 쓰고, 대통령실 전체 법카 한도는 "빵"
실천이 따르지 않는 교육은 위선이다.
그건 허구만도 못하다.
지금 EBS를 통해 비쳐지는 건 출세지향 교육이다.
출세도 좋지만, 교육은 사람의 혼과 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히 EBS 교육방송 주 수요층은 청소년들이다.
교육방송 이사장 유시춘 의 거짓말 시리즈.
이래도 되는건지 묻고 싶다.
한국은 참 황당한 나라다.
우파가 거짓말 한마디 하면 온 나라가 뒤집힐 듯 하는데, 좌파는 거짓말 시리즈를 만들어가도 태연하기만 하다
유시춘 은 건재한데, 현직 대통령 차디찬 감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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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lygeorgy · 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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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겨냈네 4년을. 잘 했어 나.
아, 그리고! 네 탓 아니고, 네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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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erafim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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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9 Yunjin's comment on Sakura's Weverse post
떡 진짜 맛있었어. 입덕도 맛있겠다. The rice cake was so delicious. Stanning* us is probably delicious too.
Sakura's reply
아… 윤진씨…🫢🫢🫢 Ah... Yunjin-ssi...🫢🫢🫢
(T/N: *Wordplay. 입덕 (eep-duk) is a slang term meaning "start becoming a fan of" and the last syllable, 덕 (duk), sounds a little like 떡 (dduk/tteok), which means rice cake)
Trans cr: Songyi @ le-sserafim.tumblr.com © Please credit when taking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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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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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 고언어
예전에 고(go) 언어 얘길 한 번 써서 올리긴 했으나 왜 이거에 관심을 두게 됐는지��� 빼 먹고 지나친 것이 기록 강박이 있는 사람으로서 영 찜찜해 적어놔야 겠기에. 원인은 자바로 개발하기가 넘 싫었기 때문. -=-=-=-=-=-=-=-=-=-=-=-=-=-=-=-=-=-=-=-=-
지난 십 년 넘게 나를 먹여 살린 프로그래밍 언어는 자바(JAVA)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동안 접한 언어 중에서 제일 싫어하는 거기도 하다.
구구절절 이유를 나열하기보다 총체적으로 한 줄 요약하면, 어릴 적 세운 상가 길바닥에서 처음 배우면서부터 즐겼던 프로그래밍하는 재미를 빼앗아 갔다. 하지만 한국 IT 업계는 자바가 대세라 이걸로 짜야 돈 준다는 데 별 수 있냐, 꾹 참고 했지.
자바는 '객체 지향' 강박이 매우 심한 언어다. 그 시절엔 이 기법이 프로그래머를 구원할 궁극의 진리 같은 느낌으로 여기저기에서 떠받들었던 기억이 내게도 있기 때문에 이해는 함. 그래서 "Hello World" 한 줄 찍으려고 해도 class부터 만들어야 한다.
EJB는 "엔터프라이즈 자바 빈"의 약자로 대규모 웹페이지 만들 때 ��던 거. 복잡하기가 개미지옥 같아, 자바의 대표 흑역사랄 수 있다. 대안으로 스프링(Spring)이라는 프레임웍이 나왔다. 자바 프로그래머들이 무척 좋아했다. 바로 이 부분이 열나 어이없는 거. 스프링은 EJB에 비해 편리하단 것일 뿐, 여전히 짜증 나는 물건이거든.
이 프레임웍의 핵심은 의존성 주입(=Dependency Injection)이라고 한다. 말은 거창하지만 인터페이스(interface)를 써서 코딩하는 짓을 과대 포장한 거. 내가 보기에 여러 개발자 집단 중 유독 자바 쪽 인간들이 허장성세가 심한 편인 거 같다. 이런 점도 거슬려하는 부분 중 하나.
'전자 정부 프레임웍'은 한국 정부가 강제로 정해 놓은 스프링 기반 개발 스펙이다. 이걸 적용해 DB에서 데이터를 꺼내 오려면, Controller → Interface → Implement → DAO 무려 4단계를 거쳐야 한다.
