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greenrain
deepgreenrain
Process of becoming a dancer.
18 posts
Don't wanna be here? Send us removal request.
deepgreenrain · 4 years ago
Text
-언어를 찾아서
언어에도 형태가 있다.
현재 한국과 여러 나라에서 다채롭게 소통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그 언어의 형태이다.
이제는 감정뿐만이 아닌 정보까지 전달하기 위해 원시부터 현재까지 그 발전을 이뤄왔고, 이루고 있다.
언어라는 것이 생기기 이전의 소통 방식은 소리를 통한 감정적 교류가 그 중 하나이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던 언어의 형태를 허물어 형태가 ���해지지 않아 말이 되지 않는 언어를 통해 원시적인 말을 한다.
이를 통해 말속에 담겨 있는 나의 감정과 우리의 감각을 속여왔던 단어 또한 허물어 소통 그 안의 본질을 느끼고자 한다.
말에 실린 감정과 자연스러운 생각의 변화로 인해 몸이 어떻게 반응하고 변화하는지 인식할 수 있다.
움직임과 언어, 그리고 음악의 본질은 감정과 온몸으로 하는 생각에서 온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을 목표로 둔다.
 1.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2. 환경, 상태에 따라 집중할 수 있도록 알맞은 디렉션을 준다.
 3. 거울 또는 사물을 통해 대상을 정한다.
 4.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 혹은 사물을 의인화한다.
 5. 말을 하지만 기존에 사용하던 언어의 종류는 잊어야 한다.
 6. 자라오며 들었던 여러 뉘앙스와 발음이 나올 수 있다. 
 7. 그러나 6번은 소리의 일종으로 인정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8. 작은 소리부터 시작해 천천히 집중한다.
 9. 8번 이후에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을 느끼도록 한다.
 10.  이때까지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제스처와 표정은 자제하도록 한다.
 10-1. 감정의 필요에 의해 적절한 표정과 제스처는 허용한다.
 11. 말에 집중하지만 몸이 굳어있는 상태는 분명 아니다.
 12. 관찰자가 혹은 행위자 스스로가 여기기에 깊게 집중되어 있다면 움직임의 제한을 풀어본다.
 12-1. 관찰자는 대상에게 시선을 제시해도 좋다.
 12-2. 행위자는 감정의 흐름과 생각의 변화에 따라 시선 혹은 위치의 변화를 주며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
 13.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감정과 움직임의 일치를 느낌과 동시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본질을 몸소 느끼려 전제를 두고 노력한다.
0 notes
deepgreenrain · 4 years ago
Text
-소리를 찾아서
꾸밈없는 자��의 목소리를 먼저 찾는다.
입에서 나오는 음은 호흡이 섞여있다.
움직임 또한 호흡이 섞여있다.
호흡을 운용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행위의 공통점은 호흡이 섞여있다는 것이다.
또한 몸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호흡의 중요성과 호흡의 운용법에 대해 스스로 탐구한다.
그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호흡이 열려있지 않다면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할 수 있을 뿐더러,
스스로도 자유롭지 않으며 거짓 행위가 될 수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몸짓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에 목표를 둔다.
 1. 아, 야, 어, 여, 오, 요… 모음을 다양하게 사용하며 음의 높낮이를 정하여 우선 일시적인 노래를 만들고 소리가 호흡에 실리는지 확인한다.
 2. 이때 호흡은 깊은 곳에서 온다.
 2-1. 발성기관이 단련되어 있지 않거나 올바른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기침이 나올 수 있다.
 3. 어느정도 호흡이 실렸다고 판단이 되어질 땐 걷거나 뛰면서 실행해본다.
 3-1. 행위자의 상태에 따라 집중할 수 있도록 음악을 틀어도 좋다.
 4. 움직이며 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게 되었다면 소리와 움직임의 일치점을 찾아본다.
 4-1. 움직이기 위해 나오는 호흡에 소리를 얹는다는 느낌이다.
 5. 단편적으로 나오는 소리를 더 길게 붙잡아 노래로 이어지도록 한다.
 5-1. 즉흥적인 움직임과 함께 소리를 탐구한다.
 6. 만들어지지 않은 노래일 수 있다.
 7.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노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하고, 인지한다.
 8. 노래와 춤의 본질적인 공통점은 무엇인지 생각한다.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Text
2020. 12. 4 현대무용 훈련일지 및 스스로의 초점
-청개구리
-생각으로 습관 이기기, 습관으로 생각 이기기.
*
1. 습관적으로 행하던 것들.
즉흥을 하거나 순서가 짜여진 안무를 할 때 습관적으로 하는 것들이 있다.
내가 습관적으로 하는지도 모르고 습관적으로 하는 것들.
이 ‘청개구리’라는 훈련은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고 나의 몸을 순수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청개구리 그 자체는 피곤할지 몰라도, 청개구리 같은 면이 적절히 있다면 매력이 될 수 있다.
이 훈련을 통해 춤을 추다 어느순간 생각이 사라지고 몸이 습관적으로 움직이던 대로 흐르게 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조절하는 또다른 습관을 들인다.
습관을 극복하고 내것으로 만든다.
*
a. 먼저 움직이기 이전에 생각을 우선적으로 한다.
b. 다만 생각에 지배당해 몸이 멈추는 것은 지양한다.
c. 우선적으로 하는 생각에 담기는 요소가 존재한다.
 첫째, 평소에 하던 움직임을 피한다.
 둘째, 현재 자신의 몸이 유지하고 있는 형태 안에서 체중이 어느곳에 실려있는지 충분히 인지한다.
 셋째, 나의 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느낀다.
 넷째, 지금의 움직임에서 다음의 움직임으로 가고자 하는 그 찰나가 기존의 습관인지 아닌지 판단한다.
 다섯째, 어떻게 움직여야 뻔한 움직임이 되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여섯째, 머리가 가고자 하는 곳인지 몸이 가고자 하는 곳인지 판단한다.
d. 끝까지 집중한다.
e. 흐르지 않는다.
f. 지점을 명확히 한다.
*
 2. 습관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버릇이란 단어도 쓰이지만 편의를 위해 습관이란 단어로 통일하겠다.
습관이 주는 이로움이 있고 또한 해로움이 있다.
가지고 있는 습관에 대해 어떻게 여기는가에 따라 그 의미 또한 변할 것이다.
독서하는 습관이 있다고 가정하자.
독서란 것은 내가 시간적, 공간적 제한이 있어 묶여있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다른 누군가의 논리정연한 생각을 들여다보며 나의 생각을 더욱 풍성하고 단단하게 다질 수도 있다.
이외에 여러 이점이 있다.
반대로 해로운 것은 무엇일까?
생각이 몸을 잠식한 누군가에게 독서는 과연 마냥 좋기만 한 것일까?
어렸을 적부터 책으로만 세상을 배운 누군가는 독서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그 순간 그건 나쁜 습관, 즉 버릇이 될 수도 있다.
책이 주는 한계점은 직접적인 듯한 간접적인 경험이지만, 사실적으로 보면 직접적이지 않은 간접 경험일 뿐이라는 것이다.
직접 피부로 공기로 느낀 것과는 달라 아무리 상상력이 좋다 한들 진짜로 경험한 것이 아니다.
이외에도 해로운 점은 찾아보면 참 많을 것이다.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나의 상태를 알고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주변에서 좋다고 추천하는 어떠한 습관이나 환경을 무작정 듣고 따라가기 전에 자신의 상태를 먼저 점검하는 것이 1순위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는 좋은 것도 누군가에게는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3. 생각의 질과 결, 근육의 질과 결.
가정환경과 학창시절의 환경 등 여러 환경에 의해 하나의 존재가 형성되어진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하거나 따돌림을 당하거나 또는 사랑을 너무 과하게 많이 받았다거나.
부모가 자식의 성격을 올바르게 형성하기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매일 옆에 붙어있을 수 없고, 매일 붙어있어 있는 것도 마냥 좋진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에 놓여있으며 많은 성장을 이룬다.
가족이란 하나의 구성과 학교라는 구성, 직장이라는 구성, 여러 집단의 구성 안에서 나는 만들어진다.
주변에서 여러 영향을 받으며 생각의 질과 결이 형성되어간다.
여러 정답이 존재하는 삶에서 나만의 시선과 기준과 정답을 가지고 살아가기도 한다.
방금 얘기했듯이 나만의 기준은 단지 나만의 기준일 뿐이기 때문에 진리는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러 사람과 대화를 하며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생각과 경험을 듣고 경험하며 더 넓고 깊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직업을 가진 이라도 하나의 과제가 주어지면 그 과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 만족하며 자위하는 세상이 아닌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에 주변을 무시할 수 없다.
생각이란 것도 내 머릿속에서 그리고 피부가 전달해준 여러 경험을 통해 습관이 형성된다.
예를 들어 오른손이 편해 오른손만 사용하고, 내가 싫어하는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습관적으로 하는 합리화도 있고 여러가지 습관이 생긴다.
익숙하고 나의 마음이 편한 것을 택해 습관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혹은 마음이 불편한 것만을 쫓아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이도 있다.
마음이 편한 것이 되려 불편한 사람도 있으니까.
생각이란 것에 정답은 없기 때문에 생각이란 것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늘 다른 환경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좋겠지만, 
현대사회에서 그러한 자유를 경험하는 것이 그저 마냥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 나의 생각을 점검하고 돌아보며 고칠 건 고치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생각의 결과 질을 더욱 더 성숙하고 올바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후에 생각의 유연성을 가지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기준과 신념을 지키며 다양한 환경에도 거뜬히 적응할 수 있다.
내공이 더 쌓이면 다른 이들을 이끌어갈 수도 있다.
춤을 배우며 이전에 했던 생각의 방황을 현재 흐름에 많이 대입해보곤 한다.
당연하게도 근육에도 결이 있고 질이 있다.
몸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 목적과 의도에 맞게 변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일상생활만 하고자 하면 그 방향대로 가면 되는 것이고, 춤을 추고자 하거나 보디빌딩을 하고자 한다면 그 방향에 맞게 가면 된다.
나의 생각을 내가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되고, 내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 어느곳을 향해 가고자 하는지 알게 된 이상,
나의 몸과 습관 또한 그에 맞게 변해야 한다.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채소를 손질하거나, 가위질을 하거나, 변기를 닦을 때 나오는 몸의 습관이 다 다르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가장 효율적이고 최적화된 몸의 중심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하고, 생각의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 생각의 방황을 했듯이 몸의 습관을 바로잡기 위해 몸의 방황 또한 필요하다.
나의 몸에 맞는 습관과 나의 몸을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몸이 바라보는 것은 무엇이고 마음이 느끼는 감정을 나의 몸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표출하고 싶어하는지.
그 과정을 거쳐 이후에 나의 생각과 감정을 예술의 형태로서 사람들에게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나만의 근육의 결과 질을 얻을 수 있을 것이�� 생각한다.
몸의 중심이 잡히고 좋은 근육의 결과 질, 그리고 유연함을 가지게 된다면 내가 느끼는 것을 가장 효율적이고 아름답고 순수한 상태로 전달할 수 있다.
나의 몸의 습관을 고치기 위해선 나의 몸의 습관이 무엇인지 인지하는 것이 먼저다.
습관을 알아야 습관을 고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습관, 신뢰, 사랑 등 여러 단어를 이해하고 나의 것으로 만들어가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자.
나이는 들어가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만 나이가 몇이든 사람 안에 담긴 무언가는 세월이 주는 것이 아니다.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Text
 2020. 7. 24 금요일 현대무용 훈련일지 및 스스로의 초점
-거울 속의 나
 1. 행위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마주한다는 것.
춤을 추던, 노래를 부르던 내가 스스로 어떠한 행위를 하는 중에 스스로 부끄러울 때가 있다.
행위를 하는 순간에는 잘 모르다가 영상 결과물로써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 순간에는 그래도 괜찮지만, 행위 하는 즉시 거울을 통해 마주치는 것은 꽤나 쑥스럽다.
눈을 감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나라하게 보여지기 때문이다.
조금 신기한 것은, 이전엔 거울을 통해 내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을 꽤나 좋아해서 자주 하던 행위인데, 지금은 어색하다는 것이다.
내면을 탐구하는 방식이 거울이 아니라 움직임이 되었기 때문일까?
행위자를 방해하는 자의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직접 보는 것이 가장 힘든 것 같다.
상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이 쌓여야 하는데 보이는 것은 현실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불 끄고 춤추기
 1. 눈 감고 돌아다니기.
무용단 지하 연습실은 이제 5개월째 경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공간에 대해 꽤나 익숙해져서 눈을 감더라도 이전의 기억을 더듬어 대략적인 위치를 떠올릴 수 있다.
처음에 내가 있던 위치를 기준 삼아 움직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경계는 모호해졌다.
시간이 더 흘러 결국엔 익숙한 공간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었다.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내 주변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불안감이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2. 시각장애.
보이지 않는 상태인 지금, 그 공간 안에서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다치지 않기 위해서 곤두세워야 하는 시각을 제외한 감각들이 있다.
소리, 냄새, 촉감.
그동안 편하게 사용하던 시각이 제한된 상태인 그 순간에 나의 안전을 위해서 서서히 깨어났다.
그동안 자주 봐 왔던 동료들의 특징이 있다.
신체적인 형태, 늘 나는 냄새, 머리 길이, 불 끄기 전에 입고 있던 연습복 등.
외관의 형태적인 부분은 신기하게도 눈이 보이지 않아도 촉감으로 볼 수 있었다.
이전의 기억이 비중이 클 것이다.
생긴 것과 닿았을 때, 냄새를 맡았던 경험들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눈으로 볼 때보다 특징들이 더욱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 사람 특유의 냄새와 팔의 두께와 어깨의 넓이, 그리고 머릿결.
선천적인 시각장애인 이들은 이전의 시각적인 경험이 없지만, 후천적인 시각장애인 이들은 이전에 보았던 것들이 시각을 잃고 난 후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3. 본다는 것은.
훈련 중 우리는 보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 상태이다.
우리는 머리로 공간을 보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껏 눈을 통해 보던 것들은 무엇인가?
보여지는 것을 볼때 우리가 눈을 뜨고 형태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보고 있는 것은 ‘느낌’이다.
색이 주는 느낌, 감정, 표정이 주는 감정, 호흡이 주는 느낌.
매순간 느끼지 않고 흘려보내고 있는 순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꾸준한 훈련을 통해 감각을 단련하여 더 다양한 것들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싶다.
 4. 어둠.
동물들이 본인의 생명에 위협을 느꼈을 때 하는 행동 중 하나가 있다.
자신의 눈을 가리는 것이다.
본인의 눈을 가려 본인이 보지 못하면 상대방도 본인을 보지 못할 거란 착각에서 온다.
나도 그런 상태였을까?
처음에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차차 어둠에 적응해나가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만 눈을 감은 것이 아니라 빛 자체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누군가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잘 보여주고자 훈련하고 있는 사람인데, 어째서 보여지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가?
나는 스스로의 실력이 보여지기에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치던 박수소리를 따라가던 도중 처음엔 들리는 곳이 명확하게 느껴졌으나, 시간이 흘러
공간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다.
