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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를 위해 모으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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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이루는 바위와 대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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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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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혼 찾기
"정말 영혼 없으시네요" 필용은 잠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영혼이 있는 상태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진심을 잘 못받아들이는 탓이라고 항변을 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J에게 만큼은 모든 말 한마디에 진심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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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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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1일
나를 이끄는 것과 내가 싸우는 것
일상의 어느 한 지점에서 무한한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 있다.  
아득해진 나는 그 지점에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해보지만, 
이미 그 시점 후로 다시는 전과 같은 삶을 살 수가 없다. 
나에게 ‘이해'라는 것은 이렇다. 어떤 미움도 애달픔으로 바꿔낼 수 있는 것, 바꿔내고 마는 것.
만약 내 안에 ‘감정'이라는 대륙이 있고, 나는 끊임없이 그 미지의 대륙을 여행하는 여행자라면, 내가 여행 지도 안에 가장 큰 영토는 ‘회한'이라는 영토일 것이다.
나는 무엇을 그리도 애달파하는가.
이것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자기 충족적인 연민의 소산인가,  나를 거리로, 전지구적으로 이끄는 파토스의 잠재력일까.  
나를 죽이려는 모든 것에 저항하고 싶다. 나를 축소화하려는 모든 것에 맞서고 싶다. 오로지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그 뿐이다. (가장 큰 적은 역시 ‘언어' 그 무수한 성긴 논리들, 다른 이들을 좀 먹는 악마성)
그렇지만 동시에!
“내가 생각건대, 혼돈이란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나 존재합니다. 내 안에도 있고 당신 안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실생활에서 일일이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로, 외부를 향해 드러내야 할 종류의 것은 아닙니다. "이거 봐, 내가 떠안은 혼돈이 이렇게나 크다니까" 하고 남들 앞에 자랑스럽게 내보일 만한 것은 아니다, 라는 얘기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아무도 보지 않길 바라는 글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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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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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어떤 애정에 대하여 정확함을 기해서 써보고 싶었던 글
<프로젝트-플로리다>
들어가며 
어떤 영화는 아름답게 만들어지고 또 어떤 영화는 스스로 아름다워진다. 전자의 영화들이 벅차게 기억되는 아름다움이라면, 후자의 영화는 아리게 기억되는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후자는 대체로 인간의 진실한 얼굴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이라는 존재만이 두 시간 안에 ‘아름다워 질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 때문이다. <무쉐뜨>에서 호수로 연거푸 몸을 굴리던 소녀, <로제타>에서 가스통을 들고 사라진 소녀가 이번엔 디즈니 동산을 향해 뛰어간다. 열 살 베기 소녀의 대책 없이 말간 표정에 그 모든 것들을 짊어 지우는 것은 도대체 어떤 작자들의 상상력이란 말인가?
웨스 앤더슨 풍의 연보라빛 건물과 멀리는 희미한 무지개가 보이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포스터의 국내 배급사 AUD의 홍보문구는 다음과 같다.
“2018년 우리를 행복하게 할 가장 사랑스러운 걸작, 안심하세요 나랑 있으면 안전해요, 플로리다 디즈니월드 건너편 ‘매직 캐슬’에 사는 귀여운 6살 꼬마 무니와 친구들의 디즈니월드보다 신나는 무지개 어드벤처”
비록 이 영화가 주거 공간을 잃고 모텔에서 장기 투숙하는 히든 홈리스들의 삶을 다루기는 하지만, 이러한 홍보 전략에 대해서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오히려 “허름한 모텔에 산다고 해서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라는 배급사 대표의 변은 꽤나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질문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행복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성질의 것이냐는 것이다.
꿈의 동산, 초라한 삶
영화는 점점 오락이 되어가고 있다. 3D안경을 ���고 덜컹거리는 의자에 앉아 영화를 보다 보면 이 행위가 놀이기구를 타는 것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 지 헷갈릴 때가 있다. ��령 비디오 게임은 그것이 얼마나 생생한 시각화에 성공했느냐 와는 별개로 우리 삶의 표피 그 이상으로 진입하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비디오 게임의 소비자 자체가 요구하는 것이 그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삶과 세계의 진면목을 보고자 비디오 게임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어떤 문화와 매체의 예술적 성취라는 것은 단지 그 수요자가 요구하는 범위 안에 머무는 것일까? 최근의 박스오피스를 보고 있자면 이것이 그렇게 틀린 답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밝혔듯 그 와중에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영화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의 충실한 모사가 아니라 그 영화가 보여주는 생생한 관점을 통해 드러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보여주는 현실은 재현적 상징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재현적 상징이란 그것이 상징을 위한 상징이 아니라 재현을 바탕으로 둔 상징이라는 의미로 쓰고자 하는 용어이다. 가령 이런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무니와 아이들의 낮 시간은 대부분 어디론가 걸어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 카메라는 건물의 구조와 아이들의 모습을 한 모습에 담을 수 있을 만큼, 먼 거리에서 이들을 찍고 있다. 당연히 구조물은 더 거대해지고 아이들은 더 왜소해진다. 그리고 이 건물들은 대부분 디즈니 동산과 관련이 있는 건물들이다. 이 극단적인 크기의 대조는 아이들을 소멸시키면서 동시에 건물들이 가지고 있는 그 철 없는 환상성을 기형화 시킨다. 이 장면에서 영화가 조작한 것은 하나도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올랜도 – 디즈니 동산이 위치한 – 외곽은 건물들 사이로 아역 배우들을 걷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관점의 차이, 카메라의 위치 변화로 인해 이 장면은 영화가 포착하고자 하는 실재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다
이 영화는 사실 어떤 관습에 얽매여 있지 않다. 아이들의 대화를 긴 롱 테이크로 보여주는 동시에 전형적인 헐리웃 가족 영화 스타일의 슬로우 모션으로 딸과 엄마가 빗속에서 뛰어노는 장면의 푸티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관습으로부터 얽매이지 않음’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어떤 관습이 있어야 한다는 듯이 상정하며 말하는 것은 이 영화가 리얼리즘이라는 큰 맥락 속에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묘사없이 묘사하는 것을 택하고, 플롯에 대하여 사건이 우위가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이야기를 직조해나가기 보다는 삶의 단면들을 보여주는 데 애를 쓰고 있고, 그러다 보니 ‘별 것 없는 일상을 다룬다’는 이젠 조금 진부해지기까지 한 표현이 이 영화에도 적용 가능하다. 다르덴 형제 이후로 많은 리얼리스트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자기만의 언어로서 위대한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 영화의 감독인 션 베이커도 분명 그 흐름을 이끄는 새로운 기수로 여겨질 만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전작들에서 다뤄온 ‘사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뉴욕의 길거리 짝퉁 상인, 중국계 배달원, 마침내 캘리포니아로 건너와서는 트렌스젠더 성 노동자까지. 이러한 영화들에서 그가 인물들을 다루는 방식과 목표는 언제나 동일하다고 느껴진다. 방식은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시각을 통해 공감하는 것이고, 목표는 그들을 스크린으로 드러내는 것 그 자체. 그는 줄곧 여러 인터뷰를 통해 말해왔다. 결코 특정 그룹을 타겟으로 다뤄보겠다고 마음 먹은 적 없다고, 다만 덜 다뤄졌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고. 이는 그가 얼마전에 내한했을 때 그의 눈을 보며 직접 들은 사실이기 때문에 신뢰해도 좋다. 그는 가장 특수한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계의 관객들에게 그들의 삶과 영화 속 주인공들을 연결시킬 수 있게 해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분명히 우리를 유년시절로 데려가기도 하고, 모성에 대해 생각해보게도 하고, 무엇보다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은 파견된 사회복지사들이 양육할 능력이 없다는 판단으로 딸과 엄마를 떼어놓으려고 할 때 눈물까지 흘린다. 그런데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무언가 찝찔함을 느꼈다
자유를 느낄 권리
이 영화는 션 베이커의 이전 영화들과는 명백히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무니의 모녀는 객관적으로 삶이 매우 힘겨운 사람들이다. 그 힘겨움은 이전 영화들의 인물들이 겪고 있는 힘겨움과 차원을 달리 한다. 한 주의 모텔 숙박비를 내기가 버겁고, 무니는 그토록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 구걸을 해야만 하는 소녀이다. 돈이 없는 그들에게 하루를 버텨내는 것은 그 자체가 미션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삶을 스크린을 통해 지켜보는 우리가 그들의 소소한 행복과 거대한 절망을 보면서 공감을 하고, 나아가 홍보 문구에 의하면 “행복해지는” 것이 온당한가이다. 아니, 누가 그들을 영화의 캐릭터로 만들 수 있는가. 즉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감상자에게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영화이면서 동시에 그 자유의 윤리성 또한 같이 묻고 있는 작품이다. 이는 재현의 윤리에 대한 리얼리즘의 태생적인 논쟁을 재소환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예술을 보며 느낄 수 있는 자유에 대한 문제 의식이기도하다. 좋은 영화의 좋은 감상자는 영화가 제공하는 계기에 따라 스스로를 깨워내고 자신의 생명성 그 자체를 유희하게 된다. 그런데 그 매개적 소통이라는 이름 하에 누리는 자유, 그 자체의 윤리성에 대해서 고민해보아야 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영화 속 생생함 앞서 분명히 존재했던 그 재현의 태도에 대해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자연스레 전에 읽었던 책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영화에서 고통을 유발한 폭력이 재현되는 순간, 그것이 아무리 끔찍하게 표현되더라도 참을 만한 자극이 된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극장에 들어와 안전한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중략)
최악의 사태는 영화의 재현된 폭력을 감상하고 나서,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안전한 분노가 그 이해의 증거로 내밀어진다. 고통의 이해가 분노를 낳는 게 아니라, 안전한 그래서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 거의 잊혀질 분노가 고통의 이해를 사후 승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관객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재현의 윤리의 문제다. 또한 폭력의 재현을 변호하는 데 동원된 언어의 문제다. 
이창동이 지켜온 재현의 윤리는 가해자에 내가 포함돼 있다는 죄의식, 혹은 공범 의식에 있었다. 그러나 밀양에서 폭력은 아예 재현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분노의 계기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고통의이해라는 자신의 인간적 감정을 사후 승인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중략) 밀양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 라는 단 한마디가 불가능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강, 2010. “고통의 심연, 찰나의 빛”
물론 이 영화가 명확히 (폭력에 의한) 가해자-피해자 구도에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무니 모녀는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홈리스가 된 것이고 결국은 공권력에 의해 모녀 사이가 갈라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거대 구조의 피해자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이 지나친 표현이라 하더라도 어쨌거나 그들의 삶의 형태는 도시 빈민이며 일반적 의미의 불행과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굳이 밀양에 대해 쓰여진 이 글을 가져온 이유는 사실 이창동이 이 영화를 만드는 태도에서 션 베이커가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만드는 태도를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내한 후 이뤄진 인터뷰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언급한 영화는 이창동의 오아시스였다. 처음에는 이것이 어느 정도 립서비스성이라고 생각했는데, 한참 전의 외신과의 인터뷰에서도 밀양을 그에게 강한 영감을 준 영화로 꼽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창동의 영화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없음을 꾸준히 외쳐왔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공감하되 연민하지 않는다는 션 베이커의 태도도 조금 더 와 닿는다.
다시 영화 속 장면으로 돌아와 보자. 생활고에 시달리는 무니의 엄마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성매매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장소는 모녀가 살고 있는 모텔 방이다. 무니의 엄마는 남자 손님들이 방문할 때마다 무니에게 목욕을 시킨다. 우리는 처음에는 이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 실재 성매매 장면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 무니가 한가롭게 목욕을 하며 물장난을 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그러나 이 상황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욕조 밖의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이 상상은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워낸다. 프레임 밖에 존재하는 현실들, 딸을 욕조에 둔 채 성매매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는 엄마의 현실과 그 심정, 나아가 영화 밖의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을 수 있는 진짜 사람들. 우리는 계속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할 지에 대한 자유를 만끽한다. 그런데 감독은 이 자유를 오랫동안 허용하지 않는다. 한 남자가 프레임 안으로 불쑥 들어와 무니와 눈이 마주친다. 이 조마조마한 순간에 우리는 더 이상 자유란 것을 논할 수 없고 그저 무니가 상처받지 않기를, 어떤 상황인지 인식하지 못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무니는 감상자에게 단순히 영화 속 캐릭터 이상의 존재감을 가지게 된다. 강력하게 확보된 영화 안의 자유가 강력한 공감으로 치환되는 놀라운 장면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마치 현실이 영화로 침투하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우리가 손쉽게 누려왔던 예술이란 세계의 자유라는 권력이 얼마나 나약한 것이지 상기시켜준다
그런데 이토록 재현과 자유가 갖고있는 한계에 대해 경계해 왔던 션 베이커는 왜 결국엔 무니의 ‘매직캐슬’에 무지개를 띄우는가. 왜 그들의 일상을 이토록 귀엽게 그려내고, 심지어는 즐길 만할 것으로 느껴지게 만드는가. 그리고 왜 결국에는 그들에게 디즈니월드로의 도피를 허락하는가. 이러한 영화적 환상으로의 도피가 그의 영화가 여타 리얼리스트들과 차별점을 가져온 부분이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 만큼은 의문이 제기되어야 마땅하고, 껄쩍지근해야 마땅하다. 그는 정말 조심성을 잃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서 현실의 고통을 교묘하게 외면하고자 한 것일까? 예상했겠지만 앞으로의 글은 이러한 혐의에 맞서 션 베이커와 그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 대한 변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작품 그 자체 이전의 태도를 논하는 것이, 가치가 없다고 느끼거나 불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연출자 자신이 무엇을 말할 수 있고 없는가, 그 경계에 대해 스스로 알고 있는지는 매우 중요한 물음이라고 믿는다. 더욱이 삶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영화들이라면 이 물음은 당위의 문제를 넘어 작품의 진정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먼저 다시 한 번 논점을 짚어보자, 이 영화에 대해 제기되는 의문은 다음의 두 질문의 대립으로 정리될 것이다. 그들을 행복할 만한 삶으로 그리는 것이 맞는가? 와 그들이 행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 또한 오만한 생각아닌가? 하는 두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두 질문이 사실은 같은 모순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 중 어느 쪽이라도 그들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션 베이커는 이 명백한 모순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그들의 행복 여하를 멀찍이서 판단하지 않았다. 알기 위해서 노력했다.
