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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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moomu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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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감도장 10 - 오천, 자유의 하늘
인감도장[人感圖章, 내가 느낀 삶의 증거]
"아ㅏㅏㅏ잇! 팔꿈치를 박살내라고! 이격! 이격! 이격 소리를 내란 말이야, 이거 안 되겠구만..총원 엎드려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ㅕ엇!"
"..앜"
(*이격: 총의 후미로 팔꿈치를 치는 행위, 그냥 개아프다.)
단도직입적으로 난 총검술이 싫었다. 해병대 68년 역사의 마지막 총검술 기수임에도 불구하고(총검술은 우리 기수를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그에 걸맞는 자부심과 유종의 미보다는 당장에 퍼렇게 부어오른 내 팔꿈치가 백만 배는 소중했다. 사실 북한군 보다는 교육대장실로 직행해 당장 눈앞의 DI(훈련교관)들에게 찔러찔러앜 즉, 펜검술을 시전해 다 팔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질나게는 무슨 그날도 배식당번이랑 신나게 기싸움 한바탕하고 받은 3/1끼니의..점심을 먹고 주린 배를 움켜퀴고 잠시 생활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맘같아서는 대자로 뻗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DI와의 달달구리한 점심 얼차려는 더욱 싫었다. 더 절망적인 사실은 얼차려보다 더 싫은 총검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내 머리는 온통 그녀 생각이 아닌 어떤 꼼수를 써서 이 난관을 헤쳐나갈지에 대해 오만 편법과 상술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아..총원 주목, 본인이 사회에 있을 때 엑셀에 특기가 있었다.. 2층 현관으로..이상"
엑셀?은 잘 모르겠고 불현듯 머리 속에 떠오른 '과업열외'의 희망에 이끌려 등불을 향해 달려가는 불나방처럼 '훈병류동완!'을 외치고 달려갔다.
이제는 말할 수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엑셀은 소대장이 기대하는 완벽한 로직과 깔끔한 함수 전개랑은 거리가 멀었고 그저 SUM함수같은 사칙 연산이나 끄적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다분히 도전적인 나의 객기에도 불구하고 소대장들은 그저 자신의 일을 ���들에게 던질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네 엑셀 잘 하냐? 나랑 주말이나 밤에 작업 좀 하자!"
..?
주말이나 밤. 물 마시는 시간도 통제되는 이곳에도 그나마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인 밤과 주말.. (항상 모든 리스크를 고려합시다 여러분)
머릿속의 행복 회로는 허상일 뿐이다. 기대했던 과업열외는 무슨 신이 난 소대장은 그날 풍악을 울리듯 더욱 신나게 총검술을 휘둘러댔다. 당연히 빼빼로 같은 내팔이 견뎌낼리 만무했다.
주말 오후, "아..아 주목, 엑셀 작업원은 2층 소대장실로.." 때가 왔다. 동기들은 밀리고 밀렸던 신변이나 정리하건만 왜 나는.. 아흑. 물론, 같이 선발된 2명의 동기와는 이미 역할 배분을 끝냈다.
1명은 그냥 밖에서 엑셀 좀 끄적인 평범한 아이였고, 나머지 1명은 그냥.. 컴퓨터에 환장하는 진성 컴돌이였다. 그는 독립선언문 선포하듯 대담하게 자신이 모든 일을 맡겠다며 호언장담했다. 그랬다 사실, 그에게는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편지 몇 장 쓰는 것 보다는 소대장의 노예가 되더라도 컴퓨터 앞에 앉는 게 더욱 행복한 일상이었다.
우리는 그의 제안에 뭐 나쁠 거 없다는 식으로 동의했으며 소대장의 말동무나 되겠다고 맞장구쳤다.
작업 시작과 함께 동시에 컴돌이는 폭풍작업에 돌입했고, 난 옆에서 날 좋은 주말에 당직이나 서고 있는 소대장의 신세한탄이나 들어주고 있었다. 모두가 예상하듯, 결론은 되도 않는 몇 가지 자기 자랑으로 귀결되었으며, 1도 재미없다는 나의 불안한 눈빛을 읽은 소대장은 이내 의자를 지구 끝까지 재낀 뒤 오침을 즐기셨다.