그러나 공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고 난 후엔 오히려 공간에 대한 제약이 사라졌다.
움직이다 보면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와 부딪히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보일 때보다 오히려 공간에 대한 생각없이 마음껏 움직였다.
이후에 서로 만나 즉흥을 시작했다.
이전에는 컨택 즉흥을 할 땐 나도 보였고 상대방도 보였고 주변도 보였다.
내가 어떤 형태인지, 상대방은 어떤 형태인지, 주변의 공기는 어떻게 생겼는지 눈을 통해 느끼고 상상하며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과 상상을 통해 느꼈다.
상대방이 어떤 형태를 띄고 있는지 촉감을 통해 확인하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어떤 형태를 하고자 하는지 그리고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에너지는 투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서로가 어느곳을 향해 움직이고 싶은지에 대한 몸의 대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방향과 힘의 흐름과 순간의 충동들.
보이지 않지만 이전만큼, 혹은 더 많이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다.
 5. 소리.
처음에 조명을 켜고 거울을 보며 소리를 따라갔다.
거울 속의 나를 의식하게 되다 보니 주변까지 그 의식의 집중력이 짙어졌다.
나 스스로에 대해 집중해야 하는 시간인데 말이다.
외부의 압력을 이겨내고 나에게 집중했을 때 내 몸은 긴장되어 있었다.
지금의 소리 단계에서 에너지가 확장되기 위해서 몸이 움직이고 싶다는 요구를 했으나, 나의 머리는 그것을 거부했다.
몸은 굳어있었고 소리는 확장되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다.
소리의 진원지는 몸인데도 불구하고, 처음의 소리 따라가기는 나의 머리가 승리했다.
이후에 어둠 속에서 컨택 즉흥을 모두 끝내고 각자 흩어져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소리를 내는 순서가 왔고, 선생님께서 나의 몸에 신호를 주셨다.
나의 소리가 발전될 수 있도록.
처음엔 미약하게 시작했지만, 점차 긴장이 풀리고 소리를 내기 위한 나의 몸속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둘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소리를 내고 있지만 움직이고 있는 이들이 신경쓰여 소리의 형태를 만들까 고민했지만, 내가 내고 싶은 소리의 충동을 따라가는 것을 선택했다.
함께 하는 순간이기에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때론 예외도 있나 보다.
나의 충동을 따라간 소리는 되려 아름다운 형태를 갖추었을 때보다 예측하기 힘들었고 듣고 보는 이에게 조금은 흥미를 주었을까?
이후에 각자 소리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을 때 나온 반응에 의하면, 움직이는 이의 입장이 아닌 내가 내고자 하는 소리에 대해 약간은 이기적으로 집중하는 것이 나았다는 결과인 듯 하다.
이번에는 나의 몸이 승리했다.
 6. 충동에 의한 소리를 충동에 의한 움직임으로 느끼게 하기.
이전에 내가 냈던 소리를 기반으로 삼아 그 호흡과 같이 움직이는 것이다.
즉흥적인 소리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어떻게 냈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훈련이 끝난 지금 생각해보면 몸이 가고 싶어하는 곳을 갈 수 있도록 풀어주고, 다채로운 호흡을 통해 움직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리를 통해 몸의 움직임을 확장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듯이, 누군가는 춤을 통해 본인의 분야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고, 나 또한 다른 분야를 통해 춤에 대한 영감을 받을 수 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더라도 사물을 통해 느낄 수도 있다.
결국 무언가를 느끼고 영감을 받기 위해선 변화에 대한 나의 감각과 관념을 주변을 향해 늘 열어두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순간적인 충동과 욕구를 올바르고 긍정적인 범위 안에서 잘 활용한다면 삶을 느끼는 범위가 넓어지고 깊어질 것이라 믿는다.
이전에 낸 소리를 움직임으로 표현하며 냈던 호흡을 통해 같이 있던 동료들이 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는지 느꼈을지는 잘 모르겠다.
결국 행위자 본인만 안다.
스스로 순간에 얼마나 떳떳하고, 어느만큼 집중하고 순간에 담기 위해 어느만큼 노력했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안다.
그 노력이 많이 쌓여도 보는 이는 그 노력의 절반은 느낄까?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집중하고 시간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Text
 2020. 7. 14 화요일 현대무용 훈련일지 및 스스로의 초점
 -관찰, 추상화, 형상화, 구체화
 1. 관찰.
작품을 만들기에 앞서 어떠한 현상과 사물에 대한 고찰이나 삶의 순간에 대해 관찰하며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여러가지 사회 규범과 규제의 빈틈, 한 사물의 쓰임의 재발견, 삶과 사물과 연결된 하나의 가르침 등.
예술이란 단어의 어원은 어떤 물건을 제작하는 기술과 같았지만, 현재 우리 삶에서 예술이 지닌 가치는 물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힘이 있다.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디자인과 발명을 해온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현재는 보완과 발전 정도가 더 많은 듯 싶다.
음악의 역사를 본다고 했을 때 이전의 것을 부정하거나 개선하고자 하는 부분을 통해 새로운 장르가 탄생했고, 현재는 전자기기를 활용한 음악이 생겼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는 여러 장르를 한 데 모은 조화를 통해 새로운 장르가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이유에서 오히려 전통적인 것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 현 실태인 듯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원시적인 주술부터 시작해서 단체에서 발생하는 집단 심리와 개인의 고립으로 인해 망가져가는 인간의 본성 또한.
감정 또한 원시부터 있었던 근본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이어져오고 있고 많은 예술가의 영감의 원천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음식을 담는 원시의 토기 또한 담아야 한다는 용도를 위한 물리적 형태는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그 물건을 이루는 재료가 달라졌을 뿐,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무언가의 역사를 훑고 나서 지금의 삶을 돌이켜보면 변한 것도 많지만 변하지 않은 것 또한 많다.
그 변화 사이에도 좋은 변화와 좋지 않은 변화 또한 존재한다.
이 부분에서 좋고 나쁘다는 기준을 삼는 것은 일반화가 아닌 그저 그 시대에 따른 변화를 얘기한다.
꼭 예술을 하지 않더라도 삶에 있어서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일부에 대해 관찰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답을 찾아간다.
예술가 각자가 삶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사람들에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예술가 본인이 먼저 삶에 대해 시야를 열고 변화하며, 느꼈던 부분을 전달하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바로 관찰이다.
보편적인 쓰임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다.
또한 생각없이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도덕적인 부분을 꼬집어 주는 것 또한 우리의 역할이다.
사람들이 더욱 성숙해질 수 있는 변화의 씨앗을 마음에 심어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할이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본인 스스로 먼저 겪고 사유하고 관찰해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삶의 큰 흥미가 아니라면 어쩌면 당신이 예술가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2. 추상화.
미술에서 사용하는 단어와는 다르지만 맥락은 같다.
관념을 ‘추상화’하는 것이다.
느끼는 감정과 머릿속에 연상되는 형체가 없는 무언가를 1차적으로 가시화하는 과정이다.
본인이 느낀 무언가를 감각화하여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그것이 바로 관념에서 파생된 추상을 또다시 관념화하는 것이다.
추상화가 Mark Rothko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색면과 색감의 배치를 통해 감정을 이끌어냈다.
표현 기법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표현한 의도가 중요하다.
우리는 몸이라는 붓으로 움직임을 그리는 사람이다.
순간적인 경험을 몸으로 전달한다.
보인다는 의미에서 누군가는 직접적이고 사실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행위의 종류에 대한 부분을 시각적으로 정밀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선 기본적으로 추상적이지 않을까 싶다.
때로는 움직임의 방향과 형태에 따라서 형식이란 것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것은 미술사에 존재하는 수많은 ‘주의’와 마찬가지인 부분이다.
우린 눈, 코, 입, 귀, 몸 등 세상을 느낄 수 있는 기관이 있는 덕분에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보여지는 것 안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그 공기와 흐름은 머리와 축적된 시간이 느낀다.
보이지 않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이다.
물론 추구하는 표현, 전달방식에 따라서 그 순서는 본인의 자유이다.
이토록 글을 적고 있는 이유도 이전에 겪었던 경험을 글자를 통해 누군가가 느끼고 상상할 수 있도록 시각화하고 있는 작업이다.
글을 기존의 배열을 모두 무너뜨리고 감정이 느껴질 수 있는 어떠한 배열을 설정한다면 지금의 이 직접적인 표현방식이 추상적인 표현방식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러 단어를 나열한다.
떡볶이, 폴리에스테르, 별, 지렁이.
답은 정해져있지 않고 이야기가 스스로의 상상을 통해 나올 수 있도록 열려있는 상태이다.
 3. 형상화.
형상화는 추상적으로 나열한 것 중에서 어떠한 규칙이나 법칙을 발견하고 그를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마찰력을 통해 바퀴를 개발하거나 기압을 이용해 주사기를 개발하거나 등등.
관찰하고 추상적으로 표현하다 보면 보이는 것들에 대해 실험하고 더욱 더 명확하게 표현하고자 시도하는 것.
예를 들면 감정의 종류 중에서 분노를 처음으로 느끼고 관찰하고 표현한다고 했을 때 분노로 인해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있다.
우선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느낀다.
감정의 교류를 느끼고, 그 뒤에 시각적으로 신체의 변화가 느껴진다.
이 부분이 형상화이다.
그리고 그 신체적인 변화는 어떤 형태이고, 그 감정으로 인해 변화하는 주변과 그 감정을 교류하는 당사자의 반응 등은 구체화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몸의 긴장과 가쁜 호흡, 혹은 반대로 침착한 호흡, 맞아 죽는 사람, 부서진 사물, 도망친 사람, 우는 사람 등.
창작의 과정은 글로도 미처 표현하기 힘든 만큼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것을 느낀다.
이전의 추상화는 관념적인 부분을 감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 과정이다.
형상화는 디테일한 부분을 만지기 이전에 추상화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감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큰 틀을 잡는 과정이다.
여러 형상을 시도해보고 결정하는 과정.
 4. 구체화.
이전에 경험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이다.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만들어 보는 이가 현실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과정이다.
감정이 들어가기도 하고 상황에 맞는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
놓치고 있는 부분에 대해 끊임없이 검��한다.
조각에서 다비드상을 비유로 들자면 돌을 쥐고 있는 근육의 모양에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없는지,
돌을 쥐고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에 이상은 없는지, 골리앗과 싸우고 있는 이의 몸의 긴장감을 이질감없이 표현하고 있는지 등등.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에 완전한 것은 불완전함과 함께 하고 있는 순간과, 그를 인정하고 불완전함을 이겨내고 완벽해지고자 하는 마음가짐에 있다고 본다.
관객의 눈은 누구보다 날카롭기 때문에 관객 본인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라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자연스러운지 부자연스러운지.
 -반대의 힘
 1. 하고 싶은 대로.
그간 즉흥을 하며 움직이고 싶은 대로 움직였다.
느껴지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몸이 가는 대로 두는 것.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스스로 정한 틀이 있거나 부모와 주변이 정해준 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표현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해선 그간 가지고 있던 삶과 생각의 습관을 고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주변에서 어떻게 바라보는지 스스로 예상하다 보면 정작 바라보는 당사자는 그렇게 느끼고 있지도 않은데 섣불리 판단하고 믿게 된다.
그로 인해 위축되고 표현의 반경이 좁아지게 된다.
누군가가 느끼는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적으로 물어보고 듣거나, 일단 보여주고 반응을 살피는 것이 확실한 방법 중 하나이다.
시간이 단축되고 불필요한 감정 낭비 또한 없다는 장점이 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는 상태에선 나에게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외부의 환경 또한 활용할 수 없으며, 본인의 깊은 곳에 갇혀 외부와 단절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하기 위해선 가진 것을 바닥까지 토해내어 본인의 상태를 점검하고 주변의 반응을 점검하고 환경을 새로고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워야 다른 것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표현하는 그 순간을 적나라하게 진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인해 자유로워지고 그 다음을 바라볼 수 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좋다고 생각하는 이미지 안에 스스로를 가두다 보면 본인이 가진 무궁무진한 매력을 그 이미지 하나를 위해 버리는 꼴이 된다.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 말라.
 2. 하고 싶은 것만 빼고 다른 것들.
하고 싶은 것의 반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 1번의 하고 싶은 대로 해보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간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움직였다면 이번에는 그 순간의 욕구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 흐름을 거부하고 가고자 하는 곳의 반대로 움직이거나 옆길로 새는 것.
이전에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갔다면 움직이기 이전에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앞으로 걸어가고 싶다면 뒤나 옆으로 걸어가거나 뛰거나.
하고자 하는 행위만 제외하면 여러 가능성이 펼쳐지는데, 여기서 이 훈련의 장점이 드러난다.
하고자 하는 것만 한다면 앞으로 걸어가는 것에서 그치겠지만, 그와 반대로 움직이려 하다 보면 표현의 방식에 대한 선택의 한계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행위자 본인만 알고 있겠지만, 보는 이에게는 예상할 수 없는 흥미진진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동작, 새로운 호흡, 새로운 생각.
뛰거나 앉고, 돌고, 안 움직이고 등.
생각이 많아지면 망설이게 되고 움직일 수 없다.
삶의 재미는 ���숙하고 반복적인 것도 있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오는 그 흥미 또한 크기 떄문이다.
춤에만 적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적용된다.
그동안 해왔던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본인의 현재 상태에 대해 한 번 생각하고 발전을 위해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시도해 보는 시간.
그 시간은 항상 삶에 대한 활력을 불어넣고 보다 성숙한 자신으로 인도해주었다.
나중에 일이 잘 안풀리거나 너무 일이 잘 풀렸을 때 검토해볼 때도 아주 유용할 것 같다.
 3. 접촉 하지 않는 접촉 즉흥.
접촉(연결) 즉흥에서 중요한 부분은 연결성이다.
붙지 않아도, 소통하고 있지 않아도 그 순간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엔 단순하게 붙지 않으려고 하는 즉흥 훈련이다.
기존에 몸을 맞대고 형태를 만들고 호흡을 같이 했지만, 다양성이 떨어졌다.
붙고 싶은 순간엔 붙지 않고 붙지 않고 싶을 때는 붙고.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즉흥 하는 동료들 또한 그 주제를 가지고 움직이다 보니 붙지 않아도
행위자로서는 연결되어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보다 강렬했다.
멀리 떨어져 함께 있지 않아도 생각하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같은?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지 않은 것의 범주 안에서의 다양함 위에 하고 싶은지 하고 싶지 않은지를 선택하는 범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알기 위해선 순간을 헤쳐나가기 위해 여러가지를 시도해본 경험이 필요한 것 같다.
이번 훈련에서 생각해보면 아쉬운 부분은 공간을 넓게 활용하지 않은 것이 떠오른다.
비록 시작은 작은 에너지이지만 꾸준히 훈련해서 이후에는 더 넓은 공간을 채우고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다.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Text
2020. 7. 10 금요일 현대무용 훈련일지 및 스스로의 초점
-소리에서 노래로.
 1. 소리의 다양성.
하나의 나라에 태어나서 보편적으로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언어를 지니고 살아갈까?
특별히 언어에 관심이 있지 않은 이상 환경에 따라 필요에 의해서 모국어를 포함해 2개 국어, 3개 국어 정도 할 듯 싶다.