-시나리오를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스토리나 캐릭터를 찾아 특정 지역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다.
=최근 몇 작품은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에 관한 영화여서 외부자로서 리서치가 필요했다. 가장 대상을 존중하는 리서치 방식은, 그들이 사는 곳에 직접 가보고 아무것도 모름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해당 지역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현상, 거기 사는 주민들을 소재로 픽션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저널리스트가 그러하듯 사람들에게 다가가 가능한 한 인터뷰를 많이 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대답했지만 그의 영화적 입장의 정수는 줄곧 여기에 있었던 듯하다. 매 영화를 만들기 이전에 직접 해당 커뮤니티에 자신의 몸을 담궜고 이는 통상적인 영화 만들기를 위한 자료 수집의 수준을 넘어섰다. 실제로 탠저린의 두 주인공은 이 과정에서 그가 사귀게 된 친구들이다. 즉 그는 윤리학적 실험을 하는 영화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치열함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치열함은 고통과 불행 이전에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어코 증명해내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그의 ‘프로젝트’만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 구걸을 하는 맹인을 보며 션 베이커라면 저 사람을 어떻게 그렸을까를 감히 상상해본 적 있다. 그는 아마 맹인의 행복과 불행을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그의 삶을 통째로 겪어낼 것이다. 모든 삶은 멀리서 볼 때는 짐작할 수 있을 만 해 보여도 가까이서 지켜볼수록 점점 특수해져서 그 자체로 반짝이는 형식이 되곤 한다. 가령 무니는 어른들이 울기 직전의 표정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눈은 반짝임을 잘 포착해낸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무니의 눈으로 무니를 보는 영화이다.
영화가 할 수 있는 일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질문하게 한다. 이 영화는 히든 홈리스라는 계층의 전형성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작품이다. 오직 완전히 개별화된 인물들을 현실에서 발견하고 찾아내면서 더 엉겨 붙은 상태의 현실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냥 그 상태의 예술 작품으로서 남겨두는 것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 그저 영화로서(예술로서) 머무는 것을 거부하는 듯 하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이 영화의 제작 방식과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션 베이커가 해왔던 영화 작업들은 그 자체로 하나하나의 사회적인 프로젝트이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만큼 ‘실제로 어떠한가?’에 대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션 베이커 감독은 영화가 사회적인 생산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 산업에서 자주 다뤄지는 사람들이 있고, 자주 이야기되는 계층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영화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계급적 위치와 산업적인 특징에 기인할 것이다. 그와 그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양면성은 이러한 스스로의 역할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한다. 그는 예술가로서 덜 이야기 되어지는 존재들에 본능적으로 흥미를 느끼면서 동시에 필름메이커로서 덜 이야기 되어지는 존재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 그가 예술가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운동가 같은 아우라를 풍기는 이유일 것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관련된 행사에서 그가 매번 빼먹지 않는 코멘트는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니 모녀에 대해 생각해달라는 말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감상자를 영화 속 실재의 세계에 연루시키면서, 스스로의 자유를 의심케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한다. 동시에 예술이 현실 사회 속 생산물이라는 건조한 명제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예민함을 요구한다. 이제 우린 다시 마지막 장면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젠시의 손에 이끌려 디즈니 월드로 달려가는 무니의 모습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가짜 세계로의 도피도 아니고 손쉬운 영화적 환상으로의 도피도 아니다. 션 베이커의 작은 프로젝트가 건네는 진심의 위로이다.
(19/12/14)
https://blog.aladin.co.kr/common/popup/printPopup/print_Paper.aspx?PaperId=2142408
모럴리스트 - 휴머니스트
영화 감독으로서의 자의식 < 휴머니스트(모럴리스트)로서의 자의식
미국에서 백인 감독이 할 수 있는 일 (난이도의 문제 -> 세련됨, 처절함의 정도 문제로 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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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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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가을에 에어팟 받으려고 쓴 글
<귀로>, 이만희 1967
     <귀로>를 본 때는 봄을 간절히 기다리던 겨울이었다. 서울의 거리는 유난히 더 삭막했고, 나는 이불 속에서 언 발을 녹이며 영화를 보았다. 발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과는 반대로 영화를 보는 나는 조금씩 더 힘들어졌다.
     전쟁에서의 부상으로 누워있을 수 밖에 없는 남편. 그런 남편 주위를 위성처럼 공전하는 아내. 따지고 보면 두 사람 모두 무던히 애쓰며 살아왔지만, 그 결과는 처절하게 고통스러운 마음일 따름인 것이다. 과연 누구를 탓해야 하나? 이만희 감독은 도시 속에서 부유하는 문정희 배우를 통해, 책임을 물을 곳이 없는 고통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필요로 했던 것은 단지 "다 당신 때문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언어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좋은 영화는 인간의 표정을 담아내고, 훌륭한 영화는 인간의 뒷모습을 담아낸다. 영화 속에서 줄곧 무언가를 기다리는 문정희 배우의 뒷모습에는 곧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어떤 정념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 강렬함은 다음 날 지하철을 타는 나를 뒤돌아보게 했다. 이 열차가 얼마나 많은 애달픔을 싣고 다닐지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
에어팟은 못 받고 도서상품권 받음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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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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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아주 신기한 영화를 본 경험을 쓴 글
그 여름 가장 시끄러웠던 바다
- 기타노 다케시 <하나비>,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의 침묵의 ost
인간은 의식 깊은 곳에서부터 소리와 이미지를 연결시킨다. 때문에 영화는 시각경험인 동시에 청각경험이다. 자연스럽게 영화는 항상 소리와 함께 발전해왔다. ‘무성’영화라고 분류되는 시대의 영화들도 사실은 동시적인 반주를 동반했다. 이것은 음악을 통해 영화를 완전한 지각경험으로 제공하기 위한 창작자들의 시도였을 수도 있고, 지속되는 정적을 견디지 못하는 관객들을 위한 배려였을 수도 있다. 동시녹음의 시대 이후로 영화 속에서 이미지와 소리의 결합은 더욱 공고해졌으며, 당연해졌다. 영화 속의 소리를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영화 속에 그 소리의 원인이 존재하는 소리 –인물의 대사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와 영화 속에 소리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소리가 그것이다. 언뜻 보면 이미지에 대한 충실도가 핵심인 전자의 소리는 물론이고 이미지들의 감정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로 보이는 후자의 소리 모두 이미지와의 관계에서 단순한 조력자로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시각경험과 청각경험은 그 우열을 단순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의 가슴 깊이 남은 기억은 이미지의 형태일 수도 있고, 소리의 형태일 수도 있다.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의 마지막 시퀀스를 보자. 한 부부가 그들 인생의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한 해변은 그들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인데, 동시에 그들이 동반자살을 할 공간이기도 하다.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적막한 바다를 응시하던 부부의 투샷 이후 화면은 다시 바다만을 보인다. 동시에 비장하던 배경음악이 멈추며, 파도소리 마저 멈춘다. 관객이 이 완벽한 음향적 무중력 상태를 견디기 힘들어지는 순간, 두 발의 총성이 바다를 배경으로 울려퍼진다. 이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의 총성은 분명 영화 내러티브에서 연유한 소리이지만 프레임밖에서 발생된 소리이다. 이 씬에서 ‘화면 밖의 총성’은 마치 그것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쇼트와 같이 작용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수평선을 경계로 하늘과 바다로 양분된 시각적 쇼트와 침묵 속의 총성이라는 청각적 쇼트가 충돌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의 비극성을 극대화한다. <하나비>의 마지막 시퀀스의 소리는 단순히 이미지를 ‘적시는’ 데 종사하지 않고 이미지 속으로 강력하게 ‘침투하고’ 있다.
기타노 다케시가 연출한 또 다른 작품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를 보면 그의 영화세계에서 소리가 가지는 힘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영화의 작업과정 중 편집을 가장 흥미로운 과정으로 보는 그의 말들을 감안할 때 소리를 중요 표현수단으로서 취하는 이 영화가 명백히 그의 의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침묵에 대한 영화이다. 주인공인 시게루와 연인인 다카코는 모두 청각장애가 있으며 시종일관 소리 내어 말하지도 않는다. 즉 일차적으로 대사라는 소리가 설정에 의하여 제거된 것이다. 그렇다고 수화로 애써 의사소통을 시도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의사소통은 침묵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니, 사랑의 방식마저 침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의 배경 공간은 어떠한가? 여느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서는 애초에 소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많이 없으며 영화의 대부분의 사건이 벌어지는 바다 또한 그러하다.
침묵이 지배하는 이 영화에서 정서는 어떻게 전달되고 있는가. 영화는 시종일관 긴 호흡의 롱테이크와 기교 부리지 않는 픽스샷과 패닝의 촬영기법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미지가 공허하고 건조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 영화의 주제 자체가 침묵인 탓일 것이다. 침묵은 소리가 없음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응시’라는 행위와 가장 잘 어울리는 ost이기도 하다. 다카코가 시게루를 사랑하는 방식, 시게루가 바다를 사랑하는 방식 모두 응시라는 행위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그 응시는 ‘침묵’이라는 배경음악에 의해 깊어진다. 그리고 이 침묵이라는 배경음악은 앞서 언급했듯 서술적이지 않고 비워져 있는 화면과 완벽한 화학적 결합을 이룩한다. 가령 몇 차례나 등장하여 이 영화의 대표적인 이미지라 말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시게루와 다카코가 하나의 서핑 보드를 나누어 든 채 바닷가를 따라 걷는 롱숏, 롱테이크 장면이다. 시게루는 앞에 서서 정면만을 보며 걷고 있고, 다카코는 그런 시게루를 따라 서핑 보드의 끝을 도와 들며 걷고 있다. 이 숏에는 어떠한 설명적이고 관념적인 요소가 없다. 그렇지만 조용한 이 장면이 반복될 수록 우리는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의 굴곡이 만들어내는 시끄러운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따라서 비어있던 이미지는 깊은 정서로 채워진다. 그의 영화를 단순히 미니멀리즘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비움의 이유가 비움 그 자체가 아닌 더 깊은 감정을 끌어내기 위함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가 침묵으로 일관된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에도 <하나비>의 마지막 씬처럼 소리가 이미지를 향해 강력하게 침투하는 순간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순간은 서핑보드를 산 시게루가 보드때문에 버스 승차를 거부당하게 되고 버스는 먼저 탄 다카코만을 실은 채 떠나게 되는 시퀀스이다. 이 때 승객의 말소리 조차 없는 조용한 버스 안의 다카코를 비추는 화면 위에 갑작스럽게 음악이 깔리며 관객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마치 다카코의 감정을 ‘들려주듯이’ 불안하고 슬픈 이 음악은 조용했던 영화에 급격히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인물의 감정을 설명해주는 듯한 음악은 자칫 뻔하게 느껴질 수 있었으나, 이 음악은 침묵 뒤에 숨어있던 소리이기에 침묵만으로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던 주인공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효과에는 음악감독 히사이시 조의 공헌이 지대하다. 히사이시 조는 기타노 다케시와 꾸준히 작업을 하고 있는데, 소리를 중요한 표현수단으로 삼는 연출자의 스타일을 정확히 이해한 스코어를 들려준다. 이 씬 뿐만 아니라 영화 전반에서 그의 음악은 반복적인 운율과 선율을 심심하게 풀어낸다. 이러한 음악은 두 주인공 사이의 침묵의 대화와도 닮아 있으며, 영화 이미지 전반의 리듬감과도 발을 맞추어 나간다. 또한 침묵과 음악의 반복이 빚어내는 리듬감과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퀀스에서 소리의 사용이 단순히 음악에만 집중된 것은 아니다. 자리에 앉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던 다카코에게 어떤 이름 모를 할머니가 자리가 비었다는 말을 건네기도 하고, 다카코가 누른 버스 차음벨의 소리나 버스에 내려 시게루를 향해 뛰어가는 발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리기도 하다. 다카코는 이 소리들을 듣지 못하리라는 생각과 더불어 내러티브에 청각적으로 입체감을 더해주는 흥미로운 요소들이었다.
