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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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있었던 이야기(혹은 지난해의 이야기)
*파리는 여전하다.
근 1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 렌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떠들다가, 걷고 또 걷고 계속해서 걸었다.
비 내리는 에펠탑 아래를 걸으며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다.
아이스크림이 빗물에 녹아드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으며, ��트르담을 보기 위해 모인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우리는 노트르담을 보지 않았다.
와인보다 맥주를 더 많이 마셨고, 잔뜩 취해서 가는 새벽녘의 맥도날드를 좋아했다.
우리의 대화는 대체로 2년 전, 처음 촬영장에서 만났던 때의 이야기로 흘러갔다.
파리에서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니 그곳이 그리 멀진 않게 느껴졌다.
나와 헤어지면 곧 또다시 서울로 가야 한다던 렌.
그에게 나도 데려가 달라고 몇 번이고 졸라댔다.
*파리에서 리스본으로.
공항에 닿자마자 진한 향수병이 몰려왔다.
오래된 광경들, 태양이 뜨겁게 작렬하며 내 검은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는다.
후미진 골목에는 그림자들이 가득하고, 부서진 벽, 계단 따위가 거리를 꽉 채웠고 그 위로 엉기설기 늘어진 빨래들은 살랑거리며 바람을 타고 있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이 나라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 있다.
가장 슬픈 나이를 보내고 있던 시시하고 별 볼일 없던 나는 대뜸 이 나라에 찾아와 하루에 한 번씩 슬픈 생각을 덜어냈다.
열차가 다니는 어지러운 레일 밑에 슬픔을 버리고, 불이 잘 들어오지 않는 골목길에,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 묻어두었다. 그래서 자꾸만 내 슬픔을 아는 이 나라로 다시 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리스본을 떠나야 했던 날 하루 전,
그곳의 광경이 한눈에 보이는 공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아주 오랜만에 오로지 아름다운 광경 속 저물어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저 멀리 바다의 수평선 위로 반짝이는 어선들의 불빛을 보았고, 비행기가 머리 위로 가깝게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자전거를 끌고 와 들판에 눕혀놓고서 담배 한 개비를 빌릴 수 있냐고 묻던 한 사람이 말했다.
우리는 오래전에 부서지고 물이 차오르고 망가졌어.
형태도 못 알아볼 정도로 끔찍했지.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시작했어. 그래야만 하니까.
우린 가난하지만 행복해. 우리는 이걸 가졌잖아.
사는 게 너무 아름답지 않아?
그의 목소리와 말투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다는 듯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담배를 함께 피우고, 가방 속 숨겨둔 와인��� 꺼내 나눠 마시며 가만히 저무는 광경을 보았다.
도시의 소음이 선명하게 들려오고, 살랑거리는 바람이 내 속눈썹을 건드렸다.
귓가에 시드가 부르는 Wild World가 맴돌았다.
처참하고 보잘것없던 한 해의 끝자락에서, 인생이 조금은 아름답다고 느꼈다.
*포르토에서 P를 우연히 만난 건 거짓이 아니었다.
그곳에 가기 전 나는 그에게 그를 보러 포르토에 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럼 나는 이제 너를 평생 보지 못하겠지?
나는 그때 그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그에게서 온 힘을 다해 멀어지려 무던히 노력하던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기어코 연말이 오고 나서야 나는 그를 보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그의 도시로 향했다.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
정말 오랜만에 보았던 C와 M도 여전히 그 도시에, 파비와 카이도 그곳에 있었다.
모두가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가 자주 가던 술집에 모여 시끄럽고 요란스럽게 떠들고 있었다.
대부분은 취해 이름 모를 작자들과 말을 섞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던 P였다.
감정이 장대비처럼 쏟아지듯 따갑고 매서우면서도 불안정했다.
기어코 만나게 되는 P. 그 애를 또 반년 만에.
우리의 시간은 자꾸 누군가 타임코드를 조작이라도 하는 듯 띄엄띄엄 흘러간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찌질했던 건, 할 말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그 애에게 멋진 척은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경이 과하게 몰렸다는 듯이 이마를 자주 만졌고, 시선은 어디에 둘지 몰라 애먼 쓰레기통만 쳐다보며 영어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말을 더듬거렸다.
그 애가 이야기 좀 하자고 내게 물었을 때,
마시던 와인잔을 그 애에게 주고 냅다 그 술집을 떠나 버린 것이다.
이렇게나 멋없고 허둥대는 만남을 원하진 않았다.
나는 곧장 그곳을 빠져나와 한참을 걷다가 R에게 전화를 걸었다. R은 내게 말했다.
해피 뉴 이어.
그렇게 새해가 온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내 주변에, 어쩌면 이 세상에도 어지러운 일들이 가득해서 자꾸만 마음이 덜컥 두려워지는 걸 억누르느라 말을 아꼈다.
구태여 회유시키고자 했던 생각들은 결코 쉽사리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몇 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아지지 않는 기분이 연말만 되면 나를 쫓아다녔다.
나는 그러한 것들을 슬픔의 수확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 해를 돌이켜 보자.
올해의 ���노는 여름의 잔상들. 그러면서도 올해의 슬픔은 속절없이 쌓여대던 술병. 올해의 희열은 단연 서울에서 베를린까지 오게 된 그 기억들일 것이다.
그런 것들을 곱씹다가, 이곳에 오기 전 수와 잔뜩 취한 꼴로 서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채우던 어느 테이블로 내 기억은 휩쓸려갔다.
나는 수에게 말했다.
수, 나 다시 멀리 갈 거다. 이해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냥 내가 간다고 하면 아무 말 없이 잘 가라고 해주라.
너 그렇게 아름다운 삶만 쫓다가 큰코 다친다.
가끔은 더럽고 가난한 것도 꿈꾸는 거야.
대체 무슨 소리야?
몰라, 짜식아. 그렇게 자꾸 도망치고 싶으면 가.
다시는 돌아오지 마. 너 없이도 잘 살 거니까.
수가 취해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서야 그때 그 수의 말은 취해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이 깨닫는다.
지난해의 아름다움과 맞바꾸었던 더럽고 가난한 기억들. 내가 조금만 더 그것들을 사랑했다면 조금은 편안했을 거다.
그렇게 이곳에서의 삶에서는 자주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고, 자주 누군가의 기억이 내게 온다.
멍청한 시선으로 가만히 허송세월을 보내는 시간들을 정리하고 무언가 해야만 한다고. 멍하니 앉아 있는 일 따위는 없도록. 그 누군가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빌고 또 빌었다.
*문득 깨달은 게 있다.
나는 한국을 참 사랑한다는 것.
어느 도시와 견주어 봐도 내가 살던 동네, 내가 알던 방식, 내가 자란 기억들은 그 어떤 곳도 이길 수 없다는 것.
그 생각을 하자니 눈물이 조금 솟구쳤다.
이따금씩 눈이 많이 내려 질척거리는 거리와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라도 그곳이라면 매일매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뿐더러, 여름에 한국은 습하고 짜증 나더라도 아이스커피 한 잔에 하루가 보장되니까.
독일 번호는 이상하게도 자주 헷갈리고, 한국 번호는 마치 주민등록번호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뇌리에 박힌다.
내 어린 시절을 알고, 내 성격을 알고, 내 사소한 습관마저도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전부 거기에 있으니까.
독일에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싫어서 왔냐는 질문을 했다. 한국이 싫어서 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며 집으로 돌아갈 때면 그들의 이야기를 곱씹다가 내 상황을 떠올린다.
난 단 한 번도 한국에서의 삶이 싫었던 적이 없다고.
정확하게는 견디기 힘든 일들이 진물처럼 자꾸만 새어나와서 갈피를 못 잡는 내가 싫어 그곳을 떠난 거다.
��든 것은 슬픔으로부터 회유하기 위함이었다.
*긴 여행을 끝내고, 베를린에 도착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했다.
나를 보러 왔던 R을 만나 연초를 함께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가야 하는 R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에 갔을 때, 베를린에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렸다.
푸른 하늘에서 눈이 진주처럼 쏟아졌다.
핸드폰이 없어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못했던 날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눈 내리는 광경을 찍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조용히 묻어두었다.
올해의 첫 시퀀스는 이렇게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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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뜁시다
러닝을 시작한 지 이제 막 두 달이 되었다. 친구들이 하나 둘씩 러닝을 시작하길래 한 번 따라 뛰었던 것이 두 달을 뛰고 있다. 그렇다고 대단히 많이 뛰는 것도 아니라 요즘 말로 ‘런린이’라고 하면 어울릴 것 같다. 한 주에 3-4회 정도 뛰기 시작한 게 두 달이니 대략 25-30회 정도 뛰었다고 볼 수 있겠다.
아직 재미가 들지 않았다. 살다 보니 운동을 하나 정도는 해야겠고, 등록한 헬스장은 가지 않아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헬스장에 가서 근력 운동을 하는 것보다는 신발 신고 나가서 냅다 뛰는 것이 훨씬 더 가벼운 용기를 내서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번 뛰면 5km를 뛰는데, SNS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5km는 우스워 보인다. 재미가 들지 않아 아직은 억지로 뛰는 편이라 ‘얼른 뛰고 들어가야지.’ 하는 마음에 5km를 약간 무리해서 뛰고 온다. 페이스로 따지면 4분 후반에서 5분 초반까지 다양하게 나온다. 두 달을 뛰었는데도 아직 5km가 지겨운데 달에 100km를 넘게 뛰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운동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다치기 쉽다. 다치지 않고 오래 운동하려면 내 신체에 맞는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다. 유튜브로 이런 저런 영상을 보면서 안 다치게 뛰는 법 등을 머리로 익힌 후 다음날 뛰면서 실험한다. 이렇게 뛰면 허리가 좀 당기고 저렇게 뛰면 오른쪽 무릎이 당긴다. 둘 다 자극이 오지 않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매일 갖가지 실험을 한다.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겠지만 러닝 역시 뛰면 뛸수록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다. 알아갈수록 피로가 누적된다.