나에게 잘하진 않지만 귀에 익숙한 언어는 영어, 중국어 정도?
영어는 조기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고 학교에서 제일 좋아했던 과목 중 하나이고, 중국어 같은 경우는 고등학교 시절에 외국어 과목으로 선택해 이수했다.
언어마다 제각각 다른 발음과 소리가 존재한다.
영국 같은 경우는 신분 차이에 따라 배우는 영어 어조가 다르고, 같은 영어권 나라라고 해도 발음과 소리가 다 다르다.
한국에서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표준어 등등 익숙하지만 다르다.
소리를 내는 기관도 우리의 몸에 해당하기 때문에 팔과 다리와 마찬가지로 쓰면 쓸수록 성장한다.
다양한 소리와 발음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의 다양한 언어의 수가 가능성이 아닌 사실임을 증명하는 꼴이 된다.
인간이 신은 아니지만 집중하고 반복적으로 갈고 닦을수록 더욱 더 발전한다는 것은 수세기가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사실임이 분명하다.
경험해보지 않았다고 해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2. 소리에 집중하기.
예전에 교회에서 단체로 수련회에 간 적이 있다.
예배를 하는 중에 ‘방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다 단어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하늘의 말을 하는 것이라 알고 있다.
이 훈련 또한 방언의 형태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익숙한 한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얼굴의 많은 근육과 혀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방향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하여
기존의 것을 허물고 새로운 소리와 발음으로 발전해가는 훈련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원초적인 감정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보조적인 요소이지, 감정을 대신하진 않는다.
소리와 언어에 담겨있는 것도 결국 호흡과 감정과 상황이다.
익숙한 언어가 흐려지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과 호흡이다.
그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속에 있는 날것을 느낄 수 있으려면 그 경지에 다다르기까지 집중이 필요하다.
처음엔 의도적으로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시작하고, 그동안 사용하지 않은 발음과 소리를 사용한다.
조금씩 적응해가며 소리는 점점 커지고 내면과 외부의 자극, 충돌을 받아들인다.
한국어, 중국어, 독일어 등 그간 우리가 매체와 무의식에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여러 발음도 나오는 경우도 있다.
집중을 하고 그 흐름을 따라가려 노력하다 보면, 소리의 질감은 더욱 다양해진다.
소리와 발음이 기존의 익숙한 것에서 탈피하고 나면, 감정이 들어온다.
처음의 어색한 감정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나를 움직이는 감정.
무언가 감정이 느껴질 때, 감정에 맞는 단어를 알고 있지 않아도 나만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감정에 맞는 언어를 순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것이 된다.
그 나만의 감정과 언어에 집중해 따라가다 보면, 그 감정과 언어에 맞는 제스처가 나온다.
하나의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가 이렇게나 많이 있다.
소리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그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 소리, 감정, 제스처가 따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의 리듬을 쭉 따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노래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 순간을 경험한 나는 노래의 역사를 훑은 꼴이 된 것이 아닐까.
 3. 움직임의 탐구에 대입해보기.
소리에서 노래로 발전하는 훈련을 겪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든다.
순간 순간 나의 집중을 끌어내리는 경우가 있다.
위의 훈련 뿐만이 아니라 삶에서 그리고 움직임에서.
내가 겪은 것을 나열하겠다.
 a.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감각을 받아들일 것.
 b. 감정을 느끼고 표현함에 있어서 진심으로 할 것.
 c. 외부의 자극을 수용할 것.
 d. 진실된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쑥스러워 망설이지 말 것.
 e. 하고 싶은 대로 할 것.
나의 내면에서 그리고 외부에서 나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존재하고,
내 안의 소용돌이를 밖으로 표출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존재하고,
무언가를 느끼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우린 훈련을 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이들을 이해하고 이겨내기 위함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는 시선과 감각을 열어야 하고, 시선과 감각을 열기 위해서는 집중하고 진지한 태도가 필요하다.
진지하게 집중하기 위해서는 드러내는 것에 대해 망설이지 않아야 하고, 망설이지 않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해선 시선에 굴복하지 않아야 하고.
결국 나의 주변 모든 것들보다 이 움직임 혹은 어떠한 행위가 가장 삶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여기는 것이다.
발전하고자 하는 욕심, 인내심, 의지, 호기심.
하나의 제스처를 끊임없이 신경을 쏟아 집중해서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소리가 노래가 되었듯이 제스처가 춤이 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나중에는 종합적으로 예술 행위를 하겠지만, 우선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자 하는 것은 춤이기 때문에 춤에 기준을 두고 생각한다.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Text
2020. 7. 7 화요일 현대무용 훈련일지 및 스스로의 초점
-걷고, 서고, 달리고, 뛰고, 쓰러지기.
 1. 비어있는 속.
오늘 움직이며 느꼈던 점은 ‘내 안에 채워져있던 것은 무엇인가?’ 이다.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걸으면서, 가만히 서 있으면서, 달리면서 그리고 여러 행위를 하면서
이전보다 주변을 인식할 수 있는 범위가 조금 늘어났다.
또한 각자의 에너지로 장식해야 하는 무대 공간 안에서 나만의 에너지를 내뿜고자 인식하려 노력 중이기도 하다.
하지만 걷고, 서고, 달리고, 뛰고, 쓰러지는 그 순간에 나는 어떤 걸 느꼈는가?
그 순간에 표현하고자 했던 나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무언가를 바라볼 때, 혹은 무언가 행위할 때 가지고 있어야 하는 무의식적인 목적성이 드러났는가?
무대 위에서 올바르게 걷는 법을 훈련받는 것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득 생각이 드는 부분은 행위자의 머릿속을 ‘걷는다.’ 라는 생각이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닌,
‘무엇을 위해 걷는가.’ 가 될 수 있도록 그 공간 안에서 본인으로서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 글을 적고 있는 이 순간에도 ‘글을 적는다.’라는 목적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적기 위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충동과 갈등의 소용돌이가 있는 것처럼.
 2. 흐름과 순간적인 멈춤.
걷다가 멈추는 건 달리다가 멈추는 것보다 비교적 쉬운 것 같다.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이동에너지가 비교적 적기 때문이겠지.
달리다가 중간에 멈추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은 무엇일까?
쉽지만은 않은 이유는 바로 내가 달리고는 있지만 멈춘다는 계획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멈추기 위해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달리다가 멈춰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여러 상황을 다채롭게 표현하기 위해서 상황에 따른 기본적인 부분들을 끄집어내어 훈련중이다.
이유는 무대에 작품을 올리기에 앞서 기본적으로 몸을 올바르고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내 몸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지만 그 방법을 익히기 위해서 내 경험에 빗대어 이해를 해야 하는 부분이 꽤 많은 것 같다.
여러 순간을 떠올리며 어떠한 물리적 작용이 일어나는지, 무게의 중심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물건을 들고 내리는 것과 돌다리를 건넌다던가, 나무를 벤다거나 등등.
지금 글을 적으며 몸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뇌와 뇌를 제외한 신체가 서로 잘 소통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호흡.
두 다리는 땅에 고정시킨 후 체중을 발바닥으로 느낀다.
그리고 위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전에 했던 2번 플리에를 한 상태에서 손과 손 사이의 에너지를 느끼는 훈련과 살짝 비슷하다.
체중을 바닥에 내린 상태에서 축을 단단히 고정한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상체에는 힘을 빼고 꼿꼿하게 서있기 위한 다리의 근력을 키우고 등등..
하나씩 해결해가다 보면 또 다른 문제점과 보완해야 할 부분이 생긴다.
이전에 이미 해결했던 문제도 다른 부분을 해결하고 나면 또다시 문제가 되는 경우 또한 생긴다.
다리를 완전히 편 상태가 아니라 다리를 약간의 긴장 상태를 느낄 수 있도록 살짝 굽혀준다.
상체의 움직임을 통해 에너지의 확장이 이루어지다 보면 다리가 펴지고 발이 살짝 뜨긴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체중이 바닥에 박혀있다는 느낌이 있다면 허용되는 범위가 아닐까 싶다.
우선 이렇게 체중은 고정한 상태에서 그 위의 몸을 움직인다.
팔을 휘두르기 위해서 들어가는 힘은 어느정도일까?
귀 옆에 앵앵거리는 모기를 쫓아내기 위해 팔을 가져가 휘두르는 힘은 어느정도일까?
큰 물체를 들거나 큰 힘이 필요한 움직임은 그만큼 힘이 필요하겠지만, 움직임은 무작정 힘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체중이동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예를 들어 나무에 매달린 과일을 따기 위해 바닥부터 뻗은 손까지 에너지가 전달되는 그 에너지의 흐름이다.
순간적인 호흡으로 인해 몸이 확장되고 수축되는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때에 따라 느껴지기도 하고 때에 따라 안 느껴지기도 하지만 차차 그 기복이 줄어들고 있다.
힘을 주는 것보다 힘을 빼는 것이 더욱 더 어렵다.
하지만 힘을 빼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정확한 움직임을 위해 필요한 근육이 약하면 주변의 근육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힘을 빼는 것이 중요하다.
주변의 근육을 필요 이상으로 사용하면 정작 기르고자 하는 곳은 운동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절’을 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그 위를 웃도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형태 만들기.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모델이 포즈를 취하듯이 형태를 만든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최후의 만찬처럼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정지된 그림처럼.
보는이가 느낄 수 있도록 무용수가 온몸을 사용하여 형태를 취한다.
처음엔 거울을 보며 형태를 만들었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있어서 각자의 움직임과 에너지에 집중하다 보니 거울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각자 스스로 상상하며 몸을 움직이다 보니 어떻게 보일지 명확하게 상상할 순 없겠지만 그 순간에 느껴지는 감각을 통해 몸을 움직인다.
트러스트 무용단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선생님들께 즉흥 훈련을 받으며 친구들과 느꼈던 그 깊이감이 얕았다면, 이제는 각자 많이 가까워진 덕분인지 그 깊이감이 더 깊어진 느낌이다.
평소 서로 신뢰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는 그 유대감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보는 이들이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매번 느낀다.
사람 일이라는 것이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성숙한 한 사람이 되어가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상황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노력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평소의 삶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무대 위에서 형태를 만들어갈 때도 그 접점이 뚜렷해진다는 것을 잊지 말자.
-가르치기.
새로 온 친구를 보며 느낀 점이 있다.
바로 쑥스러워한다는 것.
몸을 움직이는 방법을 잘 모르는 부분도 있겠지만 은표라는 친구를 보면 또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은표는 몸을 움직이는 법을 잘 모르더라도 쑥스러움 없이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친구니까.
몸을 통해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쑥스러움과 거부감이 없어야 한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잘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내 몸을 굳게 했으니까.
어떤 공간에서 무언가를 하든 왜 우리는 꼭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걸까?
꼭 아름답지 않더라도 실패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 말이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스스로의 고집도 있겠지만 다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주변의 여김도 한몫하는 것 같다.
넘어지고 의도한 대로 잘 되지 않았을 때의 주변의 반응과 시선.
트러스트 무용단의 선생님들께 배운 것이 있다.
나 또한 누군가를 나중에 가르칠 때가 온다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완벽하지 않더라도 내가 꾸준히 가르치고 그리고 배우는 이 또한 스스로 꾸준히 노력하면 나아질 거라는 신뢰를 밑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패하더라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늘 알려주는 것도.
윤은 감각을 온몸으로 듣는 것.
기태는 포즈를 정하고 포즈로 이동하는 순간을 움직임으로 채우는 것.
병인은 일상의 움직임에서 찾는 것.
이렇듯 각자 움직임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
서로가 움직임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머리로 이해하고 적용해 보면 조금 더 다채롭게 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가진 방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 서로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고.
서로의 방식을 통해 ‘논다.’는 느낌을 가지고 즉흥을 하다 보니 보는 이는 어땠을지 잘 모르겠지만,
함께 움직이는 우리는 즐겁고 행복했다.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Text
2020. 6. 30 현대무용 훈련일지 및 스스로의 초점
 -즉흥
 1. 순간적인 오브제
공간과 사람과 관객만 주어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가능성이 무한대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혹은 주변에 존재하는 날것의 가시적인 오브제는 상황을 풀어감에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은 분명하다.
내가 입고 있는 옷가지나 머리가 긴 무용수의 머리끈이나 주머니속에 들어있는 무언가.
혹은 야외 공간이라면 고여있는 물이나 나뭇가지, 나뭇잎 등 무수히 많다.
이 오브제를 사용하여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오브제가 가진 특성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의 작품을 준비하면서 사용하고자 하는 오브제에 대해 조사하고 사색하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노력이 담긴 시간은 무시할 수 없다.
그 한계란 것은 내가 순간적으로 그리고 지금껏 자연스럽게 쌓여온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오브제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한계가 드러났을 때 보는 관객들 또한 흥미를 잃을 수 있다.
움직임을 배운 누군가는 ‘나라면 저렇게도 움직였을 텐데.’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배우지 않은 누군가는 극을 이끌어가는 이에게 사고의 흐름을 맡기기 때문이다.
 2. 끝맺음
오늘의 즉흥.
처음의 시작은 머리끈.
순간적으로 등장한 오브제이다.
하나의 머리끈으로 시작해서 동료의 머리끈을 풀어 두 개의 머리끈으로 움직임을 이어갔다.
여기에서 내가 가장 신경썼던 부분은 작은 물체인 까닭에 관객들에겐 잘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먼저 직접적으로 보여주어 물체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주고자 하였다.
무엇을 매개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의아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두 개의 머리끈을 교차해 움직임을 이어나가다 한 번의 플롯이 끝났다.
이 부분에서 다음 플롯으로 이어나갈 때 머리끈을 계속해서 이어나갈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혹은 지금보다 더 발전시켜 흥미를 돋굴 수 있는 요소가 남아있는지에 대한 것.
순발력을 요구하는 것 같아 많은 경험이 쌓여야 하는 것은 분명한 듯 싶다.
이어나간다면 어떻게 했을지 순조롭게 흐름을 이어나갈 수 있었겠지만, 끝내는 것을 선택했을 때 어떻게 했을지가 더 고민이 되는 것 같다.
삶의 지표에서 끝이 아닌 시작점만 경험하고 있기 때문일까?
마무리짓는 것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은 누군가는 끝내는 방법에 대해 어색해 할 것 같다.
흥미를 잃어버린 오브제는 확실하고 어색하지 않게끔 재치있게 극의 테두리 안에서 우선 내보내자.
 3. 호흡(공기)의 변화
제스처, 시선, 걸음 등으로부터 시작해 움직임으로 발전되는 순간이 있다.
출발점부터 쌓고, 쌓고 쌓아가며 하나의 완성체가 되어간다.
누군가 혼자 무대 안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호흡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을 때 다른 누군가는 바라보고 있어야만 더욱 더 집중되고 안정되는 부분이 있다.
혼자 움직이는 무용수는 호흡에 호흡을 쌓고 쌓아가다 결국 하나의 완성체가 되는 경우가 있다.
1막, 2막, 3막 같은.
막이 끝나는 순간에 잠시간의 멈춤이 있고 길지 않은 그 순간은 이전의 호흡을 끌어오지만,
그 멈춤이 길어지게 되면 자칫 어색해질 수 있다.