비어있던 바다의 이미지로 끝났던 <하나비>와 달리 이 영화는 바다를 응시하는 시게루와 다카코의 뒷모습으로 끝이 난다. 또한 해변을 가득 메운 총성 두 발로 끝났던 <하나비>와 달리 이 영화는 빈 바다를 가득 메우는 음악으로 끝난다. 음악의 제목은 ‘silent love’이다. 그 여름 바다는 가장 조용했다, 그랬기 때문에 가장 시끄러울 수 있었다.
(지금, 여기)
이 영화의 신기한 점은 영화가 계속될 수록 기타노 다케시가 어디에서부터 영화를 시작했을지 그 시작점의 풍경이 점점 뚜렷해진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 곳으로 달려가는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무척 슬프고 아름다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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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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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많이 하던 고민을 쓴 글
오래된 여자친구
고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간의 욕망은 다분히 인위적이다. 만약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인간 욕망의 한 종류라면 우린 가장 혐오스럽다라는 것 앞에서도 -원하기만 한다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마치 찾고자 노력만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적어도 예술이 주는 아름다움은 이것과는 달라야 했다. 그것을 찾기 위해 애써 노력하지않아도, 부지불식간에 나를 감싸는 쾌 그것이 아름다움이어야 한다. 왜? 예술은 특별하니까. 그렇다면 예술 그 안에 아름다움의 근원이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고 만약이라도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 결론이라면 예술의 존재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미술 작품 앞에서 무엇을 찾고 싶은가 혹은 무엇을 찾기를 기대하는가. 우리가 예술의 다른 장르인 음악을 들을 때, 영화를 볼 때 대체로 아름다움은 그 작품 안에 실재하는 것처럼 또는 적어도 최소한 그 작품 안의 속성들과 깊이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미술 작품 앞에선 나에게 그 기대는 음악과 영화같은 다른 장르에게 기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기대를 품고 미술관에 갔을 때 였다. 순수하게 미술에 대한 감상 목적으로는 아마 처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날 나는 미술관에서 길을 잃었다. 한 작품 앞이 허용하는 공간이 너무 넓었다. 그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 지 막막했고, 미술관의 공기는 내가 생전 경험한 적 없는 미지의 아름다움때문에 색달랐다.  길을 잃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 곳에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갔고,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내 앞의 벽에 걸린 그 많은 캔버스들은 아름다움의 일말의 가능성을 가졌다. 그 달콤한 쾌감을 맛보기 위한 노력은 분명 ‘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매 작품 앞에서 성공과 실패가 반복되었다. 안타깝게도 그 날 나는 아름다움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나에게 미술관은 여전히 가능성의 공간으로 남았고 나의 미적 감수성을 시험할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전에 또 한 번 미술관을 방문했다. 미술이란 것에 대해 조금 배운 후 였다. 작은 갤러리였는데, 가장 먼저 변화한 것은 나의 자세였다. 팔은 팔짱을 끼거나, 뒷짐을 질 수 있게 되었고, 발은 자연스럽게 끌면서 갤러리를 유유히 누빌 수 있었다. 이제 캔버스는 캔버스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캔버스 앞의 공간이 너무 넓게 느껴졌던 전과 달리 캔버스 뒤의 공간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 무형의 공간에 나는 압도되었고 함정에 빠진듯한 기분을 느꼈다. 물론 길도 잃지 않았다. 나는 이제 아름다움을 찾는 나그네가 아닌 유능한 감상자가 될 필요가 있었다. 유능한 감상자는 작품 앞에서 전형적으로 기대되는 것과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유추한다. 이미 어떤 미적 판단이 담보된 상태로 작품을 마주하는 경우가 빈번해지는 것이다. 내가 품은 기대와 가능성이 물론 백퍼센트 만족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갤러리에 들어오기 전보다 좀 더 나은 미적 인간이 되어 갤러리를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러한 기대와 유능함은 동시대의 비평과 떨어져 놓고 말할 수 없다. 작품은 이제 감상의 영역에서 이해의 영역으로 전이되었고 적당한 속성들에 적당한 주목을 주어야만 하는 잘 짜여진 모델링의 과정이 되었다. 그 모델은 동시대의 비평적 맥락에 대한 예민함과 직결되어 있다. 이러한 모종의 힘이 나와 작품을 양쪽으로 끌어당기며 멀어지게 만들었다. 나를 압도하던 작품 뒤의 공간과 나를 잡아당기는 갤러리의 완력. 그 갤러리에서 내 손에 쥐어준 종이에는 상처와 치유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했다. 혹시 이 곳이 갤러리가 아니라 병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곳에 있던 한 시간 가량의 시간 동안  나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 미적 체험이 있었는가.
우리는 어쨌든 예술을 소비하고 있다. 예술은 더 이상 예전의 유럽의 귀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영역이 아니다. 누구나 적당한 관심과 지불 의사가 있으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기호가 되었다. 그럼 그들이 향유하겠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것은 무엇인가, 작품 그 자체인가 아니면 아름다움을 향유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그 상태인가. 나에겐 후자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왜냐하면 이제 우린 동시대의 예술을 보기 위해 어떠한 새로운 사고의 세팅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것 앞에 서있다는 사고의 세팅. 이러한 세팅 없이 작품 앞에 선다면 우리는 완벽하게 길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 앞에서 가장 활발히 작동한 나의 능력은 상상력이다. 맥락을 분류하고 작품의 요소들을 거기에 조합하는 힘으로서 상상력이다. 아름다움은 예술 안에 있지 않다, 예술 안에 일부가 있지만 함께 감상자의 능력과 의지, 노력이 필요하다.
대안행위가 없으면 자유행위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작품 앞에서 우리가 수행하는 감상행위는 자유행위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자유행위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차라리 무지에 가까울 것이다. 일전에 나에게 아름다움은 애쓰지 않아도 나를 감싸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미술은 오래된 여자친구가 되어 버렸다. 처음에 그녀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또한 오늘 아름답지 않아도 내일 다시 아름다울 가능성이 있는 존재였지만 이젠 애써서 그녀가 아름다운 이유를 찾아야 된다. 물론 나는 그러한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글의 초반부에 인간의 욕망을 인위적이라고 언급하며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욕망의 한 종류라고 될 수 있을까 하는 가정을 했다. 두 번째 방문했던 갤러리 안에서 나는 분명 그 욕구에 사로잡혔지만 그것은 또한 분명 내 것이 아닌 욕망이었다. 장소와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욕망이었다. 이런 만들어진 욕망안에서는 미적 경험 이전에 사고가 개입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상실된다. 인지적 확장과 그에 따른 약간의 쾌를 얻고 나를 잃었다. 인식적 확장의 쾌는 순수히 작품에 의해서인가 담론에 의해서인가. 작품을 둘러싼 담론의 숲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는다
생후 12개월 남짓의 어린 아이는 거울에 비친 육체 이미지를 자신과 동일화시키면서 자아를 형성한다. 그 과정은 나라는 주체를 파악하고 형성하는 동시에 타자로서 나를 인식함으로써 겪는 소외의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타자가 된다. 그러므로 나, 자아는 나의 실재를 바라보는 순간, 그 순간의 오인과 차이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작품의 감상 과정에서는 이 ‘나를 바라보는 순간’이 상실된다. 우리는 예술계라는 일종의 상상 속의-작품 뒤에 존재하는- 영역에 자아를 종사시킨다. 어떠한 상상적 질서에 의하여 나의 감각을 배열한다. 타자는 타자로서만 남는다. 아름다움을 기대하고 선 작품 앞에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힘들다는 것은 큰 좌절이다.
어쩌면 나는 낭만주의식 미적가치론에 사로잡혀 있는 구시대적인 인간에 가까울 수 있다. 철저히 개인적인 경험으로써 미적 체험과 소박한 아름다움-청계천에서 마주한 것과 같은-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걸까.
예술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그 맥락 밖에서 존재할 때도 빛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빛남을 가능케하는 것이 그 작품의 고유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이 시대의 미술은 맥락 밖에서 존재할 수 있을 것 인가? 아니면 최소한 우리를 현실과 대면할 수 있게 만드는가. 이에 대해 회의적인 동시에 희망을 볼 수 있는 이유는 동시대에 만들어지는 작품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다. 여전히 다른 꿈을 꾸는 예술가들이 고군분투하고 있고 걸작들이 범작들 사이에서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
이 글은 미적가치와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모든 혼란 속에서 쓰인 글이며 그래서 사실상 비평논문으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다. 다��� 개인적으로 부딪힌 벽에 대한 묘사와 그 좌절에 대한 보고이다.
(지금, 여기)
다섯 달된 여자친구를 오래된 여자친구라고 생각하고 비유했던 얼척없는 글. 하지만 뭔가 이쁨받고 싶었던 욕구를 불러일으킨 선생님이 꽤나 좋아하셨던 비유여서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연애와 전공 양 쪽에서 가지고 있던 나름의 고민을 썼었고, 그 고민이 확장된 것이 향후 2~3년의 공부였으니 이걸 선견지명이라고 해야될까 미리 걱정하는 성격의 발로라고 해야할까.. 물론 아직도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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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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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회화에 매혹되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 쓴 글
Tumblr media
밤의 그림자를 그리다
로트렉은 캔버스화,수채화,드로잉에 판화와 포스터를 더해 평생 6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의 삶을 돌이켜보건대 그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한 작품을 그린 것으로 계산되어진다. 이러한 그의 ‘생산성’과 함께 그의 작품은 특정한 사조에 포함시키기가 애매한 특징을 가진다. 물론 동시대의 인상주의 화가들과 활발히 어울렸으며 후대의 표현주의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그의 그림을 설명하는 단서가 되기는 하지만 로트렉에게 보다 적절한 수식어는 천부적인 환쟁이일것이다. 그는 그를 매혹시키는 모든 것들을 ‘그렸고’ 그것을 그리는 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모든 방식을 흡수했다.
<춤추는 잔 아브릴>을 봐 보자. 이 그림엔 특별한 이야기가 없다. 춤추고 있는 물랭루즈의 무희 잔 아브릴을 그린 그림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이 그림이 갖고 있는 묘한 시점과 공간감이다. 로트렉은 어릴 적 당한 사고로 인해 키가152cm 밖에 안되는 신체적 결함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결함은 그를 타고난 아웃사이더이자 관찰자로 만들었다. 이 작품에도 역시 항상 남과 다른 시선-물리적, 정신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로트렉의 시점의 특이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과 함께 중심 인물의 하반신인 다리 부분의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많은 회화는 당연히 시점을 담고 있지만 이렇게 특정한 화가의 관찰 시점을 뚜렷하게 느낄 수 밖에 없게 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이러한 특이한 시점이 동반된 인물에 대한 관찰은 춤추는 무희의 불안하고 우울한 표정과 맞물려져 전체적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선사한다. 그 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잔 아브릴의 표정과 달리 원경에 위치한 두 인물의 세밀한 표정의 묘사는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는데, 그들이 실제로 그 자리에 위치해 있었을 거라는 ���실은 받아드리기 어렵지 않다.