뛰다 보니 목표가 생겼다. 내년 여름이 지나가기 전까지 10km를 45분 내로 주파하는 것이다. 지난 개천절에 친구들이 10km 마라톤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날 혼자 한강에서 10km를 뛰었는데 55분 11초가 걸렸다. 아무래도 첫 10km에, 다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뛰다 보니 몸에 무리를 전혀 주지 않는 페이스로 뛰었다. 그때보다 조금 더 단련된 지금은 52분 안쪽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데, 뛰어봐야 알 수 있을 뿐이다. LSD다, 뭐다, 뭐다 해서 아주 가벼운 심박수로 뛰며 거리를 늘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데, 지겨워서 ���래 뛰기가 쉽지 않다. 10km를 뛰면서도 참 지겨웠다.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내가 이렇게까지 꾸준하게 했던 운동이 있나 싶다. 설렁설렁 하던 근력 운동도 잘 하지 않게 됐고 매주 하던 풋살도 안 한 지 오래다. 오랜만에 꾸준하게 하는 운동이 생겨서 활기가 돋는 기분이다. 뛰기 위해 도림천까지 걸어가는 길이 지겹지 않다. 이것도 얼마나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책상 앞에 앉아 이렇게 내 러닝에 관해 구구절절 쓰는 것도 러닝을 통해 얻은 활력 때문이라고 해두자. 얼마 만에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써보던가. 러닝 최고. 운동 최고. 다들 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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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컨디션은 좋았다. 신발 끈이 풀리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겠다 달려본 길이 중간에 막혀있기 전까지는.
중반부터 페이스가 떨어졌다. 이틀 전, 응급실에 누워있던 나는 이 심장 통증의 원인이 무리한 운동 때문인지는 아닐까 유튜브 검색을 하려다 멈췄다. 검색창에 검색어를 쓰고 손가락을 누르는 순간, 유산소 운동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병맛 섬네일로 타임라인이 도배가 될게 뻔하다. 인공지��은 쓰레기 같은 것. 트위터 검색은 더더욱 금지다. 일론 머스크 이 쓰레기.
그런데 3km가, 5km,가 10km가 무리한 운동일까? 진짜 만에 하나, 내가 달리기를 하다 쓰러진다 하면 차라리 이런 엔딩이 나을 것이다. 레이싱 게임을 하려고 앉은 자리에서 어디 한번 w 버튼을 열심히 눌러볼까 하려는 찰나에 누군가 내 심장을 쥐고 놓았다. 살아생전 처음 느껴본 통증이었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이 레이싱 게임 제작자는 국정감사에 출석해 게임이 심장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 악의적인 질문을 받을 것이고 국내 뉴스와 각종 sns에서는 질타와 혐오와 조롱과 웃기지도 않는 유머가 타임라인을 뒤덮겠지. 아니 잠깐만, 그렇다고 달리기하다가 심장이 멎으면 한국에 부는 러닝 열풍에 찬물을 쫘악.
그래도 10km를 완주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1km가 남았다. 9.33, 9.57, 9.88, 10이라는 숫자에 도달할 때 즈음 내 옆에 한 여성의 목소리가 달려와 내 귀에 닿았다. "몇 킬로 뛰셨어요?” 놀란 나는 (심장은 멀쩡하다. 3시간에 걸친 검사 결과 내 심장을 둘러싼 혈관은 모두 정상이었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자전거를 탄 여성이 나를 바라보며 페달을 돌리고 있었다. 러닝 시간은 1시간이 넘어간 시점이었고 저녁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일단, 달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곧 10km에 도달하는데 멈출 수가 있나? 자전거가 내게 돌진해 내 무릎을 박살 내어 또다시 응급실에 간다면? 난 천우희를 떠올렸다. 그리고 연락할 거야. 우희 님. 제가 책을 쓰려고 하는데 책 제목을 <얼마나 잘 되려고 이럴까?>라고 지어도 될까요? 안되면 우리 인스타 맞팔이라도.
대답했다. "10킬로 거의 다 와가요." 자전거를 타며 나와 속도를 맞추던 여성은 말했다. 정면을 바라보며 “저도 조금 있다가 뛰거든요!. 열심히 잘 뛰세요!” 자전거는 앞서갔고 3초 후에 나이키 러닝 앱은 말하기 시작했다. 10km다 되었다고.
나는 자전거를 쫓아가, 저기요! 잠시만요 나, 나, 나이키 앱, 여기 봐줘!라고 할 줄 알았지? 아닙니다.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자전거를 탄 여성은 이미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난 달리기를 멈춰 걷기 시작했다. 집까지 걸었다. 중간에 마트에 들려 파워웨이드 제로(중요)를 사서 마시면서 인스타에 10킬로 인증을 ���기고 셀카 291690장 찍었다.
3일 치 약을 처방했으니 받아 가라는 의사에 말에 따라 약국에서 받아온 약은 염증을 완화해 주는 약이었다. 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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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또는 소수로 행동하여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들 중에는 유명하지 않은 이도 있다. 무함마드 부아지지가 한 예다. 그는 한 독재자의 부패와 억압적 통치가 23년째 이어지고 있던 튀니지의 26세 과일 노점상이었다. 어느날 시장에서 경찰이 부아지지에게 뇌물을 뜯어낼 요량으로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허가증을 보여달라며 괴롭혔다. 그는 거절했다. 경찰은 그를 발로 차고 침을 뱉고 노점을 뒤집었다. 부아지지는 관청에 가서 항의하려고 했지만, 그곳에서도 무시당했다. 2010년 12월 10일, 경찰에게 괴롭힘을 당한 지 한 시간도 안 된 때, 그는 관청 앞에서 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외쳤다. “대체 어떻게 먹고살란 말이냐?” 그러고는 제 몸에 불을 붙였다.
부아지지의 분신과 죽음을 계기로, 튀니지 전역에서 독재자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와 여당과 경찰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시위는 확산되었고, 정부와 벤 알리는 한 달 만에 실권했다. 부아지지의 행동을 계기로 이집트에서도 시위가 열려,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독재가 거꾸러졌다. 예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알리 압둘라 살레의 34년 통치가 무너졌다. 리비아에서도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34년 권세를 잃고 살해당했다. 시리아에서는 시위가 내전으로 이어졌다. 요르단, 오만, 쿠웨이트에서도 총리가 사임했다. 알제리, 이라크, 바레인,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정부 개혁이라고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른바 아랍의 봄이었다. 부아지지는 무슬림 세계의 정치개혁을 생각하며 성냥을 켠 게 아니었다. 그저 어디로도 분출할 수 없어서 안으로 향한 분노가 있을 뿐이었다. 아랍의 봄이 짧은 희망 뒤에 새 독재자, 폭력, 난민, 시리아와 ISIS라는 파국으로 이어진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어쩌면 분신자가 역사를 만든다기보다 역사가 분신자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지역에서는 오래전부터 불만이 끓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무 개 나라 수백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든 촉매는 분명 부아지지 한 사람의 행동이다.
(786~787쪽)
틀림없이 베트남전에서 단일 사건으로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 미국으로 하여금 자신은 선한 세력이라는 인식을 마침내 떨쳐버리게 했던 일은 미라이학살이었다.
1968년 3월 16일, 한 미국 중대가 윌리엄 캘리 주니어 소위의 명령에 따라 미라이라는 마을에서 비무장 민간인을 공격했다. 중대는 석 달 동안 베트남에 있었지만 적과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래도 부비트랩과 지뢰에 부대원 28명이 죽거나 다쳐서, 총 중대원 수가 백 명가량으로 줄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흔한 해석은 그들이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얼굴 모를 적을 진짜 얼굴들과 연결 짓고자 하는 욕구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반면 당시의 공식적 논리는 미라이 마을이 베트콩 전사들과 민간인 동조자들을 숨겨주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거의 없다. 참가한 군인들 중 일부는 베트콩만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보고했지만, 다른 군인들은 가리지 말고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우물을 망가뜨리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보고가 상충하지만, 아무튼 그뒤에 일어난 일은 흔한 표현마따나 고통스러운 역사로 남았다. 미군은 아기와 노인도 포함하여 비무장 민간인 350~500명을 죽였다. 시체를 훼손하고 우물에 처박았다. 오두막과 밭에 불을 질렀다. 많은 여성 주민을 집단 강간한 뒤 죽였다. 엄마 품에 숨어 있던 아이들에게 캘리가 직접 총을 쏘는 걸 봤다는 보고도 있다. 적의 응사는 없었고, 마을에 징병 연령 남성은 없었다. 그것은 성경 수준의, 로마제국 수준의, 십자군 수준의, 바이킹 수준의······ 파괴였다. 다만 이 파괴는 사진으로 남았다. 미라이학살이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 미국 정부가 사선을 은폐하려고 용썼고, 캘리에게 겨우 3년 가택연금형을 내렸다는 점이 더 경악스러운 대목이다.
미군 병사들이 학살에 다들 똑같은 수준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결국에는 총 26명이 고발되었고, 그중 캘리만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나머지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게 법정의 명령이었다).[*살해에 가담했던 이들 중 두 명이 나중에 자살했다. 스티븐 브룩스 소위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베트남에서 자살했다. 바나도 심프슨 일병은 몇 년 뒤에 자살했는데,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열 살 아들이 동네의 십대들이 쏜 유탄에 맞아 죽는 걸 본 것이었다. 심프슨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내 품에서 죽었다. 그때 본 아이 얼굴은 내가 죽였던 아이의 얼굴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사람들을 죽인 벌을 받는구나.“ 그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심하게 앓았고, 집에서 창문을 죄 막은 채 몇 년 동안 은둔하다가 세번째 자살 시도에 성공했다.] 폭력에 대한 문턱값은 개인마다 달랐다. 한 병사는 한 여성과 그 자식을 죽이고서는 더는 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또다른 병사는 민간인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을 거들었지만 발포는 거부했다. 명령에 대놓고 거역한 병사들도 있었다.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거나 쏴버리겠다는 협박을 받고서도 그랬다. 그중 한 명인 마이클 번하트 일병은 명령을 거역하며 윗선에 보고하겠다고 대들었다. 나중에 장교들은 그를 더 위험한 순찰조로 보냈다. 그가 죽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학살을 멈춘 세 남자가 있었다. 예상 가능하게도, 그들은 아웃사이더였다. 앞장선 사람은 25세의 휴 톰프슨 주니어 준위였다. 그는 글렌 안드레오타, 로런스 콜번과 함께 헬리콥터를 몰고 있었다. 어쩌면 톰프슨이 이른바 ‘눈물의 길’ 죽음의 행군에서 살아남은 아메리카원주민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의 독실한 부모는 1950년대 조지아주 시골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했다. 콜번과 안드레오타는 가톨릭 신자였다.
톰프슨과 두 승무원은 베트콩과 싸우는 보병을 도울 생각으로 미라이 마을로 날아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전투의 증거가 아니라 민간인들의 시체였다. 처음에 톰프슨은 마을이 공격당하고 있어서 미군이 주민들을 돕는 줄 알았지만, 누가 공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헬리콥터를 내렸고, 데이비드 미첼 미군 병장이 도랑에 처박힌 채 울부짖는 민간인 부상자들에게 총을 쏘는 모습과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가 한 여성을 직사로 죽이는 모습을 보았다. 톰프슨은 누가 공격하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캘리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톰프슨보다 계급이 높았던 캘리는 그에게 닥치고 제 할일이나 하라고 말했다.
