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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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esg-seoul · 11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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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 벤치마킹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의 지배구조
ESG 벤치마킹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의 지배구조, 소개 지속가능경영 ESG 지배구조 벤치마킹 스웨덴의 발렌베리 그룹은 1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유럽 최대, 최고의 기업집단으로써 전문경영인 및 노동자 중심, 기업 투명성, 사회공헌의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국민적 지지와 사회적인 존경을 받으며 소유지배구조의 세계적인 벤치마킹 사례로 칭송을 받고 있다. ‘2023년 지속가능보고서’는 여기(→다운로드)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1. 발렌베리(Wallenberg) 그룹은 2012년 현재 스웨덴 GDP의 37%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2019년을 기준으로 스웨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스웨덴 대표 기업집단이다. 또한 스웨덴 인구의 4.5% 정도인 40여만 명을 고용하고 있는 금융 및 비금융 기업집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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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eerlander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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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중앙일보
북유럽의 강소국(强小國) 스웨덴은 여러 가지 기록을 갖고 있다. 사회민주당이 1932년 이후 70여년 집권해 세계에서 좌파 정당이 가장 오래 집권한 나라다. 세계 최고의 평등도를 자랑하며 노동조합 가입률도 90%로 제일 높다. 그러면서도 1인당 국민소득은 2만5000달러를 넘고 파업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여성의 지위도 세계에서 제일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성희롱.성폭력은 가장 적다. 혹자는 스웨덴을 노동계급이 만든 최선의 자본주의 나라라고 말한다. 이번에 국회에 진출한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 모델이 스웨덴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스웨덴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은 '발렌베리(Wallenberg)'란 재벌그룹이다. 발렌베리가 거느린 14개 상장기업의 시가총액은 스웨덴 주식시장 전체의 40%를 넘는다. 에릭슨.엘렉트로룩스.ABB.사브.스카니아 등 세계 굴지의 대기업들이 발렌베리 계열사다. 발렌베리는 주당 의결권이 10~1000개인 황금주(golden share)를 통해 높지 않은 지분율로 이들 기업을 지배하고 있다. 15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발렌베리는 철저한 가족기업이다. 현재 경영진은 창업자의 5대손이다. 스웨덴은 또 10대 기업의 매출액이 국내총생산(GDP)의 65%에 이를 정도로 경제력 집중현상이 심하다.
좌파 정권에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38년 사민당 정권과 발렌베리가 체결한 '살트셰바덴 협약'덕분이라고 한다. 당시 발렌베리는 기업지배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일자리 제공과 기술투자에 힘쓰며 최고 85%의 높은 소득세를 내는 등 '국민경제에 대한 공헌'을 사민당과 약속했다. 한때 대기업의 국유화를 검토했던 사민당 정권이 실용주의를 택한 것이다. 약속을 잘 지켜온 발렌베리는 스웨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 진보성향의 잡지인 '말'지가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를 파격적으로 인정해 주고 삼성이 자발적으로 사회공헌 기금을 내도록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눈길을 끌고 있다. "경영이 투명하고 합리적이라면 그룹의 지배권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다. 사실 가족경영인과 전문경영인의 구분보다 중요한 잣대는 유능한 경영인과 무능한 경영인이다. 이번 기회에 한국판 살트셰바덴 협약을 검토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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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9inside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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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 법인 주식에 세금 혜택을"...증여세 규정 바뀔까
“공익 법인 주식에 세금 혜택을”…증여세 규정 바뀔까
현행법은 원칙적으로 공익 법인이 5%를 넘는 지분을 받으면 증여세를 부과한다 [그래픽=안수호 기자] 기업들이 공익 법인이 내는 상속·증여세를 완화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행법상 원칙적으로 5% 이상 지분을 증여받는 공익 법인은 세금을 낸다. 단, 공익법인에 따라 지분율 20%까지도 세금이 면제될 수 있다. 공익 법인이 세금을 면제받으면, 공익 법인 이사회를 승계하는 방식으로 경영권을 물려줄 수 있다. 아스트라제네카, 일렉트로룩스, 에릭슨, 사브를 거느린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이 재단을 통해 상속세를 내지 않고 소유 지분을 승계하고 있��. 20일 송언석 국민의힘 의원(기획재정위원회)과 한국기업법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고, 4개 경제단체(한국상장회사협의회, 코스닥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코넥스협회)가 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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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zzanji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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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Gordon Brown?
더 뉴욕 리뷰 오브 북스10월 25일 발행 2007년호  
고든 브라운은 누구인가
조너선 프리들랜드
톰 바우어,  <총리, 고든 브라운> 윌프 스티븐슨 편집, <고든 브라운 연설집: 1997-2006> 고든 브라운, <용기의 여덟 초상>  
1.
