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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을 가르는 기준은 작품의 메시지가 향하는 방향에 있다. 순수예술은 창작자 개인을 향해 안 쪽으로 파고드는 반면, 상업예술은 대중을 향해 밖으로 나가려는 힘이 강하다. 원심력과 구심력. 메시지의 방향이 다른 각각의 작품들은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이 더하는 해석의 힘을 빌려 유기체 처럼 변화 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이 발산하고 개인으로 수렴하는 김희천의 작품은 지극히 순수예술에 가깝다. 김희천의 작품은 오직 그만의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다룬 <바벨>, 전자기기의 분실에서 시작된 <썰매> 등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된 그의 작품은 작업 당시 그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에 따라 비디오로 재탄생 한다. 내용과 형식 모두 지극히 개인적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감정을 건드린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무섭고 기괴하지만 때론 웃기기도 하며 이따금씩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내 슬프기도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에 가까운 그의 작품이 어찌 사람들의 감정을 흔들고, 나아가 '김희천의 아류'까지 만들어 내는 것일까.
이 현상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이 있겠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이루는 본질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을 이루는 단 하나의 본질은 사람이 가진 '감정'이다. 그의 작품은 하나의 주된 감정을 기저에 깔고 증식해나간다. 이 증식은 사람들의 예상 밖으로 뻗어 나기기 일쑤지만, 그 아래 흔들리지 않는 본질이 자리 잡고 있으니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모든 사건에는 하나의 목적이자 목표로 대변할 수 있는 '본질'이 있다는 것. 김희천의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얻으리라 생각치 못한 하나의 배움을 다시금 깨닫는다.




ps. 제20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자 김희천의 신작 <스터디>는 도산에 위치한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10월 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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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 Director
Virgil Abloh가 죽은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롤 모델”이라는, 어쩌면 진부할 수도 있는 나의 동경의 대상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지나가버렸다. 2021년 11월 28일은 나의 29번째 겨울이었고, 그때 나는 삶에 대한 권태감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무엇을 해도 매듭이 지어지지 않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2024년도의 마지막을 지나고 있는 지금, 나는 예전과 사뭇 다르다. 수많은 “이것”들과 “저것”들의 균형을 이전보다 훨씬 유연하게 잘 잡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엇이 바뀌었을까? 본질적인 ‘나’는 변한 게 아무것도 없다. 다만 상상과 실제의 간극을 줄이고자 했던 움직임들의 중첩만 쌓였을 뿐이다.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은 실제로 행동하는 것뿐이다. 본질은 거기에 있다. 수많은 것들의 의미와 디자인, 행위와 방식을 해체하여 가장 원초적인 본질만 가려 생각한다면, 사실 아주 간단하고 중요한 것들만 남게 된다.
살아가는 데 있어 수많은 것들, 어쩌면 모든 것들이 그렇게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분야의 일들이 어쩌면 한 가지의 본질로 작동할 수 있다면, 그 본질을 정확히 간파하고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해체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실천력과 유연함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엇을 하든지 경계를 넘어 유연하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삶을 퍼즐이라고 생각하기에 한 조각의 의미는 아주 크다. 오른쪽 모서리의 조각이 맞춰지면 그 정반대의 조각을 놓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맞물리게 될 것을 알기에 내가 가진 조각의 다음 조각을 찾지 않아도 결국 괜찮다.
정말 다양한 분야를 좋아하는 나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조언이자 가이드라인이다. 2025년에는 내 퍼즐 조각들을 한 “공간” 안에 맞춰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더불어 다양한 방식의 변화도 있을 것 같은 중요한 한 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2024년은 나를 정립하는 한 해로 기억한다. 그 과정은 정말 재미있었고, 소중했고, 귀중했다.
2024년에 내가 깨달았던 중요한 것들은. *실제 세상은 상상의 세상보다 작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중요한 일을 할 때는 나 혼자 할 수 없다.
항상 매년, 내년이 궁금하고 기다려진다.
202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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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家卫, Wong Kar wai Night.
Chungking Mansion, 36-44 Nathan Rd, Tsim Sha Tsui,
그대로야 그대로. 1900년대 세포이들의 후손들.
23.11.0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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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두 번째 맞게 되는 서른 살의 마무리. 처음으로 두 번째 같은 나이를 보내서 그럴까. 두 번째 서른은 첫 번째 서른 보다 훨씬 재미있었고 다양하게 보냈던 것 같다. 미루고 미뤘던 홍콩 여행도 다녀왔고, 세 번의 속초와 두 번의 제주, 북한산 종주,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등 여기저기 부지런히 많이도 돌아다녔다.
