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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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lab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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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岡克行, ルーマン/社会の理論の革命 (54)
勁草書房, 2006
발제 - 조은하, 박상우
제18장 시스템 합리성 
1. 초기 루만의 시스템 합리성 
- 합리성 문제와 개념에 대해 근본부터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1967년 1월 교수 취임 강의 「사회학적 계몽」에서 표명되었던 것처럼, 사회학적 계몽을 지도이념으로 제창한 루만 사회학이론의 하나의 과제. 당시 사회학은 행위 합리성과 올바름에 대한 판단을 정식화 하는 권한을 다른 과학에 위임했고, 서양문명의 합리화 과정이라는 사회학의 커다란 테마는 연구의 최전선에서 사라져버렸음. 이는 루만에게는 여전히 사회학이 합리성 개념을 개개 행위의 올바름에 관한 판단과 연결해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고, 또한 그런 한에서 윤리와 결합해 생각한 채로 있는 것과 어쩌면 관련하고 있는 것. 실제 합리성 개념의 분열, 즉 베버가 분석한 목적 합리성이라는 카테고리와 가치 합리성이라는 카테고리도 양쪽이 분명하게 개별 행위와 관계. 사회학에서는 그 외에 일견해 비합리에 머무른 채 숨겨진 합리성이나 잠재적 기능에 대한 관심을 높임. 그것도 또한 사회학이 개별 행위의 행위 합리성만 주목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인상에 뒷받침을 제공. 교수 취임 강의에서 루만은 이러한 이유를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 
“사회학은 행위 합리성에서 시스템 합리성으로 사고 방법을 교체하고, 행위 합리성을 사회학의 시스템 개념과 관련 맺어야만 한다.” (1970, S. 79) 
- 그래서 그러할 때 의미를 구성하는 어떤 체험과 행위도, 그것이 행위들로 이뤄진 시스템의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그것을 통해 극도로 복합적인 세계 속에서 감축적 구조를 유지하는 것에 기여하는 한에서, 합리적이라 보아야만 함. 이 강의에서는 나아가 행위들로 이뤄진 시스템의 시스템 합리성인 합리성에는 역시 전통적인 존재론적 사고와 유사하지 않은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동시에 다음과 같이 지적.  
“시스템 합리성으로서 합리성은 시스템에 상대적이고, 그것을 통해 동시에 역사적으로도 사물적으로도 체험 가공의 구성된 구조에 구속되어 있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믿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이러한 우려는 계몽의 의미, 목표 방향, 내재적 한계라는 것에 대해 본질적인 것을 표명하고 있다. 이성 계몽과 달리, 사회학적 계몽은 역시 상호주관적으로 확실하고 확고한 이성 진리를 찾으려는 것은 아니고, 그로부터 이후의 모든 것을 끌어내려 하는 것도 아니다.” (1970, S. 79) 
- 루만은 여기서 제기하고 있는 시스템 합리성에 대해, 그 후 여섯 번에 걸쳐 주제로 논함. 첫번째는 『목적 개념과 시스템 합리성 – 사회 시스템에 있는 목적의 기능에 대해서』(1968). 둘째는 『사회시스템』(1984)의 제 11장 「자기언급과 합리성」, 셋째는 『에콜로지의 커뮤니케이션』(1986)의 제20장 「에콜로지 커뮤니케이션의 합리성에 대해서」. 넷째는 『근대의 관찰』(1992)의 제2장으로 수록된 「유럽의 합리성」. 다섯째는 『사회의 사회』(1997)의 제1장 제11절 「합리성의 요구들」, 여섯째는 유고작 『조직과 의사결정』(2000d)의 제15장 「합리성」. 루만의 이론 발전사로 말하자면, 이들 중 첫번째만이 전기 작품에 속하고, 남은 모두는 후기, 즉 시스템 요소를 행위에서 커뮤니케이션으로 변환한 오토포이에시스이론의 도입 이후. 이 전기와 후기의 차이를 중시하고, 후기의 것은 일괄해 다루는 것으로 함. 
- 루만의 합리성론 나아가 시스템이론 사회학 구상 전체가 뒤에 받게 된 악평과 관계 있는 것에서 최초로 주의할 것은 첫번째 『목적 개념과 시스템 합리성 – 사회 시스템에 있는 목적의 기능에 대해서』의 발행년도. 1968년은 관리, 지배와 억압에 반대하는 항의 운동이 서독에서 최고조에 달한 해. 사회적 공격 목표는 현존 지배체제라는 <시스템>이고, 사상적 공격목표는 목적 합리적 사고양식, 도구주의적 사고양식인 서양 합리주의, 근대 합리주의. 시스템과 합리성이 의혹으로 폭로되던 그 소용돌이 속에서, 이 책 이름에 나란히 있는 것은 「목적 개념」, 「시스템 합리성」, 「사회 시스템」, 「기능」이고, 저자는 보수파의 대표적 사회학자 젤스키의 구상에 기반해 개��된 새로운 대학에서 최초로 임명된 교수, 그것도 저자의 전력은 고급 관료, 그 후 행정전문대학교에서 행정에 컴퓨터 도입문제를 연구하는 상급 참사관. 시스템 이론 사회학과 시스템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제창한 루만의 이론은 테크놀로지이고, 테크노크라트의 이론이라 추정하는 것은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 
- 그래서 책을 훑어 본 사람에게 이 책은 뉴 타입의 조직관리론, 행정관리론으로 비춰진 것. 왜냐하면 이 책에는 「사회 시스템」이라 칭해져도 조준은 주요하게 조직에, 또한 파슨즈의 이론보다 계속 행정 관리학 출신의 하버드 사이몬의 행동과학적 조직이론에 맞춰지고, 전통적 조직 이론과 관리 이론에 대해 사이몬이 했던 것 이상 철저하게 비판. 그 위에 이 책은 사이몬의 「제약된 합리성」 개념에 「극도로 복합적인 세계」라는 사고 방법을 추가하는 한 편, 사이몬의 시스템 개념에 내/외-차이(환경과의 복합성의 낙차)라는 시스템 개념을 대치해, 조직의 목적 기능에 대해서 등가 기능주의의 입장에서 사이몬과 다른 견해를 제시하려 했던 것. 그 때 루만은 사이몬이 컴퓨터 용어에서 가져온 프로그램화(「활동의 프로그램화」, 「의사결정의 프로그램화」)라는 개념을 목적 프로그램화와 조건 프로그램화라는 기능적으로 등가인 프로그램화로 재구분 하고, 조직에 있는 목적 기능 분석에서 이 구별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 이 또한 테크로크라트에 의해 쓰여진 책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한 것. 