지금껏 공들여 쌓아온 결과가 무너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멈춤의 순간에 함께 호흡하며 대기하고 있던 무용수가 나와서 제 2막을 펼칠 수도 있고
또는 멈춤 또한 다음의 움직임을 위한 것이라는 듯 자연스럽게 움직임을 다시 만들어가는 것도 있겠다.
관객은 즉흥이라는 요소에 대해 이미 정보를 갖고 있어 즉각적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열린 시선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 말은 즉슨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 온전히 시선과 사고를 맡겼다는 말이 될 수 있다.
만들어진 작품이 아닌 가능성이 담긴 시간이기 때문에 관객들의 가슴엔 또다른 ‘기대’가 담겨있다.
 4.행위자간 서로에 대한 Feedback
a. 하나의 대상에만 모두 집중되어 있었다.
하나의 지점, 오브제에만 집중되어 있던 나머지 보는 이의 관점에서 답답함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셋이 있는 상황에서, 둘이 오브제로 만들어가는 상황을 나머지 한 명은 그 상황에 대한 연결된 움직임을 독자적으로 펼쳤으면 어땠을까?
혹은 어떠한 상황에서 모이고 흩어지고 다채롭게 공간을 더욱 더 누볐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집중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제스처나 걸음에서 그치고 춤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발전되고 퇴보하는 것에 대해서 인지를 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늘 변화해야 한다는 것.
b. 상대방의 성격, 습관, 춤에 대한 접근방식, 사물에 대한 시각 등 상대방에 대한 이해도.
각자 개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외모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다.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브제와 여러 조사를 통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이해도는 필수요소인데, 
함께 하는 무용수에 대한 이해도 또한 필수라는 것을 장애인과 함께 했던 시간 안에서 배웠다.
상황에 따른 생각의 변화, 표정의 변화 누군가를 배려하는 성격인지, 틀이 없는 성격인지 등.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내며 관찰하다 보면 누적된 경험은 무시할 수 없다.
평생 한 사람을 보며 알아가는 것도 힘들지만 우린 해내야 한다.
완성도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작품과 삶에 있어서.
c. 연대책임.
함께 올라간 무대에서 당연히 책임은 함께 진다.
실력의 기준표는 존재하지 않지만 누구나 다 장단점과 강한 부분, 그리고 약한 부분이 있다.
아이디어가 좋은 사람, 몸을 잘 움직이는 사람, 리듬을 잘 타는 사람 등등..
몸을 쓰는 무용수로서 모두 고루 갖춰야 할 덕목이지만 모두 갖추기에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누군가 꺼낸 머릿속 아이디어를 같이 있는 관객과 무용수에게 던졌을 때, 판단해야 한다.
그 아이디어를 받았을 때 받아서 흐름을 이어가야만 하는 순간인지, 연결성이 없었기 때문에 흘러가게 두어도 어색하지 않은 순간인지.
행위를 하는 목적은 본인의 어떠한 해소를 위해서 할 수 있겠지만, 공연의 목적은 행위자가 아닌 보는 이의 초점에 맞춰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목적은 좋은 공연일 것이다.
때에 따라서 내가 돋보여야 할 순간이 자연스럽게 있다면 해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는 상태에서 억지로 본인의 욕심을 표출하는 순간 둘 중 하나다. 
공연이 망하거나, 함께 하는 무용수가 정말 힘들어지거나.
순간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반복하는 순간에서 목적과 방향성을 잃지 않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상황에 대해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 공간 안에서 믿고 의지할 이는 나와 상대방 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상을 자극한다는 것
 1.단장님께서 그간 해오셨던 ‘콩나무 놀이터’.
아이들과 함께 하는 즉흥 공연이다.
아이들에 대한 접근방식이 한국의 보편적인 교육방식처럼 다가가는 것이 아닌, 상상력을 자극하고 유치하지 않게 흥미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단장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다 보니 들었던 생각은, ‘아이와 그리고 자라나서 성인이 된 관객과 공연을 관람하고 참여하는 것에 있어 다를 게 뭘까?’ 라는 것이다.
나이에 관계없이 상상력을 자극해야 한다는 것은 매한가지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상력을 자극하여 흥미를 이끌어낸다는 것에 대한 맥락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살펴보자.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Video
youtube
William Forsythe's Chamber Works - N.N.N.N.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Video
youtube
William Forsythe's Chamber Works - THE VILE PARODY OF ADDRESS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Text
2020.6.1 월요일 현대무용 훈련일지 및 스스로의 초점
-쓰러지기
쓰러지는 것에는 여러 에너지가 있다. 우선 쓰러지기 이전에 우리는 몸을 잘 다뤄야 하는 무용수로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넘어지면서 가지고 있던 에너지를 잘 보존하며 떨어질 의무가 있다. 때에 따라 여러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표현의 한계를 두진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다치지 않고 가벼워 보이지 않으면서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우선 이 날엔 쓰러질 때 픽-하고 쓰러지고 픽-하고 일어나는 에너지를 사용했다.피-익-이 아닌 픽-이다. 짧은 순간에 훅-하고 쓰러지고, 짧은 순간에 훅-하고 일어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점은, 쓰러질 때 확실한 방향성을 가지고 쓰러져야 하는 것이고, 일어날 때 쓰러졌던 에너지를 토대로 바닥을 밀며 에너지를 그대로 가지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 그 과정을 길게 늘어뜨리면 근육과 관절이 순서대로 내려갔다, 올라오는 것이다. 혼자 쓰러질 때는 그 주변의 에너지와 감정과 흐름을 가져야 하겠지만, 함께 하는 무용수들과 호흡을 같이 해야 할 때는 또다른 느낌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함께 동일한 호흡을 가지고 함께 일어나고. 서로 다른 순간에 쓰러지고 일어난다고 해도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결속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함께 호흡을 맞추는 기본의 틀 안에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를 알자.
-뒤집기
트러스트 무용단에서 훈련을 받으며 약 한 두 달 전에 단장님께서 해주셨던 때가 기억난다. 지금도 아직 여러가지 깨달아야 하겠지만 그때 했던 것과 오늘 했던 느낌은 사뭇 다르다. 뒤집을 그 순간을 위해서 온몸이 함께 적절한 타이밍을 가���야 한다는 것을 조금 알게 되었다. 바닥을 향해있고 닿아있는 모든 부분을 함께 위로 올리고 호흡 또한 같이. 처음엔 몸에 대한 관심과 의문을 가지고 난 후에는 걷는 것부터 먹는 것, 입는 것까지 생각과도 같이 하나하나 그 순서와 올바른 방법을 찾아가야 하게 되어 당황하고 힘들었지만 조금씩 그 지식과 경험, 그리고 내공이 쌓여가는 성취감이 따라 오니 기분이 썩 좋다. 잘 뒤집고 등으로 잘 착지해야만 다치지 않을 수 있다. 하나의 행위를 위해서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꼭 하나의 작품을 위해서 함께 움직여야 하는 여러 예술가와 세계의 기반이 되는 노동자들과도 같다.
-Touch and move
한 사람의 몸의 어떤 부위들에 손을 대어 정보를 주고, 그 정보를 받은 부위가 에너지의 주체가 되어 움직임의 확장을 꾀하는 훈련이다. 우리 몸을 움직이는 부위는 어디일까. 근육은 관절의 움직임을 도와주는 기능을 가졌고, 실질적인 움직임, 즉 회전 혹은 접었다 펴는 것은 관절과 관절 주변의 근육이 주체가 된다. 모두 함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겠지만, 이 훈련에서 먼저 신경써야 하는 부분은 터치를 해야 하는 부위이다. 진행방향으로 가고 있는 부위를 터치한다고 해도 무의미한 행동에 불과하다. 이미 터치하기 전에 에너지가 흐르고 있거나, 곧 흐를 곳이기 때문이다. 움직임의 확장을 유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 관절과 그 주변을 접촉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 하고 있는 움직임에서 그 상황에 현실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부위를 알아야 한다. 움직이고 있는 중에 어느 부위를 터치해야 자연스러운 흐름과 죽어있는 손과 발을 살릴 수 있거나 어느 부위에만 집중하여 놓치고 있는 부위를 인식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주 목적이지, 무작정 접촉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항상 훈련을 할 때 그 목적에 대한 고민을 해 보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체중 싣기
체중 이동에 관하여 늘 생각하고 있다. 다리를 들거나 걸음을 걷거나, 앉아있거나 여러 활동을 하면서. 정확한 형태와 호흡을 보여주기 위해서 체중은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무용 뿐만이 아닌 일상에서도 기본 중에 기본적인 부분이다. 두 다리로 서 있고,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있을 때 우리가 진공 상태에 떠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중력은 늘 우리 곁에 있다. 그리고 그 중력을 이겨내기 위한 행위가 체중을 싣는 행위이다. 확실한 에너지의 방향성과 중심이 잡혀있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순간의 체중을 인식해야 한다. 오랫동안 훈련하여 습관이 되어있지 않은 현재 상태에서는 습관이 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반복이 필요하고, 여러 형태와 체중을 싣는 곳에 따른 변화를 많이 경험하자.
-Contact improvisation
Tumblr media
단장님의 수업 시간엔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라는 짧다고 하면 짧은 순간에 여러 목적을 가진 훈련을 받을 수 있다. 단장님의 작품 중에 <시선>이라는 작품 중의 한 장면을 연습해보고자 하셨다. 그림과 같이 4명이서 서로 등을 맞댄 상태에서 함께 이동하는 것. 컨택 즉흥에서 이전에 얘기했던 것과 같이 서로 체중이 맞닿아 있는 하나의 접점이 존재한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서로 등을 맞대고 있고, 그 넷의 체중이 함께 맞닿아 있는 접점이 존재한다.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함께 움직인다. 그 중 한 명, 혹은 두 명이라도 체중을 싣지 않으면 몸이 방향을 잃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혹은 동료가. 처음엔 움직임에 원동력을 불어넣어 줄 감정과 그에 따라 파생되는 행동이 없었다. 이후에 우리가 맞대고 있는 등과 그 사이에 하나의 내 욕망의 꿈을 실현해줄 무언가가 있다고 상상하게 된다면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해주셨을 땐, 행동의 확실한 동기가 생겼다. 우리가 작품을 만들 때 하나의 흐름을 통해 그 움직임의 흐름을 이어가는 것 또한 중요하겠지만 우선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본질이 아닐까 싶다. 감정, 생각은 원인이며 행동은 결과니까. 때에 따라 역전되기도 하지만. 만세와 함께 컨택을 했을 때 이전보다는 조금 느낌을 알았으려나. 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즉흥 작품
우린 네 명이고, 앞은 관객석이고 극은 시작됐다. 그 안에서 우린 준비된 것도 없고 가지고 있는 그대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 만세가 먼저 시작했을 때 그리고 그 다음에 기태가 나와서 만세의 움직임에 상상력을 더했을 때, 나는 그 둘의 에너지를 상상하며 이어나가고자 하기 보다는 내 움직임만 생각했다. 그 결과는 그 순간 관객이었던 단장님께서 느낀 그대로 전혀 연결성이 없는 것. 그간 복잡한 본질적인 감정을 표현하려고만 하다 보니 뜻대로 되지 않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서, 이번엔 비교적 접근하기 쉬운 것을 택하려다 보니 전체적인 흐름을 읽지 않은 결과가 나와버렸다. 우린 몸으로 상상하고, 생각의 상상에서 파생되어 즉흥적인 움직임을 취하게 된다. 작품을 통해 우리는 관객의 생각을 바꾸고 상상력을 일으키거나, 정보를 주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우리끼리 그저 하고 싶은 움직임만 내세우는 것은 작품이 아닌 그저 우리끼리 노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첫 발을 내딛은 누군가의 행위를 보며 나는 어떠한 자극을 받고, 그 자극을 나의 상상에 입혀 더욱 더 구체적으로 주제를 명시하고, 그리고 뒤따라 나올 그 다음 무용수 또한 보다 구체적으로함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야기를 이어가다 마무리가 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일 땐 과감하게 새로운 주제를 관객과, 동료에게 던져주며 또다른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새로운 자극을 준다. 각자 다른 상상을 토대로 결속을 꾀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일치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또한 끊임없이 내 머리는 굴러간다. '앞에 나간 무용수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저 사람의 상상을 내가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의미가 흐려진 느낌이 드는데 어떤 새로운 주제를 던져볼까?’, ‘함께 있는 이들로 인해 나는 어떤 감정과 에너지를 느끼고 있는가?’ 등 여러 생각들. 무의식과 의식이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부분이 참 어려운 것 같다. 각자 할 일을 하다 보면 누군가의 에너지가 좋아서 독립적으로 보여지게끔 하는 것도 중요하다. 들어갔다 나왔다 순간의 완성을 위해서 여러 변화는 늘 염두에 두어야 하고. 선택의 연속적인 순간은 늘 쉽지 않다. 그에 따른 결과와 책임을 함께 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함께 한다는 것은 좋기도 하다. 얼마나 가까운지, 얼마나 많은 것을 교류했는지, 어느 정도까지 신뢰하는지, 동료 무용수와의 관계 또한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서로 진심으로 함께 한 시간이 많을수록, 서로를 관찰한 시간이 많을수록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는 것 같다. 때로는 그것이 독이 되기도 하겠지만, 우선 알고 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니까. 이 사람의 표정과 습관들, 여러 감정선, 그리고 감정에 따른 표현방식들. 사물 보듯이 관찰하는 것이 아닌 몸과 마음으로 부딪혀야 하는 진실한 순간들! 단장님께서 보는 이의 자유로움에 대해 말씀하셨다. 보는 이가 자유롭다는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 생각해보았을 때, 스스로 한 번 정의해본 것은 작품을 볼 때 감정으로 인해 어딘가 답답하거나 보기에 불쾌하거나 혹은 행위를 봄과 동시에 뇌가 열려 상상력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은 감상하며 자유롭다는 것이다. 반대로 자유롭지 않은 것은, 무언가 그 안에 몰입할 수 없어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함께 감정선을 따라가거나 하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도저히 유추할 수 없어 불쾌한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흥미로운 것을 볼 때 그 안에 나를 던지는 순간에 나의 감정은 열려 자유롭지만, 너무 지루하거나 혼자 할 말만 하고 있는 영화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자면 답답함에 그냥 꺼버리니까.즉흥 또는 하나의 작품을 통해 우린 관객이 이끌려올 수 있게끔 신경을 써야 한다. 감상하며 ‘뭘 말하고 싶은 걸까?’라며 끊임없이 궁금하게 하며, 스스로의 공상에 빠져들어 사고가 끊임없이 흐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바라보고 가는 것이 예술이니까. 이야기와 행동, 그리고 작품을 통해 누군가를 더욱 성숙하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나에겐 목적이다. 알려주고, 함께 고민할 수 있게끔 동료뿐만이 아닌 관객 또한 함께 그 극에 참여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Text
2020. 5. 20 현대무용 훈련일지 및 스스로의 초점
-뇌.
1. 내 안에 집중하는 것. 
단장님께서 요즘 뇌에 대해 공부하고 계신다.