고든 브라운의 모든 것, 인생 경력과 성품에 더불어, 영원히 변함없이 강력할 이 정치적 중력의 법칙들까지도, 단 한가지 사실을 가리키는 징후라고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 그는 영국이 지금까지 가져본적 없었던 위대한 총리가 될 것이었다.  노동당을 이끌어 영국 총리가 되는 한 쌍의 야망이 좌절 중인 것이 일종의 운명의 문제로 비추어지던 시절 그의 경력은 일련의 잃어버린 기회들과 불운, 담력 부족으로 묘사되곤 했다.  2004년 토니 블레어의 참모장이던 조너선 파월은 기자들에게 말했다.  “일종의 셰익스피어 비극인 셈이죠.  고든 브라운은 자신이 왕이 되리라고 확신했지만 절대 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결코 총리가 되지 못할 겁니다.”  
브라운은 젊은 블레어에게 기회를 양보하기 위해 1994년 경선에 출마하지 않았는데, 이런 경우 미래에 두번째 기회를 갖는 선례는 드물었다. 브라운은 과거의 어느 정치인보다 오랫동안 정당한 계승자라는 위태로운 자리를 유지해야 했다 (이보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과거의 예외로는 끝이 나빴던 앤서니 이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3년전 이 일이 정말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소수였다.  곧 새로운 세대가 출현할 것이고, 브라운은 휘청거릴 것이다. 1997년 노동당이 집권하고 그가 재무장관이 된 이후 영국 경제를 덮치는 모든 종류의 타격은 그의 지지율을 떨어뜨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1994년 정당이 브라운대신 블레어를 선택한 이유도 여전히 유효했다.  브라운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가 대중적인 매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전 외무장관인 로빈 쿡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시골[1]의 차갑고 축축한 겨울에나 어울릴법한” 잔뜩 구겨진 얼굴로 상대를 노려보면서 통계 숫자들을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텔레비전 방송에 전혀 적합치 않은 인물이었다.  블레어가 가진 너그러운 성품들, 자연스러운 공감을 표현하는 능력이 브라운에게는 부족했다.  남동 잉글랜드 억양을 쓰는 블레어가 노동당이 반드시 이겨야하는 그 지역에 친근함을 어필할 수 있었을 때 그는 커칼디라는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바닷가 마을 출신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장점으로 널리 인정받았던 전략적 통찰력은 정당을 이끌 지도자의 것이라기 보다는, 톰 바우어의 말을 빌리자면 “외양의 거선 갑판 아래 기관실에서 밤낮없이 일하는, 엔진을 정비하고 피스톤의 기름을 닦아내는 스코틀랜드 기관사”가 되도록 그를 운명짓는 재능이었다.
그러나 2007년 6월 27일, 특별 전당대회에서 노동당 당수로 지명된 지 사흘 후, 고든 브라운은 총리로서 다우닝 10번지에 입성했다.  그는 지난 십여년의 세월 대부분을 블레어와의 불화와 영역다툼으로 보냈다.  외적으로는 장차관 임명, 공공서비스 투자에 관한 민간부문의 역할, 유로화 도입에 대한 것이었으나 결국은 둘의 개인적인 야망이 충돌했기 때문이었고, 그들이 서로에게 느끼던 경쟁심이 노동당 정부의 역학을 결정지었다. 영국 정치사상 가장 오래 살아남았고 또한 가장 강력했던 재무장관인 그는 강한 체력과 무자비함으로 무장한 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솜씨로 계승 가능성 있던 다른 경쟁자들을 제쳤다.  그 결과 그는 실제 노동당 당수 경선에서 적을 상대할 필요조차 없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브라운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브라운이 당수가 될 낮은 가능성을 돌파했다고 하더라도 총리로서 실패할 것이라며 예측을 바꾸었다.  대중적인 인기를 갖추고 언론을 다루는데 능하던 전임자인 해롤드 윌슨에게서 정부를 물려받았던, 또다른 전임 재무장관인 제임스 캘러헌처럼 패배할 운명만 남아있는 꽁초 정부[2]를 이끌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캘러헌은 마거릿 대처에게 패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또 한번 회의파들을 당황시켰다.  집권 첫달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테러와 홍수 등 연달아 터진 초반의 위기 상황들에 대한 건실하고 확고한 대응은 전반적으로 브라운 정부를 승인하는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지지율은 반동으로 되려 상승했다.  한때 그의 약점으로 간주되었던 자질들 – 화려함의 부족 – 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강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기대에 휩싸인 당원들은 이제 브라운이 전례없는 노동당의 네번 연속 집권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인지, 심지어 토니 블레어가 실패했던, 위대한 개혁의 노동당 정부를 만드는데 성공할 것인지에 대해 들떠 이야기하고 있다.
 2.
신임 총리의 내각 장관들 중 하나는 “좋은 고든”과 “나쁜 고든”, 두 가지 브라운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6월부터 지금까지 통치 중인 고든은 다행히도 “좋은 고든”이라고 덧붙였다. “나쁜 고든”이란, 아마 톰 바우어의 최근 전기인 <총리, 고든 브라운>에 분석되어있는 인물을 가리킬 것이다.
바우어의 이전 책들을 읽어본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이다. 그는 공적으로 쌓아온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디테일과 폭로들을 이용해 맹렬히 공격하는, 꼼꼼하고 파괴적인 전기들을 전문으로 써왔다 (이전 희생자들은 로버트 맥스웰과 최근 유죄 판결을 받은 콘래드 블랙 등 재계 사기범들이다).