여기서 나는 그의 작품들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어떤 의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본 것을 느끼는 대로 그리려는 강한 의지를 같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로트렉의 <잔 아브릴>은 단지 그 앞에서 춤을 추며 존재하던 잔 아브릴의 재현이 아니며, 동시에 온전히 그에게만 느껴지는 대로 표현되어진 잔 아브릴도 아니다. 그의 시대에는 마치 눈으로 본 것을 사진과 같이 캔버스로 옮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시대였는데 <잔 아브릴>은 그런 의미에서의 재현이 아니다. 그는 그가 본 것과 그에게 느껴지는 것을 분리하지 않았고 어쩌면 그의 눈에 보인 잔 아브릴은 이 그림의 잔 아브릴 그대로였을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은 다소 일반적인 서술로 느껴질 수 도 있다. 하지만 사물의 완전한 재현을 추구하던 시대와 완전한 표현을 추구하던 시대의 가운데에서 로트렉은 대상에 좀 더 솔직하게 다가가고 있는 화가인 것처럼 느껴진다. 즉 그는 그에게만 느껴지는 심상을 재현해낸 화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다루는 대상들이 거의 대부분 인물이라는 점은 그의 진실된 소박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이는 그의 작업 방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그는 작업의 현장성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업 방식을 야외에서 그리는 방식과 스튜디오에서 그리는 방식으로 나눈다면 그는 여기서도 중간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각각 야외에서 그리는 방식이 ‘빛’이라는 요소와 결부된 완전한 사물의 순간적 포착, 스튜디오에서 그리는 방식은 자신이 본 것을 기억에 의존하여 정밀하고 고도한 재현을 목표로 했다면, 그는 직접 보고 있는 그 순간 그 무희의 그림을 그렸다. 앞서 서술한 로트렉 특유의 재현 방식과 함께 이러한 특유의 작업 방식 – 작업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 이 그의 그림을 오늘날 까지 감상자로 하여금 생생함을 감각할 수 있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로트렉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공간감의 재편이다. <춤추는 잔 아브릴>의 전체적인 공간감은 거친 수직의 선들로 인해서 조성되고 있다. 이러한 수직적인 선들의 상승적인 배치와 함께 앞서 언급된 좌우로 배치된 있는 중심인물과 주변인물 두명의 크기 차이, 묘사 정도 차이는 급격하게 원경을 흐릿하게 만들고 감상자가 소실점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흡수적인 공간감과는 모순적으로 이 작품에선 어떤 평면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은 앞서 말한 수직의 선들이 갖고있는 색과 면적때문일 것이다. 수직의 선들은 거칠기는 하지만 얇은 다수의 선들이라기 보다는 전체적으로는 초록색 계열의 그리고 그림의 바닥에는 일부 노란색 계열이 포함된 색을 갖고 있다. 또한 이 선들은 사실 선이라기 보다는 면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정도로 두꺼운 붓질의 집합으로 표현되어 있다. 더하여 채색이 되어있지 않은 그림의 오른쪽 부분도 빈 캔버스의 하얀 느낌이 아니라 매체 특유의 재질감과 재질의 색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이 그림이 마분지에 그려졌다는 점에서 연유할 것이다. 즉 재료 자체가 색을 가지는 하나의 면으로서 역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몇가지의 색으로 채색된 면들의 집합으로서 구성되는 전체적인 배경은 이 그림이 다면을 가지는 3차원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여러 부분의 단면을 가지는 평면으로서 느껴지게 한다. 또한 그러한 배경의 채색이 춤추는 인물에게 가까워질 수록 더 진해지고 겹쳐지며 집중되는 점은 이 작품이 마치 인물에게만 포커스가 잡히고 배경이 아웃 포커스된 한 장의 스냅사진과 같이 느껴지는 강렬한 시각 경험을 주고 있다. 이러한 빨아들이는 듯한 공간감과 평면성의 기묘한 공존은 역설적으로 이 그림을 더욱 ‘현실감’있게 만든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시각 이미지들 , 특히 우리의 지각이 어떠한 인물의 강렬한 인상과 움직임에 몰두해 있다면 공간감은 그 인물에 의해 재편될 것이다. 즉 우리가 언제나 3차원으로 무언가를 인지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시각 이미지에 인위적인 소실점은 없다. 그것은 차라리 색의 연속으로 구분되어 있을 뿐이다. 가령 이 작품에서와 같이 무희가 본인의 코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면 그 무희를 중심으로는 강렬한 입체감을 느끼지만 그 배경은 희미하게 인지되고 거의 하나의 평면으로 느껴질 것이다. 로트렉은 이러한 그의 시각 경험을 최대한 진실되게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이 현재의 관람자들에게도 진실된 시각 경험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공간감의 재편과 맞물려 시각 경험의 ‘실재성’을 탐구한 로트렉은 또한 색과 조형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화가였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화장>은 그가 얼마나 색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이 전체적으로 색의 다양함이 두드러지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빛이 수직으로 닿는 면과 인물의 등 부분은 노란색 계통, 그림자가 생겨야 되는 면은 보라색 계통의 색으로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다. 특히 여인의 등의 표현은 색이 명암과 신체의 굴곡, 피부의 질감을 표현하면서 나아가 어떠한 드라마까지 느껴지게 한다. 따라서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색의 표현이 이러한 치밀한 빛과 색에 대한 연구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로트렉에게 한밤의 물랭루즈는 아마 색의 천국이었을 것이다. 색은 분명 빛이 제공하는 것이고 자연광 아래에서의 사물의 민낯만큼이나 빛이 왜곡과 교란을 수행하는 인공광 아래의 사물은 매력적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그의 작품에서 주가 되는 빛은 자연광이 아닌 화려한 조명이었고 그는 빛이 주는 다양한 가능성을 편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춤추는 잔 아브릴>에서도 화면을 감싸는 주된 빛과 춤추는 무희의 얼굴에 드리워진 빛은 녹색이다. 이는 의도적인 기괴한 색의 사용이 아닌 실제 무희의 얼굴에 드리워진 조명의 색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색의 표현 역시 그가 재편성한 인물에 의한 공간감의 영향 아래에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각 경험 그 자체이다.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아베트 길베르의 초상화를 그려 주며 그녀 얼굴에 드리워진 조명과 그림자를 너무나 충실하게 표현한 나머지 그녀와의 사이가 틀어졌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어떠한 미화나 이상화 보다는 인물과 이미지의 진지한 재현에 관심이 있었다.
<춤추는 잔 아브릴>에서 특유의 공간감과 색 이후로 관람자에게 느껴지는 쾌감은 그의 명쾌한 선의 사용이다. 로트렉의 선의 사용은 회화의 예비적 단계가 아닌 그의 정신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요소이다. 인물들은 명확한 윤곽선으로서 배경과 분리 되고 있다. 이 윤곽선을 조금 더 세밀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윤곽선은 무희의 움직임이 극대화되는 크로키적인 느낌을 만들고는 있지만 잔 터치가 극도로 절제되고 있고 오히려 뚜렷하고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대부분의 윤곽선은 길게 쓸고 내려오는 듯한 단 한번의 붓터치로 둥글게 표현되고 있다. 잔 터치가 절제되고 그 선이 너무나 명쾌하게 그려졌다는 것 때문에 대충 그렸다는 인상마저 주는 이러한 윤곽선의 표현은 확실히 인물이 솔직하게 표현된다는 느낌이 있으며 이상화가 억제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어린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그리는 그림들을 상상해보면 그의 윤곽선과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그의 관심은 인물, 더 정확히는 인물의 조형 그 자체의 포착으로 보이며, 그가 특히 움직이는 인물에 관심이 많았음은 이런 그의 관심사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단순화된 조형에 대한 관심은 후에 현대적인 감각의 포스터를 제작하는 데 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 로트렉의 선의 사용을 눈여겨 본 뒤 다시 그림을 전체적으로 보면 사실 배경의 채색과 인물의 옷 주름 등 많은 요소가 선적인 리듬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치마의 상체 부분의 짧은 흰색 선들과 속치마의 주름을 보여주는 검은색의 장식적인 터치들은 단순하면서도 정렬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이러한 극도의 단순성은 -치밀하고 복잡하게 표현된 대상이 관람자의 상상력의 작동를 억제하는 것과는 달리 - 외려 대상에 대한 심리적인 상상의 여지를 낳게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우리는 춤추는 잔 아브릴의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만을 보고 있지만 거기에서 그녀의 운동감과 우울함, 피로함 따위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선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어렸을 때 그렸던 말 등의 습작과 테크닉적인 연마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시기부터 그의 소묘에는 강렬한 운동감과 간결한 선을 사용하고 있으며, 사물의 개성을 포착하려고 하는 관찰력이 돋보인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존재한다. 로트렉이 화폭에 담은 인물들은 그림자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다만 태양광이 아닌 물랭루즈의 화려한 조명 밑의 그림자였다. 밤에 생기는 그림자였던 것이다. 로트렉은 이 그림자들에 매혹되어 생명력을 불어넣었고 그것은 스스로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 여기)
나에게 회화를 사랑하기란 참 어려운데, 어떠한 설명도 덧붙이기를 거부하는 그 자신만만함이 좀 비정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래도 관심 있는 척은 해야했고, 결국 찾은 것은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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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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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오정희의 새를 읽고 쓴 글
5000원에 팔리던 슬픔
[‘96년도 문화체육부 추천도서]
 동네 도서관에서 빌린 <새>의 첫 장에는 이런 딱지가 붙어있다. 책을 다 읽은 후 초판 발행연도를 들춰보니 1996년, 가격은 5000원. 1996년 사람들에게 5000원에 팔리던 슬픔은 무엇이었을까? 그때 나는 4살이었다. 동생은 태어난 지 1년쯤 되었을 것이고 부모님의 사랑을 동생과 공유해야 한다는 현실과 그것을 독차지 하고 싶다는 바람이 내 안에서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주공 아파트에서 할아��지, 할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할아버지는 노란 셔츠에 보잉 선글라스를 쓰고 나가 택시를 운전하셨다. 분명 행복한 시절이었다. 내 어린 시절에 대해 결핍이나 불안 같은 단어를 운운한다면 배부른 투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그 감각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있었을까? 4살짜리 아이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한울국민학교 5학년 박우미는 누가 보더라도 '행복'하지 않은 아이이다. 무책임한 부모는 아이를 세상에 버려두고 죄책감을 느낄 때만 찾아와 적당히 챙긴다. 동생 우일이는 울보인데 설상가상으로 사고를 당해 반병신이 된다. 이것들은 다 사실이고 우미는 이것을 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집요하게 우미의 눈을 통해서만 보여 지고, 우미의 입을 통해 쓰여 진다. 소설엔 아버지의 사정도 설명되지 않고, 우일이의 생각도 짐작될 뿐이다. 때때로 이 소설의 서술자가 정말 12살의 우미인지 헷갈리는 순간들이 있다. 더 잘 그려지는 것은 50대의 중년 여성이 12살 때의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 그때의 이야기를 일기처럼 적어나가는 모습이다. 담담한 서술이라고 말하면 간편하지만, 12살은 담담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할까? 행복은 정의되어질 수 없다. 우미에겐 우미 나름의 행복의 모습이 있다. 다만 어떤 잔상으로서. 우미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철저하게 고립되어있다. 새장 속에 갇힌 이씨 아저씨의 새처럼. 그런데 그 새는 자신이 갇혀 있는지 모른다. 그저 암막을 덮으면 밤이 되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벗 삼아 살아갈 뿐이다.그렇다면 인간은 서로의 새장의 암막을 벗겨주어야하는가. 태어나서 처음 맞이하는 빛에 눈이 멀지라도?
 문제는 그것이다. 어둠 속의 새는 행복과 불행에 둔감해 진다는 것. 새장에 닿는 한 줄기 빛은 그들에게 따뜻함일까, 안락한 어둠을 방해하는 성가심일까. 작가가 우미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것 같다. 다른 이의 행복과 불행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 것 그들의 뼛속까지 함께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연민은 없어져야 하는가. 누군가 연민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것이 인간에게 의지를 박탈하고 고통의 필요성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고귀하다는 감상을 품게 할 따름이라고. <새>에는 우미에게 연민을 느끼는 여러 군의 사람이 등장한다. 신기한건 우미도 누군가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것이다. 안집할머니의 딸에게 그랬고, 자신이 잡아먹은 새끼 벤 개에게 그랬고 무엇보다 우일에게 그랬다. 연민은 질박한 삶 사이에 낀 이끼와 같다. 어둡고 습한 곳에 저절로 생기는 것. 연민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인간은 나약하다. 그러므로 나약함을 인정하고 연대해야 한다. 작은 양옥집에 옹기종기 얽혀 사는 구질한 인생들. 그래서 이 소설은 나에게 비관주의자의 낙관주의로 읽힌다. 비관주의를 끝까지 밀어붙임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는 한 조각의 낙관주의.
 이 책이 아픔을 보여주는 방식은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아름다움이 아픔의 한 속성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아름다운 문장이 곳곳에 박혀있다. "문득 훅 스쳐가는 친숙한 냄새, 희미하게 떨리는 가녀린 부름을 들은 것 같아 뒤돌아보면 햇빛, 바람, 엷어진 그림자 같은 것이 있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우미의 문장이다. 작가는 빛과 어둠을 직조해서 심장을 콕콕 찌르는 아픔을 형상화한다. 우미의 눈에 비치는 섬광, 토토의 빛의 검. 우미가 보는 세상은 아마 많은 어둠 속에 약간의 빛이 흩어진 상태일 것이다. 그 빛을 찾아내어 응시하는 것, " 달이 밝은가? 희끄무레 떠 보이는 방안의 어둠 속에서도 밝고 환하고 풍성하게 빛나는 황금빛을 보는 순간 나는 눈을 꽉 감았다. 무서울 땐 언제나...... 눈을 감으면 그 깜깜함이 무서움을 가려주었다."
 엄마, 가난, 폭력적인 아버지, 성폭력의 뉘앙스가 보여주는 아픔이 무감각하도록 지긋지긋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들이 실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항상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보는 한국소설 특유의 시선에 어떤 의도가 있는건 아닌 지 의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떤 시대엔 어떤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분명 위로가 필요한 시대였으리라. ‘공감’에서 ‘아무것도 공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위로로. 날거나 날지 못하거나 새는 새인 것이다. 많은 의문들로 이어져온 글의 끝에 다만 딱 하나 기억나는 장면을 꼽으라면 벽돌을 쌓고 올라가 새장 안의 뿌연 거울을 닦아주던 우일이의 모습이다. <새>는 그 마음을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였을까.
(지금,여기)
우미와 우일이. 한국 문학사와 미시사에 드리운 지독한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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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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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썼던 소설비슷한 것
<환상의 빛> 김상현씨는 서울시 끝자락에 위치한 동사무소의 말단 공무원이다. 그는 서른 네살의 독신남성이며 근무하는 동사무소와는 조금 떨어진 지역의 오피스텔에 세 들어 살고 있다. 숙소에서 직장까지 마을버스로는 35분, 지하철로는 45분이 걸린다. 김상현씨는 평소에 걸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부러 환승 구간이 긴 지하철로 출근하는 편을 선호한다. 꽤 오랜 통근시간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고 오히려 직장 근처에 거주하는 동료들보다도 일찍 출근하는 편이라 직장 내 평판이 좋다. 그는 이러한 평판에 대해 자못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따라서 다음 주에 있을 승진 심사 발표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 날 아침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평소처럼 비타민 네 알을 입에 털어 넣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A,B,C,D. 그는 섭식을 하는 행위에 취미가 없으며 특히나 아침 식사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전에 교제하던 여자는 그를 ‘유령’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버는 돈의 삼분의 일을 먹는 데 쓰는 사람이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그녀를 잠시 떠올렸다.
