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헌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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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years ago from today, the small section of the news paper revealed the truth. The torture that killed this college student, brought other students together. Then, the tear gas bomb that killed another college student, finally brought everyone together. The truth would've been buried if it wasn't for those who wanted the justice. My dad said he was a T.A at that time, so he would go to police stations to rescue(?) those students who were arrested from the protests. ...History of Korean democracy is just .. Can't explain in English. 진짜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 죄송하고, 자랑스럽고, 화가나고, 촛불집회도 같이 동참하지 못해서 슬프고, 그리고 갑자기 너무 외로워졌다. 그 누구의 희생도 필요없이 이뤄낸 민주주의 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족들 나오는 장면과 유골 뿌리는 장면은 정말이지.. 가슴을 후벼팠다. 세월호 가족들도 생각났다.. 이 슬픔에 이 영화에 깊이 공감하고 계시겠지.. 나는 한국인인게 자랑스럽다. 비록 미국에 있지만 언젠가는 한국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싶다. 평화를 다시 찾아온 모든분께 감사드린다. 한국 다시 가고싶게 만든 영화, 난 왜 미국에 있지ㅠ_ㅠ? 영화 꼭 보세요!!! ❤ . . . #1987 #1987영화 #democracy #박종철고문치사사건 #이한열열사 #박종철열사 #전두환 #6월민주항쟁 #518 #koreanhistory #koreandemocracy #koreanmovie #dictator #ilovekorea #탁하고치니억하고죽었다 #촛불집회 #적폐청산 #호헌철폐 #평화시위 #sewol #sewolferrytragedy #세월호 #restinpeace #그날이오면 #gratitude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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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에 대한 나의 기억의 편린들 1; 초등학교 입학 -집에서 교문까지 4분 거리인 국민학교에 1학년 4반 14번이 되었고 나이아가라 파마에 후까시를 입빠이 넣은 선생님이 담임 2; 태풍 셀마 - 부산이 태풍 셀마로 큰 피해를 입음, 하룻 밤 만에 우리집 쓰레트 지붕이 날아가 버림 한 날은 학교 다녀오니 새 집이 지어지고 있었음 3; 대모에 대한 간접 기억 - 한 날은 엄마가 며칠동안은 큰 길에 나가서 놀지 말라고 하였고 저녁마다 서면에서 매케한 냄새가 흘러들어 왔음 4; 대통령 선거 -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모두 대통령 후보로 나왔으나 우리동네 어른들은 대통령 중간 평가와 '저 이사람 보통 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노태우 구라에 현혹되어 "노태우가 귀도 큼직하니 부���님 귀 같고 인상이 딱! 마! 대통령 감 이네 !!" 하는 관상으로 지지 후보를 결정 그 당시에는 중국집에서도 손님들이 내도 보통 사람 아니가~~ 하며 거의가 짜장면 보통만 시킴 곱베기 시키면 시대에 역행하는 일 이제 내 기억 속 또 다른 편린들을 정리하는 격동의 시대 거대한 전환점이 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87 #1987 #영화1987 #박종철고문치사 #이한열열사 #6월항쟁 #호헌철폐 #민주주의 #촛불집회 #시민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민주공화국이다 #국민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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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8.Fri *Sangwon's B-day🎂*
��정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p.211~227)
우리 가족의 경제적 상황이 크게 악화되었을 때 김소리는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우리가 진짜 망했고 가난해졌다는 사실을 김소리와 내가 정말로 안 것은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비롯해 우리가 가진 모든 책을 빼앗겼을 때였다. 어느날 구두를 신은 남자들이 집 안으로 들어왔고 그들은 책장을 비롯해 모든 수납장의 문을 닫은 뒤 그 문짝에 차압 딱지를 붙였다. 안에 든 것을 빼내려고 문을 열면 딱지가 찢어져 증거가 남도록.