톰프슨은 한 벙커에 옹송그리며 모여 있는 여자들, 아이들, 남자 노인들에게 미군들이 공격 태세로 다가가는 걸 보았다.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난 뒤 그 순간을 돌이킬 때, 톰프슨은 그 병사들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그러니까 그 순간에는 그들이 내게 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들은 적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어질어질할 만큼 강인하고 용감한 행동을 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살펴본 우리/그들 범주화의 이야기를 한순간에 몽땅 바꿔놓을 수 있는 행동이었다. 휴 톰프슨은 마을 사람들과 군인들 사이에 헬리콥터를 착륙시키고, 기관총을 제 동료 미국인들에게로 향한 뒤, 만에 하나 그들이 주민들을 더 해치려들 때는 가차없이 쏴버리라고 두 승무원에게 지시했다.[*톰프슨은 동료 헬리콥터 조종사들에게 무전을 보내어 생존자들을 병원으로 이송하라고 말했다. 안드레오타는 도랑에 쌓인 시신들을 헤치면서 살피다가 기적적으로 다치지 않은 네 살 아이를 구했다. 톰프슨은 자신이 본 것을 상관들에게 보고했고, 그들은 더 윗선으로 사건을 알렸다. 그러자 소탕 작전을 지시했던 지휘관은 이후 이웃 마을들에서 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작전을 취소하고 사태를 덮기 시작했다. 안드레오타는 3주 뒤에 전투중 사망했다. 콜번과 그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선 톰프슨은 군대면 정부며 언론이며 가리지 않고 어디에든 제보하려고 애썼고, 마리아학살이 대중에 알려지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하원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멘델 리버스 의원은 캘리의 기소를 막고 대신 톰프슨을 반역죄로 기소하려고 시도했다. 톰프슨은 캘리를 재판하는 법정에서 그에게 불리하게 증언했고, 그후 ���랫동안 살해 협박을 받았다. 군대가 톰프슨과 콜번의 행동을 기린 것은 그로부터 30년이나 지나서였다. 톰프슨은 2006년에 죽었다. 콜번이 그의 임종을 지켰다.]
자, 우리는 한 개인이 충동적 행동으로 20개국의 역사를 바꿔놓는 걸 보았다. 한 개인이 수십 년 묵은 미움을 극복하여 화해의 촉매가 되는 걸 보았다. 옳은 일을 해내기 위해서, 그동안 훈련으로 습득한 반사반응을 철저히 억누른 사람들을 보았다. 이제 마지막 사람을 볼 차례인데, 나를 가장 크게 감화시키는 이는 바로 이 사람이다.
1725년 출생한 영국성공회 사제 존 뉴턴이 그 사람이다. 음, 썩 흥미롭지 않은걸. 그는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사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아, 괜찮네. 레너드 코언의 <할렐루야>와 더불어 늘 나를 감동시키는 노래다. 뉴턴은 또한 노예제 폐지론자였고, 윌리엄 윕버포스가 노예제를 불법화하고자 대영제국 의회에서 싸울 때 그 조언자였다. 좋다, 점점 좋은걸. 이제 결정적 사실을 알 차례다. 뉴턴은 젊을 때 노예선 선장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이런 시나리오잖아. 한 남자가 노예무역으로 돈을 벌다가 별안간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깨우침을 떠올리고, 그래서 우리/그들 범주화가 극적으로 달라지고, 그의 인간성이 극적으로 확장되며, 그가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을 보상하고자 극적으로 헌신한다는 결론. 5장에서 보았던 신경가소성 현상이 뉴턴의 뇌에서 맹렬하게 펼쳐지는 모습이 눈에 선할 지경 아닌가.
현실은 그와는 사뭇 달랐다.
뉴턴은 선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11세부터 아버지를 따라 바다에 나갔다. 18세에 강제로 해군에 보내졌다가 탈영을 시도한 뒤 채찍질형을 받았다. 간신히 군대를 빠져나온 그는 서아프리카 노예선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아, 자신의 경험과 노예들의 처지가 비슷한 것을 목격하고는 번득 계시가 떠올랐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는 노예선에서 일하면서 주변 모두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 사람들이 그를 한 노예 상인과 함께 현재의 시이라리온에 내던져두고 갈 정도였다. 노예 상인은 뉴턴을 제 아내에게 노예로 주었다. 그는 여기서도 구출되었지만, 그가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던 배가 엄청난 폭풍을 만나서 가라앉기 시작했다. 뉴턴은 신에게 호소했고, 배는 가라앉지 않았으며,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리고 또다른 노예선에서 일하기로 계약했다. 이제 알겠네, 그는 신을 찾아냈고, 몸소 노예가 되어보았으며, 그래서 문득 노예무역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던 거지.
아니었다.
그는 노예들에게 약간의 공감을 내비쳤고, 복음주의로의 개종에 점점 더 진지해졌다. 결국 그는 어느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고, 6년 더 일하다가 그만두었다. 마침내 그가 제 행동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 거로군!
역시 아니었다.
그가 그 일을 그만둔 것은 험한 행해로 건강이 나빠져서였다. 그는 이후 징세원으로 일했고, 신학을 공부했으며, 영국성공회 사제에 지원했다. 그리고 벌어둔 돈을 노예무역 사업에 투자했다. 뭐라고? 이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그는 설교와 목회로 알려진 인기 있는 사제가 되었다. 찬송가 가사를 썼고, 가난하고 짓밟힌 자들을 대변했다. 그러던 중 어느 시점에 노예무역 투자를 그만두었다. 어쩌면 양심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더 나은 투자처가 나타나서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여전히 노예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마침내 노예제를 비난하는 소책자를 낸 것은 노예 상인일을 그만둔 지 34년 뒤였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비열한으로 산 시간이 그리 길었다. 뉴턴은 노예제의 참상을 몸소 목격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 그 가해자였다는 점에서 노예제 폐지론자들 중 드문 경우였다. 그는 결국 영국에서 으뜸가는 노예제 폐기론자가 되었고, 1807년 영국이 노예무역으로 금하는 순간을 살아서 목격했다.
(789~795쪽)
이처럼 적군 간에 공통의 유대를 발견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백 년 남짓 전, 그런 사건 두 가지가 놀랍도록 대규모로 벌어졌다.
제1차세계대전이 낳은 좋은 결과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전쟁으로 세 제국이 무너짐에 따라 발트해, 발칸반도, 동유럽 사람들이 독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 그 전쟁은 1500만 명이 무의미하게 학살된 사건일 뿐이었다. 모든 전쟁을 끝낸 전쟁은 모든 평화를 끝낸 폐허의 평화로 이어졌고, 결국에는 유럽이 수백 년간 무의미한 갈등에 청년들을 희생시킨 사례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제1차세계대전의 수렁에서 두 가지 희망의 사례가 탄생했다. 더 나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서 말하는데, 거의 기적적인 사건들이었다.
첫번째는 1914년 크리스마스 정전이었다. 시작은 참호 전선의 양측 장교들이 조심스럽게 상대의 언어로 “쏘지 말라”고 외친 뒤 무인 지대에서 만난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만찬중에는 적대행위를 일시 중지하고 시신도 회수하자는합의에서 시작된 정전이었다.
그로부터 일이 퍼졌다.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사실인바, 양측 병사들은 무덤을 파기 위해서 서로 삽을 빌렸다. 그다음에는 함께 무덤을 팠다. 그다음에는 함께 장례 예배를 가졌다. 그러다보니 음식, 음료, 담배를 교환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무장하지 않은 병사들이 무인 지대로 몰려나와서 함께 기도하고 캐럴을 불렀으며, 저녁을 함께 먹고, 선물을 주고받았다. 적군 병사들끼리 단체사진을 찍었고, 단추와 헬멧을 기념품으로 교환했고, 전쟁이 끝나면 만나자고 약속했다. 가장 유명한 사실은 급조한 공으로 축구 시합을 치렀다는 것이다. 점수는 남아 있지 않지만.
한 역사가가 기록한 오싹한 일화도 있다. 어느 독일 병사가 집에 보낸 편지에서 정전을 이야기하면서 모두가 참여한 건 아니라고 말했는데, 동료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한 그 낯모르는 상병의 이름은······ 히틀러라고 했다. 하지만 800킬로미터의 참호전선 중 대부분에서 정전은 크리스마스에 종일 이어졌고, 종종 새해 첫날에도 벌어졌다. 나중에는 장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고 협박해서야 모두가 싸움으로 돌아갔고, 병사들은 적군들에게 전쟁을 무사히 나가라고 빌어주었다. 충격적이고, 감동적이고, 가슴 아픈 이야기다. 간헐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다. 시신을 회수하기 위한 짧은 크리스마스 정전조차도 군사재판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1914년에는 왜 정전이 가능했을까? 참호전의 독특한 속성상, 병사들은 매일매일 적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전부터 전선 너머로 친근한 악담이 오가곤 했고, 희미한 유대가 형성되었다. 게다가 반복된 접촉은 ‘미래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정전을 배신했다가는 상대가 가차 없이 복수하리라는 예상이 들었던 것이다.
모두가 유대기독교 전통과 서유럽 문화를 공유했다는 점도 성공의 한 요소였다. 많은 병사들이 상대의 언어를 알았고, 상대국에 가본 경험이 있었다. 그들은 인종이 같았다. 적을 ‘프리츠’(제1차세계대전 때 연합국이 독일 병사를 부를 때 쓴 명칭―옮긴이)라고 부르며 놀리는 것은 베트남전에서 미군들이 베트남인을 ‘슬랜트‘(동남아시아인을 부르는 멸칭으로, 눈이 가늘고 치켜올라갔다는 데서 온 이름―옮긴이), ‘구크‘(원래 미국인이 동남아시아인을 부르는 멸칭으로, 한국전 때 한국인에게도 쓰였다. 어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옮긴이), ’딩크‘(어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국인이 동남아시아인, 특히 베트남인을 부르던 멸칭―옮긴이)라는 유사 종분화적 멸칭으로 부른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주로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정전이 벌어졌던 점을 설명하는 요소들도 있다. 제 땅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프랑스인과는 달리, 영국인은 독일인에게 그다지 악감정이 없었을뿐더러 보통 자신들이 역사적 주적이었던 후방의les derrières 프랑스인을 구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전중에 영국 병사들은 독일 병사들에게 사실 우리는 모두 프랑스인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얄궂게 말하곤 했다. 한편 우연히도 대부분 색슨인이었던 독일 병사들은 앵글로색슨인인 영국 병사들에게 친족적 친근함을 드러내면서 사실 우리는 독일의 밉상 지배 집단인 프러시아인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상부가 정전을 승인했다는 점일 것이다. 보통 장교들이 협상을 주도했고, 교황 같은 인물들이 정전을 요청했으며, 누가 뭐래도 지상의 모든 인간들을 향한 평화와 선의를 상징하는 축일이었다.
크리스마스 정전이 우리의 첫 사례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1차세계대전에서는 그보다 더 기적적인 사건이 있었다. ’공존공영’ 현상이라고 명명된 이 사건은 참호전의 병사들이 한마디 대화 없이도, 공유하는 축일 없이도, 장교들과 지도자들의 허가 없이도 반복적으로 안정된 정전 상태를 진화시켜낸 것이었다.