- 게다가 『목적 개념과 시스템 합리성 – 사회 시스템에 있는 목적의 기능에 대해서』에 있는 시스템 합리성의 분석과 서술에는 오해를 초래해도 할 수 없는 커다란 불충분함이 남아 있음. 조직사회학자 레너드 마인츠가 서평에서 정리했던 것처럼, 이 책은 루만이 그때까지 작품에서 전개했던 두 가지 기본적 주장, 즉 사회학 이론은 행위 이론이 아니라 시스템 이론(행위시스템이론)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사회학 이론은 복합성의 포착과 축감의 이론이여야 한다는 주장을 조직에 구체적으로 적용. 그러나 조직이라는 사회 시스템의 시스템 합리성과 사회라는 포괄적 시스템의 시스템 합리성의 차이는 거의 언급하지 않음. 
- 루만은 전자를 후자와 혼동했을 때 생겨날 수 있는 위험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로의 이행(특히 종교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던 타자의 문제화, 공통된 목적 진리의 소실, 목적 설정의 주관화 이것들의 결과인 사회적 복합성의 극도의 증대라는 전제에서 출발해, 사회시스템은 각각 특정한, 보다 상세하게 파악해야 할 조건을 통해서만 자기 존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테제를 세워, 합리성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 즉 “이 새로운 복합성과 함께, 합리성의 의미는 거의 경험하지 못했던 것 같은 방식으로 변화한다. 역시 합리성은 앞에서 주어져 있는 의미를 고려하고, 이해해서 구체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합리성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복합성의 감축이다” (1986, S. 6/8페이지). 
- 이 책은 이 합리성 개념에 따라 복합성 포착의 단계적 차이���는 관점에서, 당시 조직 연구에서 지배적인 두 가지 이론 모델, 즉 존립에 주목하는 자연적 모델과 목적 달성에 주목하는 합리적 모델의 대립의 상대화가, 또한 거기 있는 목적 기능의 새로운 해석이 시도. 이 책은 또한 복합성 감축 문제에 관련해, 근대에 생겨난 인과성 개념의 변화와 19세기에 드러난 가치 개념 문제를 다룸.  
- 그러나 이 책을 둘러싼 토론에서는 근대의 합리주의 비판이 당시 사회적인 테마였음에도 불구하고, 루만 연구 출발점에 있던 역사적 고찰과 합리성 개념의 역사적 전환이라는 문제제기는 그다지 화제가 되지 않음. 그것에 더해 <시스템 존립에는 복합성 감축이 불가결하다>라는 명제는 <시스템 존립 유지를 위해 시스템은 복합성을 감축해야만 한다>라는 명제와 연속적. 이 때문에 이 책과 그 합리성론은 현존 시스템의 존립 유지, 그와 함께 현존 시스템의 기초 구조 유지를 노리는 뉴 타입 이론이라 이해. 
- 시스템 합리성이라는 개념의 이상과 같은 난점을 해결하는 데에는, 조작적으로 닫힌 오토포이에틱한 자기언급적 시스템이론으로의 이행을 기다려야만 했음. 이 이행의 결과, 시스템 합리성은 시스템 반성 문제로서 다시 다뤄 짐. 그래서 시스템 반성 문제는 논리적 순서로는 자기언급적 시스템이론의 최후에 다뤄지는 문제. 루만 시스템이론의 기본적 사고 방법의 구명을 목표로 하는 이 책에서는, 이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시스템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다루고자 함.  
2. 자기테스트로서의 시스템합리성 
(1) 시스템합리성의 정의 
- 조작적으로 닫힌 오토포이에틱한 자기언급적 시스템이론으로 이행에서 시스템 존립에 있어서의 복합성 감축의 필요성도 시스템과 환경과의 복합성의 낙차도 조금도 부정될 이유는 없지만, 시스템 형성의 설명 방식은 복합성 감축에서 조작의 접속을 통한 오토포이에시스(자기생산)로 전환. 루만은 이 전환에서 종전의 그의 시스템 합리성 개념의 기초에 있었던 시스템과 환경의 차이라는 관점을 버리지 않고, 시스템 합리성을 시스템 반성의 한 형식, 시스템의 자기관찰의 한 형식으로 다시 다룸. 그것에 의해 “합리성은 무엇보다 우선 복합성 감축이다”라 했던 종전 테제를 넘어섬. 여기서는 그것 대신 다뤄지는 시스템 합리성 정의로부터 시작. 
- 시스템의 반성 내지 자기관찰은 시스템에 의한 자기언급 조작, 즉 시스템과 환경의 구별에 의거해 시스템 자신을 지시하는 조작이고, 이 구별을 통해 시스템 자신에 대한 정보 획득을 겨냥하는 조작. 이에 기반해 후기 루만은 시스템 합리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 동시에 반성과 시스템 합리성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함. 
“반성은 시스템과 환경의 차이를 시스템으로 도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를 차이의 통일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행할 때, 우리는 합리성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합리성은 반성을 경유하는 것에 의해서만 달성되지만, 그러나 모든 반성이 합리적일 이유는 없다.” (1984, S. 617) 다시 말해 “자기언급에서 합리성을 추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1984, S. 638) “자기언급만으로는 또한 합리적이지 않다.” (1984, S. 640) 이 자기언급이 예를 들어 이성의 자기언급이라 해도 그러함. (1986, S. 254) 합리적이라 말하기 때문에 자기언급에 추가되어야만 하는 것은, 시스템과 환경의 차이의 통일이라는 관점으로의 정위. “합리성은 차이 개념이 자기언급적으로 이용되는 경우, 즉 차이의 통일이 반성되는 경우, 그 경우에 처음으로 주어진다.” (1984, S. 640) 이에 따라, 시스템 합리성 개념은 “시스템과 환경 차이의 시스템으로의 재도입의 가능성, 그래서 시스템의 정보처리를 시스템과 환경의 차이의 통일에 의해 지시할 가능성을 말한다.” (1986, S. 257) 
- 그 때문에 이 합리성 개념에 따르면, 합리성에 의해 요구되는 것은, 차이의 개념적 자기언급을 차이로 정위한다는 관점에서 체크하고, 그래서 거기서 생겨나는 추론적 결과들을 끌어내는 것. 또 조금 나눠 말한다면, 시스템은 우선, 자기자신과 자신의 조작들에 대해 거리를 취하는 것이 가능해야만 하고, 시스템과 환경 구별을 다르게도 있을 수 있는 구별로 다루는 것이 가능해야만 함. 또한 시스템은 시스템/환경의 구별을 실재에 비춰, 시스템과 환경 각각에서 실정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 정보를 획득하고, 그를 통해 나아가 만일 그 구별을 변경하는 때 시스템에서도 환경에서도 어떻게 변화가 생겨날 것인가에 대해 추측할 수 있어야만 함. 시스템은 그에 의해, 사정에 따라서는 환경에 대한 자신의 포지션을, 그 시스템 자신 속에서만 세우고 바꿔지는 기준들에 기반해 수정하는 것이 가능해야만 함.