어머니는 아침 일찍부터 외출 중이었고 아버지는 직전에 출근한 참이었으며 김소리와 내가 집에 남아 있었다. 집달리들이 문턱에 구둣발 자국을 남기며 딱지를 다 붙이고 떠난 뒤에야 집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갔냐? 아버지였다. 출근하려고 집을 나선 그는 우리 집 쪽으로 가는 남성 한 무리를 스쳐 지나갔고 그들이 집달리들, 경매 집행관들이라는 사실을 직감했고 말했다. 나는 이 전화를 받고서야 김소리와 내가 집행관들의 방문을 받고 그 일을 겪을 동안 아버지가 바깥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그 사실에 분노해, 아빠,라고 외치자 그는 그 상황에선 자기가 없는 게 더 나았다고 판단했으며 그런 판단으로, 그들이 일을 마치고 떠나기를 기다렸다고 말했다. 자기가 가진 ‘힘’ 때문에 더 큰 비극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고 그는 말했고 당시에 나와 김소리는 그의 판단을 판단이라고 믿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벌어질 때 집안에 아빠가-남자가 있으면 사달 난다, 그게 사실일까? 자기 자신에 대한 과잉된 믿음이나 과장된 불신은 아니었을까.
그게 무엇이었든 아버지는 그 일을 자기가 경험했다고 믿는다. 1946년에 태어났고 5녀2남의 장남인 그는 십대 때부터 작은 사업들을 시도했는데 장사나 사업에 별 수완도 소질도 없어 번번이 망했고 그때마다 누나들과 여동생들이 미싱 시다로 일하며 번 돈을 끌어다 썼다. 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아이들을 키운 할머니에게는 그의 실패가 무능력은 아니었고 그의 불운이자 천성의 결과일 따름이었다. 우리 자매의 고모들에게도 오랫동안 그랬던 것처럼. 남을 속이거나 해코지 못하는 착한 동생, 비정하고 몰인정한 사업��� 세계에서 약삭빠르지 못해 손해만 보고 미끄러지는 불쌍한 오빠, 착하고 불쌍한 아들로 살아온 그는 스스로를 선하고 불쌍하게 보는 데 익숙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자신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데 능숙하다. 1992년 김소리와 나의 정신세계를 크게 뒤흔든 집행관 사건을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경험으로 말한다. 1992년에 말이지, 집달리들이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자기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집이 바로 보이는 공중전화 박스 속에서 내가 줄담배를 태우며 말이야, 그때 본인의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말하기 위해서. 그래, 그랬지. 아빠가 얼마나 괴로웠겠어. 김소리와 내가 자라는 동안, 그리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를 향한 연민으로 어쩔 줄 몰랐다는 점을 나는 생각해본다. 그 마음들은 다 어떻게 된 걸까? 그도 그것이 궁금할 것이다. 내 딸들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애들이 왜 이렇게 예민해졌을까?