어떻게 그랬을까? 역사가 토니 애슈워스가 『참호전: 1914~1918』에서 적었듯이, 그 일은 대개 수동적으로 시작되었다. 양측 병사들은 비슷한 시각에 밥을 먹었고, 그때는 총이 잠잠했다. 누구를 죽이거나 죽임당하자고 저녁식사를 중단하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는가? 날씨가 끔찍한 날도 그랬다. 그때는 모두가 최우선 관심사가 범람한 참호나 얼어죽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호 자제는 미래의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에서도 생겨났다. 식량을 나르는 마차 행렬은 포대의 쉬운 표적이었지만, 상호 포격으로 이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 건드리지 않았다. 변소도 마찬가지로 무사했다.
이런 정전은 병사들이 어떤 행동을 하지 않기로 선택함으로써 생겨난 것이었는데, 반대로 뚜렷한 행동으로써 구축되는 정전도 있었다. 어떻게? 우리 군 최고의 저격수를 데려다가 상대 적진 근처의 폐가 벽에 총알을 박아넣게 하자. 똑같은 지점을 연거푸 맞히게 하자.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일까? “우리 저격수가 얼마나 뛰어난지 봤지, 이 친구는 너희를 겨냥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어 자, 어떻게 생각해?” 그러면 상대편도 최고의 저격수를 데려다가 똑같은 행동을 하곤 했다. 서로 상대의 머리 위로 쏘자는 합의가 맺어진 것이다.
이때 핵심은 의례화였다. 무의미한 표적을 거듭 명중시키는 행동을 매일 반복함으로써 하루하루 평화에의 약속을 갱신하는 것이었다.
공존공영 정전은 약간의 동요를 버텨낼 수 있었다. 가끔 병사들은 당분간 진짜로 쏴야 한다는 신호를 상대편에 보냈다. 장교들이 오는 날이었다. 이 체제는 위반도 이겨낼 수 있었다. 만약 웬 투지 넘치는 신병이 상대편 참호에 포를 발사하면, 대개의 관행은 상대편도 이쪽의 중요한 표적을 노려서 두 발을 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는 평화가 재개되었다(애슈워스가 들려준 일화가 있다. 독일군이 뜻밖에 영국군 참호로 포를 발사했다. 곧 한 독일 병사가 외쳤다. “진짜 미안합니다. 아무도 안 다쳤기를 바랍니다. 우리 잘못이 아니라 망할 프러시아 대포 문제입니다.” 영국군은 두 발의 포를 발사하여 호응했다).
공존공영 정전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후방의 고위 장교드은 반복적으로 개입하고, 부대를 회전시키고, 군사재판을 들먹여서 으르고, 적군 간에 생겨난 공통의 이해에 대한 감각을 산산조각낼 게 분명한 육박전이 따를 습격을 지시했다.
정전이 구축되는 과정은 진화적이다. 처음에는 저녁식사중에는 쏘지 말자는 것처럼 당장은 이득이 있는 저비용 제안이었던 것이 차츰 더 정교한 제약과 신호로 발전했다. 정전 위반을 다루는 방식이 변형된 팃포탯이었따는 점도 눈에 띈다. 기본적인 협력 성향, 위반에 대한 처벌, 용서의 메커니즘, 명확한 규칙 등의 요소가 꼭 그렇다.
사회적 세균들처럼 우리도 협력을 진화시킬 줄 안다니, 만세! 하지만 협력적 세균들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심리다. 애슈워스는 공존공영에 참여했던 병사들이 적을 보는 심리���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꼼꼼하게 탐구했다.
애슈워스는 그 변화가 단계적이었다고 말한다. 첫째로 일단 상호 제약이 생겨나면, 적도 우리처럼 사격을 중지할 동기가 있는 합리적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그들을 신의 있게 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난다. 처음에는 이것이 순수하게 이기적인 이유, 즉 우리가 합의를 위반하면 상대도 되받아 위반하리라는 이유에서 생겨난 의무감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것이 약간은 도덕적인 의무감으로 발달한다. 자신을 신의 있게 대하는 상대를 배신하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꺼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전의 구체적 동기에서 깨닫는 바도 있다. “와, 저녁식사를 방해받고 싶지 않은 건 저 사람들도 똑같네. 저 사람들도 이 장대비 속에서 싸우고 싶어하지 않네. 저 사람들에게도 골칫덩어리 장교들이 있네.“ 스멀스멀 동지애가 생겨난다.
이 과정은 더 충격적인 현상으로 이어진다. 교전국의 전쟁 체제들은 늘 그렇듯이 상대에 대한 유사 종분화적 악성 선전을 쏟아낸다. 하지만 애슈워스가 병사들의 일기와 편지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적에 대한 적대감을 가장 적게 드러낸 것은 오히려 참호전 병사들이었다. 적대감은 전선에서 멀어질수록 커졌다. 애슈워스는 한 최전선 병사의 말을 인용했다. ”고향에 있는 사람들은 적을 욕하며, 모욕적으로 희화화한다. 하지만 나는 괴물처럼 묘사된 독일 황제 그림에 진절머리가 난다. 여기 전장에서는 용감하고, 숙련되고, 재주 좋은 적을 존중하게 된다. 그들도 고향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왔고, 우리처럼 진흙탕과 비와 총알을 견뎌야 한다.“
우리와 그들은 유동적일 수 있다. 만약 누가 당신이나 당신의 전우들에게 총을 쏜다면, 그는 분명 그들이다. 하지만 그 밖의 순간에는 그보다도 쥐와 이, 식량에 핀 곰팡이, 추위가 그들이었다. 본부에 편하게 있는 장교들, 다른 참호전 병사의 말을 빌리자면 ”저멀리서 추상적인 전략으로 우리를 죽이는 놈들“도 그들이었다.
이런 정전은 영원할 수 없었다. 전쟁의 최후 국면에서 영국 고위 사령부가 소모전이라는 악몽 같은 전략을 채택함에 따라, 공존공영 정전은 자취를 감췄다.
(797~802쪽)
행동 - 로버트 새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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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가게 El bazar de los juguetes"
2020년 개인 출판한 '지구와 바람과 별과 땅고'는 머리말에 밝혔듯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해 쓴 책이었다. 갈 곳 없고, 할 것 없이 시간 때우자니 이 권태로움을 어떻게 견디나, 이러다 미칠 수도 있겠구나 싶어 궁리 끝에 반강제로 시작한 집필 작업이었고 돌이켜보면 글 감옥에 갇힌 작가의 광기가 아녔나 싶을 정도로 밤낮으로 골몰한 끝에 2~3달 만에 탈고했다. 판데믹 같은 상황이 또 오지 않는 한 절대로 안 하고 못 할 미친 짓.
AI가 없던 시절, 스페인어 문맹자가 구글과 파파고에만 의지해 정확한 가사 의미를 알아 내기가 몹시 어려웠다. '땅고는 이렇게 춘다(=Así se baila el tango)'가 가장 기억에 남은 헛발질이다. 당시엔 제목만 보고 단순히 땅고 추는 법을 설명한 내용이구나 알았는데, 나중에 확인하니 "네깟 것들이 땅고 출 줄 아냐?"며 비꼬는 것이더라고.
또 하나 기억에 남은 거는 '장난감 가게(=El bazar de los juguetes)'. 까를로스 디 살리 악단 가수였던 로베르또 루피노(Roberto Rufino) 작곡, 레이날도 이쏘(Reinaldo Yiso) 작사.
대다수 땅고 가사는 꼼빠드리또의 찌질한 연애담이긴 하지만 간혹 가난, 엄마, 형제 같은 주제를 다룬 것이 있다. 스페인어 가사를 구글과 파파고에서 각각 영어, 한국어로 번역한 네 가지 결과를 펼쳐 놓고 끙끙대다 어떤 의미인지를 안 순간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 크리스마스임에도 사소한 장난감 하나 가질 수 없었던 사람이 장난감 가게 물건을 통째로 사서 동네 아이들에 나눠 주려 한다는 내용이다. 특히 뒷부분에 "장난감 하나 사줄 돈조차 없어 입맞춤으로 대신해야만 했던 엄마"를 언급한 대목에서 먹먹함을 느껴 글쓰기를 잠시 멈춰야만 했던 기억. 다음은 AI에게 요청한 가사 전문.
-=-=-=-=-=-=-=-=-=-=-=-=-=-=- 주인 양반, 문을 닫지 말아요. 놀라지 하시고. 가게에 있는 장난감 전부 내가 사려고. 얼마가 들든 상관없어, 돈은 충분하니 걱정 마시오. 하룻밤이라도 동방박사가 되고 싶네.
그래서 이 골목 아이들 모두가 내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이 기쁨의 햇살을 손에 꼭 쥐게 해주고 싶어요.
장난감 가게에, 어릴 적엔 몇 번이나 몰래 다가가 바라보곤 했었나.
밖에서, 유리창 너머로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그저 눈으로만 봤었네.
울 엄마는 너무 가난해서 빵 하나 살 동전조차 없었거든.
그런데 이제는, 운이 나를 좀 도와주었네. 어떤 아이도 놀 장난감 하나 없이 남겨두고 싶지 않아.
나는 알지, 크리스마스 이��에 선물이라곤 마른 빵 한 조각뿐인 그 마음을.
길 건너 아이들은 현관에 장난감을 잔뜩 두고 노는데 나는 그걸 바라만 봐야 했었지.
나는 알지, 아무것도 줄 수 없었던 가난한 엄마의 따뜻한 입맞춤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그렇기에 내가 장난감을 다 사는 거야. 그것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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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20년도 넘은 고등학교 친구들이 있다. 그 중에는 초등 아니 국민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도 있으니까 길게는 30년도 넘은 사이다. 17살 사춘기 시절에 만나서 입시를 거쳐 대학을 가고 군대도 가고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하는 동안, 그래도 우리는 일 년에 두 세 번을 보면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내가 워낙 사람들을 좋아하는 탓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한국에 들어가는 날이면 '이참에 모이자!'하면서 자리를 만드는 친구들이 늘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이 친구들이 자랑스럽다. 이제는 각자의 생업에서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지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면서 서로를 응원하고 있다. 생각하는 방식이나 방향도 비슷하기에 이렇다할 분쟁도 없었던 것 같다. 자주 못 봐서 아쉬우면 아쉬울 따름이지 9명으로 채워진 우리 단톡방은 언제라도 마음 편히 수다를 떨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남자들의 단톡방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올 때, 특히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끼리 모여있으면 저열한 대화 밖에 없다는 인터넷 썰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많다. 물론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있었기 때문에, 나름의 도덕적 선을 따르면서 또 실천하고 있는 덕분이라는 생각도 한다.
12월 3일 밤에 일어난 괴상한 일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했다. (사실 시차 때문에 새벽 4시에 잠들었지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40여 년 만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대통령이라니. 그 이유가 자기 마누라를 지키고 야당이 싫어서라니. 국가 전복 세력을 위해서라면서 국회를 공격하다니. 뭐 하나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충암고. 고등학교 선후배들끼리 작정한 일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선후배, 더 나아가 친구끼리 도대체 어떤 시간을 보내왔으면 내란을 일으킬 수 있는 걸까? 내 고등학교 친구들은 어제 비상 계엄 사태를 같이 지켜보면서 가슴 졸여왔는데, 저들도 고등학교 때 만난 인연으로 나라를 이 지경 이 꼴로 만들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에겐 자랑일 될 수 있는 관계가 누군가에는 민주주의 가치를 짓밟아가면서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기 위한 카르텔이라니. 관계라는 것이 이런 건가.
두 번 다시 목격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내가 나고 자란 나라를 먹칠하는 것도 모자라서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관계에 대해서도 이렇게 쓰린 마음을 들게 하다니.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은 그 누구도 대표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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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연말결산
나치고는 꽤 부지런히 다녀서.. 뒤늦게라도 개별 사건들에 대해 일기를 쓰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절대로 올해 안에 연말결산을 완성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에! 날림으로 연말결산 먼저 써보겠어요. 결산은 다행히 쉬운 게 이 여자 걍 1년 동안 슬램덩크밖에 한 게 없답니다~ 고마워요 이노타케~ 내 1년을 털어가줘서~~