- 이렇게 후기 시스템합리성은 시스템/환경의 차이라는 차이에 의해 규정되는 시스템으로 이 차이를 재도입하여 다뤄 짐. 루만의 이 합리성 사고 방법이 인과이론적 언어로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 즉 만일 시스템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려 하는 경우, 시스템은 환경에 대한 시스템의 작용을, 시스템 자신에 되돌리는 작용에 비춰 컨트롤해야만 함(1984, S. 642). 어떻게 해서도 초기 시스템합리성 개념에서 이상과 같은 전환은, 시스템이론의 전환, 즉 오픈 시스템이론에서 자기언급적 시스템이론으로의 전환의 귀결. 그래서 합리성 개념에 대한 재고라는 초기 이후의 과제에 비춰보면, 이 후기 합리성개념의 개념사상의 의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루만은 초기 이후 합리성 개념사 연구를 더욱 보충하여 그것을 분명하게 함.
(2) 합리성 연속체의 해체사
- 루만은 『공공적 관리에 있는 법과 오토메이션 – 행정학적 연구』 (1966a)의 제12장 「합리성과 법」 이후 합리성에 대해 논할 때, 언제나 역사적 퍼스펙티브 속에서 다룸. 앞의 『목적개념과 시스템합리성』(1968)에서도 ‘서양사상의 기원 내지 그것에 결합되어 있는 사상 전통의 회귀’ (S. 2)에 중요한 의미를 두었던 것. 구 유럽적 사고양식과 ‘인식론적 장해’의 타파를 목표로 하면서부터 바로 그런 것. 그 후 합리성론에서 합리성의 의미론에서 역사적 변천에 점점 많은 부분을 할애.
- 그 하나였던 논문 「유럽의 합리성」에서, 유럽 합리성의 역사는 다음 테제로 정리. “유럽의 합리성 역사는 세계 속에서 관찰자를 그 세계와 결합되어 있는 합리성 연속체(Rationalitätskontinum) 해체의 역사로서 기술하는 것이 가능하다.” (1992, S. 53/33페이지).
- 이 출발점에 있던 구 유럽의 인간주의적 전통에서, 인간은 자연본성적 존재라는 관점에서, 동물과의 구별을 통해 규정되고, ratio는 인간의 자연(자연본성, Natur). 그 때 이 자연이라는 개념에는, 오늘날과 달리 규범적 구성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 루만은 특히 주의하고, “합리성의 규범적 개념은 자연의 규범적 이해에 기반해 있다”(1997, S. 171)는 것을 강조.
- 거기서 루만이 주요전거로 삼은 것은, 최초 시기 이후 불변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의 학통. 나아가 후년에는 귀족에 대한 이론들이 더해 짐. 그러나 후자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는 생략. 여기서는 주로 『사회의 사회』의 서술(1997, s. 171~173)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맥에서 자연본성은 어떤 끝(목적, telos)을 향하는 운동으로 이해. 그렇지만 이 운동은 끝에 도달하는 것을 바로 보증하는 것은 없음. 이 자연본성은 모든 자연과 마찬가지로, 잘못, 부패, 타락에 ���지기 쉬운 것으로 다뤄 짐. Télos는 도달해 완성 상태에 있다 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정지 상태. 그러니까 이 또한 (<시>로부터 구별되는) <역사>에는 교훈적 의미를 제공. 근세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본래 있어야 할 것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가르치는 사태와 경험의 집성으로 이해.
- 그렇지만 이성은 인간의 자연이고, 그러나 자연은 타락에 빠지기 쉽다면, 여기서 자연은 자연본성이라서 비자연본성이라는 양의성.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규범적 자연본성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고, 타락을 통해서는 인식될 수 없는 형태로 처리한다고 루만은 보았음. 어떻게도, 구 유럽 전통에서는 완성(완전)의 반대개념에 있는 타락은 순응/일탈이라는 규범도식에서 해석되고, 윤리학적 취급이 가능한 것.
- 루만의 이해로는 구 유럽 전통에서 이렇게 해서 세계가 완전하다 생각되는 것만은 아님. 그것에 더해 ‘세계 연속체’로서의 합리성이 전제. (1984, S. 639) 이 전통에서는 관찰자가 사고하는 본질(animal rationale)이라 보여지는 경우, 사고와 존재의 수렴이 중요한 것이고, 그가 행위하는 본질이라 보여지는 경우에는 행위와 자연본성과의 수렴, 그래서 자연본성에 의해 주어지는 목적이 중요. (1992, S. 53f)
- 그렇지만 이 합리성 연속체는 17세기 이후 여러 곳에서 불화가 시작되고 해체. (1984, S. 638f.) 특히 우선 데카르트에 의해 합리성의 주관화가 수행되었고, 합리성 요구는 주체에게, 멘탈한 상태로 감축. 이에 의해 목적은 선택되는 것이 가능한 것, 즉 조종의 표상으로 옮겨졌고, 세계 진행의 정정요인으로 나타남. 다른 한 편 자연은 외적 패러메타로 감축. 이렇게 해서 목적을 자연본성의 완성 상태라 보지 않는 것이 가능. 이것을 가지고 목적을 위한 수단의 선택 문제만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의 선택 문제가 부상.
- 즉시 이에 이어 동기와 목적의 구별이 이뤄지기 시작. 그 때 동기는 이해관심과 다르게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분류되고, 커뮤니케이션에 있는 성실 문제와 진정성 문제가 등장. 주체의 합리성 연속체도 또한 하나의 구별, 즉 동기와 목적의 구별에 의해 분열. 루만의 견해로는 그 결과 이 이후에 수행되었던 합리성의 고찰들은 합리성 연속체를 상처 내는 구별과만 여전히 관여. (1997, s. 173~176)
- 그렇지만 확실하게 계몽의 세기였던 18세기는 합리성을 획득하고, 그것을 저항에 맞서 생활수행의 원리로 끌어 올리려던 세기. 그러나 참으로 이 저항이 보였던 것처럼, 합리성 연속체의 균열은 계속 남아 있음. 18세기는 계몽의 세기임과 동시에 센티멘트의 세기였고, 이성의 세기임과 동시에 역사의 세기. 그래서 그것은 헤겔의 평화(Entzweigung)라는 문제를 가지고 끝이 남. 합리성은 어디에서도 당장 반대의 측을 가진 이-측면-형식의 마크된 측. 합리성의 고집은 이전보다 더욱 명료하게 패러독시컬한 커뮤니케이션이 됨. 그러나 이 커뮤니케이션 자체는 의연하게 봉인되어 ���지. 왜냐하면 합리성에 반대할 만한 충분한 이유는 없기 때문. 합리성이라는 형식의 다른 측면으로의 횡단은 <시니시즘>으로 다뤄 짐.
- 19세기에 들어서면, 합리성 개념은 한 편으로는 사회의 부분시스템으로 더욱 축감. 즉 목적과 수단의 효용관계의 경제적 계산, 바꿔 말하자면 최적화로. 혹은 과학적으로 보증된 지식의 적용으로. 나아가 법 텍스트와 판례들의 경험의 개념적 정리에 연결된 판결로. 다른 한 편 합리성의 판단은 원리에서 역사적 과정으로 방향이 옮겨지고, 이 과정이 진보로 기술. 나아가 목적의 주관화 결과에도 있지만, 합리적/비합리적이라는 이분법이 사용. 이렇게 합리성 영역은 단지 언제나 행위 합리성으로서, 비합리한 생활이라는 바다 속에 섬들이 됨.
