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버린 다음 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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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버린 다음 버리기]

세탁소에 맡길 옷들을 정리하다가, ‘버릴까-말까-그래도 이건 기본템이니 입겠지’ 셔츠들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요즘엔 자질구레한 옷은 사지 않으려 한다. 옷 구매 비율을 보면 [빈티지+무지+고가의 옷+가끔 로드샵] 정도. 고민을 덜 하고 바로 버리는 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런 충격적인 귀여운 옷을 구매했다. 근로자의 날을 기념하여 세일하길래. 근로자의 귀여움을 뽐내보자. 얼른 가벼운 데님에 이 티셔츠 입고 보드 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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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https://www.goodreads.com/book/show/26196551-the-hatred-of-music )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소리의 고통으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내면의 동물적 경계심을 되살리려는 노력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의미를 띤 분절된 언어가 우리 안에 펼쳐지는 순간, 언어의 '음성적 호기심'을 잃는다. 하모니란 그러한 음성적 호기심을 되살리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아끼는 음악에는 음악 자체에 부���된 짧고 오래된 음이 있다. 희랍적 의미로 mousikē는 '음악에 더해지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일종의 "덧붙은 음악"은 우리가 고통받아 지르는 비명을 향해 지면을 부수고 나아간다. 그 비명은 이름 붙이는 것도 불가능하며 그 근원이 무엇인지 본 적도 없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결코 눈에 띄지 않을 소리가 우리 내부를 떠돈다. 그 오래된 음이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는 아직 보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숨 쉬지 않았다. 우리는 울지 않았다. 우리는 들었다. 엄밀히 말해 언어는 실재를 연장하지 않는다. 언어는 외재화한다. 언어는 범위 밖으로부터 완전함으로, '때늦음'으로부터' '지금 이 순간'으로 밀어 넣는다. 바로 이것이 음악(혹은 기억)이며,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와 음악musica이 동일한 이유다. "잘라 내는 데 쓰이는 소리들"이 음악을 정의한다. 음악의 음들은 자연적 울림과 인간의 언어를 잘라낸다. 죽음의 음들. 소리와 언어는 들리는 것이지 만지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래가 감동을 줄 때, 그것은 대상을 1) 꿰뚫고 2) 죽인다. 모든 것은 소리에 속박된 피로 뒤덮여 있다. 전쟁, 국가, 예술, 제의, 지진, 전염병, 짐승들, 어머니들, 아버지들, 파벌, 강압, 번민, 장애, 언어, 그 소리를 듣는 것, 복종하는 것. 나는 그것들에 맞서 등을 돌리고 있다. 언어의 혀 끝에서. 사제들이 소리의 속죄양을 정념이라는 이름의 바다에 던져 버리기 전에. 언어의 희생자인 인간. 언어에 '순종하는' 인간. 내 사유 안에 있는 것들은 나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그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 환영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무의지적 이미지다. 강박적 북소리는 무의지적이고 포위해 들어오며, 머릿속을 끝없이 맴도는 골치 아픈 소리의 최소 단위다. 호흡 작용에 따라 송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목소리는 그 숨의 일부를 떼어 간다. 내부의 모든 "객석"과 호흡으로 가득 찰 "극장"조차도 몸이 경험하는 감정들과 그 감정에서 멀어지려는 노력, 그리고 육체에 활기를 불어 넣는 감각들 모두를 과장해서 반영한다. 소리는 공기와 환기의 필연성을 통해 구성된다. 이 필연성은 피부로 덮여 있으며 속이 빈 우리 자신이라는 악기를 속박한다. 인간의 언어는 쉬지 않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물적 육체와 함께 조직된다. 쉼 없이 "죽어 가는"것. 소리를 발산하는 이는 제 호흡을 두 부분, 즉 들숨과 날숨으로 나눈다. 그러나 결코 완벽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는 곧 이 강박적이고도 강제적인 폐호흡의 제어를 포기한다. 그러고는 비명과 함께 자신의 어조를, 음색을, 목소리를, 리듬을, 침묵을, 노래를 짓는다. "귀"는 "입"과 "목구멍"이 행한 것을 끝없이 비교한다. 