1월
슬램덩크 입덕하다. (시작부터 망하고 시작한 것이다. 또 이렇게 인생을 무언가에 쉽게 꼬라박고...)

인사이동하자마자 일주일 만에 버스 13대 계약과 운행을 어케든 해내고(회사생활 4년차, "어케든 해내다"가 직장생활의 정수임을 깨닫다) 그렇게 고생길을 달리기 시작하다. 죽여줘.. 교육보내주든가..

2월
2월 항상 개노잼의 달이지만 그래도 슬램덩크에 타오르며 즐겁게 보낸 듯. 맨날 퇴근하면 프박 뽑으러 가고, 점심시간에 핑계 대고 프박 뽑으러 가고, 덕질메이트들한테 프박 좀 뽑아달라고 부탁했던 기억들밖엔.. 없네...


3월
3월도 사진함에 먼... 슬램덩크 짤밖에 없는데 민망해서 바될없 사진 올림. 올해 바될없 되게 열심히 만나고 우리끼리 사이는 돈독해진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책은 하나도 없음ㅋㅋㅋㅋㅋ 내년엔 노트에 따로 기록 남기기로 했으니까~ 내년에도 열심히 만나서 바보짓해야~~

4월
슬램덩크 열심히 하고 있죠. 하 진짜 웃긴 거. 옷 보니까 생각났는데 저 날 낮에 소개팅 하고 오후에 슬덩보러 달려감. 덕질 좀 하겠다는데 현실 남자가 너무 방해되네요. (울엄마가 이 글 못보게 해)


메이데이 직전엔 커다랗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 절로 템플스테이도 다녀왔다. 환상에 차서 마음의 안정, 작지만 큰 깨달음 이런 거 기대하며 갔는데 그냥 스님들과 함께 하는 우당탕탕 1박2일 수련회..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일반 여행보다 숙박비가 저렴했으니까.. 하산하자마자 허겁지겁 고기 구워먹음. 레전드 불경함.

5월
비 오는 어린이날 글렌체크 단독콘서트에 다녀왔다. 올해 spotify 순위권 전부 일본밴드라 매국노 될 뻔 했는데 갑자기 글렌체크가 날 재입덕시키더니 1위를 지켜줌..하..ㄳ.. 재입덕한 이유: 상반기에 bleach 앨범에 꽂혀서 겁나 듣고 단콘까지 다녀왔는데 생각해보니 대학생 때 좋아하던 밴드 중에 아직도 잡음 없이 지속적으로 좋은 음악 내고 있어서 10년 뒤에도 콘서트 가는 밴드가 글첵밖에 없었음.. 그 사실이 갑자기 엄청나게 소중하게 느껴졌어요.


좋아하는 게 많은 건 행운이야.
6월
6월보다 조금 이전 봄 이야기인데.. (영상이 6월♥) 고등어가 우리집 테라스에서 출산을 해줬는데.. 몸이 한창 건강해서 그런지 네 마린가 다섯 마린가.. 애기들을 최고로 많이 낳았다.. 그러다 페인트칠을 하느라 집이 좀 어수선한 사이에 잠깐 보금자리를 옮겼는데.. 하필 그때 폭우가 내리는 바람에 딱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그마저도 겨우 살아남은 거라 온갖 잔병이 많아서 튼튼하게 오래 살라고 튼튼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런데 얘가 우리집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경계심이란 게 없어도 너무 없고..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들도 첨엔 어느정도 경계심이 있는데 이렇게 성격좋고 살가운 고양이는 처음 봐서 가족들이 걍 다 녹아내림.. 고등어가 당시에 심적 충격을 받았는지 잘 돌보지도 않고 하양이랑 까망이가 공동육아를 했는데, 아니 어쩌면 그래서 눈치보는 막내처럼 사람둥이로 자란 것 같다ㅜㅜ 지금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사고뭉치인데 사고를 얼마나 치고 다니든 좋으니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 볼 수 있기를 바란당.. 흑흑 울튼튼이...

7월
인생 첫 오션뷰 호텔ㅎㅎ 7월 중순에 팀이동 해서 지옥문 시즌2 열렸는데도 굴하지 않고 꾸역꾸역.. 예약한 대로.. 항상 해보고 싶었던 광안리에서 낮에 해수욕하고 밤에 술 마시러 가기를 실행했다. 해수욕하겠다고 수영복이랑 비치타올도 사고 다이어트도 빡시게 했는데 날씨운이 안 좋아서 흐리고 추워 아쉬웠음ㅜ 그래도 비는 안 와서 입수 성공했으니 다행이고 감지덕지... 해수욕은 뭔가 마음 먹고 해야 한다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별 거 아니더라~ 내년에는 다른 바다로 가봐야지~~


8월
락페의 달. 펜타포트와 인생 첫 해외락페 ★섬머소닉★ 대성공.

9월
추석 사랑해. (성의가 없는 게 아니라 가을은 그냥 추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구요.)

10월
올해도 간 부락. 개씹덕들을 위한 라인업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락페도 농놀도 놓치지 않는www


11월
친구들이 생일에 주문케이크? 해줄 수 있음. 하지만 딸기 못 쓰는 철에 굳이 송태섭 딸기생크림케이크 재현해오기? 평생 가자는 거거든요.. 딸기는 모형이고 내용물은 제철 밤케이크인 끔찍하게 로맨틱한 혼종.. 내가 무슨 짓을 해야 내년에 이것을 보답할 수 있지? 나만 씹덕질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인천에 1박으로 놀러가서 태어나 처음 월미도 바이킹 타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보는 것이길 빌다. 어떤 우정은 사랑보다 강하다. 아주 만에 하나 나중에 내가 자식을 낳으면 월미도 가서 엄마 바이킹 같이 타줘 하는 불효자식이 아니길.

도쿄에서 리암 보고 서울에서 노엘, 겜, 크리스 봤으면 저는 올해 오아시스를 본 것이나 다름없죠? 사혼의 오아시스 모으기.. 내힘들다진짜.. 아저씨들만 합치면 되는 일인데... 아~ 아저씨들이 합쳐주면 좋은데 진짜..(수동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12월
구몬의 힘으로 엄마 첫 자유여행 시켜주기. 환갑 여성과 함께하는 오사카교토 여행 일기.. 다른 게시물에서 천천히 이어집니다..