바우어는 브라운을 “정신적으로 흠이 있는” – 당시 익명의 공직자가 재무장관이었던 브라운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표현이며, 블레어의 전 언론관인 앨러스테어 캠밸이 한 말로 추정되고있다 – 사람이자 가장 잔인한 종류의 정치 포식자로 묘사하고 있다. 1983년에 하원의원으로 처음 선출된 이 브라운은, 산더미 같은 종이와 책이 어지럽게 쌓인 집에서 살며 자주 격렬하고 갑작스런 분노에 휩싸이는 혼란스런 인물이다.  “그는 자주 화를 냈고, 수치스럽고 무능하다며 상대에게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어댔다”고 바우어는 썼다.  습관은 집권 이후에도 계속되어, 자신을 거스르는 상대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거나 때로 냉담하게 대했다.  1997년 총선 직후 며칠만에 영국 중앙 은행이 이자율을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독립권을 알리는 중대 발표 때 벌어진 일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안을 두고 묘사되는 브라운은 자신에 대한 모든 반대를 배신으로 간주하고, 아무리 가까운 동료였다 해도 충분한 충성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등을 돌린다. 또한 그는 주기적인 갈등의 원인이 된, 자신의 반대로 무산된 유로화 도입을 놓고 명목상 상사인 블레어를 거역하고 매번 고함을 쳐댄다.
바우어는 십여년 동안 화이트홀의 행정가들을 덮친 브라운의 모든 급작스런 공격, 불운한 동료 장관에게 놓은 덫, 블레어와 블레어라이트들을 향한 교묘한 책략들을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만큼 성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유로화 도입 전 영국 경제가 통과해야할 다섯가지 경제 지표의 기준들을 정함으로써 중대한 결정의 권리가 총리가 아닌 재무장관에게 있음을 확실히 한 일은 주목할만 한데, 결국 이 모든 지루한 묘사들이 철저한 디테일인 동시에 독자를 정신적으로 고갈되게 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바우어는 자신이 폭로한 사실들에 독자들이 오싹 질려버리리라 기대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바우어의 책은 그 자신이 인정했듯 편파적 해석[3]에 기대고 있다.  분명 그는 자료의 대부분을 친블레어파 인물이나 최소한 브라운을 싫어하는 사람으로부터 얻고 있다.  그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브라운이 휘두른 권력에 깊은 내상을 입었거나 어떻게든 보복을 하고 싶어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치명적인 부분은, 재무장관이 정부의 든든한 지주 역할을 하고 있으며 화면 속 배우처럼 연기에 능한 총리와는 달리 성실하고 믿을만한 금고 관리자라는 대중적 인식을 부정하는 것, 즉 그의 유능함에 관한 공격일 것이다.
바우어는 익숙한 보수당의 공격용 라인들을 차용했다 – 만사 자기 뜻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재무장관은 경제 뿐만이 아니라 영국 국내 정책 전반에 관해 멋대로 휘두르고 있다, 다른 정부 부처들이 재무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미 정해진 예산이라도 삭감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권력은 아마도 악명높은 1994년의 그라니타 합의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라니타는 런던 북부에 위치한 음식점으로, 브라운이 블레어의 단독 당수 출마를 지지하는 대가로 재무장관이 되기로 보장받은 장소로 알려져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으나 브라운이 블레어를 계승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이곳에서 도출되었다고 추측된다.).    
바우어는 브라운이 복잡한 탁상행정에 가까운 정책들을 꾸준히 기획하고 지나치게 자주 조세 제도를 뒤틀어 놓음으로써 문제를 일으키며, 중소기업들을 질식시키고 복지의 수혜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집권 첫 3년 동��� 세법책을 800페이지 늘려놓은 일이건, 런던 지하철 반半민영화를 망쳐놓느라 변호사와 회계사 임금으로만 4억 5천 5백만 파운드를 지출한 일이건, 브라운은 최종적인 영향과 비용을 고려를 최소로 하며 야심찬 계획을 추진하는 경향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브라운이 이 모든 것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정치적 기량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바우어가 무시하기로 한 경제적 성과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노동당 통치 하의 영국은 전 분기에 걸쳐 꾸준한 경제 성장을 기록했으며, 이는 전례없이 긴 성장세 유지였다 (물론 이 흐름이 존 메이저의 보수당 정부의 마지막 나날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인정해야한다).  브라운은 총선에서 노동당의 선천적 장애로 여겨졌던 경제적 무능에 대한 악명을 마침내 제거한, 지속적인 경제 안정과 번영을 이끈 최초의 노동당 재무장관이다.
또한 브라운은 단순히 재정이 축적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중부 잉글랜드의 보수당 지지층이 반감으로 결집하지 않도록 은밀히 추진해가며, 그 재정의 일부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재분배 되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바우어는 이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고 있으며 60만명의 아동을 빈곤에서 구제한 브라운의 성취 (그의 목표는 2010년까지 빈곤 아동 수를 절반으로 줄이고 2020년까지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역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업적은 훗날 그의 권력 계승에 대한 설명에서 빠져서는 안될 이야기들이다.