- 이어서 19세기가 끝날 때는 합리성 개념 그 자체 분해가 시작. 이것은 합리성에의 일반적 회의를 생겨나게 하는 것. 그래서 이 분해도 또한, 루만의 용어로 말하자면, 구별기술에 의해 수행. 합리성 개념이 예를 들면 포이에시스와 프랙시스라는 오랜 구별로 되어 목적합리성과 가치합리성으로 분할. 그 지연된 메아리처럼 하버마스에게 합리성 개념은 전략적 행위의 합리성과 이해를 추구하는 커뮤니케이션적 행위의 합리성(혹은 모노로그적 합리성과 다이알로그적 합리성)으로 분할. 이 외에 오늘날 유포되는 또 하나의 구별로, 실체적(내용적) 합리성과 절차적 합리성의 구별. 또한 행위 합리성도, 의사결정 과정의 정확한 분석을 통해 합리성의 견장을 의심하는 것.
- 이상과 같이 루만은 유럽의 합리성 역사를 합리성 연속체의 해체 역사로 그림. 합리성의 의미론의 변천은 그의 견해로는 사회구조 변화와 관계. 구 유럽 사회의 붕괴와 함께 보다 자유로운 개념 형성이 개시되고, 오늘날에는 합리성에 여러 타입이나 형식들이 있다고 됨. 합리성의 비판 기준에 대해서도 의견 차이. 나아가 또한 합리성을 귀속시키는 것이 가능한 영역에 대해서도 다툼. 루만의 생각에는, 합리성을 둘러싼 이러한 현상은 사회의 기능적 분화 현상을 반영. 그는 전통적 합리성의 부식, 합리성 개념의 분열, 합리성 기준의 복수화를 앞에 두고, 합리성 개념의 재구성을 목적. 그 때 그는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유의.
첫째 구 유럽의 합리성 개념은 부서져야 하지만, 그것이 그과 함께 문제도 또한 사라져 버렸다는 것까지를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님. (1997, S. 176) 그것은 합리성에 관한 오늘날 대부분의 사고 방법이 세계로의 관계 짓기를 결여하는 것과 대조를 통해 주의. (1986, S. 257; 1992, S. 90)
둘째 합리성의 복수 타입과 형식들이 주장되는 중에 합리성 개념의 재구성을 노렸던 데에는 추상을 가지고 대처할 필요가 있음. 또한 복수의 합리성 기준이 주장되고 있기 때문에, 합리성 개념은 합리성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관찰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해야만 하고, 그래서 제2계 관찰 수준에서 정식화 돼야만 함. (1997, S. 177f.)
셋째 목적 합리성과 가치 합리성의 구별을 처음으로 하는 여러 합리성 타입 구분론에는 이러한 구별의 양 쪽이 어떠한 합리성 이해와 또 연결되는 것으로 합리성 견장에 가치를 두는가의 물음은 세워지지 않음. 그것에서는 구별 그 자체의 통일로의 물음은 세워지는 것이 아닌 구별을 가지고 작업이 이뤄지지만, 이것은 19세기 이후 많은 경우에 많이 이뤄진 방식. 이용되었던 구별의 통일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방기는 루만의 사고에 의하면, 근대사회는 사회자신의 통일을 반성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에 불과. 그래서 합리성도 또한 관찰에 속한 사태이고, 구별. 그렇다면 차이이론적 어프로치가 필요. (1992, S. 56~59)
(3) 차이이론적 합리성 개념
- 어떤 타입의 합리성에서라면, 합리성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 위해 우선 그 자체는 합리적이 아닌 하나의 구별을 전제로 해야만 함. (2000b, S. 447) 그래서 차이이론에 기반해 말하자면, 합리성 문제는 각각의 합리성에서 이용되는 구별의 통일의 물음 중에 있다 말하는 것이 가능. 실제 예를 들면 목적과 수단 관계의 최적화 (목적합리성), 사실과 가치의 합치(가치합리성), 이들은 각각 그러한 일반적 원리의 구체적인 케이스라 보는 것이 가능. 루만은 여기에서 시스템이론을 통해 시스템과 환경의 구별(시스템합리성)을 끌어내는 것. 그 경우 이 구별의 통일로의 물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 시스템과 환경의 차이의 통일은 세계. 그 때문에 루만의 이 구별은 구 유럽의 합리성의 부식 이후, 차례로 잃어버렸던 합리성의 세계 관계를 다시 한 번 시야에 넣으려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 가능. 그렇지만 규범적으로 설정된 구 유럽의 합리성의 부식의 진행은 거기에 전제되는 것과는 정반대의 불완전하게 일탈적인 실재라는 압도적 현실과 관계가 있는 것이고, 최종적으로 그것에 의해 합리성의 전통적 구별은 붕괴되었던 것. 그렇다면 루만 이론의 경우 합리성과 실재의 관계라는 문제는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관찰하는 것에서 필연적 맹점이 있다는 데 있음.
- 어떤 인지적 조작, 어떤 행위적 조작도, 관찰로 구별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구별을 통해 한 편을 지시하는 것이 가능. 그러한 조작은 관찰을 이끄는 구별을 (통일이 아니라) 차이로 사용해야만 함. 그러한 조작은 예를 들면 헤겔의 의미에서 변증법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님. 그러한 조작은 자기자신을 관찰로, 그 조작이 관찰하고 있는 것에서 배제해야 함. 그래서 여기서는 관찰자 자신도 또한 어떠한 구별을 사용하는 것이고, 배제되는 제3항. 그렇지만 참으로 그가 그래서 그 만이 오토포이에시스를 통해 자신의 조작의 실재를 보증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에 의해 동시성(Gleichzeitigkeit)의 상에서, 세계로서 전제 되야만 하는 모든 실재를 보증하는 것. 지시를 하기 위한 구별이라는 실천은, 이 구별 속에서는 나타나지 않음. 이 실천은, 다른 구별을 가지고 하지 않는다면 지시되지 않음. 이 실천은 관찰의 맹점이고, 그 때문에 참으로 이 실천의 합리성 장소. 루만은 합리성과 실재와의 관계라는 문제를 이렇게 이해. (1997, S. 178)
- 그러나 문제가 이렇다면, 만족스러운 해결은 있을 수 없음. 이미 사고와 존재의 구별, 혹은 주체(주관)와 객체(객관)의 구별을 원용하려 해도 유효하지 않음. 이론은 그 객체만을, 그래서 사회만을 패러독시칼한 것으로 보는 것을 통해서 이론 자신을 씻어 내는 것은 불가능. 왜냐하면 이론이 객체 분석에 있어 사용하는 모든 개념(시스템, 관찰, 맹점, 의미, 커뮤니케이션 등등)은 이론자신에도 해당하기 때문. 지금 관계한 어떤 분석수준에서는 러셀이나 타르스키가 제안했던 수준들의 구별은 무효이고, 오톨로지컬한 추론을 피할 수 없음. 그렇다면 타개책은 어디에 있을까?