올해도 휴가를 못내고 자존심 상하게 종무식 참여하고ㅡㅡ,, 트위터 영업 믿고 최현우 마술쇼 보러 달려감. 그런데 마술쇼라뇨? 그는.. 마법사입니다. 하 너무 재밌어. 돈 좀 아껴보겠다고 S석 했다가 땅을 치고 후회했다. 등쳐먹는 아이돌 콘서트만 가봐서 티켓값 차이로 진정 경험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단 말입니다. 넘 재밌어서 앞으로 매년 가기로 했음. 반드시 1층으로..
기타
그 밖에 올해 있었던 일들.. 올해는 유독 좋은 일본 밴드들을 많이 ��게 돼서 좋았고.. 영화는 잘 안 본 것 같다.. 슬램덩크만 존나 봄.. 4년만에 핸드폰을 아이폰15로 바꿨고 신경 쓰이던 피부가 어째 치료하려 하면 할수록 급격하게 악화돼서 12월부터 난생 첨으로 한의원을 다니고 있다. 효과가 있음 좋겠는데 걱정이다ㅜㅜ.. 그리고 전적으로 내가 계획하고 인솔한 자유여행을 한번 다녀오니 여행이란 것이 갑자기 너무너무너무 재밌고 좋아져서 내년은 예산이 허용하는 한 더 많이 여행을 다니고 싶다. 하여튼 올해는 업무가 일년 내내 바빠서 힘들었는데도 깊게 좋아하는 것도 새로 만들고 첫 해외락페 같은 즐거운 경험도 부지런히 챙겨서 여럿 했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왠지 항상 개같이 피곤하더라..) 2024년은 더 재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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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기
언젠가 그런 기억이 났다.
난 원래 음료수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사실 네가 빨리 집에 가는 게 싫어서 그래서 자꾸만 자판기 앞을 서성이며 시간을 끌곤 했다.
밍기적 거리면서 다 마시지도 못한 음료수를 손에 들고 더울 때에나 추울 때에나 그런 순간들을 담아두고 싶어했다.
뭐가 먹고 싶냐는 네 물음에도 허둥대며 아무거나 골라도 된다는 바보같은 대답을 해도
늘 그 중에 제일인 것을 네가 감쪽같이 골라내는 걸 보면서 우리가 천생연분인줄만 알았지.
지금에야 커피도 아무 곳에서나 마시고 음료수도 마시고 싶은 만큼 잔뜩 살 수 있는 대충의 어른이 되긴 했지만,
그런 때의 순간들이 어떻게 지나온 지 모를 만큼 까마득해지기도 했다.
음료수를 고르던 나의 손도, 자판기 앞에 서성이던 날 모른척 반가워 해주던 너의 웃음도,
그런 모든 것들이 이제 오지 않는 것들이라 그래서 약간은 씁쓸하기도 하고 그립기도 한 기분이 드나보다.
-Ram
*자판기
1. 내가 자주 읽고 자연스럽게 손이 뻗게 되는 그런 책들 말고, 더 다양한 책을 읽고 싶다. 그래서 그냥 랜덤으로 책이 나오는 자판기가 집 앞에 있었으면 좋겠다. 도형이든, 색깔이든, 여러 버튼이 구분되게 나열되어 있는데 돈을 넣고 그날 내가 끌리는 버튼을 누르면 어떤 책이 딸깍하고 떨어지는 거지. 그게 소설이 될 수도 있고, 문제집이 될 수도 있고, 에세이가 될 수도 있고, 두꺼운 역사책이 될 수도 있고. 그리고 그 책을 읽어도 되고, 누군가 필요할 것 같은 사람에게 선물을 해줄 수도 있고. 늘 그 자판기 앞에 서면 어떤 책이 나올까 설렐 것 같다.
2. 조만간 3년 만에 제대로 된 한국의 겨울을 ��낄 것 같다. 작년 초에 잠시 한국에 왔었을 땐 이게 겨울인지 뭔지 싶기도 전에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기 바빴는데, 이젠 가을부터 차근차근 밟아서 겨울까지 가겠지. 늦가을쯤, 초겨울쯤 찬 바람이 불 때 학교 도서관에서 시험공부하다가 잠시 도서관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따뜻한 조지아 오리지널 캔커피 자주 마셨는데. 친구가 좋아했던 따뜻한 실론티도 생각나네. 올해는 편의점이나 자판기에서 조지아 오리지널 보이면 꼭 마셔야지. 그 맛이 그립다.
-Hee
*자판기
마지막으로 자판기를 이용해 본 게 언제였는지 또렷하게 기억한다. 대마도에서 트레킹 하던 중에 발견했던 담배 자판기. 일본어를 모르니 아무거나 눌러서 뽑아 피웠다가 고농도 타르, 니코틴 한 모금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기억. 그때를 제하면 자판기를 이용해 본 게 도대체 언제인지 모르겠다. 단 음료를 싫어하니 자판기를 이용할 일이 없는데 내 몇 안 되는 좋은 점이라고 생각된다.(그런데도 동전들이 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다.) 입맛이 탄수화물도 좀 꺼려 해주면 좋으련만.
-Ho
*자판기
돈을 넣으면 자판기는 우물우물 돈을 먹으며 내가 선택한 것을 내어준다.
내가 주문한 물건이 나에게 배달이 오듯, 내가 선택한 것을 자판기가 성실하게 그대로 내어주듯, 나는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선택하면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내가 뭘 원하느냐겠지.
사랑을 통해서, 관계를 통해서 나를 더 알아가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 가지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들을 세상에 더 많이 말해야겠다.
내가 낸 용기와 내가 한 노력보다 더 많이 내어주는 세상은 엄마 같다.
지나가다가 자판기가 보인다면 음료수 하나 뽑아 마셔야지. 그리고 감사하다고 생각 해야지.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에.
-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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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와 법원은 한식구 카르텔>
한국에서 선관위와 법원은 역시 한통속이었다. 엄청난 국민적 공분을 산 중앙선관위 고위직 자녀 부정채용 의혹과 관련해 구속영장이 청구된 전직 선관위 고위 인사에 대해 법원이 사안의 중대성을 인정하면서도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귀에 걸면 귀걸이,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하나마나한 이유를 들어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현재 중앙선관위 및 지방선관위 위원장들은 모두 현직 판사들이 겸직하고 있다. 중앙선관위원장은 현직 대법관이 겸직하고 있고 시도 및 시군구 선관위원장은 지방법원장이나 지방법원 판사가 겸직한다. 각급 선관위원장을 겸직하는 판사들은 선관위에서 선관위원장 수당 받고 진수성찬 대접이나 받으면서 선관위 공무원들이 갖고 오는 서류에 결재나 하는 왜곡된 구조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법원은 지난 4.15 총선 선거무효소송 재판 과정에서도 노골적으로 선관위를 비호해 거센 질타를 받은 바 있다. 그랬던 법원이 이번에 선관위 고위직 자녀 특혜채용 비리 사건 피의자인 선관위 전직 고위직 구속영장을 기각함으로써 선관위와 법원은 사실상의 한식구, 유착의 카르텔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김미경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위계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검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된 송봉섭 전 중앙선관위 사무차장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 심문(구속영장심사)을 한 뒤 3월 7일 밤 "공무원 채용 절차의 공정성과 관련된 중대한 사안이기는 하나 피의자를 구속할 필요성 및 상당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김미경 부장판사는 "관련 증거가 대부분 확보돼 있고,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하며 연락하고 있다는 사정만으로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며 "주거, 가족관계에 비추어 도망할 염려가 낮다고 보인다"고 밝혔다.
함께 구속영장이 청구된 전직 충북선관위 관리과장 한모씨의 구속영장도 기각됐다. 김 부장판사는 "사실관계는 대체로 인정하고 있고 관련 증거가 대부분 확보돼 있다"며 "퇴직자로서 선관위 소속 공무원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정만으로 증거인멸 염려가 있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이에 앞서 선관위 부정채용 의혹을 수사중인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김종현 부장검사)는 4일 송봉섭 전 사무차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전격소환 조사한 뒤 5일 송봉섭 전 사무차장과 전직 충북 선관위 한모 관리과장에 대해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위계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공모해 2018년 1월 송봉섭 전 차장의 딸 송모씨를 충북 단양군 선관위 경력직 공무원으로 채용토록 한 혐의를 받는다.
인사 업무 담당자이던 한씨가 송 전 차장으로부터 직접 청탁을 받아 채용 절차가 진행되기도 전에 송씨를 합격자로 내정했고, 이후 형식적으로 채용 절차를 진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송 전 차장은 중앙선관위 고위직인 기획국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충남 보령시청에서 8급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송씨는 면접위원 3명으로부터 모두 만점을 받아 선관위 경력직으로 합격했다.
한씨의 경우 고등학교 동창의 딸인 이모씨의 충북 괴산군 선관위 경력직 공무원 부정 채용에도 같은 방식으로 관여한 것으로 검찰은 파악했다. 한씨는 이를 위해 이씨의 거주 지역을 경력채용 대상 지역으로 결정하고, 이씨를 합격자로 내정해 채용 절차를 진행한 것으로 조사됐다.
송 전 차장은 채용 비리 의혹이 불거지면서 선관위가 지난해 5월 특별감사를 진행하자 "특별감사 결과와 상관없이 현 사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함께 딸의 부정채용 의혹이 불거진 박찬진 전 선관위 사무총장과 함께 사퇴했다.
한편 2022년 광주광역시 남구 9급 지방공무원에서 전남 강진군 선관위 경력직으로 채용된 박찬진 전 사무총장 자녀는 6개월 반 만에 8급으로 승진해 '아빠 찬스' 논란이 일었다.
검찰은 권익위원회 수사 의뢰와 시민단체인 자유대한호국단 고발 내용을 검토해 같은 해 9월부터 11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중앙선관위와 지방선관위, 박찬진 송봉섭 자택 등을 압수수색하며 본격 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송봉섭 전 사무차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면 상급자인 박찬진 전 사무총장도 소환조사할 방침이었으나 법원에서 사안의 중대성을 인정하면서도 증거인멸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송 전 사무차장 영장이 기각되면서 박찬진 전 사무총장에 대한 수사에도 일정부분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선관위 부정채용 의혹 고위직에 대한 김미경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의 구속영장 기각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저런 식의 논리라면 정말 속말로 엿장수 마음대로 아닌가.
과거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물론 사법부의 수장이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까지 구속영장을 자동판매기처럼 발부하던 한국 사법부와, 스스로 범죄 혐의가 중대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걸핏하면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군색한 이유로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요즘 한국 사법부는 같은 사법부가 맞는가. 왜 상대에 따라 그렇게 구속영장 발부 기준이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 달라지는가. 참으로 황당한 구속영장 기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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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액땜인가… 우울하고 꿀꿀해
폰 바꾼지 3일 만에 떨어트려서 찍힘 근데 너무너무 속상하고 짜증 나
이럴 때 어떤 마인드로 살아야 하나
뭐든 마음을 많이 주고 그 마음이 클수록 실망과 서운함이 큰 거 같아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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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적으로 일하는 방법
최근 다소 독립적인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줄어들어 일 하기는 편해졌지만 반면 너무 독립적이다 보니 성과측정이나 동기부여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또한 시간은 많아졌지만 시간이 많다고 항상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물이 좋지 않을 때 시간 부족을 핑계로 대는데, 시간은 원래 부족합니다. 한 달을 줘도 부족하고, 일 년을 줘도 부족한 게 시간이죠. 중요한 건 시간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입니다. 게다가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에 따른 업무 성과가 비례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100시간 동안 한 일을 어떤 사람은 1시간 만에 끝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벽돌을 A지점에서 B지점으로 나르는 단순 노동이 아닙니다. 심지어 단순 노동 조차도 어떤 사람은 덤프트럭을 갖고 와서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깨쳐야 할 것은 덤프트럭을 어떻게 가져오느냐는 거겠죠.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일을 잘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제가 실천 중인 팁을 소개해봅니다.
