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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조절에 관하여
점점 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는 듯 해 겁이 난다.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자꾸만 초라한 내 삶을 생각하니 두렵다. 왜 이렇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걸까..
답답하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은 나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내가 하고 싶었던 일도 아니고, 그래서 나는 보람을 느낄 수도 없다. 그 사이 나는, 내 인생은 점점 망가져간다. 어디서부터 어긋난건지 생각하고 싶지않다. 알게 된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마냥 떠도는 자유로운 삶을 살자니 용기도 계획도 자본도 없다. 능력이 없다. 그래서 이대로 갇혀버렸나보다. 내 능력이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 수준에 맞는 자유는 이정도뿐인가.
그래서 자꾸 화가 난다. 누구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이 엉망진창이 되버린 삶 때문에 화풀이를 하고 싶다. 차라리 청주에 오지 말았어야해. 그냥 파트타이머로 영영 살더라도 그냥.. 그랬어야해. 희망을 먹고 살았어야해. 지금 나는 지금의 나는 속이 썩어 미쳐가고 있다.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다. 계속해서 화가 난다. 나 자신과 내 인생에 대한 분노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분노의 불똥이 튄다. 이러다 결국 다 잃어버릴 것 같아 또 겁이 난다.
결국 내 인생에 무엇이 남을까. 다 포기해버리고 싶지만 그 마저도 용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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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넷-유월, 떠도는 어딘가에서 보내는 편지
안녕, 나야.
그동안 잘 지냈니? 네게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정신없이, 여유없이 달려왔어. 나의 무심함과 세월의 무상함을 용서해주길바란다.
며칠전 나는 큰 결심을 했는데, 그 결심을 네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천만원을 모으면 모든 달리기를 잠시 그만 두기로, 나 자신과 약속을 했어. 구체적인 년도나 날짜로 잡지 않은건 그 날짜가 지나서도 내가 용기가 없어서 주춤거린다면 내가 나 스스로에게 너무 절망할까봐 그런거였는데, 이 것마저 잊지는 않았겠지. 아무튼 오천만원, 그게 지금의 내 목표야. 생각해보면 한 4년 뒤쯤엔 훌훌 털고 웃으면서 오천만원이 찍힌 통장을 들고 떨치고 나갈 수 있을것 같은데 문제는 그 다음이야.
사실 오천만원 모으는건 별로 무섭지 않아. 지금도 나는 한달에 백만원씩 꼬박꼬박 모으고 있으니까, 결심한 지금부터 당장 내일 월급 받으면서부터 한 십만원씩이라도 더 보태면 4년이면 정말 넉넉하게 모을 수 있을 것같거든. 4년 정도 여기서 엄마아빠랑 지내고 시집가고 이런거 별로 어렵게 생각되지 않아.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아르바이트한다고 생각할꺼야. 큰 돈 못버는건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그냥 이렇게 설렁설렁 돈 벌면서 내 맘 속에서 ���는 4년 계약직인걸로, 그러니까 4년동안 아르바이트한다생각하고 돈만 차곡차곡 모아두려고하는데, 그래 그건 나 두렵지 않아.
그 안에, 4년 안에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야. 너도 알겠지만, 그러려면 내가 그동안 꾸준히 무언가를 해야겠지. 자격증을 따고 토익 점수를 올리고 그런거 있잖아. 다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
두번째 옵션은 4년 뒤에 대학원을 가는거였는데, 내가 이틀밤을 밤잠 설쳐가며 고민해본 결과 대학원 나와서 석사하면 뭐? 석사 학위가 있으면? 3천만원 들여서 석사 학위를 받으면? 이미 학력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하고, 결정적으로 나는 별로 공부하고 싶은 게 없어. 아직까지는 말이야. 혹시 생겼다면 진지하게 응원하고 싶어. 지금 내가 어설프게 고려해본건 교육심리 전공 정도인데, 내가 교육심리를 전공하면, 그 다음은 어찌해야될지 몰라서 그냥 대학원은 혹시 공부하고 싶은게 생기면 가고 아니면 말려고.