아버지는 종로구 장사동에 위치한 세운상가 1층에서 이동식 난방기와 냉방기를 판매하고 있다. 난방기와 냉방기만으로는 수익이 부족해 가습기, 토스터, 전기 포트 같은 소형 가전도 판다. 실질매출은 30년 전이나 40년 전보다 못하지만 어쨌든 가게세를 내고,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이 살아갈 정도의 생활비는 버는 듯하다. 30년 전과 40년 전. 아버지의 전자상 일대 풍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다. 매대에 오른 전자제품들의 상표나 디자인이 다를까, 10년 전에 본 것과 20년 전에 본 것과 30년 전에 거기서 내가 본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다. 아버지는 김씨 일가의 장녀인 큰고모가 한국에서의 삶에 진저리를 내며 미국 비자를 얻어 도미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어준 자금으로 세운상가 일대에서 장사를 시작했고, 한차례 부도를 겪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그 자리에서 40년 동안 장사를 이어왔다. 그의 가게는 3층 데크로 덮여 햇빛이 들지 않는 주차장을 마주하고 있고 그 부근에서는 늘 담배와 배기가스와 침과 오줌 냄새가 난다. 1987년에도 그는 그곳에서 장사하고 있었고 매일 버스를 타고 광화문을 거쳐 종로3가로 출근했다. 그해 6월의 며칠, 전에 없이 어머니가 아버지를 마중한다며 나갔다가 둘이서 고춧가루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밤이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지듯 집 안으로 들어선 그들의 몸에선 김소리와 내가 전에 한번도 맡아본 적 없는 강렬한 냄새가 났다. 그들의 귀가와 더불어 온 집 안을 채운 그 냄새 때문에 김소리와 나는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눈물이 고이고 콧물이 흐르고 눈이며 뺨이며 너무 문질러 ���개진 채로 부은 그들의 얼굴을 보고 김소리와 나는 엄마와 아빠가 어디서 몹쓸 일을 겪어 많이 울었나보다고 겁을 먹었지만 정작 두 사람은 즐거워 보였다. 그들은 걔네들, 걔네들이라고 말하며 배를 붙들고 웃었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당혹스러워하는 우리 자매를 보면서도 웃고 얼굴이 따갑다고 웃고 너무 세게 달려 종아리가 아프다고 웃었다. 두 사람이 그처럼 다정하고 즐거워 보이는 모습을 김소리와 나는 그 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냄새가 밴 옷을 벗고 세탁물을 뭉쳐 세탁기에 던져 넣고 장난하는 아이들처럼 깔깔거리며 둘이 함께 욕실에 들어가 씻었다. 그들의 머리카락에 밴 냄새는 샤워를 거치고 나서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고 그런 밤이 한번으로 끝나지도 않아서, 그 냄새는 베개와 이불에도 뱄고 덕분에 안방이며 이불장에 며칠이고 그 냄새가 남아있었다. 최루탄이라는 물질을 김소리와 나는 그렇게 그해에 처음 겪었다.
1996년에 내가 연세대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내 귀가를 다정하게 반기면서도 자기에게도 공권력을 향해 돌을 던져본 역사가 있다며 1987년 6월의 종로와 광화문을 말했다. 퇴근하던 길에 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쏘는 광경을 목격했고 너무 열 받아 소리를 질렀다고, 경찰, 사람 때리지 마, 최루탄 쏘지 마, 하다보니 종로3가 대로에서 본인이 사람들과 돌을 더닞며 행진하고 있더라고, 대통령직선제와 헌법재판소를 얻어냈으며 대통령의 힘은 줄이고(국회해산권 폐지) 국회의 힘을 늘리는 방향으로(국회에 계엄해제권과 국정감사권 부여) 헌법을 개정하는 데까지 이른 민주화 대열에 그처럼 본인도 있었다고 말하면서 지금은 시대가 그렇질 않다고 덧붙였다. 너희들 시대. 반바지에 러닝셔츠 차림으로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그의 앞에 디스 한갑과 백원짜리 플라스틱 라이터가 놓여 있었다. 앉자마자 담배부터 태우곤 하는 평소 습관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담배에도 라이터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니들이 데모할 일이 뭐가 있느냐고 그는 괴로워하며 말했다. 지금은 독재가 아니다. 전두환도 감옥에 가는 시대다. 명분이 없다. 깃발 들지 마라. 데모 따라다니지 마라. 북한 간다고 나서는 거 봐라. 빨갱이 짓이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에 엄마와 아빠도 몫을 했다는 이야기는 그 전에도 몇 번, 그들에게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너희 엄마하고 아빠가 그때 광화문에서,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인 것을 그때 처음 봤는데 거기에 경찰이 최루탄을 빠바바바바...... 그러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와악, 흩어지더라.