오피스텔 1 층에는 상주하는 경비원이 한 명 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김상현씨는 찬 공기와 함께 빨려 드는 담배냄새를 견뎌내며 인사를 건넸다. “……” 경비원은 대답이 없었다. ‘인사를 못들었나?’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재미있는 기사라도 있나요?” 경비원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김상현씨는 굴욕감을 느꼈다. “이봐요, 당신은 나를. 무시할 권리가 없어요. 오히려 무시해도 괜찮은 쪽은 나라고” 경비원은 그를 힐끗 보더니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 “당신은 스스로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보지? 당신의 역할은 이 건물의거주자들을 불쾌하지 않게 하고 적당히 상냥한 태도로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거라고,소명의식을 가지라고! 신문? 당신 자신의 일에 집중해. 세상 걱정은 나중에 하지 그래?”
경비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김상현씨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동시에 한편으로 깊은 좌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주도권을 잡은 그 순간 바로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 자리에 일분 만 더 있으면 장이 꼬이고 끝내는 배가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급하게 오피스텔을 빠져나와 거리로 나왔다. 보통 그가 출근할 때 쯤의 거리는 텅 비어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저 거리의 끝자락에서 반짝하고 무언가가 빛났다. 김상현씨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그 빛을 따라갔다. 빛과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한참 동안 정처없이 빛을 따라갔다.
***
그녀는 가느다랗고 반짝거리는 팔뚝을 가진 아이였다. 그녀의 팔뚝은 빛을 튕겨내는 투명한 색이었다. 그녀는 들기도 버거워 보이는 카메라를 들고서 신입생인 우리들을 열심히 찍고 다녔다. 밤이 되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래에 맞춰 율동을 가르쳤다. 그 노래는 민주화 운동 시절 만들어진 노래라고 했다. 나는 소매를 걷어 올려 드러난 그녀의 팔목의 움직임과 살결의 질감을 관찰하느라 한 소절도 익히지 못했다. 금세 친해진 우리 둘은 밤새 술이라는 걸 마셨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레옹>을 좋아했고 나도 <레옹>을 좋아했다. 그렇게 꼬박 1 년을 붙어 다녔다. 우린 마치 레옹과 마틸다 같았는데 특이한 점은 내가 마틸다 쪽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나는 20년동안 말을 못하고 산 사람처럼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먹고 싶은 것이 많았다. 우리는 먹은 만큼 말했고 말한 만큼 먹었다. 그녀는 나로 인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음식이 있다는 걸 알았고 이렇게 많은 종류의 말할 거리가 있다는 걸 알았다. 두 번째 학기가 끝나고 항상 술을 마시던 주점 그 곳에서 그녀는 많이 울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1 년을 같이 보냈지만 그녀에게 벌어지는 일은 하나도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그 날로 자취를 감췄고 그 자리엔 무성한 말들이 남겨졌다. 겨울의 한 복판인 1 월 8 일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뒤 나는 철원으로 입대했다. 그 날짜를 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2 년 뒤 봄이었다. 지나칠 뻔도 하였으나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을 보고 단번에 그녀를 떠올렸다. 사실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녀의 외모는 많이 바뀌었다. 긴 머리는 짧게 잘렸고, 눈 화장은 짙어 졌으며 무엇보다 그 아름다운 팔목에 이상스런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정확히 두 번 눈이 마주쳤다. 시선의 교환은 있었으나 교환비는 성립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어처구니 없게도 너무나 많은 애정을 담은 시선을 보냈다. 반면 그녀는 더 호들갑스럽게 주변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크게 웃어댔다. 분명 대놓고 나를 무시하겠다는 목적을 가지는 일련의 행동이었다.
배신감을 느꼈다. 나는 분명 이것보다는 더 잘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한 건 그저 정당한 대우였다 . 이 나라에서는 1 시간 노동을 했을 때 최소한 2275 원을 받을 수 있다. 그게 바로 정당한 대우이다. 그녀를 갈구했던 지난 2 년의 시간이 굳은 살처럼 박혀있었다. 나는 무책임하게도 너무 많은 마음의 노동을 해버린걸까. 그 즈음의 나에겐 더 이상 어린아이같은 철없는 호기도 없었고 그렇다고 어른같은 옹골진 단단함도 없었다. 반면 2 년만에 보는 그녀는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 고 있는 것 같았다. 열등감을 느꼈다. 문득 그녀에게 다가가 묻고 싶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너일 수 있는지’
만약 그 순간 그녀가 내 존재를 정의해주지 않는 이상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아마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어쩌면 상처받고 싶은 거겠지. 그래도 고통스럽진 않을 거야. 그게 널 성장시켜 주지도 않을거야. 넌 끝까지 너를 내던질 용기는 없는 사람이니까’
나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눈물은 나지 않았고 오히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다만 뒤에서 그녀의 말이 들리는 듯 했다.
‘정말 한심하구나’
***
김상현씨가 하는 일은 불광동 주민의 전입,전출을 관리하는 일이다. 전입과 전출은 주소지 이전의 경우와 호적상의 이동의 경우가 있는데, 까다로운 것은 후자 쪽이다. 호적상의 이동은 혼인과 출생, 사망 등을 포함한다. 가령 사망 신고는 ‘사망을 안 날’을 기준으로 한달 안에 이행되어야 하며 그 기간을 경과했을 시 과태료를 조금 부과하게 된다. 사망한 뒤에 서류상에 남는 것은 많지 않다. 있는 집의 사람들에게는 상속이 주요 이슈가 될 것이고 반대로 없는 집 사람들에게는 채무가 주요 이슈가 될 것이다. 김상현씨의 업무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죽음’은 의외로 많은 일들을 간단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준다.
2 년쯤 되었다. 김상현씨의 할머니가 사망한 지. 그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어린 시절 할머니 손에 크기는 했으나 벌써 삼십여 년 전의 일일 뿐더러 할머니가 요양시설에 들어간 이후로는 거의 교류가 없다시피 했다. 아버지가 같이 방문할 것을 권할 때 한 번씩 들린 게 전부이다. 그는 그 날들을 굉장히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요양시설에 있는 할머니를 보고 오는 날에는 왜인지 자신이 좀 더 싫어졌다. 그는 서울에서 4 시간 떨어진 요양원에서 지내는 할머니와 자신이 매우 닮아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애써 그 방문을 의무적이고 무의미한 행위로 만들었으며 그 날들에 대한 기억도 간직하려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더구나 그의 할머니는 좀처럼 죽지 않았다. 요양원에서 12 년을 거뜬히 버티었으며 건강상태도 노인들 중에 제일이었다. 때때로 시설의 간호사들을 주도해 김장을 담그고 집에 보내기 까지 했다. 그의 어머니는 주책이라는 단어를 썼다. 하지만 세상은 정말 알 수가 없고 할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사망했다. 할머니는 떨어져 죽었다. 요양원의 이층 옥상에 정원을 조성하는 공사중이었는데 그 현장에서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할머니는 떨어져 죽었다.”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떨어짐 그 뿐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발인을 하는 내내 김상현씨는 떨어짐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떨어진 것인가, 발을 헛디뎌 떨어진 것인가. 아니 누가 밀어 떨어트렸을 수 도 있는 것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아무도 그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할머니가 그 이층에 올라가서 밑을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했고 그래서 그 변을 당한 거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김상현씨는 그 스스로도 서류로 수 없이 많은 죽음을 대해 온 사람이기에 알고있다. 분명 사망원인은 사망신고서류의 중요 기입란이다. 한 인간의 생애가 어떻게 끝이 났는지는 국가에서도 인정하는 꽤나 중요한 사안이란 말이다.
김상현씨는 그를 괴롭혀왔던 할머니를 마주하는 것이 싫었던 그 동질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좀 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
6 살의 나는 개봉동 유아스포츠단 소속이었다. 소속을 갖기엔 분명 어린 나이였지만, 젊은 부모가 바쁘고 돈의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어린이집 전 단계에서 유아스포츠단보다 좋은 소속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더구나 부모는 같이 사는 할머니에게 나의 온전한 소유권을 내주기를 싫어했다. 그것이 미안하기도 했을 것이고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유아스포츠단이기는 했지만 주로 하는 스포츠는 수영이었다. 나는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점심을 먹은 후 개봉동 공립수영장으로 할머니와 같이 걸어가곤 했다. 할머니는 걸음걸이가 느려서 6살의 내가 지루할 정도였으며 도중에 야쿠르트 아줌마, 쌀집 아저씨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 이야기의 화제는 언제나 나였으며 아줌마, 아저씨들은 내가 꼭 여자아이 같이 예쁘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이 너무나 싫어서 항상 할머니의 넓은 치마 뒤에 숨어있었다. 할머니와 수영장까지 가는 길이 멀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우리가 수업시간에 늦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수영장에 도착하면 나는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탈의실로 향하고 할머니는 나의 옷가지를 받아주기 위해 탈의실 밖에 서있었다.내가 수영복을 몇 번 잃어 버리자, 할머니는 내 수영복에 큰 유성사인펜으로 별을 세 개 그려주었다. 그건 나를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영복을 갈아 입고 깡마른 몸으로 탈의실 밖으로 나오면 할머니는 내게 수영모자를 씌워주었다. 그건 내가 아직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또한 우리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그렇게 탈의실 앞에서 헤어지면 할머니는 항상 수영 레인들이 한 눈에 보이는 수영장 이 층 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생각해 보면 할머니도같이 수영을 하거나, 딸려있는 목욕탕에서 사우나를 하거나, 아니면 본인만의 시간을 가졌을 법도 했는데 할머니의 선택은 그저 나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법은 배영이었다. 몸에 힘을 빼고 힘차게 팔을 휘젓다 보면 어느새 물소리는 잦아들고 물 위로 몸이 둥둥 떠있게 된다. 내 몸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저기 2 층에서 나를 내려다 보는 할머니가 보인다. 할머니는 마치 내가 그대로 물 밑으로 꺼져버릴까 걱정하는 듯이 나에게서 눈을 절대 떼지 않는다. 나는 수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표정까지 자세히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시절 할머니는 초록 빛깔의 진주귀걸이를 항상 하고 다녔었는데 나는 그 귀걸이 두 개가 내뿜는 빛을 등대삼아 유유히몸을 꼼지락대는 것이다. 빛이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보인다. 나는 한 없는 안정감을 느낀다.
*제목은 동명의 영화 제목에서 차용하였으나 내용은 관련이 없습니다.
(지금,여기)
살면서 조금씩 더 붙여가야할 이야기. 지금 혹시 이걸 읽어 주신 분이 계시다면, 감사합니다. 당신에게도 환상의 빛이 닿고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이건 소설비슷한 것이니까 이렇게 써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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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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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016년에 썼던 글
찍는다는 것
어린 시절 나의 집엔 카메라 한 대와 캠코더 한 대가 있었다. 카메라는 올림푸스사에서 나온 필름 카메라였는데 카메라 전원을 켤 때 나는 기계음이 좋아서 몇 번이고 껐다 켰다를 반복했던 기억이 있다. 이 카메라는 다 찍은 필름을 회수할 때 빛에 닿지 않게 필름통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조심스럽고도 핵심적인 작업이었다. 이것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흔히 ‘똑딱이’로 불리는 디지털식 컴팩트 카메라로 대체되었고 그 이후론 한 동안 카메라를 만지지 않았다. 아마 더 이상 장난감을 가지고 놀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똑딱이’가 장난감처럼 느껴졌던지. 캠코더에 대한 기억은 조금 더 희미하다. 부모님은 나의 돌잔치를 기록하기 위해 당시 100만원을 호가하던 삼성 캠코더를 구입하셨다. 8미리 테이프가 사용되었고 68만 화소수를 가졌다. 요즘 나오는 핸드폰 카메라들은 1000만 화소도 우스우니 귀여운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렇게 돌잔치 때부터 나를 기록한 테이프가 열두 개 정도 있으나 어느 순간부터 본 적이 없다. 얼마 전 베란다의 창고에서 오랜만에 이 캠코더를 발견해서 켜봤는데, 소리만 날 뿐 테이프 들어가는 곳이 열리지 않았다.
부모님은 나에게 셔터를 누르는 기쁨을 잘 허락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아빠가 그랬다. 아빠는 대학교 때 사진 동아리였다고 했는데 정갈하게 가족들이 사진의 정 가운데에 위치하는 사진을 찍으셨던 것 같다. 반면 내가 찍은 사진들은 대부분 가족들의 목이 잘리거나 사진의 모서리에서 위태롭게 모여 있었다. 당연히 아빠는 필름 낭비라고 생각하셨을 테고 카메라는 내 목에 메고 다니되 찍는 순간에는 내 손을 떠났다. 아마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무언가를 찍는 다는 행위가 꽤나 신성하고 중요한 어른의 행위라고 느껴졌던 것이.