 3.
빈곤 퇴치를 다룰 때 전통적 사회주의에 대한 영국 유권자들의 선호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인식에 기반하여 정치 전략을 수립한 사건은 내각 동료들이 묘사하는 “좋은 고든” 페르소나의 중심이 어떻게 생겼는지 짐작케 한다.  블레어 정부 내부에서 반대자 위치를 오랫동안 고수하면서 브라운은 그 자신을 전통적 노동당 가치의 수호자로 여겨지게끔 손 써왔다.  그는 부자들에게 어떤 제제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재계의 수호자 “철의 재무장관”인 동시에, 노동당 지지자들에게 1948년 설립된 국영 건강 보험(NHS, National Health Service)으로 대표되는 오랜 종교를 설파하고 그에 헌신하는 “붉은 고든”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미지는 브라운을 중도주의자 블레어를 대체할 수 있는 사민주의적 위치로 규정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붉은 고든”에 관한 신화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애당초 그러한 이미지가 브라운 자신이 가진 인물상에 적합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1951년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고든 브라운은 쇠락해가는 옛 공업 지역에서 사람들이 겪어야하는 고통을 일상적으로 목격하며 자랐다.  도움을 청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나 커칼디 목사관 문을 두드렸다. 목사인 아버지는 교인들과 자기 아들들에게 성실히 노동하고 이웃을 도울 의무에 대해, 불평등에 맞설 것에 대해, 부의 덧없음에 대해 설교하곤 했다.  어린 브라운은 열살도 채 되기 전에 형이 한부씩 손으로 만든 소식지에 정치 논평을 기고했고, 뛰어난 학업 성취를 보여 열여섯살에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럭비 경기에서 두 눈의 망막이 손상되는 부상을 입어 눈에 붕대를 감고 완전한 암흑 속에서 반년을 병원 침대에서 보내야 했다. 이 경험은 그로 하여금 회복을 돌봐준 NHS에 대한 열정어린 신념을 갖도록 만들었다.  반면 영원히 앞이 안 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맞서야 했던 일은 그의 성격에 정서적 취약함을 영원히 각인시켰다. 그의 왼눈은 완전히 멀었고, 오른쪽 눈에는 장애가 남았지만 기능은 회복했다.  시력 때문에 그는 하원에서 여전히 큰 글씨로 연설문을 적어놓은 두툼한 종이 뭉치를 디스패치 박스 위에 올려놓는다.  부수적으로 얼굴에도 영향이 남아있다.  죽은 왼눈은 그의 평소 모습만 바꾼 것이 아니다.  네 번의 수술 중 실패한 한 번 때문에 근육이 손상되어 정상적으로 웃는 표정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브라운에 대한 대중적 인상의 중심에는 우울한 표정이 자리잡았다.  언제나 미소짓는 총리가 영영 미소짓지 못하는 총리로 교체되었다 - 이것이 바로 2007년 6월 27일 영국에 일어난 많은 변화 중 하나였다.
브라운은 대학에서 강력한 학생 정치가였으나, 1968년의 혁명 구호에 경도되지 않았다.  미래의 내각 동료 몇몇과 달리 공산주의 정파에서 활동한 적은 없다.  관심의 초점은 언제나 영국 노동당에 맞춰져 있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노동당 정치인이었던 제임스 맥스턴에 관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맥스턴은 A. J. P. 테일러가 다음과 같이 평한 적 있는 인물이다.  “그는 모든 종류의 자질을 갖춘 정치인이었다. 유일하게 갖추지 못한 단 하나는, 바로 성공으로의 길을 찾는 재능이었다."
노동당 전통에 대한 충성은 브라운이 블레어 시대에 긴 기다림을 버티며 살아남는 것을 도왔다.  자신의 정당과 스스로 거리 두기를 좋아하는 지도자, 희생 제물을 도륙해가며 명성을 쌓는 지도자, 생산재의 공공소유화를 천명한 당헌 4조를 폐지한 지도자와 뚜렷하게 대비된다는 것에는 큰 이점이 있었다.  브라운은 블레어와 마찬가지로 신노동당의 창시자이며 18년의 총선 연패를 끝냈던 현대화와 자유시장의 지지자이지만, 블레어와 달리 옛 노동당을 경멸하는 인물로 보인 적이 없다.  이는 노동당원들의 상상 속에서 정당의 양극단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보여주는 대비 중 하나일 뿐이다.  블레어는 신흥 부자들과 유명인들의 친구이며 사르데냐에 있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별장으로 휴가를 가고, 플로리다에서는 비 지스의 베리 깁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반면 브라운은 검소하고 혼자있길 좋아하는 사람으로 아이들이 태어난 후 휴가철이면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스코틀랜드에 머문다.  