물론 좋지 않은 일들도 간혹 있긴 했었지만, 대체적으로 2023년은 꽤나 기억에 남는 한 해였을 것 같다.
서울에서 송도로 첫 발령을 받았고, 첫 자동차를 구매하였으며, 첫 번째 오버리터 바이크도 구매할 수 있었다. 22년 12월 31일엔 “23년은 기대들을 실제 행동으로 옮겨 다양하게 준비하는 것들이 활성화되는 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라고 쓰곤 했었는데, 글쎄 아무래도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준비했었던 피치스와 두카티, 두카티와 람보르기니 협업 등 다양한 것들과의 협업을 주도해서 준비하곤 했었는데, 정말 아쉽게 무산이 되기도 했고 화도 나는 일도 있곤 했었지만, 과정에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과 정말 적은 확률로 성사될 것이라 생각했어도 꾸준히 한 발짝씩 나아가 보니 스파크가 튀고 무언가 형성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결과적으론 정말 많이 배우고 마인드 셋을 다잡아 줬던 소중한 경험.
동료들과 모토 캠핑단을 만들어서 같이 매달 캠핑을 다니기도 했고, 오프로드 바이크를 구매해 산과 강을 건너면서 최종 M3 랠리 대회까지 다녀오게 되었다. 건축 학원을 등록해 제도와 드로잉, 캐드와 3D를 배우는 과정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여러 전시 중 ‘안도 다다오’와 ‘미스치프’ 전시 같은 경우는 꽤나 지평선을 넓혀준 전시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영어학원, 두카티 송도, 회사를 통해 23년�� 새롭게 만났던 다양한 인연들에게 너무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한다. 건축에서의 공간도, 예술에서의 작품도, 여행에서의 도시도 모든 건 사람들로 완성이 되는 걸 너무나도 잘 알기에 즐거웠던 23년 이였다.
24년엔 아무래도 훨씬 더 재미있겠지..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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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유현준)

이 책은 건축가가 바라보는 공간에 대한 탐구 이면서도 건축물과 공간을 투영해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공간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단 건축이 진화해온 방식과 인류가 진화해온 방식이 다르지 않다는 것, 그렇다면 앞으로의 건축의 방향성과 인류의 방향성은 어떻게 흘러가는 게 바람직한 것일지에 대한 저자의 고민이 담겨 있는 책이다.
첫번째. 동서양의 문화가 다른 특징을 갖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두 지역의 ’강수량’이라고 말한다. 강수량이 비교적 많은 동양에선 벼를, 비교적 적은 서양에선 밀을 재배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벼농사 지역은 '집단의식'이, 밀 농사 지역은 '개인주의'가 강하게 발달되어 있는데 시기를 놓치면 농사가 어려운 벼농사는 노동이 집단적인 형식을 띄고 있어 모두가 힘을 합쳐 해야 하는 반면, 밀 농사는 맨땅에서 자라고 많은 물이 필요치 않기에 자연스럽게 개인주의적인 성격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사소하고 작은 차이에서부터 문명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며 형성되는 과정이 흥미롭다.
두번째 서양에서의 건축물은 항상 기하학과 수학에 의해서 만들어진 질서와 절대성의 건축물 이였으나, 중세 시대 이후 동양과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중국의 도자기나 책들이 번역되어 들어간다. 이때 중국의 도자기는 서양에 문화적 충격을 주었고, 중국 문화가 서양의 인기를 끄는 '시누아즈리' 풍이 유행하게 된다. 기존의 수 세기 동안 이어지던 건축의 틀이 조금씩 깨지는 순간들이다. 벽으로 이루어져 있던 기존의 방식이 기둥 구조의 중심으로, 기하학과 절대성의 배치가 관계지향적과 자연중심, 무작위성으로 바뀌게 된 것.
세번째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범선을 타고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그의 업적은 대륙의 발견보다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두 달 만에 연결시켰다는 '공간의 압축'에 있다. 이 사건은 식민지 시대를 열었으며 문화적 융합을 가속시킨 계기가 된다. 그렇게 인류는 19세기까지 직접적으로 탐험할 공간이 사라져 이젠 인간의 눈은 두 방향을 향했다. 하나는 안쪽, 하나는 바깥쪽. 안쪽은 심리학의 발전을, 바깥쪽은 달 착륙 등 지구 밖 성과를 이끌어냈다.