내가 보기엔 규모가 크지 않은 웹페이지의 경우 Controller와 Implement만 있어도 됨. 이 두 개가 꼭 있어야 하는 이유는 Implement에서 트랙잭션이 발생하기 때문에.
DAO는 Implement가 흡수할 수 있기 땜에 진짜 필요 없다. Interface는 애매하다. 만약 비교적 최근 등장한 go언어, 파이썬처럼 덕 타이핑(Duck Typing)을 지원한다면 당연히 처음부터 필요한 게 아니다. 자바가 클래스에 집착하는 언어인 데다 스프링 개발한 놈들이 자랑해 마지않는 의존성 주입을 포기할 수 없어 계속 이렇게 갈 듯.
이 인간들은 자바 패밀리 중 JSP를 병적으로 싫어한다. 왜 그러는지 이해 가는 면이 있긴 하다. JSP는 (PHP처럼) 그 자체로 하나의 개발툴이기도 하니까. 너무 많은 기능을 내장하고 있다 보니 JSP를 허용하면 MVC(Model - View - Controller)의 토대가 흔들리면서 뒤죽박죽인 코드를 양산할 우려가 큰 거. 그래서 기능을 제한한 JSTL이라는 템플릿으로 뷰(View) 화면을 만들라고 강요한다.
스프링으로 개발할 땐 심지어 컴파일 시간마저 짜증을 유발한다. 사소한 거 하나만 수정해도 프로젝트 전체를 빌드해야 해 결과 나올 때까지 멍때려야 하는 시간 낭비가 크다. 그만큼 개발 속도가 상당히 더디다.
설상가상 가상 머신(=JVM)에서 돌아가기 때문에 느리다. 초기엔 이거 덕분에 컴파일 한 번 해서 여기저기에 다 쓸 수 있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규칙도 사실상 깨져버린 상태. 장점은 느릿느릿하긴 해도 안정적인 거 같긴 하다. 오늘날까지 자바가 살아남은 결정적 요인은 하드웨어 성능이 올라갔기 때문일 듯.
예전에 자바 안에 파이썬 소스를 포함해야 할 일이 있었다. 구글 검색하니 '자바 + 파이썬 = 자이썬'이란 게 있다길래 함 써봤다가 너무너무 느려서 바로 폐기. 그래서 파이썬을 따로 만들어 서버에 저장하고 자바에서 리눅스 쉘 스크립스트를 실행하게 하는 약간 촌스런 방법을 썼다.
자바는 설계 구조상 메모리도 많이 잡아 먹을 수밖에 없다. C처럼 포인터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함수 호출할 때마다 파라미터와 리턴값을 통째로 복사할 수밖에 없거든. 종종 클래스 전체를 주고받을 때마다 '아, 이게 뭔 뻘짓인가' 자괴감마저 들곤 한다.
그러던 중에 고(Go) 언어를 살펴 보니 진짜 맘에 쏙 들었던 거. 우선 자바와 달리 무척 컴팩트하다. 개발자가 허풍을 안 깐다. 게다가 핵심 인물 중 한 분이 내 닉네임과 같은 켄(=Ken Thompson)이다.
당연히 포인터 있다. 하지만 C/C++처럼 포인터 연산은 지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버퍼 오버플로우' 같은 버그를 일으키는 원인이란 판단 때문이었을 듯. 진짜 좋다.
고언어는 자바처럼 객체 지향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신 구조체와 인터페이스를 이용해 동일한 성능을 낼 수 있다. 이거는 나도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였으나 삼류 개발자라 자신 있게 주장하진 못했는데, 정말로 되는 거였다니…
병렬 처리가 기본인 시대에 태어난 언어답게 쓰레드 처리가 무척 간단하다. 문장 앞에 'go'만 붙이면 되니까. 다만 자기 손을 떠난 쓰레드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먹통이 된다. 그래서 '채널'이란 걸 잘 써야 하던데 아직까진 능숙하지 못하다. 실무에 써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거 같긴 한데.