이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소년과 소녀가 우연히 카메라를 주워, 무엇을 찍을 지에 대해 대화를 한다. 소녀는 엄마를, 소년은 바다를 찍기로 결심을 하고 카메라를 들고 떠난다. 하지만 그들이 카메라의 뷰파인더에서 본 것은 엄마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다. 내 생각은 이랬다. 우리가 찍는 것은 결국 우리가 ‘보고 싶은 것’과 ‘봐야만 하는 것’ 사이의 어디쯤에 위치한 것이 아닐까. 현재 카메라의 조상은 어두컴컴한 방에 작디작은 구멍을 뚫고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통해 세상의 풍경을 보는 데서 시작했다. 좀 더 세상을 정확히 그리고 싶었던 화가들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하지만 그 상의 풍경은 세상을 뒤집어 놓은 형태였다. 좀 더 정확히 보고 싶었던 노력의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환영이었다. 쓰리디의 시대를 빠르게 지나 포디의 시대가, 가상현실의 세계가 도래한다. 무언가를 찍는 다는 것의 의미가 어쩌면 퇴색하고 있는 시대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카메라가 단순한 복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 고유의 물성을 지닌 채 살아 숨 쉰다. 무엇을 찍을 것인지, 아니 찍는 다는 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게는 평생 고민해야할 숙제이다.
무언가를 찍는다는 것은 시간을 붙잡는 행위일까? 흐르는 강물의 한 지점을 퍼내는 행위라고 비유하면 적절할까. 하지만 퍼낸 그 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물이 아닌 무엇이 된다. 따라서 붙잡는 다는 것은 환상이며 그 환상을 품은 내 자신이 남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찍기는 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는 아니다. 렌즈의 뒤에서 앞으로 향하는 행위가 아니란 뜻이다. 이러한 특성에 대해 독일의 영화감독 빔 벤더스는 이렇게 비유했다.
        사냥꾼이 눈 '앞'의 맹수를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듯.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 반동으로 몸이 '뒤'로 밀려나듯.
   사진을 찍는 사람 역시 셔터를 누르는 순간, '뒤'로 튕겨 나간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 말이다.
     그래서 찍기인 결과물인 사진 나아가 영상은 항상 두 가지 상을 담고 있다. 명확하게 보이는 찍혀진 피사체와 심연속의 희미한 기억으로서 존재하는 ‘그 뒤에 있던 것’. 바로 촬영을 하는 순간 렌즈 뒤에 있던 자신의 상이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사진학의 전설적인 인물인 롤랑 바르트는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자신의 일화를 하나 풀어낸다. 어느 날 그는 사진 한 장을 보게 되는데 특별히 잘 찍혀진 사진도 아니었고 의미 있는 피사체를 담은 사진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때 그는 바늘로 심장을 쿡 찌르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사진은 자신의 돌아가신 어머니가 찍은 사진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이를 ‘푼크툼’ 이라 이름 붙인다. ‘푼크툼’ : 찌름, 또는 그 찌름으로 생긴 작은 구멍. 그 사진을 보고 심장에 작은 구멍이 나는 사람은 아마 전 세계에 롤랑 바르트 한 명일 것이다. 그는 이런 점에서 한 장의 사진이 가지는 특수성과 어떤 기억을 환기 시켜주는 특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것 또한 물론 흥미로운 지점이다. 하지만 자신의 특별한 순간을 사진에 남기고 그것을 환기하는 데 매우 익숙한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새로운 내용이 아닐 수 있다. 나는 그것보다 그 사진에 바란 빛으로 남았을 어머니의 흔적에 더 관심이 갔다. 바로 여기에서 찍기는 시작한다. 나라는 사람이 온전히 자신도 모르는 형태로 담기는 것. 영화 <곡성>의 아쿠-마가 그의 영혼을 조각내는 행위로서 카메라를 들었다는 것이 의미심장해지는 이유이다.
  -그렇지만 시간은 계속 흐른다. 무언가를 찍을수록 거듭 증명되는 것은 시간은 결국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찍기의 결과물은 이 명제에 대한 개별적인 실패의 예시이다.
-우리가 무한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해준다. 핏덩어리인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는 것은 내가 얼마나 시간에 매인 존재인지 상기시켜준다.이 실패는 아름답다.  이제는 그 사진을 찍는 순간의 아빠를 느낄 수 있다. 실패의 선물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이 실패가 실패로 끝나지 않는 이유이다. 친구와 떠난 여행에서 장난을 치다가 잘못 찍힌 사진을 인화해서 오래 간직하고 있다. 실패란 이름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이다.  
영화는 조금 더 복잡해진다. 사진과 사진 사이에서 이야기가 태어났고, 그 자체로 시간을 지탱하고 있는 매체가 되었으며 소리가 더해졌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다 걷어내고 나면 순수하게 남는 것은 결국 무엇을 찍을 것인가에 도달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화가 세상의 오해와는 다르게 가장 개인적인 예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카메라를 1cm 옮길지 말지 결정하는 것 그것이 이 매체의 정수이다. 이것에 대한 자기 정립 없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찍는 사람일 것이다. 아니 이것도 아마 확신할 수 없다. 지금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찍는 행위가 나의 일부를 떼어내어 피사체와 나누는 양방향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내가 믿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찍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찍혀진 결과물이 내게 건네는 말들을 듣고 싶다.  
 찍는다는 것은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했다.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조금은 섬뜩한 가정으로 글을 마치고 싶다. 일생동안 찍을 수 있는 그러므로 나눌 수 있는 나의 영혼의 정량이 정해져있다면 어떨까. 찍는다는 것이 어쩌면 교만하고 무례한 인간의 반항행위여서 신이 분노하였다면. 조금 더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찍고 싶다.
(지금,여기)
다시 읽으니 별로 재미있는 글은 아니다. 내가 미학과 학생이라는 걸 티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강물을 퍼낸다는 비유는 썩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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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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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서 2016년 겨울로 넘어갈 때 끄적였던 것들.
1. '갓 태어난 달걀' 나와 오랜 시간 간헐적으로 봐왔으며 최근에는 나에 대해 본인의 환상을 뒤집어씌운 한 아이가 늘 그렇듯이 그다지 큰 의미없이 나에게 한 말. 뭐지 근데 도대체
달걀이라면 아브락삭스 그런건가. 갓 태어났으면 뜨끈하고 끈적거릴거 같은데.
밖에서 깨면 후라이 안에서 깨면 생명?(삼선형st)
2. 제발제발제발제발 쓸데없이 조급하지말자 병이야 병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인생이 기승전결로 쭉쭉 전개 되는게 아니란 말이야 그 사이엔 지질하고도 지질한 시간들이 필요하단 말이야. 니 인생 사분지 일을 살 동안 아직도 그걸 모르니
많이 보고 읽고 느끼고 보고 읽고 느끼고 보고 읽고 느끼고 보고 읽고 느끼고 사랑하자사랑하자
3. '김창완 밴드' - 시간
중이병도 평생하면 세상이 천재라고 불러준다
(비꼼1도 없이 리스펙)
최고의 재능은 어디에 재능이 있는지 아는것 두번째는 그것이 재능이라고 철썩같이 믿는것
INFP형 사람은 최악의 상황이나 악한 사람에게서도 좋은 면만을 바라보며 긍정적이고 더 나은 상황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진정한 이상주의자입니다. 간혹 침착하고 내성적이며 심지어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처럼 비쳐지기도 하지만, 이들 안에는 불만 지피면 활활 타오를 수 있는 열정의 불꽃이 숨어있습니다. 인구의 대략 4%를 차지하는 이들은 간혹 사람들의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일단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이들 안에 내재한 충만한 즐거움과 넘치는 영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교형(NF) 사람들과 비슷한 성격적 자질을 포함하고 있는 이들은 논리(분석형)나 인생이 주는 흥미로움(탐험가형), 혹은 인생의 실용적(관리자형)인 부분이 아닌 그들 나름의 원리원칙에 근거하여 사고하고 행동합니다. 더욱이 성취에 따르는 보상이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 생길 수 있는 불이익 여부에 상관없이 순수한 의도로 인생의 아름다움이나 명예 그리고 도덕적 양심과 미덕을 좇으며 나름의 인생을 설계해 나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본인들의 생각과 행동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는 지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들의 생각 뒤에 숨은 동기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하는데, 이는 자칫 이들을 외톨이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금이라고 해서 다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헤매고 다니는 자가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오래되었어도 강한 것은 시들지 않으며, 깊게 뻗은 뿌리에는 서리가 닿지 않습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
INFP형 사람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적절한 은유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생각을 상징화하여 다른 이들과 깊이 있는 의사소통을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직관적인 성향은 이들로 하여금 더 창의적인 일에 몰두하게 합니다. 이를 비춰보면 여러 유명 시인이나 작가, 그리고 배우가 이 성격 유형에 속하는 것이 그리 놀랍지만은 않습니다. INFP형 사람에게 있어 본인 자신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들은 종종 작품에 자신을 투영시켜 세상을 탐구하기도 합니다.
자기표현에 특출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이 유형의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고찰이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을 은유적인 방법을 사용하거나 작품 속 허구 인물을 등장시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또한 뛰어난 언어적 소질을 보이는데 이는 대부분의 외교형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된 재능으로, 비단 모국어뿐 아니라 제2외국어(심지어는 제3외국어까지!)를 습득하는 데에까지 재능을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외교형 사람들에게서 공통으로 관찰되는 이들의 의사소통 능력은 사람들 간의 화합을 도모하며, 그들이 목표한 바를 달성하기 위해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줍니다.
다수가 아닌 소수에게 보이는 깊은 관심
이들의 사촌격 성격 유형이 가지는 외향적 성격과 달리, INFP형에 속하는 사람은 소수의 몇몇, 그리고 의미 있다고 판단되는 한 가지 목표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등 한 번에 많은 일을 달성하려 하지 않습니다. 만일 모든 사회악을 근절하는 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이들의 에너지는 빛을 잃고 좌절감을 맛보거나 처한 상황에 압도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는 밝은 장밋빛 미래를 함께 꿈꾸며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기도 합니다.
자칫하면 INFP형 사람은 선(善)을 위해 하던 행위를 갑자기 멈추거나 하루하루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일조차 등한시할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종종 깊은 생각의 나락으로 자신을 내몰아 학문적 가설 혹은 철학에 심취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지켜보지 않으면 이들은 연락을 끊고 '은둔자' 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추후 이들을 현실 밖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기까지 주위 사람의 많은 에너지와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다행인 것은 깊은 나락에 빠져 있던 이들도 봄이 오면 다시금 봉오리를 피우는 꽃과 같이 이들의 애정 어린 마음과 창의적인 생각, 이타주의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생각 역시 제자리로 돌아와 자신뿐 아니라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뿌듯함에 미소 짓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사실적 논리나 현실적인 유용성의 관점이 아닌 넘치는 영감과 인간애, 친절함, 그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지금,여기)
전역을 했다. 재능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과, 잘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최소한 알고 싶었다. 결론은 없고, 없을 것이고 남은 것은 ‘한 치 앞도 모르는게 인생’ 이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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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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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여름에 끄적였던 것들을 모아보았다
미운것들
1.  그토록 감추고 싶은 나의 치부가 남에게서 보일 때 그 사람이 정말 미워진다.
2. 부조리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기꺼이 그 희생양을 자처하고 맹목적인 헌신을 하는 자는
말리는 시누이처럼 밉지만 꽤나 눈물겨운 구석이 있다.
도덕적으로 경지에 이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을 볼 때 어떤 태도를 취할까?
우린 모두 부족하기 때문에 넓은마음으로 포용?
아니면 좋은 점만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아예 보이지 않을까?
어쨋든 남에게 엄격하고 나에겐 관대한 지금의 내 모습은 별로다
1. 슈퍼문 1년에 한번씩 달이 지구와 가장 가까워 지는 때라고 한다.
떨어졌다 붙었다 서로 공전을 반복하는 두 별이 오늘 밤 오랜 회포를 풀기를 바란다.
좋은 생일 선물을 받았다.
2. 마로가 아프다. 머리 굵어지고 나에게 온전히 그 아픔이 전해질 만큼 가까운 누군가가 아픈건 처음인 것 같다.
부디 오래오래 곁에서 건강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행복할 수 있을때 까지만 건강히 살았으면 좋겠다.
3. 지키지 못할 약속은 서로에게 실망감을 줄 뿐이다.
약속을 하는 그 순간의 호기만을 추구하는 건 성숙한 행동이 아닌것 같다.
1. 달 밑에서 친구랑 통화하며 술약속을 하는 것 만큼 마음을 배부르게 하는 건 없다.
2. 뭔가를 해내도 해낼 거라 믿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도 나를 그렇게 봐준다.
그 친구와 나누는 앞날은 때로는 기만적일 정도로 딜콤한 장밋빛이다.
불씨가 꺼져가는 청소년기의 환상을 잠시나마 다시 지펴내는 그 대화가 좋다.
같이 쓸데없는 짓 하고, 같이 졸고, 같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은 시커먼 두 소년은 십년 뒤에 어떤 모습일까?
