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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강 건너를 다녀왔고 오는 길엔 정밀아 들으면서 망원에서 집까지 자전거로 달렸다. 충분하다는 말을 내뱉으면 일순간 많은 것이 감사해진다. 어떻든 안심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불광천에서는 나를 지나치고 내가 지나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있어서 좋은 날이 더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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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금요일

겨울 햇빛은 예상 외로 쨍하고 눈부시구나 계속 생각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나오면서. 퇴사를 한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가 너무 길다. 일주일이 길다. 회사를 빠져나오니 채워진 것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나를 덮치던 슬픔, 밀려오던 한숨도 멀리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같이 있을걸 하던 마음도 금세 줄고. 눈 앞에서 사라지니 안개처럼 모든 게 흐려졌다. 아침에 이를 닦으며 생각했다. 뭘 생각해야 하는지도 알 길이 없어 제로인 채 있는 지금. 시간이 조금 지나면 역시 다시 슬퍼지고 말까. 책상 앞에 앉은 이들, 일하는 엄마의 매일을 생각하며 나도 바깥으로 나서야 할 텐데. 오후 7시. 하루를 일찍 ��작해서인지 벌써 잠이 온다. 오늘 드디어 시계를 벽에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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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목요일

양말 두 개 겹쳐 신고 따뜻한 물 텀블러에 담아 멀리 있는 장욱진미술관에 간다. 날이 추운 데다 생각보다 멀어 꽤 큰 결심을 하고 나온 터라 어디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늘 가보고 싶었던 곳을 서울에 살고 나서야 갈 수 있게 되었네. 오랜만에 미술관에 가는 설렘도 있지만 나는 지금도 동료들을 떠올린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어질러진 책상들을 생각한다. 두 개의 모니터 앞에 있을 얼굴들을. 정류장엔 산에 가려는 등산객들이 많았다.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도착한 버스를 보고 웃음이 터졌다. 열세 명이 앉을 수 있는 작디작은 19번 마을 버스. 차분하게 메모장에 단상들을 기록하고 있으니 입사 전 그때가 떠오른다. 서울 끝자락에서 시작해 가도 가도 산, 산만 나오는 풍경을 20여분 달리고 나니 미술관이다. 높은 다리 밑에는 하천 물이 얼어 있었고 위에서 내려오는 겨울 햇빛이 언 물에 비쳐 눈이 부셨다.

미술관이 크지 않아 관람은 금방 끝났다. 좋아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잘 알지 못하는 장욱진 화가의 그림을 온전히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내가 더욱 집중한 것은 창문.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그 바깥의 앙상한 나무, 겨울의 산이었던 것 같다. 버스정류장이라고 하기엔 'bus'라고 적힌 표지판 하나 달랑 있는 길가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텀블러를 열어 물을 마시는데 열기가 식지 않아 혀를 뎄다. 다시 버스를 타고 털털털털 산에서 도시로 돌아왔다.

버스 안에서 생각한 한 가지. 이 시기에 빈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에게만 함몰되지 않기. "자신한테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게 가장 좋은 일 같아요. 인생에 일어난 의미 있는 수많은 일들은 '확장'과 관련 있어요."(이슬아 인터뷰집 <깨끗한 존경>)라고 정혜윤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내 안에만 갇혀서 나만 바라보지 않기. 주변을 둘러보고 새 길을 탐색하기. 다른 이야기를 듣고 내 안에 남기기. 나로 만족하지도, 나로 불평하지도 않기.

집에 와선 졸음 참고 동료가 추천해줬던 <데��� 프루프>를 보며 속시원했고 어딘가로든 나가려고 옷을 다시 챙겨 입고 바깥으로 나섰다. 심심함이 늘었다. 생겨났다고 해야 정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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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지 못한 편지를 전하고 돌아온 날. 2021년 8월 31일 비 오는 날 저녁에 쓴 편지는 2022년 2월 18일 오후에, 두 번의 계절이 지나고 나서야 가닿을 수 있었다. 우리의 감정이 지금 막 생겨 살아있을 때 우리는 그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말, 적확한 단어를 찾아 문장으로 만들어낸다. 말이란 건 그렇게 뱉어지려는 의지가 스스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순간을 떠올려봐도 이미 너무 많은 생각과 감정과 더 큰 피로를 지나온 터라 말로 다 할 수 없고 지나간 말은 강하기보다는 여린 것, 너무 멀리 있는 것,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렇게 살아 있던 말을 잃게 된다. '말이라는 것은 제때 뱉지 못하면 영영 갈 곳을 모르고 흐르네'라는 이설아의 가사처럼. 나는 '이제 말을 하자고.' 쓴 편지 속 내용처럼 그를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그 말을 꺼내어 보이기로 했다. 과거에서 온 말들 속에서 우리는 예전의 우리를 발견하고 아프기도 할 테지만 잊지 않고 싶었다. 그때 그 마음을. '제때'라는 건 과연 언제일까 생각��면은 조금 늦어도 괜찮을 거란 생각도 들고, 그래서 나의 제때는 오늘이었을 거란 생각도 들지만, 제때를 찾지 않으려고 묵혀두고 보지 않고 없던 일로 만드는 것만큼은 내게서 멀어졌으면, 제때를 찾아 그게 언제든 말을 뱉어내려는 마음만이 내게 머물러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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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하루였어요. 마치 ��런 독백으로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기억에 남을 일월 일일. 이렇게 걸은 것이 얼마 만인지 멈출 새 없이 걷고 또 걷고. 그러면서 웃고 또 웃었다. 잃어버린 나의 웃음보를 되찾을 만큼 우스운 일도 있었다. 헤매느라 길 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 같은 날을 기다려왔고 헤매었던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으니까. 돌고 돌아 도착한 곳에서 많은 것들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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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를 원하는 말

