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우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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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unem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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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여행하는 법 #시작은 우연히
뇌는 정보를 익히고, 저장한다. 정보를 받아들일 때 중복된 것을 발견하면 기억은 기존의 정보를 불러와 그 위에 덧입힌다. 같은 정보를 몇 차례 연속으로 받아들일 때가 있다. 나는 그것이 우연을 가장한 암시라는 생각을 한다.
1. 한국에서 몇 권의 책을 가지고 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밀란 쿤데라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별 기준없이 집에 있던 책을 가져온 것이고,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만 공항에서 산 것이다. 소유라는 것을 느끼기에는 전자책 보다는 역시 종이의 형태가 적합하다. 신발 몇 켤래 대신 가져온 책들은 물론 현명한 선택이었다.
2. 그 중에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 마지막 장이 마음을 끌었다. 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나의 침실 여행>을 소개하며 익숙한 곳에 대한 재발견에 대해 말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긴 요즘같은 때 아주 적절한 이야깃 거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유튜브에서 한 브이로거의 손에 들려있던 책을 보았다. <내 방 여행하는 방법>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알고보니 같은 작가의 한국 번역 제목이었다. 
3. 코로나 바이러스가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은 인간을 집에 가두었다. 그로 인해 최근 생긴 집단 기현상(커피, 달걀 등을 400번씩 젓는 노동을 직접 사서하는)이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무기력의 정점인 나로서는 집에만 있는 것이 싫지 않지만 사람들은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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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책을 몇 권 가져온 것이 우연히도 시기가 적절했다. 집에 있는 책들 중에 나는 여행의 기술을 가져왔고, 보통은 수많은 여행지들 중 자신에게 익숙한 곳을 여행하는 법을 메스트르의 책을 통해 이야기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시청한 브이로그에서 그 책을 다시 보았다. 이면에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기묘한 바이러스로 인한 판데믹 현상까지. 이것을 우연이 아니라면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잠재되었던 정보의 재인식일까. 나의 편집증일까.
‘글을 써야지’라고 항상 생각했다. 그러나 줄곧 금전적 여유에만 몰두했다. 돈이 있어야 사유도 하고, 창작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버는데 열중했다. 그러나 돈이 가진 성질을 간과했던 것 같다. 돈은 벌면 쓰고싶고, 쓰고나면 없다. 그러면 또 돈을 벌어야 한다. 무한의 루프 어디에도 사유와 창작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행위가 배제된 의미로만 존재하던 찰나 돈을 벌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우연히. 이쯤에서 일련의 사건들(1-2-3)이 우연의 옷을 입고 등장한 필연처럼 느껴졌다. Muss es sein? Es muss sein! 쿤데라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 문장에 매료되었다. 소설속에 인용된 베토벤 4중주의 이 문장은 나의 우연에도 못을 박았다. 변명같은 소리지만, 나는 여러 차례의 우연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 우연이 필연이 되는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가택연금같은 이 기간동안 나만의 방법으로 방을 여행하고, 그것을 글과 사진으로 남기기로 했다.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둘러보는 일에는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동반한다. 익숙함의 먼지를 털어내고, 느린 걸음으로 방을 하나씩 뜯어볼 것이다. 정리가 되지 않은 옷장에서, 읽다 만 책과 쓰다만 노트에서 무엇인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발견과 재정의를 하는 시간이 되겠지. 이 기간은 우리 모두에게 그러라고 주어진 방학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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