여전히 컴돌이는 세상 모두를 가진 표정으로 작업에 열중했다. 문뜩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일어서서 멍하니 바깥 풍경이나 관조했다. 그렇게 멍이나 죽때리고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훈련소에 입소하고 나에게만 주어진 첫 번째 자유였다. 푸른 하늘과 진한 솔 냄새. 나른하면서도 청아했던 그날의 공기. 다양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1분 1초 속에서 처음으로 얻은 '내 시간'이였다. 물론 소대장의 코골이는 옥의 티였지만..
모든 것이 통제되고 제한되는 훈련소의 시계 속에서, 아주 짧게나마 되찾은 나의 1분 1초. 오천의 푸른 하늘과 늦겨울의 청아한 공기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소중했다.
2월의 어느 주말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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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bumsun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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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의 신사상
“삼일운동”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유관순, ��극기, 만세운동, 일제의 탄압. 작년 삼일절, 문재인 대통령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임시정부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안중근과 이봉창, 김구와 윤봉길이 등장했고, 항일무장독립투쟁의 고난을 상기했습니다. 독도와 위안부 문제를 짚었고, 마지막엔 김구의 소원인 문화강국을 내걸었습니다. 저는 역사학도로서 의아했습니다. 물론 하얼빈의 총성과 홍커우의 폭탄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1919년 3월 1일과 정확히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어째서 삼일운동의 진원이라고 할 수 있는 여운형과 김규식 등의 신한청년당이나, 실제로 선언문을 작성한 이광수와 최남선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가 기억해야할 삼일운동의 하이라이트는 과연 유관순의 순국 밖에 없을까요?
저는 오늘 2019년 대한민국 청년의 시각으로 1919년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을 기억하려 합니다. 삼일운동은 청년운동이었습니다. 1880년대생부터 00년대생까지가 주축이 되어 기획하고, 행동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기성 세대의 봉건적 사고와 확연히 달랐습니다. 구한말부터 선교사들을 통해 유입되고, 유학생들을 통해 수입된 근대 사상이 드디어 물꼬를 튼 것입니다. 서구 계몽주의에 뿌리를 둔, 다분히 국제주의적이고, 인류 보편적인 세계관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그 시작부터 국제적이었습니다. 신한청년당은 상해에서 탄생했고, 대표단을 파리로 파견했으며, 이에 호응하여 도쿄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천도교와 기독교가 3.1 독립선언을 주도한 것입니다. 당시까지 주류였던 유림이 이렇다 할 참여를 하지 않은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광수의 2.8 선언과 최남선의 3.1 선언에 담긴 언어는, 여전히 사서삼경에 익숙한 6, 70년대 생이 받아들이기에는 낯설고 불쾌했을 것입니다. 서재필 등 몇몇 선각자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삼일운동 백주년인 올해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피부로 느끼기에 아주 좋습니다. 저는 1991년생이라 이제 29살입니다. 최남선은 1890년생으로 기미독립선언문을 쓸 당시 30살이었고, 이광수는 92년생이라 28살이었습니다. 여운형은 86년생, 김규식은 81년생이라 여전히 “청년"이라 부를 수 있는 30대 중후반이었고, 유관순은 02년생 17살이었습니다. 박헌영, 허정숙 등 러시아 혁명의 세례를 받은 공산주의 청년들도 각각 00년, 02년 생으로 채 스무살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이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일찍이 해외 유학을 했거나, 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유교적, 봉건적, 가부장적 질서와는 다른, 과학적, 민주공화주의적, 여성주의적 미래를 지향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일운동은 조선 청년들의 사상적 근대화에 힘입은 일대 정신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의 신사상이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획기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국제법에 기반한 평화운동이었다는 점, 둘째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내세웠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19세기 말에야 세계사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개념이었습니다. 그것을 19세기 말 조선에 태어난 청년들이 온몸으로 습득하여, 전국민의 10%가 참여하는 거국적 운동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그 동시대성이 경이로울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도 특기할 만합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배경을 밝히고 의미를 논하는 것이 오늘 방담회의 목적 중 하나입니다.