팔월 첫 월요일의 일이었으니 대략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처음 만난 동료이자 나의 단 한 명 뿐인 선배가 해고를 당하고 회사를 나간 지. 이 두 문장 뒤에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어 그동안 책상에 앉지 못했다. 그 다음, 그 다음엔 어떤 말을 적어 내려야 할까. 암전이었다. 며칠간 울고 멍하게 있기를 반복하다 회사를 떠나겠다 선언했고 그 사이 바람처럼 휩쓸려 오는 무수한 타격들이 따라왔다. 남은 동료들을 위해 그리고 나의 다음을 도모할 조금의 시간을 위해 당분간만 회사에 남기로 했다. 결정을 한 것이 내 자신이면서도, 내가 그 말을 한 것인지, 무언가 나를 이렇게 하라 만든 것인지, 이 모든 선택이 맞는 것인지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내가 걱정하는 사람들은 다행히 무사하고 사람들이 걱정하는 나는 잠깐의 휴식을 가졌다. 오랜만에 보내는 휴식이었다. 우린 정말 무사할까.

팔월 첫 주 그 일주일을 떠올리면 멀고 먼 과거를 끄집어내는 기분이 든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지. 내가 당신이 우리가 어떤 감정이었지. 그게 불과 얼마 전이었다고. 아주 긴긴, 닿을 수 없는 시간 같다가도 책상 앞에 앉으면, 같이 걷던 길을 혼자 걸으면, 천연덕스럽고 생생하게 그 시간들이 떠올라 불쑥 불쑥 눈물이 올라왔다. 마음이 놀라 움찔하는 순간이 지나자 후유증처럼 통증이 밀려왔다. 아, 이렇게 밀려드는 기억은 나를 오래도록 찾아 오겠구나.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겠구나. 공기, 적막, 차례로 들썩이던 어깨와 울려 퍼지던 울음, 구멍이 난 것만 같은 시간들.

선배와 내가 각자의 자리에서 정신을 차리는 동안 동일하게 느꼈던 한 가지 진실은, 어떤 일이든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란 건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일은 어떤 예외도 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 화면이 켜지고 드라마가 시작한다. 우리는 불과 몇 센치 되지 않는 거리에서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울고 웃고 공감하지만 마음으로는 먼 발치에 서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화면 밖에 있던 구경꾼은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 내 삶 속에서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흘려 버리고 지나쳐 온 수많은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였고 내 이야기였다. 나는 여기에 있지만, 언제나 거기에도 있었다.

선배는 말했다. "이제 나는 해고당한 사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야. 너는 가까운 사람이 해고당하고, 그 사람이 나간 뒤 회사의 상황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야."

휴식을 보내며 읽은 책 속에 마음에 남은 문장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나의 가치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가치와 같다. 내가 살리고 전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도. "내가 오늘 하는 말 중 먼 미래에도 살아남기를 원하는 말이 있는가?" 이 말은 작가 자신이 하루 24시간이 낳은 파편 더미에 불과하다고 느낄 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라고 했다. 정혜윤 작가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 나오는 문장이다.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이 진정으로 알고 싶어 하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미래라고, 진정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좋은 미래라고. 언어 공동체에 속하는 우리가 이 좋은 미래를 만나는 방법은, 좋은 미래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우리가 한번 사로잡힌 이야기에서 헤어 나올 수 없고 우리 삶은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들의 결론이다." 하여 작가 정혜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의 인생을 걸 가치가 있는 단어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말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말은 무수하고 촘촘하게 남은 또는 남았다고 믿는 시간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껏 거쳐 온 날들 속에서 나를 통과해 낸 말들이 내 안에 고여 있는 것처럼. 함께 한 시간들, 나눈 이야기, 오고 갔던 눈빛,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뭉쳐 있고 어디에는 깊게 고여 있다. 고인 말들은 어느 순간 구름을 들여다보고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무언가를 먹고 하는 와중에 점차 내 머리로 전달되어 조금씩 조금씩 내뱉어지고 흩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남아야 하는 말들은 흩어지지 못하도록 내가 붙잡을 것이다.