이윽고 그들이 목격한 것이 김대중(득표율 27퍼센트)과 김영삼(득표율 28퍼센트)의 분열이었고 노태우(득표율 36.6퍼센트)의 당선(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아프다. 동갑내기 부부인 그들이 1987년에 41세였고 오늘의 나와 동갑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 더 그렇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듬해 12월에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을까. 실패라고 생각했을까. 데모 따위, 해봤자,라고 생각했을까 세상 뻔하다고. 그 경험이 그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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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본 글에서 “아이히만에게서 서로 긴밀히 연결된 세가지의 무능성을 언급”한다.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그것이다.”(김선욱,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역자 서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평범성’으로 번역된 banality는 김학이 선생이 지적했던 것처럼 ‘평범성’보다는 ‘상투성’에 가까운 말인 듯하다.(“한국의 학자들 대부분은 ‘banality’라는 단어를 ‘평범성’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그리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 아렌트는 1965년 증보판의 후기에 그 개념을 ‘무사유’로 해석했다. 여기서 무사유란 상투어만을 사용하기에 진정한 소통을 하지 못하는, 그래서 얄팍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뻔하다는 것이다.”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 유럽 유대인의 파괴』 1권 역자 서문, 개마고원 2008)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악의 어떤 측면은 평범성이라기보다는 상투성에 그 기원이 있을 것이다.
종북과 좌빨.
몇십년 동안 구독해온 신문의 어휘와 논조를 그대로 닮은 아버지의 말에서 나는 아렌트가 묘사한 아이히만 식의 상투성을 본다. 즉 말하기, 생각하기, 공감하기의 무능성을.
아버지는 이제 칠십대에 접어들었고 누군가가 식사를 차려주지 않으면 곤경에 빠지고, 어느 서랍에 자기 양말이며 바지가 들었는지를 잘 모르고, 잘 씻지 않고, 아파도 스스로를 돌보지 않아서 어머니를 안달복달한 상태로 밀어 넣고, 자신을 내버려둔다고 딸들을 원망하며 누군가를, 무언가를 혐오하는 데 전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젊음도 늙음도 혐오하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노조 활동과 폭로와 노무현인데, 파업은 빨갱이 활동이고 삼성의 수십억원대의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는 비열한 배신자이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가당찮은 자리까지 올라간 범인凡人이다. 막노동에 나보다 많이 버는 것들이 무슨 노조며 파업이냐,라는 그의 불쾌에는 노동 혐오와 노동자 혐오가 동시에 있고, 그보다 더 근본에는 약함을 혐오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고,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 분노나 혐오에 종종 등장하곤 하는 말이 ‘권위도 뭣도 없다’라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노동자, 김용철, 노무현을 향한 그의 혐오는 같은 물줄기가 아닐까,라고 김소리와 나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는 권위 없음을 혐오한다. 그는 힘없음을 혐오한다. 그는 약함을 혐오한다.
아버지에게 힘이란 무엇이고 권위란 무엇일까.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1980년대에 우리 가족이 사용했던 양철 밥상이 생각난다. 꽃과 이파리와 공작 그림이 색색으로 프린트된 둥근 은색 밥상. 1986년 아시안게임 체조 종목에서 서선앵(86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이후 부상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채 은퇴) 선수가 금메달을 단 날에도 우리는 그 밥상을 사용해 저녁을 먹고 있었다. 서선앵 선수의 평균대 경기를 보도한 그날 뉴스의 끝자락쯤에 전두환과 노신영(18대 국무총리,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사임)의 모습이 방영되었다. 그 장면을 보고 내가 아는 것을 자랑하려고, 아빠, 대통령이 죽으면 국무총리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는 거지요?라고 물었을 때 아버지가 양철 튀어 오르도록 다급히 몸을 기울여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나는 단지 내가 아는 것을 자랑하려고 했을 뿐인데 그는 그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네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니면 아버지가 군인에게 잡혀간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겁에 질려있었다.