- 그것은 구별이 그 구별에 의해 구별된다는 것의 한 편으로 재-진입하는 것을 통해 수행되는 패러독시의 분해에 있음. 그러나 재-진입 역시 패러독시컬. 그렇다면 시스템과 환경의 구별을 시스템으로 재-진입하는 경우, 패러독스는 전개된 패러독스. 왜냐하면 이 재-진입은 그것에 이어진 관찰을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 그래서 <탈구축으로서 제2계 관찰>을 사용하는 루만의 고찰에 의하면, 구별의 구별된 것으로의 재-진입은 실은 유럽 합리성 개념에서 논거로는 알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밀의 구조로 언제나 전제되어 있는 것. (1992, S. 66~77/42~51페이지, 1997, S. 180~183)
- 우선 구 유럽의 합리성 연속체에 대해 본다면, 그것은 사고와 존재의 구별, 내지 행위와 자연의 구별이라는 관점에서, 각각의 구별의 양 측의 일치로 특징. 세계가 질서로서, 코스모스로서, 신의 창조로서, 조화로 전제되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시선은 일치의 편에 향해져 있음. 그 때 사고 내지 행위는 대상을 긍정 값과 부정 값의 구별을 통해 관찰하는 2가 논리학의 객체. 그렇지만 수렴을 겨냥해 만들어진 사고와 존재의 구별, 혹은 행위와 자연의 구별으로 눈을 돌리면, 기묘한 것이 눈에 남음. 존재와 수렴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고 그 자체가 존재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 이처럼 사고에 대해 합리성의 조건으로 존재와의 일치가 요구될 때, 사고와 존재의 구별의 기초에 내밀하게 수행되는 것은, 이 구별의, 이 구별에 의해 구별되는 것으로의 재-진입. 자연과 행위를 구별하고, 양자의 수렴이 합리성으로 이해되는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의 재-진입이 전제. 행위도 또한 자연과의 수렴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자체가 자연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 구 유럽에서는 자연으로서, 혹은 신의 창조로서 세계의 통일이 강조. 우선 모든 이론이 이 실현을 겨냥하고, 사고에 있는 존재의 모사, 예술적 행위에 있는 자연의 모방이 설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의 사고 방법에서는 <짐메트리의 타파>를 더함. 관찰자에 대해 특별한 포지션이 할당되어지는 것에서, 합리성 연속체는 어시메트리로 생각. 자기자신과 그 반대물을 포함한 특별한 포지션, 그것은 세계의 구조 속에서 점하는 인간의 포지션. 그런 한에서 구 유럽 전통은 인간주의적이었다고 루만은 말하는 것.
- 재-진입에 주목하는 루만의 탈-구축적인 고찰에 의하면, 문제는 구 유럽 합리성에 머무는 것이 아님. 근대 합리성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관찰하는 것이 가능. (1997, S. 181f.) 목적합리성을 예로 들어 말하면 형식으로서 목적합리성이 그 자체 속에 끌어들여질 (재-진입될) 때, 합리성 자체가 수단으로 생각되는 것. 그렇다면, 그 경우 목적은 무엇일까?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면 분명한 것처럼, 목적 그 자체가 외부화 된다며 그 자체가 목적 합리성은 목적으로 역할 한다는 것. 목적의 이 외부화를 최초로 의도했던 것은 우선 접촉한 목적과 동기의 구별. 그래서 같은 논리에 따라, 합리성은 또한 자기제시와 정당화에서 역할 하는 것이 가능. 물론 행위의 근거 부여에도 사용. 합리성의 판단은 그 자체로는 또한 합리적으로는 아닌 구별을 전제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서술했지만, 지금 여기서 다루는 경우에 있어 알 수 있듯, 합리성은 전에 주어져 있는 어떤 외부적 의미를 거처로 하는 것에 의해, 합리성 자신을 내부적으로 닫아 놓는 것으로서, 바꿔 말해 완전한 구별로 제시할 수 있는 것. 즉 합리성은 숨겨진 재-진입을 수행하는 것. 그 때문에 합리성은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인 것. 합리성은 그 자신이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근거 부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 조작들에 의존하는 것.
- 근대합리성의 운명을 루만은 이렇게 해석. 그 위에 그는 시스템 합리성에 대해, 시스템이론적 분석에 보완해 정밀화. (1997, S. 182~184) 우선 재-진입의 규칙을 시스템과 환경의 구별에 적용할 때, 이 구별은 시스템에 있어 다시 한 번 나타남. 시스템에서 나타나고, 그래서 구 유럽 합리성에서 필요로 했던 합리성의 최종적 세계보증은 필요로 하지 않고, 또한 구 유럽에서 상정되던 합리성 실현의 형식으로서 <지배>도 필요로 하지 않음. 시스템 자신이 시스템과 환경의 차이를 만들어 내고, 이 차이를 관찰. 시스템은 조작을 하는 것을 통해 이 차이를 생산. 시스템은 자신의 오토포이에시스 문맥 속에서 이 조작을 하는 것으로, 자기 언급과 외부 언급의 구별을 필요. 시스템은 같은 자기 언급과 외부 언급의 구별을 사용해 시스템과 환경의 차이를 관찰. 그 때 시스템은 의연하게 언제나 자신의 조작을 자신의 조작에 접속시키는 것 밖에 가능하지 않지만, 시스템은 접속을 위해 방향을 보이는 정보들을, 자기 자신과 환경의 어느 쪽에서 꺼내 내는 것이 가능. 조작적으로 닫힌 시스템에서도 이것은 가능. 그래서 그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구별들을 조작적으로 테스트하는 것, 즉 구별들의 사용은 시스템이라는 형식 속에서 이어지는 것인가, 그것과 이어지지 않는가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의 테스트. 이에 기반해 루만은 시스템 합리성은 오토포이에시스(자기생산)의 수행에서 수행되는 이 테스트, 실재 속에서 실재에 조응하는 것으로 수행되는 이 자기테스트에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
- 그래서 여기서 시스템이 수행하는 자기관찰은, 생겨난 것을 역방향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 왜냐하면 자기관찰의 조작 자체(커뮤니케이션)가 생겨난 것을 오토포이에시스 문맥 속에서 이용해 속행하기 때문. 자기관찰은 또한 자기관찰이 오토포이에틱하게 차이로 생산하는 것에서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 자기관찰은 실재적으로 조작하는 것에서 마크되지 않은 공간인 세계를 시스템과 환경으로 분해. 이에도 불구하고, 조작적으로 닫힌 시스템이 합리성에(충분하지 않은 것으로서도) 필요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시스템은 조작을 쌓는 것에서 자기복합성을, 그래서 그것을 통해 피자극 가능성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 시스템은 시스템과 환경의 구별을, 그 양 쪽으로 이뤄진 구별들에 의해 보완하고, 그러한 것으로 관찰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 가능. 시스템은 지시를 재사용하는 언급들을 농축하거나, 혹은 재사용하지 않고 소거. 시스템은 기억과 망각을 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피자극의 빈도에 반응하는 것이 가능. 이러한 모든 것에서 구별의 구별되는 것으로의 재-진입은 강화되고, 보다 복합적 접속능력이 주어짐. 그 때 전통적 사고 방식과는 달리 문제가 되는 것은 무언가의 사상으로의 접근은 아니라, 보다 많은 정의는 아니고, 보다 많은 교양 도야는 아니고, 주관적 정신 혹은 객관적 정신의 자기실현은 아님. 그것이 아니라 시스템 합리성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별, 즉 시스템과 환경의 구별을 실재에 비춰, 실재에 있어서 테스트하는 것.