말하고 싶다. 시간이 우리를 위해 고요한 마음으로 저기에 서 있으니, 우리에게 사용될 시간이 저기에 서서 기다리고 있으니 이제 말을 하자고. '살아남기를 원하는 말'을. 결코 지워지지 않는 흔적 같은 단어를 찾아 붙잡고 되���이자고. 며칠의 휴식을 보내면서 나는 고요하기 위해 분주했다. 침착하지 못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마음은 멈출 줄 몰랐다. 다행인 건, 내가 지낸 며칠 속에 내가 보고 싶었고 붙잡고 싶었던 장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를 출근을 앞두고 있다. 나는 이제 여기에 있으면서 거기에 있는 사람으로, 새 말을 찾아 헤맬 것이다. 살아낼 수 있는 말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는 책상 앞에서 언제나 살리는 사람이었고, 언제든 버리는 것이 아닌 살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니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싸울 준비만 되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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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함과 불투명함. 두 가지를 동시에 느끼면서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출근한 수요일이었다. 노매드랜드의 사운드트랙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고요함과 슬픔 그 사이 어느 지점으로 나를 이끌지만 이내 어떤 기억을 불러내기도 하고 어떤 감정을 확실히 알게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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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다. 해 지는 사이 예보 없던 비는 툭툭 차갑게 떨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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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아래 떨어진 빛. 꽃잎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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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여덟 시를 향해 가는 시간 아름답게 물드는 초여름의 하늘. 분홍빛 노을과 선선한 공기를 이 시간을 잊지 말아야지. 잊지 말아야지. 이런 순간이 있었다는 걸 깜빡하지 말아야지. 걸으면서 자꾸 다짐을 했다. 겨울이 찾아오면 여름의 광경은 모두 잊어버리고 어두컴컴한 저녁 차가운 바람을 헤치며 빨리 걷고 있겠지. 여름일랑 뒤로 하고 깜깜한 마음으로 어떤 빛을 찾기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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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속을 유영하는 삶을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일을 하면서 이런 생각이 퍼뜩 들면 자명하게 슬퍼진다. 오월은 가만히 햇살 아래 서 있기만 해도 무언가 충만해지는 달이니까 천천히 가길 바랐다. 너무 빠르게 끝이 보이는 기분이다. 여름이 온다고 ��다. 곧 여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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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겨울을 사랑하는 이유는 백 가지쯤 되는데, 1번부터 100번까지가 모두 '눈'이다. 눈에 대한 나의 마음이 그렇게 온전하고 순전하다. 눈이 왜 좋냐면 희어서, 깨끗해서, 고요해서, 녹아서, 사라져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난 횟수를 차곡차곡 세어가듯이, 나는 눈을 만난 날들을 센다. 첫눈, 두 번째 눈, 세 번째 눈...... 열한 번째까지 셀 수 있었던 해는 못내 아름다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커튼은 닫혀 있고 누운 채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데도, 내 주변으로 서름한 빛이 느껴지는 날이 있다.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니라서 아까 꾸던 꿈이 이어지고 있는가 싶기도 하다.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그 환상의 빛을 가늠해보다가 문득 이런 확신에 이른다. '뭔가 찾아온 거야!'

몸을 단번에 일으키고 커튼을 걷으면 아, 눈이 거기 있다. 창을 내내 올려 보다가 내 얼굴이 뜨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힘차게 흔드는 애인처럼. 눈을 그렇게 발견하는 날은, 사랑은 발견한 듯 벅차다.