즐겁게 일합니다. 워라밸이 아니라 워라인(Work-Life Integration)이 필요합니다. 일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빨리 일을 끝내고 개인 시간을 갖겠다는 자세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즐기고, 인생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한다는 마음가짐이나 욜로(YOLO) 같은 자세는 매우 위험합니다. 고령화 사회에서 우리는 앞으로 40년 이상 꾸준히 일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 기간을 행복하게 보내려면 무엇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즐기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목표를 세분화 하여 단기간에 처리합니다. 업무의 호흡이 너무 길면 성과가 보이지 않고 쉽게 지칩니다. 최종 목표를 기준으로 업무를 여러 개의 작은 목표로 나누고 또 이를 세분화 하여 여러 개의 태스크로 나눕니다. 태스크는 적어도 하루에 한 개 정도는 끝낼 수 있도록 하여 매일매일 완료하는 기쁨을 누리도록 합니다. 꾸준히 동기부여를 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코어 타임을 설정합니다. 주요 업무가 연구개발이다 보니 몰입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에는 논문을 보거나 코딩을 하며 오로지 연구개발에 관련된 일만 합니다. 페이스북은 물론, 인터넷을 하거나 메신저도 보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일에 집중하는 시간대가 다르겠지만 저는 점심 이전까지 오전 시간대를 코어 타임으로 정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시간에 연락하지 말라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가끔 보면 메신저에 '11:00 ~ 16:00 코어 타임 메시지 금지' 이런식으로 공지해두는 사람이 있는데, 회사는 혼자서 일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전에도 나를 찾는 핸드폰 알림이 울리면 한 번쯤은 화면을 쳐다봅니다. 긴급한 요청은 바로 응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급적 독립적인 업무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재택근무 시에도 이 시간에는 침실과 분리된 독립적인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주로 서재로 이동하거나 아예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일할 장소를 정해 아침에 산책 겸 걸어가면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노트북 어댑터는 챙기지 않습니다. 배터리가 닳을 때까지만 일하고 그 시간이 지나면 코어 타임을 종료합니다.
오후에는 커뮤니케이션 등 다른 업무를 병행합니다. 그렇다면 하루 종일 몰입해서 일하면 더 좋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람은 기계와 달리 하루 종일 몰입할 수 없습니다.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하루 종일 몰입한다고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오히려 페이스북을 조금씩 하거나 뉴스나 책을 읽고, 메신저로 커뮤니케이션하고 때로는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업무를 자주 전환해야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옵니다. 그는 하루에 4시간만 글을 쓴다고 하죠. 하루 종일 글을 쓴다고 좋은 글이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간을 정해서 집중할 때 훨씬 더 좋은 글이 나옵니다. 개발도 비슷합니다. 하루 종일 코딩한다고 좋은 코드가 나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시간을 정해서 집중할 때 훨씬 더 좋은 코드가 나옵니다. 개발이 아니라 기획 문서 작성 같은 다른 업무도 비슷합니다. 시간을 많이 투자한다고 좋은 기획이 나오는 게 아니죠. 시간을 정해 집중할 때 훨씬 더 좋은 기획이 나옵니다. 물론 대부분의 해커 출신들이 그렇듯 저도 예전에는 밤 시간대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업무와 관련해서는 오전을 활용하는 형태로 습관을 바꾸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오전에 집중해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하고 나면 시간을 관리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침형 인간』을 보면 12시 전에 하루의 모든 업무를 끝낸다는 느낌으로 하라고 조언합니다. 오후에는 한결 더 편하게 다른 업무에 임할 수 있죠. 오후에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업무나 회의, 다른 사람들의 코드를 리뷰해주거나 기술적인 조언을 해주기도 합니다.
꾸준히 합니다. 일을 잘 하는데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현명함과 성실함. 현명함이 방향이라면 성실함은 속력이죠. 현명함은 쉽게 높이기 어렵습니다. 반면 성실함은 언제든 바로 실행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현명함 또한 꾸준한 성실함에서 비롯됩니다. 지금까지 수 많은 현명한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꾸준함이 뒷받침되지 않은 경우는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제 경우에는 주말에도 쉬지 않고 오전 코어 타임을 유지합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계속해서 오전에 일을 하는 것인데, 굳이 왜 이렇게 하냐고 묻는다면 흐트러짐 없이 꾸준함을 유지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일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굳이 주말에도 회사에 충성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자신을 위해 일하고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 일 하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함께 일하는 동료를 위해 일합니다. 당신 곁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커리어를 이어가는 내내 어디선가 다시 만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당장 창업을 할게 아니라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회사에 충성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의 성장을 위해, 함께 일하는 동료를 위해 하는 일이라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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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예진도 반한 ‘감탄브라’ 열풍! 하루 매출 11.5억, 그 이유는?
요즘 SNS와 커뮤니티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단어 중 하나, 바로 ‘손예진 브라’입니다. 심리스 브라계의 레전드로 불리는 감탄(gamtan)이 또다시 브랜드 사상 최고 일 매출을 경신하며 진짜 감탄이 나오는 기염을 토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14일, 감탄브라는 하루 만에 무려 11.5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그것도 단 하루 만에요! 이 기록은 올해 4월 5억 돌파를 시작으로 5월엔 6억, 6월 초엔 7억을 넘어서는 상승세 끝에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특히 이번 기록은 주말 트래픽 집중과 제품 입소문이 맞물리며 터진 폭발적인 반응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그 중심엔 바로 감탄의 대표 모델 손예진이 있습니다. 광고가 공개된 이후, 해당 제품은 단순한 기능성 속옷을 넘어서 ‘손예진 브라’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브랜드 이미지까지 폭발적으로 끌어올리고 있죠. 그 결과, 런칭 직후 신규 회원 수는 무려 7배 증가, 주요 제품은 1차 수량 품절에 이어 추가 입고까지 빠르게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감탄브라의 대표 제품인 ‘감탄 인견쿨’은 올여름 리뉴얼을 통해 더 강력하게 돌아왔습니다. 효성티앤씨와 협업해 개발된 ‘아쿠아 프레쉬 25+인견’ 원단은 뛰어난 흡습성과 통기성, 그리고 더 부드럽고 시원한 착용감을 자랑합니다. 특히 감탄 최초로 반타공 패드가 적용돼, 여름철 가장 신경 쓰이는 땀과 냄새 문제까지 말끔하게 해결합니다.
심리스 브라의 본질은 ‘안 입은 듯한 편안함’이죠. 감탄 인견쿨은 와이어 없이도 완벽한 지지력을 제공하고, 독일 더마테스트 엑설런트 인증까지 받아 민감 피부도 안심하고 착용할 수 있습니다. 여름엔 가볍고 시원하면서도 촉감 좋은 속옷이 진짜 필수라는 점, 모두 공감하시죠?
또 한 가지, 자세교정 효과로 품절 대란을 일으켰던 ‘자세브라’도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왔습니다. 2025 여름버전 ‘에어쿨 자세브라’는 겉감과 안감 모두 시원한 메쉬 소재를 사용했고, X핏 특허 기술이 적용돼 등과 어깨를 자연스럽게 당겨주며 바른 자세를 유도합니다. 하루 종일 입고만 있어도 등 라인 정리 + 군살 커버 + 예쁜 어깨 라인 관리까지 가능하다는 게 정말 감탄스러운 포인트!
그뿐만 아니라 스포츠 브라 대용으로 활용도 가능해서 직장인, 학생, 운동러까지 전 연령층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특히 여름철 속옷은 매일 입어야 하니까, 착용감이 좋고 피부에 부담이 없는 제품을 찾는다면 감탄만한 선택이 없습니다.
누적 2,700만 장 판매, 브랜드 사상 최고 매출 경신, 제품력 + 스타 마케팅 + 입소문 3박자 완성. 이 모든 것이 ‘감탄(gamtan)’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결과입니다. 여름 속옷 고민 끝내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 감탄 브라를 직접 경험해보세요. 진짜 ‘감탄’ 나옵니다.
❤️공지사항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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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
허균이 홍길동전을 쓰지 않았단 주장을 언뜻 읽은 기억은 있지만 전 국민이 주입식 교육으로 워낙 강력하게 '가스라이팅' 당한 분야라 나 역시 선뜻 받아들이질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 책이 눈에 띄길래. 핵심 주장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듯.
첫째, 한글 소설 등장은 19세기 이후라 도무지 16세기 사람 허균이 저자일 순 없다.
둘째, 한글 소설은 애당초 저자가 알려진 사례가 없다. 이유는 "내가 썼다"고 고백해 봤자 돈이 되긴커녕 잡글이나 쓰는 놈이라고 욕먹는 사회 분위기.
셋째, 세책집(=조선시대 도서대여점) 중심으로 인쇄 아닌 필사가 기본이라 이야기 첨삭이 가능해 여러 버전에 떠돌았다.
넷째가 가장 중요해 보이는데, 조선 중기 이식이란 사람이 쓴 '택당집'에 제목만 전해오는 '홍길동전'이 있긴 하나, 동명이책. 이걸 일제강점기 때 다카하시 도루라는 일본 학자가 "그게 그거"라며 무근거로 우기는 글을 썼고, 그 제자 김태준이란 분이 '조선소설사'에 인용하며 기정사실화 됐다고.
홍길동전이 조선 시대 때 금서였던 썰도 허균이 반역죄로 처형됐단 거에서 파생한 쌩구라. 조선에서 금서로 찍히려면 양명학이나 도가 사상처럼 주자학에 반하는 사상이어야지, 지배층이 깔보던 소설 장르를 그 정도 심각하게 인식했단 주장 자체가 넌센스다. 뭣보다 홍길동전을 직접 읽어 본 뒤에 확신했다.
여기까지가 책의 반이고 후반부엔 저자가 여러 판본을 모아 재조립한 '홍길동전 풀버전'이 있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읽었는데, 새삼 이렇게 유치할 수가.
비범한 인간으로 태어나 세상의 천대를 받고 자랐음에도 삼강오륜의 틀 안에 갇혀 왕을 향한 충성심이 절대적이란 점.
입신양명 욕망이 너무 세서 "대장부로 태어나 벼슬을 얻지 못해 이름을 남기지 못하느니 도적이 되겠다"는 동기도 한심하고, 나아가 분신술로 신출귀몰하며 나라를 어지럽히던 중 왕이 '명예 병조판서'를 하사하자 입빠이 감동. 헐… 제천대성 손오공이냐.
내가 어릴 때 읽은 책엔 홍길동이 무리를 이끌고 율도국으로 떠나는 걸로 얘기가 끝났었는데, 이 책에선 율도국 정벌 얘기가 자세히 나옴. 마침내 율도국 왕이 됐음에도 (자신을 천대했던) 조선을 향한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어 자의로 사대하는 거도 황당. 결론적으로 이런 게 금서일 리가 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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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K-패션 키워드 ‘디테일’과 ‘콜라보’… 감성에 실용성을 더하다
2025년 여름, K-패션 시장에선 개성 있는 디테일과 협업 시너지 전략이 눈에 띄게 강화되고 있다. ‘실용적인 소재, 감각적인 디테일, 그리고 콘텐츠 기반의 브랜드 경험’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가 주목받는 가운데, 패션 브랜드들은 저마다의 해석으로 여름 시장 공략에 나섰다.