- 다른 말로 한다면, 시스템 합리성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통적 사고 방법에 보여지는 것 같은 통일의 달성이 아니라 차이의 유지. 왜냐하면 통일의 달성은 패러독시로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하고, 그래서 합리성의 불가능성에 다름아니기 때문.
- 이상과 같이 루만의 합리성론은 관찰하는 것은 구별로서 한 쪽을 지시하는 것 혹은 관찰의 개념과 구별의 구별된 것으로의 재-진입의 고찰, 즉 제2계 관찰을 가지고 도출.
(4) 근대사회의 합리성 문제
- 그렇다면 이 시스템 합리성을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시스템 합리성은 시스템과 환경의 차이의 통일을 시스템에서 반성하는 것이고, 그것은 실천적으로 시스템과 환경의 구별을 실재에 비추고 실제에서 테스트하는 것. 이 사고 방법은 인과론적 언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고 루만은 말 함. 즉 “시스템이 합리적으로 행동하려는 경우에, 시스템은 환경에 대한 시스템의 작용들을 시스템 자신에 되돌리는 작용들에 비춰 컨트롤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84, s. 642). 이것은 사회라는 시스템의 경우, 사회가 사회에서 발생되는 환경 문제들을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끌어 들이는 컨트롤을 해야만 한다는 것. 그래서 시스템 합리성의 이 사고 방법은 에콜로지 문제를 통해 예를 들어 푸는 것이 가능하고, 실재 루만은 사회 이론에서 에콜로지 문제를 중요시.
- 그 때 출발점은 사회나 그 기능시스템들, 나아가 조직들 모두 각기 조작적으로 닫힌 시스템이라는 것. 예를 들면 경제시스템은 조작적으로 닫힌 시스템으로 기능하고 있고, 그래서 경제시스템은 그 자신도 환경(자연환경, 인간이라는 환경, 사회내부의 환경들) 전체를 최적화하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환경 상태들을 무시하는 것은 분명하게 합리적이지 않음. 그러나 또한 경제시스템에 의한 환경 간섭을 멈추고, 시스템과 환경 차이를 사라지게 하는 것을 통해서 에콜로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음. 그렇다면 사회 움직임을 정지시키는 것. 문제의 합리적 취급은 사회 속, 그래서 사회의 오토포이에시스 속행이라는 조건에서, 조작적으로 닫힌 각 시스템의 피자극능력을 높이고, 그것에서 정보를 획득한다는 것 밖에 없음. 차이이론적 시스템이론, 조작적으로 닫힌 오토포이에틱한 자기언급적 시스템이론은, 참으로 여기서의 시스템과 환경 차이를 조준. 그래서 차이이론으로서 루만의 시스템이론은 에콜로지 문제를 그 때문에 사회라는 시스템의 환경인 인간 문제들(Humanprobleme)을, 사회의 다른 어떤 이론보다 한 층 더 이론적 사고 방법의 중심에 두어야만 함. (1997, S. 186) 단지 그 때 이 시스템이론은 인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 문제들은 통상과는 역방향에서 비춰 짐.
- 그래서 이렇게 사회와 그 환경 차이를 중앙에 두어야만 한다는 것은 에콜로지 문제와 인간문제들이 해결 되어 사라진다는 환상은 지닐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가르침. 루만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은 이를 받아들이는 경우에만 문제를 작업 프로그램처럼 다루는 것이 가능하고, 인간적 환경과 인간 이외의 환경에 관련한 사회라는 시스템의 포지션을 사회자신 속에서 구성하고 변화시켜야 한다는 기준들을 통해 개선하려 시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1997, S. 185)
- 그러나 문제가 중심도 정점도 없는 사회, 기능적으로 분화한 사회에서 그러한 기준들을 배타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심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님. 기능적으로 분화한 사회에서는 사회라는 시스템과 그 외부적 환경의 관계를 통일적으로 다루는 특권적 장소도 또한 결여. 그러한 장소가 만약 임시적으로 만들어진다 해도, 그것은 사회 내부에 하나의 새로운 차이, 그 장소와 사회에 있는 다른 모든 장소와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에 다름 아님. (1986, S. 256f.) 사회는 사회 속에서 또 한 번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 그 때문에 “근대적 조건에서 사회적 합리성은 언어의 정확한 의미에 있어서 유토피아(무-장소)이다.” (1997, S. 186)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일의 사회, 세계사회는 분명하게 점점 글로벌한 사회적 합리성에의 고려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
- 물론 각 기능 시스템은 각기 시스템과 환경의 차이의 통일의 반성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 그러나 어떤 기능시스템도 자신 속에서 사회전체를 반성하는 것은 불가능. 왜냐하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기능시스템을 동시에 고려에 넣을 필요가 있기 때문. 인과적 용어를 사용해 다음과 같이 말을 바꾸는 것도 가능.
- 환경에 대한 시스템에 한한 작용들은, 환경에 흡수되고, 그 시스템을 다시 인과연쇄에 끌어들이는 것은 아님. 이것은 기능시스템 수준에서 보는 경우, 개개의 기능시스템이 사회 환경에 야기하는 문제들은 해당 기능시스템에 한한 범위에서만 반작용한다는 것, 그래서 그러한 문제들은 다른 기능시스템에서 부담이 되는 범위내에서만 그러한 기능시스템에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테마가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 예를 들면 의원병은 의료시스템에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한 번 발견된다면, 해당 의료시스템의 커뮤니케이션 속에 도입. 그것은 또한 재판문제나 행정당국의 인가문제가 되고, 경제시스템에서는 배상문제, 나아가 기존투자의 정리상각문제로 나타날 것. 그렇기 때문에 기능시스템이 환경에 가지는 많은 작용은 기능시스템들에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테마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사회에 반작용을 야기. 예를 들면 교육시스템은 오랜 시간에 걸쳐 학교형식의 교육에 의해 많은 사람들의 인지와 동기 부여를 성형하고, 그것에 의해 사회의 환경을 고도로 변형. 그러나 이것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측되지 않은 채 수행. 또한 그 커리큘럼은 많건 적건 노동능력의 육성을 겨냥하고 있지만, 장래에 처음으로 분명하게 되는 그 귀결에 대해 충분한 보증을 주는 것은 아님. 그렇지만 교육시스템에 대해 교육시스템이 수행하고 있는 자기기술에서는 이러한 문제도 막상 파악되지 않는 것. (1984, s. 642~645)
- 근대사회는 기능적으로 분화라는 구조 편성 원리 때문에 이상과 같이 사회적 합리성에서 비상하게 어려운 조건들을 부과. 그런 탓도 있어, 합리성 추구는 언제나 조직이라는 시스템 편으로 향해 짐. 그러나 조직의 세계 관계는 이미 사회라는 내부 환경에 의해 필터를 거침. 그 뿐만 아니라 대부분 조직의 세계관계는 기능시스템의 경계 필터도 걸치고 있음. 그 때문에 조직의 시스템합리성은 세계 합리성이라는 것을 절대로 강하게 요구하지는 않음. 언제나 조직은 사회라는 시스템의 내부적 환경, 예를 들면 시장이나 여론에 정위.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사회시스템 합리성의 현상은 시스템합리성이 실현가능한 경우에는 그 합리성은 점점 세계합리적이 아니고, 또한 사회합리적으로는 아니게 되는 것.