우리의 신체와 감정 등 외부적인 정보를 느끼거나 그 정보를 바탕으로
우리의 신체 모든 부분에 명령을 내리는 Command Center 같은 것이 바로 뇌이다.
나는 뇌에 대해 혹은 해부학을 아직 깊게 접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딱히 지식은 없다.
말씀해주신 부분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교감 신경과 ���교감 신경이다.
교감 신경 같은 경우는 뇌로부터 신경 물질이 내려가면서 어떤 곳을 지나며
그 성질이 바뀌고, 바뀐 성질로서 전달되는 것이다.
부교감 신경 같은 경우는 그와 반대로 초기의 그 성질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나는 뇌에 대해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설명은 우선 여기서 그치겠다.
우리의 목 뒷부분에서 조금 위쪽에 뇌간이 존재하는데,
이 부분에서 에너지가 발생되고, 그 에너지로 하여금 위로 상승곡선을 이루며 다시
가슴으로 들어가는 에너지의 흐름이 담긴 동작을 주셨다.
몸의 구조와 신경계나 어떤 혈관이나 여러 지식을 쌓게 되면 상상력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 싶다.
움직일 때 알고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을 더욱 더 자세하게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니까.
2. 내 안의 흐름에 집중하기.
에너지의 근원은 어디일까.
내가 숨을 쉬는 것부터 혹은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서 생기는 것일까?
근원은 어디에나 존재할 것이다.
수많은 지혜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주변에 널리고 널렸으니까 말이다.
움직이기 이전에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 나는 ‘느끼고 있는가?’ 이다.
느낀다면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이다.
내가 느끼고 있는 무언가 그 근원지에서 시작해 외부까지 확장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확장되어 나간 외부의 에너지가 다시 내 안으로 흘러들어와 안과 밖의 순환.
반대로 외부의 에너지를 통해 내 안으로 확장 또는 축소되어질 수도 있다.
관객에게 느껴지는 에너지는 어쩌면 내가 집중하고 깊은 곳을 바라볼수록 확장에 확장의
연속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는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민한 것들을 실현하고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습득되어야 할 부분이다.
직접적으로 그 자리에 서서 실천하기 전에는 완전한 사실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손끝에 머문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에너지.
내가 팔을 휘두르고, 내가 발차기를 한다.
휘두른 방향에 따라 그 끝에 지속되어지고 있는 방향성을 가진 에너지가 있다.
그간 내가 무수히 와해시킨 에너지의 양이 얼마나 될까?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그 에너지를 조금이나마 느끼기까지 꽤 많은 신경을 쏟아부은지라
작게나마 경험할 수 있었던 것에 너무나도 감사한다.
그 끝에 머문 에너지가 손끝이라 해서 손과 팔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신체이기 때문에 함께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 에너지를 소중히 생각하며 기본적으로 소멸되지 않도록 이어가는 것부터 시작하자.
나는 이것이 ‘호흡’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시는 호흡이란 것의 범위는
당연히 더 넓을 것이다.
그간 그 단어들에 대해 축적된 고민과 움직임이 남다를 테니까 말이다.
나는 이제 그 중 하나를 알았지만, 모든 것은 처음의 ‘하나’로부터 시작하니 알아서 다행이다.
눈으로는 볼 수 있었지만 이번에 몸으로 직접 보고 느끼게 되었으니,
이 소중한 경험을 잃지 말아야겠다.
이 에너지의 흐름을 간직한 채로 이후엔 의도적으로 소멸시키고, 
다시 다른 곳에서 끌어오기도 하고, 여러 가능성이 있다는 걸 느끼고 나니 더욱 더 이후가 기대된다.
4. 진심.
우리가 모든 순간에 진심을 가진 채로 살 순 없다.
하지만 그 진심이란 것이 그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감정을 속이고 있지 않다면, 그건 진심이 아닐까 싶다.
움직이기 이전에 나를 방해하는 여러 요소들이 있다.
누군가 나를 평가할 것 같은 혼자만의 공상과, 혹은 실제로 나를 평가할 누군가가 있다거나,
내가 가진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 아직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 순간에 진심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등등 여러 이유가 존재한다.
시작하기 전에 늘 몸이 굳어버리는 이유는 이러한 생각들을 포용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내가 그 순간에 늘 같은 감정만 느낄 수 없는 이유는 매순간 변화하고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그 부분을 때로는 묵살해야 할 필요도 있겠지만,
우리는 사회에 머물며 그 범위가 너무나도 넓어진 나머지 불필요하게 습관적으로 저항하는 행동을 하는 것 같다.
슬픈 춤사위, 기쁨의 춤사위, 컵을 집는 행동, 물을 마시는 행동.
그것들이 그저 그 목적을 향한 진심이 담겨있다면, 자연스럽게 행동할 것이다.
그렇게 보여야 하고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어떠한 생각이 가로막는 경우가 꽤 많다.
내가 살아가며 내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에 따라 숨기거나 선을 지켜야 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린 어렸을 때부터 드러내는 것보단 누군가를 위해 자제하는 법부터 배워왔다.
현대무용은 나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은인이다.
반대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법을 알려준 사회의 가르침 또한 은인이다.
언제나 균형은 중요하니까 말이다.
내가 움직이며 느껴지는 것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되려 그 느껴지는 감정을 움직임에 반영한다면 껍데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담겨있는 움직임으로 승화할 수 있다.
배제하기 보다는 우선 수용해보자.
5. 조화, 균형, 순발력.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가?
혼자 살 수는 있을까?
혼자의 개념은 어디까지일까?
생물? 무생물?
그 기준이 철학적으로 파고들게 되면 애매모호 하다.
어쩌면 확실할 수도 있다.
무생물에 내가 감정을 투영하면 그 또한 생물로 변한다.
오브제를 이용한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이유는,
오랜 시간 동안 사물에 감정을 담고 그를 이용해 누군가에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것을 초기화하고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린 생물, 즉 인간과 함께 숨 쉰다.
혼자하는 작품이라고 한들, 관객이 있기 때문에 호흡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린 조화와 균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철학을 표현하기 위해서 혼자보다 여러 명이 더욱 더 수월하거나,
더 큰 에너지를 낼 수 있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함께 움직이는 그 순간에 서로 단어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무용수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몸이 말하고자 하는 언어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몸 또한 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서로의 주장만 내세우고 서로 배려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도 불편하고,
보는 이들 또한 불편하고 괜한 돈만 낭비한 기분이 들 테니까 말이다.
그 순간에 전달해야 하는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서로 균형을 맞추는 호흡을 알아야 한다.
때로는 멈춰 서서 바라보기도 하고, 부딪히지 않도록 시야를 열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마음을 열고 그 호흡에 담긴 감정을 마음으로 느끼고 말하지 않아도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들게끔.
함께 하는 이유는 그 결속으로 인해 파생되는 에너지가 그 이유니까.
어떤 미술 장르나 형태를 만들기 이전에 가장 먼저 느껴야 하는 것이 이러한 부분들이다.
가장 어렵지만 가장 기본적이기 때문에 놓쳐선 안 될 부분들.
형태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불나방과 함께 불 속으로 뛰어들지 말자.
6. 달리기.
달리는 이유에 대해서.
가장 원시적인 움직임 중 하나인 달리기.
그만큼 우리에게 익숙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오래된 만큼 달리기를 통해 우린 순수한 비움을 얻는다.
본능적으로 달리기 때문에 그 안에 채우는 것을 잃어버린 것일까?
그 순간에 내가 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왜 달렸을까?
뒤에 누군가 쫓아오지도 않았을 뿐더러, 내 스스로의 선택으로 인해 달리고 있는데 말이다.
목적이란 것을 설정하고 달리지는 않았다.
매번 행위 이전에 과정을 신경 쓰다 보니 막상 움직이는 중에는 무언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
내가 여러 곳을 방황하며 과정보다 순간의 경험에 의존했을 때 얻었던 것들을 돌아보자.
내 왼팔 손목에 새긴 첫 타투.
호기심에 의해, 그리고 별다른 생각 없이 새긴 타투.
그저 다른 것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하다 보면 그 안에 자연스럽게 채워지는 것들이 있다.
예전엔 의미를 중요시했던 터라, 그 습관을 버리기까지 아직은 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일단 움직이고 함께 하다 보니 시작은 비어있었어도 그 중간부터는 충만하다.
내가 누군가를 채워주고, 누군가가 나를 채워주고 이러한 순환을 통해
우리는 그 순간에도 성장하고, 작품 또한 성숙해진다.
이제는 다른 무언가를 느끼기 전까진 그냥 달리는 게 지금으로썬 우선인 것 같다.
달리기에 대해선 글과 생각보다는 몸으로 느끼자.
7. 성장하며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
하루, 한 달, 일 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안에 다양한 것들이 쌓인다.
제도적인 부분에 대한 생각과 인간 관계에 대한 경험과 삶에 대한 고찰 등.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 나를 침범하기도 하고 나 스스로 침범하기도 한다.
내 안에 정보의 형태로서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지금 나에게
사리분별이 가능한 기준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면 나는 어땠을까.
내가 가진 나이라는 숫자는 성숙의 지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첫 사회생활부터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에게도 배우고 노인들에게도 배우고 참 다양한 사람들에게 배웠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고, 생각의 변화로 이끌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올바른 기준을 가지기까지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내가 가진 모든 정보들은 독이 되고, 누군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줄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그간 멀리해온 사람들은 그저 들었던 것, 본인의 이익만을 위한 조언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식에 비하면 극히 일부이다.
100세 인생에서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한들 모든 것에 때를 묻힐 순 없다.
나는 지금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좋은 사람이 되고 있는지 또한 늘 점검하고 있다.
때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해야 할 순간이 있다.
다만 그 변해야 하는 이유가 바른 방향이라면 더욱 더 좋겠지.
사람들마다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다양하니까.
사람이니까 변화는 죽을 때까지 있을 것이다.
좋은 변화로 향할 수 있게 꾸준히 점검하자.
주변에 좋은 에너지를 주기 위해서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며 나부터 변해야 한다.
세상에 성숙한 사람이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건 좋지만,
내가 그 수많은 사람 중에 성숙한 사람이 먼저 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나이가 들어도 삶과 나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자.
세상에 존재하는 톱니바퀴들 사이에서 나는 이러한 톱니를 선택했다.
현대무용과 예술의 형태로서 사람들의 생각에 의심의 잉크를 떨어뜨리고,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노력하며 삶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여할 것을 잃지 말자.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Text
2020. 5. 11 현대무용 훈련일지 및 스스로의 초점
-넘어지기.
1.잘 넘어지기.
난 스스로 살면서 넘어진 적이 딱히 많진 않은 것 같다.
겨울철에 미끄러져 넘어본 것 한 두 번, 체육시간에 달리던 중 친구에게 명치를 잘못 맞아 기절한 적,
언제 넘어졌을까 생각해봐도 기억이 잘 없을 정도로 없는 것 같다.
아, 최근에 작품 안의 동작을 연습하다 돌던 중에 미끄러져 넘어진 적이 있긴 하다.
내가 평소에 조심스러워서 넘어지지 않았던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급하게 달리지 않거나, 정신을 놓고 걷지 않거나 등 굳이 넘어질 일을 만들지 않은 부분도 있다.
예전에 했던 운동 덕분에 조금은 균형감각이 있을지도 모르고.
자, 이날은 넘어지는 훈련을 했다.
막상 넘어져라! 하니까 어떻게 넘어져야 할까? 고민부터 했다.
그리고 그냥 넘어지려고 하다 보니까 외부적인 입력이 없다 보니 더더욱 가만히 있게 됐다.
그렇다면 상상을 해보자.
누군가가 나를 민다는 상상, 걷다가 전봇대에 부딪히는 상상, 멍하니 걷다가 덩치 큰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히는 상상을 한다거나 등등.
한 번은 실제로 느끼고 싶어서 동료와 어깨를 맞대고 서로 밀쳤다.
달리고 있던 중 누군가 나의 옆구리를 민다고 생각할 때, 나는 아마 옆으로 고꾸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꾸라져야 다치지 않게 안전하게 넘어질 수 있을까?
순간 나는 유도의 낙법을 생각했으나, 이후에 흐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옆으로 넘어질 때 살이 많은 부위를 통해 충격을 흡수해보니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반복 훈련이 되어 습관이 있지 않아서 팔이 뒤로 빠지거나 위로 올라가거나
아주 중구난방이었다.
조심스럽게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아마 벌써 다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2.잘 일어나기.
우리가 아이였을 때 우린 걷기 위해 천 번은 넘게 넘어진다고 했다.
잘 일어나서 서 있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도 우린 잘 움직이기 위해 몇 번이고 휘청이고 있다.
자연스러운 것이겠구나 싶다.
살면서 삶에서 휘청이는 순간이 자주 있다.
금전적, 이성 문제, 직업 문제, 그리고 직장 문제 등등 아주 다양하다.
그때마다 우린 삶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기도 하고, 더 강해질 수 있는 순간이라며 기뻐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나는 넘어지면 일어나고 싶다.
어떤 본능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넘어지면 일어나고, 가끔 일어나면 뛰고 싶을 때도 있다.
너무 힘들어서 그대로 가만히 있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결국엔 항상 일어났다.
그리고 그걸 즐겼다.
하고 싶고 평생 즐길 수 있는 직업을 찾으려고 꽤 많은 도전을 해왔지만
마음처럼 잘 풀리지 않은 적도 많다.
이성과의 관계에서도 마음처럼 잘 풀리지 않은 적도 많고, 가족관계 또한 그런 적이 있다.
친구들과 마찰도 자주 있었다.
예전엔 자존심과 성격 차이였지만 지금은 그저 사람과 사람이 맞지 않는 어떤 본질적인 이유란 걸 알게 되었다.
난 그 순간을 꽤 즐기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즐기는 부분이 상당수 차지한다.
오히려 내 도전의식과 오기를 자극하기도 하고, 하나 하나 이해하고 공부하고 해결해나가다 보면
더 성장해있는 내 자신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성장일기를 보거나 듣거나 읽기만 한 사람은 모를 수 밖에 없는
내 피부에 직접 새긴 소중한 날것의 경험이다.
하지만 지금도 엉망진창인 것 투성이다.
그래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 밖에 없다.
가끔은 멀리하고 싸우기도 하겠지만, 그것 또한 인정하고 느낀다는 것에 있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언가 삶에 혹은 움직임에 어떤 흐름을 이어나갈 첫 자극이 오게 되었을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되려 이용해 나아가게 되면 어떨까?
삶에서는 느꼈지만 움직임에서도 또한 느끼고 싶다.
낙하에너지, 원심력 등등.
 3.뛰다가 넘어지기.
뛰어다니다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는  거다.
돌부리에 발이 걸려 의도치 않게 몸이 갑자기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 다들 느껴봤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달리고 있는 도중 다리에 힘이 풀려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 것.
내 몸에 보내는 정신의 신호가 그 돌부리가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리의 힘을 푸는 것에 마음의 시선이 갔다.
그 이후에는 넘어질 때 잘 넘어지는 것에 마음의 시선이 갔다.
그 이후에는 넘어진 힘을 이어받아 일어나 다시 달리는 것에 시선이 갔다.