4년 뒤에, 내가 계약직으로 다른 곳에서 일하게 되면 그것도 그것나름대로 좋을 것같아. 사학연금, 어차피 내 팔자에 없는거였다 생각하고 헐값에 불려가더라도 일한다는 그 자체에 만족하면서 일하면 되지 않을까? 너무소박한 생각인가 싶기도 한데,우선은 그게지금 떠오르는 가장 좋고,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안이야.
내 소망은, 4년 뒤에 모든걸 때려치우고, 한 천만원 쓴다생각하고 유럽여행이나 쭉 돌고 오는건데 내가 그렇게 통 크게 날 위해 돈을 쓸 수있을지는 모르겠다. 워낙 없이 살아서 모아놓은 돈 쓰는데 궁색할 것 같아. 그리고 4년뒤에 때려칠수있을지모르겠고... 용기가 없어지면 어쩌지.
무조건 그만 뒀으면 좋겠다. 미래가 없는 곳에서 내 미래까지 잠식당하지 않기를. 정이 들더라도 그 정이 내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아둥바둥하냐는 이야기를들으면,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걱정하고 싶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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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과 젊음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사랑과 욕망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 보여준 <은교>. 그 마지막 페이지, 등롱 같은 누이라는 표현이 내내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차마 범할 수 없는, 불멸의 처녀-등롱 같은 누이... <은교>라는 작품의 중심적인 뼈대를 이루고 있는 '늙음'에 대한 이미지는 꼭 시간을 내서 길게 풀어쓰며 감상을 곱씹고 싶다, 영화화된 <은교>는 보지 않았으나 앞으로도 보지 않을 예정이다. 가장 큰 이유는 내 머릿 속 이적요와 박해일이 그려낸 이적요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청년 같으면서도 근사한 늙은이인 이적요를 박해일이 어설픈 분장 때문인지 연기적인 테크닉의 문제인지 암튼 조금 우스꽝스럽게 풀어낸 것 같아서 선뜻 보기에 겁이 난다. 읽는 내내 작가 박범신의 몰아치는 필력에 혀를 내둘렀는데, 아니나 다를까 작가의 말에 한달 반만에 휘몰아치듯 써내려간 작품이라고 쓰여있었다. 작가의 가뿐 호흡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와서 읽는 내내 '쫄렸다.' 비 많이 오는 여름 날,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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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악, 당신의 소년은
설룽한 마음 어느 구석엔가 숱한 별들 떨어지고 쏟아져내리는 빗소리에 포옥 잠겨 있는 당신의 소년은 아득히 당신을 그리면서 개울창에 버리고 온 것은 갈가리 찢어진 우산 나의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당신께로의 불길이 나를 싸고 타올라도 나의 길은 캄캄한 채로 닫힌 쌍바라지에 이르러 언제나 그림자도 없이 끝나고 얼마나 많은 밤이 당신과 나 사이에 테로스의 바다처럼 엄숙히 놓여져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슬픔에서만 나를 찾았고 나는 나의 슬픔을 통해 당신을 만났을 뿐입니까 어느 다음날 수풀을 헤치고 와야 할 당신의 옷자락이 훠얼 훨 앞을 흐리게 합니다 어디서 당신은 이처럼 소년을 부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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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잃은 연극이 세상 속에서 갖는 의미 -베케트와 이오네스코를 중심으로-
오래 전, 내가 대학생이 된 후 처음으로 본 연극은 『관객모독』이라는 부조리극이었다. 그때 나는 이 연극이 ‘정상적’인 연극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연극을 보기 위해 공연장 안에 처음 발을 디딜 때, 나는 이 연극을 본다는 것 자체에 기대를 품고 있었다. 물론 팜플랫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덜컥 표를 사버린 내 잘못이라면 잘못이지만, 나는 무대에 조명이 켜지기 전까지도 연극적인 연극, 전통적인 연극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배우가 서글프게 울면서 얼마나 진득하고도 감동적인 대사들을 읊을지 긴장도 되었다. 그러나 막이 내리고 내가 느낀 감정은 거의 혼돈에 가까웠다. 마음의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닥쳐온 부조리극의 ‘낯섦’ 이나 ‘비정상성‘은 그간 나의 자의든 타의든 고수해온 연극이라는 것에 대한, 더 나아가 언어라는 체계에 대한 ‘정상성’이 비틀리게 된 계기였다.