3. 아이들은 누군가를 '심각하게' 증오하고 저주하고 미워한다.
 어른들도 누군가를 증오하고 저주하고 미워하며 뒷담화한다.
1. 1000m를 낙하한 빗방울이 내 팔에 착지하는 느낌이 좋다.
문제는 빗소리와 비만오면 이상해지는 사람들이다.
2. 규칙적인 빗소리와 눅눅해서 무거워진 공기는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한다.
이때 가장 좋은 해결책은 내면으로 깊이 침잠해서 오랜만에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일시적인 '정'의 상태를 우울이라 이름 붙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더 말을 걸고 더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한다.
비가 오는 날은 만남을 자제하고 방에서 노래를 크게 틀고 맥주 한 잔 한뒤 샤워하고 자는게 최고다.
누군가는 우린 서로에게 기대를 많이 하지 읺는 편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깨질 기대와 환상을 많이 품고 사는 것도 무뎌지면 정신 건강에 썩 나쁘지는 않다.
난 아주 영악한 아이였다. 사랑받는 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어디서든 예쁨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열살짜리였다. '나 이렇게 반짝여요!' 라고 외치면 세상은 너무도 아름다운 무언갈 발견한 것 처럼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그 쓰다듬 보다도 세상이 나의 외침에 응답한다는 자체에 중독되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응답받고 싶고 딱 그 만큼만 영악하기 때문에 순수하다.
(지금,여기)
좀 많이 심심했던 것 같고, 그런데 또 길게 쓸 에너지는 없었던 것 같네. 아포리즘에 심취해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이런 것까지 모아야 하나 싶던 찰나에 마지막에 있는 몇 문장이 참 좋아하는 것들이라 옮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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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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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태치먼트를 보고 2014년 여름에 쓴 글
디태치먼트.Detachment.2011.토니 케이
누군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애원하듯이 날 쳐다본다.
난 그를 꼭 안아주며 모든 게 다 잘 될거라고 말한다.
이제 두 사람은 눈물의 포옹을 하고 앞으로 어떤 어려움도 함께 헤쳐나갈 것 처럼 보인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하지만 고통의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아픔을 나눈다'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를 던진다'는 것이 오히려 주제넘은 행동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밀쳐내면서 나도 힘들다고, 혼자 이겨내야 한다고, 강해져야 한다고 말해야 할까?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배경은 학교, 집, 밤거리, 병원이다.
어디서나 기댈 곳은 없고 서로의 고통에 무지하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게 상처만 주게 되는 공간이다.
특히 주인공의 직업이 선생님이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직업인으로서 선생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학교란 그들에겐 하나의 직장이고, 선생님이란 것도 하나의 직업인데 왜 나는 나를 거쳐왔던 수많은 선생들에게 특별한 사명감을 요구하고, 그들을 무시하고 마치 감정이 없는 존재처럼 치부했던 것일까.
수많은 직장인들처럼 그들도 고민거리를 가진 한 사람인데 말이다.
단지 학교라는 공간에서 나는 철이 덜 든 아이였고 그 사람들은 어른이였다는 이유라면 너무 가혹하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학교와 나아가 고통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제 각기 다른 방법을 택한다.
약에 의지하기도 하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포옹을 애걸하기도 하고 그러다 끝내는
일시적인 문제들의 영구적인 해결방법이라며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헨리의 선택은 일종의 거리두기였다. 어차피 우린 다 X된 상태이므로 악착같이 견뎌내는 수 밖에 없다고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 짊어지기엔 벅차다고
하지만 정말 이 세상이 엿 같고  한 치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때야 말로 서로에 대한 위로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영화에선 시종일관 단조의 노래가 깔리고 흐릿한 포커스의 화면도 혼돈스럽게 흔들거린다.
(밝은 느낌을 주는 장면은 다 합쳐서 오분도 안될 것 같다)
그럼에도 영화가 끝날 때 그렇게 우울하지 않은 이유는 헨리의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눈망울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애드리안 브로디는 이 영화로 나에게 믿고 보는 배우가 되었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살바도르 달리로 나왔을 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드미트리로 나왔을 때, 인상깊지만 뭔가 맞지않은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였는데 너무 우울한 눈망울 때문인 것 같다.
진짜 아픔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이다
(지금,여기)
어떤 영화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살면서 딱 한 번 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토니 케이가 이 영화를 만들 때 환갑 즈음이었다는 사실을 2014년 그 당시에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때는 정말 엄청난 노장 감독이 만들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 영화가 환갑의 감각이라고??
Detachment ; a feeling of not being involved in a situation ; 무심함, 거리를 둠
나에게 디태치먼트라는 영어 단어는 그냥 이 영화 그 뿐이어서, 뭔 뜻인지 맨날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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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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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끄적였던 것들 (이라고만 쓰면 왠지 다시는 태국에 못 갈거 같아서) , 2016년 2월에 태국에서 끄적였던 것들
수면 아래
코가 그 속으로 잠기는 순간 모든 인간적인 것들은 사라진다.
오직 존재의 이유가 그것 뿐인 양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데 집중한다.
목적 없이 유영하기.
가장 생존에 집중하는 순간은
가장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얼마나 춥고 무서웠을까
수면 위
폭죽소리의 환희와 시끌벅적한 삶의 기력
불안의 내음.
한 조각 배의 갑판이 제공하는 안일한 평화
여기 왔다 갔다 하는 게 다이빙인데 재밌었어
2016.2.14 Krabi life of nothing 닭이 울면 잠에서 깬다 간단히 아침을 해먹고 샤워를 한다 책을 조금 읽고 글자를 조금 끄적인다 해변으로 가서 바람을 쐬다, 저녁을 사먹는다 수끼야끼에 생각보다 해산물이 많아 기분이 좋았고 바나나쉐이크를 먹을 지 파인애플쉐이크를 먹을 지 조금 고민했다 아침거리를 사서 돌아온다 저녁 일곱 시 이후로는 너무 어두워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다 가족에게 안부를 보낸다 별이 많다 내일도 같을 것이다
(지금,여기)
사실 너무 더우면 눕고 싶고, 누우면 읽거나 쓰는 건 잘 안된다. 
내 생애 가장 사치스럽게 나태했던 날들. 솔직히 죽으면 끄라비에 뿌려지고 싶다는 생각도 몇 번 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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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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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을 보고 2014년 여름에 쓴 글
인사이드 르윈.Inside Llewyn Davis.2013.코엔 형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들 한다
포크송은 계속 불려 질 것이고 소파를 전전하던 르윈 데이비스의 삶은 오래 기억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기억되는 것만이 생명력을 가진것이냐 하면 그렇진 않다.
르윈은 누구보다 인생을 '살았다'. 그것은 기억되든 잊혀지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구나 고양이 한 마리 쯤은 마음 속에 품고 다니기 마련이다.
언제, 어떻게 비집고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졸졸 따라다니는 게 싫지만은 않다.
그러나 때론 성가시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버리기도 하고 아니면 스스로 떠나버리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찾게 되고 보고싶어 진다.
한조각 마음속의 꿈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각자의 인생을 재단하거나 비판할 수는 없다. 다만 코엔 형제는 끝까지 고양이를 지키려한 르윈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 같다.
르윈은 자신을 재워주고, 먹여주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들이 한 곡 청할 때는 이상한 모욕감을
느끼고 자존심이 상한다. 그런데 자신을 있는 듯 없는 듯 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한 껏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른다. 정말 노래를 부르고 싶을 때 부르는 르윈의 모습이 비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진실하게 보였다.
코엔 형제는 정말이지 대단하다. 테크닉의 천재는 아니지만 이야기의 천재이다.
정공법의 평범한 화면들로 만들어내는 비범한 씬들이 놀랍다.
(이 영화는 르윈이 시종일관 'Gaslight'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듯이 조명을 쓰고 있다.
진부하기는 하지만 내 인생이란 무대의 주인공은 나라는 듯이!)
그리고 무엇보다 단단하게 짜여진 느낌이 영화처음부터 끝까지 신뢰할 수 있게 만든다.
꼭 한 두명씩 등장하는 기괴하면서도 비틀린 위트가있는 캐릭터들이 양념처럼 영화에 생기를 더해준다.
<파고>에서 제리의 장인이나, 마지의 옛 남자친구가 그랬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모스의 아내나,. 토미 리 존스의 조수가 그랬다.
이 영화에서도  시카고로의 짧은 여행의 동반자인 롤랜드 터너나 조니 파이브가 영화를 더 깊고 넓게  만
들어 준 것 같다. 그리고 르윈이 합주에서 만나 하룻밤 신세지는  알 코디가 나오는 부분은 끅끅대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알 코디의 거실 탁자 밑에 르윈이 자신의 엘피 박스를 넣다가 역시 알이 자체 처분한 엘피 박스가 나오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애정하는 장면이다. 십 초 안에 담긴 영화의 정수!)
잡다한 설명 없이 말그대로 형식 스스로가 '인생은 반복되며 계속된다' 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좋았다.
어찌보면 비루하고 감정적으로 빠질 수 있는 '이름없는 뮤지션의 생애'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렇게
담백한 영화를 만들어내다니!  
'More , more, More' cried the bed,
'talk to me more'
oh bed that taked the weight of the world
All the last dreams laid on you
oh bed that grows no hair
that cannot be fucked
or can be fucked
oh, bed crumbs of all ages spilled on you
oh, bed
-the valet , Jhoony Five
(지금,여기)
그 후로 두세 번 더 봤고. 가장 최근에는 엄마랑 이틀에 걸쳐서 봤다.
조만간 조금 덧붙여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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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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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태국 호스텔에서 네이버 스포츠 보다가 썼던 글
1.
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스포츠를 좋아하고 잘 알고 있다. 그 시작은 일간지의 스포츠면에서 부터였다. 어떤 스포츠를 보거나 한 것이 시작이 아니라 글로  옮겨진 후의 것에 대한 매료가 그 시작인 것이다. 열한살 쯤에 집에 우유와 함께 배달되던 조선일보 중앙일보 따위를 들쳐보면 따분하고 칙칙한 말들 뿐인데 16에서 17면 즈음에 있는 스포츠면부터는 별천지가 시작되는 것이다. 말그대로 별천지이다. 이 2면 사이에는 패배가 있을 지언정 절망은 없다. 가령 '현대 유니콘스 역대 한 경기 최다 점수(16점차) 역전승!' '서울대 야구부 99연패만에 1승 수확!' 와우 이 만화영화같은 수사들에 어떻게 매료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나의 '스포츠면'에 대한 사랑은 시작되었다. 스포츠면에 등장하는 세상 모든 스포츠의 '화려한 기록'들과 '승리' 그리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스포츠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정말 많은 강자들이 존재한다. 가령 나는 우리나라 정구 최강팀이 대구 달성군청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였다.(정구의 규칙은 모른다 정구에 할애된 지면은 많지 않다) 토요일은 스포츠면이 1면으로 줄어서 슬픈 날 이였다.
2.
스포츠면에 빠진 나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다음 단계인 스탯(기록)의 아름다움에 빠지게 되었다. 스탯의 묘미는 갱신과 누적인데 이번 시즌에 환상적인 스탯을 찍은(스탯은 기록지에 '찍힌다') 선수도 다음 시즌에는 평범한 스탯의 선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선수는 전 시즌의 영광을 지닌 선수이다. 아마 그 즈음에 나의 장래희망이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였던 것도 이러한 시간이 가져오는 서사에 대한 매료가 한 몫했을 것이다. 나는 말 그대로 모든 종류의 스탯들을 미친듯이 외우고 다녔다. 아니 외우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마치 코흘리개가 공룡이름 외우듯이, 여자애들이 자기네 '오빠' 들의 스케줄표 외우듯이 그렇게 외워진 것이다. 아마 내 인생 최초의 기억되는 열정이다. 신문의 스포츠 면으로는 부족해 엄마를 졸라 추가적으로 축구 잡지 하나와 농구 잡지 하나를 구독했다. (그렇다고 선수들의 브로마이드를 오려서 방 벽에 붙여 놓는 타입은 절대 아니였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이것은 남자아이들의 세계에서 쏠쏠한 권력이기도 하였다. 야구 좋아하는 애들 앞에서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방어율과 타율따위를 읊고 농구 좋아하는 애들 앞에서는 nba선수들의 평균득점과 평균어시스트 따위를 읊고.. 이 얼마나 르네상스적인 인간인가.
당시 나는 책상에서 딴 생각을 하거나 잠이 오지 않을 때 나를 한 명의 선수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메이저리그의 혜성 같이 등장한 신인, 어느 날은 유럽의 변방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낸 초특급 유망주. 과정은 거의 비슷했던 것 같다.혜성같은 등장과 짧은 적응기, 그 다음은 아름다운 스탯들의 향연.. 그런데 항상 끝을 맺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슈퍼스타도 언젠간 추락하고 은퇴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지만 그것을 싫어했던 나는 거의 전성기까지만을 상상했던 것 같다.