그 이후에는 일어나 가야 하는 방향에 시선이 갔다.
그 이후에는 나는 왜 넘어지고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 이후의 마지막에는 나는 넘어지고 싶고 일어나고 싶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즐기고 있다는 것을,
전체를 보게 되었다. 몸의 눈으로.
처음에는 속이 비어있던 상태로 행동하고 있었지만 이후에는 무언가 감정이 들어찼다.
내 안의 본질적인 감정에 자극이 온 것 같다.
예전 같았다면 그 순간을 이해하려 애썼겠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이해하려 하기보단 그냥 즐기며 느끼고 있는 내 자신을 느꼈다.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나처럼 본인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며 진지하게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응원을 던지고 싶다.
아직 많은 부분을 신경 쓰고 절제하고 있진 못하지만 그 흐름의 안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공감할 수 있다. 또다른 ‘나’들을.
4.쳐다보기.
본다는 것.
무언가를 느낀다는 것.
느끼는 것이 담긴 시선이란 무엇일까?
훈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누군가를 쳐다볼 때 그 상대방의 얼굴 윤곽을 보는 걸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상대방의 얼굴 피부 안쪽의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를 보고 있다.
대상의 껍데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것들.
호흡이라던가 눈에 담긴 감정이라던가, 그 사람이 보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를 보는 관객은 나의 외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호흡과 몸에 담긴 감정의 호흡과
눈에 담긴 감정과 그 안에 흐르고 있는 내면을 들여다 본다.
연극영화 입시 시절에 연기 선생님이 쌍커풀 수술을 제안한 뒤로 눈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끼게 된 나는
향후 몇 년간 눈에 힘을 주고 크게 뜨고 다니게 된 시절이 있다.
작은 눈과 튀어나온 눈썹뼈 때문에 조명 아래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이다.
이전까진 내 작은 눈에 대해 딱히 아무 생각도 없던 터라 큰 충격이었다.
양초에 불을 붙이고 15분동안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맑아진다고 해서 그런 적도 있었고,
숟가락을 부릅뜨고 쳐다보며 연습하기도 하고.
그 시절엔 눈에 대한 지적을 많이 받았다.
눈이 흐리다거나, 초점이 확실하지 않다거나, 보는 것이 명확하지 않다던가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생각’과 ‘인식’이 없었던 때니까 말이다.
삶을 인식하고 생각하고 살고 있지 않았으니 눈에 감정이 흐르지 않을 수 밖에 없던 것.
이때 들었던 말들에 대한 내 스스로의 상처 덕분에 지금껏 이토록 잘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아주 감사하다. 잘 이겨내서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 순간에 지금 있는 트러스트 무용단에서처럼 본질적으로 얘기를 해주셨다면 또 어땠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또 다른 길을 걸었을 수도 있었겠지.
만약 그랬다고 해도 지금처럼 잘 성장할 수 있었을까?
순간의 우연은 지나가게 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소중하다.
모델 생활을 통해 내 개성 넘치는 외모가 장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난 내 외모에 만족한다.
더 나아가 타인이 생각하는 내 외모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이유는,
다 제각각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그럴싸한 말만 들으면 되기 때문이다.
본인의 외모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고, 취향이 아닌 사람도 있는 거니까 답은 없는 것.
좋아해주는 사람에게는 감사해하고, 취향을 맞춰주게 되었을 때 가고자 하는 곳에 도움이 된다면 한 번쯤
바뀌려는 노력을 해보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
여러 시도를 하고 나서 돌이켜 보니 모든 시도가 다 내 밑거름이 되었고,
파고들어 깊게 들어가면 삶에 대한 지혜도 얻을 수 있던 순간이었기 때문에 감사하다.
보고 있다는 것은 보고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모든 감각을 통해 그 안에 담긴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절규>, 뭉크
Tumblr media
1. 단장님께서 태헌이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표현으로 이끌어내시기 위해 태헌이에게 공부하라고 하셨다.
뭉크가 절규를 그릴 때 느꼈던 감정과 표현하고자 했던 의미를 공부하게끔 말이다.
<절규>가 담긴 핸드폰을 태헌이에게 보여주며 설명하라고 하셨을 때까진 잘 몰랐으나,
그 느낌을 움직임으로 표현해보라고 하시고 태헌이가 움직였을 때 난 정말 놀랐다.
깨끗한 100%의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보았다.
앞, 뒤 없이 그저 ‘배워야겠구나.’ 라고 바로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누가 있던 말던 그 순간에 시선 따위 상관없이 본인 그대로 존재했다.
아, 매번 놀란다. 태헌이를 보면.
그림에 담긴 색과 질감이 내가 느끼기에 그대로 느껴져서 신기했다.
지금껏 나는 무엇을 표현하고 있었는가?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모든 것을 순수하게 느끼고 있었는가?
오전 훈련이 끝나고 단장님께 여쭤봤던 것이 있다.
“단장님, 생각을 통해서 보는 것에 대해 많은 감각을 일깨우게 되면 염세주의에 빠지게 되고, 이겨내고 이후에
많은 정보가 흘러 들어오게 되다 보니 행복하지만 생각보다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게 되는데, 몸에 대한 감각 또한 만약
모든 감각을 열어 주변의 자연(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느낌, 바람이 몸을 스치는 느낌 등)과 사람과 동물간의 몸의
정보들을 깊게 느끼게 되면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릴까, 폭발해버릴까 두렵습니다.”라고.
이에 대해 단장님께서 말씀해주신 부분과 나의 이전의 경험에 빗대어 보면,
처음엔 물론 여과없이 입력되는 셀 수 없는 정보들 때문에 힘들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 또한 이겨내고 나면 더 새로운, 더 넓은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게 되었다.
정신에 이어 신체 또한 해방되면 그 이후엔 무엇을 해방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내가 받아들이고 느끼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 스스로 정한 틀에 나 스스로를 가둬두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말들이 나를 흔들어도 나를 잃지 않을 중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현대무용에 발을 들이기 전에 길고 긴 방황을 통해 나만의 그 ‘중심’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2.테트리스 게임.
끊임없이 흐르며 공간을 채우고 형태를 만들며 각각의 생각과 움직임이 뭉쳐서 하나의 순간을 만들어가는 것.
계속 문어처럼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이 아닌, 내 몸이 하나의 조각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
이 훈련 처음부터 중반까지 계속 끊임없이 “팔이 죽어있으니 팔을 신경 쓰고 살려라.”라고 하셨으나,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팔을 휘둘렀다.
그 이후 후반에 가서야 무슨 느낌인지 알아챘지만.
끊임없이 형태가 변하는 조각상, 조각품 등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각자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짧은 그 순간 만큼엔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강렬한 느낌을 풍기게 되는 것이 재밌었다.
각자의 생각으로 이루어진 순간의 자연스러운 일치.
어떠한 형태를 만들까? 하는 고민이 자연스레 팔의 움직임까지 이어져나갔고,
스스로 형태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자연스레 몸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훈련을 할 때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해야 하는지, 어떤 틀이 존재하는지 빠르게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엔 태헌이를 중심으로 그 주변을 꾸미는 것으로 바뀌었다.
태헌이를 중심으로 태헌이가 참여하게끔 하는 의도를 가지고, 그리고 태헌이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아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팔을 움직이면 태헌이가 따라 하고, 태헌이가 따라 했던 움직임을 이어받아 내가, 혹은 동료들이
움직인 것에 태헌이가 영향을 받아서 또다시 움직임으로 도출되는 것을 보고 또 다른 흥미를 느꼈다.
하루 빨리 ‘장애인’, “자폐아’ 같이 사회적 소외계층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이들도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발전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들 또한 긍정적인 영향을 당연히 우리에게 전달해줄 수 있다는 것 또한.
공장에서 쿠키를 만들어 파는 단순 반복적인 일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창조적인 일들 또한
조금 부족하더라도 우리가 도우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다들 알아야 한다.
 -즉흥.
이후에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화를 보여주며 태헌이에게 또 느낌을 말해달라고 하고,
그 느낌과 호흡을 이어받아 자연스럽게 즉흥으로 이어가게 되었다.
기태와 윤이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이 둘이 움직이는 호흡이 너무 빨라서 천천히 준비하며 달아오르는 성격인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몸이 굳었고, 결국엔 둘의 사이에 파고드는 것보다는 따로 떨어져서 나만의 호흡을 가지게
되는 것을 선택하고 혼자 움직임을 시작했다.
생각이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만, 생각이 너무 많은 것 또한 문제가 된다.
내 고질적인 문제이다.
지금은 예전보단 나아진 부분이 꽤 있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생각이 몸을 잠식하게 되면, 몸이 굳게 되고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생각이 몸을 잠식하려 하는 느낌이 들면 모든 것을 내던지고 그냥 그 움직임의 소용돌이 안으로 빨리 들어가야 한다.
무용수는 머리로 생각하기보단 몸으로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모두 중요하지만, 우선적으로 움직임을 중심으로 세우고 행동하자.
흘러 흘러, 윤이 내 곁에 다가와 바닥에 세 번 노크를 했을 때, 갑자기 문득 짜증이 치밀었다.
그래서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고, 피했다.
이후에도 세 번 노크를 했을 때 더 멀리 피했고, 그 이후에 세 번 노크를 했을 땐 일어서서 달려가며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그 이후에도 계속 쫓아오는 것을 느끼고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갇혀있는 공간이었고, 무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으며 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고로 난폭한 저항이었다.
윤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졌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상황이 역전된 것을 느끼며
다시 뒤로 돌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자 멀리 떨어졌다.
그 이후에 기태가 다가와 노크를 세 번 하고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며 일단락 되었다.
안무가와 연출자의 시선으로 이 마지막 순간을 바라봤을 때,
만약 소리를 지른 내가 그 에너지와 충격을 이어받아 움직임을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내가 그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 감정을 가지고 몸으로 표현해냈다면 어땠을까?
극적인 순간이 연출되어 있는 중요한 순간이다.
관객을 떠나 전체적으로 더 완성도 있고 재밌는 상황이 연출되었을 수도 있다.
가능성을 가지고 ‘수도 있다.’라고 이야기 하지만 확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연인끼리 사랑싸움을 할 때 정말 상대방과 화해하거나 서로 감정의 잔해를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이기적으로 본인 생각만 하며 돌아서서 연락을 끊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 내가 그 감정을 움직임으로 설명하지 않은 것은 나의 이기적인 면이다.
내가 가진 감정을 표출했다면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거나, 덧붙여 완성시켜야 할 의무가 생긴다.
그래야만 그 이후에도 하나의 이야기가 형성될 수 있고,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두려워했던 것들에 대해 도망쳤던 순간이 떠오른다.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 노력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내 자신이 떠오른다.
나의 선택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끝까지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감당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지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면 초인적인 힘을 이끌어내서라도 해결해야 할 의무도 있다.
작품을 시작한 순간 나는 그 작품을 끝까지 이어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움직임에 있어서 내가 뻗은 손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연관지어야 할지 아직 확실하게 느끼진 못했지만,
차차 느껴가도록 하겠다.
세상의 수많은 부모들과 책임을 가진 이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1 note · View note
deepgreenrain · 5 years ago
Text
2020. 5. 8 훈련일지 및 스스로의 초점
-Two Points On The Floor.
1.Recognize the Two points.
Tumblr media
그림과 같이 지면에 두 부분에만 무게 중심을 실은 상태로 움직이는 훈련이다.
중점적으로 신경써야 되는 부분은 무엇일까?
우선 단장님께서 말씀해주신 부분 중에서 첫번째로는, 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지면에 닿아있는 우리의 신체를 인식하며 움직이는 것.
신체의 두 지점만 닿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주셨지만, 반대로 그 틀에 국한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중심이 변화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조건 또한 부여했다.
단지 중요한 부분은 닿아있는 곳을 인식하며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인식의 ‘확장’이다.
물론 우리가 중점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부분은 두 지점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두 부분에만 집착하는 순간 그 두 지점을 제외한 나머지 신체의 쓸모는 사라지는 것이다.
이 순간 문제가 되���버리는 것은, 과연 그 두 지점만 지킨다고 해서 과연 살아있는 것인가? 이다.
우리가 움직이기 위해서 가장 보편적으로 닿아있는 두 지점이 있다.
바로 ‘두 발’이다.
그 두 발이 닿아있는 것은 중요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그 두 발이 닿아있는 것을 느끼면서도
다른 신체부위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뒤따라 올 때 비로소 ‘걸음’이라는 것이 완성된다.
팔이 흔들리고 주변의 장애물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와 시선이 움직이고,
숨을 쉬기 위해 폐와 횡격막이 팽창하고 수축하고 걷는 순간에도 위장에서는 소화액이 분비될 수도 있다.
보이는 곳 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까지 움직이는 것이다.
이처럼 인식의 확장성을 가지지 않으면 그 두 지점을 제외한 모든 부분은 기능이 정지될지도 모른다.
같은 손과 같은 무릎이 닿아있는 상황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움직임의 다양성은 상당하다.
팔은 수축하고 다리는 확장될 수 있으며, 반대로 혹은 또한 여러 가지의 다양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기 위해서는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겠지만.
훈련에 있어서 움직일 수 있는 범위의 환경에 제약을 거는 것은 인지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함이겠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얻고자 하는 부분은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흐름일 테다.
원초적으로 순수한 ‘자연’스러운 움직임.
아직 직접 몸으로 경험한 순간이 아니기 때문에 섣불리 단정지을 순 없겠다.
 2.돈.
음악을 틀어주셨다.
내 안과 몸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줄 보조적인 장치이다. 음악이란 것은.
때에 따라 그 쓰임이 천차만별이지만, 이 상황에서의 의도된 쓰임은 단지 보조적인 것이다.
우리가 자주 실수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보조적인 것에 잠식되는 순간이다.
돈 때문에 인생의 리듬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치다.
거래를 함에 있어서 편리를 위한 보조적인 도구였던 최초의 화폐는 한 인간의 잔꾀와 욕심 때문에
지금의 은행과 돈이라는 지폐와 동전의 형태, 그리고 지금의 ‘숫자’와 가상화폐에 이르렀다.
그리고 ‘부의 독식’ 형태는 꾸준히 이어져왔다.
어떤 방식으로던 간에 자연의 피라미드적인 균형은 쉽게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보조적인 도구일 뿐인 것에 자신의 영혼과 삶을 통째로 바친 사람들.
이토록 순수한 최초의 목적과 쓰임들은 시간이 흘러 불순물이 섞여 오염되기 마련이다.
내가 하고 있는 현대무용이 담겨있는 ‘순수’예술 만큼은 더럽혀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움직임을 중심으로 표현하는 현대무용의 극 안에서 음악의 목적은 우리의 움직임을 돋보이게 해주거나
관객의 감성을 쓰다듬거나,
혹은 긴장된 분위기를 고조시켜주는 보조적인 요소일 경우가 잦다.
물론 때로는 동일선상에서 존재하는 거나 움직임을 초월하는 것 또한 바로 음악이다.
움직임을 중심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지, 주변의 수많은 요소들과 한 데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바라봤을 때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란 걸 알고 있으니 오해없길 바란다.