지리적 발견이 더 이상 불가능한 시대가 오자 인간은 '새로운 대륙'을 만들었는데, 현실 속 공간이 아닌 컴퓨터 네크워크 속 즉 ‘가상의 공간’이다. 인터넷의 발달과 기술의 발전으로 건축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캐드, 라이노 등 건축물을 손쉽게 디자인을 할 수 있는 툴과 나아가 이제는 AI와의 협업들이 대표적이다. 아직은 원시적인 협업 방식이지만, 멀지 않은 미래엔 AI가 디자인의 90% 이상의 영향을 주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늘 건축가들은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건축양식을 변형시켜오는데, ‘국제주의 양식’이라는 전 세계 어딜 가나 보이는 콘크리트와 직사각형으로 된 건물들이 즐비하던 20세기를 넘어 이젠 AI 와 툴을 통해 건축가가 상상하는 대부분의 건축 디자인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3가지 스토리를 통해 정리를 해보자면
공간과 환경의 중요성
새로운 문화 들의 융합
외부 문화를 받아들이는 자세
1.현재 우리가 자주 머물러 있는 공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단 공간뿐만이 아닌, 자주 만나는 사람, 자주 먹는 음식, 자주 듣는 말들, 음악, 등등 평소에 익숙하고 친근한 것들이 과연 나에게 타의적이든 자의적이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을 해본다면, 공간의 중요성, 분위기와 습관의 중요성을 알 수가 있다.
2-3. 새로운 생각은 '제약과 융합'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생각이 나오고, 서로 다른 생각이 융합되었을 때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진다는 거다. 이 둘을 하나로 묶는 공통분모가 있다면, 모든 창조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점. 열린 마음은 '자신의 불완전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고, 지금의 발전의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하는 순간 창조적 변화는 멈추게 된다.
25살 때 인도엔 두 달간 있었는데, 여러 사람, 여러 도시, 여러 사건들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따뜻하진 않아도 뭔가 묘한 꿈속에 갔다 온 기분. 홍콩에 가보진 않았지만, 뉴델리의 빠하르간즈나 코넛 플레이스의 밤을 생각하면 홍콩의 왕가위 영화들의 색감들이 떠오른다. 영화에서의 분위기와 조도가 낮은 백열 등속 배경에 나오는 인도 사람들의 장면들이 오버랩이 되어 그러지 않나 싶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인도와 홍콩은 둘 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 각 네이티브들과 영국의 건물들이 섞여서 묘한 이미지들과 문화를 보여주는 것 같다. 늘 서로 다른문화들의 융합은 또 다른 오묘한 문화들을 만들어 낸다. 현재 우리나라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뭐든 우리의 스타일과 타 문화들을 섞어 가장 맛있게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 음식도 음악도 스포츠도 다양한 분야에서의 융합들이 발생해 이제야 빛을 보고 있는 단계가 온 것 같다. 서로 다른 무언가가 만날 때의 시너지 효과는 무엇이 나올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매력이 있다. 운이 좋던 나쁘던, 인류는 늘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왔고, 타의적이든 자의적이든 융합에서 나오는 아웃풋들은 보통 서로 다른 장점들을 부각시켜 새롭고 매력적인 것들이 나오기 마련인 것 같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도 서로의 방대한 세계관이 만나 또 다른 새로운 경험들을 하기 마련이다. 창의적인 집단이나 공간도 여러 랜덤인 사람들의 교류가 활발하고 밀도 높게 섞여있을 때 가장 창의성이 높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브랜드나 새로운 것들이 도시에서 많이 시작되는 것도 말 이 되는 이야기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한 방향을 바라보며 무언가에 다가갈 때의 시너지, 에너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직접 부딪혀 보고 손바닥을 마주쳐봐야 알 수가 있다. 주변에 혹시나 자신과 생각과 성향이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손바닥을 한번 부딪혀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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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TH>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에선 무한하게 이어진 육각형 공간의 도서관이 주 배경이 된다. 도서관 안에는 세상의 모든 지식이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고 믿을 만큼의 많은 책이 존재했는데, 그 우주 안의 인간들은 무한한 책들 사이 그 우주에 살고있는 인간의 행위를 항상 정당하다고 입증해 주고, 각자의 미래에 대한 놀라운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는 찬미서와 예언서 같은 ‘변론서’를 발견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책을 찾는 과정, 사람들은 서로 헐뜯고 죽이며, 쓸모없다고 생각이 드는 책들을 마구잡이로 창밖에 던져 버린다.