이렇게 가정해볼까. 아버지가 말하는 권위는 곧 힘이고 힘이란 누군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적인 공간에서 누가 들을까 두려워 급하게 자식의 입을 틀어막게 만든 힘, 그는 그런 힘을 경험했고 그것이 힘이라는 것을 알며 힘이란 곧 그게 되었다. 그게 없음을 그는 혐오한다. ‘권위 없음’을 혐오한다. 누구도 ‘권위 없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으므로 그는 자신의 ‘권위 없음’ 상태를 두려워한다. 그는 누군가의 ‘권위 없음’을 비난할 때 그에게는 그것을 하는 ‘권위’가 있으므로 그는 힘없음을 힘껏 혐오한다......
아버지는 정치적 견해가 달라 딸들과 갈등을 겪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고 그가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면 나는 그 판단에 동의할 수 있다. 김소리와 나는 그 갈등의 가시적 기원을 일단 김소리의 상견례에 두고 있다. 김소리는 5년 전에 정씨 성을 가진 원단 유통업자와 결혼했다.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긴 아버지가 그의 부모를 만나는 상견례 자리에서 못되게 티를 낼지도 모른다고 어머니와 김소리와 나는 걱정을 했는데, 그날 아버지는 시종일관 우리가 전에 보지 못한 기품 있는 태도로 온화하게 상견례에 임했다. 어려운 자리를 끝내고 우리끼리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는 조만간 종로 근처로 만나러 갈 테니 둘이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제안한 그쪽 집안의 아버지를, 사돈과의 대화를 곱씹으며 분개했다. 내가 자기를 왜 만나느냐고, 지가 만나러 오면 내가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냐, 그 여유가 다 뭐냐고 아들 가진 놈이라고 다 가졌다 이거냐고 말했다. 그 여유 있는 표정! 사돈의 미소를 그는 이렇게 일컬었다.
승자의 미소.
그 말을 듣고 김소리가 운전석에서, 내가 조수석에서, 어떻게 얼어붙었는지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는 그 순간의 말 몇마디로 수십년 묵은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드러냄으로써 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들켰는데 김소리와 내가 그 나이에 이를 때까지 그의 그런 생각, 기분, 감정을 느낀 적도 짐작한 적도 없다는 점은, 오히려 그가 그 긴 세월 동안 그래도 비교적 훌륭했다는 증거는 아니었을까. 서수경과 김소리와 나는 나중에 그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마는 승자의 미소, 이후로 김소리와 내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전처럼 생각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이미 알았고 모르는 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어. 그렇지 않겠나. 그의 ‘불쌍’에 우리의 존재가 있었다니. 아니야 정확히 말해야지 우리의 보지가.
딸들과의 관계에서 최근에 아버지가 가장 억울하게 생각하는 것은 딸들이 자신을 더는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김소리와 내가 사회적 사건들에 마음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마음을 못마땅해하면서 배덕과 배반을 말한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 탑승자들과 그 유가족들과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김소리와 내가 마음 쓰는 것을 두고 그는, 그는 우리가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한다. 생판 남인 그 사람들에겐 그렇게 신경을 쓰면서 네 부모는 왜 돌보지 않냐. 도덕적으로 그건 문제, 이율배반, 배반 아니냐. 너희들 앞마당부터 쓸어라.
그가 말하는 앞마당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당신의 앞마당이라는 점을 우리가 눈치챘다는 것을 그에게 말해야 할까? 아버지는 자신의 농담에 일일이 정색을 하고, 아빠 불쌍하지,라는 물음에 더는 대답하지 않고, 다정하지 않고, 자주 화를 내곤 하는 딸들에게 이제 화가 났으며 어머니를 통해 그 화를 주기적으로 통지한다. 너희들이 계속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가 말했다지만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나 그의 용서가…… 우리에겐 그의 용서가 이미 필요하지 않다. 그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과, 알아도 인정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 이렇게 앉아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할 때, 김소리나 나는 화가 나기보다는 종종 서글프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갈등을 끝내보려고 김소리와 내게 전화를 건다. 너희 아버지가 짜증과 심술만 늘어 자기를 괴롭힌다고, 외출할 일이 있어 국도 끓여두고 반찬도 냉장고에 있으니 꺼내 먹기만 하면 된다고 전달하고 나갔는데 와서 보니 김치통과 밥만 꺼내 먹고 자기 먹은 것을 보라는 듯 뚜껑을 열어둔 채로 모든 것을 식탁에 내버려두었더라, 내가 요즘 이런 걸 보고 산다, 너무 시달린다고 호소한 뒤에 니들이 아빠를 좀 달래보라고, 아빠에게 다정하게 굴어보라고 청하며 마지막엔 늘 이렇게 묻는다.