우리는 오직 눈으로만 감지되는 것을 "듣는다". 죽어 가는 물고기의 침묵. 낮 동안의 고요. 황혼의 적요. 밤낚시의 정적. 배가 연안으로 돌아오고 하늘에서 차츰 밤기운이 걷어지면 동시에 서늘함도, 별들도, 두려움도 지워지는 새벽의 침묵.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기억들이 진정한 의미의 기억이 되는 것은, 그것이 머리라는 공간에서 빠져나와, 기억을 변모시키는 이미지들로부터 멀어질 때뿐이라고 썼다. 이는 서로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는 단어들의 양상과도 같다. 기억은 그것을 묻어 버리고 잊으려는 노력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기억은 우리에게 되돌아올 힘을 얻었다. 망각의 강에서는 여전히 물이 흘러넘쳐 내린다. 그것은 말도 꿈도 성상도 없이, 몸짓과 광기와 비열한 움직임과 농가의 안뜰과 요리된 음식과 갑자기 토하고 싶은 충동과 실신과 끈질기게 따라 붙는 질문과 설명할 길 없는 두려움의 형태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듣는다는 것은 순종적 행위다. '듣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는 obaudire이다. 프랑스어 동사 obéir(복종하다)는 이 obaudire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l'audition(듣기), 라틴어로 audientia(귀 기울임)은 obaudientia, 즉 '복종'을 뜻한다. "고통passio은 지식에 앞서 존재하며, 눈물을 존재론에 선행한다. 눈물은 알려지지 않은 것 때문에 흐른다."(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청취란, 파롤parole의 본질로가 아닌 영혼으로 귀환하는 언어의 의미 작용이다. 이 회귀는 그러므로 육신을 벗어난 파롤을 포기할 때에 태어나는 침묵이다. 언어적 청취는 침묵으로 귀결된다. 사유라는 형태로 모조리 불타 버린 파롤이 침묵 속에서 허물어진다. (언어학자 소쉬르가 사회적 언어 체계를 가리키는 '랑그langue'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제시한 것으로서, 개인의 발화 행위를 의미한다. 메를로퐁티는 언어 현상학적 관점에서 언어학의 목표는 언어를 본질적 틀에 맞추고 객관화하는 것이 아니라, '파롤로 회귀'하는 것이라여겼다. 이때의 파롤은 신체적 지향성의 구체적 예이자, 말과 말하는 주체의 주관적 접촉으로 실현되는 자발적 행위를 의미한다.) 노에마들, 사유들, 목소리가 불러일으키는 환영들. (현상학에서 의식���란 언제나 어떤 대상을 향하게 된다. 이러한 의식의 방향성을 '의식의 지향성'이라고 부르는데, 대상과 그것을 향한 의식 사이에는 일정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후설은 '무엇에 관한 의식'으로서의 지향성을 '사유'라는 의미를 지닌 희랍어를 빌려 '노에시스noesis'라 불렀으며, 지향성의 대상적 상관자를 '사유된 것'이라는 의미의 희랍어를 따 '노에마noema'라 불렀다.) 청취가 주는, 불에 데인 듯한 쓰라린 고통 때문에 부재하는 것이 내는 소리인 언어는 제 스스로가 부재하는 것으로 변한다. 즉, 파롤을 둘러싼 물질적 외피가 벗겨지는 순간 그 파롤로부터 홀연히 나타나는 붙잡을 수 없는 환영으로 말이다. 그것은 더 이상 언어적 기호가 아니다. 인지적으로 감각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희생제의에서 유래한 노에시스적 희생이다. 어쨌든 언어적 청취의 과정에서 언어는 스스로 확장하여, 적용 영역이 완전히 사회적인 신체적 음대(音帶)를 벗어던진다. ��는 개개의 영혼에 침투하여 그 영혼을 뒤흔드는 정신적인 침묵의 음대가 되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언어는 의미를 표지하기 때문이다. 비의소적 언어, 즉 음악에서의 의미 작용이란 의미 작용 그 자체만을 위한 것으로, 피와 숨을 즉시 음악으로 불러들이는 행위다. 이처럼 언어적 복종은 개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 결과인 생각은 소리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다. 사유는 침묵의 반향이 될 수 있다. 말하는 이가 몰락하지 않고서 완전한 청취란 없다. 화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언어의 형태를 불쑥 솟아나와 이동하여, 결국 청자에게로 되돌아가는 말 앞에서 무너진다. 이러한 말의 회귀는, 한편으로는 그 소리의 원천이 공기 중에 소멸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자 내부에서 모두 불타 버리는 말해진 것을 청자가 침묵으로써 움켜쥐려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하여 듣는 이는 이전의 상태에서 벗어나 생각 속에서 진정 혼란스러워진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자연physis은 우리에게 두 귀와 하나의 혀를 주어 덜 말하고 더 듣도록 했다." 자연은 동물과 인간을 만들기 이전에 침묵을 "들었다". 황혼은 자연의 질서 안에서 "소리의 영도零度"다. 사실을 말하자면 완전한 영도나 침묵의 정점은 아니다. 그러나 자연이 이루는 소리의 최소치임은 분명하다. 인류는 복종을 멈추지 않는다. 존재론에서 소리의 최소치는 새의 지저귐과 개구리 울음소리의 경계를 통해 정의된다. 