그러나 고언어가 아무리 좋으면 뭐하냐. 아직까지 한국은 "Hello JAVA World"인걸… -_-;; 하루속히 고언어가 쭉쭉 성장했으면 좋겠다. 그럼 고언어 전문가인 척 구라까고 돈 받으면서 공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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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ltrip001 · 19 hou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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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ntopiabooks · 21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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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惡이란 무엇인가?무의식이 악이다.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죄악이다. 그렇다면 덕德이란 무엇인가?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덕이다. 피타고라스는 어떠한 도덕률도 제시하지 않는다. 진정한 현자 중에서 세상에 도덕률을 제시한 현자는 한 명도 없다. 진정한 지혜에서는 언제나 오직 한 가지 음성만이 흘러나온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그 안에서 더 깨어있으라.’라는 하나의 말이 흘러나올 뿐이다. 그대 혼자 있을 때나 대중과 함께 있을 때나 의식적으로 행동하라. 언제나 깨어있는 의식으로 행동하라.
어느 날 붓다가 제자들과 걷고 있었다. 그가 깨닫기 직전에 있었던 일일 것이다. 그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도 몇 명의 제자가 있었다. 붓다의 상태�� 이제 막 빛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상태였다. 마치 이른 아침에 태양이 완전히 떠오르지는 않��지만 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찬란한 빛이 퍼져나가는 것과 같았다. 지평선 너머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붓다에게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도 다섯 명의 제자가 있었다. 붓다가 그 제자들과 함께 걷고 있는데 파리 한마리가 날아와 붓다의 이마에 앉았다. 붓다는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별다른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무심결에 손을 흔들어 파리를 쫓았다. 그런 다음, 그는 갑자기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눈을 감았다. 제자들은 무슨 영문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윽고 붓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아주 천천히 손을 들어서 이마 근처로 가져갔다. 파리를 쫓는 손짓이었다. 하지만 이미 파리는 날아가고 없었다. 제자들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파리는 이미 날아가고 없습니다.”
붓다가 말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이고 있다. 조금 전에 나는 무의식적이었다. 나는 의식적인 순간을 놓쳤다. 나는 너희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몰두해서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나는 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 덕德의 길이다. 작은 행동, 아주 사소한 몸짓이나 움직임에도 철저하게 깨어있어서 모든 행동이 각성의 빛으로 충만해지는 것, 이것이 덕의 길이다.
- 오쇼의 <피타고라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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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chemicalresearch · 1 month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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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lodorenetoimo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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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수호
지 무슨 혁명이니 어쩌니 분열의 정치를 탓 하는 꼬라지하며 징글징글한 뻔뻔함임
지들이 여태까지 명줄 이어온 게 남탓하며 갈라치기 한 덕 아님? 저 뻔뻔함까지 해서
저짓을 고대로 베끼고서 보수라 참칭해서 요정이 되었거늘 왜 욕하는지 알 수 없기는 함. 지들 세상 만들어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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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ang00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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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덕 체가 삼위일체야 뭔 씹같은 1도못새겨준 빨만 휘향찬ㅎ란한 에언이 주인 니에미 보지씹같은 경이 삼위일체가아니고 이시발로마ㅉㅉㅉ 널리 인류를 이롭게하려 덕을 쌓는 단군의 얼과 개도 문맹제로만들 지로 무지함을 타파한 세종과 사탄이 활개치면 물리치료가 다ㅣ 뚜까패는 이순신의 체 그모든게 합쳐져 골고루 잘해야지 집구석찐따 남이 쉽게다푼거 머가리에 죽을떄까지 욱여처넣고 아가리만 처씨부리며토씨하나안틀리고 행동은 그리스도 틀려먹으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사고와 더 아니할 행동이 삼위일체냐 이십알년아 이런개도 알아야할것도모른ㄴ ㅡ ㄸ오머리돌머리독머리년드라 나가디져 나 강력도모자라 강려크하게 자살추천해준다 꽃도 낙엽조차 못된니들 죽을때는 낙화라도되보라고 낙화암 정자에서 내 고이 밀어주마 이십알년드라 니들도 사람새끼야 이끼새끼지ㅉ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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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maker · 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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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얼리’ 조민아, 보험사 전국 4위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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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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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북 다르부카에 관한 메모"
벨리 댄스 수업 참여하는 동안 자연스레 몇몇 이집트 음악을 접했다. 그중 움 쿨숨(Umm Kulthum)이란 분이 가장 유명한 국민 가수이시라길래 유튜브에서 음반 몇 개를 찾아 약 반년에 걸쳐 틈틈히 들어봄.