너희는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니.
사회교육학자인 전진성 선생은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 도쿄·서울』(천년의 상상)에서 1890년에 제국헌법으로 법제화된 ‘국체’ 개념을 설명하면서 국체의 정점인 천황을 언급하는 와중에 니시따 키따로오의 ‘절대무’ 개념을 인용하는데, 그의 절대무 개념이 “주체와 객체가 더는 이성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하나가 된다는 종교적 경지를 설파했다”고 말하고, “이는 일본이라는 주체가 제국이라는 객체로 용해된다는 논리로 읽힐 만한 여지가 있었다. 여기서 주체와 객체를 초월하는 ‘절대무’에 해당하는 것은 물론 천황”이라고 덧붙인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며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극장판인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을 떠올렸다. 전투병기 제작/무장 집단인 네르프의 수장이자, 이까리 신지의 아버지이고, 텔레비전 시리즈에서는 늘 의미심장한 무표정과 침묵으로 일관했던 이까리 켄도오는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자신의 숨은 열망을 드러낸다. 켄도오는 에반게리온 초호기로 흡수된 아내, 이까리 유이를 만나기 위해 인류를 절멸에 이르게 하는 서드 임팩트를 감행하고, 그 순정의 대가로 그를 포함한 인류는 액화되어 단일한 전체가 되어버린다. 인간이 사라진 세계엔 에바 초호기 파일럿인 이까리 신지와 2호기 파일럿인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가 최후의 인류로 남는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엔딩은 아스카의 독백이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모든 인간이 그 사랑 속에 융해된 주홍빛 세계에서 신지는 울고 아스카는 말한다.
気持ち悪い(기분 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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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죄명이 꼬봉
정의를 위하여=혜경궁김씨=kh
=사용하는 새끼?
=나 김홍석이가 명세기 전국 일진 짱 .
출신이 누구 밑태 겨들어간적 봤냐?
=60년대 후반에 태어난 친구들이 니덜처럼
남의 아이디나 도용해 쉽게 산지아냐?
=전두환이도 울 고딩 졸업하던해
호헌철폐 독재타도 해낸 나이다
어 얼갈이 배추무침드라큐라쥐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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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민주항쟁 기념사
6.10 민주항쟁 30주년>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6.10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이하며 어느 6.10 민주항쟁 기념식 보다 더 뜻 깊은 마음을 느낍니다. 얼마 전 촛불혁명을 성공시킨 후 맞이하는 6.10 민주항쟁 기념식이라서 많은 분들이 감동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1987년 그 날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을 외치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함과 존경함을 느낍니다. 우리나라의 민주화의 적통은 독립운동으로 시작하여 4.3 제주 4.19 혁명 5.18 광주 6.10 민주항쟁 2016~2017 촛불혁명으로 이어 진다고 생각합니다. 여려 시간이 흐르고 많은 분들이 희생되고 노력했지만 저 나름대로 생각하기에 아직도 우리나라에 민주화가 완벽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보다 민주화가 발전 되지 못한 나라가 많습니다. 하지만 휼륭한 국민들이 많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써 우리 보다 민주주의 가치가 발전한 나라와 비교 하며 하루 하루 민주화 가치가 발전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한 달을 맞이하는 날 입니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꼭 1년 이상 된 대통령의 기념사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다시 한 번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 힘 써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함과 존경심을 표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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