언어를 대하는 인간의 처음 태도는 기호와 표상된 대상이 동일하다는 신뢰였다. 따라서 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는 대상을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사물은 자신의 이름에 의지하며 이름은 사물에 의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 부패하고 말의 의미가 불문명하면 우리의 행동과 일의 의미도 모두 위태로워지게 된다. 언어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하는 모든 철학적 비판이 모호성을 가지는 것도 철학 그 자체 역시 언어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은 실재를 포착하기에 조악한 도구이면서 실재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이다. 상징이나 기호 역시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으면 설명되지 않는다. 말이라는 지시체 ��이 순전히 상징적이거나 수학적인 사상이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언어의 본질은 다른 것을 통해서 경험의 한 요소를 표상하는 것, 즉 기호 혹은 상징과 의미되거나 상징된 사물 사이의 양극 관계인 것이며, 그런 과계에 대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부조리극(Absurdes Theater)은 혼란스럽고 황당한 말장난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나 역시 처음 부조리극을 접했을 땐,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허공에 흩뿌려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부조리극에서 가장 눈에 띄는 언어에 대한 불신은 말이 사회에서 쓰이는 의미나 개념은 전달할지 모르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완전하게 다 드러낼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연극은 그 특성상, 무대라는 공간적 제한, 대화 및 동작을 통한 관객과의 필연적인 관계 때문에 전통적 형태의 의미 전달 방식을 뛰어넘기 어려운 장르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부조리극이라는 이 새로운 연극은 무엇보다도 먼저 전통적인 의미의 사실주의(Realism)나 자연주의(Naturalism)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나섬으로, 무대 구성이나 사건의 전개, 의미의 전달에 있어 일체의 논리나 설명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반연극적인 무대를 시도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부조리극 혹은 반연극 작품들을 연극 평론가 마틴 에슬린(Martin Esslin)은 ‘부조리 연극’이라고 칭하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부조리극이 현대 연극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 왔음을 역설했다.그는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외젠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보리스 비앙(Boris Vian) 등을 다루고 있는데 그들의 작품이 제시하는 공통점은 현대를 사는 인간의 부조리한 정신을 혼돈의 상태 자체로써, 의식적으로 자각시키는데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베케트와 이오네스코는 부조리 연극에서의 대표적 작가로 꼽히고 높은 평가를 받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작품이 가장 연극적이 아닌 언어의 의미 해체, 혼돈의 세계, 부조리의 세계를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조리 연극은 1952년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가 파리의 비좁은 소극장 바빌론에서 공연됨으로써 연극사에 극적인 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이때부터 반연극 또는 부조리 연극이라는 새로운 연극의 대명사로 불리며 연극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먼저, 이오네스코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오네스코는 루마니아 태생으로 파리의 뒷골목의 몇몇 소극장 무대를 통해 극소수의 애호가들 사이에서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단막극 『의자들(les Chaises)』 이후 『코뿔소(Rhinoceros)』의 공연이 성공을 거두면서 이들 반연극의 기수로 떠올랐다. 그러나 부조리 연극은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어 관객이라고는 일부 지식인과 학생들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마틴 쉴리!
스미스 뿌류돔!
마틴부인, 스미스 프랑스와.
스미스부인, 마틴 꼬뻬.
마틴부인, 스미스 꼬뻬, 쉴리!
스미스부인, 마틴 뿌류돔, 프랑소와.
마틴부인 어리석은 수 칠면조들.
마틴 마리에트 남비 뚜껑.
스미스부인 크로스나물티, 크로스나물티, 크로스나물티.
스미스 법왕이 도망쳤다. 법왕은 마개가 없다.
마틴부인 바지발작 바주카 포(砲)!
마틴 비밀 비극 빗물!