또 다른 보르헤스의 픽션 “원형의 폐허들” 에서는 주인공의 꿈이 주 배경이 된다. 꿈에서의 현실은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꿈에서의 인물들은 본인이 주인공의 꿈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 꿈속에서 주인공은 하나의 인간, 한 명의 소년을 꿈꾸었고, 주인공은 꿈속에서 몇 년 동안 손으로 빚어 마침내 한 명의 아이가 완성이 된다. 그 꿈속의 주인공의 아들역시 자신이 꿈속의 허상이란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폐허가 된 원형의 신전에 불이 나고 주인공은 불 속에 갇혀 버린다. 피부와 뼈를 녹여버릴 만큼 불길은 강력했지만, 불길은 아무것도 연소시키지 않으며 주인공을 불로 뒤덮는다. 안도감과 치욕감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면서, 주인공은 자기 역시 그를 꿈꾸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의 환영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끝이 난다.
개인적으로 나는 책을 읽으면서 종교적인 것과 영적인 세계에 대입하며 읽게 되었는데, 우선 바벨의 언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과 비슷하다고 본다. 어차피 누구도 바벨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감각이라면, 그 기저에 흐르고 있는 이법에 관한 서로 다른 해석과 표현이 있을 뿐, 누구의 것도 정설이 아닌 동시에 누구의 것도 정설이 될 수가 있다. 종교와 영적인 것의 해석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다른 표현들과 서로 다른 정설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생겨난다. 그 과정 자기 자신만의 ‘변론서’를 찾아 헤매는 인간들에 의해 폭력과 살인이 발생하고 한 평생 배척이 되는 삶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원형의 폐허들처럼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모든게 허황된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종교의 유무를 부정하거나 영적인 것에 대한 것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주장이든 무조건 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없다는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을 마음만 먹으면 알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바벨의 도서관 자체에 살고 있는 셈이다.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합리화의 ‘변론서’가 되어 줄 수 있는 책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SNS와 각종 포털사이트의 기사에 대한 댓글만 봐도 익명에 숨어 서로 목 졸라 죽이고 욕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신기한 점은 대부분이 가계정 이거나 자신이 누군지 신분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항상 격렬하면서도 저급한 비난들이 이루어진다. 얼굴을 보지 않으며 얘기를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알 수도 없을뿐더러 대부분의 만남이 일회성으로만 성사되기 때문인 걸까. 비대면 방식의 상대방과 자유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클럽하우스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얼굴을 보지 않기에 더 편하고 진솔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반면에, 꼭 밑도 끝도 없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들어오기 마련이다. 한 끗 차이의 생각으로 겉으로 나오는 아웃풋은 매우 다르다.
영혼에 대한 주제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의 사람들로 나뉜다고 한다. 첫 번째는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두 가지가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이며 육체와 영혼은 서로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주장하는 ‘이원론’적인 사람들과 인간은 한 가지 기본 요소로만 이루어져 있는, 즉 ‘육체’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일원론’적 사람들로 나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일원론’적인 주장을 믿고 있는 사람이다. 후자의 주장으로서의 죽음은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일반적인 기계가 아니라 ‘놀라운’ 기계다. 우리는 사랑하고, 꿈꾸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기계다. 계획을 세우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런 기계다. 그리고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죽음은 컴퓨터가 고장 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기계는 언젠가는 망가지게 되어 있다.
