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djaey

[birdjaey]

하늘이 아직 검푸른 이른 아침부터 오랜만에 집 안 이곳저곳을 살폈더니 미처 풀리지 않은 피로가 다시 내려앉는다. 영하의 기온, 눈이 바람에 흩날리는 지난 며칠 사이 몸 안에 들어찬 추위를 다시 피부 아래로 느낀다. 그 서늘한 기운은 소파와 담요 사이로 숨어드는 수 말고는 이겨낼 길이 없다. 그렇게 몸을 데우며 오늘이야말로 느긋하게 늘어지는 주말을 기대해 본다. 하지만 그 여유는 그리 길지 않고, 빨리 지는 겨울 해가 어느덧 창문을 지나면서 창백하게 깨끗한 하늘과 함께 나를 재촉한다. 그 곁에 탄이의 지루함에 겨운 하품 소리까지 나의 등을 떠밀어, 나는 하릴없이 짐을 챙겨 탄이와 긴 긴 산책길에 나선다. 눈 덮인 들판, 숲길과 바닷가 산책로를 따라 유달리 맑은 오늘 겨울날을 즐기러 길을 나선 다른 많은 사람들 사이를 걷다 보면 게 중 가장 높이 뜬 순간에 마주친 해는 어느 사이에 뉘엿해진다. 걷는 길 중에 만난 넓은 벌판에 탄이를 잠시 풀어주고,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본다. 어느새 손끝과 발끝을 타고 다시 몸을 파고드는 한기를 느낀다. 오늘 이런 아름다운 겨울날을 흘려보내지 않아 잘했다고. 그것이 오늘 생긴 또 다른 작은 추억의 증거인 듯, 나는 그 차가움을 품에 안고 다시 집으로 향한다.

2021년 12월 26일, 스톡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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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을 매일 탄이와 함께 나란히 산책 연습을 한다. 집을 나설 때면 사료를 한 움큼 주머니에 넣고 몇 걸음에 한 알 씩 줘가며 걷는다. 이 골목 저 골목, 나무와 나무 사이. 겨울에도 눈 덮인 채로 파란 풀 밭을 신나게 지나다 보면 한 손 가득 주머니에 담았던 것들이 어느새 다 떨어지고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길에 탄이의 눈을 바라보면 서운한 마음 나만의 것이었는지, 맑은 눈동자들은여전히 땅과 하늘 여기저기를 마냥 생경한 듯 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그 눈망울을 보면서 생각한다. 내게 남은 다가올 순간들을 세어보면 몇 알이나 될까. 흰 눈이 흩날리는 겨울날들. 세상에 나 홀로 남은 듯 보내는 길고 고요한 밤. 깊은 새벽 떠오르는 해를 기다리며 시작하는 하루들. 다시 시작되는 봄날을 마주하는 기쁨들은 나에게 몇 수십 수백 번이나 남아있을까. 그리고 나에게 그득히 주어졌을 것만 같던 그 찰나들이 한 알 �� 알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져 어느새 빈손이 되어버렸을 때. 그런 마지막을 상상하면, 지금 이 두 손이 이미 비어버린 듯 가슴 한쪽에 느껴지는 빈자리를 쓰다듬게 된다.

그 마지막에도 주위의 풍광을 여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둘러볼 수 있어서, 더 채울 수 없는 두 손의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기를. 그리고 빈손이 된 나와 같이 나란히 걸어줄 누군가가 옆에 있어 주기를 바라본다.

2021년 겨울, 스웨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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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꾸어온 이 꿈의 처음은 막 선잠에 들어 시작된 꿈처럼 흐릿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 시간은 빛 받은 구름처럼 은은하게 온기를 품으며 내 주위를 흘러갔다.

그렇게 한 동안 흐르던 꿈은 점점 선명해지고 더 밝아지면서 점점 색채를 찾았다. 그 꿈이 보여주던 풍경과 순간들은 눈부시게 다채로워 그 안에서 길을 잃은채로 헤매고 있다는 것을 잊히게도 하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걸어 도착한 그 다음의 꿈은 선명함이 더 해져서, 어느 순간 모든 것들이 주변에 가득한 소용돌이를 깨닫게 되었다. 그 혼돈은 곧이어 폭풍이 되고, 주변에 가득하던 색채는 천둥번개처럼 휘몰아쳐 나를 두렵게 하였다. 나는 줄곧 방향을 잃어왔던 걸음들이 긴 방황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눈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좌절의 시간을 지났다.