위의 서술은 순전히 이 훈련을 하는 상황에서 나에게 집중할 수 있게 해줄 보조적인 장치로
사용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주’와 ‘보’의 관계가 역전되지 않게 늘 조심해야 한다.
본인의 가슴 안에 절대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리듬을 찾아 유연한 말뚝을 박아야 한다.
 3.자연스러움.
흠, 자연스러움이란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한 번쯤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꽤 자주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했던 질문인 것 같다.
가끔은 내 안을 확- 적시기도 하고 가끔은 알다가도 모르게 모든 혼을 빼앗아 가는 해답 없는 질문이다.
일상에서 우리의 자연스러움은 무엇일까.
나는 과연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을까?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순간 내가 보게 되는 눈앞에 놓인 모든 순간은 거짓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의심’이 없어야 하는 걸까?
의심은 없지만 행동의 종류가 보기에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마냥 의심없이 익숙한 것만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닌 듯 하다.
의심은 없지만 부자연스러움이 익숙한 탓에 무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닌 것.
꾸준한 훈련과 인식을 통해 올바른 습관을 가지게 되는 것.
원초적인 눈을 통해 보다 자연에 가까운 움직임을 구별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을 포함하고,
그 움직임을 몸으로서 보다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될 수 있는 상태.
일상과 무대를 구분짓지 않고 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수준인 것 같다.
살면서 모든 부분의 정점을 찍긴 힘들겠지만, 하나 하나 해나가다 보면
죽기 전에 몇 개는 건지겠지.
우리에게 수치심과 쑥쓰러움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매력적인 감정이지만,
마찬가지로 사회적이지 않은 자연의 동물들처럼 자의식이 없는 것 또한 매력적인 감정이다.
표현해야 할 순간에 의도적이지 않은 수치심과 쑥쓰러움은 되려 독이 된다.
무수히 많은 노력이 담긴 절대 시간을 가지거나,
본인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타고난 재능을 찾아 가던가.
정답은 따로 없다.
보는 이의 가치관과 상황에 따라 해석은 언제든지 변하기 마련이다.
 4.수다와 본질의 차이.
태헌이는 수다쟁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말이 많다고 해서 모든 말이 쓸만한 정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듣는 입장에서 말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소중히 들어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움직임 또한 마찬가지다.
수다라는 표현을 하니 꽤 흥미롭다.
파고들다 보면 결국 문맥이 초월하며 통하는 구석이 즐비하니 말이다.
수다 떨지 말라는 것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움직임에 있어서 수다를 떨지 말라는 것은,
의미없는 움직임을 없애라는 것이다.
때로는 상황에 따라서 의미없는 문장들로 본질을 가리려 하는 의도의 예술 또한 있지만,
지금 이 글에서는 그 상황은 제외하도록 하겠다.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소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이 오고 간다는 것이 대화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시간 동안 셀 수 없는 단어가 오고 가도 감정적으로 해소 된 기분이 들지 않는다.
말이 중요한 걸까?
지금 드는 생각으로는 ‘호흡’과 ‘진심’이 아닐까 싶다.
관객이 우리의 공연을 본다고 가정했을 때,
Play time이 긴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뛰어다니고 격정적인 움직임이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표현의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겠지만,
진심으로 움직이고 호흡을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전에 연극영화입시 시절에 짧은 단편을 연기하며 겪었던 느낌이다.
수다쟁이는 피곤하다.
때로는 상대방을 위해서 말을 아낄 필요가 있다.
수다는 본질을 흐린다.
 -Trust Game With Lifting
이 훈련은 전에 했던 contact improvisation movement training과 trust game을 합친 것이다.
들어올린 상태에서 밑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받쳐주고,
위에 있는 사람은 어디론가 밑에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이다.
5명의 인원 중에서 한 명이 올라가고 나머지 4명이 밑에서 받쳐주는 역할이었다.
누군가는 다리 쪽에 누군가는 어깨 쪽에, 누군가는 몸통 쪽에 있었다.
본인의 역할(공간에서의 상대방에 대한 책임)이 끝나고 새로운 책임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여주어야 한다.
절대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한다.
위에 있는 사람이 조심해야 하는 것은, 밑에 있는 사람이 두 다리로 지면을 밀면서
위에 있는 본인이 딛고자 하는 부분까지 힘이 전달될 수 있는 부위를 지탱하는 것이다.
작품을 하며 이런 순간이 아마 자주 있을 것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에 있어서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서 그 의미를 증폭해야만 하는 순간.
해야만 하는 순간에 위치에 따른 경험이 부족하다면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받쳐주고, 디디고, 여러 상황에 있어서 보여지는 부분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
항상 의도적인 것과 의도적이지 않은 것, 행위자의 뻔뻔함에 따라 상황이 역전되긴 한다.
하지만 우선 우리는 기본적인 것에 충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여지는지, 어정쩡한 자세로 ‘멋’을 잃은 자세를 취하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의 표현 범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거나.
상황에 따른 움직임의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
좋아하는 누군가가 울고 있는데 비웃을 순 없으니까.
우리는 자라면서 여러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 쌓인 순간들로 인해 저마다의 기준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공통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 보편적인 기준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기본기를 다지며 차근차근 나아가는 이유다.
-무대를 대하는 자세.
1.Movement Research.
하나의 팁을 주신 것은, 일상적인 움직임이나 돌발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움직임을
차근차근 확장시켜나가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코를 후비던 손가락에서 발차기까지 갈 수 있을지 누가 알 것인가?
그 과정이 논리적이라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논리적이라면 비평가가 아닌 이상 굳이 의심할 필요없이 말(움직임)이 된다 생각할 것이다.
움직임의 주체가 되는 부분이 있다.
점프를 하기 위해서 지면을 밀치는 다리이거나, 엎드려 팔굽혀펴기를 하는 지면을 밀치는 팔이거나.
그 중심과 기준을 가지고 흐름을 찾아가는 훈련이다.
사실 이 훈련은 무용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고 배우는 시작 단계에서도
많은 경력을 가진 무용수 또한 필수적으로 이행하고 있는 훈련이란 것을 알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훈련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누구나 지나쳐가야 하는 순간들이다.
위에 있는 recognize the two points 훈련이 적용된다.
두 지점뿐만이 아니라 모든 부분을 인식하며 움직이는 것이다.
반대로 움직임 탐구 훈련은 에너지 흐름의 중심이 되는 부분에 더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심력, 찌르는 것, 포물선 등등.
시작은 작은 움직임에서 이루어졌지만, 끝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탐구하는 것.
직접 움직이며 운동하듯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힘들긴 하다.
확장되기 위해선 그 에너지(+)를 지탱해줄 수 있는 뿌리(-)가 중요한데,
그 확산된 에너지의 지점(0)을 명확하게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위해선 필수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균형’이란 것이다.
보여지기에 위태위태할지 몰라도 그 위태함을 나타낼 수 있는 이유는
그 순간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요소가 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대를 채우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하는 소양 중 하나가 바로 ‘에너지다’
에너지를 이루는 요소는 차차 경험하며 이해해감에 따라 정리되는 대로 서술하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소한 ‘gesture’에서 ‘movement’로 발전시키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movement research’를 하는 이유다.
물론 때로는 gesture가 movement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건 고수의 영역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움직임의 주체가 되는 부분을 알게 되었다면,
그 주체를 잃지 않고 명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내가 왔을 때, 같이 하는 사람중 나와 같이 시작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이와 상관없이 경력이 있고 몸에 새겨진 이해도가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이후에 들어올 새로운 누군가가 온다면 내 생각과 배움이 어떤 변화가 생길지 궁금하다.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Text
2020.05.04 현대무용 훈련일지 및 스스로의 초점
-달리기
 1.리듬.
우리가 효율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있다.
말의 빠르기, 단어와 단어 사이의 쉼표, 단어를 말할 때의 목소리, 그리고 뉘앙스 등.
알게 모르게 우리 움직임에도 말과 마찬가지로 동작을 할 때 의미를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공부하고 고민하고 있는 입장에서 생각하고자 하는 것들을 따라가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고 있던 것들이 생각하는 범주 안에 있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고 터득되지 않아 놓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 아쉽다.
만약 화가 났을 때, 소변이 마려울 때, 긴장했을 때, 신이 났을 때 등 그 상황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저마다의 흐름이 있다
어떤 음악을 듣더라도 그 음악이 확고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음악을 듣는 이가 느끼는 감정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리듬을 찾기 위해서 먼저 다가가야 할 부분은 본인의 감정을 표출하고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표현의 형태를 연마하는 단계는 그 뒤에 와야 할 순서라고 생각한다.
이 순간에 우리가 그간 탐구했던 음악의 스펙트럼처럼, 삶에서 경험했던 순간들이 자연스레 함께하게 된다.
그리고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선 당연히 순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
감정을 가지고 있기 위해선 기타 소리나 드럼 소리, 소리와 소리 사이의 공간이나,
그 음악과 관련되어 얽히고 섥힌 여러가지 순간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글을 적는 나 또한 말을 할 때나 움직일 때(움직임의 리듬을 경험한 것은 트러스트무용단에 왔을 때부터)
리듬을 가지지 않는 것과 리듬을 가지고 ‘사이’와 ‘흐름’을 느끼며 움직이는 편이 더욱 신나고 자연스러웠다.
때로는 음악과 리듬을 의도적으로 뭉개버리거나, 탈출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경우는 우선 예외로 하겠다.
리듬, 삶의 리듬,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효율이란 것을 따지게 되기 마련이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삶의 리듬 중에서 최적의 상태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움직임에 있어서 효율적(보여지는 형태만이 아닌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도 포함된다)이기 위해서
리듬이란 것은 기본이 되고, 기본은 언제나 최고다.
 2.호흡.
일전에 2020.5.1일자에 서술했던 체력과 호흡이랑은 다른 관점이다.
이번에 서술할 호흡은, 마찬가지로 정말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탐험이 시작된다.
먼저 우리가 설거지를 할 때, 긴장 상태로 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소변이 마려우면 긴장할 순 있겠지.
일상속의 자연스러운 움직임 안에 답이 존재한다.
움직임뿐만이 아닌, 삶의 지혜 또한 우리의 주변 가까운 곳에 널리고 또 널려있다.
시야를 열면 무수히 많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형태만이 아니라 정확하게 인식하며 움직이도록 가르쳐주는 곳에서 배우는 것이 처음이다.
다시 돌아와서, 어쩌면 배우는 것들이 우리들 일상과 주변에 존재할 법한 움직임일 수도 있다.
물론 그것 또한 개인차가 존재할 것이다.
예를 들면 martha graham의 팔을 활용한 형태가 내가 팔을 휘둘렀던 활동 범위 안에 존재했을지는 몰라도,
나는 현대무용을 배우고자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삶속의 내 움직임을 돌이켜보면
인식한 상태가 아니었고, 그리고 그런 형태의 움직임을 접해본 순간은 없는 것 같다.
이 얘기를 적는 이유는 무엇이던지 간에 처음하는 것은 어색하고, 어떤 최적의 길을 찾는 것이나,
본인이 여기기에, 그리고 관객이 여기기에 최적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그 출발은 늘 시작과 익숙해지는 것부터일 듯 싶다.
날 때부터 우리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울음’이다.
생애 첫 언어이다.
풍선과도 같이 호흡이 100% 열려있는 상태에서 내뱉은 울음이라는 언어.
여러 사회적 경험을 하고 가정에서 자란 교육을 받고 주변에서 무수히 많은 영향을 받으면서,
그리고 움직임의 필요성에 대해 무지해지고 있는 현대사회의 관점 또한 우리가 ‘움직이는 법’에 대해
잊어버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아닐까 싶다.
살아있는 움직임의 기초가 되는 호흡법 또한 움직임의 활동 간극이 좁아짐에 따라 위축되었다.
과거 원시에 도망치기 위해, 사냥하기 위해, 싸우기 위해 행해졌던 태초의 움직임은 사라졌다.
되찾기 위해서는 훈련 또한 필요하겠지만,
그토록 간절하고 행동에 고민이 없었던 그 마음가짐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고 스스로 진심으로 여기게끔 되어야 한다.
빠르던 느리던 모든 움직임은 호흡과 함께 이루어진다.
나는 습관적으로 순간에 하나의 목표에만 집착하다 보면 호흡이 멈추는 순간이 자주 있었다.
지금 또한 익숙해지지 않은 부분에 있어서 아직도 그 습관이 남아있다.
지금 드는 생각은 시야는 열려있되, 움직이고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를 만들어주고, 호흡과 혈액으로 내 몸의 근육과 피부를 지원해주는 방식으로 접근해볼까?
아니면 ‘그냥’ 숨을 쉬어야 할까?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때로는 열리고 때로는 닫히는 복불복의 상태인 현재로서,
꾸준히 보다 많이 노출되고 경험하고 고민하는 것이 답이다.
 3.호흡과 리듬의 관계.
나는 지금 글을 쓰며 다리를 떨고 있다.
다리를 ���고 있지만 그냥 떠는 것이 아니라 집중해서 살펴보니 행위에 일정한 시간의 간격이 있다.
리듬이 있다.
그리고 그냥 떨게 내버려둔 상태이며, 호흡을 하는 것에 있어서 거리낌이 없다.
만약 이 상태에서 다리를 떠는 근육의 움직임에 집착하며 온몸의 반동이 아니라
다리 근육의 힘으로만 움직이려는 시도를 하는 순간 이 두 허벅지와 가까운 주변이 아닌
다른 부위 몸의 일부분들은 다리의 움직임만을 위해 긴장 상태로 접어들 수도 있다.
어떠한 형태를 만드려고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잃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형태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절대 아니다.
우린 완벽을 위해서 ‘둘 다’ 챙겨야 한다.
물론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완벽의 기준은 다를 것이다.
뛰고 걷는다는 것에서 엄밀히 주동근을 따지자면 하체일 것이다.
가장 직접적으로 에너지를 받고 발생시키는 곳은 바로 이 두 발에서부터 시작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상체에서 팔이 흔들리지 않고, 허리가 골반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열려있지 않는다면,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아닐 뿐더러 되려 몸을 상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주동근은 말 그대로 주동근일 뿐이지, 우리의 몸의 모든 신체 기관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각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협력된 움직임’이 성사된다.
겉으로 보기엔 티가 나는 곳이 정해져 있을지라도, 세상이 유지되는 이유는 모두 각각의 톱니바퀴로서
제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드러나고 부각된다고 해서 마냥 중요한 것도 아니고,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온몸의 감각을 깨우자.
내 손과 내 발의 대화.
 4.공간에 남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잔상)
달리고 오고 가며 상대방과 마주쳤을 떄 그 순간에 일어나는 작용을 느끼는 것이 관건이다.
Tumblr media
그림과 마찬가지로 진행방향으로 달려가며 회전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그대로 나아가는 것이다.
서로 몸의 전면부를 오픈하며 순간적으로 에너지를 교류하고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그 에너지(잔상)를
호흡으로 남겨놓고 보는 이가 느끼도록 표현하는 것.
예전에는 이 훈련을 했을 때 속도에 대해서 단장님께서 따로 틀을 정해준 것이 있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아주 빨리 달리는 상태라는 틀을 정해주셨다.