- 루만의 생각에는 사회의 합리성 연구는 우선은 이러한 사태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인식획득을 겨냥해야만 함. 그래서 그에 의해 동시에 이러한 사태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강철 같은 법칙’이 아니라, 언제나 점점 더욱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닌 ��합성의 코스트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합리성을 겨냥하는 모든 노력의 전제조건은 왜 합리성은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래서 그렇게 있기를 계속하는가를 적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그 뒤에 과감하게 역시 합리성의 유토피아를 정위하고, 개개의 시스템으로부터 보다 넒은 환경을 끌어 들이는 보다 합리적인 문제해결을 획득하는 것이 가능한가, 또한 어떻게 해서 획득할 수 있는가를 조사하는 것은 무익하지 않은 것이다.” (1986, S. 258)
- 그 때 사회 환경에 대해 가장 강한 작용을 주는 것은 사회의 기능시스템이고, 그것에 내속한 조직들. 루만의 사회 연구는 기능시스템들과 조직을, 현재 있는 것을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닌 것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해, 이화하는 시선, 제2계 시점을 통해 관찰하고, 시스템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적,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달리 있을 수 있는 우발적인 것, 인위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이는 것. 『사회의 이론』의 제3부 각 권과 『조직과 의사결정』(2006b)에서 각각 해당 시스템의 자기기술(반성문제)이 반드시 다뤄졌고, 그것들의 시스템 피자극능력의 상승 가능성을 찾음. 그것은 각 시스템의 사회적 합리성에의 물음과 관련. 또한 여러 새로운 사회운동은 기능적 분화로의 항의라는 시점에서도 다뤄질 수 있지만, 그것도 사회적 합리성, 사회와 그 환경의 차이의 통일의 반성문제와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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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photo-man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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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교육3) 청소년프로그램개발및평가 - 프로그램 기획의 모델 3가지(완전합리주의 모델, 제한된 합리주의 모델, 점증주의 모델)에 대해서 각각 설명하고, 각각의 프로그램 기획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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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교육3) 청소년프로그램개발및평가 – 프로그램 기획의 모델 3가지(완전합리주의 모델, 제한된 합리주의 모델, 점증주의 모델)에 대해서 각각 설명하고, 각각의 프로그램 기획의 모  청소년교육3) 청소년프로그램개발및평가.hwp 해당 자료는 해피레포트에서 유료결제 후 열람이 가능합니다. 분량 : 5 페이지 /hwp 파일설명 : 판매 문서는 주제에 맞게 작성하였습니다. – 해당 문서는 공개자료입니다. – 출처는 전부 표기하였습니다. – 그대로 제출하지않기를 권장합니다. – 수정, 첨삭하여 사용하세요. – 자료활용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훌륭한 결과물 만드시길 바랍니다. 청소년프로그램개발및평가 프로그램 기획의 모델 3가지(완전합리주의 모델, 제한된 합리주의 모델, 점증주의 모델)에 대해서 각각 설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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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kenlee-blog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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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별세
2022년 9월 8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별세했단 뉴스를 읽었다. 개인의 사망에 대해선 조의를 표하지만, 21세기에서 20여년이 흐른 현재에도 '여왕'으로 불리는 공인이 존재한다는 게 황당하다. 근대의 시작과 함께 없어져야 마땅한 왕족, 귀족 따위가 영국, 벨기에, 스웨덴, 태국, 일본 같은 나라에서 여전히 굳건하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과학적 합리주의 태도를 취하는 것에 이미 익숙한 인류가 미개해서 이 제도를 유지할 린 없을 거 같은데 여전히 '고귀한 혈통' 취급을 당연시하는 풍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경악스럽다. 게다가 대다수 왕족이 역사에서 자행한 일들은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서 온갖 악행을 자행한 깡패 집단의 오야붕이었을 뿐, 도덕 군자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억지로 머리를 쥐어 짜서 내가 내린 결론은, 브렉시트를 찬성한 바보들이 과거 제국주의 시절의 향수를 느끼고 싶지 때문 아닐지? '만세일계'라 우기는 쪽바리 왕족 놈들을 없애지 못하는 것도 일본회의 같은 극우가 굳건하니 말도 못 꺼내는 거 아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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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oy1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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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 어휘 해답
다음 빈칸에 알맞은 단어를 써 넣으십시오.
명사
1)      일본은 한국을 35년 동안 통치했다.
2)      한국은 다른 주변국가들보다 더 빨리 더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3)      범정부 차원’ 수출 자원’…. 미국과 마찰 없을까?
4)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잠재 능력의 일부분만을 인식한다.
5)      그의 죽음�� 학계의 큰 손실이라 하겠다.
6)      저 멋진 와인잔들은 크리스탈 소재이다.
7)      해당 캠페인은 한국 사회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뇌물과 연줄주의 문화를 근절하기 위해 진행 중에 있다.
8)      수도권은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 경기도 지역을 묶어서 이르는 말이다.
9)      서열에 따라 순서가 정해지는 사회
10)   명절 때는 일가친척들이 모인다.
11)   그들은 수천 명의 투표자들의 선거권을 빼앗았다.
12)   솔로몬의 재판은 합리주의의 교과서가 되어 왔다.
13)   대통령에게는 제도 개선이 첫 번째 우선 과제이다.
14)   로타리 동호회는 공통된 열정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국제적인 모임입니다.
15)   현대인의 소비 성향이 크게 바뀌었다.
16)   국내 첫 영리병원으로 개원 허가를 받은 제주 녹지국제병원의 사업계획서 일부가 논란 끝에 공개됐다.
17)   이 과정에서 간과 신장이 무리를 하게 돼 기능이 떨어진 사람은 부작용 위험이 커진다.
18)   지금 국립국어원에서는 수정이나 보완을 잘 안 하는 것 같아.