​우선 삼일운동의 도화선인 신한청년당으로 가보겠습니다. 86년생 여운형은 몇몇 동지들과 1918년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세웁니다. 터키청년당 동지들에게 영감을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때 1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파리 강화회의로 이목이 집중됩니다.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로 보냅니다. 81년생 김규식은 어릴 적 언더우드 학당에서 공부했고, 서재필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프린스턴에서 석사까지 마치고 귀국했다가, 다시 중국과 몽고를 돌며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 몽골어까지 능통한 인재였습니다.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 자결주의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지배 민족이 독립하여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아주 이상주의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윌슨은 국제법에 기반한 영구 평화를 꿈꿨고, 그 장치로 국제연맹을 제안했습니다. 비록 그 꿈은 야당인 공화당의 반대와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승전국들의 반발로 이뤄지지 못했지만, 국제연맹은 이후 국제연합, 즉 유엔의 모태가 됩니다.
​이때 김규식과 함께 파리에 간 선배가 있습니다. 바로 63년생 미국인 호머 헐버트입니다. 86년에 육영공원 교사로 처음 조선에 온 헐버트는 이후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주시경 등을 가르쳤고, 서재필과 함께 독립신문을 만들었습니다. 1905년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자국 대통령인 루즈벨트를 찾아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렸고, 조미통상수호조약에 근거해 미국이 조선을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1907년 헐버트는 또 다시 고종의 부탁으로 이위종, 이준,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일제의 방해로 실패합니다. 베르사유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것이 헐버트에게는 처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1905년과 1907년, 1919년까지 헐버트의 논리는 일관되었습니다. 일제의 조선 침략은 국제법에 어긋나는 행위이니,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이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개입하여 독립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엔의 도움으로 국가를 보전한 우리에게 지금은 너무도 익숙하지만, 당시로서는 새로운 논리였습니다.
​우리는 이 논리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영구평화론입니다. 서양에서는 토마스 페인이나 임마누엘 칸트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처음 말하고, 조선에서는 안중근이 <동양평화론>에서 펼친 이 주장은 근대 전쟁의 잔학성에 대한 반작용이었습니다. 고대부터 전근대까지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습니다. 평화란 전쟁과 전쟁 사이 준비 기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인류는 전쟁의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독가스와 기관총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가 도입된 세계 1차 대전은 경종을 울렸습니다. 더 이상의 전쟁은 아니된다, 국제법에 기반한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는 자각이 있었습니다.
​헐버트는 국제법에 입각해 한국을 변호했습니다. 워싱턴에서도, 헤이그에서도, 파리에서도 번번히 무시당했지만, 그 신념은 한결같았습니다. 힘의 논리 앞에서 법과 도의를 외쳤다는 점에서 헐버트는 윌슨과 같았고, 삼일운동을 이끈 조선 청년들과도 한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삼일운동의 시작을 신한청년당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으로 볼 때, 그것은 반드시 헤이그 평화회의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두는 헐버트와 서재필과 김규식 등 조선 개화 청년들 사이에 퍼져 있던 국제주의적 평화운동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광수의 2.8 독립선언문 논지는 간단합니다. “한일합병은 조선민족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고, 동양의 평화를 헤치기 때문에 무효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우리에게도 적용해달라.” 최남선의 3.1 독립선언문은 조금 더 나아갑니다. “아아 신천지가 안전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하도다. 과거 전세기에 연마, 장양된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하기 시하도다. 신춘이 세계에 래하야 만물의 회소를 최촉하는도다.” 위력의 시대를 보내고 맞이하는 도의의 시대. 바로 국제법과 인도주의에 기반한 평화체제입니다. 윌슨에게 보내는 편지와도 같은 이광수와 최남선의 선언문은 그들의 사상과 언어가 얼마나 서구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는지 보여줍니다. 기미독립선언문은, 모든 독립선언문이 그렇듯이,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의 후예입니다. 최남선의 사상은 단군의 홍익인간 뜻이나 정약용의 실학사상보다도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 정신에 가깝습니다. 육당은 아주 계몽주의적인 심상으로 선언문을 마칩니다. “다만, 전두의 광명으로 맥진할 따름이다.” 어둠을 벗어나 빛을 향해 돌진한다. 서양의 진보주의적 역사관을 열렬히 끌어안은 조선 청년의 다짐입니다.