사후세계에 대한 기대를 하며 살아가던, 죽음 이후에 모든 것들을 부정을 하며 살아가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현재 어쩌면 죽음에 대해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는 역사 속 몇 안 되는 시기 속에서 살고 있다. 그만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곱씹어 봐야 할 시기라고도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 속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죽음의 관점에서의 합리적인 삶이 될 수가 있을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셸리 케이건 <DEATH> 202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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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도에 관해서 빠질수 없는것이 종교이다. 인도의 대부분 사람들의 종교는 힌두교 이지만 이슬람도시도 상당히 있는편이다. 섞여있는곳도 많으며 시크교와 자이나교 같은 다른 종교들도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종교 때문에 갈라진 나라이다. 11세기초부터 시작된 이슬람의 인도 침입과 통치는 약 800년 가량 지속되었다. 소수 이슬람 지배층은 다수 힌두들과 큰 갈등없이 함께 살았지만 힌두와 이슬람간에 틈이 생긴 것은 영국이 나타난 이후였다. 영국은 인도를 떠날때가 되어 이슬람은 파키스탄으로 힌두는 인도로 사람들을 분리시켰다. 분리하는 과정에서 카시미르지역의 영토분쟁이 양국의 대립 발단이 되었고 카시미르 지역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슬람종교를 가지고 있어 파키스탄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들의 통치자는 힌두교를 믿고있었기 때문에 인도에 남고 싶어했다. 파키스탄과 인도는 카슈미르 영유권으로 2차례 전쟁을 하였고 방글라데시 독립으로 한차례 더 전쟁을 하였다. 그렇게 양국의 적대관계는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얼마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의 만남으로 세계의 큰 이슈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일제의 침략과 해방후 소련과 미국의 분할통치로 국토의 절반이 잘려나갔으며 6.25전쟁으로 모든것이 파괴된 제로그라운드 상태로 시작을 하였다. 남은건 오직 서로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만이 남았으며 정작 미워해야할 일본은 잊고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기 바빴다. 양국의 통수권자가 만나 이제는 적개심을 잊고 서로에 대한 신뢰와 평화를 쌓아 나가자는 메시지를 ���표한 그날은 나에게는 정말 소름끼치게도 잊을수 없는 날이다. 우리의 만남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도 한국과 북한의 만남을 크게 보도하였다. 아마도 남한과 북한처럼 과거 같은 나라에서 분리가 되고 전쟁을 하였으며 서로에게 적개심과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것이 비슷한 우리나라와의 역사가 비슷하다 생각할것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회에서는 한반도의 만남을 지켜보며 이제는 양국의 적개심을 풀고 신뢰를 쌓자며 한목소리로 얘기를 한다. 과거의 우리나라의 3.1운동이 식민지배 국가들에 영향을 주었던것 처럼 오늘날의 만남또한 우리와 비슷한 나라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몇일전 기사를 보면 인도와 파키스탄이 양국 국경을 관통하는 순례자 길을 신설하기로 합의해 화해의 물꼬를 트게 될지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인도의 암리차르를 가보면 파키스탄과 인도의 국경이 맞대고 있어 서로의 국기계양식때 양국이 경쟁하듯이 국기계양식을 하는 와가보더를 한다. 이 지역을 통해 시크교들의 순례자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나는 어떤 사상이나 종교에 관한것들에 대해서 긍정적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던지 어떤것에 대해 강하게 빠져들면 본질에서 벗어나기 마련이다. 기독교와 천주교이던 이슬람과 힌두교이던 기본적으로 추구하는것은 평화와 사랑이다. 공산주의와 더불어 많은 사상또한 본질적인 뜻 또한 빈부의 차와 부정을 없애고 잘 살아보자는 뜻도 알겠다. 그런데 왜 종교로 인해, 사상으로 인해 대량 학살과 전쟁 그리고 폭력과 범죄가 일어날까.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옳고 다른것들은 배척하는 그런 선민사상 비슷한 몹쓸 자기 우월주위와 혐오 때문 일것이다. 나는 그래서 종교를 믿지 않고 어떤 생각에 대해 딱잘라 옳고 그름을 다투기 싫다.
인도에서의 마지막날 간디가 죽기전 마지막으로 살았고 죽었던 곳에 방문했었다. 그곳에서의 간디의 생들을 지켜보고 간디의 생각들을 되돌아보았다. 간디는 힌두교든 이슬람교든 기독교든 종교를 가리지 말고 한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말이다.
나는 예전부터 새로운것과 과거의 것들을 좋아하고 익숙한것에 벗어난것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여행이 좋은것 일지도 모르겠다. 유독 인도와 히말라야 몽골, 순례자의 길 등 대한민국과는 다른, 자연이 있는 국가와 도시들을 여행하는게 좋다. 상상만 해보던 광활한 대지를 구경하는것이 좋고 8000미터의 설산을 구경하는것이 좋다. 아마 앞으로도 내 여행 취향은 이럴것 같다. 여행을 통해 기존것과는 다른 무언가들을 경험해보고 새로운 견해를 얻고싶다. 이 블로그는 인도에서 만났던 도시들과 사람들을 필름카메라로 기록한 사진들이다 좋은 기억 따듯한 기억 가득한 인도를 다시한번 끄집어내어 정리해봤다.