부인 셰리의 막대한 강연료로부터 총리가 노동당 고액 기부자들을 상원에 앉히고 작위를 판다는 고발에 이르기까지 돈 문제는 자주 블레어를 곤경에 빠뜨렸다.  재무장관 시절 장관 전용 재규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서민적인 포드 차를 타고 다니던 브라운에게는 그러한 꼬리��가 붙은 적이 없었다.  블레어의 저녁식사 손님들이 이류 팝스타들과 낮 시간대 티비 프로그램 진행자들이라면, 브라운은 머리를 맞대고 깊이있는 토론을 할 수 있는 학자들을 재무부에 초대할 것이다. 블레어는 빠르고 유창한 답변을 하는 변호사의 재능을 타고났으나 브라운은 역사학자로 훈련받았다.  블레어는 오픈넥 셔츠를 입고 머그에 차를 마시는 전형적인 21세기 인간이지만, 브라운은 지난 세기에 속한 별난 과거인이다 (최근 보도 사진에서 그는 수트를 입은 채로 테니스를 쳤다).  
두 사람의 대비는 거의 운명적인 것에 이른다.  블레어는 45세의 아내가 건강한 넷째 아이를 출산하는 불가능한 경지의 행운으로 축복 받았으나 이 부분에서 브라운의 인생은 투쟁에 가까웠다.  첫번째 아이였던 제니퍼는 2001년 미숙아로 태어나 열흘만에 숨졌다.  첫 아들인 존은 건강하지만, 둘째인 프레이저는 생명을 위협하는 병인 낭포성 섬유증을 앓고 있다.  블레어와 친분이 없는 가디언 만평가 스티브 벨은 브라운이 총리직을 승계한 것을 두고 블레어 얼굴을 한 태양이 브라운 형상의 구름에 가려지는 것으로 묘사했다.
브라운은 진지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일부러 벗지 않고 있다. 그가 최근 출간한 책들이 반복하고 있는 무언의 주제는 지칠줄 모르는 성실함을 갖췄으며 약자에 대한 연민을 아는 “좋은 고든”이다.  <연설집: 1997-2006>에서 우리는 빠르게 소멸해가는 정치적 스타일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브라운이 유행지난 방식을 고수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총리가 되기 전까지 브라운은 연설 하나를 위해 몇 달씩 작업을 해왔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받고 폭넓은 독서와 자료 수집을 통해 직접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려가며 스스로 연설문을 작성했다.  이렇게 쓰여진 연설문은 결코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다. 강연에 쓰인 글 대부분이 전문용어와 재무부 내에서 기술관료들이 사용하는 은어가 많아 읽어내려가기 거추장스럽다.  그러나 이 연설문들이야말로 브라운의 세계관을 이루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국내 및 해외 빈곤을 퇴치하려는 노력, 공공영역을 단순히 사고파는 거래의 대상으로 축소시켜서는 안된다는 주장[4], 세계화의 파도로부터 영국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에 대해, 또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심지어 잉글랜드에서 자치권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끝내 살아남은 영국성을 정의하는 문제 등이 포함된다.      
각 연설은 앨런 그린스팬, 앨 고어, 심지어 J. K. 롤링이 들어있는 유명인의 목록 중 한 사람을 골라 찬사를 바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위대한 인물 옆에 서서 그 명성이 일부라도 옮기 바라는 희망을 품는 것이 정치인들의 오랜 수법이었다면, 연설집은 <용기의 여덟 초상>에 비하면 이를 제법 겸손한 선에서 마무리하는 편이다.  존 F. 케네디의 <용기있는 사람들 Profiles in Courage>을 의식한 것이 분명한 이 책에서, 브라운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뛰어나게 용감했던 여덟명의 삶을 조명한다. 넬슨 만델라, 디트리히 본회퍼, 마틴 루터 킹, 로버트 케네디, 라울 발렌베리, 아웅산 수치, 영국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 시슬리 손더스, 일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에서 활동하던 간호사로 수많은 연합군을 잉글랜드로 탈출시키는 것을 도왔던 이디스 카벨이 그 대상이다.
저자의 정치적 의도는 명백하다. 넘버텐에 입성한 때에 현대사의 도덕적 위인들과 자신을 연관시키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5]  그렇다고 해서 냉소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브라운은 자신이 열 살 때 읽은, 섀클턴, 스콧, 오츠와 다른 탐험가들의 용기와 대담함에 관한 일화로 가득 차있던 어린이용 백과사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치 브라운이 과거형 인물임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같다 (보수당 의원들은 브라운을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정치인”이라며 조롱한다.  브라운이 인터넷을 도입 초기에 채택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과거 시대에서 현재로 보내진 특사같은 인물이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책은 큰 열정을 가지고 진행된다. 라울 발렌베리의 이야기를 이렇게 쓰는 식이다:
“발렌베리의 현상수배 포스터가 부다페스트 전역에 나붙었다. 암살자들이 그의 뒤를 좇았다. 매일 다른 장소에서 잠을 청해가며 발렌베리는 어떻게든 그들을 따돌렸다.”
도처에 엉성한 편집이 눈에 띄기 때문에 <스펙테이터>지는 아마 좀 우쭐거리려는 의도로 이 책에 대해 “휴가철 추천도서”라는 딱지를 붙인 것 같다.  그러나 처칠 이래 어떤 영국 총리도 현직 활동 중에 이렇게 뛰어난 책을 쓴 적이 없었다.  