그것이 침묵의 시간이다. 침묵은 결코 소리의 부재로 정의되지 않는다. 침묵은 귀가 소리에 대해 가장 예민해져 있는 상태로 규정된다. 인류는 소리와 침묵이 발현되는 근원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더 이상 빛과 어둠의 기원에 머물지도 않는다. 밤의 문지방에서 귀는 가장 기민해진다. 그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그것은 나에게, 홀로 있기를 바라는 모든 시간 가운데 가장 홀로이고자 하는 때다. 내가 죽고 싶은 시간이다. 음악은 인간Homo 종 고유의 울음이 아니다. 인간 공동체의 특징적인 울음은 그 공동체가 가진 언어다. 음악은 인간이 제 먹이에게서 배운 것으로, 짐승들이 번식기에 내는 소리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음악 혐오(음악 나치 부역)>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인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협력한 유일한 예술이다. 음악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 장르다. 그 무엇보다도, 음악이 수용소의 조직화와 굶주림과 빈곤과 노역과 고통과 굴욕, 그리고 죽음에 일조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임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음악 혐오'라는 표현은 음악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이에게, 그것이 얼마나 증오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음악은 인간의 육체를 강간한다. 음악은 발기시킨다. 음악적 리듬은 신체 리듬을 사로잡는다. 음악이 들려올 때, 귀는 스스로 닫지 못한다. 힘으로서의 음악은 모든 종류의 다른 힘들과 결탁한다. 음악의 본질은 불평등이다. 청취와 복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휘자와 연주자와 복종자. 이것이 음악이 연주되는 즉시 성립하는 구조다. 지휘자와 연주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든 음악이 있다. 플라톤은 단 한 번도 규율과 음악, 전쟁과 음악, 사회 위계와 음악을 떼어 놓고 생각하지 않았다. 플라톤에 따르면 별 또한 세이렌이다. 우주와 이치를 만들어 내는, 소리가 나는 천체들이다. 리듬과 박자. 발걸음은 일정한 리듬을 지닌다. 곤봉으로 후려치는 것이나 인사하는 것 역시 규칙적이다. 수용소 군악대에 부여된 첫 임무이자 가장 일상적인 역할은 노역장에 들고 나는 수감자들의 행진에 리듬을 붙이는 것이었다. "수감자들의 영혼은 죽어 있다. 마치 바람이 낙엽을 날리듯 그들을 떠밀고, 그들의 의지를 대신한 것이 바로 음악이었다."(프리모 레비) 프리모 레비는 음악이 지닌 가장 오래된 기능을 폭로했다. 그는 음악이 "저주" 같다고 적었다. 음악은 "생각을 없애고 고통을 완화하는, 끊임없는 리듬의 최면 상태"였다. "음악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복종하거나 감내하지 않고서 노래를 다시 들어 볼 필요가 있었다. 독일인들이 계획한 이 기괴한 의례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어째서 지금까지도 이 무해한 노래가 기억 속에 다시 떠오를 때면 우리 혈관 속 피가 얼어붙는 것이 느껴지는지를."(프리모 레비) 프리모 레비는 계속해서 몸 안에 각인된 행진과 노래에 대하여 말한다. "음악은 수용소에 관한 기억 중 가장 나중에 잊힐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은 수용소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떠오른 프르동이 강박적 소리의 형태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이 노래는 개별적인 소리의 형태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이 노래는 개별적인 소리의 원자들과 뒤섞여 신체적 리듬을 끈질기게 괴롭힌다. 그리하여 프리모 레비는 음악은 파괴한다고 말한다. 음악은 결정의 "감각적 표현"이 된다. 그것으로 인간은 인간 박멸을 감행했던 것이다. 소리는 우리를 무리 짓게 하고 우리를 지배하��� 조직한다. 그러나 그 소리는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여는 것이다. 우리는 이 동질적이고도 규칙적인 간격으로 반복되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일 때, 그것들을 각각의 소리로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 소리들을 자연스럽게 두 개나 네 개의 음으로 묶는다. 때때로 세 개로, 혹은 아주 드물게 다섯 음으로 묶기도 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 우리는 이 소리들이 반복적이라기보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소리의 묶음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그런 식으로 결집되고 분할된다. 음악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의 생산은 이 "죽음"과 맞닿아 있다. 