19)   아내는 한번 일손을 붙들면 좀처럼 놓지 않았다.
20)   설 명절을 맞아 해외에 파견된 부대 장병들도 떡국을 먹고 고국의 놀이를 즐기며 하루를 보냈다.
동사
21)   우리나라의 예의범절에서는 효와 경이 특히 강조되어 있다.
22)   한국은 전쟁으로 국토 분단의 아픔을 겪었다.
23)   미국에서 7월 4일에 독립 기념일을 경축한다.
24)   그는 수출부를 담당하고 있다.
25)   어댑터를 휴대폰과 연결해 주세요.
26)   저의 생일에 함께 자리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7)   사람과 개미는 둘 다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28)   마음 속에 불편함이 있으면 그러한 불편함은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29)   예부터 우리는 부모를 섬기고 아랫사람을 잘 보살피는 것을 큰 미덕으로 여겼다.
30)   현재 국제 정세에 큰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31)   요즘 연차 찬 아이돌은 팬싸에서 선물 안 받는 게 추세이긴 한데 편지는 왜 그러지?
32)   활짝 핀 꽃들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지만 봄향기가 만연한 나날입니다.
33)   형님들이 콘서트에서 신나게 즐긴 것 같아서 너무 다행이야.
34)   읽은 계기는 사소하지만, 이제는 항상 제 책장 속, 잘 보이는 곳에 꽂혀 있���요.
35)   축낸 돈을 빨리 메워 넣으십시오.
36)   미래는 변호사보다 법률 큐레이터가 유망하다.
37)   국민의 80%는 세금 올리는 것을 지지합니다.
38)   사랑을 받고 못 받고는 제할 탓이다.
39)   귀하나 다른 지인이 위기에 처해 있다면 아래에 있는 해당 국가의 사무실로 연락해 주십시오.
40)   한국인들은 중국이 한국을 기만할 것을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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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jakjust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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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일곱번째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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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바른 마음(The Righteuos Mind) 저자 :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 출판사 : 웅진지식하우스 모임날짜 : 4월 16일 18시 30분 예정
발제문은 위쪽 에버노트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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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msaemi ·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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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
부조리(不條理)는 불합리·배리(背理)·모순·불가해(不可解) 등을 뜻하는 단어로서, 철학에서는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을 뜻한다. 원래는 조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논리적 의미만을 표시하는 말이었으나, 합리주의 철학의 한계 속에서 등장한 실존주의 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용어가 되었다.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의미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카뮈의 부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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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istedkim-blog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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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208 [SAINT BVVIS] (2015)
2015년 시작과 함께 출시한  합리주의 기능성 남성 비지니스 캐쥬얼
칸투칸에서 아웃도어 시장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전략형 사업포트폴리오
TARGET - 온라인 쇼핑이 가능한 40대~50대 장년층 남성 (기존 칸투칸 고객 흡수 및 확장)
POINT 
- 아웃도어의 기능성 원단을 응용하여 일상생활 + 직장인 출근복 활용 가능한 의류,신발 - 우수한 핏과 신축성이 탁월한 바지의 히트로 기존 고객 이탈 최소화 및 신규고객 유치 성공적 런칭 - 바지 상품번호였던 Z208이 현재 브랜드 대표명으로 사용 중 - 칸투칸 특징의 직접적이며 투박한 제품 카피 라이팅으로 기존 고객 거부감 최소화   - 신사화 니트등 다양한 제품 유치가 가능해지면서 전체 매출기여증진 및 신규고객 유치의 성공 - 현 칸투칸 전체 매출의 약 40%(215억) 차지하는 브랜드
- 초창기 독립몰형태로 운영하다 칸투칸내 거부감없이 편입됨
- 2015년 케이블 TV CF 광고
- 런칭 첫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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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woo-kim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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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fferwith-blo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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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자들은 뒷모습에 주목한다],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는 법을 그들에게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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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자들은 뒷모습에 주목한다],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는 법을 그들에게 배우다.
작가
일레인 사이올리노
출판
웅진지식하우스
발매
2013.05.27
평점

     단순 호기심부터 시작해서 책을 꺼내들었다. 그러다 표지의 ‘유혹하고 유혹당하며 사는 인생이 가장 행복하다’라는 문구에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프랑스를 가본적도 없을뿐더러, 프랑스에 대한 지식도 전무하지만….프랑스 하고 떠올리면 온갖 달콤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느낌이 먼저 든다. 와인이 그렇고 샤넬이 그렇고, 센강 그리고 프렌치키스, 달콤한 마카롱까지….. 
    이책을 읽으며 나는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한국이라는 나라는 미국식 합리주의, 청교도적 도덕성에 더 가까운 나라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집 앞 슈퍼나 빵집에 나갈때 트레이닝복에 슬리퍼 끌고 모자 하나 눌러쓰고 나가는 우리네와 너무나도 닮은 미국인들과 너무나도 다른 프랑스인들. 
이 책이 뼈속까지 뉴요커 미국여성이 프랑스인들의 삶속 곳곳에 베어 있는 유혹에 대해 쓴 글이라 더 공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집앞에 바게트빵을 사러나갈때도 마주칠지 모르는 그 누군가를 염두해 신경을 쓰고 나가는 프랑스 사람들,  충격적기도 한 정치인들이나 지도자들의 성 스캔들에 대한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금은 낯설다. 
  하지만 너무 과하지 않고 꾸미지 않은듯 늘 신경쓰며 사는 그네들의 삶에 긍정이 생기기도 하고,  조금은 내가 싫어하는 부류라 치부하던 유혹하고 유혹당하는 자들에 대한 부러움(?)도 생겼다. 역자의 말대로 ‘유혹하고 유혹당하며 사는 인생이 가장 행복하다’라고 생각하지는 못하더라도 늘 긴장을 유지하면서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멋을 내는 프랑스인들의 삶을 조금은 따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수록 나란 여자는 직장에서�� 가정에서건 약간은 쌈닭기질을 발휘하며 ‘건들면 죽어!’라는 이미지를 풍기진 않았나? 라는 반성과 함께, 프랑스 인들처럼 뒷태까지 신경쓰며 늘 긴장하면서 , 눈빛과 지적인 대화만으로도 유혹을 할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라는 다짐도 해보았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강단에 서는 내 직업을 가지고 10년이상을 살다보니 더 딱딱해지고 주위사람들과의 부드러운 소통이 안되는것을 절실히 느낀다.
  좀더 부드러운 눈빛과 함께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기 위한 유혹을 시작해 보고 싶다.
  사실 즐겁게 책장이 넘어가지는 않았다.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즐거움보다 책 내용의 지루함이 책장이 쉬 넘어가지 않게 해서 일주일 넘게 걸려 읽은 책이다. 그러나, 주위에 나같은 쌈닭기질의 여인네들에게 한번쯤 읽어보라며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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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jun · 1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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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력난신
유교적 합리주의와 괴력난신에 대한 토론 글타래. 
https://www.facebook.com/groups/doublemun/permalink/68498790153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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