시와 산책, 한정원

몸이 안 좋아 회사에 나가지 못 한 오늘. 아침에 눈을 뜨고 눈이 왔다는 소리에 엉거주춤 밖을 내다보니 온통 하얗다. 집에서 눈을 목격하는 순간, 이번 겨울은 이럴 때 한정원 작가의 말간 문장을 떠올린다. 무거운 몸을 하고서도 일 걱정을 놓지 못하는 지금, 흰 눈을 보면서 남은 나흘의 시간도 모두 맑아졌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일 출근길이 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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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 십삼일 수요일. 본래의 색 위에 흰 살이 포개어진, 눈 쌓인 기찻길과 나무, 땅, 지붕 들을 보았다. 새하얀 들판이 되어버린 한강도. 느리게 떨어지는 눈을 보며 횡단보도에 서서는 산속에서 눈멍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고요하고 차분한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면 항상 산속을 떠올리고는 한다. 바다를 좋아하지만 어쩐지 내 마음은 점점 산속으로 향한다. 나무가 있는 곳, 바람 소리가 들리는 곳, 내가 밟는 대로 소리가 나는 곳.

이번 새해엔 내 나이가 조금 덜 어색하고 덜 신기하다. 그저 n년째 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덕분일까. 올해부터 내게 할당된 업무량이 많아졌다. 어제는 그 결과로 심장이 계속 두근거려 탈이었다. 나는 책임을 무서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담에 잘 짓눌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심을 다하려 하는데 진심을 다하지 못할까 봐 그렇다. 조그만 눈덩이를 눈밭 위에 굴리면 살이 붙어가는 것처럼 일을 해 가는 만큼 감당할 몫과 책임져야 할 일은 불어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아직 스스로 나의 일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서투르기 때문이란 걸 안다. 여름엔 겨울을 떠올리고 이제는 티 한 장 달랑 걸치고 싶은 나의 마음처럼 난 여전히 나약하고 손쉽게 흔들리고 만다. 그래도 이전엔 왜 이렇게 나약하나. 스스로를 괴롭히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바로 이게 나일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일을 못하나. 그렇담 더 열심히 하자. 더 집요하게 소중히 하자. 그냥 그래버린다. 그리고 지금은 우선 밥을 먹자. 따뜻하게 김이 펄펄 나는 밥을.

이따금 잠들기 전에도 일을 생각하며 문장을 곱씹고 그러다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출근을 하는 와중에도 오물오물 말을 하기도 하고 퇴근을 해서도 기차 안에서 메모장을 켜고 하염없이 생각이 떠오르길 기다리는 날도 있었다. 어쩐담. 불안감이 필수로 따라 붙는 나의 일로 집에서까지 괴롭지 않으려면 회사 밖이 아닌 안에서 더 잘 해내는 수밖에.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노래가 입밖으로 흘러나오는 퇴근길도 있다. 이를테면 마법의 성 같은 거.. 일단 노래가 흘러나온다는 건 좋은 신호다. 하루 내내 스스로 좀스럽게 또는 헐렁거리게 느껴졌거나 사람이나 환경에 서운하거나 그런 일 없이(혹은 거의 없게) 대체로 넉넉한 마음으로 일했다는 말이니까. 종종 일을 하다 미칠 때 넋을 놓고 흘리게 되는 그런 종류의 흥얼거림도 있지만.

글쎄. 당분간 꼭 붙들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잘 안 되더라도. 잘 알아야 내가 하는 모든 것에 이유가 생기고 방향이 생기고 체계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단단하고 짱짱해지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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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이나 눈이 오겠어. 날씨 앱에 뜬 눈송이 하나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마 그런 기저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눈이 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어제, 외근을 나갔던 오후 내내 동료와 눈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일이 잘 안 풀리기 시작하자 처음엔 반가웠던 눈이 나중엔 차갑기만 했다. 갈 길이 먼데 눈도 제대로 못 뜨겠고. 길치인 동료를 무턱대고 따라갔다가 목적지가 노선에도 없는 지하철을 타서 문이 닫히기 직전 뛰쳐나오기도 했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더니 이른 아침부터 또 눈발이 날린다. 선로 문제로 앞 기차는 약 18분 지연이 됐고 그 다음 기차를 기다리던 나와 같은 사람들은 승무원의 허락 하에 앞 기차를 탔다. 기차가 달리던 몇 분간 차창으로 보이던 눈발이 어느새 그쳤다. 눈이란 건 내려본 적도 없다는 듯 깨끗하고 환한 하늘이다. 올해는 더더욱 휘리릭 지나간 것 같다는 말에 내년은 휘리릭도 아니고 슥 지나갈 거라는 농담이 돌아왔다. 아무렴 그렇겠지. 매번 실감하지 못하는 연말의 공기도 이제 이틀이면 슥 지나가버릴 테니까. 정말이지, 올해는 빠르게 스쳐갔다. 쌓일 것처럼 날리다가 금세 그친 아침의 눈처럼. 영하로 떨어진다던 오늘은 정말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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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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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의 마지막 피로하고 분주해진 마음을 가라앉힌다.

에스토니아 출생의 현재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Spiegel im Spiegel. 뜻은 거울 속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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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