​이처럼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은 계몽주의적 사상으로 국제법 질서를 옹호할 만큼, 이미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사실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20세기 초 식민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이와 같은 논리로 독립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일운동은 그 방법론에서도 아주 독보적이고 선구적이었습니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비폭력 평화주의 내지 시민 불복종 운동의 역사는 국제법에 기반한 평화운동의 역사 만큼이나 짧습니다. 19세기 중반 철학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미국의 멕시코 침략과 노예 제도에 반대하여 납세를 거부한 것이 시민 불복종의 시작입니다. 그 작동법은 이렇습니다. 정부의 불의에 저항함에 있어 폭력을 쓰거나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 평화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힌다. 그렇게 확보한 도덕적 정당성을 세계 시민에게 알려 연대를 꾀한다. 이를 통해 정부를 압박하여 원하는 개혁을 도출한다. 이것이야말로 봉건 사회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철저히 근대적이며 자유주의적인 운동 방식입니다. 소로우가 착안한 이 개념이 톨스토이를 통해 간디에게, 간디를 통해 마틴 루터 킹에게 전수되었다는 것이 비폭력 평화운동사의 줄거리입니다.
그런데 인도 독립운동이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철학인 ‘사티아그라하'를 본격 채택한 것은 1920년대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전국민의 10%가 넘게 동시다발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습니다. 1960년대 마틴 루터 킹의 민권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삼일운동이 시기로나 규모로 보았을 때 세계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마땅하지만, 여태껏 그렇지 못했습니다. “인도인이 이토록 평화적인 자세로 독립을 원한다"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전한 게 간디의 독립운동이라면 그 똑같은 이야기를 더 먼저, 더 크게 한 것이 삼일운동 아니겠습니까? 삼일운동이 제대로 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한 이유는 일단 서양 중심적인 역사관이 클 것이며, 간디나 마틴 루터 킹처럼 대표적인 지도자를 꼽기 힘들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전자는 고쳐야 하겠지만, 후자는 그 자체로 삼일운동의 민주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부각시켜야 합니다.
삼일운동이 어떻게 해서 이토록 선진적인 시위 방법을 택하게 되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당시 청년들이 소로우나 톨스토이의 사상에 감화된 것인지, 아니면 도저히 일제에 폭력으로 대항할 엄두를 못낸 것인지, 결론짓기 어렵습니다. 다만 당시 군중들이 미국과 프랑스 공사관을 향해 행진했다는 사실에서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국제법 질서 위에서 ���강의 여론을 우호적으로 끌어오기 위해 이러한 방법을 취한 것입니다. 비폭력적인 시민 불복종의 모습을 보여야 도덕적 정당성을 얻을 수 있고, 열강들로 하여금 일본을 압박하게 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적어도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전봉준보다 소로우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2019년 오늘, 저는 삼일운동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기억하면서 촛불혁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삼일운동의 정신이 곧 촛불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백만이 넘는 국민들이 거리로 나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혁명을 꾀하는, 이토록 성숙한 민주주의를 가진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한 대한민국 백년의 시작이 삼일운동인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삼일운동의 정신 만큼은 결국 청년들이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삼일운동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당시 조선에 처음 등장한, 80에서 00년대생 청년들의 국제주의적 안목이었습니다. 유교적 세계관에서 자란 윗세대에게 그들은 외계인과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대 차이는 100년 뒤 지금, 또 다른 양상으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60년대생, 속칭 386 세대는 청년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를 정도로 밀레니얼 세대를 두려워 합니다. 386이 가난과 독재를 딛고 일어섰다면, 밀레니얼은 부유하고 민주적이고 세계화된 대한민국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헬조선”이다, “꼰대"다, “빻았다", 하는 말들로 기성세대를 공격합니다. 그 간극이 조금은 걱정스럽습니다.