시몬 락스의 생각은 프리모 레비와 다르지 않다. 소리의 발산에 저항하는 청취란 없다는 것이다. 저주에 맞서는 저주받은 이가 없듯이. 가장 세련되고 난해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동시에 잔혹해질 수도 있다는 것에 사람들이 놀란다는 사실이 나는 놀랍다. 예술은 야만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폭력의 반대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의지와 국가를, 평화와 전쟁을, 피 흘림과 사상을 대립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자유의지와 죽음, 폭력, 피, 사상은 어떤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때의 논리는 설사 그것이 이성을 거스른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의 논리로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사회 공동체는 사회의 기원인 혼돈의 엔트로피를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이 사회의 숙명이다. 음향적 충격은 죽음으로 이끈다. 오래전 문헌학자들은 '종'을 뜻하는 bell이 '전쟁'을 의미하는 bellum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했다. 즉, 소리가 울리는 순간 대상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종이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었다. (...) 종이라는 단어는 동물에서 비롯되었다. 종은 bellam 즉 '소처럼 울다'라는 의미의 단어에서 왔다. 종은 인류의 높고 긴 울음소리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음악은 유아기적 흔적을 보여준다. 그것은 충격적인 소스라침과 등을 오싹하게 만드는 전율을 안기며, 놀랄 만한 지지와 격렬한 감정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도록 유도한다. 불안정성이 수용소를 압도했다. 다음 날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술은 생존과 같은 것이었으며, 시간의 시련은 다름 아닌 끝없이 길고 비어 있는 시간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카렐 프뢸리히는 이 모든 조건에 한 가지 "주요인"을 덧붙였다. 그것은 일반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진정으로 대중을 위해 연주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대중이 계속해서 죽어 갔으니까요." <저주를 풀다> 파시즘은 확성기와 관련이 있다. 파시즘은 "무선의 소리"에 힘입어 증식했으며, 곧 "원격 영상"으로 대체되었다. 20세기를 지나는 동안 역사, 파시스트, 산업, 전기에 바탕을 둔 논리는 위협을 가하는 소리들을 독점해 왔다. 음악의 실천이 아닌 음악의 기계적 재생과 청중의 증식으로 인해, 음악은 소음과 구별되지 않게 되었다. 도시에서 멜로디는 장총을 휘갈기는 퇴폐한 영웅주의적 방식으로 전파되었다. 사람들은 이에 병적 공포를 드러냈다. 의미를 띠는 것 저편에 언어의 실체가 머무른다. 이것이 음악의 정의다. 음악이 드문 것이었을 때, 음악의 소환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정신을 어지럽히는 유혹 같은 것이었다. 음악이 끊임없이 흐르게 되자 그것은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 침묵이 모두가 부르짖는 장엄한 것의 자리에 놓였다. 침묵은 근대에 들어 현기증을 일으키는 것이 되었다. 거대 도시에서 이례적인 사치품이 된 것이다. 그것을 처음으로 감지한 사람은 미군의 총성에 스러진 베베른이었다. 자기를 희생한 음악은 그 후로 미끼새처럼 침묵을 끌어당긴다. 무한히 증식된 음악은 마치 책이나 잡지, 엽서나 영화 혹은 시디롬에서 복제된 그림처럼 음악이 가진 유일함에서 멀어져 버렸다. 유일성을 상실하며 음악은 그 실재와도 멀어졌다. 그러면서 음악은 제 진실성을 포기했다. 음악의 증식은 음악의 출현에서 그 실재를 제거해 버렸다. 음악의 발생에서 본질을 없애는 이러한 행위는 음악이 지닌 고유한 매력과 아름다움을 빼앗는 결과를 낳았다. 하이파이 장치는 클래식 음악의 종말을 뜻하게 되었다. 우리는 음악 재생의 물리적 충실도를 듣는다. 더는 죽음의 세계에서 온 아연실색케 하는 울림을 듣지 않는다. 실재를 극단적으로 모사한 것이 진짜 소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실재의 대기 속에서 펼쳐지고 사그라지는 소리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실황 공연의 환경은 기술적 지식으로 무장한 청중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에 점점 더 집중한다. 이것이 음향적 청취다. 우리가 완벽히 장악한 소리를 듣는 것이다. 소리를 줄이거나 키울 수도 있으며, 중지할 수도 있다. 손가락이나 눈짓 한 번으로 전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관객의 침묵이야말로 연주자들이 추구하는 목표지점이다. 