진실은 이 책이 아홉명의 인물을 다루고 있으며 아홉번째는 바로 저자 자신이라는 것이다.  책장 사이로 본인이 골몰해있는 문제인 국가에 대한 의무와 사명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 너머 더 큰 관점에서, 우리는 브라운이 자신의 약점에 접근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정치 입문 초기부터 끊임없이 브라운을 괴롭혀왔던 문제, 이렇게나 존경하는 자질인 용기를 과연 자기 자신이 갖추고 있는가에 관한 의구심이다.  적이 아닌 그의 친구들조차 브라운이 담력이 부족한 인물임에 종종 우려를 표해왔다.    
만일 그가 1992년 경선에서 선배 스코틀랜드 정치인 존 스미스에게 맞섰더라면, 당수가 되어 1983년부터 하원 사무실을 함께 써 온 블레어를 영영 자기 아래에 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997년 다우닝 스트리트는 브라운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94년 여론에서 블레어가 앞섰다는 당내 정치 현실을 인식하여 경선 출마를 포기하고 블레어를 지지했다 (브라운 일파가 전설처럼 믿고 있으나 사실 그라니타 합의는 장자가 출생으로부터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잃은 배신에 관한 사건이 아니다.  브라운에게는 당시 자신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큰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좋은 거래였다.).
집권 후에도 브라운에게는 블레어를 치명적으로 공격해 죽일 기회가 여러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그는 부상만 입히고 물러나는 편을 택했다.  가장 너그러운 해석은 브라운이 노동당의 단합에 형제살해의 쿠데타가 가져올 영향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그는 대처의 축출이 보수당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목격했었다.  대처를 죽인 마이클 헤즐타인은 영원히 총리가 되지 못했다.  
브라운이 용기를 발휘할 가장 큰 기회였던 동시에 블레어가 가장 허약했던 시기는 모두 이라크 전쟁과 관련되어 있었다.  만일 브라운이 2003년 3월 로빈 쿡의 사임에 동참했더라면, 블레어는 틀림없이 실각했을 것이고 영국군은 파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가들은 조지 W. 부시가 영국이 참여하길 거부한 상황에서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을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만일 그 대답이 “아니다”라면, 브라운은 이라크 침공을 저지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인물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용기>에서 바비 케네디가 당명을 거슬러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부분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한가지 질문을 필연적으로 덧붙이게 만든다: 브라운은 이라크에 대해 자신이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
사실 브라운은 전쟁 준비 과정에서 고의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전직 고위 공무원이 고든의 “매카비티같은”[6] 습관이라고 불렀던,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첫 조짐을 목격하면 어디론가 사라져버���는 행동 방식이었다.  침묵은 노동당 내부에서 브라운을 숨은 반전론자로 여기게 했으며, 심지어 차기 당수로서 그의 지지율을 높여주었다.  마침내 그가 전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을때, 이러한 사람들의 믿음이 지속되도록 그는 무척 간결하고 무미건조하게만 입장을 발표했다.  적어도 그렇게 함으로써 이라크 전쟁이라는 실책은 노동당의 것이 아니라 블레어라는 개인이 일으킨 재앙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2004년 아부 그라이브의 포로 학대 스캔들과 정부측 과학자이자 전직 유엔 무기 고문이었던 데이비드 켈리의 자살로 이어진 휴튼 위원회 심리에 타격을 받아 블레어는 또 한번 허약해졌다. 대학 등록금에 관한 사안을 두고 의회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블레어는 실낱같이 가늘어진 명줄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상태였다.  브라운은 경쟁자가 추락하는 것을 손놓고 지켜보고만 있는 대신, 자신의 충성파들에게 정치적 공격을 그만둘 것을 명령하여 블레어가 3년 더 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제 브라운이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은 미래로 넘겨졌다.  그는 부시 행정부에 맞서 이란 등 또다른 분별없는 군사적 모험에 반대할 것인가? 과연 브라운에게 그럴만한 용기가 있을까?
 4.
다우닝 스트리트에서의 고든 브라운의 첫 백일이 끝나가고 있다. 백일은 브라운 자신이 영국 유권자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인상을 남길 중요할 시기라고 규정한 기간이었다.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그는 자기 일파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초과 달성했다.  ��반의 여론조사들에서 브라운은 자신보다 텔레비전 시대에 잘 맞는 상대인 보수당 당수 데이비드 카메론을 상대로 훨씬 앞서고 있기 때문에, 언론 보도는 새 총리가 자신의 지지율을 활용하여 이른 총선을 개최할 것인지, 그리하여 새 임기를 갱신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논의가 워낙 주도적이기 때문에 9월 마지막주의 전당대회에서는 대표들, 정치인들, 언론들 사이에서 그외 다른 이야기들이 거의 오가지 않을 정도였다.