컨템포러리 여성복 브랜드 ‘리브어’는 이번 시즌, 데님 셋업과 아이코닉한 레이스 디테일을 접목한 하이브리드 스타일로 주목받고 있다. 워싱 처리된 데님 원단 위에 플라워 모티브의 레이스 자수를 얹거나, 밴딩 디테일과 리본 스트링을 혼합한 디자인으로 ‘빈티지&로맨틱’ 무드를 실현했다. 특히 팬츠류는 단순한 실루엣에 머무르지 않고, 스트랩 디테일이나 언밸런스한 절개선을 통해 착용자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했다.
한편, 브랜드들은 단순한 의류 판매를 넘어 경험 중심의 마케팅으로 소비자와의 접점을 넓히고 있다. 최근 리브어는 도산공원 인근에 팝업스토어를 열고, SNS 참여형 이벤트와 오프라인 사은품 증정 프로모션을 동시에 전개했다. 팝업스토어에선 구매 고객을 위한 한정 키트 증정 외에도, 룩북 촬영 현장을 재현한 공간과 라이브 커스터마이징 체험 공간을 구성해 브랜드의 미적 감각을 입체적으로 전달했다.
협업 콘텐츠 역시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프렌치 캐주얼 브랜드 ‘세리노’가 뷰티 크리에이터 겸 스타일 디렉터 이수현과 손잡고 전개한 SS25 캡슐 컬렉션이 있다. 이번 협업은 단순히 제품에 그치지 않고, 이수현의 SNS를 활용한 스타일링 콘텐츠와 쇼츠형 리뷰 영상까지 연계한 ‘콘텐츠 마케팅’으로 확장됐다. 특히 레몬 컬러의 린넨 셔츠와 리넨 팬츠 세트는 선공개 하루 만에 온라인 판매 80%를 기록하는 성과를 냈다.
시장에서 빠르게 반응이 온 또 다른 아이템은 ‘다기능성’이다. 활동성이 강조되는 여름 시즌답게, 통기성과 흡습 기능을 갖춘 경량 아우터나 UV 차단 기능을 갖춘 린넨 블라우스 등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이후 늘어난 여행 수요와 맞물려, 한 아이템으로 여러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는 ‘멀티 웨어’ 개념이 중요해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MZ세대는 단순히 ‘예쁜 옷’보다는 브랜드의 스토리와 철학, 착용 시 느껴지는 감성에 높은 가치를 둔다”며 “여기에 착용 편의성과 실용성까지 갖춘 제품이 지속적인 구매로 이어진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기능성 니트 소재의 투피스 제품이나 여름용 라이트 트렌치코트 등은 자칫 고루해 보일 수 있는 클래식 아이템에 트렌디한 색감과 자수 포인트를 더해 젊은 세대의 선택을 받고 있다.
무신사, 29CM, W컨셉 등의 플랫폼에서도 2025년 여름은 ‘디테일과 소재’가 이끄는 시즌이 될 전망이다. 전통적인 면, 린넨, 데님 외에도 텐셀이나 재활용 폴리에스터 등 친환경 원단에 대한 수요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환경과 감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시도가 시장 전반에 확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올해 여름 패션 시장의 핵심은 '작지만 섬세한 차이'에서 비롯된다. 작은 자수 하나, 레터링의 위치 하나, 협업 콘텐츠의 한 컷이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결정짓고 소비자의 선택을 유도하는 시대다. 실용성과 감성, 콘텐츠와 제품의 결합이 만드는 시너지. 이것이 2025년 K-패션이 제안하는 새로운 계절의 정의다.
다음 계절에는 어떤 감성적 콜라보가 펼쳐질지, 패션 브랜드들의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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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구니"
*장바구니
아일랜드에서 살 때에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면 몇 백원은 되는 봉투를 사는게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그동안 샀던 봉투들을 모든 가방에 넣어두고 장바구니로 썼었다.
그때에 비닐을 돈주고 산다는 그런 개념이 한국엔 없었으니까, 괜한 돈낭비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착실하게 가방을 들던 때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끝이 났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서 한국도 유상봉투 제도가 생겼고, 나는 실제로 장보러 갈 때에 스��벅스 폴리백을 들고가게 되었다.
결국 돈이든, 어떤 의무감에서든 내게 책임감이 들린 것 같다. 그런 미묘한 기분이 든다.
봉투를 구매하지 않는 내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고,
시스템에 굴복하지 않고 50원을 지켜낸 내가 기특한 것도 아니다.
그냥 손에 무언가 들고다니면 큰일이 날 줄 알았던 20대를 지나, 무엇이든 아무렇지 않은 30대, 혹은 지금의 내가 된 것 같아서 그런 미묘한 기분이 든다.
장바구니, 그런것 따위보다 이상한 무게감이 들린 것만 같다.
-Ram
*장바구니
장바구니에 하나씩 하나씩 가을, 겨울옷들이 쌓이고, 사라진다! (아마 결제했기 때문이겠지) 더운 나라에 살다가 3년 만에 제대로 가을, 겨울옷을 살 생각에 이미 한여름부터 신났었다. 껄껄. 포근한 색감의 니트들이랑, 원래 있던 가죽자켓 디자인이랑은 완전히 다른 디자인의 가죽자켓, 그리고 한동안 쳐다도 안 봤던 모직 치마도 장바구니에 넣었다! 아니, 이렇게 니트 색들이 예뻤어? 코코아? 크림? 오트? 이런 생각으로 하나 둘 집어넣어 보니 니트 부자가 될 것 같아서 결제 직전 정신 바짝 차렸다. 사실 작년 겨울에 일 때문에 2개월 정도 한국에 있긴 했었다. 그땐 다시 갈 생각으로 예전에 입고 넣어둔 ���장 속 깊은 곳에 있던 겨울옷들 꺼내서 어찌어찌 입다가 다시 한국을 떠났었는데. 이번엔 정석으로 늦여름, 초가을을 지나 늦가을, 겨울을 맞이할 생각에 설렌다. 이제 장바구니를 스쳐갈 아이들은 겨울 패딩과 코트들인가. 역시 어느 계절이나 한국에서 파는 옷들이 살 맛이 난다. 디자인도 그렇고, 재질도 그렇고, 가격은 둘째치고 거의 모든 면에서 한국(에서 파는) 옷이 전 세계 중 최고인 것 같아.. 다시 또 장바구니를 열심히 채웠다가 빠르게 비워야지.
-Hee
이번 주는 휴재합니다.
-Ho
*장바구니
직접 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조금 비싸더라도 유리병에 담긴 제품을 구입하고, 조금 덜 먹더라도 유기농을 산다.
소고기는 될 수 있는 대로 안 먹으려고 하고, 붉은 고기보다는 닭고기를 먹는다. 닭고기를 사기 위해 정육 판매대로 갔는데 이곳은 닭을 잡아서 한 마리를 그대로 진열해 놓기도 한다. 텅 빈 닭의 눈을 보는데, 내가 굳이 고기를 먹어야 하나. 서서히 줄여야겠다고 다짐했다.
너무 많은 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데, 또 난 가끔 뭐가 사고싶고 사려고 하고 사버린다. 외국에서 사는 거에 비해 물건이 적은 편이라 언제라도 큰 캐리어, 작은 캐리어 하나면 짐을 쌀 수 있지만 그래도 내가 가진 물건 들을 볼때 답답해진다. 옷을 절대 사지 말아야지 하고도 티셔츠를 보면 왜 또 사고 싶어지는지..
짐을 늘리고, 내 공간을 물건이 차지하는 게 싫어서 전자레인지도 전기포트도 없이 사는 나를 보며 동생은 불편을 참 잘 견딘다며, 돈 몇 만원이면 삶의 질이 달라지는데 왜 그걸 참냐고 했다. 내가 채우고 싶은 건 물건이 아니라, 내 마음이고, 내 자신이다.
나에게 장바구니는 진짜로 장을 보러 갈 때 드는 그 장바구니이고, 장을 보러 가는 일은 신선한 재료들을 보며 직접 고르는 재미와 내가 먹을 것들을 직접 고르는 기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위해 노력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간결하고 단정하게 살고 싶다. 지구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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