인용된 부분은 이오네스코의 대표작, 『대머리 여가수(Bald Soprano)』의 한 부분으로 전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어의 나열이 길게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관객은 무대 위의 낯선 언어�� 몸짓에서 사건의 전개가 예측되지 않는 극단적인 혼돈과 모호함의 세계에 부딪치게 된다. 여기서 부조리 연극의 난해성과 애매성이 유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오네스코는 그의 작품 속에서 현실을 해체해서 재구축하기로 유명하다. 그 때 모든 사물은 현실적인 무게를 잃고 부유하며, 일상적인 논리를 벗어난 동작과 몸짓이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 놀라운 기복과 전환을 경험하게 한다. 거기에는 현실의 합리성에 대한 조롱, 삶의 부조리에 대한 허무와 냉소가 있는가 하면 삶에 대한 역동적인 애착도 있다. 그런 점이 관객을 매혹시키기도 한다. 그의 『코뿔소』가 성공을 거둔 것도, 당시 유럽을 거세게 휩쓸던 나치즘이라는 집단 폭력에 대한 조롱과 고발이 기발한 환상적 희극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졌기 때문이다.
이어서, 베케트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모든 작품들 속에서 세계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의미도 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에 빠진 인간의 조건을 극히 이상적이고 무의미한 언어로 허무주의에 젖어 묘사하고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파리에서 첫 공연된 후 베케트는 찬사보다 더 많은 혹평을 들었다. 우선 표제부터 고도(Godot)는 영어의 ‘신’이라느니 ‘죽음’의 상징이라느니 해석을 하지만, 몇 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끊임없이 무엇엔가 쫓기고, 의미없는 대화만을 반복하고 있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습은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워 관객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
블라디미르 좀 두고 보자는 거야
에스트라공 아무 약속도 못하겠다는 거군
블라디미르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거지
에스트라공 머리를 식히구
블라디미르 가족들하구 의논도 하구
에스트라공 친구들 하구도
블라디미르 지���인들 하구도
에스트라공 거래상들 하구도
블라디미르 자기 장부하구도
에스트라공 은행통장하구도
블라디미르 그래야 결정을 내리겠다는 거지
에스트라공 그건 당연하지
블라디미르 하긴 안 그렇겠니?
에스트라공 그런 것 같군
블라디미르 내 생각도 그렇다.
이렇게 이해 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이 연극은 역설적으로 연극이 갖는 힘의 풍성함을 만끽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연극은 대사극으로 전락한 현대극이 배우의 신체성을 억압해 온 것에 대해서 대사에 대한 몸짓이나 동작, 배우의 위치 등이 훨씬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또한 대사에 있어서도 언어의 권위를 강렬하게 고발하여 서로 엇갈리는 언어의 우스꽝스러움이 관객을 언어의 구속력에서 자유롭게 풀어준다. 연극에 있어서 의미를 찾아내고 목격하는 것, 사건들에 대한 자신만의 의견과 해석에 도달하는 부담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그런데 의미를 상실한 언어의 연속인 부조리극은 언어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언어를 뛰어넘은 것에 대한 통찰력에 대한 논의를 진행시킬 수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사람의 감각을 둔화시키는 습관이라는 굴레에서 자신을 풀어 놓는 것이다.
이제, 이런 일련의 부조리극들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쳐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20세기초반, 세계는 양차대전을 겪으면서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국가는 점점 커져갔고, 식민지는 늘어갔다. 사람들은 전쟁 이후, 높아진 국가의 위상 앞에서 허무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문학 사조는 사실주의에서 드디어 모더니즘으로 넘어왔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는 새로운 문학의 기법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를 선두로 무섭게 돌풍을 일으켰고, 전쟁 이후의 정신적 분열과 사회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역할을 해냈다.
그의 연장선상에서 부조리극을 바라본다면, 부조리극은 사회의 아픔을 따스하게 안아주기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힘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의미를 잃어가는 사회에서 언어마저 의미를 잃어 휘청거리는 현대인을 희곡 안에, 그리고 무대 위로 올려 객관화 시키는 역할을 했다. 당연히 전통적인 연극, 예를 들면 『햄릿(Hamlet)』이나 『인형의 집(A Doll`s House)』 같은 작품에 익숙해져있던 관객들에게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는 거의 불가능이었다. 그러나 처음엔 혹평을 넘어선 악평을 받던 작품들이 고전의 반열에 올라서고 작품으로써의 의의까지 갖게 되는 것으로써, 또 전 세계적으로 공연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연극에 대해서, 언어에 대해서 그리고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그 고민을 공유하게 되기까지의 변화를 부조리극들이 이끌어왔다고 생각한다.
201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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