브라운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예외적으로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다. 총리가 된지 36시간째 되던 때 런던의 웨스트엔드에서 차량 폭발물이 발견되었고, 이어 글라스고 공항에서는 테러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브라운은 자신의 전임자처럼 카메라 앞에 직접 나가 총리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거나 문명사회를 위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내무장관인 재키 스미스에게 발표를 일임함으로써 대통령제에 가까웠던 블레어 스타일의 정부를 기존의 내각제 정부로 되돌린다는 약속을 지키는 편을 택했다.    
이후 글라스고 테러에 대해 논평하게 되었을 때는 전쟁 국면이라기보다는 심각한 범죄를 대하듯 차분하고 담담하게 의견을 말했다.  이는 브라운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어구를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생각해왔다는 사실과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브라운은 이 표현이 알카에다의 살인자들에게 너무 많은 자격을, 심지어 품위를 부여하는 말이었다고 믿어왔다.  공포 대신 평정을 확산하고 사건 당시 치솟은 과열을 즉각 식히는 새로운 접근 방식은 영국 무슬림 커뮤니티를 포함하여 각계의 찬사를 이끌어냈다.  며칠 후 주요 영국 일간지의 지면에는 사건에 관한 브라운의 대처를 환영하며 테러리스트들이 범죄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도록 적극 협력하겠다는 영국 무슬림 단체들의 서약서가 서명과 함께 전면 광고로 실렸다. 일찍이 블레어 치하에서 일어난 적 없는 일이었다.
여름에 중북부 잉글랜드에서 발생한 홍수와 구제역에 대한 정부의 대응 방식에도 이와 유사하게 기존의 보여주기식 조치가 없었다.  영국의 가장 큰 대출 기관의 하나인 노던락 은행의 유동성 위기로 야기된 9월 중순의 금융위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 경우 브라운이 사태 초기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그의 매카비티 습성 때문이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말이다.).  브라운은 내각에 각 분야의 뛰어난 사람들을 임용함으로써 장관들을 신임하고 일을 맡길 수 있었다.  보통 때 적대적인 신문들조차 위기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한, 여섯명의 장관이 마흔 이하인 젊은 새 내각의 인사를 칭송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적절한 자리에 마땅한 인물을 기용한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브라운은 영국 산업 연맹 회장이자 유엔 전 사무차장이었던 마크 맬럭-브라운 등 노동당 소속이 아닌 인물들을 등용함으로써 – 미국에선 흔한 일이지만 영국에선 전례없는 일이다 – 통제광이라는 평판에 맞섰다.  9월에는 두 명의 보수당 하원의원들이 노동당 정부에서 고문으로 임명되어 정부에 협력하기로 했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세번째 인물은 자유민주당 의원이다) 그는 카메론을 앞질렀다.  마거릿 대처를 총리 관저 티타임에 초대하여 함께 사진까지 찍어 보수당을 더 깊숙히 찔러댔고, 노동당 잔류 극좌파의 신경도 긁어댔다.  브라운의 의도는 명백했다.  신노동당의 포용력이 여전히 넓어 당파를 초월한 거국내각에 이른다는 것을 전시해보이는 것이었다.  
브라운은 8월 전국 휴가철에 돌입하기 전까지 깊은 인상을 남겨야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블레어의 문제적 유산들을 폐기하는데 손대기 시작했다. 맨체스터에 라스베이거스 스타일의 거대 도박장을 건설하는 계획을 백지화하여 사회보수파인 데일리 메일과, 일확천금의 사회 풍조를 부추기던 블레어 시대에 대한 강한 적대감이 있는 가디언 독자들 양측에서 모두 칭송받았다.  앨러스테어 캠밸이 즐겨 쓰던 방식인 정부 정책을 자기편 신문에 먼저 유출시키는 방식을 버리고 하원에서 직접 발표함으로써 스핀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알렸다.  정부의 주요 권력들, 이를테면 해외 파병을 결정할 권리들을 의회에 이양하도록 추진하는 등 사회운동가들을 황홀하게 할만한 개헌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와의 관계야말로 가장 눈에 띄는 변화였다.  브라운은 7월 미국 첫방문 일정에서 상당히 미묘하면서도 분명한 방식으로 앞으로 큰 변화가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일정에 앞서 새로 임명된 외무부 소속의 장관 중 한 사람인 맬럭-브라운은 런던이 더이상 부시의 백악관과 이전처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했다. 이러한 발표는 당일 즉각 브라운의 대변인에 의해 부정되었는데, 이 시점에서는 확실히 이전의 범대서양주의를 공고히 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아이가 생기기 전, 그는 매해 여름을 케이프 코드에서 보내며 케네디 가의 사람들과 어울리곤 했다.  브라운은 주된 사상적 영향을 미국으로부터 받았다.  그는 거트루드 힘멜파브와 제임스 Q. 윌슨 등의 보수적 미국 사상가까지도 폭넓게 독서했고, 정계의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미국 정치의 전개를 놓침 없이 따라잡고 있었다.  사실 둘 중 미국적인 것에 항상 더 가까웠던 사람은 프로방스와 토스카나를 사랑하던 블레어보다는 브라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운의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행동들은 맬럭-브라운 발언의 진실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던 다정하고 격식없는 부시-블레어의 회담은 더이상 없었다. 브라운의 요청에 따라 총리와 대통령은 수트를 입고 공식적인 직함으로 서로를 불렀다.  브라운은 양국 관계가 이제부터 단지 사업적인 동반자 관계이기만을 바랐다.  한담에 취약한 브라운의 개인적 특성이 그가 부시의 친구가 아니길 원한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용되었으며, 기존의 “특별한 관계”는 더이상 10번지와 백악관의 관계가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관계가 되었다.  훗날 브라운의 한 동료는 고백했다. “고든이 자신의 약점을 자산으로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광경은 매혹적이었다”[7].