끝을 알 수 없었던 그 폭풍의 끝에 꿈은 다시 천천히 흐르기 시작하고, 몰아치던 소용돌이가 잦아들어 온기를 다시 느끼기 시작하였다. 다시 은은히 감싸는 포근함에 나는 시간을 잊고 햇빛 속을 걸었다. 하지만 계속되던 꿈은 어느새 색이 바래기 시작해 온기를 계속 품어줄 수 없었고, 나는 눈 감은 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제 이 꿈은 온기를 다 잃은듯하고, 금속 같은 차가움이 내 가슴을 찔러오는 것을 느낀다. 볼에 닿은 찬 기운에 갑자기 잠 깨는 것처럼, 나는 이제 이 꿈이 계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꿈 속에서도 알고있다. 이 다음에 오는 것은 이 추위와 어둠 속에 계속되는 깰 수 없는 꿈일까, 아니면 꿈이 끝난 뒤에 시작되는 그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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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감정적인 반응과 행동 양상의 다양성을 고려하면,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정의하는 이것이 모든 인간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추구된다고 단정짓는 것은 불가해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사랑이라고 여겨지는 감정적 행동적 양식이 생리적 반응 역시 수반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화학적 수치를 통해 사랑을 정량화 할 수도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쯤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오고 가는지 알 수 있을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나의 지난 시간 속에 진정한 사랑을 가졌다 여긴 순간은, 닿을 수 없는 허상을 따라 방황할 때도, 끊임없는 욕망에 눈이 멀었을 때도, 타오르는 감정에 나 자신을 소모할 때도 아니었다. 그 순간에 나는 오히려 더 차분해지고, 빈자리가 채워지는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한 편으로 여전히 반대편에 존재하는 허술함이 안쓰러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느꼈었다. 그런 체험은 중독적이라기보다 중력에 가까운 것이어서, 걷다보면 어느새 다시 눈 앞에 다가와있어 운명이라 여기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진정한 사랑이 사전적으로 행복한 결말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정량화할 수 없는 사랑의 다양성을 고려할 때, 그 가설은 참 또는 거짓 여부를 떠나 전제 자체가 오류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나로서 한 사람에 대해 가지는 감정과 행동적 양식의 특별함은 그 자체만으로 그 가설 자체의 논리성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 될 수 없다.

내게 지난 사랑이 중력적인 것이었기에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부유하는 듯한 상실감은 그 인력을 잃은 반작용임이 설명이 된다. 진정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많은 것을 잃어 무게를 상실하고 차가운 빈 공간을 떠다니고 있다. 그 사랑에 발 붙이고 있는 동안에, 우리 사이에 감정적 행동적 양상들이 어떤 상호작용을 내어 서로를 소모시키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 부유감은 당혹스럽고, 내가 가졌었던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을 끊임없이 가늠하게 만든다. 그것이 어떻게 너를 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빈 공간을 방황하는 내가 어느 땅에서 한 번이라도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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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닿는 가장 먼 어린 시절부터 나는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절망해왔다. 나라는 존재의 소멸과 그 부재를 인지조차 할 수 없는 상태. 티비에서 우연히 시간과 우주의 종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나의 인식이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불멸의 세계 따위는 존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던 10살도 채 되지 않았던 나의 그날 밤 기억은 지금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지금도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종말이 주는 절망감은 발작하듯 커져서 밤이면 나를 숨을 쉴 수 없게 만든다.

이 공포는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것이라, 내가 안전민감증 따위의 증상을 앓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그 어둠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체험으로부터는 거리를 두어왔다. 예를 들면, 술이나 담배는 내 기대 수명을 낮추겠지만 그 쾌락이 적어도 죽음의 인지로부터 눈 돌리게 해주는 도움은 된다. 비행기를 타는 것이나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것도 지상에 발 붙이고 있는 것보다 나를 죽음에 가깝게 올려놓겠지만, 그 경험이 주는 황홀감 역시 눈가리개가 되어준다. 하지만 가령 놀이기구를 타는 것은, 그것도 아주 높은곳에서 추락하는 롤러코스터 따위를 타는 것은, 경험상 그리 즐거운 체험도 아니었던데다 원초적인 공포감이 내 공황을 더 키우게 되니 그리 즐기지 않아왔다.