연주자들은 침묵의 강력함을 원한다. 그들은 음악 듣기의 전제 조건인 무無의 청취라는 극단적 상태로 관객의 주의를 몰아넣으려 애쓴다. 이 특별한, 인간적 침묵이라는 지옥으로 옮아가기 위하여 이미 존재하는 세상의 소리에 구멍을 낸다. 나는 언제 음악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는지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날, 머든 울리는 것들에 대해 일순 무심해져 버렸다. 타성에 젖어, 혹은 외양적 아름다움에 이끌려 악기에 다가갈 뿐이었다. 간신히 악보를 펼쳐 보아도 더는 어떤 노래도 울리지 않았다. 음이 희박해졌다. 나는 음악을 다른 것과 마찬가지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권태로웠다. 책을 읽는 것은 책에 담긴 넘치는 탐욕과, 그 리듬과, 내 내면의 결핍을 고수하는 행위일 뿐, 노래에 대한 욕망 탓은 아니었다. 나에게 가장 ���실했던 것이 지긋지긋한 심심하적에 불과해져 버렸다. 탄생에는 어떤 원인도 없으며, 그 끝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은 다르다. 끝이란 없다. 왜냐하면 죽음은 끝을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종식시키지 않는다. 다만 중단시키다. 죽음의 구간은 우리를 향해 내민, 시간이라는 손이다. 죽음이 중단시킬 때, 이 중지는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두 개의 성으로 나뉜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탄생과 외침 속에, 우리의 잠 속에, 숨과 사유 속에, 두 발로 걷는 걸음과 언어 행위 속에 있다. 우리가 불안정하고 종속되어 있는 죽음의 구간이 모든 것을 폭발시킨다. 밤이 눈을 위한 것이듯, 침묵은 귀를 위한 것이다. -파스칼 키냐르 '음악 혐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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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버린 다음 버리기]
올해의 화두는 ‘버리고 버린 다음 버리기’ 인데, 어제는 새벽 5시까지 방바닥에 앉아 버릴 것들을 솎아냈다.
버리고 버린 다음 버리기에 가장 주저했던 몇 가지 물건들을 소개하자면,
편지
필름 인화 사진들
머리털 생기고 난 다음 받은 가족들의 선물(이었던 것들)
이 세 가지가 되겠다.
편지
편지의 경우 지난 2월에 하나하나 다 읽어본 뒤 미련없이 쓰레기통으로 부어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는 첫 번째 애인에게 군 생활 내내 받은 편지 상자와 세상에 없는 중학교 친구가 나를 위해 작성한 롤링 페이퍼. 편지는 나라는 역사의 주름 그 사이사이에 낀 순간들을 타인의 언어를 빌어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것이다. 아무튼, 무사히 버리고 버린 다음 버렸다.
필름 인화 사진들
어제 드디어 버리고 버린 수백장의 사진들. ‘아… 버리기가 애매하다..’ 의 산을 넘고 넘어 쓰레기통으로 겨우 보내고야 말았다. 특히, 중학교 시절부터 찍고 인화한 필름카메라의 사진들을 버리기로 마음먹기까지 다소 어려웠고 마음을 먹은 후에는 주저 없이 버렸다. 가끔은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이것 좀 보라며 사진을 보내고 낄낄 거리기도 했다. 버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름 주제별로 봉투에 적어서 하나씩 담아두었는데, 마치 발굴한 유물을 수장고에 보관하는 모습과 흡사했더랬다. 정말 간직할 만한 사진만을 골라내니 내 뒤에는 버릴 사진들이 상자에 한가득.
가족들의 선물(이었던 것들)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 버리려고 마음을 먹기까지는 가장 쉬우나, 내적 죄책감으로 인해 끝끝내 못 버리던 물건들이 있다. (지금은 얼굴도 모르는) 삼촌이 줬다는 머리띠, 아빠와 내 얼굴이 박힌 깨진 (귀신 소환이 가능할) 손거울, 태국 전통 팔찌 (나를 그만 괴롭히세요. 어머니.) 등등. 몇 가지는 쓰레기 사이로 숨겨서 들키지 않았고 몇 가지는 결국 들키고 말았다.
버리고 버린 다음 버리기는 앞으로도 계속 진행을 할 예정이며, 버린 물건들에 대해 시리즈로 글을 남겨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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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버린 다음 버리기]

작은 꽃병이자, 이것저것꽂이를 버리기로 했다. 서촌의 소품가게에서 신중히 고른 차분한 물건이다. 차분한 물건과 다르게 고르던 그 주말은 한참 불안하던 시절 중 하루였다. 비빌 언덕이 없어 매일 울었다. 그 기억만 난다.

대신 플리마켓에서 2만원 주고 산 hay 펜홀더를 뒀다. 생일이었고, 함께 실실 웃으며 물건을 골랐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리자. 낡는 물건, 풍경, 감상. 쉽진 않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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