또한 브라운은 이라크에 파병된 영국군의 규모를 축소하겠다는 계획을 앞으로 지속할 것임을 미국 측에 통보했다.  9월 중으로 영국은 바스라에서 550명을 철수시켰으며, 이제 이라크 전역에서 영국군의 잔류는 바스라 공항으로 국한되었다. 좀 더 심층적인 관점에서 “테러와의 전쟁”과 궤를 달리하는 자신의 견해도 피력했다.  서구 국가들이 폭력적인 이슬람주의자들보다 더 큰 희망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무슬림 세계에 증명해보여야 한다는 것이다[8].  그렇게 브라운은 선한 의지로 무장한 다르푸르의 평화유지군과 유엔의 새천년 개발 목표에 동참할 의사를 강력하게 표하기 위해 캠프 데이비드로부터의 유엔까지 여정에 나섰다.  그는 만일 서구사회가 질병과 가난, 아프리카에서의 대량학살에 맞서 싸우는 존재로 비춰진다면 무슬림 세계가 차츰 지하디스트들이 쏟아내는 타락한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맹렬한 비난에 귀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브라운의 등장에 대한 따뜻한 환영은 결국 블레어의 주가를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  새 총리가 결국 자신은 그와 다른 방식으로 성취해낼 것이라는 뜻을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브라운이 스스로를 신노동당 정부의 황혼녘을, 마지막 나날들을 맡은 사람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만일 그가 블레어에게 항상 곤란한 동료였다면 - 어느 다우닝 스트리트 보좌관에 따르면 마치 “냄비로 바닥을 쿵쿵 두드리는, 다락방에 갇힌 미친 친척 삼촌”처럼 - 그것은 아마도 그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통치하고 싶어 인내심을 잃고 내내 안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당장, 이것만은 명백하다.  브라운의 야심은 자리가 아니라 권력을 향해 있었으며, 그는 이제 그 권력을 아끼지 않고 온전하게 사용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   2007년 9월 26일
(원문 출처 http://www.nybooks.com/articles/2007/10/25/who-is-gordon-brown/)
  [1] 원문에선 파이프 Fife.
[2] 꽁초 정부 Fag-end administration. 장기집권한 전임에게서 선거를 거치지 않고 물려받았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끝나는 집권 말년의 정부. 윌슨-캘러헌, 대처-메이저의 사례.
[3] 원주: 마찬가지로 당파적이지만 반대로 브라우나이트적인 해석에 관해서는 로버트 페스턴 저 <브라운의 영국 Brown’s Britain>을 참고하라.
[4] 민영화-국유화의 양분적 프레임에서 벗어나자는 주장.
[5] 원주: 브라운이 총리가 되고 나서 그의 이름을 더해 한달 후에 출간된 영국의 사회운동가들과 봉사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 <영국의 숨은 영웅들 Britain’s Everyday Heroes>(2007)에서도 비슷한 목적을 감지할 수 있다.
[6] T. S. 앨리���의 <매카비티, 수수께끼의 고양이>.
[7] 원주: 매튜 댄커너의 “감성과 지성을 탐색하는 고든과의 여정에서 On the Road with Gordon in the Search for Hearts and Minds”를 참조 (스펙테이터, 2007년 8월 4일 발행호).
[8] 원주: 브라운은 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부시 대통령 면담과 동시에 실린 워싱턴 포스트 특별기고 (“만년지계의 동반 Partnership for the Ages”, 2007년 7월 30일 발행)에서 간단히 제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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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doanyting89 · 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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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문가의 자녀교육 10계명★    01. 식사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마라 -케네디 가   02. 존경받는 부자로 키우려면 애국심부터 가르쳐라 -발렌베리 가   03. 단점을 보완해 주고 뜻이 통하는 친구를 사귀어라 -게이츠 가   04. 돈보다 인간관계가 더 소중한 것임을 알게 하라 -로스차일드 가   05. 질문을 많이 하는 공부 습관을 갖게 하라 -공자 가   06. 어머니가 나서서 ‘품앗이 교실’을 운영하라 -퀴리 가   07. 대대로 헌신할 수 있는 가업을 만들어라 -다윈 가   08. 부모와 자녀가 함께 모험여행을 떠나라 -타고르 가   09. 평생 일기 쓰는 아이로 키워라 -톨스토이 가   10. 자신을 사로잡는 목표를 찾아 열정을 다 바쳐라 -러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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