2018.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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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다이푸르의 호수는 인공호수이다. 16세기에 만들어진 이 도시는 부다페스트라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건물들과 성이 있다. 해질녘 호수가 아름답고 흰색의 건물들이 석양에 물들어가는 모습도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머물던 도시이자 두번이나 방문한 도시이고 그만큼 좋은 기억들과 사람들이 기억에 남는다. 인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는 신혼여행지 1위가 우다이푸르인만큼 인도 사람들에게도 특별한곳이다. 나는 크리스마스때 머물고 있었는데 힌두교와 이슬람 종교가 많은 인도에서 크리스마스의 밤이 되니 여기 저기에서 폭죽과 불꽃놀이가 이어졌다. 그 날 새벽 5시에는 힌두사원에서 om를 상징하는 노래가 모닝콜 처럼 울렸다. 참 요상한 곳이다. 인도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하는 도시이다.
udaip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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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5대 종교인 시크교의 본거지 암리차르다. 인도의2프로 뿐이지만 인도 세금의 20프로를 낸다는 사람들이다. 전세계 시크교인들이 있지만 80프로가 암리차르에 살고 정말 모든남자들이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기르고 다닌다. 암리차르는 다른 인도도시들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체격이 크고 건장하다. 남녀노소 할것없이 단검이나 장검을 들고 다니며 이는 약자 보호라는 시크교의 다섯가지 k를 지녀야 하는 물건들중 하나라고 한다 다섯가지 k는
Kesh 깎지 않은 머리카락과 수염, Kangha 나무 빗, Kirpan 단검, Kara 쇠팔찌, Kacchera 속바지 가 있다. 시크교의 황금사원뿐 아니라 많은 사원들이 무료로 밥을 제공해주며 입장료 또한 무료이다. 그래서 암리차르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사원을 방문했었다. 종교가 필요하다면 힌두와 이슬람의 장점을 섞어 만들어진 시크교가 가장 세상을 세상답게 하는 종교일거라 생각한다.
Amrits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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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날리는 인도에 익숙해질때쯤 도착한곳이다. 시크교도시 암리차르에서 부터 버스로 꼬박 12시간 가량. 돈을 아낀다고 로컬버스를 탔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녁6시부터 도착한 아침 6시까지 한숨도 자지못했다. 절벽길을 아슬하게 비포장도로를 달리니 불편해서 못잤고 두번째로는 추워서 못잤다. 이때가 인도에와서 가장 몸이 힘든날이였을거다. 아침에 숙소에 도착해 잠을자고 오후에 나간 마날리의 풍경은 익숙한 설산이 있었다. 마날리는 정말 추운 마을이였지만 기억속엔 가장 따듯한 기억이 많다. 3일내내 함께 같이 돌아다녔던 떠놀이개 날리부터 인도에서 가장 맛있었던 스테이크집 식당, 점심을 먹고 카페에 들어가 초코케잌과 커피를 마신 시간들과 손수 코끼리모양 나무에 그림을 그릴때 기다렸던 그 시간들 까지 모두 따듯한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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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건물을 지은 샤 자한은 타지마할 보다 더 아름다운 건물들을 짓지 못하게 하기위해서 건축에 담당했던 담당자들의 손을 모두 잘라버렸다.
taj ma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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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자 힌두교에서 가장 신성한 도시로 간주된다. 또 불교와 자이나교에서도 중요한 성지로 꼽히며 인도인들이 신성시하는 갠지스강에서 죽은자의 시체를 태우기도 그 물로 목욕을 하며 빨래를 하고 물을 마신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수없는 장면들 이지만 그들에게는 수천년간 일상이 되었다. 아침 저녁으로는 시바신께 올리는 제사같은 뿌자를 진행하며 바라나시를 방문하는 방문자들에겐 최대의 구경거리다. 강과 함께 있어 대부분의 날이 안개로 둘러쌓여 있으며 더럽고 거리마다 소가 득실 거린다. 혼란속 안정감과 대마와 마약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수 있다. 바라나시의 기차역은 연착으로 아주 유명한데 기본 6시간 나는 12시간을 연착해 아주 고생이였다. 기차가 오는 그 순간은 실로 감격적이였다.
varana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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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하의 뜻은 “숨어있는곳” 이다. 이처럼 히든카드같은 평화롭고 조용한 도시이다. 모든 도시들은 인간처럼 수명이 있다. 한때는 인도 중앙을 지배했었던 왕조의 수도 였지만 현재의 고성들은 원숭이들 뿐만 살지 않는다. 여기 저기 버려진 고성들이 있고 열대지방의 나무들이 번성하고 울창한 자연속 도시다. 성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아름다운 강을 볼수있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한시간 쯔음은 정말 잊지 못할 기억이다. 누구나 상상해봤던 동화속 마을의 쉼이다.
Or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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