그러던 내가 이 도시의 명물 놀이 공원을 방문하여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었다. 놀이 공원을 찾은 것도 오랜만의 일이었는데, 주위에서 꽤나 무서워보이는 롤러코스터를 타자고 제안했을 때, 그날은 왠지 까짓 것 타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불의의 사고로 다른 승객들과 함께 죽을 확률도 몇억 분의 일에 불과하니 걱정할 것이 없고 무엇보다 아무렴 어때, 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막상 롤러코스터에 탑승해서, 열차가 높이 높이 올라가서 낙하하며,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뒤집어지는 동안에, 왠지 나는 웃을 수가 있었다. 무중력 상태가 주는 하강감, 높은 고도와 속도 모두 어떤 일인지 견딜만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이런 상태가 ���기해서 열차가 달리는 내내 웃음이 나왔다.

지금에 와서 내가 아무렴 어때하고 생각하고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웃을 수 있는 것이, 더 어렸던 그때보다 늙어진 나의 감각이 무뎌진 탓인지. 아니면 내가 지금 지나가고 있는 이 인생의 순간이 나를 좀 더 무덤덤하게 만든 것인지. 그 열차에 오르기 전 아무렴 어때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감정이 더 무뎌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겠다.

살아가는 어느 날 밤 마침내 종말에 대한 공포가 내 마음으로부터 겉히어 사라질 수 있을지 궁금해왔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 마지막으로부터 눈 돌리고 태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나는 마침내 내 존재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지. 아니면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자포자기하게 될지. 앞으로 인생의 굴곡이 쌓이고 쌓인 그 끝에, 나는 어떤 순간에 마지막 롤러코스터에 올라타서 마침내 모든 그늘이 다 사라졌음을 깨닫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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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은 귓가에 머물다가 사라지고, 어떤 말은 마음에 들어와 산다.

요즘은 드라마에 빠져 지내고 있다. 예전에 봤던 드라마를 다시 보거나 새로운 것을 찾거나. 나이를 더 먹고 다른 경험을 하고 그 기억들 속에 사는 지금. 어릴 때는 드라마 속 흥미로운 이야기가중요했는데. 이제는 드라마 속 텍스트에서 나와 나의 감정에 대한 해명과 공감을 마주하게 된다.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내 이야기 같다라는 것일테니, 나만의 아주 특별한 감상은 아니겠지. 그저 나에게는 그 이전의 나와 그 방식이 달라 감회가 새로운 것일까.

내 안에는 내가 너무 많아 타인을 외롭게 한다.

누구에게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싶은 방이 있다.

어떤 말은 귓가에 머물다 사라지고, 어떤 말은 마음에 들어와 산다.

내 말이 네 속에서 무거운 유언처럼 살아남았구나.

내가 괜찮다고 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텍스트들 속에서 내가 얻는 위안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람의 텍스트 속에 있는 이야기이니 그럴수도 있다라는 연역적인 면제일까. 저런 말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으니, 진짜가 아니더라도 그런 삶은 생각이 가능한 범주이니, 그러니 살 수 있다는 안도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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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열 일곱 남은 구슬 중 하나를

하루에 하나 꺼내어 쓸 수 있는 작은 구슬들을 일 년 치 손에 쥐고 시작했다고 생각해 본다. 두 손 가득 들어찬 알들 중에 월요일이 52개, 화요일이 52개... 어느 요일은 53개로 시작하긴 했을텐데, 지금와서 어느 날이 하나 더 많을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그 중에 일요일도 52개. 오늘까지 17개 남았던 것을 오늘 또 하나. 이제 두 손 가득했던 것들이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남았다. 오늘 하루 스톡홀름의 날씨는 간만에 맑았고, 우리 강아지 탄과 시간을 밖에서 많이 보냈다. 아침 점심을 배불리 챙겨먹고, 저녁을 일부러 거른다.

내일 다시 시작될 회사 일들을 기다린다. 다가오는 금요일에 다시 나갈 테니스 강습을 기다린다. 개와 주인이 닮아지는지, 공놀이가 아닌 운동이 재미가 없어 더욱 그런다. 온종일 미처 소비하지 못한 칼로리를 생각해 저녁을 거르며 내일 다시 배를 채우길 기다린다. 날이 갈수록 짧아지는 해가 지고, 내일 해가 다시 떠올라 추위가 다시 가길 기다린다.

내 안에 남은 이 색을 구슬은 이제 열 여섯 남았는데. 열 일곱 째 날이 입 안에 녹아 사라지는 동안에 왜인지 나는 다른 날을 기다리고 있다. 손 안에 허전함은 아쉬운데, 지금 이 날은 왜이리 무미할까. 돌이켜보면 하루 종일 파랬던 하늘이, 탄의 바빴던 발바닥과 헐떡이는 숨이 충만치 않았던 것은 아닌데. 문제인 것은 그 충만함을 안을 준비가 되지 않은 내 속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