정부는 삼일절 백주년을 맞아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남북 화합을 꾀하고, 김구로 대표되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려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삼일운동의 키워드는 민족, 임정, 나아가 항일무장투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국제주의와 비폭력 평화주의를 또 다른 키워드로 제시합니다. 삼일운동을 이끈 청년들의 신사상에 주목할 때, 비로소 삼일운동의 세계사적 의미와 대한민국의 사상적 뿌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참석하신 다른 분들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이 자리를 계기로 삼일운동의 청년정신이 더 널리 논의되고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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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issuecollector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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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이 100년 전 옥중에서 쓴 독립선언문 첫 공개 https://ift.tt/2GVgN4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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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mauibam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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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문"처럼 우리
동포에게 고... https://story.kakao.com/_b3oI28/iBRXEb6XT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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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zukabi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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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 @minimarple: https://t.co/I4rgRHIh7d 독립선언문 영어로 필요하신 분들 보세요. 원문, 한글번역, 영어, 한글 있습니다. 저는 한국어를 모르는 제 가족들에게 영어로 읽히느라 이 링크 찾아서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소리내서 읽었거든요. 정치적인 글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냐. 라고 딸들이 감탄하네요.
https://t.co/I4rgRHIh7d 독립선언문 영어로 필요하신 분들 보세요. 원문, 한글번역, 영어, 한글 있습니다. 저는 한국어를 모르는 제 가족들에게 영어로 읽히느라 이 링크 찾아서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소리내서 읽었거든요. 정치적인 글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냐. 라고 딸들이 감탄하네요.
— 꼬장꼬장한 미니마플(공수처설치강력하게 원함) (@minimarple) March 1, 2019
via Twitter https://twitter.com/zizukabi March 02, 2019 at 08:07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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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yfyrifncubh-blog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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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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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서예전각가 함평에 작품기증|(함평=연합뉴스) 김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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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서예 퍼포먼스'로 유명한 경남 울산 출 야마토신의 서예전각가 김동욱(57)씨가 '나비'를 주제로 특별 제작한 전각작품을 전남 함평군에 기증했다.11일 함평군에 따르면 김씨는 최근 함평군을 방문해 해남에서 생산되는 3㎏짜리 전각용  야마토돌인 석인재를 이용해 가로×세로 각 9㎝에 높이 16㎝의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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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면체 형태의 전각작품을 이석형 군수에게 전달했다.이 작품의 윗면에는 나비 '접(蝶)'자를, 밑면에는 '함평나비'를 새겼으며 네 옆면에는 박쥐를 상징하는 상형문자와 네잎 클로버 안의 나비, 꽃과 7마리 나비, '나비사랑' 글자 등이 각각 조각돼 있다.김씨는 오는 4월 24일 개막하는 제11회 함평나비대축제 현장에서 영.호남 화합과 나비축제 성공을 기원하는 '울산 고래와 함평 나비가 만나다'라는 주제의 서예 퍼포먼스를 펼칠 예정이다.이 퍼포먼스에서 김씨는 폭 1.5m, 길이 150m의 광목천에 대형 붓글씨로 나비축제 취지문을 써 내려가며 성공을 기원한다.김씨는 "제11회 함평나비대축제를 축하하고 성공적으로 치러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제작, 기증하게 됐다"고 말했다.함평군은 김씨의 기증 작품을 활용한 깃발을 제작해 나비축제 행사장에 전시할 예정이다.한편 김씨는 한글날 기념 훈민정음, 이명박 대통령 취임 축하, 3.1절 기념 독립선언문 등의 서예 퍼포먼스와 지난해 열린 2008 함평세계나비곤충엑스포 현장에서도 엑스포 취지문 퍼포먼스를 연출했었다[email protected]
야마토r         앉아있던 16명의 주작단원 중 순진한 애들 몇명은 이 미 비류연   43"},{"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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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shikkimus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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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과 기독교