월드 음악 중에서 알젠틴 땅고와 포르투갈 파두는 듣자마자 귀에 팍~ 꽂혔던 반면 아랍 음악은 예전부터 내 취향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고 보고 시나브로 귀에 익을 때까지 어느 정도 여유를 뒀건만 역시나 실패.
하지만 벨리 댄스에서 중요한 타악기로 쓰이는 다르부카(Darbuka)만큼은 예외로 한번 듣고 꽃힘. 기원은 매우 오래돼 위키 백과에는 고대 이집트 및 메포소타미아(=바빌론, 수메르) 때까지 거슬러 올라 간다고 써 있다. 아마도 벽화나 부조에 비슷한 그림이 남아 있나 보다. 그런만큼 명칭도 다음과 같이 여럿이다.
(1) 다르부카(Darbuka) : 구글에는 '공격'을 의미하는 아랍어 'Darba'에서 기원했다고 나옴. 악기 연주를 들어보면 왜 공격적이란 명칭이 붙었는지를 충분히 납득.
(2) 고블릿 드럼(Goblet Drum) : 형태가 고블릿 잔(=와인 잔)처럼 생겼다고 해서 이렇게 부르는 듯.
(3) 따블라(Tabla) : 본래는 인도 대륙에서 기원한 거로 추정하는 (봉고처럼) 두개의 북을 한 쌍으로 묶어 부르는 명칭인데, 어떤 연유로 여기에 쓰였는지는 모르겠다.
(4) 둠벡(Doumbek) : 한국에서 장구 배울 때 '구음'이라고 해서 "덩기덕 덩 덕"과 같이 입으로 북소리를 재연하듯 이 동네 사람도 "둠 텍~텍 둠 텍"과 같은 게 있는데 이 전통에서 비롯한 명칭인 거 같다.
예전에 쓴 글에서 내가 악기 소유욕이 있다고 했듯, 다르부카도 구입했었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일 때 집에서 북이나 두드리려고… 유튜브에 '막숨', '발라디', '사이디' 등등 기본 리듬 정리해 놓은 자료가 있길래 따라서 몇 번 두드려 봄. 보기와 달리 난이도를 조금만 올리면 멘붕 오더만. 여기에서 더 나가려면 시간 투자를 엄청하지 않으면 안되겠단 느낌이 들었고, 한동한 구석에 방치해놨다가 벨리 댄스 쌤에게 줘버림.
당시 내가 주로 참고했던 기초 리듬 영상은 아르템 우즈노프(Artem Uzunov)란 연주자가 만든 콘텐츠였다. 미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모스크바에서 보냈단 거 외에는 구체적인 정보가 없다. 데뷔 음반은 2013년에 발매한 '함 해볼까(=Let's do it)'이고, 유튜브에 전곡이 올라와 있다.
네 번째 트랙에 '춤 추고 싶다(=I Wanna Dance)'란 곡이 있는데, 내가 수업 참여중인 벨리 댄스 쌤이 이곡에 맞춰 한 공연 영상이 있길래 허락받아 링크. 4년전 영상이건만, 이분도 방부제 미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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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lin · 6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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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에 로고 자수로 포인트를 준 폭스퍼 덕 다운 패딩 풍성하고 부드러운 폭스 퍼는 탈착가능하여 실용적이며, 덕 다운 충전재로 보온성이 우수합니다. 센터 풀 지퍼, 버튼 여밈으로 오픈 클로징이 간편하며, 함께 구성된 밴딩 벨트로 편안하게 실루엣 조절이 가능합니다. 양 사이드 포켓으로 간단한 수납성을 더해주며, 롱한 기장에 데일리한 디자인으로 활용도 높은 아이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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