이러한 열정이 시들해질 때 쯤에 우리 집은 신문을 끊었고, 나는 그냥 뛰어노는게 더 좋아졌고(잠깐 락의 역사로 빠지기도 하였으며), 내 프로야구 응원팀이던 현대 유니콘스의 구단매각과 급추락이 있었고, 김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었던 것 같다. 승리와 아름다운 스탯이 더 이상 나를 흥분시키지 않았다.
p.s1 아직 옛버릇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서 커리의 평균득점이 29점에서 30점을 왔다갔다할때 심장이 벌렁거리긴 한다.
p.s2 지금의 나의 삶도 잠깐의 매혹과 광기로 이어지고 있는건 아닌지 가끔 두렵다. 아니 어쩌면 내 삶은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것인지가 궁금하다. 매혹과 광기에서 또다른 매혹과 광기로.
(지금,여기)
요즘은 좀 덜 들락 거려. 매혹과 광기도 많이 줄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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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inme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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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구슬을 읽고, 어제 쓴 글
그 쪽과 여기 사이
나는 1992년 대한민국 인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서울 토박이이고, 어머니는 전라도에서 상경해 서울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전형적인 공교육과, 사교육을 병행하던 중, 17살이 되어 자의로 ‘집’을 떠나 기숙사가 딸려있는 전주의 한 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내가 떠나간 나의 ‘집’은 그 후로 4~5번의 이사를 다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부터 지독한 나의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전주의 기숙사에서, 재수생 시절을 보낸 천호동의 고시원으로, 대학교 신입생 시절 신도림의 4평 원룸으로, 입대를 하고 나서는 8명과 함께 생활한 병영으로, 그리고 전역 후 다시 관악구의 자취방으로. 17살 때부터 저에겐 ‘집’이 없었습니다. 물론 어느 시점에나, 어느 곳엔가 분명히 어머니가 있었고, 아버지가 있었고, 동생이 있었고, 귀여운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지만, 그 곳이 나의 ‘집’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종종 생각합니다. 17살에 내가 ‘집’을 떠나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일까. 가족을 좀 더 사랑하게 되었을까? 혹은 밤 거리를 뛰어다니는 길 고양이를 볼 때 마음이 덜 아프게 되었을까? 그런데 <파친코 구슬>을 보며 생각을 조금 고쳐 먹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딘가로부터 떠나가고 있으며, 또 언제나 누군가를 어딘가로 떠나 보내고 있구나.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둔 가정 환경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호텔방을 개조한 집에서 사라진 남편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겠죠. 따지고 보면 참으로 간단한 섭리입니다. 일단 슬롯 머신에서 구슬이 튀어나간 후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으니까요. 그저 숨죽이며 눈으로 구슬을 쫓을 뿐입니다. 장애물에 부딪히기도 하고, 때론 볼썽사납게 이리저리 튀기도 하는 구슬을 말이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구분된다면 마음은 편해지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어딘가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많은 해답을 줄 수는 없기 때문에 더 많은 것들을 원하는 인간들의 세계는 구슬들의 세계 ‘샤이니’처럼 평화로울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출발한 그 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내가 부딪히고 있는 지금 이 장애물은 도대체 무엇인가. 출발했을 때와 지금, 그 곳과 이 곳. 우리를 항상 혼란에 빠트리는 수수께끼와 같은 질문들입니다.
 인간들의 세계는 땅 위에 있습니다. 물 속도 아니고, 하늘 위 어디 즈음도 아니고, 땅 위에 있다는 이 명확한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결정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라고 가정해본다면, 그 차이는 더욱 여실히 드러납니다. 우리의 세계관과 공간감은 지금의 그 것 과는 차원이 다르겠죠. 우리 인간들은 제각기 딛고 살아갈 한 조각 땅이 필요하며, 그 땅을 국가라는 이름으로, 도시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모자라 다시 동과 호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해 불만을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날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탓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요. 이렇게 재편된 세계는 마치, 인간은 도쿄에 있으면서 동시에 파리에 있을 수는 없으며, 한국 사람이면서 동시에 일본 사람일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가와 도시의 이름들에는 어떤 비애감과 향수를 동시에 자아내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도쿄에도 서울만큼이나 복잡한 지하철 노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신이 대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알 것입니다. 평생 단 한번도 가지 않을 지하철역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그 복잡한 지하철들은 매일 같이, 도시에 깔려있는 서글픔을 이리저리 열심히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클레르도 나포리에서 시나가와 역까지를 부지런히 오고 갑니다. 그 어느 쪽에서도 그녀는 완전한 소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포리에서는 언어와 세대 그리고 가족이라는 고집스러운 벽에 부딪히고, 시나가와 역에서 또한 언어와 세대 그리고 타인이라는 낯선 벽에 부딪힙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이 출발한 – 혹은 출발되어진 – 그 곳과 지금의 이 곳을 더듬기 위해 매년 여름이면 일본을 찾는 것일 겁니다. 이쯤 되면 클레르는 분명 가장 고군분투하고 있는 구슬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그녀는 분명 구슬로서 자신의 숙명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쁜 새끼”와 프랑스어 가정교사 사이에서 그녀는 어떤 역할놀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책에서 두 세계 속의 그녀는 균형감 있게 다루어 지고 있지만, 저에게 더 와 닿는 쪽은 미에코와의 시간들이었습니다. 클레르가 “예쁜 새끼”일 때 그것은 그녀의 시작보다도 이전의 과거를 환기시킨다면, 클레르가 미에코를 마주할 때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그래서 ‘미래형인 과거’를 환기시킨다고나 할까요. 클레르와 - 그리고 또 작가인 엘리자와 - 또래인 저로서는 아직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매력적인가 봅니다. 미에코의 어머니는 자신의 고향을 스위스로 생각하며, 아버지는 죽기 직전 사슴처럼 사라져버렸죠. 그녀는 아마 몇 년 후 스위스로 보내질 것입니다. 동시에 그 전까지 지금 살고 있는 시나가와 역을 떠날 생각은 없죠. ��에코가 스위스로 떠나고 그 곳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사랑을 하고, 삶의 행복과 고통을 어렴풋이 알 때쯤 다시 도쿄로 돌아온다면 그녀는 영락없이 또 다른 클레르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에코는 클레르에게 ‘미래형인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미에코는 클레르를 보며 그 반대로 ‘과거형인 미래’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겠죠. 이 것이 둘의 끈끈한 유대를 많은 부분 설명해주는 것 같습니다. 미에코는 수영장으로 쓰이던 방에서 지내는 아이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수중생물 같은 구석이 있는 아이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수중생물들에게는 ‘집’과 같은 개념이 없다고 합니다. 그저 유속에 몸을 맡기며 흐르는 대로 흘러갈 뿐이죠. 우리는 어렸을 때 누구나 이런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의 17살처럼 말이죠. 따지고 보면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 사는 곳도 물 속이네요. 수중생물로 태어나 육지에 발을 딛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간의 성장 과정이려나요. 어쨌든 클레르와 미에코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클레르와 미에코가 서로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고, 또 어떤 것은 보여주고 싶지 않을 때, 그 사랑은 증명��니다. 클레르는 엽록소를 쪼개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고, 미에코는 마른 해초로 만들어진 나무 인형을 선물합니다. 이미 둘 사이는 미래와 과거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참 미에코를 이야기하다보니 다시 애써 잊고 있던 나포리역이 떠오르네요. 다시 생각해보면, 클레르와 미에코의 관계는 조부모님과 클레르의 관계와 정확이 일치하는 듯 합니다. 서로를 보며 ‘미래형인 과거’와 ‘과거형인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이겠죠. 그런데 이러한 시간의 문제에 가족이라는 관계가 개입이 되면 문제는 하염없이 복잡해집니다. 가족이란 가장 사랑할 수도 있으면서 또 가장 증오할 수도 있는 대상이니까요. 제 삶에도 조부모님은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저에게 ‘집’이라는 개념이 생기기도 전에 ‘집’이 되어주었던 존재셨으니까요. 저는 어린 시절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는 노란 셔츠를 입고 나가셔서 개인 택시를 운전하셨고, 할머니는 저를 돌보며 집에서 소일거리를 하셨습니다. 저를 공립수영장에 데리고 가서 수영 수업을 듣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 중 하나셨어요. 할머니는 걸음걸이가 느려서 6살이던 제가 지루할 정도였으며 도중에 야쿠르트 아줌마, 쌀집 아저씨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어요. 그 이야기의 주제는 언제나 저였으며 아줌마, 아저씨들은 제가 꼭 여자아이 같이 예쁘다고 했는데, 저는 그 말이 너무나 싫어서 항상 할머니의 넓은 치마 뒤에 숨어있곤 했었습니다. 할머니와 수영장에 가는 길이 너무도 멀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우리가 수업시간에 늦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수영장에 도착하면 저는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탈의실로 향해 수영복을 갈아 입고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나의 옷가지를 받아주기 위해 탈의실 밖에 서있었습니다. 수영복에는 할머니가 잃어버리지 말라고 유성 사인펜으로 그려주신 커다란 별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그것이 나를 뜻하는 그림이라고 하셨습니다. 수영복을 갈아입고 깡마른 몸으로 할머니 앞에 서면 할머니는 수영 모자를 씌어주셨어요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의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할머니와 헤어지고 잠시 수중생물로 돌아갑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법은 배영이었습니다. 몸에 힘을 빼고 힘차게 팔을 휘젓다 보면 어느새 물소리는 잦아들고 물 위로 몸이 둥둥 떠있게 됩니다. 내 몸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저기 하늘 위로 할머니가 보입니다. 할머니는 언제나 수영 레인들이 한 눈에 보이는 수영장 2층 유리창 앞에 앉아계셨어요. 생각해보면 할머니도 같이 수영을 배운다던가, 딸려있는 목욕탕에서 사우나를 하던가, 다른 아줌마들과 수다를 떨 수도 있었어요. 그러나 할머니의 선택은 단지 저를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마치 내가 그대로 물 밑으로 꺼져 버릴까 걱정하는 듯이 나에게서 눈을 절대 떼지 않습니다. 저는 수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표정까지 자세히 볼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 시절 할머니는 옥색의 진주 귀걸이를 항상 하고 다녔었는데 저는 그 귀걸이 두 개가 내뿜는 빛을 등대 삼아 유유히 몸을 꼼지락대는 것이었습니다. 빛이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보이고 저는 한 없이 안정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집’에 대한 첫 감각입니다.  클레르는 최소한 할머니에게도 ‘집’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저에게 최초의‘집’을 선물한 사람의 ‘집’이 어디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 뼈저린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책을 읽어나가며 저는 클레르와 그녀의 조부모님이 꼭 한국으로 여행을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습니다. 사실 어느 시점부터는 그것만이 책을 계속 읽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할머니가 항상 혼잣말처럼 클레르에게 말하시는 “오케이, 오케이, 고, 고.”는 그 희망을 좀 더 불지폈습니다. 할머니도 분명히 어딘가로 가고 싶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한국으로의 여행에 대해 많이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지만, 그 분들도 분명히 두려우셨을 것이에요. 그들 스스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녹슬만큼 녹슨 구슬인 자신들이, 이제 와서 그들이 딛고 있는 땅을 벗어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요. 하지만 그럴수록 제 희망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조부모님에게도 그들의 할머니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할머니의 옥색 귀걸이로부터 받은 빛은 아마 제가 여든 살이 되어서도 잊을 수 없을 겁니다.‘집’과 고향이란 것은 그런 것이거든요. 저는 클레르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한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기를, 그 감각을 다시 한 번 소생시킬 수 있기를 정말로 바랐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조금씩 불길해졌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너무 많은 준비가 필요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평생을 바쳐온 가게를 닫을 준비를 하셔야 했고, 할머니는 챙겨야 할 옷가지와 버려야 할 잡동사니가 너무도 많으셨습니다. 정말로 절망적인 순간은 할머니가 너무도 많은 도넛을 튀기실 때였습니다. 그것은 떠나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이번만큼은 그 똑똑한 미에코가 틀렸습니다. 미에코는 사람이 늙어갈수록 완전히 투명해지고 죽음에 가까울수록 가벼워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인간은 늙을수록 불투명해지고 무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애초에 떠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니, 떠날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클레르에게 처음으로 일본어로 말을 건네고, 할머니의 손은 축축하게 젖어갑니다. 할머니는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분명 클레르는 그들을 돌아가게 하려고 스위스에서 도쿄까지 날라왔는데 말입니다. 할머니는 다시 한 번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 쪽이 아닌 이 쪽으로.
 파친코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파친코의 구슬은 한 방향으로만 흐릅니다. 그것은 중력의 법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파친코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그 어떤 유능한 노름꾼들도 그 구슬의 흐름을 거슬러 올릴 수는 없습니다. 그 쪽은, 그 쪽이 되는 순간 영원히 그 쪽인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은 영원히 이 쪽일 따름입니다. 제가 너무 시간을 쉽게 생각해 왔던 것 같습니다. 다시 17살로 돌아간다는 상상은 너무도 동화 같은 상상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옥색 귀걸이로부터의 빛이 내 인생을 여전히 달처럼 비춘다고 할 지라도 그 빛의 출발을 지금 더듬어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우리에게 있어 ‘집’은 애초에 그런 것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광원을 잡을 수 없는, 빛처럼 감각되는. 뒤섞인 언어들의 메아리와 같은.
(지금,여기)
고마웠습니다. 읽고, 쓰면서 치유하는 법을 배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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