                                                                                             김환식 장로 (Ph.D.)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로 이어지는 독립선언문의 마지막 부분은 마치 성경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은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으나 전덕기 목사(상동교회)댁에 기거하면서 성경을 배우고 자유의 이념과 비폭력정신�� 몸에 익혔다. 물론 33인 중 이상재 선생 같은 무저항주의자, 길선주 목사 같은 사랑의 사도가 있어서 3.1 만세운동을 비폭력으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삼일만세운동이 폭력항거였다면 세계에 미친 호소력이나 후세에 남긴 정신적 영향은 매우 축소되었을 것이다. 독립선언문 서명자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다. 그 당시 전국의 기독교 신자는 26만 명(인구의 1.5%) 밖에 안 되는 극소수의 집단이었는데 정말 놀라운 일을 해냈다. 사학자 이만열 교수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약 1,400 군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사건 내용이 자세히 사료에 남은 곳은 323지역이다. 그 중 78지역이 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천도교 중심이 66곳,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동하여 거사를 일으킨 지역이 42곳이다. 조직적으로 움직인 323지역 중 120곳이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주축으로 일으킨 만세운동이었다. 기미년 당시 2,100개의 전교회와 26만 명의 전교인이 단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큰일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기독교 신자라고 하면 존경을 받았으며 독립운동, 개화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되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이 한국 인구의 23%라는데 과연 민족의 선구자가 되고 있는지 반성할 일이다. 기미년에 교회당 소실 80처, 기독교 계통학교 파괴 8개교, 투옥된 교인 3,373명, 목사 54명, 전도사 157명, 장로 63명이 감옥에 갇혔다. 일제는 어린 여학생들을 십자가에 알몸으로 매달아 인두와 칼로 고문한 기록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조선의 크리스천 여학생들은 자유와 독립을 외치며 죽어갔다. 신앙의 힘이었다. 조선에 들어온 예수 바람은 곧 새 바람이며, 개화의 바람, 인간 해방의 바람이었다. 3.1만세운동 직후, 즉 1919년 3월22일 조선총독부는 선교사 대표 9명을 초청하여 긴급 좌담회를 열었다. 마펫 선교사, 노불 선교사, 웰치 감독 등이었는데 모두 30년 이상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던 고참들이다. 3.1운동을 기독교가 주도한 이상 그 원인을 분석하여 재발을 막자는 것이 모임의 취지였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일제 관헌들에게 말하였다. “조선인에게는 물질보다 중요한 것이 의(義) 곧 정의로운 삶입니다. 그들에게는 굶어도 사람답게 대접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선교사들이 분석한 조선인의 가치관은 떳떳함과 의를 따라 사는 것이므로 잘 살게 해줄 테니 굴종하라는 통치방법은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은연 중 일제 관헌들에게 압력을 넣은 것이다. 예수는 자기의 사명을 이렇게 천명하였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즉 갇힌 데서 풀어주고, 눈을 뜨게 해 주고, 압박에서 놓아주는 것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의인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두 가지를 생활에 옮기면 된다. 하나는 악과 부조리, 사람을 괴롭히는 사태를 고발하는 용기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도 절망 앞에서 굴복하지 말라. 지금도 희망이 있다”라는 메시지를 그대의 목청이 허락하는 한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끝) 20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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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draw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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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issuecollector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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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 피하고 역사도 공부해요" 도심 속 숨은 관광지 / YTN
“추위 피하고 역사도 공부해요” 도심 속 숨은 관광지 / YTN
[앵커] 이제 본격적인 겨울방학을 맞는데요.
아이들과 함께 어디를 갈까 고민하는 부모님들 많을 겁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북적이지 않으면서도 역사 공부도 할 수 있는 실내 나들이 어떠신가요.
박소정 기자가 소개해 드립니다.
[기자] "집마다 군인들 먹어야 한다면서 쌀을 공출해갔어요. 빼앗아 갔어요."
쌀 한 톨, 숟가락 하나까지 빼앗아갔던 수탈의 역사에 학생들이 귀를 기울입니다.
몇 장 남아 있지 않은 독립선언문 원본에, 오롯이 시민의 힘으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뒷이야기까지!
아픈 역사를 들려주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올해까지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임소리 / 소하중학교 3학년 : 친일파에 대해서 더 자세히 배웠고, 나중에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성하 / 소하중학교 3학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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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zukabi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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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 @moonriver365: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이 외친 3.1 독립선언문. 시대에 맞게 새로 쓴 독립선언문을 국민과 함께 읽고 싶습니다. 다가올 3.1절 100주년을 기대하며 참여해 주십시오. https://t.co/MddSDxMRig #삼일절 #함께100 https://t.co/Gi9gCi0yDD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이 외친 3.1 독립선언문. 시대에 맞게 새로 쓴 독립선언문을 국민과 함께 읽고 싶습니다. 다가올 3.1절 100주년을 기대하며 참여해 주십시오.https://t.co/MddSDxMRig #삼일절 #함께100 pic.twitter.com/Gi9gCi0yDD
— 문재인 (@moonriver365) February 20, 2019
via Twitter https://twitter.com/zizukabi February 20, 2019 at 04: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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