중요한 부분은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부딪힐지 부딪히지 않을지에 대한
예상과 그 목적을 위한 준비단계가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날 것 그대로 부딪힐 듯 말 듯한 아슬아슬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되고 아찔한 ���간이 재밌다고 하셨다.
바이킹에서 떨어질 듯 말 듯, 일렁이는 파도에 뒤집힐 듯 말 듯.
평온하게 안의 에너지를 느끼며 달렸을 때와는 또 다르게 이번에는 행위하는
나부터 아찔한 순간을 느낄 수 있었다.
보는 이는 내가 느끼는 것을 그대로 느끼는구나.
무대 위에서 거짓말을 하면 안 되겠구나.
음악을 듣고 음악 안에 귀속되기도 하며 음악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음악이 발에게 얘기하는 것을 듣기도 하고,
발이 음악에게 얘기하기도 하고,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들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은 행운이다.
 -문어
 1.태헌이.
태헌이는 자폐아다.
삶을 살아오며 장애를 가진 이들에 대해 깊게 고민해본 적이 있다.
‘장애’란 무엇일까?
신체적인 장애, 정신적인 장애 등 여러 장애가 존재한다.
사람의 관점에 따라 편집증이 있는 사람도 장애인이라고 여기는 인간도 있을 것이다.
우선 이야기하기에 앞서 글쓴이가 생각하는 ‘장애인’은
사지 멀쩡하고 정신 또한 멀쩡한데 활용하지도 않고 옳고 그름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어쩌면 활용과 인식이 존재하지 않는 그본인 자신을 스스로 정상인으로 칭하는 그 ‘장애인’은
사지는 멀쩡하지만 정신이 멀쩡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나의 관점에서.
돌아와서, 일주일에 약 두 번 같이 배우고 있는 태헌이라는 친구가 있다.
아주 성숙하고 순수한 친구다.
아직 형태가 다듬어지지 않은 친구지만 그 안에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분명 꾸준히 하다 보면 그 순간이 올 것이라 믿는다.
실제로 근거를 본 이가 다수 있으니 신빙성이 있다.
시선에 대해 굴복하지 않고, solo time 그 순간에 무대는 오로지 본인만을 위한 무대로 변한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회적인 교육과 여러 경험의 부재로 인해 때묻지 않은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이 아닐까? 태헌이는.
최근에 단장님께 들었던 얘기에 의하면 지금과는 다르게 팔의 움직임이 없었다고 하셨는데,
팔의 움직임이 없었다면 점프 또한 없었을 것이고, 단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이었던 것이다.
우리와 전혀 다를 게 없다.
그리고 태헌이의 춤은 우리를 웃게 한다.
춤을 추기 위해 트는 음악 또한 우리를 즐겁게 한다.
나중에 무대에서 함께 춤을 출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나에게 값진 경험이 
될까 기대된다.
내가 쿵쿵거리는 소리와 태현이가 쿵쿵거리는 소리는 차원이 다르다.
배울 점이 많은 친구다. 가르쳐주고 싶은 것도 많은 친구고.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아이이다. 태헌이는.
그 태헌이의 signature dance가 있다.
이날 그 학명을 우리는 정했다.
바로 ‘문어 댄스’이다.
댄스보단 땐쓰가 더 맛깔나는 것 같으니 ‘문어 땐쓰’라고 하겠다.
Tumblr media
몸이 문어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몸의 여러 관절이 유연하게 열려있는 상태여야 한다.
물론 이 문어 땐쓰의 움직이는 원동력은 호흡이다.
호흡의 에너지를 가진 상태에서 몸은 열려있어야 한다니.
이전에 해왔던 2번 플리에 상태에서 손과 손 사이의 ‘기’를 느끼며 표현하는
훈련에서 파생된 또다른 버전이다.
원리는 같지만 아직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호흡으로 몸을 이끌어간다는 것은 절벽에서 다이빙을 하는 것일까?
온몸을 열고 떨어질 순간과 떨어지는 그 순간과 떨어질 때의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상태?
기본기를 다지는 이유는 올바르고 다치지 않게 그리고 아름답게 떨어지기 위한 훈련일까?
겁없이, 의심없이 온전히 믿기 위해선 근거가 필요하다.
태헌이처럼.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Text
<방향과 방황>
지금껏 사고한 모든 생각에게 첫 단 하나의 의문을
던졌을 때, 그로 인해 몇 년간의 시간동안 생각의 방황을
통해 내 내면의 끝이 없는 깊숙한 곳을 경험했다.
그 시발점이 되었던 것은 정말 단 하나의 ‘왜?’라는 것.
옳고 그름을 가늠할 수 있는 사리분별력을 가지고
때에 따라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내포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는 상태를 나에게 안겨준 것은
바로 끊임없는 탐구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조금은 집착스러운 노력 덕이다.
현재는 움직임에 있어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라는
물음을 몸에게 던지고 난 후,
목각 인형을 조종하는 인형사처럼 나는 내 몸을 그저
사고를 통해 조종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강력하다.
하지만 명백히 느끼는 점은,
생각의 퍼즐을 맞추며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만의 진실한 해답을 찾은 것처럼,
내 몸 또한 꼬리에 꼬리를 물어 움직임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아직은 어색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발부터 시작해서 머리 끝까지.
비록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내 생각을 위해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후에 얻을 자유로운 몸을 위해서
멈추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는 중이다.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생각하며 움직이며,
둘의 균형이 딱 맞아떨어질 날을 고대하며.
PS. 이 글에 대한 진득한 서술과 풀이는
시간 날 때 준비해서 다루도록 하겠다.
-
2020.5.2 SAT.
0 notes
deepgreenrain · 5 years ago
Text
<2020. 5. 1> 현대무용 훈련일지 및 스스로의 초점.
-달리기
1. 공간을 인식할 것.
인간에게는 여러 감각이 있다.
그중에서 공간에 대한 감각이 있고 이외에 공간을 짐짓하는 직감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걷고, 달리고, 말하는 중에 일상생활에서 나도 모르게 적용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무대에 올라가고 무언가 연습하는 관계에 놓이게 되면 긴장한 탓인지 자연스레 열려있던
감각들이 되려 닫혀버려 시야가 좁아지는 경향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중에 저 멀리 내 앞에 보이는 누군가의 속도와
내가 가는 속도를 우린 경험을 통해 계산할 수 있는 본능이 축적되어 있는데,
마찬가지로 무대와 어떠한 공간 안에서 행위하는 와중에도 내가 걷고 달리는 속도, 그리고 방향과
동료 무용수의 속도, 그리고 방향을 어렴풋이 혹은 확실하게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존재한다.
무대라는 특별한 장치 안에서 육감이 굳어버리지 않도록 공간에 대한 감각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순간적으로 내가 가진 직관과 본인만의 미적 감각을 통해 공간을 내 존재의 에너지로 채워야 하는
순간이 있다.
정사각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끊임없이 이동하며 흐르고 있는 무용수들 중에서
나 또한 행위하고 있는 자로서 주변의 흐름과 에너지를 느끼며 공간의 순간적인 완전성과 불완전성을 오가며
몸으로 고민하며 행위해야 한다.
 2. 체력과 호흡.
무용수뿐만이 아닌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로서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중요한 것이 바로 체력이다.
숨을 쉬기 위해 필요한 근육과 걷기 위한 근육 등 우리의 신체 안에 무수히 많은 근육이 존재한다.
체력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는 우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여러 생물과 원소들 또한 있겠지만,
먼저 내 몸의 근육량과 생각한 대로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뇌의 기능과 폐활량, 그리고 유연성 정도가 있겠다.
늘 기초체력 단련을 하고 식습관과 움직임에 해가 될 수 있는 행동을 최대한 자제하는 편이 낫다.
담배를 태워본 나로써는 고등학교 시절 격투기를 통해 신체 능력의 전성기를 겪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무용 자체를 시도할 수 없는 신체를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현재는 흡연을 7년간 태운 후 2018년 10월 이후 끊은 상태이다.
근육량을 늘리는 것은 물론, 그 근육의 유연한 질과 수축과 이완을 순간적으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고,
또한 생각한 대로 움직일 수 있게 뇌와 신체의 커뮤니케이션의 익숙함을 얻기 위한 훈련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커뮤니케이션의 속도를 높여 가능한 함께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훈련도 동시에 해야 한다.
몸을 움직이는 기초가 되는 호흡, 큰 움직임과 멈춰있는 듯 하지만 쥐 죽은 듯 큰 호흡을 감당해야 하는
폐활량의 단련도 중요하다.
빠르게 달리고 오래 달릴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의 균형이 맞아야만 가능하다.
소홀히 하지 말자.
시간이 쌓여 익숙해지고 준비된 몸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쌓인 시간동안 행동의 뒷받침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고 꾸준히 단련을 통해 유지하도록 하자.
 -접촉 즉흥
 1.기본.
무게중심이동.
즉흥뿐만이 아닌 움직임의 없어선 안 될 기초가 되는 부분이 바로 무게중심이동이다.
일상에서 움직일 때 이미 하고 있는 것들이 그저 움직이려는 것이 아닌
움직임을 만들어내려는 의도 ���문에 늘 무시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삶에서 나는 걸을 때, 말할 때, 쳐다볼 때, 먹을 때 행위에 있어 거리낌없이
확신으로 가득차 있다.
무엇이 나를 위축되게 하는 것인가?
확신을 얻기 위해선 무수히 많은 반복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것도 맞는 듯 싶다.
난 발을 딛는 이 땅의 질감을 알고 있고, 누군가를 쳐다볼 때 타인의 표정을 통해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사물을 바라볼 때 보여지는 질감을 통해 손으로 촉감을 느낄 수 있으며,
경험해본 것이라면 냄새 또한 맡을 수 있다.
무엇이 무대 위에서 나를 바보로 만드는가?
무대 위 경험의 부재인가?
꾸준한 훈련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이 어쩌면 나의 있는 그대로를 되찾는 과정일 수도 있겠구나.
물론 무대 위에서.
 2.시선.
감정을 나타내는 방식 중 호흡과, 몸짓, 그리고 시선 등이 있다.
사실 호흡과 시선은 몸짓 안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지만, 소분된 상태에서의 표현이다.
누군가를 쳐다보고, 누군가가 나를 쳐다볼 때 우린 무언가를 교류하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 우린 무대 위에서 내면의 흐름 따위 없는 텅빈 인형이 되어 죽은 채로 서있는가?
움직임의 원동력은 과학적으로는 ‘뇌’이지만 영적으로 우린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
훈련이 되지 않은 나는 무대 위에 몸이 남아있고 영혼은 가출했다.
과연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표출하고 싶으며 무엇을 교류하고 싶은지.
눈은 영혼의 창구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린 눈을 통해 세상의 대부분을 느낀다고도 생각한다.
반대로 세상의 대부분을 놓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느끼는 것이 담긴 시선을 관객 이전에 나와 상대방이 먼저 느끼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표현에 대한 방식보다 표현할 무언가를 찾는 것이 나에겐 더 우선이다.
삶에서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무대 안에서 살아있음을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로서 존재하고, 과장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나의 존재감을 무대 위에서
명확하게 해줄 것을 믿자.
막상 적고 보니 몸으로 하는 ‘극’이 아닐까 싶다.
삶이 곧 무대다.
 3. 흐름.
접점을 느끼자.
상대방과 나의 몸이 맞닿아 있는 부분을 느낀다는 것.
무게중심이 존재하는 발이 딛고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 상대방과 내가 딛고 있는 무게중심을 느껴야 한다.
어깨와 등, 꼬리뼈와 옆구리.
상대방을 힘으로 이끌어 가려는 것이 아니라 접점을 통해 서로 미는 힘과 상대방의 힘을 통해
떨어지지 않는 튼튼한 결속을 나타내는 것.
이 부분은 직접 훈련을 통해 쌓여야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머리만으로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몸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래도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부분은 믿고 의지하며 짐이 되지 않고,
마음을 열고 몸을 열고 머리와 몸이 활성화되어 있어야 서로 하나인 것처럼 흐를 수 있을 듯 싶은 것이다.
붙어있다가도 떨어져 있지만 함께 있다는 것처럼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말이다.
동료 무용수와 부대끼며 많은 경험이 축적되어야 할 것 같다.
 4. Trust Game.
3차원적으로 넘어지며 이를 받아 일으켜주는 훈련.
달리기 훈련에서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Pina Bausch의 Café Muller에서처럼 예측불가한 상황이 추가되어 더 ��경이 곤두선다는 것.
쓰러진 누군가를 책임지고 일으켜주어야 한다는 하나의 목적이 설정되어 있다.
4명이 달려가며 신경쓰기에 꽤 좁아서 괜찮을 법한 공간이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받아주지 못하는 경우도 워낙 많았다.
이 상황 또한 훈련의 일부가 아닐까?
시선 또한 열어놓지만 목적만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닌,
모든 시야를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는 부분에서 상당히 어려운 훈련이었다.
그래야 하지만 그래야 하는 것을 들키지 않아야 한다니.
연기하지만 연기하는 게 티가 안 나야 한다는 역설과도 같다.
하긴 그게 정말 연기이고 살아있는 거니까.
삶에 존재하는 수많은 역설중의 하나이며, 나조차도 완전하려고 하는 동시에
나의 무한한 불완전성을 인정하게 된 순간이 있으니까 말이다.
완전함이란 단어 또한 불완전이란 단어와 함께 있지 않는 순간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으니,
완벽하게 넘어지지 않게끔 일으켜줄 수 있는 목적이 있다고 해도
내 간절함과는 다르게 의도치 않은 상황이 펼쳐지기도 하니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극이 되었을 듯 싶다.
최대한 열어놓고 달리는 동시에 넘어지기로 한 대상의 호흡과 주변의 에너지가 바뀌는 순간을 느끼는 것과
그 순간을 느끼기 위해 나의 감각을 열어놓는 것이 관건일 것 같다.
아이와 함께 달리지만 언제든지 넘어지기 쉬운 아이이기 때문에
예기치 못하게 벌어질 그 상황을 본능적으로 대비하고 있는 부모처럼.
  5. Trust Dance Company
Trust라는 영단어를 한글로 번역하면 ‘신뢰’이다.
겉으로 보기엔 뇌를 가볍게 훑고 지나가는 단어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지나온 시간과 마음으로 생각하면 지내는 시간이 쌓일수록 더욱 더 깊어지는 단어이다.
사랑, 신뢰, 행복, 아픔, 고통, 신뢰, 죽음, 등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단어들이 존재하는데,
이 공간에서 나는 ‘신뢰’라는 단어 하나만큼은 지금껏 해왔던 일부분의 단어들을 마음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머리보다는 온전히 몸으로 겪어가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에 격한 감동이 밀려온다.
나에 대한 신뢰, 동료에 대한 신뢰, 사물에 대한 신뢰 등등.
순수한 삶을 지켜내기 위해 그간 했던 노력들과 감당했던 고통들이 이 안에서 해소되는 느낌이다.
순수하게 순수한 것을 원하고 내 안에 쌓여있는 불필요한 지저분한 것들을 하나하나 비우다 보면,
우연이지만 어쩌면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준 지금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들에게 
늘 감사한다.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